![[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 글라스] 36.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 성당 스테인드글라스](//cpbc.co.kr/CMS/newspaper/2016/10/rc/656016_1.0_titleImage_1.jpg)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 글라스] 36.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손승희, ‘천지창조의 말씀’, 2008, 안티크글라스 라미네이팅 기법. 현대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는 두 가지 딜레마가 있는 듯하다. 전통적인 기법에서 벗어나 현대 건축물에 더욱 잘 어울리는 자유롭고 회화적인 작품을 디자인하고자 글라스페인팅 위주의 작품을 계획했다가도 투명도가 높은 아름다운 난반사 효과를 보여 줄 수 있는 마우스 불로운(mouth-blown) 안티크글라스의 색과 빛을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 비용 문제까지 더해지면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환경 문제, 현대 건축물과의 조화, 제작의 난이도와 내구성 문제 등 여러 이유로 전통적인 납선기법을 구사하는 작품들은 줄어드는 추세다. 독일 쾰른대성당의 우측 트렌셉트(Transept, 翼廊)에 새로 현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설치하던 당시 경연을 벌였을 때에도 첫 번째 조건이 납선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작품은 안티크글라스를 실리콘으로 접합한 라미네이팅 기법(코팅 처리를 통해 광택이 나게 하고 수명을 길게 하는 기법)으로 완성됐다.납선 기법 벗어난 새로운 시도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납선기법이 가장 선호되고 있지만, 새로운 기법이 적용된 사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중 부산 가톨릭대 신학대학교 성당의 출입구 전면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는 2008년 완성된 작품으로, 성당 출입문과 그 옆으로 이어지는 창에 히브리어로 된 창세기 말씀을 빛과 색으로 연출해 낸 대형 작품이다. 작품 디자인을 맡은 손승희(소벽 막달레나) 작가는 이탈리아 로마 국립미술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라벤나에서 유리 모자이크를 연구한 뒤 귀국해 국내 여러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 작업을 진행했다.히브리어로 창세기 표현작가의 대표작인 부산가톨릭대 신학대 성당의 ‘천지창조’는 전통적인 스테인드글라스에 사용되는 안티크글라스에 모자이크기법을 도입한 작품이다. 나무 합판 문과 민 유리창으로 이뤄져 있던 대성전 출입구 전면을 색유리의 빛과 색이 연출된 디자인으로 변신시켰다. 작가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4절의 천지창조 말씀을 주제로 텍스트 전체를 히브리어로 새겨넣었다. 창세기 말씀을 히브리어 원어로 작품에 넣기로 한 것은 하느님 말씀을 인간의 글로 옮긴 첫 번째 언어인 히브리어 성경 텍스트가 신학대 성당 입구에 걸맞은 품격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작품은 중앙에 커다란 씨앗을 배치하고 그 씨앗을 향해 빛이 밝게 퍼져나가는 밑바탕에 히브리어 창세기 말씀을 겹쳐 접착해 두 개의 층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작은 유리조각을 일정한 크기로 재단해 접착제로 붙이는 방식은 모자이크 방식과 동일하지만, 불투명한 벽체가 아닌 유리창에 부착해 색유리 본연의 투명성과 색 그림자가 그대로 유지되는 작품이 됐다. 전체적으로 다양한 톤의 노란색과 갈색으로 구성된 화면을 통해 실내로 드리워지는 빛은 태양 자체의 빛이자 황금빛을 상징하는 색으로 천지창조에 등장하는 빛의 창조와 그 고귀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도전으로 태어난 천지창조작품에서 큰 그림을 이루는 색유리 조각 하나 하나는 작은 씨앗을 상징하며 인간 개개인의 모습을 나타낸다. 즉 신자 한 명 한 명이 씨앗이며, 그 작은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기쁨과 사랑의 씨앗이 돼 다시 세상에 널리 퍼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가가 색유리로 이뤄낸 성경 말씀은 세속의 세계와 하느님 현존의 표징인 성전 내부 공간의 경계로, 일종의 나르텍스(narthex, 성당 정문 안의 현관 홀)로 존재하고 있다. 빛이 통과하는 색유리로 된 투명한 말씀의 벽이 만들어내는 경계는 성전과 성전 밖 세상을 구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두 공간이 긴밀하게 연결돼 서로 통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이 공간을 지나는 사람들은 빛으로 형상화된 말씀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손승희 작가는 자르기가 어려운 곡선들로 된 히브리어 텍스트를 색유리로 일일이 재단해 다듬고, 모자이크 방식을 투명창에 도입하기 위한 여러 접착 실험들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이뤄냈다.다소 무모할 수도 있었던 시도를 작품으로 완성해내기까지 여러 사람의 노력과 협력이 필요했을 작품 ‘천지창조’를 마주하며 앞으로 우리 스테인드글라스의 새로운 도전과 발전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몇 해 전 독일의 대표적인 스테인드글라스 스튜디오 대표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몹시 어려운 프로젝트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 프로젝트가 끝났을 때 또 하나의 새로운 노하우가 우리 것이 됐기 때문입니다.” 실험 정신으로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 모든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백영민2016.10.12
![[위령성월 특집] 죽음, 삶의 종착 아닌 새로운 여정 향한 출발](//cpbc.co.kr/CMS/newspaper/2016/11/rc/658668_1.0_titleImage_1.jpg)
[위령성월 특집] 죽음, 삶의 종착 아닌 새로운 여정 향한 출발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룰 때 지상에서 미리 천국을 맛보게 된다. 그림은 조토 디 본도네가 그린 ‘최후의 심판’(1303∼06년, 스크로베니소성당, 이탈리아 파도바). 11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 성월이다. 죽음 이후, 즉 내세에 대한 희망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상상하기 어렵다. 교회는 죽음과 내세에 관한 가르침을 죽음, 심판, 지옥, 천국이라는 사말(四末)의 교리로 집약해놨다.누구나 죽음은 두렵기 마련이다.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가 펴낸 「죽음ㆍ심판ㆍ지옥ㆍ천국-가톨릭 교회의 사말교리」를 토대로 사말교리를 소개한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새로운 여정의 시작임을 일깨우는 사말교리는 내세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죽음죽음은 원죄의 결과다. 죽음은 창조주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으로, 죽음은 죄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왔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영원한 소멸의 공포를 안겨주는 죽음은 마지막으로 사라져야 하는 대상이다. 죽음은 지상 생활의 마침이며, 지상 순례의 끝이다. 죽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자신의 궁극적 운명을 결정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의 끝이다. 교회는 환생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됐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함으로써 죽음을 변화시켰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관문이 됐다. ▨심판죽음 후에는 심판이 따른다. 심판은 죽음 직후 이뤄지는 개별심판(사심판)과 세상 마지막에 있을 최후심판(공심판)으로 나뉜다. 개별심판은 지상 생활의 행실과 믿음을 결산하는 것이다. 그 결과 연옥이나 천국, 또는 지옥에 든다. 최후심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있게 될 총체적 심판이다. 심판의 가장 큰 기준은 ‘얼마나 사랑하고 살았느냐’이다. 심판을 통해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가 함께 실현된다. 지상에서 이뤄지지 못한 정의가 올바로 서고,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용서와 구원의 체험을 한다. 심판은 인간 전 존재가 심판받는 것이다. 세상 종말에 이뤄지는 육신의 부활은 육체의 생물학적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불사불멸성이 우리의 전인적 인격에 주어진다는 뜻이다. ▨연옥연옥은 죽음 후의 정화를 의미한다. 교회는 성경과 교회 전통이 증언하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관습에 따라 죽음 후의 정화, 곧 연옥의 존재를 인정한다.죽음 후의 정화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뤄진다. 연옥은 불완전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완전한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난 후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위해 겪는 정화 과정이다.우리는 죽은 이들, 즉 연옥에 있는 영혼의 정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이 사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이 죽음의 경계 너머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확신한다. ▨지옥지옥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단절이다. 지옥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단절된 이들의 운명이다. 지옥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최종적 거부다. 지옥은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과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지옥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미 체험하는 것이다. 지옥은 하느님의 사랑과 모순되지 않는다. 지옥과 하느님의 사랑이 모순되지 않는 것은 인간 스스로 지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거듭 당신과의 친교로 초대하는데, 인간이 끝까지 이 초대를 거부한 것이다. 지옥 교리가 의도하는 것은 회개로의 초대다. 교회는 지옥 형벌을 받는 사람을 한 번도 선포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영원한 단죄의 가능성은 분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천국 천국은 하느님과의 궁극적 만남이다. 천국은 하느님께서 베푸는 다른 어떤 선물보다도 값진 하느님 자신이고, 그분과 나누는 친교, 그분과 함께하는 삶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완전한 행복을 누린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가장 행복한 결정적 상태다. 지상에서 누리던 하느님과의 친교가 죽음을 넘어 완성되면 그 어떤 행복보다도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에 초대하신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초대하신다.천국은 지옥과 마찬가지로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다. 천국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됐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는 성경과 성사,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친교를 이룰 때 천국의 행복을 미리 맛볼 수 있다. 천국은 우리의 절대적 희망이다.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을 간절히 희망하면서 그 나라를 향해 나가는 나그네들이다. 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백영민2016.11.02

‘사랑의 정신’ 드러내며 공동체 일치 위해 노력하겠다 김선태 주교, 신자들의 기도 부탁 “저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고 하느님 앞에서 부당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신데 인간적인 일로 피해를 주면 되겠는가 하는 생각에 (주님께) 순종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제8대 전주교구장으로 임명된 김선태 주교는 임명 다음날인 15일 서울 궁정동 주한 교황대사관에서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자리의 중대성 때문에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며 이같이 소감을 밝혔다. 김 주교는 “여전히 부족하기에 신자들의 기도가 없으면 안 된다”며 “신자들의 기도에 의지해 주님의 도우심으로 직무를 수행하겠다. 주님이 뽑아주셨으니 필요한 은총도 주실 것이라 믿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1937년 4월 13일 설정(전주지목구)된 전주교구는 다음 달 80주년을 앞두고 있다. 전북 지역 전체를 관할하며 인구 186만여 명 가운데 신자 수 19만 5094명으로 복음화율 10.4%(2015년 말 기준)를 보이고 있다. 27년 만의 새 교구장 임명으로 전주교구는 기쁨으로 가득하다. 전임 이병호 주교도 깊은 학식을 갖춘 김 주교가 그동안 성실한 자세로 사목했고, 양 냄새 나는 목자의 본보기를 보여줬다며 기쁜 마음으로 축하했다. 스위스 프리부르대학교에서 유학한 김 주교는 보수적인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스위스, 1905~1988) 추기경과 진보적인 신학자인 요한 밥티스트 메츠(독일, 1928~)를 비교 분석한 논문으로 기초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세상 향해 하나된 사랑의 공동체김 주교는 교구 과제와 비전에 대해 “교회의 비전은 이미 복음에 나와 있듯이 ‘사랑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이 제시하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 본당 공동체에서 드러내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선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나의 공동체이자 사랑의 공동체임을 드러내야 한다고 했다. 사제단의 일치와 화합, 교구민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도 했다.“교회의 가르침대로 세상과 교회의 관계에 충실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는 세상에 속해 있지도 그렇다고 세상과 멀리 떨어져 지내서도 안 됩니다. 교회가 세상에 깊게 속하면 세속화가 되고, 너무 멀리 떨어지면 세상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지요. 교회는 자기의 정체성을 잘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교회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위해 존재할 때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사제김 주교는 한 해 계획을 세우고 이를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실천하는 사제, 평일 미사 강론도 철저히 준비하는 사제다. 이에 대해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어린 시절부터 해온 대로 하는 것”이라며 “사제 대부분이 그렇게 실천하고 있고 특별한 것이 아니다”며 겸손해 했다. 김 주교는 “은퇴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요즘도 3~4명만 참여하는 평일 미사에도 강론을 미리 써오신다”며 “사제는 강론을 준비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가까이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어린 시절 기억은 성당뿐구교우 집안 출신인 김 주교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몹시 가난했던 시골 동네에서 자라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웃음 지었다. 이어 “집안이 성직자 집안(큰아버지가 사제)이어서 어린 시절 기억이 성당뿐”이라며 “성당에서 놀았고 사제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 소신학교에 진학했다”고 회고했다. “시골엔 아이들이 없어서 새벽 미사 복사는 제가 도맡았습니다. 집 바로 밑에 성당이 있었는데 그땐 새벽 미사가 5시 반이어서 4시 50분이면 어머니가 깨우셨지요. 일어나기 싫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부모님에 대해 “늘 성모상 옆에 촛불을 켜 놓고 기도하는 분이셨다”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 함께 기도했고, 저녁에 잠들기 전 다 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 기도하지 않으면 밥을 먹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선행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인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를 꼽은 김 주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 여겨진다”며 주교 표어 역시 같은 구절로 할 계획이라고 했다.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백영민2017.03.22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22) 윤세영(안드레아) 영화감독](//cpbc.co.kr/CMS/newspaper/2017/09/rc/696209_1.6_titleImage_1.jpg)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22) 윤세영(안드레아) 영화감독사제 꿈꿨던 영화감독, 소록도 천사의 삶 스크린에 담아“2005년 11월 23일,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내용은 같았다. 이게 두 천사의 마지막 편지였다”로 시작하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20대에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소록도에 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고 43년 후 70세가 넘어서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이다. 영화는 담담하게 흔적과 기억 그리고 증언을 담았다. 다른 영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깊은 감동과 울림을 세상에 던진 영화 감독이 궁금해졌다. 영화를 연출한 윤세영(안드레아) 감독을 만났다. 이제 막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젊은 신예 감독이지만 우리 삶의 크고 작은 고민을 피하지 않고 ‘사랑을 통한 희망’을 역설했다. 배우로 활동하는 아내(박희본 마리스텔라)와 미사 후에 조용히 주님께 고백하고 기도할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작은 떨림’이 쌓인다고 한다. 약함을 드러내는 것을 주님께 자랑하며 ‘사람이 희망이고 사랑이 사람 그 자체’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하면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기쁨을 받을 수 있을까? ‘사랑의 의인화’를 함께 고민해 본다.▶ 지난 4월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연출하셨죠.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인을 위해 봉사한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간호사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개봉해서 한 달 정도 상영했고 지금은 다양성 영화를 지원하는 작은 극장과 IPTV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달(9월)에 서울시의 다양성 영화 지원으로 공공 상영 중인데 40명 이상 단체가 신청하면 CGV나 메가박스 등 복합 상영관에서 상영할 수 있습니다. ▶ 다큐멘터리 영화 연출은 처음이신가요. 그동안 계속 극영화 위주로 작업했습니다. 이번이 첫 장편 영화이자 다큐멘터리 영화로 1년 3개월 정도 작업을 했고요. 마지막 편집할 때 이제 시작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들과 친해지고 스태프들과 무엇을 강조해야할지 느낌이 막 생기는 순간 끝났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핵심은 대상과의 소통과 교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고요. 두 분의 인생을 한두 시간에 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 이 영화로 올해 가톨릭 매스컴상 특별상을 받으셨어요. 독특한 스타일보다는 촬영 과정에서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 두 분에 대한 도덕성을 보여 주는데 더 신중을 기했습니다. 두 분의 만족도와 이해를 존중해 최소한의 분량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생생함보다는 심상을 통한 은유적 방법, 이미지와 음악으로 두 분의 진솔함을 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매스컴상 심사위원께서 ‘두 할머니와 관객들이 영적 대화와 친교를 이루게 했다’고 심사평을 해주셨는데요, 과분한 상이고 너무 영광이었습니다. ▶ 수교 125주년을 맞아 오스트리아 현지에서 특별 상영됐죠. 지난 6월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기념으로 상영됐는데 많은 분이 두 분의 삶에 놀라워했습니다. 뒤풀이 자리에서 소록도에 계신 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연로하신 두 분의 뜻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되새기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실은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할머니와 인터뷰 출연자들이 함께한 두 번째 시사회가 더 두려웠는데요. 두 분께서도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돼서 아주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가렛 할머니는 영화에 나오는 조카며느리와 맨 앞줄에서 관람하셨는데, 웃기도 하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셨습니다. 치매 초기여서 다 이해를 하실까 하는 우려도 있었고요. ▶ ‘그리움은 쌓여 있는데 다시 소록도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마가렛 할머니는 워낙 매스컴을 멀리하신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씀하셨는데요. ‘소록도 시절이 너무 행복했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너무 보고 싶지만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고 나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과 이 공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계신 곳, 주님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만 내가 가장 빛을 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두 할머니의 간호학교 60년 후배들에게 ‘이런 사람이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했는데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못 할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과연 용기 있게 살았나?’하며 스스로 반문도 많이 했습니다. ▶ 처음 연출 제의를 받고 영화 제작하면서 어떤 감동을 받으셨나요 두 분을 알았다면 연출을 못했을 겁니다. 과연 어떤 분들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습니다. 영화 제작하면서 받은 감동은 죽을 때까지 유효할 것 같습니다. 작품이 끝나면 정리가 되는 극영화와는 달리 착해져야 할 것 같고 100% 실천은 어렵더라도 노력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마치 선물 같은 감동을 받았죠. 영화발표 당시가 사순 시기였는데 오스트리아 현지 양로원의 조그만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마가렛 할머니를 보면서 하느님은 한 분이고 그 자체이신데 이분들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하느님과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영화에 담지 못해 아쉬운 부분이 있으세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종교적으로 다르게 표현되는 방법들을 이해했던 두 분의 모습을 다 담지 못해 아쉽습니다. 두 분은 ‘내 것만이 옳고 이것만이 최고’라는 생각이 없으셨어요. 소록도에서 두 분은 종교가 다른 한센인들이 하나가 되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처음 제작할 때는 ‘희망을 주는 영화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두 분은 인터뷰가 끝날 때마다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드레아! 오늘 하루도 기쁘게 살아’라고요. 이분들에겐 기쁘게 살았던 하루하루가 모여 43년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요. 성인들만이 할 수 있는 대단한 일도 기쁘게 하루를 살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죠.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기쁨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으면 합니다. ▶ 언제부터 영화 감독을 꿈꾸셨어요. 원래 글을 쓰고 싶었던 문예창작과 지망생이었는데, 우연히 한 영화를 본 후 글의 행간을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어 영화학과에 가게 됐습니다. 20대 초반에 영화를 시작했고요. 저에게 종교는 ‘추억’인데요. 어떤 영성과 교리보다 어린 시절 성당의 추억이 저를 지탱해 주는 끈입니다. 어머니가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셔서 저는 성당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꿈은 ‘사제’가 되는 것이었어요. 한동안 냉담했는데 아내를 만나면서 다시 신앙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냉담 중이신 분들은 가까운 성당을 찾아 짧은 시간이라도 묵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주일미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큰 걸음은 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요리사’도 하시고 ‘요리예술사(푸드스타일리스트)’라고 알고 있는데요. 영화 감독이 불안정한 직업이어서 생계형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서 요리학교에 다니고 요리사로도 잠깐 활동했고요. 영화 회사로 돌아와서 독신 생활을 주제로 한 웹 드라마에서 ‘요리예술사’로 몇 작품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요리와 주방일이 영화 작업과 비슷합니다. 다만, 영화는 시간이 최소 1년 반 정도 걸리지만, 요리는 압축해서 단 하루 만에 끝납니다. 관객은 식사하는 손님이죠. 요리는 그날 피드백이 오지만 영화는 관객을 만나기까지 쉽지 않습니다. 가장 긴 요리와 음식이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 걸그룹 출신 아내(박희본)와 명동성당에서 결혼하셨죠? 영화 ‘트레일러’ 조감독을 할 때 현장에서 아내의 휴대전화 와이파이가 안 터져 제가 도움을 줬거든요. 그때 아내가 제 휴대전화에서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을 보고 같은 신자라 것이 매우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아내 세례명은 ‘마리 스텔라’예요. 이야기하다 보니 서로 좋아하는 것도 같고 공통점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둘이서 처음 만난 곳도 명동성당입니다. ▶ 영화 감독과 배우 부부이신데, 신앙생활이 부부에게 어떤 도움이 되시는지요. 항상 신혼일 수 없는 게 부부생활이잖아요. 미사가 끝난 뒤 5분 정도 기도하는 아내 곁에 있으면 무언가 저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또 주님께 저의 고백과 고민을 풀어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저에게 어떤 큰 의미나 단어들로 표현되는 게 아니라 굉장히 ‘작은 떨림’이 쌓여서 저의 인격체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일 때문에 지방에 같이 가더라도 저희는 꼭 가까운 성당을 찾아갑니다. ▶ 평소 마음에 담고 있는 성경 구절이 무엇인가요.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1,30)입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분의 삶과 비슷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의 약함을 보여 주셨잖아요. 한센인과 주위의 모든 분을 융합한 것은 강함과 억지스러움이 아니라 피하고 싶지만 순수하게 드러내신 마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에게는 가장 필요한 이야기이고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 구절입니다. ▶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세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하고 싶은 것들을 용기 있게 진행해야겠지요. 영화는 모두 사람 사는 이야기잖아요. 그 이야기를 깊이 있게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만의 스타일로 표현한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장르나 시기를 정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고요. 인생에 대한 이야기와 고민을 담는 작업은 축복받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 안에 담겨 있는 콘텐츠(내용)인 것 같습니다 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cpbc2017.09.20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26) 세례자 요한(루카 7,18-35)](//cpbc.co.kr/CMS/newspaper/2017/08/rc/691237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26) 세례자 요한(루카 7,18-35)“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3) 요한 세례자는 광야에서 살면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하고 묻고는 요한을 당신의 길을 준비한 선구자라고 말씀하신다. 사진은 들꽃이 화려하게 핀 봄철의 유다 광야.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루카복음은 나인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7,17)고 전하고는 바로 이어 요한 세례자와 관련한 두 이야기를 소개합니다.(7,18-35) 하나는 요한 세례자가 제자들을 통해 제기한 질문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요한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간접적으로 당신 자신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다(7,18-23)요한 세례자가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7,19-20)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질문의 배경과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루카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제자들을 보낼 때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루카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기 전에 헤로데 영주, 곧 갈릴래아와 요르단강 동쪽 페래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고 전하지요.(3,19-20) 요한 세례자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제자들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들었을 것입니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7,17)는 루카의 보도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감옥에 갇히기 전에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설교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혹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면서, 메시아로 오실 그분은 자신보다 큰 능력을 지니실 뿐 아니라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고 손에 키를 들고는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워 알곡은 곳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루카 3,15-18) 이로 미뤄 보면,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를 심판자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요한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3,7) 하고 질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요.마침내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요한은 예수님을 자신이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바로 그 메시아라고 여겼습니다. 루카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요한을 찾아오셨을 때, 요한이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고 사양한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마태 3,13-15) 이랬던 요한 세례자가 제자 두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이 물음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대한 요한 세례자의 의구심을 드러내는 질문인 셈입니다. 요한이 볼 때 메시아는 심판자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관련해서 들리는 소문은 심판자 메시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에 제자들을 보내 정말로 메시아인지를 질문한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 역할을 하지 않고 있어서 좀 똑바로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제자들을 통해 질문 형식으로 제기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메시아는 심판자인데, 당신은 메시아이면서도 왜 심판자로 활동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좀 해주십시오’라는 항변이 질문에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지나친 비약일까요? 루카는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바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과 눈먼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고 계셨다는 상황을 먼저 전합니다.(7,21) 그런 다음에 예수님의 답변을 이렇게 소개하지요.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7,22)예수님의 이 말씀은 요한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행하신 일들을 포함해 당신이 지금까지 해오신 활동을 모두 종합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말씀은 부분적으로는 구약의 이사야 예언서 61장 1절에 나오는 예언으로,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활동 초기에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선포하신 바로 그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두 가지를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당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아이다. 둘째는 메시아로서 당신의 사명은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구원하는 일이다.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이 사명을 수행하시는 것을 직접 본 목격 증인인 셈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따라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요한에게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정식으로 통보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7,23)요한에 관한 말씀(7,24-35)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요한 세례자와 관련하여 군중에게 하신 이 말씀은 내용상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요한 세례자의 신원에 대한 내용입니다.(7,24-28) 예수님께서는 요한 세례자가 ‘예언자’일 뿐 아니라 예언자보다 더 큰 인물, 곧 메시아의 길을 닦은 사자, 선구자라고 확인해 주십니다.(7,26-27) 나아가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까지 단언하십니다.(7,28)둘째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짧은 말씀입니다.(7,28) 요한이 이렇듯이 큰 인물이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7,28)는 말씀으로, 무슨 뜻인지 선뜻 와 닿지 않습니다. 「주석 성경」은 이를 ‘하느님 나라의 근본적 새로움’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위대한 인물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근본적인 새로움은 요한의 위대함이 견줄 바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셋째는 이렇게 근본적으로 새로운 하느님 나라가 예수님과 함께 시작됐는데도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7,29-34)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인 백성(세리 포함)과 반대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물리친 이들입니다. 이들은 기뻐 피리를 불 때 춤을 추지 않고 슬퍼서 곡을 할 때 울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은 요한을 두고서는 마귀가 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또 비난합니다. 한마디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고,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7,2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만 그 주님이 혹시 내가 만들어 놓은 틀은 아닌지요? 그래서 주님께 청하면서 내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의심하지는 않는지요? - 나의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엉뚱하게 심지어 정반대로 해석하고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흥겹게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슬프게 곡을 해도 울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는 어떠한지요? 백영민2017.08.08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7)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cpbc.co.kr/CMS/newspaper/2016/07/rc/644517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7)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모든 것 버리고 따라 나선 첫 제자들 예수님(왼쪽에서 두번째)이 부르시자 형 야고보(가운데)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무릎을 꿇고 있으며, 한 손에 가슴을 올린 채 동생 요한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마르코 바사이티 작, ‘제베대오의 아들들을 부르심’, 1510년, 아카데미아 갤러리, 이탈리아 베네치아.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만나게 되는 것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첫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어부였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던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표현의 원래 의미는 “나의 뒤로 (오너라)”입니다. 물론 ‘따라오라’는 의미도 담고 있는 것이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처럼 들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뒤에 있는 이들입니다. 철저하게 스승을 따르는, 그분을 본받는 이들이고 이것이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또한 마태오와 마르코는 이러한 부름에 제자들이 ‘곧바로’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전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름과 그것에 지체 없이 응답한 제자들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루카 복음서가 전하는 첫 제자들의 이야기는 조금 더 구체적입니다(루카 5,1-11). 루카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의 배경은 겐네사렛 호숫가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갈릴래아 호수는 여러 이름으로 불립니다. 갈릴래아 호수, 겐네사렛 호수, 티베리아스 호수(요한 6,1)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갈릴래아’라는 지명은 비교적 자주 찾을 수 있지만 ‘갈릴래아 호수’라는 표현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단지 ‘킨네렛 호수’(민수 34,11) 또는 ‘킨네렛 바다’(여호 12,3)라는 표현만 사용합니다. 구약 성경 시대에는 호수의 모양을 따라 킨네렛(수금 하프와 비슷한 이스라엘의 악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기 위해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고 그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밤새도록 고기잡이에 실패한 베드로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말씀에 따라 그물을 치고 상상하지 못할 만큼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이것에 놀란 베드로는 떠나 달라고 청하지만 이때에 예수님은 그를 부르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이지만 공관 복음서에서 공통되는 것은 첫 제자들이 모두 어부였고 예수님은 그들을 제자로 삼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첫 제자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요한 복음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호수도 어부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와 이름을 모르는 한 제자가 세례자 요한의 소개를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 함께 머뭅니다. 그들을 초대하는 요한 복음의 표현은 “와서 보아라”입니다(요한 1,39).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안드레아는 자신의 형인 베드로를 찾아가 말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에서 베드로를 예수님께 소개하는 인물은 안드레아입니다. 요한 복음은 첫 제자를 부르는 이야기에서도 특징을 보여줍니다. 요한 복음은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증언’이라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안드레아는 베드로에게, 그리고 그 뒤에 등장하는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증언합니다(요한 1,43-51).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증언하는 것 역시 첫 제자들이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들이지만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 이야기는 공생활의 처음을 장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지상 사명을 이루어 갑니다. 이미 이때부터 교회는 잠재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시작한 것처럼 지금도 교회와 함께 구원을 이뤄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사명 역시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6.07.12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4) 창조와 기도신비로운 만남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 미움과 증오는 파괴하지만 사랑은 창조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체험을 통해서 이를 확인합니다. 명장(名匠)은 자신이 혼신을 다해 만든 작품 하나하나에 가득한 애정을 담습니다. 하물며 사랑 자체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바라보시는 심경은 어떠하겠습니까? 구약성경 창세기 1장에서 ‘보시니 좋았다’는 표현은 괜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더욱이 당신 모습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참으로 좋았다’고 하시는 하느님이시니 인간에 대한 그 사랑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창조주 하느님이 인간을 보시는 그 마음은 마치 어머니가 품에 안은 갓난아기를 바라보는 마음에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부족한 비유이지만 말입니다. 그 갓난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요놈이 젖 먹을 때가 됐는데’ 하면, 아기는 배가 고프다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기를 보는 어머니의 마음도 이러한데, 할 수 없는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의 작품인 인간을 향한 마음은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당신을 찾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찾게 돼 있는 존재입니다. 비록 “죄 때문에, 하느님과 비슷함을 잃어버린 뒤에도,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 분께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566항). 이렇듯이 인간은 하느님을 찾게 돼 있습니다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곧 인간을 “무(無)에서 유(有)로 불러내실” 때부터 먼저 인간을 부르십니다. 이렇게 창조와 함께 시작된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갈망과 또한 창조로 인간을 불러내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의 만남이 기도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를 잊거나 또는 창조주의 면전에서 멀리 숨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좇거나 또는 자기를 버렸다고 하느님을 비난하더라도, 살아 계신 참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기도의 신비로운 만남으로 끊임없이 부르십니다”(2567항).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에서는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이 사랑의 행위가 언제나 앞서는 것이고,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이 사랑에 대한 응답”(2567항)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인 기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창조와 함께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 자체가 무에서 유로 불러내시는 하느님의 행위이고 인간의 존재 자체가 그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손오공이 아무리 애써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인간의 존재가 그러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려고 부질없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려는 열려 있는 자세입니다. 성경, 특별히 구약성경은 이렇게 인간을 부르시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과 부르심에 응답하거나 때로는 응답을 회피하는 인간의 관계를 한 민족의 역사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점차 당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에게 차츰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심에 따라,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에게 하는 호소, 상호간에 맺어지는 계약이 되는 것이다. 말과 행위를 통하여 이 계약의 드라마는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이 드라마는 구원의 역사 전반에 걸쳐 펼쳐진다”(2567항).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평화신문2016.06.2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8) 사두가이와 바리사이](//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3483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8) 사두가이와 바리사이권력에 타협한 사두가이·율법에 얽매인 바리사이 로마니노(1484?~1559?) 작,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가신 예수님’. 복음서에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가 계속해서 등장하지요. 이들은 유다교 내의 주요한 종교 집단들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주 그들의 주장과 대비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고자 하는 뜻에서 이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주로 사제들로 구성되어 있던 사두가이파는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몰락했고, 이후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두가이라는 명칭은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 차독의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사두가이들이 실제 차독의 후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모든 사제가 사두가이였던 것도 아니고, 지방의 사제들은 오히려 바리사이에 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주로 예루살렘의 귀족 계층에 속한 사제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는 산헤드린의 의장이었고, 일부 사제들은 귀족으로서 계속 정치에 개입하고 지배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정치적인 면에서 그들은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종교적인 면에서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전통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나, 외세와 타협했던 그들의 정치적 입장은 열심한 유다인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개방적이었습니다. 외세의 임금들이 뇌물을 받고 야손과 메넬라오스 등을 대사제로 임명했을 때 사두가이는 이를 눈감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뇌물을 주고 대사제로 임명된 이들이나 하스몬 집안 출신의 대사제들은 백성들에게는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는 처음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그 후에는 하스몬 왕조와, 마지막에는 로마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재판 과정에서도 산헤드린은 로마 총독 빌라도와 같은 편에 서지요. 사두가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누구하고든 타협했습니다.교리적인 면에서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중시했던 구전 전승을 거부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존중했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확인되지 않거나 불분명한 교리들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유다교에서 발전했던 천사와 악마에 관한 여러 내용들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사두가이가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정치적인 면에서는 현실적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의 신학이 그만큼 더 현세를 중시하게 했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중시했던 것은 오직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하여 기득권을 보전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어쨌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그들은 기반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들이 바리사이들에 비해 드물게 언급되는 것은, 신약 성경이 형성되던 시기에 이미 그들이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1세기 이후에 다시 재건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에서는 사제 계층이 다시 일어날 수 없었지만, 지금도 회당 예배의 몇 가지 역할들은 그들의 후손에게 유보되어 있다고 합니다.한편 바리사이라는 명칭은 ‘분리하다, 가르다’라는 히브리어와 아람어 동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이름은 아마도, 하스몬 왕조가 점점 더 세속화되어 감에 따라 바리사이들이 그들을 멀리하고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왔음을 의미할 것입니다.사두가이들과 달리 이들은 성문 율법 외에 구두로 전해진 율법도 존중하였고,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혼의 불멸, 천사와 마귀의 존재 등을 믿었으며,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두가이들에 비해 현세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으며, 세속화되지 않고 경건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이들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구전 전승을 포함한 율법에 대한 열성이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많은 유다인들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버리고 그리스 문화와 종교를 따라가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리사이들을 처음부터 위선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그들은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 생활로도 율법을 준수하고자 노력하였고 그것이 하느님께 충실한 삶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던 기간에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종교 집단이 바로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습니다.“복음서는 자주 바리사이들을 위선적이고 냉혹한 율법주의자들로 제시한다. … 그러나, 복음서들에 나타난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 간의 계속된 후대의 논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교황청 성서위원회,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리사이의 가르침을 대비시킵니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열성이 오도되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배척할 때, 그리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적인 관습에 매이게 될 때 오히려 율법의 근본 정신을 거슬러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 요인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대립이 자주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다음 흩어진 이스라엘이 이천 년 동안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율법과 일상의 여러 규범 때문이었고, 그 기틀을 마련한 것은 바리사이였습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6.05.03
[이땅에 평화-커버스토리] 쉼- 성경에서 말하는 ‘일과 휴식’휴식은 ‘안식’으로 표현, 하느님도 7일째 되는 날 휴식, 진정한 휴식은 하느님 품에서 성경의 관점으로 보면 노동은 인간의 권리이자 축복이다. 하느님은 당신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신 후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하고 이르셨다. 이는 노동이 하느님의 협력자로서 인간에게 축복의 조건으로 제시됨을 보여준다. 따라서 노동은 하느님 사업을 현세에서 계속 이뤄나가는 창조 활동의 연속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라며 아버지 하느님부터가 일하시는 존재라고 말했다. 노동을 천대시하는 그리스 사상이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당시 하느님을 ‘일하는 농부’로 묘사한 것은 획기적이다 못해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성경에서 휴식을 가리키는 말로 안식(shabar)이란 용어가 쓰인다. 이 용어는 ‘그치다’, ‘쉬다’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안식일은 한 주일 동안의 일을 중지하는 것을 의미한다.하느님은 6일 동안 일하시고 7일째 되는 날에 쉬셨다. 창조 사업 후 모든 것이 “좋았다”고 하시고 제7일을 거룩하게 하신 구절에서 안식일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창조 사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또 이집트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르셨다(신명 5,15). 당신께서는 세상을 창조했을 뿐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존재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도 휴식이 필요할 때는 망설이지 않고 잘 쉬셨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하셨지만, 제자들과 배를 타고 호수에 나갔을 때는 풍랑이 닥쳤는데도 한잠 푹 주무시고 일어나셨다. 나아가 진정한 휴식처는 당신의 품이라는 것도 일러주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김원철 기자 평화신문2015.07.21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8.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요한 19,7)](//cpbc.co.kr/CMS/newspaper/2017/03/rc/673470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8.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요한 19,7)“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심판대 선 예수님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 작 ‘사형선고를 받는 예수 그리스도’. 출처=「아름다운 성경」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내용의 흐름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후에, 원로와 군사들은 그를 대사제의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복음서는 그 해의 대사제가 카야파였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대사제의 집에서 신문을 받습니다. 대사제만이 아니라 아마도 산헤드린이라 불리는 최고의회의 구성원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에 우리가 아는 것처럼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하는 사건도 일어납니다. 대사제와 최고 의회의 의원들은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그를 죽일 수 있는 구실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서의 기록들은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기 전에 이미 유다교의 종교 지도자들과 상당히 큰 갈등을 겪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갈등의 점진적인 증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미 복음서의 시작에,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인 카나의 혼인 잔치 이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전합니다. 공관 복음은 자신의 신학적인 관점 때문에 예루살렘 입성 이후에 이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은 이 ‘성전 정화 사건’이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갈등이 시작되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사건으로 유다교의 지도자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특별히 안식일과 관련된 여러 사건을 통해 갈등은 조금씩 커져갔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갈등이 극에 달하는 것은 ‘라자로를 소생시킨 사건’입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때에 이미 유다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 먹습니다.(요한 12,10) 이제 유다교의 지도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근거였습니다. 공관 복음은 이들이 여러 근거를 찾았지만 충분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사형을 위해 당시에 로마를 대신해 유다 지방을 관할하던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데려갑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행정관이었고 총독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26년에서 36년까지 로마의 행정관으로 재임했습니다.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이 데려온 예수님을 신문하지만 마땅한 죄목을 찾지 못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고발한 죄목은 신을, 곧 하느님을 모독한 죄였습니다. 하지만 빌라도에게 인도된 예수님께 적용된 죄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황제에게 대적하는 정치적인 죄로 바뀝니다. 그렇기에 빌라도는 그에게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하고 묻습니다. 아마도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의미를 둘로 해석한 것 같습니다. 첫째는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인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라고 해석되는 이 표현은 유다인들이 기다려온 하느님의 구원자를 의미하는 용어였습니다. 둘째는 이 용어의 시작이 기름부음을 받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을 선별할 때에 사용하던 행위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은 하느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았고 이것이 왕을 선별하는 행위였다는 점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메시아로 칭했다는 것이 유다인들이 고발한 죄목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요한 19,7) 하지만 사형선고를 받기 위해 빌라도에게 제안한 죄목은 황제의 권한에 반대해 자신을 임금이라 칭한 죄였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요한 19,12)빌라도는 직접 예수님에게서 이러한 죄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유다교 종교 지도자들과 일부 유다인들의 뜻을 따라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공식적인 죄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입니다. 이 죄목 안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가 메시아, 곧 구원자였다는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7.03.02

미술로 예수 그리스도 마음 느끼는 교리서 하느님과 함께 CUM CUM 대구대교구 선한목자연구소/신자용 1만 2000원여섯 사제, 삶의 답을 찾다복음의 가치를 어떻게 발견하며, 복음에 담긴 내용을 어떻게 살며, 복음에 따라 이 세상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올해 사제품을 받은 대구대교구 새 사제들이 신자 재교육을 위한 교리서를 펴냈다. 대구대교구 선한목자연구소가 간행한 「하느님과 함께 CUM CUM」이다.우형원(대구대교구 신암본동 보좌) 신부를 비롯한 6명의 사제는 새 교리서 준비를 위해 오늘날 신앙인들의 삶의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또 신자들과 현대인의 삶을 살피면서 성경을 다시 읽고, 복음 말씀을 새롭게 새겼다. 사제들은 새 영세자, 중장년층, 청년을 위한 신앙 증진 프로그램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과 냉담 교우를 위한 교리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인간 개별의 삶을 성경 말씀과 연결해 정형화된 예시가 아닌 하나뿐인 나의 이야기로 출발하는 교리서를 만들었다. 하느님과 함께 CUM CUM은 미술을 활용, 내면으 표현하고 신앙 열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꾸며진 신자 재교육 교리서다. 미술로 내면의 나를 발견하다책은 개별적 삶, 즉 신자 개개인의 이야기가 쉽게 표현되도록 미술치료 기법을 활용했다. 그림으로 내면의 구체적인 나를 표현하도록 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미술 활동을 교리서에 넣었다. 교리서의 특징은 주입식이 아니라 피교육자가 직접 참여하는 자발성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리서는 신자 재교육용으로 만들어진 만큼 6~8명이 짝을 이뤄 중심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도록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총 14과로 구성된 교리서는 공동체의 친밀감 형성, 자신과 이웃, 하느님과의 관계를 나눌 수 있도록 짜여 있다. 아울러 과별 구성은 시작기도, 인사 나누기, 미술 활동, 말씀과의 만남, 훈화, 나아가기, 마침 기도 순으로 연결돼 있다.스스로 찾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교리서의 가장 특징적인 미술 활동도 △내 마음 그리기 △하나 되어 종이 돌려 그리기 △만약에 내가 강도를 만난 사람이라면, 또 내가 사마리아 사람이라면 그리기 등을 분명한 주제어를 제시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도록 이끌고 있다. 우 신부는 “지식 위주의 교리는 삶과 신앙의 연결을 어렵게 만들어 왔다”면서 “이 교리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도록 이끌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선한목자연구소 한영수(한국프라도사제회 책임자) 신부는 “교리서는 미술 활동을 매개로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을 오늘날 신앙인의 삶과 연결해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새로운 신학적 시도”라고 평가했다. 한 신부는 이어 “이미 신앙인으로서 삶을 살아온 이들이 더 깊은 신앙의 체험을 형성하도록 도움을 주기에 적합한 책”이라며 “교회 구성원들의 재교육뿐 아니라 다시 새롭게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려는 이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좋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하느님과 함께 CUM CUM」은 신자용(1만 2000원)과 교사용(1만 5000원) 2권으로 나와 있다. 책 수익금 전액은 대구관구 대신학원 연구 기금으로 사용된다. 구입 문의 : 053-660-5100, 선한목자연구소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백영민2016.08.17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글라스] <16>](//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4754_1.0_titleImage_1.jpg)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글라스] 파리 생트 샤펠 스테인드글라스 생트 샤펠 경당 내부 모습. 흔히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천상의 빛을 연출하는 아름다운 빛과 색채의 벽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이 표현을 가시적으로 가장 잘 드러낸 곳이 바로 파리 생트 샤펠(Sainte Chapelle, 1245~1248)이 아닐까 한다.파리 법원 옆에 위치한 이 작은 경당에는 벽면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15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들이 분절 없이 천장까지 길게 이어지며 마치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다. 높이 치솟은 거대한 고딕 대성당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 등을 모시기 위한 왕실의 경당으로 건축되어, 규모는 작지만 그 호화로움은 극에 달한다. 루이 9세 때 건축된 생트 샤펠은 당시 성물 공경에 대한 열의를 대변해 주고 있다.생트 샤펠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유독 빛으로 충만해 보이는 것은 아케이드, 트리포리움(triforium, 아치와 지붕 사이), 클리어스토리(채광창)로 나뉘는 일반적인 고딕 성당 건축의 입면 구조와는 달리 하나의 긴 창으로 연결되어 빛을 차단하는 건축적 요소가 최소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트 샤펠은 네이브(신자석)와 아일(통로)을 구획 짓는 열주(列柱)들이 생략되고, 4개의 베이(구역)로 이뤄진 네이브만으로 지어져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탁 트인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에 창과 창을 연결하는 가는 기둥 다발에도 금색을 주조로 한 채색이 더해져 스테인드글라스와는 또 다른 빛을 발하고 있다. 마치 빛을 방해하는 요소가 철저히 배제된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생트 샤펠은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층은 천장이 낮고 창이 많지 않아 어둡지만, 15m 높이의 스테인드글라스 15개가 에워싼 상층부는 천상을 연상시키는 빛을 연출하고 있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게다가 이는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어둡고 좁은 나선형 계단을 끝에서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되는 빛이어서 그 신비로움이 더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생트 샤펠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기 위해 계단을 올라 상층 경당에 첫발을 딛는 사람들은 모두 빛의 벽을 맞이한 경이로움에 취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탄사를 연발하곤 한다. 그리고 이내 자리를 잡고 앉아 각 15개의 창에 그려진 구약과 신약의 성경 말씀을 하나씩 읽어 간다.여느 고딕성당과 같이 원형, 마름모꼴 등으로 이뤄진 구획에 성경의 주요 장면들이 묘사된 창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 중에서 동쪽 정 중앙에 자리한 예수 수난에는 좌우로 이사야와 이사이의 나무, 요한 사도와 예수의 유년기(좌), 요한 세례자와 다니엘, 에제키엘의 성경 말씀이 담겨 있다. 이어 북쪽과 남쪽 측창에는 창세기, 탈출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기, 판관기(북쪽), 그리고 예레미야서, 토빗기, 유딧기, 욥기, 에스테르기의 말씀 그림들이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프랑스의 왕들과 예수 수난 성 유물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다. 그야말로 창으로 만들어진 성경이 아닐 수 없다. 서쪽 장미창은 15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고딕 전성기인 13세기 장미창들과는 달리 수레바퀴 모양에서 벗어난 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한 번은 생트 샤펠을 방문하고 나서 호기심에 파리 법원에 들어가 재판의 청중이 되어 본 적이 있다. 이미 전과가 많은 아프리카 기니의 남자 죄수에 대한 재판이었는데, 형을 선고해야 하는 판사와 한 가족의 가장으로 부양할 가족들이 있음을 이야기하며 선처를 호소하는 변호사의 변론이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그 속에서 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심판과 하느님의 심판을 떠올렸다. 빛으로 충만한 공간에서 법원의 어둑한 재판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고양되었던 정신이 다시 땅을 딛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다음엔 반대로 법원에서 생트 샤펠로 순서를 바꾸어 방문해 보려 한다. 백영민2016.05.11

신앙의 양식으로 아이 믿음이 쑤~욱 교계 출판사에서 선보이는 유아와 어린이들을 위한 신앙 도서를 소개한다.어린이 눈높이로 예수님 비유 설명바오로딸은 예수님이 들려주는 비유 이야기 시리즈 둘째 권으로 「하느님이 주신 선물」(김세실 글 / 정은미 그림)을 내놓았다. 마태오복음 25장 14-30절에 나오는 ‘탈렌트의 비유’를 유아들이 알아듣기 쉬운 그림과 글로 표현해 놓았다. 하느님이 주신 몸과 마음, 재능, 신앙 등을 잘 사용할 것을 아이들이 이해하고 오래 기억하도록 옛이야기를 해주듯 구성해 놓은 것이 특징.아동 임상 심리를 전공한 지은이는 책에서 ‘탈렌트는 무엇을 의미할까?’ ‘한 탈렌트를 받은 하인은 왜 그것을 땅에 숨겨 두었을까’라고 물으며 아이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탈렌트를 숨긴 것은 우리가 받은 선물의 귀중함과 가치를 모르고 이를 활용하지 않는 것과 같다며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선물을 잘 사용해야 할 것을 친절히 알려 준다. 교회의 믿을 교리 알기 쉽게 설명생활성서는 가톨릭 어린이 추천도서 시리즈 「참행복 여덟 가지」 「미사를 드려요」 「묵주기도를 바쳐요」 「성당의 거룩한 물건들」 네 권을 출간했다. 가톨릭 어린이 추천 도서 시리즈는 가톨릭 교회의 믿을 교리 내용을 어린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성경과 삶을 연결시켜 다양한 주제로 풀이해 놓은 안내서다. 「참행복 여덟 가지」(코니 클락 지음 / 짐 버로우즈 그림 / 김경은 옮김)는 마태오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내용을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다. 참행복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가장 소중한 말씀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쉽지 않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의로움에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등이 자비를 입고 하느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어린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책은 참행복을 설명함과 동시에 예시와 일화를 통해 참행복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미사를 드려요」(줄리아 디살보 지음 / 짐 버로우즈 그림 / 이현주 옮김)는 미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미사의 참뜻을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미사가 그저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되는 시간’임을 설명한다. 시작 예식부터 말씀 전례, 성찬 전례에 이어 마침 예식에 이르기까지 미사에서 느낄 수 있는 하느님을 차근차근 이야기해준다. 「묵주기도를 바쳐요」(마크 닐센 지음 / 짐 버로우즈 그림 / 이현주 옮김)는 묵주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그 의미를 자세하게 알려준다. 책은 묵주기도가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묵주기도는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라고 강조한다.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는 기도임을 일깨우고 있다. 「성당의 거룩한 물건들」(코니 클락 지음 / 짐 버로우즈 그림 / 백지연 옮김)은 성당에 가면 마주치는 성물들이 왜 거기에 있고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지 설명해 준다. 성당 문과 십자가, 성수대, 성작, 성합, 성화와 성상, 감실, 독서대 등 성당 안에 있는 모든 거룩한 물건은 하느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일깨운다. 무엇보다 미사와 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신비에 대해 잘 알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성물이라고 강조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백영민2017.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