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복음] 그리스도 왕 대축일 (마태 25,31-46)](//cpbc.co.kr/CMS/newspaper/2017/11/rc/702581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그리스도 왕 대축일 (마태 25,31-46)주님께서는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주임 정연정 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데, 교회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경축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믿는 분, 곧 하느님 사랑의 최고 현현(顯現)이실 뿐만 아니라 믿기 위해서 우리가 일치되어야 할 분”임을 다시금 새겨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신앙의 빛」 18항)나의 양 떼야, 너희를 구해 내겠다(에제 34,12.17 참조)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신앙의 해 개막 미사 강론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신앙의 중심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오늘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이스라엘 목자들’(에제 34,1-10)의 태만으로 양 떼를 잃는 결과를 초래한 사실을 언급한 후에 이어지는 이른바 ‘좋은 목자’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선포한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양 떼를 찾으시고, 보살피시고, 구하시고, 쉬게 하시고, 도로 데려오시고, 싸매 주시고, 원기를 북돋아 주시는”(에제 34,11-16 참조) 분이십니다. 사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콜로 3,17 참조) 하느님의 구원에 깊이 의탁합니다.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그리스의 신학자 카바실라스(N. Cabasilas)는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그분이 우리가 지음 받을 때의 원형(原形)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 안에 이미 그분께서는 충만히 현존하신다”(안젤로 아마토 추기경 「예수 그리스도」 참조)고 가르칩니다. 오늘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께서 “그리스도의 부활”(1코린 15,1-11)에 이어서 “죽은 이들의 부활”(1코린 15,12-34)에 대하여 선포하신 내용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서학자 스탠리 B. 매로우 신부님은 「바오로 서간과 신학」에서 “부활의 확실성에 대한 유일하고 참된 증거는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신앙인의 생활뿐이다”라고 강조합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과 해 주지 않은 것(마태 25,40.45 참조)교부학자 만리오 시모네티(M. Simonetti)가 엮은 「교부들의 성경 주해 : 마태오 복음」에 “지상의 목자는 동물의 몸 생김새에 따라 가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의 생김새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십니다”라는 해설이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십니다.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최후의 심판’(마태 25,31-46)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가름, 나눔, 구별, 식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길을 택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은 앵무새처럼 입만 살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음과 손을 지녀야 합니다”라고 권고하십니다.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성 대 레오 교황님께서는 “하느님께 속한 영혼이 자기 몸을 다스리는 것 이상으로 더 왕다운 것이 있겠습니까?”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소명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와 역사의 중심이시다”라는 정의로써 당신의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를 시작하십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신앙의 해 폐막 미사 강론에서 “그리스도는 창조와 백성과 역사의 중심이시다”고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심이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왕’이십니다. 이미 그분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모습을 몸소 보여 주셨는데, 지금도 우리가 그 길을 따라 살도록 끊임없이 이끄십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아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갖추는”(갈라 4,19 참조) 구원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시길 빕니다. 아멘.※한 해 동안 생활 속의 복음을 집필해 주신 정연정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대림 시기가 시작되는 다음호(12월 3일자)부터는 조명연(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전담) 신부님께서 집필해 주십니다. 문채현2017.11.22
![[허규 신부와 함께 떠나는 신약 여행] (79)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cpbc.co.kr/CMS/newspaper/2017/12/rc/705491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함께 떠나는 신약 여행] (79)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구원 역사 위에 세워진 교회 안에 모두 한 가족 소아시아 지방의 도시 에페소는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특히 이방인 선교의 거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사진은 에페소 유적. 가톨릭평화신문 DB 이방인 선교의 거점 에페소 에페소는 소아시아 지방의 도시로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던 에페소는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에서 거점 역할을 했던 장소였습니다. 교부들의 견해에 따르면 에페소는 요한 복음이 저술된 장소로 생각되었을 만큼 교회의 전통을 많이 지닌 도시입니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하 에페소서) 역시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과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의 차명 서간으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가 기록된 시기는 80년에서 90년 사이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에페소서는 잘 요약된 신학 서적과도 같은 서간입니다. 바오로의 친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으로 복음 선포와 믿음을 강조한다면, 차명 서간들은 이미 설립된 공동체, 곧 교회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특별히 에페소서는 교회에 대해 언급하면서 유다인 출신과 이방인 출신의 신앙인들 관계에 대해 다룹니다. “그때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약속의 계약과도 무관하였고,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에페 2,12) 이방인 출신들을 향한 이 표현은 당시 교회가 처한 상황을 말해 줍니다. 복음 선포와 함께 교회 구성원들은 유다인 출신에서 이방인 출신으로 변해 갑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와 함께 이방인들 역시 하느님의 구원에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다교 안에서 시작되었던 교회의 기원은 점차 희미해지고 이방인들의 구원이 하느님의 진정한 목표처럼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유다 전쟁(66~73년)의 여파로 70년에 성전이 파괴되면서 더욱 강해졌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페소서는 이방인 출신의 신앙인들에게 교회의 기원을 기억하도록 요청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유다인과 이방인 구분 없어져 이와 함께 에페소서는 예수님 안에서 더 이상 과거의 구분이, 더 이상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서로 반목하던 두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평화의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 2,17)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을 위한 것이면서 당신 몸인 교회 안에 서로 다른 유다인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만드는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에페소서는 십자가 죽음이 ‘평화의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표현되는 것은 역시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구체적으로 바오로 사도가 생각했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모든 이들이 지체를 이루는 몸을 표현합니다.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에페 1,22-23) 에페소서에서 표현되는 평화를 가져오는 십자가 사건은 교회 구성원들의 일치라는 중요한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교회에는 더 이상 민족의 구분이 없습니다. 에페소서는 이방인 출신의 신앙인들에게 그들이 더 이상 외국인이거나 이방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기초는 구약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에페 2,20-21) 하느님의 성전, 교회 교회는 하느님의 계획을 통해 역사 안에서 준비되었습니다. 물론 교회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고 모든 이들을 하나의 몸으로 만드신 예수님의 구원 업적을 통해 생겨났습니다. 구원을 위한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평화가 실현되는 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그 자체로 구원을 살아가는 공동체이고 하느님의 성전이기도 합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7.12.19
![[성경 속 도시] (68) 막펠라](//cpbc.co.kr/CMS/newspaper/2015/11/rc/604168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68) 막펠라이스라엘 성조들이 잠든 곳 아브라함은 사라가 세상을 떠나자 히타이트 사람에게 막펠라 밭에 있는 동굴을 구입해 장례를 치렀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참나무 곁에서 세 천사의 방문을 받는 모습을 그린 세밀화. 출처=「성경 역사 지도」 헤브론에 있는 막펠라 동굴은 이스라엘의 성지 중의 성지로 손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뿌리라고 믿고 존경하는 이스라엘 성조들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전 헤로데 대왕이 건설했다고 알려지는 무덤 위의 거대한 회당 건물은 그 위용이 대단하다. 거대한 성벽은 무덤을 둘러싸고 있다. 이 성벽은 이스라엘 성전 성벽과 아주 흡사하게 건설됐다. 회당 내부는 기품있는 중세 건축과 아라베스크 장식으로 이뤄져 있다. 이사악과 리브가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표시가 있는 가장 넓은 홀의 한쪽 구석에는 막펠라 동굴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 위에 둥근 천장이 있다. 또 다른 작은 방에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무덤이 있으며, 안뜰을 지나면 야곱과 레아의 무덤이 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분가하여 얼마 동안 이 부근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거주했다.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창세 13,18). 사라는 여기서 죽고, 아브라함은 아내의 묘소로 히타이트 사람에게 막펠라 밭에 있는 동굴을 구입해 장례를 지냈다(창세 23,2-20). 이 동굴을 아브라함에게 팔았던 사람들은 바로 히타이트 사람이었다. 구약성경에서는 히타이트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온다. 히타이트족은 기원전 2000년께 오늘날 터키반도에 정착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철을 성공적으로 무기로 이용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한때 시리아에 있던 여러 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에 견고한 성벽을 쌓는 등 히타이트 왕국을 큰 제국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러던 히타이트 왕국은 기원전 1200년께 갑자기 해양 민족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그런데 히타이트 사람들이 처음에는 아브라함에게 호의를 베풀면서도 그에게 토지에 대한 소유 권리만큼은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 즉, 죽은 자의 매장은 허락해 주었으나 소유하려는 토지매매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끈질긴 요구로 무덤의 토지가 아브라함의 합법적인 소유로 되었다. 아브라함은 모든 히타이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충분한 가격을 치르고 ‘법적 소유권’을 공인받았다. “성문에 나와 있는 히타이트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아브라함의 재산이 되었다”(창세 23,18). 이 땅에 자기 아내 사라를 안장하고 후에는 후손들이 쓸 무덤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사악과 야곱도 한때 헤브론에 머물렀다(창세 35,27). 그리고 이사악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을 이곳에 묻었다. “그의 아들 이사악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펠라 동굴에 안장하였다. 이 굴은 마므레 맞은쪽, 히타이트 사람 초하르의 아들 에프론의 밭에 있었다”(창세 25,9). 그 후 이곳은 베들레헴 근처에서 죽은 라헬을 제외하고 이사악과 리브가와 레아, 그리고 야곱도 여기에 안장되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분부한 대로 하였다. 그 아들들은 아버지의 주검을 가나안 땅으로 모셔다, 막펠라 밭에 있는 동굴에 안장하였다. 그 밭은 마므레 맞은쪽에 있는 것으로서, 아브라함이 히타이트 사람 에프론에게서 묘지로 사 둔 것이다”(창세 50,12-13). 아브라함은 이미 아내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죽음과 먼 미래 후손들의 삶을 준비했던 것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11.17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22)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6,12-16)](//cpbc.co.kr/CMS/newspaper/2017/07/rc/688254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22)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6,12-16)간절한 밤샘 기도 후12사도를 임명하시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작 ‘사도들을 부르심(Calling of the Apostles)’ 중 일부, 1481, Fresco, 349 x 570 cm , 시스티나성당, 바티칸. 이번 호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뽑아 사도로 세우신 이야기를 살펴봅니다.(루카 6,12-16)예수님은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6,12) 하느님께 기도하러 굳이 산으로 나가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집에서는 안 되나요? 성경에서 산은 광야와 함께 기도하는 장소, 곧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또 산으로 나간다는 말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 마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고 따라서 일상에서 탈피한다는 것입니다. 산으로 가신 예수님은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밤을 새우며 기도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혹은 간절한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밤을 새우며 기도할 까닭이 없습니다. 밤새 기도하신 예수님은 날이 새자 비로소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러고는 그들 가운데 열둘을 뽑아 사도로 부르십니다.(6,13) 이제야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신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기 위해서였지요. ‘사도’는 ‘사명을 띠고 파견된 이’를 말합니다. 유다교에서는 ‘파견된 이는 파견하는 이와 동등하다’는 원칙이 통용됐다고 합니다. 유념해야 할 것은 파견된 이가 파견한 이와 동등하다는 근거는 파견된 이 곧 사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사도로서 수행하는 사명, 곧 파견한 이가 부여하는 사명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곧 온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또한 ‘완전함’을 나타낸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온 이스라엘, 온 세상에 당신의 사명, 곧 아버지의 뜻대로 세상을 구원할 사명, 복음 선포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도록 열두 사도를 선택하셨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듯이 중차대한 일을 맡을 사도를 선택하고자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루카는 이렇게 열두 사도를 뽑기 위한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를 전한 다음 열두 사도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합니다.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6,14-16)이제 이 열두 사도를 차례로 살펴봅니다. 우선 시몬 베드로입니다. 원래 이름은 시몬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이름을 지어 주는 사람이 이름을 받는 사람에 대한 권한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새로운 소명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심으로써 시몬에 대한 권한을 지니시고 그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소명은 ‘베드로’ 곧 아람어로 ‘케파’라는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위, 반석이라는 뜻이지요. 베드로를 반석으로 곧 기초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시몬은 ‘들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루카는 열두 사도의 두 번째로 안드레아를 듭니다.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으로 형 시몬과 필립보와 함께 벳사이다 출신입니다.(요한 1,44) 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단의 도시로, 지금은 폐허가 되고 유적만 남아 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거명되는 야고보와 요한 역시 형제간으로 갈릴래아의 어부 출신입니다. 이 두 사도에게는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인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다혈질적이고 과격하다는 뜻이겠지요. 큰(大) 야고보라고 하는 이 야고보는 열두 사도 가운데 제일 먼저 순교했고(사도 12,2), 사도의 유해는 우여곡절 끝에 순례길로 유명한 스페인의 서북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성야고보 대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인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는 루카복음에서 여기에만 나옵니다.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필립보는 요한복음에 따르면 친구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요한 1,44-45) 바르톨로메오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과 같은 인물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을 행하신 카나(요한 2,1-11)에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를 기념하는 성당이 있지요.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인 마태오와 토마스 역시 루카복음에서는 이곳에서만 나옵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마태오가 세리였다고 합니다.(마태 9,9; 10,3) 토마스는 ‘쌍둥이’라고 불리는데 과단성이 있고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닌 것 같습니다.(요한 11,16; 14,5; 20,24-28 참조) 아홉 번째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고 성경학자들은 봅니다. 마르코복음 15장 40절에는 “작은 야고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야고보와도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에 나오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갈라 1,19) 또는 “야고보”(1코린 15,7)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알패오의 아들”은 마르코복음에서 ‘세리 레위’로 나옵니다(마르 2,14). 세리 레위는 또한 루카복음(5,28)에도 등장하지만, 이 레위가 아홉 번째 사도인 알패오의 아들 야보고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리 레위는 마태오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부르신 마태오 복음 기사(마태 9,9-13)가 마르코복음 2장과 루카복음 5장의 세리 레위를 부르신 기사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열 번째는 열혈당원 시몬입니다. 열혈당원은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은 로마 제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이들의 집단입니다. 열혈당은 기원후 6년쯤 갈릴래아 출신의 유다가 주도한 반란에서 시작합니다. 이 내용은 사도행전 5장 37절에 짧게 언급되고 있지요. 열한 번째 사도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입니다. 그런데 같은 열두 사도 선택을 전하는 마태오복음(10,1-4)과 마르코복음(3,13-19)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나오지 않고, “타대오”라는 이름만 나옵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아들과 타대오가 같은 인물인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다만 마태오복음을 손으로 베껴 쓴 몇몇 사본에는 타대오 대신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표기돼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 타대오가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동일인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마지막 열두 번째는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바로 그 유다지요. ‘이스카리옷’이 무슨 뜻인지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1) 유다 남쪽의 지명을 가리키는 ‘크리옷 출신’(여호 15,25 참조)이란 뜻 2) ‘예리코’ 출신의 뜻 3)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에게 붙인 ‘거짓말쟁이’라는 뜻 4) 열혈당원에 해당하는 라틴 말 ‘시카리우스(암살자, 자객)’의 셈족말로 음역한 것 등입니다. 생각해 봅시다1)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는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산으로 나가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요? 2)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소명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 때 모두 새로운 이름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지체로 사는 소명입니다. 우리는 이 소명을 어떻게 새기며 실천하고 있는지요? 3) 제자들 가운데 열두 명이 사도로 파견된 것처럼, 신자들 또한 사도로서 우리 삶의 현장에 파견됩니다. 이것이 평신도 사도직입니다. 우리는 평신도 사도직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요? 백영민2017.07.11
 19~20세기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cpbc.co.kr/CMS/newspaper/2017/11/rc/701072_1.1_titleImage_1.jpg)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6) 19~20세기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 모습은 바뀌어도 전능하신 구세주임을 한결같이 고백피에르 장 다비, 구세주 그리스도, 1868, 소묘, 렌미술관, 프랑스 20세기 가톨릭 성경학계의 가장 출중한 학자로 뷔르츠부르크학파를 형성한 루돌프 슈나켄부르크(1914~2002) 신부는 “진정한 예수는 그저 멀리서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복음서는 역사적 기초를 전제하고는 있지만 믿음의 관점에서 이 한계를 뛰어넘는다”라고 했습니다. 성미술도 역사적 진실을 뛰어넘는 상징으로서의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이번에는 성경의 영감을 받아 ‘주님의 얼굴’을 찾아 탐구했던 19세기 이후 화가들을 소개합니다. 프랑스 대혁명1789년부터 1794년에 걸친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 근대 사회의 붕괴를 가져왔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절대 왕정 시대의 종말을, 문화적으로는 바로크 예술의 종식을 고했습니다. 바로크 미술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촉발한 교회 분열을 막고,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기 위해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결실이었습니다. 공의회는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취하도록 성경과 교리에 더욱 충실한 성미술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장엄하고 위엄있는 새로운 양식의 성미술 즉 바로크 미술이 탄생했습니다. 절대 군주들도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신성화 작업으로 호화스러운 바로크 미술을 채택해 왕궁을 장식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낡은 질서를 허물겠다’는 기치 아래 교회와 왕정을 대변하던 바로크 미술품을 파괴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화가들에게 인간 본성과 감흥을 표현하는 감성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이를 ‘낭만주의’라고 합니다. 19세기의 낭만주의 화가들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괴된 성당 안의 성미술의 잔재들을 보면서 예술적인 상상력을 펼쳤습니다. 피에르 장 다비그들 중 한 명이 바로 피에르 장 다비(Pierre Jean David, 1789~1856)입니다. 다비 당제(David d’Angers)로도 알려진 그는 낭만주의 조각가로 그 시대 미술의 중심이었던 파리에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의 몇 안 되는 소묘 가운데 ‘구세주’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전능하신 그리스도) 성미술 양식과는 전혀 다르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시대사조를 반영한 구세주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다비의 ‘구세주’ 작품에는 하느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옥좌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구원할 지구 위에 홀연히 앉아 계십니다. 그 안에 당신이 구원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존재합니다. 구세주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증거하듯 머리와 몸에 다섯 상처를 지니고 있으며 아마포로 된 수의를 걸치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겨낸 구세주의 육신은 마치 어린 아기의 피부처럼 밝고 윤이 납니다. 구세주는 빛나는 천체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평화롭고 안식을 주는, 창조되지 않고 영원히 지지 않는 빛이 성령의 은총과 선물처럼 구세주를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성미술에서 빛은 거룩한 빛이며 ‘성령의 친교’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구세주를 감싸고 있는 빛나는 천체들은 시간의 영원성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구세주는 지구 표면에 무언가를 쓰고 계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군중들 손에서 구해 주시는 장면(요한 8,1-11)을 연상케 합니다. 붉은 물감으로 눈에 확 띄게 보여 주는 구세주께서 쓰신 글은 프랑스어로 ‘liberte, egalite, fraternite’입니다. 우리말로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입니다. 다비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과 당위성을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비해 표현한 것입니다.귀스타브 모로19세기 후반의 그림을 한 점 보겠습니다.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0)의 작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로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하지만 그의 화풍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낭만주의 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낭만주의 화가 샤세리오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이탈리아를 유학하면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거장들의 르네상스 작품에 매료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감성과 상상력으로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렸지만 늘 종교와 신화, 역사를 주제로 했습니다.모로의 ‘예수 그리스도’는 얼핏 봐도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를 연상시킵니다. 현란한 색상이 눈을 자극하고 전통적인 판토크라토르의 양식미는 없으나 지구를 상징하는 반구와 천체 위에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구세주께서는 세 천사의 호위를 받고 계십니다. 천사들은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합니다. 마지막 날 오신 구세주 앞에 모든 악한 세력들은 굴복할 것을 명령하는 듯 천사들의 표정은 단호합니다. 천사들이 머리띠를 하고 있는 것은 전통 이콘 기법입니다. 전통 이콘에서 일반적으로 천사는 흑발에 머리띠를 두르고 그 띠의 끝자락은 천사의 후광 안에서 휘날리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모로도 이 전통을 따라 천사의 머리 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테살로니카의 성 시메온은 “천사의 머리띠는 영의 순수함, 순결의 관,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에 집중돼 있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모로는 구세주를 십자가 상의 수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합니다. 구세주의 성혈이 땅을 적시고 스며들어 인간을 구원하신다고 묵시적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로가 쓴 붉은색과 푸른색, 녹색은 성미술에서 전통적으로 즐겨 사용하던 색입니다.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데 있어 붉은색과 파란색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합니다. 전통에서 탈피해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으로 구세주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표현 양식과 색에서 성미술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모로의 치밀한 구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조르주 앙리 루오마지막으로 20세기 작가의 작품입니다. 조르주 앙리 루오(Georges Henri Rouault, 1871~1958)의 작품 ‘성스러운 얼굴’입니다. 루오는 성미술을 현대의 시각으로 해석한 미술가입니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그를 ‘복음을 실천하는 화가’라고 평합니다. 그의 신앙이 삶과 작품 전체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귀스타브 모로에게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루오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를 흠모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그리스도를 그리는 것을 유일한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루오의 ‘성스러운 얼굴’은 마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보는 듯합니다. 직사각의 프레임에 있는 성스러운 얼굴은 하지만 전통적인 ‘베로니카의 수건’ 이미지를 따른 작품입니다. 루오의 ‘성스러운 얼굴’은 그가 흠모했던 렘브란트의 ‘청년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렘브란트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확신에 찬 표정을 하고 있는 청년 그리스도를 그렸다면, 루오는 당신의 사명을 다 한 예수님께서 고통 속에서도 평온해 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렘브란트의 세밀한 묘사와 달리 그는 간결한 선의 묘사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표현했습니다. 지극히 단순한 삶을 사신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간결한 선의 묘사로 초월성을 느끼게 합니다. 긴 코와 굳게 다문 입이 ‘주님의 존엄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비잔틴 미술의 대표적인 예수님 얼굴이기도 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낮춤’을 표현합니다. 루오는 이콘의 전통 기법에 따라 주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그렸습니다. 정면을 향한 주님의 얼굴은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과 친교의 감정을 일으킵니다. 루오는 성스러운 얼굴 앞에선 사람들과 주님의 일치점이 바로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루오는 “인간의 고귀함은 고통 가운데에서도 강하게 얻어지는 것이고, 고귀함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예수님의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종합이렇듯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그리스도’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그리스도교 신앙 자유 선언 이후 지상 교회가 세워지면서 늘 사랑받아온 성미술입니다. 시대에 따라 신학과 사상, 문화의 변이로 그 표현 방식이 바뀌어 왔지만, 여전히 전능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표현하는 성미술은 늘 이중의 뜻을 지닙니다. 하나는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인간이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미술을 감상할 때는 ‘깨끗한 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또 은총을 받기 위한 겸손한 기도의 자세가 요구된다고 합니다. 새 하늘 새 땅을 완성하러 오실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를 고대하면서 주님의 은총을 청하는 깨끗한 마음과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문채현2017.11.09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63) 14세기 ④ - 잉글랜드 영성가들과 신비신학](//cpbc.co.kr/CMS/newspaper/2018/02/rc/712018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63) 14세기 ④ - 잉글랜드 영성가들과 신비신학대륙과 섬을 오가며 발전 거듭한 신비신학 리차드 롤. 13~14세기 라인랜드(Rheinland)와 로우랜드(Lowland)에서 활동한 신비 체험가들과 신비 신학자들은 자신의 체험을 증언하거나 자신만의 학문적인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그런데 14세기 바다 건너 잉글랜드(England)에서도 신비 체험가들이 자신의 체험을 저술 작업을 통해 증언하면서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은수생활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한 리차드 롤잉글랜드 북요크셔(North Yorkshire)에 있는 피커링(Pickering) 근처 손튼(Thornton) 출신이었던 햄폴의 리차드 롤(Richard Rolle de Hampole, 1300~1349)은 더럼(Durham)의 대부제 토마스 드 네빌(Thomas de Neville)의 지원을 받아 옥스퍼드(Oxford)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학창 시절 롤은 철학이나 세속 학문보다 신학과 성경 공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18세쯤에 롤은 은수자가 되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석사학위 취득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 피커링의 존 돌튼(John Dalton)의 소유지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롤은 3년가량 은수생활을 하던 시점에 신비체험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결국 세속과 관련된 모든 일에 흥미를 잃었습니다.하지만 1322년쯤 존이 불행을 겪으면서 더 이상 그와 함께할 수 없게 되자, 롤은 여러 곳을 떠돌면서 기도생활과 집필 활동, 영적 지도를 하며 은수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1320년대 전반 롤은 프랑스 소르본(Sorbonne)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롤은 북요크셔에 계속 머물면서 가족과 함께 생활했거나 그 지역에서 발생했던 알 수 없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방랑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롤은 1348년쯤 북요크셔의 레이븐스워스(Ravensworth)에서 여성 은수자 마가렛 커크비(Margaret Kirkby, 1322쯤~1391/94)를 알게 됐고, 그녀에게 은수생활을 지도했습니다. 롤은 말년에 햄폴의 시토회 수녀원에서 머물렀는데, 수녀원에서 그의 역할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교회의 허가를 얻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롤은 1330년대에 라틴어로 저술하기 시작했으며, 1340년대에 영어로도 저술 작업을 했습니다. 롤은 잘 알려진 저서 「사랑의 불길(Incendium Amoris)」에서 자신의 신비체험을 육신의 물질적인 온기, 경이로운 다정한 감각, 그리고 시편을 부르는 것 같은 천상 음악이라는 세 가지 종류로 설명했습니다. 또한 롤은 하느님께 더 가깝게 다가가는 것을 완성하는 4가지 정화 단계도 묘사했는데 문을 열고, 뜨거워지며, 노래를 부르고, 다정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롤은 영어로 저술한 마지막 저서 「생활 양식(The Form of Living)」에서 은수자로서의 마가렛의 삶을 지도했습니다. 결국 14~15세기 넓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외에도 수많은 롤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다만 롤의 작품에 논란의 여지가 담겨 있어서 몇몇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비판했습니다.애덕 실천으로 완덕에 다다르는 것을 강조한 월터 힐튼잉글랜드 출신으로 생애에 대해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월터 힐튼(Walter Hilton, 1340/45~1396)은 교회법을 공부했으며, 교구 참사위원으로 일하려고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1380년대에 힐튼은 세상을 등지고 홀로 은수자가 됐으며, 기회가 되면 수도 공동체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1386년쯤 힐튼은 노팅엄셔(Nottinghamshire)의 아우구스티누스 의전 수도회인 서가튼(Thurgarton) 수도원에 입회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했습니다.힐튼은 저서 「완덕의 계단(Scala Perfectionis)」을 통해 신비신학에 정통한 신학자 및 영적 지도자로서 명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특히 이 저서는 중세에 저술된 내적 생활에 관한 작품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명쾌하며 균형이 잡혔는데, 두 개의 논문으로 구성됐습니다. 첫째 논문에서 힐튼은 여성 은수자들에게 14세기에 유행했던 범신론적인 위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을 연설했습니다. 둘째 논문에서 힐튼은 수도원 안에서만 영성생활을 완성할 수 있다는 중세의 전통에 반대했습니다. 즉 힐튼은 중세 서방 교회에서 그리스도교 완덕의 삶이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 혹은 환경에 제한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힐튼에 따르면 하느님과 일치하는 완덕의 삶은 오히려 애덕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부정의 길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관상 생활중세 잉글랜드 신비신학을 대표하며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작품은 14세기 후반에 익명의 저자가 저술한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이었습니다. 제목을 봐서도 추측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위(僞)-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500쯤)의 신비신학과 유사한 방식인 부정의 길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부정 신비신학’의 특징을 보였습니다. 일찍이 위-디오니시우스의 작품을 서방 교회에 확산시킨 요한 스코투스 에리우게나(Ioannes Scotus Eriugena, 810쯤~877/80)가 아일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신비신학을 대표하는 「무지의 구름」이 위-디오니시우스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작품의 저자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의전 수도회 소속이었던 월터 힐튼으로 추정하지만 의심스러운 주장일 뿐이며, 또 다른 학자들은 카르투지오회 소속의 사제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역시 분명하지 않습니다.익명의 저자는 「무지의 구름」에서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과정을 4가지 형태로 설명했습니다. 즉, 활동의 낮은 단계인 평범한 삶과 활동의 높은 단계이며 관상의 낮은 단계인 특별한 삶, 그리고 관상의 높은 단계인 고독한 삶과 완전한 삶을 언급했습니다. 완전한 삶은 이승에서 출발해 천상까지 연결돼 있습니다. 특히 수덕적인 측면인 활동과 신비적인 측면인 관상이 조화를 이뤄야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지성적인 측면에서 신비적인 지식은 인간 이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기에 인간이 무지의 구름 속에서 정화되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과 아무 데도 아닌 곳에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것을 깨달을 때 새로운 지식을 얻어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지적인 측면에서 인간은 하느님 은총으로 하느님을 열렬하게 사랑한다면 하느님 은총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것이었습니다.비록 지리적으로 유럽 대륙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던 잉글랜드였지만, 고립되지 않은 가운데 중세 유럽 신비신학의 흐름을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인 연구를 첨가했던 잉글랜드 신비신학은 근세 유럽 신비신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8.02.21
![[평화칼럼] ‘평신도 희년’](//cpbc.co.kr/CMS/newspaper/2017/10/rc/700134_1.0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평신도 희년’이창훈(알폰소)
한국 천주교회가 2018년을 ‘평신도 희년’으로 지낸다. 주교회의는 지난 10월 19일 끝난 가을 정기총회에서 내년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한국평협) 설립 50주년을 맞아 올해 11월 19일 평신도주일부터 내년 11월 11일 평신도주일까지 1년을 평신도 희년을 지내게 해 달라는 한국 평협의 요청을 승인했다. 주교회의는 또 교황청에 희년 전대사 수여를 청원키로 했다.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희년을 지내면서 ‘평신도를 위한 희년의 날’을 기념한 적은 있었어도, 한 해를 오롯이 평신도 희년으로 지낸 사례는 보편 교회(세계 교회)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지역 교회(국가 교회) 차원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한국 교회가 평신도 희년을 뜻깊게 지내도록 교황청이 한국 교회에 희년 전대사를 수여한다면 더욱 큰 기쁨이 되리라고 본다. 희년은 성경의 용어로,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내고 맞이하는 그다음 해 곧 50년째 되는 해다.(레위 25,8-22 참조)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과 안식년에 지켰던 규정이 더욱 확장돼 적용된다고 한다. 그래서 희년에는 땅을 놀려야 했을 뿐 아니라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동족에게 돌아가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희년을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해방을 선포해야”(레위 25,10) 했다. 희년이 거룩한 해, 해방을 선포하는 해인 까닭은 무엇일까. 안식일이 하느님께 바치는 날인 것처럼 희년이 하느님께 바쳐진 해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하느님을 참 주인으로 알아 섬기라는 것이다. 또 하느님께서 쉬셨듯이, 쉬라는 것이다. 땅도, 소나 나귀도, 종이나 몸 붙여 사는 사람들도 숨을 돌리고 쉴 수 있도록 배려하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유를 주고 해방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쉬고 풀어주어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하신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이 희년이 제대로 지켜진 적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희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충만히 실현됐다고 고백한다. 공생활 초기에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선포하셨고(루카 4,18-21 참조), 이를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 실현하셨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란 바로 희년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평신도 희년을 지낸다는 것은 내년 한 해 동안 특히 한국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 희년의 기쁨을 되새기며 희년 정신을 실천할 것을 다짐하고 또 그렇게 노력하는 해로 지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교회의는 이런 뜻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평신도 희년을 승인했고, 희년의 영적이고 가시적인 표징인 희년 전대사를 교황청에 청원키로 한 것이라고 본다. 평신도 희년 거행과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희년의 본래 의미, 곧 하느님을 참 주인으로 섬기고,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제자리를 찾으며, 쉼과 배려의 의미를 구현하고, 자유와 해방의 정신을 구체화할 수 있는 방안들이 마련돼 한국 교회가 명실상부하게 평신도 희년을 뜻깊게 경축하는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평화신문2017.10.31
![[아! 어쩌나] 418. 성스러운 삶과 건강한 삶](//cpbc.co.kr/CMS/newspaper/2017/11/rc/703260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418. 성스러운 삶과 건강한 삶홍성남 신부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상담을 원하시면 010-5032-7422로
‘문자’를 보내주세요. 문 : 대모님과의 관계 때문에 고민입니다. 대모님은 아주 조용하시고 늘 성당에서 기도하시고 봉사활동을 하셔서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래서 제 대모님으로 모셨는데, 날이 갈수록 대모님과 사사건건 갈등이 생깁니다. 저는 성격이 외향적이고 놀기를 좋아해서 친구들과 맛집도 찾아다니고 좋은 영화와 연극이 있으면 보러 다닙니다. 대모님께서는 그런 저에게 세속적이라고 일침을 가하시더군요. 그 말씀에 제 마음이 찔려서 온종일 기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는데 너무 마음이 답답해 결국 오래 하지 못하고 포기했습니다. 대모님은 다시 저에게 마귀가 들려서 그렇다고 하셔서 마음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또 제가 마음이 심란하다고 하면 마귀가 들렸다고 하십니다. 정말 마귀가 들린 건지요.답 : 신앙적인 면이건 일상적인 면에서건 사람의 정신적인 건강성에 대한 판단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가 그리고 자신도 편안한가 하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자신은 불편하다면 ‘병적인 콤플렉스’일 가능성이 높고, 자신은 편안하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면 ‘성격 장애’, 자기도 불편하고 다른 사람들도 불편하게 한다면 ‘신경증 장애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모님이 자매님의 삶을 세속적이라고 말한 것은 지나치게 영적으로 민감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적 신경증 증세’라고도 말하는데 이런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과 세속을 구분하는 데 지나친 민감성을 보입니다. 기도와 성당에서의 삶이 아닌 다른 삶에 대해선 세속적이라고 단죄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성당에서 행사할 때도 늘 못마땅하게 불평을 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문화나 예술에 대해서도 경직되고 폐쇄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본인들은 신앙이라고 확신할지 모르나 자칫 세상의 모든 일을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보곤 합니다. 그런 사람은 정신 상태가 분열증 초기일지도 모르니 조심할 일입니다. 또한, 이런 성향의 분들은 ‘종교적 자폐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흔히 ‘방주 콤플렉스’라는 증상인데 자신이 경험한 세상, 자신이 깨달은 것이 절대적이고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얼핏 보기에 신념과 신앙심이 대단한 분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생각에 도취하고 자기가 만든 신앙에 빠진 심리적 우상숭배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복음의 하느님이 아닌 자신이 만든 하느님을 섬기고 성경의 말씀을 자기 합리화를 위해 인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누이 강조한 바 있지만, 인간 삶의 영역은 영적인 영역과 정신적인 영역 그리고 육체적인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이 세 가지 영역이 균형을 이룰 때 그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지나치게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만 빠져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영적인 세계에만 몰입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사람은 마음이 늘 하느님만 향할 수는 없고 또 그분께 대한 믿음을 늘 견고하게 유지할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원래 반듯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면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해줍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욕망에 충실하고 약간은 흐트러짐이 있을 때 가장 사람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흔히 지진에 대비해 건물을 짓는 것에 비유되지요. 지진이 심한 곳에서는 건물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게 짓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내진 설계는 약간 흔들리게 짓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약간의 허술함이나 흔들림이 있어야 오히려 신앙인의 길을 잘 갈 수 있습니다. 가끔 빈틈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런 분들을 대하면 숨이 막힐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이 아닌 로봇 같아서 말이지요. 완전함을 지향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삶을 사는 것도, 흐트러짐이 없이 사는 것도 아닙니다. ‘완전한 삶’이란 자신이 완전하지 못함을 고백하는 삶이라고 한 성인들의 말씀을 잘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평화신문2017.11.29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마태 25,14-30)](//cpbc.co.kr/CMS/newspaper/2017/11/rc/701689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마태 25,14-30) 사랑에는 알리바이가 통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평신도 주일’입니다. 아울러 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기념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세속(世俗)’은 평신도들이 자신의 그리스도인 소명을 성취하는 자리가 되고 그 수단이 된다”(「평신도 그리스도인」 15항)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말뿐이 아닌, 구체적인 행동으로써 사랑을 실천하는”(1요한 3,18 참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훌륭한 아내는 가난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잠언 31,19 참조)우리는 때때로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앞을 찜찜한(?) 마음으로 지나치면서 “저런 사람에게 돈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돈을 줘봐야 그 돈으로 술을 사 먹을 게 뻔하니까”라며 그 상황을 애써 모면하려고 합니다. 이런 태도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한 월간지와 인터뷰에서 “그 술 한 잔이 그에게 유일한 낙이에요. 당신은 ‘숨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합니까? 당신은 그들보다 여러 면에서 행운아예요. 그러니까 그들을 돌봐줘야 합니다”라고 깨우쳐주셨습니다.오늘 제1 독서는 잠언에 나오는 이른바 ‘훌륭한 아내’(잠언 31,10-31) 일부분인데, 여기 등장하는 “여인은 성공한 인간 실존의 전범(典範)”(에리히 쳉어, 「구약성경 개론」 참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가난한 이웃에게 조건 없이 손을 내밀고 있는지?” 늘 성찰해야 합니다.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1테살 5,5)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회개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주님 친히 나를 나병 환자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주님께서 교회에 대한 크나큰 신앙심을 주셨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이처럼 성인께서는 늘 주님 앞에 자신을 깨우고자 하셨습니다.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의 시간과 때”(1테살 5,1 참조)를 희망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6)라고 권고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이 ‘안락함’과 ‘이기주의’로부터 깨어나도록 돕는 것입니다”라고 자주 강조하십니다.잘하였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참조)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첫머리에서 “사랑에는 알리바이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단언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핑계도 변명도 구실 따위조차 통하지 않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삶의 방식입니다.오늘 복음의 내용은 이른바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주인에게 받은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둔”(마태 25,24-25 참조) 이유를 “두려움” 때문이라고 실토합니다. 이에 대하여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예수, 구원의 스승」에서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주변만 맴돈다. 그는 사랑 안에서 자신을 선사하는 자유를 모른다”고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금잔이 아니라, 아름다운 영혼을 필요로 하십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께서는 「마태오복음 주해」에서 “우리가 어린양을 먹고 늑대가 된다면, 어떻게 우리의 정당함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시면서, 모름지기 성체성사의 신비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가난으로 부유하게 된”(2코린 8,9 참조) 사람들입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우선적 사랑”(제1차 가난한 이의 날 담화 참조)을 배워 “착하고 성실한 종”(마태 25,23)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주임 문채현2017.11.15
![[성경 속 도시] (70) 게제르](//cpbc.co.kr/CMS/newspaper/2015/12/rc/60675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70) 게제르솔로몬이 결혼 지참금으로 받은 땅 게제르 성문에는 방이 여섯 개 있었다. 그 방 하나에 있던 돌 욕조. 기원전 10세기. 출처=「성경 역사 지도」 도시가 형성하고 발전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는 교통이 얼마나 편리한지에 달려 있다. 게제르는 유다 평지의 북쪽 끝 부분 고지대에 있지만 주변이 탁 트여 사방의 전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과 더불어 주변에는 아주 비옥한 농지가 풍부했고 풍성한 샘물도 있었다. 이처럼 게제르는 해안도로를 지나던 교통요충지로서 해안 평야 지대에서 유다 산지로 올라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기원전 2000년쯤부터 이 도시는 항상 높은 성벽과 튼튼한 성문으로 요새화돼 이집트와 아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요충지로 발전했다. 게제르를 장악하는 것은 고대 국제무역로로 통제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여러 강대국도 모두 탐내던 도시였다. 성경에서도 게제르는 자주 언급돼 나온다. 게제르의 호람 왕은 여호수아의 정복 때 라키스 왕을 도우러 나왔다가 패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에 게제르 임금 호람이 라키스를 도우러 올라왔지만, 여호수아는 그와 그의 백성도 쳐서 생존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여호 10,33). 기원전 13세기 말 게제르의 인구는 줄어들었고 도시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여호수아는 게제르를 정복하고 에프라임 지파에 속한 레위인 크핫의 나머지 자손들에게 나눠주었다. “크핫의 나머지 자손들, 곧 레위인 크핫 자손의 씨족들은 제비를 뽑아 에프라임 지파에서 성읍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있는 살인자의 도피 성읍 스켐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게제르와 거기에 딸린 목초지…”(여호 21,20-21). 이곳은 레위 사람들의 도시 가운데 하나로 언급돼 있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만 정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제르는 필리스티아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완충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최전방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제르가 성경의 사건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솔로몬 시대였다. 솔로몬은 게제르의 지리적 입지를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안도로와 북쪽으로 도로를 장악하기 위해 솔로몬 임금이 주님의 집과 자기 궁전과 밀로 궁을 짓고, 예루살렘 성벽과 하초르와 므기또와 게제르를 세우려고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켰다(1열왕 9,15).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게제르를 점령해서 성읍에 있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솔로몬에게 아내로 준 자신의 딸에게 이 도시를 선물했다. “이집트 임금 파라오가 올라와 게제르를 점령할 때, 그 성읍에 불을 지르고 그곳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을 살해한 일이 있었다. 그는 솔로몬의 아내가 된 자기 딸에게 그 성읍을 지참금으로 주었는데…”(1열왕 9,16).결국 게제르는 이집트의 속국이 돼 고대 기록에는 게제르 왕들이 이집트 파라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집트는 20년 동안 게제르의 왕을 4번이나 바꿨다.이곳은 고대 주요 문서에서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는 게제르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객관적 자료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현재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 떨어져 있는 텔 엘-제제르(Tell el-Jezer)로 밝혀졌다. 발전을 거듭했던 게제르는 기원전 732년 아시리아에 의해 파괴된 후 다시는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한 도시의 흥망성쇄를 보면 겸허한 마음이 절로 생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12.01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cpbc.co.kr/CMS/newspaper/2017/02/rc/670936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지금은 바니아스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 카이사리아 필리피의 옛 유적지. 이방인의 도시인 이 지역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세속화와 물질문명의 첨단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복음의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연재를 시작하며“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신약성경 루카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신원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제자들에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답변은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으로 다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재차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물음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18-21 참조)비록 표현의 말마디는 약간 다르지만 마태오복음서(16,13-20)와 마르코복음서(8,27-30)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고, 마르코복음에서도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이 일이 있었던 곳이 어디인지 나오지 않지만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 혹은 그 근처라는 지명이 언급됩니다. 기획 의도 “스승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혹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약 2000년 전 베드로 한 사람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2000년의 세월을 이어오면서 가톨릭과 정교회, 프로테스탄트(개신교)를 포함해 그리스도교라고 자처하는 종교가 한결같이 고백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비신자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사실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짧은 신앙 고백문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2000년 전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고백이 2000년을 이어오면서 교회가 해온 고백이자 오늘날 우리 신자들이 하고 있는 고백과 동일한 고백이라는 점에 입각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신약성경의 복음서, 더 구체적으로는 루카복음서를 중심으로 묵상하면서 우리의 삶과 신앙을 성찰하고 쇄신하고자 하는 기획입니다. 따라서 이 기획이 지향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묵상과 성찰을 통해 우리 또한 베드로처럼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신앙 고백을 새롭게 하자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신앙 고백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이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삶으로 드러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복음이 2000년 전의 기록된 죽은 문자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임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더없는 축복일 것입니다. 왜 루카복음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전하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는 모두 네 권입니다. 그 가운데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 루카복음은 내용이나 형식, 구성이 비슷하고 해서 공관(共觀)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루카복음을 묵상과 성찰의 기본틀로 사용합니다. 루카복음을 흔히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방인은 유다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에 들지 못하는 차별받은 이, 소외된 이의 범주에 들었습니다. 루카복음은 실제로 죄인들, 세리들, 가난한 이들,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들을 향해 각별한 관심을 보여줍니다. 루카복음의 이런 특징은 온갖 형태의 차별과 소외가 엄존하는 우리의 아픈 현실을 개선하는 데에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기획은 루카복음을 중심으로 진행해 나가면서 필요에 따라 다른 복음의 내용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구성 ‘예수님 이야기’는 루카복음에 대한 주해나 주석이 아닙니다. 그럴 의도도, 그럴 역량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이, 복음서에 쓰인 시기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 2000년 역사 동안 교회가 한결같이 고백한 신앙, 그리고 오늘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자처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이 같은 주님께 대한 같은 신앙이라는 믿음으로, 루카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이야기는 성경 본문 묵상이 기본이 될 것입니다. 때로는 단락 전체가, 때로는 특정 단어나 구절이 묵상의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로운,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혼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히브 4,12) 하느님 말씀에 맛들이는 일입니다. 가능하다면 매회 독자들과 나눌 묵상거리를 ‘나누기’ 또는 ‘새겨보기’로 마련할 것입니다. 이와함께 성경의 지명이나 인명, 관련된 내용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 등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는 적절한 설명을 곁들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새겨보기다음은 ‘예수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독자 여러분과 함께 새겨보고 싶은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 13,8) cpbc2017.02.08
‘전대사’ ‘명의 주교’를 아시나요?주교회의, 「천주교 용어집」 개정 증보판 발행 주교회의(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표제어와 설명 자료를 보완한 「천주교 용어집」 개정 증보판<사진>을 발행했다. 「천주교 용어집」 (208쪽) 발행은 2000년 초판과 2014년 개정판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가 편찬한 「천주교 용어집」 개정 증보판은 표제어 859항목을 한국어(가나다 순)ㆍ라틴어ㆍ영어로 병기하고 설명을 첨부했다. 부록으로는 성월ㆍ특별 주일ㆍ교황청 기구ㆍ교황/교황청 문헌 명칭과 외국 성인명 로마자-한글 표기, 한국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 명단, 외국 성인명 등의 한글 표기법, 전례복ㆍ성당 기물 명칭과 사진 자료, 용어 색인 등을 실었다.개정 증보판은 자주 쓰는 전례ㆍ교리ㆍ교회법 용어와 ‘교부’, ‘명의 주교’, ‘전대사’, ‘부분 대사’, ‘사도좌 정기 방문’ 등 교회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을 설명과 함께 추가했다. 교황청 기구 명칭은 「교황청 연감」 2016년 판을 반영한 것으로, 최근에 신설된 기구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외국 성인명은 로마자(라틴어 표기)에 대응하는 한글 표기를 병기하고, ‘루카’, ‘티모테오’ 등 2005년 「성경」 발행과 용어위원회 논의에 따라 바뀐 일부 표기도 확인하도록 했다. 특히 성직자 전례복은 언어별 표기와 설명 외에도 주교, 신부, 부제가 실제로 착용한 사진을 실어 알아보기 쉽게 했다. 주교회의 2017년 춘계 정기총회 때까지 용어위원장으로서 개정 증보판 편찬 작업을 총괄한 강우일 주교는 “개정 증보판 발행으로 용어집 개정 작업은 일단락되겠지만,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용어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라며 용어집을 찾는 이들의 관심 속에서 올바르고 풍요로운 천주교 용어들이 자리 잡기를 기대했다.가격은 5000원. 구입 문의 : 02-460-7582 남정률 기자 njyul@cpbc.co.kr 평화신문2017.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