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진단] 가톨릭과 우리 문학 -표정훈(요한 사도, 출판평론가)](//cpbc.co.kr/CMS/newspaper/2017/10/rc/697825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 가톨릭과 우리 문학 -표정훈(요한 사도, 출판평론가)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었으나 / 그의 안에서 나의 호흡이 절로 달도다. / 물과 성신으로 다시 낳은 이후 / 나의 날은 날로 새로운 태양이로세!’ 1934년 「가톨릭청년」 제9호에 실린 정지용(프란치스코, 1902~1950)의 시 ‘다른 하늘’의 일부다. 정지용은 1933년부터 「가톨릭청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앙시 여러 편을 발표했다. 그는 도시샤대학 재학 중 1928년 7월 교토에서 프랑스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했으며, 재일본조선공교신우회 교토지부 서기로 활동했다.소설가 한무숙(클라라, 1918~1993)은 「역사는 흐른다」(1948), 「감정이 있는 심연」(1957) 등 많은 수작을 발표하며 작가로 성공하고 가정생활에서도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삶을 살았지만,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레지던트로 있던 둘째 아들이 1970년 2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참척(慘慽)의 슬픔을 견뎌내며 다시 창작에 몰두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신앙의 힘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무숙은 가톨릭문우회 대표간사(회장)로 봉사했으며 1986년에는 장편소설 「만남」으로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정약용과 그의 조카 정하상을 두 축으로 천주교 박해와 순교를 그린다. 우리 현대 소설사에 분명한 족적을 남겨온 작가 오정희(실비아)는 「오정희의 이야기 성서」(2012)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는 내게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이란 살아가는 일의 슬픔과 쓸쓸함이라고 표방하기도 하는데, 성서를 찾아 읽는 마음 또한 세상에 가득한 고통과 슬픔의 불가해함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창작을 이끄는 내적 힘과 성경을 통해 묵상하는 신앙의 힘이 멀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작가는 2014년 3월 제13대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장으로 선임됐을 때 이렇게 말했다. “가톨릭 문학은 나와 남의 벽을 허물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저마다 각기 다른 문제점과 고통을 갖고 있지만 모두에게 위로이자 치유로 다가갑니다.”소설 「군함도」로 2017년 제20회 한국가톨릭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수산(요한 크리소스토모)은 김수환 추기경을 소재로 한 「용서를 위하여」(2010)를 발표한 적이 있다. 작가는 현재 최양업 토마스(1821~1861) 신부의 일대기를 소설로 쓰는 중이다. 앞으로 성모님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고, 한국 천주교회사 전체를 소설로 쓰고 싶다는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종교와 비교하면 가톨릭 문학 작품이 적습니다. 인간의 원죄 의식을 바탕으로 한 좋은 작품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가톨릭평화신문 1421호 2017년 7월 2일 자>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 헌장」 62항, ‘문화와 그리스도교 교육의 조화’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문학과 예술도 그 나름대로 교회 생활을 위하여 중요하다. 인간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완성하려는 시도에서 인간 본연의 특성과 인간의 문제와 경험을 배우려고 노력하며, 역사와 전 세계 안에서 인간의 자리를 찾고 인간의 불행과 기쁨, 욕망과 능력을 밝히고 인간의 더 나은 운명을 그리려고 힘쓰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문학과 예술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표현되는 인간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다.”한수산 작가가 말했듯이 가톨릭 문학 작품 숫자도 적고, 가톨릭 문학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 성과도 구중서(베네딕토)의 「한국 천주교 문학사」 (2014), 김인섭의 「한국 문학과 천주교」 (2002) 등 얼마 되지 않는다. 「사목 헌장」이 표방하는 문학의 의미와 역할에 부응하는 문학 작품을 더 많이 읽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평화신문2017.10.10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27) 6세기 ② - 베네딕투스의 영성](//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3640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27) 6세기 ② - 베네딕투스의 영성유럽의 수호성인,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아버지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Benedictus Nursinus, 480/90~555/60)가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아버지’이고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사람들을 모아서 정주(定住) 수도회를 창설했고, 베네딕도 수도회와 베네딕투스 수도 규칙서를 따르던 수도자들이 당시 사회에 영향을 끼치면서, 중세 유럽에서 정치 상황의 안정과 문화유산의 보존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베네딕투스 성인, 페널에 템페라,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정주(定住) 수도회 설립서로마 제국 멸망 후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태어났던 베네딕투스는 어린 시절에 동고트족의 침략 전쟁을 경험했고 동고트 왕국 치하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누르시아(Nursia) 귀족 가문 출신인 베네딕투스는 청소년 시절에 로마에서 수학하면서 서방 교회의 혼란스런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 당시 서방 교회는 교황 심마쿠스(Symmachus PP, 재임 498~514)를 지지했던 동고트 왕과 대립교황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재임 498~507/08)를 지지했던 동로마 황제의 알력으로 한동안 분열과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로마에서 베네딕투스는 권력자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조세정책을 펼침으로써 백성들이 궁핍하게 되는 사회적인 모순과 백성들의 고단함을 목격했습니다. 베네딕투스는 세속적인 문화와 윤리적인 타락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500년경에 로마 동쪽 내륙 엔피데(Enfide)로 이주해 은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베네딕투스는 준비 없는 독거 생활이 영성 생활을 위험에 빠트린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몇 년 후에 그의 명성이 알려지자 베네딕투스는 비코바로(Vicovaro)에 위치한 수도원 원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 수도자들과 갈등을 겪자 베네딕투스는 수비아코(Subiaco)로 옮겨 그의 지도를 바라며 모여든 제자들과 함께 ‘성 클레멘스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곳 본당 신부의 시기 질투 때문에 베네딕투스는 동료 수도자들을 보호하고자 몇몇 제자들과 함께 다시 거처를 옮겼습니다.529년경에 베네딕투스는 로마 남쪽 몬테카시노(Montecassino)로 이주해 대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방 종교에 물든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또 베네딕투스는 인근 피우마롤라(Piumarola)에 여자 수도원을 설립하고 쌍둥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Scholastica, 480경~547경)에게 초대 원장 직분을 맡겼습니다. 이후 베네딕투스는 서쪽 해안가 테라치나(Terracina)에 수도원을 설립하고자 한 차례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 죽을 때까지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머물렀습니다.기도, 노동, 독서 중심의 수도 생활베네딕투스가 추구했던 수도 생활 정신은 그가 말년에 저술한 작품인 「수도 규칙(Regula Monachorum)」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베네딕투스는 수도자들에게 한 곳에 머무는 정주 수도 생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즉, “수도원 안에서 살며 규칙과 아빠스 밑에서 분투하는” 회수도자들을 가장 굳센 수도자라고 언급했습니다.(1장 참조) 북방 민족의 침략전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미래를 설계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베네딕투스는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한 곳에 정착해 육체노동을 하면서 수도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타인의 재물을 탐내고 일확천금을 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살던 백성들에게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을 일깨우며 정착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습니다.다음으로 베네딕투스는 상호 존중하는 형제애를 강조했습니다. 즉, 아빠스는 더 나은 수도 생활을 위해서 “형제들의 의견을 듣고 깊이 검토한 후에” 판단하고 지도해야 할 것이며, 수도자들도 “온전히 겸손된 복종심을 가지고” 아빠스의 결정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3장 참조) 이방 민족의 침입으로 로마 민족 사이에 이방 민족이 섞여 살아야만 했고, 피난살이로 자유인이나 노예나 타지에서 함께 정착해야 했기 때문에, 베네딕투스는 서로 존중하고 순종하는 사랑의 형제애를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수도자들은 선행, 순명, 침묵, 겸손의 덕을 익히고 실천해야 했습니다.(4~7장 참조)하지만 베네딕투스가 가르친 중요한 수도 생활은 기도, 노동, 독서였습니다. 베네딕투스는 수도자들이 공동으로 바치는 성무일도에 대한 규정을 자세히 제시했습니다.(8~20장 참조) 또한 베네딕투스는 수도자들이 개인적인 상황에서 실천하는 기도 생활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했습니다.(49~52장 참조) 한편 베네딕투스는 수도자들에게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성독(聖讀)을” 할 것을 권고했습니다.(48장 참조) 특히 베네딕투스는 독서 생활에 대한 실천 규정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48장 참조) 오늘날 가톨릭 신앙인들은 베네딕투스와 베네딕도 수도원을 생각하면 일반적으로 ‘기도하고 일하라’(Ora er Labora)라는 표어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만약 이 두 가지 내용만 기억한다면, 베네딕투스의 가르침을 일부만 이해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기도 및 노동과 함께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점은 베네딕투스가 앞서 동ㆍ서방 교회에서 수도자들이 성경 독서를 수도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던 정신을 계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강조베네딕투스는 매일 적어도 2~4시간씩 정기적으로 거룩한 독서를 실천하도록 권고했습니다.(48,3~4.10~11 참조) 따라서 수도자들은 나태함에 떨어지지 말고 거룩한 독서를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거룩한 독서와 육체노동은 균형을 맞추어 했습니다.(48,13.17~18.22 참조)그런데 베네딕투스는 수도자들에게 쉬고 있는 다른 동료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독서하라고 권고했습니다. “만일 누가 혼자 독서를 하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48,5) 즉, 소리 내어 읽는 독서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소리 내어 읽는다면 독서에 집중도 잘 될 것이고, 하느님 말씀도 선포할 수 있어서 유용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한편 베네딕투스는 저서 말미에 독서 목록으로 성경 말씀 이외에 교부들의 가르침들이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포함시켰습니다. 그중에서도 “교부들(요한 카시아누스)의 담화집이나 제도서 … 그밖에 우리의 거룩한 사부 「바실리우스의 규칙서」는”(73,5) 수도자들의 덕행 증진에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습니다.6세기 초에 베네딕투스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제시했던 새로운 삶의 모습은 그 당시 시대적 요청뿐만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유효한 정답이었습니다. 베네딕투스의 가르침은 중세 수도 생활과 수도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1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실천되고 있습니다. <가톨릭대 영성대학 신학대학 교수>백영민2017.05.31
![[성경 속 도시] (67) 메드바](//cpbc.co.kr/CMS/newspaper/2015/11/rc/601652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67) 메드바이스라엘·모압 간 갈등의 불씨 ‘메드바’는 요르단 동쪽 고지대에 있다. 고대의 중요 무역 통상로인 ‘왕의 대로’가 지나가는, 3500년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나라들이 오가며 남긴 독특한 문명의 흔적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빛나는 문화적 유적들로 가득한 곳이 바로 이곳 메드바다. 신약시대 메드바는 나바테아 왕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나바테아 왕국의 뒤를 이어 기원후 106년 로마 제국에 의해 아라비아 지방의 도시로 편입된 메드바는 비잔틴 제국에 의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중심지로 급속히 확산돼 나갔다. 그 후 이곳에서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순교하기도 했다. 비잔틴 시대에 들어와서는 요르단 강 동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하고 번성한 그리스도교 도시가 됐다. 특히 메드바는 당시 이름을 날리던 모자이크 장인들이 모여들면서 모자이크 예술의 중심 도시가 됐다. 세계적 고대 문화 유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메드바 모자이크 지도’ 가 대표적이다. 비잔틴 문화를 꽃피우던 메드바는 614년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았고 635년 이슬람군에 함락된 후 무슬림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리고 8세기 중반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파괴되면서 버려진 도시가 됐다. 현재 무슬림이 약 92%이고 그리스도교가 6% 정도인 요르단에서 메드바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표적 그리스도교 도시다. 성경에서 보면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서 아모리인들로부터 빼앗은 땅을 이야기하면서 처음으로 ‘메드바’를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가 활을 쏘아 대자 헤스본에서 디본까지 다 망하였다. 우리는 노파까지, 메드바까지 다 황폐시켰다”(민수 21,30). 메드바는 아모리인들의 임금 시혼으로부터 이스라엘이 빼앗은 땅이었다. 이스라엘은 아모리인들의 임금 시혼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청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혼의 땅을 지나가도록 허락해주기만 하면 밭이나 포도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물물도 마시지 않겠다고 서약한다. 오직 ‘임금의 큰길’만 따라 지나가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혼은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치려고 모든 군대를 모아 광야로 나와 전투를 벌였다. 이스라엘이 도리어 그를 칼로 쳐 죽이고, 아르논에서 야뽁까지, 곧 암몬 자손들의 영토에 이르기까지 그의 땅을 차지하였다(민수 21,21-35).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북쪽 헤스본에서 메드바를 거쳐 남쪽 디본에 이르는 아모리 족속의 땅은 르우벤 지파에게 할당됐다. “그들의 영토는 아르논 강 가에 있는 아로에르에서 시작하여, 그 강 중간에 있는 성읍, 메드바 곁의 고원 지대 전체…”(여호 13,16).이스라엘 역사에서 메드바는 이스라엘과 모압 족속 사이에 벌어진 갈등의 근원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메드바는 요르단 강 동편에서 예리코를 거쳐서 요르단 강 서편으로 갈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왕조 때에 자연스럽게 메드바가 모압 족속과 전쟁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메드바는 요압이 암몬인과 그 연합군을 격파한 장소이기도 하다. “또 병거 삼만 이천 대, 그리고 마아카 임금과 그의 군대도 고용하였다. 그들은 메드바 앞에 와서 진을 쳤다. 암몬 자손들도 싸우려고 저희 성읍들에서 모여 왔다”(1역대 19,7).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11.04
![[허규 신부의 신약 여행] (53)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갈라 2,6)](//cpbc.co.kr/CMS/newspaper/2017/06/rc/685301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의 신약 여행] (53)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갈라 2,6)복음 선포의 걸림돌, 지혜 모아 해결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는 이방인 사도를 받아들이기 위한 초기 교회 공동체의 노력이 잘 드러난다. 니콜라스 베르햄 작, ‘리스트라의 바오로와 바르나바’, 1650년, 생테티엔 미술관, 프랑스. 바오로 사도의 첫 번째 선교 여행 이후 초대 교회는 중요한 사건 하나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사도 회의”입니다. 사도행전 15장과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장에 담겨있는 이 내용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 그리고 갈라티아서에 따르면 그리스 출신인 티토가 예루살렘의 사도 회의에 참석합니다. 여기서 ‘사도’라는 표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사도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목격 증인들에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의 삶을 함께한 이들, 곧 열두 제자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부름을 받아 그 여정을 함께 걸었던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는 전형적인 표현은 “열둘”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었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생각나게 하는 표현입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때부터 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처럼 사용됩니다. 예수님 역시 열두 제자를 뽑습니다. 이 열둘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처럼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닌, 부르심과 믿음을 통한 새로운 백성입니다. 이 제자들은 복음서에서 보통 ‘열둘’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70년 정도 이후에 이들에게 ‘사도’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으로 봅니다. ‘파견된 사람’을 의미하는 사도는 원래 사회에서 사용되던 용어이지만 초대 교회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열둘’을 지칭하는 특별한 용어로 자리매김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도 사도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용례를 보면 사도는 좁은 의미에서 열두 제자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한 초기 교회의 봉사자들에게도 사용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역시 예루살렘에서 열린 사도 회의에 참석합니다. 이 회의에서 가장 큰 주제가 되었던 것은 ‘할례’입니다. 할례는 유다인 남성들에게 행하던 것으로 그 기원은 창세기에 나오는 하느님과 아브라함과의 계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너희가 지켜야 하는 계약, 곧 나와 너희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은 이것이다. 곧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이다.”(창세 17,9-10) 이것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이고 이 계약의 징표가 할례입니다. 성장하는 초기 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곧 율법이 정한 모든 것을 요구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방인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알고 믿었던 유다인 출신들은 이방인들 역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를 접하게 되고 이것을 사도 회의를 통해 풀어갑니다. 이 회의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에게 할례는 유다교의 특성이지 그리스도교의 특성은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는, 할례받은 이들과 아닌 이들을 구분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결국,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이방인 출신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고 우상과 관련된 것들을 멀리하도록 신자에게 권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는 우선 새로운 문제를 접한 초대 교회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보여줍니다. 사도 회의는 시간이 지나고 공동체가 커지면서 생겨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한 개인의 결정이 아닌, 사도들이 함께 모여 문제를 논의하고 그것을 해결해 갑니다. 새로운 문제들은 이렇듯 새로운 방향과 의미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사도들은 서로 합심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할례를 받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바오로 사도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앞장섭니다. 김지항2017.06.14
![[평화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4) 산살바도르대교구 - 진실 규명에 앞장서다](//cpbc.co.kr/CMS/newspaper/2018/03/rc/714829_1.0_titleImage_1.jpg)
[평화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4) 산살바도르대교구 - 진실 규명에 앞장서다고통스러운 진실을 직시함으로써 화해와 평화의 길 닦아 리베라 이 다마스 기록보존소에서 한 연구원이 1981년에 벌어진 판도 모소테 언덕 학살 사건 관련 문서를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 한 사람의 기억 속에라도 남아 있는 한,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죽음의 진실, 그 참혹했던 과거사가 밝혀지고, 가해자가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며, 이를 통해 공동체는 ‘기억의 정화’를 거쳐 참된 용서와 화해, 평화의 바다로 나아간다. 또 그 기억은 단순히 기억으로만 그치지 않고 평화를 위한 기도의 연대와 실천으로 이어진다. 성찬례 때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는 말씀을, 우리가 듣고 기념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듯이. 복자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 대주교를 이은 아르투요 리베라 이 다마스(1923∼1994) 대주교는 그 기억을 정화하고자 자신의 이름을 딴 ‘리베라 이 다마스 기록보존소’를 설립했다. 그레고리오 로사 차베스 추기경을 따라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정세덕 신부) 방문단이 기록보존소에 들어서자 서고와 그 옆 빈 공간에 각종 문서와 사진, 자료가 빼곡히 쌓여 있고 연구원들이 그 곁에서 복원 작업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산살바도르 학살의 증거 보관하는 기록보존소 연구원들이 내보인 자료 중 가장 눈길이 간 것은 산살바도르 학살의 증거들이다. 1989년 11월 16일 산살바도르대교구 내 예수회 설립 대학인 중앙아메리카대학(UCA, Universidad Centro Americana)에서 평화 협상을 중재하던 이그나시오 에야쿠리아 신부 등 예수회원 6명과 공동체 식복사, 그의 15세 딸 등 8명이 반군으로 위장한 정부군에 살해당한 모습을 찍은 사진과 기록, 유품이다. 엘살바도르 내전의 전환점이 된 사건 기록으로, 정의의 실현을 살아낸 순교자들의 모범을 보여주는 신앙의 증거다. 내전 당시 살해당한 메리놀 수녀회 수녀들에 대한 학살 증거도 있다. 로메로 대주교 살해를 사주한 공군 대위 알바로 라파엘로 사라비아에 대한 재판 당시 기록보존소에서 미국 재판부에 제출했던 증거들, 로메로 대주교가 산살바도르대교구장에 착좌한 1977년 2월부터 순교한 1980년 3월까지 직접 쓴 강론 육필 원고도 기록보존소에 남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81년 판도 모소테 언덕에서 1000여 명의 어린 아이들과 민간인이 무참히 살해된 사건 당시 생존자가 1991년 교회에만 밝힌 학살의 진실에 대한 증언과 사건 전모 기록, 유해 발굴 네거티브 필름과 사진 등도 남아 있다. 기록보존소는 12년간의 내전 때 교회에 제공된 자료와 기록, 증언을 차곡차곡 보관하며, 최근엔 디지털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페르난도 디아즈(26) 연구원은 “이 자료는 ‘그냥 다 잊고 용서하자’는 정부 입장에 맞서 ‘진실이 밝혀진 다음에야 화해는 가능하다’는 교회 입장을 반영한다”며 “내전의 가장 큰 희생자는 진실이고, 그 진실을 고발하는 것이 기록보존소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방문단을 안내하던 차베스 추기경은 “이 자료들은 고통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희망의 기록”이라고 덧붙였다. ‘평화는 진실을 기초로 만들어진다’는 모토로 운영되는 기록보존소는 공동체의 기억의 정화에 없어서는 안 될 사목적 도구인 셈이다. 방문단은 이어 UCA 로메로 대주교 센터를 찾았다. 맨 먼저 들른 곳은 예수회 사제 6명과 민간인 2명 살해 사건 기록과 유물을 전시한 센터 내 순교자기념관이다. 순교자들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초상, 살해 장면을 담은 사진들, 제의와 평상복, 가방이나 신발, 안경 같은 일상 소지품들, 기관총을 난사한 흔적이 남은 주석 성경, 불에 탄 십자가와 성물들, 스페인 교황청립 살라망카대학에서 수여한 살바도르 훈장과 기념 메달 등이 가득했다. 피투성이인 상처의 기억과 진실을 대면해야 하는 건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순교자기념관을 빠져나와 뒷문으로 나오니 옷을 벗긴 채 예수회원들을 끌어내 무릎을 꿇리고 살해했던 장미정원이다. 정원 맞은편에는 순교자 추모비가 세워져 있고 정원 앞에는 순교자 추모 알림판이 줄지어 있다. 안쪽에는 예수회원들이 살았던 사제관, 예수회원들을 학살하는 걸 본 목격자라는 이유로 살해된 식복사 모녀가 살았던 숙소가 있다. 그 앞에 순교자 기념 성당이 세워져 유해를 모셔 놓았는데, 이 성당 벽에는 살해된 예수회원들의 시신 사진을 그림으로 옮겨 십자가의 길 14처가 걸려 있다. 순례 직후 차베스 추기경과 UCA 교수 4명이 함께한 가운데 1시간여에 걸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평화나눔연구소(소장 최진우 교수)와의 간담회가 마련됐다. 대화의 초점은 내전 당시 평화협상 전개 과정과 현 엘살바도르 상황, 피해자 입장에서의 정의와 사면 문제 등에 집중됐다. ▶관련 기사 24면정의와 복수, 혼동해선 안 돼 UCA 총장 안드레우 올리바(예수회) 신부는 “정의와 복수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며 “법에 호소하기는 했지만, 예수회원들 살해 사건 책임자인 대령이 30년 형을 언도받았을 때 예수회가 앞장서 사면운동을 벌여 4년으로 감형한 사례는 예수회가 화해를 위한 정의를 기대한 것이지 복수를 위한 판결을 기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했다. 진상 규명이 먼저 그리고 참회 UCA 사회 부총장 오마르 세라노 교수는 “엘살바도르 평화협정 당사자들은 무조건 과거를 잊고 사면한 뒤 새출발하자고 이야기하는 데 이는 불가능하다”며 “이는 내전 당시 희생된 7만 5000여 명에 대한 진상 규명이 없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교회는 대사면에 반대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UCA 정치학 교수 호세 마리아 토헤이라(예수회) 신부는 “내전을 둘러싼 재판에 가보면, 희생자들의 가족은 다들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서 “하지만 그들은 용서하고 화해하고 싶어도 누구와 해야 할지 모르고, 사건 주범이나 진실은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한다”고 반문했다. 이어 “이들이 요구하는 정의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진상 규명과 가해자의 참회를 통한 용서를 통해 화해와 평화로 가는, 희생자들을 위한 정의”라고 강조했다. “진실은 정의와 자비의 단짝 친구이며, 이 세 가지는 평화를 건설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을 떠올리며 내려오는 UCA 대학 구내로 열대의 석양이 붉게 깃든다. 글·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엘살바도르 내전 1979년 극우파 쿠데타에 이어 이듬해 로메로 대주교가 암살되면서 엘살바도르는 1980년대 내내 내전에 휩싸였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과 파라분도-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 등 반군 간 내전으로 수십 만 명이 국외로 탈출하고 7만 5000여 명이 사망했다. 통칭 ‘14가문’이라고 불리는 스페인 통치시대 이래의 지배 집단과 이에 맞선 반군과 원주민 학살, 반공 군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 등으로 엘살바도르는 굴곡진 시대를 살아야 했다. 교회는 1980년대 초부터 양측에 대화를 촉구했고, 1984년 말부터 5년간 평화협상의 중재자로 활약했다. 교회는 1989년 코스타리카 산호세 대화에서 이후의 모든 과정을 유엔의 손에 맡겼고, 1992년 1월 마침내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cpbc2018.03.21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51)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 9,5)](//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3712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51)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 9,5)박해자, 주님 만나는 체험 후 복음 선포자 되다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작 ‘성 바오로의 개종’,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사도들의 행적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흔히 ‘이방인의 사도’라 불리는 바오로는 선교 여행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방에 널리 전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볼 수 있는 그의 인생 역시 상당히 극적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그의 회심 이전의 이름인 사울은 스테파노의 순교 때에 처음 등장합니다.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사도 7,58) 이후 사울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로 소개됩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사도 8,3) 사울은 유다교에 충실했던 인물로 소개됩니다. 그의 이름인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 왕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바오로 사도에 대한 많은 내용은 그의 소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몇 번에 걸쳐 자신의 과거에 대해 그리고 회심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안에서 이런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 22,3) 바오로는 또 말합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필리 3,5) 바오로의 표현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열성적인 유다인이었는지, 더 나아가 얼마나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게 살았던 인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의 유명한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에게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이자 바리사이였습니다. 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 역시 사도행전에서 언급됩니다. 그는 사도들이 유다교로부터 박해당할 때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던 인물이었습니다.(사도 5,34-39) 사울은 열정에 넘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향합니다. 그리고 이 길에서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체험을 하게 됩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은 그를 박해하는 자에서 선포하는 자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 체험은 사도행전 9장 3-19절과 22장 6-21절에서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자세하게 묘사됩니다. 하늘에서 빛이 비치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흘’은 성경 안에서 하느님과 관련된 표현으로 마치 하느님의 업적이 드러나는 준비의 기간처럼 표현됩니다. 또한, 사울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보속의 기간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명을 받기까지 이러한 시간을 보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니아스를 사울에게 보냅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이렇게 사울은 하나니아스를 만나 세례를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러한 체험 이후 사울은 ‘바오로’라고 불립니다. 바오로는 그의 로마식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바오로가 됩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는 그에게 ‘사도’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원래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지칭하는 표현이지만, 조금 넓은 의미로 복음 선포에 기여한 바오로와 그의 협력자들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이제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서부터 복음 선포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회심 이후 그에게 주어진 시련 역시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여전히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로 받아들이고 유다인들 역시 반역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사도 9,20-25)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열성을 다해 자신의 사명을 이어갑니다. 그의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교가 성장하는 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김지항2017.05.31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이냐시오 로욜라 (4)](//cpbc.co.kr/CMS/newspaper/2017/08/rc/690709_1.0_titleImage_1.jpg)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이냐시오 로욜라 (4)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그리스도께 다가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냐시오가 영적 회심을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이탈리아 수비아코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 프레스코화. 이냐시오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를 자서전에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금빛 전설」에서 데 보라진은 도미니코 성인을 주님의 보호자이며 교회의 보호자로 묘사한다. 또한, 이냐시오로서는 어린 시절부터 친숙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야기를 「금빛 전설」을 통해 읽으면서 자신의 삶과 어떤 비슷한 점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일부분만 발췌해 보자. 주님의 기사 동경한 세속의 기사“프란치스코, 가장 높은 분의 종이며 친구는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인이 되었으며 20세까지 헛된 삶을 살아왔다. 그 후 주님은 그에게 병고를 허락하시고, 매우 빠르게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예언자의 정신을 현현하게 하셨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프란치스코, 달콤함 앞에 쓴 것을 내어 놓아라. 나를 알고 싶다면 너를 버려라.”프란치스코 성인의 삶 이야기의 이 부분은 이냐시오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 또한 회심 이전에는 이냐시오처럼 세상의 헛된 영광을 추구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병고를 겪었던 것처럼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이냐시오 또한 병고를 겪고 부상으로부터 회복 중이다. 이냐시오는 프란치스코의 회심에 깊은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이냐시오 또한 그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택하기로 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 유명한 「신국론」을 저술했는데, 데 보라진은 그 내용을 「금빛 전설」에서 다룬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은 예루살렘의 왕인 그리스도와 바빌론의 왕인 사탄이 서로 대치하는 전장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두 개의 도시 중에서 어떤 도시에 살고 싶은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도미니코 성인과 프란치스코 성인이 주님의 종이며 친구이고 기사로 묘사되는 데 반해, 이냐시오 자신은 세상의 왕족을 위한 기사로서 살아왔다. 이러한 상황은 이냐시오에게 자신의 과거 삶을 숙고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스스로 자문한다. “성 프란치스코나 성 도미니코가 한 일을 나도 하면 어떨까?” 이런 상념이 점차 발전되어 이냐시오는 ‘영의 식별(discernment of spirits)’에 대한 인식을 얻게 된다. 책 통해 그리스도 생애를 묵상이냐시오가 읽은 또 다른 책인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이냐시오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보자. 「금빛 전설」이 성인들의 모범적인 거룩한 생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면 작센의 루돌프가 저술한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삶의 신비를 묘사한 책이다. 이 책은 성경, 교부학, 특히 요한 크리소스토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위 보나벤투라, 보나벤투라 등 풍부한 참고 자료를 바탕으로 저술된 매우 방대하고도 학문적인 글이다. 라틴어로 저술된 이 책의 본래 제목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인데, 그리스도의 생애가 인간을 향한 하느님 구원의 드라마의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이냐시오는 이 책의 스페인어 번역본을 읽었다. 이냐시오는 이 책을 통해 후에 그가 저술한 「영신수련」의 다양한 내용을 길어 올렸다. 17개의 요점으로 구성된 이 책의 서문을 일부분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에서 루돌프는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하여 매우 풍부한 설명을 제공한다. 첫 번째 요점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여기에서 루돌프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관점을 따르면서, 하느님은 자족한 분이지만 인간은 불충분한 존재로 묘사한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 죄인들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초대받은 존재다. 그럼으로써, 죄인인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과 죄에서 탈피해 본래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참회와 고해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하고 모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한다. 이러한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와 화해함으로써, 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이러한 역동성은 「영신수련」의 첫 번째 주간의 역동성과 매우 유사한 면을 보여 준다. 루돌프의 뛰어난 점은 그 내용의 풍부함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를 방법론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독자들을 더욱 깊은 내적 차원으로 이끈다는 점이다. 카르투시오회 출신 수도자인 루돌프는 이 수도회의 영적 전통인 ‘렉시오 디비나’ 방법을 이 책에 적용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그리고 기도(oratio)의 순서에 따라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도록 초대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본받기(imitation of Christ) 위한 내적 여정을 한 걸음씩 밟아 나아가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루돌프는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를 읽을 때에는 독자가 그리스도의 신비 사건의 장면이 일어나는 것처럼 상상력을 사용하라고 한다. 또한, 그 장면들을 내적으로 음미하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이냐시오는 「자서전」 7항에서 밝힌 것처럼 간혹 읽기를 멈추고 자신이 읽은 내용을 마음속으로 헤아리곤 하였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이냐시오는 그리스도를 단지 이성적으로만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경험적 지식은 단순히 그리스도에 관한 책을 읽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알게 된 지식이 아니다. 이러한 지식은 우리 영혼을 살찌우지 못한다. 경험적 지식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경험해 알게 된 지식을 말한다. 그래서, 이 지식은 우리가 더욱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한다. 백영민2017.08.02
![[종교개혁 500주년] 교회는 분열했으나 가톨릭 쇄신에 전환점 마련](//cpbc.co.kr/CMS/newspaper/2017/03/rc/674138_1.0_titleImage_1.jpg)
[종교개혁 500주년] 교회는 분열했으나 가톨릭 쇄신에 전환점 마련 종교개혁 500주년 배경과 의미 등 교황과 전례 등 그 어떤 것보다도 성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그림. 2017년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리를 초래한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다. 마르틴 루터<사진>가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조 명제를 붙임으로써 시작된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연 기념비적 사건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했다. 500년 전 사건을 돌아보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그 사건이 지닌 의미를 되살려 오늘의 교훈으로 삼고자 위함이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배경과 전개, 그리고 의미를 짚어본다. 배경세상에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큰 사건일수록 복잡한 배경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종교개혁 또한 수많은 역사적ㆍ사회적ㆍ신학적ㆍ교회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발생한 폭풍 같은 사건이다. 정치적으로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은 중앙집권 체제의 군주제로 발전하면서 그리스도교 제국 전체가 아닌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고 교회를 예속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반대로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은 지방 분권화가 이뤄짐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사회적으로는 도시와 지방의 빈부 차이가 심해졌다. 일부 귀족과 몰락한 기사, 농민들은 가난과 불만 속에서 어떤 혁명을 기대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로 발전하면서 교회 개혁을 촉구했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초대 교회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대사, 구원, 미사성제, 성사, 교회, 교황 수위권 등 핵심적인 신학 주제들이 교회 당국에 의해 확실하게 정립되지 못함으로써 신학의 불확실성 시대를 초래했고, 이는 루터가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는 빌미가 됐다. 게다가 교회 내부는 한마디로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교황들은 출신 가문의 세력 확장과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는 데 열중했다. 전 국토의 3분의 1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했던 독일 교회는 부와 세속적인 권력을 누리기에 바빴다. 비윤리적인 생활을 하면서 독신을 지키지 않는 사제가 허다했다. 비복음적인 부조리가 팽배했고, 사제에 대한 불신은 고조됐다. 그렇다고 교회 전체가 타락한 것은 아니었다. 교회 쇄신을 위해 순교적 희생을 아끼지 않은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도 적지 않았다. 전개 교황청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신축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이른바 대사부(大赦符)를 발행했다. 대사부는 죄를 용서해 주는 면죄부가 아니라 고해성사 때 사제가 정해주는 보속을 줄여주는 증서였다. 그러나 이 보속 경감을 면죄(免罪)로 과장하고 상품화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대사부를 둘러싼 소란과 곡해에 충격을 받은 루터는 1517년 이에 항의하는 95개 조 명제를 만들어 동료들에게 보냈다. 95개 조 명제는 출판업자들에 의해 간행되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신학자들의 반박과 교황청의 심문을 받았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루터는 1521년 교회에서 파문됐다. 이후 루터는 교회 개혁 저술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다. 루터 문제는 정치 문제로 비화했다. 1526년 황제는 독일의 종교 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하고자 국회를 열었지만 루터를 지지하던 제후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1529년 그리스도교는 양분되기 시작했고, 종교 분쟁은 숱한 회담과 충돌, 30년 전쟁을 거쳐 ‘베스트팔리아 평화 회담’에서 최종적으로 일단락됐다. 그 결과 1570년쯤 독일 북부 지방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루터교로 개종했다. 종교개혁의 바람은 루터에서 끝나지 않고 이웃 스위스로 번졌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성서관과 루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1523년 교회 개혁안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는 신ㆍ구교의 종교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츠빙글리는 1531년 전사했다. 제네바에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론인 「기독교 강요」(1536년)를 저술한 칼뱅이 시 의회의 지지를 받고 종교개혁에 착수했다. 그의 과격한 혁신은 시민들의 반발을 샀으나 칼뱅은 가혹한 대응으로 1555년 모든 저항을 제거했다. 이후 제네바는 개혁 교회의 중심이 됐고, ‘낭트 칙령’으로 칼뱅파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했다. 섬나라 영국도 종교개혁의 대열에 합류했다. 영국 왕 헨리 8세(1509∼1547)는 본래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대하면서 일곱 성사를 옹호하는 입장을 밝혀 교황청의 지지를 받았다. 그랬던 헨리 8세가 이혼하기 위해 관면의 무효성을 주장했는데, 교황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헨리 8세는 단독으로 이혼을 추진하면서 영국 왕이 영국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갖도록 조치했다. 이로써 영국 교회는 가톨릭교회와 분리됐다. 영국 성공회는 이렇게 탄생했다. 의미종교개혁은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쳤던 유럽의 정치적 일치를 무너뜨렸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해방됐다는 것은 교황청이라는 종교 권력이 아닌 국가라는 세속 권력에 예속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황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든 것은 물론이다. 나라에 따라 종교가 달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종교개혁은 또 근대 자본주의를 촉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교개혁은 신자들의 영성 생활을 활성화하고 하느님 말씀을 자주 읽고 실천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종교개혁 이전부터 있었던 가톨릭 쇄신 운동에 힘을 싣는 결과도 낳았다. 종교개혁 결과 수많은 개신교파가 등장했다. 개신교의 가장 큰 특징은 교황의 수위권과 성전(聖傳)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성경만을 신앙의 근거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성경은 하나지만 성경 해석은 각기 다르다 보니, 새로운 개신교파가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개신교는 성경과 전통, 말씀과 성사, 신앙과 선행, 가정생활과 수도생활 중에서 주로 전자(前者)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대조적으로 가톨릭은 양쪽을 포괄하려는 성격이 짙다.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잘 아는 반면 독선적ㆍ배타적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 개신교, 신앙과 인생의 가치를 최대한 수용하는 반면 신앙의 핵심을 놓치기 쉬운 것이 가톨릭이라는 지적은 설득력이 크다.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교회 개혁을 가톨릭이 수용했다면 교회 분열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부질없는 가정이다. 그리스도 신앙의 이해와 실천을 다양하게 한 것은 종교개혁의 순기능이다. 더불어 종교개혁은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는 것을 가장 큰 교훈으로 남겼다. 참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개신교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교훈이다. 남정률 기자 njyul@cpbc.co.kr cpbc2017.03.08

스마트폰 대신 소중한 이의 눈을 마주 보세요「어쩌면 조금 외로웠는지도 몰라」 저자, 미디어 영성가 김용은 수녀어쩌면 조금 외로웠는지도 몰라김용은 수녀 지음애플북스 / 1만 4000원 ‘정보의 백화점’이자 가상의 대화 공간인 스마트폰. 오늘날 현대인은 스마트폰으로 유사 이래 최고의 이기와 혜택을 누리며 산다. 그런데 이처럼 편리한 스마트폰이 삶의 질을 잠식해 가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있는가.어느새 우리는 길에서, 지하철에서 고개를 숙이고 화면 속 세상에만 집중하고 산다. 그런 탓에 가족, 연인과도 ‘함께 따로 있기 삶'을 하고 있다. 초행길도 스마트폰으로 뚝딱 해결하는 사이에 이웃을 돌아보는 시야가 사라졌다. 이러한 모습에 ‘미디어 전문가’인 김용은(살레시오수녀회) 수녀가 새 책 「어쩌면 조금 외로웠는지도 몰라」를 통해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나와 주변을 돌아보라”고 경종을 울렸다.김 수녀는 뉴욕대(NYU) 대학원에서 미디어 생태학을 전공하고 ‘미디어 영성가’로서 20년째 변화된 미디어 환경에 따른 영성적 삶에 대한 연구와 강의를 해오고 있다. 현재 살레시오사회교육문화원 원장인 김 수녀는 변화된 미디어 환경이 자신의 생활 습관도 바꿔놓았다고 고백했다.“스마트폰으로 인해 우리 삶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스마트폰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주인이 돼버렸죠. 그러다 진정으로 해야 할 일, 성찰하고 기도하고 참 대화를 나누는 생활을 점점 잃게 됐습니다. 저도 강의 원고를 준비하거나 쉴 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어요. 이런 변화는 신자들뿐 아니라, 영성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에게도 도전입니다.”책은 미디어 환경에 따라 변화된 우리 삶을 고찰하고 있다. 뚜렷한 목적 없는 스마트폰 사용은 가족, 이웃과 대화할 에너지를 고갈시켰고, 기도와 성경에 깊이 들어갈 집중력도 앗아갔다. 우리는 계속 스마트폰 속으로 숨고 있다.“우리가 외로워서 혼자 있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인 나 자신을 마주하지 못해 외로운 것은 아닐까요. 내면 아이가 가진 외로움을 돌아보고 꼭 안아주세요.”김 수녀는 ‘나와 만나기’로 독자를 인도한다. ‘오늘 얼마나 힘들었니?’,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 힘들었구나!’하는 대화는 나와 관계 맺기의 출발이다. 가상 공간에서 공허한 위로받기에서 벗어나 나와 이야기하다 보면 삶의 에너지가 생긴다. 명상, 기도, 단순 노동, 할 일에 집중하기 등 책에 담긴 작은 실천 사항들은 ‘스마트폰 생활’을 ‘영성 생활’로 안내해 준다.“유아기 때 스마트폰을 접한 아이들은 그림책도 손가락으로 화면 넘기듯 합니다. 주말 내내 스마트폰에 삼매경인 아빠는 아이와 놀아줬다고 여기지만, 아이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아이들은 집중력과 인내력이 저하되고, 교감과 공감 능력도 떨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죠. 스마트폰은 무의식의 욕망을 계속 자극하는 도구입니다. 이를 조절하지 못하면 삶의 경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삶까지 해치게 되는 겁니다.”‘미디어 환경과 축성 생활’이라는 주제로 그동안 수많은 수도회에서 강의해 온 김 수녀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교회, 수도회에도 큰 도전”이라며 “수도회도 뉴미디어 문화에 익숙한 젊은 성소자들의 적응력과 인내심을 문화 코드 안에서 해석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스마트폰 시대의 도래는 문화 현상입니다. 변화된 미디어 환경을 결코 부정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가족 간 대화가 사라지고,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어색해진다면 말이 달라집니다. 이웃과의 대화도 힘든데 하느님과의 대화는 어떻겠습니까. 진정한 우리 삶과 인간성을 돌아보도록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김지항2017.10.18
![[성경 속 도시] (63) 아테네](//cpbc.co.kr/CMS/newspaper/2015/10/rc/596466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63) 아테네우상숭배 만연한 곳에서 복음을 외치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세계적으로 오래된 도시로 지금도 고대 신전과 공공건물로 유명하다. ‘아테네’라는 이름은 이 도시의 수호신이자 지혜의 여신이며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에게 비롯됐다. 아테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 이 도시를 차지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아테네는 서구 문명의 발생지이며 고전 문명과 예술적 사상이 비롯된 곳으로 예술, 학문, 철학의 중심지였다. 아테네가 이룬 문화적ㆍ정치적 업적이 당시 유럽 대륙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고향으로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과거 그리스는 로마와 터키의 지배를 받으며 많은 시련을 겪었다. 아테네에는 고대 유산이 아직 잘 남아 있다. 그중 아크로폴리스 유적지는 아테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이곳은 고대 그리스 도시의 중심이 됐던 곳이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는 미케네 시대(기원전 1400~1200) 성벽 유적과 파르테논 신전과 에렉테움 신전, 니케 신전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테네의 상징인 파르테논 신전도 2500여 년 세월 동안 다른 그리스 신전처럼 때로는 그리스도교 교회로, 때로는 이슬람 모스크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됐다. 파르테논 신전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으로 보이는 헤로데스 아티쿠스 오데온 야외극장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오늘날에도 다양한 연주회와 연극 공연이 열린다고 한다.성경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제2차 선교 여행 때 아테네에 도착해 보니 우상숭배가 너무 심한 곳이라 선교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오로는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그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사도 17,16). 아테네는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있을 정도로 우상숭배가 심한 도시였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사도 17,23).매일 거리에서 유다인과 헬라인을 막론하고 복음을 전하려 애썼지만 그들 중 일부만 바오로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사도 17,34).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에서 디모테오와 실라를 기다리는 동안 이 도시를 살펴보며 복음을 전하다 당시 철학자들과 논쟁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바오로 사도는 많은 박해와 오해를 받게 됐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제2차 선교 여행으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예루살렘과 온 유다 지방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계획이 이뤄진 것이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10.06
![[시사진단] ‘인권경영’의 시대 -이성훈(안셀모, 경희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 교수)](//cpbc.co.kr/CMS/newspaper/2017/10/rc/698608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 ‘인권경영’의 시대 -이성훈(안셀모, 경희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 교수)이성훈 (안셀모, 경희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 교수 겸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 ) 시대가 바뀌면 시대정신도 달라진다. 문재인 정부가 임기 중 실현하겠다고 채택한 100대 국정과제에는 ‘평화, 민주주의 및 인권’이라는 시대정신이 녹아 있다. 또한, 지난 5월 25일 대통령 업무지시 7호로 발표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상 강화’라는 권고도 관련 부처가 국가인권위 권고를 제대로 이행하는지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보고받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에 따라 정부 부처들은 그간 국가인권위가 채택한 권고안 중 자기 부처에 해당하는 내용을 파악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자연스럽게 ‘인권 경영’이 주목을 받게 됐다. 최근 일부 기업 대표의 이른바 ‘갑질 행태’와 가습기 살균제 사건, 고질적 뇌물 연루 사건 등을 통해 기업의 ‘비정상적’ 행태가 확연히 드러나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된 것도 인권경영이라는 화두와 무관하지 않다. 국가인권위는 이미 지난해 정부를 상대로 인권경영을 반영하는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을 권고했고 그 이전에도 공공기관에 ‘인권경영’을 도입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이에 부응해 법무부는 5년간 시행할 제3차 기본계획에 인권경영을 반영했고, 기획재정부는 해마다 시행하는 공공기관 경영 평가에 인권경영을 반영하는 방안을 준비 중이다. 상황이 변하자 지금까지 인권과 무관한 듯 지내던 다수 공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경영 평가 결과는 기관의 성과와 평판뿐 아니라 기관장 연임, 성과급 액수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를 예견하고 준비한 기업이 적지 않다. 이미 25개 공기업이 인권경영을 선포하고 실천에 착수했다. 인권경영 관련 교육과 훈련 및 자문을 수행해 온 필자의 인권재단에도 최근 문의와 도움 요청 건수가 크게 늘고 있다. 인권경영은 크게 인권경영 선언과 인권경영 시스템 구축, 인권침해 구제 절차 등 세 축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인권은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유엔에서 합의된 원칙이자 구체적 조항을 말한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이후 제정된 수많은 국제인권조약을 물론이고 가장 최근에,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2011년 유엔 인권이사회가 채택한 ‘기업과 인권 이행 원칙’이 있다. ‘인권경영의 바이블’에 해당하는 31개 원칙은 ‘보호, 존중 및 구제 프레임워크’라고 부르는데 핵심은 실사(Due diligence)라고 부르는 제도에 있다. 실사는 인권영향평가 등 인권침해를 예방하기 위한 조처를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실정법 위반 여부를 중시하는 ‘준법경영’이나 사회적 통념과 윤리 기준을 고려하는 ‘윤리 경영’의 한계를 넘어 유엔을 통해 국제사회가 합의한 인권기준을 실질적으로 준수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인권경영은 국내에서 아직 생소하다. 하지만 국제사회, 특히 유엔과 유럽에서는 이미 ‘상식’이자 보편적 기준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가입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이미 ‘기업책임경영’ 정책을 통해 이행 원칙 실천에 앞장서 왔고, 미국과 유럽 대다수 국가는 이를 이행하기 위한 국가인권계획을 이미 수립했다. 이제 유럽 등지에서 사업을 수행하는 기업은 인권경영을 모르거나 실행하지 않고서는 사업 자체가 어려워지거나 아예 불가능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게 됐다. 지금은 공기업이 주 대상이지만 민간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일부 민간기업은 드러내지는 않지만, 인권경영을 준비하거나 실천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병원과 학교, 사회복지기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 또한 당연히 인권경영의 대상이 된다. 인권은 ‘세속화된 복음’으로 성경의 가치가 세상의 언어로 구체화한 것이다. 교회에 속한 기업이 인권경영 시대를 모범적으로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평화신문2017.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