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도시] (34) 아이](//cpbc.co.kr/CMS/newspaper/2015/01/rc/54975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34) 아이승리의 나팔 불던 여호수아, 넘어지다 아이 왕의 처형을 그린 ‘콘스탄티노폴리스 모세팔경’의 세밀화, 11세기, 바티칸 박물관, 로마. 아이는 여호수아가 두번째로 공격한 도시로 패전의 아픔을 맛본 곳이다. 출처=「성경 역사 지도」(분도출판사)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을 건너 예리코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뒀다. 여호수아는 예리코를 아주 잔혹하게 파괴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소와 양과 나귀 할 것 없이, 성읍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칼로 쳐서 완전 봉헌물로 바쳤다”(여호 6,21). 이렇게 예리코를 철저하게 파괴한 이유는 가나안 지역에 이러한 소식을 전해 공포심을 조장하려는 심리적 이유가 강했다고 추측된다. 여호수아가 택한 다음의 전략적 요충지는 베텔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하려면 남북을 가로지르는 산맥을 선점해야 했기 때문이다. 산맥을 차지하게 되면 나라를 가로지르는 통로뿐 아니라 보병뿐인 이스라엘군이 전차를 대동하고 있는 가나안 병사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군에게 산맥은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여호수아는 산맥에 있는 고개 지역을 중심으로 가나안 지역의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려는 계획이었다.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북쪽 16㎞ 거리의 베텔은 산맥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있었다. 여기를 장악하면 가나안의 중추를 장악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베텔에 이스라엘이 주력군을 보내기 전에 소규모 정찰대를 보냈다. 정찰대는 예리코 성에서 서북쪽 10㎞쯤에 있었던 아이 성을 발견한다. 아이는 1000년 전만 해도 강력한 도시였다. 정찰대는 돌아와서 아이 성이 정복하기 쉽다고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백성이 다 올라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천 명이나 삼천 명쯤만 올라가도 아이를 칠 수 있습니다. 저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으니, 온 백성을 그리로 가게 하여 고생시킬 필요가 없습니다”(여호 7,3). 그리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삼천 명쯤이 그리로 올라갔지만 그들은 아이 사람들 앞에서 도망쳤다. 일부 성서학자들은 예리코에서 대승을 거두고 방심한 이스라엘이 매복한 적 군사에게 당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군은 첫 패배를 했다. “아이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에서 서른여섯 명을 쳐 죽이고, 성문 앞에서 스바림까지 뒤쫓아가 내리막에서 그들을 쳐 죽였다. 그러자 백성의 마음이 녹아내려 물이 되어 버렸다”(여호 7,5). 성경은 여호수아의 첫 패배의 원인이 전리품을 챙기지 말라는 아칸의 범죄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아칸은 죽임을 당한다(여호 7,24~26). 여호수아는 즉시 아이 성을 공격하면서 일부 병사들을 아이 서쪽으로 보내 베텔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게 했다. 그리고 아이 성 앞으로 백성들을 데리고 접근하여 아이 성 안의 병사들을 유인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패배하는 척하고 광야 쪽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성읍 안에 있던 모든 백성이 성읍을 열어 놓은 채 이스라엘인들을 뒤쫓았다. 이 틈을 타서 매복병들이 아이 성을 점령하고 불을 질렀다. 결과적으로 성을 떠난 아이 성읍의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아이의 임금은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여호 8,1-29).오늘날 이 지역은 아랍인들만 사는 가난한 농촌이며 지금은 산 언덕 위에 돌무더기만 남아 있다. 아이 성의 전투는 여호수아의 뛰어난 전략이 돋보였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많은 교훈을 안겨줬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1.13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9.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cpbc.co.kr/CMS/newspaper/2017/03/rc/674229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9.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마사초 작 ‘성 삼위일체’, 1426년쯤,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가톨릭굿뉴스 제공 예수님 부활 예언 이해 못한 제자들스승 잡혀갈 때와 사형 순간에도 부재십자가 위에서 남긴 말 ‘가상칠언’복음서 통해 모든 신앙인에 전파사형선고를 받은 예수님은 해골터라 불리는 골고타를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로마의 형벌이었던 십자가형은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십자가에 처형된 이는 적게는 서너 시간 동안 그리고 길게는 하루가 넘도록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한때 예수님에 대해 역사적인 연구, 곧 실제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어떠했는지 따져보았던 연구에 따르면 십자가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질식 상태로 죽어 가는 형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에 대한 언급은 공관 복음과 요한복음이 조금 다릅니다. 요한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준 시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날은 파스카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요한 19,14) 반면에 마르코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마르 15,25) 이와 함께 공관 복음은 낮 열두 시가 되어 어둠이 온 땅을 덮었고 예수님은 오후 세 시쯤 숨을 거두셨다고 전합니다. 공관 복음이 전하는 시간에 대한 언급이 좀 더 적절한 것처럼 보입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모아 ‘가상칠언’,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 이러한 전통은 하인리히 슈츠나 요셉 하이든과 같은 작곡가들에 의해 곡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복음서마다 조금 다른, 십자가 위에서의 말씀은 마치 제자들과 신앙인들을 향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목마르다.”(요한 19,28)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죽음 시각이 유다인들의 9시, 지금의 오후 3시쯤이라고 전합니다. 다음날은 안식일이어서 유다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을 무덤에 모십니다. 공관 복음과 요한복음이 공통으로 언급하는 사람은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이자(마태 27,57) 의회 의원으로(마르 15,43) 착하고 의로운 이였다고(루카 23,50) 복음서들은 전합니다. 요한복음은 그가 이미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고 말합니다.(요한 19,38) 이렇게 예수님의 드라마는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많은 사람은 이것이 모든 사건의 끝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에도 그와 함께 있지 못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공관 복음서는 예수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표현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또한 그런 예수님의 죽음을 멀리서 바라보던 이들은 모두 여인들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마르 15,41) 요한복음에서 요한 사도가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 어디에도 제자들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여인들만이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면 애통해 할 뿐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드러나게 예수님과 활동을 했기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지만, 복음서들은 제자들의 부재(不在)를 통해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말씀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의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김지항2017.03.08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글라스] <20>](//cpbc.co.kr/CMS/newspaper/2016/06/rc/640763_1.0_titleImage_1.jpg)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글라스] 서울 명동주교좌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하> VIDIUS ENIM STELLAM EJUS IN ORIENTE VENIMUS ADORARE EUM(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EUNTES DOCETE OMNES GENTES BATIZANTES EOS(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라-마태 28,19).위의 문장은 서울 명동주교좌성당 트렌셉트(transept) 스테인드글라스 하단에 쓰여 있는 라틴어 성경 구절이다. 명동대성당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한국의 대표적인 성당이지만 그곳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스테인드글라스 연구를 진행하면서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한 성당에서 100컷 이상의 많은 사진을 촬영하곤 한다. 큰 그림, 작은 그림, 아주 자세한 디테일까지 두 다리를 삼각대 삼아 촬영하고 컴퓨터 모니터로 관찰해 가다 보면 예기치 못했던 서명이나 문구, 독특한 문양 등을 발견하게 된다.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전반에는 포도나무 잎과 단풍나무 잎 등이 즐겨 사용됐다. 이는 장식 역할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표현된 것이다. 명동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구상과 추상적 표현이 함께 이루어져 있다. 앱스 쪽에 다섯 개의 긴 창에 표현된 ‘로사리오 십오 현의도’와 트렌셉트 양쪽 창의 ‘성탄과 삼왕 경배’,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는 프랑스에서 작품이 수용된 19세기 말 유럽에서 유행했던 양식대로 인물과 풍경이 묘사된 구상적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밖에 신자석 측창들(아케이드, 클리어스토리의 창)을 비롯한 나머지 창들은 포도 잎, 떡갈나무 잎, 백합 등을 모티프로 한 간결한 구성의 그리자유(회색계통으로만 그리는 회화기법, grisaille) 기법으로 구성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전반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모티프인 포도나무 잎은 떡갈나무, 단풍나무 잎 등과 함께 중세 그리자유 창에서 즐겨 사용되던 나뭇잎 문양이다. 이러한 나뭇잎 문양은 스테인드글라스의 장식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포도는 성경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된 비유로 하느님과 인간의 긴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 이러한 포도 잎이 신자들의 시선이 가깝게 닿을 수 있는 아케이드 창의 문양으로 쓰이고 있는 것도 인간과 하느님을 이어주는 일종의 매개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동일한 그리자유 창이지만 성당 상부 클리어스토리의 창들은 도식화된 백합 문양으로 채워져 있다. 백합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꽃으로 가시관 한가운데의 백합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클리어스토리 스테인드글라스의 백합 문양은 명동대성당의 수호성인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모님을 상징하는 백합 문양을 아케이드보다 높은 클리어스토리에 둔 것은 ‘천상의 모후’로서의 성모님의 이미지와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도 중세의 거대한 장미창은 아니지만 작은 장미창들이 놓여 있다. 모두 8개의 꽃잎으로 나뉜 장미창에는 물고기 형상을 한 포도 잎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상징에서 숫자 8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8일째 되는 날 무덤에서 부활했으므로 ‘부활’을 상징하는 수이고, 물고기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 고백’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 따라서 명동대성당의 장미창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명동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들을 찬찬히 살펴볼 기회가 없었던 분들에게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스테인드글라스를 새로운 시선으로 대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의 제작자 서명은 어느 위치에 몇 개가 남아 있을까? 장미창은 총 몇 개이며 글 서두에 언급했던 라틴어 성경 구절은 어디에 자리하고 있을까? 떡갈나무 잎과 포도 잎, 백합은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표현되었는가?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창을 하나하나 관찰하면서 그냥 스쳐 지나갔던 나뭇잎, 꽃 한 송이의 그리스도교적 상징과 의미에 대해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백영민2016.06.15
![[말과 침묵] 닭을 위한 진혼곡](//cpbc.co.kr/CMS/newspaper/2017/01/rc/668576_1.0_titleImage_1.jpg)
[말과 침묵] 닭을 위한 진혼곡김소일 세바스티아노 보도위원 태어나서 한 번도 하늘을 보지 못했다. 시원한 바람도 쐬어 본 적 없다. 내 사는 곳은 무창계사. 창문이 없는 사육시설을 그렇게 부른다. 내가 딛고 선 발판은 흔한 종이 한 쪽보다 작다. 나는 모이를 쪼고 알을 낳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의 세상엔 해가 뜨고 별이 지는가? 여기선 강렬한 인공조명이 낮과 밤을 정한다.이따금 계사의 문이 열릴 때 그 틈새로 세상을 본다. 그곳엔 구름이 흐르고 들판이 펼쳐지고 삽살개가 지나간다. 흔들리는 아카시아 잎을 볼 때는 내 가슴에도 바람이 인다. 아는가? 우리에겐 원래 왕족의 피가 흐른다. 일찍이 숲 속에서 알을 품어 천년 왕국의 탄생을 알렸다. 새벽을 깨우는 고고성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우리의 몫이었다. 이 땅에 오신 성자가 수난을 당할 때 베드로의 마음을 흔들어 깨운 것도 우리 선조였다.우리는 ‘볏을 가진 족속’이다. 붉게 솟아오른 수탉의 볏은 왕관보다 화려하다. 윤기 흐르는 깃털은 햇빛을 튕겨내고 꽁지깃은 휘어져 난초처럼 우아하다. 고개를 한껏 치켜든 채 늠름하게 걷는 수탉을 본 적이 있는가? 겁을 모르는 눈과 날카로운 부리까지 갖췄으니 가히 문무를 겸비했다. 성경에도 있지 않은가? ‘당당하게 발을 옮기는 것이 셋이 있으니, 동물의 왕 사자, 꼬리를 세우고 걷는 수탉, 양떼를 거느리고 가는 숫염소’(잠언 30,29-31)라 했다.기억하는가? 우리가 홰를 치며 날아오르는 모습을. 한낮에 담장이나 지붕 위로 날아올라 금빛 울음을 토하면 한순간 우주가 숨을 멈추곤 했다. 우리의 수명 또한 잘 모르리라. 나는 산란계라 1년은 넘게 산다. 2년 채우기는 어렵다. 육계는 그저 한 달이 무섭게 팔려나간다. 행여 그것이 우리의 자연 수명이라 착각하진 말아다오. 야생에서 우리 종족은 20년 넘게 사는 일도 흔하다.무슨 소용인가? 1년이든 한 달이든 무슨 차이란 말인가? 이 지옥 같은 창살 속에서 차라리 죽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이제 거대한 떼죽음의 파고가 덮쳤으니 이것은 재앙인가 축복인가? 정유년 닭의 해가 밝아오는데 당신들은 집단 도살의 광기를 부린다. 이른바 ‘살처분’의 이름으로 삼천만 마리 넘는 우리 일족에게 죽음을 안겼다.나 이제 산 채로 구덩이에 떨어져 마지막으로 하늘을 본다. 그토록 보고 싶던 하늘은 잿빛이더라. 레퀴엠의 선율은 들리지 않더라.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 재판도 없이 / 매질도 없이 /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김혜순) 아아, 눈물 따윈 흘리지 않으리라. 차라리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리라. 쏟아지는 흙비 속에서 나는 그분의 기도를 읊는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듣노라.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4-5)두려워 말라. 너희 몸속에 내가 있노니 우리는 한 생명이다. 나는 ‘치맥’과 삼계탕과 계란찜으로 너희 속에 있고 빵과 포도주로 거듭나 다시 한 몸을 이룰 것이다. 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죄악을 감춘 땅 위로 꽃 한 송이 피어나리니 그 선홍빛 꽃잎을 보거든 부디 이 순환의 법칙을 기억해다오. cpbc2017.01.18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3주일 (마태 4,12-23)](//cpbc.co.kr/CMS/newspaper/2017/01/rc/668403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3주일 (마태 4,12-23)정연정 신부
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주임 오늘 교회는 연중 제3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어떻게 실현됐는지를 알려줍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로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빛 속에 살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하늘 나라에 좀 더 가까이’(마태 4,17 참조)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야 하겠습니다.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본 큰 빛(이사 9,1 참조)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갈릴래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비옥해서, 예로부터 이곳을 탐낸 이민족(異民族)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이사 8,23; 마태 4,15)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다인들은 갈릴래아를 부정(不淨)한 땅(요한 7,52 참조)으로 취급했으며, 좋은 것이 나올 수 없는 곳(요한 1,46 참조)으로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이 갈릴래아에 속했다는 사실에서 하느님의 역사(役事)와 섭리의 오묘함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루카 4,14-16 참조)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에게 땅은 얼마나 필요한가?」에 등장하는 파홈이라는 소작농은 내기를 통하여 큰 땅을 차지하게 됐지만, 결국 그는 죽음이라는 더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의 욕심, 곧 그의 삶 안에 드리웠던 어둠과 암흑이 참 빛과 참 생명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의 말씀처럼, 인간은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이사 9,3 참조)가 주님 안에서만 부서지고 해결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로지 주님만이 우리의 메시아가 되십니다.2.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1코린 1,17)갑작스러운 황반 현상 때문에 시신경에 이상이 와서 한쪽 눈이 못 보게 된 자매님의 말씀이 새삼 떠오릅니다. “지금 저는 다른 한쪽 눈마저도 형체만 뿌옇게 볼 수 있는 처지지만, 모든 것을 깨끗이 낫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제가 다시 보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매님을 통하여, 우리가 궁극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됐습니다.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우리의 삶을 늘 살피자고 권고합니다. 사실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사랑의 상징입니다. 또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신실한 사랑의 은약(恩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어떤 처지에서도 절대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용기를 일으켜줍니다.3.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려고(마태 4,14 참조)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公生活)에 대하여 전해줍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래아라는 것에서 그 의미가 새롭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들이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중요시하던 예루살렘을 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많은 이들로부터 멸시당하고 따돌려졌던 이른바 변방(邊方) 갈릴래아를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고 정신입니다. 아울러 갈릴래아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르기로 응답한 곳입니다. 그러기에 두 사도에게 갈릴래아는 ‘영적 본향(靈的本鄕)’과 같은 의미였습니다.4. 무엇이 중요한가요?지금 우리에게 갈릴래아는 어떤 의미입니까? 자신을 드리웠던 어둠을 뚫고 비로소 빛이 들어왔다면, 우리도 사도들이 갈릴래아를 떠올리며 느꼈던 뜨거운 마음을 공분(共分)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안 계신다면 삶이 같지 않다는 것을 마음으로”(「복음의 기쁨」 121항) 늘 새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평화신문2017.01.18
 예리코](//cpbc.co.kr/CMS/newspaper/2015/01/rc/548661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33) 예리코지도자 여호수아의 첫 승전지 유혹의 산에서 내려다본 예리코 전경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지도자는 여호수아가 되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르단을 건너 하느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다(여호 1,1-2). 영리한 지도자이며 뛰어난 전술가였던 여호수아가 요르단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면서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한 지역이 바로 예리코이다. 예리코는 현지 아랍인들은 ‘아리하’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예루살렘 북동쪽 36km에 위치하고 요르단 강과 사해가 합류하는 북서쪽 15km 지점에 있다. 예리코는 지중해 해면보다 250m나 낮은 지역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도시다. 이 지역은 각종 과실수가 우거진 오아시스로, 예로부터 종려나무 성이라 불러왔다. 본래 요르단 영토였던 예리코는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후 이스라엘이 장악하고 있다. 고고학계에 발견된 증거에 따르면 예리코는 약 1만 년 전에 이미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있다. 이처럼 예리코는 세계 역사에서도 유명한 도시다. 기원전 8000년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 최초의 도시이기도 하다.예리코는 한 부족이 살다 다른 부족이 침입해 먼저 살던 도시와 성벽을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살고, 또 다른 부족이 침입해 들어와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이렇게 수천 년이 지난 결과로 고대 도시가 있던 자리가 점점 높아져 커다란 언덕을 형성하게 됐다. 지금도 예리코의 서쪽 편에는 폐허가 된 헤로데의 겨울 궁전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 지역은 로마의 안토니우스(기원전 83~30)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했으며, 클레오파트라는 예리코를 헤로데에게 팔았다. 헤로데는 겨울에 와서 머물 궁전을 짓고 극장, 목욕탕, 수영장, 화려한 정원을 만들어 여기서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성경에 의하면 기원전 14세기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예리코 성이 함락됐다. 성경은 예리코 함락 과정을 기적처럼 묘사하고 있다.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여호수아는 사람들로 성을 에워싸게 한 다음 사제들에게 숫양뿔나팔을 불며 언약궤를 가지고 성 주변을 돌게 했다. 나팔 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자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실제로 예리코에는 석벽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예리코를 점령한 이스라엘인들은 성을 완전히 파괴하고 남녀노소할 것 없이 도시의 주민을 모두 죽였다. 아마도 공포심을 조장해 주변 도시를 쉽게 정복하려는 전략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미리 침투해서 이 지역을 정탐한 이스라엘 첩자들을 숨겨준 공로가 있는 매춘부 라합과 그녀의 가족만 목숨을 부지했다(여호 6,1-27참조). 이 전투 과정에서 여호수아는 모세가 준 지침을 충실히 지키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일치 단결시켜 가나안 정복에 나서는 매우 이상적인 지도자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인에게 함락된 뒤 오랫동안 저주가 내려져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 돼버린 예리코는 기원전 9세기 베텔의 히엘이 재건했다(1열왕 16,34). 신약에서 예수님은 예리코를 지나던 중 맹인을 치료하고 회개하는 세리 자캐오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마태 20,29). 예루살렘과 예리코를 잇는 좁은 도로는 강도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1.06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40) 138. 만왕의 왕<상>](//cpbc.co.kr/CMS/newspaper/2016/11/rc/659701_1.0_titleImage_1.jpg)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40) 138. 만왕의 왕1562년판 「제네바 시편집(Genevan Psalter)」. 138번 성가는 종교개혁이 발생하던 때 세상에 나온 곡이다. 당시 우리 교회는 전례를 거행할 때 라틴어로 된 그레고리오 성가를 불렀는데, 대부분 성직자나 수도자들 혹은 다성음악을 훈련받은 전문 합창단이 노래했다. 당연히 라틴어를 교육받은 바 없는 일반 신자들은 짧은 노래들을 외우고 있지 않는 한 성가에 참여할 수 없었다.종교개혁 주역 중의 한 명이었던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예배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성경의 시편을 자기들 언어로 함께 노래할 수 있도록 여러 시도를 했다. 가령 특별한 박자가 지정되어 있지 않은 그레고리오 성가를 박자가 있는 곡으로 바꿔 부르기 쉽게 만들거나, 일반 세속 곡의 선율 혹은 새로 창작된 선율에 시편 가사를 붙이는 시도를 했다.사실 그는 예배 중에 부르는 노래에 상당히 엄격한 정책을 취했는데, 어떠한 악기의 사용도 금지했으며 따라서 노래도 무반주로 화음 없이 선율만 노래하도록 했다. 당시 나온 악보 중 화음이 붙어 있는 악보는 예배 이외의 모임에서 부르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찬송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라틴어로 된 시편을 자기네 언어, 즉 일반 대중들이 쓰는 프랑스어로 번역해야 했고, 여기에는 시인 마로(Clment Marot, 1496~1544)와 신학자 베제(Theodore de Beze, 1519~1605)가 큰 역할을 했다.이렇게 해서 1533년에서 1543년 사이에 시편 가사로 꾸며진 성가집들이 나오게 됐다. 이 책들은 개신교 찬송가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제네바 시편집(Genevan Psalter)」이다. 최종적으로 150편의 시편이 집대성돼 완간된 것은 1562년이었으며 여기에는 ‘시메온의 노래’가 포함돼 있었다. 이 시편 찬송가집에는 여러 작곡가의 선율이 수록됐는데, 138번 성가의 선율도 그중 하나였다. 이 선율의 작곡자는 부르조아(Loys Bourgeois, 1510~1560)다.이 선율은 ‘Old 100th’라는 이름으로 1551년 출판된 「제네바 시편집」 두 번째 판에 처음 등장한다. 이 이름은 시편에서 유래했는데, 본래 시편 134편이 가사로 수록되어 있었지만, 프랑스어로 된 「제네바 시편집」을 영어로 번역한 이들 중 한 명인 케쓰(William Kethe,)가 ‘땅 위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아’(All People that on Earth do Dwell)라는 제목으로 시편 100편을 바탕으로 한 가사를 붙여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이 찬송가는 영국의 작곡가 본 윌리엄스의 편곡으로 1953년 영국의 엘리자벳 2세 여왕의 즉위식에서 불렸다. 하지만 후에는 여러 다른 가사가 붙기도 했다. <가톨릭대 교회음악대학원 교수> 김지항2016.11.09
![[이 땅에 평화] 저출산 문제?다둥이 가족을 만나다](//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2947_1.3_titleImage_1.jpg)
[이 땅에 평화] 저출산 문제?다둥이 가족을 만나다아이들 웃음소리가 인생의 선물이죠 즘 주변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다자녀 가정을 만났다. 여섯 자녀를 둔 박상근(시몬, 수원교구 안양 중앙본당)ㆍ박옥희(프란치스카 로마나)씨 가정과 전북 순창에서 농사를 지으며 다섯 자녀를 둔 김기열(이냐시오, 전주교구 순창본당)ㆍ전명란(클라라)씨 가정이다. 두 가정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자 소중한 생명인 자녀들을 통해 더욱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평신도 선교사 아빠, 평범한 가정주부 엄마와 여섯 자녀?박상근ㆍ박옥희씨 가정 “하느님께 감사하다는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박상근(시몬, 49)씨는 “일하다가도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해져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고 고백했다. 경기도 안양에서 부엌가구 제조공장을 운영하는 박씨는 “20여 년 전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안양에 와 아내를 만난 것부터 IMF 시절 큰 빚을 내 시작한 사업이 승승장구한 것, 여섯 자녀와 행복한 가정을 이룬 것 등이 주님의 은총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고해성사를 보고 7년 넘게 이어오던 냉담을 풀고 미사에 참여하고 나오다 아내를 만났다. 이후 그는 아내와 함께 청년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활동하며 사랑을 키웠다. 결혼 후 남편은 부엌가구 공장을 차렸다. 많은 회사가 줄줄이 부도로 쓰러지던 때였지만, 사업은 날개가 달린 듯했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그를 괴롭혀온 가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자녀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낳았다. 셋째, 넷째…. 부부가 아이를 계속 낳자 친척들이 아내에게 낙태수술을 권했다. ‘무식한 여자’라는 소리까지 했다. 그럼에도 부부는 “하느님 뜻대로 낳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론 누구도 나무라지 않았다. 박씨는 7년 전 수원교구 하상신학원을 졸업하고 평신도 선교사가 됐다. 현재 수원교구 성령쇄신봉사회에서 자신의 신앙체험을 전하는 ‘말씀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매일 온 가족이 함께 아침ㆍ저녁 기도를 바치고, 사순 시기에는 매일 ‘십자가의 길’을 봉헌한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 힘입어 유치원 교사인 장녀 슬기(마리아, 21)씨는 4년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고, 지금은 평일 미사 반주자로 봉사한다. 미사 때 복사를 서는 넷째 비오(비오, 중1)군은 사제가 꿈이다. 아내는 “하느님께선 나약한 존재인 저를 아이들을 통해 엄마로서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신 것 같다”면서 “덕분에 제가 가족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셨다”고 감사해 했다. 남편은 “큰딸이 첫 월급을 받고는 ‘하느님께 감사헌금을 봉헌하겠다’고 했을 때 자녀를 신앙의 길로 이끈 큰 보람을 느꼈다”며 “자녀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면 하느님은 아이들을 당신 뜻대로 이끄신다는 것을 늘 체험하고 있다”고 웃음 지었다. 장녀 슬기씨에게 결혼해서 자녀를 몇 명 가질 것인지 물었더니 “마음으론 3~4명을 낳고 싶은데, 현실적으론 2명 정도일 것 같다”며 부끄러운 듯 웃었다. 다섯째 민희(오틸리아, 초5)양은 “우리 집엔 언니 오빠, 동생이 모두 있어서 외로울 틈이 없다”고 밝게 웃었다. 귀농한 뒤 자식 농사도 풍년?다섯 자녀 둔 김기열ㆍ전명란씨 가정 순창군 풍산면 두승리에 있는 미나리 농장인 ‘가이아 농장’ 공동대표 김기열ㆍ전명란씨 부부는 도시에 살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김씨는 20여 년 전 서울 방이동에서 학습지 영어 교사였고,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전씨는 서울 강남의 건축설계사 사무소 직원이었다. 경기가 어려워지자 영어 교사를 그만둔 김씨는 친구의 권유로 전주의 한 식물원에 입사했다가 농장에서 일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이 무렵 두 사람은 각자 떠난 보길도 여행길에서 만났다. 2000년생인 맏딸 예진(파우스티나, 고3)양이 돌이 됐을 무렵, 부부는 순창으로 귀농했다. 순창은 김씨의 고향. 두 사람 다 전라도 출신이긴 하지만 농사의 ‘농’자도 모르던 초보 귀농인이었다. 그런 부부에게 하느님은 수확의 기쁨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3300㎡(1000평) 땅에 고추 농사를 지었지만 4~5년간 실패만 거듭했다. 섬진강 변의 축축한 땅에 고추를 심으니 여름이면 물이 넘쳐 썩어 문드러졌다. 다시 도시로 가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끼니를 거르는 날이 있었을 정도였다. 2002년생인 둘째 고은(로엘라)양과 셋째 민서(임마누엘)양이 4년 터울인 것도 그만큼 그 시절이 어려웠다는 증거(?)다. 보다 못한 이웃 어르신이 습지에서도 잘자라는 미나리 농사를 권했다. 다행히 이듬해 봄, 새싹이 돋아났다. 부부는 감사기도를 드렸다. 미나리 농사를 지으면서 농장은 번창했다. 집안에선 아기 울음이 계속 이어졌다. “원래 하나나 둘만 낳으려 했어요. 그러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낳자고 마음을 바꿨지요. 시골에 오니 자연이 주는 편안함 덕분에 마음도 넉넉해진 것 같아요. 게다가 아내가 아이를 무척 좋아해요. 막내는 우리 집 활력소입니다.”(남편) 부부는 가족을 ‘가장 작은 사회’라고 말한다. 형제자매가 많은 집안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작은 사회 속에서 서로 배운다. 소소하게 싸우고 양보하면서, 마음에 상처도 주고받으면서 사회생활을 연습한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은 것도 공부가 될 수 있고, 부모의 사랑을 쪼개고 나눠 받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양보하고 사랑을 나눌 줄 아는 방법도 체득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레 공동체 일원으로서 서로 존중하며 사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 부부의 경험이다. 부부는 신앙적으로도 큰 체험을 했다. 2011년 부부가 트럭에 미나리를 가득 싣고 납품을 가다 차가 미끄러졌다. 낭떠러지에서 차가 떨어지려는 순간, 마주 오던 본당 신자 차량과 부딪쳐 목숨을 건졌다. 차는 처참하게 부서졌다. 남편은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아내는 골반을 다쳐 한 달간 병원 신세를 졌다. “입원해 있는데 눈물이 막 쏟아졌어요. 주임 신부님과 수녀님, 신자들도 문병을 와 주셨지요. 성경을 읽다가 ‘하느님의 은총’이란 말씀이 뇌리에 박히더라고요. 앞으로 전과 다른 삶을 살라는 하느님의 경고 같았지요.”(아내) 사고 이후 부부는 완전히 새롭게 거듭났다. 완전히 냉담했던 남편도 애령회장(연령회장)과 성가대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지난 2년간은 전주 가톨릭농민회 순창분회장으로도 봉사했다. 형제자매가 많은 것에 대해 둘째 고은(중3)양은 “요즘은 시골에도 자녀가 거의 한두 명인데 혼자인 친구들은 집에서 스마트폰을 주로 하고 놀지만 우리 집은 언니 동생들과 함께 물놀이도 하며 재밌게 지낸다”고 즐거워했다. 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문채현2017.05.24
![[성경 속 도시] (37) 에벤 에제르](//cpbc.co.kr/CMS/newspaper/2015/03/rc/557991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37) 에벤 에제르주님께 감사하며 기념비를 세우다 에벤 에제르는 이스라엘의 아펙 근처의 한 마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펙에 진을 치고 있던 필리스티아인을 맞아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필리스티아인들이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주로 지중해 해안 평야가 정착지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주로 중앙 산지에 정착하였다. 해안 평야에 정착한 필리스티아인들과 산지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충돌했다. 이 두 민족끼리 치른 중요한 전쟁이 사론 평야와 에브라임 산지의 경계 지역인 아펙과 에벤 에제르에서 일어났다. 이 전쟁들은 이스라엘의 국가 체제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사무엘의 말은 그대로 온 이스라엘에 전해졌다.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러 나가 에벤 에제르에 진을 치고, 필리스티아인들은 아펙에 진을 쳤다”(1사무 4,1).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실로로 사람을 보내어 그곳에서 ‘계약 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게 했다. 이 계약 궤란 양편에 황금의 두 천사가 날개를 편 상(像)이 놓여 있는 네모난 상자를 말한다. 구약 시대 모세가 받은 십계 판을 이 상자에 담아 성막에 보관했다. 왕조 시대 이전에는 전쟁의 수호신 등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게 된다. 광야는 위험한 곳으로 식량과 물 부족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 이민족의 침입과 질병 역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부딪쳐야 할 두려움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주님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계약 궤는 이스라엘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백성은 실로에 사람들을 보내어, 거기에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왔다.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하느님의 계약 궤와 함께 왔다”(1사무 4,4). 이스라엘은 계약 궤가 승리를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두 번째 전쟁에서도 대패했다. 설상가상으로 계약 궤마저 탈취당하고 말았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이렇게 싸우자,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도망쳤다. 이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군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으며,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1사무 4,10-11).그 후에 필리스티아인들이 하느님의 궤 때문에 벌을 받게 되고(1사무 5, 1-12 참조)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다시 계약 궤를 되찾아 온다. 본래 주님의 계약 궤 상자는 시나이 산에서 제작된 후, 길갈에 안치됐고 이는 다시 베델, 실로를 거쳐, 잠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겼다(1사무 4,11). 그후 다윗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그리고 솔로몬은 성전 지성소(1열왕 6,19)에 이를 안치했다. 이스라엘이 계약 궤를 되찾은 후 예언자 사무엘은 기념비를 세우고 ‘에벤 에제르’라고 불렀다. “사무엘은 돌을 하나 가져다가 미츠파와 센 사이에 세우고, “주님께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며, 그 돌의 이름을 에벤 에제르라 하였다”(1사무 7,12).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있을 때 이것을 기념하고 후대에 기억하기 위해 돌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구약에 자주 나타난다. 에벤 에제르는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인을 이긴 후 도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세운 기념비의 이름이며, 이후에 그곳 지명이 된 경우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3.0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23) 5세기 ④ - 브리타니아 선교와 켈트족 영성](//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0384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23) 5세기 ④ - 브리타니아 선교와 켈트족 영성켈트족, 이교도에서 복음 전파의 첨병 되다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미국 동북부 지역은 매년 3월 17일이면 온통 초록색 물결로 뒤덮입니다. 아일랜드 국경일이자 ‘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아일랜드 주교 파트리키우스(Patricius Hibernorum, 389경~461/92?)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면서 아일랜드 복음화 업적으로 아일랜드 교회의 아버지이자 수호성인으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런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브리타니아 복음화 과정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켈트족(Celts)’을 이해해야 합니다.탁월한 종교 심성을 지닌 켈트족혹시 ‘아스테릭스(Asterix)’라는 만화를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마법 물약을 먹으면 힘이 강해지는 아스테릭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며, 기원전 로마군과 싸우는 갈리아 지역 켈트족 이야기를 다룬 20세기 프랑스 만화입니다. 역사적으로 켈트족은 이미 기원전 4세기경 이탈리아를 제외하고 서유럽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로마와 잦은 전쟁으로 교류가 빈번해져 로마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따라서 갈리아 및 이베리아 지역 켈트족은 로마 제국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접했으며, 2세기 말에 브리타니아 지역 일부 켈트족도 복음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4세기경 북유럽에서 ‘게르만족(Ger manic Peoples)’이 서유럽 본토로 대이동을 하면서 켈트족 지역은 유럽 대륙의 극히 일부 지역과 브리타니아 지역으로 축소됐습니다. 게다가 5세기경 게르만족의 분파인 ‘앵글족(Angles)’과 ‘색슨족(Saxons)’이 잉글랜드를 점령, 켈트족 지역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등으로 대폭 축소됐습니다. 사실 ‘아서 왕(King Arthur)’의 전설에서 아서 왕은 5세기 잉글랜드를 침략한 게르만족을 막아낸 켈트족의 영웅적인 인물이었습니다.켈트족은 종교심이 탁월한 민족이었습니다. 켈트족 사회에는 빛의 신과 저승의 신뿐 아니라, 조상의 신과 보호자의 신이 있었습니다. 또한 켈트족은 신과 인간 사이의 영웅적인 인물들이 왕족을 이루면서 우주적인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며 통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켈트족 여성은 종교 안에서 지도자 반열에 드는 특별한 지위를 지녔습니다. 켈트족 성직자 역시 제사장이기보다 신탁을 전하는 역술가에 가까웠습니다. 켈트족은 영혼 불멸을 믿었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로 환생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영혼이 먼 곳에 있는 신비한 섬들을 여행한다는 많은 전설이 있었습니다.금욕적인 수도 생활에 열정을 보인 켈트족 그리스도인이런 종교 심성을 지닌 켈트족은 개종 이후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열정을 보였습니다. 특히 켈트족 그리스도인은 부족장을 따라 함께 세례를 받았음에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헌신하면서 종교적 열성을 발휘했습니다. 부족장들은 수도원을 설립해 부족 구성원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실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개종 전에 종교 지도자였던 여성도 수도원장이 돼 남녀 공동 수도원을 이끌었습니다.따라서 켈트족 수도자들은 민족의 종교적 열정에 힘입어 남다른 열성으로 수도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수도 생활 안에서 육체노동을 중요한 요소로 여겼으며, 글을 모르던 자들도 성경을 읽기 위해 라틴어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켈트족 수도자들은 개종 전 금식 전통의 확장 선에서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실천하며 ‘백색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영성 생활은 개인적인 참회의 삶이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켈트족이 실천한 고해성사 규정에서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죄의 경중에 따라 상응하는 속죄 행위를 상세하게 구분했습니다.켈트족 영성에서 또 하나의 특징은 마치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한 것처럼 고향을 떠나는 용기였습니다. 켈트족은 개종 전에 이미 낯선 곳을 여행하는 유랑 생활에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켈트족 수도자들은 자신이 속한 수도원에만 머물지 않고 또 다른 곳으로 과감하게 선교 여행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켈트족 그리스도인의 열정은 많은 이교인들을 복음화시킬 수 있었고, 심지어 유럽 대륙에까지 건너가 나태했던 그곳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적인 열정을 불어넣었습니다. 다만 5세기 게르만족의 침략 전쟁을 잊을 수 없었던지, 이후 켈트족 그리스도인은 유독 잉글랜드에 거주하게 된 앵글로-색슨족의 복음화에는 야박했습니다.복음화에 박차를 가한 아일랜드 선교사들브리타니아 지역은 이단설 창시자 펠라기우스(Pelagius Britannus, 350/54경~418 이후)의 고향이며, 켈트족 수도자들이 능동적으로 금욕 생활을 철저히 실천했던 토양 때문에 이단 펠라기우스주의에 쉽게 오염됐습니다. 이에 브리타니아 교회는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로마에 머물던 팔라디우스(Palladius Hibernorum, ?~432)는 교황 코일레스티누스(Coelestinus PP. I, 재임 422~432)에게 공동체 수도원을 설립해 엄격한 수도 생활을 실천하던 오세르 주교 게르마누스(Germanus Autissidorensis, 375경~437/48)를 펠라기우스주의를 평정할 특사로 추천했습니다. 교황은 429년 게르마누스를 브리타니아에 파견했습니다. 게르마누스는 브리타니아에서 신앙 성숙을 위해 노력하면서 여러 이단들을 평정했습니다.한편 431년 교황 코일레스티누스는 팔라디우스에게 주교품을 주고, 그를 아일랜드 지역 선교사로 파견했습니다. 아일랜드 초대 주교로서 팔라디우스는 아일랜드 지역 이교도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개종했습니다. 이후 팔라디우스는 스코틀랜드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픽트족(Picts)에게도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스코틀랜드 그리스도교 가정 출신이었던 파트리키우스는 10대 후반에 해적에게 잡혀 아일랜드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경험을 오히려 회개의 시간으로 여기며, 아일랜드 복음화를 결심했습니다. 먼저 파트리키우스는 게르마누스에게 사제품을 받았고, 432년 주교까지 됐습니다. 마침 아일랜드 복음화를 염려하던 교황 코일레스티누스는 파트리키우스를 아일랜드 선교사로 파견해 아일랜드 초대 주교 팔라디우스의 뒤를 잇게 했습니다. 435년 아일랜드에 도착한 파트리키우스는 아일랜드 이교도들에게 적극적으로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많은 사람을 개종시킬 수 있었습니다. 파트리키우스가 세 잎 토끼풀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한 일화 때문에, 세 잎 토끼풀은 파트리키우스의 상징물이 됐습니다.파트리키우스는 40년 동안 아일랜드를 복음화하면서 여러 지역에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파트리키우스는 그곳 수도자들과 함께 다시 아일랜드를 거점으로 외국으로까지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열성적인 켈트족 종교 심성을 바탕으로 아일랜드 그리스도인들은 훗날까지 선교사로서 열정을 발휘하며 오히려 유럽 대륙에 나태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경종을 울렸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cpbc2017.05.02
![[부음] 대전교구 원로 신학자 박상래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6/10/rc/655164_1.0_titleImage_1.jpg)
[부음] 대전교구 원로 신학자 박상래 신부 대전교구 원로사목자이자 신학자인 박상래(야고보) 신부가 1일 오전 대전성모병원에서 폐렴으로 선종했다. 향년 82세. 고인의 장례 미사는 4일 오전 교구 대흥동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봉헌됐으며, 유해는 대전가톨릭대 성직자묘역인 하늘묘원에 안장됐다. 1935년 충남 논산의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난 박 신부는 1954년 성신대학(현 가톨릭대 신학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196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리옹가톨릭대를 졸업하고 1963년 12월 리옹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어 독일 본대학과 프라이부르크대학, 이탈리아 로마 성서대학에서 공부했다.10년간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박 신부는 가톨릭대 신학부에서 16년을 교수로 살았다. 성서신학을 전공했지만, 신약학뿐 아니라 그리스도론도 강의했다.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신학을 한국 교회에 전하는 역할을 했으며, 해방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번역서인 「예수 그리스도」, 「예수와 역사」, 「나자렛 예수」 등과 저서인 「성서와 그 주변 이야기」 등을 통해 신학 연구와 발전에 이바지했다. 1974년 설립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학적 비전을 제공했으며, 이 때문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배후자로 지목돼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조사 후유증으로 1년간 요양했지만, 평생을 하느님 정의와 백성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신했다. 본당 사목도 논산 부창동본당과 신평ㆍ도고본당 등 3개 본당에서 10여 년밖에 하지 못했다. 1997년부터 8년간 긴 요양 끝에 2005년 1월에 은퇴했고, 은퇴 이후에도 지병인 심장병으로 줄곧 심장박동제어기를 달고 살았다.제자인 황종렬(레오) 박사는 “올해 늦은 봄에 찾아뵈었을 때도 눈빛이나 말씀이 살아 있으셨는데 이렇게 하느님 품으로 가시니 황망하기 이를 데 없다”며 “평생을 성경과 예수님 안에서 충실하게 머무르셨고, 진리에 대한 믿음을 꺾지 않으셨으며, 주위 사제들, 평신도들과 함께 다 같이 시대를 읽으려고 노력하셨던 분이셨다”고 추모했다. 오세택 기자 평화신문2016.10.05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파키스탄 (1) 차별과 박해Ⅰ](//cpbc.co.kr/CMS/newspaper/2017/06/rc/684443_1.0_titleImage_1.jpg)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파키스탄 (1) 차별과 박해Ⅰ테러 공포가 일상인 신자들… 믿음 있어 두렵지 않다고통받는 교회 돕기(ACN)·가톨릭평화신문 공동 기획‘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지금 많이 아프다. 이슬람 영토에서는 차별과 박해에 시달린다. 그리스도인 희생 소식이 들릴 때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 박해시대보다 순교자가 더 많다”고 통탄한다. 아프리카와 남미 교회는 찌든 가난 속에서 신앙 형제들의 도움을 호소한다. 교황청 산하 고통받는 교회 돕기(ACN)와 함께 차별과 박해, 가난에 신음하는 교회를 찾아간다. 이 기획은 ACN 총재 마우로 피아첸차 추기경의 간절한 호소에서 영감을 얻었다. “교회는 한 몸이기에 지체 한 군데가 아프다는 것은 결국 전체가 아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외국 교회의 많은 도움을 받아 발전한 한국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다른 나라 교회를 위해 나서주십시오.”(2015년 방한 인터뷰) 첫 순서로 차별과 폭력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는 파키스탄 교회를 간다. 글·사진=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몸을 던져 폭탄 테러를 막은 ‘성 요한 성당의 의인’ 아카시 바시르의 묘. 맨 오른쪽 청년 스칸다르도 테러 당시 한쪽 눈을 잃고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그들의 얼굴에서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슬픔은 찾아볼 수 없다. 부모는 자식을 잃으면 슬픔의 강을 건너가 화석처럼 굳어버린다는데, 아카시 바시르(Akash Bashir)의 부모는 그렇지 않다. 라호르 변두리에 있는 그리스도인 마을 요한나바드에서 만난 아버지는 “아들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죽었으니까 천국에 갔을 것이다. 슬픔은 신앙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2015년 3월 15일, 20살 청년 아카시는 평소처럼 성 요한 성당 문을 지키고 있었다. 성당 청년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에 대비해 주일이면 새벽부터 나와 경비 봉사를 한다. 그날 미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사람이 다가오더니 총을 쏘며 성당에 진입하려고 했다. 테러범임을 직감한 아카시는 달려가서 괴한의 허리를 꽉 껴안고 저지했다. 테러범은 이미 문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은 상황이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두 사람은 씨름하듯 서로 밀면서 소리쳤다. “놔, 폭탄을 갖고 있어. 너도 죽고 싶어?”“죽어도 못 놔. 한 발짝도 못 들어가!” 두 사람은 엉켜서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 순간 테러범이 폭탄 조끼를 터뜨렸다. 성당 안에서는 1500여 명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다. 인근 성공회 성당에서도 폭발음이 들렸다. 이날 두 성당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테러로 17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성 요한 성당은 아카시의 희생 덕에 사망자가 2명에 그칠 수 있었다. 아들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카시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꿈을 꿨다. 아카시가 무덤가에서 자고 있길래, 일어나라고 했더니 일어나더라. 내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면서 ‘그동안 어디 있었냐?’고 물으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고 말했다.”‘성 요한 성당의 의인’ 무덤은 성당 근처에 있다. 신자들은 최대한 정성 들여 대리석으로 묘를 단장했다. 그리고 아카시가 부활의 영광을 누리길 기원하며 성경 한 구절을 돌판에 새겼다.“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묵시 20,4) 요한나바드는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 15만 명이 모여 사는 파키스탄의 최대 그리스도인 밀집 지역이다. 이날 테러 발생 직후 그리스도인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현장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경찰에 체포됐는데, 2년 넘도록 42명이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무슬림 2명에게 폭력을 가한 죄목이다이들의 석방 운동을 벌이는 라호르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엠마누엘 유사프 신부는 “상대 측 변호사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은 풀려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지금까지 개종자는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파키스탄은 2억 인구의 95%가 이슬람을 믿는다.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이슬람 인구가 많다. 그리스도인은 2%, 가톨릭은 0.65%(130만 명)다. 이 ‘소수의 양 떼’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흔하디흔한 일상이다. 단적인 예로, 그리스도인이 아이스크림을 팔면 “청소나 해서 먹고 사는 인간들이 더럽게 먹을 것을 판다”며 손가락질하는 지경이다.몇 년 새 발생한 충격적 사건은 다 열거하기가 힘들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정부 내각에 유일하게 등용된 사바즈 바티 장관은 신성모독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가톨릭 여성의 구명 운동을 벌이다 암살당했다. 지난해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공원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72명이 숨졌다. 이슬람 경전 코란 훼손 혐의를 받은 부부는 폭도로 돌변한 주민들에 의해 벽돌공장 불가마에서 화형당했다. 파키스탄은 코란을 훼손한 자는 종신형, 예언자 마호메트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이 신성모독죄(형법 제295조)는 무슬림까지 옥죈다.청년사목을 담당하는 자한제브 신부가 벽돌공장 화형 테러 사건(2014년) 직후 다급했던 상황을 회고했다. “청년들이 울분을 토하며 거리로 몰려나가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더 큰 피해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다, 그리스도인은 초대 교회 때부터 많은 피를 흘렸다. 그들이 흘린 피가 우리 신앙의 씨앗이 됐다’며 눈물로 설득했다.”라호르대교구장 세바스찬 쇼우 대주교는 “우리는 ‘2F 정신’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두려워하지(Fear) 않고, 싸우지(Fight) 않는 것이다.새카맣게 탄 마을, 아이들만이 희망 빈민촌 사목자 조셉 샤자드 신부 라호르 시내 그리스도인 빈민촌 조셉 콜로니(Joseph Colony)에서 사목하는 조셉 샤자드 신부가 한국 교회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300가구가 살던 이 마을은 2013년 3월 무슬림들이 불을 질러 새카맣게 타버렸다. 사건은 친구 사이였던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청년이 술자리에서 벌인 사소한 언쟁에서 촉발됐다. 무슬림 청년이 이슬람 지도자에게 달려가 그리스도인 친구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하자, 그 일대 성난 주민들이 몰려와 마을을 불태웠다. 주택 180가구와 교회 2개가 전소됐다. 마을이 불타는 광경은 TV에 생중계됐다. 그때 피란 갔던 주민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잿더미로 변한 마을로 돌아왔다. 대부분 날품팔이 노동자다. 그나마 시내에 살아야 일거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셉 신부는 “주민들은 짐꾼과 청소부, 식당 설거지 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며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미사 집전 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털어놨다. 그의 소망은 방치된 아이들을 위해 작은 학교를 여는 것이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20%도 안 된다. 공립학교에서는 그리스도인도 이슬람 교리를 외워야 하고, 툭하면 ‘왕따’를 당한다. 그는 주민들과 머리를 맞대고 “아이들 교육이 먼저냐, 입에 풀칠하는 게 먼저냐” 토론하지만 결론은 없다. 그는 “학교를 여는 게 여의치 않으면 우선 똑똑한 아이들을 뽑아 학비라도 대고 싶다”고 말했다. 성금 계좌 : 우리은행 1005-303-232450(예금주 사단법인 에이드투더처치인니드)고통받는 교회 돕기(Aid to the Church in Need)는 어려움을 겪는 가톨릭교회를 지원하는 교황청 직속 단체로, 한국 교회도 1960, 70년대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2015년 아시아 최초로 한국 지부(이사장 염수정 추기경)를 개설했다. cpbc2017.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