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백성에게 경배 받은 아기 예수 기념하며, 성탄 기쁨 더 길게주님 공현 대축일(7일)과 주님 세례 축일(8일) 7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 그리고 8일은 주님 세례 축일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또 하나의 주님 성탄 대축일이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두 축일의 유래와 의미를 알아본다. 남정률 기자 njyul@cpbc.co.kr 주님 공현 대축일주님 공현 대축일은 동방 박사들이 구세주께서 탄생하심을 알고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를 찾아가 경배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민족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과거에는 ‘삼왕내조축일’(三王來朝祝日)이라고도 했다. 이 사건으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다. 그리스어로 ‘에피파네이아’(epiphaneia)인 공현(公現)은 ‘드러나다’는 뜻이다. 한국 교회는 매년 1월 2일에서 8일 사이 주일에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낸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1)동방 박사의 방문은 구약에서 예고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이사 60,6) 금과 유향은 당시 이방인들이 태양신에게 바쳤던 예물이다. 구약의 말씀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 이 세상에 오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그리스도교 초기 서방 교회는 그날부터 낮이 길어지는 태양신 탄생 축일(동지)인 12월 25일을 예수 성탄일로 지냈다. 그런데 이집트를 포함한 동방 교회가 예수 성탄일로 기념한 태양신 탄생 축일(동지)은 1월 6일이었다. 예수 성탄일이 두 개가 된 것이다. 4세기 말쯤 동방 교회의 예수 성탄일이 서방 교회에 전해지면서 혼란을 막을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서방 교회는 주님 성탄 대축일은 12월 25일에, 주님 공현 대축일은 1월 6일로 나눠 지내기 시작했다.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주님 성탄 대축일과 달리 특별한 예식이 없다. 공현 대축일이 성탄시기에 들어 있고 또 성탄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성탄은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공현은 그분 탄생을 이방 민족들 모두에게 드러내 보이셨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이방 민족들을 대표하는 동방 박사들을 구유에 설치한다. 동방 박사들은 구세주를 경배하는 모든 백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교황 레오 1세(재위 440~461)는 주님 공현 대축일의 의미를 이렇게 밝혔다. “오늘 경축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은 우리에게 성탄의 기쁨을 연장해주고 있는데, 두 축일에서 서로 비슷한 내용의 신비를 연이어 지낸다 해서 우리 기쁨의 강도나 믿음의 열정이 약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 태어나신 갓난아기가 작은 마을에 갇혀 계시면서도 벌써 온 세상에 선포하신 인류 구원에 관한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이스라엘의 백성 그리고 이 백성 가운데 한 가정을 선택하셨으며, 이 가정에서부터 전 인류가 지니고 있는 본성을 취하셨습니다. 하지만 만민을 위해 태어나신 그분은 당신의 탄생이 어머니의 협소한 거처 안에 감춰져 있기를 원치 않으시고 즉시 모든 이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셨습니다.”성탄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취하신 인성(人性)에, 공현 대축일은 인간 가운데 드러난 신성(神性)에 초점을 맞췄다. 두 대축일은 서로 보완하면서 서로에게 빛을 밝혀준다. 구세주의 별을 보고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께 맞갖은 예물을 드리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주님 세례 축일 레오나르도 다빈치 작, ‘그리스도의 세례’, 1472∼1473,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시기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된다. 주님 세례 축일과 이어지는 주간이 ‘연중 제1주일’이다. 주님 세례 축일 저녁에 구유를 비롯한 모든 성탄 장식을 치운다.주님 세례 축일은 원래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주일에 지낸다. 다만 주님 공현 대축일이 1월 7일이거나 8일인 때에는 대축일 다음 날인 월요일에 기념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그런 경우다.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세례를 따로 받을 필요가 없었다. 요한 세례자에게 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성부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예언의 성취를 위해 선택한 겸손의 표양이다. 성부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인간이 주님의 세례에 동참할 수 있게 됐다.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구원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봤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으로 하느님의 아들임이 계시됐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옴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공적 활동을 하기에 앞서 도유되고 파견된 것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동방 박사들의 아기 예수 경배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빚은 기적(요한 2,1-12)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공현을 나타내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같은 맥을 잇는다. cpbc2018.01.02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72)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갈라 2,16)믿음에 걸림돌 된 율법 예수 부활 앞에 무의미해진 율법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논의한 사안은 ‘율법과 할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의 회의를 열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했다는 의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충실한 유다인이었고 율법에 정통했던 인물입니다. 어느 누구보다 율법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그에게 율법을 통해 의로운 사람이 되고자 했던 유다인들의 모든 노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에 무의미한 것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율법은 더 이상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진정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을 통한 것이고, 유다인들은 율법 준수를 의로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은총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 2,16)아브라함처럼 순명하는 이들‘의로움’은 구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의로움의 근원은 하느님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훌륭한 찬사였고 하느님의 정의를 닮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주제를 통해 유다교의 믿음과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비교합니다. 흔히 ‘의화’(義化), 곧 의롭게 되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구원과 직접 연결되는 주제입니다. 이 표현의 좀 더 정확한 의미는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구원이 ‘나’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바오로 사도는 ‘신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바오로 사도에게 아브라함은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은 선조였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것을 통해 믿음을 보여 준 선조이고 그에게 내린 하느님의 축복은 이제 율법을 지키는 후손들이 아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후손들에게 전해집니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율법의 준수가 아닌,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믿음 통한 의로움으로 축복 받다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이 처음부터 ‘믿음을 통한 의로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전의 것들을 파기한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의 처음부터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해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르는 후손들, 곧 유다인들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후손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안에서 실현됩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율법은 저주와 연결돼 있습니다. 실제로 신명기에는 “이 율법의 말씀들을 존중하여 실천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입니다.(신명 27,26) 사람들에게 율법은 잘 지키는 이들에게 축복이 내린다는 것보다 그것을 지키지 못한 이들에게 저주가 내릴 것이라는 점을 더 강조합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바른길을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오로 사도에게 율법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후에 더 이상 구원을 위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걸림돌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신명 21,22-23 참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율법의 저주를 무력화하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믿음을 통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약속은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김지항2017.11.01
![[성경 속 도시] (64) 예루살렘 (상)](//cpbc.co.kr/CMS/newspaper/2015/10/rc/597703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64) 예루살렘 (상)하느님의 집, 첫 성전을 세운 곳 예루살렘은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의 주요 성지로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사진은 2014년 5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 【CNS 최고의 성지, 예루살렘은 늘 기대와 설렘을 주는 도시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의 주요 성지로, 어떤 장소는 시간대별이나 구역별로 나눠 이들 세 종교가 관리한다. 예루살렘은 유다인들에게 역사와 종교와 민족 의식의 원천이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이다. 또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예루살렘은 중요한 성지이다. 그래서 거대한 옛 도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시가지에는 유다인 지역과 아르메니아 지역, 그리스도교 지역, 무슬림 지역 등 4개 지역으로 구분돼 있다. 1948년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 이후, 구시가지와 동(東)예루살렘은 트란스요르단에,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 분할되었다가 1967년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예루살렘은 지금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어디서나 기관총을 휴대한 군인들을 쉽게 볼 수 있고 출입 관리도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국제법상으로는 어느 나라에도 속해 있지 않은 도시다. 현재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인위적으로 점령 중이다. 지형적으로 동쪽으로는 키드론 골짜기와 남쪽으로는 힌놈 골짜기의 가운데 솟은 구릉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은 기원전 약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산악 지형의 예루살렘은 외부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성채를 중심으로 서서히 도시가 발전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후 약속된 땅을 분배할 때 예루살렘은 본래 벤야민 지파에 속하였던 곳이다(여호 18,11-28 참조).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는 다윗왕이다. 기원전 약 1000년경 이스라엘의 선조 다윗 왕이 구릉에 위치한 ‘시온의 성’이라 불리던 도시를 정복한 후 유다인들은 이곳을 ‘다윗의 성’이라 불렀다. 다윗 임금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족을 치려 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거기에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2사무 5,6-7). 그는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첫 성전을 건축했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과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서른 살에 이스라엘 임금이 된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반 동안,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2사무 5,3-5 참조). 다윗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은 도시에 왕궁과 신전 및 성채를 새로이 건설하고 언약궤를 신전 안에 보관하였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실 때에 그들과 맺으신 계약을 넣은 궤를 둘 곳을 여기에 마련하였소”(1열왕 8,21).예루살렘은 신약에서도 중요한 장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에서 시작하여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이뤄진 장소이다. 성령 강림 후 사도들은 한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여 복음을 선포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10.13

어떤 곳을 ‘성지’라고 하나요?[교회상식 교리상식] 예수님 삶과 관련된 곳, 순교자 묘소 등 포함갈릴래아 호수. 가톨릭평화신문 DB 신자들과 성지순례와 관련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정작 "어디가 성지인가?"라는 물음에는 서로 말이 달랐습니다. 정확한 성지 개념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 일반적으로 '성지'라고 하면 예수님과 관련된 곳(예루살렘), 성모님과 관련된 곳(파티마와 루르드), 성인들과 관련된 곳(로마와 아시시) 등을 가리키지요. 우리나라에는 솔뫼성지, 절두산순교성지, 해미성지, 배론성지, 초남이성지 등 많은 성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정을 들여다보면 조금 복잡해집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 성지 성지(聖地, Holy Land)는 원래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활동하시다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땅을 통틀어 일컫는 표현입니다. 이 땅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기도 합니다. 이 땅을 교회에서는 라틴말로 '팔레스티나'라고 불러왔는데,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전체를 가리킵니다. 참고로 라틴어 팔레스티나(Palestina)와 영어 팔레스타인(Palestine)은 모두 같은 말에서 나왔는데 구약성경의 필리스티아인(공동번역 성서의 블레셋 사람)에서 유래합니다. 이렇게 '약속의 땅' '거룩한 땅'인 성지(聖地)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활동 무대인 팔레스티나 전체를 가리키지만 좀더 좁은 의미에서 거룩한 장소(터)를 가리키는 성지(聖址, Holy Place)도 있습니다. 이것은 팔레스티나 전체가 아니라 팔레스티나에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관련되는 특정한 장소나 지역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베들레헴 동굴, 나자렛, 타볼산, 갈릴래아 호수, 베타니아, 겟세마니 등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번째 의미의 성지는 세월이 점차 흐르면서 예수님과 관련되는 곳만이 아니라 성모님 발현지, 사도들의 활동지, 순교자나 성인들 순교지나 묘소, 하느님 은총으로 이적(異蹟)이 일어난 곳, 유서 깊은 성당 등에도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팔레스티나를 가리키는 성지(Holy Land, terra sancta 聖地)든, 아니면 거룩한 장소를 가리키는 성지(Holy Places, loci sancti, 聖址)든 영어나 한자어로는 명확하게 구별이 되지만 우리말로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가톨릭대사전」에서는 거룩한 장소를 나타내는 두번째 의미의 '성지'(聖址)를 '성역'(聖域)으로 바꿔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별은 아무래도 복잡합니다. 그래선지 천주교 용어위원회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성지(terra sancta)'는 본래 예수님과 관련된 이스라엘 땅을 말하지만, 성모님이나 성인 또는 순교자 관련 사적지나 순례지(sanctuaria)를 일반적으로 '성지'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는 문제 삼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본래 성지는 예수님과 관련되는 땅 팔레스티나를 가리키지만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팔레스티나 곧 이스라엘 땅뿐 아니라 성모님과 성인들, 순교자들과 관련된 사적지나 순례지까지 다 포함해서 '성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 순례지 순례지란 "많은 신자들이 교구 직권자의 승인 아래 특별한 신심 때문에 빈번히 순례하는 성당이나 그밖의 거룩한 장소를 뜻한다"고 교회법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자면, 성인이나 순교자 무덤이나 순교지가 아니더라도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 성모님의 발현이 일어난 곳, 성체 기적 같은 특별한 기적이 일어난 곳 등에는 많은 신자들이 찾아가 성인 유해를 참배하며 특별한 공경을 바치거나 그 일이 일어난 의미를 되새기며 신앙을 키우곤 합니다. 이런 곳들에 대해서 교회가 공식으로 순례지로 인정할 경우에 순례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순례지는 교구가 인정하면 교구 순례지로, 그 나라 주교회의가 인정하면 국가 순례지가 됩니다. 국제 순례지가 되려면 교황청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국제 순례지와 국가 순례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대희년 때에 각 교구들이 주교좌성당을 비롯해 교구내 주요 성지들을 순례지로 한시적으로 지정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200곳이 넘는 성지가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순교자들 순교지나 무덤과 관련된 곳이지만 사적지에 해당하는 곳들도 더러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교회 사적지와 성지, 순례지와 성지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성지는 성인이나 순교자들의 무덤이나 순교지에 국한하자는 것입니다. 모두가 교회의 값진 유산이기는 하지만 구별할 때에 성지의 고유한 의미를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교지나 무덤이 아닌 곳들은 사적지로, 필요하다면 순례지로 지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견이 잘 반영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알아둡시다>> 예전에는 순교자 성월이 되면 신자들이 순교성지들로 성지순례를 많이 갔습니다만 요즘에는 성지순례를 하는 신자들 발걸음이 성지마다 일년 내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성지를 찾아 순교성인들의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 신앙을 굳게 하는 것은 대단히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느 성지를 가든지, 어느 순례지를 가든지 간에 성지순례의 최종 목적은 그 성지와 관련되는 성인, 관련되는 신심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중심이요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지마다 다른 성지와 구별되는 영성적 또는 신심적 특징이 있고, 해당 성지에서는 그런 특징들을 부각시키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지순례를 통한 신심 행위가 자칫 달을 향하기보다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향할 우려가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한국에서 열린 성지순례사목 아시아대회에서도 이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고 합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신자들뿐 아니라 성지나 순례지사목을 담당하는 사목자들도 이를 좀더 유념해서 성지순례 신심이 올바로 고양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김지항2017.07.14
소공동체 활동 ‘평신도 복음화’ 이끌어 서울대교구 사목국, 소공동체 25돌 맞아 설문조사 보고서 발표… 23일 심포지엄 올해로 도입 25주년을 맞은 ‘소공동체’가 평신도 복음화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소공동체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그렇지 않은 신자들에 비해 ‘미사 참여 외 성경 읽기 빈도’와 ‘미사 참여 빈도’, ‘고해성사 빈도’에서 각각 21.0점, 10.6점, 6.3점(이상 100점 만점 기준) 높은 점수를 보이는 등 거의 모든 복음화 지표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다만, 소공동체 참여 빈도는 복음화 정도에 영향이 크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서울대교구 사목국(국장 조성풍 신부)이 발표한 서울대교구 소공동체 25주년 기념 기초자료 수집 설문조사 보고서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소공동체 평가와 전망」(이하 보고서)에서 나타난 결과다. 교구 사목국은 2016년 10월 15일~11월 13일 교구 9개 본당 주일 미사 참여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8764명의 유효 응답을 토대로 보고서를 완성했다. 설문지법(자기기입식)의 구조화된 질문지를 통해 조사했으며, 참여 남녀 비율은 여성 66.7%, 남성은 33.3%였다. 60.2%가 대졸 이상의 학력 소지자였고 가정주부가 35.3%로 가장 많았다. 설문은 신자 개인의 기초 배경과 ‘복음선포’ ‘전례’ ‘친교’ ‘봉사’의 네 가지 항목으로 이뤄졌다.교구 사목국은 그동안 소공동체 현황 및 발전 과정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지속적으로 발간해 왔다. 올해 보고서는 소공동체 참여 신자와 불참 신자의 복음화 정도를 직접 비교 분석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보고서 발간은 2012년 이후 5년 만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소공동체 참여자들은 신앙고백에 관한 문항들로 이뤄진 ‘복음 선포’ 영역과 하느님 체험의 장인 ‘전례’, 신자로서 자부심과 이웃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친교’의 모든 영역에서 전체적으로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말씀과 신앙 체험을 실천하는 ‘봉사’ 영역에서는 전반적으로는 높지만 뚜렷한 차이를 보이진 않았다. 소공동체가 복음화 도구로서 제구실을 하고는 있지만, 한계도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 분석된다. 앞으로는 서울대교구 상황에 걸맞은 ‘맞춤형 소공동체’로의 변화가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서울대교구는 신자 수 급증과 본당 신설 및 비대화, 사목자와 신자의 인격적 만남의 어려움, 소속감과 유대감 약화, 냉담교우 및 거주불명자 증가, 신앙과 삶의 유리 등의 현상을 극복하고자 1992년 남아프리카 룸코 연구소의 소공동체 사목 모델과 프로그램(SCC,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을 도입, 시행해 왔다.조성풍 신부는 “소공동체는 신자들이 복음을 중심으로 삼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도구”라며 “이번 보고서는 도입 25년이 지난 소공동체를 통한 신자들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현대 대도시 문화에 발맞춘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고 평가했다.한편 교구 사목국은 23일 오후 2시 명동 가톨릭회관 1층 대강당에서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서울대교구 소공동체 25주년 평가와 전망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소공동체의 결실을 평가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자리다. 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cpbc2017.08.29

하느님은 왜 내 기도를 안들어 주실까? 구약 성경 전문가 김영선 수녀가 전하는 성경으로 되새기는 올바른 기도법 김영선 수녀 기도로 신학하기, 신학으로 기도하기김영선 지음/생활성서/1만 4000원기도를 흔히 하느님과 대화 혹은 만남이라고 한다. 대화나 만남은 일방적일 수 없다. 상대가 있어야 하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영향을 미치는 관계다. 그러니 기도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영향을 받게 된다. 하느님께 영향을 받았으니 당연히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럼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아침에 눈 뜨며 감사 기도를 바쳤지만, 이내 작은 불편도 참지 못해 화를 내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시험 잘 보게 해달라는, 건강하게 해달라는, 로또에 당첨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절로 나오지만, 왠지 굶어 죽는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한 기도는 어색하기만 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기도 생활과 삶이 왜 이토록 분리됐을까. 김영선(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녀 역시 오랫동안 씨름하던 주제였다. 구약 성경 전문가인 그는 구약 성경을 연구하며 비로소 해답을 찾았다. 구약 성경에 현대의 기도 생활을 향해 들려주는 지혜의 소리가 담겨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을 한 권의 책 「기도로 신학하기, 신학으로 기도하기」로 풀어냈다. 김 수녀는 “기도와 삶의 분리를 극복하려면 내가 지금 기도를 바치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기도를 바치는 나는 누구인지를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십 년간 기도를 바쳤다 해도 하느님에 대한 앎이 깊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기도를 통한 삶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김 수녀는 구약 성경의 인물들이 바치는 기도에 주목했다. 이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불렀는지, 왜 기도를 드렸는지, 어떠한 자세로 기도했는지, 어떠한 확신과 믿음을 지녔는지 등 네 가지 요소로 나눠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무엇이 기도와 일상의 괴리를 만들어 냈는지, 어떻게 기도를 바쳐야 하는지를 짚어줬다.“기도할 때 자비이신 하느님, 사랑이신 하느님이라고 먼저 하느님을 부르잖아요. 이렇게 하느님을 부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벌써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나타나거든요. 그리고 내가 무엇을 청하는지도 드러나게 되고요. 이때 내 기도가 너무 개인적인 청원에만 치우쳐 있지 않은지, 내가 가진 하느님 이미지가 건강한지도 성찰해야 합니다.”김 수녀는 올바른 기도 생활을 위해 평소 바치는 기도문을 글로 적어보기를 권했다. 글로 적었을 때 자기 자신이 어떤 기도를 바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에 응답이 없더라도 꾸준히 기도하길 당부했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되더라도 꾸준히 바치다 보면 어느새 기도 지향의 중심이 ‘나’에게서 ‘하느님’으로 바뀌어 감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수정 기자 백영민2015.11.18

바쁜 현대인의 성경 공부, 사이버로 통한다 수원교구 사이버 성경학교, 2013년 문 열어… 한 학기 수강자만 700명 넘어 제6차 연수 참가자들이 박병규 신부 강의를 듣고 있다. 임영선 기자 ‘성경 공부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신자는 많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이는 드물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시간이 없어서”다. 바쁜 현대인들이 본당이나 교구ㆍ수도회에서 여는 성경 공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 공부하자니 어렵기도 하고, 꾸준히 이어지지도 않는다.2013년 문을 연 수원교구 사이버 성경학교는 신자들의 이런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교실 없는 학교’다. 요즘 많은 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사이버 대학’과 같은 형태다. 컴퓨터,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누리집에 접속해 원하는 강의를 들을 수 있다. 강의 수준도 무척 높다. 첫걸음·일반 과정 구분 강의는 처음 성경을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첫걸음 성경 강좌’와 ‘일반 여정 성경 강좌’가 있다. 이용화(수원교구 군포본당 주임)ㆍ김승부(수원가톨릭대)ㆍ김효준(의정부교구 신앙교육원장)ㆍ박병규(대구가톨릭대) 신부, 김혜윤(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총원장)ㆍ김영선(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ㆍ이혜정(예수의까리따스 수녀회) 수녀가 강의한다. 15개 강의를 들으면 한 학기 과정을 수료하게 된다. 출석률과 과제물 제출, 성경 일기ㆍ퀴즈 참여 등으로 수강생을 평가해 70점 이상이면 수료증을 수여하고, 성적 우수자에게는 장학금도 지급한다. 수료자들은 한 학기가 끝난 후 수원교구청에서 열리는 연수(1ㆍ7월)에 참여할 수 있다. 연수에서는 온라인에서 만나던 강사들을 직접 만나 강의를 듣는다. 9일 열린 ‘제6차 사이버 성경학교 연수’에는 2015년 2학기 과정을 수료한 이들 중 274명이 참가해 박병규 신부의 ‘요한 묵시록’ 강의를 들었다. 지난 학기 수강자는 711명, 수료생은 426명에 이른다.이날 ‘장학생’으로 선정된 장동호(바오로, 수원교구 상현동본당)씨는 “성경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직장 생활로 바빠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면서 “사이버 성경학교를 통해 ‘진정한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 뿌듯해 했다. 서규석(요한 사도, 수원교구 지동본당) 씨는 “마음에 와 닿는 강의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들을 수 있는 게 사이버 성경학교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2016년 1학기는 2월 29일 개강 연수 파견 미사는 복음화국장 시절 사이버 성경학교를 만든 문희종(수원교구 교구장 대리) 주교 주례로 봉헌됐다. 문 주교는 “성경을 공부하고 싶어도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공부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 사이버 성경학교가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수강생들이 성경 말씀에 감동하는 것을 넘어서 세상에 나가 그 말씀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됐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2016년 1학기 사이버 성경학교는 2월 29일 개강한다. 오경ㆍ역사서ㆍ시서와 지혜서ㆍ예언서(구약), 복음서와 사도행전, 서간과 요한 묵시록, 요한ㆍ마르코 복음서 강의가 개설된다. 모집 기간은 3월 31일까지이며 수강 신청은 누리집(cyberbible.casuwon.or.kr)에서 할 수 있다. 문의 : 010-7249-7966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평화신문2016.01.12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55) 제자직(루카 14,25-35)](//cpbc.co.kr/CMS/newspaper/2018/03/rc/714094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55) 제자직(루카 14,25-35)가족까지 ‘미워하라’는 스승 말에 하늘이 무너진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것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사진은 예루살렘 성지에서 십자가를 들고 십자가의 길 순례 기도를 하는 성지 순례단. 가톨릭평화신문 DB 예수님께서 당신과 함께 길을 가던 군중에게 당신을 따르는 제자 직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여간 혹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말씀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버림과 따름(14,25-33)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중입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과 함께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시어” 말씀하십니다.(14,25) 돌아서신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군중에 앞서 가시고 군중은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모습을 상상하게 해줍니다. 제자들이야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많은 군중이 왜 그분을 뒤따라갈까요? 군중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직접 보았거나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었을 테고 호기심에서 함께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충격적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6)학자들은 “미워한다”는 극단적인 표현과 관련해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언어 군(群)인 셈족 언어에는 비교급이 없어서 “덜 사랑한다”는 표현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미워한다”고 표현한 것이라면서 “미워하지 않으면”이라는 표현을 “(예수님보다) 덜 사랑하지 않으면”이라는 뜻이라고 풀이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데서는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표현 강도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기도 하지요.(「주석 성경」 참조)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5,11) 예수님을 따라나선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 또는 레위(5,28) 같은 제자들과는 달리, 군중은 그냥 따라나선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어 따르려면 부모와 형제자매는 물론 아내와 자식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 미워할 정도로 큰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이 말씀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어오는 말씀 곧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7)는 말씀과 관련하여 찬찬히 새겨보면 “미워하라”는 말씀의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는 당신의 죽음이,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지셔야 하는 십자가였고,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처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나 형제나 아내나 자식을 미워할 정도로 포기하지 않는 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십자가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식들이 눈에 밟혀 배교했다가 다시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복녀 이성례 마리아(1801~1840)가 이와 관련한 좋은 사례입니다. 남편(최경환 프란치스코)은 순교하고 장남(최양업 토마스 신부)은 사제가 되고자 머나먼 이국에 가 있었습니다. 이성례는 젖먹이 막내 스테파노가 옥에서 죽어가자 자식들이 눈에 밟혀 배교하고 말지요. 그러다가 다시 체포된 이성례는 네 명의 자식을 둔 채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습니다. 반어(反語)적으로 표현한다면 네 명의 자식을 포기할 정도로 미워했기 때문에 어린 자식들을 두고 순교의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어린 자식들을 남겨 두고 혼자 죽어야 하는 것 자체가 이성례 마리아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정도로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하지만, 결단을 내린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결단을 내리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 결단한 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흔히 봅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의 삶 자체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결단을 내리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내리는 결단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를 잘 헤아리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먼저 비용을 잘 계산해 봐야 한다는 말씀(14,28-30)과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기 전에 이길 수 있는지 먼저 헤아려봐야 한다는 말씀(14,31-32)은 바로 이를 강조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예를 들어서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고 마무리 지으십니다.(14,33) 얼핏 이 말씀은 탑을 세우려는 사람의 예화와 그리고 전쟁을 치르려는 임금의 예화와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비용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 전쟁을 치르려는 임금은 군사력을 확보해야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마련하고 확보하는’ 대신에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가 되려면 부모 형제와 자식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마무리한다고 하겠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14,34-35)예수님께서는 이제 소금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지만 짠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어 밖에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은 소금이라고 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그런데 이 말씀은 제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앞 말씀과 연결할 때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소금이 된다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자로서의 직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모가 없는 제자이고 제자라고 불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짠맛을 잃은 소금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제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자로서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생각해 봅시다]가족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 또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개인적 상상입니다만,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과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멈칫했을 것이고 곰곰 생각한 끝에 되돌아갔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을까요? 역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그것은 이 말씀은 행복선언의 말씀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행복선언 말씀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 기준과는 정반대이지요. 마찬가지로, 가족과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는 것은, 소유를 버리라는 것은, 가족과 자기 자신과 소유에 대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춰서 새롭게 생각하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새롭게 생각했다면 그렇게 살아야, 적어도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짠맛을 잃지 않는 소금이 될 것입니다. 백영민2018.03.14
[성서 주간] 이럴 때 이런 ‘성경 말씀’말씀이 우리를 ‘토닥토닥’ 누구의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마음에 안식을 주는 단 하나는 ‘성경 말씀’이다. 힘들 때나 아플 때나 기쁠 때나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과 힘을 주신다.하느님 말씀과 더욱 가까워지는 성서 주간, 마음에 와 닿는 성경 말씀을 골라 묵상하며 기도로 위안을 청해보자. 주변에 말씀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말씀 카드로 만들어 함께 나눠도 좋다. 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근심거리가 많을 때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중요한 일을 앞뒀을 때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주변 사람이 미울 때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1베드 3,9)깊은 좌절에 빠졌을 때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 1,12)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 (마태 12,35)병으로 고통스러울 때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요한 11,4) 평화신문2015.11.17
![[성서 주간] 성경 필사하는 신자들](//cpbc.co.kr/CMS/newspaper/2015/11/rc/604226_1.0_titleImage_1.jpg)
[성서 주간] 성경 필사하는 신자들성경, 쓰다보면 놀라운 일들이 쓰면 쓸수록 더 쓰고 싶어지고, 쓰는 동안은 행복하고, 잠시 외출이라도 하면 빨리 집에 들어가 쓰고 싶어지는 게 있다. 연애편지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 필사를 해본 신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성서 주간을 맞아, 성경 필사를 한 신자들에게 삶에 어떤 변화가 찾아왔는지 물었다. 매일 1시간 20분씩, 18년간 “누가 쓰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하루 세끼를 안 먹으면 배가 고프듯 성경을 안 쓰면 신앙적으로 배가 고파요.” 18년 동안 구약 8번, 신약 11번을 필사한 이분례(막달레나, 63, 안동교구 봉화본당)씨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졌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돈 쓰는 일에 덜 인색해졌다”고 털어놨다.“남한테 쓰는 돈에 인색한 편이었어요. 그런데 성경을 쓰면서 하늘에 보화를 쌓고 싶고, 죽어서 하느님께 떳떳해지고 싶어진 겁니다.”매일 하루에 1시간 20분을 성경 필사하는 데 쓴다는 이씨는 “미사가 시작될 때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마치 연애할 때처럼 떨리고 설렌다”고 했다. 처음에는 성경을 완필하고 싶은 단순한 마음으로 펜을 잡았지만, 성경 필사는 신앙의 깊이와 기쁨을 더해줬다고 이씨는 전했다. 10년간 세 번 필사 10년간 세 번 필사를 한 여선숙(아녜스, 수원교구 금정본당, 56)씨는 자녀가 고3이었을 때 처음 필사를 시작했다. “밤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오는 아들을 기다리며 썼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 같지 않은 아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쓰다 보니 금세 빠져들더군요.”여씨는 쓸쓸하고 마음 붙일 곳 없고, 기도의 힘이 필요할 때마다 성경을 펴 한 글자씩 써내려갔다. 삶에서 어려운 순간을 겪을 때마다 성경 필사를 하면 마음이 풍요로워졌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여씨는 털어놨다. 또 성경 필사를 통해 얻은 삶의 구체적인 변화로 일상생활에서 성경 말씀을 실천하게 되는 순간들이 생긴다는 점을 꼽았다. “이론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진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상대방 처지에서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사랑을 알아챌 수 있는 눈이 생겼습니다. 본당에서도 봉사를 부탁하면, ‘그 자리는 나랑 안 맞아’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내가 필요한 곳에 ‘예’라고 응답합니다.”해외성지순례 가고파 시작했지만배희진(클라라, 16, 수원교구 양지본당)양은 2년 전 2년 3개월 만에 신구약을 필사했다. 수원교구 청소년국에서 성경을 완필하면 해외성지순례를 보내준다는 소식을 접하고 필사를 시작했다. 배양은 “처음에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지만 참고 계속 쓰다 보니 재밌게 느껴졌다”면서 “필사를 하면서 힘들 때마다 예수님이 계신 것을 느꼈다”고 했다. 배양은 스스로 성당에 갔고, 혼자서 9일 기도를 바치기도 했다.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하심 체험 병상에서 성경 필사에 매달린 신자도 있다. 대장암을 앓았던 박민소(바오로, 7, 서울대교구 동대문본당)씨는 투병 중에 신·구약 성경을 필사하며 항암치료의 고통을 떨쳐 냈다.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손이 떨려 수저도 겨우 들었던 박씨는 “처음에는 원망의 마음으로 성경 필사를 시작했지만, 성경을 써내려가면서 주님 말씀에서 희열을 체험했다”고 밝혔다. 박씨는 성경 필사를 통해 하느님이 항상 옆에 계시다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평화신문2015.11.17
![[하느님과 트윗을] (21) 보편 사제직이란 무엇인가요](//cpbc.co.kr/CMS/newspaper/2017/09/rc/696875_1.0_titleImage_1.jpg)
[하느님과 트윗을] (21) 보편 사제직이란 무엇인가요소명에 따라 맡은 역할 수행하며 교회와 사회에 기여 하느님과 트윗을 문 : 모든 신자의 보편 사제직이란 무엇인가요.답 : 성경에서 예수님은 대사제라고 불리셨습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백성의 보편 사제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느님 백성이며 다 함께 교회를 이룹니다.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고, 선행하면서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2,9)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세요!문 : 그럼 평신도들은 어떤 소명을 받은 건가요.답 : 우리 교회는 대다수가 보편 사제직에 참여하는 평신도로 이뤄져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직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자신이 맡은 임무가 무엇이든 평신도는 모두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평신도 개개인에게는 개인적인 소명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혼인하고 가족 내에서 사제직을 수행하도록 소명을 받았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어 주고, 성당에 데려가고, 자녀들이 잠자리에 들거나 학교에 갈 때 자녀를 위해 축복 기도를 하는 모습에서 그 소명은 뚜렷이 드러납니다. 어떤 신자는 독신 생활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소명을 받습니다. 이는 수도회의 수사나 수녀가 되는 소명이기도 하고, 하느님 사랑에 봉사하기 위해 독신으로 사는 소명이기도 합니다. 기혼이거나 미혼인 사람 모두가 예수님을 세상에 널리 전할 소명이 있습니다. 외국에서 신앙을 전하는 선교사뿐만 아니라 자기 고객을 돌보는 빵집 주인도,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교리교사도, 사업가도, 복사를 하거나 봉성체를 하는 본당의 신자들도 예수님을 세상에 널리 전할 수 있습니다.문 : 직무 사제직의 역할은 무엇인가요.답 : 단지 열두 명의 제자만이 사도로 선택된 것과 같이 한정된 수의 그리스도인만이 우리 교회의 주교와 사제로서 직무 사제직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이 베푸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로마15, 15-16) 은총으로 대담하게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었습니다. 직무 사제직 덕분에 예수님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성사를 통해 현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계속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가 있다는 것은 우리 교회에 근본적인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도들을 위한 협조자들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제 성소를 위해 모든 신자가 자주 기도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문 : 각자 자기의 역할이 있다는 말인가요.답 : 직무 사제직은 보편 교회에 있어 근본적인 것입니다. 봉사를 위한 다양한 역할들이지요. 모든 신자에게는 교회를 꾸려야 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각자가 여기에 기여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맡았느냐가 아니라 사랑으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역할이 필요하고, 모두가 보편 사도직에 참여해야 합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실천하고 선포할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는 각자의 개별적인 소명을 통해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정리=맹현균 기자 maeng@cpbc.co.kr 평화신문2017.09.27

판화로 하느님 자비 드러낸 ‘조르주 루오’의 판화 해설집정양모·웅모 형제 신부 루오의 58개 판화 해설한 첫 책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정양모ㆍ정웅모 신부 해설/기쁜소식/1만 5000원렘브란트 이후 가장 빼어난 종교화가로 꼽히는 이가 프랑스의 조르주 루오(1871~1958)다. 루오는 유화와 함께 판화를 많이 그렸다. 대표작은 58점의 연작으로 이뤄진 판화집 「미세레레」(MISERERE,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라틴어). 루오는 판화를 통해 인간의 참상과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고자 했다. 「불쌍히 여기소서」는 정양모(안동교구 원로사목자)ㆍ정웅모(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 유물 담당) 형제 신부가 58개 판화 하나하나에 해설을 붙인 판화 해설집이다. 두 신부는 2013년 예수 일생을 62편으로 나누고 각 편에 해당하는 성화를 엄선한 뒤 편마다 성경 풀이와 미술 풀이를 단 「예수 모습 성경 미술」을 펴낸 성미술 전문가.파리 교외 빈민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루오는 가난한 이들과 빈민촌을 즐겨 그렸다. 노숙자, 외톨이, 노동자, 매춘부와 뚜쟁이, 사형수, 농부, 슬픈 사람, 장님… 그의 판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판화집 중간중간에 고난을 당하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등장한다. 해설자들은 그 뜻을 이렇게 풀었다. “…예수는 고통의 바다에 사는 인간들과 한통속이라는 뜻이다. 그는 인류의 대표 주자로서 인류 대신 고통을 받고,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죽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예수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깊이깊이 깨닫고 맑게 맑게 체현했으니,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화신(化身)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한 그리스도는 죽은 이들에게 부활의 희망을 선사한다는 것이다….”인간의 참상과 구원을 직감적으로 꿰뚫어본 루오의 판화를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풀이하기가 난해한 영성적 작품이어서 그런지, 판화집은 여러 나라에서 출판됐지만 해설은 거의 없는 편이다. 따라서 「불쌍히 여기소서」는 루오의 판화를 본격적으로 해설한 첫 책이다. 해설자들은 “성경과 루오의 신앙관을 의식하면서 나름대로 연작 판화 하나하나에 주관적인 감상과 해설을 붙였다”며 해설에 구애받지 말고 루오의 판화를 스스로 감상하기를 권했다. 남정률 기자 njyul@cpbc.co.kr 백영민2016.12.14
![[낮은 곳에 주님 사랑을] 사회사목국 사제 릴레이 인터뷰 (9)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 위원장 이재돈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7/04/rc/678095_1.0_titleImage_1.jpg)
[낮은 곳에 주님 사랑을] 사회사목국 사제 릴레이 인터뷰 (9)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 위원장 이재돈 신부대량 생산·소비가 환경 파괴… 검소한 생활 지향해야 가톨릭교회에서 환경 운동이 시작된 건 그리 오래지 않다. 1990년 1월 1일 평화의 날을 맞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발표한 담화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 모든 피조물과 함께하는 평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내에선 1991년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생활실천부 안에서 시작돼 1994년 이재돈 신부가 보편 교회에서 보기 드물었던 환경사목 전담 사제로 임명된 데 이어 2000년 10월 교구 환경사목위원회로 독립하면서 교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재돈(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위원장) 신부 생태신학자 이재돈(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위원장) 신부는 “그간 교회가 하느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은 많이 얘기했는데, 자연 사랑은 소홀했다”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015년 9월 발표하신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폭넓고 깊이 있게 공부해 생활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문을 뗐다. 지난해 3월 ‘한 지붕 두 가족’이던 우리농촌살리기운동 서울교구본부와 분리된 교구 환경사목위원회를 이끌어온 이 신부는 교회가 왜 환경사목을 해야 하는지부터 설명했다. “교회는 진화를 인정하면서도 우주는 성경과 함께 하느님 계시가 드러나는 장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창조 세계를 파괴하면 하느님의 아름다움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지배’라는 표현은 세상을 잘 돌보라는 얘기지 파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환경 문제의 원인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대량 폐기에 있기에 이를 극복하려면 단순하고 검소한 생활방식으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환경사목위원회의 역할은 창조 세계가 지닌 신학적 의미를 신자들에게 일깨우고 창조 세계를 돌보는 데 협력하도록 도와드리는 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교구 환경사목위원회는 교육과 조직, 행사, 실천, 연대, 홍보,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교육 분야에선 지난 3월 말 생태영성학교를 개설했고, 분기별 가톨릭 에코포럼과 연중 가톨릭 유아 생태 교육에 치중하면서 본당 환경분과와 사목위원, 구역ㆍ반장 생태 교육도 빼놓지 않고 있다. 또한, 생태영성학교를 통해 양성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생태 사도직 단체인 ‘하늘땅물벗’을 조직, 본당 생태 환경 운동의 장을 만들 계획이다. 이와 함께 중ㆍ고등부 청소년 환경 기자단과 봉사자 조직, 후원회 등을 통해 생태 환경 운동의 저변을 다지고 있다. 실천 운동의 핵심은 ‘즐거운 지구 살리기 운동’에 있다. 캠페인은 에너지와 생활 속 실천, 두 분야로 나눠 추진되고 있다. 에너지는 지구 온난화를 줄이고, 하느님의 에너지 사용을 위한 생활 실천 운동으로서 서울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과의 연대, 미니 태양광 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탈핵에 방점을 찍고 있다. 기존 ‘즐거운 불편’에서 생태적 회심을 통한 자발적 환경 운동으로 변모를 일신한 생활 속 실천 운동으로는 대중교통 이용과 생명의 먹거리 이용, 일회용품 안 쓰기, 물 아끼기, 폐식용유 활용 등이 연중 실천 운동으로 펼쳐진다. 이 밖에 전국 생태 환경 활동가와의 연수, 탈핵천주교연대와 함께하는 활동, 창조보전연대와 함께하는 축제, 예수살이공동체 주관 교육 참여, 종교인 대화 마당이나 종교인 생명평화 순례 등 연대에도 시선을 둔다. 아직 힘이 닿지는 않지만, 앞으로 생태 환경 연구 서적 발간이나 자료집 발간 통을 통해 교회 내 생태 환경 운동의 저변을 확충할 계획이다. 이 신부는 “교회 생태 환경 운동은 허공에 뜬 얘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운동이고, 그래서 생태 사도직 단체로서 ‘하늘땅물벗’과 함께 즐거운 지구 살리기 캠페인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백영민2017.04.12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16) 갈릴래아 전도와 희년 선포(4,14-30)](//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3643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16) 갈릴래아 전도와 희년 선포(4,14-30)선입견에 사로잡힌 군중, 예수를 벼랑 끝에 몰다 나자렛의 절벽산 비탈. 나자렛 시내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절벽산은 나자렛 주민들이 격노해서 예수님을 끌고 가 벼랑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다는 산으로 전해진다. 이 절벽산에서 시작해서 비탈을 타고 내려가 갈릴래아 호수 북단으로 이어지는 ‘복음의 길’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이제부터 예수님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살펴봅니다. 루카는 예수님이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고, 그곳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칭송을 받으셨다고 기록합니다.(4,14-15) 학자들은 이 성경 대목이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을 먼저 요약하고 있다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세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힘, 갈릴래아, 회당입니다.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다’는 것은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수님의 활동이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이 자라나신 고향인 나자렛을 포함해 갈릴래아 호수 일대를 끼고 있는 지역으로, 예수님 활동의 중심 무대입니다.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에서 비옥한 곡창지대이지만 구약 시대 때부터 이집트에서 근동으로 가는 육상 통로의 요충지였습니다. 당연히 이민족의 침략과 왕래가 잦았고 그래서 “이민족의 갈릴래아”(마태 4,16; 이사 8,23)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변방 지역, 이민족의 갈릴래아가 예수님 활동의 출발지이자 주요 무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회당은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으로 유배갔을 때 성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길이 없던 유다인들이 성전 대신으로 사용하고자 마련했다고 합니다. 유다인들이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안식일이면 회당에서 예배하는 관습이 이어지면서 곳곳에 회당이 생겼습니다. 회당은 안식일에는 예배 장소로 평일에는 공공집회 장소와 재판정으로도 사용됐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은 자연스럽다고 하겠습니다.루카는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희년을 선포하신 일화를 공생활의 앞머리에 내놓습니다.(4,16-30) 이 일화는 예수님의 말씀→청중의 반응(긍정에서 부정)→예수님의 대응→격분한 청중이 예수님을 끌고 가는 것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차례로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시어 이사야 예언서의 한 대목을 찾아 읽으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 이 대목은 이사야 예언서 61장 1-2절에서 일부 구절(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주어)을 빼고 58장 6절(억압받는 이를 자유롭게 내보내며)을 덧붙인 것입니다. 마지막의 “주님의 은혜로운 해”는 레위기 25장 8-13절에 나오는 ‘희년’을 가리킵니다. 희년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라는 구절은 희년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를 성별할 때에 나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1열왕 19,16 참조) 그렇다면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예언자로서 직접 희년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층 더 놀랍게도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는 분일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또한 희년에서 선포되는 내용을 실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좋게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지요. 하지만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순간 그들은 돌변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4,22) 이 말투에는 ‘우리가 너의 출신을 아는데 네가 잘나 봤자 얼마나 잘났다고 그러나?’ 하는 업신여김 혹은 비아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들을 반박하십니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격언을 인용하는 것을 시작으로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일화를 들면서 당신 말씀을 은총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자렛 사람들의 오만과 불손을 질타하십니다.(4,24-28) 이 말씀에 사람들은 오히려 격분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4,28-29) 이 위기 상황에서 루카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4,30)라는 표현으로 일화를 마무리합니다. 생각해봅시다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한 이야기는 중요한 의미를 전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 희년을 몸소 실현하시리라는 것을 예시합니다. 또 희년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가르침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시리라는 것을 예시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게 말하다가도 어느 순간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 아닌가?’ 하고 얕잡아봤듯이, 우리 또한 어떤 사람을 좋게 이야기하다가도 그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 사람의 훌륭한 점, 장점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 적은 없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혹시 나의 선입관, 고정관념에 집착한 나머지 진실을 말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화를 내고 그 사람에게 모욕을 준 적은 없었는지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 끝에서 밀어 떨어뜨리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고 루카는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느님 일을 하십니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고 그것을 확신하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유유히 자리를 뜨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 하느님의 영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시련이나 어려움에 지레 겁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둡시다 - 희년희년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그다음 해 곧 50년이 되는 해를 말합니다. 이 희년은 거룩한 해(성년, 聖年)로서, 안식년 때와 마찬가지로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나는 소출을 거둬서도 안 됩니다. 땅만이 아니라 가축도 쉬게 해야 합니다. 빚을 탕감해 주고, 종으로 팔린 사람을 다시 풀어줘 자기 집에 가게 하고, 땅은 소유주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이에게 구원과 해방을 선포하는 해입니다.(레위 25,8-15) 이 희년 제도에는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후 보시고 좋았다 하신 그 상태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원상회복의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이 불순종과 죄로 하느님과 멀어졌던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다시 새롭게 회복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희년을 가톨릭교회에서 받아들여 제도화한 것이 성년(聖年)입니다. 교회는 성년 때 일정한 조건을 이행하면 받아야 하는 모든 잠벌(暫罰)을 사해 주는 전대사를 발표합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것을 다시 원상으로 되돌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이창훈 기자 changhl@cpbc.co.kr 백영민2017.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