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연구자 김구정](//cpbc.co.kr/CMS/newspaper/2016/10/rc/656045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연구자 김구정<10·끝> 말하는 글쟁이, 그의 가톨릭 정신 김구정이 전교회장을 맡은 신암본당의 고등부가 선보인 ‘피묻은 쌍백합’ 공연에 참가한 학생들과 당시 본당 보좌 신부였던 고(故)최영수 대주교, 1970. 교회사 연구와 이를 대중화하기 위한 강연은 서로 다른 영역이다. 교회사 연구는 또한 직접적인 교회 홍보나 선교와도 구별되는 분야다. 그러나 오랫동안 우리 교회는 이 모두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해 왔다. 김구정은 당대에 사람의 심금을 울린 교회사가이고 작가며 강연자였다. 이 모든 분야에 신명이 있던 사람이었다.김구정은 신앙을 주제로 폭넓은 분야의 글을 썼다.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시, 소설, 극본, 역사 등 모든 장르를 넘나들었다. 그는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던 순교자들의 문학 정신을 이어받아 자신도 천주가사를 지었다. 이렇게 다양하게 활동하다 보니 그가 사용하는 이름도 많았다. 김구정은 본인 이름 이외에 이냐시오, 지원, 달성선인(達城仙人), 금솥 등으로 글을 썼다. 그 밖에 달선생, K 기자 같은 이름도 보인다.순교사 전파하며 신앙의 모범 보여그는 종이 위에 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자신이 직접 강연하며 신앙을 전파했다. 그는 박해시대 신자들의 일상사를 마치 옆집 아저씨네 집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듯이 엮어갔다. 그래서 1970년대까지 대구교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사였다. 또 그는 직접 순교극 대본을 쓰고 무대에 올리고 연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여러 본당에서 연극으로 공연됐다. 그는 일찍이 1934년 조선교회 150주년 기념대회를 계기로 병인박해를 배경으로 한 순교성극 「거룩한 피」를 썼다. 해방 이후에는 이순이 루갈다와 성웅 김대건 등에 관한 희곡을 썼다. 그는 이렇게 신자 대중에게 순교사를 체험토록 했다. 그는 또 트럼펫을 잘 다뤘고, 오르간도 쳤다. 이는 신학교 교육의 산물인 듯싶다. 물론 대구교구는 1910년대 명도회, 그 이후 성유스티노신학교에 브라스밴드를 운영하고 있었고, 이러한 문화적 환경은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을 고조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산대학에서처럼 자신이 거쳤던 학교의 교가도 지었다. 김구정은 고향인 신암본당에 돌아와서 전교회장을 했고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단장도 했다. 그는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세 시가 되면 어김없이 성체조배를 했다. 조배 후에는 성당 문앞에 있는 김기연의 집으로 가서 바둑을 두며 소주 한 병을 반주 삼아 부부 앞에서 순교사화를 구수하게 풀어놓았다. 그는 순교사를 썼으니 이제 성모님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되뇌었으나, 그 숙제를 우리 몫으로 남겼다. 대구대교구에서는 1981년 김구정에게 교구 설정 70주년 공로상을 수여했다. 김구정은 평생 성무일도를 바친 평신도였다. 그는 라틴어로 성무일도를 바쳤다. 자다가도 성무일도를 꼭 챙겼다. 프랑스어도 잘해 프랑스어로 된 기도서를 들고 다녔다. 그가 성경을 읽으면 성당이 쩌렁쩌렁 울렸다. 소리는 낭랑해서 모두 빨려 들어갔다. 그는 성경을 읽을 때는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읽으라고 당부하곤 했다. 순교 현장 누비며 순교 정신 기려김구정은 책을 집필할 때마다 짐을 싸들고 생각이 집중되는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몇 달씩 머물다 돌아오곤 했다. 그는 순교자들이 피 흘린 현장을 누비며 그 정신을 기렸고, 지방 교구의 발자취를 좇았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이 그에게 교회사 정보를 제공하거나 찾아왔다. 그리하여 그는 진목정, 정난주 묘 등 성지 개발에도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대구교구의 신나무골 성지 역사를 밝혔는데, 1977년 그가 쓴 비가 마을 앞에 세워졌다. 또한 그는 1868년 울산에서 순교한 이양등, 허인백, 김종륜 등의 묘소가 있던 경주시 산내면에 소재한 진목정의 유래를 밝혔다. 이때 순교자에게 감동한 호랑이 사연도 발굴해 냈다. 박해를 당해 순교자 세 가족이 진목정 뒤편 산 아래 단수골에 이르러 큰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 그곳에 피신했다. 밤에 호랑이 두 마리가 굴 앞에 나타났으니 그곳이 바로 호랑이 굴이었다. 이때 죽기를 각오한 허인백이 사정을 설명하고 박해가 그치면 돌아갈 테니 그동안 집을 좀 빌리자고 애원했다. 그 말을 듣고 맹수들이 어슬렁어슬렁 가버렸다고 한다. 김구정은 황사영의 부인인 정난주의 묘도 확인했다. 1970년에 그는 대구에서 황사영의 4대손 황찬수를 만나 그로부터 관련 자료를 받았다. 김구정은 1973년 김병준 신부의 도움으로 정난주의 무덤을 확인했다. 정난주는 1838년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 37년 만에 선종했다. 그런데 1909년 제주본당 2대 주임 라크루 신부가 추자도를 사목 방문했다가 황사영의 증손자를 만나 정난주의 생애를 듣게 됐다. 라크루 신부가 정난주의 삶을 프랑스에서 간행되던 전교지 「가톨릭 선교」에 소개하자, 프랑스에서 익명의 후원금이 답지했다. 라크루 신부는 황사영의 후손에게 집과 밭을 사줬으며, 이때 정난주가 유배 생활 중에 아들에게 보낸 서한을 얻었다. 김구정이 확인한 정난주의 묘는 오늘날 제주교구의 대표적 성지가 됐다.교회와 사회 관계 중시하며 교회사 연구김구정의 교회사 연구는 세계 교회사를 바탕으로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세계적 종교며, 교회사는 사상과 교리뿐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커다란 조직체의 역사라고 인식했다. 그는 인류 역사는 그리스도교를 떠날 수 없고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세계 역사의 정수라고 주장했다. 김구정은 또 가톨릭이 문명을 개화시켰고, 사회에 선한 이득을 끼쳤다고 믿었다. 그의 역사에 대한 생각과 이를 전달하는 메시지는 웅장했다. 그의 천주교와 한국사 이해는 이 맥락에서 전개됐다. 그는 천주교가 도입되기 전의 한국사는 암흑이라고 보았다. 이벽이 「천주실의」를 읽은 것은 동방박사가 예수 탄생을 예고하는 별을 본 것과 같았다. 그리고 이승훈이 영세함으로써 4000년의 밤이 새기 시작했다. 이벽과 이승훈 등 초기 신자들의 움직임은 동트는 새벽에 호미와 괭이를 잡고, 4000년 묵은 황야 삼천리를 개척하려는 생(生)의 약동이었다. 그렇게 이 땅에는 새벽이 오고야 말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 혜택을 누리려면 한국은 순교 정신으로 통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복식을 소개하면서 우리 복자들은 이러한 대사상을 이 땅에 수입해 이 민족에게 참된 행복과 문화를 베풀다가 희생됐고,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을 세계에 소개했다고 주장했다. 사상적 혼란에 고민하는 조선은 조선 순교복자의 열로 모든 병든 사상을 불사르면 참된 행복을 누리리라고 역설했다. 동시에 그는 시대와 사상은 유행을 탄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가톨릭은 시대를 초월한 처세 철학을 가르치는 영원한 진리다. 그러므로 세속인이 시대에 살려고 배우는 것과는 달리 시대에 속지 않기 위해 또 시대를 확고 불변한 진리로 지도하기 위해 가톨릭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원래 역사는 사건과 해석의 결합을 말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결합 작업을 본격적인 전문 분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김구정은 역사 연구 방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훈련을 받은 바가 없었다. 그는 박해 시대의 자료를 모으고 그 증언을 기록해 내는 작업을 교회사라고 생각했고, 이를 실천했다. 오늘날의 엄격한 기준으로 볼 때 그를 전문적 역사학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는 열정적으로 우리의 교회사를 전해 주었고, 사료를 모았다. 현장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 거기에서 교회사의 편린이라도 찾고자 했다. 이러한 데에서 그가 발휘했던 시대적 사명과 역할을 확인하게 된다. 교회사연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聖殿)을 짓는 작업이다. 성전은 내가 쌓지만 남이 사용하는 ‘봉헌’이다. 복음서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담은 책이라면 교회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생활과 증거를 수록한 책이다. 가톨릭의 가르침은 성경과 성전(聖傳)을 두 개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우리 교회의 박해 시대 순교자들이 드러냈던 삶의 기록은 우리의 성전이다. 김구정은 우리의 성전(聖傳)을 존중했고 이를 성전(聖殿)으로 되살려 내고자 노력했던 한 시대의 인물이었다. 실제로 한국 교회가 설립된 이후 교회사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까지 적지 않은 공백이 있었다. 김구정은 이 공백을 메꿔준 유능한 연구자였다. 1984년 5월 1일 김구정은 머리카락 수도 세신다는 하느님께 86년간 받은 생의 몫을 올리고 글로 남았다. 그가 더하고 싶었던 말은 주께서 조합하시리라. 그리고 오늘은 김효동(성물조각가)과 김명동(한국외방전교회) 신부 등 손자들이 조부의 체온과 소망을 전하고 있다. 김구정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통해서 또 다른 김구정이 조명되기를 빈다. <끝> 다음 호부터는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가이오) 편이 연재됩니다. 백영민2016.10.12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22>](//cpbc.co.kr/CMS/newspaper/2016/06/rc/642846_1.0_titleImage_1.jpg)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210번 나의 생명 드리니<하> 해버갈(Frances Ridley Havergal, 1836~1879). <22> 210번 나의 생명 드리니<하> 가톨릭성가집에 수록된 210번 성가는 모차르트의 친저성(親著性)이 의심되는 그의 12번째 미사곡 사장조의 자비송 선율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노팅햄(Nottingham)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곡은 모차르트의 위작이라고 여겨지고 있으며, 오히려 뮐러라는 이가 작곡자라는 논란을 앞에서 짧게 소개한 바 있다. 곡에 붙은 가사만 21개에 이르러 모차르트의 곡이라고 여겨져 온 탓인지 ‘Fight the good fight’나 ‘Thee will I love, O Lord’ 등을 비롯해 사용된 가사가 알려진 것만 약 21개에 이르는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가사는 영국의 해버갈(Frances Ridley Havergal, 1836~1879)이 쓴 ‘Take my life and let it be’이다. 영국의 문학가인 이 여성은 영국에서 ‘거룩한 시인’, 혹은 ‘찬미가 세계의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불렸다. 아버지가 성공회의 성직자였던 그녀는 평생을 걸쳐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과 주님께 대한 신뢰의 삶을 보여 주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대단히 지적인 여성이었으며 성경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구약 일부분과 신약 성경은 외울 정도였다. 또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음악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래도 대단히 잘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마치 성인과도 같은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는 그녀는 43살에 짧은 인생을 마감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제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 이 가사는 그녀가 38살 되던 해인 1874년에 쓴 것인데, 어느 날 그녀는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그 집 아버지의 부탁으로 아직 신앙인이 되지 못한 그의 두 딸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두 딸은 그녀와 오랜 대화를 나눈 후 드디어 신앙인이 되기로 했다. 그날 저녁 해버갈은 초대받은 집에서 잠을 이루려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아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기도하던 중에 이 가사와 같은 내용의 기도를 바쳤으며, 그것을 시로 쓰게 된 것이다.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주님, 제 삶을 받으시고 거룩하게 하소서. 제 모든 시간과 나날들을 받으시어 그침 없이 흐르는 찬미가 되게 하소서. 2. 제 두 손을 받으시어 당신 사랑으로 일하게 하소서. 제 발을 받으시어 당신 위해 바삐 일하는 아름다운 발 되게 하소서. 3. 제 목소리를 받으시어 나의 왕이신 당신만을 위해 항상 노래하게 하소서. 제 입술을 받으시어, 당신의 말씀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신앙과 삶의 일치 보여 우리 성가집에는 이 가사의 구성을 그대로 받아들여 각각 생명, 삶, 음성, 재능, 마음으로 구분해서 가사를 꾸미고 있다. 이런 구성은 이미 116번 ‘주 예수 바로 보라’ 성가에서 소개했던 “우리 예수님의 수족”과 같이 우리 교회의 오래된 기도 형태였다. 210번 성가는 ‘신앙 따로 삶 따로’인 우리를 다시 일깨워 준다. <가톨릭대 교회음악대학원 교수> ※가톨릭 성가곡들은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www.catholic.or.kr)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백영민2016.06.29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5) “이스라엘을 그 교훈과 지혜와 관련하여 칭송하는 것은 마땅합니다”(집회서 머리글)](//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5111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5) “이스라엘을 그 교훈과 지혜와 관련하여 칭송하는 것은 마땅합니다”(집회서 머리글)인간, 하느님 지혜 앞에 무릎 꿇다 인간에게는 알고자 하는 갈망이 새겨져 있는 듯합니다. 그저 지금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앎을 향하여 손을 내뻗습니다. 그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지만, 모든 문화에서 인간은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지혜문학’으로 분류되는 책들이 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잠언, 욥기, 코헬렛, 집회서, 지혜서가 여기에 속합니다. 지혜에 대한 관심이 이 책들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지혜에 관련된 문제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지혜에 대한 추구는 크게 발전했었습니다. 열왕기 저자가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 모든 이의 지혜와 이집트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고 말한다면(1열왕 5,10), 이 말은 역으로 동방과 이집트의 지혜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이스라엘이 그것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겠지요. 더 늦은 시기에는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지혜를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고, 구약 성경 가운데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의 책인 지혜서에서는 이들의 영향도 나타납니다. 사실 지혜문학은 특정한 장소에 한정되지도 않고 특정한 시대에 한정되지도 않습니다. 다른 나라들에도 지혜문학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의 책들이 그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지혜문학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보편적이고 국제적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회생활에서 성공하는 길은 무엇인가, 죽음과 고통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런 문제들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입니다. 또한 지혜문학이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법도 보편적입니다.지혜문학의 특징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지금은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그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출발점이 인간 이성이라는 점입니다. ‘출발점’이라고 앞에 붙여놓은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여기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출발점에서, 토라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알려 주신 율법에서 출발하고 예언서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시작하는 데에 비하여, 지혜문학은 인간 이성의 추구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의 머리로 세상의 질서를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질서를 보면서 하느님을 감지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 창조 질서입니다. 우주와 자연 현상의 질서를 바라보며, 그 안에 하느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고 그로부터 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입니다.구약 성경 지혜문학의 첫 단계인 잠언은 주로 이렇게 세상의 질서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고전적 지혜’라 부릅니다. 다른 여러 나라의 지혜문학과 공통된, 아주 전형적인 지혜문학의 모습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이 세상의 질서에 관심을 집중하며, 인간의 행위에는 반드시 갚음이 있음을 역설합니다. 관심은 현세에 집중되어 있으며 선과 악에 대한 갚음도 현세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그런데, 이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지혜문학의 출발점이었던 인간의 지혜로 이 세상의 질서를 파악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디에선가는 분명 한계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일이 원리원칙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이 세상에서 언제나 착한 사람이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 살면서 언젠가는 체험하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고전적인 지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게 됩니다.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 가운데서는 욥기와 코헬렛이 이 단계를 대변합니다. 잠언이 이 세상의 정돈되고 질서있는 영역에 머물렀다면, 욥기와 코헬렛은 세상의 끝까지 가서 그 한계선을 붙잡고 몸부림칩니다. 인간의 지혜에 한계가 있음을 확인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욥기와 코헬렛입니다.하지만 성경의 지혜문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 한계선에서, 현인들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인간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지혜를 알고 계신 분이 하느님이시며, 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지혜를 알려 주심을 발견합니다. 아니,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이미 알려 주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위에서 지혜문학의 ‘출발점’이 인간 이성이라고 했지요. 말하자면 철학적 사고와 유사하게, 처음에는 인간의 머리로 지혜를 깨달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지혜문학만이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의 지혜문학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었습니다. 지혜문학의 출발점은 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 지혜문학의 특징은, 마지막에 가서 계시로 돌아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조상들에게, 구체적으로는 모세를 통하여 주셨던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지혜를 알려 주셨음을 깨달은 다음, 집회서와 지혜서는 토라로 돌아갑니다. 참된 지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토라 안에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 1,7).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은 이 말로 시작하여 이 말로 끝납니다. 인간의 이성을 출발점으로 하면서도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이는 참된 지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 구약 성경 지혜의 특징이었습니다.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 평화신문2016.01.19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 글라스] 26. 1970년대 이후 한국의 스테인드글라스](//cpbc.co.kr/CMS/newspaper/2016/07/rc/646310_1.0_titleImage_1.jpg)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 글라스] 26. 1970년대 이후 한국의 스테인드글라스한국 작가의 유리화, 한국 교회 정서 담아 남용우, 의왕 성 라자로 마을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1975.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전쟁의 포화 속에 파손된 교회 건축물들을 재건하며 당대의 화가들이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 참여했고, 그들의 회화적 표현이 수용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1970년대 중엽부터 현재까지 제작되고 있는 한국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현대 미술을 과감하게 수용했던 유럽 스테인드글라스의 영향을 받았다. 다양한 회화적 표현이 도입되어 순수 미술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유학파 작가들, 유리화 부흥 이끌어1970년대는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국내 작가들에 의해 스테인드글라스가 제작되기 시작한 매우 중요한 시기다. 유럽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연구한 고 이남규(루카, 1931~1993)와 남용우(마리아, 86)가 1960년대 말 귀국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 스테인드글라스의 부흥을 이끌었다. 이들은 각각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의왕 성 라자로 마을 성당을 시작으로 서구의 추상적 경향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들을 선보였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신의 회화 세계와 20세기 프랑스, 독일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나타난 추상적 경향이 수용된 작품을 제작하고자 노력했다.1980년대에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이하여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성당이 건축됐고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한 관심과 수요도 날로 증가했다. 또한 1984년에 개최된 ‘영원의 모습’(Images of Eternal)전에서 마르크 샤갈, 알프레드 마네시에, 장 바젠, 라울 위박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소개돼 국내 가톨릭 미술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교세 확장, 한국적 유리화 등장1970년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20세기 유럽 스테인드글라스의 추상적인 표현을 바탕으로 비가시적인 존재를 형상화하는 데 주력했다면, 교세가 확장되고 스테인드글라스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고유한 정서가 반영된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즉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작품을 선호하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상황이 작품에 더 적극적으로 반영됐다. 이남규의 1980년대 이후 작품과 1990년대 이후 최영심의 작품에 표출된 성경의 구상적 표현은 다양한 페인팅 기법을 구사함으로써 한국 스테인드글라스의 기법적인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테인드글라스와 건축의 대화프랑스의 미술사가 베르나르 도리발(Bernard Dorival)은 “스테인드글라스는 건축을 필요로 하고 건축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필요로 한다. 이 두 예술 간에 대화가 이루어지면 서로가 더욱 풍요로워지지만, 이 중 하나가 입을 다물면 나머지 하나도 침묵을 선고받게 되는 것”이리며 건축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상호 공존하면서 진화해가고 있음을 이야기했다.우리나라에서도 1980~1990년대 다원화된 교회 건축 양식과 더불어 건축 구조에 따른 다양한 양상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이 시도되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스테인드글라스는 회화 작업처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설치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건축에 존재하는 창의 위치와 여러 조건을 고려해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내포하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건축 초기 단계부터 건축가와 함께 논의하며 충분한 소통의 시간을 거쳐 작업하는 스테인드글라스 설치 사례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어 건축적 예술로서의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전쟁의 포화 속에 파손된 교회 건축물들을 재건하며 당대의 화가들이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 참여했고, 그들의 회화적 표현이 수용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1970년대 중엽부터 현재까지 제작되고 있는 한국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현대 미술을 과감하게 수용했던 유럽 스테인드글라스의 영향을 받았다. 다양한 회화적 표현이 도입되어 순수 미술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백영민2016.07.26
![[원로 사목자를 찾아서] (2) 최창화 몬시뇰(서울대교구 원로 사목자)](//cpbc.co.kr/CMS/newspaper/2017/07/rc/689920_1.0_titleImage_1.jpg)
[원로 사목자를 찾아서] (2) 최창화 몬시뇰(서울대교구 원로 사목자)사제, 하느님 사업 쉬어선 안 돼… 어르신 위한 사목하고 싶어 서울 선릉로 김성학관에서 생활하고 있는 최창화 몬시뇰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래와 어르신들을 위한 사목을 하고 싶다고 했다. 리길재 기자 “일생을 검고 긴 수단 밑에서 성의를 맵시 있는 양복으로 아시고, 매일 미사 지내심을 천주님의 뜻으로 아시고, 또 기쁜 마음으로 길 잃은 양들을 인도하소서. 그리고 마음이 썩고 가난한 죄인들을 애인과 같이 손을 잡아 이끌어주시고, 길을 모르는 불쌍한 무리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하는 포옹을 해 주소서.”1971년 12월 사제 수품 때 서울대교구 오류동본당 신자들이 쓴 축하 글이다. 서울대교구 원로 사목자 최창화(토마스 아퀴나스, 74) 몬시뇰은 사제가 된 후 신자들로부터 받은 첫 편지 속의 염원을 지금까지 마음 깊이 새기며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제로 살아가고 있다. 2014년 2월 서울대교구 특수 사목 담당 교구장 대리직을 사임하고 사목 일선에서 물러난 최 몬시뇰은 순교자 현양 사업과 아시아 본토인 사제 양성을 통한 복음화 사업,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남북한 교류와 인도주의 대북 지원 사업에 큰 업적을 남긴 착한 목자요 주님의 충실한 종이다. 최 몬시뇰은 1943년 평안남도 안주읍에서 출생해 1971년 사제품을 받았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수품 동기다. 서울대교구 돈암동ㆍ청량리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구파발ㆍ응암동ㆍ개봉동 주임을 지냈다. 1987년 가톨릭중앙의료원 원목실장 겸 강남성모병원 원목으로 처음 특수 사목을 시작한 그는 영국 연수를 마친 후 돈암동ㆍ천호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했다. 이 시절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 총무를 겸임한 그는 새천년기가 시작하기 전인 1999년 서울대교구 사무처장으로 임명돼 7년간 재임하면서 서울대교구 시노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003년 8월 몬시뇰로 서임된 그는 2006년부터 2014년 사목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중서울지역과 특수 사목 담당 교구장 대리로 일하면서 민족화해위원회와 직장 사목, 일반병원 사목, 경찰 사목, 순교자현양회의 기틀을 마련했다. 요즘 최 몬시뇰은 “고독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면서 “기회가 있다면 또래 은퇴자들과 어르신들을 위한 사목을 하고 싶다”는 열정을 드러냈다.특수 사목 사제와 원로 사목자를 위한 숙소인 서울 선릉로 김성학관과 경기도 용문 집을 오가면서 생활하고 있는 최창화 몬시뇰을 만났다.▶근황이 궁금하다. “고독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매일 미사와 기도로 일과를 시작해 성경 묵상, 클래식 기타ㆍ아코디언 독학, 영어 공부, 텃밭 가꾸기 등으로 소일을 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깨며 팔다리며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해, 한 달에 4번은 정기적으로 병원에 간다. 찾아오는 이들도 없어 은수자처럼 살고 있다. 특별히 감사 기도를 많이 한다. 하느님과 신앙을 전해 준 선조들에게, 부모에게, 교회와 은인들에게 감사하는 기도를 바친다. 또 함께 교회 안에서 살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사제들과 교우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이젠 사목과 같은 공적인 일과는 확연히 멀어진 것 같다.” ▶갑자기 사목 일선에서 물러나셨다.“개인적으로 교구장 대리 자리가 아니더라도 2016년 병인 순교 150주년까지 일하고 싶었다. 2013년 12월 말 서울대교구에 젊은 두 분의 주교가 탄생했다. 경사요 축복이었다. 그때 피정 중이었는데 새 주교들이 사목을 잘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교로서 첫 출발점에 있는 두 분께 내가 장애물이 되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일선에서 물러나는게 도리라고 결심했다. 아쉬움도 컸다. 무엇보다 전혀 준비가 안 되었기에 스스로 결정하고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방황도 많이 했다.”사람이 그리워서인지 최 몬시뇰은 된더위에도 밖에 나와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땀이 맺힌 걸로 봐서 한참을 나와 있었던 것 같았다. 숙소로 들어가자마자 찬 생수를 권하면서 서소문성지 조성사업을 걱정했다. 최 몬시뇰은 최기복 신부와 함께 서소문역사공원과 순교성지 조성 사업이 내년에 완공되면 한국 천주교의 과거 오늘 미래를 작품화한 나전칠화 작품을 설치할 준비를 하고 있을 만큼 아직도 순교자 현양 사업에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었다.▶꺼져 가던 순교 신심에 불을 지피고 순교자 현양 사업도 활성화하는 큰일을 하셨는데. “2003년 몬시뇰에 서임된 직후 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순교자를 본받기 위해 순교자 현양 미사, 기도, 성지순례, 성지 안내 봉사자 양성 등 많은 일을 했다. 그중에서도 보람된 게 몇 가지 있는데 먼저 서울 여의도에 103위 시성 기념비와 광화문 광장에 124위 시복 기념 표석을 설치한 일이다. 103위 시성 기념비를 세울 때는 참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큰 도움을 준 여규태 전 한국평협 회장께 감사드린다. 또 2013년 서울대교구 성지순례 길인 말씀ㆍ생명ㆍ일치의 세 길을 조성해 염 추기경께서 선포한 일이다. 무엇보다 보람있는 것은 김대건 성인 기념 사업회를 창립해 아시아 본토인 사제를 양성해 복음 선교의 길을 초석을 마련한 일이다.”▶김대건 성인 기념 사업회에 사재를 내놓을 만큼 애정이 컸던 걸로 알고 있다.“원래 이 일은 1997년 배갑진 신부가 ‘김대건 성인 장학회’를 창립하면서 시작됐다. 정진석 추기경이 먼저 사재를 털어 장학기금을 내놓으면서 종잣돈이 돼 2008년 김대건 성인 기념 사업회로 새롭게 출범했다. 개인적으로 이 사업회를 위해 선친의 조의금 전액을 내놓기도 했다. 이후 국제신학교인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중국, 베트남, 스리랑카 신학생들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5명의 사제를 배출했고 현재 4명의 신학생이 공부 중이다. 이들이 한국 교회를 얼마나 이해하고 협조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아시아 선교를 위해 본토인 사제를 양성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최 몬시뇰은 1995년부터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장으로 퇴임 때까지 20년 가까이 일했다. 민족화해센터를 짓고 다섯 차례 북한을 방문해 다양한 대북 지원 사업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했다.▶만 19년을 우리 민족을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셨다.“소임을 맡았을 때 북에서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때였다. 무엇보다 북한 주민들의 식량난을 해소해 주기 위해 노력했다. 옥수수와 밀가루, 영양제, 약품 등을 지원했다. 문제는 북한이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통일 이전이라도 이산가족끼리 왕래가 정례화 됐으면 좋겠다. 서신 왕래만이라도 자유로웠으면 한다. 그리고 민간 교류와 인도주의적 지원 사업은 중단되어선 안 된다. 새 정부가 남북 대화를 시도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잘하는 것이다.”▶남북 교류가 중단된 상태이다. “무엇보다 영적으로 강해져야 한다. 우리 민족을 위해 또 통일을 위해 더 많은 기도와 지원이 필요하다. 다시 통일의 붐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민화위 활동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탈북자들을 교회 내 통일 일꾼으로 양성해 그들을 중심으로 기도 운동과 민화위 홍보 사업, 대북 지원 사업을 펼치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을 듯하다. 탈북자들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면 신앙과 열정으로 고향과 조국에 대한 평화 운동을 펼칠 것이다.”그는 46년 사제 생활 동안 절반씩 본당 사목자와 특수 사목자로 살았다. 인천교구장 정신철 주교를 비롯한 아들 신부만도 10명이나 된다. 사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맏형 최창정(요아킴, 1937~1984) 신부에게 배웠다.▶본당과 특수 사목 분야를 각각 20년 넘게 고루 해 보셨다.“1999년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께서 교구 사무처장으로 와서 일하라 했다. 그때 나를 ‘밀레니엄 사무처장’이라고 불렀다. 6년간 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영적으로나 외적으로 많이 성장했다. 본당과 특수 사목 분야의 한정된 시야에서 벗어나 교구 전체를 보는 시야를 가지게 됐다. 2000년 대희년을 지내고 교구장을 보필해 교구 시노드를 진행했다. 의정부교구도 독립시키고 생명 운동 등을 추진하면서 사제는 뭐든지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맏형인 고(故) 최창정 신부가 큰 버팀목이었다고 들었다.“형님은 늘 좋은 사제가 되라고 조언을 해 줬다. 그때는 잔소리 같았는데 돌아가신 후 내게 아무도 충고해 주는 사람이 없다. 미사 중에 형님을 위해 많이 기도한다. 나보다 10년 앞서 1961년 사제품을 받은 형님은 1965년 군종신부로 파월했다가 고엽제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 늘 기침을 하고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그런데도 독일의 한국인 간호사와 광부, 선원들을 위해 자원해 함부르크 교포 사목을 떠났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벗이 됐다. 1984년 방한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강복을 받은 후 선종했다.”▶후배 사제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사제 생활은 변덕스러운 날씨와 같다. 좋은 날이 있으면 흐리고 폭풍우가 오는 날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힘들 때마다 속상해 하지 말고 웃어라. 많이 웃을수록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잔걱정은 필요 없다. 걱정을 끊고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라. 매일 하느님께 사제로 잘살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라. 기도하면서 사는 게 중요하다. 50년 가까이 사제로 살다 보니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요 도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매사에 감사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목하길 바란다.”▶사제로서 하고 싶은 공적인 일이 있다면“우리 또래와 어르신들을 위해 사목하고 싶다. 한국 교회가 당면한 과제 중 하나가 노인사목과 원로 사목자 문제다. 매해 수십 명의 원로 사목자들이 나올 텐데 교구가 그들의 숙소조차 모두 보장해 줄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젊은 사제들이 노인 사목을 효과 있게 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원로 사제들을 본당 사제들과 협력해 노인사목을 할 수 있는 방안을 교구에서 마련해 줬으면 한다. 원로 사목자들이 본당 일에 간섭하지 않는 장치만 마련한다면 큰 문제가 안 될 듯하다. 특수 사목은 많은 부분에서 교구 지원을 직접 받아야 한다. 그래서 본당을 활성화해야 한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업을 쉬어선 안 된다. 그 나이에 맞춰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백영민2017.07.26
![[생활 속의 복음]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루카 2,16-21)](//cpbc.co.kr/CMS/newspaper/2016/12/rc/665810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루카 2,16-21)정연정 신부
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주임 오늘은 2017년 새해 첫날이며, 교회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아울러 ‘세계 평화의 날’을 지냅니다. 올 한 해도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모습을 닮아 살면서 주님의 평화가 온 누리에 충만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1.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5년 전에 이미 한 차례 암에 걸렸던 자매님이 다른 곳에 암이 재발하여 입원하게 되었다고 병자성사를 청하셨습니다. 제 눈에 들어온 그분은 깡말라진 몸에, 머리는 빡빡 깎은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발병하기 전에 그분은 아들 셋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유치원 버스 기사도 마다치 않았던 강인한 엄마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분의 눈에 고인 눈물에서 아이를 낳은 모성(母性)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 신비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그들이 거기에(베들레헴)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루카 2,6) 예수님을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십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지녔던 모성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모성도 사신 분이십니다.2.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오늘 제2독서에서 우리는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갈라 4,4)는 구세경륜(救世徑輪)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선포를 들었습니다. 이 선포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게 됐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아울러 마리아께서 지니신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신적 모성(神的母性)에 대한 믿음을 자연스럽게 고백하게 된 단초(端初)를 제공합니다.그리하여 에페소 공의회(431년) 교부들은 “마리아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당신의 동정 품 안에 잉태를 하시어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 4항 참조)3.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벨기에의 쉬넨스(L.J.Suenens) 추기경은 “마리아의 존재에 관하여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합니다. 즉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신 그리스도는 한 분의 어머니가 계시고, 그 이름은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고 밝혀주면서, 성모님의 모습과 품성에 대하여 헤아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마리아께서 이미 처음부터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명에 대해 ‘완전히 개방된’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습니다.(「구세주의 어머니」 39항 참조)4.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 : ‘앞서는’ 믿음몇 년 전에 한 신자로부터 받은 편지의 일부입니다. “요즘 저는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며 세상의 경이(驚異)를 체험하는 것만 같은 심정입니다. 바라고 희구하고 매달리는 기도에서 벗어나 내 안에, 우리 안에 깃든 주님의 뜻을 살피고 기다리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마리아의 영웅적인 믿음은 교회의 사도적 증언에 ‘앞서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구세주의 어머니」 27항 참조) 여기서 ‘앞서는’ 믿음이 바로 우리가 성모 마리아로부터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성모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큰 것을 이루려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는 자비’(루카 2,54 참조)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 길이 성모님께 하느님의 역사와 섭리를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 길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었습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성모님의 믿음을 본받아 더욱더 주님께 의탁하여 평화와 사랑의 길에서 충만하게 되시길 빕니다. 아멘. 평화신문2016.12.28
![[아! 어쩌나] 375. 회개란 무엇일까요](//cpbc.co.kr/CMS/newspaper/2017/01/rc/667504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375. 회개란 무엇일까요홍성남 신부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문 : 오랫동안 냉담하다 최근에 다시 성당에 나오게 됐는데, 저를 다시 나오게 한 분이 “회개하고 죄를 끊고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수도자처럼 사는 분이라 심리적 부담감이 커집니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에선 냉담 교우로 살 때가 더 편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성당에 가기가 무섭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일까요?답 :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님의 문제는 신앙적 과제들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여서 그런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선 회개에 대한 버거운 마음을 가볍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회개라고 하면 길거리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삶이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앙에 매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어떤 종교는 신자들에게 그런 삶을 요구해 가정 파탄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그러나 회개는 그렇게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심리적 문제가 심각한 이들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회개란 ‘마음의 눈이 뜨여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감사하지 않고 짜증 내고 분노하고 우울해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역경을 겪으며 자신의 살아있음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그분의 은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때 자신이 교만했음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 일상의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회개한 마음입니다.또 자신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분노하다가 그 분노의 끝자락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볼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많은 죄를 지은 자신을 용서해주셨구나 하는 자각이 들면 부끄러움을 느끼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자신의 이기적인 감정과 욕구에 사로잡혀 심술 난 아이처럼 짜증 내고 우울해 하면서 살다가 심리적으로 눈이 뜨여 하느님 현존을 느끼고 감사하고 용서를 청하는 삶을 회개하는 삶이라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들은 마음이 즐겁고, 기도하고 싶어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맛을 느낍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체험했기에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지요. 이처럼 회개에서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러한 감사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억지 회개를 하고자 하면 심리적으로 부담감이 생기고 병적인 죄책감과 자기 기만적이며, 때로는 자학적인 기도 생활을 할 수도 있으니 조심할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신의 모습을 다듬으려 합니다. 그처럼 우리도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체험하면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죄를 끊으려 노력합니다. 이렇게 물이 흐르듯 마음이 변화를 일으켜야 회개가 주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회개에 집착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커녕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길거리 회개 이벤트를 벌이는 광대 짓을 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영성 심리 관점에서 회개는 자기의 삶을 다듬어가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떼이야르드 샤르댕 신부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정점을 향해 진화해가는 존재’입니다. 성숙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삶이며,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고 성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회개하는 삶을 산다면서 마음이 어둡거나 무겁고 우울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회개이고 피상적인 회개, 작위적인 회개로 일어나는 병적인 현상입니다. ※상담을 원하시면 010-5032-7422로 ‘문자’를 보내주세요. 평화신문2017.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