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교구장 새해 사목교서] 원주교구-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청소년의 해](//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6625_1.1_titleImage_1.jpg)
[전국 교구장 새해 사목교서] 원주교구-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청소년의 해 원주교구장 김지석 주교 우리 교구는 올해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지내는 신앙의 해라는 바탕 위에서 '희망의 해'로 맞이하고자 하며, 이어서 내년에는 '사랑의 해'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믿음과 희망, 사랑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나타나기에, 교구 설정 50주년이 되는 2015년을 준비하는 3년을 믿음, 희망, 사랑의 해로 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 백성이 어려움에 처한 시기마다 희망의 메시지는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근거는 믿음입니다. 희망은 긍정적 힘입니다. 어려운 현실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반복되는 좌절은 우리를 절망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희망을 품은 이는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상실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에 처했지만, 그럴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다가가시어 희망을 건네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절망의 총체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고, 절망의 상징인 닫힌 무덤을 열고 나오시어 희망의 상징이 되셨습니다. 희망은 절망조차도 덮지 못하는 그런 긍정적 힘입니다. 희망은 잘못된 나와 우리를 바로 세우는 힘입니다. 희망은 실현을 위한 노력을 품고 있어야 참다운 희망이 됩니다. 희망은 미래에 존재하지만, 현실에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관계해야 합니다. 거울을 통해 내 자신을 들여다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고쳐나가는 것처럼, 희망은 현재의 부족한 부분을 깨닫고 고쳐나가도록 나를, 우리를 채찍질하고 격려해 나가게 해줍니다. 희망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사이에 존재합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사이에 희망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가는 곳'이 아니라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는 곳이라면 나 혼자만 잘 살아 그곳에 가면 되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오는 것이기에 지금 이곳에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희망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주제가 청소년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이라는 주제로 '청소년의 해'를 보내면서 청소년에 대한 교회의 배려와 관심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청소년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결손가정의 청소년이 주변에 수없이 존재합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갖지 못하고 자라난 청소년은 어른을 공경하지 않습니다. 청소년 폭력과 자살하는 학생들 이야기가 뉴스의 주요 소재가 되었습니다. 청소년에 대한 고민과 배려는 바로 오늘 시작해야 합니다. 청소년은 교회의 '미래'가 아니라 '오늘'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어려움을 이야기합니다. 경기불황으로 서민경제는 시름에 잠겨있고, 가정 붕괴와 생명경시풍조는 날로 확산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어려움을 절망으로 맞이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조은일2012.12.31

“자연은 하느님 작품”… 가우디의 삶과 건축가우디 서거 100주년 맞아 시복 조사 맡은 신학자가 쓴 전기...방대한 자료·신학적 해설 독보적 스페인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정 대성전) 전경. 레오 14세 교황은 지난 6~12일 스페인 사목 방문 기간 중 144년 만에 완공된 이 성당의 중앙 첨탑 봉헌식을 주례했다. 가톨릭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1852~1926)가 설계했으며, 올해는 그의 서거 100주년이다. OSV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 / 아르만드 푸치 신부 / 송병선 옮김 / 한스미디어 레오 14세 교황이 지난 6~12일 스페인을 사목 방문했다. 방문 기간 중 교황은 바르셀로나 성가정 대성전(바실리카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중앙 첨탑인 ‘예수 그리스도 탑’ 봉헌식을 주례하고, 설계자인 가경자 안토니 가우디(1852~1926) 서거 100주년 장엄 미사를 주례했다. 144년 만에 성가정 대성전이 완공(내부는 미완)된 데다 가우디 서거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다룬 책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은 산 푸시아대학 아테네오(바르셀로나) 신학부 학장 및 총장을 지낸 아르만드 푸치 신부가 쓴 책이다. 가우디의 고향 카탈루냐 레우스 인근 지역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스스로를 가우디가 살았던 땅의 풍경과 신앙, 언어와 감각을 몸으로 알고 있는 연구자라고 말한다. 실제로 성가정 대성전을 장식하는 상징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해온 학자며, 가우디의 시복 절차에 필요한 생애와 신앙, 영적 여정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맡기도 했다. 가우디는 생전에 말과 글을 많이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세속적인 작품과 종교 작품은 대부분 보존되어 있다. 저자는 교회의 공식적인 지원 하에 수집한 방대한 실증 자료, 동시대 기록과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가우디를 종합적으로 복원한다. 특히 그를 단순한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빛과 공간, 재료와 형태를 자신만의 미학으로 다루는 독특하고 유일한 존재’로 바라본다. 가우디는 자연을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작품’으로 보았고, 자신의 건축이 주변 환경과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기를 바랐으며, 자연 속에서 건축의 원리를 발견하려 노력했다. “가우디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아름다움이니, 진리가 없으면 예술도 없다. 그리고 진리를 찾으려면 창조된 존재들을 잘 알아야 한다.’ 가우디는 자연이 하느님의 계시를 보여주는 첫 번째 방식이며, 두 번째는 성경, 곧 성서의 글이라고 여긴다. 자연과 성경 속에서 하느님은 말씀하시고 자신을 드러낸다.”(147쪽) 책은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구엘 공원, 콜로니아 구엘 교회, 마요르카 대성당 복원 작업 등 가우디의 주요 작품을 하나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다. 작품 곳곳에 숨어 있는 십자가와 묵주, 복음서의 상징, 자연과 빛의 의미, 카탈루냐 문화와 건축적 전통까지 세밀하게 추적한다. “가우디는 삼위일체의 신비, 곧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위격에서는 세 분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숫자 ‘3’과 그 배수들, 즉 3×2.5인 7.5, 3×4인 12, 3×3인 9에 2를 곱한 18, 12×2인 24는 대성당 내부와 외부 공간의 치수를 조화롭게 규정한다. 그래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삼위일체에 대한 찬가이다.”(290쪽) 1894년 사순절의 단식과 정신적 위기를 겪은 이후 가우디는 자신의 작품 안에 가톨릭 신앙과 상징을 더욱 깊이 담아내기 시작했다. 말년에는 성가정 대성전 공사에만 전념하다시피 했고, 직접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한 모금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책은 제목대로 가우디의 삶과 일에 대한 방대한 자료와 신학적인 해설이 독보적이다. 다만 모든 이미지가 흑백으로 처리돼 가우디가 담아낸 지중해의 찬란한 색감을 확인할 수 없는 점은 아쉽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6.06.10
![[생활속의 복음] 전능하신 하느님](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5/26/DDc1779786243600.jpg)
[생활속의 복음] 전능하신 하느님 헨리 오사와 태너 작 ‘지붕 위의 그리스도와 니코데모’. 장남에 대한 편애에 불만을 가진 차남이 엄마에게 물었다. ‘아들 맞나요?’ 엄마는 ‘너는 아들이지’라고 답한다. 두 아들의 엄마에게 장남·차남은 더한·덜한 아들로 가를 수 없는 똑같은 아들이다. ‘장남’, ‘차남’, 둘의 연결고리인 ‘형제’는 삼위일체 이해에 유익하다. 장남·차남·형제에 성부·성자·성령을 대입하면, 다음의 진술이 가능하다. ‘장남이 아닌’ 차남·형제가 ‘장남과 똑같이’ 아들인 것처럼, ‘성부가 아닌’ 성자·성령은 ‘성부와 똑같이’ 하느님(주님)이다. 단 아들보다 선재(先在)한 엄마 편에는 복수형 ‘아들들’인 반면, 선재를 구상할 수 없는 ‘창조되지 않은’ 성부·성자·성령은 단수형 ‘하느님’이다. 초대 교회는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삼위일체를 ‘믿을 교리’로 정립하였다. 이 과정 중 두 반론이 등장했다. 하나는 유다교의 경직된 유일신론에 입각한 성자·성령의 신성에 대한 부정이다. 이는 성부가 옷을 바꾸어 입듯이 성자와 성령으로 변형하여 한시적으로 활동했다는 견해와 연계한다. 다른 하나는 신성의 정도로 서열을 매긴 종속 관계다. 이는 다신론 배경의 선교지에서 신성이 공인된 성자·성령이 성부보다 덜한 신성을 가진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그리스 철학 용어를 도입하여 장남·차남·형제처럼 ‘서로 똑같지 않은’ 성부·성자·성령을 ‘위격’으로, 아들처럼 ‘서로 다르지 않은’ 하느님을 ‘실체’로 지칭하였다. 유일신론의 기조(1티모 2,5 참조)를 고수한 신약성경은 성자·성령의 신성을 명백히 진술한다. 성자의 육화로 출현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다.(콜로 2,9 참조) 그리스도는 아버지-하느님을 ‘들려주고’ 아들-하느님을 ‘보여주며’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주듯 영-하느님을 ‘보내준다.’ 성자를 통해 성부로부터 파견된 성령은 하느님이다.(1코린 2,10 참조) 성령은 아버지-하느님을 ‘부르게’ 하고 아들-하느님을 ‘기억하고 고백하게’ 하며 성부와 성자를 증언할 힘을 부여하여 ‘활동하게’ 한다.(사도 1,8 참조) 현대 교회는 삼위일체에 대한 연역적 설명보다 세 위격을 표본으로 교회가 중시하는 공동체성을 해명하는 귀납적 설명을 선호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핵심은 공동체성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력 행사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의 협업·분업 양식이 아니라 세 위격의 ‘사랑에 기초한 자기 비움’(필리 2,7 참조)이 창출한 전능성의 표출 양식이다. 아들에게 권한·책임을 전적으로 맡긴 아버지(요한 3,17 참조)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려고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마태 26,42 참조), ‘아버지와 똑같이’ 영에게 권한·책임을 전적으로 맡긴 아들(요한 15,26 참조)과 ‘아들과 똑같이’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하는 영(티토 3,6 참조)이다. 경청과 소통이란 감투에 숨겨진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 행태, 대화와 친교란 명패에 가려진 ‘꼰대’(훈계·지시) 행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력 행사 방식에 부합될 수 없다. 조직 문화와 서열 구조의 편 가르기, 줄 세우기에 능숙한 이는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왜곡할 수 있다. 삼위일체는 인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경험할 수 없기에 ‘신비’이지 않을까? cpbc2026.05.27

원죄 이야기 속 하느님의 온유[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2) 어릴 적 동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키곤 했습니다. 만일 하느님 앞에서 거짓을 말하면 크게 분노하실 것이라고 겁을 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참말을 끌어내는 데는 효과가 있었습니다만, 심각한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동생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원죄를 지은 인간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처분은 영원한 저주도 돌이킬 수 없는 천벌도 아닙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느님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하느님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시고는 치미는 분을 참지 못하여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신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전지(全知)하십니다. 그러니 선악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숨은 인간 앞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첫 말씀은 이러합니다. “너 어디에 있느냐?”(창세 3,9) 이 질문은 하느님의 염려를 드러냅니다. 경찰이 잠적한 범죄자를 수색하는 것이 아니라 제 딴엔 큰 사고를 치고 어딘가 숨어버린 자녀를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얘야 어디 있니? 괜찮으니 어서 나에게로 오렴.” 물론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은 아이가 어떤 잘못을 하든 마냥 오냐오냐하는 아버지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자녀와 갈등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실을 부정하는 거짓 온유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온유는 진실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인간의 잘못을 꾸짖으시지만, 인간을 단죄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봅시다“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창세 3,17)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는 아담과 하와(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 부조) 여기서 하느님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땅을 저주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땅의 저주는 오로지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하여 재난이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고통의 책임을 하느님께 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비록 인간이 자초한 고통이지만, 그것을 겪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으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창세 3,21) 알몸은 연약함을 상징하고, 가죽옷은 영속적인 보호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두렁이 따위로는 알몸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직접 질긴 옷을 지어 인간을 입히십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러도 하느님은 인간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더 큰 은총이 내립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신 일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마치 하느님께서 매정하게 인간과의 관계를 끊어내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 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 3,22). 이것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신 이유입니다. 얼핏 듣기에 하느님께서 자신처럼 된 인간을 질투하여 내쫓으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들어보면 사실 이것은 추방이 아니라 인간을 보호하는 조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OSV 인간은 이미 성숙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소화할 수도 없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하느님과의 사랑의 친교 안에 제대로 들어가기도 전에, 즉 감당할 수도 없는 생명의 열매마저 따 먹을 판이었죠. 영원한 삶 자체가 아니라 그 삶이 어떠한 삶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는 생명의 열매는 먹으면 안 되는 것이죠.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알아서 선물로 주실 열매들이지만, 인간이 참지 못하고 스스로 따 먹으면 독이 든 과일이 될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사탄이 바란 것입니다. 사탄이 인간이 잘 되기를 바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을 보호하려는 조치로 아담과 하와를 생명나무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에덴동산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천사들에게 불 칼을 들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 단호한 조치는 하느님의 온유함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즉, 이로써 하느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하신 것, 인간을 포기하고 놓아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인간이 생명의 열매마저 따 먹는 치명적인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온유함은 우유부단하고 물러터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글 _ 함원식 신부(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cpbc2025.02.24
![[기톨릭 문화산책]<21>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5)](//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7907_1.1_titleImage_1.jpg)
[기톨릭 문화산책]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5)하느님 인간의 결합 상징하는 혼인잔치, 포도주로 기쁨 더해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와 마리아, 사도들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는다. 한창 잔치가 흥겨운 중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직 잔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고 아들에게 알린다. 이에 예수는 하인에게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여섯 개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고, 그것을 퍼서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가져가라 말한다. 하인들은 예수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항아리에 부은 물이 모두 포도주로 변한다. 이 작품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6~1337)가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인 카나의 혼인 잔치를 그린 것으로, 사실적 묘사가 탁월하다. 일반적으로 교회 미술에서 '최후의 만찬'이나 '카나의 혼인잔치'를 주제로 다룬 장면은 대개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기 위해 많이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조토가 제작한 '카나의 혼인잔치'는 스크로베니 경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중 한 장면이다. 이 경당은 이탈리아 파도바 갑부였던 엔리코 스크로베니(Enrico Scrovegni)가 고리대금업자였던 아버지 레지날도의 속죄를 지향으로 성모 마리아께 봉헌한 것으로 예수와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장면은 세 단으로 나뉘어 있는데 '카나의 혼인잔치' 장면 위에는 마리아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젊은 구혼자들이 묘사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죽은 예수를 안고 비탄에 잠겨 있는 마리아가 표현돼 있다. 표현된 인물 형상은 분명하게 구획된 실내 공간에 배치돼 그림의 이야기 전달을 넘어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다."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작품 : '카나의 혼인잔치', 조토 디 본도네 작 (1304~06년께, 이탈리아 파도바 스크로베니 경당) ● 빛의 신비 2단 : 예수님께서 카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결합(혼인), 믿음, 영광#신랑 예수와 신부 마리아 향연 식탁의 왼쪽에는 예수와 신랑이, 화면 중앙에는 왕비처럼 위엄있게 신부가, 그 옆에는 마리아가 앉아 있다.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는 아들에게 혼주를 도와 달라고 요청한다. 비록 예수는 아직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하인들에게 이른다. 예수는 마리아의 극진한 믿음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잔치에 첫 기적을 보인다. 믿음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든 것이다.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성모의 얼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녀의 표정은 믿음으로 가득하다. 왼쪽에서 예수는 물 항아리를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하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이는 마치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많은 사람이 모인 잔치에서 예수가 성자이며 구세주로 이 땅에 왔음을 증거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신성한 결합 카나의 혼인잔치를 주제로 다룬 그림들에서 신랑과 신부를 화면에 중점을 둔 것은 14세기 초부터다. 이전에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에 초점을 둬 물 항아리를 부각하거나, 신랑 신부는 아예 등장하지 않기도 했다. 조토의 작품에서 신부는 그림의 중앙에 마치 황후처럼 앉아 있고, 신랑은 예수의 옆쪽에 깍지를 낀 채 신부와 떨어져 앉아 있다. 하지만 그는 멀리서라도 신부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무엇인가 신부에 대한 각오를 다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이제 그림은 포도주 기적과 신기한 일에만 관심을 두기보다는 신랑과 신부의 신성한 결합을 부각하고 있다. #'좋은 포도주'를 마시는 사나이 그림 오른쪽 앞 부분에 흰 옷을 입은 하인은 막 새 술독에서 나온 포도주를 항아리에 따른다. 그 뒤에 불룩한 배에 붉은 옷을 입고 서 있는 사람은 포도주 맛에 감복했는지 술잔을 내려놓지 못하고 바라만 본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요한 2,9-10). 성경 내용에 따라 조토는 정결례에 필요한 물을 담기 위해 준비된 여섯 개의 항아리를 원근법적으로 앞줄과 뒷줄의 크기 차이를 통해 공간의 깊이를 나타낸다. 여기서 6이란 숫자는 메시아가 오기 전의 여섯 시기를 상징한다. 아담에서 노아, 노아에서 아브라함, 아브라함에서 다윗, 다윗에서 바빌론 유배, 바빌론 유배에서 요한 세례자, 요한 세례자에서 세상 끝날까지다. 일곱 번째, 즉 완전한 수를 상징하는 시기는 메시아의 도래를 뜻한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 성 베르나르도는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로 보고 그리스도와 인간의 사랑을 설명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 관계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것, 즉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영적 혼인'으로 봤다. 아가서에서 신랑 신부의 입맞춤(아가 1,1-4)은 성령을 불어넣는 입맞춤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를 원하는 열망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마리아)와의 혼인 축가로 생각했다. 교회와 마리아는 동정의 성격과 동시에 하느님을 신랑으로 모시는 혼인 관계를 갖는다. 신랑-신부가 있고, 예수-마리아가 있다. 카나의 혼인잔치는 강생의 신비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의 육화를 통해 우리와 친히 결합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 혼인의 신비에 관해 말한다. 무의미한 물이 맛좋은 포도주로 변한 것처럼, 하느님은 신랑으로, 우리는 신부처럼 결합하여 우리 인생은 새로운 맛을 얻게 된다. 맛좋은 포도주 때문에 혼인잔치의 기쁨과 흥겨움이 우리 마음과 생활에 영원히 남는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작품 : 이콘 '판토크라토르'(Pantoncrator) (6세기께, 이집트 시나이 성 카타리나 수도원) ●빛의 신비 3단 :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묵상 단어 : 하느님의 나라, 회개, 복음 이콘 '판토크라토르'는 우주의 통치자를 상징한다. 이 이콘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입었던 튜닉 상의에 히마티온이라 부르는 일종의 숄을 두르고 있다. 오른손의 세 손가락은 삼위일체를, 나머지 두 손가락은 하늘과 땅의 결합을 상징하면서 인류에게 축복을 주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손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성경을 들고 있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무표정하고 엄숙하나 상당히 사실적인데, 이 안에는 이콘 도상학의 중요한 특성인 고요와 관조, 평정, 침묵을 상기시킨다.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이콘으로 인간적이면서 초월적인 인간성을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모습으로 기품있는 권위를 극명하게 나타낸다.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당신을 들어 높입니다. 영영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합니다."(시편 145,21) 윤인복 교수(아기예수의 데레사,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조은일2013.06.11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 기념 전국 선교 신앙대회 이모저모 마리아의 군단, 성모신심 강화 통한 쇄신, 성장 다짐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 기념 전국 선교 신앙대회는 전국의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성모신심으로 한마음이 된 축제의 장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레지오 마리애 단원 1만여 명은 성모님의 하느님에 대한 순명 정신을 본받아 성숙한 단원으로 성장할 것을 다짐했다. 지난 60년간 레지오 마리애 정신을 살아온 신앙 선조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선교 신앙대회가 광주 염주종합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됐다. 이날 1만여 명의 레지오 마리애 간부와 단원들은 성모신심으로 한국교회 복음화에 투신할 것을 다짐했다. ○…5월 25일 광주 염주종합실내체육관을 가득 메운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열기는 30도 가까운 이른 여름 더위보다 더 뜨거웠다. 기념미사에 앞서 벡실리움(레지오 마리애 단기)과 성모상, 기수단이 차례로 입장하자 객석에 있던 단원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단장 김칠연)를 시작으로 대구 의덕의 거울 세나뚜스(단장 류해석),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단장 김광희) 단원들이 단기를 들고 입장했고, 사회를 맡은 손보영(광주평화방송) 아나운서는 각 세나뚜스와 레지아의 연혁 및 단원 수 등을 차례로 소개했다. 입장식에 이어 하성호(대구 세나뚜스 담당)ㆍ김종대(광주 세나뚜스 담당) 신부가 성모상에 화관을 씌우자, 이를 지켜보던 단원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김광희(펠릭스, 광주 세나뚜스) 단장의 개회 선언에 이어 단원들은 레지오 마리애의 60년 역사를 다룬 영상 '레지오 마리애의 어제와 오늘'을 감상하며 레지오 마리애가 걸어온 길을 회고했다. 단원들은 엄숙한 가운데 묵주기도와 까떼나를 함께 바쳤다. ○…이어 김희중(광주대교구장) 대주교 주례와 사제단 50여 명 공동 집전으로 60주년 기념 경축미사가 봉헌됐다. 김 대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1950년대 한국 사회와 교회는 전쟁의 폐허에서 삶의 터전을 재건하고자 몸부림쳤다"며 "온 국민이 물질적 정신적 궁핍을 느끼며 마음의 안식처를 찾고 있을 때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됐다"고 회고했다. 김 대주교는 이어 "레지오 마리애의 기본 정신은 주님 뜻에 순명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기도는 우리 생명을 하느님과 연결해주는 탯줄과 같다"면서 레지오 마리애의 기본 무기(기도)를 버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단원들은 6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30개 평의회의 1만 3000여 명 단원이 이어 쓴 신구약 합본과 7개 평의회가 필사한 39권의 레지오 마리애 교본, 30개 평의회가 바친 묵주기도 5200만 단을 예물로 봉헌했다. 단원들의 다짐을 적은 '우리의 다짐'패도 함께 봉헌했다.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알고 싶고, 살고 싶었습니다." 기념미사 후에 열린 기념식, 고령의 나이로 강단에 선 하초자(가타리나, 72, 마산교구 회원동본당)씨가 선교 사례 발표를 마치자 장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기념식에서는 하씨를 비롯해 단원으로서 복음 선포와 냉담교우 회두에 열성을 쏟은 단원 18명에게 선교대상을 수여했다. 깊은 성모신심으로 오랫동안 레지오 마리애 간부로 활동해온 단원 17명은 공로대상을 받았다. 수상자 중에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어르신 신자가 많아 눈길을 끌었다. 시상식에 앞서 한국평협 최홍준(파비아노) 회장은 축사에서 "한국교회 대표 성모신심 단체이자 평신도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의 60주년을 축하한다"면서 "한국 가톨릭 신자의 10%를 차지하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새 복음화에 투신해달라"고 요청했다. 콘칠리움 특사로 방한한 패트릭 페이씨는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의 손때가 묻은 성경을 김희중 대주교에게 전달했다. 광주 세나뚜스는 목포 산정동성당에 있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에 성경을 보관하기로 했다. 광주 세나뚜스 담당 김종대 신부는 "도입 60주년을 맞아 쇄신의 출발은 성모님의 정신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엇이든 '예'라고 순명하신 성모님의 굳은 믿음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이날 신앙대회에 참석한 대구대교구 최훈(요한 사도, 봉덕본당 은총의 모후 꼬미시움)씨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며 성모님께 의탁하는 삶을 살아왔다"며 "많은 이들이 성모님의 겸손과 순명 정신을 본받아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전부터 한복을 차려입고 행사 안내 봉사를 맡은 광주대교구 주화영(베로니카, 화군동본당 '하늘의 문' 쁘레시디움 단장)씨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기에 신앙인으로서 더 부지런하고 참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광주 세나뚜스 김광희(펠릭스) 단장은 "신앙의 해를 맞아 지난 60년의 세월을 반성하고,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를 타파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 함께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손춘복 명예기자 ▨레지오 마리애는 '마리아의 군단'을 뜻하는 조직으로 고대 로마의 군대 조직인 로마 군단(Legio Romae)에서 가져온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 조직은 단위체인 쁘레시디움(Praesidium), 본당의 평의회 꾸리아(Curia), 꾸리아 대표가 모인 지역평의회 꼬미시움(Comitium), 교구 평의회 레지아(Regia), 국가 평의회인 세나뚜스(Senatus), 중앙 평의회 꼰칠리움 레지오니스(Concilium Legionis)로 구성돼 있다. 콘칠리움 특사- 패트릭 페이(콘칠리움 전 단장) "한국의 수많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헌신하고 있다는 점이 감격스럽습니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가 아시아 복음화의 큰 도구가 되길 바랍니다." 5월 25일 열린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 기념 전국 선교 신앙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아일랜드의 콘칠리움 레지오니스 특사 패트릭 페이(Patrick Fay, 55, 콘칠리움 전 단장)씨는 "레지오 마리애가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신 한국의 주교님들과 성직ㆍ수도자들에게 감사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콘칠리움 레지오니스는 아일랜드 더블린시에 있는 세계중앙평의회로, 레지오 마리애의 최상급 평의회다. 페이씨는 콘칠리움 레지오니스에서 서기를 맡고 있다. 그는 "전 세계의 단원 중에서 한국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10%를 차지한다"며 "한국의 단원들이 수적으로 많은 만큼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이행해주고 있어 감사하다"고 밝혔다. 또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봉사 및 선교단체로서 어르신과 환자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냉담교우들을 회두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페이씨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교포들이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서 봉사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면서 "앞으로도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를 위한 복음화 사명을 수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콘칠리움 서기 보조 패트릭 오더나우씨와 함께 방한한 페이씨는 5월 28일 출국했다. 페이씨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50주년 행사에도 참석한 바 있다. 이지혜 기자 조은일2013.05.29
![[평화인] 박용만(실바노, 두산그룹 회장) -냉혹한 경영에서도 따뜻함 일구는 '하느님의 사람'](//cpbc.co.kr/CMS/newspaper/2013/04/rc/451030_1.2_titleImage_1.jpg)
[평화인] 박용만(실바노, 두산그룹 회장) -냉혹한 경영에서도 따뜻함 일구는 '하느님의 사람' 두산그룹 박용만(실바노, 59) 회장은 외할머니의 만두를 잊지 못한다. 어린 시절, 그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외할머니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주일미사를 거르는 일이 결코 없었다. 묵주기도는 매일 바쳤다. 외손주가 외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칭얼대도 외할머니는 "이 할미가 하느님 뵈러 갔다 오는 게 내 새끼한테도 좋지"하며 성당으로 향했다. 손주의 손을 떼어놓고 성당에 간 외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사온 건 만두였다. 그가 정신없이 만두를 먹다가 "할머니도 하나 먹어"하고 내밀면 외할머니는 먹는 시늉을 하며 만두를 받아뒀다가 손주가 다 먹고 나면 그 만두를 다시 내밀었다. 그는 천주교에 입교한 계기를 묻는 질문에 할머니와 만두를 함께 떠올렸다. 그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 아버지가 되고 나서 성당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강력한 사람들의 따뜻한 집단'을 표방하는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을 십자고상이 걸린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은 돌봄과 배려를 바탕으로 한 따뜻한 성과주의를 지향한다. 돌봄과 배려로 성과를 내라 117년 역사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 두산은 '사람이 미래다'라는 핵심가치로 사람 중심의 경영을 해왔다. 두산그룹은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두산건설 등 산업기반 설비와 기계, 건설 등 인프라 지원사업과 소비재 사업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지난해 4월 2일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한 박 회장은 취임식에서 "따뜻한 성과주의를 통해 인재를 키우겠다"고 밝혔다. 따뜻한 성과주의는 끊임없이 경쟁을 유도해 도태되는 사람을 가차 없이 내보내는 경영이 아니다. "따뜻함의 반대는 무관심, 냉혹입니다. 내부 경쟁이 전혀 없을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 역량을 정확히 파악해 육성하자는 것이지요." 그는 올해부터 후배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육성했는지를 인사 평가에 반영하기로 했다. 임원이 부하 직원과 소통하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도 포함했다. "100명의 신입사원이 모두 사장까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느 기업이나 조직은 피라미드 형태이기 때문에 올라가면서 누군가는 떠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 과정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조직은 따뜻할 수도 냉혹할 수도 있습니다." 박 회장은 "인간을 도구화해서 경쟁의 결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며 "돌봄과 배려를 통해 구성원 역량을 파악해 육성하면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역량을 알고 상처받지 않고 회사를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업운영은 각박하고, 회사생활은 기계적으로 돌아가기 쉽다. 대기업 총괄 CEO로서 업무 스트레스는 만만치 않다. 박 회장은 일하면서 오는 괴로움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가상의 원을 그려보세요. 그 원은 제 자신이 가진 역량의 한계입니다. 하나는 원 밖의 일을 이루고 싶을 때 괴로움이 오지요. 내 역량을 벗어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원 안에 있는데 내가 충분히 하지 않아서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후회와 자책으로 이어집니다." 박 회장은 "원 밖에 있는 역량은 내 역량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이 안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나를 분명히 알고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스트레스를 없애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귀띔했다. 따뜻한 집단의 소통 잘하는 CEO 박 회장은 젊은이들과 소통을 잘하는 CEO다. 신입사원들과의 술자리와 야구를 좋아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 SNS를 통해 다양한 이들과 소통을 즐긴다. "회사 가기 싫다"는 직원의 글에는 "내 차 보내줄까?ㅋㅋㅋ"라고 댓글을 단다. 그에게 젊은이들과의 소통 비결을 묻자, 박 회장은 "그들의 다른 점을 인정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이어 박 회장은 "젊은 친구들은 우리 베이비붐 세대가 만들어놓은 풍요롭고 다양한 사회에서 자랐다"며 "좋고 나쁨을 떠나 어떻게 다른지를 보면 이해하기가 쉬워진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신입사원뿐 아니라 어린이들을 만나러 서울시 꿈나무마을도 종종 방문한다. 꿈나무마을은 마리아 수녀회가 운영하는 아동복지시설. 박 회장은 재단법인 마리아 수녀회 후원회장이다.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고등학교 친구의 권유로 꿈나무마을을 방문한 게 계기가 됐다. 두산 베어스 선수단은 5년째 꿈나무마을을 방문해 아이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선사하고 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우울할 줄 알았는데 밝고 순진한 모습에 놀랐습니다. 편견이었죠.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들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인연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박 회장은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태워주고 싶어 직원들과 자전거를 사서 꿈나무마을을 방문하는가 하면, 겨울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옷도 지원해줬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하고 밝은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혹시라도 밝은 웃음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박 회장은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공헌 활동과 사회 환원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선택사항이 아닌 시대를 관통하는 조류"라고 강조했다. 그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나눔 정신을 확산하는 재단법인 '바보의 나눔'에 통 큰 기부를 몇 년째 이어가고 있다. 박 회장은 기업을 운영하며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이 숨어 있음을 발견할 때 즐겁다고 털어놨다. "성경 말씀을 경영에 그대로 투영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답답하고 힘들어집니다. 하지 못할 일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나 사회생활에서 이건 참 옳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묵상해보면 하느님 말씀과 다른 게 많지 않아요." 박 회장은 이어 "두산그룹 구성원들이 각자 역량을 잘 갖추고 서로를 돌보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집단으로 만들어주길 바란다"면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책임 있는 당당함을 보여주고, 투명하고 바른 경영을 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경영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외출장이 없을 때에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틈틈이 묵상하는 시간을 통해 기도하는 박 회장은 "내게 신앙은 불완전하지만 중요한 삶"이라고 말했다. "제가 신앙인이라고 하면 많은 분이 완벽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매일 실수하고 고해성사도 자주 봅니다. 다만 제가 신앙을 안 가지고 계신 분과 차이가 있다면 고해성사를 할 수 있다는 것 같아요."(웃음) 두산가(家)의 천주교 신앙은 1896년 서울 배오개시장(현 종로4가)에 '박승직 상점'(두산그룹 모태)이라는 면직물 점포를 연 박승직(베드로, 1864~1950) 거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회장은 박승직 거상의 장남인 고 박두병(바오로) 회장과 부인 고 명계춘(데레사) 여사의 7남매 중 5남이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조은일2013.04.30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부] 28. 사제 양성 교령](//cpbc.co.kr/CMS/newspaper/2012/07/rc/420867_1.1_titleImage_1.jpg)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부] 28. 사제 양성 교령성소증진, 사제 양성은 모든 그리스도인 책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 「온 교회의 열망(Optatam Totius)」(이하 사제 양성 교령)은 공의회 제4회기 때인 1965년 10월 11일 통과돼(찬성 2318, 반대 3) 10월 28일 제7차 장엄 공개회의에서 공포됐습니다. 보편교회 차원에서 사제 양성에 관한 가르침을 새롭게 제시한 것은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 때인 1563년 성품성사에 관한 교리를 선포하면서 사제 양성 법규를 제시한 이후 400년 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목자 양성에 필요한 일반 원칙을 담고 있는 사제 양성 교령은 신학생들에게 타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제시한다. 사진은 지난 6월 정교회를 방문해 설명을 듣고 있는 부제들. 교령은 서론에서 민족과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크기에 공의회는 사제 양성에 관한 일반 원칙만 제시할 수 있을 뿐이고 "그 지역의 사목적 요구에 언제나 부합하도록" 각 나라나 예법(전례)에 따라 고유한 사제 양성 지침을 각국 주교회의가 제정하고 개정해 사도좌 승인을 받아 적용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1항). 교령은 이어 사제 성소 증진에 관해 언급합니다(2~3항). "성소 증진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의 의무"(2항)이기에, 하느님 백성 전체가 기도와 보속, 강론과 교육, 성소 기구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성소를 증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렇게 성소 증진을 위한 노력을 강조한 후 교령은 사목자 양성을 직접 목표로 하는 대신학교의 사제 양성에 관한 원칙들을 △학교 규정(4~7항) △영성 교육(8~12항) △교회 학문 과정 개편(13~18항) △사목 교육 증진(19~21항) △계속 교육(22항)으로 나눠 제시합니다. 교령은 대신학교에 관한 규정과 관련, 신학교 장상들과 교수진을 "가장 뛰어난 인재들 가운데서 발탁해야 한다"면서 모든 사제들은 "신학교를 교구의 심장으로 여기고 신학교에 기꺼이 협조하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5항). 성소 심사와 관련해서는 비록 사제가 부족하고 안타깝다 하더라도 언제나 확고한 기준을 적용해, 합당한 사람들을 진급시키고 부적합한 사람을 제때에 다른 임무를 찾아가도록 어버이로서 지도하라고 당부합니다. 또 각 교구가 자기 신학교를 제대로 설립할 수 없는 곳에서는 여러 교구 또는 그 지역이나 국가 전체에 공동 신학교를 설립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제시합니다(6~7항). 교령은 영성 교육과 관련, 교회 정신과 순명 교육뿐 아니라 정결 교육과 인간 성숙 그리고 사목 수련까지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영성 교육은 △학문 교육과 사목 교육과 직결돼야 하며 △학생들이 성삼위와 끊임없는 친교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이뤄져야 합니다. 또 "교회 관습이 권장하는 신심 행위도 열심히 실천해야 하지만 영성 교육이 신심 행위에 그치거나 종교적 감정만을 키우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8항)고 지적합니다. 신학생들은 사제적 순명과 가난한 생활 방식, 극기 정신의 배양에 각별히 힘써야 하며, "허용되는 것이라도 유익한 것이 아니면 기꺼이 끊어 버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한다"(9항)고 교령은 적시합니다. 또 독신 생활은 "교회법의 명령일 뿐 아니라 겸손되이 간청해야 할 하느님의 고귀한 선물"이라고 밝히면서 신학생들의 "생활과 활동이 독신 생활 때문에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고, 몸과 마음을 더욱 철저히 다스리고 더욱 완전한 성숙에 이르며, 복음의 참 행복을 더욱 완전히 깨닫게 해야 한다"(10항)고 강조합니다. 인간 성숙과 관련, 신학생들은 특별히 △정신의 안정성 △신중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 △사건들과 인간들을 정확히 판단하는 방법을 익혀야 할 뿐 아니라, △진실한 마음 △변함없는 정의감 △약속을 지키는 신의 △정중한 행동 △사랑으로 나누는 점잖은 대화를 존중하도록 배워야 합니다(11항). 교령은 또 영성 교육의 더욱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고 신학생들이 심사숙고한 후 자유 의사로 성소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적절한 기간을 영성 수련기로 설정하고, 나아가 얼마동안 휴학기 또는 사목 수련기를 두어 사제직 후보자의 적성을 더욱 충분히 살펴보도록 권고합니다(12항). 교회 학문 과정 개편(13~18항)과 관련, 교령은 신학생들이 고등학문을 받을 수 있는 인문 교육과 과학 교육을 받아야 하고 라틴어 지식을 배양해야 할 뿐 아니라 전례 언어와 성경 언어에 대한 지식도 증진해야 한다고 제시합니다. 또 교과 과정에서는 철학과 신학 과목들을 적절히 조화롭게 편성해 신학생들이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특별히 교회 학문은 상당 기간 입문 과정을 계속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입문 과정은 신학생들에게 교회 학문의 의의와 체계, 사목적 목표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주고 아울러 신앙을 토대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철학 연구는 신학생들이 "특히 인간과 세상과 하느님에 대한 건실하고 일관성 있는 지식을 얻도록 이끌어야"(15항) 하고, 신학 과목들은 "신앙의 빛 안에서 교회 교도권의 지도를 받아" 신학생들이 "가톨릭 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자기 영성 생활의 양식으로 삼도록 또 사제 교역에서 이를 선포하고 설명하고 수호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16항)고 교령은 밝힙니다. 또 성경을 비롯해 교의신학과 윤리신학, 교회법 등 과목들이 어떻게 개편돼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이 밖에도 갈라진 교회와 교회 공동체들을 더욱 충분히 이해하고 교회 일치를 촉진하는 데 기여하도록 이끌고 다른 종교들도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교령은 강조합니다. 사목 교육 증진(19~21항)과 관련, 교령은 신학생들이 교리교육, 설교, 전례 거행, 성사집전 등 사목 임무 수행에 직접 필요한 교육뿐 아니라 적절한 대화 교육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인간관계의 여러 상황에서 사랑의 정신으로 마음을 열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19항)고 지적합니다. 또 교육학, 심리학, 사회학의 도움을 활용해 다양한 형태의 사도직을 증진할 수 있도록 하고 신학교 밖에서의 실습 교육을 통해 이론만이 아니라 실습으로 사도직 수행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제시합니다. 교령은 끝으로 신학교 교육 과정을 마친 뒤에도 계속 교육이 필요함을 지적하면서 이를 위해 각국 주교회의들이 더욱 적합한 수단들을 활용할 것을 주문합니다(22항). 사제 양성 교령이 제시하는 이런 기본 원칙과 그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2년에 발표한 교황권고 「현대의 사제 양성」 등을 토대로, 한국 천주교회는 2001년 교황청 승인을 받아 「한국 사제 양성 지침」을 마련했으며, 이를 토대로 각 대신학교에서는 나름대로 양성 지침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조은일2012.07.17
![[제13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찾아서](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3/10/uC21773128300186.jpg)
[제13회 신앙체험수기] 장려상 -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찾아서강남년(마리아, 마산교구 금산본당) 구글 제미나이 제작 6년 전 늦은 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항암과 수술 후유증으로 몸이 좋지 않아 산행을 하면서 체력을 회복하려고 했었다. 그날도 산에 올랐다가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해서 서둘러 하산을 하는 중이었다. 우산도 비옷도 없이 서둘러 내려오는 길목에 동네 성당이 보였다. 늘 스쳐 지나가던 건물이었는데, 그날은 팔을 벌리고 누군가를 안아줄 것 같은 높은 벽 앞쪽에 있는 성상의 모습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 손짓 때문이었는지 비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처음으로 성당이라는 곳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사가 한참 진행 중이던 성당 안 2단으로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긴 의자의 맨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보았다. 맨 뒤에 앉으면 아무도 나를 눈치 채지 못할 것 같았다. 이렇게 눈에 띄는 등산복 차림이라도. 강론 중이던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느님은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가 아니라 가장 약해졌을 때 우리를 부르십니다.” 무슨 말씀일까?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이 마음속에 덜컥 떨어져 내려앉았다.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니실 테지. 나는 성당 사람이 아닌데⋯ 나는 여기 안 보이는 구석에 앉아 있는데⋯.’ 신부님의 강론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소탈한 화법에 마음이 편했다. 산행 가는 길목에 있는 그 성당을 나는 매주 들렀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성당에 들어가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미사에 참여한다기보다 그 맨 뒷자리에 앉아 있기 위해 성당에 갔다. 신부님의 강론이 시작되기 전까지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기도하는 방법도 몰랐고 성당 예식과 절차도 몰랐지만, 다른 사람들이 일어서면 따라서 일어서고 앉으면 따라 앉았다. 독서와 강론 시간에 다들 책을 보고 있기에 「매일미사」 책도 따라 사보았다. 앞사람의 등을 유심히 바라보며 “아멘”도 따라 말해보았다. 매번 뒷자리에 앉아 있으니 자릿세라도 내야 할 것 같아서 사람들을 따라서 봉헌금도 내보았다. 어느 날, 나는 여전히 그 긴 의자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한 어르신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성사 보실 건가요?” 그때 처음으로 성사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렇지만 성사가 뭔지 몰라서 나름 정중하게 대답했다. “어르신 먼저 하세요.” 어르신은 내 뒤에 있는 두 개의 문 중 하나를 열고 들어갔고 어르신이 들어가자 그곳의 불이 켜졌다. 너무나도 무지했던 나는 그곳을 화장실로 생각한 채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봤다. 늘 앞만 보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신부님이 그곳을 들어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내가 늘 앉던 그 자리는 신부님께서 미사 전 고해소에 들어가기 전에 앉으시는 자리였고 암묵적으로 신자들이 양보하고 있던 자리였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나는 그곳이 화장실 앞이어서 사람들이 앉지 않는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가끔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분들도 있었지만, 이전 치료에서 한참 무균실 신세를 졌던 기억에 사람들을 조금 피하고 있었다. 선뜻 말을 걸어 주셨던 선한 신자분들에게 나는 벽을 치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성당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때였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느낌만은 어렴풋이 있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매주 독서와 강론을 통해서 말씀을 조금씩 전해 들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65년간 교회와 인연이 없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초보적인 궁금증도 생겨났다. ‘하느님은 정말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시는 분일까?’ 아직 스스로에게도 ‘성당을 다닌다’고 하지 않고 ‘성당에 앉아 있다가 온다’고 하고 있던 나는, 신자분들에게도 신부님께도 말을 걸기가 멋쩍었던 터라 이런 궁금증을 한가득 쌓아가며 성당에 ‘앉아 있으러’ 매번 가고 있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자 본당 신부님께서 조심스럽게 말을 거시며 세례를 받지 않겠느냐고 물으셨다. “세례를 받기 전과 후가 차이가 있나요?” 나의 당돌한 질문에도 신부님께서는 웃으시며 성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몸으로 오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때의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겁이 났다. 당시 나는 병으로 인해 음식 하나도 조심하던 때였고 밀가루 음식은 전혀 먹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밀로 만든 성체는 받아 모실 수 없을 것 같다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엄한 말들이 내 입에서 마구 튀어나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지한 말이었는지 모른다. 거룩한 하느님의 몸을 앞에 두고 그것을 밀가루로만 생각했으니 말이다. 몰라서 한 말이었고, 몰라서 지은 죄였다. 그렇게 세례 이야기는 잠시 멀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성당에 나왔다. 잘 모르면서도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고 싶었다. 그러다 얼마쯤 지나 다시 세례를 권유받았다. 이번에는 확신이 있어서라기보다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비가 오던 날 처음 성당 안으로 나를 불렀던 성상의 하느님 손짓을 참 좋으신 신부님을 통해서 느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세례를 받기로 했다. 강 마리아. 나는 예순여섯에 강 마리아로 다시 태어났다. 세례를 받고 났지만 모든 것이 단번에 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개월이 지나고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성당에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겨우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데 성당을 나갈 수 없는 상황이, 하느님을 뵈러 가는 길이 막히는 상황이 너무 답답하여 신부님께 여쭤봤더니 성경을 읽으라고 권해주셨다. 성경이 곧 하느님이자 가르침과 말씀이라고 하셨다. 사전보다 두꺼운 책, 성경. 나는 왜 성경을 읽을 생각을 못 했던가? 성경을 읽으면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세속적인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었다. 성당에 다니는 지인에게 연락해가며 겨우겨우 1년 만에 1독을 끝낼 수 있었다. 2독으로는 신약을 중심으로 신약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 등을 읽으면서 공부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성경 속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궁금증만 쌓여가고 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성경을 완독했는데도 나는 왜 아무것도 모르는가? 이 갈증이 나를 말씀으로 이끌었다. 유튜브를 찾다 보니 가톨릭평화방송을 비롯해 많은 신부님의 강론이 있었고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듣는 날도 많아졌다. 강론을 듣다 보면 자주 같은 말씀이 반복되었다. “성체조배를 해보십시오.” “미사보다 큰 기도는 없습니다.” 그 말이 처음에는 잘 와 닿지 않았는데, 또 한 번 고백하자면 성체조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당 안에 조용히 앉아 있는 시간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성체조배를 시작했다. 잘은 모르지만 감실 앞에 앉아 보기로 한 것이다. 시간은 잘 가지 않았고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밀려들었다. 아픈 몸, 치료 일정, 가족 걱정, 세상 일들이 쉼 없이 떠올랐다. ‘기도가 이렇게 어려운 건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냥 자리를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도 일단 정한 시간만큼은 앉아 있기로 했다. 잘 집중하지 못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해도, 감실 앞에 머무는 것 자체가 좋다고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겨울 내내 하루에 30분씩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이 없는 시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이면 더 조용하지 않을까, 아무도 없는 시간에 혼자 앉아 있으면 덜 산만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새벽에 성당을 가기 시작했다. 새벽 3시, 감실 앞에 앉으면 낮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흘렀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때도 나는 여전히 기도를 잘하지 못했다. 분심은 여전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날도 많았다. 그래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만은 기다려지기 시작했고, 내가 찾고 있던 것이 ‘잘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었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새벽 3시면 성당으로 향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굳은 결심을 한 것도 아니었다. 2시 30분이면 눈이 떠졌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예외는 없었다. 아파서 서울 병원에 가야 하는 날에도 새벽 버스를 타기 전 먼저 성당에 들렀다. 치료 때문에 서울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할 때에도 병원 원목실이나 근처 성당을 찾아 성체 앞에 앉았다. 그 자리에 앉지 않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 것 같았다. 기도를 잘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분심이 많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두 시간을 보내는 날도 있고 아직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그런데 내 삶에 조그만 변화들이 하나둘 스며들기 시작했다. 놀기만 하는 모임은 점점 마음이 가지 않았고, 그렇게 좋아하던 텔레비전도 어느 순간부터 켜지 않게 되었다. 천 원도 아끼던 내가 성당에 필요하다는 말이 들리면 계산하지 않고 내게 되었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옷을 사주고 누군가 아프다 하면 먼저 마음이 쓰였다. 내 안의 성격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아프면 주위에 짜증부터 냈었는데,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떠올리며 참는 횟수가 많아지게 되었고 늘 부정적으로만 보이던 일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나를 설득한 것도 가르친 것도 아닌데, 성체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내 마음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지난 추석, 가족들이 모여 앉아 모두가 보고 싶어 하던 임영웅 콘서트 방송을 보던 날이 있었다. 나도 보고 싶었지만 성경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서 결국 울면서 방으로 들어가 성경을 펼쳤다. 그 일을 두고 아이들은 그렇게 울 정도면 같이 보지 그랬냐고 아직도 나를 놀린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보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성당 안 자매들은 내가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고, 성당 밖 친구들은 내가 예수님께 미쳤다고 했다. 어느 쪽 말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체조배는 나를 특별하게 만들지 않았다. 다만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하느님 앞에 나를 내려놓게 했다. 그 시간이 쌓여 어느덧 5년이 되었고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내가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이었다. 구글 제미나이 제작 어느 날은 성체 앞에 앉아 있다가 복음이 더 이상 나 혼자만의 위로로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하느님을 만나서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었지만, 항암을 받을 때, 수술을 받을 때,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맬 때에도 하느님을 알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뒤늦게 밀려왔다. 내 평생 가장 후회되는 일이 하느님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것이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신 당부가 그때는 유난히 또렷하게 마음에 남았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셨는데 그 땅끝이 꼭 먼 곳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가장 가까운 자리, 가족과 오랜 친구들, 신앙에서 멀어져 있던 이들부터가 내가 서 있는 땅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설득하기보다 먼저 그들 곁에서 살아내는 쪽을 택했다. 복음은 말보다 삶으로 먼저 건네질 수 있다는 것을, 그분께서 성체 앞에서 차분히 가르쳐 주고 계셨다. 남편은 평생 신앙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기독교 재단과 관련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안 좋은 기억이 있었는지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성당에 다니는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함께 가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고 나 역시 먼저 권하지 않았다. 괜히 설득하려 들면 오히려 마음이 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매일 새벽, 성체조배를 위해 성당에 다녀오는 일상을 그대로 살아갔고 남편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어느 날, 남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성당에 가? 새벽마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힘들지 않아?” 남편의 질문에는 비난도, 호기심도, 설득의 의도도 없었다. 그저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성당이 좋아서 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만나는 예수님이 좋을 뿐이라고. 이 말은 설명이라기보다 고백에 가까웠다. 나 자신도 아직 그 마음을 온전히 말로 옮길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왜 좋은지,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말로 풀어낼 수는 없었다. 그분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좋았고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다시 정돈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얼마 뒤 아무 예고도 없이 남편이 말했다. 한 번 같이 가보자고. 특별한 이유도 결정적인 계기도 없었다. 남편은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고, 내가 그랬듯이 어느새 그 자리에 익숙해졌고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이 되었다. 신앙에 대해 길게 말한 적도 없고 성경 말씀을 들이민 적도 없었기에 그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하느님께서 직접 부르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요즘 우리는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문을 낭송하고 미사를 간다. 물론 남편은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따지고 들고 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음이 나는 이런 상황이 되면, 나는 남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요셉 씨, 우리 그냥 성경 큰 소리로 읽읍시다. 그리고 말씀을 믿으면 돼요.” 딸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닮아 고집이 센 딸은, 흔히 말하는 가방끈이 긴 딸은 엄마 말을 순순히 따르는 타입은 아니다. 성당을 다니는 엄마를 응원해줬지만, 본인이 하느님을 알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봄날, 전화로 하느님은 어디 계시냐고, 왜 성당에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는 만큼만 답했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다 딸도 동네 성당에서 입교하게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가족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을 조금씩 배워갈 무렵 나는 레지오 마리애에 참여하며 곁에 머무르는 신앙을 실천하려고 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이 은총을 혼자만 품고 있기에는 마음이 불편해지는 감각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먼저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신앙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묻는 쪽을 선택했다. 성당에 오기까지의 망설임, 다시 멀어지게 된 이유, 혹은 아직도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에 대해 묻고, 듣고, 판단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앉아 있어 주는 일이었다. 방향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제시해주심을 알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자연스럽게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이어졌다. 오랜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은 나보다 훨씬 먼저 하느님을 알게 되었지만 냉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동창 모임 식사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앉아 큰소리로 성호경을 그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불러주며 하느님 앞에서 그들이 받은 은총과 믿음을 기억했다. 머뭇거리던 친구들도 하나둘 소리 내며 성호경을 그었고, 그들은 그렇게 하나 둘 교회로 돌아오고 있었다. 성당 공동체 안에서도 비슷한 시간이 있었다. 작년 초,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자매가 눈에 들어왔다. 늘 혼자 다니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성당 생활도 아직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가벼운 이야기로 웃기도 하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미사와 성당 생활에 대해 물으면 아는 만큼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어느 날 그 자매는 남편이 투병 중인데, 자신이 성당에 나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늘 불편한 마음으로 겨우 미사에 온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어서 포기하지 않고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그리고 나 역시 투병을 겪으며 하느님 앞에 서 있었던 시간과, 누구도 살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던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나누었다. 사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을 꺼렸었다. 그런데 나를 닮은 이 자매에겐 그 이야기들이 술술 나왔다. 이후 우리는 종종 함께 기도했고 결과를 앞당기기보다 하루하루를 하느님 뜻 안에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뒤 성당에 나오는 것을 말리던 그 자매의 남편도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 세례를 받았다. 또 한 번 누군가를 설득하기보다는 곁에 머물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자리가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돌아보면 성체조배는 나를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만들어 준 시간이었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하느님 앞에 나를 내려놓게 했고, 말씀을 생각하며 내 말과 선택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알게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천천히 배워가는 시간이었다. 하느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삶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더 많이 말하기보다 덜 판단하게 되었고, 앞서기보다 기다리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신앙이란 결국 하느님을 설명하는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태도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흔둘, 나는 여전히 서툰 신자이고 나이 많은 아기이다.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조금씩 찾아가며 하느님 앞에 머무는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요즘 나는 성경 10독 중인데, 오늘도 성경의 이 두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이 말씀들은 외침이라기보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나를 다시 바로 세우는 문장에 가깝다. 성당의 마당만 밟고 지나가는 신자가 아니라, 말로만 “주님, 주님”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그분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성체 앞에서, 그리고 일상의 자리에서 이 마음을 조용히 되새기며 하루를 연다. “주님, 주님.” 이 고백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강남년 마리아cpbc2026.03.11
![[생활속의 복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5/13/8tR1778639936660.jpg)
[생활속의 복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주님 승천 대축일 마태 28,16-20 피에트로 페루지노 작 ‘그리스도의 승천’ ‘하늘’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는 천문학의 탐구 대상인 ‘천체 우주’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종교에서 거론되는 상징 언어인 ‘천상 낙원’이다. 자연 현상에 일방적으로 종속됐던 인류는 생존의 필수 요소인 빛과 비를 제공하는 태양과 구름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였다. 호의를 베푸시는 하느님과 풍요와 안정의 토대를 마련해 주는 하늘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타 종교와 대조되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하늘에 대한 양면적 접근이다. 한편으로, “하늘”(창세 1,8)과 하늘에 펼쳐진 “빛물체들”(창세 1,14: 해·달·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고대 종교의 하늘에 대한 신성화를 부정하려는 방편으로 하늘이 상대화되었다.(1열왕 8,27; 시편 148,1-3 참조) “천지의 창조주”(사도 신경) 고백을 통해 만물을 존재케 하는 바탕인 하늘조차도 하느님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다른 한편으로, 주님의 기도 첫 문구 “하늘에 계신”이 의도하는 바와 같이, 하늘은 ‘하느님의 거처’(신명 26,15 참조)다. 구약 성경은 ‘죽음을 겪지 않은’ 이의 하늘을 향한 공중 부양을 보도한다.(에녹: 창세 5,24 / 엘리야: 2열왕 2,11) 이 하늘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룬 지복직관에 도달한 이가 진입하는 ‘특정 공간’(천국)으로 이미지화되었다.(2코린 5,1 참조) 상하 개념과 연계하여 반대말로 추정되는 하늘과 땅은 ‘땅 위 하늘’과 ‘하늘 아래 땅’ 차원에서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관계 언어다. 만물을 포괄하는 개념인 ‘천지’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에페 1,23)의 ‘새로운 피조물’(새 하늘과 새 땅: 묵시 21,1)이다. 성경은 하늘과 땅 사이의 하강과 상승 구도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전개한다. ‘첫 번째 오심’(성탄)은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있던 아들의 인류를 위한 ‘하늘에서 내려오심’(강생)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하늘로 올라가심’(승천)은 ‘두 번째 오심’(재림)의 시작이다.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죽음을 겪은’ 그리스도의 승천은 ‘하늘과 땅’(성과 속)의 분리를 전제로 땅에서 탈출하는 공중 부양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는 약속을 구현하는 ‘새로운 현존’에 대한 공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라는 빈 무덤에 등장한 눈부시게 차려입은 두 남자의 물음처럼, 승천을 시각화한 사도행전은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을 통해 묻는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1,11) 그리스도가 승천한 하늘은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올라가신’ 하늘은 미지의 특정 구역이 아니라 하늘과 맞닿은 ‘내려오신’ 땅을 암시한다. 부활은 ‘언제나’(죽음 후에도), 승천은 ‘어디나’(하늘 아래에도) 현존하고 활동하는 하느님을 입증한다. 둘째, ‘올라가신’ 하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내려오신’ 땅에 대한 구체적 집중으로 교정된다. 하느님의 거처는 땅 위의 ‘저 하늘’이 아니라 하늘 아래의 ‘이 하늘’(땅)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1요한 4,12 참조)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묵시 21,3) cpbc2026.05.13

패션 컨설턴트 장명숙씨, 패션계에서 이름 날리던 그녀 불우 청소년들 어머니로 나서 10여년 그룹홈 아이들 돌봐 "아침에 미사를 드리는데 인터뷰에 괜히 응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본당 신자들이 평화신문을 보면 뭐라고 하려나…. 미사 때 분심이 생겨서 혼났어요. 제가 독실한 신앙인은 아니거든요.(웃음)"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은발의 쇼커트를 한 패션 컨설턴트 장명숙(안젤라 메리치, 62)씨는 서울 반포성당에서 평일미사를 막 마치고 온 길이었다. 장씨는 35년 전 한국인 최초로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 간 1세대로, 국내 유명백화점 패션 고문을 지내며 한국에 이탈리아 명품 '살바토레 페라가모', '막스마라' 등을 소개했다. 1990년대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보이런던' '겟 유즈드'도 그의 작품이다. 밀라노 마란고니 복장예술학교에서 무대의상과 스타일리스트를 공부하고 귀국한 그는 교수와 디자이너로 활약했다. 패션시장을 떠난 그는 요즘 하느님과의 연애에 푹 빠져 산다. 장씨는 해마다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열리는 만찬에 참석해 우연히 거룩한 열정의 딸 수도회 수녀들과 맺은 인연으로 10년 넘게 그룹홈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이들은 가정해체와 어려운 형편으로 친부모 곁을 떠난 청소년들이다. 아피(AFI, 국제가톨릭형제회)가 운영하는 서울 신림동 공부방 아이들도 돌본다. 그는 아이들을 만날 때 옷을 최대한 멋지게 차려입는다. 생일과 어린이날에는 최고급 레스토랑에 간다. 아이들이 귀한 대접을 받아야 주눅이 들지 않고, 자존감을 키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씨는 "젊은 시절 너무 바빠 두 아들에게 좋은 엄마 노릇을 못해 그에 대한 보속으로 아이들을 만난다"고 했다. "한창 일할 때 고민이 많았어요. 높은 연봉을 받으며 내가 추구하는 게 돈인지 명예인지…. 스스로 질문했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은 충격이었다. 삼풍백화점 명품 패션 고문인 그는 월ㆍ수ㆍ금요일에만 출근했고, 백화점은 목요일에 무너져 내렸다. 함께 일한 동료와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100일 동안 사고로 목숨을 잃은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그때 생각했어요. 나는 왜 살아남았을까. 하루만 일찍 혹은 하루만 늦게 사고가 났어도…." 그는 2년 전 거룩한 열정의 딸 수도회 수녀들이 선교하는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피그미족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 넝마 같은 옷을 걸치고 사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고 행복의 기준이 무너졌다. 지금은 아프리카 아이들과 대화하고 싶어 프랑스어를 배운다. 그의 패션과 디자인에 대한 열정은 봉사로 옮겨붙었다. 그는 카메룬에 다녀온 후 계획 없이 산다. 계획은 하늘에서 다 세운다는 섭리에 맡기기로 했다. 그는 밀라노를 오가며 문화 관련 디자인 컨설팅과 강의를 하고 있다. 매일미사를 봉헌하는 요즘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좋은 곳에서 멋진 옷을 입고 식사할 때, 더 크고 확실하게 십자성호를 긋는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시편 34,9).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조은일2013.07.16
![[전국 교구장 새해 사목교서] 전주교구- 각자가 참으로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8863_1.1_titleImage_1.jpg)
[전국 교구장 새해 사목교서] 전주교구- 각자가 참으로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 우리는 오는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 계속될 신앙의 해를 지내며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해의 근본 취지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신앙의 열기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나 자신에서 시작해 교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서 사도적 확신을 갖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1983년 남미 선교 5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이 대륙의 복음화 5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정말 의미를 지니려면 주교 여러분이 각자 소속 사제 및 신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각오와 헌신으로 복음화 사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재복음화가 아니라 새로운 복음화여야 합니다. 열정에서, 방법에서, 그리고 표현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지난해 교구 사목평의회에서도 교회와 신앙생활의 현실을 돌아보며, 가장 큰 문제로 하느님 체험 부족을 들었습니다. 신앙이 굳건하지 못해 신흥 종교와 사이비 종교에 쉽게 넘어가기까지 하는 현상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봉독ㆍ공부ㆍ나눔, 전례 활성화, 소공동체 활성화, 피정, 「가톨릭교회교리서」 연구, 그리고 성직자ㆍ수도자의 소명의식 강화를 그 처방으로 제시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말씀을 잘 지키는 일입니다. 하느님 말씀이 하늘에서 떨어진 씨앗처럼 우리 안에 뿌려진 다음, 우리가 그것을 잘 '지키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하느님 능력으로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 주님 가르침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 말씀을 자신 안에 잘 간직하는 것입니다. 우리 과제는 이 순서를 뒤에서부터 되밟아 살아 계신 주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1코린 12,12-18).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선포한 새로운 교회상을 실제로 구현한 것이 소공동체입니다. 우리 교구도 그동안 활발하게 추진해온 성서운동을 바탕으로 다양한 모양으로 해오던 소공동체를 새로운 각오로 한층 체계를 갖춰 널리 확산시켜야겠습니다. 성서사도직운동을 교구 내 모든 본당과 기관에서 활성화하기 위해 교구 기구를 정비하고 보강해야겠습니다. 미사를 더욱더 활기차고 따뜻한 축제로 만들기 위해 전례에서 각자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도록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겠습니다. 하느님을 특별히 체험한 신자들의 증언을 듣고, 이를 널리 알리는 방안을 활용해야겠습니다. 아직 성서 공부와 나눔의 과정을 이수하지 않는 이들은 먼저 하느님 말씀을 통해 깊은 신앙체험을 하게 합니다. 그다음 「가톨릭교회교리서」와 공의회 문헌을 공부합니다. 교구와 다른 지역 성지를 찾아가 신앙 선열들의 정신을 되새깁시다. 구역ㆍ반 개념과 소공동체 개념을 분명히 구분해 사용합시다. 성서사도직과 소공동체 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사제 특별연수회를 개최하겠습니다.조은일2013.01.22
![[전국 교구장 새해 사목교서] 마산교구-신앙의 해,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서](//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8167_1.2_titleImage_1.jpg)
[전국 교구장 새해 사목교서] 마산교구-신앙의 해,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서 마산교구장 안명옥 주교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처한 환경은 열악해지고 있습니다.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와 현세위주의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는 신앙의 기복화와 개인화를 초래하며, 영적 가치가 물질적 가치로 자리를 이동하고, 그 결과 신앙의 가치보다는 경제적 성공만이 중시되고 있습니다. 이 가치관은 교회 안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해 많은 신앙인들 역시 마음의 위로와 물질적 축복을 보장해 주는 수단으로서만 신앙을 받아들일 뿐 신앙인의 사명과 책무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결과를 야기했습니다. 특히 교구가 처한 현실은 더 어렵습니다. 교구의 복음화율은 전국 평균보다 현저히 낮은 편이며, 미사 참례율도 다른 교구에 비해 저조한 상태이고, 냉담교우 비율 역시 높습니다. 이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교회에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며, 우리가 주님께서 맡기신 복음화 사명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을 드러내줍니다. 복음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과 헌신은 신앙의 해를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맞아야 합니다. 교황께서는 새로운 복음화 여정의 길을 떠나고자 '신앙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아울러 2000년 교회의 역사 안에서 체험된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과 내용을 종합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아울러 공의회 정신의 진정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가톨릭교회교리서」를 연구, 성찰하도록 초대하십니다. 거룩함과 죄가 교차되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배인 신앙의 역사를 되짚어봄으로써 그리스도 사랑을 알아차리고 신앙이 더욱 굳건해지기를 바라십니다. 믿음의 길 안에서 신앙인으로서 행동을 성찰하고, 20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신앙을 증거하며 전해준 분들의 삶을 배움으로써 믿음의 깊이를 더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은총의 선물인 신앙의 깊이를 더해 가는 데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 현존과 사랑을 알아보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공부하고,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한 해가 돼야겠습니다. 신앙 선조들처럼 우리가 받은 이 신앙의 유산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은 신앙은 전달되지 않지만 생동감 있게 살아 있는 신앙은 다음 세대로 전달됩니다. 우리는 신앙의 전달자들이어야 합니다. 신앙의 해를 의미 있게 보냄으로써 복음의 증인이 되고, 우리가 물려받은 찬란히 빛나는 신앙을 그 모습 그대로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선택되었음을 압니다. 그것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1테살 1,4)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더불어 아래와 같은 실천 사항들을 제안합니다. 1) 성경 쓰기와 읽기를 계속합니다. 2) 본당은 신자들에게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공의회 문헌'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합니다. 3) 성찬 예식에 적극적으로 참례합니다. 4) 모든 본당과 신심단체는 연 1회 교구 내 여섯 순교자 묘소를 방문하고, 가능하다면 도보로 순례합니다.조은일2013.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