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69)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2코린 2,15)새 계약의 사도들이 선포하는, 구원으로 이끄는 화해의 말씀 복음 선포 직무에 대한 성찰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특징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내용 중 하나는 복음을 선포하는 직무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성찰입니다. 사도의 직무에 대해 언급하는 신약성경의 내용에서 잘 알려진 것은 바오로의 협력자였던 루카가 전하는 사도행전의 표현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공동체의 일을 담당할 부제들을 뽑으면서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힙니다.(사도 6,4) 또 마티아 사도를 뽑는 이야기에서 보면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으로 표현됩니다.(사도 1,22) 이런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해했던 사도 직무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나 멸망할 사람들에게나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고,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내입니다.”(2코린 2,15-16) 바오로 사도는 자신과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표현의 배경에는 당시 로마의 ‘개선 행진’이 자리합니다. 로마는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며 개선 행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행진의 가장 앞에는 신에게 감사하는 의미를 담은 향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개선 행진에서 사용하는 이 향은 로마에게는 승리의 향기로 그리고 로마에 패한 이들에게는 죽음의 향기로 여겨졌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치 로마의 개선 행진처럼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 역시 사람들에게 전하는 향기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불의한 이들에게는 심판을 전하고 의로운 이들에게는 구원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개선 행진에서 피어오르는 향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또한, 바오로 사도는 사도의 직무를 “새 계약의 일꾼”으로 생각합니다.(2코린 3,6) 여기서 말하는 계약은 문자가 아닌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바오로 사도의 표현은 예레미야서 31장 33절의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구약의 십계명처럼 돌 판에 새겨진 계약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곧 문자가 아닌 성령에 의해 주어진 계약입니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옛 계약은 사라질 것이지만, 성령을 통한 새 계약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바오로 사도에게 사도의 직무는 “성령의 직분”이고(2코린 3,8) 사람들을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입니다.(2코린 3,9)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 사람들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으로, 영광으로, 궁극적으로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이 모든 것을 바오로 사도는 ‘자유’를 위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그들에게 해방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 하느님은 성령을 통한 새로운 계약으로 믿는 이들에게 의로움을 통한 자유를 선사합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코린 3,18)하느님이 부여한 화해의 직분바오로 사도에게 하느님의 가장 큰 업적은 죄 중에 있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과 화해시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과 화해를 위한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화해 말씀을 전하는 “화해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입니다.(2코린 5,18) 바오로 사도의 사도 직무에 대한 성찰 역시 충실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화해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을 죄에서 구원으로 이끄는 화해의 말씀을 사도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2코린 5,20) 사도의 직무는 이렇듯 말씀에 봉사하는 직분입니다. 이 직무는 개인적인 자격이 있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선물로 이해합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김지항2017.10.11
![[성경 속 도시] (62) 파트모스 섬](//cpbc.co.kr/CMS/newspaper/2015/09/rc/59431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62) 파트모스 섬요한 사도가 묵시록 기록했다는 곳 파트모스 섬의 요한 동굴 입구. 이곳에서 요한 사도가 묵시록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길재 기자 정치범의 유배지 파트모스 섬은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수많은 섬 중 하나로 바위와 화산으로 뒤덮인 조그마한 섬이다. 에페소에서 남서쪽으로 90㎞ 정도 떨어져 있고 에게해 해안에 있는 그리스 영토다. 이 섬은 로마제국 시대에 종교인 또는 정치범의 유배지로 이용됐던 곳이다. 파트모스에 속해 있는 몇 개 작은 섬들이 동쪽에서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곳 집들은 대부분 하얀색이어서 바다와 함께 어우러져 매우 깨끗하고 한 장의 사진처럼 느껴진다. 파트모스 섬이 유명해진 것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96) 말기에 요한 사도가 유배 생활을 하며 요한 묵시록을 기록한 장소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묵시 1,9). 그래서 파트모스 섬은 요한 사도와 관련이 매우 깊다. 이 섬에는 현재 요한 묵시록을 기록한 곳으로 알려진 동굴, 섬의 정상 부분에 성채처럼 우뚝 서 있는 그리스 정교회의 성 요한 기념 수도원, 요한 사도가 처음 세례를 주었다고 전해지는 세례터가 있다. 그래서 작은 섬이지만 1년 내내 순례객이 끊이지 않는다. 요한은 18개월간 파트모스 섬에서 지내며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다. 그리고 요한 사도가 에페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일곱 공동체에 그들의 신앙을 잊지 말라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이 편지가 성경의 마지막 책인 바로 요한 묵시록이다.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묵시 1,10-11).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에페소에 와서 선교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요한 사도의 흔적 곳곳에 남아 요한 사도는 요한 묵시록을 기록한 후 석방돼 말년을 에페소에서 살다가 생애를 마감했다. 요한은 일찍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로 불렸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요한 13,23). 요한 사도는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불굴의 신앙심과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여 사도의 길을 걸었다. 그의 흔적은 파트모스 섬 곳곳에 남아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9.22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27)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다 (루카 7,36-50)](//cpbc.co.kr/CMS/newspaper/2017/08/rc/691900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27)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다 (루카 7,36-50)진정으로 회개했으니 이미 용서받았다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아 음식을 드시던 예수님은 자신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닦아준 죄많은 여자를 용서하셨다. 그림은 성 안젤로 성당 벽화 중 하나로 ‘죄많은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 프레스코화, 성 안젤로 성당, 카푸아, 이탈리아. 출처=굿뉴스 가톨릭갤러리 지난 호에 살펴본 요한 세례자에 관한 예수님 말씀(7,24-35)의 끝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과 당신을 대비시키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7,33-35)루카는 이 말씀에 바로 이어 예수님께서 시몬이라는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를 받아 음식을 드시다가 죄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이 일화를 통해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인 예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 루카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화를 세 장면으로 나눠 살펴봅니다. 첫째 장면입니다.(7,36-38) 시몬이라는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장소가 어딘지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이 바리사이 집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옵니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7,37-38)고 루카는 전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죄인인 여자입니다. 그 여자가 왜 죄인인지 또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 여자 스스로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놀라운 활동과 특히 죄를 용서하신다는 소문을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단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는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은 다음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여인의 이 일련의 행위가 순전히 즉흥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향유를 든 옥합을 갖고 올 때부터 이미 어느 정도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 장면입니다.(7,39-47) 이 장면은 죄인인 여자의 행위를 본 시몬의 생각과 그 의중을 간파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에게는 여인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인의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문제 삼았습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댄 여자가… 죄인인 줄 알 터인데”(7,39)라는 생각의 이면에는 ‘왜 저 죄 많은 여인이 하는 짓을 그대로 놔둘까?’ 하는 못마땅함이 들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시몬에게 설명하십니다. 여자가 눈물로 당신의 발을 씻어주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다음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라준 것은 더 큰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더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7,47) 그런데 이 마지막 말씀은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여자의 행동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데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다음 장면에서입니다. 셋째 장면입니다.(7,48-50) 예수님께서는 이제 비로소 그 여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7,48)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둘째 장면 마지막 부분에서 제기된 의문에 답을 찾아봅시다.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께 한 행위를 용서의 이유(회개의 표시)이자 동시에 결과(사랑의 표현)라고 보면 어떨까요? 어쩌면 여자는 예수님을 찾아뵙기로 작정했을 때부터 이미 마음으로 회개했고 또 자신의 큰 죄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회개의 마음과 용서에 대한 확신이 예수님을 직접 뵈면서 행동으로 드러났다고 하면 잘못된 해석일까요?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7,48)고 말씀하셨을 때, ‘용서받았다’는 단어가 ‘과거에 이미 용서받았고 그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완료형’으로서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더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라는 47절의 ‘용서받았다’에 대한 반복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7,48)고 말씀하시기 전에 또 그 여자가 사랑의 행위를 표시하기 전에 여자의 회개하는 마음을 보시고 이미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는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예수님 말씀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합니다.(7.49)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언급하시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7,50) 하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 또한 여자가 예수님께 한 행위가 죄의 용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회개가 먼저인가 용서가 먼저인가 하며 옥신각신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편한 쪽으로 해석하려고 하지요. 누가 내게 잘못했고 내가 용서를 해야 할 입장이라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언제든지 용서할 준비가 돼 있어. 그쪽에서 먼저 잘못했다는 한마디만 한다면.” 그 반대 상황이라면 또 이런 식으로 생각하겠지요. “저쪽에서 조금만 관용을 베푼다면 내 잘못을 기꺼이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텐데….”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신 일화는 이런 방식에서 벗어나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죄 많은 여인이 보인 태도는 회개의 표현이자 또한 용서받은 데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공감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용서 청하는 사람의 진심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의 너그러움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을 닮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사이 시몬은 죄인을 멀리함으로써 자신의 의로움을 간직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멀리하거나 내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이고 포용하며 죄인을 회개시킴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드러내십니다. 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흠 없고 깨끗한 세상을 꿈꾸기보다는 죄인을 받아들여 용서하고 회개시킴으로써 개선해 가는 세상, 그런 세상을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가꾸어 가야 하는 게 아닐까요? 평화신문2017.08.15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3) 8세기 ② - 성화상 논쟁과 종교 예술의 활성화](//cpbc.co.kr/CMS/newspaper/2017/07/rc/688256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3) 8세기 ② - 성화상 논쟁과 종교 예술의 활성화일단락된 성화상 논쟁… 불씨는 꺼지지 않아 7세기 이슬람 제국의 침입을 막아낸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종교 분야에도 깊이 관여함으로써 동방 교회 자체를 분열시켰을 뿐만 아니라, 서방 교회와도 대립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이 서방 교회를 이방 민족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않자, 서방 교회는 유럽 본토 정치 세력과 우호 관계를 도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중심에 ‘성화상 논쟁’이라는 사건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성상 논쟁 시기 동로마 제국에서 제작된 성경 시편 사본의 삽화. 성상파괴주의자들이 교회에서 물에 적신 해면으로 예수의 성상을 지우는 것을, 병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장대에 꽂은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 예수에게 갖다 댄 것에 대비시키고 있다. 출처=나무위키 성화상 파괴론자들의 출현시리아 지역 평민 출신이었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Leo III, 재위 717~741)가 황제 즉위 전후로 이슬람 제국의 유럽 진출을 저지시키면서 인기가 높아지자, 황제는 본격적으로 종교 문제에도 관여했습니다. 725년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는 소아시아 주교들이 황제에게 성화상 파괴를 간언했고, 726년경에 레오 3세는 성화상 공경 금지 칙령을 내리면서 황궁의 칼케(Chalke) 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을 제거했습니다.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게르마누스 1세(Germanus I Constantinopolitanus, 재임 715~730)는 성화상 파괴를 반대하다가 730년 레오 3세에 의해 해임되었습니다. 레오 3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PP. II, 재임 715~731)에게 황제의 정책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는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고 황제의 요구를 거절하며 황제에게 성화상 공경에 대한 서한을 보냈습니다.(「신경 편람」 581 참조) 그러자 레오 3세는 또 다시 성화상 공경 금지 칙서를 발표하고 성화상 철거 및 성인 유해까지 파괴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Gregorius PP. III, 재임 731~741)도 731년 로마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성화상 파괴론자(iconoclast)를 파문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레오 3세의 아들이자 후임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us V, 재위 741~775)는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반란에 의해 퇴위되어 잠시 피난살이를 했습니다. 이때 그를 보호하며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성화상 파괴론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743년 콘스탄티누스 5세는 제위를 회복하자 바로 성화상 파괴 명령을 내렸습니다. 754년 콘스탄티누스 5세는 히에레이아(Hiereia) 교회 회의를 소집해 성화상 공경을 우상으로 규정하고 성화상 공경을 실천하는 수도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성화상 공경의 당위성을 밝힌 다마스쿠스의 요한다마스쿠스의 요한(Ioannes Damascenus, 650경~754이전)은 성화상 파괴론자들을 반대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이 태어날 당시에 다마스쿠스는 이미 이슬람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다행히 한동안 그리스도교 관용 정책을 펼쳤던 이슬람 지도자들로 인해 요한은 가업을 물려받아 황실에서 관직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7세기 말부터 정책이 바뀌었고, 요한은 관직을 더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요한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마르 사바 수도원으로 이주하여 수도 생활을 실천하면서 성경과 신학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의 명성을 듣게 된 예루살렘 총대주교 요한 5세(Ioannes V Hierosolymitanus, 재임 706~735)는 요한에게 사제품을 주었으며, 성화상 논쟁에 가담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성화상 공경의 당위성을 강력히 주장했고, 사망 후인 754년에 히에레이아 교회 회의에서 단죄되었다가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복권되었습니다.요한은 많은 양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3부작으로 구성된 「인식의 원천(Fons Cognitionis)」 중 한 권인 「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De Fide Ortodoxa)」에서 다양한 주제로 구성된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성화상 공경과 성인 및 마리아 공경에 대한 견해를 밝혔습니다. 또한 요한은 저서 「성화에 관한 세 편의 연설(Orationes de Imaginibus Tres)」에서 성화상 공경에 대한 올바른 근거를 밝혔습니다.첫 번째 연설에서 요한은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창조된 하느님의 형상이기에 성자 그리스도는 당연히 성부의 형상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두 번째 연설에서 요한은 예형론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의 구원을 보장할 구원의 은총이 담겼다고 언급했습니다. 세 번째 연설에서 요한은 하느님에 관한 형상의 묘사가 강생의 신비로 인하여 그리스도교에서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언급했습니다.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화상에 관한 교의적 정의 공포됨비잔틴 제국 황제 레오 4세(Leo IV, 재위 775~780)가 즉위하자 성화상 공경을 지지하는 황후 이레네(Irene, 750쯤~803) 덕분에 암묵적으로 성화상 공경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us VI, 재위 780~797)는 모후 이레네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게 되어 786년경에 성화상 공경 신심이 거의 회복되었습니다.따라서 여황제 이레네에 의해 787년에 소집된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화상에 관한 교의적 정의를 공포했으며(「신경 편람」 600~603 참조), 성화상들,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신경 편람」 605~609 참조) 또 성화상 공경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파문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성화상 논쟁이 한 번 더 벌어졌습니다. 비잔틴 제국 황제 레오 5세(Leo V, 재위 813~820)는 815년 성화상 공경 금지 칙령을 발표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케포루스 1세(Nicephorus I Constantinopolitanus, 재임 806~815)의 협조를 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총대주교를 해임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 황제 미카엘 3세(Michael III, 재위 842~867)가 즉위하자 모후 테오도라(Theodora, 재위 842~855)는 섭정으로 84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성화상 공경 법령을 확인했으며, 성화상 공경자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메토디우스(Methodius Constantinopolitanus, 재임 843~847)를 총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비록 성화상 파괴론자들이 어떤 우상이나 신상 및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명(탈출 20,4; 레위 26,1; 신명 4,16~18 참조)을 핑계 삼아 성화상 논쟁을 벌였으나, 성화상 공경은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 때문에라도 평신도 신심 운동 안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성화상 공경에 힘입어 교리 내용을 담은 예술 작품이 교회 안팎에 설치되었으며, 성화상 공경을 지지했던 교황은 세속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신앙을 지키는 수호자로 여겨졌습니다. 결국 성화상 공경을 지속적으로 지지했던 서방 교회와 성화상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동방 교회는 훗날 분열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톨릭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7.07.11

기도를 어떻게 바쳐야 할지 모르겠어요[교회상식 교리상식] 겸손·믿음 갖고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노력한 신자가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기도를 못한다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떻게 기도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바람직한 기도 자세에 대해 「가톨릭교회교리서」를 중심으로 알아봅니다. ◇기도 자세 기도할 때에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자세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오만한 사람은 자신의 원의를 하느님의 뜻보다 위에 두지만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위에 둡니다. 자신의 뜻을 하느님 뜻에 맞추고자 합니다. 또 자신의 뜻을 하느님 뜻에 맞추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고 뉘우칩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은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은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마음을 깨끗이 하여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합니다. 겸손한 자세와 관련해 성경에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루카 18,9-14)가 나옵니다.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하고 바치는 세리의 기도는 겸손한 마음, 회개하는 마음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겸손은 기도의 초석"이며 "기도의 선물을 무상으로 받기 위한 마음 가짐"이라고 가르칩니다(2559항). 기도할 때에 요청되는 또 한 가지 기본 자세는 신뢰, 곧 믿음입니다. 신뢰 역시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인다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한다면 하느님께 자녀다운 신뢰심을 지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18). 그러나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믿음의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마음을 가져야 믿음의 기도가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마태 6,32-33 참조). 기도할 때에 믿음과 함께 요구되는 것은 간절함과 끈기입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친구의 청을 들어 주는 사람의 비유'(11,5-8)와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18,1-8)는 기도에서 간절함과 끈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비유의 끝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한 가지 더 「가톨릭교회교리서」는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드리신 두 편의 기도에 관해 언급합니다. 첫째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나오는 기도(마태 11,25-27; 루카 10,21-22)이고, 둘째 기도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실 때에 바친 기도(요한 11,41-42)입니다. 이 두 편의 기도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두 기도 모두 감사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첫째 기도에서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하고 감사를 드리신 예수님은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하고 고백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기도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2603항). 둘째 기도에서 예수님은 감사를 드리신 후에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청하고 계신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며 이렇게 "감사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제시합니다. 곧 "선물을 받으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선물을 주시고 그선물과 함께 당신 자신도 주시는 분(하느님 아버지)과 일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베풀어진 선물보다도 그 선물을 주시는 분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선물은 곁들여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2604항). 따라서 기도할 때는 언제나 감사로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고, 얻고자 하는 기도의 선물을 구하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바치신 두 편의 기도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점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cpbc.co.krcpbc2017.10.20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70)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 4,7)](//cpbc.co.kr/CMS/newspaper/2017/10/rc/698743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70)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 4,7)질그릇같은 나약함 속에 드러난 주님의 능력 코린토 유적. 가톨릭평화신문 DB 이방인의 지역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공동체를 세운 바오로 사도에게 가장 힘들었던 점은 그의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던 무리였습니다. 바오로 서간에 간혹 이런 부분이 언급되지만 가장 구체적인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입니다.“우리도 어떤 사람들처럼 여러분에게 내보일 추천서나 여러분이 써 주는 추천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2코린 3,1) 여기서 말하는 추천서가 무엇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인정한 선교사들을 위한 추천서나 자격을 나타내는 문서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성장하는 교회와 함께 많은 이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나서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신원을 확인해 주는 어떤 장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루살렘 교회의 추천서와 같은 형식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런 추천서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추천서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진 이 추천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으며 또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우리의 봉사직으로 마련된 그리스도의 추천서입니다.”(2코린 3,2-3) 사도직 인정 않는 반대파와의 갈등바오로 사도가 겪은 그의 반대자들과의 갈등은 상당히 컸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따르면 그들은 사도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한 일은 자신들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그들을 거짓 사도라고 비판합니다.(2코린 11,13) 이 반대자들이 누군지에 대해 여전히 많은 견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보면 이들은 유다교 출신의 선교사들로 바오로 사도와는 달리 유다교의 전통들을 사람들에게 지키도록 요구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2코린 11,22-23) 대가없이 복음 선포 위해 몸바쳐이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죽을 위험도 감수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여행에서 무수한 어려움들을 겪었습니다.(2코린 11,24-33 참조)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아무런 대가 없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삶을 바쳤던 인물이었습니다. 또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은 바오로 사도가 겪었던 개인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2코린 12,7)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4장 13-14절의 내용과 함께 본다면 바오로 사도는 육체의 병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모든 내용을 통해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를 위해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개인적인 어려움과 복음 선포를 위해 감수해야 했던 고난들, 그럼에도 복음을 선포해야만 했던 처지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이라는 비유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질그릇은 바오로 사도 개인을 나타내고 보물은 하느님의 구원 복음을 의미합니다. 고난 속에 더 굳건해진 선교 사명이미 구약성경에서 질그릇은 인간의 나약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시편 31,13; 예레 22,28) 쉽게 깨질 수 있는 특성을 통해 인간의 유한함과 한계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의 보잘 것 없음을 표현합니다. 반면에 보물은 복음의 선포에 담긴 구원을 가져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충분히 할 만해서, 그럴 능력이 있어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자랑할 것 없고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이지만,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업적이 더 잘 드러나도록 하는 사명을 받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역설적으로 질그릇 같은 바오로 사도의 나약함을 통해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더욱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4,7)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김지항2017.10.18
![[이땅의 평화-디지털 시대 청소년 사목] 스마트폰 놓지 않는 청소년, 교회 고민도 깊어져](//cpbc.co.kr/CMS/newspaper/2017/01/rc/668551_1.0_titleImage_1.jpg)
[이땅의 평화-디지털 시대 청소년 사목] 스마트폰 놓지 않는 청소년, 교회 고민도 깊어져 가톨릭교회는 디지털 시대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 제작에 힘쓰고 있지만 청소년을 위한 콘텐츠는 여전히 부족하기만 하다. 청소년 눈높이 맞는 콘텐츠 개발 시급“주일학교 애들 몇 명은 피정이나 캠프를 가면 스마트폰을 내야 하니까 안 가겠대요. 농담 같죠? 진짜예요!” (교리교사 문혜지 아셀라)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문화 속에서 자란 오늘날 청소년들은 즉각적이고 화려한 체험을 선호한다. 쉴 새 없이 스마트폰을 만지며 빠르게 SNS 세계를 넘나들고, 글 대신 이모티콘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이들은 주로 간결하게 그려진 웹툰과 10분 안팎의 짧은 동영상 등 간편한 콘텐츠를 즐겨 소비한다. 디지털 미디어 소비가 높아질수록 주의력 지속 시간은 짧아지고 있다.교회 역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디지털 문화 속 청소년들을 사로잡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처지다. ‘디지털 시대 청소년 사목’ 어디까지 왔고 또 어디로 가고 있을까.스마트폰을 손에 든 청소년 무리가 서울 시내 한 성당에 나타났다. 성당 앞마당에 서서 구호를 외치고 성가를 부르더니 스마트폰에 그 모습을 담아내 어디론가 전송한다. 작은 화면에 머리를 맞대고 교리 퀴즈를 풀면서 자신들의 ‘미션’ 성공률을 실시간으로 점검하기도 한다.지난해 9월 열린 제12회 서울대교구 가톨릭 청소년 축제에서는 스마트폰이 핵심 도구로 사용됐다. 주일학교 학생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축제 전용 웹 페이지’에 접속해 축제 본부로부터 수행 미션을 전달받고 실시간 진행과정을 기록하며 ‘모바일 레이스’를 벌였다. 마치 게임처럼 진행되는 미션 레이스는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스마트폰을 손에 달고 사는 청소년들을 위해 더 즐거운 축제를 만들 수 없을까?’ 이 고민에서부터 축제 전용 모바일 페이지가 탄생했다.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전산 업무팀 한상욱(안토니오) 팀장은 “축제라면 보통 행사 부스를 찾아다니는 방식을 떠올리는데 좀 더 활동적이면서 흥미를 끌어낼 방법을 찾다가 2015년 모바일 페이지를 처음 만들게 됐다”며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디지털 시대, 교회의 현주소교리교육도 이제는 성당 주일학교 책상 앞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교회는 디지털 시대 아이들을 끌어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펼치고 있다. 인터넷 방송과 애니메이션, 카카오톡 등 청소년들이 즐겨 쓰는 디지털 플랫폼과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대구대교구는 2013년 인터넷 교리공부 팟캐스트 ‘옥탑교리방’을 제작해 큰 인기를 끌었다. ‘옥탑교리방’은 사제와 청년 신자들이 모여 청소년 교리서 「유캣(YouCAT)」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교리 외에도 젊은 신자들과 공유할 만한 교회 행사, 책 소개 등을 곁들였다. 팟캐스트는 총 20회, 각각 30분 분량으로 제작돼 교구 누리집과 아이튠스 등을 통해 배포됐다.서울대교구 청소년국 유아부는 가톨릭 유아 노래를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누리집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쉬운 노랫말과 그림을 통해 유아들에게 ‘부활’, ‘성탄’, ‘성모’ 등의 개념을 전달한다. 수원교구 청소년국은 카카오톡 계정을 통해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상담 등에 활용하도록 했다. 청소년 눈높이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처럼 디지털 도구들을 활용한 다양한 시도가 있지만, 이용자인 학생들의 요구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무엇보다도 주일학교나 가정에서 ‘믿고 쓸만한’ 신앙 교육용 디지털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이미 제작된 콘텐츠의 경우엔 개별 누리집을 통해서만 공개되거나 시간이 지나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주일학교 교사들은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가 더 많이 개발되기를 한 목소리로 주문했다.6년째 교리교사로 봉사하는 문혜지(아셀라, 서울 구로2동본당)씨는 “주일학교 내 디지털 활용은 피할 수 없는 대세”라며 “기왕이면 가톨릭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춘 디지털 자료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문씨는 “학생들에게 성경 앱을 내려받으라고 했더니 개신교 성경 앱을 깔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면서 “주일학교 시간에 쓸 교육용 영상물도 가톨릭 교회 교리에 맞는 내용을 이곳저곳에서 찾아내 편집해서 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초등부 교안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서연구가 김두심(엘리사벳)씨는 청소년 교리교육용 앱 제작을 제안했다. 현재 ‘매일 미사’, ‘가톨릭 성가’, ‘천주교 용어 자료집’ 등이 제작돼 많은 신자가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가톨릭 청소년 교리 앱이 나온다면 주일학교와 가정에서 활발하게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이들이 더 쉽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각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며 “현재 초등부 월례 교육에서는 성경 말씀을 친숙한 예화에 섞어 전하고 있지만 모든 교리 내용을 예화로 제공하기 힘든 데다 몇 장씩 곁들인 그림은 요즘 청소년들의 시선을 끌기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유은재 기자 you@cpbc.co.kr 백영민2017.01.18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5.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마르 14,34)](//cpbc.co.kr/CMS/newspaper/2017/02/rc/670966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5.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마르 14,34)십자가 죽음 앞에 선 예수님, 겟세마니 올라 하느님께 기도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 작 ‘체포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출처=「아름다운 성경」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이후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님에 대한 내용들은 모두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갑니다. 예수님께서 잡히기 전에 찾을 수 있는 것은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그 장소를 겟세마니로 전하고 루카는 올리브 동산이라고 전합니다. 예루살렘 동쪽의 올리브 산은 이미 구약성경에서도 기도의 장소(2사무 15,32)나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에제 11,23)으로 표현되고 종말 때의 심판이 이루어질 곳으로 소개되기도 합니다.(즈카 14,4) ‘겟세마니’라는 말이 ‘기름 짜는 틀’을 뜻한다는 점에서 올리브 산이나 겟세마니는 동일한 장소를 일컫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곳을 ‘정원’이라고 표현합니다.(요한 18,1) 예수님은 이 기도의 자리에 세 명의 제자와 동행합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기도 한 이들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되살린 일(마르 5,35-43)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마르 9,2-10) 때에도 등장하는 증인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에서 정한 것처럼 ‘둘이나 셋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신명 17,6)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예수님의 감정이 드러나는 이런 표현은 복음서 안에서 자주 발견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의 표현을 보면 이 표현은 시편 42장 6절(또는 43장 5절)의 내용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또한, 집회서 37장 2절의 내용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동무나 친구가 원수로 변하면 죽는 것처럼 슬프지 않겠느냐?” 예수님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제자로부터 배신당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집회서의 말씀 역시 문맥과 잘 어울립니다.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기도는 그에게 닥칠 고통의 시간과 인간적인 두려움을 잘 드러냅니다. “그 시간이 비켜 가게 해주십사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제 다가올 사건들이 임박했음을 보여줍니다. 보통 성경에서 ‘그 시간’은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이 기도 안에서 시간이 나타내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말을 통해 기도합니다. “아빠!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아버지에 대한 호칭과 함께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었던 주님의 기도와 상당히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인간적인 고통과 두려움을 넘어 하느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루카는 이처럼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땀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고 묘사합니다. 짧은 표현이지만 예수님의 심경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겟세마니의 기도는 고통과 두려움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과 그럼에도 하느님의 구원을 위해 순명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과 대조적인 것은 동행했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당부에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특히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가르침은 단지 겟세마니에서의 자세만이 아니라 앞으로 베드로 사도에게 맡겨질 사명에 관한 내용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앙인들이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겟세마니의 기도를 통해 복음서가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세 번에 걸쳐 번민과 괴로움에 기도했던 절박한 예수님의 모습과 여전히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처하게 될 마지막 운명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복음서는 앞으로 전개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 안에서 제자들의 이런 모습을 지속적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함께하고, 중요한 사건들을 목격한 제자들이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복음서는 독자들에게 깨우치도록 권고합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백영민2017.02.08

하늘의 도리에 따라 생겼음을 깨달아야 도리도리 각궁이상재 신부 / 홍익포럼 / 2만 원도리도리(道理道理) 각궁(覺躬)은 우리나라 전통 육아법인 ‘단동십훈(檀童十訓)’에 나오는 말이다. 천지 만물이 하늘의 도리로 생겼으니 아이인 너도 하늘의 도리에 따라 생겼음을 깨달으라는 뜻이다.가톨릭평화방송 TV 까스통 신부의 신앙강좌 ‘꿈을 지고 따르라’를 진행한 이상재(대구대교구 고성동본당 주임) 신부가 TV 강연 내용을 다듬어 「도리도리 각궁」을 펴냈다. 저자는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고 그분과 일치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일곱 갈래 길을 제시한다. 먼저 길을 나서(求道), 보고(視道), 듣고(聞道), 얻고(得道), 행하고(行道), 걸림돌은 옮겨놓고 디딤돌을 딛고 하느님을 향해 꿈을 펼치라고 한다.저자는 인간은 먹어야 살듯 의미를 찾아야 살 수 있다고 한다. 의미가 없으면 공부도, 일도, 삶도 붙들고 살 수 없다. 그래서 의미를 찾아 구도의 길을 나서야 한다. 뜻을 찾아 구도의 길을 나선 이는 의미를 좇아 철학하게 된다. 철학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것은 보는 것이다. 인식하면서 볼 때 비로소 자신만의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것이 시도(視道)이다. 세상 이치를 꿰뚫어보는 것은 더 높은 차원으로부터의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은 ‘봄’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고 언제나 ‘들음’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교회는 보는 것보다 들음을 강조한다. 말씀의 전례 중 성경을 보지 않고 듣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들음을 통해 이치를 제대로 보는 것이 깨우침이다. 도가 트이면 길이 열린다. 이를 득도(得道), 각궁(覺躬)이라 한다. 득도의 삶, 각궁의 행위는 믿음과 희망, 사랑이라는 구체적 길로 드러난다. 지행합일(知行合一), 깨침이 곧 행함이다.저자는 “하느님은 믿음의 대상이시고 사람은 이해의 대상”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과 관계된 모든 것을 믿으시고, 사람과 관계된 모든 것을 이해하십시오”라는 권고로 책을 끝맺는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백영민2017.05.16

사제들의 기도와 일상 이야기, 책으로 만나 보세요왼쪽부터 책 「나그네 생각」, 「사제생활 50년」, 「하느님을 그리며」표지.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 양 떼를 돌보며 사는 사제들은 사목 일과 중에도, 그리고 홀로 침묵하는 중에도 하느님을 노래한다. 주님의 백성인 양들은 말씀의 선포자요, 영적인 삶의 모범인 사제들의 찬양을 듣고 따르며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에 산다. 하느님을 노래하는 사제들의 신간을 소개한다. 나그네 생각김현 신부 지음 / 1만 원 / 으뜸사랑“‘세상에 길들여지는 것’과 ‘철이 든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그 차이를 잊고 ‘길들여지기’에만 매진하고 살아온 듯합니다.”(41쪽)사제생활 10여 년. 김현(부산교구 언양본당 협력사목 주임) 신부는 로마 유학 중에도 사목 활동 중에도 떠오르는 단상을 틈틈이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 속엔 기다림, 비움,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난 하느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떠오르는 일상을 옮긴 짧은 글들은 사제의 차분한 시선을 담은 묵상이나 다름없다. 김 신부는 욕심이 없는 나무를 보고 시로 옮기기도 하고, 험담과 편견에 대해 꼬집기도 한다. 김 신부는 위로를 잊지 않는다.“세상이 그들을 힘들게 만든 것인지, 그저 각자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괜찮아….”(50쪽)사제 생활 50년이계창 신부 지음 / 1만 원 / 기쁜소식이계창(대전교구 원로사목자) 신부가 사제생활을 하며 가장 보람되게 느낀 것은 은퇴할 때까지 예비신자 교리교육을 맡아 강의한 것,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 창립 멤버로서 활동해온 것, 본당을 옮길 때마다 ‘사랑의 나눔회’ 봉사조직을 만들어 이웃사랑을 실천한 것이다.어린 시절 홀로 성당에 찾아가 세례를 받은 이 신부는 군에서 제대하기도 전에 신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할 정도로 사제가 되길 열망했다. “가난한 이웃과 어려운 신학생을 돕겠다”는 다짐대로 그는 대전교구 신학생 장학기금으로 2억 5000만 원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1억 원을 쾌척하고 2007년 사목 일선에서 물러났다.50년간 사제생활을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옮겨놓은 책은 이 신부가 만난 인연들과 소소한 일상, 그리고 유신체제에 맞서며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그의 역동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단 한 번도 사제가 된 것을 후회해본 적 없다”는 이 신부는 지금도 매일 묵주기도 100단을 넘게 바치며 한국교회 발전과 사회 정의를 주님께 청하고 있다.하느님을 그리며전경표 신부 지음 / 1만 3000원 / 기쁜소식전경표(순천향대서울병원 원목실장) 신부가 올해 사제 수품 25주년을 맞아 그간의 강론을 모았다. 책은 제목대로 하느님을 ‘그린’ 강론집이면서 전 신부 스스로 하느님을 ‘그리워’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는 신앙인들이 몸과 마음을 바로 하는 재계(齋戒)를, 봉헌을 통한 평화를 이루는 희사(喜捨)를,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전한다. 화려한 미사보를 쓰고 헌금을 많이 내야만 하늘나라에 들 것이란 착각에 빠지는 ‘제도의 수호자’가 되지 말고, 말씀과 기적에서 비롯된 ‘표징’을 깨닫자고 강조한다. 전 신부는 성경 이야기를 통해 삶에서 갖춰야 할 신앙인의 자세를 일깨우고 있다.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김지항2017.08.16

대죄? 소죄? 죄에도 사이즈가 있나요한 신부가 신자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있다.【CNS】"죄란 이성과 진리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이다. 죄는 어떤 것에 대한 비뚤어진 애착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가 밝히는 죄의 정의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1846-1896항)를 중심으로 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봅니다. ◇죄란 무엇인가 성경은 하느님께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온갖 것을 지어내시고 사람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시고는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고 전합니다. 죄는 이렇게 "참 좋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침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래서 죄를 "영원한 법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위나 욕망"이라고 정의했지요.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죄는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자 "하느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나아가 죄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맞서며 우리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합니다. 이러한 죄는 인간의 본성에 상처를 입힐 뿐 아니라 인간의 연대성을 해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해치는 것입니다. ◇대죄와 소죄 죄는 그 경중에 따라 대죄(大罪, 죽을 죄)와 소죄(小罪, 용서받을 죄)로 나눕니다. 대죄(죽을 죄): 하느님의 법을 크게 어겨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생명 원리인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근본적으로 거스르고 파괴하는 죄를 말합니다. 예컨대 하느님을 모독하거나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근본적으로 어기는 것이 됩니다. 또 살인을 하거나 간통을 하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어기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죄가 대죄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나아가 어떤 죄가 대죄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첫째, 중대한 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둘째, 완전히 의식하며, 셋째, 고의로 저지를 때 대죄가 되는 것입니다. 중대한 문제란 십계명을 거스르는 죄를 말합니다. 그런데 십계명에도 경중이 있지요. 살인은 도둑질보다 더 무겁습니다. 폭력도 부모에게 행사한 폭력은 그 자체로 다른 사람에게 휘두른 폭력보다 더 무겁습니다. 완전히 의식한다는 것은 그 행위가 악하고 하느님의 법을 거스른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으면서 저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고의로 저지른 죄라는 것은 의도를 가지고 저지르는 죄를 가리킵니다. 똑같은 죄를 고의가 아니라 무지에서 지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줄어듭니다. 순간적으로 격한 감정이 일어나서 저지른 죄, 외부의 압력에 의해 또는 병적 장애에 의해 저지르는 죄도 책임이 줄어들 수 있지요. 하지만 악의를 가지고 고의로 짓는 죄는 가장 무거운 죄입니다. 대죄는 생명 원리인 사랑을 상실하게 하고 성화 은총을 박탈해 버립니다. 이 은총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기에 인간의 진실한 회개와 함께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드리는 성사 곧 고해성사를 통해서만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소죄(용서받을 죄) :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어기고 해치기는 하지만 그 사랑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 죄를 말합니다. 가벼운 문제에 대해 도덕률이 정한 기준을 지키지 않았거나 중대한 문제에 대해 도덕률을 어겼지만 완전히 의식하지 못했거나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긴 것이라면 소죄가 됩니다. 예를 들면 엉겁결에 거짓말을 했다거나 남의 일에 쓸데 없이 참견해서 화를 돋군다거나 또는 비웃음을 흘리는 행위 등은 소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소죄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기에 고해성사를 보지 않더라도 인간의 참회 행위를 통해서 속죄할 수 있습니다. 현세에서 살아가는 동안 소죄들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죄라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습관적으로 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 소 도둑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소죄라 하더라도 자꾸 범하면 양심을 흐리게 하고 판단을 그르치게 해 악습을 형성하게 합니다. 다른 많은 죄를 만들면서 이런 악습들의 뿌리가 되는 죄를 죄종이라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죄종을 일곱가지로 구분해 왔는데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가 그것입니다. 죄는 개인이 짓는 것이기에 개인적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짓는 죄에 협력하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그 죄에 직접적이고 고의적으로 관여하는 일뿐 아니라, 그 죄를 명령하거나 권장하거나 칭찬하거나 승인하는 일, 그 죄를 알리거나 막아야 할 의무가 있을 때 그렇게 하지 않은 일, 그리고 그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편들거나 보호하는 일 등이 포함되지요. 이창훈 기자 changhl@cpbc.co.krcpbc2017.10.13
2016 세종도서 선정 교양 부문 교회 서적 「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분도출판사), 「그림에 숨겨진 하느님」 「예수 - 새 시대를 여심」(이상 바오로딸),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1ㆍ2(가톨릭출판사) 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세종도서 교양 부문 도서로 선정됐다. 「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는 분도출판사가 자비의 희년을 맞아 특별 기획한 도서. 책은 세계의 종교 전통들이 자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다루고, 오늘 우리 고통의 맥락에서 자비 언어를 성찰한 글로 구성돼 있다. 자비와 관련해 여러 책이 출간됐지만, 우리의 전통 및 현실과 자비를 연결했다는 평가를 받아 올해의 세종도서로 선정됐다.「그림에 숨겨진 하느님」은 성화를 통해 성경 내용을 알려 주고, 그 내용의 그림을 보면서 하느님의 뜻을 일깨우며 신앙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묵상서이다. 「예수- 새 시대를 여심」은 신약성서학 박사인 예수회 송봉모 신부의 5부작 예수 시리즈 가운데 두 번째 책으로 예수의 공생활 시작을 다뤘다. 쉽고 깊이 있는 해설로 성경 속 이야기뿐만 아니라 성화, 지도, 발굴 지역, 현지 사진 등을 함께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1ㆍ2는 2014년 가톨릭평화방송 TV와 라디오에서 인기리 방송된 박승찬(가톨릭대) 교수의 ‘그리스도교, 서양 문화의 어머니’를 글로 엮은 도서다. 국내 출판계에서 그리스도교 인문 교양서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은 그리스도교 태동부터 15세기까지 1500년의 그리스도교 흐름을 문화, 역사, 철학적 관점에서 풀어냈다. 저자는 중세가 고대와 근대 사이에 긴 어두운 시기가 아니라 그 어느 시대보다 사상과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였음을 강조하며 독자들에게 중세의 새로운 변모를 발견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백영민2016.12.21
![[생활 속의 복음]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cpbc.co.kr/CMS/newspaper/2017/03/rc/676444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정연정 신부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주임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구약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장(印章)처럼 나를 당신의 가슴에,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팔에 지니셔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큰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가지 못한답니다. 누가 사랑을 사려고 제집의 온 재산을 내놓는다 해도 사람들이 그를 경멸할 뿐이랍니다.”(아가 8,6-7) 모름지기 사순 시기는 우리를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때입니다.1. 내 백성아, 너희를 데려가겠다(에제 37,12 참조)‘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일치’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말씀하시면서, “일치란 단순히 말과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 내 삶의 짜깁기와 다른 사람 삶의 짜깁기가 일치하는 것으로서 나의 삶이 다른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깨우쳐주셨습니다.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를 끌어내어,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놓겠다”(에제 37,12-14 참조)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끔찍이도 사랑하시는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2. 여러분의 죽을 몸이 다시 살 것이다(로마 8,10-11 참조)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너는 (내 안에서)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라고 통찰했습니다. 사실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에, 사랑은 그 자체 안에 이미 영원에 대한 향수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용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고 영원한 것’입니다.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하느님의 영(靈)이 ‘죽을 몸’, 곧 ‘죽음을 향해 있던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셨다”(로마 8,8-11 참조)고 선포하십니다. 참으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신실하신 사랑은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고 밝히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3.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요한 11,36 참조)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생은 무의미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던 라자로의 죽음 앞에 마음이 북받치시고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2-36 참조)고 전합니다. 여기서 라자로는 우리의 예형(豫形)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께서는 이른바 ‘물질주의와 상대주의와 무관심주의’라는 무덤 속에 갇혀있는 우리에게 크게 외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리 나와라.”(요한 11,25.43 참조)4. 너는 믿느냐?(요한 11,26)교황청 성서위원회는 ‘라자로의 부활’(요한 11,1-44)처럼 예수님께서 행하신 ‘예외적인 행위’에 대하여 “증명되고 기록된 표징(表徵, semeia)들은 예수님에 대한 막연하지 않고 명백한 구체적 믿음, 따라서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으로 인도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성경의 영감과 진리」 참조)교형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죽을 몸’인 우리를 ‘부활과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부디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영원히 살게 하시는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삶이 되시길 빕니다. 아멘. 문채현2017.03.28

미술관·박물관 늦여름 나들이 여가 즐기고 신앙심도 키워요가볼 만한 전시관 4선 입추가 지나면서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말복이 지나면서 더위도 한풀 꺾일 태세다. 막바지 여름을 조금 더 뜻있게 보내는 방법은 없을까.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교회 미술관과 박물관을 소개한다. 갤러리1898의 가톨릭청년미술가회 정기전에서 선보일 예정인 김수현 작 ‘요한’.명동 1898광장주교좌 명동대성당 지하 1898광장은 한여름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볼거리도 많다.1898광장에는 서울대교구 문화위원회(위원장 허영엽 신부)가 운영하는 ‘갤러리1898’이 있다. 갤러리에서는 15일까지 한국예술수석전시회가 열린다. 이후엔 ‘나를 이끄시는 빛’을 주제로 가톨릭청년미술가회 정기전(8/16~22)이 예정돼 있다. 이어 △김혜선 개인전(8/23~29) △가톨릭 청각장애작가 초대전(8/30~9/5) 등이 이달에 시작한다.갤러리 대각선 맞은편에는 ‘가톨릭생명나눔센터’와 ‘가톨릭정보문화센터’가 있다. 가톨릭정보문화센터에서는 서울의 성지순례길과 성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 선간판 옆에서 기념 촬영도 가능하다. 또한,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마련한 테이블에서는 자녀들에게 장기 기증과 조혈모세포 기증과 같은 가톨릭 교회의 생명 나눔 운동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다.특히 1898광장에는 레스토랑과 카페, 제과점, 재활용 공방, 서점, 명동대성당 기념품점 ‘1898+’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어 명동을 찾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관람 문의 : 02-727-2336, 갤러리 1898새남터 기념관우리나라 첫 번째 사제인 성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 신부가 순교한 서울 새남터성당에 있는 새남터기념관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박해사, 103위 순교성인화, 형구와 형틀, 성인 유해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이자 길 위의 사도로 불리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일생에 관한 기획 전시회가 한창이다. 오전 10시~오후 5시 무료 관람. 관람 문의 : 070-8672-0327, 새남터기념관한국 천주교 순교자박물관새남터에서 한강둔치 길을 따라 5㎞ 떨어진 곳에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에는 한국 천주교 순교자박물관이 있다. 현재 박물관에서는 절두산 순교기념관 축성과 봉헌 5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초대 평양교구장 패트릭 번 주교의 십자고상을 비롯해 ‘백서’로 유명한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의 ‘청화백자합’, 안중근(토마스, 1879~1910) 의사의 ‘경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대주교의 제의 등을 관람할 수 있다. 특별전은 10월 21일까지다. 10인 이상 단체 순례객은 2주 전 반드시 예약해야 한다.관람 문의 : 02-3142-4504, 한국 천주교 순교자박물관강원 영월종교미술박물관미래주의 거장인 이탈리아의 카를로 카라(Carlo Carra)에게 사랑받은 조각가 최바오로(바오로)의 성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최씨는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로마의 목공방에서 도제 시절을 보낸 뒤 수십 년간 성미술 조각가로 활동해 왔다. 평생의 역작인 성화와 성미술 조각품을 관람할 수 있다. 1동에는 성경을 기반으로 제작한 1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고, 2동에는 불교ㆍ힌두교 등 동서양의 종교 작품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 입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은 부산비엔날레 출품작으로, 크기가 3m를 넘는다. 수장고에 600여 점의 미공개 작품이 있어 시기에 따라 작품 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오전 10시~오후 5시, 매주 화요일 휴관. 관람료 2000~4000원. 관람 문의 : 033-378-0157, 영월종교미술박물관 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김지항2017.08.09
![[신앙단상] 인생 후반전, 역전해서 주님께로](//cpbc.co.kr/CMS/newspaper/2017/08/rc/692916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인생 후반전, 역전해서 주님께로서왕석(마태오, 꾸르실료 한국협의회 회장,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주간 ) 교통사고를 겪고 15년이 흘렀습니다. 이후 덤으로 사는 선물을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주님은 성실하게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하고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간 때로는 가파른 고갯길을, 때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강을 건너기도 했습니다. 쉽지만은 않았던 그 길을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이 늘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폭풍우 치는 바다에 떠 있는 배들에게 비춰주는 등댓불처럼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당신 사랑을 비춰주고, 우리 각자의 희망과 믿음이 빛나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씀드리고, 나 자신을 모두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사랑의 생활을 살 수 있기를 지금도 기도드립니다. 저는 모든 일을 주님 편에서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습니다. 이제 제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제게 남은 건강한 몸,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지닌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떠한 역경이나 어려운 고통이 찾아와 한 몸 지쳐 쓰러질지라도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끝까지 가려 합니다.여러분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오래 살든 오래 살지 않든 멋지게 살고 싶으시죠? 누구나 곱게,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저는 제 삶을 축구경기 전후반 90분에 비유하곤 합니다. 제가 지금 6학년 3반, 예순셋입니다. 전반전 45분이 지나갔고, 후반전도 벌써 18분이 지나갔습니다. 남은 시간은 27분에 불과한 셈이죠.저는 전반전에 이미 3골을 먹혔습니다. 3대 0으로 지는 삶을 살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제 교만으로 인해 사업을 하는 동안 30번이 넘는 부도를 맞으며 한 골을 내줬습니다. 두 번째, 한때 주님과 멀리하고 새벽 2~3시가 되어서야 귀가하는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또 한 골을 내줬습니다. 세 번째, 교통사고 이후 우울증과 수면장애 속에 주님을 원망하면서 보내는 삶의 여정에서 또 한 골을 내줬습니다.하지만 후반전에 와서 2골을 만회했습니다. 첫째, 교통사고로 비록 4급 지체 부자유 장애인이 됐지만, 이를 통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얻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6년 동안 매년 한 번씩 신ㆍ구약 성경을 통독할 수 있는 은총을 얻고 또 한 골을 만회했습니다. 이제는 남은 시간 동안 1골을 더 만회해 동점을 만들고, 남은 삶의 여정에서 또 한 골을 더 넣어 역전한 다음 주님께 가려 합니다. 자신이 외로움과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 때, 기쁠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여러 가지 일로 고통당할 때, 제가 갖고 있는 것을 나누는 나날이 되고, 기쁘고 훈훈한 신앙생활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좋은 마음은 좋은 것을 가져오고, 나쁜 마음은 나쁜 것을 가져옵니다. 투덜거리는 사람은 투덜거림을 얻습니다. 고맙고 감사하는 사람 주위에는 고맙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고, 믿음과 희망이 있는 사람 곁에는 믿음과 희망 가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세상에서 살 집을 잘못 지으면, 그 집에서 몇 년만 고생하면 됩니다. 그러나 죽은 뒤 우리가 가야 할 저 세상에 살 집을 잘못 지으면 영원히 고생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탤런트를 엉뚱한 곳에 사용하지 않고, 진실한 인생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것은 바로 영원히 살 집을 잘 짓는 것입니다. 이 글을 끝내며 지금까지 제 삶의 여정을 묵묵히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평화신문2017.08.23
![[시사진단] 예루살렘, 탄식의 도시 (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교수)](//cpbc.co.kr/CMS/newspaper/2017/08/rc/692894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 예루살렘, 탄식의 도시 (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교수)박현도 (스테파노,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교수) 현지 시각으로 지난 7월 14일 무슬림 합동 예배일인 금요일 오전 7시 예루살렘 성전산에서 이스라엘 국적의 아랍인 3명이 이스라엘 경찰관 2명을 총으로 죽였다. 범인들도 모두 사살됐다. 사건 발생 직후 이스라엘 당국은 성전산 출입을 봉쇄했고, 17년 만에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예배가 취소됐다. 이스라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안전 조치로 모스크로 들어가는 입구에 금속 탐지기와 보안 카메라를 설치했으나 무슬림들의 강력한 항의 때문에 이내 철수했다. 무슬림들이 보안 장치를 거부한 것은 이스라엘의 감시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성전산 소유권이 무슬림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유다인과 무슬림이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곳은 7세기 이래 십자군 시대를 제외하고는 무슬림의 땅이었으나 1967년 이른바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요르단으로부터 빼앗았다. 그러나 이미 무슬림의 성지가 된 성전산을 강제로 접수하기는 위험이 너무 컸기에 운영은 요르단 정부의 지원을 받는 ‘와크프’라는 공공재단이 하고 이스라엘은 외곽 경비를 맡았다.성전산은 유다인과 무슬림 모두에게 성지다. 유다인의 믿음에 따르면 성전산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리야 산이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 곳으로, 솔로몬이 여기에 성전을 지었다고 한다. 성전이 있던 곳이라 성전산이라고 부른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무너진 성전을 페르시아 고레스 황제의 도움으로 재건하고, 이를 제2성전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19년 헤로데가 성전을 증축했지만, 70년 로마군이 다시 파괴했다. 성전 붕괴와 함께 유다인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고, 135년에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의 이름마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었다. 성전산은 로마, 비잔티움의 손을 거쳐 638년 아랍 무슬림이 차지했다.새 주인이 된 무슬림은 폐허가 된 성전산에 2개의 탁월한 종교건축물인 알아크사 모스크와 황금돔 바위 성원을 지었다. 코란과 전승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하룻밤 사이에 영험한 말 ‘부락’을 타고 천상 여행을 했다고 한다. 예언자가 간 곳은 코란에서 말하는 바 ‘가장 먼 곳에 있는 성원’인데, 이를 아랍어로 알아크사 모스크라고 한다. 아랍인 3명이 이스라엘 경찰관 2명을 죽인 곳이 바로 이 모스크 입구다. 또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친 곳이라고 믿는 바위를 안에 두고 만든 건축물이 황금돔 바위 성원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 바위를 밟고 천상 여행을 했다고 믿는다. 무슬림들은 성전산을 ‘알하람 앗샤리프’, 즉 ‘고귀한 성소’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은 ‘쿠드스’(성스러운 도시)다.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예루살렘을 향후 수도로 점지해두었기에 성전산은 성지가 아니라 화약고다. 국제 사회가 양측과 머리를 맞대고 솔로몬의 지혜를 짜내기 전에는 피비린내가 계속 진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일부 극렬 유다인들은 무슬림 성지를 부수고 제3의 성전을 세우려고 벼르고 있다. 성전산에서 비무슬림이 기도하는 것을 막는 이유 중 하나다.유일신을 믿는 유다인과 무슬림이 모두 성소라고 부르는 곳은 평온과 사랑이 넘쳐야 하는데, 긴장과 증오와 폭력만이 난무한다. 그리스도교의 성지이기도 한 예루살렘이 더 이상 피로 물들기 전에 국제 사회가 나서야 하지만 묘수가 없다. 평화의 도시여야 할 예루살렘이 탄식의 도시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차라리 이름 없는 도시로 바꿔 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지닌 지혜와 인내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평화신문2017.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