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 듦은 목적성이 확실한 여정이다[서민선 아녜스 작가의 노년을 읽습니다] 25. 서명옥 「나이듦의 영성」 처음으로 성경을 읽었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의문은 성경 속에 100세를 훌쩍 넘는 인물이 더러 있다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더 낮았을 것 같은데 이상했다. 심지어 100세 넘은 나이에 출산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린 나는 성경에서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칼럼을 쓰기 위해 책을 고르던 어느 날, 성경 속 노인들을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서 다루는 노년은 어떤 모습이고 성경이 노년에게 주는 지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러다 서명옥 작가의 「나이듦의 영성」을 알게 되었다. 딱 내가 찾던 책, 성경 속 인물들의 나이 듦을 다루고 있었다. 영성의 완성에 이르는 길에서 나이란 무엇인지,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러한 맥락에서 책에는 성경 속 스무 명의 인물이 나온다. 나는 이야기책을 읽는 기분으로 흥미롭게 책을 읽었다. 아브라함은 175년, 야곱은 147년, 모세는 120년을 살았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수명은 이에 비하면 더욱 압도적으로 길다. 여기서 오랫동안 살았고 늦게 죽었다는 것은 핵심이 아니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성의 완성에 인간의 나이 듦이 깊이 관계한다는 진리다. 모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나이가 80세였고 토빗이 실명에 이른 나이가 62세였다. 하느님의 역사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이 듦은 바로 목적성이 확실한 여정이다. 나는 야곱과 요셉 이야기에 특히 관심이 갔는데, 먼저 야곱을 보자. 저자는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개울을 몇 번 건넌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야곱이 몇 번의 개울을 건넌 끝에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존재로 인생을 마무리하게 된 것에 집중한다. 개울을 많이 건널수록 타인을 축복할 품이 넓어진다는 것, 그것은 진리다. 그런데 축복이란 것도 해봐야 가능하다. 내 아이가 올해 고3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를 위한 기도를 드릴 때면 나는 망연해진다. 어떤 기도를 드리고 어떤 지향을 해야 할까. 좋은 대학에 가게 해달라고, 아니면 마음 관리를 잘하게 해달라고? 그것도 안 맞는 것 같고 그저 건강하게 해달라고 해야 할까. 아이를 향한 기도는 늘 그렇듯 조심스럽다. 무엇이 진정 아이를 위하는 기도인지 자신이 없어서다. 그래서 결국 “제 아들 프란치스코를 위해 기도합니다”라는 선택을 한다. 다른 누군가를 위한 기도, 특히 타인을 향한 축복을 청함에 있어서는 숙고가 앞서야 한다. 무엇보다 축복이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본인의 인생 전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야곱이 몇 번의 개울을 건너고 나서야 타인에 대한 축복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생을 마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완벽한 결말이다. 다음으로 성경 속 화해의 아이콘 요셉 이야기다. 요셉은 중년의 나이에 본인을 시기 질투했던 형들을 살릴 수 있는 권력을 갖는다. 그리고 요셉의 힘으로 형들을 고향에 돌려보내고 가족과 화해한다.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며 깨닫는다. “초년기 나의 고생, 외롭고 험했던 나의 청년기는 모두 다 이를 위함이었구나. 하느님께서 이를 역사하셨구나.” 나는 요즘 불화에 대해 생각한다. 특히 가족과의 불화. 가족과 불화한 채로 생을 마감하는 많은 가족을 본다. 어느 한쪽의 잘못인 경우도, 함께 잘못한 경우도,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이유의 우위에 힘과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참이다. 작가도 책 속에서 “화해, 그것은 진정 힘 있는 사람, ‘어른’이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제 노년이 되었다면 먼저 안아주고 먼저 용서하여 관계든 사람이든 정리해 보자”고 덧붙인다. 나는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을, 그리고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을 믿는다. 거기에 하나 더 보태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도 역시 믿는다. 한데 나는 이 속담을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 나이 든 사람의 품이 어린 사람보다 당연히 크다는 뜻으로. 나아가 언젠가 내 아이가 사전에서 ‘나이는 못 속인다’는 속담의 뜻을 찾았을 때 이렇게 나왔으면 한다. ‘옛날에는 나이가 쌓이면 겉으로 드러난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시간이 흐르며 그 뜻이 변했습니다. 요즘은 나이 든 사람의 이해심과 관록은 더 어린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나는 인심 좋은 곳간이 되기 위해 돈을 많이 벌고 싶고, 미래의 속담 사전이 바뀔 수 있게 이해심 많고 품이 넓은 노인이 되고 싶다. 작가는 ‘노인은 젊은이의 미래’라는 표현을 썼다.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라는 표현은 많이 들어봤지만 ‘노인은 젊은이의 미래’라는 표현은 매우 낯설다. 밝고 희망차서다. 우리가 흔히 갖는 노인의 이미지에 반한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본 성경 속 나이 듦은 그게 가능하다. 종종 잊지만 우리가 다 아는 성경 속 이야기들은 귀한 메시지를 무궁무진하게 담고 있다. cpbc2026.06.17

마지막 날의 온유함[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 온유 삽화 _ 김 사무엘 십자가는 예수께서 온전히 품으신 하느님의 온유함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생명까지 내어놓으시면서 하느님의 온유함에는 ‘여기까지만’이라는 한계가 없음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의 고통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온 세상에 퍼져나가는 하느님의 온유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두 팔은 십자가에 결박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뻗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프랑스 조각가 제르만 리시에(Germaine Richier, 1904~1959)는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십자가의 종목은 거의 감추어져 있고 횡목은 아예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 자체가 십자가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팔이 나무에 못 박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팔은 세상을 다 품에 안으려는 듯이 활짝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은 아래로 휘어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이 말입니다. 그 모습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품어 안는 형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의 온유함을 궁극적으로 체험할 때는 지금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여기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지 않으십니다. 눈물의 원인인 고통을 없애지도 않으시고, 그 까닭을 설명해 주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실 뿐입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예레 14,17) 당신께서 정하신 마지막 때가 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마지막 날에 있을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이사 25,7-8) 그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는 눈물 흘릴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의외로 성경에는 다른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이 마지막 행위를 위해 유보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온유함을 결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그 놀라운 행위의 증인이자 수혜자가 될 것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도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7)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리라는 약속이 두 번이나 반복되며 더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말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더는 어떤 베일도 가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흘리 신 눈물까지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뵙기를 간절히바란 엘리야와 모세를 비롯한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죽음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질 일입니다. 죽음의 패배는 이 궁극의 행복인 지복직관(至福直觀)으로 향하는 관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이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우리말 성경에는 ‘슬퍼하는 사람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실 이 일을 가로채는 대신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심으로써 마지막에 있을 일을 미리 다른 형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또한 온유함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발을 닦으셨을 때 제자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습니까? 하지만 그 놀라움조차도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으실 일에 비하면 작을 것입니다. 글 _ 함원식 신부 (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2025.08.14
![[특별기고] 폭력에 물든 인간, ‘자비의 하느님’을 전쟁에 끼워 맞췄다](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4/14/iHr1776129411757.jpg)
[특별기고] 폭력에 물든 인간, ‘자비의 하느님’을 전쟁에 끼워 맞췄다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손희송 주교)미국은 2월 28일 ‘장대한 분노’ 작전으로 이란을 대규모 공습한 이후 때마다 자신들의 전쟁 정당성을 위해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교회는 이에 “전쟁에 하느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죄에 해당한다”고 비판했지만, 미 정부는 멈추지 않고 있다. 아울러 전쟁 후 현재 세계 원유 수송의 약 20%가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유조선들의 발이 묶인 상황이다. 12일 기준 해협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 선박은 26척, 선원은 173명에 이른다. 본지는 전쟁을 둘러싼 미 정부의 잘못된 발언에 대한 주교의 기고와 평소 선원들을 위해 사목해온 사제의 글을 통해 전쟁을 향한 어긋난 진실과 이면의 고통을 돌아봤다. 정리=박민규·박예슬 기자 2026년 3월 10일 미국 전쟁부 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기자단 브리핑에서 구약 성경의 시편을 근거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촉발된 전쟁을 정당화했다. 그는 시편 144편 1절에서 “나의 반석이신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내 손에 전투를, 내 손가락에 전쟁을 가르치시는 분”이란 표현을 인용했다. 그러자 예루살렘 라틴총대주교 피에르 바티스타 피자발라 추기경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죄에 속한다”라고 반박하면서 “하느님은 분쟁 속에 고통받고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계시지, 종교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이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3월 25일에도 헤그세스는 공개적인 기도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총알이 적에게 명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레오 14세 교황은 3월 29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강론에서 “피 묻은 손으로 올리는 기도는 하느님이 거절하신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며 전쟁을 거부하신다”라고 응대하셨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지난 3월 기자단 브리핑에서 시편 구절을 인용해 전쟁 발발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OSV 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의 배경에는 구약과 신약 성경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내용과 신약 성경의 내용이 서로 대립할 때 어느 쪽을 따라야 할까?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모두 하느님을 계시하는 책이지만, 구약은 약속이고, 신약은 그 약속의 실현이다. 계시의 정점은 신약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정점을 근거로 성경의 다른 내용들을 해석하는 것이 가톨릭의 전통적 성경 해석 원칙이다. 이런 원칙에 따르면, 신약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으로 비폭력의 하느님을 선포하시고, 자신도 철저히 비폭력의 삶을 사셨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면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폭력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운 모습이다가도 어떤 때는 폭력적이고 피를 요구하는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부조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성경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느님이 그 내용을 불러주시고 인간이 그 말씀을 듣고 쓴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인 동시에 인간의 글이다. 말하자면 성경은 그 시대 인간의 문화와 생각을 바탕으로 쓰인 글로서 그 속에서 하느님의 본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런 전제하에 ‘라이문트 슈바거’라는 가톨릭 신학자(스위스 태생 예수회 소속 인스브루크 신학대학 교수, 1935~2004)는 성경에 드러난 하느님의 ‘폭력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폭력성 인간에게는 폭력성이 내재해 있는데, 이것을 하느님께 투사시키고는 했다. 인간 자신이 폭력에 물들어 있어서 폭력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하느님 역시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분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구약 성경은 서서히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자비로운 하느님과 폭력적인 하느님 모습이 혼재해 있다. 이런 불명확함은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끝이 난다. 예수님은 명시적으로 폭력에 폭력으로 맞대항하지 말라고 하셨고(마태 5,38-42 참조),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이를 근거로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태 5,43-48 참조) 또한 그분은 체포되는 순간에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를 만류하시면서 폭력을 거부하신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십자가상에서는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청하셨다.(루카 23,34 참조) (참조 : 손희송,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하느님’,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위하여」,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5~42쪽) 미국의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들 구미에 맞는 구절을 신약과 구약 가리지 않고 뽑아내어 자기 이익에 맞게 해석하고는 한다. 그러나 말과 행동으로 철저히 비폭력을 추구하셨던 예수님을 하느님 계시의 절정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약 성경의 일부 대목을 근거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3월 19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자신들이 시작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적 우위만으로는 무자비한 적을 맞설 수 없다고 하면서, 역사학자 윌 듀런트(Will Durant)를 인용하여 “역사는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칭기즈칸보다 우위에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이기에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그렇게 막강했던 칭기즈칸의 제국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에 반해서 너무도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의 추종자들이 모인 교회는 -때로는 세상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역사의 승자인가?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장 손희송(의정부교구장) 주교박민규2026.04.14

아버지의 온유함[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4) 성경은 주로 하느님을 아버지, 남성으로 표현하고 어머니, 여성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적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차별 때문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의 여성성은 성경에서 아예 제거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우리 인간과 같은 성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모습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성을 구별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영이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70항) 그런데도 굳이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부모로서 동등합니다. 하지만 몸소 태중에 자녀를 품은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가 친밀성을 강조하기에 적합하다면, 몸 밖에서 자녀를 낳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구분을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구분되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점, 여기에 인간의 자유가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의 집착이 심한 경우, 즉 자신과 자녀를 일체화할 때 자녀가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부모의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가 되어 불행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은 범신론과의 차별화 때문에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힌두교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구분되지 않고 융합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신이고 신이 곧 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관에서는 하느님의 초월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관도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 도를 닦아 해탈에 이르는 구원을 말합니다. 물론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다고 해서 그분이 인간 아버지와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누구도 하느님과 같은 아버지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느님 아버지’라는 표현을 들으며 하느님께 대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자기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이 생각나서 그런 것이죠.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와 다른 분이시라고 합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 주시리라.(시편 27,10) 하느님의 온유함은 인간 아버지의 온유함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 아버지의 이미지를 하느님께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아버지이신지 알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요한 1,18)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마르 14,36) ‘아빠’는 어린이의 언어입니다.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강하며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슈퍼맨으로 신뢰하는 어린이가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루카 15장에서 예수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온유함을 가장 훌륭히 보여주십니다. 자신이 살아있음에도 마치 죽은 것처럼 유산을 요구하여 받아 떠나서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떠한 죄를 얼마나 크게 자주 짓는다 하더라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온유함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20절입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어떻게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날부터 매일 동구 밖을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발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면서 말입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원망이 아니라 염려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청하기 훨씬 전에 아버지는 이미 그를 용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회개를 앞섭니다. 우리는 그 용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 즉 돌아감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여 용서를 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지고 있는 용서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는 예수. 의정부교구 마재 성가정 성지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다시 만난 제자들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요한 21,5) 여기 사용된 ‘얘들아’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파이데이아’는 7세 미만의 어린이들을 가리킵니다.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당신을 배신하고 버린 괘씸한 제자들이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온유함을 그대로 품은 예수님의 눈에는 마냥 그들이 무섭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도망쳐 버리고만 가련한 어린아이들로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온유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글 _ 함원식 신부(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cpbc2025.07.21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인 온유함[월간 꿈 CUM] 테마로 읽는 성경 (3)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262×205, 캔버스에 유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 아들의 어깨를 짚은 아버지의 손을 보면 한쪽은 남자의 손, 다른 쪽은 여자의 손이다.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단 하나의 기도로서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은 우리도 당신처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대 근동의 많은 신들은 남신과 여신으로 나뉘어 결혼도 하고 출산도 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심지어 신들 사이에서 불륜도 일어나죠. 인간의 세상을 신의 세계에 투영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유일한 하느님의 성을 그처럼 남성이나 여성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굳이 그러한 신관을 따른다면, 홀로 예수님을 낳은 하느님은 자웅동체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지만, 그분께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여성성을 제거하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모습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하느님께서 여성적인 온유함을 갖고 계심을 잘 보여줍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여성적 온유함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대표적 그리스 단어 하나를 봅시다. 오이크티르모스(οἰκτιρμός). 이 단어는 연민을 뜻하는데, 모태(母胎)와 관계있습니다. 즉, 어머니가 자기 몸 안에 품었던 아이의 삶이 어떠하든지 항상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듯이, 하느님도 비록 우리가 죄인이어도 그렇게 바라보신다는 말입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마지막 문장은 직역하면, ‘내 모태가 요동친다’입니다. 하느님은 자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당신 백성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다른 말씀도 들어봅시다.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호세 11,3-4)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 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이사 66,12-13) 성경에는 하느님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말씀이 놀랄 정도로 많습니다. 하느님은 심지어 인간에게서 여성성 혹은 모성이 사라진다 해도 당신의 여성성은 영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신약성경에는 예수께서 가엾이 여기셨다는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이 표현도 본디 모태가 요동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예루살렘을 두고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루카 복음 15장에 수록된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하느님의 남성성뿐 아니라 여성성이 보입니다. 복음은 아버지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루카 15,29 참조) 이 표현은 직역하면 ‘모태로부터 연민을 느꼈다’입니다. 그래서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는 이 장면을 그린 성화에서 하느님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어깨를 짚은 아버지의 두 손을 자세히 보시면, 한쪽은 굵고 투박한 남자의 손이고 다른 쪽은 가늘고 섬세한 여자의 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온유함이 여성들만의 전유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남성적인 온유함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남성적인 온유함을 특히 아가서에서 신랑의 비유를 통해 드러내십니다.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그대에게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려.”(아가 4,7) 당신의 신부인 우리 인간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한지요. 글 _ 함원식 신부(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cpbc2025.07.14

신천지의 치밀한 포섭에 무너졌던 이들의 고백한국천주교유사종교대책위 세미나,. 신천지 탈퇴 청년들 증언 주목받아 6월 22~24일 전주 치명자산성지 평화의전당에서 ‘2026 유사종교 전국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22~24일 전주 치명자산성지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2026 유사종교 전국 세미나’ 참석자가 유사종교 자료집을 훑어보고 있다. “신도 한 명을 만들기 위해 많게는 50명까지 협력합니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모두 자발적인 의지입니다.”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에서 나와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온 청년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들은 “문제가 있어서 이단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하느님을 알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표적이 된다”며 신천지의 치밀한 포섭 방식과 그 안에서 겪었던 경험을 생생히 털어놨다. 한국천주교유사종교대책위원회(위원장 이용권 신부)는 6월 22~24일 전주 치명자산성지 평화의전당에서 ‘2026 유사종교 전국 세미나’를 열고 신천지, 기독교복음선교회(JMS), 나주 율리아 현상 등 이단들의 실태를 공유했다. 특히 신천지 탈퇴 청년들의 증언이 관심을 모았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신천지 전도는 철저한 조직력과 치밀한 관계 형성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서울의 한 대형 신천지 교회의 경우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청년만 5000명 이상”이라며 “그들이 모두 전도에 나선다고 생각해 보라. 하나같이 행복한 표정으로 성가를 부르고 설교를 들으며 자신의 사명을 위해 움직인다”고 전했다. 포섭은 상대방을 철저히 분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구역장을 중심으로 신도들은 밤늦게까지 남아 대상자의 직업·성격·취미·고민을 공유하며 접근 방식을 연구한다. 가장 절실한 필요를 채워주며 관계를 쌓은 뒤 자연스럽게 성경 공부를 권한다. 한 피해자는 “그들이 반지하에 살던 사람 집에 새벽 2시에 찾아가 밤새 곰팡이를 제거해준 사례도 있었다”며 “매주 사비로 선물을 준비하고 1년 가까이 빠짐없이 편지를 써서 전달하는 경우도 흔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 정도로 신뢰를 쌓은 뒤 성경 공부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신천지 교리에 동화돼 갔다”고 했다. 이처럼 헌신적인 활동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피해자들은 “신앙이 너무도 구체적이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신천지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오고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설명됩니다. 그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니 시간과 인생을 바치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6월 22~24일 전주 치명자산성지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2026 유사종교 전국 세미나’에 마련된 유사종교 자료집. 대규모 카드섹션을 준비하기 위해 6개월 동안 매주 연습하고, 행사 당일엔 화장실도 가지 않으려 기저귀를 착용한 일에 대해서도 “그 안에서는 그것이 학대가 아니라 구원을 위한 과정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함승수(서울대교구 사목국 행정지원팀) 신부는 “무지하거나 문제가 있어 이단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하느님을 더 알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 때문에 몸과 마음, 정신에 큰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이며, 이들이 오랜 회복 과정을 거쳐 교회로 돌아온 만큼 따뜻하게 품고 함께 신앙생활을 이어가도록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증언 전에는 이단의 교리적 특징과 문제점도 공유했다. 신천지는 총회장 이만희를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존재로 믿으며, 마지막 때의 계시를 받아 성경의 비유와 비밀을 풀어내는 유일한 자라고 말한다. 모든 성경 말씀을 비유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전체 맥락이 아닌, 말씀 한 구절을 교묘하게 엮어 이만희로 연결하는 식이다. 전주교구 상담사목센터장 이금재 신부는 “이단은 기성 종교를 비판하면서 사람들의 불안과 갈망을 파고들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종말 의식을 자극하며 세력을 확장한다”면서 “인간 소외와 절망, 미래 불안이 커지는 상황에서 교회가 그 갈증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할 때 이단이 그 빈틈을 파고든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들은 이단에서 벗어난 뒤에도 다시 돌아가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점도 공유했다. 교리가 잘못됐다는 사실은 알게 됐지만, 가정불화나 공동체의 냉담한 시선으로 인해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줬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위원장 이용권 신부는 “교회로 돌아오게 하고 머물러 있게 하는 힘은 결국 사랑”이라며 “복음적 사랑 실천을 통해 상처 입은 이들이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다시 신앙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박민규2026.06.30

“왜 프란치스칸은 화폐 사용을 거부했는가”국내외 연구자들, 다양한 관점으로 6월 29일~7월 1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27차 프란치스칸 영성 학술발표회 셋째 날 작은형제회 신우창 신부가 발제하고 있다.작은형제회 제공 제27차 프란치스칸 영성 학술발표회가 6월 29일~7월 1일 사흘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렸다. 발표회는 ‘복음적 삶’을 주제로 국내외 프란치스칸 연구자들이 프란치스칸 영성의 핵심인 복음적 권고와 카리스마를 신학적·성경적·역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한 자리였다. 첫째 날 미국 성보나벤투라 대학교의 마이클 F. 쿠사토(Michael F. Cusato, 작은형제회) 신부는 ‘서원인가, 카리스마인가? 프란치스칸 삶 이해의 출발점’ 주제 발표를 통해 “프란치스칸 소명의 중심은 모든 수도자에게 공통으로 부여된 청빈·정결·순명의 서원이 아니라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이 함께 나눴던 고유한 카리스마에 있다”면서 “프란치스칸 영성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며, 그 삶 안에서 청빈·정결·순명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쿠사토 신부는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을 분석하며 ‘작음(minoritas)’이야말로 프란치스칸 카리스마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들이 스스로를 단순히 ‘가난한 형제들’이 아니라 ‘작은형제들(Friars Minor)’이라 부른 것은 사회의 가장 낮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복음적 선택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어 “이때 가난은 목적이 아니라 작은 이들과 함께하는 삶의 결과”라며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프란치스칸 정신의 본질”이라고 거듭 설명했다. 아울러 “초기 프란치스칸 공동체가 화폐 사용을 거부하고 노동과 탁발을 선택한 것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화폐 가치를 조작해 서민을 착취하던 당시 경제 질서에 동참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연대의 실천이었다”고 설명했다. 권웅용(작은형제회) 신부는 이어진 논평에서 ‘카리스마’와 ‘서원’이 단순한 선후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된 두 차원이라는 점을 짚었다. 권 신부는 “쿠사토 신부의 논지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카리스마와 서원, 작음과 가난의 관계를 보다 상호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며 “카리스마 없는 서원은 형식주의에 머물 수 있고, 서원 없는 카리스마는 개인적 영감에 머물 위험이 있다”고 했다. 둘째 날 발표에서는 복음삼덕의 성경적 토대와 현대적 의미를 조명했다. 이용호(작은형제회) 신부는 아시시 성프란치스코 대성당의 프란치스코 알레고리를 통해 청빈·정결·순명의 상징성을 해석했고, 김미정(사도 성 안드레아 수녀회) 수녀는 “시노달리타스 시대에 평신도 역시 복음적 권고를 자신의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영선(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수녀는 복음삼덕의 성경적 기초를 중심으로 프란치스칸 영성이 성경 안에서 어떻게 형성됐는지 설명했다. 청빈과 정결, 순명의 세 서원을 각기 다른 시각에서 되짚은 셋째 날에는 신우창(작은형제회) 신부가 성녀 클라라의 가난을 통해 복음적 청빈의 의미를 재조명했고, 박성호(작은형제회) 신부는 보나벤투라와 올리비의 사상을 비교하며 프란치스칸 정체성과 가난의 의미를 분석했다. 최성욱(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운영본부장) 신부는 현대 성 윤리의 관점에서 정결의 의미를 해석했고, 오수록(작은형제회) 수사는 성 프란치스코의 순명과 다산 정약용의 효 사상을 비교해 동서양의 윤리 전통을 연결했다. 이번 학술발표회는 프란치스칸 영성을 단순히 수도자의 서원으로 이해하는 데 머물지 않고, 복음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결했다. 참가자들은 프란치스칸 카리스마의 본질이 ‘작은 이들과 함께하는 복음적 삶’임을 재확인하며, 오늘날 교회와 사회 안에서 복음의 가치가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성찰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박민규2026.07.07

물을 포도주로, 포도주를 성혈로[‘성서와함께’ 가꾸는 기도의 정원] 9. 포도 성서와함께 제공 날씨는 무덥지만 한편으로 다양한 제철과일을 즐길 수 있는 계절이다. 수박·복숭아 등 종류가 많지만 포도야말로 대표적인 늦여름 과일. 포도는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상징성을 갖는 식물로, 가톨릭교회는 초기부터 포도와 포도나무의 종교적 상징성, 포도주가 예수님의 성혈로 변하는 것의 의미를 교리로 가르쳐왔다. 성경에는 구약의 창세기부터 신약의 복음서까지 포도를 소재로 한 이야기가 많다. 특히 생포도는 물론 과실을 가공해 만든 건포도, 포도즙과 포도주, 포도 식초, 포도나무, 포도원 주인과 일꾼에 대한 비유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등장한다. 실제로 포도는 과거 중동 지역의 7대 주요 작물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재배되었을 정도로 긴 역사를 자랑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게 될 좋은 땅이 “밀과 보리와 포도주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신명 8,8)으로, 이스라엘이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 열매를 잘 맺는”(호세 10,1) 곳으로 표현된 것만 봐도 이 지역에서 포도가 얼마나 중요한 식물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약 성경에 언급되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포도에서 시작해 포도로 끝난다. 예수님께서 카나에서 보여주신 첫 번째 기적은 바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일이다. 이후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포도밭 주인으로 비유하시고, 당신 자신을 “참포도나무”(요한 15,1)라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의 가지가 될 것을,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것을 당부하신다. 수난을 앞두고는 제자들과 포도주를 나누며 이를 “내 계약의 피”(마르 14,24)라 이르셨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접했던 음료도 신 포도주다. 화가들은 이 같은 성경 내용을 바탕으로 각종 성화에서 포도나무 잎과 덩굴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무 기둥에 달린 포도송이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표현했다. 또 빵과 함께 포도나 포도주 잔을 그려 성체성사, 예수님의 수난을 나타냈다. 포도주가 가톨릭교회의 전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유럽에서는 포도주 제조가 꾸준히 발달했고, 포도주와 포도주 제조업자들의 수호성인도 생겨났다. 4세기 스페인의 순교자인 사라고사의 성 빈첸시오가 수호성인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의 이름이 프랑스어로 뱅 상(vin sang), 즉 ‘포도주의 피’를 뜻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그의 축일인 1월 22일 무렵이 포도나무가 휴면기를 끝내고 새순을 내는 시기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신지현cpbc2026.07.07

2000년 전 교부들이 묻는다 “당신의 마음은 어디 있습니까”교부 문헌 주제별로 선집한「교부들의 가르침」 네 번째 책 교부들의 가르침 Ⅳ / 하성수(시몬)·이지영(루치아) 엮음 / 분도출판사 교부 문헌을 주제별로 선집한 「교부들의 가르침」 네 번째 책이 나왔다. 분도출판사와 한국교부학연구회는 지난 2008~2022년 교부들이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성경 각 구절을 풀이한 내용을 골라 「교부들의 성경 주해」 총 29권을 출간했다. 그 책에서 주요 개념을 가나다순 250여 개 항목으로 분류한 선집이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이번에 공개된 4권에서는 ‘마음’부터 ‘부활(인간의)’까지 다룬다. 마음의 의미와 이해·말·무신론·믿음·박해·벌·보상·복음·본성·부자 등에 관한 성경 구절과 해설을 담았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삶의 모습은 타락한 본성에서 말미암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악한 곳간에서는 악한 것만 꺼낼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지껄인 근거 없고 부주의하고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에 의해 단죄받거나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어 있습니다.”(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마태오 복음 주해」 12,19.) “우리가 성경에서 읽듯이, 아브라함은 인간에게 보상받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 보상을 받았습니다. ⋯ 주님은 상을 주시는 데 더디지 않으십니다. 나약한 영혼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경멸한 것을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주님은 얼른 약속하고 싶어 하시며 큰 상을 주십니다. 자신에게 제공된 이 세상의 것들에 유혹당하지 않은 이에게 큰 상으로 보상하심으로써, 말하자면, 높은 이자로 되갚아 주십니다.”(암브로시우스 「아브라함」 1,3,18.) 한국교부학연구회 하성수(시몬) 선임연구원은 “신약 성경과 가장 가까운 시대에 살았던 교부들이 남긴 대부분의 문헌은 그들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쓴 풀이기에 「교부들의 가르침」은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교회 일치와 쇄신,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성, 성직자들의 사목과 설교, 평신도의 영적 성숙에 도움이 될 중요한 그리스도교 문헌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교부들의 가르침」은 해마다 한 권씩 총 열 권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6.01.20
참된 인간됨을 알려주는 성경[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96) 성경의 매력 얼마 전 한 일반 출판사로부터 책을 출간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교회 출판사가 아닌 일반 출판사였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주로 신자를 대상으로 글을 써왔기에, 일반 독자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니 일반 신문에도 칼럼을 써왔기에 못할 것도 없을 법했다. 출판사의 제안은 성경을 통해 믿는 사람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이에게 위로와 희망이 될 내용을 풀어서 설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해본다. 과연 성경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다’고 답한다. 성경은 모든 이에게 자비와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선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만이 아닌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한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이에게 알려져야 한다. 성경은 하느님만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성경의 매력은 살아계신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다양한 감정으로 인간과 대화하시는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 있다.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은 질투하는 분, 때로는 화가 나 분노하시는 분, 그러나 쉽게 마음을 돌려먹고 다시 인간을 용서하시는 분,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좋아하시는 분, 기뻐하는 인간을 보고 기뻐하는 분이시다. 성경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천의 얼굴’을 담고 있다. 성경의 또 다른 매력은 인간 삶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신화적이거나 유토피아적인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곳은 저 먼 하늘 위가 아닌, 혹은 내세에서의 삶만이 아닌, 죄와 악,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인간 삶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성경은 완벽한 신앙의 길보다는 인간 삶의 다양한 측면이 얽혀 있는 현실과 그 안에서 가능한 신앙의 길을 이야기한다. 시련과 좌절, 절망에도 계속해서 일어나 걷기를 재촉한다. 나아가 성경은 참된 인간됨의 길을 말해준다. 그것은 두드리고 모색하며 찾아가는 삶에 있다. 성경은 답이 아닌 물음으로 가득 찬 책이다. 답을 찾고 만족하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게 한다. 성경은 참된 인간됨의 길이 자비하신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에 있다고 한다.(루카 6,36 참조) 하느님처럼 미소하고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가 친구가 되어주며 그들 편에 서서 그들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 울며 슬퍼하는 이들, 박해받는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향해 눈을 돌리며 그들과 이웃이 되어가는 것이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며, 진정 인간미 넘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바로 그러한 미소한 이들,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 편에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말한다. 심지어는 가장 작은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당신께 해준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최후 심판의 판단 기준이라고 말한다.(마태 25,40 참조)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학습서이며, 하느님의 교육 방법을 담고 있다. 성경을 벗 삼아 걷다 보면 어느덧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변화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 안에 갇혀 있던 내가 나에게서 조금씩 벗어나 이웃 형제들을 위해 삶을 내어놓는 존재로 변화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 모든 이에게 매력적인 책임에 틀림 없다. 이정훈2025.04.22

역사의 수작(酬酌)[월간 꿈 CUM] 철학의 길 _ 동양 고전의 지혜와 성경 (11) 한국 사람들은 참 술을 좋아합니다. 아니 술 자체라기보다 술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회식 자리에서 혼자 ‘자작’(自酌)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친교에 동참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자작 문화에 익숙한 외국인들의 시선에 남의 술잔까지 신경 써야 하는 한국인의 술 문화가 불편하고, 고루한 관습처럼 보일 수 있지만, 몸에 밴 문화의 깊이를 이해하면 한국인들은 우주의 원리를 몸으로 구현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에 경이로워해야 할 것입니다. 술을 주고받는 것을 한자로 ‘酬酌’(수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수작 부리지 마!’라는 부정적 어감으로 사용하지만, 주인이 손님에게 술잔을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다시 손님이 주인에게 술잔을 권하는 것을 작(酌)이라고 합니다. 수작은 이렇게 가거니 오거니 술을 주고 받는 것을 말합니다. 상호적이며 상관적 관계를 보여주는 미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역」을 해설한 「계사전」은 이 ‘수작’을 우주론적 의미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顯道 神德行 是故 可與酬酌 可與祐神矣 子曰 知變化之道者 其知神之所爲乎 도와 덕행의 신묘함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서로 수작(상호 동조)할 수 있고, 서로 도울 수 있다. 공자가 말하길 변화의 도를 아는 자는 그 신이 행하는 바를 알 수 있다.(「계사전 상」 9) 위 구절은 역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역은 우주 자연의 변화이며, 생명의 원리입니다. 생명은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유지되고, 그 변화는 상호적이며 상관적으로 주고받아 움직여집니다. 그 가운데 도와 덕이 있습니다. 위 구절은 우주의 상호작용을 ‘수작’이란 단어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술 문화에는 이런 생명의 원리가 몸속 깊이 흐르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몸으로 구현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수작 부리지 마!’라는 부정적 의미가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과거 주막에서 한 남정네가 여염집 아가씨를 붙들고 ‘수작’을 하려 하자 그 아가씨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수작 부리지 마! 어디서 개수작이야!” 우리 말에는 참과 다른 거짓 혹은 올바르지 못한 것을 표현할 때 ‘개’자를 붙입니다. 그래서 수작인 척하는 가짜 수작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죠. 이처럼 상황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의미라 할지라도 욕을 먹어야 하는 가짜가 됩니다. 위정자들은 특히나 수작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백성들의 삶을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삶이 겹겹이 쌓인 역사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주고받을 때 현재와 미래 역시 주고받는 생명의 상호작용이 일어납니다. 역사 앞에 사과와 용서가 오간다는 것은 바로 과거와 현재가 수작하는 것이며, 그 현재가 다시 미래와 수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 앞에 사람만 왕래하고 술잔만 주고받는다면 그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 됩니다. 위정자들은 수작이라 하지만 백성은 참이 아닌 ‘개’자를 붙여 부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 하느님의 축복과 인간의 찬양,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회개는 모두 수작의 원리입니다. 술과 관련된 말 중에 ‘짐작’(斟酌)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짐(斟)은 ‘헤아리다’, ‘머뭇거리다’라는 뜻인데, 술잔에 술이 얼마 남아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따라야 하는지 헤아리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술잔과 술병이 투명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상대의 술잔과 술병에 술이 어느 정도 남았는지 한눈에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수작을 위해 헤아려야만 했습니다. 다소 불편하지만 이런 작은 배려를 통해 수작이 이루어졌습니다. 상처받은 백성과 역사가 투명하지 않은 잔과 병에 담겨 있다면 그 앞에서 ‘짐작’(斟酌)이라도 해야 미래의 생명이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미래는 현재가 과거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살아 숨 쉬며 다가올 것입니다. 글 _ 손은석 신부 (마르코, 대전교구 안식년) 2006년 사제수품.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전담사제, 산성동본당 주임을 지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전공)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소소하게 살다 소리 없이 죽고 싶은 사람 중 하나. 그러나 소리 없는 성령은 꼭 알아주시길 바라는 욕심쟁이다. cpbc2025.06.16

성경 품고 청년들과 동행한 착한 목자, 주교로 부르심 받다최광희 신임 주교 삶과 신앙서울대교구의 새 보좌 주교로 임명된 최광희 신임 주교는 청년 사목·성서 사도직·문화 홍보 등 여러 분야에서 경험을 쌓아온 인물이다. 최 주교 곁에서 동고동락한 이들은 한결같이 그가 배려심 깊고, 늘 경청하는 사제라고 입을 모은다. 사제 성소의 못자리였던 서울 목5동본당 공동체에서 성소의 싹을 틔웠고, 젊은이들의 사제로 동반했다. 최광희 주교의 어린 시절. 복사단과 성소 전주 숲정이에서 영세 후 복사로 활동 목5동본당에서 사제의 꿈 키워 2004년 사제품 받아 경청과 배려의 아이콘 학생 때부터 따뜻하고 자상 다정다감한 성품에 늘 먼저 다가가 청년들과 활발한 대화 통해 소통·사목 청년·성경·문화홍보 사도직 분야에서 7년간 성서모임 청년들과 동행 문화홍보국장 역할 충실히 다양한 경험 갖춘 사목자 “먹이고 재우고 입혔을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신학교와 교구·교회가 사람을 키운 것이지 제가 아버지로서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은 없습니다. 교회 어른들이 잘 지도해주셨지요. 성당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삶 안에서 사제로 길러진 것입니다.” 최광희 주교의 아버지 최동준(보나벤투라, 77)씨는 아들의 주교 임명 소식에 “축하 인사를 받아도 제가 한 일이 없어 송구스러울 따름”이라며 말을 아꼈다. 최 주교는 1977년 1남 1녀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직장 관계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전주교구 숲정이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한 뒤 복사단 활동으로 신앙을 키웠다. 이듬해 인천으로 이주했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다시 서울로 돌아와 목5동에 정착했다. 최 주교에게 목5동본당은 성소의 뿌리이자 신앙의 터전이었다. 초대 주임 고 박노헌 신부의 영향을 받아 사제 성소의 꿈을 키웠고, 고등학교 진학 후 예비 신학생 모임에 참여했다. 2002년 3월, 시종직 후 청년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최광희 신학생.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제공 1999년 강원도 고성에서 군 생활 시절.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제공 2004년 7월 2일 사제서품식 후 아버지(최동준 보나벤투라)와 어머니(이연복 데레사), 여동생(최현주 엘리사벳)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제공 아버지 최씨는 “유년 시절부터 어른스럽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했다. 그는 아들을 산과 바다에 자주 데려갔다. 최씨는 “다섯 살 무렵 동해안에 눈이 내려 버스를 타고 무작정 경포대 백사장을 찾아가 아이를 풀어놨는데, 모래가 아닌 눈으로 덮인 해변에서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뛰어가던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미국에 거주하던 큰아버지와 함께 미국 동서부 공원을 여행했고, 중학교 3학년 때에는 어머니 이연복(아기 예수의 데레사, 72)씨와 함께 유럽 배낭여행을 했다. 어린 시절의 이러한 경험은 그의 시야를 넓히고 감수성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는 “드넓은 대자연을 직접 보고 경험한 일들이 사제성소를 선택하는 데 분명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주교는 2004년 7월 2일 사제품을 받았으며, 수품 성구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를 택했다. 그는 수품 성구처럼 항상 경청하는 자세로 신자들에게 다가갔고, 배려는 그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2004년 7월 2일 사제품을 받은 후 출신 본당인 목5동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제공 2004년 7월 2일 사제품을 받은 최광희 신부.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제공 목5동본당 출신 후배 사제로 함께 생활한 박민우(교구 사목국 노인사목팀 담당) 신부는 “중고등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한결같이 따뜻하고 자상한 모습이었다”며 “훤칠한 인물에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밝혔다. 이어 “고민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전화하던 든든한 선배였는데, 앞으로도 특히 젊은 사제들의 마음을 잘 읽어주시는 사제들의 아버지(주교)가 되어주시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사제수품 동기인 은성제(교구 청소년국 가톨릭청소년이동쉼터 서울A지T 소장) 신부는 “최 주교님은 저와 청소년·청년 사목관에 있어 비슷한 점이 많아 대화도 많이 나눴는데, 늘 청년들과의 면담 스케줄이 꽉 차 있었을 정도로 젊은이들과 동반해온 분”이라며 “사목하다 보면화가 날 수 있는 일이 생겨도 인내심이 얼마나 깊은지 청년들 사이 ‘배려의 아이콘’으로 불렸다”고 전했다. 21년간 사제생활 중 최 주교가 가장 오래 몸담은 곳은 가톨릭청년성서모임이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최 주교는 7년 동안 성서모임 청년들에게 말씀의 힘을 전하는 데 열정을 쏟았고, 젊은이들이 성경 그룹공부와 연수를 통해 느끼는 하느님 체험의 감동에 동반하며 성서 사도직 활성화에 헌신했다. 2020년에는 세계 각지에 사는 한인과 교포 청년들을 위한 첫 영문판 성경 공부용 교재도 출간하기도 했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에서 찬양부 활동을 했던 고수미(클라라, 37)씨는 “연습 때 찾아와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어봐 주기도 하고, 고충이 있을 때엔 면담을 통해 들어주는 사제셨다”며 “늘 사려 깊고 청년들을 잘 챙겨주신 신부님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 미사 중 성체가 쏟아졌는데, 한치의 망설임 없이 휴지로 먼지 섞인 성체를 다 모은 후 주저하지 않고 받아 모셔 곁에 있던 사제들을 놀라게 한 일화도 전해진다. 선배·동기 사제들과 함께 하고 있는 최광희 신부(맨 오른쪽). 앞줄 가운데는 당시 신부였던 유경촌 주교. 최 주교는 2023년부터 교구 문화홍보국장을 지내며 가톨릭커뮤니케이션협회 담당 사제로 활동, 언론·방송·출판 등 커뮤니케이션 관련 일을 하는 신자들과도 교류해왔다. 가톨릭커뮤니케이션협회 강무성(티모테오) 회장은 “최근 협회 주관으로 열린 제25회 가톨릭 포럼 ‘다시 쓰는 민주주의’가 늦게 끝나 장내를 정리하고 있는데, 최 주교님은 그 순간에도 앞서 질의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며 대화하고 계셨다”고 했다. 이어 “이들과 대화하는 최 주교님을 보며 가톨릭교회는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잠시 후 기념촬영 때 전장연 활동가들이 어색하게 서 있자, 같이 사진을 찍자고 손을 잡아 앞자리에 세우며 세심히 챙기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털어놨다. 교구 문화홍보국 차장 박우준 신부는 “최 주교님은 문화홍보국장으로 일하면서 직원들을 기능적으로 대하지 않고, 동반자로 여기며 각자의 사정과 이야기를 늘 경청해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경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상황에 맞게 마음을 써주셨기에 많은 청년이 애정을 갖고 주교님을 많이 찾아왔다”면서 “청년들과 소통해온 주교님의 경험이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준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 주교는 인스타그램에 날마다 성화와 복음 묵상글을 올린다. 그리고 주교 임명 당일인 8일 처음 자신의 사진과 함께 주교 임명 축하식에서 발표한 소감문을 게재했다. “부족한 저를 위해 기도를 청한다”고 밝혔고, 축하 댓글이 이어졌다. “책임과 권한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망각하기 쉬움을 생각해봅니다. 자신의 권한에는 매우 넓은 아량을 베풀고 자신의 책임에는 매우 협소한 기준을 적용하기가 쉽지요. 잘못을 인정하는 거에는 인색해지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는 지혜로워지기가 쉽지요.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들을 지워놓고 자신은 그 압박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버리기도 쉽습니다. (···) 생명의 길, 내적인 기쁨과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축복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임을 다시금 되새깁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립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요한 13,17)” - 5월 14일 레오 14세 교황 선출 후 올린 최광희 주교의 글 중에서 - 이지혜·박예슬 기자이지혜2025.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