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온 편지] 민족과 문화는 달라도 신앙 안에 한 형제](//cpbc.co.kr/CMS/newspaper/2016/10/rc/657015_1.0_titleImage_1.jpg)
[선교지에서 온 편지] 민족과 문화는 달라도 신앙 안에 한 형제과테말라 <4·끝> 김현진 신부(서울대교구) 처음 과테말라에 왔을 때 한국과 다른 문화에 사뭇 놀랐습니다. 물론 외국이기에 당연히 한국과는 다른 문화일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음에도, 같은 종교 안에서도 다양하게 드러나는 신앙의 모습이 참으로 이색적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영향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전해졌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모습이 과테말라의 문화와 실생활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부활 때 마을 우물을 성수로 축복하는 모습. 김현진 신부 제공15세 생일 기념 미사, 결혼 동전 축복예를 들어, 과테말라에선 열다섯 살이 되는 여자아이는 열다섯 살 생일 기념 미사를 드립니다. 이 미사를 통해 이제는 아이가 어린 소녀가 아니라 한 가정을 책임지는 사회 구성원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청하며 올바르게 잘 자랄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아무래도 조숙한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일찍부터 본인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일깨워주는 듯합니다.또한 십자성호를 그을 때, 마지막으로 본인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댑니다. 이유가 궁금해 많은 사람에게 질문했지만, 그냥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배웠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노인분을 통해 십자성호에 담긴 사연을 들었습니다. 스페인 정복 시기,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면서 과테말라의 원주민들에게 십자성호를 알려주기 위해 직접 눈앞에 십자가를 보여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성호를 긋게 한 후, 마지막에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십자가를 눈앞에 보여주지 않아도 성호를 그을 수 있게 되니 십자가상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는 대신, 자신의 엄지손가락에 입술을 대게 된 것입니다.혼인성사를 드릴 때도 한국과는 다른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하는 혼인 예식에는 반지 축복 이후 특별한 전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전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사제에게 축복받은 동전을 신랑이 신부에게 건네주며, 하느님 축복을 의미하는 재화를 당신과 함께 나누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신부는 다시금 그 동전을 신랑의 상의 주머니에 넣으며, 당신에게 집안의 재화를 상징하는 이 동전을 잘 받았으며, 앞으로 지혜롭게 잘 사용하겠다고 약속합니다. 한 가정을 이루면서 하느님의 축복 안에서 경제적인 부분까지도 함께 서로 나누며 지혜롭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모습을 통해 삶 깊숙이 담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또한 성경에서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축복한 것처럼(루카 2,25 참조), 태어난 지 40일이 되면 아기를 성당으로 데려와 미사 후 부모가 사제에게 아기를 건네며 축복을 청합니다. 그러면 저는 갓난아이를 두 팔로 안고 하늘을 향해 번쩍 든 후, 하느님의 축복이 아기에게 함께하시기를 공동체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본당 신부에게 열쇠 건네인사 발령으로 본당을 새롭게 맡게 될 때도 한국과는 전혀 다릅니다. 성당에 부임했을 때를 되돌아보면, 주교님께서 강론하신 후 저에게 본당의 모든 열쇠를 건네주는 예식을 하셨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동한다더라도 따로 열쇠를 건네받은 적은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열쇠가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미사 중간에 본당의 모든 열쇠를 축복하고 그것들을 사제에게 건네줌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본당에 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사제에게 맡긴다는 것을 신자들 앞에서 다시금 강조하는 예식이었습니다. 영성체 역시 다릅니다. 한국과는 달리 성체를 손이 아니라 입으로 모십니다. 아무래도 처음에는 입으로 성체를 직접 드리는 것이 어색해서 조금 낯설었는데, 이제는 저 역시 그러한 전례 안에서 정성껏 주님의 몸을 신자들과 나누고 있습니다.같은 믿음과 신앙과테말라에서 살면서 전례나 삶에서 늘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봅니다. 처음에는 한국에선 전혀 보지 못한 모습이라 낯설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이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깨달았을 때는 정말 다양한 문화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에게만 익숙한 틀 안에 예수님을 가두고, 그 틀로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동안 한국에서 배우고 가져왔던 틀 안에서 이분들의 믿음을 바라보게 됐습니다. 물론 머리로는 노력하지만, 마음으로 다가가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미사 중에 개들이 돌아다니고, 아무런 스스럼없이 가슴을 드러내, 우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 역시 하나의 분심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틀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모습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습니다.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듯 하느님께서도 다양한 민족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계심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외적인 모습은 다를지라도,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시기에 저도 이제는 마음 편하게 신자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충만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구별하시어 그들의 길을 다양하게 만들어 놓으셨다”(집회 33,11)는 말씀처럼 우리 안에 다양한 길, 다양한 문화, 다양한 사고방식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합니다.다른 것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닙니다. 같은 믿음과 신앙만 갖고 있다면 조금 다르게 보이더라도 이해하며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문득 깨달은 사실은, 제가 이 문화에 적응하고 삶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처럼, 분명 이분들도 외국 신부의 어눌한 말과 본인들과는 다른 생각과 삶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서로가 다른 모습을 가졌음에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기에, 어쩌면 저와 저희 본당 신자들은 지금 이렇게 행복한 모습으로 주님을 향해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서로 다르다고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 다른 모습,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음에도 하느님 안에서 다 같은 한 자녀임을 꼭 기억하며, 나와 다른 이들을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움 주실 분 : 서울대교구 해외선교후원회 문의 : 02-747-2407 우리은행 454-035571-13-101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국민은행 375-01-0091-080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백영민2016.10.19
![[생활속의 복음]마르타의 괘씸죄, 그리고…](//cpbc.co.kr/CMS/newspaper/2016/07/rc/644606_1.1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마르타의 괘씸죄, 그리고…연중 제16주일(루카 10,38-42) 주수욱 신부 (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주임) 마르타가 잘못한 이유마르타는 예수님께 뭔가 정성껏 대접하기 위해 분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동생이 얼마나 얄미울까요. 그 바쁜 마르타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일까요? 오히려 칭찬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르타가 예수님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그 말씀을 자신이 반복하고 있지는 못할망정, 마르타는 예수님에게 자신이 하는 말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반복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사실 자세히 따져보면 기가 막힐 일이지요. 집안에서도 어린 자녀들이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있어야 하는데, 거꾸로 자녀가 부모에게 명령하면 되겠습니까?마리아는 왜 그렇게 주님의 발치에만 앉아 있는 것일까요? 바쁘게 움직이는 언니를 제쳐 놓고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려고 처음부터 작정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막연하지만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니의 면박을 들어가면서도 그렇게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만 듣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현대 사회의 마르타과연 동생 마리아는 언니의 말만 들어야 할까요?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그 옛날의 마르타만이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모두 그 마르타처럼 바쁩니다. 바쁘게 살지 않으면 모두 굶어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중요할까요? 아무것도 안 하고 무조건 예수님 말씀만 듣겠다고 성경만 보거나 기도만 하고 있어도 안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들려오기도 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자면 오늘 복잡한 현대 사회 한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하느님을 떠나는 인간의 고독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조건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떨까요? 오늘 우리는 과거에 비해 훨씬 바쁘게 살아갑니다.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침묵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바쁘게 살아가는 이 세상살이에서 그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맙니다. 침묵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요즘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모두 스마트폰을 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조용한 것이 아닙니다. 게임 내용이 전쟁 중이어서 폭력적이기도 하고 도박에 정신이 팔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실은 모두 시끄러운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 속에 자유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없고, 인간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떠나는 현대의 인간은 철저한 고독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난민, 실업자, 죽어가는 아이들…. 모든 외침이 멀리서 들려올 뿐입니다.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산다는 것은 현대인에게 어떤 유익함을 가져다줄까요? 꼭 필요한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 바싹 다가앉아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렇게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새로운 창조를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새롭게 만날 수 있습니다.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일 줄 알 때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 때,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오해도 생기고, 소통이 안 되어 고통스럽게 죽어갑니다. 결국, 혼자 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고독감과 분노로 발전하게 됩니다.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알 때,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도 귀담아들을 줄 알게 됩니다. 자기 주장을 내려놓고 잠시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지혜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안겨 주십니다. 문채현2016.07.13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9)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cpbc.co.kr/CMS/newspaper/2016/07/rc/646265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9)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성전 정화하시며 당신 죽음과 부활 예고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며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엘 그레코 작 ‘성전정화’ 부분, 1600년대, 프릭 컬렉션, 미국 뉴욕. 복음서는 모두 넷입니다. 그중에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을 ‘공관(共觀)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공관이라는 말은 18세기에 세 복음서를 비교할 수 있게 편찬한 책의 이름에서 시작되었지만, 이 세 복음서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드라마를 바라보는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공관 복음은 예수님의 삶을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으로 소개합니다.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활동을 시작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갈릴래아 주변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정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여정이 끝나는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장소라는 점에서 공관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삶은 구원을 위한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공관 복음은 예수님께서 단 한 번 예루살렘에 가신 것처럼 묘사합니다. 공관 복음에서 예수님의 삶 전체는 구원을 향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요한 복음은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 복음은 내용적인 면에서도 공관 복음과 차이가 있지만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여러 번 성전을 방문한 것으로 나타납니다(요한 2,13; 5,1; 7,14; 12,12). 예수님께서 우리가 아는 것처럼 2년 남짓한 공생활의 시간을 보내셨다면, 성전에 한 번 방문했다고 전하는 공관 복음보다 요한복음의 내용이 좀 더 정확해 보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성전을 정화한 예수님에 대한 언급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방문했을 때에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요한 복음은 자신의 복음서 초반에, 그리고 공관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 바로 직전에 소개합니다. 공관 복음에서 예루살렘은 예수님 여정의 목적지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성전을 방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언제 이러한 사건이 벌어졌을까요? 이런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기는 쉽지 않지만 요한 복음에서 전하는 내용이 개연성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이 성전 정화 사건에서 시작해서 점차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전을 정화한 이야기의 내용은 거의 동일합니다. 공관 복음은 모두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는 이사야서(56,7)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는 예레미야서(7,11)의 내용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언급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행동은 제자들에게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는 시편 69장 10절의 내용을 기억하게 했다고 전합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한 권한을 요구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로 답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이 말씀의 의미를, 곧 당신의 부활을 나타낸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결국, 이러한 내용을 기록한 것은 죽음과 부활 이후라는 이야기입니다.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들을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명확하게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죽음과 부활과 무관하게 이해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들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면서 그 의미가 확실해집니다. 이런 방식을 학자들은 재독(再讀, Relecture)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죽음과 부활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읽는 방식 역시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6.07.2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40>](//cpbc.co.kr/CMS/newspaper/2016/02/rc/619742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세 가지 길 하느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은 몇 갈래의 길로 비유되어 설명하기도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담은 영화 더 웨이(The Way)의 한 장면. 【CNS】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정화’, ‘조명’, ‘일치’의 세 가지 길로 비유해 설명합니다. 물론 여기서 세 가지 길은 세 종류의 각기 다른 방향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길에서 발전 단계를 구분하여 일컫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여정 안에서 세 가지 길은 때로는 두 가지나 네 가지 길로 비유되기도 합니다.먼저 현대 영성신학자들은 세 가지 길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보고자 시도했고,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는 않더라도 유추해서 해석해 볼 수 있는 성경 구절을 제시했습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시편 34,15). 즉, 악을 피하는 행동은 정화의 단계이며, 선을 행하는 행동은 조명의 단계이고, 평화를 찾는 행동은 일치의 단계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즉, 자신을 버리는 행동은 정화의 단계며, 제 십자가를 지는 행동은 조명의 단계고, 예수님을 따르는 행동은 일치의 단계라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그런데 고대 교부들은 바오로 사도가 언급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1코린 13,13)에 먼저 관심을 가졌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첫 단계에서 믿음으로 열광을 억제하고 악을 피하며, 둘째 단계에서 희망으로 덕행을 실천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사랑으로 선을 실천한다고 제시했습니다. 또한 요한 카시아누스는 믿음으로 벌악(罰惡)의 두려움과 함께 악을 피하며, 희망으로 세상과 육체의 쾌락에서 고개를 돌려 상선(賞善)을 기다리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을 뜨겁게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계속해서 카시아누스는 믿음과 희망이 완덕의 탁월함을 완전하게 지니지 못한 반면에 사랑은 온전히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간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따라서 몇몇 성인들은 바오로 사도가 강조한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ㄴ)이라는 데에 관심을 갖고 영적 여정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초기 단계의 사랑, 상당히 진보한 사랑, 매우 큰 사랑, 완전한 사랑이라는 네 가지 단계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단계별로 발전하기 위해서 늘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잠시라도 쉬고 있다 보면 뒤로 퇴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성인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는 영적 여정을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했습니다. 즉,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 인간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 인간이 하느님을 위해서 다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 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의 사랑에 도달하려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특권을 지녀야 잠시나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또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애덕의 영적 성장을 ‘초보’, ‘진보’, ‘완성’의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해 제시했습니다. 즉, 초보자는 애덕을 잃지 않으려 죄를 피하고 욕정을 극복합니다. 진보자는 애덕을 강화하려 덕행을 증진하고자 노력합니다. 완성을 이룬 사람은 애덕의 최고 경지인 하느님과 기쁨의 일치를 이루고자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염원합니다. 결국 애덕은 인간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만 성장하고 완성됩니다.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여정의 종착지가 애덕인 것은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언급하였듯이, 애덕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인간에게 주신 하나의 초자연적인 선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애덕의 완성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초자연적인 질서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계는 인간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도되어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경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영적 여정 안에서 능동적인 노력이 수동적인 이끌림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잘 살펴야만 신비 생활을 올바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6.02.17
![[사도직 현장에서] 이미 와 있는 천국을 살려면](//cpbc.co.kr/CMS/newspaper/2016/04/rc/631015_1.0_titleImage_1.jpg)
[사도직 현장에서] 이미 와 있는 천국을 살려면김선규 수사(성안드레아병원장·한국순교복자수도회) 사도직 현장의 가장 큰 괴리는 편견에 있다. 지난 사도직 현장이었던 장애인 시설에서의 경험도 그랬다. 어떤 방문객이 그랬다. “집이 깨끗하고, 원생들이 깔끔하네요.” 이 말에는 “후원할 필요가 없는 부유한 시설”이라는 편견이 내포돼 있다. 나는 그분에게 말했다. “장애인 시설은 허름하고 냄새나고, 장애인들은 나보다 못한 허름한 옷차림의 모습이어야 합니까? 장애인들은 더 깨끗하고, 더 깔끔하게 살면 안 됩니까? 장애인들이 청결하게 지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비장애인의 노력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이것이 함께 살아가는 것 아닐까요?”그 방문객은 시설에 다시 오지 않았다.지금의 사도직 소임은 정신질환 환우들의 치유를 돕는 일이다. 요즘 듣는 이야기는 “정신병원에 담도 없고, 밝고, 깨끗하고, 잔디 운동장과 산책 시설도 넓네요”라는 말이다. 이 말에는 정신병원에는 창살이 있고, 어두워야 하며, 괴상한 표정의 얼굴을 한 사람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편견이 있다. 그리고 “여기는 돈이 많은가 봐요”라는 식의 말을 들으면 울화통이 터진다. 정신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우들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니 화나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대중매체에 거론되는 정신병원, 정신질환자는 늘 부정적이다. 그렇다고 정신질환자와 정신병원은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도 않는다. 그냥 어둡고, 괴상하고, 무섭고,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물론 그런 부정적 이미지를 생산해 내고 있는 몇몇 병원과 정신질환자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미지의 생산은 너무나 폭력적이고 자극적이어서 엄청난 거부감과 혐오감을 갖게 한다. 현대 사회에는 점점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이들이 거리낌 없이 치료받도록 사회적 편견을 깨야 한다. 사회적 편견과 불편한 시선이 이중 고통을 받게 한다. 환우 분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을 사회가 보듬어 줘야 한다. 더는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스스로 소외되지 않도록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면 좋겠다. 이럴 때 떠오르는 성경 말씀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천국을 살 것인지 아니면 천국을 가기 위해 살 것인지에 대한 삶의 문제다. 우리는 천국을 선택했다. 이미 와 있는 천국을 살기 위해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도 고민한다. 왜냐하면, 천국의 모습을 살아 보이는 것이 수도자의 신원이니까. 평화신문2016.04.20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영성 산책] <17>](//cpbc.co.kr/CMS/newspaper/2015/08/rc/589482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영성 산책] 학문으로서의 영성신학 성경은 다양한 하느님 일꾼의 삶의 여정과 예수님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노력했던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깨닫게 한다. 【CNS】 영성신학은 계시 진리와 개인의 종교 체험을 대상으로 연구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영성 생활 발전 과정을 추상적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이론적인 체계를 갖춰 설명하는 학문입니다. 본격적인 연구는 신학자들 몫이겠지만, 일반 신자도 자신의 영성 생활 발전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평소에 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계 서점에 마련된 영성 생활 관련 서적들은 저자의 개인 묵상에 근거해 대부분 감성적인 내용으로 구성돼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서적이라도 접하는 것이 아무것도 접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영성 생활을 너무 감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우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영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학문으로서의 영성신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연구 자료를 선정할 필요가 있습니다.정말로 영성 생활 발전에 관심있는 신앙인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인간 저자가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그 내용을 보증하고 전해 준 하느님 말씀을 담고 있는 책이기에 영성 생활 발전에 가장 적절한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다양한 하느님 일꾼들의 삶의 여정과 시편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노력하였던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또한 신앙인은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물론 초기에 가톨릭 교회는 믿을 교리를 알아듣고 가르치는 데에 치중했지만, 현대에 와서 교황님이나 교회 당국이 다양한 상황에 맞춰 발표하는 문헌들은 신앙인이 영적 여정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담긴 가르침은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톨릭 신앙인이 나아가야 할 영적 여정을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 진리를 담고 있는 성경 말씀과 교도권의 가르침은 영성 생활 발전에 활력소라 할 수 있습니다.한편, 개인의 종교 체험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유익합니다. 2000년 교회 역사 안에는 많은 영성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 체험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객관적으로 서술한 저서를 출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신학자들도 신학적 작품을 저술할 때, 영성 생활에 도움이 되는 내용을 첨부했습니다. 신앙인은 이러한 영성 작품들을 통해 저자의 개인적인 체험에 객관적으로 접근하여 살펴보면서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물론 신앙인 개개인의 영적 체험도 영성 생활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체험이 너무 주관적으로 기울면 부정적인 측면도 발생할 수 있으므로, 언제나 영적 지도자의 인도 아래 자신의 체험을 객관적인 관점으로 성찰하려는 노력이 동반돼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을 다양한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셨듯이, 영성 생활을 획일적으로 알아듣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영적 여정을 살펴보는 것은 영성 생활 발전에 무척 유익한 일입니다.게다가 영성신학에서는 신앙인의 영적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세상 학문의 연구 결과들도 활용하는 추세입니다. 이미 과거에 몇몇 성인들도 인간학이나 심리학의 연구 결과 중에서 일부를 활용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세상 학문 연구 결과 전부가 영성신학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점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개인의 영적 체험을 객관화시키는 데 도움을 받고자 하는 제한적인 측면에서만 세상 학문 연구 결과를 활용한다는 것입니다.비록 영성 생활이 개인적인 사건이지만 객관화시켜야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영성 생활을 연구하는 영성신학은 이성적인 학문 방법론을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 여러분도 조금 어렵게 생각되더라도 체계적으로 설명한 학문적인 영성 서적들을 찾아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5.08.26
신천지를 주의합시다! ④ - 2돌아온 탕자에게 새겨진 주홍글씨 ① 신천지란 무엇인가② 신천지는 어떤 사람을, 어떻게 포섭하나 ③ 왜 신천지에 빠지는가④ 신천지를 경험한 사람들 이야기⑤ 신천지 대처법·구별법 40대 후반 이 베로니카(가명)씨는 “나는 의심이 많고, 남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는 말부터 꺼냈다. 또 “내가 살아가는 원천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믿음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신천지에서 성경 공부를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수치스럽다”며 “기사에 꼭 가명으로 써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독실한 신자인 이씨가 신천지를 접한 건 3년 전이었다.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성경을 가르치는 신부님이 계시는데 강의가 정말 좋다. 같이 들어보자”고 권유했다. 성경 공부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이씨는 ‘신부님’이라는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갔다. ‘그레고리오’라는 그 신부(사제 사칭하는 김현성 그레고리오로 추정)는 교황청에서 사제품을 받고, 16년 동안 필리핀에서 빈민 사목을 했다고 소개했다. 로만 칼라도 하고 있었다. 4~5명이 같이 강의를 들었다. “강의 퀄리티(질)가 꽤 좋았어요. 서울 강남구청 근처 건물에서 4~5명이 같이 강의를 들었는데 천주교 신자가 3명이었어요. 남편이 본당 사무장이라는 분도 있었고요. ‘지인 부탁이니까 1~2번만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갔는데 강의가 괜찮아서 몇 번 더 듣게 됐죠.”몇 차례 성경 강의를 한 ‘신부’는 “사목이 바빠서 오래 강의할 수 없다”며 “종파를 초월해 성경 공부를 하는 신학원을 소개해줄 테니 거기서 공부를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권했다. 결국, 이씨에게 성경공부를 소개해준 지인과 함께 신학원에 등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인은 원래 신천지 신도였고, 이씨 앞에서는 처음 성경공부를 하는 것처럼 행동한 것이었다.의심이 많았던 이씨는 신학원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30~40명이 함께 수업을 들었다. 수시로 시험을 봤고 열심히 공부했던 이씨는 늘 100점을 맞았다. 2개월 정도 지났을 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지인에게 이야기했더니, 곧바로 ‘그레고리오 신부’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다른 데 시선을 돌리지 말고, 진리를 놓치지 말고 잘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신부님’ 말씀이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성경 공부를 시작한 지 4~5달이 지났을 때, ‘신천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남편에게 말했더니 ‘두 번 다시 가지 마라. 이단을 믿는 사람이랑은 같이 못산다’는 말까지 했죠. 하지만 저는 과정을 마치고 직접 판단하고 싶었어요. 남편에게는 안 나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몰래 계속 공부를 했죠.”1년여 동안 이어졌던 ‘신천지 생활’은 신천지에 관한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마무리됐다. ‘진리’라고 배웠던 것들이 진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 후 이씨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토록 사랑했던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그렇게 열심히 하느님을 믿고 기도했는데, 저를 어떻게 저런 곳에 가도록 놔두셨나 하는 원망이 들었어요. 그런 곳에 빠져 있었던 나 스스로에 대한 분노도 있었고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한동안 신앙생활을 못 했어요.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어요. ‘이 오물을 어떻게 벗겨내야 하나’하는 고민을 계속했어요.”가짜 신부를 소개해준 지인은 이씨가 신천지에서 나온 후에도 “차 한잔 하자”며 몇 번을 찾아와 설득했다. 하지만 이씨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이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교회와 신자들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고 말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돌아온 탕자’ 이야기도 있고요. 그런데 실제 본당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요. ‘신천지에 갔다 온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면 신자들 사이에서 배척당해요.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인데, 돌아와서 더 큰 상처를 받고 신앙을 잃는 경우가 많아요. 교회에서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더 관심을 두고, 피해자들이 신앙을 회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으면 해요.”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백영민2015.07.16
 “나의 의로운 종은…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이사 53,11)](//cpbc.co.kr/CMS/newspaper/2015/09/rc/594323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40) “나의 의로운 종은…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이사 53,11)타인 위해 수난·죽음 당한 ‘주님의 종’은 예수 카라바조 작,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606년. 빌라도가 가시관을 쓰고 자주색 망토를 걸친 예수를 가리키며 군중을 향해 ‘이 사람을 보라’(에케 호모)고 세 번 외친 장면을 묘사한 작품. 많은 이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하느님의 손에서 고통을 받는 종.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고통받는 주님의 종을 예고하는 것이 지난주에 읽기 시작했던 이사야서 제2부입니다.우리 「성경」에는 네 본문에 ‘주님의 종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42장 1-9절, 49장 1-7절, 50장 4-11절, 52장 13절─53장 12절입니다. 하지만 성경 원문에는 단락이 나누어져 있거나 제목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라는 것은 19세기 말에 학자들이 붙인 제목입니다.이사야서 제2부는 사실 ‘종’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종’은 이스라엘을 지칭합니다(41,8.9; 44,1 등). 그런데 가끔, ‘종’이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단락들이 있습니다. 이 노래들에서 ‘종’은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개인 또는 몇몇 사람들로 보입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단락들을 골라내어 ‘주님의 종의 노래’라 불렀습니다.이 노래들에 나오는 ‘종’은 이사야 예언서 제2부의 다른 부분들에서 ‘종’으로 일컬어지는 이스라엘과 여러 점에서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자신의 죄에 대하여 죗값을 다 치렀고(40,2) 이제는 용서를 받게 되었는데(44,22),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종은 무죄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을 겪습니다(53,4-7.11). 또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권리를 돌보지 않으신다고 탄식하는데(40,27) 이사야서 49장 4절에서 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자신의 권리를 돌보아 주심을 믿습니다.하지만 이 종이 누구인지는 잘 밝혀지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이 모세와 같이 먼 과거의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우리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당시의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 여호야킨 등 여러 인물이 후보로 등장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이 노래들이 역사상의 어떤 인물에게서 완전히 실현된 것이 아니라고 보아 미래의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이미 수렁에 빠졌습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를 읽으면서, 종이 누구인지를 밝히려는 데에 관심을 집중하면 결국은 실패합니다. 종은 여러 의미를 동시에 갖기 때문입니다. 종이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 종의 노래에서 종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아야 길이 열립니다.첫째 노래(42,1-9)에서는 하느님께서 종을 선택하십니다. 그 종은 하느님께서 선택한 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입니다. 둘째 노래는(49,1-7) 종의 사명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셋째 노래는(50,4-11) 이 사명을 수행하며 종이 겪게 되는 운명을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이미 박해와 거부, 고통이 나타납니다. 마지막 넷째 노래는(52,13─53,12) 종의 죽음을 주제로 합니다.이 노래들에서 종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 해도, 중요한 것은 주님의 종의 노래들이 보여주는 고통과 구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입니다. 특히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무죄한 종의 고통은 많은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전통적으로는 악인이 벌을 받아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거꾸로 고통받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여겼었습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는 이 도식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 종이 받는 고통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죄를 짊어지는 고통입니다. 종은 무죄하면서도 하느님께서 뜻하신 이러한 고통을 순종으로 받아들입니다.종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이 노래들을 어떤 맥락 안에서 읽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종의 노래들을 따로 떼어놓고 읽을 때, 이 노래들만 모아놓고 읽을 때, 이사야서의 앞뒤 문맥 안에서 읽을 때 그 해석은 달라집니다. 그 가운데 주님의 종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는 해석은 구약과 신약을 모두 하나로 묶어 놓고 그 안에서 이 노래들을 읽을 때에 나오는 결과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 노래들을 읽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말씀들이 온전히 실현된다고 보았고 그래서 이 노래들을 인용하여 예수님께 적용시켰던 것입니다.이 노래의 본래 저자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생각하고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노래를 예수님께 적용시키는 것은 구약이 신약에서 완성되고 성취되었다고 보는 전망 안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입니다. 이사야서의 다른 본문들에서도 그렇듯이(예를 들어 7장의 임마누엘 예언) 이 해석은 자주 주님의 종의 노래들을 인용하는 신약 성경 자체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 노래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다고 보았으며, 이 노래들을 통하여 그 수난과 죽음을 이해했습니다. 특히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나타나듯이 종의 죽음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었고 그 모습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을 비참한 모습이었으나, 그를 바라보던 이들은 그의 죽음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한 죽음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는 고통이 순전히 부정적이고 무가치한 것이며 고통당하는 사람 자신의 죄의 결과 또는 그가 받은 저주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시각이 나타나는데, 바로 그러한 의미의 고통과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확인되는 것입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5.09.22
![[성서주간] 한님성서연구소](//cpbc.co.kr/CMS/newspaper/2014/11/rc/540284_1.0_titleImage_1.jpg)
[성서주간] 한님성서연구소성경 연구의 씨앗, 나무로 자라 ‘숲’을 꿈꾸다 한님성서연구소는 평신도 신학자들이 주축이 된 연구기관이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강재준 사무국장, 김명숙·주원준·송혜경 박사, 이효임 디자이너. ‘도서관’이라 불리는 33㎡ 남짓한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성경과 관련된 수백 권의 책이었다. 성경사전에서부터 신약, 구약은 물론 초대 교회, 고대 근동에 이르기까지 쉽게 접하기 힘든 성경 연구서들이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다양한 언어로 된 서적도 눈에 띄었다. 성서연구소임을 실감케 하는 장소였다. 성서주간을 앞두고 찾아간 한님성서연구소(소장 정태현 신부)는 의정부 시내 한 건물 2층에 있다. 연구소는 크게 도서관과 연구 공간으로 나뉘는데, 연구 공간에는 연구원들의 개인 연구실이 있다. 연구원은 정태현(전주교구 효자동본당 주임) 소장 신부를 제외하고 모두 5명. 하느님 말씀에 빠져 외롭고 배고픈 신학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30~40대 평신도 신학자들이다. 이 가운데 송혜경(비아, 신약 외경 및 영지주의 연구)ㆍ김명숙(소피아, 에제키엘서 및 예레미야서 주석)ㆍ주원준(토마스 아퀴나스, 신명기 주해 및 고대 근동)ㆍ박미경(안나, 70인역 및 탈출기) 박사 등 4명이 연구소를 지키고 있다. 강지숙(빅토리아, 랍비 및 유다이즘) 박사는 현재 예루살렘에서 공부 중이다. 이 밖에도 연구소 장학생 김선영(아녜스, 아랍문학)씨가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다. 연구 이외의 업무는 사무국장 강재준(요셉)씨와 편집 디자이너 이효임(아녜스)씨가 맡고 있다. 연구소는 규모는 작지만 업적은 탄탄하다. 성서학, 동방 그리스도교, 고대 근동과 유다이즘 연구에 매진하며 「칠십인역 창세기」「영지주의자들」「타르굼 아람어 문법」「교부학」 등 그리스도교 사상과 신앙의 원천을 밝히는 책들을 발간해 왔다. 이외에도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도 펴냈는데, 정태현 신부가 쓴 「성서입문」(상/하권)과 「거룩한 독서」(1~4권)는 연구소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연구소는 1998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모두 60여 종의 책을 연구 결과물로 세상에 선보였다. 현재 연구소 주력 사업은 ‘거룩한 독서를 위한 성경 주해’ 총서와 ‘유다ㆍ그리스도교 고전 입문’ 총서 발간이다. 바오로딸출판사와 함께 10~20년을 내다보고 시작한 연구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성경 주해’ 총서는 거룩한 독서를 위한 길잡이 책으로, 성서학의 최신 연구 동향을 바탕으로 신학적ㆍ영성적ㆍ문학적 해석을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게 담아냈다.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 「요한복음」 등이 출판됐다. ‘유다ㆍ그리스도교 고전 입문’ 총서는 성경 연구에 기초가 되는 문헌(원천 문헌)을 설명한 해설서다. 원천 문헌은 성경의 배경이 된 고대 근동 문헌, 성경을 풀이한 유다교 랍비 문헌, 동방 그리스도교 문헌, 정경화 과정에서 성경과 경합을 벌인 외경 등을 말한다. “무릇 기초를 놓는 사업은 무척 고단하고 그 결과가 쉽고 빠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일에는 오랜 세월 인내와 끈기, 막대한 인적ㆍ물적 투자가 필요하다. 이제 한님성서연구소는 새로운 천년기와 희년을 준비하는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 그리스도교 사상과 신앙의 원천을 밝히는 일에 작은 씨앗을 뿌린다.” 연구소 설립 취지문의 한 구절이다. 연구소는 지난 16년간 서두르지 않고 꾸준하게 평신도 신학자를 후원, 양성하며 한국 신학의 척박한 토양을 일궈왔다. 연구소 운영은 이사진과 일반 후원회원이 낸 후원비로 이뤄진다. 정태현 소장 신부는 “50년, 100년을 내다보고 설립한 연구소”라면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교 원천 연구의 길을 걷겠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평화신문2014.11.18
![[생활속의 복음] 감히 인간이 하느님의 친구!](//cpbc.co.kr/CMS/newspaper/2016/07/rc/645638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감히 인간이 하느님의 친구!연중 제17주일(루카 11,1-1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인간은 하느님의 친구임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과연 피조물인 인간, 때로는 동물만도 못하다고 손가락질당하기도 하는 인간이 하느님의 친구일까요? 친구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냥 인사만 하는 친구가 있고, 함께 고민을 나누고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친구가 있고,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친구도 있습니다. 동창생 친구도 있고, 취미 생활을 함께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깊이 있게 사귀는 친구도 있고, 배신하는 친구도 있습니다.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우정을 간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에서 그 우정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십자가 밑에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모입니다. 그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아드님을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게 있어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친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다는 것입니다.이미 구약 성경 탈출기에 보면(24─33장) 하느님께서 모세를 친구로 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탈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고 있을 때, 산밑에서 그 백성은 우상인 금송아지를 만들고 제사를 바쳤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진노하시고, 계약은 깨지고 징벌을 내리셨습니다.요한복음 15장 1315절에서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나는 너희를 더는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오늘 복음서에서 나오는 이 친구는 졸라대는 친구입니다. 예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를 맞이하는 친구는 뜸을 들이다가 마침내 잠자리에서 일어나 불평하지 않고 빵을 챙겨 주는군요.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사실 저는 평생 주님께 면목없이 졸라대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제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헌장 2항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콜로 1,15; 1티모 1,17 참조) 이 계시로써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탈출 33,11; 요한 15,14-15 참조), 인간과 사귀시며(바룩 3,38 참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 인간은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는 친구로서 하느님과 말씀을 주고받으며 사귀는 사이이며, 하느님과 인간은 더불어 하나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하느님께 단순하고 전적인 신뢰심으로 ‘예!’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흔히 수제자라고 말하는 베드로는 불리한 상황에서 친구인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세 번이나 잡아떼면서 배신하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친구들 가운데 가장 믿고 천국의 열쇠도 맡긴 친구인데 말입니다. 그래도 성실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친구를 찾아가셨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확답을 받으면서 변함없는 우정을 세 번이나 확인하십니다(요한 21,15 참고).그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친구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친구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롯 유다도 있습니다. 극적인 과정을 거쳐 참 우정을 간직하게 된 친구 베드로와 달리, 유다는 절망한 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끝내 버렸습니다. 끝까지 우정에 기대면 사람은 깊은 어둠을 이겨내고 살아납니다. 그렇지 않고 하느님과의 우정에 한계가 있다고 여기거나, 하느님 앞에서 자기 체면만 차리고 희망을 포기하면 어둠 속에 묻혀 생명을 잃고 죽고 맙니다.이런 친구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친구, 하느님의 친구가 되어 감사하면서 정성껏 이 기도를 바쳐야겠다는 마음을 새롭게 갖습니다. 평화신문2016.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