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성심성월의 유래에 대해 알아봅시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 예수성심상. CNS 예수성심성월의 유래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교회는 6월을 특별히 예수성심을 공경하며 기리는 예수성심성월로 지냅니다. 그래서 본당에서는 미사 전후에 예수성심성월 기도(예수 성심께 천하만민을 바치는 기도)를 바치고, 성시간과 성체강복 등 예수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신심행사들을 갖지요. 예수성심성월의 유래에 대해서 좀더 알아봅니다. 심장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심장이 멎으면 바로 죽음입니다. 또 심장이 약한 사람은 생기가 없지요. 따라서 심장은 우리 삶에서 바로 생명과 활력의 원천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심장, 곧 마음은 그 사람의 내면, 정신 생활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나아가 마음은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 양심이 거처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볼 때 심장은 단순히 육체적 생명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성심으로 표현되는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라는 성경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당신 외아들마저 기꺼이 내어주신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한결같은 사랑의 표현이 바로 예수성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은 요한 복음서의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7,38-39)라는 말씀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군사 하나가 창으로 찔렀더니 즉시 피와 물이 나왔다'(19,34)는 말씀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앞의 말씀은 예수님이 성령과 함께 생명수의 원천임을 가리키고 있고, 뒤의 말씀에서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물과 피는 세례의 물과 성체성사를 상징한다고 교부들은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서 구원의 생명수가 흘러나온다고 본 교부들은 또한 창에 찔린 옆구리를 창에 찔린 심장(늑방)으로 이해하면서 예수성심을 모든 은총의 근원으로 본 것입니다. 이런 신학적 이해를 기반으로 비롯된 예수성심 공경은 중세기까지는 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 신심 차원으로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특히 중세 후기인 12~14세기에는 정감적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묵상이 활기를 띠면서 예수성심 공경이 유럽 사회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 시기 예수성심 신심의 대표적 인물로 성 베르나르도(1090~1153), 성 보나벤투라(1217~1274) 성녀 제르투르다(1256~1302), 성녀 가타리나(1347~1380)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예수성심 신심이 체계를 갖추고 세계적으로 확산되도록 한 주역으로 17세기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의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617~1690)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라코크 수녀는 1673년 말부터 1675년까지 네 번에 걸쳐 환시 중에 예수성심의 발현을 체험합니다. 알라코크 수녀는 이 환시 체험들을 통해서 △ 예수성심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예수 성심은 사람들의 배은망덕으로 상처를 입었기에 사랑의 상처를 기워 갚아 드리는 것이 예수성심 신심이다 △특별히 매월 첫째 금요일에 영성체를 하고 매주 목요일 밤에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는 성시간을 가짐으로써 상처입은 예수성심을 위로하라 △성체축일(성체 성혈 대축일) 후 금요일을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축일로 지내라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알라코크 수녀가 받은 계시가 인정되면서 예수성심 신심은 수녀가 속한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를 비롯해 예수회 등을 통해서 전세계로 확산됩니다. 이와 함께 성모성월과 인접해 있고 예수성심축일이 있는 6월을 예수성심성월로 지내는 관습도 생겨납니다. 특히 교황 비오 9세(재위 1846~1878)는 1856년에 이전까지 지역교회 차원에서 지내던 예수성심축일을 보편교회 축일로 확대했으며, 1873년에는 6월을 예수성심성월로 인가하면서 이와 관련한 대사를 반포했습니다. 또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1899년 예수성심께 전 인류를 봉헌하는 회칙을 발표했습니다. 20세기에 와서 '성심의 교황'이라고도 불리는 교황 비오 12세(재위 1939~1958)는 5월 성모성월과 6월 예수성심성월을 중요하게 여기고 성모성심 신심과 예수성심 신심을 적극 권장했습니다. 교황은 나아가 예수성심축일 제정 100년이 되는 1956년에 예수성심 신심의 교리적 근거와 기원을 신학적으로 제시한 회칙 「물을 길으리라」(Haurietis Aquas)를 발표, "예수성심 신심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학교"라고 강조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인간의 구원자」 「자비로우신 하느님」 같은 회칙들을 통해서 구원의 원천인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을 통해 나타나며, 예수성심 신심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고백하는 가장 합당한 수단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cpbc.co.krcpbc2017.06.01
![[NIE-신문으로 크는 신앙]정말 악마가 존재할까?](//cpbc.co.kr/CMS/newspaper/2016/07/rc/643687_1.3_titleImage_1.jpg)
[NIE-신문으로 크는 신앙]정말 악마가 존재할까?일러스트=문채현 무더운 여름.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공포 영화들이 극장가에 등장하는 때가 왔어요. 늘 ‘악마’ ‘악령’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빠지지 않죠. 지난해 구마 의식을 다룬 영화 「검은 사제들」이 인기를 끌었고, 최근 개봉한 영화 「곡성」과 「컨저링2」도 악마와 빙의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있어요.정말 악마가 존재하느냐고요? 답부터 알려주자면, 있어요. 과거에도, 지금도 어디에나 있답니다. 갑자기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무서워졌다고요? 기사를 끝까지 읽고 나면 그런 걱정은 사라질 거예요.악마는 누구인가구약성경에서 악마는 ‘사탄’(Satan)이라 불려요. 우리말로 적대자란 뜻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악한 영이랍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왜 악한 영을 만들어내셨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세상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 선해요. 악마들도 사실 이전엔 하느님이 창조한 선한 천사들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하느님께 대항해 타락하고 말았어요.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해요. 악을 부추기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게 방해한답니다. 이런 악마는 인간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죄에 빠지도록 온갖 유혹과 술수를 부려요. 탐식ㆍ음란한 욕구ㆍ탐욕ㆍ슬픔ㆍ분노ㆍ허영ㆍ교만 등이 악마의 유혹이라 할 수 있어요. 또 오만하고 음란한 악마는 인간을 육체적ㆍ정신적으로 괴롭히고 악으로 끌어들여 인간의 육신을 소유하기도 해요. 사람을 습격해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을 마습(魔襲), 몸속으로 들어가 비정상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을 부마(附魔)라고 한답니다.보이지 않아 생김새를 알 순 없지만, 성경에선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해서 악마를 ‘군대’라고도 표현해요. 중세시대 때는 악마를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괴물의 모습으로 상상해 그리기도 했어요. 동물의 머리를 한 반쪽 인간, 날개ㆍ뿔ㆍ꼬리가 달린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했죠. 성경에 나타난 악마성경을 통해 악마가 사람을 어떻게 괴롭히는지 알 수 있어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도록 사로잡고(루카 22,54-62), 유다가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넘기도록 꾄 것도 악마였어요.심지어 악마는 예수님까지 유혹하려 했어요(마태 4,1-11). 악마는 40일간 단식한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돌들을 빵으로 바꿔보라”고 재촉했어요. 또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아래로 몸을 던져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고 부추겼어요. 다시 악마는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보여주며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고 유혹했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악마를 물리치셨어요.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괴롭히는 악마들도 자주 물리치셨어요. 갈릴래아 호수 근처 게라사 지방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단번에 알아보시고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자 자신을 ‘군대’라고 밝힌 악마는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해, 돼지 2000여 마리 속으로 들어가 갈릴래아 호수로 뛰어들어 죽고 말았답니다(마르 5,1-20). 악마에게 유혹되지 않으려면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악마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아요. 하지만 “사탄의 가장 은밀하고 간사한 꾀는 오늘날 우리가 사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하는 것”이라고 해요.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도 “악은 효력을 발휘하는 살아 있는 존재이며, 타락한 영이고, 인간의 타락을 조장하는 자이다. 신비하고, 무서운 공포의 현실이다. 이런 악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성경적이고 교회적인 가르침의 반경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면서 악마의 존재를 설명하셨어요.기도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열심히 따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악마의 힘은 강력하고 그 숫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그보다 더 강인하고 권위 있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이에요. 누구든 언제나 악마에게 유혹을 당하고 시련을 겪을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에겐 곁에서 돌봐주시는 자비로운 하느님이 항상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기로 해요.“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아멘”(1베드 5,9-11).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문채현2016.07.06

성경 쓰인 시대와 현재의 간극, 해설서로 메운다 마르코 복음서 해설서 펴낸 최승정 신부 서울대교구 성서 100주간 담당과 청년성서모임 연수지도를 맡고 있는 최승정(서울대교구, 가톨릭대 신학대 교수) 신부는 본당이나 단체들이 서로 모시고 싶어하는 인기 성경 강사다. 신학교 수업을 제외하더라도 한 해에 잡힌 성경 강의 일정만 해도 70~80회에 이른다. 타고난 강사 체질 같아 보이는데 정작 최 신부 자신은 “숨어 사는 게 인생의 목표”라고 했다. “수줍음이 많아 책상에 앉아 연구하고 글 쓰는 게 체질인데, 인생이 뭔가 잘못 풀렸다”는 최 신부를 최근 가톨릭대 성신교정 도서관에서 만났다. 성서 사도직 봉사자를 위한 마르코 복음서 길라잡이 「마르코 복음 이해」(생활성서/1만 원)를 펴낸 것이 계기가 됐다. 「마르코 복음 이해」 -「마르코 복음 이해」는 어떤 책인가교구 청년성서모임 마르코 연수 지도를 하면서 연수 때 다 하지 못한 마르코 복음에 관한 설명을 담았다. 연수 때 이미 다룬 내용도 자료를 좀더 첨부하고 내용을 심화해 가다듬었다.-마르코 복음서의 특징은 무엇인가복음서 중에 가장 오래된 복음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고통받는 하느님, 고난받는 메시아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인간 고통과 연대하는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 가능하다.-일반 신자를 위한 첫 책인 듯하다그동안 부지런히 논문을 썼다. 탈출기 주석서를 쓴 적이 있는데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이들을 위한 책이다. 성서사도직(성서100주간, 청년성서모임)에 몸담으면서 성경을 쉽게 해설해주는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2~3년 전부터 작업을 해왔다.-성서사도직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정말 내 탈렌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연구하고 학생들 가르치며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잘못 풀렸다(웃음). 사실 인생 목표는 숨어 사는 거였는데…. 전 춘천교구장이신 장익 주교님께서 어느 날 밥 먹는 자리에 데리고 가더니 사람들에게 성서 100주간 신부라고 소개하셔서 (성서100주간을) 맡게 됐다. 청년성서모임은 전 청년성서모임 담당인 홍인식 신부님께서 부탁해 돕게 됐다. 이렇게 오래 할 줄을 몰랐는데 성경 봉사자들에게 배운 것이 참 많아 계속하고 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그분들의 진심은 저에게도 좋은 체험이다.최 신부는 신학생 때 독일로 유학 가 신학을 공부하고 다시 이탈리아 로마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다. 사춘기 시절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사제(신학자)의 길을 꿈꿨다. 하지만 공부 잘하던 아들이 신학교에 가는 걸 부모는 반기지 않았다. 최 신부 부모는 ‘대학에 가서 공부를 더 해본 다음 그때에도 신학교에 가고 싶으면 가도 좋다’고 했다.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최 신부는 자연과학으로는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를 풀 수가 없다는 걸 깨닫고 졸업 후 곧바로 신학대에 들어갔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인생의 궁금증을 풀었는지신학교에 와 공부해도 잘 모르겠더라(웃음). 유학할 때 당대 최고의 성경신학자들, 슈나켄부르크, 지글러, 피츠마이어, 노르베르트 로핑크 등을 찾아다니며 그분들께도 질문했는데 역시나 답을 찾진 못했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느낀 것을 토대로 각자 답을 찾아야 하는 것 같다.-요즘 청년들이 본당을 떠나고 있는데, 성경 공부하러 오는 청년들은 꾸준한 듯하다5~6년 전 청년성서모임 지도신부들과 모여 이야기한 적이 있다. 성당 나오는 청년이 줄어드니 성서모임도 없어지지 않겠느냐. 출구전략을 짜야 한다. 조직도 줄여보자고 했다. 그런데 정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젊은이들이 더 많이 찾아왔다. 세상이 이러면 이럴수록 영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커진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교회가 이런 말씀의 목마름에 준비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잘 읽는 것인가성경 말씀을 왜곡하지 않으려면 본문 내용을 충실히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쓰인 시대와 공간이 지금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를 해설해주는 주석가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 없이 마음대로 읽고 해석하면 자칫 교회 공동체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다. 요즘 문제가 되는 신천지도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그렇다. 교회가 올바른 말씀 해석을 신자들에게 심어 주면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다.최 신부는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을 때 혼자보다는 여럿이 ‘함께’ 읽고 나누기를 강조했다. 나눔을 통해 성경 말씀이 보다 풍성해지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 신부는 “성경을 함께 읽고 나누면 의문점을 공유해 풀 수 있고, 공동체의 장점을 누릴 수 있다”면서 “함께 읽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백영민2015.08.19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6)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cpbc.co.kr/CMS/newspaper/2016/07/rc/643679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6)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림은 코시모 로셀리 작 ‘산상설교와 나병환자의 치유’ 중 일부, 1481~1482년, 시스티나성당, 바티칸.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에서의 유혹 이후에 본격적인 활동을 나타내는 것은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아주 짧은 형태로 전해지는 이 선포는 예수님의 활동을 요약해 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아주 단순하게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반면에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선포가 이미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예언되었고 이제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사야서 8장 23절에서 9장 1절의 내용을 인용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마태오 복음이 사용하는 용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하늘 나라’입니다. 마르코나 루카 복음서는 모두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마태오 복음은 이것을 하늘 나라로 표현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주된 독자들은 유다인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유다교의 전통에 익숙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하느님의 이름 대신 장소를 나타내는 하늘을 통해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를 가장 독특하게 전하는 것은 루카 복음서입니다. 루카 복음은 마태오와 마르코처럼 간단한 선포 대신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대신합니다. 나자렛 회당에서의 희년 선포(루카 4,16-30)는 루카 복음서의 특징을 잘 요약해 주는 부분입니다.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면서 선포되는 내용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 곧 희년입니다. 메시아 시대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사야서를 통해 이제 하느님의 뜻이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을 선포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시작되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종말론적인 긴장의 시간이라 부릅니다. 종말의 때가 되어 완성될 이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 백성의, 교회 공동체의 삶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희년의 선포와 함께 나자렛에 전해지는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의 이야기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는 기근의 시기에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 파견된 엘리야(1열왕 17,8-16), 그리고 이스라엘의 나병 환자가 아닌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고쳐준 엘리사(2열왕 5장). 이 두 인물은 이스라엘의 예언자이지만 이방인들에게 기적을 베푼 것으로 구약 성경에 나타나고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안에 담겨진 의미는 이미 구약성경 시대에도,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도 하느님은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하느님의 구원이 유다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향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을 통해 전해진, 모든 이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하느님의 의지는 예수님을 통해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고 실현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관 복음서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장소적인 어떤 것을 나타낸다기보다 하느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하느님의 뜻이 백성들 안에 실현되는 관계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그 다스림을 받고 따르는 이들이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의 활동과 가르침은 모두 이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고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알려지고 선포되며 그의 행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드러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선포와 함께 요청되는 것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6.07.06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33) 예수님의 정체, 그분을 따르기(루카 9,18-27)](//cpbc.co.kr/CMS/newspaper/2017/09/rc/696888_1.1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33) 예수님의 정체, 그분을 따르기(루카 9,18-27)베드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 고백하다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곳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60㎞ 정도 떨어진 카이사리아 필리피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파네아스라고 불렸는데 헤로데 대왕의 또 다른 아들 헤로데 필리포스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도시를 세우면서 카이사리아 필리피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는 바니아스라고 불린다. 사진은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 유적이 남아 있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가톨릭평화방송 여행사 제공예수님이 하신 놀라운 일들은 그분의 정체성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가 예수님의 신원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리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베드로의 고백(9,18-21)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셨고, 제자들이 함께 있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9,18) 제자들의 답변은 헤로데 영주가 소문에 들은 이야기와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옛 예언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9,19; 9,7-8 참조)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고, 시몬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엄중히 분부하십니다.(9,20-21) 이 짧은 이야기에서 특별히 두 가지를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함구령입니다. 예수님의 신원 이해와 관련해, 군중들의 답변과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의 답변이 다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엘리야나 옛 예언자에 속하는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지만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반면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란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 이 곧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구세주라는 뜻입니다.(1414호 5월 14일 자 참조)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 마태오복음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마태 16,17)이지만, 루카복음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이 고백은 그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직접 보고 체험한 데서 나온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엄중하게 분부하십니다.(9,21) 왜 함구령을 내리셨을까요? 그다음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수난과 부활의 첫 예고(9,22) 함구령을 내리신 예수님께서는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9,22)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가 오시면 자신들을이민족의 압제에서 구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로마의 지배에서 풀어 주실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나 되는 장정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까지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하시면서 오히려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가 되살아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들은 이스라엘의 지배층입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은 유다인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이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할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부에게 배척과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상과는 멀어도 한참 멉니다. 물론 “되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덧붙이기는 하셨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긍정하시면서도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것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상과 메시아이신 당신이 가서야 할 길이 엄청나게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요? 달리 말하면 제자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사명과 그분의 길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서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일깨우시고자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나(9,23-27) 이렇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주목할 것은 이 말씀을 제자들 곧 사도들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려는 “모든 사람”(9,23)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9,23)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는 말씀과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씀은(9,24-25)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9.26) 예수님이나 예수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면,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오실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을 따르는 법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9,27)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이, 하느님의 다스림이 펼쳐지는 상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이를 살리신 것 또한 하느님의 다스림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사람이 있으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루카가 바로 이어서 묘사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 또한 하느님의 다스림의 펼쳐진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지요? 아니면 자신을 지키고 내세우려 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외면하면서 입으로만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지요? 혹시 그리스도 신자임을 밝히는 것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거나 선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는 않는지요? - 예수님의 길은 배척과 고난,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가시고 우리는 그 길을 따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배척과 고난, 수난과 죽음을 겪어야만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면 되니까요. 때로는 그 십자가마저 고달프고 무겁게 느껴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안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문채현2017.09.27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1) 예수 그리스도의 드라마](//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8027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1) 예수 그리스도의 드라마예수가 주연인 감동의 드라마 다시 보기 신약 성경은 예수가 주연하고 열두 사도 등이 조연으로 출연하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프라 안젤리코 작 ‘제자들의 성찬’, 1441~1442년, 프레스코화, 산 마르코 미술관, 이탈리아 피렌체. “여행을 떠나요. 즐거운 마음으로. 모두 함께 떠나요.” 어떤 노래의 가사입니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여행의 즐거움보다 그것을 준비하고 기다릴 때의 즐거움이 더 큽니다. ‘신약 여행’. 어쨌거나 여행인데 이번에는 이 여행이 아주 즐겁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부담 때문이겠죠! 그래도 여행이라니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이 여행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입니다. 2000년 전쯤 이스라엘에 살았던 한 젊은이가 바로 여행의 주제입니다. 나자렛 출신의 예수는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대외적 활동이 2 년 남짓한 그의 인생은 그리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숱한 소문과 문제를 일으킨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인생 안에서,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에 이 청년 예수에게는 다른 호칭이 하나 따라 붙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이’를 일컫는 이 호칭은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로 불립니다. 사람들은 그 예수를 이제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총 27권으로 되어 있는 신약 성경은 모두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내용을 중심에 둡니다. 나자렛 출신의 청년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신약 성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드라마를 중심으로 합니다. 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 청년이 되어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선포하고 그것을 활동으로 보여 준 다양한 이야기들, 그리고 이것으로 십자가형이라는 가장 혹독한 형벌에 처형당했지만, 다시 살아났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까지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드라마’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는 끝났지만 20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은 이 드라마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역사상 가장 훌륭한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드라마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많은 이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제자들입니다. 열둘, 사실은 더 많은 제자가 조연으로, 때로는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드라마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아니 더 나아가서 많은 이들의 삶을 바꾸어 주는, 상당히 긴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그 안에는 기쁨과 행복, 고통과 고뇌들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이 아니라 그 안에 감추어진 어려움들 역시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흥미롭고, 어쩌면 조금은 따분한 이야기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인들에게 의미있는 것이고, 또 신앙인들이 기억하고 한 번쯤은 되새겨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삶 안에서 벌어진 여러 이야기들, 복음서에서 전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이 여정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순례의 길일지도 모릅니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신앙에 도움이 되는 여정이면 좋겠습니다. 전혀 모르던 새로운 것을 얻는다기보다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는 여정이면 좋겠습니다.“행복합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을 생각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시편 84,6) 허규 신부 서울대교구 소속, 1999년 사제 수품, 독일 뮌헨 대학(Ludwig-Maximilians-University Munich) 성서신학 박사, 현 가톨릭대 성신교정 교수 평화신문2016.05.31
![[성경 속 도시] (39) 다마스쿠스](//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3258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39) 다마스쿠스박해자 사울, 예수님을 만나다 다마스쿠스 구시가지 동쪽 외곽의 거리 모습. 출처=「In the steps of Saint Paul」 나는 오래 전 성지순례차 다마스쿠스에 갔다. 당시 과거와 현재가 혼합돼 있는 느낌이었고 전체 도시가 생기발랄한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시리아 지역 시골에서 만난 사람들은 넉넉한 살림살이는 아니었지만 정이 많고 순박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런데 지금은 오랜 내전 등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나라가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고 이 도시에 평화가 내리길 기도해본다. 기원전 3000년쯤 세워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손꼽히는 다마스쿠스는 시리아의 수도로 중세기 한때는 이슬람 제국 전체의 수도였다.아름다운 도시, 교통의 중심지‘다마스쿠스’라는 이름은 기원전 15세기부터 사용했다. 옛날부터 ‘동양의 진주’라고 불렸다고 하니 그 규모와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긴 역사를 지닌 다마스쿠스는 이슬람 문화의 4대 도시(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중 하나로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대상 무역로로 유명했고 아라비아 반도와의 통상로 등 교통의 중심지였다.다마스쿠스는 본래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람의 수도였지만 기원전 732년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신바빌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다가, 서기 1세기에 로마 제국의 속주 시리아의 수도가 됐다. 당시 다마스쿠스에는 이미 많은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마스쿠스는 비교적 성경에 많이 언급되는 도시다. 구약에서 나오는 인물은 유명한 시리아의 장수 나아만이다. 나아만이 나병을 치유하는 이야기이다. 나아만이 나병을 고치려고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사마리아까지 찾아와 엘리사 예언자의 말에 따라 요르단 강에 내려가 몸을 씻고 나병을 고쳤다는 극적인 이야기다(2열왕 5,1-27). 성경 속 인물 중에 이 도시와 관련을 맺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역시 바오로 사도가 아닐까. 사울(개종 전의 바오로 사도의 이름)은 본래 철저한 바리사이였고 열심한 유다교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앞장서서 박해했고 교회를 아예 없애 버리려고 남자든 여자든 신자를 잡아다가 감옥에 넘겼다(사도 8,1-3 참조). 사울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예루살렘으로 연행해오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인을 받은 뒤, 다마스쿠스를 향하다가 극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사도 9,1-18). 박해하려던 곳에 하느님 말씀 전해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성경에 여러 번 반복돼 언급된다. 세례를 받은 사울은 바오로로 개명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제일 먼저 자신이 박해하려던 다마스쿠스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9,19-20). 그는 이방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안타깝게도 현재 다마스쿠스는 우리나라 외교부에서 여행 경보 4단계인 여행 금지로 지정하고 있는 지역이다. 우리나라 국민은 이곳에서 즉시 대피하거나 철수해야 하며 만약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방문하면 처벌을 받게 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4.01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48.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1320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48.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믿음 가진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길 열렸다베르나르도 카발리노 작 ‘성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 백인대장’ 부분, 1640년대,로마 국립근대미술관, 이탈리아.환시 통해 새 깨달음 얻은 베드로 정결한 것과 속된 것 구분 없어져 예수님 의해 구약의 법 새롭게 모든 이에게 차별 없는 주님 사랑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기회 주어져 “카이사리아에 코르넬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탈리아 부대라고 불리는 군대의 백인대장이었다.”(사도 10,1) 사도행전 10장 전체는 베드로와 코리넬리우스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코르넬리우스는 이방인으로, 로마의 군사를 이끌던 지휘관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도 간간히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로마의 군대에서 백 명의 군사를 이끌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방인 출신이었지만 이미 신심을 가진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내용에서 차이는 있지만 코리넬리우스의 이야기는 루카복음(7,1-10)에서 전하는 백인대장의 이야기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은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 모두 환시를 통해 서로 만나게 된다는 점입니다. 백인대장은 환시를 통해 베드로를 찾아가라는 천사의 말을 따릅니다. 베드로 역시 환시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는 하늘에서 큰 아마포 같은 것이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그 안에는 “네발 달린 짐승들과 땅의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생명체를 일컫는 표현입니다.(창세 6,20)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유다인들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구분은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정결법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속된 것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했으며 이것은 유다인들의 특징처럼 표현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는 말씀처럼 유다인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생활 전반에 걸쳐 영향을 줍니다. 음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철저하게 구분했고 정결한 짐승만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레위 11장 참조) 베드로는 말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환시는 사도행전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 이제 구약의 법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됩니다. 복음서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르 7,18-23) 더 이상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분은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음식에 대한 내용만은 아닙니다. 먹을 수 있는 짐승에 관한 이 환시의 의미는 선택받은 민족과 그렇지 못한 민족에게로 확장됩니다. 정결한 것과 속된 것의 구분은 유다인들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었고, 이 선택은 민족들에게도 해당됩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뽑힌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 곧 그 외의 민족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환시 이후에 코르넬리우스를 만난 베드로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하느님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 10,34-35) 더 이상 민족들 간의 구분과 차이는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을 간직한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 복음 선포의 내용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사도 10,39-40) 여기서 베드로는 ‘십자가’라는 표현 대신 ‘나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신명기(21,22-23)를 생각하게 합니다. “죽을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에게 십자가는 이런 의미였습니다. 하느님의 저주인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일으킨 사건인 부활. 서로 조화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이것이 초기 교회의 믿음이었고 선포였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김지항2017.05.10

그들이 어떻게 기도했길래 하느님이 응답해 주셨나 성경 인물들의 기도 상·하 성경 인물들의 기도 상·하차동엽 지음/위즈앤비즈/2만 5000원무(無)에서 유(有)가 탄생하는 경우는 없다. 소설가들은 한 권의 소설을 쓰기 위해선 수십 수백 편의 소설을 ‘필사’한다고 한다. 그렇게 다른 작가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미술가들은 또 어떠한가. 위대한 걸작들을 보고 익히면서 자기만의 화풍을 구축해 간다.기도도 마찬가지다. 기도할 줄 모른다면, 기도를 잘하고 싶다면 먼저 신앙 선배들이, 신앙 선조들이 바친 기도를 찾아보고 그 기도를 따라 해봐야 한다. 배움에 왕도가 없듯이 기도에도 왕도가 없다. 차동엽(인천교구) 신부가 펴낸 「성경 인물들의 기도」는 기도의 길을 닦은 성경 속 인물들의 갖가지 기도가 담겨 있다. 그들이 무슨 기도를 바쳤는지, 하느님께선 응답해 주셨는지, 기도의 결말은 어떠한지를 살펴봤다. 차 신부가 ‘기도 선배’인 성경 속 인물들을 통해 배운 기도와 기도 체험을 엮어낸 것이다. 기도와 믿음에 도(?)가 텄을 것 같은 차 신부지만, 그 역시 “기도를 기도답게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기도 선배들에게 배우는 게 먼저였다”고 털어놨다. 책은 구약편과 신약편 2권으로 구성돼 있다. 구약편엔 아담와 카인, 모세, 여호수아, 솔로몬, 다니엘, 말라키 등 34명의 기도가 들어 있다. 신약편은 세례자 요한에서부터 예수님까지 19명의 기도를 담았다. 어떤 기도는 금세 하느님께 응답받았고 어떤 기도는 거절당하기도 했다. 응답을 받기까지 한평생 기다린 이들도 있다. 성경 인물들의 기도를 통해 세상만사 희로애락과 한 시대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다. 차 신부는 기도를 배우면서 시편 102편 말씀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주님께서… 헐벗은 이들의 기도에 몸을 돌리시고 그들의 기도를 업신여기지 않으시리라”(시편 102,17-18). 하느님 앞에 기도를 바치는 이들은 임금이나 예언자, 과부나 고아 할 것 없이 ‘헐벗은 이들’이 됐다. 그리고 이들의 기도는 애원이고 탄원이었으며 하소연이었다. 하느님께선 그 기도를 ‘업신여기지 않고’ 보듬어 주셨다. 차 신부는 “우리 시대 저마다의 애환과 고달픔을 속속 헤아려 주시는 주님 연민이 고동치는 듯하다”고 했다. ‘대체 성경 인물들 기도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는 이들에게 차 신부는 “그들의 기도가 우리 기도를 한 단계 발전시켜 주는 영감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는 책을 추천하며 “신앙 선배들은 우리에게 척박한 삶의 터에서 살아남는 생존 기도, 실전 기도를 가르쳐 준다”면서 “무작정 기도하기보다는 먼저 기도하는 법을 충실히 배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백영민2016.04.27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중동(1) 자흘레 난민 캠프를 가다](//cpbc.co.kr/CMS/newspaper/2017/10/rc/699565_1.0_titleImage_1.jpg)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중동(1) 자흘레 난민 캠프를 가다가족 8명과 포격 뚫고 국경 넘은 모나 란다씨 자흘레 시 외곽 시리아 난민 캠프에서 만난 아일란 쿠르디의 친구들. 전쟁의 고통은 힘없는 여성과 아이들 몫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천막 틈바구니로 고개를 내밀고 바깥 세상을 구경하는 아이의 순수한 눈빛이 그 사실을 웅변한다. “성조들과 예언자들의 고향, 메시아가 강생하신 영광스러운 장소, 구원자의 십자가가 드높여지는 것을 보았고 구세주의 부활과 성령 강림을 목격한 곳, 사도들과 성인들과 수많은 교부가 거쳐 간 땅, 최초의 교리가 정립된 현장….”(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중동 교회」 제8항 참조)중동은 그리스도교의 뿌리이자 요람이다. 하지만 인간의 눈먼 욕심에 그 뿌리는 뽑히고, 요람은 짓밟혔다. 100년 전만 해도 중동 인구의 14%가 그리스도인이었다. 지금은 4%대로 주저앉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2003년)과 ‘아랍의 봄’, 그리고 이슬람 극단 무장조직 창궐이라는 일련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진 박해를 받고 쓰러졌다. 특히 극단 무장세력 IS(이슬람 국가)가 활개친 이라크와 시리아의 경우 앞으로 그리스도인의 ‘현존’ 가능성을 의심해야 할 정도다. 교황청 산하 재단 고통받는 교회 돕기(ACN)와 가톨릭평화신문은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두 번째 순서로 박해받는 중동의 그리스도인들을 찾아간다. 글ㆍ사진=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 레바논 국경도시 자흘레에 있는 시리아 난민 캠프에 들어서자 아일란 쿠르디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아일란은 2년 전 터키 보드룸 해안에서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된 3살짜리 시리아 난민 꼬마다. 모래사장에 잠든 양 엎드려 있는 아일란의 모습은 시리아 난민의 비극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전 세계인의 양심을 아프게 찔렀다. 아일란과 난민 캠프 아이들은 모두 시리아 북부 알레포가 고향이다. 알레포는 칼리프 제국 건설의 망상에 사로잡힌 이슬람국가(IS)가 점령해 초토화시켰다. 천막 골목에서 놀다 낯선 방문객을 보고 몰려든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 이들은 친구 아일란의 죽음과 고향 소식을 모르는 듯하다. 이들에게는 당장 배고프고 추운 게 불만이다. 그래서 아이들이다. 겨울에 대비해 찬바람을 막으려고 천막 귀퉁이에 못질하는 여인의 어설픈 손길에서 난민 생활의 고달픔이 느껴질 뿐이다. 분쟁 지역의 난민촌 풍경이 다 그렇듯, 남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캠프의 대표격인 이브라힘(40)씨는 남자들 행방에 대해 “전쟁 중에 죽었거나, 시리아에서 싸우고 있거나, 아니면 시내로 날품팔이를 나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눈앞에 보이는 황량한 산등성이 너머 시리아 영토를 가리키면서 “기막힌 사실은 저기에 남아 싸우는 남편이나 아들이 지금 누구와 싸우는지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니파 극단 무장세력과 시아파 정부군, 미국과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뒤엉켜 패권 다툼을 벌이는 내전의 현실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하지만 다 파괴된 데다 언제 제2, 제3의 IS가 튀어나올지 몰라 망설이고 있다”고 말했다. 자흘레 외곽에 있는 난민 캠프는 50개 가까이 된다. 5, 6년 전 난민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올 때와 비교하면 모든 게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엔을 비롯한 비정부 기구들(NGO)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 캠프에는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다.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자흘레 변두리 산동네로 올라가 피란 보따리를 풀었다. 자흘레대교구(멜키트 동방가톨릭교회)의 난민지원사업 담당 사나 사미아씨는 “극단주의자들과 폭도로 돌변한 무슬림 이웃을 피해 도망 나온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무슬림 캠프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무슬림 난민은 시내와 캠프 어디든 들어갈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더욱이 산동네 빈민촌으로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은 유엔과 NGO 지원의 사각지대에 있어 고충이 더 크다”고 말했다.남편과 함께 사지(死地)에서 탈출한 그리스도인 난민 로나씨는 “그간 알레포에서 무슬림 이웃과 갈등 없이 평화롭게 살았다”며 “하지만 2011년 내전 발발 직후 마을의 모스크(이슬람 사원)에서 확성기로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기 시작하면서 이웃 주민들이 폭도로 변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다. 그들의 배신과 이유 없는 증오에 몸서리가 쳐진다”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은 공포와 배신감, 피란 생활의 막막함으로 뒤범벅됐다. 자흘레대교구는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난민들 때문에 처음에는 어쩔 줄을 몰랐다. 난민들은 시내 빌딩 주차장은 물론 대성당 마당에까지 천막을 쳤다. 긴급 구호 경험이 없는 대교구에 사업 방향을 가르쳐 주고, 지원해 준 곳이 교황청 산하 고통받는 교회 돕기(ACN) 재단이다. ACN은 지금도 난민 월세 주거비, 무료 급식소, 난민 학교 등을 지원하고 있다. 사나 사미아씨는 “ACN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교구는 지금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우리는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가리지 않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도적 지원을 한다”고 밝혔다. 여러 세력이 뒤엉켜 싸우는 시리아와 이라크 내전은 수니파, 시아파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강대국들은 석유와 지역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두 나라의 독재 정권을 두둔했다. 이에 대한 불만을 먹고 성장한 극단 무장세력은 정치적 야망을 위해 불을 지르고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세를 규합하는 데 쓰인 불쏘시개는 그들의 종교적 ‘신념’이다. 불의한 신념의 희생양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시리아만 하더라도 내전 발발 직전 국민의 6%를 차지하던 그리스도인은 현재 유서 깊은 ‘성경의 땅’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른다. 혹자는 2~3%라고 추정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짓밟은 그들의 눈먼 증오는 파스칼의 「팡세」 한 구절로 설명이 충분하다. “인간은 종교적 신념을 갖고 행할 때일수록 희열에 넘쳐 철저하게 악을 행한다.” 가족 8명과 포격 뚫고 국경 넘은 모나 란다씨 가정 가족 8명과 함께 피란 온 그리스도인 난민 모나 란다(54)씨 손에 약봉지가 들려 있다. 자흘레대교구와 ACN에서 보태 준 돈으로 사온 남편의 심장약이다. 피란길에서부터 심장 이상 증세를 보인 남편은 병원에서 “죽기 일보 직전에 왔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도 약을 달고 산다. 란다씨는 “IS 대원들은 아들을 구타하면서 IS에 가입하라고 협박하고, 마을 소녀들을 끌고 갔다”며 “우리 가족은 그들 손에 죽고 싶지 않아서 포격을 뚫고 걸어서 국경을 넘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의 피란길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여정과 다를 게 없었다”며 5년 전의 피란길 악몽을 떠올렸다.란다씨 가족의 생활은 ‘버티는 것’이지 사는 게 아니다. 빈민가에 작은 방을 하나 얻었지만, 수입은 아들 혼자 나가 벌어오는 돈이 전부다. 자흘레 시내에서 일하는 시리아 난민 남성의 하루 품삯은 20~30불(약 3만 원)이다. 그나마도 난민들 탓에 일거리가 줄었다고 반발하는 원주민들 때문에 일감도 많지 않다. ACN의 도움으로 월세 충당란다씨 가족은 ACN이 교구를 통해 지원해 주는 돈으로 월세를 낸다. 제대로 된 식사는 무료 급식소 ‘자비로운 요한의 집’에 가서 먹는 점심이 유일하다. 그는 “하느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전쟁 전에는 가난해도 행복했는데…그는 시리아 고향 얘기를 하다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 레도씨는 내전 발발 전에 채석장에서 일했다. 가난했지만 아무 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놔둔 채 도망쳐야 했다. 그리스도인이라서 박해받은 데 대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서 전쟁 중에 우리의 신앙이 더 강해졌다”고 말했다. 이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리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며 “한국에서 온 손님과 다시 만날 때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고통받는 교회 돕기(Aid to the Church in Need)는 차별과 박해,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톨릭 교회를 지원하는 교황청 산하 단체로, 한국 교회도 1960, 70년대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2015년 아시아 최초로 한국 지부(이사장 염수정 추기경)가 개설됐다. 문의 : 02-796-6440 성금 계좌 : 우리은행 1005-303-232450 (예금주 사단법인 에이드투더처치인니드 )고통받는 교회 돕기(Aid to the Church in Need)는 차별과 박해,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톨릭 교회를 지원하는 교황청 산하 단체로, 한국 교회도 1960, 70년대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2015년 아시아 최초로 한국 지부(이사장 염수정 추기경)가 개설됐다. 홈페이지: www.churchinneed.or.kr cpbc2017.10.25

‘성모님의 군대’로서 소명과 사명 되새겨인천·의정부교구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돌 인천 '바다의 별' 레지아 도입 60주년 기념 행사에서 기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맹현균 기자 인천교구 ‘바다의 별’ 레지아(단장 고중섭)는 3일 부천종합운동장에서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 48)를 주제로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 신앙대회를 개최하고, 성모님을 닮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살 것을 약속했다. 1만 5000명의 단원이 참가한 이날 행사는 기수단 사열식을 시작으로 ‘답게 살겠습니다’ 운동 선포식, 장기근속자 및 모범단원 표창, 경축 미사 봉헌, 축하공연 등으로 꾸며졌다. 김태현(교구 선교사목부 부국장) 신부는 대회사를 통해 “지난 60년은 시간의 흐름을 넘어 단원들이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을 닮으며 살아온 시간이라는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인천교구장 정신철 주교 주례와 80여 명의 교구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봉헌된 60주년 경축 미사에서 단원들은 지난 1년간 바친 묵주기도 7637만 300단, 소외된 이웃을 위한 기도 39만 1400회, 매일 미사 참여와 성경 읽기 706만 3000회, 60주년 봉헌기도 353만 3000회를 새긴 봉헌기도 패를 봉헌했다. 정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교구 ‘바다의 별’ 레지아가 60년 동안 눈부신 성장을 이뤄온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라며 “앞으로도 성모님이 걸으신 신앙의 길을 우리도 굳건한 믿음 속에서 힘차게 따라가야 한다”고 당부했다.단원들은 또 ‘답게 살겠습니다’ 결의문을 통해 △겸손하신 성모님을 본받아 교회와 레지오에 순명하고 △가족을 소중히 여기며 성가정에 충실하며 △매일 까떼나와 묵주기도를 바치고 △천주교 신자의 의무를 다할 것 등을 다짐했다. 이날 전임 단장 권대섭(요셉)씨 등 3명이 공로상을 받았고, 장기근속자(16명), 모범단원(17명), 소년단원(1명), 소년파견간부(1명) 등이 표창장을 받았다. 50년 장기근속 표창장을 받은 오춘자(가브리엘라, 연수동본당)씨는 “하느님께서는 제게 건강함을 주셨다”면서 “힘닿는 데까지 계속 이웃을 도우며 살라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인천교구 레지오 마리애는 1957년 9월 인천 답동본당 ‘천지의 모후 쁘레시디움’으로 시작했다. 1986년 3월 레지아로 승격했으며, 현재 17개의 꼬미시움과 211개의 꾸리아, 2560개 쁘레시디움이 있다. 행동단원은 2만 2000명, 협조단원 2만 6000명이다. 맹현균 기자 maeng@ 의정부교구 ‘애덕의 모후’ 레지아(단장 한효수)는 3일 경기도 의정부시 주교좌 의정부성당에서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서의 소명과 사명을 되새겼다. 한효수(바오로) 단장의 개회 선언으로 시작한 행사는 특강(홍승권 신부), 연혁 보고, 경축 미사 등으로 진행됐다. 교구장 이기헌 주교는 미사를 주례하고 강론을 통해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게 평화를 위한 기도를 특별히 당부하면서 “우리나라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더 기도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평화의 원리로 서로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꼽았다”면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도 서로를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며 평화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주교는 미사 중에 정정근(막달레나)씨를 비롯한 단원 9명에게 모범상을 수여했다. 40년 넘게 레지오 마리애 활동에 헌신한 공로로 상을 받은 나정자(아가타, 85)씨는 “하느님과 성모님께 언제나 최고의 사랑을 받았다”면서 “남들이 볼 땐 가진 것 하나 없는 할머니겠지만, 지금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말했다. 교구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1년간 전 단원이 기도와 선교 대상자, 냉담교우 회두 등을 봉헌하기로 서약한 결과를 패에 담아 이 주교에게 전달했다. 의정부교구 레지오 마리애는 1957년 2월 의정부2동본당(현 주교좌 의정부본당) ‘근심하는 이의 위로’ 쁘레시디움으로 시작했다. 2004년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가하면서 애덕의 모후 꼬미시움이 교구 애덕의 모후 레지아로 승격했다. 2017년 3월 말 현재 애덕의 모후 레지아는 쁘레시디움 1107개, 꾸리아 93개, 꼬미시움 8개로 구성돼 있다. 성인 단원은 9087명(여성 6280명, 남성 2807명)이며, 청년 단원 67명, 소년소녀단원 198명이다. 협조단원은 모두 1만 5526명이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평화신문2017.05.09
![[나의 미사 이야기] (1) 손희송 주교(서울대교구 총대리)](//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1048_1.0_titleImage_1.jpg)
[나의 미사 이야기] (1) 손희송 주교(서울대교구 총대리)손희송 주교
서울대교구 총대리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0)라고 인사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을 뵙고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시고 그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부활하신 예수님은 위기의 순간에 당신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선물해주신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와 평화의 사도로 삼으시면서 계속 그들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 말씀대로 지금도 예수님은 성경 말씀과 성사, 특별히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기원하셨던 평화의 은총을 우리에게 선사해주신다. 유럽 유학 시절미사 중에 주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평화의 은총을 체험한 이들이 적지 않다. 황송하게도 내게도 그런 체험이 있었다. 오래전 유럽 유학 시절의 일이다. 1982년부터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10년간 유학 생활을 했는데, 마지막 2년 반은 신학교에서 남자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겨 지냈다. 가능한 대로 수도원의 일과표에 따라 성무일도와 미사, 식사를 함께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곳 수사 신부들, 수련자들과도 친해져 공부에도 도움을 받고 개인적으로도 가깝게 지내게 됐다. 어느 날 그동안 비교적 친하게 지내던 수사 신부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독일어 발음이 잘못됐다고 지적해 주었다. ‘네가 독일어를 한 지가 벌써 몇 년이 되었는데, 그런 것도 틀리느냐’는 약간의 비웃음이 담긴 지적처럼 들렸다. 그 순간 모욕을 당했다는 느낌과 함께 그 신부에 대한 미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미운 감정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었다. 너그러울 때에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일 듯하다가도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는 것이 마음이라는 어느 선승의 말을 절감하게 됐다. 그 신부와 대화는 물론 시선조차도 마주치기가 싫었다. 작은 일에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기도 중에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한 집안에서 매일 마주치는 사람에 대해 미운 감정을 갖고 살자니 우선 내가 불편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미사 중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 아침 미사 때 그 신부도 함께 참석한 가운데 하느님께 간절히 청했다. ‘주님, 제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 이제는 당신이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나도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내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기도했던 것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미사 후에 그 신부에 대한 미운 감정이 사라졌고, 다시 평소처럼 그와 대화도 하고 농담도 할 수 있게 됐다. 미움의 먹구름이 한순간에 걷히고 내 마음에 찾아온 평화의 햇살은 온전히 주님의 선물이었다. 거의 단절되다시피 한 인간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체험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세력이고, 돈독했던 인간관계가 끊어진 곳에는 분명히 죽음의 세력이 활동하는 것이다. 단절된 인간관계가 다시 이어졌다면,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죽음의 세력이 극복된 것이고, 바로 여기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손길이 닿았다고 말할 수 있다. 미사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 체험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기원한다.※‘나의 미사 이야기’에 실릴 원고를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8매 분량 글을 연락처, 얼굴 사진과 함께 pbc21@cpbc.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평화신문2017.05.09
[미사전례풀이] 15. 성당, 예수님 흠숭하기 가장 알맞은 곳▨그리스도는 성체 안에만 현존하는가?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고,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분으로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교회에 현존하신다. 특별히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성체의 형상 안에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마태 18,20)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신자들 집회 안에, 신자들이 함께 기도할 때에 현존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서 성경이 봉독될 때와 그 말씀에 대한 해설이 이뤄지는 바로 그때에 당신 말씀 안에서 현존하시며, 십자가 상의 제사를 거행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사제의 인격 안에도 현존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운 사람들, 곧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안에도 현존하십니다. 미사성제 때에 빵과 포도주가 축성됨으로써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의 형상 안에 가장 완전하게 ‘실재적으로’ 현존하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사가 거행되고 감실이 모셔져 있는 성당과 경당은 성체 안에 실제로 현존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흠숭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입니다.▨신령성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모령성체는 무엇인가?교회는 신자가 영성체를 할 수 없는 경우에도 성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지니고 성체를 모시고자 원한다면 성체성사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를 신령성체(神領聖體)라고 부른다. 반대로 신자가 영성체를 해서는 안 될 경우임에도 성체를 영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모령성체(冒領聖體)라고 한다. 사제가 없어 미사를 거행하지 못하고 단지 말씀 전례만 거행할 경우, 병고나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 대죄 중에 있으면서 고해성사를 받지 못해 영성체를 할 수 없는 경우, 혼인 조당으로 지속적으로 성체를 영하지 못하는 경우, 또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 신자일 경우에 신령성체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미사 중에 성체가 모자라 영성체를 못 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신령성체를 하는 것입니다. 신령성체는 성체 신심의 또 다른 표현으로, 성체를 모시지 않고 마음으로 성체를 모셔도 같은 효과가 있다는 믿음입니다. 영성체를 하지 못한다고 미사 참여마저 하지 않는 신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영성체를 하지 못하더라도 미사에 참여하고 신령성체를 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모령성체는 은총의 지위에 있지 않은 신자가 스스로 중죄 중에 있음을 의식하면서 영성체를 하는 경우입니다. 모령성체는 성체에 대한 불공경의 태도이며, 중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은총의 지위에 있지 않은 신자는 영성체 전에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고 교회와 화해해야 합니다. 백영민2017.03.08
![[미사전례풀이] 8. 쪼개진 성체도 온전한 주님의 몸](//cpbc.co.kr/CMS/newspaper/2017/01/rc/667645_1.0_titleImage_1.jpg)
[미사전례풀이] 8. 쪼개진 성체도 온전한 주님의 몸 성찬례를 거행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체성사는 언제 만들어졌나예수 그리스도는 수난 전날 제자들과 함께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고, 이 예식이 제자들을 통해 계속 이뤄지기를 바랐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 하신 말씀이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9-20)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예식은 오늘도 우리가 미사를 거행할 때 이뤄지고 있습니다.성체성사는 무한한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기에 여러 이름으로 불립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행위이기 때문에 성찬례(감사제)라고 하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최후의 만찬이므로 주님의 만찬, 빵의 나눔, 성찬 모임이라고 부릅니다. 또 구세주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를 재현하고 교회의 봉헌도 담고 있기 때문에 거룩한 희생 제사, 하느님의 거룩한 전례라고도 부르며,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신자들을 파견(missio)한다는 뜻을 지녔기 때문에 미사라고도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체 안에 실제로 계시나예수 그리스도는 빵과 포도주의 성체성사 형상 안에 실제로 현존한다. “이는 내 몸이다. … 이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6-30)라는 말씀으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렇게 빵이 주님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거룩한 변화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실체 변화라고 일컫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성체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 빵과 포도주가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의 두 가지 형상 안에 각각 온전히 현존하며, 또 그 각 부분에도 현존하시므로 빵을 나눠도 그리스도께서는 나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영성체 때 쪼개진 성체를 모시게 되더라도 온전한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 것입니다. 백영민2017.01.11

기도할 때 십자성호 긋는 이유는?[교회상식 교리상식]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 신앙 고백 담긴 표현2014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 일본전에서 골을 넣은 뒤 십자성호를 긋는 코트디부아르의 디디에 드로그바 선수.십자가가 그리스도교 상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 배경을 좀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또 천주교 신자들은 밥 먹을 때나 기도할 때 손으로 몸에 십자가 표시를 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주님이요 하느님'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이지요. 십자가는 예수님 시대 이전부터 근동 아시아와 로마 제국에서 사형(死刑) 수단으로 사용됐습니다. 로마제국에서는 중죄인, 특히 제국에 반기를 든 모반자들이나 강도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치욕이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이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신 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부활을 체험하고 난 후부터는 십자가를 더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구원의 상징으로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십자가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 코린 1,23).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로마 제국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박해가 일어납니다. 처형 수단인 십자가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혐오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합쳐지면서 신자들은 드러내놓고 십자가 표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비신자들이 모르도록 십자가를 삼지창이나 닻 형태로 변형해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 모르게 개인적으로 이마나 가슴에 십자 표시를 하는 관습이 신자들 사이에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십자가를 공개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에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용인되면서부터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4세기초 로마에서는 두 장군 콘스탄티누스와 막센시우스가 서로 황제가 되려는 야망에서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전투를 하기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가 환시를 봤는데 하늘에 큰 십자가 표시가 보이면서 '이 표지로 그대는 승리하리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는 싸움에 이겨 마침내 황제 자리에 오릅니다. 이후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공식으로 인정하고 세례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는 무덤을 비롯해 기념비나 동전, 관공서 서류 등 곳곳에서 사용되기 시작하고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4세기 말 로마제국 국교가 되면서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마나 가슴에 하던 십자표시를 이마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두 어깨를 연결하는 큰 십자가 표시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발전해서 오늘날 천주교 신자들이 기도를 바칠 때나 식사를 할 때 긋는 십자성호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 국교로 공인되고 널리 확산되면서 아무런 형상이 없는 민십자가를 보석이나 포도넝쿨 등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표현한 십자고상(十字苦像)도 등장했습니다. 십자고상은 그리스도교 예술가들에 의해 고통 당하는 예수님 상, 영광스럽게 왕의 옷을 입고 팔을 벌리는 모습의 예수님 상 등 시대 상황에 따라 여러 형태를 띠었습니다. 성당에서 또 천주교 신자들 집에서 볼 수 있는 십자고상들은 이런 역사적 변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알아둡시다>> 십자성호와 성호경 천주교 신자들은 기도할 때나 마칠 때, 식사를 할 때나 마칠 때, 그 밖에 일과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도 언제나 손으로 자기 몸에 십자 모양을 그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기도를 바칩니다. 이때 십자 모양을 긋는 것을 '십자성호', 함께 바치는 기도문을 '성호경'이라고 합니다. 「예비신자 교리서」는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호경을 바치는 의미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음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십자성호 긋는 법 십자성호를 그을 때는 먼저 왼손은 손가락을 붙여서 가슴에 붙입니다. 그리고는 오른손은 손가락을 다 모아 먼저 이마에 대고 "성부와" 이어서 가슴에 대면서 "성자와" 다시 왼편 어깨에 대고는 "성" 마지막으로 오른편 어깨에 대며 "령의" 하고 십자표를 그은 후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붙이면서 나머지 부분 "이름으로. 아멘"을 바칩니다. 손을 모을 때는 왼손 엄지손가락이 오른손 검지 쪽을 잡고,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왼손 엄지 위로 포개 엄지 손가락이 대각선으로 십자표시를 이루도록 합니다. 성호경을 바칠 때는 언제나 이렇게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바칩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호경을 바치는 이 행위로써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성령 안에서 행동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이 십자성호는 또한 세상의 온갖 유혹과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를 굳세게 해줍니다. 이제부터는 십자성호를 그을 때마다 정성을 다해 그으면서 성호경도 정성스럽게 바칩시다. 천주교 신자들은 미사 중 복음 말씀을 읽기 전에도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이마와 입술과 가슴에 십자표시를 합니다. 이것은 복음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며(이마), 입으로 고백하며(입술), 가슴에 새겨 실천한다(가슴)는 의미를 지닙니다.김지항2017.07.07
![[평화칼럼] 부활의 희망 속에](//cpbc.co.kr/CMS/newspaper/2017/04/rc/677313_1.0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부활의 희망 속에윤재선 레오 보도총국장 윤재선 레오 보도총국장 우연의 일치인가 묘한 악연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감옥에 갇힌 날 세월호는 진실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뭍으로 돌아왔다. 그가 파면되자마자 세월호 인양 시점이 확정됐다. 마치 누군가 짜놓은 시나리오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박근혜가 내려가니 세월호가 올라왔다”고 외쳤다. 누군가는 ‘인과응보’, ‘사필귀정’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신의 뜻’이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그런 해석의 이면엔 참사 당일의 또렷한 기억과 대비되는 망각,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을 너무 쉽게 망각해버린 대통령에 대한 분노와 응징이 자리하고 있다. 진실 규명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세월호’를, ‘바다’를, ‘아이들’을, ‘팽목항’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징글맞게 싫어했던 사람들에 대한 노여움이 서려 있다. 그동안 드러난 국정농단의 파렴치한 사례들에 비춰 그의 죄악과 위선을 법적으로 엄히 단죄하는 건 순리이고 당연한 귀결이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들이 바라는 건 오로지 ‘진실’이다. 복수가 아닐 것이다. 행여나 법적인 단죄에 맞서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세력이 있다면 그런 생각일랑 접어두시길.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라고 하지 않는가.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로마 12,19) 세월호 참사 3주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월호 참사를 안고 살아왔다. 이들에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4월 16일 그날이다. 생존자들은 어떤가. 어느새 발언을 멈추고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함께 기도하고 울어줘서 국민 여러분에게 고맙다는 미수습자 9명 가족의 진심 어린 감사 인사는 되레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런데 왜 나는,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를 미안해하는 걸까?, 그 이유를 곱씹고 또 곱씹어본다. 세월호가 침몰한 바다는 진도 앞바다가 아니었다. 탐욕의 바다였다. 부패의 탁류에 침몰한 것이다. 약육강식과 강자생존의 논리로 대한민국은 기나긴 항해를 계속해왔다. 누구의 탓이라고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물질에 대한 욕망과 부패의 탁류에 휩쓸려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선적으로 물질에 대한 욕심과 욕망이 우리들의 삶을 압도한 결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나와 우리 삶의 좌표는 그날 이후 어떻게 얼마나 달라져 있는가를. 여전히 탐욕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은가를. 4월 16일은 참사 3주기이자 공교롭게도 예수 부활 대축일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희생, 부활 사건을 묵상하며 희생자와 유가족, 생존자들을 떠올린다. 유가족 중의 누군가는 애통해 하며 이렇게 물었다. 하느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과 슬픔을 주시느냐고. 침묵으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지만, 고통과 슬픔을 겪는 게 어찌 하느님의 탓이랴. 욕망의 덫에 갇혀 하느님을 멀리하고 부패의 탁류에 젖어들어 우리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한 인간 군상(群像)의 탓임을. 그래도 희생자들은 우리의 기억을 통해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음을 확신한다. 기억은 부활이다. 부활은 새로운 체험이고 만남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 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살아 계신 분과 다시 만나는 것이며 새로운 만남은 체험을 통해 형성된다. 예수님은 목숨까지 바쳐 사랑하신 그 인간들 안에 성령으로 다시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시다. 세월호 참사 3주기를 앞두고 두 손 모아 기도드린다. 부활의 희망 속에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아멘. 윤재선 기자 백영민2017.04.05
![[추기경 정진석] (59) 새로운 목자의 탄생](//cpbc.co.kr/CMS/newspaper/2017/07/rc/689782_1.0_titleImage_1.jpg)
[추기경 정진석] (59) 새로운 목자의 탄생베네딕토 16세 새 교황에 선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교황 선출 직후 2005년 4월21일 로마에 있는 숙소 앞에서 군중에게 답례하고 있다.【CNS】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뒤를 이을 새 인물을 고대하며 수많은 군중이 성 베드로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2005년 4월 18일 오후, 교황 선거인 콘클라베의 첫 번째 투표를 앞둔 때였다. 라틴어 ‘콘클라베(Conclave)’는 ‘자물쇠가 채워진 방’을 의미한다. 교황을 선출할 추기경단은 일제히 선거 회의장에 들어가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 투표를 진행한다. 또 참석자들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비밀로 한다. 이날 오후 4시 30분, 교황 선거를 위한 추기경단 115명의 행렬이 성령의 도움을 바라는 성가 ‘오소서, 성령님(Veni Creator)’을 부르며 선거 장소인 시스티나성당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텔레비전을 통해 콘클라베의 시작을 생중계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우리나라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법적으로 교황 선출 자격이 있는 80세를 넘긴 나이여서 아쉽게도 콘클라베에 참석하지 못했다.시스티나성당에 도착한 추기경들은 선서를 한다. 서약은 먼저 추기경단 수석 추기경이 서약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1996년 발표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교황령 「주님의 양떼」의 규정들을 충실하고 철저하게 준수할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특히 「주님의 양떼」는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와 절대 접촉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실제로 2005년의 콘클라베에서는 추기경단 숙소인 마르타의 집 전화와 인터넷 회선이 절단됐고, 숙소와 시스티나성당에는 휴대전화 사용이나 도청을 방지하기 위한 방해 전파를 내보내는 등 보안을 강화했다. 추기경들은 어떤 식으로든 교황 선출과 관련된 모든 비밀을 엄수하고 교황 선출에 관한 어떤 형태의 간섭이나 반대 또는 개입에 찬성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선서한다. 추기경들은 최후의 심판 장면이 그려져 있는 시스티나성당 벽화 앞에서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 성경에 손을 얹고 “나 아무개는 그와 같이 약속하고 맹세하고 선서합니다”라고 하면서 “하느님과 이 거룩한 복음은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추기경들의 선서 후에는 ‘외부인 전원 퇴장’을 선언하고 추기경단 이외의 사람을 모두 성당 밖으로 퇴장시킨다.교황 선출은 비밀 서면 투표로 진행된다. 개표 직후 투표용지는 불에 태워 처리하는 것이 관례다. 선거 이후 발생할 수 있는 구설수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함이다.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의 득표는 과거에는 만장일치제였지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경우 과반수의 찬성으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규정을 바꾸었다. 교황을 다수의 합의로 선출함으로써 교회의 확고한 일치와 원활한 운영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투표 결과는 투표용지를 태울 때 연기를 통해 외부에 알려진다. 과거에는 교황이 선출되지 않았을 때는 투표용지와 젖은 짚단을 함께 태워 검은 연기가 나도록 했다. 선출됐을 경우엔 마른 짚을 함께 태워 흰 연기가 나도록 했다. 그런데 요한 23세 교황이 선출된 1958년 콘클라베에서는 짚이 제대로 타지 않는 바람에 연기의 색깔이 불명확해져 회색 연기가 나왔고, 양도 너무 적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혼란을 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2005년부터는 화학 약품을 첨가해 색을 명확하게 했다. 그러나 연기의 색깔을 만드는 방법은 여전히 비밀이다. 또 흰색 연기에 성 베드로 대성전의 종소리를 추가해 혼란을 방지했다.드디어 4월 19일 오후 5시 55분. 교황 선출을 알리는 흰 연기와 함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있던 군중은 일제히 환호했다. 차기 교황이 확정되면 수석 추기경이나 연배가 가장 높은 추기경이 선거인단을 대표해 선출된 사람의 동의를 구한다. 이때 선출된 교황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세례명 또는 평소에 존경하던 전임 교황의 이름을 교황명으로 명명해 공표해야 한다. 이후 추기경들은 새 교황을 알현하고, 선임 부제 추기경은 외부 사람들에게 새 교황 탄생 소식과 이름을 공표한다. 30여 분이 지나자 호르헤 메디나 추기경과 전례 담당 마리니 몬시뇰이 등장해 전통에 따라 라틴어로 새 교황의 탄생을 공표했다.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새 교황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며, 교황 이름은 베네딕도 16세로 명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곧이어 휘장 뒤에서 새 교황으로 선출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즉 베네딕토 16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 교황은 이탈리아어로 짤막하게 부족한 자신을 위해 기도를 청하는 인사를 한 후 군중과 세상을 향해 첫 축복을 했다. 언론은 새 교황이 교황명을 요한 바오로 3세로 정할 것으로 추측했지만, 교황명은 ‘베네딕토’로 정해졌다. 성 베네딕토(480∼546)는 유럽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다시금 불러일으킨 인물로, 바오로 6세 교황이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반포할 만큼 위대한 성인이다. 교황이 선출된 시각이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한밤중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언론사들은 밤중에 방송과 인터뷰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정진석 대주교는 당일 새벽 교황 선출 소식을 접하고 바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즈음에도 정 대주교는 어렵고 힘든 세상에 새로운 시대를 책임질 교황님을 교회에 보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동이 트자 정 대주교는 곧바로 명동대성당으로 가서 새 교황 선출을 축하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전했다.“새 교황님께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강조하신 대로 이 세상을 인간다운 세상, 누구도 소외되는 일 없이 공존하는 평화롭고도 값진 세상으로 만들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진리에 충실하실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마음을 하나로 모아 기도와 희생을 봉헌해야 합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김지항2017.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