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cpbc.co.kr/CMS/newspaper/2016/11/rc/662366_1.2_titleImage_1.png)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7> 면장은 몰라도 가이오 회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퇴임식을 마치고 압해도 신자들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 가운데 점선 안이 김금룡 회장과 부인 박기남이 손녀를 안고 있는 모습. 김금룡이 압해도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섬사람들의 얼굴을 대략 익히고 나자, 목포에서 살 때처럼 가난하고 아픈 이들은 그의 차지가 되었다. 공소 교우 가운데 아픈 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득달같이 달려가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함께 나누고 그와 가족을 자상하게 위로해 주었다. 처음에는 아픈 교우들을 찾아다니던 것이 점차 병든 외인들까지 확대되었다. 1950년대 한국의 농어촌 지역에서 아무리 아파도 병원을 찾아가거나 약국에서 약을 사 먹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한약방에서 한약을 몇 첩 지어 먹거나 민간 처방으로 산이나 들에 있는 약초를 구해 달여 먹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자연적으로 그냥 치유될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가난한 이들 위해 모든 것 내어줘같은 동네에 거주하던 친목회원이자 친구였던 김수복(요한)씨가 “김금룡 회장은 가난한 교우들이 아프면 손수 약을 구해 오거나 약값을 마련해 도와주었다. 자신은 굶주리고 헐벗으면서도 가진 것을 마지막까지 나눈 그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회고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만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기 주머니를 털었다.환자 방문을 하다 보면 상가 봉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자기가 방문하던 아픈 이가 주님께 돌아가면 자연스럽게 상가 봉사로 이어가고, 갑자기 돌아간 이와 가족을 위한 봉사 활동도 정성을 다한다. 공소 회장인 김금룡은 매일이다시피 압해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보고 있었으므로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 가운데에도 누가 얼마나 아픈지 늘 파악하고 있었다.“김금룡씨는 천성적으로 남을 돕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신자건 비신자건 사람이 선종하면 그 집에 가장 먼저 달려가 연도를 바치고 염과 입관 절차를 거쳐 출상까지의 일을 도맡아서 했다”라는 공소 신자 박인택(파트리치오)씨의 회고처럼 선종 소식을 들으면 즉시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 준비를 해 주었다. 신장리공소는 목포와 연결되는 선착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섬의 반대편 끝에 있는 마을은 40여 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먼 곳이라도 선종 소식을 들으면 즉시 상가를 찾아갔다.전문 장의사보다 야무진 손길로그가 입관하는 전 과정은 밥벌이로 이 일을 하는 전문가 장의사보다 훨씬 군더더기가 없으면서도 야무졌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먼저 시신 앞에 겸손하게 꿇어앉아 성호를 긋고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그러고 나서 시신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정성을 다해 씻기 시작하여 관에 모시기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끔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곧바로 처음 시작할 때처럼 경건하게 기도를 바치는 그의 모습에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의 이런 자세가 짧은 시간 안에 압해도 전역에 알려져 환자 방문과 함께 상가를 돌보는 일이 주업처럼 돼 버렸다. 비신자들까지도 자기 가족이 돌아가면 그가 염습과 입관을 맡아 주기를 바랐고, 그는 언제나 이런 섬사람들의 바람을 기꺼이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명절이거나 집안에 혼인이나 제사, 이사 등의 날짜가 정해지면 외인들은 부정 타는 것을 두려워하여 친척 상가도 찾아가지 않았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그런 금기 사항이 없었다. 김금룡은 외인들의 초상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상가로 달려가서 먼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정성을 다해 도와주고 신자들에게도 알려 금기 사항 때문에 외인들이 찾아오지 않는 고인과 유족을 더욱 정성껏 돌보게 하였다.그가 압해도에 들어온 1950년대는 물론이고 떠난 1970년대까지도 섬사람 가운데 외인이 죽으면 초하루와 보름마다 제사를 지냈다. 비록 대세를 받았더라도 대개 외인인 유족들은 위령 기도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김금룡은 상주의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장사를 다 지낸 후라도 자식이 효도를 다 한 줄로 생각지 말고, 마땅히 평생에 죽은 부모를 생각하며 정성으로 기도하여 항상 그 영혼 돕기를 힘쓸지니…”(「텬쥬셩교례규」, 상장규구)라는 교회 가르침을 따라 유족들이 돌아간 이를 위해 위령 기도를 바쳐야 하는 이유를 최대한 쉽게 설명하여 납득시켰다. 그러고 나서 가족끼리 위령 기도를 바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찾아가 기도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정성을 다해 함께 바쳤다.이처럼 그는 늘 섬사람들의 궂은일에 매달리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신장리에 살던 신자 박인택(파트리치오)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김금룡 회장님은 빈 몸으로 오셔서 공소를 키우기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했다. 회장님이 신장리공소에 머무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이웃 사람과 싸운 일이 없었으며 오로지 그리스도의 신앙을 전하는 일에 몰두했고, 외인들에게는 더욱 친절하셨다.” 그러다 보니 압해도에서 면장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섬사람 가운데 교우가 아닌 외인들도 ‘가이오’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누구나 서슴없이 “가이오 회장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가 공소 회장으로서 선교 활동에 매진해서 얻은 아름다운 열매는 이렇게 말보다 몸으로 진실하게 실천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끼니도 거르며 이웃 사랑 실천그러나 그가 공소 회장을 은퇴하기 직전 아내 박기남(칸디다)이 찾아왔을 때 남편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여건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는 공소 신자들의 교무금에서 쌀이 조금만 남아도 모두 관할 본당으로 보냈다. 오늘날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던 당시 섬의 취사시설에서 환갑에 가까운 나이 든 남자 혼자서 밥을 지어 먹고 세탁까지 손수 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 두 끼를 기본으로 먹었지만 일에 몰두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그의 습성 때문에 늘 끼니 때를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의 위를 비롯한 장기 곳곳이 심각하게 탈이 나고 만 것이었다.남이 아플 때는 자기 주머니를 털어 병원으로 데려가고 약을 사 먹였으면서도 정작 자기 몸을 위해서는 곰처럼 버티고 지내는 남편이 참으로 한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돈벌이를 못 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먹을 약도 사 먹을 수 없을 만큼 궁색한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픈 몸을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하면서도 그는 새벽과 깊은 밤이 되면 희미한 호롱불을 켜 놓고 성경과 신앙 서적을 하루도 빼지 않고 읽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읽어 본 책갈피마다 그의 손때가 새까맣게 절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 몸을 위해 약 한 첩도 제대로 사 먹지 못하는 남편을 쳐다보면 속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공소 회장으로서, 아니 그 이전에 신앙인으로서 오직 주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기 한 몸 희생하여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그의 대단한 신앙심과 인내심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1974년 4월 20일에 김금룡은 17년 6개월 동안 자기의 모든 정열과 사랑을 쏟았던 압해도 신장리공소 회장직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위의 사람은 1957년 압해면 공소 회장으로 재임 이래 현재까지 이 지방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온바, 교회 설립과 전교에 헌신한 공로가 크므로 이를 감사하고 그 공적을 높이 치하합니다”라는 감사패를 수여하며 그의 지난 삶을 기렸다.그는 이날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깊은 정이 속속히 들었던 섬 주민들의 아쉬운 작별 인사를 받으며 압해도를 떠나 목포 용당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들고 온 짐은 목포를 떠나 압해도로 들어올 때처럼 낡은 이불과 옷 몇 벌이 들어 있는 보따리 하나뿐이었다. 다만 압해도로 들어올 때 없었던 것이 생겼다면 그동안 공소 회장을 하면서 읽었던 책들과 바쁜 틈을 타서 정성껏 기록했던 전교일지 등이 담긴 낡은 궤짝일 것이다. <계속> 문채현2016.11.30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5) 김덕수(바오로) 사물놀이 명인](//cpbc.co.kr/CMS/newspaper/2017/02/rc/670079_1.0_titleImage_1.jpg)
[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5) 김덕수(바오로) 사물놀이 명인바티칸에서 사물놀이 한 번 신명나게 펼쳐봤으면! 전통연희상설 공연장에서 장구를 메고 선 김덕수씨. 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극장 무대에서 인터뷰했다. 3대째 남사당패의 피를 물려받은 ‘오리지널 광대’다. 현재 예순다섯인데 60년 동안 사물놀이를 한 전통 예인이자 명인이다. 김덕수(바오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다. 다섯 살 때부터 해온 자기 일을 사랑하고 배운 것을 후학들에게 교육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남사당패를 따라 전국을 누비며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졌고 사물놀이로 전 세계에 전통 한류의 초석을 닦았다. 김덕수의 사물놀이를 접하면 돈과 명예가 거추장스럽고 인종과 종교, 배고픔과 설움을 모두 잊게 한다. 어깨춤을 들썩이며 한형제가 되고 평등한 인간이 된다. 그 현장에서 하느님을 느낀다는 김덕수 명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저마다의 소리가 허공을 향하고 있다. 사물놀이의 타악기도 각각의 소리는 둔탁하다. 그러나 꽹과리와 징 그리고 북이 장단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 장구가 합세해 음악으로 승화된다. 사물놀이처럼 우리 사회가 화합과 통합의 아름다운 화음을 낼 그 날을 그려본다. 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 ▶ 인터뷰하는 이곳은 대한민국 최초의 전통예술 공연장이라고 들었습니다.그렇다고 볼 수 있죠. 가장 한국적인 공연은 사실 마당문화잖아요. 그런데 마당이 사라져버린 거죠.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실내 공간화했습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잊으면 안 되고 지켜야 할 삶 속의 기본 중에 하나가 전통공연 예술 분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나름대로 어떻게 하든지 우리끼리 꾸려가 보자고 해서 사물놀이 전통연희상설공연장을 만들게 됐고요. 벌써 10년이 됐네요.▶ 김덕수 교수님이 가톨릭 신자라고 하면 많은 분이 놀라시는데요. 어떻게 입교하시게 됐는지요. 사실 뱃속에서부터 입교한 것 같아요. 어머님은 평생 머리 안 자르고 쪽지시고 매달 초삼일이 되면 달 밑에서 정화수 떠놓고 비셨는데 어느 날 머리를 자르시고 천주교에 입교하셨어요. 세례명은 마리아십니다. 그래서 저도 매일같이 하느님께 기원하는 마음으로 연주해 왔는데 육십이 넘은 어느 날 놀라움이 저에게 생긴 겁니다. 사실 음악이나 예술은 어느 나라에 가든 복을 빌어 주는 것입니다. 평화롭게 서로 화합하면서 살자는 것이거든요. 우리 소리와 춤, 울림도 모두 그것인데요. 브라질 상파울루 한인성당 공연 때 수녀님이 세례명이 뭐냐고 물어보시길래 세례도 안 받았는데 얼결에 ‘베드로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일로 항상 죄스러웠죠. 그런데 이번에 교리공부를 하면서 세례명을 바오로로 결정했습니다.▶ 가톨릭에 입교한 직접적 계기가 있었나요.직접적인 계기는 역시 아내입니다. 아내와 함께 새벽 미사를 나가기 시작하면서 교리공부를 하게 됐는데요. 인간으로서 여러 가지 부족함을 느낄 때 아내가 저를 잘 인도한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가정의 큰 화목과 우리 가족이 함께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컸던 것 같고요. 가톨릭으로 인도한 아내에게 늘 감사하죠.▶ 부인은 유명한 승무전수자이신데요. 예술인의 길을 함께 가시고 신앙도 같은데 어떤 점이 좋으세요.아내는 재일교포 2세인데요. 미사 할 때나 기도할 때 아내와 똑같이 축복을 느끼는 것이 행복입니다. 의견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은 함께 성당을 나가면서 시작된 것 같은데요. 똑같은 장구와 북을 치고 승무를 추더라도 그 의미가 진실하게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저희가 함께 가고 있다는 그 자체가 저는 큰 영광이라고도 생각하고요. 그런 일은 전에는 없었던 일들입니다.▶ 바오로를 세례명으로 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이방인의 사도로서 굉장히 탄압을 많이 받으셨던 분이더라고요. 로마시민으로요.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모든 영광이 장구와 꽹과리를 친 우리 민족의 신명인데요. 이 신명을 통해 예수님을 전하자 하는 그런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고 세례명을 바오로로 정했습니다.▶ 사물놀이로 전교 여행을 하실 계획은 없으신가요.오래전부터 간직한 꿈인데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꼭 하고 싶습니다. 베드로 대성당의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과 우리의 울림과 신명이 하나가 되고 모든 종교가 화합하는 그런 자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 평상시 마음에 담고 있는 성경 구절이 있으신가요.“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마르 14,26)는 구절을 볼 때마다 아, 이게 나의 역할이고 나의 모습이구나 하고 느끼고요. “춤을 추며 그의 이름 찬양하여라. 북치고 수금 타며 노래하여라”(시편 149)는 말씀을 읽고 기쁨과 희망, 평화를 함께 나누는 현장에서 (사물놀이가) 하느님께 제게 주신 큰 역할 중 하나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좀 합니다.▶ 사물놀이를 창시하신 분인데요. 사물놀이는 무엇인가요.1978년 2월에 사물놀이라는 용어로 처음 연주를 했으니까, 한 40년 정도 됐는데요. 사물은 꽹과리, 징, 장구, 북 네 가지 악기라는 뜻인데요. 마을 단위로 일할 때도 치고 초상이 났을 때도 치고, 잔치 때도 쳤습니다. 전쟁이 나면 이게 군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생활 속에 없으면 안 되는 가장 필수의 기본 악기였죠. 그런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한 경제논리가 앞서면서 가장 중요한 우리들의 신명, 우리의 맛과 멋이 생활 속에서 떠나 버린 겁니다. 우리 세대가 크게 반성해야 할 일인데요. 수천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이 지켜왔고 우리 조상, 우리 아버님들이 물려주신 것인데 현장에서 완전히 사라졌어요. 그래서 우리 세대가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사물놀이입니다.▶ 사물놀이와 남사당패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겁니까.남사당패는 전문 예인 집단으로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입니다. 저는 남사당의 후예인데요. 남사당패는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전국을 유랑하면서 직업으로 삼았던 분들입니다. 악기도 연주하고, 서커스도 하고, 춤도 추고 인형극도 하고요. 가장 원초적인 것부터 공연했던 프로 집단입니다. 남사당패였던 아버님은 대를 이으시려고 아들 낳기만을 기다렸죠.▶ 다섯 살 때 상쇠의 목말을 타고 춤추고 재주 부리는 무동(舞童)으로 데뷔하셨는데 무섭지 않으셨어요.가장 꼭대기에 올라가는 아이를 ‘새미’라고 하는데요. 아기 때는 그게 마냥 좋았습니다. 높은 데에서 어른들의 환호와 탄성을 내려다보는 게 좋았고요.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인데 먹을 것도 풍성히 챙겨주고 최고 대우를 받았죠. 제가 어디 아프면 안 되니까 제일 좋은 것은 저부터 챙겨주시고요.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최근에 아주 귀한 자료가 공개됐다고 들었습니다.제가 어렸을 때 모습을 보고 싶었고요, 더 중요다한 것은 우리 아버님 세대의 공연이 예술적, 음악적, 역사적, 학술적으로 의미가 매우 큰데 그동안 영상 자료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저희 제자가 전주에 있는 ‘국립무형유산원이라는 곳에서 찾아냈습니다. 제가 7살 때인 1959년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꽹과리 치며 공연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아버님도 계시고요. 16밀리 흑백 필름인데요.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저에게는 정말 국보급 영상 자료입니다.▶ 1980년대에 사물놀이 하면 데모 앞잡이로 오인되지 않으셨나요?70년대 중반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거셌고 그 당시 아픔을 풀어주는 데 사실 꽹과리, 징, 장구, 북만한 게 없었죠. 폭발적이었으니까요. 탈춤판이 벌어지든 시위 현장이 됐든 항상 사물놀이가 선두에 섰죠. 기쁠 때는 기쁨의 음악이고 화가 나면 민중의 힘이 되고 잔치 때는 잔치 음악이 되는 게 바로 사물놀이입니다.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표현한 신명이고 울림입니다. 70년대 말에 사물놀이가 탄생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냥 역할자로서 행위를 한 것뿐이죠. ▶ 요즘 문화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로 시끄러운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자기 마음에 들면 예술이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블랙리스트 만들어서 탄압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과거에 있었다고 해도 21세기를 사는 글로벌화 된 시대에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얘기죠. 헌법에도 맞지 않고요. 예술가는 언제나 진보적인 사고를 하고 시대 정신에 근거해 창조 예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리스트를 만들어 일종의 검열을 하겠다는 것은 충격적이죠.▶ 4개의 전통 타악기가 내는 둔탁한 소리가 어떻게 음악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요?제가 50년 이상을 외국 다니면서 각국의 좋은 음악과 기 싸움도 해보고 조화로운 앙상블도 해봤는데요. 우리 소리는 정말 신비롭습니다. 우리 전통 가락이 수백 가지의 리듬 꼴이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 해외 공연을 많이 하셨는데 어떤 공연이 가장 인상에 남으세요.우리 꽹과리, 징, 장구, 북이 공식적으로 세계 음악계에 등단한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2년 미국 텍사스 댈러스에서 월드 세계 타악기인 대회였는데요. 3500명 이상의 세계 최고 연주자들이 모인 곳에서 우리 사물이 세계 음악계에 울림을 준 그 날은 아마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판문점을 통해서 평양에 공연하러 갔는데 어디를 가도 꽹과리, 징, 장구, 북이 있는 거예요. 북한에도 똑같은 울림과 똑같은 신명이 있었습니다. 북한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도 하고 행진도 했는데요. 남북이 평화통일을 구현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저는 꽹과리, 징, 장구, 북만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 사물놀이는 이제 세계인의 음악 장르가 됐죠.그럼요. 오래됐어요. 우리가 서양 선교사님들에게 서양 문화와 서양의 악기를 배운게 한 150년도 안 됐어요. 이제는 거꾸로 정말 우리 것이 좋다면 우리도 전 세계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 학계나 세계의 많은 지도자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의 마지막 꿈이자 소명이라고 하면 공식적인 학교 음악교실에 이 악기를 가져다 놓고 교육하는 것입니다.▶ 전통예술의 창조적 계승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신가요.전통을 계승할 때 절대적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대의 변화상도 담아야 하고 창조적으로 변화해 가면서 우리의 삶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본질, 기운, 맛까지 변해서는 안 됩니다. 다양한 재료를 넣어서 된장찌개를 끊여도 된장 맛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죠.▶ 오리지널 광대이신데 예술인을 꿈꾸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주시죠?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도피성이 강하지 않나 싶습니다. 부모님들도 문제가 있어요. 왜 세계 최고만 꿈꾸느냐는 것이죠. 카네기홀이나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것만 예술이고 연주인가요. 시장에서도 할 수 있고요. 자부심 느끼고 예술행위를 했으면 합니다.▶ 새내기 신자로서 요즘 어떤 기도를 바치시나요.아침에 일어나면 늘 그레고리오 성가를 듣습니다. 세례받기 전부터 그랬는데요. 아침에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으면 저의 정신과 마음에 평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가를 들으면서 교만하지 않고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죠. cpbc2017.02.01
![[교황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30. 접근법과 행동 방식](//cpbc.co.kr/CMS/newspaper/2016/02/rc/619733_1.0_titleImage_1.jpg)
[교황생태회칙 해설] 30.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⑨ 과학(학문)과 대화하는 종교들 “오늘날의 생태적 재앙이 갖는 엄중함은 우리 모두에게 공동선을 향해 길을 나서라고, 언제나 ‘실재들은 관념들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인내와 자제와 관대함을 요구하는 대화의 행로로 나서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201항).정치와 경제가 사람과 사회와 자연 곧 생태를 보호하고 개선하는 그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오히려 오늘날 생태 재앙을 일으킨 과학기술 만능과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에 종속될 때, 이를 바로 잡을 힘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교종은 ‘생태적 전환’(216항 이하)을 위한 “과감한 문화적 혁명의 길”에서 우리가 “속도를 줄이고 다른 방식으로 실재를 볼 것”(114항)을 촉구한다. “오늘날 생태 재앙이 근대성의 윤리ㆍ문화ㆍ정신적 재앙을 드러낸 하나의 작은 표지에 불과한 것”(119항)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생활양식과 생산ㆍ소비 모델과 기축 권력의 철저한 변화뿐만 아니라(4항) 대중과 시민사회의 건전한 압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204항 참조).회칙은 ‘나침반을 잃어버린’ 인류(200항)를 걱정한다. 우리에게 ‘인문학의 고사’라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심지어 대학에서 철학과를 폐지한다는 소식부터 대학이 취업을 위한 직업훈련소가 되었다는 자조적인 탄식도 들린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사회가 ‘학문’조차도 철저하게 ‘돈벌이’가 될 수 있는 분야와 그렇지 못한 분야로, 정직하게는 ‘경제’ 혹은 ‘기업’에 활용 가치가 있는 분야와 그렇지 못한 분야로 나누어 버렸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사회에서는 “미학적 감수성이나 시나 혹은 사물들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파악할 이성의 능력조차도 설 자리가 거의 없게 된다. 윤리적 원리들조차…순수하게 추상적인 형태”로만 자존하여 공허해진다(199항). 우리에게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려 주는 나침반이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회칙은 ‘종교’ 혹은 인문학의 가치와 임무를 재확인한다. 특히 ‘종교’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 사상을 자극하고 마음과 정신을 확장하는 영구적인 힘”을 갖는다. 게다가 종교의 언어들은 “모든 맥락을 고려하는 윤리적 원리들”을 담을 수 있다(199항). 종교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조화롭게 살 수 있게 하고, 희생할 수 있게 하며, 다른 것들을 잘 다루게 할 수 있는 위대한 동기들”을 잊지 않게 한다(200항).그렇다고 해서 교종은 종교가 제 임무와 역할을 언제나 올바르게 실천한 것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각 종교가 그 원천에 충실할 것을 권고한다. “만일 [종교의] 원리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자연을 학대한 것을 정당화하고, 창조에 폭압을 행사하고, 전쟁과 불의와 폭력을 자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면, 우리 믿는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적] 지혜의 보고들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각 종교들이 갖는 원천들에로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원천 곧 지혜의 보고에 충실하지 않은 믿는 이들의 삶은 곧 “자기들의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방식의 삶, “자기들의 행동으로 그 신앙을 부정한” 삶, “하느님의 은총에 개방되어” 있지 않은 삶,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삶이기도 하다(200항).‘원천으로 돌아가기’는 ‘현대 세계에의 적응과 쇄신’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한 정신 가운데 하나다. 마땅히 교회는 초대 교회 신앙 공동체의 삶(성경)을 존재와 생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교종은 한국 교회의 현실 진단과 미래의 방향 찾기에서 언제나 그 기준은 사도 시대의 이상적 교회 모습을 드러낸 우리의 초대 교회의 삶이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5장을 마무리하면서 회칙은 종교 사이의 대화, 학문 사이의 대화, 생태 운동 사이의 대화를 호소한다. ‘대화’는 ‘교회의 끊임없는 정화와 쇄신’ ‘현대 세계의 복음화 사명’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교종은 “자연 보호, 사회적 약자의 방어, 존경과 형제애의 관계망 구축”을 위한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촉구한다. 다양한 학문 사이의 대화도 소극적으로는 지식의 고립화와 절대화를 막기 위해서, 적극적으로는 환경 문제를 효과적으로 대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빈번하게 이념적 충돌이 벌어지는 생태 운동들 사이에서도 개방적이며 존경심을 갖는 대화가 필요하다(201항). 우리의 경우를 성찰한다. 종교는 우리 사회의 ‘나침반’으로서의 임무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자기만족과 자기 몰두의 내재주의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교회는 ‘원천(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끊임없이 쇄신하며 복음화와 대화의 길로 나서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학문은 사물들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파악할 이성의 능력을 발휘하는가? 아니면 거꾸로 고립화와 지식의 절대화를 꾀하는 가운데 스스로 ‘경제’에 종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백영민2016.02.17
![[여름 휴가철 특집] 일상엔 쉼표를 신앙엔 느낌표를!](//cpbc.co.kr/CMS/newspaper/2016/07/rc/643738_1.0_titleImage_1.jpg)
[여름 휴가철 특집] 일상엔 쉼표를 신앙엔 느낌표를!올 여름 휴가는 피정의 집으로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여름 휴가다. 어디든 달려가고 싶다. 왜 그렇게 길은 막히고 사람은 또 그리 많은지…, 스트레스 풀려고 나섰다가 스트레스 안고 돌아오기에 십상인 여름 휴가다. 올해 여름 휴가는 한적한 피정의 집으로 떠날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비우고 싶은 마음과 성경 한 권이면 족하다. 하느님을 채우고 돌아오는 풍성한 시간이 될 것이다. 찾아갈 만한 피정의 집을 지역별로 나눠 소개한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 수도권△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경기 남양주시 불암산로 105-75)= 수도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전례에 참여하고 은거자 생활을 경험해 볼 수 있다. 영적 상담과 고해성사도 가능하다. 다만 취사는 피정자들이 직접 해야 한다. 031-527-8115 △그리스도 왕의 집(서울 성북동 156-36 홍익고 1길 8-2)= 도심 속 아늑한 정원과 가족적 분위기가 돋보이는 곳으로, 개인ㆍ가족 피정과 영성수련, 수도자 면담이 가능하다. 02-741-0678△마리아의 종 피정의 집(경기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 10-5)= 취사가 가능한 콘도형 시설로, 개인 피정을 할 경우 수도자와 영적 대화, 상담할 수 있다. 031-227-8221△몬띠 피정의 집(경기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23-4)= 몬띠 가족상담소와 연계한 자아 발견, 대화 등 심리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장애인 생활시설 봉사와 묵상, 대화를 곁들인 가족 피정도 가능하다. 031-207-4982▨ 강원권△풍수원성당 피정의 집(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 유현1길 30)= 강원도 모든 성당의 모태인 풍수원성당은 ‘러브레터’ 등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대명 비발디파크에서 30분 거리에 있으며, MT 장소로도 이용 가능하다. 033-342-0035△묵당 피정의 집(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삽교리 75-4번지)= 태기산 중턱에 자연경관을 훼손하지 않고 지은 숙소가 대자연의 숨결을 느끼게 하며, 주변에 민가가 없어 고요한 침묵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기 좋다. 011-9260-2927△까리따스 피정의 집(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버리깨길 42)= 설악산과 동해안이 가까워 창밖으로 해돋이 풍경을 볼 수 있으며, 콘도형 숙소가 준비돼 있다. 033-638-4004▨ 충청권△두메꽃 피정의 집(충북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5길 43)= 배론성지에 있는 개인 피정 숙소. 성지에 있는 최양업 신부 묘소, 신학교 터, 황사영 백서 토굴을 둘러볼 수 있다. 043-651-7523△예수 마음 피정의 집(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 공세리성지에 있는 피정집. 단체 피정과 MT, 공세리 역사관 관람, 미사 참례 모두 가능하다. 041-533-8181△대천해수욕장성당(충남 보령시 대천로 51)= 대천해수욕장에 있는 관광 사목 성당. 콘도형 숙소가 준비돼 있으며, 성당 옆 솔밭 캠프장에서도 취사와 숙박이 가능하다. 041-934-7758△프라도의 집(충남 공주시 계롱면 양화2구 608-2)= 농사짓는 프라도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휴식 공간. 041-852-3281▨ 영남권△자인 피정의 집(경북 경산시 자인면 북사동 442-3)= 가족 피정이 가능하며, 식사는 따로 제공하지 않는다. 계림숲, 청도 운문사 등 명소가 가깝다. 053-857-2037△성심원 교육관(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 91번지)= 개인ㆍ가족ㆍ소규모 숙박 가능하며, 작은 형제회가 운영하는 한센인 생활시설 성심원에서 자원봉사도 할 수 있다. 055-973-3788△영성의 집(경상남도 양산시 어실로 695)=콘도형 가족 피정 숙소를 갖췄고, 성모 동산과 십자가의 길 등 야외 기도 장소가 다채롭다. 055-382-9465▨ 호남권△나바위성지 피정의 집(전북 익산시 망성면 나바위1길 146)= 주방시설이 딸린 개인 피정의 집을 운영하며, 숲정이ㆍ여산 등 인근 성지를 돌아보면 더욱 좋다. 063-861-9210△천호 피정의 집(전북 완주군 비봉면 천호성지길 124)= 개인 피정 예약시 성직자ㆍ수도자 면담 일정을 협의할 수 있다. 063-262-5454△성모승천 봉헌자 수녀회 피정의 집(광주시 서구 금호심곡길 13)= 소나무 숲 속에서 묵상과 기도를 할 수 있는 도심 속 휴식 공간으로, 가족 MBTI 피정, 청소년 상담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062-371-0172△소록도성당(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선창길 55)= 한센인 시설 방문과 소록도 관광을 함께할 수 있다. 061-844-0528△황토방 피정의 집(전남 화순군 춘양면 학포로 1385)= 성 베네딕도회 화순 수도원 부설 피정집으로, 소그룹(12명 이하) 숙박이 가능하다. 수도원 전례와 노동 체험, 고해성사 및 면담을 할 수 있다.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 대신 취사 시설 이용이 가능하다. 061-373-3001▨ 제주권△면형의 집(제주도 서귀포시 지장샘로 19)= 한국 순교복자 성직수도회가 운영하는 곳으로, 수도회 전례 참여, 고해성사와 상담도 가능하다. 064-762-6009△성 이시돌 젊음의 집(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금악동 2길 25)= 청소년 캠프, 수학여행 숙소로도 애용된다. 제주 성 이시돌 목장을 끼고 있어 자연 경관이 수려하며, 오름과 올레길 순례를 병행해도 좋다. 064-796-7711이 밖에도 주교회의 누리집(http://www.cbck.or.kr)에 들어가면 초기 화면에서 휴가철인 7∼8월에 이용할 수 있는 피정의 집 프로그램들을 소개했다. 평화신문2016.07.06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1) 루돌프 슈나켄부르크 (상)](//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1782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1) 루돌프 슈나켄부르크 (상)개신교 학자 주류 속에서 빛난 가톨릭 성경학자 가톨릭·개신교 주석서 시리즈 중 슈나켄부르크가 쓴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주석서. 20세기 성서학은 20세기 성서학자를 이야기하자면 루돌프 슈나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1914~2002)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시간적으로 20세기 초반에 태어난 인물이기도 하지만, 성경학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에서도 역시 그렇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은 이들에겐 루돌프 슈나켄부르크는 조금 낯선 이름일지도 모른다. 슈나켄부르크를 이야기하자면 당시 분위기를 아는 것이 조금 도움이 될 듯하다. 인문학이 발달하면서 18세기부터 성경 연구에 비평적인 방법론들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역사비평 방법론’이 성경 연구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자리 잡게 된다. 역사비평 방법론은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연구하는 것을 일컫는다. 물론 지금 모든 이들이 이 방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적인 성경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 방법론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사실 이러한 방법론을 처음 주창하고 발전시켰던 것은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들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오직 성경을 통해 하느님 계시와 진리에 다가가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개신교 신학자들이 성경 연구를 주도했던 시기에, 사제로서 그리고 성서학자로서 가톨릭 신학을 성경학계에 알리고 그것을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슈나켄부르크다. 그에 대한 관심은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저서인 「나자렛 예수」를 통해 더욱 부각됐다. 교황은 저서에서 슈나켄부르크에 대해 “20세기 후반 독일어권의 성경학계에서 가장 출중한 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슈나켄부르크 발자취 - 혼란한 시기의 삶루돌프 슈나켄부르크는 1914년 1월 5일 실레시아 지방 카토비츠에서 태어났다. 실레시아는 지금은 폴란드에 속하지만 당시 이 지역의 일부는 독일 영토였다. 산악 기술자(산에 마을을 건설하거나 필요한 건물 혹은 장치를 설치하는)였던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실레시아의 동쪽 산악 지역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1914년 전쟁에서 사망한다. 이후 어머니와 형과 함께 리그니츠(Liegnitz)라는 도시로 옮겨 살았는데 경제적인 면에서 아주 넉넉한 생활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슈나켄부르크는 최고 성적으로 고등학교(Gymnasium)에 입학했고 두 반이나 월반해 졸업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학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졸업 이후 슈나켄부르크는 브레슬라우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꽤 많은 학생이 이 대학의 신학과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는데, 당시 이 학교에는 좋은 교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신약을 가르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이어(Friedrich Wilhelm Maier, 1883~1957) 교수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는 언어학적 방법론과 역사비평 방법론을 통해 성경을 해석했고 덧붙여 신학적인 정리를 해줬다고 함께 공부했던 이들은 전한다. 슈나켄부르크 역시 마이어 교수에게 논문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1937년 ‘요한복음 안에서의 믿음’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슈나켄부르크는 이미 요한복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논문은 이후 요한복음 주석서를 펴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박사 과정을 마치던 해에 브레슬라우에서 사제로 수품한 슈나켄부르크는 1946년까지 본당 사제로 일했다. 그는 본당에서 일할 때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가졌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어를 사용하던 브레슬라우대학은 폴란드로 넘어가고 교수들은 독일로 추방되었다. 이때에 슈나켄부르크 역시 독일 뮌헨으로 추방당하고 1947년 마이어 교수에게 교수자격논문(Habilitation)을 마쳤다. 그의 논문 제목은 ‘바오로의 성사적 구원 사건’(Sakramentale Heilsgeschehen bei der Taufe nach dem Apostel Paulus)으로 1950년 「사도 바오로의 세례에서 보이는 구원 사건」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본격적으로 학자의 길을 시작한 슈나켄부르크는 1952년 딜링엔에 있는 철학-신학대학 부교수로 임명됐고, 3년 뒤인 1955년 밤베르그의 철학-신학대학의 교수로 임명됐다. 밤베르그의 철학-신학대학이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바이에른 주에 새로 생겨나는 대학들의 근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1957년 그는 뷔르츠부르그대학 교수로 임명됐고 1982년 은퇴할 때까지 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했다. 이곳을 근거지로 그의 동료들과 제자들은 ‘뷔르츠부르그 학파’(Wrzburg-Schule)를 형성했다. 이때가 가톨릭 신학 안에서 성경 해석과 신학이 꽃피던 시기였다. 당시 수많은 학생이 그를 찾아와 강의를 들었고, 많은 이들이 그에게 박사 논문을 썼다는 것에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신학의 방향과 성경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켰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뷔르츠부르그대학에 많은 애정과 열정을 보였다. 그가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뮌스터와 뮌헨대학에서 제의한 교수직을 두 번이나 거절했다는 일화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은퇴 이후의 삶을 통해서는 학자로서의 애정과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은퇴 이후 슈나켄부르크는 여전히 뷔르츠부르그에 머물면서 연구와 집필 활동을 계속했으며, 2002년 8월 28일 89세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뷔르츠부르그 시내 묘지에 묻혔다. 슈나켄부르크의 활동슈나켄부르크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독일 「공동번역 성경」(Einheitsbersetzung)의 번역 작업이다. 1962년에 시작해 1980년에 완성된 이 성경은 가톨릭 성서학자들과 개신교 학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번역된 것으로 지금도 독일어권 가톨릭 전례 안에서 공식적인 성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말 자체로 이미 성경에 대한 주석과 해석을 통해 번역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신학적인 의미가 가장 잘 담긴 성경의 번역은 모든 성서학자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슈나켄부르크 역시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또 그 열매를 맺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중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성경 번역 작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슈나켄부르크의 발자취 중 가장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가톨릭와 개신교 사이의 공동 작업이다. 그는 신약성경 연구를 위해 개신교 학자들과 함께 학문적인 바탕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결실로 이뤄진 것이 독일어권에서 출판됐고, 지금까지도 가장 자세하고 풍부한 내용이 담긴 주석서로 인정받는 「가톨릭-개신교 주석서」(EKK: Evangelisch-Katholischer Kommentar)다. 이러한 작업을 가장 먼저 계획한 것은 스위스의 에두아르트 슈바이처(Eduard Schweizer)였다. 그는 슈나켄부르크에게 자신의 계획을 제안했고 두 학자의 주도로 이 주석서 시리즈가 출판되기 시작했다. 슈나켄부르크는 가장 먼저 이 시리즈에 에페소서에 대한 주석서를 썼고, 이 주석서는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서에 대한 주요한 참고 서적으로 꼽힌다. 그리스도교 일치(가톨릭과 개신교)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업적은 ‘신약성경 연구학회’(Studiorum Novi Testamenti Societas) 활동이다. 그는 1966~67년에 가톨릭에서는 두 번째로 이 학회 회장을 맡았으며, 당시 개신교의 학자들이 주를 이루던 상황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성경학계를 소개하고, 업적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허규 신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1999년 사제수품(서울대교구)△2012년 독일 뮌헨대학 박사(성서신학) 평화신문2014.10.01
교회 단체 한눈에… 서울 평신도단체 박람회 개최서울 평협 산하 30개 단체 참여, 14~15일 서울 명동성당 일대 르트루바이, 국제성경사도직후원회…언젠가 들어본 건 같은데,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인지 물으면 고개를 갸웃하는 신자들이 꽤 있을 것이다. 르트루바이는 이혼과 별거 등으로 위기에 빠진 부부들이 혼인생활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이고 국제성경사도직후원회는 가난한 나라 신자들에게 성경을 보급하는 단체다.교회 안의 다양한 단체들을 신자들에게 알리는 시간이 마련된다. 서울대교구 사목국(국장 조성풍 신부)은 14~15일 서울 명동성당 일대에서 ‘2015 서울대교구 평신도단체 박람회’를 처음으로 개최한다. 서울 평협(회장 권길중)이 주관하는 이번 박람회에는 산하 30개 단체가 참여한다.서울 평협 산하 단체는 61개에 이르지만 그동안 단체 회원들이 한데 모이는 행사는 드물었다. 이번 박람회는 사도직 단체들에게는 서로의 활동을 이해하고 협력할 기회가, 또 신자들과 예비 신자들에게는 교회 안의 다양한 단체 활동을 알리는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박람회는 14일 오전 10시 명동성당 1898 광장에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주례하는 미사로 시작된다. 단체들은 가톨릭회관 마당과 명동성당 마당에서 부스를 운영, 홍보 영상을 상영하며 활동을 알릴 예정이다. 활동을 체험할 기회도 있다. 가톨릭바리스타협회는 커피를 내리는 과정을 보여주고, 신자들이 맛볼 수 있는 시간도 마련한다. 서울가톨릭시각장애인선교회는 신자들을 대상으로 안마 시술 행사를 하고, 가톨릭마라톤동호회는 유니폼을 입고 명동 일대를 달릴 예정이다.1898 광장에 있는 무대에서는 이틀 내내 공연이 펼쳐진다. 시각장애인선교회 ‘에파타 합창단’, 바리스타 협회 ‘오카리나 앙상블’, 지속적인 성체 조배회 ‘한국 무용 공연 팀’, 트리니타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네오까떼꾸메나도의 길 중창단, 마리아사업회 ‘젠 성가 중창단’ 등이 출연한다. 박람회는 15일 오후 6시 조성풍 신부가 주례하는 폐막 미사로 이어진다. 이번 박람회는 신자들이 낯선 단체를 알 수 있는 기회도 될 것으로 기대된다. 르트루바이를 비롯한 네오까떼꾸메나도의 길, 서울 미바회 등 비교적 생소한 단체들이 참여해 활동을 홍보할 계획이다. 교구 사목국장 조성풍 신부는 “많은 회원들이 박람회에 참여해서 단체 회원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다른 단체와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길을 터주길 바란다”면서 “신자분들을 비롯해 본당 신부님, 단체 담당 신부님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인터뷰】서울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권길중 회장 -“단체 박람회는 단체들이 어떤 특은을 갖고 어떤 봉사를 하는지를 알리는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각 단체가 신자들에게 단체를 상세히 알리고, 또 단체들끼리 활발하게 교류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10월 30일 서울 명동 서울 평협 사무실에서 만난 권길중 회장은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면서 단체 박람회는 교회가 가진 풍요로움을 널리 알리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산하 단체들은 매년 1월 총회가 열리는 날 교구장에게 새해 인사를 하고,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발표하는 시간을 가진다. 올해 발표 후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서울 평협 권길중(바오로) 회장에게 “많은 신자와 사제들이 교회 안에 이렇게 훌륭한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서 “모든 단체가 활동을 발표하는 자리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전했다. 권 회장은 몇몇 단체 회원들과 함께 머리를 맞댔고, ‘단체 박람회’를 기획했다. 마침내 14~15일, 신자들에게 그 결실을 선보인다. “교회 안에 훌륭한 단체가 참 많은데 그런 좋은 단체들을 몰라서 가입해 활동하지 못하는 모르는 신자가 꽤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이름만 알고 무슨 활동을 하는지는 모르는 단체가 있었으니까요. 이번 박람회가 신자들이 교구ㆍ본당의 여러 단체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그는 “단체 활동을 하면 신자들끼리 친교를 나눌 수 있고, 영성도 키울 수 있고, 봉사도 할 수 있다”면서 “신앙이 풍요로워지고 공동체 의식도 생길 것”이라고 단체 활동의 장점을 열거했다.“잔치를 열었는데 손님이 없으면 안 되겠죠? 많은 신자들이 박람회를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회원들이 정성을 다해 많은 것을 준비해놓았습니다.” 백영민2015.11.04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9)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말라 3,23)](//cpbc.co.kr/CMS/newspaper/2015/12/rc/608029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9)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말라 3,23)심판의 날을 두려움 없이 맞으려면 마지막 예언서, 말라키서가 남았습니다. 구약의 예언들은 늦은 시기로 갈수록 종말론적 색채가 강해집니다. 그 마지막인 말라키서는,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3,19)고 예고하며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고 우리를 일깨웁니다.‘말라키’라는 이름은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어떤 예언자에게라도 적용될 수 있는 이름이겠지요. 실제로 ‘말라키’라는 이름을 가진 예언자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인물을 이렇게 부르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가상으로 ‘나의 사자’를 이 책의 저자로 내세우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말라키서에는 말라키가 언제 태어났고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 한 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본문을 보면서 시대를 짐작할 따름입니다. 이 책에 나타난 사회적, 경제적 상황, 그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고 있다는 언급 등을 근거로 이 책이 작성된 때는 성전이 재건된 때로부터 느헤미야의 개혁이 있기 이전 사이의 시기, 대략 기원전 5세기 전반으로 봅니다.이 작은 책에서는 당시에 문제가 되고 있던 주제들을 하나하나 들고 나와 논쟁을 합니다. 그 형태가 눈길을 끕니다. 매번 하느님이, 또는 예언자가 한마디 말을 하면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이 반박합니다. 그러고 나면 그 대답으로 설명이 뒤따릅니다. 이러한 논쟁이 여섯 번 펼쳐집니다.그 논쟁들 가운데 특별히 부각되는 주제가 종말의 심판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과연 의인과 악인의 행동을 보고 계시며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시는지 의심을 품습니다. “주님의 눈에는 악한 일을 하는 자마다 다 좋고 그분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좋아하신다”(2,17). 이게 웬 말입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악인들이 아닙니다. 의인들이, 착하게 살아도 복을 받기는커녕 고생만 많고 오히려 악한 사람들이 글자 그대로 잘 먹고 잘살고 있으니 하느님의 정의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보지 않으신다고,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바에야 무엇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 착하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악인들이 번영을 누리며 잘 사는 것을 보면, 하느님은 그들에게 오히려 잘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악인들의 번성이라는 문제 때문에, 의인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갚음은 과연 이루어지는가, 지혜문학에서도 크게 부각될 문제입니다.여기에 대하여 말라키서가 하는 대답이 종말의 심판입니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고 의인과 악인이 서로 다른 운명을 맞게 될 날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3,1). 사람들이 볼 때에는 선을 행하는 이들이나 악을 행하는 이들이나 아무 차이가 없이 그냥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의인과 악인을 가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와 섬기지 않는 자를 가릴”(3,18) 날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이름은 “비망록에”(3,16)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3,14)라고 말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부모가 자식을 아끼듯이 당신을 섬기는 이들을 아껴 주실 것이며, 그날에 의인과 악인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여기까지, 종말에 대한 말씀들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습니다. 악인들이 번성하는 현실 앞에서 신앙이 흔들리던 말라키 시대 사람들에게 주님의 날, 심판의 날은 무서운 날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날이라는 점입니다. 말라키서가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말하는 것은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인들에게 있을 상급을 약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괴로워한 것은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심판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과연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두려움 없이 맞을 수 있을까요? 말라키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 비법을 알려 줍니다.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고, 엘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3,22-24 참조). 다른 새로운 가르침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이스라엘이 그 길을 충실히 따라가도록 예언자들이 옆에서 일깨워 줄 것입니다. 모세오경과 예언서가 완성되어 가던 시기에, 말라키서는 그 가르침들이 주님의 날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준비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있던 율법이고 이미 있던 예언서라 하더라도, 그 가르침들이 주님의 날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지침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키서에서 새롭게 부각됩니다.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마지막 단락이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성경은 히브리 성경과 책들의 배열 순서가 달라서, 말라키서가 구약의 마지막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말라키 예언서 3장 22-24절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건너가는 문턱이 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신약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여러 차례 인용하며(마태 17,10-13; 마르 9,11-12; 루카 1,17) 이것이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면 예수님보다 앞서 엘리야가 왔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한 주장을 부인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그 말씀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알아듣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구절을 통하여 신약이 구약의 전망에 연결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약속들이 성취됨을 봅니다.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5.12.08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9) “이국땅에 살면서”(집회서 머리글)](//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2284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9) “이국땅에 살면서”(집회서 머리글)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지혜를 경외하라 사진에 보시는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 회당의 1893년 사진입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가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를 기려 그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는 기원후 1세기의 인물이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포위되었을 때에 요하난 벤 자카이는 당시에 로마군 지휘관이던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가 그가 장차 황제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그때에 사람들이 모여 율법을 공부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남겨 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다 파괴되는 마당에 그 작은 공간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모든 것이 다 무너졌을 때 민족을 지켜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았던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서 그 백성들이 언제 어느 곳에 흩어져 살게 되어도, 율법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 줄 것입니다.집회서가 작성된 배경이 이와 유사합니다. 저자인 예수 벤 시라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히브리어로 쓴 책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머리글에서 이 책의 취지를 밝혀 놓았습니다. “저는 이국땅에 살면서 배우기를 즐기고, 율법에 맞는 생활 습관을 익히고자 하는 이들을 위하여 이 책을 펴냅니다.”그래서, 집회서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 책은 작성 연대가 명확합니다. 머리글에서 밝히듯이 할아버지의 책을 손자기 번역한 것이 기원전 130년대이므로, 책이 처음 작성된 것은 기원전 180년대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에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팔레스티나 본토를 떠나 이국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한창 꽃피고 있는 다양한 문화들을 접하게 됩니다.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문화가 널리 퍼지던 때입니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의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은 어떻게 될까요?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 지혜문학의 흐름에서도 이제 전환점이 필요했습니다. 잠언의 전통적 지혜에 욥기와 코헬렛이 이의를 제기한 다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나름대로 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이미 한계에 부딪힌 것 같았습니다. 욥기와 코헬렛에서 인간의 고통과 죽음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넘어설 수 없는 장벽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이기에 그 신비가 하느님의 영역이리라고 믿었다 하더라도, 지혜를 추구하는 인간의 갈망은 잠잠해지지 않습니다. 지혜를 찾는 시도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처럼 보입니다.이때에 집회서의 저자 벤 시라는, 지혜로운 분이 한 분 계시니 하느님이시고 그분께서 인간에게 지혜를 알려 주신다고 말합니다(집회 1,1. 8-10). 인간은 도달할 수 없는 그 지혜를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그뿐 아니라 인간에게 그 지혜를 나누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신비인 지혜를, 하느님 편에서 나에게 주십니다. 그 통로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은 언제 어떻게 인간에게 당신의 지혜를 나누어 주실까요?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이 집회서 24장입니다. 이 중요한 장에서는 먼저 지혜를 찬미한 다음, 그 지혜가 바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계약의 글이고 야곱의 회중의 상속 재산으로 모세가 우리에게 제정해 준 율법이다”(집회 24,23)라고 밝힙니다. 율법에 하느님의 지혜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제는 멀리서 지혜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지혜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지혜문학이 그동안 거쳐온 길을 돌아볼 때입니다. 지혜문학의 출발점은 인간 이성이었습니다. 인간은 지혜를 찾아내고자 먼 여행을 했습니다. 갈 수 있는 곳까지 모두 가 보았습니다.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한에서는 세상의 질서를 깨달아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멀리서 찾던 지혜는 실상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집회서 머리글에서 말하듯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율법과 예언서와 그 밖의 글들 곧 구약 성경 안에 이스라엘은 다른 어떤 민족의 지혜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이성을 출발점으로 했던 지혜 추구가 이제는 다시 계시를 향하게 됩니다.벤 시라의 시대에, 다른 민족들의 문화를 보면서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조상들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 새로운 학문과 종교를 추종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찬란한 지혜를 이루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언, 욥기, 코헬렛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은 이미 그러한 시도가 어디까지 이를 수 있고 어디에서 멈추게 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이제 집회서는, 참된 지혜는 하느님께 있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인간에게는 최고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없이 인간의 지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에, 잠언 첫 장에서 말했듯이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것이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준칙이 되었던 것입니다. 벤 시라는 모든 민족 앞에서 이스라엘의 지혜를 자랑합니다. “율법과 예언서와 그 뒤를 이은 다른 글들을 통하여 위대한 가르침들이 우리에게 많이 전해졌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을 그 교훈과 지혜와 관련하여 칭송하는 것은 마땅합니다.”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후손들에게 율법을 가르침으로써 로마제국에 무너진 민족을 다시 세우려 하였듯이, 벤 시라는 하느님의 지혜가 담긴 율법을 통하여 이국땅에 사는 이스라엘 후손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하려 하였습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6.03.02

성년 맞은 ‘솔봉이’ 한마음으로 축하서울 명동본당 장애인 주일학교 ‘솔봉이’ 개교 20주년 기념 미사, 8지구 주바라기도 10주년 맞아 서울 명동본당 솔봉이 주일학교 개교 20주년 기념 미사에서 염수정 추기경이 솔봉이 주일학교 학생들 손을 잡아주고 안수해 주고 있다. 이정훈 기자 서울대교구 명동본당 장애인 주일학교인 ‘솔봉이’는 4월 24일 개교 20주년을 맞아 서울 명동대성당 문화관 꼬스트홀에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축하식을 가졌다.‘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를 주제로 열린 이날 미사에는 솔봉이 주일학교 학생 11명과 전ㆍ현직 교사, 학부모, 그리고 타본당 장애인 주일학교 학생 등 200여 명이 자리했다. 솔봉이 주일학교 학생들은 이날 보편 지향 기도를 바치고, 준비한 하모니카 공연을 선보이며 개교 20주년을 자축했다. 신당동본당 디딤돌 장애인 주일학교 학생들도 무대에 나와 준비한 시 낭송을 선물했고, 명동본당 초등부 주일학교 학생들은 귀여운 댄스를 보이며 축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염 추기경은 미사 중 학생들 한 명 한 명 손을 잡아주고 안수하며 기쁨을 나눴다. 염 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솔봉이 주일학교 학생 여러분들도 내가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면 좋겠다”며 “솔봉이를 오롯한 관심과 사랑으로 돌봐온 교사와 부모님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솔봉이’는 어리숙하지만 착하고 순수한 사람을 뜻을 가진 순우리말이다. 1996년 개교한 명동본당 솔봉이 주일학교는 학생 6명으로 시작해 현재 11명의 학생과 교사 6명이 미사와 교리 교육, 캠프와 성지순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하며 장애인 신앙 교육의 요람이 되고 있다. 솔봉이 주일학교는 올해에도 첫 영성체, 성지순례, 캠프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솔봉이 주일학교 부모회 장경희(루치아) 회장은 “오늘 솔봉이 20주년을 맞아 우리 아이들이 주인공이 된 것이 기쁘다”며 “사랑하는 솔봉이 아이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정광연(헬레나) 교감은 “솔봉이 학생들을 통해 저 또한 다양한 모습의 하느님을 만났다”며 “많은 이가 솔봉이 학생들과 친구가 되어 각자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가면 좋겠다”고 말했다.서울 8지구 주바라기 10주년 미사서울대교구 8지구 장애아부 주일학교 주바라기도 4월 24일 광장동성당에서 설립 1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축하식을 가졌다. 이날 미사에는 주일학교 학생 15명을 비롯해 교사와 학부모 20여 명이 함께 했다.2006년 10월 설립 때부터 교사이자 학부모로 함께해온 이정현(세라피나, 58)씨는 “미사와 전례력에 맞춘 교리 교육, 교재를 활용한 성경 공부를 10년간 해왔다. 비록 천천히 갈지언정 분명히 발전이 있으며 감정은 같이 자란다는 것도 발견했다”며 감회에 젖었다. 이날 미사를 주례한 이세호(광장동본당 보좌) 신부는 “매 주일 오전 9시 미사를 주바라기 미사로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본당 신자들의 도움과 배려가 없었다면 10년 동안 발달장애우들을 위한 주일 미사를 봉헌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본당 공동체와 주바라기 주일학교 교사들께 특히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현재 서울대교구에는 1995년 개교한 첫 장애인 주일학교인 명일동본당 ‘파란마음 주일학교’를 비롯해 모두 12개 본당 13개 장애인 주일학교를 운영 중이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백영민2016.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