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9. 서론과 2장 - 1](//cpbc.co.kr/CMS/newspaper/2015/08/rc/588288_1.0_titleImage_1.jpg)
[교황 생태 회칙 해설] 9. 서론과 2장 - 1과학적 패러다임 신봉에 재앙 직면한 인류, 종교 간 대화와 형제애 쌓고 위기 극복해야 1장에서 교황은 신뢰할 만한 과학적 사실들을 근거로, ‘지금 우리의 공동 가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소개한다. 이는 교황이 “지루하고 추상적”(17항)인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실재가 관념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교회 사람들에게 ‘실재주의자’가 되자고 권한다. 1장은 ‘실재’를 놓고 모든 사람이, 특히 과학자 및 전문가들이 정직하고 진실하고 공개적인 토론을 해달라는 교황의 요청이라 할 수 있다(201항 참조).교황은 인류가 직면한 사태(도전)의 급박함과 엄중함과 복잡함을(15항) “고통스럽게 자각”하여 “자신의 인격적 고통으로 변환”(19항) 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아무리 “최악의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다시 선한 것을 선택하고…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새로운 경로”(205항)를 밟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전하며 ‘공동 가정을 돌보는 일’에 관한 실효적인 대화와 토론을 긴급히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화와 토론의 자리에서 이 회칙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문화와 경험과 재능을 갖고 참여하고 협력”해서 구축해야 할 “새롭고 보편적 연대”에 기여하기를 교황은 바란다(14항). ‘창조의 복음’이라는 제목을 붙인 2장은 간단히 ‘유다-그리스도교 전통’(15, 76, 78항)에서 이해하는 ‘창조’ 혹은 ‘세상’이라 할 수 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이해하는 창조와 세상’으로 서술해도 될 것을 교황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이유 하나는 모든 종교의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스스로 믿는 이들이라 고백합니다. 이 (신앙)고백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재촉해야 합니다. 자연 보호를 위하여, 사회적 약자를 방어하기 위하여, 존경과 형제애의 관계망을 구축하기 위해서 말입니다”(201항). 또 다른 이유는 회칙 전편에 걸쳐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지난 2세기에 걸쳐 세상을 이끌어 온 과학기술 패러다임의 행적’에 대한 반성(특히 3장 참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지난 200년 동안 우리의 공동 가정에 상처 입히고 학대한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문제는 우리에게 이런 재앙에 맞설 수 있는 문화가…지도력이…법적 틀이 없다는 것입니다”(53항).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도 다음 진술에서 일단의 답을 찾을 수 있겠다. “정치는 경제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경제도 효율성만 따르는 과학기술 패러다임의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189항). 3장에서 밝히고 있지만, 오늘날 재앙의 뿌리는 지난 2세기의 근대정신과 닿아 있으며, 그 근대성은 절대 주체로서의 인간관과 단순한 객체로서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여, 과학 기술적 패러다임을 절대화했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창조주 혹은 종교들을 밀어내버리거나 하위문화쯤으로 간주하고 있다(62항).그러나 교황은 과학과 종교가 실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다른 접근법을 갖고 있을 뿐, 서로 생산적이며 심층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믿으며, 대화를 제안한다(62항). 회칙 제2장은 “인류와 세상에 유익한” 즉 “해방의 경로를 모색하는” 이 대화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자세와 확신을 제시한다(64항). 회칙 제2장의 소제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I 신앙이 비추는 빛(63~64항), II 성경의 지혜(65~75항), III 우주의 신비(76~83항), IV 창조의 조화 안에 있는 각 피조물의 메시지(84~88항), V 우주적(보편적) 친교(89~92항), VI 재화의 공동(보편) 목적(93~95항), VII 예수님의 눈길(96~100항). 이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자. 백영민2015.08.19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7)장 르클레르크(하)](//cpbc.co.kr/CMS/newspaper/2014/08/rc/526538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7)장 르클레르크(하)성경 중심으로 교회와 함께 고백하는 기도 생활 강조 르클레르크는 개인 취향 빠지는 주관적인 경향을 극복하려면 교회가 만든 공식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본다. 사진은 미사 중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신자들. 【CNS 자료사진 중세 연구 통해 밝혀진 역사 장 르클레르크가 질송의 권유를 받아 중세 수도원운동(Monasticism)을 연구하면서 이론적 측면에서 수도신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신비체험(Mysticism)에 관한 슈톨츠의 연구에 영향을 받으며 연구하면서 실천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에 대한 고유한 관점을 형성할 수 있었다.르클레르크가 특히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던 중세는 신비 생활과 수덕 생활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에서 수덕 생활은 초세기부터 영성 생활을 살아가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였지만,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덕 생활이 과도한 고신극기의 모습을 바뀌면서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실천하기 점점 어려워졌다. 따라서 같은 시기에 평신도 그리스도인 및 또 다른 성직자, 수도자들은 기도 생활 안에서 체험하는 신비 생활에 많은 관심을 두게 됐다. 하지만 적절한 이론이나 외형적 틀 없이 추구한 기도 생활은 신비 생활을 왜곡시키면서 중세 후기에 신비 체험과 관련된 영성적 이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르클레르크는 중세를 연구하면서 이러한 역사를 분명히 목격하였다.기도 생활의 어려움한편, 르클레르크가 신학자로서 연구를 시작하던 20세기 직전까지 교회는 다시 한 번 수덕 생활과 신비 생활의 부조화를 경험하였다. 즉, 17세기에 신비 체험과 관련된 이단이 출현하여 악영향을 끼치고 난 후 200여 년간 교회 안에서 신비 생활은 자취를 감추고 이단의 찌꺼기를 척결하고자 수덕 생활만 강조되는 영성 생활이 실천되었다. 그런데 다행히 19세기 말엽부터 교회는 다시 올바른 신비체험을 경험하면서 신비 생활에 대한 반감이 줄고 공개적으로 관심도 갖고 연구도 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분위기를 몸소 체험한 르클레르크는 그리스도인이 영성 생활을 위해 기도 생활을 실천할 때, 아무 틀도 없이 신비 생활만 추종하는 것보다 적당한 틀 안에서 수덕 생활과 함께 접근하는 것이 더욱 안전하고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그런 까닭에, 르클레르크는 현대 영성신학자답게 현대인의 입장에서 기도 생활의 어려움과 그에 대한 극복 요령을 수덕 생활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설명하였다. 르클레르크에 따르면, 현대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대부분 시간은 생산과 소비에 사용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도하기 위하여 보내 시간은 겉보기로는 소비된 시간이요 결실 없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기도에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은 외적인 성취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외적인 결과를 거부해야 한다.”르클레르크에 따르면, 물론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을 기도로 바친다는 것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얼마간의 재산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무엇인가를 포기하면서 기도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기도의 가치에 대하여 확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르클레르크는 말한다. “즉 기도에 대한 확신을 했을 때만이 이와 같은 포기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따라서 르클레르크는 기도 생활을 수덕 생활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시도하였다. 즉, “현대의 소용돌이치는 삶 안에서 기도의 수덕은 노력을 의미”하는데, 특히 “시간에 대한 수덕은 희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의식적으로 있으려 하는 우리의 기도 활동에서 우리 자신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르클레르크는 지적한다. 사실 르클레르크가 생각하는 피조물인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향하려는 우리의 지향을 끊임없이 감소시키고, 얽매어 없애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 경향에서 탈피하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에 접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르클레르크가 생각하는 기도 생활은 단지 일정한 시간 동안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게 하는 많은 장애물을 의도적으로 극복하여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은총의 시간을 보내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수덕 생활과 연계된 기도 생활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발성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면서 “우리의 자유를 교육”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기도 생활은 새로운 활기를 가지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지게 된다는 것이다.기도 생활에서 유의점한편 르클레르크는 기도 생활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도 지적하였다. 즉, “주관적인 경향의 기도를 열심히 한다면 그 결과 나의 체험은 아주 깊게 느끼게 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주관적인 체험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너무도 빈약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취향에 맞는 개인적인 편견을 극복”하고, “자신에서 탈피”하며, “자신에게서 소외되는 것 같은 기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르클레크는 말한다. 르클레르크는 우리가 주관적인 경향을 극복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마련하여 함께 바치던 공식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본다. 즉, “이러한 교회의 기도는 어떠한 형식으로 이루어지든 문제 되지 않으며 또한 이 교회의 기도를 혼자서 했을 때라도 교류는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가 확인하고 제시하고 반복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영양분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쉽게 듣지 않는 위험에 빠지게 되며 그 결과 우리 자신에게만 말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정반대로 만약 “우리가 교회가 제시하는 영감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생명 없이 될 수 있는 빈약한 주관주의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그런데 르클레르크에 따르면, 우리는 교회의 공식 기도문을 능가하는 원천에 눈을 돌려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다. 사실 “하느님은 성경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성경은 하느님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알려주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그분과 맺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에 의하여 영감을 받은 기도는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상황으로 우리를 몰입시킨다.”그리고 르클레르크에 따르면, 우리는 성경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께 좋은 가르침과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때, 우리의 기도 생활은 원만하게 실천된다. 특히 르클레르크는 “우리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과의 깊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예수님께 대한 인간적인 사랑을 기초로 두고 인간적이고 내적인 일치를 위하여 노력해야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관장하여 잘 사용하여야 하며”, 이것이 수덕 생활의 관점에서 다가가 실천하는 기도 생활이라고 강조하였다.영성생활에 큰 도움 준 영성신학자 결국, 르클레르크는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은 신비 생활과 수덕 생활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었다.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과 은총의 이끄심에 따라 기도 생활을 실천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잘못될 수 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면서 교회와 함께 고백하는 기도 생활을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가톨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영성 생활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던 현대 영성신학자 르클레르크에 대해 불행하게도 한국 가톨릭 교회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르클레르크의 중요 저서들이 번역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편적인 가르침조차 간단하게 소개된 적도 없었다. 이번 기회가 그를 아는 좋은 기회였길 생각하면서 훗날 또 다른 기회를 간절히 바란다.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영성신학 교수,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평화신문2014.08.27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30>](//cpbc.co.kr/CMS/newspaper/2015/12/rc/607033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초자연적 윤리덕 그리스도의 윤리덕은 하느님께서 인간 영혼에 직접 넣어주셨다고 해서 ‘주입적 윤리덕’으로 일컬으며 은총에 기반을 둔다. 죄를 지으면 덕의 능력이 축소돼 윤리덕은 쇠퇴한다.성 베드로 사도 대리석상. 수덕 생활에서 핵심은 선으로 이끄는 덕을 최선을 다해 반복해 실천함으로써, 그 덕이 자신의 몸에 확고하게 배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기원전 중국이나 그리스의 현자 및 철학자들이 선을 추구하기 위해 인간이 실천하는 윤리적인 덕에 대한 다양한 목록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자연적 윤리덕’을 실천하며 올바른 선을 추구함으로써 성인군자로 존경받기도 했습니다.자연적 윤리덕자연적 윤리덕은 자주 반복해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특성 때문에 ‘습득적 윤리덕’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자연적 윤리덕을 습득한다면 추구하고자 하는 선을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자연적 윤리덕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에 이미 세상에 새겨 놓으신 창조 질서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영향으로 구약 성경뿐 아니라 신약 성경에서도 다양한 덕행 목록을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의 노고에 덕이 따른다. 정녕 지혜는 절제와 예지를, 정의와 용기를 가르쳐 준다”(지혜 4,7).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필리 4,8).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2베드 1,5-7).기원전 현자들과 그리스도교 윤리덕의 차이하지만 그리스도교가 기원전 현자들과 거의 비슷한 이름의 덕행 목록을 언급했다고 하더라도, 그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기원전 현자들이 언급한 자연적 윤리덕은 창조 질서를 통해 깨닫게 된 덕이기에 사람들이 올바른 선을 추구하며 막연하게 창조주를 향해 나아가기만 합니다. 또한 자연적 윤리덕은 특성상 끊임없는 반복 실천이 중요하기 때문에 실천을 게을리하면 덕이 쇠퇴해 버립니다.반대로 그리스도교가 언급한 윤리덕은 하느님께서 인간 영혼 안에 행동 원리를 직접 넣어주시어 작용하도록 했기 때문에 ‘초자연적 윤리덕’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자연적 특성 때문에 인간 영혼은 하느님께 공로를 쌓을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 윤리덕은 하느님께서 인간 영혼 안에 직접 넣어주셨다고 해서 ‘주입적 윤리덕’이라고도 일컫습니다.그런데 초자연적 윤리덕은 주입됐다고 하더라도 자연적 윤리덕의 습득적인 특성을 일부 공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은총으로 주입된 초자연적 덕이라 하더라도 덕을 보다 쉽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같은 행위를 반복해서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도 있어서 주입적 윤리덕은 신앙인이 초자연적 선을 추구하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로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주입적 윤리덕은 은총에 기반을 두기에 신앙인이 죄에 떨어지게 되면 덕의 능력이 축소되고 덕의 실천에 방해를 받음으로써 결국 초자연적 윤리덕은 쇠퇴해 버립니다.‘사추덕’(四樞德)그리스도교는 다양한 초자연적 윤리덕 중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는 ‘현명’, ‘정의’, ‘용기’, ‘절제’의 네 가지 덕을 선택하여 ‘사추덕’(四樞德)이라고 불렀습니다. ‘지덕’(智德)이라고도 하는 “현명은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참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실행할 올바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실천 이성을 준비시키는 덕”(「가톨릭 교회 교리서」 1806항)입니다. 따라서 지덕(현명)은 사추덕의 나머지 덕들뿐 아니라 다른 모든 덕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첫 번째 덕입니다. 즉, 지덕을 통해 성화를 위해 해야 할 일과 피해야 할 일을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죄의 원인과 기회를 잘 간파해 죄에 물들지 않고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덕 중에 으뜸으로 꼽히는 지덕은 윤리덕보다 상위에 있는 신학덕의 영역까지 관여해 현명한 판단을 하도록 합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5.12.02

문화에 복음 녹여 전하니 눈과 귀에 쏙 들어오네[2015 문화 결산] 2015년 교회 문화 활동은 다양한 분야에서 어느 때보다 풍성하게 이뤄졌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1주년 기념 공연과 전시를 비롯해 영화, 미술, 음악 모든 분야에서 활발한 ‘문화 복음화’가 이뤄졌다. 평화방송·평화신문이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1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평화나눔 음악회에서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로 구성된 레인보우합창단이 교황 방한의 기쁨을 되새기며 노래하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문화 사목 박차서울대교구는 지난 8월 교구 문화위원회와 성음악위원회를 각각 설립해 ‘문화 사목’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문화위원회는 첫 사업으로 ‘신앙, 인문학을 만나다’를 주제로 ‘청년문화학교’ 강좌를 열었는데, 예상을 훌쩍 넘는 170여 명이 9주 강의에 꾸준히 참여했다.성음악위원회는 10월 ‘말해주세요. 성가대 이야기’ 포럼을 처음 개최, 각 본당 성가대원들의 고충을 들었다. 교회 음악가 박원주ㆍ이상철ㆍ최호영 신부는 각개 전투식으로 펼쳐지는 본당 성가대원들의 어려움과 의견을 듣고 조언해줬다. 위원회는 이를 토대로 ‘성음악 로드맵’을 만들어 교회 성음악 전반을 지원할 계획이다.서울가톨릭미술가회는 20년 만에 성미술 세미나를 개최해 가톨릭 미술의 현재와 미래를 모색했다. 미술가들은 세미나에서 △성미술 작품의 체계적인 보호ㆍ관리 △종교미술 가치를 보급할 현대 종교미술관 건립 등을 교회에 건의했다.한국 교회 1번지 명동성당은 올해 ‘문화가 있는 명동’을 매달 열었다. 클래식ㆍ재즈의 대가들이 무대를 장식하며 성당을 찾는 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했다.부산교구는 2015년을 ‘문화 복음화의 해’로 정하고, 1년간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문화를 전하는 데 힘썼다. 교구 선교사목국은 신심 서적 읽기 추천 도서 50권을 선정, 매달 2~3권씩 주보에 소개했다. 사목국은 연말에 추천 도서 독후감 공모전도 열어 나눔을 풍성하게 했다. 부산가톨릭센터도 문화 복음화의 해 동안 매달 한 영화를 정해 무료 상영회를 열었다. 더불어 다양한 특별 기획전을 마련해 일반 문화 센터 전시와 차별화된 복음적 가치가 담긴 작품들을 선보였다.본당들도 음악회ㆍ전시회ㆍ성극 등을 열어 적극적으로 사목 지침을 따랐다. 양산본당은 ‘문화 복음화 운동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본당 공동체와 지역 사회에 복음 정신을 전했다. 특히 성경 퍼즐, 한 줄 성경 쓰기 등 본당 누리집을 활용하는 다채로운 활동들을 마련해 주목을 받았다.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1주년‘프란치스코 효과’는 교황 방한 1년이 지난 올해에도 활발히 전해졌다. 8월 서울 명동대성당 들머리에는 교황 방한 때 감동이 담긴 사진들이 걸렸고, 명동성당이 개최한 음악회 ‘교황님 기억합니다’에 참석한 신자들은 교황 방한 영상도 함께 감상하며 연주에 빠져들었다.평화방송ㆍ평화신문은 교황이 남긴 메시지 ‘평화ㆍ나눔ㆍ사랑’을 주제로 평화나눔음악회를 열었다. 가수 인순이(체칠리아)씨를 비롯해 교황 행보에 매료된 이승환씨까지, 가수들도 1년 전 기쁨을 노래했다. 대전교구는 8월 15~16일 해미순교성지에서 ‘프란치스코 데이’ 청년 축제를, 예수의 꽃동네 유지재단은 꽃동네 희망의 집 잔디광장에서 열린 음악회를 열며 1년 전 기쁨을 다시 한 번 기념했다.영화는 복음을 싣고가톨릭영화인협회와 한국가톨릭문화원은 나란히 제2회 가톨릭영화제, 제2회 한국가톨릭어린이영화제를 각각 열었다. ‘가족의 재발견’을 주제로 서울 명동역CGV에서 열린 두 번째 가톨릭영화제에는 가족 관계를 돌아보는 장ㆍ단편 영화 42편이 상영됐으며, 영화인, 수도자, 관객이 소통하는 토크쇼도 열렸다. 제2회 한국가톨릭어린이영화제에는 어린이 감독 60여 명과 부모들이 2박 3일간 김포시 문화아트센터에서 연출과 연기를 배우고, 작품을 만들며 영화에 흠뻑 빠졌다. 전년보다 더 많은 관객과 참가자가 찾아들면서 두 영화제는 상업 영화 틈바구니에서 교회 안팎에 복음을 전하는 장(場)으로 더욱 자리매김했다.토크 콘서트 바람올해 교회는 ‘토크 콘서트’가 대세였다.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5월 청년들과 만난 첫 토크콘서트에서 기타 치고 노래하는 소탈한 모습을 보여줬다. 공지영(마리아) 작가, 김제동(프란치스코)씨 등 스타들도 교회 곳곳에서 토크 콘서트를 열고 신앙의 의미와 체험을 전했다. 젊은이들은 평소 접하기 어려운 주교의 금쪽같은 덕담, 유명인들의 재치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었다. 올해는 특히 하향식 일방 소통에서 벗어 ‘위와 아래의 만남’을 이루는 ‘토크 콘서트 사목’이 교구와 단체를 막론하고 곳곳에서 선보인 해였다.평화방송ㆍ평화신문 문화사업가톨릭 종합매체인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은 올해부터 ‘찾아가는 문화공연, 함께해요! PBC 문화마당’을 시작했다. △영화 △음악회 △연극 및 뮤지컬 등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이 지닌 양질의 문화 콘텐츠를 일선 본당을 위해 맞춤형으로 지원하는 사업이다. 벌써 몇몇 본당은 PBC 문화마당을 통해 인형극과 생활성가 공연을 열었다.아울러 최근 출시한 가톨릭 모바일 공동체 모바일 앱 ‘코이’는 신자 자영업자와 이용자를 연결해주면서 정보를 제공하고 친교를 나누도록 하는 생활 속 새로운 교회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백영민2015.12.23
[성경 속 생명이야기] 17. 고엘(구원자)이신 하느님 성경화 체칠리아(가톨릭교리신학원 강사) 생명의 복음 제3장에서는 생명에 관련된 하느님의 계명(살인해서는 안 된다)에 대해 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신성한 법이라고 설명합니다.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살게 하시고, 인간을 자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셔서 나머지 창조물들을 다스리고 지배하면서 이 지상에서 하느님과 같은 주인 역할을 하도록 허락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 생명에 대한 절대적 주인이 바로 당신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나는 치기도 하고 고쳐 주기도 한다.”(신명 32,39)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주시기 이전에, 하느님께서는 인간 생명을 다루는 부분에 관해서는 특별히 그 피의 복수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다시 강조하십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카인이 동생 아벨을 질투로 살해하고 난 뒤에 그 형벌이 짊어지기에 너무나 크다고 주님께 하소연합니다.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며 만나는 자마다 자신을 죽이려 할 것임을 언급하면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카인에게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배로 앙갚음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면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도 카인을 죽이지 못하게 해주십니다. 자신의 친동생을 죽이는 죄를 범한 카인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직접 카인의 구원자(고엘)가 되어 주십니다. 구약에서 고엘에 관해 살펴보면, 레위기 35장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피신할 도피성읍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반면에 고의로 살인한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하며 피의 보복자는 그런 살인자를 죽여야 한다고 언급합니다. 실제로 카인은 아벨을 지키도록 요구되지는 않았지만, 아벨의 형제로서 아벨이 살해되었을 때 대속자 역할을 하고 또 그 피에 대해 복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카인 자신이 아벨의 살인자여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카인을 위해 직접 그 ‘피의 보복자’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창세 4,15) 레위기(17,11)를 보면, 생물의 생명은 그 피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속죄의 제물로 사용되는 동물의 피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제단에 쓰는데, 피가 그 생명으로 속죄하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살인으로 흘려진 피는 거룩한 땅을 더럽혀서 하느님이 현존하시기에 부적합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으며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에 대한 살인은 반드시 보복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느님이 직접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창세 9,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교도권은 무고한 이나 죄인, 불의한 범죄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생명권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권과 절대적으로 평등함을 주장하며(「생명의 복음」 57항), 이 평등성으로 진정한 사회관계의 기초가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특히 무죄한 생명을 죽이는 고의적 낙태는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개인적 책임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머니 모태에서 빚어지기 전부터 알고 계셨으며(예레 1, 4), 어머니 뱃속에서 엮으신 분이며(시편 139,13), 아직 태아일 때부터 당신 두 눈으로 보고 계시고(시편 139,16), 이미 정해진 날이 시작하지 않았을 때부터 당신 책에다 모든 것을 적어두고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어머니 뱃속에서 이끌어내시고, 어머니 젖가슴에 평화로이 안겨주시는 분이시기에 모태에서부터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시편 22,10-11) 성경에서는 낙태나 안락사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카인의 고엘이 되어 주기도 하시는 하느님께서 초기 단계의 무고한 인간 생명에 대해서도 고엘이 되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평화신문2014.06.17
![[생활 속의 복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cpbc.co.kr/CMS/newspaper/2015/11/rc/604398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그리스도 왕 대축일(요한 18,33ㄴ-37)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생활 속의 복음으로 교우 여러분을 만난 지 어느덧 일 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의 흐름이 왜 이렇게 늦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읽고 많은 격려와 충고를 해주신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동료 신부님들 말씀은 마음속에 기억하겠습니다. 숨을 고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번 주에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주제를 정했습니다. 이유는 많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멋진 삶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동ㆍ서양에는 훌륭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장자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장자는 「잡편」에서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살아온 자신이 자유로운 삶을 ‘세 부류의 사람과 진인(眞人)’이라는 가르침으로 이야기합니다. “난주(暖姝)에 속하는 사람은 이론을 배우기만 하고 여과 없이 그것을 따라 자기의 학설로써 만족하는 사람으로 주관이 없는 사람이고, 유수(濡需)에 속하는 사람은 돼지의 몸에 붙어사는 이와 같은 사람으로 일시적인 안락을 꾀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권루(券婁)에 속하는 사람은 순임금과 같은 사람으로 자신의 참됨과 인간성으로 평생 열심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세 부류의 인간상을 초월하는 이가 진인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물건을 보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본성으로 되돌아간 사람입니다.”구약성경에서는 야곱을 진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경쟁을 시작했고, 형제나 이웃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외모로 여인을 평가하던 아주 속물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양을 돌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진실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파라오를 축복해주는 것은 정말 너무나 멋진 모습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바르나바 성인이 있습니다. 유다교에서 개종해 물질적 유혹을 극복한 성인은 후배인 바오로를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들이며 도와주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모습은 인간적 욕심을 내려놓고 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철저히 실천하신 또 다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마치 이웃집 어르신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의 향기가 느껴지는 이가 있습니다. 브라질의 35대 대통령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재임 2003~2010)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학업을 포기했습니다. 길거리에서 땅콩을 팔고 구두닦이를 하며 살다가 14살에 상파울루 철강공장에서 취직해 일했습니다. 18세에 새끼손가락이 절단되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공장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하였지만, 워낙 가난해 임신한 아내와 아기를 잃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실업자가 돼 길가에 앉아 울기도 했던, 눈물이 많았던 그는 훗날 하루에 1달러의 수입으로 살아가던 가난한 형제들 4000여만 명의 지지로 57살에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의 당선 후 많은 외국자본이 브라질을 떠났습니다. 그래도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게 모든 정책의 최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결석률 15% 미만을 유지하는 것을 조건으로 소득수준 하위 25%의 국민들에게 생활 보조금을 지급했습니다. 그의 정책에 힘입어 10년 후에는 국민 2000만 명이 중산층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룰라 대통령을 두고 “이분이 나의 우상이다. 나는 그를 깊이 존경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룰라 대통령을 통하여 세상의 희망과 따뜻함을 느낍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묵상하다 보니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가 보입니다. 제1 독서에서 예언자 다니엘은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다니 7,14)라고 이야기하며 사랑과 정의, 봉사로 통치되는 하느님 나라를 보여줍니다. 제2 독서와 복음은 사제직과 진리를 증언하는 예언직을 보여줍니다. 교우 여러분들께서 세 가지 직무를 완성하신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했으면 합니다. 진인과 함께 그리스도를 배우고 선포하여 주십시오. 아멘.※지난 1년 동안 ‘생활 속의 복음’을 집필해 주신 박재식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호부터는 주수욱(서울 대방동본당 주임) 신부님께서 수고해 주십니다. cpbc2015.11.18
[성경 속 생명이야기] 14. 생명의 길하느님 계명은 생명의 길 안내판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지혜로운 선택을 할 때 우리 삶의 질이 나아집니다. 이렇게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자유의지에 따라 각자의 삶을 주님 뜻에 맞갖게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으며 이 선물을 가치 있게 잘 사용할 때 궁극적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더 나은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계명들을 제시하시며 복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30,15-16). 하느님의 계명은 이처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안내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생명을 성장시키는 선한 행위를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의 목적 자체가 선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선을 실천할 때 생명은 자라나고, 반대로 생명이 선에서 멀어지면 그 생명은 파멸의 운명으로 치닫게 됩니다(바룩 4,1 참조). 예수님의 구체적 사랑의 삶은 우리가 걸어야 할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때문에 죽음의 길을 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직접 일러주신 사랑의 가르침은 이기심으로 완고해진 우리 마음에 큰 울림으로 메아리칩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사랑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새롭게 변화됐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14).이웃을 나 자신처럼 아끼는 진실한 사랑만이 우리를 진정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이기적 성향을 지닌 인간이 관대한 형제적 사랑을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비결은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사랑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는 순간, 그분의 신원이 온 세상에 선포됐습니다.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15,39).이방인의 입을 통해 들려온 이 놀라운 선포는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아버지 뜻을 끝까지 충실하게 따른 이가 획득한 진정한 승리입니다. 생명의 꽃이 이렇게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 활짝 핀다는 역설을 예수님의 삶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중에 제자들에게 사랑을 살도록 거듭 가르치셨는데 그 방법을 당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예수님이 살아가신 사랑의 방식은 오늘날 곳곳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고 생명의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우리가 택해야 할 필수적인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신의 무력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실천하신 생명의 완성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령의 법을 계시해주셨습니다(로마 8,2). 선한 길로 이끄시면서 생명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하시는 성령의 법을 따라감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인 ‘생명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성장하게 됩니다. 평화신문2014.05.15
![[최기산 주교 선종] 교구 복음화·발전 이끈 열정가이자 온화한 목자](//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8039_1.0_titleImage_1.jpg)
[최기산 주교 선종] 교구 복음화·발전 이끈 열정가이자 온화한 목자최기산 주교 발자취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주님을 따라 산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가 5월 30일 하느님 품에 안겼다. ‘나도 저런 사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일으킬 만큼 성덕이 뛰어난 주교였기에 목자를 보내는 슬픔은 더 컸다. 교구 설정 55주년을 보내며 두 번째 목자를 잃은 교구 공동체는 최 주교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는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 사목자로서 살아온 41년 생애에 녹아있는 복음화의 열정과 교구 공동체를 향한 사랑, 그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말수는 적지만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겸손의 덕을 갖춘 착한 목자’. 5월 30일 선종한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에 대한 주위의 평가는 한결같다. ‘인화’를 중시하는 사목 스타일과 소탈한 성품, 뛰어난 성덕으로 후배 사제들의 한결같은 본보기가 됐다. 침묵의 영성 갖춘 설교가“뒷담화만 안 해도 성인”이라는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침묵의 영성을 갖췄으면서도 역설적으로 설교에 큰 관심을 가졌다. 본당 신부로, 신학교 교수로 바쁜 와중에 1995년부터 3년간 미국 세인트루이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교 설교연구소에서 연수를 받고 ‘보다 나은 주일 설교를 위한 제언’ 등 여러 편의 논문과 「말 잘하는 신부의 이야기 교리」 등 강론집과 복음 예화집을 집필했다. 어린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어린이 설교집을 낸 것도 최 주교가 처음이었다. 1999년 주교 수품 이후에도 「어느 주교의 행복수첩」 「행복을 부르는 말씀」 등 성경 묵상집을 여러 권 내 신자들의 복음살이를 도왔다. 이처럼 겸손하고 신심이 깊은 목자이어선지 최 주교가 교구장으로 재임한 14년 동안 인천교구의 교세는 크게 늘었다. 교구장에 취임한 2002년 말 본당은 85개 본당에서 2015년 말 현재 122개로, 43.5% 증가했고, 신자 수도 37만 2213명에서 49만 6364명으로 33.4%나 늘어났다. 최 주교는 그러나 교구의 외적 성장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소외된 청소년과 노인, 여성 등을 위한 사회복지시설을 확충하고, 사회 사목에도 눈길을 돌렸다. 이를 위해 교구 신학생들에게 사회복지 자격증을 따도록 했을 정도였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마리스텔라 실버타운을 조성했고, 2014년 당시 60년 전통의 관동대를 인수, 가톨릭관동대를 출범시켰다. 이와 동시에 국제성모병원을 설립해 가톨릭관동대 의대 부속병원으로 삼고 복합메디컬타운을 조성, 병원 사목의 새로운 전기로 삼았다. 최 주교는 환경 사목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96년 인천가톨릭대 교수 신부 시절에는 강화도 옆 석모도에 지으려던 1200만㎾ 규모 LNG발전소 건립을 무산시키는 데 이바지했고, 지역 환경 단체들과 「강화도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관한 연구」 자료를 내기도 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재임 시기에는 위원장이 되자마자 환경소위원회를 중심으로 가톨릭 환경상을 제정,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과 자연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에 앞서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 간 대화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이웃 종교와의 대화에 힘쓴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구교우 집안서 성소 키워 최 주교는 구교우 집안 출신이다. 1948년 경기 김포시 양촌면 마산리 278번지에서 최윤봉(파비아노)ㆍ정용환(데레사)씨 사이 6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신앙의 훈육을 받으며 자랐다. 김포성당이 집에서 10㎞가량 떨어져 있었지만, 늘 미사에 참석했다. 사제가 되겠다는 성소를 갖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로 평소 최 주교를 모범적 신앙생활로 이끌었던 부모 영향이 컸다. 신학교 시절, 최 주교는 평범하고 조용한 신학생이었다. 특기할 만한 게 있다면, 한국 천주교회에 미국의 성령쇄신운동을 소개했던 백 제랄드(Gerald Farrell) 신부를 신학교에 초청해 강의를 마련하며 성령쇄신기도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래선지 1981년부터 9년간 교구의 성령쇄신봉사회 담당 신부를 맡아 교구 신자들 사이에 성령쇄신의 열기를 불러일으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도 본당 사목자로, 교구 사목국장으로, 신학교 교수로 복음화에 열성적인 면모를 보였고, 새천년기 교구 복음화의 문을 열고 하나하나 초석을 다져나갔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 백슬기 기자 jdarc@pbc.co.kr최기산 주교 약력 1948년 5월 16일 경기 김포 출생1975년 12월 6일 사제 수품 1975~1977년 부평1동·백령 본당 보좌 1977~1987년 김포·해안·심곡1동 본당 주임 1987~1990년 교구 사목국장 1990~1994년 해외 교포 사목 1994년 5월 미국 성 요셉대학교 종교학 석사 1995~1996년 인천교구 산곡3동 본당 주임 1996~1999년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영성처장, 겨레문화연구소장 겸임) 1999년 10월 29일 인천교구 부교구장 임명 1999년 12월 27일 주교 수품 2000년 3월~2004년 10월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 위원장 2001년 1월~2002년 4월 인천교구 총대리 2002년 4월 25일 인천교구장 착좌식 2002~2007년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위원 2004년 10월~2010년 3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2010년 3월~2016년 3월 주교회의 교육위원회 위원장 2010년 3월~ 주교회의 성직주교위원회 위원장 2014년 10월~ 주교회의 서기 2014년 10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상임이사 2016년 5월 30일 선종 평화신문2016.05.31
![[신앙단상] 글의 진실, 글의 힘](//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6404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글의 진실, 글의 힘이대현 요나(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기자 시절, 나는 ‘오자(誤字) 대장’이었다. 원고지에 쓸 때는 전혀 없던 오자가 컴퓨터로 글을 쓰면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데스크를 보는 선배가 틀린 곳을 빽빽하게 고친 원고를 보여주면서 핀잔을 준 적이 부지기수다. 내가 데스크를 맡자, 그 선배의 축하 겸 걱정의 한마디도 “오자 대장이 오자를 잡게 생겼네”였다. 오자는 30년 가까이 글을 쓰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칼럼, 평론은 물론 신앙체험수기에까지 튀어나온다. 이유는 하나다. 자판 사용이 서툴면서도 쓴 글을 다시 읽어보지 않기 때문이다. 변명이 아니다. 정말 그것이 싫다. 나만 아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면서도 자기가 쓴 글이 밉기라도 하듯 “보기 싫다”며 두 번 다시 읽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길든 짧든, 무엇에 관해 썼든, 글은 곧 자신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쥐어짜서, 생각을 굴려 쓴 글일수록 더욱 그렇다. 배우가 열연한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어색하고 민망하듯이. 어쩌면 자신의 글도 연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자연스럽고, 솔직해 보여도 연기는 연기일 뿐이다.신앙체험수기 ‘주님,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를 읽고 많은 사람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누구보다 아내와 청주 성모 꽃마을에서 함께 지내며 암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분들의 반응이 유난했다. “다 읽을 때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는 감정이 흥건한 글도 있었다. 가까이 있었지만, 미처 몰랐던 아내의 아픔과 기도를 확인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아픔과 고백으로 받아들이는 ‘공감’ 때문이었으리라. 불안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거나, 보내고 있는 그들에게 잠시나마 나의 글이 ‘힐링’이 되었다면 감사할 뿐이다. 이런 감사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글도 배우의 연기가 아닐까’하는 자괴감으로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선다. 신앙, 체험, 수기, 이 세 가지 모두 100% 진실하다고 말할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 “어찌 너는 그 알량한 글재주로 아내를 속이고, 자신을 과장하고 미화하고 속이려 했느냐”는 주님의 꾸짖음이 들린다. 돌이켜보면 생각만큼 기도도 간절하지 못했고, 아내와 아픔을 온전히 함께하지 못했으며, 그런 나의 게으름과 이기심을 솔직하게 쓰지 않았기에 그 꾸짖음을 달게 받는다. 분명 어떤 곳에서는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해 과장을 했고, 어떤 곳에서는 굳이 다 이야기할 필요까지 없다면서 빼버리기도 했다. 소설이라면, 영화라면 상관없다. 허구니까. 수기는 자기 손으로 쓰는 자기 고백이다. 진실하지 않으면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르나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하다. 죽은 글이 된다. 신앙체험수기가 나로 하여금 “글의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글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지게 했다. 답은 둘 모두 숨김과 보탬이 없는 ‘진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일 것이다. ‘성경’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나의 수기가 사람들의 가슴에 조금이라도 닿았다면, 그 역시 미약하나마 진솔함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자기 글, 오자투성이인 자기 글을 쓰지 않은 길도 분명하다. 알면서도 다른 핑계를 대며, 자신이 없어서 애써 외면해 왔을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그 길을 가야겠다. 어쩌면 이런 다짐도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그러나 더없이 고마운 ‘신앙’이란 이름을 앞에 붙인 ‘체험수기’와 이 ‘칼럼’을 쓸 기회를 주신 주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cpbc2016.03.24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3) “좋기도 하여라, 우리 하느님께 찬미 노래 부름이”(시편 147,1)](//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2618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3) “좋기도 하여라, 우리 하느님께 찬미 노래 부름이”(시편 147,1)하느님께 올리는 찬양·탄원가, 시편 10세기 독일의 시편집. 연재를 시작한 지 어느새 1년이 지났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아직 다루지 않은 부분들이 꽤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따라 걸으며 유배 이후의 예언서와 역사서들까지 이미 많은 책을 거쳐 왔습니다. 시편은 그 모든 역사가 녹아 있는 용광로와 같습니다. 한 시대 한 작가가 쓴 것이 아니라 대개 연대도 저자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의 기도인 시편 안에는, 이스라엘이 살아온 역사와 그 안에서 만났던 하느님의 모습이 다채롭게 펼쳐집니다.이렇게 다양한 150편의 시편들의 내용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요? 제목을 가지고 시작해 봅시다.히브리어로 시편집의 제목은 “찬양가들의 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편집이 온통 기쁜 찬양의 노래들로만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책에는 오히려 탄원시편의 수가 찬양시편의 수보다 더 많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시편은 과거에 누군가가 했던 기도들을 모아 놓은 것이고, 우리가 체험하듯이 우리의 기도는 찬양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찬양시편들만 모아 놓은 책이라면 우리에게는 비현실적인 기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시편의 여러 종류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탄원시편과 찬양시편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습니다. 탄원시편에서 기도자는 하느님을 부른 다음 자신의 처지를 하느님 앞에 하소연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그가 자신만을, 자신의 고통만을, 또는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길을 하느님께 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시편 42,6). 하느님께 부르짖는 탄원은,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과 나 사이의 결합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어 갑니다.한편 찬양시편에서는 흔히 첫머리에서 다른 이들을 향해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하고 이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말해 줍니다. 창조의 놀라움,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변함없는 자애 등 여러 가지가 하느님을 찬양할 이유가 됩니다. 시편집이 삶의 고통을 잊지 않기에, 그 책에 들어 있는 찬양시편들은 삶의 굴곡 속에서 멈추어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는 순간들이 됩니다.개별 시편들의 저자는 알 수 없습니다. 150편의 시편 가운데 73편에 ‘다윗’이라는 머리글이 붙어 있고 전통적으로는 시편집 전체를 ‘다윗의 시편’이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세 오경을 모세가 썼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 신학적인 의미에서이지 실제로 다윗이 이 시편들을 쓴 것은 아닙니다. 다윗을 시편의 저자라고 하는 것은 그가 악기를 연주했다거나 노래를 지었다는 이야기들이 성경에 전해지고 그가 전례를 정비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일컬어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다윗이 훌륭한 임금으로서 메시아의 전형이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편들 대부분은 다윗 시대보다는 늦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신학적으로도 이미 유배를 겪은 흔적이 드러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이렇게 저자를 알 수 없어도, 분명 저자가 있기는 했겠지요. 그 사람은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시편을 썼을 것입니다. 기쁨에 넘쳐서 하느님을 찬양하기도 했을 것이고, 슬픔 속에서 하느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기도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닌 여러 사람의 기도가 되어 갑니다. 마치 어떤 계기로 노래 가사를 쓰거나 곡을 만들었던 것이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많은 사람이 그 노래를 부르게 되듯이, 한 사람의 기도가 모든 이들의 것이 되어 갑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모인 시편들이 하나의 책으로 완성된 것은 아마도 기원전 2세기 무렵일 것입니다. 그러니 벌써 2000년도 더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수천 년 전에 누군가가 했던 그 기도를 지금도 바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래전에 그 기도를 바쳤던 사람과 지금의 우리 사이에 어떤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겠지요.공감대, 그것이 시편을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합니다. 시편에서 저자는 자주 자신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나는 가련하고 불쌍하지만”, 시편 40,18). 시편은 주님께 피신하는 가난한 이들의 기도입니다. 시편이 얼마나 진실하게 나의 기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나 스스로 어느 만큼 가난한 사람이 되어 있는가에 비례합니다. 탄원이 찬양보다 더 많은 구약의 시편집은 분명 태평하고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의 기도가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서 나 혼자의 힘으로 삶을 헤쳐갈 수 없음을 아는 약한 이들의 기도, 훌륭하고 좋은 것 역시 내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이렇게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매달리고 기쁨 가운데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편의 기도들은 하느님을 임금으로 선포합니다. 그래서 시편 22장4절에서는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이라 부릅니다. 이 세상의 이런저런 힘들이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시편을 노래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칩니다”(시편 145,13).<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6.01.05

월세방에 홀로 사는 94세 변순희 할머니가 행복한 이유“매일 미사하고 성경 쓰고 봉사할 수 있어 기쁩니다” 변순희(마리아, 춘천교구 서석본당) 할머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보면 작은 셋방에서 홀로 살고 있는, 아흔이 넘은 할머니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변 할머니는 “정말 행복하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무엇이 그렇게 행복하시냐?”고 묻자 “늘 하느님과 함께하고, 미사에 참례하고, 성경을 필사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1921년생인 변 할머니는 우리 나이로 94세다. 또래 어르신들은 요양원이나 집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변 할머니는 지금도 여느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본당 레지오 마리애 ‘사랑하올 어머니’ 쁘레시디움 단장으로 6년 동안 활동하기도 했다. 본당 성물방 운영, 청소, 가지치기, 잡초 뽑기, 주보 접기 등 안 해본 봉사가 없다. 항상 미사 시작 한 시간 전에 성당에 오는 변 할머니는 성당 청소를 깔끔하게 해 놓고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했다. 미사 후 뒷정리도 할머니가 담당했다. 지금도 주보 접기 봉사는 할머니 몫이다. 변 할머니의 일상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성경 필사다. 2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고 옮겨 쓰고 있다. 지금도 매일 4~5시간을 성경 필사에 할애한다. 그동안 신약 10번, 구약 4번을 필사했다. 지금은 신약성경을 11번째 옮겨 적고 있다. “늘 행복하지만 그중에서도 성경을 옮겨 쓸 때가 가장 행복해요. 내가 쓴 건데도 가끔은 ‘어떻게 이렇게 신통방통하게 잘 썼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매일 성경을 쓰니까 잠도 잘 자고 아픈 데도 없어요. 이러다가 100세까지 사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웃음)1980년 남편이 명동성당 맞은편에 있는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세상을 떠나기 전 “내가 보니까 천주교가 젤 나은 것 같다. 내가 죽으면 성당에 다니라”고 당부했다. 변 할머니는 남편 말대로 그해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세례 직후부터 레지오 마리애 단원 생활을 시작했고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아낌없이 가진 것을 베풀었다. 레지오 활동은 34년 동안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월세방 살면서 행복하다고 하면 바보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예전 부자였을 때보다 훨씬 행복해요. 다 내려놓으니까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돈이 없어도 하느님이 다 보살펴주세요.” 변 할머니의 꿈은 빨리 다리가 나아서 레지오 활동을 다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이대로 성경을 쓸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세상만사가 천국”이라며 또 한 번 환하게 웃었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전창남 명예기자 평화신문2014.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