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도시] (37) 에벤 에제르](//cpbc.co.kr/CMS/newspaper/2015/03/rc/557991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37) 에벤 에제르주님께 감사하며 기념비를 세우다 에벤 에제르는 이스라엘의 아펙 근처의 한 마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펙에 진을 치고 있던 필리스티아인을 맞아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필리스티아인들이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주로 지중해 해안 평야가 정착지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주로 중앙 산지에 정착하였다. 해안 평야에 정착한 필리스티아인들과 산지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충돌했다. 이 두 민족끼리 치른 중요한 전쟁이 사론 평야와 에브라임 산지의 경계 지역인 아펙과 에벤 에제르에서 일어났다. 이 전쟁들은 이스라엘의 국가 체제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사무엘의 말은 그대로 온 이스라엘에 전해졌다.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러 나가 에벤 에제르에 진을 치고, 필리스티아인들은 아펙에 진을 쳤다”(1사무 4,1).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실로로 사람을 보내어 그곳에서 ‘계약 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게 했다. 이 계약 궤란 양편에 황금의 두 천사가 날개를 편 상(像)이 놓여 있는 네모난 상자를 말한다. 구약 시대 모세가 받은 십계 판을 이 상자에 담아 성막에 보관했다. 왕조 시대 이전에는 전쟁의 수호신 등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게 된다. 광야는 위험한 곳으로 식량과 물 부족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 이민족의 침입과 질병 역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부딪쳐야 할 두려움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주님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계약 궤는 이스라엘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백성은 실로에 사람들을 보내어, 거기에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왔다.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하느님의 계약 궤와 함께 왔다”(1사무 4,4). 이스라엘은 계약 궤가 승리를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두 번째 전쟁에서도 대패했다. 설상가상으로 계약 궤마저 탈취당하고 말았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이렇게 싸우자,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도망쳤다. 이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군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으며,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1사무 4,10-11).그 후에 필리스티아인들이 하느님의 궤 때문에 벌을 받게 되고(1사무 5, 1-12 참조)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다시 계약 궤를 되찾아 온다. 본래 주님의 계약 궤 상자는 시나이 산에서 제작된 후, 길갈에 안치됐고 이는 다시 베델, 실로를 거쳐, 잠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겼다(1사무 4,11). 그후 다윗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그리고 솔로몬은 성전 지성소(1열왕 6,19)에 이를 안치했다. 이스라엘이 계약 궤를 되찾은 후 예언자 사무엘은 기념비를 세우고 ‘에벤 에제르’라고 불렀다. “사무엘은 돌을 하나 가져다가 미츠파와 센 사이에 세우고, “주님께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며, 그 돌의 이름을 에벤 에제르라 하였다”(1사무 7,12).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있을 때 이것을 기념하고 후대에 기억하기 위해 돌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구약에 자주 나타난다. 에벤 에제르는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인을 이긴 후 도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세운 기념비의 이름이며, 이후에 그곳 지명이 된 경우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3.0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23) 5세기 ④ - 브리타니아 선교와 켈트족 영성](//cpbc.co.kr/CMS/newspaper/2017/05/rc/680384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23) 5세기 ④ - 브리타니아 선교와 켈트족 영성켈트족, 이교도에서 복음 전파의 첨병 되다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미국 동북부 지역은 매년 3월 17일이면 온통 초록색 물결로 뒤덮입니다. 아일랜드 국경일이자 ‘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아일랜드 주교 파트리키우스(Patricius Hibernorum, 389경~461/92?)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면서 아일랜드 복음화 업적으로 아일랜드 교회의 아버지이자 수호성인으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런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브리타니아 복음화 과정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켈트족(Celts)’을 이해해야 합니다.탁월한 종교 심성을 지닌 켈트족혹시 ‘아스테릭스(Asterix)’라는 만화를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마법 물약을 먹으면 힘이 강해지는 아스테릭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며, 기원전 로마군과 싸우는 갈리아 지역 켈트족 이야기를 다룬 20세기 프랑스 만화입니다. 역사적으로 켈트족은 이미 기원전 4세기경 이탈리아를 제외하고 서유럽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로마와 잦은 전쟁으로 교류가 빈번해져 로마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따라서 갈리아 및 이베리아 지역 켈트족은 로마 제국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접했으며, 2세기 말에 브리타니아 지역 일부 켈트족도 복음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4세기경 북유럽에서 ‘게르만족(Ger manic Peoples)’이 서유럽 본토로 대이동을 하면서 켈트족 지역은 유럽 대륙의 극히 일부 지역과 브리타니아 지역으로 축소됐습니다. 게다가 5세기경 게르만족의 분파인 ‘앵글족(Angles)’과 ‘색슨족(Saxons)’이 잉글랜드를 점령, 켈트족 지역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등으로 대폭 축소됐습니다. 사실 ‘아서 왕(King Arthur)’의 전설에서 아서 왕은 5세기 잉글랜드를 침략한 게르만족을 막아낸 켈트족의 영웅적인 인물이었습니다.켈트족은 종교심이 탁월한 민족이었습니다. 켈트족 사회에는 빛의 신과 저승의 신뿐 아니라, 조상의 신과 보호자의 신이 있었습니다. 또한 켈트족은 신과 인간 사이의 영웅적인 인물들이 왕족을 이루면서 우주적인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며 통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켈트족 여성은 종교 안에서 지도자 반열에 드는 특별한 지위를 지녔습니다. 켈트족 성직자 역시 제사장이기보다 신탁을 전하는 역술가에 가까웠습니다. 켈트족은 영혼 불멸을 믿었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로 환생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영혼이 먼 곳에 있는 신비한 섬들을 여행한다는 많은 전설이 있었습니다.금욕적인 수도 생활에 열정을 보인 켈트족 그리스도인이런 종교 심성을 지닌 켈트족은 개종 이후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열정을 보였습니다. 특히 켈트족 그리스도인은 부족장을 따라 함께 세례를 받았음에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헌신하면서 종교적 열성을 발휘했습니다. 부족장들은 수도원을 설립해 부족 구성원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실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개종 전에 종교 지도자였던 여성도 수도원장이 돼 남녀 공동 수도원을 이끌었습니다.따라서 켈트족 수도자들은 민족의 종교적 열정에 힘입어 남다른 열성으로 수도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수도 생활 안에서 육체노동을 중요한 요소로 여겼으며, 글을 모르던 자들도 성경을 읽기 위해 라틴어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켈트족 수도자들은 개종 전 금식 전통의 확장 선에서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실천하며 ‘백색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영성 생활은 개인적인 참회의 삶이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켈트족이 실천한 고해성사 규정에서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죄의 경중에 따라 상응하는 속죄 행위를 상세하게 구분했습니다.켈트족 영성에서 또 하나의 특징은 마치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한 것처럼 고향을 떠나는 용기였습니다. 켈트족은 개종 전에 이미 낯선 곳을 여행하는 유랑 생활에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켈트족 수도자들은 자신이 속한 수도원에만 머물지 않고 또 다른 곳으로 과감하게 선교 여행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켈트족 그리스도인의 열정은 많은 이교인들을 복음화시킬 수 있었고, 심지어 유럽 대륙에까지 건너가 나태했던 그곳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적인 열정을 불어넣었습니다. 다만 5세기 게르만족의 침략 전쟁을 잊을 수 없었던지, 이후 켈트족 그리스도인은 유독 잉글랜드에 거주하게 된 앵글로-색슨족의 복음화에는 야박했습니다.복음화에 박차를 가한 아일랜드 선교사들브리타니아 지역은 이단설 창시자 펠라기우스(Pelagius Britannus, 350/54경~418 이후)의 고향이며, 켈트족 수도자들이 능동적으로 금욕 생활을 철저히 실천했던 토양 때문에 이단 펠라기우스주의에 쉽게 오염됐습니다. 이에 브리타니아 교회는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로마에 머물던 팔라디우스(Palladius Hibernorum, ?~432)는 교황 코일레스티누스(Coelestinus PP. I, 재임 422~432)에게 공동체 수도원을 설립해 엄격한 수도 생활을 실천하던 오세르 주교 게르마누스(Germanus Autissidorensis, 375경~437/48)를 펠라기우스주의를 평정할 특사로 추천했습니다. 교황은 429년 게르마누스를 브리타니아에 파견했습니다. 게르마누스는 브리타니아에서 신앙 성숙을 위해 노력하면서 여러 이단들을 평정했습니다.한편 431년 교황 코일레스티누스는 팔라디우스에게 주교품을 주고, 그를 아일랜드 지역 선교사로 파견했습니다. 아일랜드 초대 주교로서 팔라디우스는 아일랜드 지역 이교도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개종했습니다. 이후 팔라디우스는 스코틀랜드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픽트족(Picts)에게도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스코틀랜드 그리스도교 가정 출신이었던 파트리키우스는 10대 후반에 해적에게 잡혀 아일랜드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경험을 오히려 회개의 시간으로 여기며, 아일랜드 복음화를 결심했습니다. 먼저 파트리키우스는 게르마누스에게 사제품을 받았고, 432년 주교까지 됐습니다. 마침 아일랜드 복음화를 염려하던 교황 코일레스티누스는 파트리키우스를 아일랜드 선교사로 파견해 아일랜드 초대 주교 팔라디우스의 뒤를 잇게 했습니다. 435년 아일랜드에 도착한 파트리키우스는 아일랜드 이교도들에게 적극적으로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많은 사람을 개종시킬 수 있었습니다. 파트리키우스가 세 잎 토끼풀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한 일화 때문에, 세 잎 토끼풀은 파트리키우스의 상징물이 됐습니다.파트리키우스는 40년 동안 아일랜드를 복음화하면서 여러 지역에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파트리키우스는 그곳 수도자들과 함께 다시 아일랜드를 거점으로 외국으로까지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열성적인 켈트족 종교 심성을 바탕으로 아일랜드 그리스도인들은 훗날까지 선교사로서 열정을 발휘하며 오히려 유럽 대륙에 나태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경종을 울렸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cpbc2017.05.02
![[부음] 대전교구 원로 신학자 박상래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6/10/rc/655164_1.0_titleImage_1.jpg)
[부음] 대전교구 원로 신학자 박상래 신부 대전교구 원로사목자이자 신학자인 박상래(야고보) 신부가 1일 오전 대전성모병원에서 폐렴으로 선종했다. 향년 82세. 고인의 장례 미사는 4일 오전 교구 대흥동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봉헌됐으며, 유해는 대전가톨릭대 성직자묘역인 하늘묘원에 안장됐다. 1935년 충남 논산의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난 박 신부는 1954년 성신대학(현 가톨릭대 신학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196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리옹가톨릭대를 졸업하고 1963년 12월 리옹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어 독일 본대학과 프라이부르크대학, 이탈리아 로마 성서대학에서 공부했다.10년간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박 신부는 가톨릭대 신학부에서 16년을 교수로 살았다. 성서신학을 전공했지만, 신약학뿐 아니라 그리스도론도 강의했다.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신학을 한국 교회에 전하는 역할을 했으며, 해방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번역서인 「예수 그리스도」, 「예수와 역사」, 「나자렛 예수」 등과 저서인 「성서와 그 주변 이야기」 등을 통해 신학 연구와 발전에 이바지했다. 1974년 설립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학적 비전을 제공했으며, 이 때문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배후자로 지목돼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조사 후유증으로 1년간 요양했지만, 평생을 하느님 정의와 백성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신했다. 본당 사목도 논산 부창동본당과 신평ㆍ도고본당 등 3개 본당에서 10여 년밖에 하지 못했다. 1997년부터 8년간 긴 요양 끝에 2005년 1월에 은퇴했고, 은퇴 이후에도 지병인 심장병으로 줄곧 심장박동제어기를 달고 살았다.제자인 황종렬(레오) 박사는 “올해 늦은 봄에 찾아뵈었을 때도 눈빛이나 말씀이 살아 있으셨는데 이렇게 하느님 품으로 가시니 황망하기 이를 데 없다”며 “평생을 성경과 예수님 안에서 충실하게 머무르셨고, 진리에 대한 믿음을 꺾지 않으셨으며, 주위 사제들, 평신도들과 함께 다 같이 시대를 읽으려고 노력하셨던 분이셨다”고 추모했다. 오세택 기자 평화신문2016.10.05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파키스탄 (1) 차별과 박해Ⅰ](//cpbc.co.kr/CMS/newspaper/2017/06/rc/684443_1.0_titleImage_1.jpg)
[고통받는 교회를 도웁시다] 파키스탄 (1) 차별과 박해Ⅰ테러 공포가 일상인 신자들… 믿음 있어 두렵지 않다고통받는 교회 돕기(ACN)·가톨릭평화신문 공동 기획‘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지금 많이 아프다. 이슬람 영토에서는 차별과 박해에 시달린다. 그리스도인 희생 소식이 들릴 때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 박해시대보다 순교자가 더 많다”고 통탄한다. 아프리카와 남미 교회는 찌든 가난 속에서 신앙 형제들의 도움을 호소한다. 교황청 산하 고통받는 교회 돕기(ACN)와 함께 차별과 박해, 가난에 신음하는 교회를 찾아간다. 이 기획은 ACN 총재 마우로 피아첸차 추기경의 간절한 호소에서 영감을 얻었다. “교회는 한 몸이기에 지체 한 군데가 아프다는 것은 결국 전체가 아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외국 교회의 많은 도움을 받아 발전한 한국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다른 나라 교회를 위해 나서주십시오.”(2015년 방한 인터뷰) 첫 순서로 차별과 폭력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는 파키스탄 교회를 간다. 글·사진=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몸을 던져 폭탄 테러를 막은 ‘성 요한 성당의 의인’ 아카시 바시르의 묘. 맨 오른쪽 청년 스칸다르도 테러 당시 한쪽 눈을 잃고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그들의 얼굴에서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슬픔은 찾아볼 수 없다. 부모는 자식을 잃으면 슬픔의 강을 건너가 화석처럼 굳어버린다는데, 아카시 바시르(Akash Bashir)의 부모는 그렇지 않다. 라호르 변두리에 있는 그리스도인 마을 요한나바드에서 만난 아버지는 “아들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죽었으니까 천국에 갔을 것이다. 슬픔은 신앙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2015년 3월 15일, 20살 청년 아카시는 평소처럼 성 요한 성당 문을 지키고 있었다. 성당 청년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에 대비해 주일이면 새벽부터 나와 경비 봉사를 한다. 그날 미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사람이 다가오더니 총을 쏘며 성당에 진입하려고 했다. 테러범임을 직감한 아카시는 달려가서 괴한의 허리를 꽉 껴안고 저지했다. 테러범은 이미 문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은 상황이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두 사람은 씨름하듯 서로 밀면서 소리쳤다. “놔, 폭탄을 갖고 있어. 너도 죽고 싶어?”“죽어도 못 놔. 한 발짝도 못 들어가!” 두 사람은 엉켜서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 순간 테러범이 폭탄 조끼를 터뜨렸다. 성당 안에서는 1500여 명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다. 인근 성공회 성당에서도 폭발음이 들렸다. 이날 두 성당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테러로 17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성 요한 성당은 아카시의 희생 덕에 사망자가 2명에 그칠 수 있었다. 아들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카시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꿈을 꿨다. 아카시가 무덤가에서 자고 있길래, 일어나라고 했더니 일어나더라. 내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면서 ‘그동안 어디 있었냐?’고 물으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고 말했다.”‘성 요한 성당의 의인’ 무덤은 성당 근처에 있다. 신자들은 최대한 정성 들여 대리석으로 묘를 단장했다. 그리고 아카시가 부활의 영광을 누리길 기원하며 성경 한 구절을 돌판에 새겼다.“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묵시 20,4) 요한나바드는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 15만 명이 모여 사는 파키스탄의 최대 그리스도인 밀집 지역이다. 이날 테러 발생 직후 그리스도인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현장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경찰에 체포됐는데, 2년 넘도록 42명이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무슬림 2명에게 폭력을 가한 죄목이다이들의 석방 운동을 벌이는 라호르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엠마누엘 유사프 신부는 “상대 측 변호사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은 풀려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지금까지 개종자는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파키스탄은 2억 인구의 95%가 이슬람을 믿는다.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이슬람 인구가 많다. 그리스도인은 2%, 가톨릭은 0.65%(130만 명)다. 이 ‘소수의 양 떼’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흔하디흔한 일상이다. 단적인 예로, 그리스도인이 아이스크림을 팔면 “청소나 해서 먹고 사는 인간들이 더럽게 먹을 것을 판다”며 손가락질하는 지경이다.몇 년 새 발생한 충격적 사건은 다 열거하기가 힘들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정부 내각에 유일하게 등용된 사바즈 바티 장관은 신성모독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가톨릭 여성의 구명 운동을 벌이다 암살당했다. 지난해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공원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72명이 숨졌다. 이슬람 경전 코란 훼손 혐의를 받은 부부는 폭도로 돌변한 주민들에 의해 벽돌공장 불가마에서 화형당했다. 파키스탄은 코란을 훼손한 자는 종신형, 예언자 마호메트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이 신성모독죄(형법 제295조)는 무슬림까지 옥죈다.청년사목을 담당하는 자한제브 신부가 벽돌공장 화형 테러 사건(2014년) 직후 다급했던 상황을 회고했다. “청년들이 울분을 토하며 거리로 몰려나가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더 큰 피해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다, 그리스도인은 초대 교회 때부터 많은 피를 흘렸다. 그들이 흘린 피가 우리 신앙의 씨앗이 됐다’며 눈물로 설득했다.”라호르대교구장 세바스찬 쇼우 대주교는 “우리는 ‘2F 정신’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두려워하지(Fear) 않고, 싸우지(Fight) 않는 것이다.새카맣게 탄 마을, 아이들만이 희망 빈민촌 사목자 조셉 샤자드 신부 라호르 시내 그리스도인 빈민촌 조셉 콜로니(Joseph Colony)에서 사목하는 조셉 샤자드 신부가 한국 교회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300가구가 살던 이 마을은 2013년 3월 무슬림들이 불을 질러 새카맣게 타버렸다. 사건은 친구 사이였던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청년이 술자리에서 벌인 사소한 언쟁에서 촉발됐다. 무슬림 청년이 이슬람 지도자에게 달려가 그리스도인 친구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하자, 그 일대 성난 주민들이 몰려와 마을을 불태웠다. 주택 180가구와 교회 2개가 전소됐다. 마을이 불타는 광경은 TV에 생중계됐다. 그때 피란 갔던 주민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잿더미로 변한 마을로 돌아왔다. 대부분 날품팔이 노동자다. 그나마 시내에 살아야 일거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셉 신부는 “주민들은 짐꾼과 청소부, 식당 설거지 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며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미사 집전 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털어놨다. 그의 소망은 방치된 아이들을 위해 작은 학교를 여는 것이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20%도 안 된다. 공립학교에서는 그리스도인도 이슬람 교리를 외워야 하고, 툭하면 ‘왕따’를 당한다. 그는 주민들과 머리를 맞대고 “아이들 교육이 먼저냐, 입에 풀칠하는 게 먼저냐” 토론하지만 결론은 없다. 그는 “학교를 여는 게 여의치 않으면 우선 똑똑한 아이들을 뽑아 학비라도 대고 싶다”고 말했다. 성금 계좌 : 우리은행 1005-303-232450(예금주 사단법인 에이드투더처치인니드)고통받는 교회 돕기(Aid to the Church in Need)는 어려움을 겪는 가톨릭교회를 지원하는 교황청 직속 단체로, 한국 교회도 1960, 70년대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2015년 아시아 최초로 한국 지부(이사장 염수정 추기경)를 개설했다. cpbc2017.06.07

대전교구 원로사목자 박상래 신부 선종 4일 대흥동주교좌성당에서 장례미사 대전교구 원로사목자이자 신학자인 박상래(야고보) 신부가 1일 오전 대전성모병원에서 폐렴으로 선종했다. 향년 82세. 고인의 장례미사는 4일 오전 10시 교구 대흥동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봉헌돼며, 유해는 대전가톨릭대 성직자묘역인 하늘묘원에 안장된다. 1935년 충남 논산의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난 박 신부는 1954년 성신대학(현 가톨릭대 신학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196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리옹가톨릭대를 졸업하고 1963년 12월 리옹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어 독일 본대학과 프라이부르크대학, 이탈리아 로마 성서대학에서 공부했다. 10년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박 신부는 가톨릭대 신학부에서 16년을 교수로 살았다. 성서신학을 전공했지만, 신약학뿐 아니라 그리스도론도 강의했다.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신학을 한국교회에 전하는 역할을 했으며, 해방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번역서인 「예수 그리스도」「예수와 역사」「나자렛 예수」 등과 저서인 「성서와 그 주변 이야기」등을 통해 신학 연구와 발전에 이바지했다. 1974년 설립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학적 비전을 제공했으며, 이로 인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배후자로 지목돼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조사 후유증으로 1년간 요양했지만, 평생을 하느님 정의와 백성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신했다. 본당 사목도 논산 부창동본당과 신평ㆍ도고 본당 등 3개 본당에서 10여 년밖에 하지 못했다. 1997년부터 8년간 긴 요양 끝에 2005년 1월에 은퇴했고, 은퇴 이후에도 지병인 심장병으로 줄곧 심장박동제어기를 달고 살았다. 제자인 황종렬(레오) 박사는 “올해 늦은 봄에 찾아뵈었을 때도 눈빛이나 말씀이 살아 있으셨는데 이렇게 하느님 품으로 가시니 황망하기 이를 데 없다”며 “평생을 성경과 예수님 안에서 충실하게 머무르셨고, 진리에 대한 믿음을 꺾지 않으셨으며, 주위 사제들, 평신도들과 함께 다 같이 시대를 읽으려고 노력하셨던 분이셨다”고 추모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cpbc2016.10.03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cpbc.co.kr/CMS/newspaper/2016/06/rc/640451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예수님 탄생 예고, 구원의 역사 1막 1장 프라 안젤리코 작 ‘주님 탄생 예고’, 1433년, 코르토나 디오체사노 박물관, 이탈리아 밀라노. 예수님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탄생에 대한 예고로부터 시작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언급 없이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시작합니다. 요한 복음서 역시 짧게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탄생에 대한 예고는 찾을 수 없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탄생에 대한 직접적인 예고 대신 예수님의 족보를 먼저 전합니다(마태 1,1-17). 그렇기에 마태오 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아로서, 그리고 왕들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서 소개합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면서 간략하게 지난 과거의 탄생 예고를 언급합니다(마태 1,18-23). 그리고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건을 이미 구약성경의 예언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합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서 안에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관련해서 가장 풍부한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은 루카 복음서입니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함께 요한 세례자의 출생과 관련된 내용을 함께 전하면서 짜임새 있게 구성해 놓았습니다. 요한 세례자의 출생 예고 예수님의 탄생 예고 요한 세례자의 출생 예수님의 탄생 순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극적인 만남 또한 전해줍니다. 마치 탄생 예고에서부터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의 모든 사건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는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가브리엘 천사의 이 표현은 앞으로 복음서 안에서 보게 될 요한 세례자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즈카르야에게 전해진 요한의 출생 예고는 엘리사벳의 잉태로 확인됩니다. 같은 가브리엘 천사는 그 후 여섯째 달에 마리아를 찾아갑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31-32).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3월 25일에 기념합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12월 25일)로부터 아홉 달을 거꾸로 계산한 날입니다. 이런 전례의 의미를 본다면, 교회는 이미 가브리엘의 탄생 예고 때에 마리아가 잉태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답을 듣고서야 마리아에게서 떠나갑니다.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서 보게 되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천사의 발현에 두려워하고 처음에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예언자들의 소명에 관한 내용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동시에 마리아를 부르시는, 마리아의 소명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탄생의 예고와 요한 세례자의 출생 사이에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이 소개됩니다. 두 여인의 만남은 여전히 지금도 성모송과 마리아의 노래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것을 받아들인 마리아를 칭송하는 이 만남을 매일 기억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믿기 힘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두 여인은 예수의 드라마를 시작하는, 그리고 지금도 기억하도록 하는 가장 큰 조력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단순히 먼저 탄생을 알려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이 이 세상 안에서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알려 주는, 구원 역사를 위한 하나의 사건입니다. 탄생 예고는 미리 앞으로 태어날 아기 예수의 정체성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주님으로 백성들을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구원 역사를 구체적인 인물들을 통해 시작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가톨릭대 성심교정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6.06.14
![[생활 속의 복음] 꼴찌가 됩시다](//cpbc.co.kr/CMS/newspaper/2016/08/rc/649036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꼴찌가 됩시다연중 제21주일 (루카 13,22-30) 주수욱 신부(서울 대방동본당 주임) 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 1등을 하려고 죽도록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1등을 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치열한 경쟁에 들어갑니다. 평생 경쟁하지만 정작 한 사람도 그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 이래로 현대처럼 교육의 기회가 흘러넘치게 제공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모두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인간의 성숙함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생존 투쟁의 장이 돼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절망감은 이루 다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참된 행복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꿈과 이상이 사라지고 더 많은 소유라는 신기루를 좇으며 불나방처럼 죽어가는 사회가 돼버렸습니다. 한국 사회뿐 아니라 온 세계가 희망을 잃고 망연자실한 채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이 안고 있는 깊은 문제입니다.흙수저 예수님그런데 그리스도 신자들은 십자가 밑에 모입니다. 십자가는 꼴찌임을 강력하게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꼴찌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은 흙수저를 문 채 마구간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고향 나자렛은 변두리 세계입니다. 거기서 자라고 변두리 사람의 억양과 말투로, 말씀도 단순하게만 하셨습니다. 그분은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 호숫가를 중심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주로 만난 사람들은 병자, 귀신들린 사람, 배고픈 사람들,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범으로 몰려서 사형수로 죽었습니다. 흙수저를 끝까지 문 채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해서 아드님을 보내셨는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금수저 대신 흙수저를 안긴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기록하듯이, 하느님께서는 흙수저를 문 사람들을 항상 우선하여 선택하십니다.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영광의 때’라고 매우 강조합니다. 카나 혼인잔치에서는 성모 마리아에게 서운하게 대답하면서 ‘저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모호한 말씀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능력을 발휘하시어 아드님도 부활시키셨고, 인간을 모두 부활에 초대하셨기 때문에 하느님 영광의 때를 작정하고 준비하신 것입니다.여종으로 자처하신 성모 마리아 성모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찬송하고 기뻐하면서 자신을 비천한 여종으로 자처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신 성모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자를 자신의 태중에 모셨습니다. 능력을 발휘하시는 하느님께서 성모님 안에서 큰일을 하시고, 미천한 이를 한없이 끌어올리십니다. 성모 승천이 이것을 말해줍니다.당시 유다인 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미련이 없었습니다.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삶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십자가 밑에 모이는 교회는 2000년 역사 속에서 항상 꼴찌가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을 기리는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는 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성경을 충실하게 읽지 않는 교회는 이 복음 정신의 핵심을 놓치고 유혹에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과 달리 유혹에 빠진 교회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한국 순교자들이 그 당시 사회에서 분명히 꼴찌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꼴찌가 돼야 할 차례입니다.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성모님에게 성자를 잉태시키신 성령께서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도 이끄셨습니다. 그렇게 성령께서 이끄셔야 우리도 그 복음적 꼴찌가 되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진정으로 세워집니다. 평화신문2016.08.16
 나병 환자와 중풍 병자를 고치심(5,12-26)](//cpbc.co.kr/CMS/newspaper/2017/06/rc/686089_1.0_titleImage_1.jpg)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19) 나병 환자와 중풍 병자를 고치심(5,12-26)나병 환자의 고백과 믿음에 화답하시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시대에는 세관까지 있던 도시였고 ‘예수님의 도시’라고 할 정도로 예수님 활동의 주 무대였다. 뒤의 새 건물은 시몬 베드로의 집터 위에 세워진 카파르나움 성당.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나병 환자를 고치심(5,12-16)장소가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5,12)라고 루카는 전합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오복음(8,1-4)과 마르코복음(1,40-45)을 참고할 때 이 일이 일어난 지역은 갈릴래아의 어느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지만 나병(한센병)은 예전에는 천형(天刑)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나병을 비롯한 악성 피부병에 걸린 이들은 부정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반인들이 사는 동네에서 함께 살지 못했으며, 그들의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동네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으며,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야 했습니다.(레위 13,45-46 참조) 나병 환자들은 죄인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소외된 이들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런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5,12) 하고 청합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는 것은 나병에 걸린 사람으로서 부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한 시몬 베드로의 태도를 상기시킵니다.(5,8 참조)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청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시며 주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확신한다는 신뢰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십니다.(5,13)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도 얼마든지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을 내밀어 불결과 부정의 표상인 나병 환자에게 대십니다. 손을 댄다는 것, 접촉한다는 것은 받아들임의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나병 환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만이 아니라 불경하다고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통념을, 고정 관념을 불식시키신 것입니다.예수님의 말씀에 “곧 나병이 가셨다”(5,13)고 루카는 기록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갔다’를 순화시켜 ‘나병이 가셨다’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떠나갔다’고 나병을 의인화한 표현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붙어 있었을 때 그 나병 환자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늘 억눌리고 짓밟혀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병이 떠나가게 하심으로써 그 사람을 나병의 억눌림으로부터 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나병 환자를 치유하시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예물을 바치라고 분부십니다. 나병을 비롯한 악성 피부병에 걸린 환자는 깨끗해지면 사제에게 확인을 받고 부정에서 벗어나는 정결예식을 치르는 것이 모세가 정한 율법 규정입니다.(레위 14장 1-31) 예수님의 이 분부는 ‘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8) 하신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루카는 예수님의 분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져나가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왔다”면서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5,15-16)고 기록합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심(5,17-26)마태오복음(9,1)과 마르코복음(2,1)을 참고할 때 이 일화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등장인물이 조금 다릅니다. 군중이나 환자만이 아니라 갈릴래아와 유다는 물론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율법 학자)까지도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들 앞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병을 고쳐 주기도 하고 계셨습니다. 루카는 예수님의 치유가 “주님의 힘”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5,17)그때에 남자 몇 사람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누인 채 데리고 옵니다. 군중이 많아서 예수님 가까이에 갈 수 없게 되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예수님께 내려보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환자에게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이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하시며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5,18-23)이 대목에서 특별히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루카는 그들이 병자의 친인척인지 아니면 이웃인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중풍 병자가 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능히 그러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미음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붕까지 뚫고 병자를 예수님께 내려보낼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뿐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권한까지 있음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며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리에 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시빗거리가 됩니다. 죄의 용서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유다인들의 사고에 비춰볼 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완고함을 꾸짖는 듯 들립니다. 여기서 생각할 게 있습니다. 루카는 이미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5,17)고 전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의 치유 행위가 주님의 힘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질병이 하느님의 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병의 치유 또한 하느님의 일로 여기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예수님 말씀에는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통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중적 잣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생각해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습니다.(5,16) 사람들이 나에 관한 좋은 소문을 듣고 나에게 몰려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요? 2)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5,19)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뿐 아니라 병자의 치유를 바라는 간절함과 진실함이 있었습니다. 선을 지향하는 믿음, 진실함과 간절함이 결부된 믿음은 하늘을 울립니다. 백영민2017.06.21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2.제1장 말씀의 빛 안에서 ① (8~11항)](//cpbc.co.kr/CMS/newspaper/2016/04/rc/632518_1.1_titleImage_1.jpg)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2.제1장 말씀의 빛 안에서 ① (8~11항)하느님 창조의 신비, 가정에서 볼 수 있다「사랑의 기쁨」 제1장(8~30항)은 ‘말씀의 빛 안에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기에서 제목 그대로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혼인과 가정의 본질과 특징을 고찰한다. 혼인과 가정에 관한 성경 말씀은 그냥 거룩한 말씀이 아니다. 성경에는 가정에 관한 이야기들, 탄생과 사랑 이야기들, 가정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 이야기들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마치 우리네 가정들처럼. 그런데 모든 가정의 이야기들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슬기로운 사람이 반석 위에 지은 집과 어리석은 사람이 모래 위에 지은 집이다(마태 7,24-27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비유가 “가족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행동이 빚어낸 가정들의 상황”(8항)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한번쯤 성찰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우리 집, 우리 가정은 반석 위에 지은 ‘든든한 집’인가 아니면 모래 위에 지은 ‘부실한 집’인가 하는 것이다. 든든한 집이라면 비바람이 몰아치고 강물이 밀려들어도, 곧 온갖 어려움이 닥쳐도 붕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실한 집이라면 조금만 비바람이 불고 강물이 밀려오면 금방 무너지고 말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그 반석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물음들과 관련,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편 128장 1-6절에 나오는 한 가정의 풍경을 예로 들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8항). 독자들은 꼭 이 시편 구절을 한번 정독해 보시길 바란다. 집은 기초를 놓고 짓듯이 가정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출발한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된다”(창세 2,24). 둘이 결합해 한 몸을 이루는 이 한 쌍의 남녀는 어떤 존재인가? 교황은 창세기 첫 장의 말씀으로 이를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프란치스코 교황은 창세기 이 구절에서 하느님의 모습이 ‘남자와 여자’라는 쌍을 가리키고 있음을 주목한다(10항).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됐다고 해서 하느님이 남성과 여성을 다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느님은 남성 여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친절한 설명과 함께 교황은 핵심을 건드린다. “하느님의 초월은 보존되지만,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신 만큼, 한 쌍의 인간이 이루는 결실(자녀)은 하느님의 창조적 행위의 효과적인 ‘모습’, 즉 볼 수 있는 표징”이라는 것이다(10항). 그래서 교황은 이렇게 밝힌다. “부부의 결실을 맺는 관계는 하느님 자신의 신비를 이해하고 묘사하기 위한 ‘모습’이 됩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시각에서, 하느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사랑의 영으로 관조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사랑의 친교이고, 가정은 그 생생한 반영입니다”(11항). 가정은 그래서 하느님의 존재 자체와 무관하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기서 선대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직 초기인 1979년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에 참석하러 멕시코 푸에블라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행한 미사 강론 말씀을 인용한다. “당신의 가장 깊은 신비에 있어서 우리의 하느님은 고독이 아니라 하나의 가정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안에 아버지 됨과 아들 됨 그리고 가정의 본질인 사랑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신적 가정에서, 그 사랑은 성령입니다”(11항). 여기에서 우리 가정의 현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성찰할 수 있다. 우리 가정은 반석 위의 가정인가 아니면 모래 위의 가정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부부는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가? 우리 부부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듯이 서로 그렇게 대하는가? 우리 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사랑의 친교를 반영하고 있는가?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백영민2016.04.27
![[평양의 순교자들] ②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cpbc.co.kr/CMS/newspaper/2017/04/rc/677280_1.1_titleImage_1.jpg)
[평양의 순교자들] ②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일제와 공산당 탄압에도 목자 소임 다하다 순교 ‘시련기를 살다간’ 사제였다. 사제품을 받은 시기도, 주교로 임명돼 주교품을 받은 시기도, 해방 이후 주교로 살았던 시기도 시련과 박해와 순교로 점철했다. 그러나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시련을 극복하며 지극한 사랑으로 신앙의 모범을 드러냈고 순교의 화관을 썼다. 홍 주교는 1906년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 감6리(현 평남 평원군 화진리) 태생이다. 국운이 기울던 대한제국 시대에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어머니도 보통학교 5학년 때 잃었다. 이웃 동네로 시집간 누이 홍 마리아와 자형 최남현(다니엘)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홍 주교의 본적지가 누이의 주소(한천면 감7리 327)로 돼 있는 것도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시사한다. 그런데 누이도 몹시 빈곤했다. 홍 주교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일찍부터 자립했다. 15세 어린 나이에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제 성소를 꿈꿨다. 신학생 시절의 홍 주교는 ‘책벌레’로 소문났다. 쉬는 시간조차도 책을 읽는 데 열중했고, 영어를 독학하는 데 몰두했다. 당시 신학교에선 라틴어와 프랑스어 외에 다른 외국어 학습을 못 하게 했는데도 혼자서 영어를 익혔고, 이 같은 선견지명은 훗날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평안도 선교를 맡게 되면서 빛난다. 어렵게 신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1933년 5월 25일 평양 관후리주교좌성당에서 서울대목구장 아드리앙 조제프 라리보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는다. 양기섭, 강영걸 신부에 이어 평양교구 사상 세 번째 본토인(本土人) 사제였다. 평신도 중심의 전교 운동 활성화관후리본당 보좌로 사목을 시작한 홍 신부는 1934년 1월 평양교구에서 월간 「가톨릭 연구」를 창간해 초대 사장을 맡았고, 교리 강좌와 함께 성경과 교회사, 전례 해설 등을 통해 신자들의 신심 생활에 도움을 줬다. 아울러 1934년 ‘평양지목구 가톨릭운동연맹’이 조직되면서 의장에 임명돼 평신도 중심의 전교 운동을 활성화했다. 1936년 3월 지목구장 비서로 서포교구청에 있다가 1936년 8∼12월 영유본당 주임으로 가면서 ‘소년단’을 조직했다. 1937년 1월에는 지목구 출판사를 전담하게 되면서 「가톨릭 연구」를 「가톨릭 조선」으로 개칭한 뒤 사장 겸 주필로서 문서 선교에 앞장섰다. ‘평양교구 봉헌문’을 지어 교구 신자들이 한마음이 돼 기도하도록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1938년 12월 일제가 우리 말과 글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면서 「가톨릭 조선」은 폐간됐다. 어려움 속에서도 1939년 7월 11일 평양지목구가 평양대목구로 승격되는 기쁨을 맛봤지만, 이 기쁨도 잠시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전원 감금되면서 홍 신부 또한 순천경찰서에 잡혀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2년 2월 평양대목구장 윌리엄 오세아 주교 역시 연금된 상태여서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가 교구장 서리를 맡았지만, 노 주교 혼자서 서울과 평안도 전역을 관할하기 어려웠다. 노 주교는 석방된 홍 신부에게 평양대목구장 서리 직무대행을 맡겼다. 홍 신부는 대목구 공동체의 자립정신 함양과 함께 성직자 양성의 중요성, 신심 강화 등에 역점을 두고 사목했다. 이어 1943년 3월 9일 제6대 평양대목구장에 임명돼 3월 21일 대목구장으로 착좌했다.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1944년 2월 일제에 관후리성당과 대지, 부속건물을 징발당했고, 성당을 허문 자리에는 고사포 부대가 들어섰다. 1944년 4월 주교로 임명됐지만, 그해 6월의 주교 서품 미사는 일제가 관후리성당 대신 내준 개신교 예배당 산정현교회에서 봉헌해야 했다. 박해와 순교의 길을 걷다해방 이후 평양대목구의 5년은 ‘박해와 순교’로 얼룩졌다. 일제에 빼앗겼던 관후리주교좌성당 부지를 되찾아 새로이 대성당을 건축했고, 1947년 9월 1일 정초식을 거행하며 홍 주교가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께 바치는 봉헌문’을 지어 낭독까지 했다. 하지만 공산 정권의 노골적 박해는 계속됐다. 평양시 인민위원회는 1948년 12월 28일 관후리성당 건물을 이듬해 1월 3일까지 정부에 양도하라고 통고했고, 결국은 1949년 12월 몰수해 갔다. 운명의 날은 1949년 5월 14일이다. 이에 앞서 5월 7일 함흥대목구장 겸 덕원자치수도원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의 요청으로 덕원에 갔던 홍 주교는 사우어 주교아빠스로부터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체포되면 자신의 교구를 보살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5월 9일 사우어 주교아빠스가 체포됐고, 홍 주교마저도 5월 14일 서포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첫 종신 서원자 면담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오던 중 체포되면서 행방불명됐다. 그 뒤 부감목(현 총대리) 김필현 신부가 백방으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홍 주교는 평양인민교화소 특별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당시 홍 주교와 같이 끌려간 두 소년과 함께 같은 감방에 갇혀 있다 풀려난 김원우(아명 김인국)씨의 증언도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을 지내고 1959년 소련으로 돌아간 박길룡 박사의 증언으로는 홍 주교는 평양 수복 직전인 1950년 10월 18일 같은 감옥에 수감돼 있던 조만식(1883∼1950) 선생 등과 함께 북한 내무성 정보처 한규만 소좌 등에 의해 총살됐다. 홍 주교의 나이 44세였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김현진2017.04.05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3.제1장 말씀의 빛 안에서 ② (12~18항)](//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3819_1.1_titleImage_1.jpg)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3.제1장 말씀의 빛 안에서 ② (12~18항)자녀 신앙 농사 망치면 집안 교회 대 끊긴다 혼인과 가정은 남녀가 부부의 인연을 맺음으로써 시작한다. 부부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창세기 첫 장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남자는 동물들과 주변 세상 가운데서 느끼는 고독을 덜어줄,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창세 2,18.20)를 애타게 찾고 있다”(12항). 그 짝은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의 다른 표현을 인용하면 남자에게 “뜻이 맞는 협조자요 의지할 기둥이 되는”(집회 36,29) 여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가의 한 대목도 인용한다.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 나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아가 2,16; 6,3).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 의지할 기둥, 자기의 고독을 덜어줄 짝을 찾던 남자는 자기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여인을 만난다. 이 만남은 두 남녀를 결합하게 하고 한몸이 되게 한다. 이로써 혼인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가정이 시작된다. 둘이 한몸이 되게 하는 이 결합은 어떤 결합일까? 교황은 혼인의 결합은 “성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서로를 내어주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결합으로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마음과 삶의 결합에서, 그리고 마침내는 자녀에게서 한몸이 된다”고 설명한다. “자녀는 유전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부모의 ‘몸’을 나누어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13항). 부부의 결합(혼인)이 지니는 의미를 이같이 제시한 교황은 이제 부부를 토대로 그 자녀가 함께 이루는 가정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계속해서 성경을 인용하면서 고찰한다(14~18항). 부모는 어떤 의미에서 가정의 토대, 기초다. 그렇다면 자녀는 무엇에 비길까. 교황은 자녀들을 “가정의 ‘살아 있는 돌’”(14항)과 같다고 본다. ‘살아 있는 돌’이란 신약 성경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 나오는 표현이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1베드 2,5). 가정에서 살아 있는 돌인 자녀들의 존재는 대대로 이어지는 가정의 연속성에 대한 표시다. 교황은 이어 “집에 모이는 교회”(1코린 16,19 등)라는 성경의 표현에 주목하면서 가족의 생활 공간인 가정은 그 안에 그리스도를 모실 때 집안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밝힌다. 여기서 한 가지 의미 있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가정이 집안 교회로서 대를 이어 가면서 연속성을 유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자녀에 대한 신앙 교육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녀를 신앙 안에서 키우는 장소”인 가정에서 “부모는 신앙에 있어서 자녀들의 첫 교사가 된다”면서(16항), “부모는 이 교육에 진지한 책임을 진다”(17항)고 강조한다. 반면에 자녀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탈출 20,12)는 계명을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한다. 여기서 ‘공경한다’는 표현은 말로만 때우는 것이 아니라(마르 7,11-13 참조),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이행한다는 것과 관련된다고 교황은 설명한다(17항). 그런데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기들이 꾸려가야 할 고유한 삶이 있다”(18항)고 교황은 적시한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가정에서 신앙으로 양육되는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자기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리고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부모와 가족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님을 이 삶의 모델로 제시한다. 어린 예수는 지상의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을 뿐 아니라(루카 2,51 참조), 열두 살 때는 더 큰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 지상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알려 주었다(루카 2,48-50 참조).나아가 예수님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루카 8,21)이라며 가정 안에서도 믿음과 그에 따른 실천이라는 더 깊은 유대의 필요성을 제시하신다. 그뿐 아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어린이들에게서 오히려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두 가지만 성찰하자. ①우리 가정은 집안 교회인가. 그래서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고,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첫 교사 역할을 하고 있는가. ②부모로서 자녀를 소유물, 혹은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해 줄 존재로 여기는가, 아니면 자녀의 인격과 고유한 개성을 존중하는가.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백영민2016.05.04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4.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요한 15,1)](//cpbc.co.kr/CMS/newspaper/2017/02/rc/669917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4.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요한 15,1) 정미연 작 ‘참포도나무의 예수님’, 2015. 가톨릭굿뉴스 제공 요한복음은 14장부터 17장까지 상당히 긴 예수님의 담화를 전합니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흔히 ‘고별 담화’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 이전에,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공관 복음은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셨다는 내용을 짧게 전하는 반면에 요한은 성령과 세상 그리고 제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긴 담화를 소개합니다. 그중에서 요한복음 15장 1-17절은 포도나무의 표상을 통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넓은 의미의 제자들에게 권고하는 예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머물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요한복음의 이 표현은 ‘믿음’을 대신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머물러 있다는 것은 상당히 정적(靜的) 표현이지만 요한에게서 이 표현은 예수님과 맺는 관계의 역동성을 나타냅니다. 단순히 머물러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머무는,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예수님의 현존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믿음’보다 더 역동적이면서 생생함을 전하는 의미로 ‘머무름’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포도나무는 성경에서 하느님과 그의 백성들, 곧 믿는 이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전통적인 표상입니다. 가지가 나무 없이 살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지에 양분이 공급되고 그것을 통해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에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자연적인 현상들은 예수님과 믿는 이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적용됩니다. 포도나무가 그러하듯 예수님과 믿는 이들의 관계는 유기적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양분을 공급받으며 열매를 맺기 위해 필수적인 모습입니다. 가지는 살아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나무로부터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믿음 안에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단지 외형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적인 역동성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열매 맺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있을 때 가능합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있다는 것은, 예수님 역시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다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또한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요한복음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시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은 형제적인 이웃 사랑의 근거가 됩니다.(요한 3,16)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의 의미는 공관 복음에서 표현하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마르 12,28-34) 요한은 이것을 포도나무의 표상을 통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담화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포도나무를 통한 말씀은 한 개인을 향한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향한 가르침입니다. 공동체의 가장 큰 특성은 사랑입니다.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지속됩니다. 이 모든 사랑의 근원은 하느님입니다. 믿음은 수직적으로 이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면서 수평적으로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7.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