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풀이] <4>](//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6447_1.0_titleImage_1.jpg)
[미사 풀이] III. 미사의 각 부분 나. 말씀 전례(1) 말씀 전례의 중심 부분은 성경에서 뽑은 독서들과 그 사이의 노래들로 이루어집니다. 강론, 신앙고백, 보편 지향 기도는 이 중심 부분을 더 발전시키고 완결짓습니다. 침묵 말씀 전례는 묵상을 북돋우는 방식으로 거행돼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모으는 데 방해가 되는 온갖 형태의 조급함을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또 말씀 전례를 거행하는 동안에 회중의 특성에 맞게 짧은 침묵 시간을 두어야 합니다. 말씀 전례를 시작하기 전, 첫째 독서와 둘째 독서 다음, 그리고 강론 다음에도 알맞게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이 침묵 시간에 신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기도로 응답할 준비를 합니다. 성경 독서 성경 독서로 신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의 식탁이 마련되고 성경 보물의 곳간이 열립니다. 이 독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구속과 구원의 신비를 열어 보이시며 영적 양식을 주십니다. 성경 독서는 신약과 구약의 일관성과 구원 역사의 연계성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또 하느님 말씀을 담고 있는 독서와 화답송을 성경이 아닌 다른 본문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회중과 함께 드리는 미사에서 독서는 언제나 독서대에서 선포합니다. 전통에 따라서 성경 독서는 주례자가 아닌 봉사자가 맡습니다. 독서자가 독서를 하고, 주례 사제가 아닌 다른 사제나 부제가 복음을 봉독합니다. 그러나 부제가 없고 사제 혼자 미사를 거행할 때는 주례 사제 자신이 복음을 봉독합니다.복음 봉독은 말씀 전례의 정점입니다. 복음에 특별한 영예를 나타내는 표시로 가장 큰 경의를 보입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를 하도록 정해진 봉사자(주례자가 아닌 사제나 부제)는 강복을 받거나 기도를 바치면서 복음 선포를 준비하고, 신자들은 환호로써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계시며 자신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경의 표시로 복음은 서서 듣습니다. 또 「복음집」에도 경의를 표합니다. 화답송 화답송은 독서에서 봉독된 하느님 말씀을 잘 묵상하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말씀 전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화답송은 각 독서 내용에 어울려야 하며, 원칙적으로 전례 「독서집」에 있는 것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독서집」에 지정된 시편 대신 「로마 성가집」이나 「소성가집」 혹은 교황청이 승인한 다른 성가집에 실린 고유한 노래와 시편을 쓸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주교회의 또는 교구장 주교가 승인한 시편 모음, 따름 노래집, 성가집에 나오는 시편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다른 시가나 노래는 화답송으로 바칠 수 없습니다. 화답송은 적어도 신자들이 맡는 후렴 부분은 노래로 바치게 돼 있습니다. 시편 선창자는 독서대나 다른 적절한 자리에서 시편 구절을 노래하며 회중 전체는 앉아서 듣습니다. 신자들은 후렴을 바침으로써 화답송에 참여합니다. 복음 환호송 복음 바로 앞에 나오는 독서가 끝나면, 전례 시기에 따른 예식 규정대로 ‘알렐루야’나 그 밖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 복음 환호송을 통해 신자들은 복음 선포에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실 주님을 환영하고 찬양하며 또 그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복음 환호송을 바칠 때는 모두 일어섭니다. 이 노래는 성가대 또는 선창자가 인도하며 필요에 따라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따라오는 구절은 성가대나 선창자가 노래합니다. 부속가를 바칠 때는 알렐루야 앞에 바칩니다. 부속가는 부활 주일과 성령 강림 주일에 하는 부속가 외에는 자유롭게 바칠 수 있습니다. 정리=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백영민2016.01.27

예수 자비하심을 체험하는 지름길은 성체 [특별기고]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성인 유해 공경은 경계해야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을 모심으로써, 또 성체 앞에서 묵상하고 조배함으로써 우리는 예수 성심, 그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체험하게 된다. 이힘 기자 lensman@cpbc.co.kr우리는 예수성심성월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에 대해 묵상한다. 특히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마음 아파하시며 그들을 위로하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예수 성심의 신비 안에서, 여러 인간사와 세상사로 인해 상처받고 아파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위로를 받고 치유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과 자비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현존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며 행하셨던 치유와 구마의 기적이 나온다. 기적을 행하시는 이유는 아픈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고 가엾이 여기시는 그 자비롭고 온유한 마음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을 모시고, 또 성체 앞에서 묵상을 하고 조배를 하면서 바로 이러한 예수 성심, 그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체험하게 된다.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해 피 흘리고 상처받으신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우리의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이 쉬게 되고 위로와 치유를 받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신다”(시편 34,19)는 말씀이 이제 예수 성심 안에서 이뤄진다. 12사도의 유해가 담겼다고 하는 성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 소속되어 전국 차원의 활동을 펼치는 여러 전국위원회 중에 신앙교리위원회(위원장 손희송 주교)가 있다. 신앙교리위원회는 국내에서 발생하는 신앙 교리에 관련한 문제들을 다루고 조사하며, 식별하고 판단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필자는 현재 신앙교리위원회의 위원이자 총무로서 활동하고 있다. 신앙교리위원회에서는 시대와 상황의 필요에 따라 자체적인 문헌을 만들어 발표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여러 경로의 제보나 보고를 통해 접수된 신앙 교리에 관한 문제점들을 직접 다루게 된다. 그런데 최근 초대 교회 때의 12사도의 유해가 담겼다고 하는 성광 사진이 소셜네트워크(SNS)를 통해 신자들 사이에 유포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게 됐다. 즉, 그저 그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 은사와 영성이 넘친다고 하는 메시지와 함께 12사도의 유해를 담았다고 하는 성광의 컬러 사진이 카카오톡으로 유포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앙교리위원회 위원들은 회의를 통해 많은 토의를 했으며, 모두가 일치해 이 현상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게 됐다. 이러한 사진과 메시지의 유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들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첫째, 12사도의 유해를 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 해서 그러한 유해를 입수하게 됐는지 그 원천적 경위나 출처에 대한 설명이 없다. 역사를 돌이켜보자. 초대 교회부터 중세 시대를 거치기까지 성인 유해 공경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성인 공경의 아름다운 전통에 참여하게 됐다. 하지만 동시에, 과도한 유해 공경과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유해 약탈이 속출하기도 했고, 그로 인해 진짜 유해와 가짜 유해가 구분되지 않고 여러 지역에서 중복해 소장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성인 유해 공경은 교회의 허락을 받아 이뤄져야 한다. 교회의 교도권은, 성인들 특히 순교자의 유해 공경에 있어 확실하고 ‘진정한’ 유해가 아니면 인정할 수 없다는 지침을 역사 안에서 거듭 확인해 왔다. 그런데 오늘날 갑자기 우리나라에서 12사도의 유해를 모두 한데 모은 성광이 출현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그에 대한 확실한 교회사적 근거가 없다면 이는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유해 공경은 유해라는 ‘사물’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유해를 통해 드러나는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 유해는 표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유해의 진정성에 관한 문제는 별개로 본다 하더라도, 유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치유의 은사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주장이다. 이것은 유해라는 ‘사물’ 자체의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힘을 믿게끔 유도하는 오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사가 아니다. 만일 성인 유해라는 표지를 통해 그 신앙의 모범을 본받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성인들에 대한 공경이 이뤄지고 성인들의 전구를 간절히 청하게 된다면,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뜻과 범위에 따라 은총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유해는 내적 은총을 받기 위한 외적 요인이자 표지 혹은 도구일 뿐이지, 그 자체로 자동적인 은총의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한다. 셋째, 은사에 대한 오해가 있다. 은사는 교회의 공동체적 필요와 봉사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에 개인의 영예를 위해 이례적인 은총을 청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1코린 12,9)가 주어질 수도 있지만, 이는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1코린 12,11)이다. 즉, 은사는 인간의 기대와 생각을 뛰어넘어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것처럼”(요한 3,8) 활동하시는 성령께서 직접 주시는 것이다. 사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계적, 자동적으로 은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은사의 진실성과 올바른 실천에 관한 판단은 교회 교도권에 속하는 것이다. 넷째, 우리는 성인들에 대한 ‘공경’을 통해 마침내 하느님을 향한 ‘흠숭’에로 나아가야 한다. 즉, 성인들을 향한 ‘공경지례’와 삼위일체 하느님을 향한 ‘흠숭지례’는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성인을 공경하는 이유는 먼저 그분들 삶의 모범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전구를 통해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도록 성인들에게 청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과장된 성인 유해 공경으로 인해 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려야 할 찬미와 흠숭이 소홀해지거나 불충실하게 돼서는 안 된다. 또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는 것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무이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과 신비에 대한 경시와 간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진정한 치유를 향하여 오늘날 웰빙과 힐링의 문화가 널리 퍼져 있다. 사실 이는 현대인들의 불안감과 내적 피폐함, 그리고 영적 빈곤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 사회 안에 퍼지고 있는 일부 저급한 웰빙 문화 식의 치유 흐름이 교회 안에도 번져서는 안 될 것이다. 출처가 불분명한 성인 유해를 찾아 헤매며 현혹되는 것은 그만큼 신앙의 미성숙함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아 우리는 미사와 성체강복, 성체조배를 통해 예수 성심을 묵상하며 그 신비 안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직접 모시지 않는가? 이것보다 더 큰 은총과 기적이 어디 있는가? 이 예수성심성월에 우리가 진정 온 마음을 다해 바라보며 깊이 묵상해야 할 대상은 불확실한 유해가 담긴 성광이나 그 사진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가 모셔진 성광과 감실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자비로운 마음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치유를 선사할 것이다. 박준양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 교황청 국제신학위원)백영민2017.06.14
 기브온](//cpbc.co.kr/CMS/newspaper/2015/01/rc/55236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35) 기브온약삭빠른 동맹으로 전쟁의 화 면해 예리코 평원. 뒤로는 유다 산악 지형. 출처=「성경 역사 지도」,분도출판사 기브온은 솔로몬이 하느님께 번제물을 드리고 지혜를 선물 받게 된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임금은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갔다. 그곳이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 제단 위에서 번제물을 천 마리씩 바치곤 하였다”(1열왕 3,4). 기브온은 기원전 12세기 이후 언덕을 둘러싸고 있었던 거대한 성벽으로 도시를 이뤘다. 이곳에서는 성벽 내 사람들을 위한 거대한 지하 물 저장고가 발견되기도 했다. 고대 가나안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 여름에는 특별히 물 저장소를 만들어 주거지 주위에 뒀다. 기원전 8~7세기께 기브온은 유다 왕국의 포도주를 책임지는 도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 발견된 포도주 공장 지역에서는 63개의 포도주 저장용 장소가 있었다. 기브온은 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여호수아와 관련된 대목이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을 정복하자 기브온 주민은 여호수아가 예리코와 아이에서 한 일을 듣고서,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기브온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종을 자처하면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먼 고장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여호수아는 그들과 평화롭게 지내기로 하고 그들을 살려 준다는 계약을 맺었다. 사흘 후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의 정체를 알게 됐지만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조약을 맺은 백성이었기에 기브온과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기브온과 동맹을 맺은 이스라엘은 중앙 산악지를 장악하게 되어 가나안에 대해 더욱 큰 지배력을 가지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왕 아도니 체덱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해 가나안 남쪽 지역의 왕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임금, 헤브론 임금, 야르뭇 임금, 라키스 임금, 에글론 임금, 이렇게 아모리족의 다섯 임금과 그들의 모든 군대가 모여 올라와서, 기브온을 향하여 진을 치고 싸움을 걸었다”(여호 10,5). 기브온 사람들은 길갈 진영으로 여호수아에게 전갈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계곡 위에 있는 기브온의 지형 탓에 이곳을 공격하려는 연합 군대들은 계속 아래쪽에 진영을 갖췄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길갈에서 야간에 병력을 이동시켰고 공격을 감행했다. “여호수아는 길갈을 떠나 밤새도록 올라가서 그들에게 갑자기 들이닥쳤다”(여호 10.9). 고대 군사 전문가들은 여호수아가 새벽에 아침 해를 등지고 아직 잠들어 있는 군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섬멸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또 한 번 여호수아의 뛰어난 군사 지략과 결단력이 드러난 전투였던 것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에게 상당한 두려움을 줬다. 여호수아와 조약을 맺은 것으로 정복 전쟁의 희생을 피한 기브온은 베냐민 지파의 땅이 됐고(여호 18,25), 레위 지파의 도시가 됐다. “또 벤야민 지파에서는 기브온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게바와 거기에 딸린 목초지, 아나톳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알몬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이렇게 네 성읍을 내주었다”(여호 21,17-18).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5.01.28
 사마리아](//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524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32) 사마리아사마리아인은 왜 사마리아인이 되었나 사마리아는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중부 지방인 팔레스티나를 가리키던 지역명이다. 북쪽으로는 갈릴래아, 남쪽으로는 유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서쪽에 지중해가 있고 동쪽으로 요르단 강이 흐른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했을 당시 사마리아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은 가나안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지에 발판을 마련했으나 이웃 평원이나 골짜기에 있던 가나안의 핵심적 거점들은 다윗왕 시대에 와서야 차지할 수 있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지역은 요셉의 가문, 곧 에프라임 지파와 므나쎄 분파에게 할당된 곳이었다. 지금의 나불루스 근처에 있던 고대 세켐 지방이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당시에 도로들의 교차점이자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이 세메르에게 은 두 달란트를 주고 매입해 그 산 위에 건축한 성을 산 주인이었던 세메르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사마리아 산을 세메르에게서 은 두 탈렌트로 산 뒤, 그 산을 요새로 만들고 자기가 세운 성읍의 이름을, 산의 본래 소유자인 세메르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1열왕 16,24). 구약 시대에 열두 부족이 가나안 땅을 분할 소유할 때 에프라임족과 므나쎄족이 후에 사마리아 지방이라 불리게 될 부분을 소유하였다. 사울, 다윗, 솔로몬 등의 시대에 남북은 통일돼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10세기에 솔로몬 왕이 죽은 뒤 사마리아는 북왕국, 즉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과 갈라지게 됐다. 이스라엘 왕국의 첫 수도는 티르자에 있었고 이어 오므리왕 시대에는 당시 세켐에서 사마리아로 옮겨졌다. 북왕국은 대체로 남쪽의 유다 왕국보다 세력이 더 강했으며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그 뒤에 여러 강대국의 입김에 사마리아는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잡혼 성행하자 유다인이 사마리아인 멸시본래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민족의 한 분파였다. 그런데 기원전 722년께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점령당한다. 황제였던 사르곤 2세는 주민 3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열 개 지파가 사라지게 됐다. 그리고 사마리아에는 각지에서 몰려온 이민족을 이주시켜 자리 잡고 살도록 하는 식민지 정책으로 잡혼을 실시했다. 사마리아 지역은 종족 간 피가 섞이게 됐고, 그래서 유다인은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을 이방인이라 부르고 원수지간처럼 지냈다. 이후 유다인은 사마리아인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경멸했다. 유다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조차 말을 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다(요한 4,8-9). 그러다 기원전 587년 남쪽 유다 왕국도 바빌론에게 멸망하게 된다. 나중에 바빌론에서 본토로 귀환한 유다인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던 무렵부터 유다인과 사마리아인과의 반목과 대립은 더 심해졌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참된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즈루빠벨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사마리아인은 오직 구약 성경의 오경만을 그들의 유일한 경전으로 여기고 세켐이나 그리심 산 중턱 등에 오늘날까지 일부 남아 있다. 현재 사마리아는 요르단의 북서부로 편입돼 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평화신문2014.12.16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연구자 김구정](//cpbc.co.kr/CMS/newspaper/2016/10/rc/656045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연구자 김구정<10·끝> 말하는 글쟁이, 그의 가톨릭 정신 김구정이 전교회장을 맡은 신암본당의 고등부가 선보인 ‘피묻은 쌍백합’ 공연에 참가한 학생들과 당시 본당 보좌 신부였던 고(故)최영수 대주교, 1970. 교회사 연구와 이를 대중화하기 위한 강연은 서로 다른 영역이다. 교회사 연구는 또한 직접적인 교회 홍보나 선교와도 구별되는 분야다. 그러나 오랫동안 우리 교회는 이 모두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해 왔다. 김구정은 당대에 사람의 심금을 울린 교회사가이고 작가며 강연자였다. 이 모든 분야에 신명이 있던 사람이었다.김구정은 신앙을 주제로 폭넓은 분야의 글을 썼다.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시, 소설, 극본, 역사 등 모든 장르를 넘나들었다. 그는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던 순교자들의 문학 정신을 이어받아 자신도 천주가사를 지었다. 이렇게 다양하게 활동하다 보니 그가 사용하는 이름도 많았다. 김구정은 본인 이름 이외에 이냐시오, 지원, 달성선인(達城仙人), 금솥 등으로 글을 썼다. 그 밖에 달선생, K 기자 같은 이름도 보인다.순교사 전파하며 신앙의 모범 보여그는 종이 위에 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자신이 직접 강연하며 신앙을 전파했다. 그는 박해시대 신자들의 일상사를 마치 옆집 아저씨네 집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듯이 엮어갔다. 그래서 1970년대까지 대구교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사였다. 또 그는 직접 순교극 대본을 쓰고 무대에 올리고 연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여러 본당에서 연극으로 공연됐다. 그는 일찍이 1934년 조선교회 150주년 기념대회를 계기로 병인박해를 배경으로 한 순교성극 「거룩한 피」를 썼다. 해방 이후에는 이순이 루갈다와 성웅 김대건 등에 관한 희곡을 썼다. 그는 이렇게 신자 대중에게 순교사를 체험토록 했다. 그는 또 트럼펫을 잘 다뤘고, 오르간도 쳤다. 이는 신학교 교육의 산물인 듯싶다. 물론 대구교구는 1910년대 명도회, 그 이후 성유스티노신학교에 브라스밴드를 운영하고 있었고, 이러한 문화적 환경은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을 고조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산대학에서처럼 자신이 거쳤던 학교의 교가도 지었다. 김구정은 고향인 신암본당에 돌아와서 전교회장을 했고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단장도 했다. 그는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세 시가 되면 어김없이 성체조배를 했다. 조배 후에는 성당 문앞에 있는 김기연의 집으로 가서 바둑을 두며 소주 한 병을 반주 삼아 부부 앞에서 순교사화를 구수하게 풀어놓았다. 그는 순교사를 썼으니 이제 성모님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되뇌었으나, 그 숙제를 우리 몫으로 남겼다. 대구대교구에서는 1981년 김구정에게 교구 설정 70주년 공로상을 수여했다. 김구정은 평생 성무일도를 바친 평신도였다. 그는 라틴어로 성무일도를 바쳤다. 자다가도 성무일도를 꼭 챙겼다. 프랑스어도 잘해 프랑스어로 된 기도서를 들고 다녔다. 그가 성경을 읽으면 성당이 쩌렁쩌렁 울렸다. 소리는 낭랑해서 모두 빨려 들어갔다. 그는 성경을 읽을 때는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읽으라고 당부하곤 했다. 순교 현장 누비며 순교 정신 기려김구정은 책을 집필할 때마다 짐을 싸들고 생각이 집중되는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몇 달씩 머물다 돌아오곤 했다. 그는 순교자들이 피 흘린 현장을 누비며 그 정신을 기렸고, 지방 교구의 발자취를 좇았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이 그에게 교회사 정보를 제공하거나 찾아왔다. 그리하여 그는 진목정, 정난주 묘 등 성지 개발에도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대구교구의 신나무골 성지 역사를 밝혔는데, 1977년 그가 쓴 비가 마을 앞에 세워졌다. 또한 그는 1868년 울산에서 순교한 이양등, 허인백, 김종륜 등의 묘소가 있던 경주시 산내면에 소재한 진목정의 유래를 밝혔다. 이때 순교자에게 감동한 호랑이 사연도 발굴해 냈다. 박해를 당해 순교자 세 가족이 진목정 뒤편 산 아래 단수골에 이르러 큰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 그곳에 피신했다. 밤에 호랑이 두 마리가 굴 앞에 나타났으니 그곳이 바로 호랑이 굴이었다. 이때 죽기를 각오한 허인백이 사정을 설명하고 박해가 그치면 돌아갈 테니 그동안 집을 좀 빌리자고 애원했다. 그 말을 듣고 맹수들이 어슬렁어슬렁 가버렸다고 한다. 김구정은 황사영의 부인인 정난주의 묘도 확인했다. 1970년에 그는 대구에서 황사영의 4대손 황찬수를 만나 그로부터 관련 자료를 받았다. 김구정은 1973년 김병준 신부의 도움으로 정난주의 무덤을 확인했다. 정난주는 1838년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 37년 만에 선종했다. 그런데 1909년 제주본당 2대 주임 라크루 신부가 추자도를 사목 방문했다가 황사영의 증손자를 만나 정난주의 생애를 듣게 됐다. 라크루 신부가 정난주의 삶을 프랑스에서 간행되던 전교지 「가톨릭 선교」에 소개하자, 프랑스에서 익명의 후원금이 답지했다. 라크루 신부는 황사영의 후손에게 집과 밭을 사줬으며, 이때 정난주가 유배 생활 중에 아들에게 보낸 서한을 얻었다. 김구정이 확인한 정난주의 묘는 오늘날 제주교구의 대표적 성지가 됐다.교회와 사회 관계 중시하며 교회사 연구김구정의 교회사 연구는 세계 교회사를 바탕으로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세계적 종교며, 교회사는 사상과 교리뿐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커다란 조직체의 역사라고 인식했다. 그는 인류 역사는 그리스도교를 떠날 수 없고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세계 역사의 정수라고 주장했다. 김구정은 또 가톨릭이 문명을 개화시켰고, 사회에 선한 이득을 끼쳤다고 믿었다. 그의 역사에 대한 생각과 이를 전달하는 메시지는 웅장했다. 그의 천주교와 한국사 이해는 이 맥락에서 전개됐다. 그는 천주교가 도입되기 전의 한국사는 암흑이라고 보았다. 이벽이 「천주실의」를 읽은 것은 동방박사가 예수 탄생을 예고하는 별을 본 것과 같았다. 그리고 이승훈이 영세함으로써 4000년의 밤이 새기 시작했다. 이벽과 이승훈 등 초기 신자들의 움직임은 동트는 새벽에 호미와 괭이를 잡고, 4000년 묵은 황야 삼천리를 개척하려는 생(生)의 약동이었다. 그렇게 이 땅에는 새벽이 오고야 말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 혜택을 누리려면 한국은 순교 정신으로 통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복식을 소개하면서 우리 복자들은 이러한 대사상을 이 땅에 수입해 이 민족에게 참된 행복과 문화를 베풀다가 희생됐고,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을 세계에 소개했다고 주장했다. 사상적 혼란에 고민하는 조선은 조선 순교복자의 열로 모든 병든 사상을 불사르면 참된 행복을 누리리라고 역설했다. 동시에 그는 시대와 사상은 유행을 탄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가톨릭은 시대를 초월한 처세 철학을 가르치는 영원한 진리다. 그러므로 세속인이 시대에 살려고 배우는 것과는 달리 시대에 속지 않기 위해 또 시대를 확고 불변한 진리로 지도하기 위해 가톨릭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원래 역사는 사건과 해석의 결합을 말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결합 작업을 본격적인 전문 분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김구정은 역사 연구 방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훈련을 받은 바가 없었다. 그는 박해 시대의 자료를 모으고 그 증언을 기록해 내는 작업을 교회사라고 생각했고, 이를 실천했다. 오늘날의 엄격한 기준으로 볼 때 그를 전문적 역사학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는 열정적으로 우리의 교회사를 전해 주었고, 사료를 모았다. 현장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 거기에서 교회사의 편린이라도 찾고자 했다. 이러한 데에서 그가 발휘했던 시대적 사명과 역할을 확인하게 된다. 교회사연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聖殿)을 짓는 작업이다. 성전은 내가 쌓지만 남이 사용하는 ‘봉헌’이다. 복음서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담은 책이라면 교회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생활과 증거를 수록한 책이다. 가톨릭의 가르침은 성경과 성전(聖傳)을 두 개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우리 교회의 박해 시대 순교자들이 드러냈던 삶의 기록은 우리의 성전이다. 김구정은 우리의 성전(聖傳)을 존중했고 이를 성전(聖殿)으로 되살려 내고자 노력했던 한 시대의 인물이었다. 실제로 한국 교회가 설립된 이후 교회사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까지 적지 않은 공백이 있었다. 김구정은 이 공백을 메꿔준 유능한 연구자였다. 1984년 5월 1일 김구정은 머리카락 수도 세신다는 하느님께 86년간 받은 생의 몫을 올리고 글로 남았다. 그가 더하고 싶었던 말은 주께서 조합하시리라. 그리고 오늘은 김효동(성물조각가)과 김명동(한국외방전교회) 신부 등 손자들이 조부의 체온과 소망을 전하고 있다. 김구정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통해서 또 다른 김구정이 조명되기를 빈다. <끝> 다음 호부터는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가이오) 편이 연재됩니다. 백영민2016.10.12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22>](//cpbc.co.kr/CMS/newspaper/2016/06/rc/642846_1.0_titleImage_1.jpg)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210번 나의 생명 드리니<하> 해버갈(Frances Ridley Havergal, 1836~1879). <22> 210번 나의 생명 드리니<하> 가톨릭성가집에 수록된 210번 성가는 모차르트의 친저성(親著性)이 의심되는 그의 12번째 미사곡 사장조의 자비송 선율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노팅햄(Nottingham)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곡은 모차르트의 위작이라고 여겨지고 있으며, 오히려 뮐러라는 이가 작곡자라는 논란을 앞에서 짧게 소개한 바 있다. 곡에 붙은 가사만 21개에 이르러 모차르트의 곡이라고 여겨져 온 탓인지 ‘Fight the good fight’나 ‘Thee will I love, O Lord’ 등을 비롯해 사용된 가사가 알려진 것만 약 21개에 이르는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가사는 영국의 해버갈(Frances Ridley Havergal, 1836~1879)이 쓴 ‘Take my life and let it be’이다. 영국의 문학가인 이 여성은 영국에서 ‘거룩한 시인’, 혹은 ‘찬미가 세계의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불렸다. 아버지가 성공회의 성직자였던 그녀는 평생을 걸쳐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과 주님께 대한 신뢰의 삶을 보여 주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대단히 지적인 여성이었으며 성경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구약 일부분과 신약 성경은 외울 정도였다. 또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음악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래도 대단히 잘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마치 성인과도 같은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는 그녀는 43살에 짧은 인생을 마감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제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 이 가사는 그녀가 38살 되던 해인 1874년에 쓴 것인데, 어느 날 그녀는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그 집 아버지의 부탁으로 아직 신앙인이 되지 못한 그의 두 딸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두 딸은 그녀와 오랜 대화를 나눈 후 드디어 신앙인이 되기로 했다. 그날 저녁 해버갈은 초대받은 집에서 잠을 이루려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아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기도하던 중에 이 가사와 같은 내용의 기도를 바쳤으며, 그것을 시로 쓰게 된 것이다.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주님, 제 삶을 받으시고 거룩하게 하소서. 제 모든 시간과 나날들을 받으시어 그침 없이 흐르는 찬미가 되게 하소서. 2. 제 두 손을 받으시어 당신 사랑으로 일하게 하소서. 제 발을 받으시어 당신 위해 바삐 일하는 아름다운 발 되게 하소서. 3. 제 목소리를 받으시어 나의 왕이신 당신만을 위해 항상 노래하게 하소서. 제 입술을 받으시어, 당신의 말씀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신앙과 삶의 일치 보여 우리 성가집에는 이 가사의 구성을 그대로 받아들여 각각 생명, 삶, 음성, 재능, 마음으로 구분해서 가사를 꾸미고 있다. 이런 구성은 이미 116번 ‘주 예수 바로 보라’ 성가에서 소개했던 “우리 예수님의 수족”과 같이 우리 교회의 오래된 기도 형태였다. 210번 성가는 ‘신앙 따로 삶 따로’인 우리를 다시 일깨워 준다. <가톨릭대 교회음악대학원 교수> ※가톨릭 성가곡들은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www.catholic.or.kr)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백영민2016.06.29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 글라스] 26. 1970년대 이후 한국의 스테인드글라스](//cpbc.co.kr/CMS/newspaper/2016/07/rc/646310_1.0_titleImage_1.jpg)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 글라스] 26. 1970년대 이후 한국의 스테인드글라스한국 작가의 유리화, 한국 교회 정서 담아 남용우, 의왕 성 라자로 마을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1975.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전쟁의 포화 속에 파손된 교회 건축물들을 재건하며 당대의 화가들이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 참여했고, 그들의 회화적 표현이 수용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1970년대 중엽부터 현재까지 제작되고 있는 한국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현대 미술을 과감하게 수용했던 유럽 스테인드글라스의 영향을 받았다. 다양한 회화적 표현이 도입되어 순수 미술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유학파 작가들, 유리화 부흥 이끌어1970년대는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국내 작가들에 의해 스테인드글라스가 제작되기 시작한 매우 중요한 시기다. 유럽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연구한 고 이남규(루카, 1931~1993)와 남용우(마리아, 86)가 1960년대 말 귀국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 스테인드글라스의 부흥을 이끌었다. 이들은 각각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의왕 성 라자로 마을 성당을 시작으로 서구의 추상적 경향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들을 선보였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신의 회화 세계와 20세기 프랑스, 독일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나타난 추상적 경향이 수용된 작품을 제작하고자 노력했다.1980년대에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이하여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성당이 건축됐고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한 관심과 수요도 날로 증가했다. 또한 1984년에 개최된 ‘영원의 모습’(Images of Eternal)전에서 마르크 샤갈, 알프레드 마네시에, 장 바젠, 라울 위박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소개돼 국내 가톨릭 미술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교세 확장, 한국적 유리화 등장1970년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20세기 유럽 스테인드글라스의 추상적인 표현을 바탕으로 비가시적인 존재를 형상화하는 데 주력했다면, 교세가 확장되고 스테인드글라스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고유한 정서가 반영된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즉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작품을 선호하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상황이 작품에 더 적극적으로 반영됐다. 이남규의 1980년대 이후 작품과 1990년대 이후 최영심의 작품에 표출된 성경의 구상적 표현은 다양한 페인팅 기법을 구사함으로써 한국 스테인드글라스의 기법적인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테인드글라스와 건축의 대화프랑스의 미술사가 베르나르 도리발(Bernard Dorival)은 “스테인드글라스는 건축을 필요로 하고 건축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필요로 한다. 이 두 예술 간에 대화가 이루어지면 서로가 더욱 풍요로워지지만, 이 중 하나가 입을 다물면 나머지 하나도 침묵을 선고받게 되는 것”이리며 건축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상호 공존하면서 진화해가고 있음을 이야기했다.우리나라에서도 1980~1990년대 다원화된 교회 건축 양식과 더불어 건축 구조에 따른 다양한 양상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이 시도되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스테인드글라스는 회화 작업처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설치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건축에 존재하는 창의 위치와 여러 조건을 고려해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내포하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건축 초기 단계부터 건축가와 함께 논의하며 충분한 소통의 시간을 거쳐 작업하는 스테인드글라스 설치 사례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어 건축적 예술로서의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전쟁의 포화 속에 파손된 교회 건축물들을 재건하며 당대의 화가들이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 참여했고, 그들의 회화적 표현이 수용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1970년대 중엽부터 현재까지 제작되고 있는 한국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현대 미술을 과감하게 수용했던 유럽 스테인드글라스의 영향을 받았다. 다양한 회화적 표현이 도입되어 순수 미술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백영민2016.07.26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5) “이스라엘을 그 교훈과 지혜와 관련하여 칭송하는 것은 마땅합니다”(집회서 머리글)](//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5111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55) “이스라엘을 그 교훈과 지혜와 관련하여 칭송하는 것은 마땅합니다”(집회서 머리글)인간, 하느님 지혜 앞에 무릎 꿇다 인간에게는 알고자 하는 갈망이 새겨져 있는 듯합니다. 그저 지금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앎을 향하여 손을 내뻗습니다. 그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지만, 모든 문화에서 인간은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지혜문학’으로 분류되는 책들이 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잠언, 욥기, 코헬렛, 집회서, 지혜서가 여기에 속합니다. 지혜에 대한 관심이 이 책들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지혜에 관련된 문제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지혜에 대한 추구는 크게 발전했었습니다. 열왕기 저자가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 모든 이의 지혜와 이집트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고 말한다면(1열왕 5,10), 이 말은 역으로 동방과 이집트의 지혜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이스라엘이 그것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겠지요. 더 늦은 시기에는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지혜를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고, 구약 성경 가운데에서도 가장 늦은 시기의 책인 지혜서에서는 이들의 영향도 나타납니다. 사실 지혜문학은 특정한 장소에 한정되지도 않고 특정한 시대에 한정되지도 않습니다. 다른 나라들에도 지혜문학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의 책들이 그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지혜문학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보편적이고 국제적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회생활에서 성공하는 길은 무엇인가, 죽음과 고통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런 문제들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입니다. 또한 지혜문학이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법도 보편적입니다.지혜문학의 특징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지금은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그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출발점이 인간 이성이라는 점입니다. ‘출발점’이라고 앞에 붙여놓은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여기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출발점에서, 토라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알려 주신 율법에서 출발하고 예언서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시작하는 데에 비하여, 지혜문학은 인간 이성의 추구에서 시작합니다. 인간의 머리로 세상의 질서를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질서를 보면서 하느님을 감지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 창조 질서입니다. 우주와 자연 현상의 질서를 바라보며, 그 안에 하느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고 그로부터 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입니다.구약 성경 지혜문학의 첫 단계인 잠언은 주로 이렇게 세상의 질서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고전적 지혜’라 부릅니다. 다른 여러 나라의 지혜문학과 공통된, 아주 전형적인 지혜문학의 모습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이 세상의 질서에 관심을 집중하며, 인간의 행위에는 반드시 갚음이 있음을 역설합니다. 관심은 현세에 집중되어 있으며 선과 악에 대한 갚음도 현세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그런데, 이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지혜문학의 출발점이었던 인간의 지혜로 이 세상의 질서를 파악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디에선가는 분명 한계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일이 원리원칙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이 세상에서 언제나 착한 사람이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 살면서 언젠가는 체험하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고전적인 지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게 됩니다.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 가운데서는 욥기와 코헬렛이 이 단계를 대변합니다. 잠언이 이 세상의 정돈되고 질서있는 영역에 머물렀다면, 욥기와 코헬렛은 세상의 끝까지 가서 그 한계선을 붙잡고 몸부림칩니다. 인간의 지혜에 한계가 있음을 확인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욥기와 코헬렛입니다.하지만 성경의 지혜문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 한계선에서, 현인들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인간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지혜를 알고 계신 분이 하느님이시며, 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지혜를 알려 주심을 발견합니다. 아니,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이미 알려 주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위에서 지혜문학의 ‘출발점’이 인간 이성이라고 했지요. 말하자면 철학적 사고와 유사하게, 처음에는 인간의 머리로 지혜를 깨달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지혜문학만이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의 지혜문학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었습니다. 지혜문학의 출발점은 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 지혜문학의 특징은, 마지막에 가서 계시로 돌아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조상들에게, 구체적으로는 모세를 통하여 주셨던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지혜를 알려 주셨음을 깨달은 다음, 집회서와 지혜서는 토라로 돌아갑니다. 참된 지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토라 안에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 1,7). 구약 성경의 지혜문학은 이 말로 시작하여 이 말로 끝납니다. 인간의 이성을 출발점으로 하면서도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이는 참된 지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 구약 성경 지혜의 특징이었습니다.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 평화신문2016.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