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 <2>](//cpbc.co.kr/CMS/newspaper/2015/10/rc/596784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사랑과 평화의 사도 장면 요한 기울어져 가는 조국의 아들로 태어나 장면은 19세기 마지막 해인 1899년 8월 28일 서울 삼군부 뒷골목, 지금의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제물포(인천) 해관 방판(幇辦)이던 아버지 인동 장씨 기빈(張箕彬, 레오, 1878~1959)과 평양 외성의 갑부집 딸인 어머니 의성 황씨(루치아, 1878~1954)는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기도의 힘을 믿고 평생을 살았던 장면 요한 신앙의 뿌리는 언행일치의 삶으로 모범을 보인 부모의 깊은 신앙심에서 비롯되었다.이에 앞서 8개월 전인 1898년 12월 22일 햇살 따사롭던 아침, 인천 전동 장기빈의 집 대청마루에 두 부부가 나란히 앉아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치아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아이를 가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간밤에 참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글쎄 성당에 가는 도중에 길가 진흙덩이 사이에서 홀연히 섬광이 눈을 찌르는가 했더니 그 속에서 금가락지 다섯 개를 얻었지 뭐예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편 레오가 말을 받았다.“나도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뒤뜰 나무 위에 내려앉은 영롱한 깃털이 찬란하며 울음소리도 신비하고 진기한 짐승을 가슴에 품는 꿈을 꾸었다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건넌방의 외숙모도 급히 마루로 나와 “나도 꿈을 꾸었는데 밭 가운데로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났어”라며 대화에 끼어든다.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빙긋이 웃었다. 길조를 알리는 태몽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은 나란히 십자고상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황 루치아는 장면을 낳기 한 달 전 가마를 타고 서울 친정으로 가서 첫 아들 요한을 순산했다. 친정에서 두 달 동안 산후 조리를 한 뒤 자랑스럽게 아들을 안고 그때 막 개통한 경인철도의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갔다. 온 집안의 축복이요 기쁨이었다.인동(仁同) 장씨(張氏) 가문인 장면의 선대는 8대조 장익붕(張翼鵬) 때 경상도 칠곡 인동에서 평안도 성천으로 옮겼고, 고조 장인각(張仁珏) 때부터 평안도 중화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중화는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다.장기빈은 1876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시작으로 열강들의 문호 개방 압력이 거세던 시기에 나고 자랐다. 그는 “이런 변혁기에 바로 살기 위해서는 그 변화의 중심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대로 살아오던 중화를 떠나 당시 부산, 원산에 이어 개항장이 된 인천으로 갔다. 쉽지 않은 결단을 하기까지에는 관리 출신으로 인천에 살던 할머니 강 안나의 남동생 강화석(姜華錫)의 도움이 컸다.1895년에는 관립 서울 영어학교에 입학해 서구 근대 학문과 영어를 배웠고, 밤에는 일어학원에서 일어를 공부했다. 그는 1896년 레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이듬해 강화석의 중매로 평안도 8대 가의 한 사람인 구교우 황성집(黃聖集, 베드로)의 둘째 딸 루치아와 혼인성사를 했다. 1898년 부친 장기빈의 관리 시절. 앞줄 오른쪽이 장기빈. 영어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식장에 참석한 고종황제의 극찬을 받은 장기빈은 탁지부(度支部, 지금의 재정경제부에 해당) 방판으로 임용돼 인천 해관에서 출입국 업무를 수행했다. 1905년 주사로 승진했으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일제의 관원 노릇은 할 수 없다”며 사표를 던졌다. 어린 장면은 울분에 찬 아버지의 그 모습을 가슴에 새겼다. 장기빈은 일찍이 근대 문물에 눈 떴고 국제 정세에도 밝은 개명 선각자였으며 인정이 많은 민족주의자였다. 황 루치아도 끼니 때마다 걸인들을 위한 밥상을 별도로 차려놓을 만큼 동정심이 많은 문학파 신여성이었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계명을 그대로 실천했다. 3남 4녀의 자녀들은 그런 부모의 선각자적인 언행과 ‘사랑의 실천’을 보며 배우고 자랐다.장면은 태어난 지 15일 만인 9월 12일 서울 종현(지금의 명동)성당에서 요한 세례자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10살 때 인천성당(지금의 답동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았다. 장면 스스로 “나의 가정은 그리 군색하지도 않았고, 내가 장남인 만큼 부모님은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셔서 남부러울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회상할 정도로 유복하게 자랐다. 지나가던 한 승려가 소년 장면을 보고 황 루치아에게 “저 아이는 분명히 크게 될 아이이니 각별히 보살펴야 됩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장면은 어린 시절부터 비범했다. 8살 때(1906) 인천성당에서 운영하던 박문학교에 입학해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대학, 중용, 통감과 신학문인 지리, 역사, 산술을, 교사 수녀들로부터 “천주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법을 배웠다. 12살 때,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심상과를 졸업했다. 조국이 패망하고, 1년 전 10월 29일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1879~1910)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3월 26일)하던 해다. 소년 장면은 “일생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박문학교와 심상학교 고등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장면은 1914년 4월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농대 전신)에 입학했다. 의학강습소를 나와 의사가 되려고 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원서조차 내지 못하고, 40명 모집에 1400명이 응시한 농림학교에 최연소로 합격한 것이다. 18살 되던 3학년 때인 1916년 5월 20일 서울 약현성당(지금의 중림약현성당)에서 부친이 정해 준 김옥윤(金玉允, 마리아, 1901~1990)과 혼인성사까지 했으니 장면에게 수원농림학교 생활 3년은 잊을 수 없는 시절이다. 김옥윤은 오랜 기간 천주교 신앙을 지켜온 집안인 경주 김씨 가문의 김상집(金商集, 요셉)과 김해 김씨 가문의 김 바울라 사이의 4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16살 때 부친끼리 혼인을 약조한 대상인 장면과 만나 모두 6남 3녀를 낳았다. 첫째와 둘째를 일찍 여의었으나 5남 2녀를 훌륭하게 키우며 50년을 동고락했다. 장면은 2학년 때 배일 운동을 목적으로 한 학내 비밀 결사 조직의 가입을 권고받고 흔쾌히 들어가 활동했다. 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의식이 그만큼 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개신교 신자 선배로부터 큰 수모를 당하고 인생 진로에 중대한 결단을 하게 된다. 서울의 유명한 목사가 수원 3ㆍ1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수원농림학교 학생들도 연일 찾아가 설교를 듣고 열광했다. 원래 웅변가인 그 목사는 설교 중에 틈틈이 독립사상을 일깨워 젊은 학생들의 정열을 자극하고 항일 의식에 피 끓게 했다. 부흥회 기간 내내 설교를 듣고 온 학생들은 매일 밤 모여 토론하고 기도하는 등 온통 개신교 열풍에 휩싸였다. 그 선배는 단연 리더였다. 그는 열정도 대단했지만 성경과 교회사 공부까지 철저히 해 교내 목사로 불렸다. 그러던 중 전교생 120명 가운데 유일한 천주교 신자인 장면에게 천주교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천주교는 완고하고 미신적이며 부패한 사교에 지나지 않아!”“그렇지 않아요. 한 분이신 천주님을 믿는 천주교만이 가장 올바른 종교란 말이에요.” 장면의 항변은 거기까지였다. 성경 구절을 줄줄 외고 풍부한 교회사 지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비방을 당해낼 수 없었다. 주변 학생들의 비웃음이 들렸다. 참을 수 없는 참담한 패배였다. 천주교가 골수에 밴 장면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이었다. 그때까지 장면은 그 선배가 인용한 코린토 전서니 콜로새서가 무엇인지 들어보지도 못했고, 더구나 교회사에 대해서는 캄캄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 내에 성경 관련 서적은 「성경 직해」밖에 없었고, 호교 관계 책도 「진교사패」(眞敎四牌)뿐이었다. 그나마 신자들에게는 보급되지 않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사제들 역시 극소수여서 개인 지도를 받기란 불가능했다.장면은 결심했다. “내 신념을 채우려면 외국으로 유학 나가 외국 원문을 통한 광범위한 섭렵으로 마음껏 교리 연구와 교회사 연찬에 전념하겠다.”그 즉시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일반 농업 관련 수업과 실습을 하고, 밤마다 혼자 영어와 씨름했다. <계속> cpbc2015.10.07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하)](//cpbc.co.kr/CMS/newspaper/2014/06/rc/513649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48)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하)여성주의 관점에서 비판적 성경 해석 제시 피오렌자 교수는 ‘해방을 위한 비판적 여성주의’ 관점에서 성경 본문을 읽고 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사진은 예루살렘 주님 무덤 성당에서 한 여성이 참배 순서를 기다리며 성경을 읽고 있다. 【CNS】 ‘해방을 위한 비판적 여성주의 해석학’이란 비판적인 여성주의 사상가의 눈으로 성경 해석의 방법론적 원칙들을 연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생각을 잘 이해하려면 그가 자신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세 가지 중심 용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용어는 각각 ‘wo/man,’ ‘의식화(conscientization),’ 그리고 ‘주인중심제(kyriarchy)’입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익숙한 개념들이 전제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되생각해 보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낯선 용어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용하곤 합니다. 중심용어 세 가지 첫째 용어인 wo/man 혹은 wo/men이라는 용어는 피오렌자 교수가 자신의 독자로 하여금 남성중심적 언어의 문제점을 의식하게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 용어(wo/men)는 어떤 형태로든 억압을 경험하고 있는 남녀 모두를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됩니다. 그런데, 피오렌자 교수의 저서를 읽는 독자들은 그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을 wo/men이라는 용어에 포함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도록 초대받으며,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어떤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각자가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 힘을 가진 존재인지 아닌지를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피오렌자 교수가 지적하듯이 자신이 한 사회의 억압받는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은 양자택일적 물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억압하는 자인 동시에 억압받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사회적 위치는 다양한 관계들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이처럼 한 사람이 자신이 어떻게 억압자가 되고, 또 억압받는 자가 되는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을 ‘의식화’라고 부릅니다. 세 번째 용어는 제2부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주인중심제(kyriarchy)’라는 용어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주님’을 뜻하는 그리스어와 ‘다스린다, 지배한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를 결합해 만든 것입니다. 주인중심제란 소수의 엘리트 남성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지배하는 사회정치 구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부장제라는 말이 젠더라는 생물학적 개념에 기초한 용어라면, 주인중심제는 지배 구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젠더는 사회적인 지위나 부와 함께 그런 지배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한 요소입니다. 피오렌자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특권층에는 남성이 속하지만 억압받는 자에게는 양성 모두 속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피오렌자 교수에게 있어서 wo/men과 주인중심제는 상호연관된 용어입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여성주의(feminism)란 남녀 모두의 의식을 일깨워 그들을 묶고 있는 억압의 구조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남녀 모두 성별을 떠나서 그들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억압받고 있다면 그들이 억압받고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 억압받고 있다고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단계는 매우 힘든 과정입니다. 나아가 소수의 엘리트 남성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주인중심제는 그런 상황이 정상적이고 상식적이라는 망상을 만들어냅니다. 전통적 성경 해석은 이런 주인중심제를 천부적 체제로 여기게 하곤 하였습니다. 피오렌자는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얼마나 오랫동안 여성이 고통을 받아 왔는지를 지적합니다. 주인중심적인 억압의 체제가 정상적인 것도 상식적인 것도 아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해방을 위한 중요한 단계이며, 의식화 과정의 일부분이 된다고 피오렌자 교수는 말합니다. 자신이 속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무엇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지를 알아차려야 하고, 또 다른 이들이 받고 있는 억압에 의식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떤 식으로 참여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서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 본문과 성경의 해석 역시 주인중심제의 지배구조를 옹호하고 있는지 혹은 저항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기존의 학문적 성경 연구 분야도, 학자들이나 사목자들, 평신도들이 하는 성경 본문의 해석도 모두 다 주인중심제의 패턴을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어떤 여성신학자들은 그런 이유로 인하여 아예 성경을 포기합니다. 성경 본문 자체가 이미 남성중심적 사고에 젖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을 포기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 연구나 성경의 해석을 그런 패턴에 맡겨두는 것 역시 무책임한 것이라고 봅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을 읽고 그 안에 담긴 말씀들을 자신의 영적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이들조차도 기존의 성경 해석 방법이 미치는 결과들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를 수정하기 위하여 ‘비판적 여성주의 성경 해석자’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비판적 여성주의 성경 해석자’란 성경 본문 자체와 성경을 해석하는 학문이 내재적으로 주인중심제의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이해하고, 더 근원적인 민주주의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입니다. 이런 해석자들을 통하여 여성에 대한 지배를 옹호하는 성경 해석에서부터 여성이 그런 지배에 저항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하는 비판적 여성주의 성경 해석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이를 위하여 다음 일곱 가지의 해석학적 모델을 발전시켰습니다: ① 경험을 사회적으로 정의하는 경험의 해석학, ② 지배의 해석학, ③ 의심의 해석학, ④ 평가의 해석학, ⑤ 재상상력의 해석학, ⑥ 재구성의 해석학, ⑦ 변화와 개혁의 해석학. 이 가운데 몇 가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의심의 해석학은 남성중심적이고 주인중심적인 본문과 그에 대한 해석이 주인지배적인 억압을 유지하기 위하여 활용한 방법들을 연구합니다. 이와 반대로 욕망의 해석학, 혹은 재상상력의 해석학은 의심의 해석학이 밝혀낸 지배와 착취, 소외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담론을 만들어 내고 해방을 위한 비전을 만드는 것을 추구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이런 비전의 한 예로 ‘여성-에클레시아’라는 말을 만들어 냅니다. 보통 ‘교회’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는 충분한 시민 자격을 갖춘 완전한 시민들의 민주적인 회합을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피오렌자의 ‘여성-에클레시아’라는 말에는 모두가 평등하며, 의사결정 과정에 충분히 참여하는 근원적 민주주의에 대한 비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피오렌자 교수가 여기에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인 이유는 여성들만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교회(에클레시아)에서 여성들이 소외되었고, 결정권 대부분이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주어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지혜-소피아의 집피오렌자 교수는 성경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미지들 안에서도 주인중심적 지배 체제가 반영되어 있음을 지적합니다. 성경의 언어 자체가 남성중심적 체제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남성으로 지칭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여성이 억압받는 사회에서는 하느님을 남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여성들의 억압을 영속화하는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피오렌자 교수는 먼저 신을 표현하는 인간 언어의 부적절성과 어려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느님을 G*d로 표기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지혜-소피아로 볼 것을 제안합니다. 지혜-소피아로서의 신개념은 성경에 나오는 개념이지만 다양한 신개념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진 개념이기도 합니다. 마치 지혜가 일곱 기둥으로 집을 짓고 사람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듯이 피오렌자 교수는 자신의 독자들로 하여금 비판적 여성주의 성경 해석을 실천해보도록 지혜-소피아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 배움의 집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부와 무관하게 영적 성장과 사회적 참여의 기회를 균등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학자로서의 전 삶을 이 집에 이르는 길을 만드는 데 바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늘도 지혜-소피아의 일꾼이 되어 그 집 문간에 서서 부지런히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평화신문2014.06.10
![[나의 묵주이야기] 156. 묵주는 몸의 일부, 기도는 생활의 일부](//cpbc.co.kr/CMS/newspaper/2016/02/rc/619792_1.0_titleImage_1.jpg)
[나의 묵주이야기] 156. 묵주는 몸의 일부, 기도는 생활의 일부이규정 스테파노(부산교구 망미본당) 내가 묵주를 지니고 다닌 것은 1980년부터였다. 이 해에 세례를 받고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해 오늘에 이르렀다. 알다시피 레지오 마리애는 활동 보고로 묵주기도를 받고 있다. 그래서 묵주를 지니고 다녔는데, 차츰 신앙에 맛을 들이면서 나의 모든 바지의 왼쪽 호주머니에 묵주가 들어 있게 되었다. 바지는 외출복에서부터 집에서 입는 일상복과 운동할 때 입는 바지 등 대여섯 장은 나와 있다. 그런 모든 바지의 왼쪽 호주머니에 반드시 묵주가 들어 있다. 맨묵주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때문에 왼손이 들어가면 묵주가 잡힌다. 그래야 기도하고 싶은 때에 왼손잡이인 내가 바로 꺼낼 수 있다. 묵주를 바지에 넣어 다니면 묵주가 닳아 묵주알이 반질반질 윤이 난다. 그런 묵주는 오래 사귄 지인처럼 감정이 통하는 것 같다. 바지를 갈아입을 때는 언제나 묵주부터 먼저 챙겨 넣지만 그래도 실수로 묵주를 안 넣을 때가 가끔 있다. 그럴 때 바지에 손을 넣었다가 묵주가 안 잡히면 영 서운하고 허전하다. 정든 사람과 뜻밖의 이별을 한 것처럼 낭패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나에게 묵주는 어느새 내 몸의 일부처럼 돼 버렸다. 걷기 운동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은 대개 둘이나 셋이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나는 혼자 걷는다. 혼자 걸어야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수시로 묵주기도를 하기 전까지는 누구와 만나기로 하고 나갔다가 만날 사람이 안 나와 있으면 짜증이 났지만, 묵주기도를 하고부터는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지도, 약속을 어긴 사람이 밉지도 않다.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은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다”고 했지만 나는 기도를 알고부터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다.신앙인들에게 기도할 일이 좀 많은가. 또 우리는 누구에게나 쉽게 “기도하겠습니다” 하고 약속하는 일도 많지만,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기 일쑤다. 그러니 우리는 늘 기도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셈이다. 아침저녁으로, 식사 전후에, 그리고 고마운 일에 감사 기도, 잘못한 일에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는데 이러고 보면 우리는 그야말로 기도 속에 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니, 신앙인은 꼭 기도하지 않아도 매사를 기도하는 자세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하면 좋겠다. 그러면 세상이 한결 밝고 평화로워지리라.특히 나같이 나이 든 사람일수록 기도는 생활의 전부까지는 몰라도 일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길을 걷다가 지팡이에 의지해서 겨우겨우 위험스럽게 걷고 있는 중풍 환자를 만나면 나에게 아직도 제대로 걸을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기도가 절로 우러나온다. 그리고 그 환자를 위해서도 잠시 기도하게 된다. 성경에는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주 많다. 그중에서도 다음의 말씀을 나는 항상 기억하고 있다.“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나의 묵주이야기’에 실릴 원고를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8매 분량으로 연락처와 함께 pbc21@pbc.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채택된 원고에 대해서는 소정의 고료를 드립니다. 문의 : 02-2270-2434 cpbc2016.02.17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8>](//cpbc.co.kr/CMS/newspaper/2016/02/rc/621024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평신도 신학의 선구 양한모 “김수환 추기경과 공모하여 정부를 뒤엎으려는 것 아니냐” 신학교 첫 평신도 학생이 되다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지 3년 되는 해인 1971년, 양한모는 신앙인으로서 의미 있는 일들 몇 가지를 새로 시작했다.먼저, 가톨릭대학 신학부(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성직을 지망하는 신학생 신분이 아니라 평신도 신분으로서 신학교에 청강생으로 등록했다. 쉰을 넘긴 나이에 시작한 신학 공부였지만, 1975년까지 만 5년에 걸쳐서 신학교의 전 과정을 이수했다. 당시에는 신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것이 일반 신도에게는 허용되지 않았기에, 평신도가 신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양한모가 비록 청강생으로나마 신학교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에 대한 신학교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요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1962년에 열려서 1965년에 폐막한 이 공의회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이, 그때까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평신도의 신학교 수강 허용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제 한국의 신학교도 평신도에게 문호를 개방하기로 했고, 그 이듬해인 1972년부터는 평신도를 정규 학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로써 남학생들뿐 아니라 여학생들도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가톨릭출판사 부사장이 되고 월간 「창조」 창간하다양한모는 또한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는 가톨릭출판사의 부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출판사 경영진으로서 그는 월간 잡지를 창간하는 데 주력했다. 이 출판사에서는 1933년부터 지식인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월간지 「가톨릭 청년」을 발행해 왔다. 한편, 시중에는 일제 치하에서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내용으로 지식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으나 해방 이후 명맥만 간신히 유지되던 「창조(創造)」라는 잡지가 있었다. 그는 「가톨릭 청년」의 맥을 이어 나가면서 「창조」<사진▼>도 다시 살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출판사와 서울대교구 관계자들은 반신반의했으나, 그는 1년 안에 흑자를 내겠다고 장담했다. 이를 위해 「창조」의 성격을 전면 개조하기로 했다. 편집 체제를 고치고 편집 방향을 ‘일반 지식인 대중과의 개방적 소통’으로 잡았다. 기사는 가톨릭보다는 사회와 관련된 것들로 채우기로 했다. 지식인 교양지를 표방하겠노라는 그의 계획안에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고, 양한모는 자신의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구체적으로, 우수한 편집진을 확보하기 위해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던 구중서를 5개월에 걸친 교섭과 설득 끝에 주간으로 영입했다. 구중서는 기자진용 구성을 주간에게 일임할 것, 기자의 급여와 필자의 원고료를 일반 신문사나 잡지사 수준으로 보장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양한모는 이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구중서는 「중앙일보」에서 기자 두 명을 데려왔다.1971년 9월, 드디어 「창조」 창간호가 나왔다. 처음에는 3000부를 찍었으나,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서 나중에는 8000부까지 인쇄했다. 이른바 손익 분기점이 7500부였으니, 「창조」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장담대로 흑자 운영이 가능해진 셈이다.그런데 「창조」가 점차 지식인 대중의 주목을 받아 가던 무렵에 양한모는 갑자기 부사장직을 그만두었다. 「창조」는 당시 노골화해 가는 독재 정권을 신랄한 논조로 비판했고, 이 때문에 「창조」와 양한모는 정권과 기관으로부터 미움과 압력을 받았다. 거기에다 그와 사장 신부의 관계 또한 원만하지 못했다. 그는 사장과 부사장이라는 동료 또는 동업자 관계가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상하 관계에서 자신을 대하는 시각에 반발했고, 끝내 사직서를 제출했다.1972년 3월, 출판사를 그만둔 얼마 뒤에 그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창조」 1972년 4월호에 김지하의 장편 풍자시 ‘비어’(蜚語)를 실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1970년 5월에 「사상계」라는 잡지에 풍자시 ‘오적’을 발표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당국에 연행된 적이 있고, 당시 기소 중이던 김지하가 ‘비어’를 발표함으로써 권력층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창조」 4월호는 즉시 판매 금지 처분을 받고 압류 또는 압수되었으며, 관계자들은 검거되었다.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양한모는 「창조」를 만든 이유가 김수환 추기경과 공모하여 정부를 뒤엎으려는 것 아니냐며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다. 그는 혹독한 고문과 억지에 온몸으로 버텼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독재 정권에 항거하던 민주 인사들과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눈에 띄게 심해졌다. 김지하 말고도 사제가, 교계 신문사의 기자가, 가톨릭 학생회의 간부가 속속 연행되었다. 「창조」 편집 주간인 구중서도 사퇴 요구를 거절하다가 결국 의원 사임했고, 사장 신부도 사임했다.이 사건의 여파로 「창조」의 인기는 오히려 높아졌다. 5월호가 발간되자 시판 15일 만에 매진될 정도였다. 특히 일반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이 높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당국의 계속되는 압력에 어쩌지 못하고 창간 15개월 만에 1972년 11월호를 마지막으로 휴간 형식을 빌려서 자진 폐간하고 말았다.한국크리스찬사상연구소를 설립하다양한모는 우리나라가 공산주의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그에 맞설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지 못한 것을 늘 염려했다. 국가보안법과 공산주의를 무작정 반대하고 보는 메카시즘 논리 외에 달리 반공의 수단이 없었는데, 이는 도리어 진정한 반공산주의 이론이 정착하지 못하게 만들 뿐이라고 양한모는 통탄했다. 가톨릭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전래된 지 200년 가까이 되었어도 아직 토착화하지 못했고, 또한 공산주의에 맞서는 사상 전쟁의 선봉으로서 시대적 사명을 다 하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로서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공산주의에 논리적으로 맞설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기 위한 전문 연구기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그러던 차에 마침 김수환 추기경이 그를 불렀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공산주의 이론과 북한 현실을 연구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연구소가 있어야 한다면서, 그에게 책임지고 연구소를 세워 보라고 했다. 그는 이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자 가톨릭출판사 부사장으로서 바쁜 가운데서도 그는 연구소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다.1971년 9월 서울 당산동에서 현석호, 유홍렬, 이숭녕, 문창준, 박갑성, 송찬규 등과 함께 ‘한국크리스찬사상연구소’ 창립총회를 열었다. 명칭을 ‘가톨릭’이 아니라 ‘크리스찬’이라고 한 것은 개신교의 참여도 염두에 두려는 뜻에서였다. 연구소는 명목상으로는 서울대교구 산하 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그가 거의 독립적으로 운영했다. 이듬해 6월에는 재정적인 문제를 고려하고, 또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연구에 전념하려는 뜻에서 사무실을 서울 장충동 그의 자택으로 옮겼다.설립 후 5~6년 동안 연구소는 활발하게 움직였다. 사무실 인근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와 공동으로 가톨릭문화 강좌, 성경 강좌, 성인 교리(예비신자 교리) 강좌를 개설했고, 매년 한국크리스찬사상연구소 세미나도 열었다. 1976년에는 연구소 기관지인 「가톨릭 문화」를 창간하고, 제3호부터는 제호를 「교회와 문화」로 바꾸어 발행했다. 그러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신학원을 운영하게 되고 서울대교구에서 성경 강좌를 주관하게 되면서 차츰 연구소의 기능은 위축되었다. 나중에는 그의 ‘신도신학론’ 탐구와 공산주의 비판, 그리고 통일 사목 운동의 이론적 산실로서 기능하는 정도에서 머물렀다. 백영민2016.02.24
 박재환 도미니코 사비오 (주)종합건축사사무소 도성건축 대표](//cpbc.co.kr/CMS/newspaper/2016/06/rc/641797_1.0_titleImage_1.jpg)
[나의 신앙 나의 기업](23) 박재환 도미니코 사비오 (주)종합건축사사무소 도성건축 대표하느님 집 짓기 40년, 구도자의 길을 걷다 서울 잠실성당을 설계한 이후 해마다 하나 이상의 성당을 설계해 온 박재환 대표는 성당을 설계할 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구체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먼저 필요하다고 말한다. 40년 가까이 40여 개 성당을 설계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성당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찾아가는 순례자’라는 사실이다. (주)종합건축사사무소 도성건축의 박재환(도미니코 사비오, 75, 인천교구 통진본당) 대표이사의 삶이 그러하다. 박재환 대표가 성당 설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0년대 후반, 서울 잠실성당 설계를 맡으면서다. 본당 신자 중에 건축가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주임 신부(고 이병문 신부)가 불러서 직접 설계를 의뢰했다.“단순히 전통 양식을 답습하거나 어설프게 모방하지 말고 시대상을 드러내는 기능과 조형성을 갖춘 성당이었으면 좋겠다는 게 신부님의 특별한 당부였습니다.”건축 분야에서 10여 년 경력을 쌓았고 건축연구소 대표로 활동한 지 5년이 넘었지만, 성당 설계는 처음이어서 박 대표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나름의 사명감과 함께 기대감도 있었다. 주변 환경을 고려해서 성당의 측면을 정면처럼 보이게 하고, 신자석에서 제대로 향하는 상승감을 강조했다. 처음으로 설계한 성당이 몇몇 사제들에게서 호평을 받으면서 박 대표의 성당 설계 인연은 계속됐다. 이후 지금까지 박 대표가 설계한 성당은 40여 개소에 이른다. 한강, 천호동, 이문동, 옥수동 등 서울대교구의 성당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그가 설계한 성당들은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배론성지 대성당, 청주교구청 청사와 사제 숙소, 지난 5월 말에 축복식을 한 안동교구청사도 박 대표의 작품이다. 그의 설계로 리모델링한 서울 송파동성당은 서울시 건축상 본상과 가톨릭미술상 건축 부문 본상 수상작이 됐다. 박 대표는 강원도 삼척 도계 출신이지만 어려서 인천으로 이사와 대학까지 인천에서 마쳤다. 교우 집안은 아니었지만, 가톨릭에 귀의한 누나들의 영향으로 인하대 2학년 때 세례를 받았다. 인하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던 1966년에 안영배건축연구소에서 입사, 건축 분야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건축사 면허 취득을 계기로 1973년 안일건축연구소를 등록하고 1980년 ‘도성건축연구소’로 상호를 바꿨으며, 2000년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이름은 다르지만 50년 동안 한 우물을 판 ‘장인’ 건축사인 셈이다. 웨스턴 조선 비치 호텔 등 수많은 건물을 설계했고 10년 전부터는 해외까지 진출, 수십 개 건축물을 만들어냈지만 40여 곳에 이르는 성당을 설계했다는 박 대표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신자로서 하느님의 집을 하나만 설계하는 것도 큰 영광일 것입니다. 저는 첫 성당을 설계한 이후 1년에 하나 이상의 성당을 설계한 셈이니 얼마나 더한 영광이며 보람이겠습니까. 사람이 감히 하느님의 집을 짓는다고 생각하면 감당키 어려운 짐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매번 부족함과 한계를 느끼면서도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이 일이야말로 제가 짊어져야 할 소명이 아닐까 하며 살아왔습니다.”성당 설계와 인연을 맺으면서 보람과 함께 안타까운 일, 답답하고 가슴 아픈 일도 적지 않았다. 현상 설계에 당선됐지만, 해당 본당 측에서 아무런 설명이나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다른 건축가와 작업을 했을 때, 설계 계약을 하고 설계를 진행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아 중단되는 경우, 설계대로 공사를 시작하다가 중간에 설계자와 협의 없이 공사를 변경하는 일이 생길 때는 화가 났고, 때로는 서글프기도 했다. “시골 본당의 경우 성당 신축 설계를 해드렸는데 돈이 없어서 설계비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돈이 없다면서 설계비 대신 산나물을 잔뜩 보내주더군요. 시간과 경비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그지없지만, 돈이 없어 나물을 보내주신 그곳 신부님 마음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면 오히려 위안이 되더군요.”그래도 감사할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그중에서도 박 대표는 많은 사제, 수도자들을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축복이고 은혜라고 여긴다. 대부분이 성당이나 교회 관련 건물 설계로 인연을 맺은 이들이다. 하지만 박 대표는 “업무적인 만남 이상으로 제 삶에 영성적인 가르침을 주신 분들”로 되새기고 있다. 박 대표는 건축사로 평생을 살아오는 데에 도움을 받은 또 한 분으로 안영배(유스티노, 84))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를 꼽는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부터 지금까지 사실상 건축가의 길을 함께해 오고 있다는 안 교수에 대해 박 대표는 “때로는 스승으로 때로는 협동 설계자로서 모든 성당의 계획에서 마무리까지 최선의 방안을 찾기 위해 진지한 구도자의 자세로 설계해 온 분”이라고 소개한다. 이런 만남과 인연은 박 대표에게 성당 설계만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삶을 제대로 설계하고 설계한 대로 짓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또 하나의 자극이 되고 있다. 자녀들의 학교 생활을 계기로 신자들과 교류하고 본당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게 됐다는 박 대표는 본당 총회장을 비롯해 예비신자 교리교사 등 여러 분야에서 봉사했으며, 신앙의 지식과 이해를 더 넓히기 위해 성서 못자리와 교리신학원을 통해 성경과 신학 공부도 했다. 신앙의 지식과 체험은 또한 본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돼 성당 설계에도 반영되고 있다. 박 대표는 “성당 설계에 앞서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성당을 설계할 때는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지역 사회에 열린 교회 △삶의 근원인 빛의 도입을 주제로 하는 성스러운 내부 공간과 비유를 통한 상징성의 표현 △화려한 외형보다는 절제되고 소박한 균형미를 통한 조형성 추구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일까. “성당 설계자는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찾아가는 순례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박 대표의 말에는 신앙인 건축가로서 삶의 연륜이 함께 실려 있는 것 같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평화신문2016.06.22
![[청소년 주일] 교황 담화 해설 -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cpbc.co.kr/CMS/newspaper/2015/05/rc/572939_1.0_titleImage_1.jpg)
[청소년 주일] 교황 담화 해설 -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청소년들이여, 참행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해 청소년 주일 담화 주제를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로 정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청소년 주일 담화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참 행복’에 대해 묵상할 것을 권고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 아니다. 교황은 2016년 7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열리는 제29차 세계청년대회(WYD)를 준비하면서 지난해부터 2016년까지 3년간 청소년 주일 담화 주제를 ‘참 행복’ 선언과 관련된 성경 구절로 미리 정했다. 지난해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가 주제였고, 내년에는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를 주제로 할 예정이다. 내년도 주제는 곧 세계 청년 대회 주제이기도 하다. 세계청년대회 주제로 ‘자비’를 택한 것은 폴란드 크라쿠프대교구에 묻힌 ‘자비의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를 기리기 위해서다. 15년간 크라쿠프대교구장을 지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0년에 파우스티나 수녀를 성인품에 올렸다.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면서 3년간 참 행복의 의미를 찾는 데 집중하도록 한 것은 젊은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교황의 마음이 그만큼 간절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황은 젊은이들이 갈망하는 모든 선과 행복이 완전하게 이뤄지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도, 성경 읽기, 그리고 (특히 가난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삶을 요청했다. 이 세 가지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참된 길이고, 그리스도를 만나서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교황은 예수와 성부와 성령은 젊은이의 그저 그런 친구가 아니라 가장 위대하고 신뢰할 만한 친구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물론 기도를 열심히 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또 성경 읽기에 습관을 들이지 않았다면 매일 한두 줄씩이라도 복음서를 읽을 것을 권했다. 하느님은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신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교황은 담화를 통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행복임을 절대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교황의 청소년 주일 담화는 젊은이들을 행복으로 부르는 행복 초대장이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평화신문2015.05.26
![[생활 속의 복음]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cpbc.co.kr/CMS/newspaper/2015/03/rc/560728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원고를 쓰기 위해 한글판 성경을 보면서 문득 한국 교회가 신자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신자들을 정말 똑똑한 지성인으로 생각하는지, 혹은 성경을 읽지 않는 신자이기를 바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이렇게 앞뒤 없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요한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설명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교회 성경을 보니 요한복음 1장 19절(머리글 다음) 앞에는 ‘표징의 책’(II. The Book of Sings), 13장 앞에는 ‘영광의 책’(III. The Book of Glory)이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또한 「라티노아메리카노」(Latinoamericano)라는 스페인어 성경에도 설명과 더불어 곳곳에 메데인 문헌(1968년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단 총회 문헌)을 비롯한 교회 문헌을 첨부해 신자들이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한글 성경을 만들기까지 고생하신 분들에게 딴죽을 걸거나 그분들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쯤 이런 부분을 생각해 봤으면 하는 바람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시골 본당 사제로 살아가고 있는 저도 요한 복음서를 이해하고 묵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신자분들의 기도나 성경에 대한 열정은 다른 지역 교회보다 월등합니다. 그에 반해 자신의 신앙 증거, 타 종교인과 대화에서는 소극적인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도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 전체 맥락 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장 19절에서 12장까지 예수님은 7가지 기적 사건과 7문장(나는 …이다)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군중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관점과 시각에서만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12,37)라는 결말이 나옵니다.복음사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못한 원인을 “그들은 눈이 멀었고 마음이 무디어졌다”(요한 12,40)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기본으로 오늘 복음의 핵심 문장인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이별의 순간에 여러 번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영광일까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고통의 내용인 요한 복음 13장 이후 부분을 미국 성경은 왜 ‘영광의 책’이라 했을까요?저는 축구, 야구 등 스포츠를 즐기고 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많은 남미 축구선수들은 경기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신자 선수들은 경기 중 종종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과연 그런 행동이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지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을 앞두고 누군가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과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독일과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님들이 자국의 승리를 기원하며 기도를 하는 모습을 상상한 그림이었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어떤 이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할까요? 교우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루터 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길 기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해서 대기업에 정규직 사원으로 입사하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건가요? 시험에 떨어지거나 취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부족해서인가요?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본성이 언제 가장 잘 드러나는가’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 정의, 평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님을 자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분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진정한 정의, 평화를 체험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김 추기경님의 명언 중 하나인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 말라”는 말씀에서 하느님 자비를 느꼈습니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열광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멋진 외모와 미소, 아니면 검소한 생활 태도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이웃의 손을 잡아주셨고, 그들 이야기를 들어주셨기에 열광한 것입니다. 교황님 자신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황님의 강론이나 행동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자주 느낄 수 있어서 열광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cpbc2015.03.18
![[내 마음의 북녘 본당] “황해도 신자들 열성, 신앙의 표양”](//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6426_1.0_titleImage_1.jpg)
[내 마음의 북녘 본당] “황해도 신자들 열성, 신앙의 표양”황주 출신 방영자 수녀 “기도 중에 늘 황해도의 형제들을 기억하지만, 늘 마음이 아픕니다.”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방영자(아기 예수의 데레사) 수녀는 황해도 황주군 출신이다. 올해 73세지만 부모와 함께 월남한 게 1947년 4세 때니, 고향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해서 올해 100세라는 방 수녀의 어머니 김유자(레지나)씨를 찾는 게 나을 듯했지만, 노환으로 인터뷰가 어려워 하는 수 없이 방 수녀를 찾았다. 부모나 가족, 친척들한테서 들은 얘기나마 전해 듣고 싶어서였다. 어머니가 신앙의 채찍질 아끼지 않아 1967년 수도회 입회 이후 40년을 교사로 산 방 수녀는 자신의 어머니 얘기부터 꺼냈다. “옛날엔 천주교회에서 영세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대요. 그래서 저에게 늘 ‘넌 1년도 못돼 세례를 받지 않았느냐’면서 황주의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표양을 본받으라고 하셨어요. 저는 월남한 뒤 1960년대 초 대학 다닐 때 세례를 받았지만, 명동성당 성가대와 가톨릭학생회 등에서 나름으로 열심히 봉사하며 살았는데도 어머니께선 신앙적 채찍질을 아끼지 않으셨지요.”방 수녀 부모가 혼인했을 때는 황주군에 본당이 없고 공소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양심적으로 살았는지, 비신자들도 천주교 신자라면 다 인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아버지 방재성(요셉)씨는 월남한 뒤 정작 자신은 당시 신자가 아니었는데도 자녀들을 명동성당에 데려가 신앙에 입문하도록 했다. 당시 집 한 채 값이던 50만 원을 성당에 헌금한 뒤 공과책(기도서)과 묵주, 성경을 사주면서였다. 이는 아마도 “아버지께서 황주에서 병원을 운영하시면서 보신 황주 신자들의 모범 때문에 저희를 신앙으로 이끌어 주신 게 아니었나 싶다”고 방 수녀는 회고한다.이어 방 수녀는 외가 신천군에 있던 신천성당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아버지께서 일제 말기에 신천에서도 병원을 개원하셨어요. 그때 성당이 외가에서 5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아버지나 외삼촌, 이모들도 많이들 성당에 놀러 가셨다고 해요. 벽돌 성당이었는데, 신식 건축물이다 보니 신기하셨겠지요. 외가 7채 중 1채는 수녀원에서 빌려 썼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어요. 특히 외삼촌 중 한 분이 혼인하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분은 전쟁 중 신천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황해도 수도자들의 순교 정신 깊이 새겨가족과 함께 월남한 방 수녀와 황해도의 인연은 또다시 이어졌다. 매화동본당 출신 최진옥(마티아) 수녀와 수도생활을 하다가 만나게 됐는데, 최 수녀의 여동생이 마침 방 수녀의 외삼촌과 혼인한 사이였다. 해서 “사돈 수녀로부터 참 많이도 신앙적 열심을 보고 배우고 느꼈다”고 방 수녀는 기억한다. 그런데다 매화동본당에서 순교한 김정자(안젤라)·김정숙(마리안나) 수녀와 함께 사도직을 하다가 구사일생한 강양자(마리 레지스) 수녀에게서 들은 황해도 신부님들과 수도자들의 순교 정신은 방 수녀의 평생 수도 생활에 모범이 됐다고 한다. 오세택 기자 평화신문2016.01.27
![[복음 이야기] (44)예수님이 쓰신 문자](//cpbc.co.kr/CMS/newspaper/2015/02/rc/554876_1.1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44)예수님이 쓰신 문자히브리어와 아람어 쓰고 말해 쿰란 유적지에서 발굴된 구약 성경 사본. 이 쿰란 사본에 쓰인 글이 성경 히브리어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은 지역에 따라 히브리말과 아람말 두 가지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글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의 율법학자들이 글 쓰는 것과 쓰인 글을 해석하는 것을 주 임무로 했고, 회당에서 어린아이들을 교육했기 때문에 성경 시대에도 많은 유다인들이 글을 쓰고 읽었을 것이라는 게 성경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 이러한 증거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글판에 ‘요한’이라고 쓰는 장면이 나온다(루카 1,63). 또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약은 집사가 쫓겨나기 전에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문서를 조작하게 하는 비유(루카 16,1-8)에서도 글을 쓰는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 자신도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당신께 끌고 왔을 때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요한 8,1-11). 예수님과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 즈카르야, 비유 속에 나오는 채무자가 쓴 글은 분명 히브리어나 아람어였을 것이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알고 계셨다는 증거로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서 한 부분을 읽으시고 희년을 선포하신 것(루카 4,16-30)과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마태 5,18)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제시한다. 한국 주교회의가 펴낸 「주석성경」에 따르면 ‘자’에 해당하는 말은 헬라어 ‘이요타’(Ι)로서 여기에서는 본디 히브리말이나 아람말 알파벳에서 가장 작은 글자를 가리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글자는 ‘요드’다. 구약성경은 기원전 1200년께부터 기원전 200년께까지 거의 1000여 년에 걸쳐서 기록된 책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구약성경 대부분은 히브리어로 쓰였다. 다니엘서 일부(2,4‘─7,28)와 에즈라기 일부(4,8-6,18; 7,12-26), 예레미야서 한 절(10,11)이 아람어로 쓰였다. 그리고 지혜서와 집회서, 마카베오기 하권은 헬라어로 쓰였다. 아울러 토빗기와 유딧기, 바룩서와 마카베오기 상권은 그리스어로 전해졌지만 원래는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번역됐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통설이다. 또 기원전 3~2세기께 이집트에서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됐는데 이 번역본을 ‘칠십인역본’이라 한다. 성경의 문자인 히브리어와 아람어, 헬라어는 모두 페니키아 문자에서 나왔다. 성경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고 모두 자음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자음 알레프, 바브, 요드, 아인을 경우에 따라 모음처럼 반자음으로 사용했다. 현대 히브리어도 성경 히브리어와 같아 별반 다름이 없어 예수님께서 오늘날 히브리어 신문, 잡지, 책을 읽고 해독하실 수 있다. 성경 시대 유다인들은 동물 뼈나 구리로 만든 첨필로 초를 바른 목판에 글을 쓰거나 갈대 펜으로 잉크를 찍어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글을 썼다. 양피지는 소아시아 페르가몬에서 생산된 것이 제일 질이 좋았다. 그래서 양피지를 뜻하는 라틴말 ‘페르가메나’도 이 도시에서 유래됐다. 양피지는 값이 비쌌다. 그래서 양피지를 쓰는 사람들은 통상 외피와 내피를 분리해 사용했다. 그리고 얇고 깨끗한 내피 양피지보다 그렇지 못한 외피 양피지가 싸게 거래됐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성경을 필사할 때 양피지가 쉽게 찢어지지 않게 통가죽으로 된 양피지를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도 양피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티모테오에게 로마 감옥에 갇힌 자신에게 올 때 트로아스에 있는 카르포스의 집에 두고 온 외투와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져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2티모 4,13).갈대로 만든 파피루스는 양피지에 비해 가격은 쌌지만 쉽게 구해 쓸 만큼 결코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특히 예수님 시대 때에는 로마가 이집트산 파피루스에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유다인들은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또 성경학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서간이 파피루스에 쓰였다고 하고 초대교회 신자들도 성경 본문을 주로 파피루스에 필사했다고 설명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cpbc2015.02.11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45>](//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6334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영적 식별의 기준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꿈에서 주님의 천사의 말을 듣고 영적 식별을 할 수 있었다. ‘요셉의 꿈’, 가에타노 간돌피, 1790년 경, 유채, 개인 소장. 통상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신비 체험에 대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강하게 보내며, 그에 대한 영적 식별에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인이 관심 가져야 할 문제는 나날의 삶 안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찾아 구세주로 알아볼 것이며, 구원을 위해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영적 식별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에 대해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몇몇 일화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알아볼 수 있는지에 관한 영적 식별 기준을 제시하였습니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가 같이 살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해 하다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꿈에서 주님의 천사의 말을 듣고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를 하느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으로 식별하게 됐습니다(마태 1,20-24 참조). 베들레헴 지방 들판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은 주님의 영광이 그들의 둘레를 비추자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목자들은 주님의 천사가 알려준 대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구원자 그리스도로 식별하게 됐습니다(루카 2,8-12 참조). 동방에서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을 경배하러 예루살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박사들은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멈춰 선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를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으로 식별하게 됐습니다(마태 2,1-11 참조). 성령께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던 시메온과 성전에서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한나가 같은 때에 성전에 있었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던 그들은 마침 정결례를 거행할 날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데리고 온 아기를 예루살렘을 속량할 주님의 그리스도로 식별하게 됐습니다(루카 2,25-38 참조).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것을 알려주셔서 베드로는 스승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마태 16,13-17 참조).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 위해서 하느님 계시와 성령의 이끄심에 늘 귀 기울여야 합니다.한편, 예수님께서는 참 그리스도인을 식별할 기준도 제시하셨습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듯이,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면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를 가릴 수 있으며(마태 7,15-20 참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참 가족이고(마태 12,46~50 참조), 어린이처럼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마태 18,2-4 참조),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이라야 양 떼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마태 25,34-40 참조). 따라서 참 그리스도인은 소박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애덕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죄를 지은 형제는 이웃과 교회의 말을 들어야 교회에 머무를 수 있으므로(마태 18,15-17 참조), 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교회의 가르침과 교도권에 순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그러나 마음이 무디고, 귀로 들으려 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린 사람은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들은 말씀을 뿌리내리게 못 하며,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함으로써(마태 13,13-22 참조) 영적 식별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가져야 하는 관심은 일시적인 신비 체험이 아니라 늘 일상 속에서 주님을 알아 뵙고 참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을 찾는 영적 식별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백영민2016.03.24
![[발칸에서 평화를 찾다] ⑤ 스르프스카 학살의 진실, 화해와 용서](//cpbc.co.kr/CMS/newspaper/2016/06/rc/640466_1.0_titleImage_1.jpg)
[발칸에서 평화를 찾다] ⑤ 스르프스카 학살의 진실, 화해와 용서도움·나눔의 손길로 분쟁의 땅을 평화의 땅으로 일궈 바냐루카교구의 성 보나벤투라주교좌성당 앞 예수성심상 기단석에는 “Mir Vama!”, 곧 “너희에게 평화를!”(요한 14,27)이라는 뜻의 성경 구절이 씌어 있다. “용서요? 날마다 기도를 통해 용서를 청하고 또 용서합니다.” 바냐루카교구청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의 한 수도자는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공화국 비밀경찰이 자행한 학살을 용서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1996년 3월 20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공화국과 스르프스카공화국 간 국경선이 그어지면서 보스니아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데이튼 평화협정 덕이었다. 양쪽의 포로는 석방됐고, 진실 규명과 함께 전범 재판도 시작됐다. 그 마지막 재판은 취재진이 지난 4월 중순 바냐루카를 찾아가기 20여 일 전에야 결말이 났다. ‘보스니아의 학살자’로 불린 라도반 카라지치(71)가 네덜란드 헤이그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40년 형을 선고받은 것. ‘눈에 보이지 않는’ 학살과 성당 파괴가 끝나자 바냐루카교구는 재건을 시작했다. 그런데 재건 방향이 특별했다. 교구장 프란요 코마리차 주교는 교회 재건에 앞서 ‘주교관’을 카리타스 보건소로 내놓았다. 주교관을 개축한 보건소를 통해 교구는 18년 동안 20만 명의 난민과 환자들을 치료하고 공중보건 혜택을 제공했다. 오갈 데 없는 노인과 가족, 학생들을 위해서는 요양원과 기숙사, 사회교육센터, 협동조합 등을 설립, 운영했고 어려운 형편에 놓인 소녀들을 위한 가정과 생명 센터와 미혼모의 집도 열었다. 난민 사목과 함께 교구는 외국의 지원을 받아 파괴된 2500여 채의 집과 아파트를 보수했다. 그 뒤에야 파괴된 성당과 사제관, 수도원, 오라토리오(청소년 기도의 집 겸 교회 학교)를 다시 짓고 있다. 그간 15개 성당을 새로 지었고, 59채의 교회 건축물을 보수했으며, 지금은 25개 공사를 진행 중이다. 바냐루카교구 카리타스 담당 밀렌코 아니치치 몬시뇰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이에게 똑같이 도움의 손길을 펼친다는 게 저희 교구 카리타스의 원칙입니다. 그 결과는 평화로 돌아왔습니다. 코마리차 주교님은 인종과 종교 간 갈등으로 얼룩진 비극을 씻어내고자 사회복지 활동과 함께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하는 평화포럼을 열어 분쟁의 땅 보스니아에 평화를 정착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2014년에는 코마리차 주교님께서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습니다.” 보편 교회도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평화 증진에 힘을 보탰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3년 6월 ‘전격적으로’ 바냐루카를 찾았다. 중화기로 무장한 보스니아 군경의 삼엄한 경계 속에 사목 방문한 교황은 2차 세계대전 중 가톨릭 수사가 포함된 크로아티아 민병대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인 2500여 명을 학살한 데 대해 용서를 청하고 발칸의 화해와 평화를 촉구했다. 또 1차 세계대전 참전 뒤 가톨릭 전례 운동과 평신도 운동을 펼친 바냐루카 출신 이반 메르츠(Ivan Merz, 1896∼1928)를 복자품에 올렸다. 복자의 유해를 담은 관과 복자화, 시복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앉았던 의자 등이 성 보나벤투라 주교좌성당 내 안치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주교좌성당 정문 앞엔 예수 성심상이 세워져 카리타스 보건소를 찾는 모든 이를 반긴다. 기단석에는 큰 글씨로 “Mir Vama!”라고 씌어 있다. 보스니아 말로 “너희에게 평화를!”(요한 14,27)이라는 뜻이다. 그동안에는 수없이 들으면서도 무심히 지나쳤던 이 말씀이 이제야 평범하지만은 않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하는 의문이 취재 내내 긴 여운으로 남았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인터뷰; 바냐루카교구 마르코 셈렌 보좌주교“용서는 정말 힘겹고 고통스러웠지만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바냐루카교구 총대리 마르코 셈렌 주교는 “비밀경찰의 학살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면서도 “학살은 비극이었지만, 우리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게 했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고 고백했다. 인종·종교 상관없이 도움의 손길 뻗어 셈렌 주교는 “교구 카리타스와 함께 인종이나 종교의 장벽을 두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심지어는 교구 신자들과 사제들, 수도자들을 처형했던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들은 물론 무슬림과 유다교 신자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돌봤다”며 “그 힘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서 비롯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셈렌 주교는 내전 당시 동료 사제들이 당한 수난도 그대로 전했다. “당시 교구 사제가 6명이나 살해당했는데, 살아남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분들 중 한 분이 스티포 쇼시치 신부님이셨죠. 비밀경찰에 끌려가신 뒤로 어디에 계신지 알 수가 없었는데, 우연히 그분이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해서 적십자사를 통해 석방을 요구하니까, 한밤중에 다른 수용소로 빼돌리려다가 발각돼 결국은 석방되셨지요. 그 신부님이 석방되던 날, 수용소에 가보니 갇힌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오시는 게 아니겠어요? 갇혀 있는 동안 두 손이 묶인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훗날 그 신부님이 「어둠까지」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데, 스웨덴에서 난민 사목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이 얘기를 전한 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셈렌 주교는 “중요한 것은 용서가 아니라 ‘주님, 제 상처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주님 앞에 모든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 상처를 모두 짊어지실 수 있고, 가해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며 “요즘도 교구 신자들의 기도는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님이 주신 희망을 안고셈렌 주교는 이어 “지금도 교구 상황이나 선교 여건은 열악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더 좋은 희망을 주셨고 우리는 그 희망을 안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기에’(히브 7,19 참조) 카리타스 활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그렇게 살아가는 힘은 바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세택 기자 cpbc2016.06.14
![[성경 속 생명이야기] 22. 생명의 어머니 마리아 Ⅱ- 마리아의 모성애](//cpbc.co.kr/CMS/newspaper/2014/07/rc/520755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생명이야기] 22. 생명의 어머니 마리아 Ⅱ- 마리아의 모성애 지영현 신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사무국장)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 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묵시 12,1-4). 교회와 마리아의 신비 사이의 상호 연관성은 묵시록에서 묘사된 ‘큰 표징’ 속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12,1). 교회는 이 표징 속에서 자기 자신이 지닌 신비의 모상을 발견합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교회는 지상에 하느님 왕국의 ‘시작과 싹’을 심는다는 의미에서 역사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신비가 마리아 안에서 완전하고도 전형적으로 완성됨을 봅니다. 마리아는 영광을 입으신 여성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그분 안에서 지고한 완전성을 가지고 수행될 수 있었습니다. 묵시록은 그 ‘태양을 입은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12,2)고 말해 줍니다. 교회는 자신 안에 세상의 구세주이신 주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남녀들을 하느님의 새 생명 안에 새롭게 태어나도록 함으로써 세상에 그리스도를 제공하도록 부름 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사명이 마리아의 모성애 때문에 가능해졌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참된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된 하느님’을 잉태하고 낳으신 분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 천주의 모친(Theotokos)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여성에게 주신 모성애의 소명은 그분의 모성애 안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께서는 교회의 전형이시며, ‘새로운 하와’, 믿는 이들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창세 3,20 참조)라고 불립니다. 교회의 영적 모성애는 오직 해산의 고통과 ‘진통’(묵시 12,2 참조), 다시 말해서 여전히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주고 그리스도에게 저항하는 악의 세력과의 끊임없는 긴장을 통해서 성취되며, 교회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4-5).교회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고통 속에서 모성애를 실천해야만 했습니다. “이 아기는…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카 2,34-35). 구세주께서 지상생활을 시작하실 바로 그때 시메온이 마리아에게 하는 이 말은 예수에 대한 거부를 요약하여 예시합니다. 갈바리아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는 이 거부는 예수와 더불어 마리아에 대한 거부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밑에 서 계신’(요한 19,25 참조)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그 헌신에 참여하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봉헌하시고, 그분을 내어주시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위해서 그분을 낳아주십니다.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 받은 그날의 “예”라는 대답은 십자가의 날에 그 충만한 완성에 다다릅니다. 그날은 마리아께서 제자가 되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여 당신의 자녀로 낳아주시며, 그들 위에 당신 아드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부어주시는 때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9,26).그러므로 두려움과 고통 안에서도 모든 이들을 위해 생명을 받아들이시고 그 생명을 사랑에 차 보살피신 그 모성애를 통해 마리아는 교회와 생명을 향해 다시 태어난 사람들의 어머니, 곧 생명의 어머니,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cpbc2014.07.23
![[성경 속 생명 이야기] 10. 생명의 원천](//cpbc.co.kr/CMS/newspaper/2014/04/rc/504701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생명 이야기] 10. 생명의 원천민남현 수녀(엠마, 성바오로 딸 수도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한 원천에서 생겨났습니다. 성경은 첫 책부터 마지막 책까지 하느님을 영원히 살아계신 분으로 증언하면서 생명의 원천으로 제시합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었음'(창세 1,2)을 밝히고 하느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묵시 1,4)으로 선포합니다. 하느님이 모든 존재의 원천이신 이유는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신(창세 1장) 하느님의 창조활동이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육화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실현됐음을 요한복음서는 매우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3-4). 하느님의 무상적 사랑으로 창조된 인간이 선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해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자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새 생명을 다시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인간이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시기 위해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깨닫고 믿을 수 있는 최고 방식인 아드님의 육화로 당신의 큰사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전해짐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음을 요한 1서의 저자는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1요한 1,1-2). 예수님의 공생활, 죽음 그리고 부활을 실제로 체험한 감동에서 나온 이 증언은 우리가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인지를 깊이 느끼게 합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인간을 살리는 구원의 도구로 내어주실 만큼(요한 10,10) 우리는 그분께 사랑받는 존재들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구약시대에 매우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보도한 이사야 예언자의 글이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이사야 예언자가 어머니와 갓난아기의 관계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로 비교한 것은 우리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논리를 훨씬 넘어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앎으로써 우리 자신의 생명이 소중함을 깨닫고 타인의 생명 또한 존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면서 체험한 고통을 기억해 훗날 자유인으로 살아갈 때 다른 이를 자비롭게 대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매우 큰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탈출 22,22). 주님은 생명을 살리는 분이십니다. 공생활 중에 육체적, 윤리적, 영적 차원에서 죽음을 체험하는 병자들에게 언제나 연민으로 다가가 치유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4,24). 예수님께서 사람이 돼 세상에 오신 목적은 여러 죽음의 상황으로 인해 자유를 잃고 고통의 어둠속에 있는 인간에게 생명을 되찾아주시려는 것입니다. 곧 모두가 골고루 충만하게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삶을 포기하고 싶은 때,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을 떠올리면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cpbc2014.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