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이야기] (17) 유다인의 교육과 성년식](//cpbc.co.kr/CMS/newspaper/2014/05/rc/511392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17) 유다인의 교육과 성년식역사·지리 등 모든 교육의 근본은 성경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성년식을 치르고 있는 한 유다인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토라에 입을 맞추고 있다. 리길재 기자 유다인의 아동 교육은 참으로 탁월하다. 특히 ‘종교와 도덕’ 교육을 중시했다. 성경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잠언 22,6)고 일깨우고 있다. 아버지들이 나서서 교육성경 시대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은 자녀에게 십계명을 가르치는 것이 우선적 의무였다. 유다인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이 계명을 아침ㆍ저녁 기도 때마다 되풀이해 외웠다. 아울러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은 아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업적을 들려줘야 했다. 이스라엘 사회는 종교와 도덕이 하나이며, 민족의 역사도 종교 계명과 함께 율법 일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은 또 자녀에게 성경 말씀대로 대축제와 여러 관례의 신성한 의미를 가르쳤다. 그래서 성경은 늘 부모들에게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주어라”(신명 6,4-7)고 일깨우고 있다. ‘소를 살찌게 하듯 아이들을 토라(율법)로 살찌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속담대로 유다인들은 성경을 교재로 언어ㆍ문법ㆍ역사ㆍ지리 등을 가르쳤다. 그래서 저명한 유다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성경 안에 가장 뛰어난 학문이 있고 행복의 원천이 있다”며 “나는 이미 4살 때 완전히 성경을 이해했다”고 자랑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익혀 왔다고 제자인 티모테오에게 고백한 바 있다(2티모 3,15). 여아들도 사내아이들처럼 성경 공부를 한 것 같다. 그 대표적 증거가 바로 성모 마리아시다.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에는 30곳 이상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회당에서 ‘하느님의 사자’라 불린 교사들이 가르치면 땅바닥에 둘러앉은 아이들이 선생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따라 외웠다. 이 같은 반복과 응답이 유다인의 일상적 학습 방법이었다.성경 속 유다인 아이들은 공부만 강요받는 오늘날 우리 아이들과 달리 놀기도 잘했다. 예언자 즈카르야는 예루살렘 도성 광장마다 뛰노는 소년소녀들을 이야기하고 있고(즈카 8,5), 마태오 복음서는 아이들이 어른 흉내를 내어 결혼식이나 장례식 놀이를 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마태 11,16-17).「탈무드」 ‘조상의 격언’ 편에는 “5살이 되면 교리 공부를 시작해야 하며, 10살이면 전승을 공부하고, 13살이면 하느님의 모든 율법을 알고, 그 계명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또 15살이면 지식의 완성에로 나아가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는 이와 달리 예수님의 성장기를 ‘갓난아기’ (2,16), ‘아기’(2,40), ‘소년 예수’(2,43)로 나누고 그 후는 그저 ‘예수’라 말하고 있다(200주년 신약성서 참조). 유다인의 성년식유다인 소년들은 13살이 되면 법률적으로 ‘성인’이 된다. 13살 생일에 유다인 소년은 성년식(바르 미츠바)을 하고 토라에 손을 얹고 ‘율법의 아들’로 선포된다. 13살이 성인의 기준이 된 것은 야곱이 형 에사우의 복을 가로채 이사악에게서 장자권을 받고 하란으로 도망칠 때 나이가 13살이었다는 게 유력설이다. 12살이던 소년 예수가 성전 앞뜰에 자리 잡은 율법학자들과 토론한 것은 특별한 경우이지만, 이스라엘 소년들은 13살이 되면 성인으로서 그 유명한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 신명 6,4-9) 기도를 하루 3번 되풀이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또 13살이 되면 ‘정해진 날’ 특히 ‘대속죄일’에 율법 규정대로 단식하고 예루살렘 순례에 참가해야 하며, 성전에 도착하면 ‘남자들의 앞뜰’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성년이 된 후 성경과 율법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예루살렘으로 가서 저명한 율법교사들이 강의하는 학교에 등록해야 했다. 바오로 사도도 저명한 율법교사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했었다. 여느 사회처럼 이스라엘의 가정도 사회의 기초요 모퉁잇돌이다. 예수님 시대 역시 구약 시대만큼 은 아니지만 집안끼리 강한 ‘골육’(창세 29,14) 의식을 보였다. 유다인들은 ‘같은 피를 갖고 있다는 것은 같은 혼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가문의 영속성과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형제간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 자는 카인과 같은 자’라며 멸시했다. ‘가족’을 뜻하는 히브리말 ‘아하’는 부모 형제뿐 아니라 이부모 형제, 종형제, 친척까지도 뜻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우리는 한 혈육”(창세 13,8)이라고 말했고,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고향 사람들이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마태 13, 54-58)라고 말한 까닭도 이 같은 관습 때문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5.27

배려심 많고 경청과 화합의 탈렌트 지닌 착한 목자장신호 주교 삶과 신앙 1971년 첫 영성체날 찍은 장 주교 사진. “아이고, 잘하셨네! 이제 주교님이 되셨으니 더 잘해야겠네.”아들 신부의 보좌주교 임명 소식을 들은 장신호 주교의 아버지 장진휘(베드로, 78, 대구 계산본당)씨는 곧바로 성당으로 달려가 기도했다. “성경 말씀대로 살면 탈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아버지의 꿈은 사제. 장 주교는 매일 새벽 미사를 봉헌하고, 성령쇄신봉사회와 연령회에서 봉사를 해온 아버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장 주교의 어머니 김현순(안나, 77)씨는 “아버지가 못 이룬 꿈을 아들이 이뤘다”면서 꿈 이야기를 하나 해줘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에 따르면, 4남매 중 장남인 장 주교가 8살 때 동생들과 다투자 매를 들었는데 그날 밤 어머니는 장 주교가 그 매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꿨다. 어머니는 아들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는데, 어느 멋진 집에서 사람들이 아들의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꿈에서 깨어나 ‘하늘에서 이렇게 대접을 받는 아들인데, 내 아들이라고 너무 내 마음대로 했다’ 싶어 매를 꺾어 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았다.교리 교사 하며 신앙 더 깊어져어머니는 “3살 때 유치원에 갔다가 길을 잃어 밤 8시에 파출소에서 찾은 일을 빼고는 아들 때문에 신경 쓸 일은 한 번도 없었다”며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남이 손해 보는 것을 못 보는 착한 아들”이라고 말했다. 장 주교는 고등학생 때까지 본당 복사단으로, 대학(영남대) 진학 후에도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했을 때 그는 주일학교 학생들과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사제 서품식에 참여했다. “그때 많은 신자와 함께 교황님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 또한 교리교사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교리를 더욱 열심히 가르치고, 신앙이 깊어지는 계기가 됐습니다.”당시 학생들에게 ‘날으는 돈가스’라고 불린 그는 주일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에서 신임이 두터웠다. 늦게까지 성당에 남을 때는 동료 교사들을 택시에 태워 귀가시켰고, 돈이 없을 땐 집까지 데려가 택시비를 쥐여줬다. 교사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다른 교사들을 탓하지 않고, 혼자 묵묵히 책임을 떠안았다.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던 시간은 그를 신학교로 이끌었고, 사제 생활을 꿈꾸게 한 터전이 됐다. 계산본당 주일학교에서 많은 성소자가 배출됐고, 장 주교도 선배들을 따라 신학교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다. 1993년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신학생 신분으로 로마 유학길에 올랐다. 1998년 사제품을 받고 1년간 봉덕본당 보좌로 사목했던 시간을 빼면 2002년까지 8년간 로마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유학 생활에서 오는 향수병은 대구 토박이인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그러나 2년마다 재유럽 대구대교구 사제 신학생 모임이 열렸고 여기에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신부들과 모여 모처럼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한국 음식을 먹었던 순간은 그에게 큰 힘이 됐다. 당시 교구장이었던 이문희 대주교가 한국에서 가져온 김치와 직접 끓여준 라면을 먹으며 향수병을 달래곤 했다. 온화한 성품에 대인관계 원만 장 주교에 대한 지인들의 평은 한결같다. 온화하고 성실하며, 특별히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다. 장 주교의 사제 생활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김명현(비산본당 주임) 신부는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남들이 어려우면 차분하게 배려하고 도와주는 성품을 지녔다”면서 “일을 하나 부탁하면 두 번 다시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해 무척 성실한 분”이라고 말했다. 장 주교와 로마에서 함께 생활한 김 신부는 장 주교가 2006년 대구가톨릭대 신문방송사 부주간을 맡았을 때 주간으로 함께 일했다. 신자들이 전례에 쉽게 다가가도록 2009년부터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로, 주교회의 전례서 편찬을 담당해온 장 주교는 가톨릭 전례학회 총서 시리즈 1권 「교회의 전례」 등을 번역했다. 전례서를 번역하면서 신앙생활에서 전례를 어렵게 느끼는 신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전례 관련 질문도 외면하지 않고 친절히 답글을 달아줬다. 그가 전례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계산성당에서 주교가 주례하는 미사에서 복사를 서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전례로 옮겨가면서다. 장 주교가 생각하는 전례의 핵심은 사랑에 있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웃에게도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데 그 힘은 전례에서 나온다”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가톨릭 전례학회 회장 윤종식(가톨릭대 전례학 교수) 신부는 “장 주교님은 사람을 이해해 주려는 측면이 강하신 분이고,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지 않는 분”이라고 했다. 특히 “학문적인 탐구에 있어 끈질긴 면이 있어 존경한다”고 덧붙였다. 장 주교와 신학교 동기인 이성호(교구 성소 담당) 신부는 “평소에 늘 웃는 얼굴로 본인의 이야기를 하시기보다 경청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면서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불평, 불만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교구가 커서 교구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다양한데, 경청과 화합의 탈렌트가 있으신 만큼 교구장님을 잘 보필해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장신호 주교 약력1966년 5월 25일 대구 출생1984년~1988년 영남대학교 1988년~1993년 대구가톨릭대학교 1993년~1996년 교황청립 사도들의 모후대학1996년~1998년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교 전례학 석사1998년 8월 25일 사제 수품1998년~1999년 대구대교구 봉덕본당 보좌1999년~2002년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교 전례학 박사2002년~2009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2009년~현재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 주교회의 전례서 편찬 담당 2016년 5월 31일 대구대교구 보좌주교 임명 백영민2016.06.08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육신의 재계란?믿음으로 행하는 재계, 하느님께 이르는 방법 필자는 그리스도인 수덕 생활이 나쁜 악습을 끊어 버리려는 방향과 좋은 덕행을 습득해 증진시키려는 방향에서 실천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수덕 생활을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덕의 본성이라는 범주에서 구분하는 경우와 다르게 실천 방법의 범주에서 또 다른 구분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인간 육신의 행위에 강조점을 두는 경우와 인간 정신의 행위에 강조점을 두는 경우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동안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육신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인간 육신의 행위를 통한 수덕 생활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재계, 부정함을 멀리 한다는 의미오늘날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사순 시기나 대림 시기가 되면 종종 ‘재계’(齋戒)를 지켜야 한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 사전은 이 단어의 의미를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해 ‘종교적 예식을 거행하기에 앞서’ 재계를 실천한다고 설명합니다. 가장 이해하기 좋은 예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폭넓게 사용하는 ‘목욕재계’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부정 타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려는 측면이 나타날 뿐이지 인간 육신에 해를 끼치는 듯한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하지 않습니다.그런데 이 단어의 준말인 ‘재’라는 말 하나만 사용하는 경우에는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 조금 다른 의미를 드러냅니다. 한국 가톨릭 신앙인은 교회에서 우리말 ‘금육재’, ‘단식재’라는 용어를 통해 이 단어를 접하게 되는데, 외형적으로는 ‘재’가 사용됐지만, 내용적으로는 규정을 지키라는 의미가 더욱 포함된 ‘계’라는 의미로 더 알아듣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교회 안에서는 비슷한 말로 금욕, 고행, 고신극기(苦身克己) 등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단어에는 인간 육신에 다소 불편함을 제공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고통, 하느님께 다다르는 역설적 방법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사상을 살펴보면, 사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포함해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고 나서 보시니 좋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 1장 참조). 이러한 좋은 세상에 고통이 들어온 것은 인간이 죄를 지은 후였습니다(창세 3장 참조). 그러나 인간에게 벌로 주어진 고통은 인간이 회개를 통해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신 하느님의 마음이었고, 인간이 짊어질 수덕 생활과 같은 것이었습니다.그런데, 가나안 정착 이후에 유다인들은 인간이 수확한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다시 하느님을 저버리게 됐습니다. 이에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께 다시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잠시 인간에게서 지상의 재물을 빼앗을 뿐 아니라(호세 2,10-11 참조), 재물을 저주의 징표로 여겨야 한다(이사 5,8-24 참조)고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육신의 고통은 고통받는 욥(욥 42,1-6 참조)과 예언자 예레미야(예레 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 참조), 그리고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이사 52,13-53,12 참조)에 이르러서 하느님께 다다르는 역설적인 방법이 됐습니다.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수덕 생활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 가르침에서도 어려운 여정이 요청됩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그 길도 비좁습니다(마태 7,14).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있다면 비록 몸의 일부이더라도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마르 9,42-48). 나아가서 자신의 소유를 다 포기해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루카 9,33).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탓할 것이 있어도 참아야 하며(1코린 6,1-7; 콜로 3,13; 에페 4,26) 남의 짐을 져 주고(갈라 6,2), 형제를 심판하지 말며(로마 4,4.10) 박해자들마저 축복해 주어야 한다(로마 12,14)는 것입니다.결국 성경의 가르침은 자신을 해치는 고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고통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믿음에 일치시키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수덕 생활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5.10.07

외계 생명체 존재한다면 그들도 하느님 피조물우주에서 ‘또 하나의 지구’ 발견 - 바티칸 천문대장 호세 가브리엘 푸네스 신부에게 묻다 지난 7월 23일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우주에서 ‘또 하나의 지구’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평화방송·평화신문은 이를 계기로 바티칸 천문대장 호세 가브리엘 푸네스(Fr. Jose G. Funes, S.J.) 신부와 전자우편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며 바티칸 천문대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진화론과 신앙과의 관계에 대한 최근 교황들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보도국=김소일 기자 우주에서 '또 하나의 지구' 발견 -바티칸 천문대장 호세 가브리엘 푸네스 신부에게 묻다 지구와 다른 행성에 생명체가 있다면 그 또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바티칸 천문대장 호세 가브리엘 푸네스(Fr. Jose G. Funes, S.J. 사진) 신부가 말했다. 그는 평화방송·평화신문과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외계 생명체는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며, “설사 그들이 우리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 해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회 소속 사제이면서 천문학 박사인 그는 2006년부터 10년째 바티칸 천문대장을 맡고 있다. 다음은 질문과 답변 내용의 요약이다. ▶다른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은?최근의 관측 결과에 따르면, 모든 항성은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외계 생명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해도 존재할 가능성은 있다.▶외계 생명체가 있다면 그들도 하느님이 창조하셨나?하느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다. 우주 속에 지능을 가진 외계 생명체가 있다면, 그들도 하느님의 피조물이다.▶그러한 존재가 우리 신앙을 위협하지는 않는가?그들이 설사 우리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 해도 창조, 육화, 구원의 믿음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지구상에 생명의 다양성이 존재하듯이 하느님이 창조한 다른 지적 존재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 배치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느님의 창조를 제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오늘날 구약 성경의 창세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천문학자로서 나는 하느님의 우주 창조를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기본적으로 과학책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책이며, 2~3천 년 전의 언어로 쓰였다. 그때는 ‘빅뱅’ 같은 개념이 없었다. 때문에 성경에서 과학적 답변을 찾을 수는 없다.▶ 빅뱅이론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가?현재로서는 빅뱅이론이 우주에 관한 가장 훌륭한 이론이다. 우리의 신앙과 모순되지 않으며, 합리적이다.호세 가브리엘 푸네스 신부는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이탈리아 파도바대학교에서 천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사제품을 받고, 2000년부터 바티칸 천문대 연구원으로 일하다 2006년부터 천문대장을 맡고 있다. 교황청 기관지와 이탈리아 언론을 통해 과학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자주 대변한다.바티칸 천문대 유래와 역사 교황 여름 별장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바티칸 천문대. 오른쪽 돔형 지붕이 천문대다. 바티칸에 천문대가 있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이 많다. 그냥 아마추어 수준의 관측소가 아니다. 천문 관측의 역사에서 결코 잊힐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 기원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율리우스력을 폐지하고 새 역법을 선포했다. 지금까지 쓰고 있는 그레고리오력이다. 이 역법 개정을 앞두고 천문 연구를 위해 바티칸에 관측소를 세웠다. 지금도 바티칸 박물관 건물에 남아 있는 ‘그레고리오 탑(바람의 탑)’이 그곳이다. 이곳에 1789년 대형 반사경(Specola)이 설치된다. 오늘날 바티칸 천문대를 뜻하는 ‘스페콜라 바티카나’(Specola Vaticana, 바티칸 반사경)라는 이름은 이렇게 탄생했다.1774년에는 교황청 소속 로마대학(현재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도 천문대가 생겼다. 이 천문대 또한 과학사에 빛나는 성과를 남겼다. 특히 안젤로 세키(Pietro Angelo Secchi S.J.) 신부는 28년간 천문대장을 역임, 별빛의 스펙트럼을 통해 별의 특성을 알아내는 천체분광학을 개척했다. 태양이 여러 별 중 하나임을 권위 있게 선언한 최초의 과학자로도 꼽힌다.바티칸 천문대는 1935년 로마 시내의 밝은 불빛을 피해 장소를 옮긴다. 이때 교황 비오 11세가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에 있는 교황 여름 별장을 기꺼이 제공했다. 천문대 운영과 연구는 예수회에 맡겨졌다. 이 시기 바티칸 천문대의 관측 자료와 연구 성과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다. 지금 달의 분화구에는 그 발견자인 예수회 신부의 이름이 35개나 붙어 있다.1981년에는 미국 애리조나주 투산(Tucson)에 제2연구소를 설립했다. 1993년에는 애리조나주 그레이엄 산(Mt. Graham)에 1.8m(71인치) 크기의 ‘바티칸 고급 기술 망원경’(VATT)을 설치했다. 지금 바티칸 천문대는 이런 시설과 연구소를 연결한 ‘바티칸 천문관측 그룹(VORG)’이다. 해마다 연구 성과를 집약한 보고서를 펴내고, 요약본을 교황에게 제출한다. 교황 회칙, 연설에 나타난 교회 입장 [[그림 4]]현대 과학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한 교황으로 비오 12세가 있다. 1950년 진화론에 대한 입장을 회칙(Humani generis)으로 발표했다. 이 회칙은 진화론을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의 진지한 가설’로 여긴다. 다만 인간 영혼의 문제에서는 단호하다. 즉 인간의 육체는 그 이전의 생물체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해도, 그 영혼은 하느님이 직접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 점만 분명히 하면 진화론과 신앙 교리 사이에 아무런 대립도 없다고 선언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바로잡은 교황이다. 그것은 과학과 종교, 신앙과 이성 사이에 전개된 비극적 오해와 불신의 시대를 마감한다는 상징적 조치였다. 그는 1996년 10월 교황청 과학원 총회에 보낸 연설을 통해 다시 한 번 진화론을 언급한다. 비오 12세 회칙 이후 반세기가 더 흐르면서, 진화론은 이제 ‘하나의 가설 이상’이 됐다고 지적했다. 다만 인간의 정신만은 여전히 진화의 산물일 수 없음을 강조했다.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10월 교황청 과학원 총회에서 연설하면서, 현대 우주론의 총아인 빅뱅이론이 신앙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늘날 세상의 기원으로 제시되는 빅뱅(대폭발)은 창조주의 개입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창조주에 의존한다. 진화도 진화할 존재의 창조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창조의 개념과 충돌하지 않는다.”빅뱅이론은 우주가 약 137억 년 전의 대폭발에서 비롯됐다는 이론이다. 교황은 그 태초의 폭발이 창조주의 몫임을 역설한 것이다. 또한 진화는 수십억 년 지구 위에 펼쳐진 생명의 향연이다. 그 생명은 탄생의 순간에 하느님의 숨결을 필요로 한다. 분명 교회는 과학 이론의 옳고 그름에 어떤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진화론과 빅뱅우주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두 이론 모두 창조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우리의 신앙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cpbc2015.08.11
![[제4회 신앙체험수기] 행복한 사형수](//cpbc.co.kr/CMS/newspaper/2017/03/rc/675056_1.1_titleImage_1.jpg)
[제4회 신앙체험수기] 행복한 사형수이석수(요아킴, 수원교구 북수동본당)그림= 문채현 흐르는 시간이 기적을 일으켜 현실의 반대 방향으로 역류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잃어버린 20년의 세월 앞에 당당해질 수 있다면 “나는 무엇으로 그 소중한 시간을 값진 알맹이로 채워갈 수 있을까?”라는 마음을 사색의 깊은 강물에 던져봅니다. 향긋한 꽃향기처럼 이웃에게 조금이라도 사랑의 향기를 피워올릴 수가 있다면,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입니다. 누구나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한 올의 어긋남과 이탈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마는 저는 아직도 끔찍한 그 큰 실수의 당위성을 말하기엔 너무나 큰 죄악을 저지른 죄인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운 교도소의 15척 큰 담 안의 세월을 20년 동안 묵묵히 참고 견디며 시간이 주는 잔혹한 부속물과 설움의 눈물을 삼키며 그렇게 삶을 살아왔습니다. 날개가 꺾인 새는 하늘을 날 수가 없듯이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를 빼앗긴 삶은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한 짐승의 삶과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자유를 상실하고 자유를 잃어버린 삶.’ 그것은 단순히 철장 속에 갇힘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거침없이 과거로 흘러가고 있는데, 그 시간의 잔상이 현실의 벽에 막혀 단절되었을 때의 그 깊은 절망과 고통, 슬픔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갖가지 아픔과 눈물, 절망의 쓴 잔을 무수히 삼키고, 푸른 수의를 입고 작은 골방에서 철창으로 조각난 사각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설움의 뜨거운 눈물을 뿌렸던 나날들이 그 얼마인지 모릅니다. 담 안에서 살아갈 때 사소한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에도 마음과 손이 가고, 담장 위를 자유롭게 비행하며 삶을 만끽하는 비둘기들의 정겨운 모습이 마냥 부럽기도 했었습니다. 정에 굶주린 사람은 한낱 미물에게도 진솔한 마음을 열어 보인다는 옛말이 헛된 말은 아님을 저는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죄의 대가를 혹독하게 다 치렀고, 오래전 제가 태어나고 살았던 그리운 고향 산천으로 벅찬 감회의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못난 저를 위해서 똑같이 마음고생을 하며 징역살이를 같이 해야만 했던 사랑하는 저의 처 안나씨와 두 딸 노엘라와 마리아, 그리고 은인 천사분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기도의 땀방울이 없었다면 아마도 저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돌이킬 수 있을 때 과감하게 뉘우치고 반성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함을 저는 큰 담 안에서 절실하게 배웠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을 땐 순간적인 잠깐의 실수에도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27년 전에 죽음의 늪지대인 그 두려움으로 떨던 사형수 시절을 잠시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갑을 두 손에 차고 어설픈 기도로 묵주 알을 굴리며 다시 한 번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피눈물로 매달리고 몸부림쳤던 아찔한 그 시간들과 밤낮들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다시 한 번 저를 살려주시기만 한다면 생명이 붙어있을 때까지 하느님을 흠숭하고 찬미할 것이며, 하느님의 크신 뜻과 계명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 기꺼이 죽기까지 하겠습니다.” 저는 사형수 시절에 주님께 드린 그 약속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지킬 것입니다. 저는 비로소 예전에 몰랐던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숨 쉰다고 다 사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참 천주로 받아들이고, 또 그 존엄하신 분의 진리의 깊은 뜻과 사랑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생명의 참 삶임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마태오 복음 4장 4절의 말씀처럼 주님께 덤으로 받은 이 재생의 삶을 나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고,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는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최고수라고도 불리는 사형수! 그 이름만으로도 교도소에선 충분히 주위를 춥고 무겁고 두렵게 하는 최악의 절망적인 단어입니다. 우리 주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은총으로 말미암아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형이 되었을 때, 환희의 기쁨으로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그 가슴 벅찬 감동의 은혜로운 시간들…. 죽지 않고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입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살아있음”이 얼마나 주님의 큰 축복인가를 절절히 느끼게 됩니다. 지금 저는 이렇게 자유롭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저의 온몸에 기생하고 있는 작은 세포와 그 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근육과 그 근육을 가로지르는 섬세한 핏줄과 그 핏줄 속을 힘차게 흐르고 있는 붉은 피와 쿵쿵거리며 뛰고 있는 튼튼한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는 주님께 향한 감사의 송가가 제 입에서 넘쳐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산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의 가치가 있는지 모른답니다. 인생의 제일 밑바닥에서 자유를 잃고, 제한된 공간과 감시 속에서 처절하게 눈물로 겪어보지 않으면 말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라는 시편 27장 1절의 말씀은 저에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큰 힘과 용기를 주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저를 위하여 밤낮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던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 하느님께서 천사로 보내주신 이대길(시메온) 신부님과 강귀연(후꼬) 수녀님, 사형수 때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무료 변론을 해주신 배기원(알폰소) 양아버님, 그리고 많은 은인 분들의 눈물 어린 기도와 사랑을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저에게 또 한 번 재생의 삶으로 응답해 주셨음을 저는 힘차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울분과 분노를 삭이지 못해 두 분의 고귀한 생명을 앗았습니다. 생명보다 더 고귀한 것이 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다? 저는 그 고귀한 생명을 잃게 한 큰 죄인입니다. 20년 동안 징역살이한 것으로 저의 모든 죗값을 다 치렀다고 저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두 생명을 잃게 한 큰 죄는 제가 숨 쉬며 살아가는 동안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제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갚아야 할 저의 의무이자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고인이 되어버리신 두 분과 피해자분들께 진심으로 사죄하고 또 사죄를 드리며 그 어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뉘우침과 참회의 기도를 하느님께 수없이 바쳤습니다. 저는 이제 고인이 되신 그 두 분의 몫과 함께 하루 72시간의 삶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 사랑의 흔적을 남겨야 하는 사명감이 저의 두 어깨에 걸려 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고인이 되신 분들과 가슴 아픈 피해자 가족분들에게 깊이 사죄를 드립니다. 죄인의 당연한 귀결이지만 이젠 그 혹독한 형기를 모두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어 또다시 세상에 맞서서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시점에서 저는 많은 것을 고민했습니다. 27년 전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실로 엄청난 격세지감이 있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일상생활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편리해지고 안락해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돈과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 더욱더 인심이 강퍅해져 버리고 고약해진 것 같습니다. 인정과 인심이 후했고 예절이 흘러넘치며 사람의 향기가 물씬 풍기던 그 옛날이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담 안에서 갇혀 살아갈 때 저는 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 탓에 불면의 밤을 많이 지새우기도 했었습니다. 저 자신이 저를 위해서가 아니고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윤리와 도덕이 마치 풍전등화와 같은 위태로운 이 사회와 우리 성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를 말입니다. 저의 탈렌트는 하느님께서 분명히 넘치도록 주셨음을 굳게 믿었기에 그 믿음의 끈을 희망으로 부여잡고 끊임없이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는 마태오 복음 7장 7-8절의 말씀처럼 저도 이른 새벽 미명의 시간에 일어나 제단을 쌓고 하느님께 정성 어린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지혜를 청했습니다. 주경야독의 정신으로 아둔한 머리를 돌려 신ㆍ구약 성경 입문과 중급 과정을 통신으로 6년 동안 공부하고 은혜롭게 수료했습니다. 한자 1급 자격증을 땄고 대입 검정고시에도 합격했습니다. 종교 서적과 시집, 가톨릭 월간지 등을 시간을 쪼개어서라도 닥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탐독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자동차 정비 1급 산업기사ㆍ이용사 등 많은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큰 담장의 교정시설 안에서 몇 번에 걸쳐서 천주교 회장과 공장 반장과 자치회장(총반장)의 책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또 매주 드리는 미사와 각종 행사, 생일자 모임 때에는 몇 년 동안 입술이 부르트도록 독학으로 익힌 하모니카로 감미롭고도 경쾌하게 아름다운 성가와 생활 성가, 가곡과 동요, 애창곡 등을 연주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도 했었습니다. 정말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저와 그 시간을 같이하셨던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많은 형제자매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셨지만, 사랑의 원천이신 우리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기뻐하셨을까요?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입증하는 일이라면 새롭게 주신 이 재생의 생명이 무엇이 그렇게 아깝겠습니까! 교도소에서 “이석수(요아킴) 총반장”이라고 하면 직원분들과 재소자들 모두가 한목소리로 제일의 모범수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보다도 하늘에 계신 우리 하느님께 참으로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은 지금도 죄가 뭔지도 모른 채 죄의 늪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크든 작든 사소하든 아니든 간에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여서, 이제 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이 돌 같은 마음으로 굳어버린 것 같습니다. 양극화가 심화하는 지금의 시국에서 더 많은 사람이 인생 한방을 쫓아 헤매는 것처럼 제 눈에는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약하고 부족한 저의 영혼이지만 제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주님을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저를 사랑으로 불사르고 싶습니다. 소박한 삶 속의 감사함과 아름다움의 참 의미를 일깨워 주고 싶습니다. 두 번 다시는 저와 같은 어리석은 큰 죄인이 이 세상에서 암적으로 존재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봉사하며 헌신할 것입니다. 저의 이 처절한 삶의 신앙 체험 고백으로 인해서 무서운 죄의 본성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길 잃은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와 주님을 참 천주로 고백하고 참 자유를 만끽하며 주님 안에서의 행복을 맛볼 수 있도록 저의 뜨거운 열정과 모든 힘을 다 쏟을 것입니다. 제가 교도소 안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바다였습니다. 더 넓은 수평선 위로 붉게 떠오르는 말간 아침 태양을 두 눈이 시리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과 함께 말입니다. 저 수평선의 끝없는 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와 생명과 희망’의 의미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모든 오물을 정화하고 썩지 않도록 모든 생명을 한 아름에 끌어안고 있는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이제는 제 삶도 주님 안에서 완전히 변화해야 함을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 남은 인생이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깨끗한 바다처럼 그렇게 투명해질 수는 없을까요? 수많은 생명이 사는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는 것이 염분이듯이 저도 짠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 많은 사람이 세파에 변질되고 오염되어 가는 이들의 마음을 썩지 않게 하는 짠 소금과 밝은 빛이 되어서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으로 그들의 발걸음을 옮기게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진리의 말씀으로 치유하는 방법이 분명하게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큰 담 안에서 참회하고 회개하며 겸손의 삶을 배워갈 때 매주 한 번도 거르지 않으시고 우리 천주교 공동체를 위하여 미사 집전을 오시는 자상하시고 자애로우신 많은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형제자매님들의 따뜻한 사랑과 기도를 통해서 큰 죄인인 제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오늘날 변화되었듯이, 저 역시도 지금 이 시각에 죄악에서 허덕이고 절망하며 방황하는 가련한 영혼들을 선교하여 하느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복음 선교를 감당해야 한다는 마음의 큰 울림소리를 결단코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힘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은 잘 알지 못하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존재하시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며 앞날을 심판하신다는 그 사실을 저는 힘차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믿은 것은 1984년 화창한 5월의 봄날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식과 103위 시성식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께서 친히 오셔서 거룩하게 집전하고 기도하실 때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십자가가 약 10초가량 나타나는 기적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저의 큰딸 노엘라도 아기 예수님께서 오신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에 대구 파티마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최고수라고도 불리는 사형수 꼬리표를 떼던 날 새벽에 무지개를 만지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그 다음 날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형되어 재생의 삶을 주님께 또 한 번 허락받았습니다. 그리고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큰 담 안에 갇혀서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해주시고 보호해주시며 제가 하는 모든 일에 큰 축복을 내려 주셨기에 각종 문예작품 공모전에서 큰 상들과 많은 자격증을 취득할 수가 있었습니다. 온갖 나쁜 일들과 악한 기운을 막아주시어 아무런 작은 사고도 없이 영육간 건강한 몸으로 날마다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큰 행복도 주셨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과 자비와 기적의 은총은 말로 다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교도소 안에서는 한때 과분하지만 ‘수사’라는 별칭으로 행복하게 불리기도 했었습니다.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무기수에서 또다시 20년수라는 유기징역으로 몇 차례 감형의 큰 은혜를 입기까지 하느님의 크나큰 그 모든 은총은 결단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죄인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어주신 아가페적 큰 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겠지?”하는 무책임한 결과일 수는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이 저의 마음에 차고 넘치는 이 큰 죄인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는 담 안에서 진정으로 우리 하느님을 만났고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나기까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사연과 눈물겨운 설움과 아픔이 들어 있습니다. 큰 담 안에서 20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저에게는 헛된 죽음의 시간이 아니라 은혜로운 큰 희망과 생명의 아름다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작은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큰 담 안이라는 ‘시련의 용광로’에 집어넣어 단련과 연단을 시키셨습니다. 이제는 저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습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는 집회서 2장 5절의 거룩한 말씀이 저의 마음과 뇌리에 불같이 타오릅니다. 단지, 저는 그분의 도구입니다. 주님께서 쓰시는 방향대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면 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해드렸고 또 그분께서 저의 앞날을 인도해주시는 대로 마음만 열고 따라가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만사형통이 될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전능하신 우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불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시자 사랑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또다시 골고타산 십자가 위에 못 박고 진홍빛 같은 고귀한 보혈을 흘리게 해 드릴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 죄를 지을 땐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변함없이 그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저를 인도해 주시고, 저의 앞길을 환하게 밝혀주시며 보호해주실 것을 굳게 믿기에 저의 온 마음과 힘과 목숨을 다 바쳐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고 흠숭할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찬미와 찬양과 감사의 아름다운 노래도 이 생명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끝없이 부르고 증언할 것입니다. 2010년 3ㆍ1절 특사로 자유의 땅에 첫발을 내딛고 사랑하는 가족과 포옹하며 가슴이 설레었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제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 6개월쯤에 그토록 많은 고생을 감내하며 못난 남편을 기다리던 저의 반쪽 안나씨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2년간 병간호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주님의 나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20년 동안 세상의 온갖 모진 풍파를 겪으며 가정을 지키고 옥바라지를 해온 아내의 그 아름다운 사랑에 그저 미안한 마음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로 떠난 안나씨에게 미안한 저의 마음은 제가 주님의 뜻에 부합하는 사랑의 삶을 힘차게 펼쳐가는 일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저로 말미암아 유명을 달리하신 피해자 두 분의 영혼이 주님의 나라인 천국에서 영복을 누리시기를 매일 기도드린답니다. 이 큰 죄인과 늘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제가 두 딸과 함께 저의 가정을 성가정으로 잘 꾸려갈 수 있도록 좋은 직장과 일을 주시고 쉬는 날에는 우리 성교회와 가톨릭교육관에서 신앙 체험 특강을 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법무부 교정기관인 교도소와 청소년수련원에서 교육 및 특강을 할 수 있도록 제 입을 열어주시고 또한 수원시 장안공원 등에서 색소폰과 하모니카 연주로 많은 사람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더 기쁜 일은 저의 자서전 「행복한 사형수」가 많은 독자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분에 넘치게도 서울대교구 주보와 신문에서 저에 대한 기사가 실리는 영광과 함께 가톨릭평화방송에서 2015년 성탄 특집에 방영되는 큰 기쁨을 우리 주님께서 제게 주셨습니다. 또한,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열린 세상 오늘에 ‘선교’라는 주제로 생방송에 인터뷰할 수 있는 영광도 주셨습니다. 제 삶의 잔에 넘치도록 사랑과 자비를 부어주시는 우리 하느님께 “감사”라는 말밖에 저는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형수입니다.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고 믿는 이들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시는 만민의 주님이신 우리 주 하느님 아버지!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이 큰 죄인을 사형이라는 죽음의 늪에서 다시 한 번 살려주셨습니다. 15척의 큰 담 안에서 온갖 시련이 도사린 정글의 역경을 극복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저를 주님의 독특한 법과 방법으로 삶의 깊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도록 지혜를 배우게 하셨으니 그 크나큰 탈렌트로 삼위일체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우리 주 하느님을 힘차게 증거하다가 보람 있고 의미 있게 죽도록 제 삶을 주관해 주시옵소서. 이젠, 이 큰 죄인은 삶에 조금도 후회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오롯이 저의 희망이시고 기쁨이시며 저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 하느님의 깊으신 뜻대로 이 사형수를 당신의 작은 도구로 사용하소서! 사랑의 원천이신 우리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간절하게 원하는 당신의 보잘것없는 천한 종의 가슴 아픈 고백입니다. 영원토록 이 큰 죄인에게서 찬미와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주님께 큰 영광을 드리고 주님을 증언하는 곳이라면 어떤 곳이라도 마다치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이 큰 죄인인 요아킴과 항상 같이 하시는 우리 주 하느님을 영원토록 흠숭하고 사랑합니다. 저의 삶에 모든 기쁨과 영광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우리 주 하느님만을 위하여 올립니다. 영원히 아멘.” 문채현2017.03.16
![[원주교구 조규만 주교 착좌] 양 냄새 풍기는 착한 목자 맞아 박수 소리 우렁차게](//cpbc.co.kr/CMS/newspaper/2016/06/rc/638155_1.0_titleImage_1.jpg)
[원주교구 조규만 주교 착좌] 양 냄새 풍기는 착한 목자 맞아 박수 소리 우렁차게착좌식 현장 조규만 주교(오른쪽)가 목장을 전해받은 후 주교좌에 착좌했다. 23년 만에 새 교구장을 맞은 원주교구는 축제 분위기였다. 더없이 좋은 날씨 속에서 착좌식이 거행된 원주 원동주교좌성당 안팎에서 사제, 수도자, 신자 1500여 명이 한마음으로 조규만 주교의 착좌를 축하했다. 조 주교는 전임 교구장 김지석 주교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현하며 “늘 원주교구를 위해 기도하는 교구장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주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가 조규만 주교를 원주교구장으로 임명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령을 높이 들어 보이고, 교구 총대리 박순신 신부가 교령 선포문을 대독하자 원동주교좌성당은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김지석 주교는 조 주교에게 목장을 전달하고 손을 잡으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조 주교는 김 주교와 파딜랴 대주교의 안내를 받아 주교좌에 앉았다. 차분한 표정으로 미사를 집전하던 조 주교는 교구 사제단과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조 주교는 축하식 때 꽃다발을 전달하러 나온 원동주교좌본당 아이들을 보고 또 한 번 활짝 웃었다. 원주교구 치명자의 모후 레지아 박덕구(안셀모) 단장은 교구민을 대표해 묵주기도, 주교를 위한 기도 등이 담긴 영적 예물을 봉헌했다.재치있는 입담과 공연에 축하식은 웃음 만발 ○…축하식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첫 번째로 웃음을 선사한 이는 교구 사제단을 대표해 환영사를 한 한상용(무실동본당 주임) 신부였다. 한 신부는 ‘부활 찬송’을 개사한 노래를 부르며 환영사를 시작해 다소 엄숙했던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노랫말이 인상적이었다. “용약하라 원주교구 사람들, 모두 환호하라 새 교구장 착좌. 외쳐라 우렁찬 함성소리, 찬미하라 구원의 섭리!”한 신부는 “조 주교님은 축구를 워낙 좋아하셔서 물찬 제비처럼 드리블하시고 벌같이 쏘는 슈팅으로 상대편을 지옥으로 몰아넣으셨다”는 재치 있는 말로 조 주교의 ‘축구 사랑’을 소개하기도 했다.교구 신학생 20여 명이 축하 공연을 하러 제대 앞으로 나오자 즐거운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신학생들은 깜찍한 율동과 함께 ‘참 아름다운 그대’를 불러 조 주교와 착좌식 참석자에게 큰 웃음을 선물했다. 신학생들은 노래를 마치고 두 팔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조 주교를 향한 사랑을 표현했고, 조 주교도 팔을 머리 위로 올려 하트를 그리며 화답했다. 조 주교는 답사에서 “상큼 발랄한 공연을 해준 신학생들에게 고맙다”고 전했다.이호용(스테파노) 부제는 “신학생들이 의견을 모아 주교님의 따뜻한 성품과 잘 어울리는 노래를 선택했다”면서 “열흘 전부터 자유시간 때마다 한자리에 모여 열심히 연습했다”고 말했다. ○…조 주교와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이들도 많이 참석했다. 맨 앞자리에서 착좌식을 지켜본 조 주교의 가족과 친척들의 얼굴에는 감격과 기쁨이 교차했다.어머니 지복련(클라라, 84)씨는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기쁘다”며 “하느님 뜻에 따라, 모든 이를 위해 살아가는 교구장이 되셨으면 한다”고 당부했고, 아버지 조시환(아우구스티노, 88)씨는 “착한 목자가 되시라고 매일같이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고 말했다. 조 주교의 첫 임지였던 서울 연희동본당 신자들도 찾아와 조 주교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전했다. 1982년 9월부터 1년 8개월 동안 보좌신부로 사목한 연희동본당은 조 주교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목) 본당이었다. 10년 전 조 주교가 주교품을 받을 때는 연희동본당 신자 몇몇이 뜻을 모아 조 주교의 세례명을 딴 ‘바실리오회’를 만들기도 했다. 바실리오회 이효순(로사, 77) 회장은 “회원 16명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주교님을 위해 고리 기도를 바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기도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조 주교의 소신학교 은사와 동창, 안병철 신부를 비롯한 평화방송ㆍ평화신문 관계자, 서울대교구 사제단도 착좌식을 찾았다. 조 주교와 소신학교 때부터 함께 공부한 조규정(원주교구 성내동본당 주임) 신부는 “사제품을 받고 각자 다른 교구로 흩어졌는데, 34년 만에 재회하게 됐다”면서 “물 맑고 인심 좋은 강원도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조 주교가 어린 시절을 보낸 포천 백의리공소에서 가족처럼 지냈다는 염정분(마리아, 86, 서울 도봉동본당)씨는 “자꾸 눈물만 난다”면서 “서울에 계실 때는 조 주교님이 주례하는 미사에 종종 참례했는데, 이제 원주로 이사하셔서 자주 못 뵐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재단이사 최철수(스테파노) 코리아인스트루먼트 회장은 “새로 맡으신 교구장직이 쉽지 않겠지만, 주님 도우심으로 교구를 잘 이끌어나가실 것”이라고 덕담했다. ○…원동주교좌성당은 400여 명밖에 들어갈 수 없어, 많은 신자가 마당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착좌식을 지켜봤다. 마당에만 1000여 명이 모였다. 이날 착좌식은 평화방송 TV로 전국에 생중계됐다. 미사 4시간 전인 오전 10시 가장 먼저 성당에 도착해 스크린 바로 앞에 자리를 잡은 김명자(아녜스, 83, 원주 명륜동본당)씨는 “하느님 은총이 가득한 영광스러운 순간을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하고, 기쁘다”며 활짝 웃었다.조 주교가 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로 재임하던 시절 조 주교가 주례하는 미사에 복사를 섰다는 권민서(미카엘라, 중2, 서울 목5동본당)양은 “주교님께 드리려고 편지와 선물을 준비해 왔다”면서 “원주교구에서도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조 주교는 착좌식에 온 손님들에게 자신의 문장이 새겨진 묵주와 신약 성경, 떡을 선물했다. 착좌식 후 신자들에게 둘러싸여○…착좌식을 마치고 성당을 나온 조 주교는 축하를 전하는 신자들에 둘러싸여 한동안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조 주교는 한 명 한 명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며 활짝 웃는 얼굴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성당 맞은편 교구청 강당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건배사를 한 총대리 박순신 신부는 “멀리 한양(서울)에서 원주교구에 오신 조 주교님을 환영한다”면서 “원주교구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양 냄새를 풀풀 풍기는 착한 목자가 돼 주시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반=남정률 기자 njyul@ 이힘 기자 lensman@ 임영선 기자 hellomrlim@ 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평화신문2016.05.31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5)요셉 피츠마이어 (하)](//cpbc.co.kr/CMS/newspaper/2015/01/rc/551087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5)요셉 피츠마이어 (하)>75< 피츠마이어 신부가 살고 있는 미국 조지타운대 예수회 공동체.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 신약성경의 아람어적 배경에 대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는 고대 유다교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는 보고(寶庫)와 같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신약성경의 호칭에 대한 문헌학적 고찰」(The New Testament Title ‘Son of Man’ Philologically Considered)이라는 논문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개념과 용어들이 생겨난 배경이 되는 유다교를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욥기 타르굼에 대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와 아람어 서간학에 대한 연구는 제2 성전기와 초기 랍비 시대 유다인의 사고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열쇠 역할을 했다. 그래서 유다인 학자 로렌스 쉬프만은 피츠마이어 신부를 두고, 사도행전 5장 34절에 나오는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라고 평했다. 사제로서 사목적 관심과 배려 피츠마이어 신부의 학문적 업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연구 활동은 대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가톨릭 사제로서 그는 신자들을 향한 사목적인 관심과 배려 또한 잊지 않았다. 성경에 관한 지식을 일반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에게도 나눠주기 위해 노력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하기 이전인 1964년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여름방학을 이용해 성경 강좌를 개최하는 ‘여름 성경연구소’를 만들었고, 그 후 25년간 이 연구소를 이끌었다. 2013년 이 연구소는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그 이름을 ‘조지타운대학교 요셉 피츠마이어 성경 연구소’로 바꿨다. 가톨릭 교회 내 일반 신자들에게 성경 지식을 나누고자 하는 피츠마이어 신부의 관심은 일반 신자들이 쉽게 참조할 수 있는 주석서를 편찬할 의향을 품게 했다. 그의 바람은 같은 뜻을 지녔던 다른 두 가톨릭 성경학자들과 협력을 통해 결실을 맺게 됐다. 미국 가톨릭 성서학계의 세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뜻을 함께한 것이다. 예수회의 피츠마이어 신부, 슐피츠회의 레이몬드 브라운 신부, 가르멜회의 롤랜드 머피 신부는 「예로니모 성경 주석서」(The Jerome Biblical Commentary, 1968)와「신 예로니모 성경 주석서」(The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 1990)를 편찬했다. 이외에도 피츠마이어 신부는 여러 본당 단체들의 부탁이 있을 때마다 강의했는데, 팔순을 넘어서도 계속했다고 한다. 종교간 대화 활동 그는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파를 초월해 신학적 대화를 하도록 이끌어내는 데 훌륭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79년부터 1988년까지 교황청 일치평의회 자문위원으로서 다양한 개신교 교파들과 대화에 참여했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꼽는다면 1999년 10월 31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 대표자들이 ‘의화론에 관한 공동 선언’에 서명을 하게 된 기념비적 사건이다. 의화론(義化論)은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간의 오랜 쟁점이었다. 루터교는 믿음(신앙)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했고, 가톨릭 교회는 믿음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두 교회는 공동 선언을 통해 “구원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온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행할 힘을 주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고 합의했다. 공동 선언이 발표된 날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그 성당 문에 95개의 주제문을 붙였던 날과 같은 날이다. 공동 선언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두 교회가 35년간 신학 대화를 주고받은 결과였다. 피츠마이어 신부는 신약 성경 학계의 주도적인 가톨릭 학자로서 거의 30여 년에 걸쳐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 간 대화에 참여했다. 평가와 인간적 면모 지금까지 살펴본 요셉 피츠마이어 신부의 생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현재까지 약 60년에 이르는 가톨릭 성서학계의 역사를 요약하는 것과 같다. 그는 공의회 이전까지 이뤄진 가톨릭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바탕을 두는 동시에 19세기 이후 개신교 성경학자들이 성경 연구에 적용한 방법들을 성경 연구에 도입했다. 이제는 그의 뒤를 이어 훨씬 더 많은 가톨릭 성경학자들이 학문적인 성경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피츠마이어 신부처럼 학문적인 성경 연구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준 학자들 덕분에 성경 연구에 바탕을 둔 초교파적 신학 대화의 문이 그전보다는 훨씬 더 넓게 열리게 됐다. 그리고 피츠마이어 신부와 같은 학자들의 노력과 더불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성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고, 성경에 대한 지식에 목마른 수천 명의 남녀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이 피츠마이어 신부가 세운 여름 성경 연구소로 밀려들었다. 피츠마이어 신부를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거의 수도자처럼 생활한다.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저녁 8시 30분이면 잠자리에 들었다.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서 피츠마이어 신부는 아주 정확하고 꼼꼼했다. 논문을 쓸 때 사용하는 일차 자료와 이차 자료를 모두 두 번씩 반복 확인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학문적 논쟁에 참여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국제적인 모임을 통해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의 여러 곳을 방문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이와 함께 그는 성경 연구만큼이나 요리를 즐겼다. 이제 만 94세가 된 피츠마이어 신부는 워싱턴 D.C.에 있는 예수회 대학 조지타운대 예수회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평생을 교육자로서 가르치고, 미래의 학자들을 길러내는 일에 열정을 쏟았던 그의 모든 노력은 이제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후학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여름 성경연구소를 통하여 배웠던 수많은 평신도와 성직자, 수도자의 삶의 통해 이어질 것이다. 피츠마이어 신부가 뿌린 씨앗은 온 세상 곳곳에서 오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고 있을 것이다. 요셉 피츠마이어 신부의 저서 중 한국에 번역된 책은 다음과 같다. 「바울의 신학」(솔로몬, 1996). 「바울로의 신학」(분도출판사, 2001), 「로마서를 통한 영신수련」(바오로딸, 2000), ‘예수의 동정 잉태와 신약 성서’(「신학전망」제 36호, 92~116쪽) 김영선 수녀(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평화신문2015.01.20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43>](//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3775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신비체험가들 신비체험가들이 애덕 실천을 통해 보여준 신앙인의 모습은 그들의 주변 사람들에게 하느님 은총을 전하기에 충분했다. 사진 왼쪽부터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시에나의 가타리나·아시시의 프란치스코·아빌라의 데레사·리지외의 데레사·토마스 머튼.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성인 축일표를 살펴보면, 신비가 즉 신비체험가로 분류되는 성인을 무려 스무 분이 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축일표에 나와 있는 신비체험가들은 주로 12~19세기 인물입니다. 아마도 고대와 중세 초기 신비체험가는 순교자, 은수자 및 동정녀 등과 달리 훗날 그들의 삶을 채록하여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워 등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시야를 넓힌다면 모든 시대에 걸쳐 신비체험가들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고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목숨까지 바쳐 가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언했던 순교자가 첫 번째 신비체험가일 것입니다. 아무나 쉽게 걸어갈 수 없는 순교의 길은 하느님 은총이 함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길입니다. 따라서 박해를 받으며 순교의 형벌을 기다리던 순교자들은 이미 지상에서 하느님 품에 있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바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교회가 보증했습니다.로마 황제의 칙령에 따라 박해가 끝나고 자유롭게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자 몇몇 그리스도인이 개별적으로 사막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을 찾고자 수도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단시간에 부쩍 수가 늘어난 은수자들은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관상생활을 했습니다. 고대 수도자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와 요한 카시아누스는 저서를 통해 수도생활을 통한 신비체험의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중세에는 많은 여성 신비체험가들이 있었습니다. 빙엔의 힐데가르트, 헬프타의 메히틸다, 헬프타의 제르트루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등이 여성 수도자임에도 자신의 생애를 통해 교회를 보존하고 신앙을 수호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과 깊이 일치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또한 노르위치의 율리안나, 제노바의 가타리나 등이 평신도로서 자신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애덕을 강조하며 실천한 것도 하느님과 깊이 일치했다는 증거입니다. 남성 수도자로는 오상을 받고 많은 기적 사건을 체험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하느님과 깊은 일치 안에 살아간 신비체험가라 할 수 있습니다.근세 들어 대표적인 신비체험가가 출현했습니다. 수도 생활 중에 자주 신비체험을 했던 아빌라의 데레사는 저서를 통해 인간 내면 안에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영적 여정의 단계를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개혁을 반대하던 수도자들에게 잠시 억류되어 있는 동안에 신비체험을 했던 십자가의 요한은 저서를 통해 앞선 신비신학자들의 이론을 종합하면서 내적 성찰을 통한 정화를 강조하는 영적 여정의 단계를 제시했습니다. 특히, 이 두 신비체험가들의 고백은 오늘날까지도 각자 자신의 신비체험을 객관적으로 가늠해 보는 시금석같이 여겨집니다.현대에는 비슷한 삶을 살았던 두 신비체험가가 주목받았습니다. 리지외의 데레사와 삼위일체의 엘리사벳은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이미 자주 하느님과 합일하는 체험을 했을 뿐 아니라, 일찍이 수도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신비체험을 통해 얻은 하느님 은총을 나눠 주었습니다.한편, 아주 최근의 인물이라 아직도 평가 중에 있지만 충분히 신비체험가로 여길 수 있는 인물도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나치의 유다인 학살 때 수용소에서 순교한 에디트 슈타인, 침묵의 관상생활을 현대인들에게 재해석해 보여주며 열심히 기도했던 토마스 머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데 평생을 봉헌하였던 콜카타의 복녀 마더 데레사 등도 분명 하느님과 깊은 일치 속에서 자신의 영적 여정을 묵묵히 걸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신비체험가들의 영적 여정은 일정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고백도 체계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애덕 실천을 통해 그들이 보여준 당당한 신앙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마저 덩달아 하느님 은총을 느낄 수 있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비체험을 굳이 이론화해 소개한다면 ‘실천-신비사상’이라고 일컫고 싶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6.03.09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하는 구도 시인 구상](//cpbc.co.kr/CMS/newspaper/2016/07/rc/643741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삶을 노래하는 구도 시인 구상<7>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두세요!”1960년 4·19 혁명 직후 정국이 요동쳤다. “내가 꿈꾸던 새 삶의 공화국은/ 공중의 풍선처럼 자취 없이 꺼지고/ 내가 현장 속에서 목도한 것은 새 송장에 몰려든 갈가마귀 떼들의/ 우짖음과 그 소란이었다”고 구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책상 앞에 앉아 붓을 잡았지만/ 동면 속에서 갓 나온 개구리처럼/ 향방을 몰라 심장만 불룩였다.” 1950년대 해공 신익희 선생이 구상에게 민국당 선전부장으로 일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민주당의 장면<평화신문 1333호 2015년 9월 27일자~1342호 12월 6일자 연재> 총리였다. 구상은 경북 칠곡군의 민의원 후보 공천을 거절하고 강원도로 피신해 후보 등록 마감일까지 숨어 지냈다. 다시 참의원 선거 출마를 권유하자 이를 피하려고, 당시 승려였다가 후에 환속한 일초 스님 고은과 작반해서 제주도로 간다. 왜관 수도원 출판사의 위촉으로 「예수의 생애」 번역 원고의 윤필 수정을 맡아 하던 때였다. 제주도로 간 구상이 “일과로 삼은 것은 2000년 전 이스라엘 속의 ‘나자렛 예수’의 추적으로, 태중에서부터 하느님을 섬겨온 그에게서 비로소 시공의 제약 속에 있던 한 인간을 발견해 갔다.” 그러면서도 술을 즐겼던 구상은 고은과 함께 저녁이면 비바리 술집을 드나들며 낄낄거리기도 하고 유배객 같은 수심에 젖기도 했다. 1949년 육군 정보국에 근무하던 시절 구상은 정보국장이던 이용문 장군의 소개로 박정희를 만나 의기투합해 자주 어울리며 술을 마시곤 했다. 서울로 향하는 “귀로, 대구서 만난 장군 박정희는 이미 눈에 핏발이 서려 있었다.” 박정희는 구상이 피정의 여운으로 화제를 쇄락(灑落)으로 몰고 가도 “해치워야 해”를 주정 섞어 연발하며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 떼들을 보네”라는 일본 전국시대의 대결전을 노래한 한시의 한 구절을 되풀이해 불렀다. 40일 만에 돌아온 서울은 북새판이었다. 1960년 그해 겨울과 이듬해 봄에 친아우 같았던 삼십 대 초반의 조각가 차근호가 음독자살하고, 1952년 신문사로 찾아와 구상의 시를 활활 외던, 말을 트고 지낼 정도로 친했던 포병 대령 이기련이 행려 사망자 묘지에서 거적에 싸인 시체로 발견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승만 독재 시절 그와 감옥 생활을 함께한 아나키스트 우한룡의 죽음도 이어졌다. 구상은 불안도, 권태도, 구토도, 소외도 아닌, 온몸에 옴이 오른 것 같은 정신의 미칠 듯한 가려움을 느꼈다. “나는 이 소양증을/ 잠시라도 잊으려고/ 음란에 빠져들었다.// 범접하고 난 후의 그 허망감!/ 바로 그것만이 약이었다”. 구상은 1961년 “5·16의 아침을 어느 무희 집에서 맞았다/ 그녀는 아침 화장을 하면서 방송을 들으며/ ‘이러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요? 선생님 신상에 행여나 해가 없을까요?’/ 하고 연거푸 물었다.” 구상이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와 마주 앉은 것은 5월 19일 저녁, 지금 칼(KAL) 빌딩이 서 있는 자리에 있던 국제호텔에서였다. 마당에는 기관총을 실은 장갑차가 있었다. 서로 잠자코 술잔만 비우다가 마침내 박정희가 말을 꺼냈고 구상이 답을 했다. “미국엘 좀 안 가 주시렵니까?” “내가 영어를 알아야죠?” “영어야 통역을 시키면 되죠!” “하다못해 양식당의 매너도 모르는걸요!” “그럼 어떤 분야라도 한몫 져 주셔야지!”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두세요!” 구상은 남은 생애 시에 몰두해 살 것을 다짐하고 연작시 ‘밭 일기’ 100편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모든 체험을 시에 담되 현실적 정치적 역사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존재의 차원, 영원의 차원에서 바라보려 했다”고 평가한 성찬경 시인의 말대로 구상은 문학과 인간, 시와 삶이 하나로 융합된 시를 쓴다. 구상은 1962년 봄, 궁리 끝에 당시 가톨릭에서 경영하던 ‘경향신문’의 동경지국장을 자청해서 국내를 떠나 1965년까지 일한다. 대수술을 감행하지 않고는 치유의 희망이 보이지 않던 고질병 폐결핵을 치료받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구상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으로 내정해 놓았던 박정희와 작별하며 나눈 대화를 구상은 자전시에다 이렇게 남겼다. “바로 내 앞방에다 사무실을 마련해 놓았는데 끝내 가시기요, 이 판국에 일본 낭자들과 재미나 볼 작정인가요?” “시인이란 현실에서 보면 망종(亡種)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게 아닙니까?” 일본으로 간 구상은 동경의 한 서점가에서 “현대 최고의 철학자”란 표제에 끌려서 사 든 책을 밤새워 읽으며 가톨릭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과 만난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역사에 대한 거듭된 절망으로 허무의 수렁에 빠져 있던 구상에게 “삶의 새로운 긍정의 문을 열어 주었으며, 인간은 홀로서이지만 또한 더불어서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겸손에 이어져야 함을 깨우쳐 주었다. 또한 내세를 오늘로부터 살아야 함을 깨우쳐 주었다.” 구상 스스로 표현한 대로 그야말로 “은혜의 책”이었다. 1963년 6월 3일, 구상이 “현대 한국이 낳은 기인이요, 대덕이요, 동방의 현자”라 일컬었던 공초 오상순 시인의 장례식이 문단장으로 거행되었다. 구상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시인 공초는 “자유가 나를 구속했었다”는 말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다. 공초의 임종에 맞춘 듯 일시적으로 일본에서 귀국한 구상은 공초의 성대한 범시민장에 참여하고 돌아간다. “5·16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평소 자신과 친분이 돈독하고 천주교 내에서 신망이 높았던 시인 구상을 내세워 경향신문을 인수토록 자금을 지원했다고 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1962년 당시 성우산업 대표 이준구씨가 경찰국장 출신 인척인 홍병희씨를 내세워 경향신문을 인수하게 됐고, 이 과정에 이준구씨는 천주교 재단이사회로부터 손에 넣은 ‘백지 위임장을 편법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2016년 올 1월 구상의 딸 자명씨가, “또 다른 천주교 인물 양한모씨<평화신문 1346호 2016년 1월 1일자~1355호 3월 13일자 연재>를 통해 경향신문 인수를 시도한 이병철 삼성 회장의 자금력으로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구상 시인을 통해 하려 했던 사실이 왠지 좀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며 경향신문에 쓴 5·16 직후의 비화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구상이 자전시에서 그 전말을 생략한다고 말한 대로, 자신이 희망치도 않은 이해에 얽혀 영혼에 치명상을 입고 사제들과 교회에 실망한 구상은 “죄인들로 이어 내려온 교회가/ 붕괴되지 않고 그 신성성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교회라는 거룩한 탈을 쓰고 그 짓들인데 그 사람들 법으로 혼들을 내 주시죠. 그렇듯 당하고만 계실 거예요?”라는 박정희의 말에 구상은, 한쪽 뺨을 치면 다른 뺨을 내 대라는 성경 말씀으로 답한다. “그래서야 어디 세상을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까?”라는 말에도 “그게 바로 천주학의 어려움이지요!” 하고 만다. 이 일로 박정희는 구상을 현실 정치에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단념했을 것이라고 구상은 밝히고 있다. <계속> 백영민2016.07.06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4) 요셉 피츠마이어 (중)](//cpbc.co.kr/CMS/newspaper/2015/01/rc/549770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4) 요셉 피츠마이어 (중)곻초기 유다교와 사해 문헌 연구에 정통한 대가 사해 협곡, 유다 광야에 있는 쿰란 동굴은 가장 오래된 구약 성경 사본을 찾아낸 곳이다. 유다인 학자들 사이에선 가톨릭 사제인 피츠마이어 신부의 쿰란 문헌 연구 자료는 초기 유다교를 연구하는 데 꼭 참고해야만 하는 자료로 알려져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신약성경 연구 피츠마이어 신부의 「루카 복음 주석서」는 두 권으로 출판됐는데, 첫째 권인 「루카 1-9장」(1981)은 루카 복음의 연구사를 개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 복음서의 집필 시기와 저자, 복음서의 독자와 구성, 문체와 언어, 본문의 전승에 대한 주제를 차례로 다뤘다.이 첫째 권 주석서에는 꽤 긴 논문인 ‘루카 복음의 신학에 대한 소고’라는 글이 들어 있는데, 이것으로 인해 피츠마이어 신부의 「루카 복음 주석서」는 이 주제에 관한 최고의 단행본으로 알려지게 됐다. 그는 또한 같은 주석서 시리즈의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주석서」(1993),「사도행전 주석서」(1998),「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주석서」(2001)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주석서」(2008)를 집필했다. 이로써 피츠마이어 신부는 바오로 서간 전문가로서도 연구를 활발히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석서들에는 피츠마이어 신부의 뛰어난 학문적 역량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는 신약 성경을 주석하면서 구약 성경과 제2 성전기의 유다교 문헌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해 성경 각 권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밝혔고, 사해 문헌에 관한 연구 결과 또한 성경 주석 작업에 종종 활용했다. 그리고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1-12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언급하는 ‘아담의 죄’나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1장 2-16절에 나오는 ‘여자가 머리를 가려야 하는 이유’와 같이 본문 해석과 관련해 자주 제기되는 질문의 경우에는 그 본문들과 관계된 학자들과 토론하고 연구한 내용을 아주 자세하게 제시했다. 그의 주석서들은 성경의 두 가지 의미, 곧 자구적 의미와 영성적 의미를 밝히려는 그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피츠마이어 신부에게 있어 성경의 자구적 의미를 안다는 것은 ‘성경 본문을 집필한 저자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본문이 전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성경 본문의 자구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 성경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적절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성경 본문의 자구적 의미는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다고 봤다. 성경 본문의 자구적 의미에 바탕을 두고 그 본문이 어떻게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읽어내는 것이 곧 성경 본문의 영성적 의미를 읽는 것이라고 했다.예를 들어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그 본문이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어떻게 미리 보여주는지를 읽어내는 것 또한 성경 본문의 ‘영성적 의미’를 읽어내는 것으로 본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가 성경 연구 활동을 하던 초창기에는 가톨릭 보수 진영의 학자들이 성경을 역사적 비평적 연구 방법론에 따라 읽고 연구하는 것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성경 연구에 왜 역사적, 비평적 방법론을 적용할 필요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신학적 통찰과 민감성을 가지고 역사적 비평 방법론을 적용할 때 이 방법론이 교회의 삶과 신학을 모든 수준에서 풍성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아람어와 사해 문헌 그는 또한 아람어와 사해 문헌 연구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학자였다. 이 분야에 대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는 신약성경 연구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아람어 연구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같은 예수회 소속이었던 다니엘 헤링턴(1940~2013) 신부와 함께 「팔레스타인 아람어 교본」(1977)을 출판했고, 「성경 아람어 사전」(A Lexicon of Biblical Aramaic)(2011)을 편찬했다. 그리고 사해 문서 가운데 「창세기 외경」(Genesis Apocryphon, 2004)과 「아람어 토빗기」(2003)에 대한 그의 주석서들은 쿰란 연구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필자가 사해 문헌을 공부할 때 참고 교재로 봤던 「사해 두루마리와 그리스도교의 기원, 사해 두루마리 연구와 관련 문헌」(2007)과 「사해 두루마리의 영향」(2009)도 피츠마이어 신부의 저서들이다. 피츠마이어 신부는 학자들을 위해 사해 문헌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사해 문헌에 관한 일반인들의 궁금점을 풀어주기 위해 「사해 문헌에 대한 101개의 질문에 대한 응답」(Responses to 101 Questions on the Dead Sea Scrolls, 1992)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사해 문헌에 관한 그의 열정과 학자로서의 경험은 2004년 미국 가톨릭대학교에서 은퇴한 후에도 후학들 성장에 귀한 거름이 돼 줬다. 은퇴하고 나서도 그는 조지타운대학교에서 학부 학생들에게 사해 문헌에 관한 지식을 나눠 주기 위해 강의를 했다. 그가 발표했던 다양한 논문을 한데 모아놓은 두 권의 논문 모음집은 피츠마이어 신부의 학문적 연구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신약 성경의 셈어적 배경에 대한 에세이 모음」(Essays on the Semitic Background of the New Testament, 1971)이고, 다른 하나는 「유랑하는 아람인: 아람어에 관한 에세이 모음」(A Wandering Aramean: Collected Aramaic Essays, 1979)이다. 이 두 권의 에세이 모음집은 「신약 성경의 셈어적 배경」(The Semitic Background of the New Testament, 1997)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재출판됐다. 여기에 게재된 논문 대부분은 신약 성경 연구와 관련 있는 쿰란 문헌을 분석한 것이다. 쿰란 문헌에 대한 그의 분석 작업은 가톨릭 교회 사제라고 하는 그의 종교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유다교 자료를 아주 균형 잡힌 시각에서 공정하게 다룬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다인 학자들 사이에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 자료는 초기 유다교를 연구하는 데 꼭 참고해야만 하는 자료로 알려져 있다. 쿰란 문헌의 대가인 유다인 학자 로렌스 쉬프만은 ‘쿰란 문헌을 통해 본 사도행전의 유다 그리스도교’(Jewish Christianity in Acts in Light of the Qumran Scrolls)라는 제목의 피츠마이어의 논문은 그리스도교와 초기 교회를 낳게 한 유다교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논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영선 수녀(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평화신문2015.01.13

모든 장애 넘어 주님 찬양한 20년한국가톨릭장애인사목협의회 설립 20주년 감사 미사 봉헌 한국가톨릭장애인사목협의회 설립 20주년 기념 미사에서 염수정 추기경이 휠체어에 탄 장애인 신자에게 성체를 영해주고 있다. 이정훈 기자 독서대에 선 시각장애인은 또박또박 점자 성경을 낭독했다. 이어 박민서(서울가톨릭농아선교회 담당) 신부는 수화로 정성껏 복음을 전했다. 복사를 선 발달장애인들은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례 미사 전례에 맞춰 제때에 종을 치고, 추기경 목장과 주교관을 베일로 잘 감싸들고 있었다. 장애인들이 꾸민 미사는 실수 하나 없이 거행됐다. 염 추기경은 “장애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라며 힘을 북돋웠다. 7일 서울 대방동성당에서 봉헌된 한국가톨릭장애인사목협의회(회장 홍흥근, 담당 김재섭 신부) 설립 20주년 기념 미사 풍경이다.이날 전국에서 온 장애인과 가족 900여 명이 성당을 메웠다.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맨 앞자리에 앉았고, 발달장애인 학생들은 부모 도움으로 성체를 영했다. 장애인들은 한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했다.염 추기경은 강론에서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장애인”이라며 “신체적 어려움이 많지만, 그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살게 해주심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살자”고 말했다.1995년 설립한 한국가톨릭장애인사목협의회는 전국 교구 영역별 장애인 사목을 지원해온 전국 협의체다. 장애인 교육, 연수, 세미나 등을 열고, 장애인 사목의 올바른 방향을 교회에 건의해왔다.염 추기경은 미사 후 장애인 단체장, 발달장애인 부모들과 함께 식사하며 고충을 들었다. 장애인들이 꾸민 공연에 이어 영역별 장애인 단체장들은 ‘교회에 바란다’는 건의문 낭독을 통해 △교구별 장애인사목 전담 사제와 담당관 제도 확립 △각 교구 장애인사목 복지센터 확충 △장애인 미사 참례 분위기 조성 △명동대성당 장애인 시설 확충 등을 요청했다.청각장애인들은 평화방송TV 자막과 수화 통역사 배치 등을 건의했고, 발달장애인 부모들은 지구별 장애부 주일학교 설치, 평생지원센터 건립을 요청했다. 어르신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 시설 마련에 대한 요구도 있었다.김재섭(작은 형제회) 신부는 “복지 차원을 넘어 사목과 영적인 배려를 통해 장애인들이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하도록 꾸준히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평화신문2015.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