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35-칠극(七克) 이야기(10)사랑이란 소명의 길, 끝까지 성실하게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이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인 것 같다. 처음에는 「칠극」이라는 책에서 일곱 가지 주제만 가져오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좋은 것들이 많아, 결국은 유학적 내용들과 섞어가면서 스케치하듯 그 책을 소개하는 형국이 돼버렸다.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이런 기회에 많은 이들이 「칠극」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이 책의 마지막 주제는 '게으름'(懈怠)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부지런함'(勤德)이다. 이 주제는 가장 평이한 주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주제일 수 있다. 왜냐면 '성실'과 '근면'을 빼놓고 인간됨이나 수행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경을 묵상하면서 가끔 두려움에 빠지는 대목은 '탈렌트의 비유'에서이다. 내가 재주가 많아서가 아니다. 하느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사용하는 문제에서, 특히 시간 사용에 있어서는 정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일의 결과뿐 아니라 그 과정을 보시는 분이 아닌가! 그리고 그 과정은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언젠가 공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의 삶은 곧게 마련인데, 곧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요행히 화나 면하고 있는 것이다."(子曰 人之生也 直 罔之生也 幸而免. 「論語」, 雍也篇) 삶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모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질책으로 들린다. 그런 의미에서 빤또하가 말하는 게으름의 문제는 삶의 외적 태도만은 아니다. 오히려 삶의 참된 목표와 희망을 지니고 그것에 투신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한 번은 루카복음으로 피정을 하면서 피정 지도자로부터 '예수의 하루 일과표'를 작성해보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단편적 장면들이었지만, 성전에서의 가르침, 세리와 죄인들과의 만남, 끝없는 병자치유 그리고 새벽까지의 기도와 다른 지방으로 떠나는 장면까지…. 그 하루는 정말 자신의 소명에 충실히 투신하는 모습이었다. 공자 자신도 자신의 삶을 그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언젠가 섭공(葉公)이 제자 자로에게 공자의 사람됨에 대해 물었을 때, 자로가 대답을 못했다고 하자 이렇게 말하며 서운해 했다. "너는 왜 그 사람됨이 학문에 발분하면 밥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움으로 근심조차 잊어 버려서, 늙음이 장차 닥쳐오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亡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論語」, '述而') 대단한 경지이다. 이러한 주제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새로이 다지며 떠올리는 구절이 있다. 증자(曾子)의 말이다. "선비는 포용력이 잇고 강인해야 할 것이니,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후에야 그칠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論語」, '泰伯') 우리 그리스도교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랑하는 것으로 소명을 삼았으니, 그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 또한 죽은 다음에야 완성될 것이니, 얼마나 먼 길이 되겠는가? 강인한 의지와 큰 열정을 지녀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해 주고 계신다.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히브 6,11-12).조은일2008.10.21
[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29-칠극(七克) 이야기(4)자신과 하느님 아는 것, 선의 시작과 끝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칠극」을 읽다보면 늘 만나게 되는 독특한 느낌들이 있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의 구수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편안함이다.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의 교리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소신학생 시절 영적 지도신부님의 훈화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게도 되며, 심지어는 한문을 가르쳐주셨던 여러 어르신들의 이야기들도 함께 어우러져 또 다른 세계를 여행하며 그것에 젖어 들어가는 행복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학자인 김승혜 수녀는 「칠극」의 특성으로 '지혜문학적 성격'을 지적하기도 한다. 판토하가 인용하는 많은 성경구절, 고대 문학의 가르침, 교부들의 말씀들은 대부분 지혜문학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동양 종교들의 지혜들도 함께 곁들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여튼 「칠극」은 '교만과 겸손'이라는 주제로 시작하면서 그것에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다. 이 주제가 수덕(修德)의 출발점이자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교만을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하고 나서, 경계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제시한다. 즉 세상의 행복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戒以形福傲), 마음의 덕을 자랑하는 것(戒以心德伐),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여기기를 좋아하는 것(戒好異), 명예를 좋아하는 것(戒好名), 선을 가장하여 명예를 낚으려는 것(戒詐善釣名), 예찬을 듣는 것(戒聽譽), 귀해지기를 좋아하는 것(戒好貴)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학 뿐 아니라 동양의 모든 종교들이 그 수덕과정에서 강조하는 것들도 바로 이런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것을 잊고 세속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 가치있는 삶인가 하는 문제요, 이러한 경향들은 모두 교만이 빚어내는 결과라는 것이다. 판토하는 교만을 극복하는 결정적인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을 알아 겸손을 지키는 것'(識己保謙)이다. 그리고 그것에 관한 핵심적인 설명으로 성 베르나르도의 말씀을 전해준다. "너희가 만약 두 가지 알아야 할 것을 지니고, 두 가지 알지 못하는 것에서 벗어난다면, 지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알면 겸손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은 모든 선(善)의 시작이다. 그리고 하느님(天主)을 알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은 모든 선의 마지막이다. 이것이 두 가지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므로 교만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모든 죄(罪)의 시작이다. 그리고 하느님(天主)을 알지 못하므로 하느님에게 바라거나,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것은 모든 악(惡)의 마지막이다. 이것이 두 가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爾持二知. 逃二不知. 則能成智. 知己則生謙爲衆善之始. 知天主故愛天主爲衆善之成. 此二知也. 不知己故生傲爲衆罪之始. 不知天主故無所畏望於天主爲衆惡之成. 此二不知也. 「七克」, '識己保謙'). 유학이라는 학문도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된다. 자신을 살피고, 가꾸고, 완성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이다. 그래서 유학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부른다.(「論語」 헌문편 25절 참조) 그리고 그 학문은 하늘의 뜻을 아는 지명(知命)에서 완성된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論語」라는 책도 '學而時習之'(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면)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不知命無以爲君子'(하늘의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로 끝나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 겸손은 모든 수덕과정을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덕행이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따른다면 '원리와 기초'가 되는 셈이다. 곰곰이 생각해보자.조은일2008.09.02
[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27-칠극(七克)이야기 (2)선이 커지면 악은 작아지고 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내가 칠극(七克)을 읽으면서 지향했던 것 중 하나는 이 글을 먼저 읽었던 우리 신앙선조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었다. 아마 나도 유학을 공부했기에 어느 정도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조선시대 말엽, 사회적 혼란과 함께 그동안 성리학의 이념으로 이상적 사회를 이루려고 했던 노력들이 학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을 즈음, 그들은 서학(西學)의 문물과 사상을 만난 것이다. 유학도 본시 인간의 본질을 하늘이 부여한 도덕성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유학자들이 「칠극」 안에서 수많은 서양의 선비와 현자들의 수덕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놀랍고 반갑게 느꼈을까? 더 나아가 자신들이 마음속에 품어왔던 삶의 근본인 하늘과 하늘의 이치〔天理〕가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와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인격체로서 설명될 때, 혼란스러우면서도 또 한편 얼마나 커다란 희열을 느꼈을까? 내가 그들 안에서 느끼고 만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참된 진리에 대한 욕구, 근원적 존재에 대한 열망 그리고 어려운 결단을 통해 그것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였을 때의 기쁨 같은 것이었다. 칠극(七克)에서 극(克)의 뜻은 무엇일까? 전주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번역본이 '일곱가지 승리의 길'이라는 부제를 붙인 것을 보면, '이기다' 또는 '극복하다'는 뜻으로 사용한 것 같다. 그러나 극복해가는 방식은 독특하다. 즉 일곱 가지 죄의 뿌리와 직접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대립되는 덕(德)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스콜라 철학이 악(惡)을 그 자체로 규정하지 않고, 선(善)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또한 선의 결핍(缺乏) 혹은 완전성의 결여(缺如)로 해석하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마르틴 부버가 지은 「인간의 길」이라는 책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전해준다. 즉 서로 사돈관계인 두 랍비가 대화를 나누는데, 한 랍비가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아직 속죄하지 못했다"고 한탄하니 다른 랍비가 "그것에서 벗어나시지요"라고 답하는 내용이다. 그것에 이어 또 다른 랍비의 강론을 소개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줄곧 그 잘못에 대한 말만 하고 생각만 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저열한 그것을 마음에서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 자는 결코 돌아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 어쩌자는 말입니까. 똥을 이리 쓸고 저리 쓸어 본들 똥은 똥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는가 안지었는가 해봐야 하늘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꿍꿍거릴 겨를이 있으면 차라리 하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진주알을 꿰고 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도 "악을 떠나 선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악에설랑 아예 돌아서서 더는 거기 마음을 쓰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그대는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그렇다면 선을 행함으로써 이에 대처하십시오." 이것이 「칠극」의 특징이기도 하다. 죄의 7가지 뿌리를 분석하고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적할 수 있는 더욱 완전한 덕을 설정하고 매진하여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마음으로 신앙의 선조들과 함께 찬찬히 이 책을 읽어나가자.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정통 신앙의 보화들이 있는지 확인하면서….조은일2008.08.12
[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25 성인(聖人)들과 우리, 무엇이 다른가?그분 향해 걷다 보면 어느새 성인이?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동양철학)내가 어렸을 때, 그 당시 교회 분위기는 성인들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인들을 공경할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본받으려고 노력했고, 또 힘들 때 그들에게 전구를 청하며, 일상생활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많은 위로와 힘을 얻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교우 자신들도 그들처럼 성인이 되고자하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마치 성인들과는 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그분들과는 별 관계없이 따로 놀면서 다른 것에 마을을 빼앗기고 있다. 이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하느님께 축성되어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불리운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 19,6).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 몸 바친 거룩한 백성이 아니냐?"(신명 7,6)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스스로 거룩하게 행동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브 12,14). 유학 또한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율곡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여,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똑하거나 어리석거나 모두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거늘 성인은 무슨 까닭에 유독 성인이 되고, 나는 왜 유독 보통사람이 되었는가? 진실로 뜻이 세워져 있지 않고(志不立), 아는 것이 명확하지 않으며(知不明), 행하는 것이 독실하지 않기(行不篤) 때문이다"(원문생략, 「擊蒙要訣」, '立志章'). '모두 같은 사람인데'라는 표현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왜 나는…. 율곡 선생의 원인분석이 명료하다.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 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지식은 충분히 쌓았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힘써 행했는지 살펴보라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성인이 되고 싶은 걸까? 실상 성인이 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것이 가능한가?'라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송대 유학자들 특히 주렴계 선생은 '가능하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럼에도 그 당시의 많은 학자들은 비웃거나 스스로 포기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宋代의 구산양씨(龜山楊氏)는 이렇게 한탄하면서 충고한다. 조금 길긴 하지만 차분히 들어보자.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聖人을 스승으로 삼았는데도 그 배움이 지극하지 못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덕(德)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인이 되기 어려움을 보았다. 이 때문에 모든 배우는 자들이 '聖人의 경지를 배워서 이를 수 있다'고 말하면 반드시 미쳤다고 여기며 속으로 비웃는다. 聖人은 진실로 쉽게 이를 수 없으나 만약 聖人을 버리고 배운다면 장차 무엇을 법칙으로 삼겠는가. 聖人을 스승으로 삼음은 활쏘기를 배울 때에 과녁(的)을 세우는 것과 같다. 과녁을 저기에다 세운 뒤에야 활쏘는 자가 이것을 보고서 적중(的中)하기를 구할 수 있으니, 과녁에 적중하고 적중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이지만 과녁을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을 표준으로 삼겠는가"(원문생략, 「心經附註」, '聖可學章'). 성인들은 많은 영적 보화들을 남겨주면서, 하느님께 이르는 여정을 우리보다 먼저 가신 분들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기쁘고 훌륭하게 이 길을 갔는지 되새긴다면 얼마나 힘이 되겠는가. 우리도 그분들과 함께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충실하게 이 길을 걷다보면, 언젠가 하느님 대전에서 그분들처럼 聖人이 되어있지 않을까? 조은일2008.07.22
![[생활속의 복음] 우물과 선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3/04/Zss1772596168429.jpg)
[생활속의 복음] 우물과 선물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안니발레 카라치 작 ‘우물가의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1593~1594년경. 특정 기념일에 나름의 방식으로 정성을 담아 소중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선물은 선물 마련의 수고에 견줄 수 없는 행복을 부여한다. 슬기로운 사회생활을 위한 의례적 선물과 주고받기로 조합된 거래적 선물도 있지만, 진정한 선물은 신뢰를 전제로 형성된 ‘관계의 결실’이다. 이 선물은 선물 자체로 그 가치를 판정할 수 없다. ‘사물’(무엇)이 아니라 ‘관계’(누구)가 표출되는 선물은 멀리서도 가깝게, 대면하지 않아도 보이게 하는 만남을 구현한다. 곧 선물은 ‘관계 유지의 표지’다. 신앙을 전제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기술하는 성경은 ‘하느님의 선물들’을 열거한다. 선물과 유사한 용어가 법률 차원을 넘어선 의미를 함축하는 ‘계약’이다. 옛 계약은 율법을 통해, 새 계약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립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다. 관계 유지의 실태를 ‘의로움’으로 표명하는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화 : 로마 5,1 참조)을 역설한다. ‘물을 통한 하느님의 심판’(창세 7,7 참조)을 언급한 성경은 척박한 대지에 샘솟는 ‘물을 통한 하느님의 선물’(탈출 17,6 참조)도 제시한다. 풍부한 수자원을 보유한 에덴동산(창세 2,10-14 참조)으로부터 첫 인간이 추방된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물 부족 지대에서 유목하다가 정착하였다. 생존의 필수 요건인 식수 확보가 가능한 샘·우물·호수·강 근처에 인구가 밀집되어 마을이 조성되었다. 지역민이 우물에 대한 지분을 선점하더라도 방문객에게 우물물을 제공하는 행위는 당연한 처사였다.(1열왕 17,10 참조) 한 사마리아 여인이 ‘조상 야곱과 관련된 시카르 고을의 우물’(창세 33,18 참조) 부근에서 방문객 예수님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소개된 ‘목마르지 않은 물’로 인해 ‘야곱의 우물’(하느님의 선물)이 재조명된다. 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선물을 사물로 대하듯, 목마르지 않은 물 혹은 생명수(묵시 22,17)를 ‘특별한(신령한) 물’로 대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유의점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하느님의 선물을 대상화하는 태도다. 영성체 예식에서 신앙인은 ‘빵과 포도주’(사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관계)를 먹고 마신다. 복음과 천국은 내용이나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만남) 유지 상태다.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요한 4,14) 하는 생명수는 ‘어떤 물’(무엇)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누구)이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숨을 거두기 직전 예수님의 두 발언은 “목마르다”(19,28)와 “다 이루어졌다”(19,30)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의 목마름은 부재한 듯 여겨지는 ‘아버지에 대한 갈증’이고, 아들의 성취감은 현존하여 함께 있는 ‘아버지에 대한 확신’이다. ‘아들 예수님’에게 목마르지 않은 물은 ‘아버지 하느님’이다. 시편은 시냇물을 향한 암사슴의 그리움을 은유로 이를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42,2-3) 우리의 목마름은 ‘물에 대한 갈증’인가, ‘하느님에 대한 갈증’인가?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목마른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 cpbc2026.03.04

사회복지사 꿈꾸는 스키 메달리스트 김현미(지적장애 3급)양 동계 스페셜올림픽에서 은,동메달 따지적장애인 김현미(마르티나, 17)양은 인생에서 '꽃피는 봄날'을 맞고 있다. 나이가 그래서가 아니다. 올초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동계 스페셜올림픽(지적 장애인올림픽)에서 은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따고 난 후부터다. 현미양에게 꽃피는 봄날은 어떠한 모습일까.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지적발달장애인 생활시설 아네트의 집(원장 김영자 수녀)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현미 양을 만났다. 김현미양이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에서 딴 은메달과 동메달을 들어 보이며 수줍게 웃고 있다. #스페셜올림픽에서 메달 3개 따 현미양은 요즘 학교에서든 집(아네트의 집)에서든 어디서나 잘 웃는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자신감 때문이다. 웃을 때면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있는 현미양에게 "메달 땄을 때처럼 웃어보라"고 하자 그제야 고개를 든다. 낯선 이에게 미소를 들켜 수줍은 표정이다. 현미양은 지적장애 3급으로, 지적장애인 특수학교인 진명학교에 다닌다. 1년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중학교 3학년이다. 지적장애 3급은 지능지수와 사회성숙지수가 50~70으로, 또래와 같은 사고와 학습, 생활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현미양은 시침과 분침, 초침이 있는 아날로그 시계를 보는 데만 2년이 걸렸다. "시계를 볼 줄 안다"고 하지만 지금도 분침 보는 것이 서툴다. 현미양 옆에서 함께 대화하던 김영자 수녀는 "현미는 운동에 소질이 많다. 스키뿐 아니라 무슨 운동이든 잘한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현미양은 스키를 배우기 전 이미 육상선수이자 배드민턴 선수, 높이뛰기 선수 등으로 활약했다. 스키는 2011년에야 입문했다. 뛰어난 운동신경과 교사들의 지도, 아네트의 집 수녀들 헌신 덕에 2년 만에 올림픽 알파인스키 메달리스트가 됐다. 스페셜올림픽에는 남동생 현재(발렌티노, 15)군과 시설에서 만난 김형주(미카엘, 14)군이 함께 출전했다. 그 중 메달을 딴 사람은 현미양뿐이다. 시계 보는 것보다 메달을 따는 게 더 쉬운 모양이다. "(1위를 한) 프랑스 친구는 정말 날아다녀요(빨라요).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올림픽 이야기를 꺼내자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다. 현미양은 2월 5일 열린 대회전 결승에서 4.5초 차이로 2위에 머물렀다. 알파인스키는 1, 2차 시도 시간을 합해 가장 빨리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에게 금메달을 준다. 현미양은 스페셜올림픽 직후 열린 장애인 동계체전에서도 동메달을 따며 기량을 뽐냈다. "4년 뒤 미국(LA)에서 열릴 스페셜올림픽에도 나갈 거예요. 올해는 5월 국내에서 열리는 배드민턴 대회에, 10월에는 높이뛰기 대회에도 나갈거예요!" #엄마 기억이 안 나요 현미양은 6살 때 남동생 현재와 함께 아네트의 집에 왔다. 어릴 때 떨어진데다 지적장애가 있어 부모 얼굴을 기억하기는커녕 함께 지낸 기억조차 없다. 남매는 본래 전남 순천에서 살았다. 부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린 남매를 보육시설로 보냈다. "엄마 얼굴이 기억 안 나요." 현미양에게 엄마 아빠 기억이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현미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남매는 아네트의 집으로 옮겨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엄마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연락도 닿지 않는다. 현미양은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지적장애'와 '부모와의 이별'이라는 십자가 두 개를 지고 살아왔는데도 말이다. 아네트의 집 수도자들의 헌신적 보살핌과 기도 덕분에 현미양은 조금씩 더 행복해지고 있다. 세례도 받았고, 주일미사에도 열심히 참여한다. 그의 밝은 얼굴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는 성경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현미양은 아네트의 집에서 '천사 누나'로 통한다. 몇 명 되지는 않지만, 자신보다 어린 동생들을 잘 돌본다. 자신이 어려움을 겪어봤기에 나이 어린 동생들 아픔을 잘 안다. 꿈을 묻자 천사같이 대답한다.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요. 저보다 더 아픈 사람,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어요." 이힘 기자 조은일2013.04.24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17주일- 진짜 보물이 여기 있습니다](//cpbc.co.kr/CMS/newspaper/2011/07/rc/383955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17주일- 진짜 보물이 여기 있습니다박용식 신부(원주교구 횡성본당 주임)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 모파상 작품인 「목걸이」의 주인공 마틸드는 하급 관리 아내였지만 호화로운 생활을 꿈꾸며 사는 여자였습니다. 어느 날 장관이 주최하는 파티에 남편과 함께 초대받은 그는 친구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빌려 한껏 멋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만 친구에게 빌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잃어버립니다. 마틸드는 어쩔 수 없이 전 재산을 처분하고 모자라는 돈은 빚을 얻어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친구에게 돌려줍니다. 그러고 나서 마틸드 부부는 빚을 갚기 위해 10년이나 허드렛일을 하며 고생합니다. 마침내 빚을 다 갚을 무렵 마틸드는 거리에서 우연히 목걸이를 빌려준 옛 친구를 만나 그간의 일을 고백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 이를 어쩌면 좋아. 내 목걸이 값을 갚느라 10년이나 고생을 했단 말이에요? 그 목걸이는 싸구려 가짜였어요." 마틸드는 가짜를 얻기 위해 그토록 많은 세월을 고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나라가 어떤 곳인지 가르쳐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어떤 감각으로도 느낄 수 없는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려고 온갖 비유를 다 만들어 내십니다. 하늘나라를 겨자씨, 누룩 등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다가 마침내 오늘 복음에서는 '보물'과 '진주'에 비유해 설명하십니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5-46). 인생은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평생 보물찾기를 계속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디에 좋은 물건이 있으면 가진 것을 다 털어 그것을 사고, 어디에 병을 잘 고치는 용한 의사가 있다고 하면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서라도 그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합니다. 또 어느 나라에서 큰돈을 벌어 갑부가 될 수 있다고 하면 전 재산을 팔아 국외로 이민을 가기도 합니다. 몇 년 전 전남 진도군 죽도 앞바다와 울릉도 근해에 보물선이 침몰해 있다는 소문이 돌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내려 혈안이 되기도 하고 관련 주식에 투자자들이 몰리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보물, 즉 재물ㆍ권력ㆍ명예ㆍ쾌락 등 부귀영화를 찾아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상 보물은 일시적 기쁨과 행복을 주겠지만 결국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성경(시편 90,10)에 분명히 쓰여 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의 보물은 참된 보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찾아다니는 보물은 대부분 모파상 소설에 나온 것처럼 가짜입니다. 그런데 가짜가 더 진짜처럼 보여서 진짜보다 더 화려하고 눈부시게 반짝입니다. 가짜 보석 목걸이는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들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단 하룻밤 꿈처럼 사라집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있지요. 세상의 보물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다가 발등 찍힌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과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 줄 진짜 보물, 발등 찍히지 않고 믿을만한 참된 보물은 하느님 말씀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구해야하는 참된 보물입니다. 그래서 성 바오로 사도는 이 진리를 깨닫고 이 세상 모든 보물들을 '쓰레기'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사제가 될지 말지를 고민하던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오랜 고민과 방황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얻으려면 가장 좋은 또 다른 것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사제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결국 그 신학생은 신부가 돼 지금까지 다른 어느 신부보다 더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좋은 보물, 하느님 나라라는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이 좋은 보물을 얻기 위해 재물, 명예, 세속적 성공 같은 가짜 보물을 아낌없이 버려야합니다. 그것들을 팔아서 하느님 나라라는 진짜 보물을 사야합니다.조은일2011.07.19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15주일- 내 마음 밭은 어떤 밭일까?](//cpbc.co.kr/CMS/newspaper/2011/07/rc/382446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15주일- 내 마음 밭은 어떤 밭일까?박용식 신부(원주교구 횡선본당 주임)한 여인이 상점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계산대에 하느님이 서 계셨습니다. 여인은 깜짝 놀라 여쭈었습니다. "아니 하느님, 여기서 뭘 하고 계셔요?"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팔려고 기다리고 있단다." 여인은 이왕이면 자기가 원하는 최고의 것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평화와 사랑, 행복과 지혜, 자유를 사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는 평화, 사랑, 행복, 지혜, 자유 같은 열매는 팔지 않고 그 씨앗을 팔고 있단다. 그러니 네가 이 씨앗을 사가지고 가서 잘 가꾸면 그와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많은 것을 청합니다. 때로는 노력 없이 좋은 결과만 청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청원을 완성된 결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씨앗의 형태로 우리 마음에 뿌려주십니다. 물고기를 청하면 물고기 잡을 그물을 주시고, 평화를 청하면 평화를 그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씨앗을 주십니다. 그 씨앗을 우리 마음 밭에 심어 싹을 틔우고 자라 꽃을 피워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복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 먹었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말라버렸습니다.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음 밭이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 같은 사람은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마음 밭이 옥토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은 여러 방법으로 우리 마음 밭에 씨를 뿌리십니다. 천둥, 번개와 벼락을 통해 죄인들에게 회개의 씨앗을 뿌리고, 고통 받는 이웃을 통해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시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세례성사, 고해성사, 성체성사 등 성사를 받을 때 하느님은 당신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성경을 읽을 때도 당신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수도 없이 우리 마음 밭에 뿌려졌습니다. 우리 마음 밭이 좋은 땅이었다면 지금쯤 좋은 열매를 아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밭이 좋은 밭이라면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갈라 5,22)를 풍성하게 맺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제의 강론을 통해서도 우리 마음 밭에 씨를 뿌리십니다. 그런데 똑같은 강론을 들어도 신자들 반응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깊은 감동을 느끼고 생활 속에서 많은 열매를 맺지만, 어떤 신자들은 강론을 들으나마나 '소귀에 경 읽기', '굳세어라 금순아'입니다. '신부님이 뭐라고 강론을 하든 내 방식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사제를 통해 아주 좋은 씨앗을 뿌려주셔도 이런 신자들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똑같이 피정을 받고, 똑같은 강론을 듣고, 똑같이 기도를 하고, 똑같은 훈화를 들어도 열매를 맺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어떤 이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 내 마음 밭은 어떤 밭입니까?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에 덮인 밭입니까? 아니면 좋은 밭입니까? 하느님이 내 마음 밭에 평화의 씨앗을 뿌렸는데 평화롭지 못하면 그것은 분명 내 마음 밭이 돌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 밭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셨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분명 마음 밭이 가시덤불로 덮여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생활 속의 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뿌려질 하느님 말씀의 씨앗도 많은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조은일2011.07.05
[생활속의 복음] 대림 제1주일-가장 인간적인 하느님 만나는 날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부활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축제임을 알면서도 신자들은 크리스마스를 더 기다리고 축제의 장으로 열광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활이 그리스도교 전례주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크리스마스는 믿음에 대한 최대 인간 축제일 것이다. 그것은 이날 우리가 하느님의 인간성을 가장 깊이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베네딕토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구간 구유의 아기 예수와 초라한 목동들의 벅찬 감동이 완벽한 찬미를 이룬 그날 밤은 하느님의 인간성이 절정을 이룬 날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는 오늘, 복음과 독서는 우리의 이러한 성향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온통 '깨어 있어라'고 경고합니다. 짧은 복음 말씀에서 깨어있으라는 구절이 네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삶이 깨어 있으면서 예수님 성탄을 준비하는 삶이겠습니까? 바로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과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메시아를 기다렸던 율법학자, 바리사이, 사두가이는 바로 곁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 본 이들은 멀리 있었던 동방박사들과 하느님에 대해 무식하고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죄인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잘 알고, 메시아를 학수고대했던 이들이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이유는 그들의 모든 관심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현세적 욕심을 채우는 데만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를 쳐부수고 제2의 모세가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 자기들만을 일등국민으로 만들어 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을 만났고, 또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했던 사람들은 동방박사들, 목동들, 제자들, 과부들과 병자들, 고아와 고통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던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번 성탄에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을 우리는 제대로 알아 모실 수 있을까요? 대림시기 동안 내 이기적 마음을 정화시켜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랑과 평화, 감사의 마음을 간직한다면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스탠턴은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한 번은 두 사람이 함께 사건을 맡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법정에 앉아 있던 스탠턴은 링컨을 보자마자 자리에게 벌떡 일어나 "저 따위 시골뜨기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라는 겁니까"하며 나가 버렸습니다. 이렇듯 스탠턴이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하게 행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장관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임명했습니다. 참모들은 이런 링컨의 결정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탠턴이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참모들이 재고를 건의하자 링컨은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합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스탠턴은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버려야지요!" 참모들의 말에 링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속에서 없애버려야지요!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뒀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구원 복음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요구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어느덧 사랑이 샘솟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맺어졌던 아픈 과거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성탄보다도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축제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조은일2008.11.25
[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37-사추덕(四樞德) (2) - 정의인간 모든 행위 기준점은 '의'플라톤에 의하면 사추덕은 네 가지 덕으로 구성돼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따로 떨어질 수 없는 통합적 체계의 덕들이다. 그래서 그는 "덕은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후에 그 덕들의 연관성에 대해 설명한다. 마치 유학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인간의 핵심적 덕목으로 제시하고, 그 덕들의 관련성 안에서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논의하고 있는 것처럼…. 짧은 지면이라 여기에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추후라도 연구해볼 만한 주제다. 토마스 데 아퀴노는 사추덕의 연관성을 형이상학적 원리 안에서 이해한다. 크게 보면 이성(理性)의 영역에서 지혜와 정의의 덕이 나오고 정념(情念)의 영역에서 절제와 용기의 덕이 나온다. 따라서 지혜는 어떤 행위와 영역 안에서의 분별의 올곧음이며 정의는 정신의 올곧음인데, 인간은 그것을 통해 어떤 영역에서든 자신이 해야만 할 것을 행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도 '의'(義)는 모든 삶의 질서를 위한 최고의 생활 가치로 인식된다. 이것은 절대적 윤리 규범에 대한 인간의 방정한 품행과 법도의 의로움, 재판의 의로움 등을 의미한다. 이 義는 하느님의 속성이다.(시편 4,1; 7,17) 유학 또한 의(義)를 마땅함, 도리(道理), 정당(正當), 옳음 등의 뜻으로 이해하며, 항상 인간의 행위와 연관해 사용한다. 그러므로 의는 한 마디로 인간 행위의 준칙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자가 늘 근심하던 것 중의 하나는 '의를 듣고 능히 실천하지 못하는 것(聞義不能徙, 論語」, 述而篇)이었고, 의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君子)라고 불렀던 것이다.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리에 밝다."(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論語」, 理仁篇) 공자 스스로도 이러한 점을 강조했고 또 그렇게 살았다. 즉 인간 삶에서 의식주와 관련된 물질적 측면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보다 더 높은 가치 즉 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의롭지 않으면서 돈 많고 벼슬 높은 것은 나에게는 뜬 구름과 같다."(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 如浮雲. 「論語」, 述而篇) 예수도 산상설교 중에 같은 의미의 가르침을 전해준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7,31-33). 공자는 군자의 또 다른 특성으로, 의를 바탕으로 하여 모든 덕을 통합하는 인간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치 플라톤이 정의를 가장 완숙한 상태의 덕으로 파악한 것처럼…. 공자는 말한다. "군자는 義로써 바탕을 삼고, 禮로써 그것을 행하며, 겸손한 태도로 그것을 표현하며, 믿음으로써 그것을 이룩하니, 참으로 군자로다."(子曰 君子義以爲質 禮以行之 孫以出之 信以成之 君子哉. 「論語」, 衛靈公篇) 예와 겸손함과 믿음은, 의라는 본질을 행동에 옮기고 외면으로 표현하며 완성하는 수단이요 방법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 행위의 바탕이 義에 있다는 말이다. 군자는 더 나아가 모든 인간 행위를, 義라는 기준을 통해 판단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군자는 천하의 일에 대하여, 오로지 주장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아서, 義를 따라 행동할 뿐이다."(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論語」, 里仁篇.) 왜냐면 정의는 인간관계 뿐 아니라 사회나 국가공동체의 공동선과 관련된 덕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 관건이다. 미가 예언자가 넌지시 일러주는 말씀을 들어보자. "이 사람아, 하느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미가 6,8) 조은일2008.11.04

‘되찾은 아들’ 선물한 이 대통령, ‘평화의 날 담화’ 선물한 교황이재명 대통령, 레오 14세 교황 예방 레오 14세 교황이 15일 이재명 대통령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선물 교환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Vatican Media 제공 한반도 평화·서울 WYD 협력 논의 양측, 평화·화해 담은 선물 교환 이재명 대통령이 레오 14세 교황을 예방하고, 교황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지와 관심을 재확인했다. 이 대통령은 15일 오전(현지시간) 교황청 사도궁을 방문해 교황을 만나 한반도 평화 정착에 대한 우리 국민의 염원과 정부 구상을 전했다. 교황과 이 대통령은 또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의 성공 개최를 위해서도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이 대통령의 교황청 방문은 한반도 평화와 2027 서울 WYD라는 두 과제를 연결하며, 새 정부와 교황청의 협력 의지를 재확인했다. 교황과 이 대통령은 만남 후 평화와 화해, 그리고 상호 존중의 의미를 담은 선물을 주고 받았다. 이 대통령은 교황에게 ‘하느님의 품’ 조각상과 백자 합을 선물했다. ‘하느님의 품’은 성경 속 ‘되찾은 아들’(루카 15,11-32)의 비유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용서, 화해와 공동체의 회복을 상징한다. 백자 다용도 합은 한국 백자의 정갈함과 절제된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으로, 청빈과 성찰을 중시하는 사제의 삶을 떠올린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선물 이재명 대통령이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에게 들꽃문양 필함을 선물했다. 청와대 제공 이재명 대통령이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에게 홍삼 달임액을 선물했다. 청와대 제공 ‘하느님의 품’ 조각상. 청와대 제공 이재명 대통령이 레오 14세 교황에게 백자 다용도합을 선물했다. 청와대 제공 이 대통령은 또 교황청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에게 전통 칠화 기법으로 제작한 들꽃문 데스크 세트와 프리미엄 홍삼 달임액을 선물했다. 필함과 명함집, 펜접시로 구성된 들꽃문 데스크 세트에는 들꽃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통해 겸손과 성찰의 삶을 기리는 뜻이 담겼다. 홍삼 달임액은 파롤린 추기경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과 함께 한국의 전통 건강문화를 소개하는 의미를 담았다. 레오 14세 교황과 파롤린 추기경의 선물 풍요의 뿔, 코르누코피아는 성 베드로 대성당 성체 경당에 있는 바닥 장식을 재현한 것이다. '레오 14세의 제5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파롤린 국무원장은 라파엘로의 유명 프레스코화를 재현한 도자기 작품을 이재명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교황은 이 대통령에게 올해 1월 1일 발표했던 제59차 세계 평화의 날 교황 담화와 사도궁 관련 서적, 풍요의 뿔을 주제로 한 그림을 선물했다. 파롤린 추기경도 장식용 도자기 접시를 전달하며 우의를 다졌다. 양측이 주고받은 선물에는 한반도 평화와 화해에 대한 염원, 그리고 한국과 교황청이 앞으로도 긴밀한 협력을 이어가길 바라는 뜻이 담겼다. 바티칸=김혜영 기자김혜영2026.06.17

서학을 통해 조선 현자들에게 ‘공현’하신 주님[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2) 주어사 강학 권철신과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녹암계 현자들은 1779년 겨울 주어사에서 열흘간 가톨릭 교리를 연구한 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사진은 주어사 터. 2026년 1월 4일은 전례력으로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새 「성경」에 ‘동방 박사’라고 번역된 ‘마고이’ 곧 ‘현자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찾아온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이날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민족에게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드러나셨다고 해서 ‘주님 공현(公現)’이란 표현으로 경축한다. 신약 성경의 언어인 헬라어로는 ‘ἐπιφάνεια(에피파네이아)’라고 한다. 우리말로 ‘스스로 드러내심’이라는 뜻이다.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께서는 별의 인도로 찾아온 동방 박사들 곧 현자들을 통해 당신을 스스로 드러냈듯이, 우리 민족에게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공현’했다. 바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의 인도로 ‘서학’(西學)을 탐독하던 현자들을 통해 구세주의 실존을 드러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 몰약을 바쳤다. 이 선물들은 그리스도의 ‘왕권’과 ‘신성’, 그리고 ‘인류를 위한 희생’을 상징한다. 하지만 글을 통해 아직 희미하게 구세주의 존재를 인식했던 우리의 현자들에게는 구세주 아기 예수의 신비를 상징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 ‘그리움’, ‘고통’ 등을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합당한 자세, 마음가짐이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현자들은 서학에 담겨 있는 글 안에서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자 구세주로 경배할 수 있었다. 이에 동방 박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최초의 이방인’으로 복음서에 등장하듯이, 서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현자들 가운데 세례를 받은 이들은 ‘우리 민족의 첫 세대 그리스도인들’로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 기록되고 있다. 교회의 동아시아 선교와 한역서학서 출간 우리 민족이 한순간 갑자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성경 시대에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연결되는 ‘중간 시기’가 있었듯이,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서학을 수용해 신앙으로 승화하기까지 궤적을 보여주는 사상사적 ‘수용 시기’가 분명 있었다. 서학의 조선 전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가톨릭교회의 동아시아 선교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에 대응해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후 교황들은 유럽 밖의 복음화 정책을 시행했다. 가장 큰 결실이 바로 ‘포교성성’(현 교황청 복음화부) 설립이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선교 지역에 교구와 대목구를 증설했고, 서구 중심의 선교 정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톨릭 신앙에 어긋나지 않는 한 현지인들의 관습에 순응해 ‘토착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과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와 도미니코회 등 여러 수도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 선교를 계획했으나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조선의 쇄국 정책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 서양 문물과 또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해마다 부연사(赴燕使) 일행을 따라 북경에 가서 천주당을 방문하거나 북경 선무문 밖 유리창 상가에서 서양 물건과 한역서학서를 사오는 것이었다. ‘한역서학서’는 16세기 말 이래로 중국에서 활동한 서양 선교사들이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 서양 문물을 전달하기 위하여 가톨릭 교리와 윤리·지리·천문·역사·수학·과학·기술 등을 한문으로 저술 또는 번역한 일체의 서적을 말한다. 한역서학서는 주로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출간됐다. 16세기 말에서 18세기 말까지 출간된 한역서학서는 400종이 넘는데 그중 가톨릭 서적은 「천주실의」「칠극」「교우론」「기인십편」「직방외기」「성경직해」「성체요리」「천주교리」 등이 유명했다. 조선 학자들이 서학을 대한 태도 한역서학서를 비롯한 서양 문물이 조선에 소개된 것은 17세기 초부터였다. 이후 18세기에 들어 ‘서학’은 학문으로서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수용됐다. 서학에 대한 조선 학자들의 태도는 세 갈래로 드러났다. 첫째, 서양 학문과 기술, 가톨릭 신앙 모두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며 전문을 수용하고 실천한 ‘신서파’(信西派)이다. 이들은 주로 남인계 소장 학자들로 하느님의 종 녹암 권철신(암브로시오, 1754~1785)와 그 문하생들이었다. 둘째, 서양의 과학 기술은 받아들이나 종교와 윤리는 배격하는 ‘비판적 수용론자들’이다. 이들의 주류는 북학파 계열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이었다. 셋째, 가톨릭 신앙뿐 아니라 서학 자체를 거부하고 배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이다. 척사론(斥邪論)을 내세운 안정복, 신후담, 홍정하 등이 주류였다. ‘주어사 강학회’에서 가톨릭 신앙을 수용하다 신서파는 주로 성호학파 가운데서도 좌파로 알려진 양명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명나라 왕양명이 주자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새로이 수립한 양명학을 수용했다. 경기도 양근 지역 권철신의 문하에서 양명학을 공부하던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벽(요한 세례자), 정약전, 정약용(요한 사도), 이승훈(베드로),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윤유일(바오로), 홍낙민(루카), 이총억, 김원성, 권상학 등 녹암계가 이들이다. 1779년 겨울, 권철신 주도로 열린 ‘주어사 강학회’에서 녹암계 현자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열흘간 밤을 새우다시피 한역서학서를 함께 읽고 가톨릭 교리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인 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ἐπιφάνεια(에피파네이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글을 통해 이들에게 스스로 드러내셨다. 그래서 일부 한국천주교회사 학자들은 권철신의 집이 있는 양근 한감개와 강학회가 있었던 주어사를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라고 평한다. 조선의 현자들이 처음으로 구세주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주님께서 이들에게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곳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12.31
![[생활속의 복음]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1/21/CSh1768968175437.jpg)
[생활속의 복음]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연중 제3주일 마태 4,12-23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작 ‘제자들을 부르심’. 체된 양상을 보인다. 한 인간의 변화도 이와 흡사하다. 섬세하게 설계된 교육 제도가 순기능으로 작용하여 한 인간의 긍정적 변화를 유도하더라도, 특정 연령에 도달한 이들의 실질적 변화를 기대하기가 사실상 어렵다. 연중 시기의 시작부를 장식하는 주제어는 대림 시기나 사순 시기와 같은 ‘회개’다. 성경의 전체 맥락이 강조하는 회개를 인간의 ‘죄’와 연동하는 교회의 고전적 해석에 따르면, 회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그런데 그리스어(메타노이아) 어원을 검토하면, 회개는 인생 전반에 걸친 ‘방향 전환’을 함축한다. 회개는 한 인간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역동적 변화이다. ‘인간은 스스로 회개(변화)할 수 있는가?’ 변화의 당위성에 수긍하는 인간은 이 당위성으로 변화하지 않고 변화의 중대성과 시급성으로 변화한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향과 품성, 후천적으로 확립된 가치관은 ‘실증적으로’ 견고한 성벽과 같다. 변화는 이에 상응하는 동기 부여를 요청한다. 손해되면 거절하고 이익되면 화답하는 인간에게는 유동적인 손익 계산으로 인한 임시적 변화와 구별되는 중대한 사유로 일어난 드라마틱한 변화가 실재한다. 갑작스러운 체질 변화처럼 중병으로 죽음을 가깝게 의식하거나 밑바닥을 치는 고충을 감내하며 재기한 이들로부터 종종 체감되는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있다. 이 변화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자극·활력을 포착하여 자기 내면에서 이를 적용·승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회개의 일차적 계기는 ‘자기 밖’에 있으며, 이를 신앙 언어로 ‘은총’이라고 칭할 수 있다. 회개를 강조하는 복음은 ‘변화에 주저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마태 4,16)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고 선포하는 그리스도를 ‘변화의 추동력’(빛)으로 명시한다. 하늘 나라 선포와 병렬로 전개된 제자 선발에서 ‘물고기 낚는(지켜보는) 어부’가 “사람 낚는(돌보는) 어부”(마태 4,19)로 변화(회개)되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늘 나라는 새 시대의 도래를 의미했다. “하늘과 땅”(창세 1,1: 나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업적이 최종적으로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 하늘 나라)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히 유다 지역에 비해 소외되었던 갈릴래아 지역에 변화의 중대성과 시급성을 제공하는 외적 동인, 곧 회개의 근거였다. 하늘 나라가 회개의 주도적 촉매였던 성경의 시대와 달리 오늘날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된다. 하나는 사후에 진입하고 싶은 ‘천상 천국’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에 건설하고 싶은 ‘지상 천국’이다. 강조점을 어디에 두든, 하늘 나라에 대한 담론이 변화의 중대성과 시급성을 촉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로마 8,34) 빛이신 그리스도를 매개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변화의 중대성과 시급성을 제시할 수 있는 교회의 새 언어가 발굴되어야 할 시점이다. 2026.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