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평화방송과 함께 예수님 부활을 맞이하세요](//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4986_1.6_titleImage_1.jpg)
[카드뉴스]평화방송과 함께 예수님 부활을 맞이하세요평화방송 라디오(FM 105.3㎒)와 TV(Sky 평화 174)가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성삼일과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아 24일부터 28일까지 다양한 특집 프로그램을 마련한다.성삼일 전례 생중계서울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되는 성유 축성 미사와 파스카 성삼일 전례, 바티칸의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를 TV와 인터넷, 평화방송 애플리케이션으로 생중계한다. ▷성유 축성 미사 24일 오전 10시▷주님 만찬 성 목요일 미사 24일 오후 8시▷주님 수난 성 금요일 미사 25일 오후 8시▷부활 성야 미사 26일 오후 8시▷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 27일 낮 12시, 재방송 오후 7시 40분▷바티칸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 27일 오후 5시 5분, 재방송 오후 11시 10분 특집 프로그램-‘나를 따라오너라’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과연 무엇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일까? 영화는 오늘을 사는 우리처럼 오해와 의심, 두려움으로 가득했지만 결국 교회의 굳건한 지도자로 변화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통해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본다. 성서적 지식 없이도 복음이 담고 있는 중요한 메시지를 쉽게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단편 영화.▷25일 오후 1시 10분, 26일 오후 7시 15분, 27일 오후 3시 5분 -‘셋째 날’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증거는 무엇이며, 혹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환상은 아닌지 살펴보는 다큐멘터리. 전문가들과 함께 예수님의 부활을 둘러싼 오랜 논쟁들을 성경과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흥미진진하게 살펴본다.▷26일 오후 6시, 27일 오후 9시 -‘주님 무덤 성당의 비밀’지난 수 세기 동안 역사학자와 과학자, 고증학자 등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죽음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려고 연구해 왔다. 다큐멘터리는 신학자, 과학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성의의 진실을 추적하고 예수님 무덤에 세워진 주님 무덤 성당을 다각적으로 분석, 조명한다.▷25일 오후 6시 40분, 26일 밤 10시 35분, 27일 오후 2시 -특선영화 ‘별빛 가득한 밤에’1936년 스페인 알마그로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 수도자와 수련자들의 열기로 가득한 이곳에 뜻하지 않은 고통이 닥친다.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으로 수도자들이 갇히고 하나씩 죽임을 당한다. 영화는 스페인 내전의 정치적 이야기에서 벗어나 수도자들이 직면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세심하게 담았다. 2014년 폴란드 니에포칼라노프 국제 영화제 수상작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25일 밤 10시 15분 -‘아시아에 희망을 심다 : 더불어 사는 세상’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캄보디아ㆍ몽골ㆍ필리핀에 파견돼 현지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국인 선교사들의 모습을 담았다. 희망의 씨앗이 어려운 이웃들 곁에서 묵묵히 나누는 형제적 사랑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해설은 배우 채시라(클로틸다)씨가 맡았다.▷25일 오후 12시 10분, 26일 오후 5시 -주님 수난 성금요일 특집 라디오 신앙상담 ‘따뜻한 동행’성금요일 특집으로 새롭게 준비되는 따뜻한 동행은 자비의 특별 희년인 올해, 자비의 실천과 더불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보듬는 마음이 생기도록 이끌어 준다.▷25일 오후 4시 5분 -부활 특집 ‘부활 성야 미사’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성당에서 염수정 추기경 집전으로 봉헌되는 예수 부활 대축일 성야 미사 실황을 150분간 생중계한다.▷26일 오후 8시 -부활 특집 ‘부활 대축일 낮 미사’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되는 예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실황을 90분간 생중계한다. ▷27일 낮 12시 -부활 특집 새롭게 즐겁게 오 해피데이 ‘주님이 다시 오셨도다’110분간 진행하는 부활 특집 새롭게 즐겁게 오 해피데이는 예수 부활 대축일 말씀으로 퀴즈를 내고 같은 단어가 들어가는 생활 성가를 들려준다. 2부에서는 생활 성가 가수를 초대해 라이브 음악을 들려준다.▷27일 오후 2시 10분 -부활 특집 ‘알렐루야 예수 부활하셨도다’예수 부활의 기쁨을 묵상할 수 있는 가톨릭 성가 등 노래와 음악을 소개한다.▷27일 오후 7시 -부활 특집 명동연가 오픈 스튜디오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아 명동연가가 청취자들을 초대하는 오픈 스튜디오를 마련한다. 가수 장은아씨와 싱어송 라이터 추가열씨가 출연하며, 방송인 심택월씨가 진행한다.▷27일 오후 9시 -부활 특집 그대에게 평화를 박민우 신부입니다 ‘부활 성가 톱 10’평화방송 누리집과 프로그램 블로그 댓글을 통해 신자들이 좋아하는 부활 성가를 추천받아 톱10을 선정하고 퀴즈를 맞히는 청취자 참여 시간으로 진행한다.▷28일 오후 2시 5분이힘 기자 lensman@pbc.co.k 문채현2016.03.16

“내 심장은 지금도 이주민들 위해 뛰고 있다”10년 동안 이주민들과 함께한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장 최병조 신부 10년 전 가을이었다. 아프리카 출신 이주민이 수원교구 이주사목부 전담 신부로 부임한 최병조 신부에게 조심스럽게 고해성사를 청했다. 이주민은 영어로 죄를 고백했고, 최 신부는 짧은 영어로 최선을 다해 보속을 줬다. 성사를 마친 이주민은 “한국에 온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봤다”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최 신부의 머릿속에는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최 신부는 “그날 고해성사를 베풀면서 사제가 신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영혼을 돌봐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2005년 9월 이주사목부로 부임해 만 9년 9개월을 이주민들과 함께한 최 신부가 지난 6월 교구 사회복음화국장으로 부임했다. 최 신부는 “내 심장은 지금도 이주민들 위해 뛰고 있다”며 이주민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표현했다. 최 신부에게 10년 동안 이주민들과 함께한 이야기를 들었다. 최 신부는 부임 당시 상황을 “Nothing(아무것도 없는)”이라고 표현했다. 66㎡ 남짓한 사무실 하나에 직원 1명, 수도자 2명이 전부였다. 후원자는 20여 명에 불과했다. 10년 동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교구 곳곳에 이주민 상담소가 설립됐고, 이주민 쉼터ㆍ자립 시설, 다문화 자녀 공부방 등 33개 시설이 문을 열었다. 후원자는 2000여 명으로 100배 가까이 늘어났다. 최근에는 이주사목회관까지 마련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다.최 신부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성경 말씀대로 나그네들이 쉴 곳을 마련해줬고(이주민 쉼터), 배고픈 이들에게는 먹을 것을 줬다(무료 급식). 또 헐벗은 자에게는 입을 것을(알뜰 매장), 아픈 이들은 치료해줬다(무료진료소).이주민들의 눈에 비친 최 신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주민들은 그를 ‘Father’(아버지, 신부님)부터 ‘Friend’(친구), ‘Comforter’(위로해 주는 이), ‘Supporter’(지지자)까지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다. 최 신부는 ‘친구’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한다.“이주민들이 저를 보고 이웃집 아저씨 같다고 하면서 ‘친구’라고 부를 때 행복했어요. 항상 그들을 지지하고 후원하고 포용하려고 노력했어요. 한국 교회는 사제와 신자들 사이에 간격이 많이 벌어져 있는 것 같아요. 신자들에게 사제가 편안한 존재였으면 해요.”한국은 외국인 비율이 3% 넘는 다문화사회다. 다문화가정, 외국인노동자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외국인 특히 저개발국에서 온 노동자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최 신부는 지난해 개봉해 화제가 됐던 영화 「국제시장」을 언급했다.“주인공 덕수와 영자가 독일에 가서 광부, 간호사로 일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 하는 모습을 보고 관객들이 안타까워했잖아요. 지금 우리나라 이주민들 삶이 영화 속 덕수와 영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요. 이주민들은 우리나라가 필요로 해서 들어온 이들이에요. 좀더 따뜻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으면 해요.”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평화신문2015.08.19
퇴폐의 상징인 소돔](//cpbc.co.kr/CMS/newspaper/2014/04/rc/507605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15)퇴폐의 상징인 소돔주님 뜻 거슬러 받은 징벌의 상징 소돔은 요르단의 저지대에 있던 도시다. 현재는 사해 남부의 수몰지역에 해당한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이 도시는 성적 문란 및 도덕적 퇴폐 때문에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서 부근의 고모라 등과 함께 유황불 심판에 의해 멸망됐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소돔 하면 죄악과 타락과 파멸의 도시를 상징한다. “그때 주님께서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창세 19,24). 창세기에서 소돔을 방문한 두 천사에 대한 소돔 남자들의 요구 때문에 소돔에서 유래한 ‘소도미아(Sodomia)’라는 단어가 남색(男色)을 의미하게 됐다(창세 19,5). 소돔의 위치는 요르단 국토 중에서 사해 남쪽 어느 곳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최근에는 사해 북쪽의 바다 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해 남부 수중 수심 1.8m 정도의 얕은 부분이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장소라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위치에 대한 약간의 논쟁이 있지만 아직은 사해 동쪽에 있는 요르단 쪽의 밥 아드 드라(Bab adh Dhra)가 가장 유력하다.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 중기(기원전 2000년~1500년께)만 해도 농사를 지을 만한 충분한 양의 신선한 물을 사해로 흘려보내는 비옥한 땅이었다고 한다. 성경에서 히브리 족장 아브라함의 조카로 나오는 롯은 양 떼들을 먹이기 위해서 시띰 골짜기에 있는 도시들 가운데 비옥한 이 지역을 택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과거 큰 지진에 의하여 땅이 내려앉고 천연가스와 석유가 폭발했기 때문에 도시들이 화염에 싸여 사해의 수중에 침몰한 것으로 생각된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황과 불’은 이 도시들을 파괴한 지질학적 변동에 동반되는 재앙으로 상상이 됐던 것이다. 사해 인근에 자리잡았다가 폐허가 된 소돔. 사람의 바위는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으로 변한 바위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리길재 기자 소돔과 그 이웃 성인 고모라는 특별히 성적 문란 및 도덕적 퇴폐가 만연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소돔은 본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던 곳이다(창세 13,1-13). 아브라함은 타락한 소돔을 위해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한다. 하느님은 소돔에 거주하고 있던 롯에게 의로운 사람 10명만 찾아내면 멸망을 보류하겠다고 선언해줬으나, 그 10명의 선량한 사람을 찾아내지 못해 롯이 소돔을 탈출하자마자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 멸망했다고 한다(창세 18,16-19,29 참조). 소돔에 대한 성경 속 이야기와 관련된 주제들은 오늘날까지 예술작품들에서 많이 다뤄지고 있다. 지금 이 지역은 사실 아무런 유적도 없고 마을도 전혀 없어 찾기가 쉽지 않다. 오늘날 이곳은 유황불로 멸망했다는 성경의 기록처럼 특별한 유적이 없는 황량한 광야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과거의 소돔이었다는 작은 푯말만 자리 잡고 있다. 소돔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대가로 받은 징벌의 상징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했음에도 회개하지 많은 카파르나움을 항해 야단을 하실 때 소돔을 비유로 사용했을 정도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마태 11,23).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cpbc2014.04.30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 닮은 특별한 존재](//cpbc.co.kr/CMS/newspaper/2015/07/rc/579480_1.0_titleImage_1.jpg)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 닮은 특별한 존재13. 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하게 창조된 인간(영국 런던 캠브리지, 지저스 칼리지 성당 색유리화). 인간이 ‘하느님의 족속’임을 드러내는 표식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과의 사랑의 합일’이라는 숭고한 목적으로 예정하셨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를 창조하시되 당신 모상에 따라 만드셨습니다. 이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소개되고 있는 인간에 대한 대표적인 정의로 하느님의 인간 창조에 대해 전하는 창세기 1장 26절에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쉽게 말해, 이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되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여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인간은 본질적인 면에서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들이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아 닮듯이 그렇게 하느님을 쏙 빼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본질적으로 닮았습니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인간 존재가 지닌 숭고한 품위를 보증하는 것이자 그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그리고 그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늠케 해줍니다. 인간 존재에 인호처럼 각인된 이 하느님의 표식은 그가 ‘하느님의 족속’이자 ‘천상 부족’임을 잘 드러내 줍니다. 십자가 성 요한의 영적 비전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하느님의 모상과 유사한 인간그런데 초대 교회의 교부들 이래로 적지 않은 신학자, 영성가들은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하는 이 정의를 더욱 정확히 규명하고 이를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는 바탕 가운데 하나로 삼았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따르면, 창세기 1장 26절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selem)과 ‘유사함’(demut)에 따라 창조됐다 하며 두 개념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칠십인역 성경(그리스어)과 불가타 성경(라틴어) 역시 이 두 개념을 구분해서 표현했습니다. 성 이레네오를 위시해서 오리게네스, 성 아우구스티노 등 적지 않은 교부들은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오는 이 두 개념에서 고유한 신학적 의미를 끌어냈습니다. 우선, 그들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여타 다른 피조물과 달리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선물로서의 측면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닮았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원본과 복사본이 100%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차이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인간이 자신에게 선사된 삶을 통해 더욱 더 닮아가야 한다는 과제를 가리킵니다. 교부들은 인간의 이러한 소명을 ‘유사함’이라는 말 안에서 보았습니다.하느님의 모상을 완성시켜가는 영적 여정 그러므로 이 전망에서 본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졌지만(모상) 동시에 더욱 더 그분을 닮아야 하는 소명(유사함)을 받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초대받은 존재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이런 교부들의 영성적인 비전을 바탕으로 자신의 영성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영성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과 그 계획의 실현 과정에 대해 전하고 있으며 그 이면에 숨어있는 속살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그러나 그분을 더욱 더 닮아야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밑그림이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성인의 작품들을 보면, 인간의 영적 여정의 시작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하느님의 모상’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며 여정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설명에서는 ‘유사함’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정화, 조명, 일치의 여정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모상을 완성시켜가는 과정이자 모상과 유사함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일한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를 닮음그런데 볼 수 없는 하느님, 형상이 없는 하느님을 어떻게 닮을 수 있을까? 우리가 믿는 신앙은 바로 이 점에 대한 해답을 전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라고 하지만, 정확히 말해 유일한 하느님의 모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는 인간의 소명은, 정확히 말해 당신의 인격을 통해 하느님이 누구신지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인 삶 속에서 보면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인의 가르침에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닮으라는 가르침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성인의 가르침에 있어서 중심인 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이루어야 할 근본 소명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해 이루어갈 수 있는지 「가르멜의 산길」에 나오는 성인의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들으며 그 비결을 배우기로 합시다. “우선, 자기 삶을 그리스도께 맞추면서 매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을 일상적인 욕구를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본받을 수 있고 모든 것에 있어서 그분이 하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의 삶을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할 수 있으려면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감각들이 가져다주는 어떤 기쁨일지라도 그것이 순수하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공경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거절해야 하고 비운 상태에 머물러야 합니다”(1권 13장 3-4항). cpbc2015.07.01
![[내 마음의 북녘 본당] “라디오 틀어놓고 성당 마당서 체조했었죠”](//cpbc.co.kr/CMS/newspaper/2015/12/rc/611510_1.0_titleImage_1.jpg)
[내 마음의 북녘 본당] “라디오 틀어놓고 성당 마당서 체조했었죠”재령본당 출신 김봉덕(아가타) 할머니 “수구초심이라더니 나이 들수록 고향 성당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간절해집니다. 황해도 재령본당 출신 김봉덕(아가타, 89, 대구대교구 대명동본당) 할머니는 “어릴 적엔 저녁 미사가 없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새벽 미사를 다녔는데,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성당에 갔었다”고 회고하며 “겨울엔 특히 어찌나 눈이 많이 왔는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걷던 기억이 요즘도 눈에 선하다”고 말문을 뗐다. 김 할머니가 신자 수 100명쯤 되는 작은 공동체였던 재령본당에 대해 맨 먼저 떠올린 기억은 뜻밖에 ‘라디오’다. 1933년부터 3년 3개월간 제4대 주임으로 재임한 방유룡 신부는 주일이면, 성당 마당에 라디오를 꺼내다 놓고 주민들과 맨손체조를 했다는 것. “주민들 건강을 챙기려는 뜻도 있었지만, 생전 처음 접하는 라디오를 듣고 싶어하는 주민들에게 선교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요리문답 경시대회하면 1등 “‘신부님, 라디오 안에 사람이 있어요?’ ‘그럼, 라디오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말하는 거야!’ 신부님이 농담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면, 사람 허리보다 약간 큰 진공관 라디오 안에 어떻게 사람이 들어가 있을까 싶어 신기해했지요. 아무튼, 그렇게 라디오를 들으러 왔다가 체조하고 신자가 된 분들도 많았어요.” 이렇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김 할머니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재령성당에 대한 기억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여섯 살 무렵 언니(김재덕 요셉피나)를 따라 세례를 받고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던 김 할머니는 1934년에 새로 나온 「천주교 요리문답」을 달달 외워야 했다. “성탄이나 부활 찰고(판공) 때, 신부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면 성사도 안 주셨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320개 조목에 주요 기도문까지 몽땅 외웠는데, 그 덕에 황해도 감목대리구에서 요리문답 경시대회를 하면 항상 1등을 했다. 재령 골짜기마다 성당 종소리 울리길 김 할머니는 해방 직전 ‘열두 대문 집’에 시집갔다. 북이 공산화된 이후 지주라는 이유로 재산을 다 뺏기고 재령성당 제의방에 숨어 있다가 1947년 남편 이선풍(베드로)씨와 함께 두 아이를 업고 월남했다. 그는 1959년부터 30년간 대구대교구 점촌ㆍ상주 서문동(이상 현재 안동교구)ㆍ신동본당 등에서 3000명 넘게 세례를 받도록 이끈 ‘열혈 전교회장’으로 교회에 봉사했다. 고령에도 한결같이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김 할머니는 “전에는 라틴 말로 미사를 드리니까 뭔지도 몰랐는데, 지금은 우리말로 미사를 드리며 참뜻을 알게 되니 미사 때마다 눈물이 핑 돈다”며 “단 하나 소원이 있다면 고향 재령 골짜기마다 성당 종소리가 울리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전한다. 1971년 남편을 잃고도 7남매를 양육하며 “저녁마다 성경 말씀을 한 구절씩 먹여 주는” 저녁기도(조과)를 거르지 않은 김 할머니는 자녀 중 이형우(시몬 베드로, 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원장) 아빠스와 이현숙(안나 마리,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수녀를 수도자로 길러내고 숱한 박사 아들ㆍ딸ㆍ손주를 키워낸 ‘신앙의 어머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평화신문2015.12.29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19> 영성 훈련](//cpbc.co.kr/CMS/newspaper/2015/09/rc/591855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영성 훈련예수님이 보여주신 덕행, 반복 수련해야 나쁜 악습을 끊어버리려 실천하는 수덕 생활이 인간 육신을 다소 힘들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오늘날까지 여전히 수덕 생활을 위한 유효한 방법 중에 하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면서 세속 분위기의 변화가 수덕 생활에 있어서 좋은 덕행을 몸에 익히게 하는 반복 훈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보다 긍정적인 경우도 발생했습니다. 즉, 근세가 시작되면서 인간 존엄성을 강조하는 문예 부흥과 인문주의가 출현한 것이 세상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도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중세까지 하느님께만 관심을 집중했던 그리스도인은 근세부터 인간 자신에게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할 때에도 예수님의 신성보다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며 인간으로서 보여주신 삶을 본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면서 수덕 생활의 강조점도 바뀌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 안에서 이러한 변화는 ‘새 신심 운동’(Devotio Moderna)이라고 불립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독일의 사상가며 아우구스티노 수도참사회원. 새 신심 운동을 대표하는 사례로 토마스 아 켐피스와 그의 저서 「준주성범」을 들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거룩한 규범’이라는 한자의 뜻을 빌려온 우리말 제목 및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라는 원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공생활 기간 중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을 충실히 따른다면 영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바람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 인성을 묵상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좋은 덕행을 본받고자 반복해서 훈련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후 「준주성범」은 교회 안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 서적이 됐는데, 이것은 이 책이 강조하는 방향이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인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큼 영성 생활을 위한 중요하고도 유익한 점을 잘 제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영성 훈련은 인간의 지성보다는 인간 의지를 강화하는 훈련입니다. 중세 중반 이후 스콜라 신학의 영향을 받아 주로 지성적인 특성이 강조된 영성 생활에서 어려움을 느낀 신앙인들은 의지를 훈련해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 생활에 친근함을 느끼게 됩니다. 다만 실천적인 영성 생활에서 기준이나 방향성 없이 무작정 인간의 의지만 강조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영성가들은 체계적인 기도 생활을 확립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북유럽에서 활동했던 그란스포르트는 저서「묵상의 사다리」에서 거의 최초로 체계적인 묵상 기도 단계를 소개했습니다. 즉, ‘준비 단계’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상승 단계’에서 지성에서 의지까지 순차적으로 훈련하며, ‘최종 단계’에서 자신의 염원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스페인에서 활동했던 시스네로스는 저서 「영성 생활을 위한 훈련」에서 영성 훈련에 대한 총체적인 표준 지침을 제시했습니다. 즉, ‘정화 주간’, ‘조명 주간’, ‘일치 주간’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출발한 영적 여정이 인성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다다르면 하느님 사랑의 최고조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그런데 그리스도의 인성을 묵상하는 데서 출발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좋은 덕행을 반복 훈련하여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영적 발전의 여정은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저서 「영신수련」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항상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 생애와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묵상 기도를 훈련할 것을 강조했습니다.결국 신앙인은 끊임없는 영성 훈련을 통해 좋은 덕행을 습득하거나 나쁜 악습을 끊으면서 영적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오늘날까지도 수덕 생활을 실천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각자 끊어야 할 악습과 습득해야 할 덕행이 무엇인지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5.09.08

타일조각에 영성 불어넣는 ‘돌연변이’ 사제 조각가 타일조각가 김옥수 신부 ‘보시니 좋더라’ 전시회 타일조각가 김옥수 신부는 “교회 안팎에서 타일의 미와 영성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보시니 좋더라 전시’는 내년 1월 10일까지 계속된다. ‘타일조각’ 하면 여전히 낯설어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건축 재료로 다양하게 쓰이는 타일을 20년간 묵묵히 성미술 작품으로 승화시켜온 장인(匠人)은 그래서 더욱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타일조각가 김옥수(부산교구 원로사목자) 신부 얘기다. 타일조각 장인인 김 신부가 1일부터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보시니 좋더라’ 전시를 열고 있다. 내년 1월 10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사제의 독특한 타일조각의 멋을 접한 미술관 측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덕분에 미술관을 드나드는 수많은 시민들이 로비에 걸린 대형 성화 작품을 감상하게 됐다. 개막식에는 광주대교구 총대리 옥현진 주교, 윤장현(마르코) 광주광역시장 등 인사 및 관람객 120여 명이 참석해 관심을 보였다.전시작품은 십자가 위 예수님 주변으로 천사와 성모 마리아가 있는 성경 속 작품을 비롯해 예수님 곁으로 탁자에 빼곡히 들어앉은 열두 제자가 최후의 만찬을 하는 모습 등 크고 작은 작품 수십여 점이다. 카나의 혼인잔치 등 성화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의 환한 얼굴, 그네를 타는 여인들을 형상화한 민화에, 파스텔 빛을 머금은 작품까지 다양하다. 가로 7m에 이르는 제일 큰 작품 ‘하느님의 계획’은 제작에 9년이나 걸렸다.타일조각은 까다롭다. 에칭 기계로 타일에 형상을 넣고, 위에 안료를 입혀 구워내는 방식을 취하는데, 타일이 잘 깨질 뿐만 아니라, 색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10회 이상 가마 불에 구워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이후 색이 잘 변하지 않아 영구한 작품으로 가치가 높다. 김 신부는 이탈리아 유학 시절 조각 세계에 빠져든 이후 나무, 유리, 돌을 거쳐 타일조각가로 자리매김했다. 2008년 이 기법을 특허 출원한 김 신부의 타일조각은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찾기 힘들다.김 신부는 “처음 색을 내는 데에만 4~5년의 연구 시간이 걸릴 정도로 타일조각은 까다로운 작업”이라며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성화와 민화, 제자들의 작품도 함께 출품했다”고 밝혔다.경남 밀양에 있는 공방에서 작품활동 중인 김 신부는 7년 전 타일조각벽화연구소를 설립해 타일조각의 후계자 2명을 양성 중이다. 작품 외연도 넓히고 있다. 매년 지역을 불문하고 전시하고 있다. 김 신부의 작품은 가톨릭대학교, 부산교구 해운대성당 등 전국 20여 곳에 설치돼 있다. 과거 “나는 그림 공부를 해본 적 없는 돌연변이 조각가”라고 밝힌 김 신부는 “표현에 제한은 없다”고 했다. 개척과 변화를 계속 이어갈 생각인 듯하다.김 신부는 “모든 건축 재료로 쓰이는 타일에 예술성을 가미해 우리 삶을 꾸준히 아름답게 꾸며갈 계획”이라며 “교회 안팎에서 타일의 미(美)와 영성(靈性)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문의 : 062-613-7100, 광주시립미술관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장재학 명예기자 bio2583@ 평화신문2015.12.09

‘하느님 말씀’이 사람의 ‘몸’이 되셨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미하엘 발트슈타인 엮음/이동호 옮김/가톨릭대학교출판부/4만 7000원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위원장 염수정 추기경)는 6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설립 10주년 기념미사 중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을 봉헌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몸 신학’ 사상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생명 가르침이기에, 생명위원회가 ‘몸 신학’이 말하는 생명에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나타낸 것이다.이동호(서울 오류동본당 주임) 신부가 10년에 걸쳐 번역해 최근 발간한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은 교황이 1979년부터 1984년까지 5년간 수요 일반 알현 시간에 ‘몸’을 주제로 강론한 내용이다. 교황은 인간의 몸을 신학적이고 인간학적 관점에서 성찰하며 통합적이고 독창적인 몸 신학을 완성했다. 그는 몸 신학 교육을 통해 성경 말씀과 성사를 바탕으로 성과 사랑, 남녀의 혼인과 수도자들의 독신 문제, 생명 윤리 등을 다뤘다. 교황에 따르면 인간 몸은 “하느님 안에 영원으로부터 감춰진 신비를 세상의 가시적 실재로 옮겨주도록, 그리하여 그 신비의 표징이 되도록 창조”됐다. 그리고 이 감춰진 신적 신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한몸’이 될 때 가능하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 몸 신학은 육욕적이고 세속적이며 유한한 몸이 ‘하느님의 학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교황은 “하느님 말씀이 몸이 되셨다는 사실로써, 몸은 신학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교황은 하느님 말씀이 사람(몸)이 된 신비를 알려주고 이를 통해서 인간생명의 참 목적과 참 의미를 깨닫도록 이끈 것이다. 교황은 또한 몸과 영혼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이원론, 하느님 존재를 망각한 과학적 합리주의, 현대문화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몸의 숭배를 경계하며 그리스도께서 가르친 진정한 사랑의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웠다. 몸 신학 연구에 매달려 온 크레스토퍼 웨스트(몸의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박사는 책 서문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은 단지 성(性)의 혁명에 대한 응답만이 아니라 계몽사상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면서 “현대적 합리론, 데카르트적 이원론, 초-영성론 그리고 현대세계를 감염시킨 모든 탈육체적 인간학에 대한 응답“이라고 설명했다. 책은 교황의 몸 신학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원천 자료다. 일반 신자들이 소화해내기엔 너무 어렵다. 우선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압도당한다. 몸의 신학에 담긴 신학적 철학적 사유를 온전히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몸의 신학이 모든 이를 위해 쪼개어질 빵이 되려면, 학문적이거나 대중적인 차원 모두에서 해야 할 작업이 많이 남아 있다”는 웨스트 박사의 지적은 마땅하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으로는 「쉽게 쓴 몸의 신학」 「처음 읽는 몸의 신학」이 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백영민2015.12.09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7)헤로데 집안과 로마 통치](//cpbc.co.kr/CMS/newspaper/2016/04/rc/632353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7)헤로데 집안과 로마 통치예수님 시대, 대제국 아래 혼돈의 시대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나타날 때마다 대충 넘어가는 이름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야고보이고, 다른 하나가 헤로데입니다. 특히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무렵에는 연대도 혼란스러워서 아버지 헤로데를 말하는 것인지 아들 헤로데를 말하는 것인지 왔다 갔다 하고, 아버지든 아들이든 상관없다고 얼버무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은 그 헤로데 집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복잡합니다. 하스몬 왕조 안에서만 복잡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복잡합니다. 루카 복음 3장 1-2절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나타난 것이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로마 황제와 유다 총독에다 갈릴래아 영주까지 개입하니 제가 그 땅의 백성이라면 도대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를 것 같습니다.큰 그림을 그려보면, 당시의 대제국은 로마이고 기원전 63년 이래 유다를 지배한 것도 결국은 로마입니다. 그 아래에서 누가 실세가 되느냐, 이것이 문제이지요. 로마에서 팔레스티나에 처음 개입한 것은 폼페이우스였습니다. 하스몬 왕조에서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히르카노스 2세 형제가 서로 대립하면서, 각각 폼페이우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노스 2세의 편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히르카노스 2세가 끝까지 폼페이우스에게 충실했던 것도 아닙니다. 로마의 정치 변동 속에서 히르카노스 2세와 그의 신하 안티파테르는 카이사르에게 돌아서서 필요한 때에 그를 돕고는 그 보답으로 팔레스티나에서 실권을 장악했습니다.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히르카노스 2세의 싸움 사이에서 진정한 승자는 안티파테르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안티파테르는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두 아들 파사엘과 헤로데(미래의 헤로데 대왕)은 각각 유다와 갈릴래아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안티파테르가 그들에게 요직을 차지하게 한 것입니다.이후로 로마의 정치 상황은 끊임없이 변해 갔고 팔레스티나에서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의 무력 봉기로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그 속에서도 안티파테르의 아들 헤로데는 로마로 가서 안토니우스의 지지를 얻는 데에 성공하고 기원전 40년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임금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때에는 아직 안티고노스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기원전 37년에는 헤로데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위에 올라 기원전 4년까지 통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임금이었던 헤로데는 이 헤로데 대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해는 기원 1년이 아니라 기원전 4년 이전이라는 이야기지요.헤로데의 통치는 정략적이고 잔인했습니다. 로마의 지지로 유다에서 권력을 잡았던 그가 손해들을 감수해 가면서도 로마의 호의를 잃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두매아 출신이었던 그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성전을 크게 개축하기도 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20절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라고 말하지요. 그것이 헤로데 대왕이 짓게 한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충실한 유다인들은 그를 미워했고, 오히려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유다인들이 그를 지지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를 세바스테라는 이름으로 재건하고 항구를 건설하여 카이사리아라고 명명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히르카노스 2세의 손녀 마리암네와 결혼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하스몬 집안을 경계하고 미워하여 마리암네와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마태오 복음 2장에 나오는, 자신의 왕권이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하는 헤로데의 모습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헤로데 사후에는 그의 세 아들이 왕국을 나누어 통치했습니다. 아르켈라오스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렸는데, 폭정에 불만을 품은 관리들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폐위를 요청하여 결국 아르켈라오스는 기원후 6년에 쫓겨났고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로마 총독에게 맡겨졌습니다. 그 총독들 가운데 하나가 기원후 26~36년에 다스렸던 본시오 빌라도입니다.둘째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베로이아를 통치했고,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의 수난 때에 등장하는 헤로데가 바로 이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아버지 헤로데 대왕처럼 건축 사업에 관심을 기울여 티베리아스를 건설했습니다. 이복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여 요한 세례자에게 비난을 받은 것이 바로 그인데, 그는 39년에 칼리굴라 황제에 의하여 갈리아로 유배되었습니다. 셋째 아들 필리포스는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쪽 지방을 다스렸습니다.필리포스가 세상을 떠난 후 시리아에 귀속되었던 그의 영토와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영토는 결국 헤로데 대왕의 손자인 아그리파스 1세에게 넘어갑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그의 왕권을 인정하고 로마 총독이 다스리던 사마리아, 유다, 이두매아 땅까지 그에게 주었으므로, 그는 결국 헤로데 대왕이 다스리던 지역 전체의 임금이 됩니다(기원후 41년). 아그리파스 1세 자신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사람이었지만 유다인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고, 바로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여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체포하였습니다. 그는 4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44년 이후 유다, 사마리아, 이두매아는 66년까지 계속 로마 총독이 통치했고, 전에 필리포스가 다스리던 영토와 아빌레네 정도만을 아그리파스 1세의 아들 아그리파스 2세가 다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사셨던 시대는 이렇게 정치적으로 복잡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속에서 백성은 무엇을 기다렸을까요?<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6.04.27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연구자 김구정](//cpbc.co.kr/CMS/newspaper/2016/08/rc/648183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연구자 김구정<2> 사제의 길, 평신도의 길 김구정의 동기 신학생인 이종필, 이경만, 김영제, 정수길, 서정도, 이필경. 사진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얼굴과 이름을 대조할 수 없지만 「사제 수품 오르도」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1923년 사제품을 받았다. 1919년 9월 10일 유스티노신학교는 개강을 했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등교하게 됐다. 샤르즈뵈프 교장 신부는 귀가시킨 김구정과 서정도 두 학생이 사제 성소를 잃을까 염려해 방학 동안 그들의 본가를 자주 방문해서 성소를 잃지 않도록 권면하고 타이르곤 했다. 실제로 주교도 신학교와 일반 교회학교에 대해 다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주교는 해성학교 학생들이나 명도회원이 시위로 경찰에 체포됐을 때는 침묵했다. 그러나 경성일보가 유스티노신학교의 학생이 시위에 끼어있었다고 보도하자 체포된 이는 학교를 떠난 예전 신학생이므로 정정하라고 요구했다. 주교는 시위를 막는다기보다는 신학교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학교는 김구정을 지켜내지 못했다. 두 시위 주동 학생은 11월 23일에 거행된 서품식에서 다른 7인의 동반생과 7품 중 1,2품인 수문품과 강경품을 받았다. 수문품은 성당 문을 여닫는 권한과 성당 종을 칠 수 있는 권한이고, 강경품은 성당 안에서 성경과 기도문을 읽을 수 있는 권한이다. 이는 신학반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받는 품이었다. 유흥모, 이약슬은 이날 사제품을 받았다. 교장 신부와의 갈등, 퇴학으로 이어져학교에 다시 돌아온 김구정은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동기 중에 서품이 더 빨리 진행되는 학생들이 있었다. 한편, 드망즈 주교는 1920년 5월부터 한 달 여 동안 로마에서 개최되는 파리외방전교회 대의원회의 대표로 선출됐다. 주교는 회의 참석 후 귀국길에 미국에서 교구 운영비를 모금하는 등 1년여의 여행 계획을 세웠다. 주교는 서품식 다음 날 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이때 우르바노대학에 입학시킬 송경정, 전아로도 데리고 갔다. 한국 교회 최초의 로마 유학이었다.그런데 드망즈 주교가 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인 1920년 4월 22일 샤르즈뵈프 교장 신부가 대구교구 사제들의 피정 미사를 집전하던 중에 쓰러져 선종했다. 페네 신부가 2대 교장으로 임명됐다. 한옥 수류성당을 건축한 신부였다. 그는 또 인명학교를 개교해, 학교 경영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김구정은 페네 교장 신부에게 불만이 많았다. 1920년 봄 새 교장이 오고, 얼마 안 있어 김구정은 신경쇠약으로 집에 가서 치료받게 됐다. 그리고 곧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개강 후에도 그는 당분간 집에서 통학하기로 했다. 11월 3일 교황대사 비온디 대주교의 방문 환영식이 있었다. 신학생들이 대구역 환영식에 참가했는데 김구정도 집에서 통학하던 복장으로 학생들 맨 끝에 서 있었다. 때마침 교장 신부가 학생 행렬을 살피러 왔다가 중절모 차림의 김구정을 발견했다. 사절 주교 일행은 주교관으로 들어가고 신학생들은 학교로 왔다. 교장은 김구정을 교장실로 불러 복장을 지적했다. 김구정은 전임 교장 때는 집에서 다니는 학생은 그런 복장으로 등교했다고 말했다. 교장은 “너는 그런 모자가 쓰고 싶으니 그만 사회로 나가 네 마음대로 하라”면서 그의 퇴교를 명했다. 김구정은 성직품에 오른 사람을 퇴교시키려면 주교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항의했다. 그러자 교장은 부주교에게 품달(稟達, 웃어른이나 상사에게 여쭈어 아룀)하겠다며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다.김구정은 감정이 폭발하여 교장의 태도를 일일이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당신들은 선배 신부들같이 전교를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멸시하려고 온 것 같다. 월남 망국에 있어 전교 신부들이 프랑스 식민화에 앞장섰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다”고 내뱉었다(1978년 본인 진술). 그 일이 있은 지 삼일쯤 후 해성학교에 재직 중인 그의 형을 통해 계산동본당 주임 겸 부주교이던 베르모렐 신부가 김구정을 불렀다. 베르모렐 신부는 부주교의 직권으로 그를 퇴학 처분한다고 알렸다. 그는 부주교에게도 “2품까지 받은 사람을 그만두게 하는 데는 타당한 이유와 결점이 있어야 하는데 무조건 퇴학 처분이라니 불복이오. 주교님이 오신 다음 상세한 퇴학 이유를 설명한 뒤 주교의 직권 처분을 기다리겠소”라고 답했다.주교는 그해 12월 11일 대구교구청에 귀청했다. 당시는 겨울방학이 없던 때여서 수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김구정은 소식을 기다렸으나 새해가 지나도 주교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그는 직접 주교를 찾아뵙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주교는 그에게 성모동굴에 가서 기도한 후에 다시 와서 보자고 했다. 한참 후 주교에게 다시 갔을 때 주교는 김구정에게 신부가 되겠다는 의사를 확인한 후 다음날부터 학교에 다시 나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학생으로서 교장 신부께 과히 당돌했으니 먼저 용서를 청하라”고 했다.개선장군처럼 신학교로 돌아갔지만드망즈 주교는 독일에 점령된 스트라스브루그 교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파리로 이사했고 그는 파리에서 공부했다. 소신학교 시절 그는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강인한 성격과 발랄한 기질 탓에 품행 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여러 차례 퇴학의 위기도 맞았다. 그러나 그는 4학년 때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성당에서 열린 선교사 파견식에 참석한 뒤 ‘새 사람’이 됐다. 그런 주교였기에 김구정에 대해서도 한때의 방황은 수정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김구정은 그 길로 ‘개선장군인 양 기쁜 마음으로’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주교의 말을 전하고 용서를 청하러 왔다고 했다. 교장은 당가신부인 쥴리앙 신부를 불렀다. 두 교수 신부는 논의했고, 구내전화로 주교에게 문의했다. 그때 교장실 앞에 있던 김구정의 고해 사제인 김승연 신부가 그에게 다가왔다. “이냐시오, 그만 세속으로 돌아가. 내가 들으니 주교가 이냐시오를 학교로 오게 하면 두 분이 학교를 떠나겠다는구나.… 열심히 살면 천주께서 다 아시는 일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위로했다. 김구정은 그만 물러 나왔다. 신부들은 성소의 문제를 말했고, 김구정은 이를 독립운동에 대한 억압으로 해석해 응대했다. 이들의 대화는 서로 초점이 달랐다. 이 사실이 항간에 퍼지면서 교우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다. 혹자는 그가 3ㆍ1 만세 운동 때문에 퇴교당했다고 하고, 혹자는 품행 문제로 제적됐다고 했다. 젊은 분노는 타고 있었다. 그는 아직 성직의 길과 독립운동 길의 양립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3ㆍ1 만세 시위가 무위로 돌아간 뒤 김구정은 신학교에 회의를 품었을 수 있다. 다만 자신이 미처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정리할 수 없었을 뿐. 유스티노신학교에는 그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이해하고 확신할 때까지 그와 시간과 노력을 함께해 줄 교수가 없었다. 그 또한 그런 학교의 입장이 마뜩잖았다.김구정은 1921년 1월 초 유스티노신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다. 꼬마 사제 후보들이 신학교의 ‘위대한 어려움’을 견디고 12년 과정을 마치고 사제품을 받게 되는 숫자는 당시 입학 때의 4분의 1 정도였다. 학업 부진, 동상, 각기병 등의 이유로 울면서 보따리를 싼 학생이 남은 학생보다 훨씬 많았다. 학생들은 매일 오전 5시 30분,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에 “주님을 찬송할지어다”로 시작해 빡빡한 일과를 소화했다, 수도원과 같은 엄한 규칙이었다. 이들은 잠자리에 들면서 훌쩍거리는 동료들의 울음소리를 몰래 들었다. 서로 말은 안 하지만, 막연하고 긴 사제의 길 문턱에서 밤에는 집이 그리운 어린이들이었다. 친구가 죽어나갈 때는 무섭고 집에 가고 싶기도 했다. 그가 지내온 지난 10년의 생활이었다.겨울바람이 온몸을 에어 왔다. 자신에게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도 세상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학교조차도 그 앞에서 평온했다. 천둥 번개라도 쳐야 하는 것 아닌가?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가 숨을 거둘 때 하늘이 캄캄해진 것은 하느님의 위로였나 보다. 붉은 벽돌로 증축하여 새로 넓혀진 공간이 확대돼 그의 눈에 들어왔다. 1911년 대구교구에서는 16명이 용산신학교에 입학했다. 그중 1명은 입학하자마자 퇴교당했고, 학업 과정 중 2명이 탈락했다. 그래서 대구에는 13명이 함께 내려왔다. 그중 이종필, 이경만, 김영제, 정수길, 서정도, 이필경 등 6명이 남았다. 그들은 10년 동안 소년의 꿈을 함께 다졌으나, 이제 서로 멀리서 혹은 돕고, 혹은 가끔 견주면서 고비마다 가지 않은 길을 서로에게 비출 것이다. 김구정은 1921년 1월, 23세의 나이로 세상에 새로 던져졌다. 지금은 깨닫지 못해도 그의 길은 따로 있었다. “주여, 말씀하소서.” 백영민2016.08.10
![[금주의 성인] 7월 23일: 성 요한 카시아노](//cpbc.co.kr/CMS/newspaper/2015/07/rc/582225_1.0_titleImage_1.jpg)
[금주의 성인] 7월 23일: 성 요한 카시아노 ▨ 7월 23일: 성 요한 카시아노(St. John Cassian)360~435년, 소 스키티아(현 루마니아) 출생 및 갈리아(현 프랑스) 선종, 수도원장.요한 카시아노 성인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에게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특히 두 교회 수도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성인이 쓴 「제도집」(Institutiones)과 「담화집」(Conlationes)은 후대 수도자들에겐 교과서와 같은 수도생활 지침서였습니다. 당시 동방교회에선 이집트 사막을 중심으로 홀로 수도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았고, 서방교회에선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공동체를 이뤄 수도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인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도 개인 수도생활에 집중할 수 있는 수도생활을 추구했습니다. 두 교회 수도생활의 특징과 장점을 조화롭게 엮어낸 것입니다. 이러한 성인의 가르침은 두 교회 수도생활에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성인은 소 스키티아 지역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수도생활을 동경했던 성인은 친구와 함께 베들레헴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수도생활의 기초를 닦은 성인은 좀더 깊은 영적 체험을 하기 위해 이집트로 떠났습니다. 당대에 이름을 떨친 여러 수도자를 찾아다니며 영성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또한 동방교회 중심지 콘스탄티노플과 서방교회 중심지 로마에 머물면서 동양과 서양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접했습니다. 성인은 이후 갈리아 마르세이유에서 성 빅토르 남자수도원과 성 살바토르 여자수도원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동·서방의 교회 장점을 아우른 수도지침에 따라 수도원을 운영하고 수도자를 양성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의 ‘수도규칙’ 역시 요한 카시아노 성인의 이 같은 지침에 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요한 카시아노 성인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리 수도생활을 모범적으로 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단식과 철야기도, 성경 공부, 재산이나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 따위는 완덕이 아니라, 완덕에 이르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단식과 철야기도, 성경 공부, 가난 등을 자랑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사랑을 완성한 사람이야말로 자기 안에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며, 그의 정신은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갑니다.”(「담화집」 중에서)▨ 7월 19일: 성녀 유스타와 루피나 3세기경, 스페인 세비야 출생 및 순교.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난 자매는 가난하지만 신앙심 깊은 부모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성녀네 집은 도자기와 그릇 등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어느 날 이교인들이 축제에 사용할 그릇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축제는 우상숭배나 다름없는 자리였습니다. 자매는 가톨릭 신자로서 이교인 축제에 참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릇 판매를 거절했습니다. 두 성녀를 괘씸히 여긴 이교인들은 감옥에 가뒀고 배교를 강요했습니다. 고문관들은 달군 쇠로 성녀 살을 지지고, 물과 음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언니 유스타는 감옥에서 먼저 숨졌고, 동생 루피나는 화형당했습니다. 자매는 세비야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cpbc2015.07.16

젊은 감각으로 녹여낸 ‘순교 정신’ 전했다서울 오류동본당 순교 주제 글짓기 수상 젊은이들, 평신도 주일 미사 강론 맡아 평신도주일을 맞아 주일 강론을 한 서울 오류동본당 젊은이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청년 윤설민씨, 조선혁, 정주형, 전준탁, 박예린, 손정원 학생. 류지웅씨는 함께하지 못했다. 이정훈 기자 “한 차례 배교했던 김윤덕 복녀는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형장으로 돌아가 순교의 칼날을 맞습니다. 그분 용기를 보며 제 신앙생활을 다시 돌아봤습니다.”15일 서울 오류동본당(주임 이동호 신부) 교중 미사 시간. 평신도 주일을 맞아 어른 신자 대신 건장한 청년이 독서대에서 강론(평신도 담화)을 했다. 평신도 주일이면 주로 사목위원이나 어른 신자가 강론하는 관례(?)를 깨고 교중 미사에 젊은이가 제대에 오른 것이다.청년 윤설민(미카엘)씨는 강론에서 “어느 순간 뜨뜻미지근해진 저의 신앙생활이 자칫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음을 느낀 적도 있다”며 “김윤덕 복녀의 순교정신과 용기가 귀감이 됐다”고 발표했다. 어른들은 기특한 젊은이의 신앙관에 귀 기울여주며 공감의 박수를 보냈다.그런데 이날 강론한 이는 윤씨만이 아니다. 본당 중고등부 주일학교 학생부터 청년까지 모두 7명이 토요일 저녁 미사부터 주말 모든 미사 강론을 한두 사람씩 나눠서 했다.이들은 모두 지난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본당이 ‘순교’를 주제로 실시한 글쓰기 대회에서 수상한 젊은이들이다. 본당은 ‘교회 미래’인 이들에게 평신도 주일 강론을 통해 각자 신앙을 직접 선포하는 시간까지 제공한 것이다. 이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성소를 계발하고 젊은이 신앙생활을 견고하게 하려는 뜻이 담겼다.‘젊은이 강론자’들은 자신이 쓴 글을 요약하고, 신앙관도 밝혔다. 박예린(에스테르, 중1)양은 신앙 서적을 읽고 박해가 왜 일어났는지 알아봤고, 손정원(안나, 중1)양은 신앙을 튼튼히 하려면 “성경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정주형(바오로, 중3)·조선혁(알베르토, 고2)군은 ‘순교’, ‘희생’을 주제로 적어 내려간 시를 낭독해 박수를 받았다. 성 김대건 신부에 관해 글을 쓴 전준탁(안토니오, 중3)군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수상해 강론했다. 비결을 묻자 “자기 신앙을 솔직히 적으면 된다”고 귀띔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부터 청년 미사 형·누나들 앞에서 생애 첫 강론을 해낸 이들은 포상으로 내년 초 일본 나가사키 성지순례도 다녀온다.이동호 주임 신부는 “입시와 취업으로 바쁘게 사는 이들이 이렇게 신앙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 오히려 고맙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jdarc@pbc.co.kr 백영민2015.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