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가 누구시기에 우리는 열광하는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범은 예수님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예수님을 닮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려 부단히 노력한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모두 예수님처럼 살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대체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이토록 우리는 예수님 ‘바라기’가 되는 것일까. 예수, 온전한 인간 온전한 하느님 예수, 온전한 인간 온전한 하느님마이클 케이시 지음/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여자 수도원 옮김/성바오로/2만 원“나자렛 예수님에 관한 가장 명료한 신앙 선언 중 하나는 그분이 동시에 온전히 거룩하고 온전히 인간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신학자 마이클 케이시(호주 타라와라 트라피스트 수도원) 신부는 5세기 후반 사용된 라틴어 신경의 한 대목을 빌려 예수님을 소개한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단 하나의 인격체 안에 일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위는 인간의 행위이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의 행위가 된다. 저자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신비를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육화를 기쁘게 이해하고 감사하지 못한다면 건전한 영성을 세울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19쪽).이와 함께 저자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의미를 인간 본성 그 자체가 너무 귀해 하느님께서 그 본성을 통해 인간으로 살고 행동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인간이 모순투성이자 한계를 지닌 존재가 아님을 명확히 한 것이다. 저자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서, 예수님과 같은 인간인 우리가 하느님 은총을 통해 하느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전해 주고 있다. 세례받는 예수님, 씨 뿌리는 예수님, 배우는 예수님, 예언자 예수님, 유혹받는 예수님 등 다양한 삶의 순간마다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을 함께 통찰하며,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춰준다.“우리는 자신들의 경험을 인지하고 성찰함으로써 예수님을 날로 더 이해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에 드러나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더 깊이 깨달으면서 그 빛으로 우리 자신의 삶도 의미가 풍성해진다”(7쪽).책을 관통하는 영성은 시토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저자가 속한 트라피스트회가 시토회의 한 수족이기 때문이다. 시토회는 11세기 프랑스에서 베네딕토 성인 규칙을 따르며 수도 생활 개혁과 쇄신에 앞장섰다. 예수-새 시대를 여심송봉모 지음/바오로딸/1만 5000원“예수님은 역사의 중심이시다. 인류 역사는 그분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BC)과 기원후(AD)로 나뉜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에서뿐 아니라 개인 역사에서도 중심 역할을 하신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존재의 근거요, 삶의 지평으로 삼는다.”송봉모(예수회) 신부는 이처럼 전 인류는 물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중심에 우뚝 선 예수님 활동에 집중했다. 흔히 ‘공생활’(公生活)이라고 말하는 시기의 시작을 다뤘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간 지낸 다음,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부분까지다. 송 신부가 5부작으로 기획 중인 예수 시리즈 두 번째 권이다.예수님 활동을 해설하는 데 있어 송 신부는 다양한 자료를 아낌없이 펼쳐 보인다. 성화, 지도, 사진 등은 물론이고 예수님 생애를 다룬 문학 작품 인용도 풍부하다. 송 신부만의 시각이 담긴 묵상도 빠지지 않는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신(마르 1,12; 마태 4,1) 부분에서 송 신부는 광야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곳임을 일깨운다. “광야라는 뜻의 미드바르의 어원은 ‘하느님 말씀’을 의미하는 다바르다. 광야는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인간은 그 말씀을 듣는 곳이다. 태고의 적막이 감싸고 있는 광야에서, 인간의 정신을 혼란시키는 감각적 쾌락이나 자극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광야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다”(106쪽).송 신부는 이어 현대인들에겐 특히 ‘광야’가 필요하다며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빠져 사는 이들이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서 자기만의 광야로 나가야 한다고 당부한다. 2000년 전 예수님 모습에서 오늘을 사는 이들을 위한 삶의 방향과 의미를 길어 올린다. 송 신부는 “이 책을 읽는 분들이 더욱 근원적이고 영원한 삶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들어가는 글의 마지막에 이러한 격언을 남겼다. “한 번뿐인 인생, 순식간에 지나가리니/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만 남으리라.-존 스토트-”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백영민2016.02.17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55>](//cpbc.co.kr/CMS/newspaper/2016/02/rc/619763_1.0_titleImage_1.jpg)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 성령의 신비로운 활동 사도로서 흔들리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에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확신이 자리하고 있다.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 스펠트 작 ‘그리스도의 부활’. 출처=「아름다운 성경」 교황은 우리가 선교 열정을 지니고 복음의 선포자로 활동할 수 있는 세 번째 동기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 성령의 신비로운 활동’을 제시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 성령께서 복음 선포자를 돕는다는 의미다. 도움의 방법에 대해서는 ‘신비로운 활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때에 따라서는 그 활동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풍요로운 결실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실을 ‘신비로운 결실’이라고 표현했다(280항 참조). 이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복음 선포자의 가슴 깊은 곳에 있어야 한다. 그 어떤 장애에도 꿋꿋이 사도로서 땅끝까지 나아가는 복음 선포자에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신다는 확신과 그분 성령께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 중에 계시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교황은 이를 ‘신비 감각’이라고 소개하면서 설명했다. “이는 사랑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이들은 모두 좋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요한 15,5 참조). 세상에 현존하는 하느님 나라교황은 먼저 복음 선포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았다. 현실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의 표지가 감추어져 보이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한다. 체념이나 절망 혹은 회의에 빠져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선포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죽음을 물리치신 분이고, 모든 사람의 절망과 회의 속에서도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 복음에 따르면 첫 제자들이 설교하러 갔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여러 가지 표징으로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도록, 이를 체험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희망의 깊은 원천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도움을 아낌없이 주실 것입니다”(275항). 교황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 현존하고 곳곳에서 여러 다른 방식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복음 말씀을 환기시키며(287항), 하느님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활동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촉구하였다. “하느님 나라는 매우 큰 나무로 자라는 작은 씨앗과 같고(마태 13,31-32 참조), 밀가루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과 같으며(마태 13,33 참조), 가라지들 가운데에서 자라는 좋은 씨와 같고(마태 13,24-30), 언제나 우리를 기뻐하며 경탄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 나라는 여기에 있고, 다시 올 것이고, 새로 꽃피우고자 싸웁니다”(278항).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이 씨앗이 지금 자라고 있고 언젠가 큰 나무로 성장하여 우리들 모두가 그 가지들 속에 깃들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교황은 이를 ‘신비 감각’이라 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 4,7).성령에 대한 확고한 믿음교황의 권고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의 모든 행동, 다른 이들을 향한 진심 어린 관심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행동은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아낌없는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고통스러운 인내는 쓸모없지 않습니다.…이따금 우리의 노력이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교는 거래나 투자도 아니고 심지어 인도주의적 활동도 아닙니다. 광고에 따라 모인 관객의 수를 세는 공연도 아닙니다. 선교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며, 그 무엇으로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성령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려 하지 않고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279항).교황은 끝으로 성령께 대한 복음 선포자들의 신앙을 강조했다. 선교 열정이 늘 살아 있으려면 성령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로마 8,26).…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께 간청하여야 합니다.…성령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 권고문은 이를 ‘신비롭게 결실’을 얻는다고 설명했다(280항 참조). 백영민2016.02.17
![[성경 속 도시]<3>스켐](//cpbc.co.kr/CMS/newspaper/2014/01/rc/492333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스켐야곱의 가나안 첫 정착지, 요셉이 묻힌 땅 오늘날 '나블루스'라 불리는 스켐의 사마리아인들이 속죄절에 양들을 죽어 번제물로 바치고 있다. 【CNS 자료사진】 '여행'.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단어다. 여행을 떠나면 일상을 벗어난다. 그리고 우리를 수 천 년 전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으로 인도한다. 그러면 길 위의 돌멩이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평화신문 지면을 빌려 세 번째로 여행할 곳은 신성한 도시 '스켐'이다. 사마리아 지방에 위치한 스켐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65㎞ 떨어져 있고 나자렛으로 가는 길에 있다. 스켐은 '목덜미'라는 뜻인데, 그리짐 산과 에발 산을 양쪽 어깨에 메고 있는 듯한 모양새 때문인 것 같다. 스켐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통하고 팔레스티나를 관통하는 곳으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집트에서 요르단과 시리아를 가려면 예루살렘을 거쳐 스켐까지 외길이고 스켐에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켐은 예로부터 대상들이 모여드는 요지였다. 스켐은 연평균 강우량이 적당해서 고대로부터 농사짓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평지를 둘러싼 산비탈에는 포도,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가 경작됐고, 목축에도 좋은 풀밭이 많이 있었다(창세 37,12-13).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스켐에는 기원전 4000년께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스켐의 넓은 성전과 큰 성문들은 기원전 18~17세기께 힉소스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다 스켐은 기원전 1550년께 이집트인들에 의해 파괴됐다. 이집트 점령 이후 도시의 규모는 축소됐다. 스켐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경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성경에서 스켐의 역사는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한다. 스켐은 가장 먼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에 오는 장면에 등장한다.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창세 12,6). 스켐의 성소에 나타나신 주님께서 아브람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아브람은 주님을 위해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창세 12,7 참조). 야곱은 외삼촌 라반을 떠나 형 에사오와 헤어져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스켐에 정착했고(창세 33,18), 야곱의 딸 디나가 스켐의 족장 하모르의 아들에게 겁탈당했을 때 오빠 시메온과 레위가 스켐에 들어가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다(창세 34장 참조).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차지한 뒤 요셉의 유골을 스켐에 안치했다(여호 24,32). 이후 스켐은 요셉의 맏아들인 므나쎄 지파의 땅이 됐다(여호 17,1-7).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두고 열두 지파를 스켐에서 소집한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여호수아 24,1). 이후 스켐은 12지파의 종교적 중심지로 억울한 죄인들이 피신할 수 있는 성읍 중 하나로 뽑혔다(여호 20,7). 솔로몬 왕이 사망한 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기원전 931년) 북 이스라엘 왕권을 장악한 느봇의 아들 예로보암은 스켐을 첫 번째 수도로 삼았다(1열왕 12,25). 그러다 그는 곧 그의 가족이 거주하는 티르차에 새 수도를 세운다(1열왕 14, 17).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스켐의 주민들을 잡아갔다. 그리고는 이방인들을 이곳에 이주시켰다. 이후 남쪽 유다인들은 스켐이 속한 사마리아를 '이방인의 땅'으로 취급했다. 기원전 4세기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요충지인 스켐을 군사 기지로 만들었다. 이후 기원전 123년께 유다의 새 왕조인 하스모네아 왕조의 요한 히르카노스 1세에 의해 스켐은 완전히 파괴됐다. 기원전 72년 로마는 스켐을 재건해 '플라비아 네아폴리스'라고 불렀고,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발음에 따라 지금까지 '나블루스'라고 한다. 스켐은 오늘날 유다인에게 예루살렘처럼 거룩하게 여기는 중요한 도시이다. 1948년부터 요르단에 속했던 스켐은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 땅이 됐다. 스켐은 오늘날 성지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성경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이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교구장 수석비서) cpbc2014.01.14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참된 행복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시나마 하느님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겠습니까? 또한,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한 후에 즉시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어떤 감정을 느끼겠습니까? 아마도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최고이자 최상의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사람들에게 가르치실 때 이 최고이자 최상의 행복을 이미 선언하신 바 있는데(마태 5,3-12 참조) 이것을 ‘진복(眞福) 선언’ 혹은 ‘참된 행복’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참된 행복을 선언하는 문구를 보면 “행복하여라, ~한 사람들! ~일 것이다”로 구성돼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덕행 실천으로 공로를 쌓으면 ‘~이’ 되는 미래의 상급이나 때로는 현세의 상급을 선물로 받는다는 내용입니다.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신학대전」에서 참된 행복을 영적 여정의 발전 단계와 연관 지어 의미 있는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즉 토마스는 여덟 개의 참된 행복을 설명하기 위해 ‘관능적인 삶’과 ‘활동적인 삶’ 및 ‘관상적인 삶’의 세 범주를 제시했습니다. 관능적인 삶은 다가올 행복에 장애물이고, 활동적인 삶은 다가올 행복의 특성이며, 관상적인 삶은 다가올 행복의 진수입니다.먼저, 첫 세 개의 참된 행복은 관능적인 삶의 관점에서 부와 영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난을, 탐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슬픔을, 그리고 분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유함을 지닐 수 있을 때 다가올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참된 행복은 활동적인 삶의 관점에서 이웃과의 적극적인 삶 속에서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말라야 하고, 인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비로워질 때 다가올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다음 두 개의 참된 행복은 관상적인 삶의 관점에서 순수한 관상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이웃과 잘 지내기 위해 평화를 이룰 때 다가올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 참된 행복은 앞선 일곱 개의 참된 행복의 내용을 종합해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관능적인 삶은 거짓된 삶으로써 악습을 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삶에 해당합니다. 활동적인 삶은 좋은 덕행을 실천하여 발전시키는 삶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관상적인 삶은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시는 삶에 해당합니다. 특히 참된 행복을 영적 발전 단계로 해석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를 루카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와 달리 예수님께서 평지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네 개의 참된 행복 선언 이후에 네 개의 불행 선언을 말씀하십니다(루카 6,20-26 참조). 불행 선언에서 ‘~한’ 사람은 아직까지 끊어야 할 악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영적 발전의 여정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참된 행복은 습득적인 특성을 지닌 초자연적 주입 덕행보다는 성령께서 원하실 때 베푸시는 은사의 특성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영혼에게도 작용하는 은총이나 성령의 역사하심보다는 잘 준비된 영혼에게 어느 순간 하느님 나라를 지상에서 미리 맛보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따라서 참된 행복은 성령의 선물로, 성령의 열매들 중에서 가장 최상급의 열매를 훨씬 뛰어넘는 매우 완전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 중에 누리게 되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믿음을 굳건히 하도록 격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공로 없이 무작정 참된 행복이란 상급을 바라는 자세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고, 우리의 공로마저 하느님 은총의 범주 안에 있으니 겸손하게 감사하게 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백영민2016.02.03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하느님 신앙의 수호자’ 엘리야 예언자 후예들](//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3421_1.1_titleImage_1.jpg)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하느님 신앙의 수호자’ 엘리야 예언자 후예들1. 가르멜 성인들에게 공통된 영성적 특징들① 가르멜 수도자들은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지니고 있어 ‘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녀의 형제들’이라 불렸다. 이번 호부터 약 1년간 우리는 네 분의 가르멜 성인들(십자가의 성 요한, 성녀 소화 데레사, 성녀 에디트 슈타인, 삼위일체의 복녀 엘리사벳)의 생애와 영성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분들의 영성을 살펴보기 전에 이분들을 그 근본에서부터 이해하게 해주는 핵심적인 요소들을 먼저 나눠볼까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르멜 수도회’라고 하는 영적 토양입니다.가르멜 수도회의 시작많은 가르멜 성인들의 원류가 되는 가르멜 수도회는 12~13세기 십자군 원정과 더불어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지면서 시작했습니다. 당시 성지를 수호하기 위해 왔던 기사들 중에 하이파의 가르멜 산 골짜기로 들어가 은수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혼자 은수생활을 하다가 그 수가 많아지자 그들 가운데 리더인 ‘브로카르도’를 중심으로 공주 은수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순수한 하느님 신앙의 수호자였던 엘리야의 후예이자 성모님의 형제들로 자처하며 당시 예루살렘의 알베르토 총대주교로부터 삶의 규범을 청해 「원 회규」를 받았습니다. 이 「원 회규」는 가르멜의 은수자들뿐만 아니라 성지 전역에 그리고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생활하던 은수자들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됩니다. 다시 말해 성지 곳곳에 흩어져 살았던 은수자들이 가르멜의 은수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로 모여 가르멜 수도회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이들이 모토로 삼았던 영성은 크게 네 가지로 집약됩니다. 이 네 가지 특징은 훗날 가르멜 성인들의 영성에 공통된 자양분을 전해주었습니다.엘리야 예언자의 후예들무엇보다도 가르멜 수도자들은 자신을 엘리야 예언자의 후예로 자처했습니다. 일찍이 가르멜 산은 엘리야 예언자가 활동했던 주 무대자 바알 사제들과 맞서 경합을 벌여 순수한 야훼 신앙을 지켜냈던 곳입니다. 엘리야 이후 야훼 하느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신앙을 살고자 했던 수많은 은수자들은 구약 시대 내내 가르멜 산을 찾아왔고 신약 시대로 들어와서도 적지 않은 은수자들이 가르멜 산에서 주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을 불태우며 살았습니다. 가르멜 수도회의 모토인 “저는 만군의 주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에 불타고 있습니다”(1열왕 19,10)라는 구절에는 하느님을 향한 엘리야의 열정과 그분에 대한 깊은 체험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듯 가르멜의 영적 전통에는 ‘엘리야’로 대변되는 예언자적 정신이 그 근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가르멜 산 성모님의 형제들또한 가르멜 수도자들은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녀의 형제들’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초창기 가르멜 수도자들은 신약의 새 하와이신 성모님에게서 완전한 성성(聖性)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성모님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결정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온전히 순명하며 그분의 말씀을 잉태한 여인이자 성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들은 직관적으로 이 점을 간파했으며 그래서 수도회 시작부터 그분의 ‘종’이자 ‘아들’ 그리고 ‘형제’로 표방하며 그분의 품 안에서 고유한 성모 신심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성모님을 ‘여왕(Regina)’이자 ‘어머니(Mater)’ 그리고 ‘누이(soror)’로 고백하며 자신들의 영성 생활의 안내자요 수호자로 그분을 공경했습니다.가르멜 영성의 근간 ‘거룩한 독서’가르멜 수도회는 창립될 당시부터 성경의 전통 안에 뿌리를 둔 공동체였습니다. 가르멜 산에서 은수생활을 해오던 초창기 회원들은 ‘성경’을 자신들의 삶의 근본 바탕으로 여기며 밤낮으로 성경을 묵상해 왔습니다. 이러한 성경 묵상의 전통은 가르멜 수도회 영성의 근간이 됐습니다. 초기 회원들이 사용한 「원 회규」에는 다음과 같은 규범이 있습니다. “각자는 다른 정당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은 한, 자기 수방이나 그 근처에 머물며 주님의 법을 밤낮으로 묵상하고 깨어 기도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 묵상 규범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즉 ‘거룩한 독서’라는 형태로 구체화됐습니다. 이런 거룩한 독서의 영향으로 인해 후대의 가르멜 성인들은 성경을 못자리 삼아 자신들의 고유한 영성을 활짝 꽃피웠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또한 가르멜 수도자들의 삶의 바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인식하고 가르멜에서의 수도생활을 그 구체적인 실현 과정으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특히 그들은 가르멜을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영적 전투’를 치루는 전장(戰場)으로 여기며, 사도 바오로의 권고처럼(에페 6,11 참조), 정의의 띠로 허리를 동이고 거룩한 생각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의 칼로 영적 전투에 임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권고하신 완전한 자,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필자 약력▲ 1998년 수품 (맨발 가르멜 수도회)▲ 2001년 교황청립 테레시아눔 대학원, 신학적 인간학 전공, 신학박사▲ 2006년 아빌라 신비신학 대학원, 신비신학 및 가르멜 영성 전공▲ 2007~2011년 아빌라 신비신학 대학원 교수▲ 2012년~현재 대전 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여러 신학총서를 통해 다양한 교의신학 교과서들을 출간했으며 「가르멜 총서」와 「가르멜의 향기」 시리즈를 창간, 다양한 가르멜 영성 서적들을 출간하고 있다. cpbc2015.04.01
![[평화칼럼] 정치 지도자의 덕목](//cpbc.co.kr/CMS/newspaper/2015/12/rc/609584_1.0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정치 지도자의 덕목이창훈 알폰소(편집국장)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에 ‘일’ 났다. 1년 3개월 전 당을 함께 출범시킨 공동대표 안철수 의원이 탈당했다. 그는 13일 탈당 선언 기자회견에서 “새정치연합을 혁신하고 또 혁신해서 국민이 믿고 정권을 맡길 수 있는 정당으로 바꾸라는 염원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같은 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아무리 파도가 높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총선 승리에 이르는 새정치연합의 항해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표현은 다르지만 두 정치 지도자가 내세우는 목표는 동일하다. 내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하고 2년 후 대선에서도 승리하겠다는 것이고, 그러려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정당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실현해 나가는 방식이다.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 상태로는 가능성이 없으니 혁신하고 또 혁신해야 한다는 게 안철수 전 공동대표의 주장이라면, 현 체제의 기본을 유지하면서 필요한 쇄신과 보완을 통해 총선에 승리하자는 것이 문재인 대표의 입장인 듯하다. 이렇게 목표 달성을 위한 접근 방식이 다르니 두 대표가 갈라설 수밖에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또 한 가지 살펴봐야 할 것은 접근 방식이 다른 이유에 관해서다. 분명한 사실은 여기에는 두 지도자 나름의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의(大義)만이 아니라 대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챙겨야 하는(?) 실리(實利)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계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는 이와 관련한 훌륭한 예화가 있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루카 14,31-32).이 예화에 비춰볼 때, 제1야당의 두 지도자는 서로 자신에게 승산이 있음을 확신하는 듯하다. 아니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라는 강한 뚝심으로 밀고 나가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무모한 뚝심이야말로 자신은 물론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에 오히려 해악을 끼치고 국민에게도 치명적인 독소가 될 수 있다. 자신이 실리보다 대의를 더 중요시한다고 확신하고 있다면 더더욱 피해야 할 것이 이런 무모한 뚝심이다. 필자는 새정치민주연합을 편들어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새누리당을 생각해서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다만 정치 지도자들이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정치라는 것이 단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정권을 잡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듯이, 정치의 본령도 인간이다. 정치의 주체도 인간이지만, 대상과 특히 무엇보다 목적이 인간이다. 참으로 인간을 위한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펴고자 한다면, 정치 지도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은 하나다. 국민을 위해 욕심을 비우고 기득권을 비우고 자신을 비우는 일이다. 그런데 이게 어디 정치 지도자에게만 해당할까.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은 이 덕목의 가장 뚜렷한 현현(顯現)이다. 그 성탄이 가까이 왔다. 평화신문2015.12.16
![[성경 속 생명 이야기] 13. 생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cpbc.co.kr/CMS/newspaper/2014/05/rc/507828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생명 이야기] 13. 생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민남현 수녀(엠마, 성바오로 딸 수도회)사람 사이의 관계가 여러 면에서 걱정스러운 위기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개인, 공동체 그리고 나라 간의 관계가 팍팍한 경제 이득의 논리로 계산돼 서로 멀어지고 가족 간 관계마저도 형제애보다는 실리적 목적으로 포장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우리를 타인에 대해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고 무관심한 방관자가 되게 합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와 서로의 관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인간에게 제일 먼저 일러주신 계명을 떠올리고 그 계명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사업에 인간이 참여할 수 있도록 부부의 사랑을 통해 자손이 태어나게 하시고 거룩하고 의롭게 세상을 관리하도록 인간에게 통치권을 주셨습니다(지혜 9,1-3). 세상을 번성케 하는 능력은 인간 스스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협력자로 우리를 택하신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이 사명은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창세기 저자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일러줍니다.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창세 4,1). 모든 생명은 하느님 은총의 열매임을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곧 생명의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아이를 낳은 육신의 부모는 그 생명을 관리하는 협력자라는 말입니다. 일곱 아들을 믿음의 증거인 순교로 하느님께 봉헌한 위대한 신앙 어머니의 증언도 이를 잘 설명해줍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2마카 7,22-23). 그러므로 자녀의 생명을 하느님의 선물로 귀하게 받아들이고 신앙 안에서 잘 성장시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받은 첫 번째 계명을 지키는 중요한 일입니다(시편 127,3; 128,3-4 참조). 요즘 심각한 사회문제인 낙태와 폭력과 살인은 하느님의 첫 번째 계명을 거스르는 행위임이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은 소홀히 다루어질 수 없는 가장 귀한 하느님 은총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에서부터 시작해 사회에서 효율적인 생산성에 이바지할 수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인권을 존중하는 행위에까지 연관됩니다. 최후 심판에 대한 예수님 가르침 가운데 이에 대한 구체적 말씀이 제시되는데 이는 특히 경제성만을 중시하고 보이는 능력을 최고 가치로 삼는 현대인에게 날카로운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4-36). 이렇게 인간은 타인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숨결을 받은 첫 순간부터 숨이 멈추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삶의 과정을 하느님 섭리에 맡기고 평화롭고 기쁘게 사는 것(시편 16,5)이 협력자로 부름 받은 우리의 임무에 충실히 응답하는 길입니다. <평화신문·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공동기획>cpbc2014.05.01
![[가톨릭 리빙]봄내음 맡으며 성지순례길 열차에 몸 실어 볼까](//cpbc.co.kr/CMS/newspaper/2016/04/rc/631266_1.5_titleImage_1.jpg)
[가톨릭 리빙]봄내음 맡으며 성지순례길 열차에 몸 실어 볼까[카드뉴스] 코레일과 떠나는 성지순례 <상> ? 원주교구 제천 배론성지봄꽃이 만발한 떠나기 좋은 계절, 서울 청량리역에서 ‘정선 아리랑 열차’를 타고 아우라지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코레일이 운영하는 이 관광열차는 창이 넓어 벚꽃과 개나리 등 꽃들의 향연을 관람할 수 있다. 오랜만에 운전대를 놓고, 온 가족이 함께 열차를 타고 성지순례를 떠나는 건 어떨까. 우리는 박해시대의 순교자를 만나러 갈 수는 없지만 순교자들의 숨결이 머물렀던 순교의 땅을 순례할 수 있다. 열차를 타고 가면 좋은 성지순례지와 인근에 신자가 운영하는 맛집을 두 번에 걸쳐 소개한다배론성지에 순례를 온 한 부부가 기도하고 있는 모습.배론성지는 1년에 10만여 명의 순례자들이 찾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우리나라 첫 신학교인 성 요셉신학교와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이 조선 교회의 박해 상황을 알린 백서를 쓴 토굴,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신앙의 요람이다. 한국 초기 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산골 마을로, 화전과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운 교우촌이다. 제천역에서 내려 대중교통을 이용해 배론성지 입구에 다다르자, 황사영 순교자의 글을 새겨 넣은 나무 표지판이 보인다. “이 몸은 백번 생각하여도 이 천주교는 구세(救世)의 양약(良藥)이라 생각되어 성심껏 믿어왔습니다.” 성지를 가로지르는 개울을 따라 올라가니, 한옥으로 지은 배론성당이 나온다.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순례자들의 성가가 성지에 울려 퍼진다. 성지 곳곳에는 개나리와 목련, 수선화가 꽃봉오리를 터트렸다. 배론은 치악산 동남 기슭의 구학산과 백운산의 산봉우리가 둘러싼 계곡 양쪽의 산골 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최양업 신부 바다의 별 대성당’과 너른 잔디밭 건너편에 있는 성 요셉신학교로 발을 옮겼다. 성 요셉신학교는 1855년 장주기(요셉, 1803~1866) 성인의 초가에 설립한 성직자 양성 학교.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로 장주기 성인과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인 교장 푸르티에 신부, 교사 프티니콜라 신부의 순교로 문을 닫게 된다. 한옥으로 지어진 신학교는 몸을 낮춰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천장이 낮고 부엌에는 가마솥도 걸렸다.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는 그 작은 초가에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 교육에 전념했다. 성 요셉신학교 옆에는 황사영 순교자 현양탑과 황사영 백서 토굴이 있다. 황사영 순교자가 1801년 2월 말부터 9월까지 신분을 감추고 명주천에 백서를 썼던 토굴 앞에는 수선화들이 꽃을 피웠다. 그가 은신했던 토굴은 볼품없고, 왜소했다. 성인 두 명이 누워서 잘 수 있는 좁은 공간에서, 옹기를 쌓아 출입구를 은폐해 숨어 살았던 그의 신앙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황사영 토굴을 지나서 겟세마니 동산으로 올라가면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묘소로 올라가는데 경사진 산 비탈길에서 호흡이 가빠진다. 호젓한 산속에 자리 잡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묘소 앞에 섰다.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은 최 신부는 10여 년간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를 오가며 신자 4000여 명을 만났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성직자 묘소에 들렀는데, 이 세상을 떠난 한 사제의 비석에 새겨진 성경 구절에 마음이 오래 머문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루카 10,42)▶교통편 : 청량리역에서 열차를 타고 제천역에 하차한다. 본당에서 전세 열차 순례를 할 경우에는, 1년 전부터 늦어도 4개월 전까지는 코레일 충북본부 여행센터(043-641-2707)에 예약하면 된다. 단, 최소 인원이 432명이어야 한다. 전세 열차를 이용하면, 제천역에서 배론성지(관광지 경유)까지 들어가는 관광버스를 지원해 준다. 제천 중앙공원 앞에서 배론성지로 들어가는 시내버스(852번)를 이용해도 된다. 시내버스는 하루에 4번(5:45/8:10/13:00/18:40)만 운행한다. ▶배론성지 주소 및 연락처(순례 및 피정 예약 필수) :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043-651-4527 ▶인근 관광지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위용을 자랑하는 300여 년 된 소나무와 정자가 어우러져 제천시민에게 사랑받는 명승지 ‘의림지’와 맑은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세운 정자 ‘탁사정’을 함께 관광할 수 있다. 또 제천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 유형 문화재인 ‘용소막성당’(배론성지에서 11㎞)에 들러도 좋다. ▨정선 아리랑 열차(A-트레인) 한국의 전통미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정선 아리랑 열차는 코레일 주관으로 태백선과 정선선, 중앙선을 왕복하는 관광열차다. 레일크루즈 해랑으로 사용하던 무궁화호를 개조해 사용하고 있으며, 각 호차별로 아리랑과 정선의 정서를 표현한 디자인으로 꾸며 볼거리를 제공한다. 열차 내에서는 개방형 창문과 넓은 전망창을 통해 경치 를 즐기고 음악방송을 들으며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정선 아리랑 열차를 타고 정선에 도착하면 △정선 5일장 코스(정선 5일장, 정선 아리랑극, 스카이워크, 화암동굴 등) △정선 레일바이크 코스(주례마을, 풍경열차, 레일바이크, 아우라지 뱃사공, 아리랑전수관) 등 당일이나 1박2일 여행이 가능하다. ▨집밥처럼 편안한 토속음식점 ‘풀향기’ 배론본당 신자인 유연정(마리아)씨가 10년째 운영하고 있는 한정식집. 5월에 수확하는 곤드레의 첫 순으로 지은 ‘곤드레밥’과 생감자를 갈아 수제비 맛이 나는 ‘감자옹심이’가 별미다. 무쇠솥으로 지어내는 향 깊은 곤드레밥에 직접 담근 양념간장을 비벼 먹으니 맛이 일품이다. 들기름 향이 밴 곤드레밥 숭늉도 구수해 깔끔한 뒷맛을 남긴다. 반찬은 참나물과 두부, 멸치볶음 등 평소 집에서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정갈한 반찬들로, 매일 아침마다 사장이 직접 준비한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비롯해 신자들 사이에 입소문 난 집이다. 탁사정 맞은편에 있으며, 배론성지에서 차로 5분 거리다. ▶제천시 봉양읍 제원로 485번지 ☎043-653-5491.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문채현2016.04.20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3) “다니엘에게 말씀이 계시되었다”(다니 10,1)](//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7248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63) “다니엘에게 말씀이 계시되었다”(다니 10,1)묵시문학, 그저 ‘이상한 책’만은 아냐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에게 환시를 풀이해 주다. 렘브란트 작 ‘다니엘의 환상’ 부분. 일단, 묵시록이라는 단어는 요한 묵시록 첫머리에서 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묵시 1,1). 여기서 ‘계시’로 번역된 단어가 다른 곳에서 ‘묵시록’, ‘묵시’로 번역되는 ‘아포칼립시스’입니다. 가려져 있는 것을 열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 알려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묵시문학이라고 할 때에는 그러한 일반적인 의미보다는 더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특정한 형태로 된 문학 작품들이 여기에 속하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 묵시록이 묵시문학에 해당하지만, 묵시문학 작품은 이 둘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많은 묵시문학 작품들이 생겨났고, 묵시문학은 이 시대의 특징적인 현상이었습니다.대략이나마 묵시문학을 정의해 본다면, 묵시문학에서는 한 인물에게 어떤 초월적인 내용이 전달됩니다. 그 내용은 시간적으로는 종말의 일들과 관련된 경우가 많고, 공간적으로는 천상이나 다른 어떤 세계를 보여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우가 많다”는 표현을 되풀이하여 사용하는 것은, 모든 묵시문학에 공통된 특징이라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단정 지어 규정하다 보면 요한 묵시록은 묵시록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든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게 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흔히 나타나는 특징들을 열거해 볼 뿐입니다. 또 많은 경우는, 계시를 받는 사람이 그 받은 내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천사나 다른 어떤 존재가 해석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니엘서에는 천사가 자주 등장하지요. 그만큼 계시의 내용이 신비롭다는 점을 강조하는 장치입니다. 환시를 본 사람 자신도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신비로운 내용이, 특별한 계시를 통하여 전달된다는 것입니다.이러한 묵시문학은, 어떤 면에서는 예언서들과 유사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예언서들에서도 환시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요. 아모스도 환시를 보았고 예레미야도 환시를 보았습니다. 특히 묵시문학에 가까운 것은 즈카르야의 환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대적으로도, 예언이 사라져가는 무렵에 묵시문학이 생겨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여기서도 대략 이야기를 해 본다면, 우리는 유배에서 돌아온 후 예언자들이 점점 종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모스와 같은 유배 전 예언자도 ‘주님의 날’에 대해 말한 일이 있지만, 즈카르야와 말라키 등 마지막 예언자들에게서는 종말이 점점 더 중요한 주제가 되어 갔습니다. 묵시문학은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묵시문학에서의 종말은, 예언서에서보다 분명하게 현재의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여러 예언자가 심판을 예고했지만, 그들이 예고한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멸망 등 많은 경우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깊은 영향을 남긴 사건들임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묵시문학에서는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은 이 세상의 역사가 끝나고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역사의 흐름이 단절되는 것입니다.묵시문학의 다른 특징들로는 상징들을 통하여 표현한다는 것과 과거의 권위 있는 인물을 저자로 내세운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상징들은 요한 묵시록에서 많이 볼 수 있고, 다니엘서도 여러 가지 상징들을 사용합니다. 환시에 등장하는 여러 동물, 색깔과 숫자들 등은 모두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묵시문학에서는 실제 저자가 아닌 인물을 저자로 내세웁니다. 대개 창세기의 에녹과 같이 매우 오랜 고대의 인물을 저자로 제시하거나 아니면 이미 확고한 권위를 가진 어떤 인물을 내놓습니다. 이렇게 다른 인물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그 권위에 의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징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수단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일단은 묵시문학의 내용이 현재 상황에서 내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서가 작성되던 시기에 당시의 지배자였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몰락을 말한다거나 요한 묵시록이 작성되던 시기에 로마의 멸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에 분명 위험한 일이었습니다.이렇게 특수한 형태의 책인 묵시문학의 역할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사 전체를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앞이 보이지 않는 현재를 하느님의 계획 일부로 이해하게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다니엘서나 요한 묵시록을 보면서 우리는 그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책이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저자와 독자들에게 이 책들이 지닌 의미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틀림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고, 이 책들이 말해 주는 역사 이해는 그들에게 어두운 시대를 견딜 수 있는 희망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어렸을 때에 어느 날 저녁 유난히 붉게 물든 저녁놀을 보면서, 혹시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한 묵시록의 내용이 생각났던 것이지요. 잘못 이해했던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묵시문학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묵시문학은 무엇일까요? 쉬운 질문이 아닙니다. 요한 묵시록이 묵시문학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이 무엇인지 물으면 누구도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묵시문학을 어떻게 정의해야 좋을지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화신문2016.03.29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38>](//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6413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38> 성령의 열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인도를 잘 받고 있는 영혼은 성령의 열매로 가득 채워질 것이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꼽았다. 그리스도인이 영적 발전의 여정을 통해 내면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미묘한 변화 과정을 느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 영혼은 조력 은총의 자극을 받고 주입덕행을 받아들여 활성화하기 시작합니다. 덕행 실천 초기에는 많은 어려움도 겪게 되고 많은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노력하다 보면 덕행 실천이 완전히 익숙해지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습성화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느님께서 인간 영혼이 실천하는 덕행이 어느 정도 절정의 단계에 도달했다고 판단하시거나 부진하여 답보 상태에 놓여 있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시면, 갑자기 성령의 은사가 개입해 덕행의 습성화가 더욱 견고해지면서 힘들이지 않고도 실천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때 인간 영혼은 내면으로부터 커다란 영적 즐거움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오로 사도가 언급한 성령의 열매 목록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물론 바오로 사도가 나열한 이 목록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라틴어 번역본 성경은 마지막 열매인 절제를 정결로 바꾸고 참을성, 겸손, 억제의 세 가지 목록을 첨가한 열두 개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또한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신학대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자신만의 목록을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목록의 수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열매를 얻기 위한 조건을 살펴야 합니다.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를 소개하기 전후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갈라 5,16.18).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4.25). 결국 육의 욕망과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정반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인간 영혼은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잘 받고 있는 영혼은 성령의 열매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영혼은 육의 욕망을 끊어버리고 성령의 인도에 잘 따라야 합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중에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7.20).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맺은 열매는 그 사람의 내면 상태를 반영하기에 그를 판단할 수 있는 외적인 판단 척도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결국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르려고 노력한다면, 예수님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시어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성령의 열매는 덕행 실천을 완성해 가는 인간 영혼이 내적으로 느끼는 풍요로운 즐거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령의 열매는 그 열매를 맺은 사람에게만 유익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가르침처럼 열매는 내적인 상태를 외적으로 보여주는 척도이기에 성령의 열매를 맺은 사람과 함께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자신이나 타인 안에서 성령의 현존을 느끼는 방식이 꼭 성령의 열매를 확인하는 길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너무 의식적으로 성령의 열매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귀 기울입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려고 노력한다면 은총으로 성덕도 완성할 수 있을 것이요, 그 결과로 성령의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2016.01.27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인터뷰하다 사랑을 인터뷰하다 사랑을 인터뷰하다곽승룡 지음/하양인/1만 5000원인터뷰의 필수 조건 중 하나는 사전 조사다. 인터뷰할 대상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인터뷰 결과는 좋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정보가 아니라, 누구도 알지 못했던 내용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 인사의 인터뷰 기사를 보자. 눈길이 가는 기사는 확실히 다르다. 여느 인터뷰와는 달리 내용이 새롭고 이야기가 다채롭다.그런 면에서 대전가톨릭대 총장 곽승룡 신부가 인터뷰한 ‘사랑’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곽 신부는 인터뷰 대상인 ‘사랑’에 관한 사전 조사를 철저히 했다.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성경 속에서, 인간관계와 사회 안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사랑에 관해 고민한 유명 저자들과 학자들, 고대 수도승들이 남긴 말들도 놓치지 않았다. 책은 곽 신부가 이러한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만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렵다. 저자 역시 사랑이 지닌 입체적인 모습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이름 부름’이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사랑은 또한 ‘온유’하고 ‘맑은’ 기질을 지녔다. 때론 ‘겸손’과 ‘평화’ 모습으로 나타나고 때론 ‘눈물’이 되기도 한다. 곽 신부는 무엇보다도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강조한다. ‘하느님은 사랑’(1요한 4,16)이기 때문이다. 그는 책에서 “사랑에 관한 모든 것, 특히 그리스도교 진리가 전하는 사랑을 찾고 그 시선을 만나 모든 영혼이 주님의 사랑을 만나고 움직이도록 전하고 싶다”고 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기에 감정 그 이상의 차원이다. 때문에 사랑을 감정으로만 표현하고 느끼는 대로 쏟아붓는다고 해서 관계가 성숙되지는 않는다. 감정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감정과 느낌 너머에 있는 참된 사랑, 즉 하느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은 서로 바라보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데서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공감을 동반한 대화는 사랑을 키우는 밑거름이 된다.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사랑은 자라나지 못한다. 사랑이 자라나는 곳은 마음이다. 저자는 마음이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라고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마음의 목소리가 하느님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곽 신부는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에 관해서도 사랑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면서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의 행복에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가난과 겸손의 가치, 즉 사랑이 사라진 물질중심사회의 행복 추구에 경종을 울렸다. 그는 진정한 행복을 위해 그리스도교의 미덕인 겸손을 강조했다. “겸손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자기 자신의 것인 양 여기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질과 능력이 선물이기에 주신 분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103쪽).곽 신부는 사랑의 ‘롤 모델’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내세웠다. 가톨릭 교회가 말하는, 예수님이 강조했던 사랑의 모습을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과 행동에서 찾아냈다. 자칫 ‘이상’처럼 느껴질 수 있는 사랑의 인터뷰는 곽 신부가 찾아낸 교황의 모습 덕분에 지금 여기에서 실천 가능한 ‘현실’이 됐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백영민2015.11.25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1> 칼날 같은 하느님의 말씀](//cpbc.co.kr/CMS/newspaper/2014/11/rc/541647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칼날 같은 하느님의 말씀하느님 만나기 위해선 하느님을 버려야 한다!연재를 시작하며“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 4,12).연재 첫머리부터 무서운 말씀으로 운을 뗀다고 깜짝 놀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참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읽는 나보다 강하십니다. 나를 꺾어 놓고야 맙니다. 그래야 마땅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이런 말씀은 듣기 싫다고, 없었으면 좋겠다고 느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듣기 싫은데도,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끄듯이 꺼버릴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런 것은 싫다고, 구미에 맞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 읽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지금 바로 성경을 덮고 서점에 가서 훨씬 더 가벼운 책을 고르셔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관절과 골수를 가르고 내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내는 것이 싫다면, 무엇하러 성경을 읽으십니까?그리스도교는 스스로 다른 몇몇 주요 종교들과 달리 계시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추론해서 찾아낸 하느님도 아니고 열심히 정진하여 발견한 하느님도 아니십니다. 하느님 편에서 먼저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셔서 인간이 하느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 등)이라고 일컬어지시는 그 하느님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혼자 생각해서 알아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상을 고집하며 매달릴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내가 교리를 배운 신자로서 하느님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하지만, 하느님의 신비를 다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하느님께는 내가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분명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고 인간의 한계라면 겸손하게 인정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이 아닌 내 마음대로 상상해낸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으로 모시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깨뜨려버려야 할 그릇된 하느님 상입니다.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이들은 하느님에 대해 그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수난 예고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구약의 이스라엘도 결코 평탄치 않았던 그들의 역사 속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모습에 당황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했던 예언자들이 반대받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을 보아도, 하느님의 말씀은 분명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심판을 선고해도 회개하지 않고 그렇다고 구원을 선포해도 기뻐할 줄 모르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말씀에 꺾이기보다 그 말씀을 내 마음에 들게 맞추고 싶어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성경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원천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인지 객관적인 진술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호기심에서, 또는 다른 종교에 대한 관심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렇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창세기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밝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도 성경을 성경으로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곧 신앙의 규범으로 읽는다면 그 성경은 나의 신앙을 규정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 따로, 성경의 하느님 따로일 수 없습니다. 성경의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하느님이 아니라 그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나를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성경을 읽는 태도는 다른 책들을 읽는 태도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성경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끼셨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앞으로 느끼게 되실 수도 있겠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요구를 내세웁니다.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말씀은, 내가 하느님과 달리 생각하고 달리 판단할 때에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면서 회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두려워할 일만도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쌍날칼보다 날카로운 하느님의 말씀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이제부터 구약 성경의 책들을 읽으려 합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시대 순을 따를 것입니다. 성경의 책들이 형성된 순서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의 순서를 따라 창세기부터 시작하고, 지혜문학서들은 후반부에 모아서 다룰 것입니다. 중간에 때로는 성경 진도를 멈추고 한 시대의 역사나 성경 이해에 관련된 한 가지 주제를 다루기도 하겠고, 구약 성경의 책들이 모두 끝난 다음에는 신약 시대가 오기까지의 배경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 여정이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과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성경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원천이며, 성경을 읽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이다. 백영민2014.11.26
![[복음 이야기] (46) 하느님 나라, 하늘 나라](//cpbc.co.kr/CMS/newspaper/2015/03/rc/560622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46) 하느님 나라, 하늘 나라하느님 나라 입국엔 회개·믿음이 필수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다. 그림은 운보 김기창 화백 작품 ‘되찾은 아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이 설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신 첫 말씀이며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가르침, 즉 복음의 핵심어이기 때문이다. 헬라어 성경 본문에 각인된 ‘바실레이아 투 테우’(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을 구원하실 참된 세상의 지배자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다’라는 신앙 고백과 연결돼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설교의 주제로 삼으실 때 항상 그 가르침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고 설명하셨고, 이 놀라운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항상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응답은 바로 ‘회개’와 ‘믿음’이다. 따라서 신ㆍ구약 성경 전체 내용은 ‘예수님은 그리스도(구세주)이시다’라고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고,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인간은 ‘회개’하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도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모두 122번 나온다. 그중 99번이 마르코ㆍ마태오ㆍ루카 복음 곧 ‘공관복음서’에 나온다. 이 가운데 90개 본문이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직접 말하지 않고 ‘하늘 나라’(라틴어로 ‘Regnum Caelorum’-레눔 첼로룸)로 표현한다. 이는 유다인들이 즐겨 쓰던 표현으로 마태오는 복음서에 하늘 나라를 무려 51번이나 쓴 반면, 하느님의 나라는 단 4번만 표기했다. 이는 ‘하느님’이란 거룩한 단어를 직접 쓰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이스라엘식 관념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성경학자와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의 통치’로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인 로마 황제가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이미’ 온 나라이며, 구세주 재림하실 때 완성될 나라이다. 또 그리스도 도래 때까지 교회를 통해 이 땅에 현존하는 나라이다.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구약 시편(47편, 93편, 96-99편)을 통해 찬송되었고, 다니엘서는 하느님을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모든 생물을 지배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다니 14,5)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과 회당 전례를 통해 찬양하고 고대하던 나라이다.예수님께서는 직접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마태 13,3-9; 마르 4,1-9; 루카 8,4-8), ‘가라지’(마태 13,24-30.36-43), ‘저절로 자라는 씨앗’(마르 4,26-29), ‘겨자씨와 누룩’(마태 13,31-33; 마르 4,30-32; 루카 13,18-21), ‘보물과 진주 상인’(마태 13,44-46) 등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 눈에 초라한 모습을 띠지만 그 실상을 발견한 자는 모든 것을 처분해 손에 넣을 만큼 값진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루카 18,9-14),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5-37), ‘매정한 종’(마태 18,21-35), ‘되찾은 아들’(루카 15,11-32),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마태 7,15-20; 루카 6,43-45),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마태 7,7-11; 루카 11,9-13) 등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자신을 낮추어 자비를 청하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며, 하느님의 선하심과 용서의 삶을 닮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이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신다. 가장 악한 죄인들조차도 회개하고 성부의 무한한 자비를 받아들이라는 부름을 받았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서 이미 겸손한 마음으로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차지가 되고 있다”(107항)고 고백하고 있다.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5.03.17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47)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중)](//cpbc.co.kr/CMS/newspaper/2014/06/rc/512631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47)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중)전통적 성경 연구법 탈피해 대안적 해석학 제시 피오렌자 교수가 14년 동안 신학을 가르쳤던 노트르담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성모 동굴. 루르드의 성모 동굴을 본땄다. CNS 자료사진 노트르담대학교를 떠나 케임브리지의 성공회 대학으로 옮겨온 피오렌자 교수는 ‘해방을 위한 비판적 여성주의 해석학’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984년에서 1988년까지 케임브리지의 성공회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동안 많은 이들에게 비판적 여성주의 성경해석을 가르치고 소개하였습니다. 이때에 가톨릭 대학교인 노트르담대학교에서 가르칠 때보다 더 많은 가톨릭 여학생이 그의 수업을 들었다고 합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학문적 연구는 점차 학계의 인정을 받기에 이릅니다. 1985년에 그는 미국 성서학회의 첫 번째 여성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성서학계가 피오렌자 교수가 성경해석 분야에 끼친 공헌을 공식으로 인정하였음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성경 연구에서 비판적 여성주의적 관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피오렌자 교수는 주딧 플래스코(Judith Plaskow)와 함께 「여성주의 종교연구」라는 잡지(Journal of Feminist Studies in Religion)를 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잡지는 이후로 여성신학자들의 학문 업적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해왔습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1988년 이후 지금까지 하버드 신학대학에서 성경 해석학과 여성신학 분야에서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연구업적 및 주요 저서피오렌자 교수는 성서해석학과 여성신학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 업적을 남겼고 지금도 이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강의와 연구는 성경 및 신학과 관련된 인식론, 해석학, 수사학, 정치신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것이며, 신학교육과 평등성, 근원적인 민주주의와 관련된 주제들에도 꾸준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저술 활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왕성하다고 할 수 있는데, 현재까지 약 24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17권에 이르는 책의 편저자이며, 240편이 넘는 논문을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로 발표하였습니다. 현재, 「여성주의 종교연구」라는 잡지의 공동 설립자이자 공동 편집자이며, 「콘칠리움」(Concilium)이라는 잡지의 공동 편집자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성경 관련 주요 잡지들과 연구소들에서 상임위원직을 맡고 있습니다. 2001년에는 미국 인문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뛰어난 연구 활동을 인정하여 미국의 코네티컷에 있는 성 요셉 칼리지, 오하이오의 데니슨 대학교, 뉴욕 로체스터의 성 베르나르도 학교,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교, 독일의 뷔르츠부르그 대학교, 퍼킨스 신학대학, 남부 메토디스트 대학교,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타나 신학대학에서 피오렌자 교수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였습니다. 2002년에는 가톨릭 도서관협회에서 주는 성 예로니모 상을 수상하였습니다.피오렌자 교수의 책 「그녀를 기억하며」(In Memory of Her, 우리말 번역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신학적 재건」)은 현재 13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그밖에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피오렌자 교수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돌이 아니라 빵을」(김윤옥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4): Bread Not Stone: The Challenge of Feminist Biblical Interpretation (Boston: Beacon, 1985). 2) 「동등자 제자직」(김상분, 황종렬 역, 분도, 1997): Discipleship of Equals: A Critical Feminist Ekklsia-Logy of Liberation (New York: Crossroad 1993). 3) 「성서-소피아의 힘: 여성 해방적 성서 해석학」 (김호경 역, 다산글방, 2002): Sharing Her Word: Feminist Biblical Interpretation in Context (Boston: Beacon, 1998).신학사상여성 성경신학자로서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 해석의 방법들과 특권적 배경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습니다. 자신의 오랜 연구를 통하여 그는 성경 본문 자체와 그리고 그 성경을 설명하려는 해석 방법들이 종종 특권층에 속하지 못한 이들이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돕기보다는 오히려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경우가 많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과 그 해석 방법에 대한 다차원적 비평 방법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기존의 해석 방법들을 단지 비판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해석 방법에 대한 대안적 읽기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접근법은 복잡하고도 역동적이며 성경 해석의 윤리적 결과들을 깊이 고려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 해석에 관한 이러한 피오렌자 교수의 주장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피오렌자 교수는 어떤 생각이든 어느 정도로는 이데올로기적일 수밖에 없으며, 성경 해석에 사용되는 관념이나 방법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대답합니다. 어차피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피할 수 없다면, 무엇보다 윤리적인 해석 방법을 취하는 것이 중요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만큼 성경은 사회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피오렌자 교수가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의 입장에서 성경 해석과 그 방법들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그가 어린 시절에 전쟁 난민으로서 경험하였던 고통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억압받는 이들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자 합니다.피오렌자 교수는 그가 저술한 수많은 책과 논문들에서 지속적으로 기존의 성경 연구 방법에 도전을 제기합니다. 성경 연구라고 하는 학문을 변모시키려는 피오렌자 교수의 노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오늘날의 성경 연구라고 하는 학문이 전제하고 있는 것, 곧 성경 본문 안에서 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들을 발견하는 것이 성경 연구의 목적이라는 전제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 본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부터 그것이 번역되고 해석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학문적, 사회적 문제들이 연루됐다고 주장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그 오류를 ‘주인중심제’(kyriarchy)라고 부르는데, 이는 소수의 엘리트 남성들이 특권 받지 못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사회적 지배의 복잡한 패턴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성신학자들이 가부장제 혹은 남성중심적 지배 체제를 비판한다면, 피오렌자 교수는 남성 중심적이라는 말이 서구사회를 지칭하는 적절한 말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남성 역시 그 지배 체제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여성과 남성 간의 대립에서 온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소수의 특권 계층이 전체를 지배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며, 불특정 다수는 그런 지배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체제에 있다고 보며, 이 체제를 피오렌자 교수는 ‘주인중심제’(kyriarchy)라고 부릅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 본문 안에, 그리고 성경의 해석 방법들 안에 주인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고, 또 특정한 성경 본문이나 해석 방법에 의해 어떻게 그것이 강화되고 있는지를 지적합니다. 둘째로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 연구 분야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주인중심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데서 나아가 대안적인 성경 연구 방법들을 찾고 제시하고자 합니다. 피오렌자 교수가 제시하는 전통적인 성경 해석 방법에 대한 대안은 ‘해방을 위한 비판적 여성주의 해석학’(a critical feminist hermeneutics for liberation)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제안하는 바가 유일한 대안이 아님을 피오렌자 교수는 강조합니다. 그리고 기존의 주인중심적 연구 풍토, 곧 소수의 주류 학자들이 전체 학계를 이끌어가는 풍토에서 벗어나 다양한 담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 철저하게 민주적인 공간이 만드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합니다. 피오렌자 교수가 제시하는 해방을 위한 비판적 여성주의 성경 해석의 내용은 제 3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김영선 수녀(마리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평화신문2014.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