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4.제1장 말씀의 빛 안에서 ③ (19~30항)](//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4746_1.1_titleImage_1.jpg)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4.제1장 말씀의 빛 안에서 ③ (19~30항)교황이 말하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범 “네 손으로 벌어들인 것을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이 있어라. 네 집 안방에는 아내가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올리브 나무 햇순들 같구나”(시편 128,2-3).모든 가정이 이 시편 구절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혼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예비부부나 신혼부부의 축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혼에 관한 논쟁의 맥락에 들어 있음을 주목한다(마태 19,3-9 참조). 실제로 성경을 읽어보면 수많은 곳에서 가족 관계에서의 고통과 피 흘림의 이야기가 나온다. 카인의 아벨 살해는 그 시작일 뿐이다. 예수님 또한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피난 생활을 해야 하는 운명을 겪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정이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신다. 술이 떨어진 혼인 잔칫집의 당혹스러움을 해결해 주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내용을 일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은 일련의 추상적 관념들이 아니라 어려움과 고난을 체험하는 모든 가정을 위한 위로와 동료애의 원천”(22항)이라고 제시한다. 우리네 가정들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들은 가족 간의 관계에서만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 곧 노동과 관련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동은 단순히 원죄의 대가가 아니다. 노동은 그 처음부터 인간 존엄성의 본질에 속한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는 말씀처럼,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자연을 가꾸고 돌본다. 이를 통해 가족을 부양할 뿐 아니라 사회 발전을 도모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도 나오듯이 일거리가 없어서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마태 20,1-16 참조). 오늘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실업으로 인한 빈곤은 가정들을 더욱 어렵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죄의 결과로 인한 인간 이기심과 욕망은 자연을 파괴하고 사회 경제적 불균형을 심화시킨다. 이것이 예언자들이 고발하고, 예수님께서 규탄한 불의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통들을 안고 있는 가정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줄 수 있는 표징은 무엇일까.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사랑의 계명을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그들의 삶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 원칙”이라고 이해한다. 실상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야말로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사랑은 또한 자비와 용서에서 결실을 맺는다”(27항). 자신을 내어주는 이 사랑은 그리스도교적 혼인과 가정생활에 대한 체험에 중심이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와 함께 중요한 한 가지 덕목을 더 제시하는데 다정함(살가움, 부드러움)이다. 실상 바쁘게 움직이고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 돌아가는 현대의 삶에서 다정함은 곧잘 간과되기 십상이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와 같은 살가움은 시편 저자가 하느님과 하느님께 성실한 이들과의 관계를 나타내고자 사용한 이미지다(시편 131,2 참조). 성경에 나오는 혼인과 가정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을 살펴본 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인 가정을 이렇게 규정한다. 1.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가정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합일을 이루는 모습대로 그 구성원들이 인격적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 2. 가정이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은 하느님의 창조 활동을 반영한다. 이 가정은 ① 매일 기도를 바치고 ② 하느님 말씀을 읽으며 ③ 미사에 참여하고 ④ 그리하여 사랑에서 성장하고 갈수록 더 온전히 성령이 거처하시는 성전이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29항). 교황은 나아가 모든 가정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보고 배워야 한다면서 특별히 마리아의 모범을 닮기를 권고한다. “마리아처럼, 우리 가정들은 순경에서나 역경에서나 용기 있고 평온하게 가정의 도전들을 대면하고 하느님께서 이루신 위대한 일들을 가슴에 간직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30항). 다시 한 번 성찰하자. 우리 가정은 삼위일체의 친교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가? 우리 가정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바라보며 특별히 마리아의 모범을 닮고자 노력하고 있는가?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백영민2016.05.11
![[NIE-신문으로 크는 신앙] 교회 달력은 왜 11월 부터시작할까?](//cpbc.co.kr/CMS/newspaper/2016/11/rc/661717_1.1_titleImage_1.jpg)
[NIE-신문으로 크는 신앙] 교회 달력은 왜 11월 부터시작할까?일상을 사는 우리는 통상 1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지내고 있죠. 그러나 가톨릭 교회 달력의 시작은 11월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성탄, 곧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기 시작하는 때를 한 해의 시작으로 삼습니다. 보통 중요한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미리 집 안을 청소하고 여러 준비를 해두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예수님 오심을 앞두고 ‘기다림’과 ‘준비’의 시간을 갖지요. 그래서 이 시기를 대림 시기라고 부릅니다. 대림 시기는 전통적으로 4주간으로 지내오고 있어요. 예수님의 성탄, 즉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이고, 여기서부터 주일 네 개를 거꾸로 빼면 보통 11월 말쯤이 됩니다. 올해는 11월 27일이 그 날이 됩니다. 그래서 대림 제1주일이라고 부르지요. 교회력은 이렇게 대림 제1주일에 시작한답니다. 대림 시기에 대해 더 알아볼까요? 6세기 이후 기쁨의 의미가 더해져 대림(待臨)은 한자 그대로 ‘오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Advent’라고 하는데 ‘도착’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us’(아드벤투스)에서 유래했죠.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한 요한 세례자는 구세주께서 곧 오실 것을 알리며 회개를 촉구하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어요. 대림을 지내는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그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아요. 다만 4세기 말쯤 스페인과 갈리아(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성탄을 앞두고 6주간 참회의 기간을 지냈다는 데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하지만 당시의 대림은 ‘금욕’의 성격만 지녔다고 합니다. 6세기 이후 그레고리오 교황이 전례로 정하면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기쁨’의 의미가 더해졌습니다. 예수님 오심을 대비한 회개와 희망의 시기 교황청은 대림 시기 의미에 더욱 정확한 지침을 전하고 있어요. 1970년 개정한 「로마 미사 경본」에 수록된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 지침’을 통해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들 사이에 오신 것을 기억하는 성탄의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요, 동시에 그와 같은 기억을 통하여 마지막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도록 영혼이 인도되는 시기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림 시기의 마지막 제4주는 구세주 오심에 대비한 ‘회개’의 마음과 더불어 예수 탄생을 기뻐할 ‘희망’의 마음을 함께 지니는 시기입니다. 연말이면 우리가 한해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새해를 기쁘게 맞을 준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대초와 제의 색도 바뀌어 대림 시기에는 보랏빛 대림초가 제대 앞을 장식합니다. 사철나무 위에 장식된 대림초는 매주 촛불을 하나씩 늘려가며 구세주가 얼마나 가까이 오고 계시는지 알려 줍니다. 대림초는 보라색 4개 혹은 보라색 3개와 장미색 1개, 또는 흰색 4개로만 사용할 수 있어요. 가장 짙은 색부터 불을 밝히면 돼요. 초 4개를 모두 켜게 되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곧 임박했음을 알 수 있겠죠! 이때는 사제의 제의 색깔도 바뀌어요. 사제는 대림 시기 회개와 속죄를 뜻하는 보라(자주)색 제의를 입습니다. 주님 오심을 합당하게 준비하려면 회개와 절제하는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이 시기엔 제대 또한 화려함을 없애죠. 대림 시기에는 제대를 대림환으로만 비교적 단출하게 장식하고, 미사 중 대영광송도 하지 않는 게 특징이에요. 오르간 등 악기의 단독 연주도 금하고, 혼인성사가 있어도 화려함을 피하죠. 하지만 사제들은 대림 제3주일이 되면 기쁨을 나타내는 장미색 제의를 착용해요. 전례 내용에 따라 주님께서 오실 날이 머지않았음을 기뻐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림 시기 중남미 지역의 축제 ‘라스 포사다스’ 라스 포사다스(Las Posadas)는 스페인과 멕시코, 과테말라, 미국 남서부 지역에서 대림 시기에 지내는 중요한 축제 중 하나예요. 12월 16일부터 예수 탄생 전야인 12월 24일까지 9일간 열리는 성대한 전야제죠. 포사다스(Posadas)는 스페인어로 ‘숙박’을 뜻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를 낳고자 신성한 장소를 찾아가는 과정을 축제 안에 묘사하며 그 의미를 드높이는 데 목적이 있어요. 축제는 마리아와 요셉 역할을 맡은 두 주인공과 뒤따르는 행렬이 여인숙을 향해 출발하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마리아와 요셉이 도착하면 집 주인은 노래를 부르며 맞이하고, 집 안에서는 모두 같이 무릎을 꿇고 예수 탄생 기도를 드리죠. 나귀를 탄 마리아 뒤로 천사와 목동들이 함께 따르는 모습까지 재현하면 축제가 더욱 풍성해지겠죠? 이 기간에는 아이들과 함께 사탕과 과일을 나눠 먹는 풍습도 있어서 어른부터 아이까지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 탄생을 함께 기다리고 축하할 수 있어요. 교회력이 지닌 의미 사람들은 세상사의 온갖 중요한 일들을 보통 1년을 단위로 해서 기념하지요. 마찬가지로 교회는 구원의 역사를 1년을 주기로 해서 기념한답니다. 이것을 교회력 또는 전례력이라고 불러요. 교회력은 구원 역사의 중심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림 시기부터 시작하지요. 그래서 대림→성탄→사순→부활→성령 강림→연중 시기로 이어집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이 지난 주에 기념한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한해 전례력을 통해 지나간 신앙 유산을 돌아보고 현재를 경험하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다지지요. 미사 중 거행되는 말씀 전례는 3년 주기(가ㆍ나ㆍ다해)로 편찬돼 다양한 성경 속 의미를 복음과 강론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문채현2016.11.25

명동본당 사순특강 - ‘사도신경에 담긴 신앙 고백’송용민 신부(주교회의 사무국장) 송용민 신부 평화신문은 이번 호부터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의 사목표어인 ‘교회의 가르침은 새로운 복음화의 나침반’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우리 신앙생활의 길잡이가 되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돌아보는 명동대성당 사순 특강을 정리 연재한다. 순서는 △22일 사도신경에 담긴 신앙고백(송용민 신부) △29일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나타난 회심(이하 박준양 신부) △3월 7일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나타난 친교 △3월 14일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나타난 봉사다.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의 바탕이 되는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 신앙을 담은 신앙 고백문으로서, 초기 교회부터 이단적 신앙을 거슬러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신학적 성찰과 공의회 결정이 담긴 신앙의 기초이며, 초대 교회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명백한 신앙이 요구되는 세례 성사 때 예비신자들이 고백해야 하는 것이자, 예비신자들을 위한 길잡이이자 교육 지침이다. 사도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을 내용으로 하지만, 사도신경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저는 믿나이다”라는 신앙의 고백에 있다. 사도신경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가장 중요한 잣대로 교회 안에서 고백돼 왔다.오늘날 사도신경이 우리 신앙에 중요한 이유는 현대 그리스도교가 처해 있는 다양한 정체성 논란 속에서 올바른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를 되찾고, 그리스도 신앙이 지닌 참된 가치를 재정립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은 특별히 삼위일체 신앙을 이해하는 가운데,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현대적 해석이 중요하다. 성부에 대한 신앙 고백에서는 ‘하느님’이란 단어가 담고 있는 풍요로운 의미를 되찾고, 나에게 하느님이 어떻게 체험되고 있으며, 교회가 고백해온 하느님의 역설적 사랑과 자비, 인간의 속됨 속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의 체험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신흥종교들이 하느님을 비인격적 실재로 치부하거나, 세속적 욕망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문제들에 맞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인격적 현존이자 무한한 신비로 만나는 영성적 자세가 요구된다.성자에 대한 신앙 고백에는 예수를 단순히 역사적 한 인간으로만(아리우스 이단), 혹은 신화적 신적 존재로만(영지주의) 이해하려던 이단들과의 투쟁에서 지켜낸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이 깊이 담겨 있다. 참된 인간이시자 참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는 물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이르는 파스카 신비야말로 인간이 겪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답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재림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신앙은 죄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밝혀주고, 인간의 궁극적 목표인 하느님과의 만남을 무서운 심판이 아닌 희망으로 만날 수 있는 그리스도 신앙의 고유성을 되새기게 해줬다.성령께 대한 믿음은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영 안에 담긴 성령의 체험이 신앙의 바탕이 돼야 하며, 신앙인이 위로자이며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일깨워주시는 하느님의 진리를 고백하고 선포해야 하는 교회와 깊은 결합 속에서 공동체적 신앙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밝혀줬다. 또한 역사 속에 제도이자,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영적 교회의 양면성을 지닌 교회가 세상 속에서 고백하는 성인들의 통공과 죄의 용서,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이야말로 가톨릭 신앙이 자긍심을 갖고 고백하는 성사(고해성사, 성체성사)의 가치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임을 강조했다.끝으로 사도신경은 우리 신앙인의 실존적 응답인 ‘아멘’이라는 장엄한 응답으로 마쳐지는데, 이는 우리가 고백하는 모든 것들이 진실로 그렇게 될 것임을 확신하는 태도이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욕망의 사회 속에서 퍼지고 있는 이기적 탐욕에서 벗어나, 이타적 희생의 삶과 그리스도를 따라 회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사순 시기를 살아가는 참된 제자의 길임을 다짐해야 한다.정리=이힘 기자 lensman@pbc.co.kr cpbc2016.02.24

제삼천년기 한국 교회 키워드는 연대·말씀·선교새천년복음화연구소 설립 10주년 기념 심포지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주년을 맞이한 제삼천년기의 한국 교회’ 제삼천년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과학 기술의 발전과 물질 만능주의가 극대화된 현대 사회에서 한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새천년복음화사도직협회 산하 새천년복음화연구소(소장 조영동)는 설립 10주년을 기념해 17일 서울 명동 가톨릭 회관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주년을 맞이한 제삼천년기의 한국 교회’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고 구원관과 성경, 선교 차원에서 한국 교회 복음화를 전망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기조강연을 맡은 정순택(서울대교구) 주교는 “제삼천년기 한국 교회의 사명과 과제는 남북한 통일”이라며 “젊은이들과 함께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 교회가 무슨 일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고 찾아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세계 교회 안에서 아시아와 중국을 위한 한국 교회 역할을 강조하며 “중국 교회와 아시아 교회 복음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발제자로 나선 곽승룡(대전가톨릭대 총장)ㆍ백운철(가톨릭대 신학대학장)ㆍ김준철(주교회의 사무처장) 신부는 제삼천년기를 살아가는 신자들이 실천적 신앙인으로 거듭날 것을 주문했다. 곽 신부는 ‘참여와 연대’를, 백 신부는 ‘말씀’을, 김 신부는 ‘선교와 복음화’를 제삼천년기 한국 교회의 과제로 제시했다(발표 내용은 오른쪽 참조).이날 심포지엄에는 박문수(프란치스코,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박사, 전영준(가톨릭대)ㆍ김유정(대전가톨릭대) 신부가 논평자로 나섰다. 이와 함께 심상태(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몬시뇰, 이재룡(서울 혜화동 주임)ㆍ조재형(새천년복음화사도직협회 담당) 신부 등을 비롯해 수도자, 신자 300여 명이 참석했다. 조영동(요한 세례자) 소장은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하느님 존재하심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우리의 사명”이라면서 “이 심포지엄이 신자들 마음에 불꽃이 타오르도록 자극해 마침내 세상이 진리 자체이신 사랑하는 목자를 만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제삼천년기 신앙 구원론과 한국 교회의 복음화 전망 및 과제(곽승룡 신부)신앙 구원론은 인간 구원 문제를 탐구하는 신학의 한 분야로 예수 그리스도 구원 업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 강생론과 파스카 신비가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특별히 삼천년기 신앙 구원론은 강생 구원론(제일천년기)과 희생 구원론(제이천년기)을 바탕으로 참여연대 구원론이 실현돼야 한다. 이를 기초로 한국 사상과 문화, 역사와 정서에 가까운 토착화 가능성을 연구하고 실현해야 한다. 곧 그 구원관은 구원 경륜 안에서 자신을 비움으로써 스스로 희생하여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생명에로 구하는 데 자신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문화와 성경 구원 경륜에서 구원관을 대별해 본다면, 많은 점에서 한국 교회의 토착화에 밑거름이 될 것으로 믿는다. 한국 교회의 복음화 전망 및 과제도 우주 그리스도론 통합연대의 구원관 실현에 있다. 기존의 구원관에서 탈피해 통합과 연대, 참여의 구원관이 실행되도록 연구하고 준비할 몫은 교회 구성원, 하느님 백성의 몫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사목 일꾼들의 연대사목, 신자들에 대한 일대일 맞춤식 신앙영성 상담 사목(고해성사와 신앙상담의 전문화), 아시아 교회를 위한 성령에 깊이 이끌리는 한국 교회 복음화 사명과 역할을 연구하고 실현해야 할 몫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삼천년기 한국 회의 성서 사도직의 과제-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과 교회 문헌의 한국적 적용(백운철 신부)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 가져온 위대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나누는 성서운동을 전 세계적으로 촉발시켰다는 사실이다. 공의회 이후 학자들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주석하는 작업을 활발히 전개하고 신자들은 번역 성경을 열심히 읽고 나눔으로써 하느님 말씀의 바람이 가톨릭 교회 안에 세차게 불기 시작한 것이다. 계시헌장 「하느님의 말씀」은 공의회 이전 성경에 관한 교회 가르침을 집약하고 그 이후에 성경 관련 회칙들이 발표될 수 있도록 영감과 자극을 주는 분수령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10년 발표한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 본질과 교회 안에서의 말씀 연구와 활용 그리고 말씀의 사회적 역할에 이르기까지 공의회의 계시헌장을 보완하고 현대화하는 가장 포괄적인 전망과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 교회의 성서 사도직의 역사와 과제는 △성경 번역 △성경 연구 △다양한 성서 모임 △성경 교육 기관의 설립 △말씀 중심의 다양한 사도직 △말씀 중심의 본당 사목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에 따른 한국 교회의 시급한 성서 사도직의 과제는 본당 사목을 말씀 중심으로 이끄는 일이다. 또 가톨릭대 신학대에 STL(교황청이 인정하는 석사과정) 과정을 개설해 성경 교사를 양성하고 이 교사들이 성서 사도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구 차원의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반포 50주년을 맞이하는 제삼천년기 한국 회 진단(김준철 신부)「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이하 「선교 교령」)은 교회가 펼치는 선교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 방향을 올바로 설정해 준 문헌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선교 활동이 약화됐다. 이에 바오로 6세 교황은 1975년 「현대의 복음 선교」를 반포해 복음화 개념을 새롭게 했다. 복음화란 단순히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만이 아니고, 모든 개인과 집단, 그들의 활동, 가치관, 생활양식, 구체적 생활환경, 문화 등을 복음의 가치에 맞게 바로 잡는 것을 의미한다. 선교 측면에서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복음 선포에 있어 소극적이었다. 또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설문조사(한국 갤럽, 2014) 결과에서 드러나듯 신자들은 천주교 4대 교리(천주존재, 강생구속, 삼위일체, 상선벌악)에 대한 확신이 강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오늘날 기성 종교에 대한 실망과 거부감은 뉴에이지 운동, 기(氣)수련 운동 등 대체종교 등장으로 이어졌다. 「선교 교령」 반포 5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 교령」 정신 대로 적극적으로 선교 사명을 수행하며 이 사회를 복음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올바른 하느님 이해 △올바른 인간 이해 △자연과 화해 △올바른 가치관 확립 △사랑의 공동체 확산 △천주교 이미지 강화 △사회 봉사활동 강화 △참된 그리스도인상 확립 △선교의식 촉진에 힘써야 한다. 평화신문2015.10.20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2번 ‘주 하느님…’ (상)회개의 기도 소리 듣고 가사 덧붙여 「가톨릭성가」 2번 ‘주 하느님 크시도다’는 가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개신교 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이 아닐까 싶다. 개신교 찬송가 제목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How Great Thou Art)다. 우리 성가책에는 작곡자가 스튜어트 하인(Stuart K. Hine, 1899~1989)으로 표기돼 있으나, 하인은 이 곡을 영어권 나라들에 소개한 음악가일 뿐이다. 본래 이 선율은 스웨덴의 민요에서 유래한 것으로, 작사가는 스웨덴 시인이자 저술가인 보베르그(Carl Gustav Boberg, 1859~1940)이다. 그는 당시 스웨덴 개신교 신문 「진리의 증거자」(Sanningsvittnet) 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약 60여 편에 이르는 시와 성가 가사를 쓴 인물이다. 그가 1886년 3월 ‘오 위대하신 하느님’(O Store Gud)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했는데, 1888년 스웨덴의 어느 교회에서 이 시가 민속 선율과 합쳐지면서 처음 불리게 됐다. 이듬해 그가 발행하던 신문에 최초로 악보가 등장했으며, 후에 미국으로 망명한 스웨덴 음악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에드그렌(Adolph Edgren, 1858~1921)에 의해 피아노와 기타 반주가 덧붙여지기도 했다. 이 곡은 처음에는 3/4박자였는데 1894년 출판된 「스웨덴 선교학회 노래집」에서 4/4박자로 수정돼 실렸다. 러시아의 마틴 루터로 불리는 프로카노프(Ivan S. Prokhanov, 1869~1935)에 의해 러시아어로 번역돼 1927년 「크리스천의 노래」라는 성가책에 실리기도 했다. 영어 번역판으로는 존슨(E. Gustav Johnson)과 하인(Stuart K. Hine)의 두 가지 번역이 있으나, 하인의 것이 더욱 유명해지게 된다. 사실 이 곡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게 된 데에는 하인 자신의 역할이 컸다. 그는 독일어로 된 가사를 처음부터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에서 어느 여성이 러시아어로 부르던 노래를 듣고 이 성가를 번역하게 됐다. 1931년 하인은 폴란드 접경 지역인 우크라이나의 한 마을에 선교사로 가게 되었는데, 하인 부부가 묵었던 집 주인 부부가 그 지역 유일한 개신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집 주인 부인 루디밀라는 몇 년 전 러시아 병사가 놓고 간 「성경」을 통해 더듬더듬 성경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하인 부부가 외출 뒤 집에 도착할 즈음 밖에서 루디밀라 부인이 자신의 집에 묵고 있던 사람들에게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부분을 읽어 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이어 성경을 듣던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을 부르고 회개의 기도를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하인은 밖에서 그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가사 한 절을 써서 그가 번역한 ‘주 하느님 크시도다’ 노래 가사에 덧붙였다. 그 후 몇 개의 절이 더해지면서 본래의 독일어 가사와 다소 다른 영어 가사의 노래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 성가가 2번 성가의 유래가 되는 개신교 찬송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인 것이다. 이 찬송가는 영국 선교사들이 식민지로 선교를 나갈 때 그곳에서 가르쳐주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미국에서는 쉐아(George Beverly Shea)라는 미국 찬송가 가수를 통해 유명해졌다. <가톨릭대 교회음악대학원 교수> 백영민2016.01.13
![[생활 속의 복음] 인간으로 태어나 알게 된 하느님](//cpbc.co.kr/CMS/newspaper/2016/06/rc/639552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인간으로 태어나 알게 된 하느님연중 제11주일(루카 7,36-8,3) 주수욱 신부(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주임) 어느 날 지구라는 별에 왔습니다60년도 더 된 과거의 어느 날, 나는 지구라는 별에 태어났습니다. 자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걸 모른 채, 인간으로서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억할 수 없는 과거 어느 날, 내가 인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지구에 내가 적응하는 것은 지금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수없이 많은 세포로 이뤄진 내 몸 안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발생하면 때로는 치명적이기도 합니다. 내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자라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남들이 정해 놓은 복잡하고 규격화된 삶의 기준에 적응해서 살아야 합니다. 말도 배워야 하는데, 인간이 사용하는 말은 동물들의 세계에는 없는 것입니다. 갈수록 섬세한 말을 알아들어야 하고 말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또 부모님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랑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쉬운 일인 것 같지만, 어른이 되어도 사랑받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일들에 무관심하면서 일생을 마치는 불행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어느 날 보니, 친구들도 나에게 경쟁 상대가 되어서 다가왔습니다. 이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평생 노력해도 잘 안 됩니다. 사춘기가 되어서 이성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기보다는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일 뿐입니다. 이성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이기주의로 살아가게 된다면 모두 죽어 버리고 맙니다. 인간이 죽는 것뿐만이 아니라 산천초목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쉽게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지구라는 별에는 하느님이 많이 있습니다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하느님(神)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많은 하느님이 존재합니다. 특히 무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사는 한국인의 역사 속에 많은 신이 등장합니다. 중국에 가도 그렇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위력 앞에 노출된 일본은 더욱 그렇습니다. 종교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인도에 가면 수많은 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신들, 아메리카 대륙의 신들도 무수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많은 신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많은 신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신을 그리워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 신이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20세기에 정치권력을 장악한 유물론적 공산주의는 끔찍하게 수많은 인간을 파괴하였습니다.하느님은 어떤 분인가?나는 어릴 적에 어머니와 함께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라틴어로 하는 미사에 끌려다니고, 사춘기에는 스스로 성당에 갔습니다. 그때에 예수라는 분이 서서히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온 세상에 예수님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은 싫어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이해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성모님은 절에 모신 부처님과 보살님 정도로 여겨지고 맙니다. 교회에 나와서 알게 된 신이나 세상에 많이 모습을 드러낸 신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맙니다. 즉,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시는 하느님, 잘못한 사람들에게 벌을 주시고 고통을 가하시는 하느님, 열심히 빌면 복을 내려주시고 화를 면하게 하시는 하느님으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볼 수 없으니 아무렇게나 하느님에 대해서 적당히 둘러대면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종교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알려진 하느님은 전혀 새롭습니다. 물론 성경이 기록된 그 시대와 그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낯선 하느님, 그러나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교회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성부로부터 파견된 아드님이십니다. 그분의 모습은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보면(루카 7,36-50)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파격적입니다. 그 고장의 유명한 창녀가 예수님께 행하는 행위들은 참으로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이 여인과의 만남에서 드러난 하느님은 인간이 예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르게, 많은 빚을 탕감해 주는 하느님, 인간에게 한없이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빚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말미암아 창조의 세계에서 주인처럼 살게 되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서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참고 1베드 1,4). 인간을 일방적으로 사랑해주고 그치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아야 하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연인 사이처럼, 인간과 사랑을 주고받고자 하는 하느님입니다. 올해 온 세상의 신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 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마음에 새기면서, 하느님을 닮아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cpbc2016.06.08
![[NIE-신문으로 크는 신앙] 천상의 소리...그레고리오 성가](//cpbc.co.kr/CMS/newspaper/2016/10/rc/657719_1.1_titleImage_1.jpg)
[NIE-신문으로 크는 신앙] 천상의 소리...그레고리오 성가 왜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이 붙었나요?그레고리오 성가는 64대 교황인 성 그레고리오 (Gregorius Magnus, 540?~604)의 업적에 따라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초기 그리스도교 성가에는 지역별로 로마 성가를 비롯해 갈리아(프랑스와 라인강 서부) 성가, 모자라빅(스페인) 성가, 고대 베네벤토(이탈리아 남부) 성가, 켈트(북서부 유럽) 성가 등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이러한 성가들 가운데 ‘로마 성가’와 ‘갈리아 성가’를 중심으로 나머지를 합하고 전례력에 따라 정리해 「안티포나리움」(응답송, 후렴을 모은 성가라는 뜻)을 편찬했습니다. 가톨릭 교회 초기 성가집인 셈입니다.그레고리오 대교황은 이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전례음악 교육을 위한 노래 학교인 ‘스콜라 칸토룸’도 세웠습니다. 성가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을 뿐 아니라 전례 음악의 정착에 힘을 기울인 것입니다. 이러한 공로로 성가에 ‘그레고리오’라는 교황 이름이 붙게 된 것이지요. 그레고리오 성가 덕분에 로마 교황의 주도로 서방 교회의 전례적 통일이 이루어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 세계 어느 지역의 성당에 가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노래하고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베드로라는 부제가 그레고리오 교황의 말씀을 받아 적을 때, 교황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비둘기 모습의 성령이 교황의 귀에 성가 멜로디를 들려줬다고 합니다. 한편 학계에서는 서기 750~810년께 센 강과 라인 강 사이 지역에서 그레고리오 성가 목록이 집대성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신이 ‘고대 로마 성가’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그레고리오 성가의 특징은 무엇인가요?첫째, 단선율의 성악곡(Vocal music)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 성가로서 미사와 시간 전례(성무일도)에서 사용됐습니다. 셋째, 가사는 대부분 성경의 내용, 특히 ‘시편’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라틴어로 돼 있습니다. 넷째, 리듬이 자유롭고 가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음정과 리듬보다는 가사 전달에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 예절을 돕는 가사를 더 강하게 잘 표현하기 위한 것이죠. 다섯째, 8개의 교회 선법(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는 8가지 방법)을 따르고 있으며, 여섯째로, 성가를 통해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기도하는 노래’라는 점입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전례헌장」 116항에는 “성교회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로마식 전례의 고유한 성가로 인정한다. 따라서 같은 조건이라면 이 성가가 전례 행위(의식)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흥망그레고리오 성가는 이미 9세기에 서유럽에서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서기 800~1050년에 ‘선 없는 악보’로 기록됐습니다.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고 밑에 가사를 쓰는 오늘날의 악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선 없는 악보는 가사만 있었고, 노래 음정이나 리듬은 부르는 이들이 암기해야 했다고 합니다.그러다 1050~1200년께 접어들면서 ‘선 있는 악보’로 기록됩니다. 이러한 악보들을 그레고리오 성가의 ‘고대수사본’(Paleographia)이라고 부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선 없는 악보, 곧 가사만 적혀 있는 악보가 가장 큰 권위가 있다고 합니다. 선 없는 악보를 통해서는 가사만 볼 수 있고 멜로디와 창법은 스승에게서 전수받음으로써 악보로 규격화되지 않은 멜로디와 리듬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선 있는 악보를 통해선 멜로디의 음높이를 올바로 파악할 수는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성가의 원천적인 표현력은 상실되기도 했습니다. 1200년 이후 사각 악보가 서서히 등장하면서 그레고리오 성가는 매우 거칠고 메마르게 기록되죠. 그러면서 1500년 후반에 와서는 그레고리오 성가가 ‘죽음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스승에게 창법의 감칠맛까지 전수받아 익혔던 성가를 음표로 기록하면서 표현력을 상실해 쇠퇴하게 된 것이죠.그러다 1800년대에 와서 프랑스 솔렘(Solemes) 수도원을 중심으로 다시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흥하려는 노력이 이뤄져 마침내 부활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특히 고대수사본을 중심으로 그레고리오 성가가 복원됐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위해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악보(집)는 「그라두알레 로마눔(Graduale Romanum)」(1975)과 다른 두 수사본의 악보를 첨가한 「그라두알레 트리플렉스(Graduale Triplex)」(1979)가 주로 사용됩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 미사 때면 성당에서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청소년 미사 때 생활 성가를 부를 때도 있지만, 가톨릭 성가의 기본은 ‘그레고리오 성가’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 들어보긴 한 것 같은데’ 하는 분들 있으시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미사를 비롯한 일곱 성사와 모든 경신 행위에 사용하는 고유 성가인 그레고리오 성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문채현2016.10.26
![[신앙단상] 신학원 풍경](//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7421_1.1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신학원 풍경이백만 요셉(캄보디아 하비에르학교 홍보대사) “교수님…, 예수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으셨나요? 어떤 소설에는 부인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공관복음 수업 시간이었다. 열성 학구파 자매님이 손을 번쩍 들더니,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교실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교수님이 심호흡을 한번 내쉬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세요?”그 질문에 그 대답! 학생들 모두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교실 안에 조성됐던 묘한 긴장감이 화롯불에 눈 녹듯 사라졌다.자매님이 몰라서 이런 질문을 했을까? 믿음이 약해서 물었을까? 아니다. 더 확실히 알기 위해, 더 강한 믿음을 갖기 위해, 보다 근사한 논리를 습득하기 위해, 저명한 신학박사이자 신부인 교수님에게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진 것이다. 교수님은 자매님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듯 ‘준비된 대답’을 술술 풀어나갔다. 고대 근동의 결혼 풍습, 예수님 독신의 의미, 이단들의 주장과 그에 대한 반박. 교수님은 설명을 마친 다음, 한마디 거들었다. “이번 학기 학생들은 질문이 무척 날카롭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학생들이 또 한 번 까르르 웃었다.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덕담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다들 좋아했다. 마치 초등학교 교실 풍경을 연상케 했다. 교수님들도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기초적인 개념을 이해하기도 어려운 철학 시간이었다.“신학을 배우려 오셨지요?” “네~!” “그런데…, 딱딱한 철학을 왜 공부해야 하지요?” “…….”다들 할 말을 잊은 채 교수님만 쳐다봤다. 곧이어 교수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한국 최고 신학자들과의 만남, 자유로운 질문, 진지한 토론, 그 속에서 깊어가는 신앙심….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난해 3월 가톨릭교리신학원에 입학했다. 주변 친구들이 아직도 의아해 한다. 왜 그곳에 갔느냐고 묻곤 한다. 마땅히 해 줄 말이 없다. “지은 죄가 많아서…”라고 눙쳐버린다. 1학년 때 구약성경을 가르쳤던 안소근 수녀님은 본인의 저서 「성경 펼쳐 읽기시편」에 저자 사인을 해주면서 이런 글을 써주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 들여라.” 그 친구들이 이 ‘맛’을 어떻게 알겠는가.신학원에 모인 40여 명의 학우는 누구인가.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의 백전노장들이다. 대부분이 환갑을 넘나드는 나이다. 손주를 둔 할머니 할아버지도 적지 않다. 무엇을 바라고 여기에 왔는가. 승진? 출세? 돈? 권력? 명예? 어느 것도 아니다. 인생 2라운드를 ‘그분’과 함께 보람있게 살고 싶은 마음, 그것뿐이다. 얼마나 선한 집단인가. 올해 개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전례에 관한 한 엄격하기 그지없는 수산나 자매님(전례부장)이 그날따라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뭔가 중요한 역할을 맡기려는 모양이었다. “요셉 형제님, 공동체 미사 때 보편 지향 기도 좀 해 주셔요! 신학원 학우들을 위해서….” “네!” 대답은 쉽게 했지만, 기도문 작성은 쉽지 않았다. 한참 고민했다. 시편 42장이 번뜩 떠올랐다. 학우들 모두가 영적인 갈증에 목말라하는 암사슴들 아닌가! “은총의 주님,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가톨릭교리신학원 학우들이 당신의 은총을 목말라하며 이곳 작은 배움의 공동체에 모였습니다. 불쌍한 저희가 당신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달아, 졸업할 수 있도록 은총의 단비를 내려 주소서.” cpbc2016.03.30
 2세기 ① - 사도 교부 시대 영성 생활](//cpbc.co.kr/CMS/newspaper/2016/12/rc/665837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6) 2세기 ① - 사도 교부 시대 영성 생활그리스도로 무장한 그리스도인 공동체 유배지에서 기적을 행한 죄로 닻에 묶인 채 흑해에 빠져 순교한 클레멘스 1세를 그린 피에르레오네게치 작 ‘성클레멘스의 순교’. 그동안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서 초세기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을 엿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초세기 말엽에서 2세기 중엽 사이에 위치한 사도 교부 시대 영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물론 사도 교부 시대 작품들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작품들을 통해서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영성 생활을 실천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사도 교부는 열두 사도들의 직제자이었거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습니다. 사도 교부는 지역 교회 주교로서 사목 활동을 하면서, 신자들을 격려하고 신자들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목적인 저술 활동도 겸했습니다. 로마의 교황 클레멘스(Clemes Romanus, ?~96/97),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티우스(Ignatiua Antiochenus, 105?~135?),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Smyrnensis, ?~167), 및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Papias Hierapolitanus, 60?~120?)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한편 비슷한 시기에 익명이나 가명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가 저술한 몇몇 작품들도 사도 교부 시대에 속한 작품으로 간주되어 이 당시 상황을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Didache ton dodeka apostolon)」, 「바르나바의 편지(Epistula Barnabae)」, 「헤르마스 목자(Pastor Hermae)」 및 「솔로몬의 송가(Odae Salomonis)」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사도 교부 시대 영성의 첫 번째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유다교와는 달리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는 일부 나타났던 유다교화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분간 교회 분위기를 하느님 중심보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끌어 가야 했을 것입니다.“우리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육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순수한 사랑의 힘과 겸손의 능력을 배워야 하고 순수한 정신으로 그분 안에서 거룩하게 살고 있는 모든 것을 구원하시는 그분께 대한 아름답고 큰 경외심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클레멘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21,8)“우리가 지금까지도 유다교를 따라서 살아간다면 이는 우리가 은총을 받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과 가까운 사람들인 예언자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습니다.”(이냐티우스, 「막네시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8,1~2)“누가 여러분에게 유다교에 관하여 가르치려 할 때 여러분은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할례받지 않은 사람에게서 유다교에 관해 듣는 것보다 할례받은 사람에게서 그리스도교에 관해 듣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면, 둘 다 제게 있어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묘비나 죽은 자들의 묘소에 불과합니다.”(이냐티우스, 「필라델피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6,1)전례 중심적인 영성두 번째 특징은 전례 중심적인 영성입니다. 예루살렘 모교회 신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빵을 떼어 나누어 먹으면서 날마다 성찬례를 거행했습니다. 이후 주님의 복음이 전달된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인은 성찬례를 거행하며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실현하고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발생한 이단자들은 성찬례와 성찬례를 통해 오는 주님의 은총을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사도 교부들은 각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할 수 있다는 점을 널리 알려야 했을 것입니다.“이 빵조각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끝들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이들이 아니면, 아무도 여러분의 감사(례)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말아야 합니다.”(「디다케」 9,4~5)“심지어 천상 존재들, 영광의 천사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통치자들과 볼 수 없는 통치자들이라도 그리스도의 성혈을 믿지 않는다면 그 또한 심판받을 것입니다. … (예수 가현 이단자들은) 성체와 기도를 멀리합니다. 저들은 성체가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살임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성체야말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수난하신 그리스도의 살이요, 아버지께서 자애로이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살인데도 말입니다.”(이냐티우스, 「스미르나인들에게 보낸 편지」 6,1; 7,1)“그 한 덩이 빵으로 말하면 불사의 약입니다. 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해독제입니다.”(이냐티우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20,2)수덕 생활 실천의 영성이 시대 영성의 세 번째 특징은 수덕 생활을 실천하는 영성입니다. 이미 바오로 사도도 나쁜 악습을 끊어버리고, 좋은 덕행을 증진시키도록 수덕 생활 실천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갈라 5,13-26 참조). 특히 사도 교부들은 수덕 생활이 이념 논쟁과 이단사상을 극복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덕을 완성하기 위하여 수덕 생활의 여정을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헤르마스는 저서를 환시, 계명, 비유의 세 부분으로 구성했는데, 거의 모든 부분에서 덕행과 악습을 비교 나열하면서 윤리 도덕적인 실천을 권고했습니다(「목자」, 셋째 환시; 여섯째~여덟째, 열두째 계명; 아홉째 비유 참조). 도덕적인 완성 없이는 그리스도의 성덕을 본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의로운 것에 뜻을 둔다면 그의 영예는 하늘에 쌓이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분명히 주님의 마음에 들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악한 것에 뜻을 두고 있는 이들, 특히 이 세상 것을 얻기 바라고 부를 자랑하며, 앞으로 선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 죽음과 속박을 부른다.”(「목자」, 첫째 환시, 1,8)폴리카르푸스도 ‘의로움’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다고 밝히면서, 그리스도인의 윤리 도덕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덕들을 갖추고 있다면, 그는 의로움에 관한 계명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실 사랑을 갖춘 사람은 모든 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 3,3) 따라서 그는 여러 곳에서 악습과 덕행 목록을 비교 나열했습니다.(「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 2,2; 4,3; 5,2;6,1; 12,2 참조)새로운 종교적 신념을 확립하려면, 이념적인 무장뿐 아니라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교부들은 그리스도로 무장한 그리스도인이 공동체로는 전례 안에서, 개인으로는 수덕 생활 안에서 영적 여정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백영민2016.12.28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8) 선교사 측근 양반 신자들의 행패에 맞서다](//cpbc.co.kr/CMS/newspaper/2016/12/rc/665691_1.0_titleImage_1.jpg)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8) 선교사 측근 양반 신자들의 행패에 맞서다선교사들의 양반 중심의 교회 운영, 불화의 불씨 돼 리델 주교가 그린 빗속의 가마 행렬. 페레올 주교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은 사목 여행 중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양반 신자와 건장한 신자와 동행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최양업 신부는 성경 속 초대 교회처럼 신자들이 살아가길 소망했다. 반상(班常)의 구분도, 차별도 없이 모두가 평등하며 신앙 안에서 화목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하는 공동체를 희망했다. 그래서 최 신부는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산속에서 교우촌을 이루고 사는 신자들을 좋아했다. 최 신부는 이들을 ‘열심한 신자’라고 불렀다. “신자들은 거의 모두 다 외교인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속에서 외교인들과 아주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거의 다 교리에도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으로 잘 지키고 삽니다. 그러나 평야 지대인 고향에서 친척들과 외교인들 사이에 섞여 사는 신자들은 대체로 교리에 무식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더 열심한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죄악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1850년 10월 1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그러나 당시 조선 교회 현실은 최 신부의 바람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신자 간 갈등과 불만이 극심해 와해할 조짐을 보였다. “우리 포교지의 상태는 신자 중에서 신분의 계급 차이로 서로 질시하고 적대시하므로 분열이 일어나서 큰 걱정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덕과 형제애가 부족하고, 계속되는 논쟁과 암투와 증오로 신자 공동체가 와해하고 비건설적으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이 폐단을 시정할 무슨 대책은 없는지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우리 포교지에 큰 손실을 초래할 것입니다.”(1854년 11월 4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서양 선교사들의 양반 중심 교회 운영이 갈등의 불씨였다. 최양업 신부 귀국 전 조선 교회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사목했다. 페레올 주교는 서울과 경기도를, 다블뤼 신부는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 지역을 맡아 사목했다. 최양업 신부 귀국 직후인 1850년 초 두 선교사는 모두 병에 걸려 있었다. 특히 다블뤼 신부의 병세가 위중해 최 신부가 그의 사목지를 대신 맡았다.박해시대 교우촌을 찾아가는 서양 선교사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박해자와 비신자들의 눈을 피해 상복을 입고 한밤중 외딴길을 이용해 몰래 교우촌을 찾아가는 선교사의 모습을 일반적으로 상상한다. 하지만 현실은 사뭇 달랐다. 양반 신자와 완력을 쓰는 이들을 대동해 말과 가마를 타고 요란 법석하게 다녔다. 선교사들이 박해자의 눈을 피해 안전하게 사목 여행을 하기 위해선 이들의 든든한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우리는 기품을 하나도 잃지 않고 어디든지 양반 행세를 하며 다녔어. 그날부터 우리는 계속 우리가 가는 주막마다 방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을 몰아내었지. 그러면 어떤 때는 그 가엾은 사람들은 추위에 몹시 떨어야 했어.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서 자야 하니까. 난 마음속으로 그들을 불쌍하게 여겼지.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어? 이렇게 하는 것이 불행한 만남을 피하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걸.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야말로 세르베로(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을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린 개)로 행동했지. 엄한 말투로 말하고 가끔은 협박도 하고, 조선의 양반들이 평소에 하는 대로 했어.”(다블뤼 주교, 1848년 8월 동생에게 보낸 편지)문제는 선교사들의 양반 수행원들이 교우촌 신자들에게까지 위압적으로 행세했다는 것이다. 교우촌 신자들은 선교사들의 사목 방문 때마다 양반 수행원들 행패에 모욕을 감수하며 접대해야 했기에 불만이 컸다. “페레올 주교님이 생존하셨을 때 신자들 사이에 말이 많아 주교님을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페레올 주교님께서 당신을 보좌하는 복사들을 잘못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 복사들은 크게 비난받을 짓을 많이 범하고서도 양반임을 내세워 항상 너무 거만한 행세만 부리므로 모든 교우한테 미움을 샀습니다. 그러나 유독 페레올 주교님께서는 그들만 사랑하고 신임하시어 그들하고만 모든 일을 의논하셨습니다. … 페레올 주교님은 양반 계급만 너무 편애하시어 이미 너무나 비참하고 억눌려 있는 일반 서민들을 더욱 억누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자들 사이에 나날이 더욱 불화가 심해지고 많은 이들이 의분을 느끼고 자포자기에 빠졌습니다. 또한, 교우들의 열심이 나날이 감퇴되어 가고, 악한 사정이 더욱더 악하게 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1857년 9월 15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선교사 측근들의 전횡을 보다 못한 최 신부는 페레올 주교에게 직접 그들의 폐단을 지적했다. “제 생각에 이를 그대로 두면 주교님께도 해로울 것이고 일반 교우들에게도 손해가 되겠기에, 주교님께 여러 번 서한도 올리고 직접 면담하면서 그들을 내보내시라고 진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저는 주교님께 큰 꾸중만 들었고, 저 복사들로부터는 큰 미움을 샀을 뿐이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최 신부는 조선의 양반 제도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고 백성들의 온갖 비참함의 원인으로 인식했다. “조선의 양반 제도 아래에서는 형제의 우애와 애덕이란 것이 있을 수 없고, 천부적 인권은 완전히 무시됩니다. … 그리스도의 정신에도 위배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실행으로 항상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들의 편을 드시고,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에게는 혹독하게 대하셨습니다.”(같은 편지에서)최양업 신부는 조선 사회에 만연한 고질적인 신분제를 반대했다. 신분 차별 없이 그 사람의 출생 성분을 따지지 않고 재능과 인격만으로 평가받는 사회를 희망했다. 그래서 그는 측근에서 시중드는 복사들 말만 듣고 판단을 그르치거나 그릇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자신과 신자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제대로 익힌 다음 선교사를 파견해줄 것을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정식으로 요청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평화신문2016.12.27
![[생활 속의 복음]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 말씀](//cpbc.co.kr/CMS/newspaper/2016/10/rc/656842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 말씀전교주일 (마태 28,16-20) 주수욱 신부(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주임) 마태오 복음서 맨 마지막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교회는 매년 전교주일에 듣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전교 또는 복음화의 내용을 이 말씀에 따라서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분께 엎드려 절하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었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괘씸하게 생각해 심하게 나무라셨을 텐데 예수님은 전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부족한 신앙을 탓하지 않으시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제자들과 함께 복음화 사명을 계속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저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더러는 십자가와 부활의 스승 예수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많은 의심을 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심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우리를 동업자로 여기면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고 계십니다.먼저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은 분임을 밝히십니다. 광야의 유혹 때, 악마는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그것들을 주겠다고 속삭이면서,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도록 유혹했습니다(마태 4,9-10).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만을 섬기면서 십자가 죽음까지 묵묵히 나아가시고, 마침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천지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음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파스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권한에 참여하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됐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기도를 겸손하고 진실하게 바쳐야 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종교인을 만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실천하고, 그분의 모범을 뒤따르는 제자가 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을 하는 교회의 사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는 표현을 쉽게 합니다. 그래서 듣기 싫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예언자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제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마음의 표시로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해 선택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오늘 교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쉽게 교회에 올 수 없습니다. 교회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용기가 필요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십사고 성령께 간절히 기도합니다.“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달리 표현하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사람들을 새롭게 탄생시켜라.’ 왜냐하면 하느님을 떠난 인간은 새로운 탄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비참해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다가 사라지도록 사람들을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엄하게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인간이 서로 신뢰하면서 살 줄 알게 해줘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할 줄 알도록 해줘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하느님 자녀로서 새로운 탄생을 가져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나라로 완성돼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 빛과 생명 속에서 살고, 진리와 참된 자유 속에서 살고,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지금 시작돼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평화신문2016.10.19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16)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cpbc.co.kr/CMS/newspaper/2016/09/rc/653346_1.0_titleImage_1.jpg)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16)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공관 복음서 복음서에서 읽게 되는 몇몇 이야기들에는 각 복음서가 지니는 특징을 비교해 볼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의 논쟁(마태 15,1-20; 마르 7,1-23)과 한 여인의 이야기(마태 15,21-28; 마르 7,24-30)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서는 사건의 흐름으로 볼 때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반면 루카에서는 동일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루카는 손을 씻는 정결례와 관련된 비슷한 내용을 전하지만(루카 11,37-41), 전체적인 이야기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은 이 내용을 전하지 않습니다.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네 복음서의 관계입니다. 우선 요한 복음은 복음서의 구성이나 내용에 있어서 공관 복음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요한 복음이 공관 복음과는 다른 예수님에 대한 전승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공관 복음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비슷합니다. 이것은 세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한 같은 전승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공관 복음은 두 가지의 자료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두 자료는 ‘마르코 복음서’와 예수님의 말씀만을 모아 놓은 ‘어록집’(Q)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마르코 복음이 마태오나 루카 복음보다 먼저 기록된 복음서이고, 아마도 마르코와 비슷한 시기에 ‘어록집’ 역시 기록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근거가 됩니다. 마태오와 루카 복음은 이 두 출전, 곧 마르코 복음과 어록집을 기반으로 해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록된 복음서는 그들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위 그림 참조>루카 복음은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에 큰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이것은 루카 복음이 지향하는 독자들이 유다인들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또는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르코는 이 이야기를 전하긴 하지만 식탁에 앉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유다인들의 관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마르 7,3-4). 아마도 마르코 복음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모두를 독자로 삼았을 것입니다. 동일한 내용을 전하는 마태오는 마르코 복음에서 설명하는 정결례에 대한 설명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태오의 독자들은 이미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던 유다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공관 복음은 하나의 이야기를 전할 때에도 자신들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한 여인의 딸을 치유하는 이야기 역시 비슷합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방인 출신이었습니다. 마르코는 그녀를 시리아의 여인으로, 마태오는 가나안의 여인으로 기억합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 여인은 재치있게 답합니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서 믿음을 보았고 여인의 청을 들어줍니다. 마태오 복음의 특성마르코 복음과 비교해서 마태오 복음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마태 15,24). 이 표현 역시 마태오 복음의 특성을 잘 드러냅니다. 마태오는 자신들의 독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처음의 목적이 ‘이스라엘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구약 성경의 전통을 이어 예수님의 구원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 곧 유다인들을 향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마태오 복음의 이런 시각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거부했고, 이제 예수님의 구원은 유다인들만이 아닌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 됐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마태오 복음서의 특징입니다. <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평화신문2016.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