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이야기] (50·끝) 부활의 증거 (2)사도들의 변화](//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8190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50·끝) 부활의 증거 (2)사도들의 변화부활하신 예수님 만나 ‘새 사람’이 된 사도들 사도들의 영적 변화는 예수님 부활의 역사적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은 안니발레 카라치, ‘아피아 가도에서 성 베드로에게 나타난 그리스도’, 1601~1602, 유화, 런던내셔널갤러리.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8).그리스도 부활에 관한 바오로 사도의 증언이다. 빈 무덤과 사도들의 영적 변화가 예수님 부활의 표징이라고 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들의 온 실존이 송두리째 사로잡히고 압도당하는 체험을 하게 되고, 이제 그분을 구세주 그리스도로서 만방에 선포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예수님 부활 사건의 명백한 역사적 증거이다(박준양, 「그리스도론」 329쪽).사도를 뜻하는 헬라어 ‘αποστολοs’(아포스톨로스)는 ‘사명을 받아 파견된 자’라는 뜻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시작 1년 후 두 번째 파스카를 맞기 몇 주 전 오천 명을 먹이시는 빵의 기적’(요한 6,1-5; 마르 6,32-44; 루카 9,10-17)을 행하시기 앞에 그를 따르던 수천 명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선정하셨다(마태 10,1-4; 마르 3,13-19; 루카 6,12-16). 예수님께서는 직접 뽑은 열둘을 사도라 부르시며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다(마르 3,14-15.16,15-18).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실 때 하느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먼저 기도하셨다(루카 6,12).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4)하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요한 16,6)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6,18-19)라며 사도들을 파견하셨다. 이처럼 사도들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시하신 이를 예수님께서 직접 뽑아 아버지의 이름으로 주님의 권위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파견한 이들이다. 이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가르침을 듣고 음식을 나누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앞에 궁극적으로 구원받은 새로운 영의 사람이 된다.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 간의 관계이다. 복음서에서 12사도들의 이름 가운데 늘 첫 번째로 나오는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께로부터 “너는 행복하다”(마태 16,17)는 축복과 함께 ‘케파‘(베드로,반석)라는 새 이름을 받고 사도들의 으뜸이 됐다. 원래 그의 이름은 ‘시메온’이었다. 시몬은 헬라식 이름이라고 한다.복음서에는 베드로 사도의 아버지 이름이 ‘요나’(마태 16,17)와 ‘요한’(요한 1,12. 21,15)이라고 서로 다르게 나온다. 대부분 성경학자는 ‘요한’이 맞을 거라고 보는 편이다. 베드로 사도를 예언자 요나와 연관시키고자 마태오 복음서 저자가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바꾸었다는 견해가 가장 많다.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마르코 복음은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들에게 웬 젊은이가 나타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마르 16,7) 일러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는 기다렸다 베드로가 먼저 들어간 다음 뒤따라 갔다(요한 20,1-6). 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9)며 수위권을 주셨다. 그리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는 흰옷 입은 두 사람의 예언을 사도들은 신앙으로 고백했다. 사도들로부터 시작된 이 고백은 사도들의 후예인 주교들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이라고 외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그동안 ‘복음 이야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평화신문2015.04.28
 “나는 유배자들과 함께 크바르 강 가에 있다”(에제 1,1)](//cpbc.co.kr/CMS/newspaper/2015/08/rc/589503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느 구약 여행](37) “나는 유배자들과 함께 크바르 강 가에 있다”(에제 1,1)하느님이 떠난 이유는 그들에게 있었다 아시리아 커룹, 부조. 성경을 공부하고 싶은데 지리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다든가, 아니면 역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든가 하는 경우들이 있지요. 특히 연대표에 약하신 분들에게 에제키엘서는 고마운 책입니다. 군데군데 예언자가 언제 이러한 말을 했는지 정확히 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연대들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단 하나의 연대만 외우려고 한다면 반드시 외어야 할 연대인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의 파괴, 바빌론 유배를 중간에 끼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제키엘은 대략 기원전 592년부터 571년 정도까지 활동합니다.유배 전 예언자들은 나름대로 특징이 있고, 유배 중-유배 후 예언자들은 또 나름대로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제키엘은 한 사람의 예언자가 두 시대에 걸쳐 활동하면서, 587년 이전에 선포한 내용과 그 후에 선포한 내용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대략 말한다면 유배 전 예언자들은 심판을 선고하고, 유배 중-유배 후 예언자들은 구원을 선포하지요. 그런데 에제키엘은 한 사람이 그 두 가지 모두를 선포합니다. 1─24장에서는 주로 심판을 선고하고, 이민족들에 관한 예언이 나온 다음(25─32장) 마지막 33─48장에서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심판과 구원의 분기점이 되는 것이 유배입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심판을 선고한 부분을 읽어 보겠습니다.하느님의 집이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인가? 정확히 말한다면,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고 왕국이 멸망하기 10년 전인 기원전 597년에 이미 제1차 유배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임금이던 여호야킨을 비롯하여 중요한 인물들이 이때에 유배를 갔고, 사제였던 에제키엘도 바빌론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에제키엘서 1장 1절에서 에제키엘은 “유배자들과 함께 크바르 강 가에” 있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유배를 가 있는 그곳에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에제 1─3장).하지만 이 시기에 아직 사람들은 유배라는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나라가 멸망한 것도 아니었고, 처음 유배를 갔던 이들은 이 유배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곧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제키엘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배 전 예언자의 특징, 심판 선고이지요. 그는 이미 있었던 것보다 더 큰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말리라고, 성전까지도 파괴되는 일이 일어나리라고 말합니다.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인가? 성전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하느님의 집이 아닌가? 아무리 외적이 쳐들어와도, 그 성전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이 아니던가? 만일 바빌론군이 쳐들어와 성전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바빌론의 신 마르둑이 우리의 하느님 야훼보다 강하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이러한 질문들은 나름대로 근거도 있었습니다. 2장에서 에제키엘을 예언자로 부르시면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 마음이 완고해서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도 있지만(에제 2,4 참조), 신학적으로도 예루살렘의 함락이란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사야 시절에는 예루살렘을 지키시는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에는, 하느님의 천사가 하룻밤 사이에 아시리아군 십팔만 오천 명을 친 일도 있지 않았던가요? 이 시기에 에제키엘이 한 일은, “어떻게 예루살렘이 함락될 수 있는가?”라는 신학적 질문에 대답한 것이었습니다.8장에서 에제키엘은 환시를 봅니다. 바빌론에 유배가 있는 에제키엘에게 하느님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가 본 장면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한 장면 한 장면을 보여주실 때마다 하느님은 “너는 더 역겨운 짓들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주님께 등을 돌리고 온갖 종류의 우상들을 숭배하고 있고, 심지어 성전에서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성전에서 떠나가게 하려고 그런 짓들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성전을 떠나기로 작정하시고, 10장에서는 주님의 영광이 성전 동쪽 문으로 나와 그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커룹들을 타고 성전을 떠나십니다. 이제 성전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성전이 무너지기 전에 떠나신 하느님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는 것은, 바빌론군이 성전을 공격할 때 하느님이 그들보다 약해서 밀려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빌론군이 오기 전에 하느님은 먼저 성전을 떠나셨고,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예루살렘이 함락될 수 있는가?”에 대한 에제키엘 예언자의 대답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원인은 하느님의 무력함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원인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성전에서 떠나시게 했고, 그래서 바빌론군이 성전을 불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바빌론 유배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성전이 불타 없어진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땅이 꺼지는 것과 같은 사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 성전을 지킬 힘이 없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떠나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과 함께 머물 수 없으십니다.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5.08.26

‘미국 한인 가톨릭공동체의 반석’ 박창득 몬시뇰 선종24일 메이플우드 한인성당에서 장례미사 봉헌… 염수정 추기경 조문박창득 몬시뇰‘미국 한인 가톨릭공동체의 반석’으로 불리는 뉴왁교구 박창득 몬시뇰이 18일 오후 4시 44분께(미국 시각) 미국 뉴저지주 메이플우드 한인성당 사제관에서 선종했다. 향년 81세. 고인의 장례미사는 24일 오전 10시(미국 시각) 메이플우드 한인성당에서 봉헌되며, 유해는 뉴저지 프랭클린 호 옆 그리스도 왕 공원묘역에 안장된다. 1935년 2월 충북 청주 태생인 박 몬시뇰은 15세 때 충남 서산중 3학년 재학 중 6ㆍ25전쟁의 와중에서 성소를 느껴 성신고에 들어갔으며, 1961년 3월 가톨릭대 신학과를 나와 그해 3월 20일 대전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961년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1962년부터 65년까지 군종사제로 복무했으며, 제대한 뒤 다시 대흥동본당에서 보좌로 사목했다. 이어 1966년 로마로 유학을 떠나 1967년 로마 안젤리쿰대학에서 종교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니아 주 포코노에 있는 성 마리아본당 보좌, 뉴저지 주 저지시티 승리의 성모 본당 보좌로 있으면서 사회학 공부를 계속했다. 뉴저지 주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인성당에서도 주임을 지냈다. 이어 1986년 5월 30일 미국 뉴왁대교구로 적을 옮겨 뉴저지 한인천주교회(종전 오렌지카운티 한인성당, 현 메이플우드 성당)을 중심으로 현재의 여러 뉴저지 주 한인 성당을 공소 형태로 설립했다. 1978년엔 뉴욕대교구 스테튼 아일랜드 한인 공동체 설립에도 밑거름 역할을 했다. 1983년에는 애틀랜틱 시티에, 1984년에는 이튼타운과 포트딕스에 공소를 설립해 뉴저지 중남부의 신자들에게도 사목의 손길을 뻗었다. 1986년에는 포트리에 공소(현 새들브룩 103위 성당)를 설립했고, 1989년에는 데마레스트 공소를, 1991년에는 뉴브런스윅 공소(현 메투천성당)를 세웠다. 설립하는 한인 가톨릭 공동체마다 성령운동과 매리지 엔카운터(M,E), 청소년 안티옥 프로그램 등 여러 신심운동을 도입해 한인공동체를 성소의 못자리로 만들었다. 특히 구역회를 통한 성경묵상운동을 전개해 큰 성과를 거뒀다. 또한, 1983년 북미주 한인사제협의회를 설립하고 12년 동안 회장을 맡아 미주 한인 가톨릭공동체를 활성화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1984년 미국 주교회의 이주ㆍ관광사목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미주 「가톨릭 다이제스트」와 미주 「매일미사」, 미주 「평화신문」등을 창간해 신자들의 신심생활을 도왔다. 또한, 중국은 물론 북한을 30여 차례나 방문해 북방 선교는 물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도 헌신했다. 간암 투병 중이던 지난 8월에도 아들 신부인 조후연(메이플우드한인본당 주임) 신부와 함께 자신이 북한 나진ㆍ선봉지구에 설립한 유치원을 방문해 북녘 어린이들을 만나고 돌아오기도 했다. 한편 제8차 세계가정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인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메이플우드 한인성당에 마련된 박창득 몬시뇰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cpbc2015.09.22
![[생활 속의 복음] 어디서 오는 기쁨인가요?](//cpbc.co.kr/CMS/newspaper/2015/12/rc/608193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어디서 오는 기쁨인가요?대림 제3주일(루카 3,10-18) 주수욱 신부(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주임) 지난 본당에 있을 때 일이었습니다. 동네의 작은 종합병원에 환자를 찾아보기 위해 들어섰더니,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환자가 본당 신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습니다. 엉겁결에 생수 한 병을 사드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 교우를 성당에서 만났습니다. 그때까지도 그분에게는 본당 신부가 생수를 사줬다는 감동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아들이 자폐아입니다.그 아들이 길거리를 한없이 걷는데, 엄마가 함께 걸어야 한답니다. 젊은 아들과 무한정 걸어야 하니 엄마는 얼마나 고된 지 모릅니다. 집에서는 살림을 살아야 하고, 낮에는 직장에 가서 일하고, 아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함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길을 걷다가 아들이 갑자기 차가 쌩쌩 달리는 길로 뛰어들려 해서 그 녀석을 잡다가 보니 어깨 인대가 늘어났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 어깨 인대 수술을 했더랍니다. 아들은 중증의 자폐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그 엄마를 통해서 저는 매주 성당에서 자폐아 엄마들과 함께 매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생활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서울과 인근 지역에서 많게는 15명이 모여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생활과 복음을 곧잘 연결해서 나눕니다. 이곳은 항상 울음이 많은 자리입니다. 그때마다 다른 엄마들이 위로해주고, 함께 지혜를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그 모임이 끝날 때 보면 놀랍게도 기쁜 얼굴을 하고 연이어서 말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이처럼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대놓고 감사하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고통을 피하기 바쁘고, 고통 속에서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만 하지, 변하지 않은 그 상황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릴 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분들한테서 신앙의 한 수를 배웁니다. 분명 이분들을 통해 제가 복음화되고 있습니다.저는 혼자 있을 때 자주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그런 고통을 겪으며 살면서도 어떻게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 어떻게 기쁨을 간직할 수 있을까? 가끔 강한 의문이 듭니다. ‘그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괜히 본당 신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가?’ ‘그렇지만 신자들이 본당 신부에게 보이려고 거짓으로 기뻐하는 것과 진실한 기쁨을 내가 구별도 할 줄 모를까?’고통 중에 있지 않은 이들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주 외면합니다.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는 고통받는 약자들,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죄지은 것도 없는데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사실은 그렇게 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을 몰고 가는 사회가 죄지은 사회이고, 그렇게 주동하고 또 따라가는 사람들이 죄인들이지요.그 기쁨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마술적으로 옵니까? 아닙니다. 하늘에서부터 오는 기쁨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극심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기쁨을 간직하고, 그 암울한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감사를 돌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들은 진짜 기쁨이고 하느님께 진심으로 하는 참된 감사입니다. 하느님은 심술이 많으신 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서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걸 내버려두시고, 고통이 많은 사람은 감사할 줄 알게 하시는 분인가 봅니다.그런데 하늘에서 오는 기쁨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노래 가사처럼 별을 따오듯이 하늘에서 기쁨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께 가서 기쁨을 선물로 받아올 수 있나요? 분명히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쁨을, 특별히 고통을 많이 받으면서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사는 사람들이 그 기쁨을 누립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기쁨입니다. 바로 베들레헴 마구간의 성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올해도 성탄을 기다리면서 이미 우리에게 선물로 온 기쁨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cpbc2015.12.09
![[성경 속 생명 이야기] 8. 하느님 의식과 인간 의식의 실종](//cpbc.co.kr/CMS/newspaper/2014/03/rc/502282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생명 이야기] 8. 하느님 의식과 인간 의식의 실종이명기 수녀(가톨릭대 ELP학부대학 교수) 사도 바오로는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한다"(로마 7,22)고 했고, 그리스도교 영성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존재의 기반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분리나 거리를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없이 사는 삶을 추구하는 사회 문화 풍조 안에서 하느님 의식이 실종될 때 인간 의식 곧 인간 존엄성과 생명 의식도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생명의 복음」 21항 참조). 카인이 아우를 죽인 사건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하느님의 저주를 들은 카인은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합니다"(창세 4,14) 하고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카인의 이런 의식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고 주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간 자신을 만들어냅니다. 그가 만들어낸 자기는 "하느님 앞에 몸을 숨겨야 한다"고 했으니 진짜가 아니라 가짜 곧 거짓 자기인 것입니다. 카인은 몸을 숨김으로써 하느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몸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환상입니다. 어린 아이가 자기 부모에게 안 보이게 하려고 눈을 감는다고 합시다. 스스로는 그렇게 하고 부모에게서 떨어져 있다고 믿겠지만 착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아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면서 사랑을 계속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하느님 의식이 사라지면 인간 의식도 위협받고 훼손된다는 사실을 이렇게 천명합니다.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피조물 자체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사목헌장」 36항). 이렇게 되면 인간은 생명을 더 이상 하느님의 빛나는 선물로, 자신의 책임에 맡겨진 따라서 사랑으로 보살피고 존중해야 할 신성한 어떤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생명 자체가 단순히 사물이 되고 맙니다(「생명의 복음」 22항 참조). 하느님 의식의 실종과 인간 생명 의식의 실종에는 사회의 책임도 있습니다. 사회가 생명에 반하는 행위들을 용인하고 조장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생명을 거스르는 실제적 '죄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강화하는 '죽음의 문화'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대 세계의 대부분은 사도 바오로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묘사하고 있듯,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1,18)로 이뤄져 있으며, 하느님을 부인하고 하느님 없이 스스로 지상의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1,21). 또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할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1,32). 양심이라는 영혼의 밝은 등불이(마태 6,22-23 참조)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나쁜 것을 좋다"(이사 5,20)고 할 때 가장 위험한 부패의 길로 접어든 것이며, 가장 어두운 도덕적 맹목의 길로 접어든 것입니다(「생명의 복음」 24항 참조). 어떻게 거짓 나를 깨우치고 참 나로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을까요? 카인은 하느님이 주신 형벌에 대해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창세 4,13) 하고 말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 죄가 지닌 중대성을 완전히 깨닫는 것은 진정 주님 앞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생명의 복음」 21항 참조). 이는 다윗(시편 51,5-6 참조)과 돌아온 탕자(루카 15,11-32 참조)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카인과 다윗과 탕자는 하느님을,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코 카인과 다윗과 작은아들을 떠나지 않으셨으며, 그들이 당신의 자녀가 아니라고 여기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로부터 멀리 떠난 자녀들을 단죄하거나 당신과 분리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떠난 이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비현실적인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참 자기로 돌아오는 것밖에는 생명을 회복할 다른 길이 없습니다. cpbc2014.03.25
![[원주교구장 임명] 우직하고 원리원칙 지키면서도 사랑 많은 목자](//cpbc.co.kr/CMS/newspaper/2016/04/rc/628483_1.2_titleImage_1.jpg)
[원주교구장 임명] 우직하고 원리원칙 지키면서도 사랑 많은 목자조규만 주교 삶과 신앙 조규만 주교는 1968년 소신학교(성신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본당 주임이었던 고(故) 이창숙 신부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결정적이었다. 이 신부는 “왜 소신학교에 입학원서를 내지 않았느냐. 신학교에 가야지”라고 했고, 조 주교는 이에 “네”라고 응답했다. 소신학교 시절 6년 내내 반장이었던 조 주교는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그와 학교를 같이 다닌 동기나 그를 가르쳤던 교사들은 조 주교를 ‘우직하고 꾀부리지 않는 성실한 학생’으로 기억한다. 군종 신부 꿈꿨지만 “유학가라”는 말씀에 “네”조 주교는 아버지 조시환(아우구스티노)씨와 어머니 지복련(클라라)씨 슬하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조 주교 집안은 할머니 때부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는데, 개신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결혼하면서 가톨릭 신자가 됐다. 군인이던 아버지 영향을 받은 조 주교는 1982년 사제품을 받은 뒤 군종 신부가 되고 싶어 했다. 연희동본당 보좌를 지내며 그런 마음을 먹고 있던 조 주교에게 경갑룡(당시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는 유학을 권했다. 이번에도 그는 역시 “네”라고 답했다. 훗날 조 주교는 “하느님께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셨다. 나는 유학이라는 걸 꿈꿔 본 적이 없었지만, 로마로 유학 가서 하느님과 성모님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게 됐다. 사제로 살아가는 데는 그것이 훨씬 도움됐음이 틀림없다”고 회고했다. 조 주교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유학하며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귀국한 그는 가톨릭대 신학대 교수로 부임했다. 신학교에서 지낸 시간은 조 주교에겐 사제 생활의 황금기였다. 조 주교는 신학생에게 큰형 같은 존재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신학생들과 축구 경기를 하며 함께 몸을 굴리고 땀 흘릴 줄 아는 사제이기도 했다.겉으론 딱딱해 보일지 몰라도 알고 보면 사랑과 정이 많다는 게 제자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그는 당시 200여 명이던 신학교 전교생 이름을 모두 외우고 있을 정도로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 “조규만 주교님은 항상 어머니 같은 따뜻한 사랑으로 사제를 사랑하는 분이었다. 사제가 어머니 같은 사랑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조 주교가 주교회의 사무처장으로 임명돼 신학교를 떠날 땐, 그를 형처럼 따르던 신학생들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조 주교는 온화한 성품이면서도 원리원칙을 지키는 덴 철저했다. 특히 신학적으로도 가톨릭 교회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전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조 주교를 아는 이들은 “조 주교가 맡은 일은 철두철미하게 하고 할 말은 분명하게 다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부드럽지만 강직해서 경우에 어긋나는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 동기 신부는 “조 주교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조 주교는 주교회의 사무처장으로 재임하던 중 2006년 1월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됐다.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교 표어로 택한 조 주교는 주교 서품식 때 ‘제가 여러분을 위해 있다는 것은 저를 두렵게 하지만, 제가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것은 저를 기쁘게 합니다’라고 말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말을 빌려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그는 언제나 사제, 신자들 곁에서 함께 했다. 교황방한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 맡아 진행 조 주교가 잊지 않은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유머다. 그는 강의나 강론할 일이 있을 때면 늘 우스갯소리를 하나씩 준비해 오곤 했다. 진지하게 강론을 이어가다 “요즘 이런 말이 있답니다”라며 준비한 우스갯소리를 들려줘 딱딱한 분위기를 한순간에 풀곤 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허영엽 신부는 “(무덤덤하게) 툭 던지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굉장히 노력해서 준비한 이야기”이라고 귀띔했다. 우스갯소리 하나도 철저히 준비할 만큼 조 주교는 주교 직무를 세심하게 수행했다. 우직하고 원리원칙을 지키는 성품으로 교구장을 보좌했고, 2014년엔 서울대교구 총대리가 됐다. 또한 2014년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사목방문이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었던 것도 조 주교 역할이 컸다. 조 주교는 당시 교황방한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최일선에서 여러 교구와 각계각층 의견을 수렴하고 조율했다. 조 주교와 함께 일했던 이들은 “묵직하게 중심을 잡아주셨기에 일이 잘 진행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청소년·청년 사목에 각별한 애정 조 주교는 또 청소년 담당 교구장 대리, 2006년 신설된 주교회의 청소년사목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내며 청소년ㆍ청년 사목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주교회의 청소년사목위원회는 2007년 제주교구에서 제1회 한국청년대회를 성대히 개최하며 한국 교회 청년 사목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매년 12월 성탄 때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찾았던 조 주교는 노숙인 복지시설, 소년의 집, 구치소 등에서 예수 성탄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고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을 몸소 전했다. 조 주교는 2014년 4월 열린 제1회 한국가톨릭교육실천네트워크 배움콘서트에서 가장 아끼는 물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성경」 「가톨릭교회 교리서」 「준주성범」”이라고 답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버킷리스트)이 무엇이냐는 물음엔 “은퇴하면 기도학교를 세우고 싶다”고도 했다. 교회 가르침과 기도. 그의 삶을 지탱해 온 두 가지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조규만 주교 약력 1955년 6월 8일 부산 출생 1982년 8월 26일 사제 수품 1982년 9월~1984년 5월 서울대교구 연희동본당 보좌 신부 1984년 6월~1986년 6월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 교의신학 석사 1990년 4월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 교의신학 박사 1991년 9월~2006년 1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2004년 2월 9일~2009년 2월 교황청 신앙교리성 국제신학위 위원 2004년 3월~2006년 3월 주교회의 사무처장 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2006년 1월 3일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엘레판타리스 인 프로콘술라리 명의 주교) 임명 2006년 1월 25일 주교 수품 2006년~2014년 2월 서서울 지역 담당 교구장 대리, 서울대교구 청소년 담당 교구장 대리 주교 2006년 10월~2012년 12월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신학위원회 주교 위원 2006년 10월~2010년 3월 주교회의 청소년사목위원회 위원장2010년 3월~2016년 3월 주교회의 신앙교리위 위원장2014년 2월~2015년 8월 서울대교구 중서울 지역 담당 교구장 대리 주교 2014년 2월~ 현재 서울대교구 총대리 2016년 3월 15일~ 현재 주교회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 위원장 2016년 3월 31일 원주교구장 임명 cpbc2016.04.05
![[성경속 궁금증] 98-끝. 성경에서 착한 목자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cpbc.co.kr/CMS/newspaper/2013/12/rc/488184_1.0_titleImage_1.jpg)
[성경속 궁금증] 98-끝. 성경에서 착한 목자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자비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상징… 양들과 함께 지내며 양 냄새 나는 목자 필요필립 드 샹페뉴 '착한 목자', 17세기께, 유화, 프랑스 포르루아얄 데 샹 미술관. 평소 이해하기 쉬운 강론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봄에 사제들을 향해 "목자에게서는 양 냄새가 나야 한다"고 말했다. '목자'라는 칭호는 고대 왕들에게도 자주 붙였다. 당시 사람들은 왕을 지상의 대리자로 생각했는데, 이것이 왕을 목자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그만큼 목자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성경에서는 목자와 양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스라엘 지역의 목자는 이른 아침에 양 떼를 데리고 풀밭으로 나온다. 온 종일 양들의 먹이와 물을 찾아서 여기저기로 옮겨다닌다. 우리가 보기에는 양들이 목자를 보고 쫓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 양은 시력이 아주 떨어져서 바로 앞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자들은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를 지르고, 지팡이로 땅을 치기도 하면서 양들을 몰곤 한다. 그 소리를 따라 양들이 한 방향으로 따라가는 것이다. 목자는 들에서 양을 치다가 밤에는 비와 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곳에서 양들과 함께 지내야 했다. 좋은 목자에게 양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언서와 시편에서 이스라엘의 목자는 종종 하느님을 비유하는 말로 등장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양 떼를 돌보는 착한 목자'라고 소개하신다(요한 10,11-16 참조). 착한 목자는 양을 어깨에 들쳐 업은 목자의 형상으로, 자비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1). 이 착한 목자의 이미지는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마태 18,10-14)에서 유래한다. 예수님은 실제로 당신 양 떼를 위해 목숨을 내어준 착한 목자이시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의 영광 속에 빛나는 착한 목자로 제시하곤 했다. 또한 전례에서도 예수님을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착한 목자로 찬양한다. 착한 목자의 아름다움은 양 떼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큰 사랑에 있다. 그러한 사랑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즐겨 찾을 줄 아는 큰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을 착한 목자라고 하는 것은 양들을 돌보시는 그분의 헌신적 사랑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신 착한 목자이시다(요한 10,1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 떼를 베드로에게 맡기셨다(요한 21,15-17 참조). 따라서 교회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목자와 관련해 이해돼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마음으로 생활하고 사목을 수행하면서 크나큰 사랑과 진정한 선의를 지녀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교회 사제들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목자와 양 떼의 관계에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착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더욱 더 많은 착한 목자가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요한 10,11-16 참조). ※이번 호로 '성경 속 궁금증' 연재를 마칩니다. 디음 호부터는 '성경 속의 도시'가 연재됩니다. cpbc2013.12.17

온몸으로 성경말씀 배우는 '뮤지컬 교리'서울 상도동본당 중고등부 주일학교, 뮤지컬 '별이 빛나는 밤에' 공연상도동본당 중고등부 주일학교 학생들이 준비한 뮤지컬 '별이 빛나는 밤에'의 한 장면. 박수정 기자 공연이 끝난 뒤에도 아이들은 한참이나 무대를 떠나지 못했다. 몇몇은 무대 뒤에서 눈물을 왈칵 쏟았고, 또 몇몇은 서로 부둥켜안고 등을 토닥이며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 감격을 나눴다. 울고 웃으며 함께 부대꼈던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서울대교구 상도동본당(주임 정의덕 신부) 중고등부 주일학교 학생들은 11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동작문화복지센터 대강당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 내용을 담은 뮤지컬 '별이 빛나는 밤에'를 무대에 올렸다. 연기에 직접 참여한 배우부터 조명과 소품을 담당하는 스태프까지 각자의 역할을 맡은 30여 명의 학생들은 이날 90분간의 공연에 온 힘을 쏟았다. 공연을 준비해 온 1년의 시간이 열매를 맺는 날이었다. 정의덕 주임신부는 지난해 초 중고등부 주일학교에 '뮤지컬 교리'를 제안했다. 틀에 박힌 교리교육에서 벗어나 교리 내용을 뮤지컬로 만들어 아이들이 온몸으로 성경말씀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자는 취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새로운 시도에 걱정도 앞섰지만, 과감히 뮤지컬 교리에 도전했다. 처음 3~4개월은 교리공부에만 집중했다. 아이들은 성경 속 등장인물을 연기해야 했기에 교리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성경 인물의 마음을 헤아려야 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마음에 새겨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리아와 요셉, 예수님과 동방박사, 요한 세례자 등 성경 속 등장인물들의 삶이 전과는 다르게 생생히 다가왔다. 요셉 역할을 맡은 윤재상(요한 사도, 고1)군은 "몇 번씩 성경을 읽으며 남편 요셉, 아버지 요셉의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교리공부가 끝난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뮤지컬 연습에 매달렸다. 대본은 본당 신자 중에 전문 작가가 있어 도움을 받았다. 노래는 기존 뮤지컬 노래와 생활성가를 개사해 활용했다. 연기 지도는 교사 중에 연기를 전공하는 대학생 이두현(토마스 모어, 22)씨가 맡았다.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모여서는 연습이 부족해 평일에도 짬을 내 성당에 나와 연습했다. 연기와 노래 둘 다 소화해야 하는 뮤지컬은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마리아를 연기한 강다빈(아셀라, 중1)양은 "선생님께 연기 지적받으며 많이 혼났고, 친구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운 적도 있었지만 끝까지 서로 챙겨주고 힘이 돼주며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쳐 정말 좋다"고 눈물을 쏟았다. 공연 날, 500여 객석은 본당 신자들로 가득 찼다. 예상보다 많은 관객이 몰려 보조의자까지 동원해야 했다. 이들은 아이들이 준비한 공연에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이선미(가브리엘라, 43)씨는 "중2 아들이 학원까지 빠져가며 책임감 있게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면서 "학교 공부도 하랴, 주일학교 뮤지컬 연습도 하랴 힘들었겠지만, 아들에게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정의덕 주임신부는 "1년간 수고해준 아이들과 교사단, 보좌신부님과 공연에 도움을 준 모든 신자에게 감사드린다"면서 "주일학교 교육에 새로운 길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cpbc2014.01.14
![[성경속 궁금증] 92.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은 누구인가?](//cpbc.co.kr/CMS/newspaper/2013/11/rc/481749_1.0_titleImage_1.jpg)
[성경속 궁금증] 92.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은 누구인가?신약, 동족은 물론 이방인ㆍ이교도까지 확대야콥 시몬스 피나스,'착한 사마리아인', 17세기께, 동판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랑스. 성경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의 응답으로써 자신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19). 여기서 언급하는 이웃이란 어떤 범위까지 사람을 의미하는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동족만 이웃이라고 생각했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 19,18).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이웃'은 철저하게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르치는 단어였다. 당연히 이교도나 이방인은 이웃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같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도 이웃의 범위가 확대, 적용됐다.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 19,34). 이웃에 대한 개념은 예수님의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부터 완전히 달라진다(루카 10,29-37 참조). 물론 이웃의 범위 역시 동족은 물론 이방인, 이교도까지 확대된다. 이런 가르침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특정 대상이었던 '이웃'이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 됐기 때문이다(루카 10,36). 성경은 이처럼 일찍부터 이웃에 대한 사랑을 중요시하고 그 개념을 깊이 이해했다. 이웃의 범위 안에 가까운 이웃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은 놀랄 만하다. "또한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신명 10,18). 다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한 추상적 사랑 대신 가까이 있는 이웃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위를 요구하셨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 20-21). 이처럼 이웃 사랑의 계명은 말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보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성경에서는 이웃 사랑은 하느님의 행위에 바탕을 둔다(신명 10,18-19).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두 계명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시켰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자선을 자기 자신의 칭찬과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마태 6,2-4). 이웃 사랑은 의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라 할 수 있다.cpbc2013.11.05

서울대교구 사목국 선교전례사목부 교리학교 <3>기도에 대한 계시,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총대리)예수님께서 친히 들어주신다 계시가 뭘까? 계시라는 말은 ‘감춰진 것을 들춰내다’라는 뜻을 지닌 ‘레벨라레’(revelare)에서 유래했다. 쉽게 말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바로 계시다.계시 없이 인간 이성으로 만물의 근원인 하느님을 아는 데는 한계가 있다. 구약에선 모세를 통해서야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수 있었다. 하지만 신약에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 자신을 알려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계시의 절정이고 완성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써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 곧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계시의 대상은 당신 자신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에 관한 신비를 당신 계획에 따라 인간에게 기꺼이 알리고자 하셨다. 하느님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계시다.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뭘까?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그것이 바로 자유 의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 의지로 하느님 자신을 사랑해 주시기를 원하신다.계시에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가 있다. 공적 계시는 신ㆍ구약 전체와 사도들의 가르침, 곧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전승인 성전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종결된 공적 계시를 보완할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는 게 교회 가르침이다. 사적 계시가 공적 계시의 보충이나 보완이 될 수는 없다.기도에 대한 계시를 알려면 성경에서 기도에 대해 알려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시편은 특히 구약성경에서 기도의 걸작을 이룬다. 시편은 이미 이뤄진 하느님 약속을 기념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희망함으로써 역사의 모든 차원에까지 미친다.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바치시고 그분 안에서 완성된 시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근본적이고 불변하는 요소다(「가톨릭교회 교리서」2596, 2597항). 성경과 성전은 하느님 체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예수 부활 체험 이외에도 수많은 영적 체험 사례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참된 사적 계시에 대한 기준은 꼭 필요하다. 무엇보다 사적 계시의 모든 내용은 공적 계시에 부합해야 하고,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 진리나 도덕성에 상반되지 않아야 한다. 건방지면 하느님 체험이 아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이 어찌 겸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도 신비 체험을 하고 난 뒤에는 책을 쓰지 않았다. 성경은 하느님 계시의 기록이지만, 그 시대 눈높이에 맞춰 기록됐다.성경에 보면 기도에 관한 표현은 간구하다를 비롯해 청하다, 원하다, 정보를 묻다, 조사하다, 심사하다, 질문하다, 중재하다, 탄원하다, 울부짖다, 울다 등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하던 모습도 머리를 숙이다, 무릎을 꿇다 등으로 다양하다. 구약성경은 힘 있는 기도와 그렇지 않은 기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를 구별한다. 신약성경에서 기도의 절정은 예수님의 기도다. 마음으로, 정성으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셨다(마태 18,2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드리는 기도를 친히 들어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정리=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평화신문2014.12.02
[문종원 신부의 생태영성] 우주를 마음에 담으면 상상력도 자란다 정신이 발달된 아이에게는 자연에 대한 지적인 접근을어떤 아이들은 몸보다 정신이 더 발달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분류학, 생물 기후학, 동물학, 천문학과 같은 지적인 접근을 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도록 격려할 수 있다. 그들과 함께 밖으로 나와 걸으며 각기 다른 새들, 나무껍질, 지질 형태를 탐구하라. 망원경을 사거나 빌려서 행성, 별, 은하의 이름과 위치, 색깔과 우주 이야기를 배워라. 예민한 소녀들은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빠져들 수 있다. 일단 바깥세상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면, 상상력과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것이다. 몇몇 아이들과 함께 정원 가꾸기, 자연사 박물관 방문하기, 집으로 가져온 꽃을 그림으로 그리고 색칠하기 등으로 시작할 수 있다.아동기의 야생 체험세계 전반에 걸쳐 부모와 교사들은 아이들을 환경적으로 민감한 새로운 세대로 키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데이비드 소벨(David Sobel)은 교육 내용이 아이의 지적이고 정서적인 발달에 부합하기 위해 나이에 맞는 독특한 환경예술의 교육과정을 채택할 것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소벨은 교사들에게 열대지방의 산림벌채와 지구 온난화와 같은 환경 파괴 개념과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이러한 현실에 노출되는 것은 그들이 자연 세계를 즐겁게 탐구하기보다 두려워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연과의 유대를 발전시키기 전에 지구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환경교육의 장기적인 목표에 역효과를 낳는다. 소벨은 “우리는 아이에게 지구를 구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동물, 야생화, 구름만큼이나 자신들이 야생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위해 모든 아이는 자연 세계에서 온전한 소속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어른을 필요로 한다. 자연은 적대적인 외계인으로 가득 찬 위협적인 장소가 아니라 아이의 친구, 협력자, 교사, 보금자리와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는 아동기의 자연 탐구와 혼 중심적인 발달 사이의 중요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표현한다. “성경 공부를 통해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그들이 대부분 시간을 자연 세계의 사물들을 경험하면서 보내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우리가 숲을 잃는다면 우리의 혼을 잃는 것이다. 우리가 새들의 노랫소리를 잃는다면 우리의 혼을 잃는 것이다. 우리가 도시의 인공 불빛 때문에 별을 더는 볼 수 없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혼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상상력을 잃을 것이다. 그들은 내면의 발달을 빼앗기게 된다. 숲은 더 높은 비전을 앗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숲은 아이들에게 더 높은 비전을 제공해 준다. 그래서 아이와 자연 세계와 유대를 맺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다. 만약 우리가 자연 세계를 황폐화하거나 일그러지게 한다면, 우리의 내면세계는 외적 경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그만큼 왜곡될 것이다. 아이가 경험하는 것, 특히 아이가 외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내면을 형성한다.” 토마스 베리는 바깥 세계와 내면 세계가 어떻게 서로를 반영하는지, 그리고 자연, 혼, 상상력, 창조적인 인간 비전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문화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동기 전반에서 자연과 정신, 곧 바깥 세계와 내면 세계가 서로 반영하는 것을 배울 때, 아이는 건강하고 생태 중심적이고 혼으로 채워진 존재가 될 수 있다.아이들에게 우주론을 가르쳐라야생의 세계는 지구의 숲, 강, 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훨씬 넓게 펼쳐진다. 그것은 가장 멀리 있는 은하수의 위대한 신비로 무한히 뻗어 있다. 우주론자인 브라이언 스윔(Brian Swimme)은 가족과 부족, 땅과 물 안에서뿐만 아니라 달, 태양, 태양계, 수천억 개의 별로 가득 차 있는 은하수, 그리고 수천억 개의 은하수를 가진 광활한 곳,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우주 안에서 그들이 일원임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이가 매혹적인 자연을 발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는 우주 안에 있는 인간처럼 우주와 우리의 장소가 지닌 의미를 배우는 것이다. 아동기에 우리는 우리의 가족 체계와 학교 체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태양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주와 우주의 펼쳐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황홀함을 맛보도록 가르쳐야 한다. 백영민2015.12.16
![[성경 속 생명 이야기] 5. 생명에 대한 폭력의 근원](//cpbc.co.kr/CMS/newspaper/2014/03/rc/499133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생명 이야기] 5. 생명에 대한 폭력의 근원모든 살인은 영적 친족에 대한 침해 성경에 따르면 사람은 충만하고 완전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느님 모습과 닮게 창조됐습니다. 이런 생명의 복음과 대조를 이루는 죽음에 관해서도 성경은 증언합니다. 곧 악마가 이를 시기해 사람에게 무의미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합니다(지혜 2,24; 창세 3,1.4-5 참조). 이 죽음은 카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폭력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생명의 복음」 7항 참조). 창세기 4장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두 형제는 하느님께 각각 예물을 바쳐드렸는데,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더 반기십니다. 이로 인해 카인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카인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왜 화가 났느냐? 왜 얼굴을 떨어뜨리고 있느냐?"(창세 4,6-7). 하느님의 이 질문에는 외견상 선의(善意)가 담긴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을 배척하심으로써 카인에게 위기를 안겨 주시고는 카인 스스로 그 위기를 해결하도록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느님께서 카인의 예물을 반기지 않으신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 몇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예물을 반기고 안 반기고는 '하느님의 자유'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예물을 반기지 않으셨지만 카인과 대화를 단절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카인의 예물을 반기지 않으신 것이 카인을 화나게 했다손 치더라도, 엄밀히 말해 카인의 분노와 우울은 그의 내면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다음 말씀을 들어봅시다.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7).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이라는 하느님의 말씀 이면에는 카인이 자신의 분노를 악으로 갚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이를 테면 '너는 마음을 잘 다스려 선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카인의 욕망은 그가 옳게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질문을 묵살합니다. 그 욕망은 몹시 거슬리고 밉살맞은 존재가 제 곁에서 영원히 사라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욕망은 수시로 변하는 감정에서 오기에 허상입니다. 그런데 이 헛된 욕망이 사람을 실제로 죽음에까지 몰고 가는 죄의 강력한 힘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카인은 달려들어 아벨을 쳐 죽입니다(창세 4,8). 카인은 "처음부터 살인자였던"(요한 8,44) 악마의 사고를 허용함으로써 폭력적 살인의 원형이 된 것입니다(「생명의 복음」 8항 참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여전히 '혈육'에 대한 폭력적 침해가 수시로 일어납니다. 낙태의 경우처럼 무방비 상태의 어린 생명이 세상을 보기도 전에 죽어갑니다. 카인의 형제 살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살인은 인류를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묶는 '영적' 친족 관계에 대한 침해입니다. 안락사를 장려하거나 실행에 옮길 때도 생명에 대한 침해가 일어납니다(「생명의 복음」 8항 참조). 아벨은 짧은 일생이었지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께 예물을 봉헌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는 것이 이를 말해줍니다. 아벨에 비해 좀 더 긴 여정을 걷게 된 카인의 일생은 어떠합니까? 그는 아우를 살해함으로써 평생 그림자를 안고 살면서 형제와 화해를 하지 못한 자로 남게 됐습니다. 화해하지 못한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은 실로 살인죄에 완전히 상응하기에, 살인자는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화해를 이루지 못한 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살인자이지만 그가 인격적 존엄성을 잃지 않도록 몸소 지켜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생명의 복음」 9항 참조). 비록 카인을 처벌하시어 그가 '놋 땅'(창세 4,16) 곧 결핍과 고독의 땅, 하느님과 단절된 곳으로 쫓겨나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될 운명에 놓이게 하셨지만, 여전히 그를 굽어보고 계시는 것입니다(「생명의 복음 9항」 참조). 바로 여기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정의라는 역설적 신비가 드러납니다(「생명의 복음」 9항). 비록 카인의 삶이 당장엔 평탄치 못했을지언정 생애 끝에 가서는 하느님의 자비로,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다음과 같은 삶으로 인도되지 않았을까, 오늘을 사는 우리로서 희망해 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이명기 수녀(가톨릭대 ELP학부대학 교수)cpbc2014.03.04
![[창간 27돌] 건강한 신앙인으로 이끌어준 길잡이](//cpbc.co.kr/CMS/newspaper/2015/05/rc/569424_1.0_titleImage_1.jpg)
[창간 27돌] 건강한 신앙인으로 이끌어준 길잡이20년 애독자 이정임씨가 말하는 평화신문 “신앙인이라면 평화신문은 꼭 봐야 해요. 평화신문만 정독해도 건강하고 올바르게 신앙을 키울 수 있으니까요.”부산 기장에서 숙박업을 하는 평화신문 애독자 이정임(클라라, 52, 부산 기장본당)씨는 “평소와 달리 정성껏 화장하고 머리 모양에도 신경을 썼다”며 환한 표정으로 기자를 반겼다. 이씨는 1995년 12월 부산 괴정본당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평화신문을 처음 접한 후 20년째 애독하고 있다.애독, 영적으로 성장하는 시간그는 신문을 읽기만 하는 독자가 아니다.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www.catholic.or.kr), 마리아사랑넷(www.mariasarang.net), 홍성남 신부 도반모임(cafe.daum.net/withdoban) 등에 본지 연재물을 실어 나르며 선교와 평화신문 홍보에도 열심이다. 자신만의 신앙 체험과 선교 비결을 쓴 글도 자주 올리는 덕분에 온라인에선 유명 인사다. 이씨는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이끈 첫 번째 선생님이 평화신문”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숙박업소 특성상 24시간 일해야 하기에 남편과 번갈아 가며 낮에 자고 밤에 깨어 일하는 그는 손님이 없는 고요한 새벽 시간에 평화신문을 읽는다. 그는 “새벽 평화신문을 읽는 시간이야말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시간”이라고 웃음 지었다.“요즘은 좋지 않은 소식들이 넘쳐 나는데, 평화신문에는 늘 감동을 주는 소식과 함께 예수님 가르침을 쉽고 재밌게 풀이한 좋은 글이 참 많아요. 기자들의 교회 소식도 훌륭하고요. 유익한 글을 좀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서 누리방 게시판을 이용하는 거예요. 물론 저자 허락을 받고 옮깁니다.”이씨는 세례를 받고도 성경과 교리에 부족함을 느꼈다. ‘정말 아는 게 없다’는 절박함에서 평화신문을 구독했다. 그는 “본지에 실린 사제와 수녀의 강의를 찾아다녔고, 평화방송 라디오와 TV의 좋은 강의를 글로 풀어 게시판에 올렸다. 또 성서 40주간, 통신 성서 등을 수강하며 열심히 성경 공부를 한 덕분에 신자다워졌다”고 수줍게 말했다.이씨는 세례받기 전에는 자신을 ‘구두쇠’라고 말할 정도로 돈밖에 모르고 살았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돈 버는 데에만 혈안이 됐다. 그러던 중 중학생 아들이 가출했고, 아들을 찾아 헤매는데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같이 “그게 왜 아이 탓이니, 네가 잘살아야지”하는 음성이 귓속에 들렸다. 그 즉시 회개한 이씨는 길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 오늘 안에 아들이 돌아오면 세례받겠습니다”하며 눈물로 기도했다. 그날 아들이 기적처럼 집으로 돌아왔다.다양한 신앙 체험 담은 꼭지 희망 그는 자신의 각별한 체험이 미신이나 사적 계시로 빠지지 않고 건강한 신앙으로 성장하는 데에 평화신문과 평화방송이 길잡이가 됐다고 고마워했다.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 하느님을 만난 체험은 냉담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평화신문에서 신자들의 다양한 신앙 체험을 다루는 꼭지를 마련해 주셨으면 해요. 평화신문 파이팅!” 글·사진=이힘 기자 lensman@pbc.co.kr 평화신문2015.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