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 초세기 ③ - 알렉산드리아의 필론](//cpbc.co.kr/CMS/newspaper/2016/12/rc/664179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 초세기 ③ -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성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풀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초상화. 위키피디아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 형성의 실마리는 여전히 초세기 유다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계시 종교’인 유다교는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가 절대 기준이자 신앙의 출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연 종교’에 친숙했던 주변 나라 사람들은 상대적인 가치 기준에서 신을 믿었고, 인간적인 기준에서 신을 설명했습니다. 급기야 이교 철학자들은 계시 진리에 기반을 둔 유다교 하느님에 대해 인간 이성으로 납득 가능한 설명을 요청했습니다.이러한 현상은 유다교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계시 종교인 그리스도교도 교회 안팎에서 유사한 요청에 직면했습니다. 중세 중기 스콜라 신학이 출현하면서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그리스 철학 체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신학 체계가 출현했던 것도 이와 관련됩니다. 따라서 먼저 유다교가 세상의 사고방식과 이방 종교의 도전을 극복하며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잘 설명하려 시도했던 노력의 결과를 이후 그리스도교가 적극 활용했습니다.유다인 철학자 필론팔레스티나 밖에 형성된 유다인 집단 거주지인 디아스포라 출신 유다인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기원전부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지리적인 요충지로서, 그리스 언어, 사상, 문화,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였습니다. 이곳 사람들도 인간의 희로애락을 반영하여 여러 신들이 활동하는 그리스 신화에 비해 계시 종교로서 유일신 사상을 지닌 유다교가 이성적으로 잘 이해하기 어렵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예수님과 동시대 인물이면서도 예수님 및 그리스도교와 전혀 인연이 없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다인 철학자 필론(Philo Alexandrinus, B.C.20~A.D.42)은 칠십인역 구약 성경을 친숙하게 사용하는 지역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 문화권에 익숙했지만, 유다인 전통에 따라서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조상들의 전통과 신앙을 익혀 유다교 하느님의 개념을 올바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필론은 유다인으로서 플라톤 철학과 유다교 사상을 잘 조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믿는 이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고 시도했습니다.중기 플라톤 사상중기 플라톤 사상가들은 실재(reality)를 최상의 초월적 원리인 일자(一者, the One)가 있는 ‘초월적 차원’과 관념의 세계인 ‘로고스 차원’, 그리고 감각의 세계인 ‘물질적 차원’으로 구분했습니다. 사실 플라톤 사상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물질계’인 감각의 세계와 눈에 보이는 것 배후에 있는 ‘이데아계’인 관념의 세계로 이분했습니다. 따라서 플라톤 사상에서는 최상위 차원인 이데아계가 중기 플라톤 사상에서는 두 번째 차원으로서 로고스 차원이라고 불렸고, 첫 번째 차원에 존재하는 초월적 일자에 종속되었습니다.여기서 필론은 세계 외부에 존재하면서 세계 내에 능력을 발휘하는 최상의 원리를 하느님으로 파악했습니다. 또한 필론은 로고스를 세상 안에 들어오는 초월적인 신의 작용을 이해시키고, 하느님과 이 세상을 연결시키는 중개자로 파악했습니다. 즉, 로고스는 신의 맏아들로서, 또 사람들을 위한 신의 통역자로서 천사들과 같은 단계에 있는 실체라는 것이었습니다.하느님의 불가지성중기 플라톤 사상을 따랐던 필론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 육신이 머무는 감각의 세계인 물질적 차원과 유일한 초월자 신이 머무는 초월적 차원은 직접 연결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관념의 세계인 로고스 차원에 속한 로고스를 통해야만 초월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알 수 있고, 본질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여기서 로고스를 통해야만 초월자 신에게 접근 가능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해석한다면, 필론이 파악한 하느님은 우리의 지성으로는 직접 파악할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불가지성(不可知性)의 특징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본 것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상급과 처벌」, 39). 그런 까닭에 필론은 처음으로 하느님을 “이름을 붙일 수 없고, 발설할 수 없으며, 그리고 어떤 관념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분”(「꿈」, I,67)이라고 표현했습니다.게다가 필론은 하느님에 대해 알기 시작하는 것조차도 자기 부정, 즉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서야 비로소 ‘계시는 분’을 알기 시작한다.”(「꿈」, I,60) 그러므로 인간 영혼이 하느님을 파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신비스러운 체험의 여정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하느님을 향한 여정인간 영혼이 하느님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인간 영혼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면서 차차 그분께 다가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서 하느님을 깨닫기 시작한 인간 영혼은 본격적인 상승의 단계를 거치면서 최상의 단계를 향한 영적 여정을 걷게 됩니다.“첫째 단계는 점성술을 버리는 일이다. … 다음 단계로 정신은 스스로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 셋째 단계는 정신이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추적하기도 해명하기도 어려운 만민의 아버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희망을 향하여 길을 열어 놓으면, 하느님 그분을 인식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정확한 깨달음 또한 동시에 쟁취하게 되는 최정상의 단계일 것이다.”(「아브라함의 이주」, 194~195)결국 상승의 여정을 통해 도착한 곳은 하느님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며, 그마저도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도달한 곳은 결국 인간은 하느님을 헤아릴 수 없다는 인식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하느님을 향한 영적 여정을 설명하는 필론의 방법론은 일찍이 그리스도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근세 이전까지 정작 유다인은 필론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리스도교가 필론과 그의 사상을 전했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필론은 고대 교부들 및 중세 신학자들이 다소 추상적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플라톤과 그의 후대 사상을 가지고 이해 가능하도록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백영민2016.12.14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 관한 메시지 종말론 종말론호세 알비아르 지음/윤주현ㆍ안소근 옮김/대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2만 원그리스도교가 하나의 교의나 철학, 사상 체계를 넘어서서 종교적 전망을 갖는 것은 ‘종말론’이 있어서다. 종말론은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 관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종말 신앙은 크게 죽음, 심판, 지옥, 천국에 관한 믿음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사말(四末) 교리’라고도 불리는데, 종말론을 구성하는 핵심 교리이기도 하다. 종말론에서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간의 죽음이 극복됐기 때문이다.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나가기 위해 그분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인류는 심판을 받게 된다. 최후 심판이다. 종말론은 심판을 단죄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 주님이 베푸는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강조한다. 또한 종말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지옥과 천국을 단순히 ‘공간’적 개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가톨릭 교회는 지옥과 천국을 하느님과 인격적 만남 차원에서 이해하도록 가르쳐 왔다. 지옥은 하느님과 친교를 스스로 거부한 상태이고, 천국은 하느님과 궁극적으로 만난 상태다. 책은 사말 교리를 비롯해 하느님 나라, 죽은 이들의 부활, 연옥 등 종말론과 관련된 주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성경 말씀은 물론 교부들의 가르침, 이단 논쟁, 교회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종말론의 종합 교과서’라 해도 손색이 없다. 저자 호세 알비아르(스페인 나바라신학대 부학장) 신부는 “종말론은 현세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의미와 가치, 자극을 주는 구원의 학문”이라면서 “정점에 도달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탄과 경탄이 배어 있는 신앙의 묵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백영민2016.04.27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37> 환경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내가 사는 이곳 신학교는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다. 2005년에 신학교 소임을 받고 들어왔으니, 이제 거의 10년째가 다 되어 간다. 처음 이곳 강화에 들어왔던 것은 1996년 부제 때였다. 20여 년의 세월은 강화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 변화의 정도는 일반 도시들과는 차이가 크다. 도시와 달리 이곳 강화는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곳 중 하나다. 물론 농촌이라는 지리적 조건에 사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불편한 점도 있지만, 자연환경은 그러한 어려움을 상쇄시키기에 충분하다. 처음 황무지 같은 진강산 밑 벌판에 신학교가 지어졌을 때는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학교 모습이 제법 꼴을 갖추었고 환경과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십수 년 전에 학교 진입로에 심었던 어린아이 팔뚝 굵기의 느티나무가 자라나 이제는 몸통만하게 굵어졌고, 하늘로 뻗은 나뭇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터널이 될 정도로 자라났다. 또한 철마다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들을 바라보며 행복함을 느끼곤 한다. 봄이면 진달래, 영산홍, 개나리, 철쭉의 향연을 볼 수 있고 요즘 같은 가을철엔 서서히 물들어가는 단풍으로 인해 눈 속에 가득히 들어오는 초록과 노랑, 빨강의 향연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치유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학교 진입로 옆으로 펼쳐진 논을 보면 계절의 변화를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다. 겨울이 지나 봄철이 되면 황량한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를 시작하고 이내 황토색 벌판이 녹색으로 변해 간다. 그리고 들판이 초록빛으로 가득해질 무렵 신학생들은 여름 방학에 들어간다. 또 가을이 되어 황금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하면 신학생들이 학교로 다시 돌아오고 2학기가 시작된다. 벼가 여물어 추수하기 시작하면 다시 노란 들판이 황토색으로 변하게 되고, 이때가 되면 겨울 방학이다. 들녘의 모습이 바뀔 때마다 신학교의 시간이 흘러감을 직접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곡식이 자라듯, 신학생들 역시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곡식이 추수되듯이 신학생들도 사제가 되면 소중한 못자리를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주변 식물들의 변화와 함께 학교에서 사는 많은 생물을 만나기도 한다. 이따금 저녁 끝기도 후에 홀로 학교 주변을 산책하고 있노라면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만날 수 있다. 동네 주변에서 신학교에 놀러 온 고양이와 개들도 많지만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뒷산에서 내려온 고라니들이다. 철마다 이름 모를 철새들이 신학교 기숙사 옆에서 자신의 존재를 뽐내듯 지저귄다. 까마귀나 까치 같은 텃새들뿐만 아니라 ‘후투티’나, 새 울음소리가 마치 ‘홀딱 벗고’처럼 들린다고 하여 일명 ‘홀딱 벗고 새’라고 불리는 ‘검은등뻐꾸기’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곤 한다. 한마디로 동물농장이 따로 없는 곳이 바로 이곳 강화 신학교인 셈이다. 사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이처럼 시골에서 오랜 기간을 살아가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이곳에서 사는 것이 더 익숙해졌다. 어쩌다 일 때문에 나가는 도시의 환경은 오히려 나를 피곤하게 만들곤 한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발생하는 시끄러운 도시 소음과 공해 속에서 단 몇 분만을 보내도 쉽게 피곤해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인간의 삶이 모두 다 하느님의 은총이고 섭리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지금 내가 사는 이곳 신학교의 환경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자연사회교리에서는 자연환경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사회교리는 자연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면서 그 근거를 성경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세상을 적대적인 환경이나 해방되어야 할 악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이해했다. 또한 그들은 이 자연환경을 하느님께서 인간의 책임 있는 관리와 활동을 하도록 맡기신 장소이자 계획으로 인식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보시니 좋았다’(창세 1,4.10.12.18.21.25 참조)라고 말씀하셨고, 마지막으로 그 창조의 정점에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참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고(창세 1,27 참조), 모든 피조물을 인간의 책임 아래 맡기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관계성 안에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모든 피조물에 대한 책임 있는 존재로서 인간에게 자연을 돌볼 임무를 부여하셨다(「간추린 사회교리」 451항 참조).무분별한 개발로 신음하는 자연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환경보호를 무시한 무분별한 개발 앞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과 자연을 올바르게 돌보아야 한다는, 하느님께 받은 소명을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백영민2014.11.11
![[시사진단] ‘자비’, 불교만의 용어 아니다](//cpbc.co.kr/CMS/newspaper/2015/12/rc/610920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 ‘자비’, 불교만의 용어 아니다오용석 프란치스코 사베리오(한국평협 사회사도직연구소장, 경성대 명예교수) 올 한 해의 막바지에 우리에게 특별히 주어진 삶의 지표는 ‘자비’이다. 지난 8일부터 내년 11월 20일까지 ‘착한 사마리아인’이 베푼 자비(루카 10,30-37 참조)를 우리도 베풀 것을 약속하고 실천하는 ‘자비의 특별 희년’이 시작된 때문이다.이 ‘자비의 희년’을 준비하면서 ‘자비’ 용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이 제기되었다. 이 말이 원래 불교 용어라는 이유에서였다. 평화신문 6일 자에 실린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저서 「자비」 소개 글 제목도 “‘자비의 해’라는데… 자비, 불교 용어 아닌가?”(24면)였다. ‘자비’가 불교 용어인 것은 맞다. 불교에서 ‘자비’는 “중생에게 복을 주어 괴로움을 없애주는 일”로 풀이된다. 6세기에 중국 수나라 혜원(慧遠)이 지었다는 불교 백과사전으로 전해지는 「대승의장」(大乘義章)에도 ‘자비’가 불교의 중요한 용어로 설명되어 있다. “나약한 사람을 가엾게 여겨 사랑함을 자(慈)라 일컫고, 괴로워하고 슬퍼함을 비(悲)라 말한다”(愛憐名慈, 惻愴曰悲)가 그것이다. 이 때문인지 한국을 제외한 한자 문화권 가톨릭 교회에서는 라틴어 misericordia 번역어로 가장 적합한 말이 ‘자비’임에도 이 말이 쓰이지 않는다. 중국과 대만 교회만 하더라도 성경, 미사경본, 기도서 등 어디에도 ‘자비’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자비’라고 쓴 곳에 ‘불쌍히 여김’을 뜻하는 ‘롄민’(憐憫), ‘콴수’(寬恕), ‘런쯔’(仁慈), ‘롄수’(憐恤), ‘취롄’(垂憐) 등이 함께 쓰인다. 미사 통상문과 호칭기도에서는 ‘취롄’으로 통일되어 있다.한국 교회도 ‘자비’라는 말을 미사경본과 기도서 등에서 공식 용어로 쓰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1967년부터 우리말로 미사가 봉헌되었지만 30년 동안 ‘자비’라는 말은 쓰이지 않았다. 1997년 새 미사 통상문이 확정되면서 처음으로 이 말이 도입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하는 ‘자비송’이다. 그 이전에는 Kyrie라는 라틴어 제목으로 “긍련(矜憐)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다가 “불쌍히 여기소서”로 하다 지금의 ‘자비송’으로 바뀌었다.물론 1997년 이전에도 한국 교회에서 ‘자비’라는 말이 안 쓰인 것은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교황 문헌의 우리말 번역에서 이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번역본에서 하느님의 속성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자비’에 관한 교황 문헌으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이 있다.우리말 성경에서 ‘자비’라는 말의 쓰임새를 보면, 우리 교회에서 이 말의 중요성이 그대로 다가온다. 1977년에 나온 「공동번역 성서」(가톨릭용)에서는 이 말이 ‘자애’, ‘불쌍히’ 등과 함께 쓰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2005년 주교회의가 간행한 「성경」에서는 이런 유사어들이 ‘자비’로 거의 통일되어 쓰이고 있음을 본다. 이렇게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 쓰임이 일반화된 ‘자비’라는 말을 불교만의 용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적으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기 수 세기 전 기록인 「좌전」(左傳)에 이미 이 말이 쓰였다. 그리고 어의적으로 ‘자’(慈)는 사랑(愛也), 선함(善也), 어짐(仁也), 부드러움(柔也)과 함께 불쌍히 여김(憐也)을 뜻하여 ‘비’(悲)와 통한다. 이 말뜻으로부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닮으라고 가르치신 하느님의 속성은 바로 ‘자비’로 함축됨을 알 수 있다. ‘자비의 특별 희년’은 카스퍼 추기경이 「자비」에서 강조한대로 “신학계가 벌을 받아야 할 만큼 망각해온 자비”를 용어에서부터 그 본질을 회복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평화신문2015.12.24
![[생활 속의 복음] 제자 되려면 가족을 미워하라고요?](//cpbc.co.kr/CMS/newspaper/2016/08/rc/650905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제자 되려면 가족을 미워하라고요?연중 제23주일 (루카 14,25-33) 주수욱 신부(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주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복음서에 나오는 말씀 가운데 곧잘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 있어도 어지간하면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려면 가족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평상시에 그렇게 강조하는 ‘사랑하라’는 계명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을 미워하라니요?여기서 미워하라고 표현한 이유는, 구약성경의 히브리말에는 ‘더 사랑하다. 덜 사랑하다’와 같은 비교급이 없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10장 37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예수님을 더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신자들 가운데도 간혹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낯선 분들이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그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더 완벽한 생활을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우리 인간은 얼마나 하느님을 보고 싶어 하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싶어 합니까!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보듯이 인간을 죽도록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니, 우리도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이렇게 하느님과의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 덕분입니다.예수님의 부르심 세상에서 가장 좋고 값진 것입니까? 인간이 감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꿈이라도 꿀 수 있을까요? 인간 스스로 하느님께 다가가고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죽기까지 하시면서 인간과 하나가 되시어 이제는 그분의 부활에 우리를 동참시키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을 따라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 없이 즉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호한 태도로 이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길 외에는 인간의 구원과 해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풍성한 가치를 가진 제자 됨의 삶을 살기 위해서 결단을 내리고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많은 신자가 그 모범을 보여 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삶을 생생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이 서로 화목하고 정의롭게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죄는 인간을 소유욕에 사로잡히게 하고, 죄는 인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이제 새롭게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살기 시작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단호함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서 우리와 기꺼이 나누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함께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기 시작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회생활에 대해서 하나하나 심사숙고하면서 잘 식별해야 합니다. 평화신문2016.08.31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글라스] <24>](//cpbc.co.kr/CMS/newspaper/2016/07/rc/644657_1.0_titleImage_1.jpg)
[치유의 빛 은사의 빛 스테인드글라스] 서울 주한 교황대사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알빈 슈미트, ‘기도하고 일하라’, 서울 주한 교황대사관 성당, 1970년대 초. 서울 궁정동의 주한 교황대사관 성당에는 1970년대 초에 제작 설치된 두 점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남아 있다.성 베네딕도수도회 소속 알빈 슈미트 신부의 작품으로, 그가 한국 교회에 남긴 여러 점의 벽화와 마찬가지로 보이론(Beuron) 화풍을 보이고 있다. 보이론 미술은 19세기 독일 보이론에 위치한 수도원에서 시작된 교회 미술이다.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 이집트 미술에서 표출되는 기하학적 원리에 기초한 추상적인 작품 경향을 종교적 영성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방법으로 삼은 게 특징이다. 이와 같은 보이론 화풍에서 비롯된 간결하고 기하학적인 작품들은 사실적인 표현에서 오는 직접적인 감정 전달과는 다른 절제된 종교적 감성을 제시하고 있다.주한 교황대사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은 성 베네딕도수도회의 정신과 성경 말씀에 기초한 구상적인 표현으로 이뤄져 있다. 작품 제목은 따로 정해진 바가 없으나, 작품에 표현된 라틴어 문구에 따르면 그 주제는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와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FACAMTE PISCATOREM HOMINUM)’이다. 이탈리아에서 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두 작품은 모두 가로 1.78m, 세로 3m의 창에 설치되어 있다. 작품에 사용된 색유리들은 대부분 반투명과 불투명으로 바깥 풍경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푸른색, 흰색, 갈색을 주조로 하면서 부분적으로 붉은색을 포인트 색채로 사용하여 자칫 경직되고 지루해 보일 수 있는 화면에 긴장과 변화를 준 작품이다.제대를 향하고 봤을 때 왼쪽 창에 설치된 ‘기도하고 일하라’는 성 베네딕도수도회의 정신을 집약적으로 나타낸 라틴어 문구인 ‘ORA ET LABORA’를 작품 왼쪽 위에 적어 넣음으로써 작품의 메시지를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작품 중앙에는 성 베네딕토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등장하는데, 배경과 구분이 어려울 만큼 도식화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목구비가 생략되어 단순하게 그려진 인체는 화면 전체 구성에 나타나는 수직, 수평선의 연장 선상에서 표현되어 절제된 보이론 미술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성 베네딕토의 얼굴과 손가락의 세부적인 표현을 위해서만 흑유(黑釉) 페인팅을 사용했고, 나머지 선묘에는 모두 납선을 사용해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이다.오른쪽 창의 작품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에는 중앙에 물고기들로 가득한 그물을 끌어올리는 베드로를 사선 구도를 이용해 배치하고 있다. 작품 상단의 라틴어 문구 ‘FACAMTE PISCATOREM HOMINUM’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표현했다. 자칫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붉은색 후광을 표현해 보는 이의 시선을 끌고 있다. 또 작품의 중심 부분에 과감하게 28㎜의 굵은 납선을 사용해 단조로워 보일 수 있는 작품에 변화를 주고 있다. 알빈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작가 자신의 화풍인 보이론 미술 경향을 반영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상징적인 이미지로서 존재하고 있다. 백영민2016.07.13

마진우 신부, 8년 간 선교생활 끝내고 귀국가진 게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 배워... 페이스북 친구를 만났다. 페이스북에서 ‘겸손기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볼리비아의 선교사 마진우(대구대교구) 신부다. 그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는 볼리비아의 천진난만한 아이들부터 넉넉한 미소의 할머니까지 그와 함께 살 맞대고 사는 마을 사람들 이야기가 올라온다. 선교 현장에서 길어 올린 그의 영성 글은 페이스북이라는 얕고 넓은 ‘온라인 바다’에서 내면을 살피게 한다. 그의 영성 글을 구독하는 페이스북 친구만 4500명이 넘는다. 6월 30일, 그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갑작스러운 담석증으로 8년간의 볼리비아 선교생활을 끝내고, 수술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7월 9일 귀국해, 수술 후 회복 중인 마 신부를 경북 칠곡군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만났다. “열심히 일했고, 많은 씨앗을 뿌리고 왔습니다. 가진 게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7월 4일 그가 볼리비아 공항에서 출국하던 날, 신자들은 버스 한 대를 빌려 공항에 배웅 나왔다. 마 신부와 사진 찍고 포옹을 하며 인사를 나눴다. 눈물을 흘리는 신자도 많았다. 어느새 피부색과 표정이 볼리비아인이 되어 버린 그는 신자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가치를 찾으세요. 예수님을 사랑하며 사세요.” 그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상수도 시설도 변변치 않은 산타크루즈의 시골 마을에서 즐겁고 기쁘게 살았다. 모래먼지와 열기, 모기와 곤충, 짜고 단 음식에는 금세 적응했다. 살인 사건과 성폭행이 잦았고, 길에 유기된 시체를 발견하는 것도 흔했다. 무엇보다 축복식과 병자성사, 장례 미사가 많았다. “성탄을 앞두고 시골 공소에 다녀오는 길에 16살 된 아이가 몸에 칼집이 난 채로 앉아 있는 겁니다. 동네 경찰들은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고…. 급한 대로 트럭에 태워 병원으로 갔어요.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을 만난 거지요. 가장 소외된 이웃이었으니까요.”마 신부는 본당 사목을 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들을 사랑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신앙인으로서 가야 할 삶의 길을 물었다. 교리교육을 비롯한 성경 강좌를 열고, 소공동체 모임도 했다. 볼리비아는 국민의 80%가 세례를 받은 가톨릭 국가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는 8%뿐이다. “전 세계 어디든 신자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이끌어줄 목자입니다. 그만큼 신앙의 본질에 굶주려 있습니다.”한국으로 돌아온 소감을 묻자, 마 신부는 “한국 신자들은 전례와 교육 같은 외적인 형식과 틀은 잘 갖추고 있지만, 내면의 충실성은 상실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 신부는 선교사의 길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쉬운 길을 선택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가 말하는 쉬운 길은 돈과 명예 같은 세상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는 “한국인 사제들을 해외 선교지에 많이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선교지에서는 정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고 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문채현2016.07.26
![[성경 속 도시] 25. 페르가몬](//cpbc.co.kr/CMS/newspaper/2014/07/rc/52209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25. 페르가몬믿음 지켰으나 세속화로 책망받아 요한 묵시록의 7대 교회 중 하나인 페르가몬 도시 유적. 리길재 기자 페르가몬의 역사는 고대 트로이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가 ‘아킬레스’의 아들 ‘네프톨레무스’와 결혼해 나은 아들이 ‘페르가무스’인데 그가 성을 쌓아 만든 도시라고 해 ‘페르가몬’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페르가몬은 고대부터 도시가 형성됐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대왕이 죽자 그의 신하였던 장군 4명이 알렉산더가 정복했던 나라를 분할통치했다. 그중 리시마코스 장군은 페르가몬이 있는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을 다스리게 됐다. 리시마코스는 전형적인 군인이다. 그래서는 그는 일찍부터 페르가몬의 특성을 이용해 성벽을 건축하는 등 군사적인 요충지를 만드는 데 공을 들였다. 그는 페르가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페르가몬은 원뿔형의 높은 위치에 요새로서 천혜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주변국의 계속되는 침략을 잘 막아냈던 페르가몬도 로마제국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페르가몬을 자진 헌납했다. 로마는 페르가몬을 아시아주의 수도로 삼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건축 문화 의술 등 발달 페르가몬은 무엇보다 일찍이 양피지의 발달로 20만 권의 장서를 가진 세계 2대 도서관과 대학이 있는 학문의 도시였다. 북쪽 광장에 있는 도서관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페르가몬의 건축, 문화, 예술 교육, 의술은 우상과 신전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페르가몬은 제우스의 출생지로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제우스 신전과 아테네,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모여 있고 신전을 건축하느라 건축과 미술 조각이 발달했다. 최고의 병원 아스클레피온이란 이름은 건강과 약 치료의 신이며 독사로 상징되는 아스클레피오스로부터 따왔다. 이 병원은 다른 병원들과는 치료방법이 달랐다. 물, 진흙, 스포츠, 연극 그리고 도서관 등으로 병을 고쳤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사티로스나 갈레누스와 같이 유명한 의사들이 이곳에서 활약했으며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출생했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7대 교회 중 하나인 페르가몬 교회는 안티파스의 순교와 신자들의 믿음으로 많은 유혹과 핍박에도 신앙을 지켜 하느님의 칭찬을 받은 교회로 알려졌다.“나는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안다. 곧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지키고 있다. 나의 충실한 증인 안티파스가 사탄이 사는 너희 고을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묵시 2,13). 또 동시에 페르가몬 교회는 교회가 세상과 결합해 진리를 잃어버리고 세속화돼 가는 것에 대한 책망을 듣기도 했다. 사탄의 영향 많이 받아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타락 행위를 탓하면서 이스라엘의 예언자 발라암의 예를 들고 있다.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에게는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 발라암은 발락을 부추겨,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걸림돌을 놓아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고 불륜을 저지르게 한 자다”(묵시 2,14). 페르가몬은 우상숭배 신전들로 가득 차 있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고, 우상 숭배와 세속화 분위기 속에서 사탄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 cpbc2014.07.31

네 복음서만으로는 2% 부족한 당신을 위한 ‘다섯 번째 복음서’다섯 번째 복음서로 불리는 이스라엘 성지 순례, 예수회 제임스 마틴 신부의 생생한 여정 담아 예수, 여기에 그가 있었다 예수, 여기에 그가 있었다제임스 마틴 지음/오영민 옮김/가톨릭출판사/1만 5000원마르코ㆍ마태오ㆍ루카ㆍ요한 복음은 예수님 삶을 기록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태어나셨는지, 마지막 모습은 어땠는지, 살아계시는 동안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오롯이 담고 있다. 예수님에 관해서 더 잘 알고 싶고 더 생생하게 만나고 싶은데, 네 복음서만으론 부족한 이들에게 종종 추천되는 ‘다섯 번째 복음서’가 있다. 바로 이스라엘 성지 순례다. 책은 ‘다섯 번째 복음서’ 즉 이스라엘 성지에 관한 이야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스라엘 성지에서 만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 제임스 마틴(미국 예수회) 신부는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 책에서는 연구, 기도, 체험, 성지 순례, 그리고 믿음,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삶에 집중할 것이다. 특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를 걸으며 처음으로 물으신 질문, 곧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물음에 집중할 것이다”(41쪽).마틴 신부는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해보라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고백한다. “난 예수회에 입회한 이래로 하루도 빠짐없이 복음서를 읽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책을 수십 권도 넘게 읽었고, 복음서의 내용을 수백 번, 어쩌며 수천 번 정도 묵상했다. 이런 내가 이스라엘을 여행한다고 무엇을 더 배울 수 있을까?”(47쪽)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현장에 가니,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이스라엘 성지를 다섯 번째 복음서라고 부르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성지순례를 통해 나는 책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알아갔다. …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까지 걸으셨다는 내용을 읽는 것과 자동차로 한 시간 내내 그 먼 길을 가로지르며 1세기에 팔레스타인 지방을 걸어서 다닌 그 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를 마음에 그려 보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40쪽).마틴 신부는 예수회 소속답게 ‘이냐시오 영신 수련’ 방식으로 책을 구성했다. 예수회를 설립한 이냐시오 성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라면, 열두 제자처럼 살아 계시는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섬기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각 장에서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님과 만난 체험을 보여 주고, 이에 관한 복음 내용을 묵상하며 신학적 설명도 덧붙였다. 그런 다음 마지막에 관련 성경 구절을 써 놓고 독자들이 마틴 신부가 만난 예수님이 아닌 자신만의 예수님을 만나 묵상할 수 있도록 했다. 마틴 신부는 “성지순례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읽고 듣게 됐고, 예수님을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면서 “이 책이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도록 하는 초대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백영민2016.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