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복지사 꿈꾸는 스키 메달리스트 김현미(지적장애 3급)양 동계 스페셜올림픽에서 은,동메달 따지적장애인 김현미(마르티나, 17)양은 인생에서 '꽃피는 봄날'을 맞고 있다. 나이가 그래서가 아니다. 올초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동계 스페셜올림픽(지적 장애인올림픽)에서 은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따고 난 후부터다. 현미양에게 꽃피는 봄날은 어떠한 모습일까.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지적발달장애인 생활시설 아네트의 집(원장 김영자 수녀)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현미 양을 만났다. 김현미양이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에서 딴 은메달과 동메달을 들어 보이며 수줍게 웃고 있다. #스페셜올림픽에서 메달 3개 따 현미양은 요즘 학교에서든 집(아네트의 집)에서든 어디서나 잘 웃는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자신감 때문이다. 웃을 때면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있는 현미양에게 "메달 땄을 때처럼 웃어보라"고 하자 그제야 고개를 든다. 낯선 이에게 미소를 들켜 수줍은 표정이다. 현미양은 지적장애 3급으로, 지적장애인 특수학교인 진명학교에 다닌다. 1년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중학교 3학년이다. 지적장애 3급은 지능지수와 사회성숙지수가 50~70으로, 또래와 같은 사고와 학습, 생활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현미양은 시침과 분침, 초침이 있는 아날로그 시계를 보는 데만 2년이 걸렸다. "시계를 볼 줄 안다"고 하지만 지금도 분침 보는 것이 서툴다. 현미양 옆에서 함께 대화하던 김영자 수녀는 "현미는 운동에 소질이 많다. 스키뿐 아니라 무슨 운동이든 잘한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현미양은 스키를 배우기 전 이미 육상선수이자 배드민턴 선수, 높이뛰기 선수 등으로 활약했다. 스키는 2011년에야 입문했다. 뛰어난 운동신경과 교사들의 지도, 아네트의 집 수녀들 헌신 덕에 2년 만에 올림픽 알파인스키 메달리스트가 됐다. 스페셜올림픽에는 남동생 현재(발렌티노, 15)군과 시설에서 만난 김형주(미카엘, 14)군이 함께 출전했다. 그 중 메달을 딴 사람은 현미양뿐이다. 시계 보는 것보다 메달을 따는 게 더 쉬운 모양이다. "(1위를 한) 프랑스 친구는 정말 날아다녀요(빨라요).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올림픽 이야기를 꺼내자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다. 현미양은 2월 5일 열린 대회전 결승에서 4.5초 차이로 2위에 머물렀다. 알파인스키는 1, 2차 시도 시간을 합해 가장 빨리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에게 금메달을 준다. 현미양은 스페셜올림픽 직후 열린 장애인 동계체전에서도 동메달을 따며 기량을 뽐냈다. "4년 뒤 미국(LA)에서 열릴 스페셜올림픽에도 나갈 거예요. 올해는 5월 국내에서 열리는 배드민턴 대회에, 10월에는 높이뛰기 대회에도 나갈거예요!" #엄마 기억이 안 나요 현미양은 6살 때 남동생 현재와 함께 아네트의 집에 왔다. 어릴 때 떨어진데다 지적장애가 있어 부모 얼굴을 기억하기는커녕 함께 지낸 기억조차 없다. 남매는 본래 전남 순천에서 살았다. 부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린 남매를 보육시설로 보냈다. "엄마 얼굴이 기억 안 나요." 현미양에게 엄마 아빠 기억이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현미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남매는 아네트의 집으로 옮겨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엄마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연락도 닿지 않는다. 현미양은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지적장애'와 '부모와의 이별'이라는 십자가 두 개를 지고 살아왔는데도 말이다. 아네트의 집 수도자들의 헌신적 보살핌과 기도 덕분에 현미양은 조금씩 더 행복해지고 있다. 세례도 받았고, 주일미사에도 열심히 참여한다. 그의 밝은 얼굴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는 성경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현미양은 아네트의 집에서 '천사 누나'로 통한다. 몇 명 되지는 않지만, 자신보다 어린 동생들을 잘 돌본다. 자신이 어려움을 겪어봤기에 나이 어린 동생들 아픔을 잘 안다. 꿈을 묻자 천사같이 대답한다.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요. 저보다 더 아픈 사람,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어요." 이힘 기자 조은일2013.04.24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17주일- 진짜 보물이 여기 있습니다](//cpbc.co.kr/CMS/newspaper/2011/07/rc/383955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17주일- 진짜 보물이 여기 있습니다박용식 신부(원주교구 횡성본당 주임)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 모파상 작품인 「목걸이」의 주인공 마틸드는 하급 관리 아내였지만 호화로운 생활을 꿈꾸며 사는 여자였습니다. 어느 날 장관이 주최하는 파티에 남편과 함께 초대받은 그는 친구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빌려 한껏 멋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만 친구에게 빌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잃어버립니다. 마틸드는 어쩔 수 없이 전 재산을 처분하고 모자라는 돈은 빚을 얻어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친구에게 돌려줍니다. 그러고 나서 마틸드 부부는 빚을 갚기 위해 10년이나 허드렛일을 하며 고생합니다. 마침내 빚을 다 갚을 무렵 마틸드는 거리에서 우연히 목걸이를 빌려준 옛 친구를 만나 그간의 일을 고백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 이를 어쩌면 좋아. 내 목걸이 값을 갚느라 10년이나 고생을 했단 말이에요? 그 목걸이는 싸구려 가짜였어요." 마틸드는 가짜를 얻기 위해 그토록 많은 세월을 고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나라가 어떤 곳인지 가르쳐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어떤 감각으로도 느낄 수 없는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려고 온갖 비유를 다 만들어 내십니다. 하늘나라를 겨자씨, 누룩 등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다가 마침내 오늘 복음에서는 '보물'과 '진주'에 비유해 설명하십니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5-46). 인생은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평생 보물찾기를 계속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디에 좋은 물건이 있으면 가진 것을 다 털어 그것을 사고, 어디에 병을 잘 고치는 용한 의사가 있다고 하면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서라도 그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합니다. 또 어느 나라에서 큰돈을 벌어 갑부가 될 수 있다고 하면 전 재산을 팔아 국외로 이민을 가기도 합니다. 몇 년 전 전남 진도군 죽도 앞바다와 울릉도 근해에 보물선이 침몰해 있다는 소문이 돌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내려 혈안이 되기도 하고 관련 주식에 투자자들이 몰리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보물, 즉 재물ㆍ권력ㆍ명예ㆍ쾌락 등 부귀영화를 찾아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상 보물은 일시적 기쁨과 행복을 주겠지만 결국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성경(시편 90,10)에 분명히 쓰여 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의 보물은 참된 보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찾아다니는 보물은 대부분 모파상 소설에 나온 것처럼 가짜입니다. 그런데 가짜가 더 진짜처럼 보여서 진짜보다 더 화려하고 눈부시게 반짝입니다. 가짜 보석 목걸이는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들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단 하룻밤 꿈처럼 사라집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있지요. 세상의 보물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다가 발등 찍힌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과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 줄 진짜 보물, 발등 찍히지 않고 믿을만한 참된 보물은 하느님 말씀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구해야하는 참된 보물입니다. 그래서 성 바오로 사도는 이 진리를 깨닫고 이 세상 모든 보물들을 '쓰레기'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사제가 될지 말지를 고민하던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오랜 고민과 방황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얻으려면 가장 좋은 또 다른 것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사제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결국 그 신학생은 신부가 돼 지금까지 다른 어느 신부보다 더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좋은 보물, 하느님 나라라는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이 좋은 보물을 얻기 위해 재물, 명예, 세속적 성공 같은 가짜 보물을 아낌없이 버려야합니다. 그것들을 팔아서 하느님 나라라는 진짜 보물을 사야합니다.조은일2011.07.19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15주일- 내 마음 밭은 어떤 밭일까?](//cpbc.co.kr/CMS/newspaper/2011/07/rc/382446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15주일- 내 마음 밭은 어떤 밭일까?박용식 신부(원주교구 횡선본당 주임)한 여인이 상점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계산대에 하느님이 서 계셨습니다. 여인은 깜짝 놀라 여쭈었습니다. "아니 하느님, 여기서 뭘 하고 계셔요?"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팔려고 기다리고 있단다." 여인은 이왕이면 자기가 원하는 최고의 것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평화와 사랑, 행복과 지혜, 자유를 사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는 평화, 사랑, 행복, 지혜, 자유 같은 열매는 팔지 않고 그 씨앗을 팔고 있단다. 그러니 네가 이 씨앗을 사가지고 가서 잘 가꾸면 그와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많은 것을 청합니다. 때로는 노력 없이 좋은 결과만 청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청원을 완성된 결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씨앗의 형태로 우리 마음에 뿌려주십니다. 물고기를 청하면 물고기 잡을 그물을 주시고, 평화를 청하면 평화를 그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씨앗을 주십니다. 그 씨앗을 우리 마음 밭에 심어 싹을 틔우고 자라 꽃을 피워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복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 먹었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말라버렸습니다.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음 밭이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 같은 사람은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마음 밭이 옥토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은 여러 방법으로 우리 마음 밭에 씨를 뿌리십니다. 천둥, 번개와 벼락을 통해 죄인들에게 회개의 씨앗을 뿌리고, 고통 받는 이웃을 통해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시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세례성사, 고해성사, 성체성사 등 성사를 받을 때 하느님은 당신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성경을 읽을 때도 당신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뿌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수도 없이 우리 마음 밭에 뿌려졌습니다. 우리 마음 밭이 좋은 땅이었다면 지금쯤 좋은 열매를 아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밭이 좋은 밭이라면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갈라 5,22)를 풍성하게 맺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제의 강론을 통해서도 우리 마음 밭에 씨를 뿌리십니다. 그런데 똑같은 강론을 들어도 신자들 반응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깊은 감동을 느끼고 생활 속에서 많은 열매를 맺지만, 어떤 신자들은 강론을 들으나마나 '소귀에 경 읽기', '굳세어라 금순아'입니다. '신부님이 뭐라고 강론을 하든 내 방식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사제를 통해 아주 좋은 씨앗을 뿌려주셔도 이런 신자들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똑같이 피정을 받고, 똑같은 강론을 듣고, 똑같이 기도를 하고, 똑같은 훈화를 들어도 열매를 맺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어떤 이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 내 마음 밭은 어떤 밭입니까?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에 덮인 밭입니까? 아니면 좋은 밭입니까? 하느님이 내 마음 밭에 평화의 씨앗을 뿌렸는데 평화롭지 못하면 그것은 분명 내 마음 밭이 돌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 밭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셨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분명 마음 밭이 가시덤불로 덮여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생활 속의 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뿌려질 하느님 말씀의 씨앗도 많은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조은일2011.07.05
[생활속의 복음] 대림 제1주일-가장 인간적인 하느님 만나는 날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부활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축제임을 알면서도 신자들은 크리스마스를 더 기다리고 축제의 장으로 열광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활이 그리스도교 전례주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크리스마스는 믿음에 대한 최대 인간 축제일 것이다. 그것은 이날 우리가 하느님의 인간성을 가장 깊이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베네딕토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구간 구유의 아기 예수와 초라한 목동들의 벅찬 감동이 완벽한 찬미를 이룬 그날 밤은 하느님의 인간성이 절정을 이룬 날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는 오늘, 복음과 독서는 우리의 이러한 성향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온통 '깨어 있어라'고 경고합니다. 짧은 복음 말씀에서 깨어있으라는 구절이 네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삶이 깨어 있으면서 예수님 성탄을 준비하는 삶이겠습니까? 바로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과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메시아를 기다렸던 율법학자, 바리사이, 사두가이는 바로 곁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 본 이들은 멀리 있었던 동방박사들과 하느님에 대해 무식하고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죄인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잘 알고, 메시아를 학수고대했던 이들이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이유는 그들의 모든 관심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현세적 욕심을 채우는 데만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를 쳐부수고 제2의 모세가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 자기들만을 일등국민으로 만들어 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을 만났고, 또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했던 사람들은 동방박사들, 목동들, 제자들, 과부들과 병자들, 고아와 고통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던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번 성탄에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을 우리는 제대로 알아 모실 수 있을까요? 대림시기 동안 내 이기적 마음을 정화시켜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랑과 평화, 감사의 마음을 간직한다면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스탠턴은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한 번은 두 사람이 함께 사건을 맡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법정에 앉아 있던 스탠턴은 링컨을 보자마자 자리에게 벌떡 일어나 "저 따위 시골뜨기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라는 겁니까"하며 나가 버렸습니다. 이렇듯 스탠턴이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하게 행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장관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임명했습니다. 참모들은 이런 링컨의 결정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탠턴이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참모들이 재고를 건의하자 링컨은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합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스탠턴은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버려야지요!" 참모들의 말에 링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속에서 없애버려야지요!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뒀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구원 복음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요구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어느덧 사랑이 샘솟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맺어졌던 아픈 과거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성탄보다도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축제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조은일2008.11.25
[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37-사추덕(四樞德) (2) - 정의인간 모든 행위 기준점은 '의'플라톤에 의하면 사추덕은 네 가지 덕으로 구성돼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따로 떨어질 수 없는 통합적 체계의 덕들이다. 그래서 그는 "덕은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후에 그 덕들의 연관성에 대해 설명한다. 마치 유학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인간의 핵심적 덕목으로 제시하고, 그 덕들의 관련성 안에서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논의하고 있는 것처럼…. 짧은 지면이라 여기에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추후라도 연구해볼 만한 주제다. 토마스 데 아퀴노는 사추덕의 연관성을 형이상학적 원리 안에서 이해한다. 크게 보면 이성(理性)의 영역에서 지혜와 정의의 덕이 나오고 정념(情念)의 영역에서 절제와 용기의 덕이 나온다. 따라서 지혜는 어떤 행위와 영역 안에서의 분별의 올곧음이며 정의는 정신의 올곧음인데, 인간은 그것을 통해 어떤 영역에서든 자신이 해야만 할 것을 행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도 '의'(義)는 모든 삶의 질서를 위한 최고의 생활 가치로 인식된다. 이것은 절대적 윤리 규범에 대한 인간의 방정한 품행과 법도의 의로움, 재판의 의로움 등을 의미한다. 이 義는 하느님의 속성이다.(시편 4,1; 7,17) 유학 또한 의(義)를 마땅함, 도리(道理), 정당(正當), 옳음 등의 뜻으로 이해하며, 항상 인간의 행위와 연관해 사용한다. 그러므로 의는 한 마디로 인간 행위의 준칙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자가 늘 근심하던 것 중의 하나는 '의를 듣고 능히 실천하지 못하는 것(聞義不能徙, 論語」, 述而篇)이었고, 의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君子)라고 불렀던 것이다.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리에 밝다."(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論語」, 理仁篇) 공자 스스로도 이러한 점을 강조했고 또 그렇게 살았다. 즉 인간 삶에서 의식주와 관련된 물질적 측면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보다 더 높은 가치 즉 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의롭지 않으면서 돈 많고 벼슬 높은 것은 나에게는 뜬 구름과 같다."(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 如浮雲. 「論語」, 述而篇) 예수도 산상설교 중에 같은 의미의 가르침을 전해준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7,31-33). 공자는 군자의 또 다른 특성으로, 의를 바탕으로 하여 모든 덕을 통합하는 인간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치 플라톤이 정의를 가장 완숙한 상태의 덕으로 파악한 것처럼…. 공자는 말한다. "군자는 義로써 바탕을 삼고, 禮로써 그것을 행하며, 겸손한 태도로 그것을 표현하며, 믿음으로써 그것을 이룩하니, 참으로 군자로다."(子曰 君子義以爲質 禮以行之 孫以出之 信以成之 君子哉. 「論語」, 衛靈公篇) 예와 겸손함과 믿음은, 의라는 본질을 행동에 옮기고 외면으로 표현하며 완성하는 수단이요 방법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 행위의 바탕이 義에 있다는 말이다. 군자는 더 나아가 모든 인간 행위를, 義라는 기준을 통해 판단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군자는 천하의 일에 대하여, 오로지 주장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아서, 義를 따라 행동할 뿐이다."(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論語」, 里仁篇.) 왜냐면 정의는 인간관계 뿐 아니라 사회나 국가공동체의 공동선과 관련된 덕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 관건이다. 미가 예언자가 넌지시 일러주는 말씀을 들어보자. "이 사람아, 하느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미가 6,8) 조은일2008.11.04

자업자득(自業自得)! 흩어지지 않는 기억으로…[월간 꿈 CUM] 철학의 길 _ 동양 고전의 지혜와 성경 (10)오늘은 아침부터 내 몸이 나에게 호소가 아닌 호통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3주 정도 전부터 위가 쓰려왔는데 오늘은 참다못해 요동을 치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아닌 누구에게 탓할 일도 아닌 듯합니다. 아침에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 잔이 오랜 변비를 해결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쁨과 해방감에 하루, 이틀, 긴 시간의 반복이 내 삶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술이 술을 마시듯 모닝커피가 모닝커피를 마시는 패턴이 위장을 화나게 한 것입니다. 내가 나에게 준 자업자득의 고통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고통이 호통칩니다. 불교에서 ‘업’(業)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업이라하면 불교를 떠올리며 죽고 사는 삶의 반복인 윤회 혹은 환생과 연결 지어 생각합니다. 그러나 굳이 윤회와 연결 짓지 않더라도 업은 우리 일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삶과 행동의 인과적 패턴입니다. 자기의 행위(행업)는 과거 행위(행업)의 결과이며, 그 결과는 원인이 되어 새로운 결과로 돌아옵니다. 이런 인과적 패턴에 따른 업에서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법염경」(正法念經)에 나오는 사자성어로 쉽게 말해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가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그는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삶이라는 습관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이었다. 영웅의 왕관은 거의 그의 손에 들어왔으며 그는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이 악명 높은 사건이 결과적으로 안 씨의 승리로 끝나고 만 것은 아닐까?” 이 내용은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재판을 지켜본 영국 기자가 쓴 기사 내용입니다. 이 기사에서 ‘삶이라는 습관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 눈에 잡힙니다. 습관은 우리의 행동이 반복되면서 몸에 밴 버릇을 말합니다. 지금의 행위가 다시 그 행위를 낳고 그 행위가 또 그 행위를 낳는 것이죠. 욕도 해본 사람이 잘하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뭔가 어색합니다. 욕이 욕을 낳듯, 강도질이 강도질을 낳고, 거짓이 거짓을 반복합니다. 자기 행위가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며, 돌아온 행위는 그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더욱 자신을 옭아매게 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과적 패턴의 자업자득이 사회 안에서 관습, 고정관념,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자리 내리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가 너무 당연히 여기는 삶의 습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익숙한 사회적 습관의 업보에서 벗어난 영웅이었습니다. 잘못된 업보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해방은 조건을 바꾸어 인과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일본이 강제로 맺은 조건의 굴레를 새로운 조건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보인 행동은 동양평화를 위한 행업, 그리고 우리 민족을 새로운 자주 독립 국가로 만들기 위한 사회적 행업, 일본의 한 부분이 되어 사는 삶이라는 습관을 포기한 순교행위였습니다. 일본의 신민(臣民)이 아니라 자주독립국을 선택해 업을 바꾼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의 현재 모습은 영국 기자의 말처럼 ‘안중근은 승리자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잘못된 인과적 업보에서 벗어나는 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칼을 쓰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칼이며, 죽이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입니다. 일본은 총과 칼로 일어서 총과 칼로 무너졌습니다. 고통은 누가 아닌 자기 자신에서 비롯된 인과적 결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인과적 업이 있다면 불의의 업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업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하느님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행업은 반드시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얻고, 열리는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며 구원입니다. 그 약속의 결과인 구원은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유입니다. 우리의 행업은 그 약속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3월이 되면 3.1만세 운동을 기념합니다. 그 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이들은 일본 신민(臣民)으로서의 인과적 고리의 악습에서 벗어나려 한 순교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특정 국가에, 잘못된 역사관에, 물질과 권력에, 특정 이데올로기에 신민(臣民)적 업보가 남아있다면 우리 안에서 다시 독립 만세를 외쳐야 합니다. 위장도 호통을 치는데 우리 정신이 호통을 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깊은 한숨 바람에 흩어지고.’(영화 「영웅」 노래 가사의 일부) 그러나 기억만큼은 흩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 만세! 글 _ 손은석 신부 (마르코, 대전교구 산성동본당 주임) 2006년 사제수품.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전담사제를 지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전공)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소소하게 살다 소리 없이 죽고 싶은 사람 중 하나. 그러나 소리 없는 성령은 꼭 알아주시길 바라는 욕심쟁이다. cpbc2025.02.28

기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사제가 답하다 배런 주교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먼저 기도하셨다” 전례·신심·성경 통해 일상에서 하느님 만나는 법 집대성 마틴 신부 “느낌 없어도 마음 깊은 곳 무언가 일어나” 전통 기도·성모 기도·전례력 따른 기도 생활까지 쉽게 안내 신앙인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어려운 단어인 ‘기도’. 기도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빎’이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구하라 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바라는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때로는 각종 기도문들이 나와는 한참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도대체 기도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도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이 나란히 출간됐다. 기도 - 내 안에서 기도하시는 하느님 / 로버트 배런 주교 / 허찬욱 신부 옮김 / 생활성서 “기도는 초월적인 영역이 우리의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초월적인 영역에 가닿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뻗는 우리의 손길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손길과 만나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17쪽) 「기도 - 내 안에서 기도하시는 하느님」은 교회의 가장 뛰어난 메신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미국 미네소타 위노나-로체스터교구장 로버트 배런 주교가 기도의 모든 과정을 집대성한 책이다. 배런 주교는 “기도는 결국 ‘청원’이며, ‘어떻게 기도하는지 모른다’라는 말이 곧 기도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특히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먼저 기도하고 계셨고,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간절히 찾으신다”며 기도를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자 신비적인 응답으로 재정의한다. 책은 총 7장으로 나눠 기도의 기초적인 정의부터 의미, 구체적인 실천 방법까지 안내한다. 토마스 머튼과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등 영성가들의 기도 체험을 통해 ‘바라봄’과 ‘머묾’의 관점으로 기도를 풀어낸다. 전례 기도를 통해 가톨릭교회의 공적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과 신심 기도 및 성경을 읽으며 일상의 순간마다 하느님과 대화하는 방법도 제시한다. “기도란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습관이 자리 잡으면, 우리는 어떤 일도 하느님과 떨어져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만물 안에서, 일상의 모든 자리에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 안의 누군가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79쪽) 파리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먼델라인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0부작 TV 다큐멘터리 ‘가톨리시즘’의 진행자로 활동했고, 저술·강연·SNS 등 여러 매체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기도, 할수록 좋네요 / 제임스 마틴 신부 / 가비노 김 옮김 / 바오로딸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숨김없이 마음을 드러내 보이길 바라십니다. 정말 가까운 친구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듯이, 하느님께도 그대로 이야기하면 됩니다.”(26쪽) 「기도, 할수록 좋네요」는 제임스 마틴(예수회) 신부가 집필한 「기도, 이렇게 하니 좋네요」의 후속작이다. 기도에 대한 기초 지식과 삶의 모든 순간에 필요한 지향으로 바치는 기도, 다양한 기도 방법에 대해 안내한다. 쉽고 단순하게 풀어낸 짤막한 글에 자신의 이야기도 버무려 친근감을 더했다. 전통 기도부터 성모님과 함께하는 기도, 전례력에 따른 기도 생활도 영성적으로 이끌어준다. 마틴 신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하고 청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기도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며 “(기도에) 아무런 느낌이 없더라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분명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기도하는 중에 문득 떠오르거나 의식하게 되는 생각(깨달음), 감정, 기억, 이미지, 열망, 몸의 느낌, 그리고 때로는 어떤 단어나 구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순간들을 통해 여러분과 소통하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을 알아차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238쪽) 시카고 로욜라대학교와 웨스턴 예수회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마틴 신부는 신문·잡지·웹사이트 등에 글을 기고하고, 피정 지도와 강연 등을 통해 신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번 책은 월간지 「Give Us This Day」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칼럼에 기고한 글을 발췌해 엮은 것이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6.05.20

늙음과 죽음 앞에서 한 가족의 결말이 결정된다[서민선 아녜스 작가의 노년을 읽습니다] 24. 아니·클로드 보듀셀 「부모님이 나이 들어 가실 때」 구글 제미나이 제작 사람은 안 변할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드니 변한다 나는 그것에서 어떤 희망을 본다 아니 보듀셀·클로드 보듀셀은 프랑스인 부부 작가다. 부부는 죽음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을 돕는 일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책으로 썼다. 책은 코헬렛 12장으로 시작한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코헬 12,1) 코헬렛 12장 제목은 ‘늙음과 죽음’이다. 모든 것이 허무라고 말하는 그 유명한 성경 구절이 바로 이 장에 들어있다. 불행의 날들이란 바로 노년이라는 사실을 서글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보듀셀 부부는 부모님이 나이 들어 가는 것을 인식하면 “부모님과 함께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한다. 부모님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고. 즉 부모 돌봄의 시기가 왔음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이 문장에서 정반대의 맥락을 읽었다. 노년을 맞은 당사자 역시 자식과 함께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비단 자식에게 노후를 의지하고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노년기 부모와 장년기 자식의 결말에 관한 이야기.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유아기 때 관계가 좋았던 가족이 청년기 때도 좋고, 청년기 때 좋았던 가족이 장년기 때도 좋다. 희망적이기도 절망적이기도 한 진리다. 책 「부모님이 나이 들어 가실 때」 작가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예전의 부모님과 맺었던 관계에 따라 나이 든 부모님에 대한 연민이 달라질 것이라고. 그런데 지금껏 맺어온 관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거라고. 혹시 부모가 노년이 되었을 때 관계가 삐걱거리는 중이더라도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테니 잘 한번 해보자는 의미이리라. 부모님께서 나이 들어 가시면서 나는 종종 삶의 새로운 국면들을 만난다. 판단력·기억력·순발력·문제해결 능력·체력. 그분들의 모든 능력이 점점 쇠함을 서로가 느낀다. 그리고 쇠하는 것들은 본래의 성정이 바뀌도록 조금씩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사람은 변한다. 사람은 안 변하는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드니 변한다. 나는 그것에서 어떤 희망을 본다. 나와 부모 간에 풀리지 않던 어떤 것이 어느 날 ‘탁’ 풀려버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나는 일흔다섯의 시어머니를 만나 그분의 나이 아흔셋까지 함께했다. 너무나도 나이 차이가 많던 고부 사이는 세월이 가며 점차 달라졌다. 나를 그저 어린 손주 보듯 하던 어머니는 차츰 어른을 대하는 눈이 되더니 마지막에는 기대고 의지하는 눈이 되었다. 나도 그랬다. 시골에 계신 내 할머니를 상대하듯 그저 예쁨 받으려고 했던 나는, 그분의 병원 동행자가 되고 마지막에는 보호자가 되었다. 어느 여름날 남편과 함께 어머니를 뵈러 간 적이 있다. 간다고 연락드리면 새벽부터 아니 그 전날부터 기다리며 고속도로 운전을 걱정할 것을 뻔히 알기에, 그날은 연락없이 간 참이었다. 어머니 얼굴에는 반가움의 희색이 아니라 놀라움의 사색이 먼저 번졌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나)한테 무슨 일이 있어? 왜 이렇게 연락도 없이 왔어.” 나는 그때 어머니의 늙음을 보았다. 본인의 안위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어지는 시기가 왔구나. 어머니께서 전적으로 우리에게 의지하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자립심이 강한 어머니께 상상하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본인에게도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내가 해. 그냥 둬”를 하루에 백 번씩 반복하시던 어머니가 “엄마는 이제 못 해. 해주고 가”를 반복하는 어머니로 바뀌었다. 새로운 국면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그것은 차츰 서서히 진행된다. 책 「부모님이 나이 들어 가실 때」에는 한편 이런 이야기들도 나온다. 노쇠한 부모님을 연민하고 아이를 돌보듯 돌봐야 하지만, 여전히 부모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즉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의 노년을 지켜드리되, 부모님께 받은 모든 것을 받은 만큼 되돌려 드리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서로가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자식으로서의 나, 형제·자매로서의 나, 아내로서의 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지켜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앙과 숙고다. 지침은 성경에서 얻을 수 있고 용기는 기도에서 얻을 수 있다. 크게 갈등하는 가족들의 서사에 꼭 등장하는 강렬한 문구들이 있다. “나 죽어도 오지 말아라”, “장례식 때나 만나자” 등.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의 죽음은 가족 서사의 핵심이다. 구성원의 죽음으로 가족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때로 완결된다. 여느 희극처럼 가족도 서사를 전개하는 때가 있고 마무리하는 때가 있다. 그러니 죽음은 여러모로 무겁다. 어두워서가 아니라 중해서 무겁다. 가족의 결말은 구성원 모두의 결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늙음과 죽음 앞에서 구성원 모두가 그것을 소중하고 무겁게 다룰 일이다. cpbc2026.06.10

공동선에 기여한 70년… 성심당 사례로 배우는 'EoC 경제'서울대교구 청소년국·한국 EoC 위원회, 특강 개최 이윤 극대화에 몰두해 현대 자본주의가 관계, 영적 위기 등 한계에 직면했다는 우려 속에 경쟁과 수치에서 벗어난 ‘모두를 위한 경제(EoC)’의 가치 추구가 현 시대에도 가능할까. 대전 향토기업 성심당이 오랜 세월 이어온 사랑과 나눔의 실천의 모범으로 소개됐다. 서울대교구 청소년국과 한국 EoC 위원회는 9월 17일 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EoC가 제안하는 새로운 경제와 성심당의 여정’을 주제로 특강을 개최했다. 이번 강연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주인공인 청년들에게 공동선의 가치를 실천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신앙과 삶 안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기획됐다. 국제 EoC 초대 대표를 역임한 루이지노 브루니(이탈리아 로마 룸사대학교 정치경제학과) 교수와 로쏘(성심당) 브랜딩사업부 김미진(아녜스) 총괄이사가 연사로 나서 자본주의의 폐해에 따른 대안을 모색했다.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가 9월 17일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강연하고 있다. 브루니 교수는 현대 자본주의가 △세계화(방향 상실) △환경(착취와 쓰레기) △관계(공동체 붕괴) △영적 위기(삶의 의미 상실) 등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고 진단했다. 브루니 교수는 이러한 위기가 벌어진 이유를 언급하면서 “과거 경제 기적을 이룬 원동력이었던 노동의 ‘덕’이 고갈됐다”며 “기업은 이를 소모하기만 할 뿐 재생산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행복하지 않은 한국의 현실도 꼬집었다. 유엔 산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가 발표한 올해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도는 10점 만점에 6.040점으로, 세계 67위다. 2012년 발표 이래 가장 낮은 순위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신뢰의 약화, 부패 인식, 사회적 고립, 과도한 SNS 사용 등을 주요 원인으로 짚었다. 브루니 교수는 “모두를 위한 경제를 실천하기 위해선 관계를 회피하지 않고 친교를 택해야 한다”면서 “이익의 상당 부분을 나누는 ‘주는 문화’를 조성하고, 상호성의 원리에 입각해 타인을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9월 17일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EoC가 제안하는 새로운 경제와 성심당의 여정’을 주제로 특강이 진행되고 있다. 이날 자본주의 위기 속에 이윤 극대화가 아닌 친교와 나눔을 기업의 핵심 가치로 삼아 성공을 이룬 기업으로 대전의 성심당이 소개됐다.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를 겪으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창업주 고 임길순·한순덕씨 부부의 다짐에서 시작된 성심당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웃과 빵을 나누면서 성장해왔다. 1990년 원도심 공동화 현상에 따른 침체와 2005년 화재로 인한 전소에도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 12,17) 등 성경의 가르침을 기업 문화로 승화했다. 김 이사는 “성심당이 단순한 자선 활동을 넘어 기업 본연의 활동을 통해 공동선을 추구하고, 생명 중심의 경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99년 남편 임영진(요셉) 대표가 포콜라레에서 EoC를 접하며 경영 철학에 적극 도입했다고 전했다. 성심당은 이를 통해 2007년 무지개 프로젝트를 전개했고, 이웃사랑과 환경보호, 법규와 제도 수호 등을 실천해왔다. 특히 이윤을 지역 복지기금과 장학금으로 사회에 환원하고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했다. 성심당은 구성원을 이익 창출의 도구가 아닌 인격체로 대우하며 동반 성장하는 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김 이사는 모두를 위한 경제 추구가 사회와 기업 모두 성장하게 된 배경이라고 강조했다. 김 이사는 임 대표의 말을 인용, “제가 만약 EoC 기업방식을 알지 못했다면, 그저 성공한 착한 빵집 사장으로 남았을 것”이라며 “EoC를 알고 직업을 통해 공동선을 이루고 보편적 형제애를 살 수 있어 기쁘다. 앞으로도 빵을 통해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준태 기자 ouioui@cpbc.co.kr 이준태 2026.09.30

“부활의 기쁨, 안방까지 전달합니다” cpbc 부활 특집 프로그램 풍성[부활특집] cpbc프로그램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cpbc 가톨릭평화방송 TV와 라디오가 부활의 기쁨을 나누고, 그 의미를 더욱 체현할 수 있도록 다양한 특집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TV 2026 신앙체험수기 다큐멘터리 ‘나에게 오신 빛’ 3부작 인생 한 페이지에서 만난 주님의 사랑과 축복이 다큐멘터리로 재탄생했다. 가톨릭평화신문이 13년째 공모받아 연재하는 신앙체험수기는 하느님과 진솔한 만남을 담은 신자들의 작품으로 주님 사랑을 찬미할 기회를 선사하고 독자들에게는 신앙을 성숙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올해 당선작들이 지면을 넘어 안방극장에도 찾아간다. 방송 : 5~19일 일요일 오전 11시 30분, 재방송 : 6~20일 월요일 오후 8시 / 8일~22일 수요일 오후 7시 30분 / 9~23일 목요일 오전 10시 20분 / 11일~25일 토요일 오후 4시 김대우 신부의 부활 편지 “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영혼이 평안하듯이 그대가 모든 면에서 평안하고 또 건강하기를 빕니다.” 신자들에게 보내는 김대우(수원교구) 신부의 부활 영상 편지, 성주간을 앞두고 1박 2일 다녀온 수도원 피정에 대한 나눔 등 김 신부의 묵상을 바탕으로 삶 안에서 부활을 사는 데 필요한 노력을 성찰한다. 방송 : 5일 오전 10시 30분 / 오후 8시 허규 신부와 듣고 보는 신약 성경 “부활이 뭔가요?” 청년의 물음에 허규(서울대교구) 신부가 답했다. 드라마 ‘예수 그리스도 생애’ 가운데 부활 이야기를 꼽아 전하는 일대일 부활 밀착 과외, 어렵게만 느껴지는 성경을 청년과 대화하면서 풀어낸다. 방송 : 5일 오전 11시 / 오후 7시 30분 주님의 마지막 일주일 머리에 재를 얹고 단식하며 ‘먼지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는 사순 시기, 네 복음서 속 수난기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여정을 김덕재 서울대교구 신부와 함께 묵상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부터 수난과 죽음, 부활에 이르기까지 복음서별 말씀을 차례로 살펴보는 시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전례인 사순과 부활의 의미를 한껏 집약했다. 방송 : 3~4일 오전 2시 (라디오 : 2~4일 오전 5시) 특집 다큐 ‘바티칸 사람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밀착 취재한 프랑스-이탈리아 공동 제작 다큐멘터리. 일반인은 접근이 불가한 바티칸 내부 모습을 카메라에 생생히 담았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종교인과 평신도 약 5000명의 일상을 조명한다. 방송 : 4일 오후 5시 애니메이션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꿈’ 박해받는 조선의 신자들을 위해 이 땅에 당도하고자 온갖 애를 쓰다 중국 땅에서 선종한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과 신앙, 조선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나볼 수 있다. 방송 : 4일 오전 6시 30분, 재방송 : 5일 오전 2시 40분 애니메이션 ‘홀리 몰리’ 아이들을 위한 10분짜리 짧은 만화로 고전 성경 이야기를 재구성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기 쉽게 돕는다. ‘최후의 만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빈 무덤’을 주제로 다룬 만화가 생생하게 안방 극장을 찾는다. 방송 : 2~4일 오전 8시 50분, 재방송 : 5일 오전 3시부터 3편 연속방송 영화 ‘마태오 복음’ 이탈리아 거장 피에르 파오로 파솔리니 감독의 영화(1964). 마태오 복음을 바탕으로 예수님 생애를 전기 다큐 형식으로 만나볼 수 있다. 방송 : 2일 오후 10시 40분 영화 ‘벤허’ 로마의 압제와 친구의 배신으로 왕자에서 죄수로, 노예에서 귀족으로 신분이 바뀌며 기구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한 유다 청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차시켜 보여준다. 1959년 개봉 당시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휩쓰는 대기록을 세운 작품이다. 방송 : 4일 오후 10시 40분 미사 중계 하느님의 자비 주일 미사 부활 제2주일 자비 주일을 맞아 하느님의 자비를 기리는 공개 미사를 천주교 사도직회(팔로티회)와 공동으로 서울 동성고등학교 대강당에서 봉헌한다. cbp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성기헌 신부와 천주교 사도직회 김태광 신부가 공동집전한다. 2023년부터 이어진 하느님의 자비 주일 미사 중계는 죄에서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신자들이 자비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마련되고 있다. 방송 : 12일 오후 3시 라디오 미니 드라마 ‘2026 신앙체험수기’ 제13회 신앙체험수기 공모전 수상작이 성우들의 열연으로 엿볼 수 있는 듣는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7분 분량의 미니 드라마로 각색된 일상 속 신앙의 신비가 청취자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방송 : 3월 30일~4월 3일 오후 4시 50분 재방송 : 4일 오후 12시부터 5편 연속방송 기도의 오솔길 전영금 수녀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올리브 산에 이르기까지 40일간의 약 330㎞ 여정. 그분의 발길이 닿은 다양한 장소에서 선포하신 부활 메시지를 음악과 함께 되새겨본다. 전쟁과 상처로 지친 오늘날 예수님이 전하신 ‘평화’란 무엇일까? 방송 : 6일 오후 4시, 재방송 : 6일 오후 11시 이 주의 책 ‘사제의 책’ 가톨릭 사제가 쓰고 번역하며 추천하는 영성 도서를 통해 부활 대축일의 기쁨을 온전히 맞이한다. 서울대교구 햇살사목센터 소장 조재연 신부가 전하는 「우리 아이도 신앙을 가지면 좋겠다」는 성가정을 꿈꾸는 모든 신자 가정에 희망의 등불을 선사할 예정이다. 방송 : 5일 오전 8시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회개와 절제, 성찰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화하고, 부활의 의미를 더욱 깊이 체험하는 영성의 시간을 갖는다. 가톨릭찬양크루 ‘열입곱이다’부터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조직위원회 이희천 신부, 반주하는 시인 박은지(소화데레사)씨 등 활기를 선사하는 초대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다. 방송 : 3월 31일~4월 3일 오후 12시 15분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박예슬2026.04.01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32주일-천주교 신자들은 십일조 내면 죽는 줄 알고...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오늘 독서와 복음은 두 과부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에서는 '가난한 과부'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과부라고 해다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홀아비는 이가 서 말, 과부는 은이 서 말"이라는 말이 있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말하는 '과부'라는 표현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 주변에서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소외되고 힘없는 자를 뜻합니다. 제1독서의 사렙타 과부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 사랑을 음식으로 실천했고,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진 돈을 모두 봉헌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가장 구차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신자들은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고 하느님이 모든 것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행위로 교무금과 헌금을 봉헌합니다. 이는 신자들이 자신의 몸은 물론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신앙고백의 중요한 표현이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알몸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고,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 1/10을 봉헌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십일조라고 부릅니다. 레위기를 보면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다"(레위 27,30)라고 하셨고, 말라키서에서는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말라 3,1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통해 받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하느님께서 직접 보증해 주셨지요. 가난한 청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둘은 서로 성공을 다짐하면서, 성당에 가 하느님께 평생 동안 자신의 수입의 1/10을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매달 자신의 수입에서 무조건 1/10을 떼서 성당에 봉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수입이 워낙 별 볼일이 없어 수입의 1/10은 아주 적은 액수였지요. 시간이 지나 두 청년 중 한 사람이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됐습니다. 또 다른 청년 역시 그렇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둘은 자신들이 약속했던 수입의 1/10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둘 중 성공한 청년에게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 말합니다. "여보게 친구, 사실 내가 젊은 시절에 자네와 함께 맺은 약속을 이제는 취소하고 싶네. 내가 내 수입의 1/10인 10만원을 성당에 봉헌할 때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1/10이 몇 억씩 되다보니 얼마나 아까운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네.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이 행동을 그렇게 오랫동안 했으니 이제는 그만 둬도 되지 않을까?"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이 친구가 수십 억씩 버는 것이 이제 싫은가 봅니다. 도로 10만원씩 봉헌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함을 잊지 않고 겸손하게 나누며 살아야 하느님의 축복이 지속됩니다. 많은 축복을 받고도 하느님께 감사의 표현을 지속하지 못해 그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이 성경 안에 넘쳐납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돼서는 안 될 터인데 우리 현실은 어떠합니까? 천주교 신자들의 봉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에 한참 못 미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십일조를 내면 죽는 줄 알고, 개신교 신자는 십일조를 안 내면 죽는 줄 안다"는 웃지 못 할 말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난한 과부들의 정성과 축복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조은일2009.11.03
[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39(끝)-사추덕(四樞德) 4 - 절제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아야 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사추덕의 마지막 덕목인 절제는 정신의 경향인데, 이는 모든 정념과 행위에 그 한도를 정해 주어, 해야 할 바 이상을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 그래서 이 절제는 중용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덕은 과도함으로 말미암은 악덕과 부족함으로 말미암은 악덕 사이의 중용인데, 절제는 무감각과 방종 사이의 중용인 것이다. 유학에서 절제는 예(禮)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본시 "예란 인간됨의 근간이요, 예가 없으면 사람으로서 설 수 없다"(禮 人之幹也 無禮 無以立. 「春秋左氏傳」, '昭公 7년')고 해 예를 인간의 본질적 가치규범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유학에서 제시하는 많은 덕목들은 현실의 실천 과정에서 반드시 예의 조절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자는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롭고, 신중하되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하되 예가 없으면 어지럽고, 강직하되 예가 없으면 박절하게 된다"(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 「論語」 泰伯篇)고 말한다. 여기에서 예는 모자라거나 지나치지 않은 '중용(中庸)'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즉 예는 모든 덕목들을 현실에서 중용에 맞게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군자가 널리 글을 배우고 예로써 단속한다면, 또한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不畔矣夫. 「논어」 雍也篇)는 공자의 말도 바로 현실의 실천 과정에서 예를 통한 조절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학에서 禮는 핵심적 덕목인 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고, 현실에서 그것을 구현하고 완성하는 필수적 덕목이 된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가 거기에 미치더라도 仁으로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비록 얻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지혜가 거기에 미치고 仁으로 그것을 지킬 수 있더라도, 장엄함으로 임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지혜가 거기에 미치고 仁으로 그것을 지킬 수 있고 장엄함으로 임하더라도, 움직이기를 禮로써 하지 않으면 善하지 않다."(원문생략. 「論語」 衛靈公篇) 그래서 공자는 仁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제시하고, 그 구체적 조목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禮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論語」 顔淵篇 참조) 주자는 '극기복례'를 '자기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이겨서 禮, 즉 天理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극복하고 예를 회복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 이냐시오가 그의 '영신수련'에서 강조하고 있는 초연한 태도(indiferente)는 깊이 숙고할 만하다. 그는 먼저 인간의 창조 목적을 제시하고, 인간의 피조물 사용과 모든 행위는 이 목적에 부합되는 범위에서 선택돼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 부합되면 될수록 더(magis) 활용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치 유학에서 극기(克己)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복례(復禮) 즉 '天理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연재를 마치며 근 1년, 유학사상과 함께 신앙생활과 연관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러나 돌아보면 너무 부끄럽고 죄송하다. 늘 급박하게 글을 쓰게 되어, 깊은 묵상에서 나오는 정갈한 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분들에게서 분에 넘치는 격려와 질책 그리고 제안을 받았다.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얼마 전에는 그동안 몇 번 공동번역을 사용한 부분, 인용된 성경의 틀린 장절까지 지적해주신 분도 있었다. 감사드리고 싶다. 무엇보다도 늘 시한을 넘겨 마지막으로 오는 원고를 인내와 사랑으로 기다려주신 편집국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때, 독자들을 포함한 모든 평화가족들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기쁜 한 해 맞으시기를 기원하고 마음 모아 기도드린다. 감사합니다.조은일2008.11.18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6주일- 예수님의 충격 선언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너무나도 충격적인 예수님 말씀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자기들보다도 먼저 세리와 창녀들이 천국에 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혁명적 말씀이었지요. 왜 그렇게 된다는 말씀일까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끝내 그 답을 찾지 못해 멸망의 길을 가고 말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충격 선언을 들은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칠 줄은 모르고 남의 잘못만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외쳤고, 예수님이 가르쳤지만 정작 자기의 길을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행동으로 보인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들이었지요. 포도원을 경작하는 농부가 있었는데 그 농부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일이 아주 바빴던가 봅니다. 농부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 21,28)고 청합니다. 이 말에 첫째 아들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싫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아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아버지가 굉장히 실망을 했겠지요? 그리고 거기에 생각이 미친 맏아들은 곧 뉘우치고 일하러 갑니다. 맏아들에게 거절당한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똑같이 일을 시킵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요한 21,28). 그러자 둘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마태 21,30)하고 대답은 합니다. 하지만 대답만 하고 아버지의 일은 아랑곳없이 곧 다른 곳으로 놀러가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성경 안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선뜻 "맏아들입니다"(마태 21,31)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대답만 하고 따르지 않은 아들보다는 뉘우치고 밭에 간 아들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이라는 데에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곧 명확해집니다. 과거에 잘못된 삶을 살았더라도 반성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대답만 잘 하고 행동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부부가 차에 기름을 넣으려고 한 주유소에 들어갔습니다. 기름을 넣는 동안 주유소 직원이 다가와 차 앞 유리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기름이 거의 채워지고 유리가 거의 닦아질 무렵 남편이 주유소 직원을 불러 세웠습니다. "유리가 잘 닦이지 않았네요. 다시 한 번 잘 닦아주세요."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열심히 유리를 닦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남편은 직원을 불러 소리쳤습니다. "잘 좀 닦아보세요. 유리가 전혀 닦이지 않았잖아요." 직원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차 유리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닦이지 않는다고 화가 난 남편은 차 문을 열며 곧 뛰쳐나갈 태세였지요. 이때 옆에 있던 부인이 남편의 안경을 빼서 닦아주었습니다. 순간 남편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더러웠던 것은 차 유리가 아니라 자기 안경알이었던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며 남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사람보다는 과거에 잘못된 길을 걸었더라도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이 하느님께 더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의 탓을 하지 말고 자기를 닦아야 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내 눈에 남의 잘못들만 보인다는 것은 내 안에 나쁜 것이 있다는 증거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으로 나를 정화하고 상대방의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 어떠한 지식보다도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는 말씀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조은일2008.09.23
[생활 속의 복음]연중 제20주일- 혈통보다도 믿음을 보시는 예수님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이 바로 그렇습니다. 마귀가 들어서 시도 때도 없이 거품을 문 채 여기 저기 머리를 부딪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는 백방으로 병을 고쳐보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지요. 그러던 중에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한걸음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로 가까이 갈 수가 없자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고 소리도 소용없자 예수님의 길을 막고 엎드려서 애원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예수님께서는 박정하게 거절하시지요. 그러나 이 어머니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며 자녀를 위해서는 개가 되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더욱 간절하게 예수님께 달려듭니다. 그때서야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받아들이시지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바로 그 순간에 여인의 딸이 나았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애절한 청에도 불구하고 큰 상처를 입을 정도로 한 이방 여인을 박정하게 대하셨던 이유는 당신의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전 세계 모든 민족에 해당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1, 2독서 역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이것이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하느님께서는 집요하게 청하는 사람을 결코 물리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처녀가 인도에 선교사로 가려다가 출발 직전에 좌절하게 됐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님이 중환으로 몸져눕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 후 어머니는 3년 동안 병고로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병간호에서 자유를 얻은 서른 살이 다 된 처녀는 다시 선교사로 떠나기 위한 수속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멀리 살고 있는 언니 집을 인사차 찾아갔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언니마저 중병으로 눕게 된 것을 알게 됐습니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언니마저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다섯 명의 어린 조카들은 울면서 그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도저히 어린 조카들을 버려둘 수가 없어서 언니 집에서 이들을 당분간 돌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형부가 몸져눕게 됐습니다. 그는 선교사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됐지요. 얼마 후 형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선교사 일보다도 어린 조카를 기르는 일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자기를 돌보지 않고 온전히 다섯 조카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초로의 할머니가 됐고 조카들은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그중 세 명은 인도의 선교사로 파견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른 지향을 가지고 정성껏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 뜻대로, 그것도 지금 당장 이뤄지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기도하기가 힘들고,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뜻대로 내 욕망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간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덧붙여 나의 소망을 청하면 주님께서는 인간이 생각할 수도 없는 넘치는 열매를 주십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민족에게로 펼쳐나감을 강조하셨고, 그 누구도 끊임없이 구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큰 은혜에 감사드리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성심 성의껏 기도한다면 축복은 자연히 덤으로 따라 올 것입니다. 조은일2008.08.12
![[생활속의 복음] 보라, 십자 나무!](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3/11/1QN1773195886755.jpg)
[생활속의 복음] 보라, 십자 나무!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브리엘 뷔거 작 ‘슬픔의 성모’, 1868년 감각기관의 분류를 기준으로 오감은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으로 구성된다. 선천적인 오감을 잘 활용함으로써 인간은 삶의 질을 향상하고, 타인과 함께 느끼는 공감력을 형성한다. 한 감각기관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면, 다른 기관이 이를 보완하거나 대체하도록 신체는 대응체계를 수립한다. 보는 눈으로 듣거나 맛보는, 듣는 귀로 맡거나 만지는 가능성이 열려있다. 이 오감은 오용되거나 남용될 수 있다.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은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기에 오류를 범하고, 한시적 감각에 치우친 무분별한 생활 태도로 인해 죄악을 행한다.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오감과 결합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쉐마)!”(신명 6,4)로 시작하는 구약의 대표적 신앙고백과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로마 10,17 참조)고 설파한 바오로 사도의 훈시는 청각과 관련된다. 신앙인의 합당한 품위를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는 후각과,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안내하는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1베드 2,3)는 미각과 연동된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루카 8,44 참조)으로 성사된 하혈하는 여자의 치유와 “믿음과 사랑의 갑옷”(1테살 5,8)을 피부에 밀착하여 입으라는 권고는 촉각과 연관된다. 신앙의 궁극적 완성 상태를 시사하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1코린 13,12)는 시각을 통해 묘사된다. 성경의 치유 기적에는 오감과 직결된 사례가 비교적 많다. 복음서 중 가장 후대에 집필된 요한 복음의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치유’에는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하나는 ‘치유의 재료’다. 재료 없이 말씀(의지)만으로 성취된 ‘하느님의 창조 업적’(창세 1장 참조)처럼, 대개의 치유 기적은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실현된다. 반면 눈먼 사람의 치유에는 재료 사용(흙과 예수님의 침: 요한 9,6 참조)이 인상적이다. 이는 인간 창조의 재료인 ‘흙과 하느님의 숨’(창세 2,7 참조)을 연상케 한다. 다른 하나는 ‘치유의 절차’다. 치유 사건이 예기치 않게 한순간 벌어지지 않고, 흙으로 기존의 눈을 완벽히 차단한 후에 실로암 못의 물로 씻는 일련의 순서로 진행된다. 옛 눈에서 새로운 눈으로의 변화를 주도한 정화하는 물은 옛 인간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변모시키는 세례성사의 물을 암시한다. ‘복된 들음’(복음)으로 시작된 신앙은 맡고 맛보며 만지는 ‘복된 여정’을 거친 후에 ‘복된 봄’(지복직관)으로 완성된다. ‘멀어 있는’ 눈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있는’(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인간 실존의 한계를 표상한다.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하느님을 보는) 사람에게는 측정 가능한 시력과 다른 ‘새로운 눈’이 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 ‘하느님을 보는 때’를 고대하는 이들에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보라”(1,36; 12,15)고 조언한다. 사순 시기는 부활한 예수님을 보는 새로운 눈을 얻기 위한 재료와 절차를 고민하는 기간이다. 이 재료와 절차를 안내하는 전례 문구는 다음과 같다. “보라, 십자 나무.”(성금요일의 십자가 경배예식 중) cpbc202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