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월간 꿈CUM] 꿈CUM 환경 출처: 월간 꿈CUM 제2장 창조의 복음 : 개괄 (02) 1시간 전에 안경을 어디에 뒀는지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어제 또는 지난주에 안경을 어디에 뒀는지는 잊어버려야 합니다. 옛 기억을 잊어야 지금 필요한 기억을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같은 장소에 매번 둔 경우는 예외로 말이죠.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제2장 창조의 복음’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 이성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날 때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신앙적 차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복음’이라는 제목을 붙인 2장에 대해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유다-그리스도교 전통’(「구약과 신약의 전통」 76, 78항 참조)에서 이해하는 ‘창조’ 혹은 ‘세상’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황님이 ‘가톨릭 신앙에서 이해하는 전통’이라고 말하지 않고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이라고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교, 정교회, 개신교 등 모든 종교를 초월한 관심과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도는 뒷부분 ‘제5장 접근법과 행동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스스로 믿는 이들이라 고백합니다. 이 사실이 자연 보호, 가난한 이들의 보호, 존중과 형제애의 관계 구축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를 서로 나누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학문들 사이의 대화도 역시 시급합니다.”(201항) 이처럼 회칙 제2장은 복합적인 생태 위기가 영성과 종교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와 학문의 대화를 요구한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합니다. 더 나아가 제2장은 신앙이 ‘자연’과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할 이유와 동기를 제공한다고 강조합니다. 또 자연에 대한 책임감은 ‘신앙의 일부’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렇다면 제2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Ⅰ. 신앙이 주는 빛(63~64항) Ⅱ. 성경 이야기의 지혜(65~75항) Ⅲ. 세상의 신비(76~83항) Ⅳ. 창조의 조화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전하는 메시지(84~88항) Ⅴ. 보편적 친교(89~92항) Ⅵ. 재화의 공통적 목적(93~95항) Ⅶ. 예수님의 눈길(96~100항) 이 내용들은 단순히 환경 문제와 생태계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시각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서 좀 더 넓은 시야를 갖도록 할 것입니다. 이제 그 각 내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글 _ 이용훈 주교 (마티아, 천주교 수원교구장) 1979년 3월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1988년 로마 라테라노 대학교 성 알폰소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 주교로 서품되었다. 저서로는 「그리스도교와 자본주의」, 「삶에 대한 이야기」 등이 있다.cpbc2026.05.25

시(詩)와 예(禮)로써 도둑질한다고?! 정말?[월간 꿈 CUM] 철학의 길 _ 동양 고전의 지혜와 성경 (9)태양 볕이 내리쬐는 팔레스티나 촌구석에서 예수님은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왜 뽀얀 유럽 백인의 얼굴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 절대적 가치가 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자신들의 얼굴로 만들었습니다. 백인의 얼굴 속에 절대적 가치의 기준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월한 백인은 이제 세상을 지배할 정당한 권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얼굴을 집어넣은 예수님의 얼굴로 그들은 세상을 보편 법칙으로 지배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권력과 이익의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이런 기만적 행동은 서양 제국주의 시대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기만적 행위가 일어날 수 있음을 장자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어떻게 자리하고 있을까요? 푸르디푸른 보리가 비탈진 무덤가에 무성하구나. 살아서 남에게 베풀지 않았는데 어찌 죽어 입에 구슬을 물고 있는가. 靑靑之麥 生於陵陂 生不布施 死何含珠爲 이 구절은 유자(儒者)가 부유하게 살다 입에 구슬까지 물고 죽은 자를 보며 그의 욕심과 사치를 『시경』의 내용을 읊으며 풍자, 비판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그가 남긴 재물로 인의(仁義)를 실천코자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장자』의 「외물」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전체 내용을 보면 오히려 유자들을 비판하는 장자의 반전 드라마입니다. 유학자들이 입에 구슬을 물고 죽은 자의 무덤 앞에서 도굴을 시도합니다. 스승쯤 되는 자가 자기 권위로 제자들을 재촉합니다. 그러자 제자쯤 되는 자가 위의 구절을 읊으며 서둘러 입 안의 구슬을 도둑질합니다. 경전의 구절을 읊고 있지만. 자기들 구미에 맞는 구절들로 도둑질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을수록 정의를 구현하는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장자는 유자의 위선적 행위로 지적합니다. 세상은 지식이 많을수록 지도자의 위치가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높이 쌓은 지식이 도덕적 가치, 사랑의 가치도 높여줄까요? 장자는 말합니다. 유자들은 시와 예로써 무덤을 도굴한다. 『장자』 「외물」 儒以詩禮發冢 앎(知)이 많다고 모두가 도둑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도층이 권력이든, 명예든, 재물이든 정의보다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면 지식은 이익을 위한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높은 법률가는 법으로 도둑질하며, 높은 정치인은 정치로 도둑질하고, 높은 의사는 의술로 도둑질하며, 높은 성직자는 경전으로 도둑질하고, 높은 경찰은 국민의 안전을 이유로 도둑질합니다. 적극적 도둑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안위와 자리보전을 위해 도망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권위만 누리려는 ‘자리 도둑질’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유자들을 비판하는 장자를 유자들의 아버지 공자에게 물어보면 어떤 말을 했을까요? 공자 또한 그들을 소인이라 나무랐을 것입니다. 공자는 “군자는 정의로움(義)에서 깨우치고 소인은 이로움(利)에서 깨우친다.”(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 『논어』 「이인」)고 했으니까요. 예수님은 구원받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고 하시며,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인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며 그들을 ‘불의’한 자라고 말할 것이라 합니다.(루카 13,22-30 참조) 불의한 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 들어가려 힘쓰지 않는 자입니다. 여기서 ‘힘써라’(아고니제스데)는 운동경기장이나 투기장에서 전력투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온 마음과 몸과 정신을 다한 투쟁적 행동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탈란트를 맡기고 여행을 떠난 이야기에서 셋째 종이 쫓겨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마태 25,14-30 참조) 셋째 종은 돈을 잃는 것이 두려워 땅에 묻어두었다 쫓겨납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 사투를 벌이고 인내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정의가 아니라 이익을 생각하면 행동하는데 두려워합니다. 아마도 그런 이들은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말씀의 지식(知)으로 정당화해 높은 지위를 도둑질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 하면서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반석의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루카 6,49 참조) 세상의 강물이 곧 들이닥치면 겁먹고 무너질 사람들인 것이죠. 유자들은 시와 예로써 도둑질하는데 당신은 무엇으로 도둑질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나 자신이 스스로 그 당신이 되어 자문해봅시다. 무덤 앞에서 망자를 위해 기도하는가? 망자의 구슬이 탐나 기도하는가? 시와 예, 법, 경전, 정치, 생명, 자유, 평등, 인권의 얼굴은 망자의 옥구슬이 아닙니다. 글 _ 손은석 신부 (마르코, 대전교구 산성동본당 주임) 2006년 사제수품.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전담사제를 지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전공)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소소하게 살다 소리 없이 죽고 싶은 사람 중 하나. 그러나 소리 없는 성령은 꼭 알아주시길 바라는 욕심쟁이다. cpbc2025.01.10

회개와 절제의 40일, 죽음 너머 생명의 길사순 시기 추천 도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며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는 사순 시기다. 회개와 절제의 시간, 길잡이가 될 책들을 골라봤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 쿠르트 코흐 추기경 / 황미하 옮김 / 바오로딸 사순과 부활 시기에 관한 영적 안내서다.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 시기 전반의 의미를 다루고,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부터 주님 부활 대축일에 이르는 파스카 성삼일, 주님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동반한다. 그야말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장별로 각 전례 시기의 주제 및 의식과 관련된 교리적 내용을 전례·성경·신학·영성적 바탕 위에서 폭넓게 조명해 사순과 부활 시기의 의미에 깊이 머물도록 안내한다. “예수님은 인간이 겪는 무력함과 고통과 죽음, 그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알지 못하신다. 예수님은 이 길을 택하신다. 그 길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영원한 길이기 때문이다.”(67쪽)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부 장관인 저자는 앞서 스위스 루체른대학교에서 교의신학 및 전례학 교수로 재직했다. 사순 시기란 / 미셸 존스 슈뢰더 / 서영필 신부 옮김 / 성바오로 “재의 수요일 몇 주 전부터 우리는 보속을 정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중략) 무엇을 ‘포기할지’, 더 정확히 말해 사순 시기 보속으로 무엇을 봉헌할지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가로막는 삶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종종 사순 시기 희생을 새해 결심의 두 번째 기회처럼 취급합니다.”(42쪽) 사순 시기의 진정한 의미를 쉽고 간결하게 소개한 책이다. 책은 사순 시기가 지극한 슬픔을 느끼는 때이지만, 동시에 영적으로 더욱 깊게 성장할 수 있고 그 슬픔을 통해 영원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평신도인 저자는 기도·단식(희생)·자선의 의미와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피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도 설명한다. 이를 통해 수년 동안 무심코 한 일들이 어떻게 천국의 길로, 부활로 이끄는지 깨닫게 한다. 죽음의 신비 /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 조규홍 옮김 / 가톨릭출판사 신비가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가 ‘죽음’을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죽음을 ‘인간 실존의 가장 두려운 한계’이자 동시에 ‘하느님 섭리가 가장 깊이 드러나는 자리’로 설명한다. 신앙의 전통 안에서 죽음은 인간의 죄로 인한 처벌이지만, 하느님께서 그 처벌마저 은총으로 바꾸셨음을 성경 말씀과 그리스도론·죄론·구원론·종말론·삼위일체론의 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풀이한다. 특히 성인과 성사,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통해 부활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그들은 사랑의 하느님, 은총의 하느님은 잊고 오직 정의의 하느님만을 마주하였다. 낙원에 관한 생각은 일찌감치 사라졌고, 그들 앞에는 외면할 수 없는 죽음이 위협적으로 떡하니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곳에는 그들을 위해 마련된 하느님의 계시가 있었다.”(56쪽) 십자가의 길 / 조재형 신부 / 생활성서 사순 시기하면 ‘십자가의 길 기도’가 바로 떠오른다. 예수님의 골고타 여정을 담은 14처를 돌며 바치는 기도다. 그 십자가의 길을 기도와 함께 색을 칠하며 묵상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수원교구 조재형(궁리본당 주임) 신부가 작업한 컬러링북으로,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을 나누고 그 안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묵상 글도 수록했다. “청하오니 주님, 당신의 십자가의 걸음을 따를 용기를 주소서.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이웃의 짐도 함께 져 주며 마침내 세상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낼 용기를 허락하소서.”(14쪽)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6.02.25

“대회마다 주제 성구가 있는 것 같아요”[신부님, WYD가 뭐예요?] 교황이 직접 선택한 구절 대회 정신과 방향성 제시 서울 WYD “용기를 내어라~” 오늘날 도전 맞선 믿음 요청 일반적으로 문화·체육뿐 아니라 종교 등이 주최하는 대회는 하나의 슬로건과 공식 로고를 통해 대회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정신과 가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올림픽의 주제와 로고·마스코트 등이 좋은 예입니다.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역시 대회의 본질적 정신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대회마다 주제 성구를 정하고 이를 구현해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27 서울 WYD를 위해 선택하신 주제 성구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입니다. 이는 한국의 순교 성인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보여준 용기를 본받아 젊은이들이 온갖 형태의 불의와 싸워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갖게 되길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제 성구는 성경에서 발췌한 구절 가운데 짧고 기억하기 쉬운 것이 선택됩니다. 그런데 이 주제 성구는 교황님께서 직접 결정하신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세계적 상황과 청년들의 현실, 교회의 사목적 방향을 고려해 성경의 한 구절을 주제 성구로 정하시어 청년들이 이 말씀을 중심으로 신앙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발견하도록 촉구하십니다. 매 대회가 이뤄지는 시점에서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도전에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르침을 압축한 것이 바로 주제 성구입니다. 제1회 대회는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렸습니다. WYD를 제정하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정한 주제성구는 “너희 안에 있는 희망에 관하여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1베드 3,15)였습니다. 다음해 198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회 때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였습니다. 이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젊은이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 진리를 토대로 한 여러분 삶의 증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의 증언에 감사드리며 여러분이 언제나 하느님 사랑의 증거자,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되길 격려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주제 성구들은 기본적으로 청년들이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 안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공동체 안에서 그 사랑을 배우고 키워나가도록 이끌어줍니다.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의 붕괴가 임박한 격동의 시기에 열린 1991 폴란드 쳉스토호바 WYD때는 “여러분은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성령을 받았습니다”(로마 8,15)였습니다. 이는 혼란한 국제정세 속에서 전 세계 젊은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간직하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습니다. 2000년 대희년에 개최된 로마 WYD에서는 새천년을 시작하는 시점에 더욱 그리스도께 의탁하고 그분을 따르도록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가 선택됐습니다. 2016년 자비의 희년에는 자비의 성녀 파우스티나 코발스카의 땅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로 정해졌습니다. 아울러 2023년 포르투갈 리스본 WYD는 “마리아는 서둘러 떠났다”(루카 1,39)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모 발현지인 파티마를 중심으로 성모님의 굳건하고 실천하는 믿음을 젊은이들이 닮게 되길 바라셨습니다. 이처럼 청년들이 직면한 다양한 형태의 도전 앞에 신앙을 굳건하게 살아가도록 힘을 주는 주제로 성구가 결정됐습니다. 이준태 2026.02.25

돌로 지은 작은 교회에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이 함께 찾아온다성모님 생애 마지막 지낸 곳으로 알려진 튀르키예 셀축에 위치한 성모님의 집. 성모님께서 요한 사도와 함께 이 터에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7세기 집터에 지은 경당 1951년 복원 그리스 정교회 8월 15일마다 순례행사 성 바오로 6세 등 세 교황 사목방문 성모 관련 쿠란 전시된 무슬림 순례지 교회 안에서는 성모 승천 대축일, 교회 밖에는 광복절을 지내며 사흘간의 연휴가 시작됐다. 성모 승천 대축일은 지상에서의 생활을 마친 성모님의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로 불려 올라가심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런데 성모님은 승천하시기 전 생애 마지막을 어디에서 보내셨을까. 무더운 올여름 이렇다 할 휴가를 보내지 못한 이들을 위해 튀르키예 셀축으로 떠나본다. 튀르키예 서남쪽에 위치한 셀축 외곽. 고대 도시 에페소 유적지와 함께 성모님이 생애 마지막을 지낸 곳으로 알려진 집터와 그 위에 세워진 경당으로 연중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거대한 에페소 유적지와 달리 ‘성모 마리아의 집(House of Virgin Mary)’은 아담한 석조 건물이다. 십자형 구조에 돔 모양의 지붕을 얹었고, 현관에서 바로 경당과 제대 뒤 반 원형 공간인 앱스(apse)로 연결된다. 7세기에 지어진 교회로, 1951년 복원됐다. 튀르키예 셀축 성모님의 집 입구에 세워진 성모상. 성모 마리아의 집 입구 세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요한, 그 요한 사도가 말년을 에페소에서 보냈다는 전승에 따라 성모님도 같은 지역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폐허가 된 이 장소가 다시 주목받은 것은 1878년 독일의 안나 카타리나 에메릭(Anna Katharina Emmerick, 1774-1824) 수녀의 환시를 엮어 펴낸 「성모 마리아의 생애」가 출간되면서다. 단 한 번도 독일 밖으로 떠난 적이 없는 카타리나 수녀는 성모님이 생애 마지막을 보낸 집의 위치와 주변 풍경을 기록했고, 이후 사제와 수도자들에 의해 발견된 장소는 수녀가 기록한 모습과 일치했다고 한다. 성모님의 집 밖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제대가 마련돼 있다. 과거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이 해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 이 터에서 순례행사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고, 1967년 성 바오로 6세 교황, 1979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등이 방문하며 가톨릭 순례지로 자리 잡았다. 2006년에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튀르키예 사목방문 중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고 사실상 확인할 길이 없는 성모님의 선종 장소로 에페소와 함께 ‘마리아의 무덤 성당’이 있는 예루살렘도 언급된다. 에페소의 경우 요한 사도 대성당 유적과 무덤, 세계 최초로 성모님에게 봉헌된 교회(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열렸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유적 등을 근거로 내세운다. 수많은 순례자의 기도와 소망이 적힌 쪽지들을 확인할 수 있다. 튀르키예 셀축 성모 마리아의 집은 무슬림에게도 순례지다. 성모님을 언급하는 쿠란 구절들의 번역본이 전시되어 있다. 고즈넉한 산 속에 위치해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는 역부족이다. 내부는 매우 협소해 방문객이 많으면 기도는 차치하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세세히 살펴보기도 힘들다. 반면 외부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제대, 세례터, 성수를 받을 수 있는 공간 등이 조성되어 있다. 또 여느 성지에서나 볼 수 있는 기도와 소망을 적어 매단 수많은 종잇조각에서 민족과 종교를 뛰어넘어 하늘에 닿길 바라는 인간의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6.08.12

판테온 꽃비, 성령의 불꽃[‘성서와함께’ 가꾸는 기도의 정원] 2. 작약 작약(Peony). 성서와함께 제공 성당 회중석에 서서 ‘오소서 성령이여’를 듣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성가가 절정에 이른 순간 성령의 불꽃을 상징하는 붉은 작약 꽃잎이 공중에 흩날리고, 성령이 영혼을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에 온몸에 전율이 인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40일째 되는 날은 주님 승천 대축일(지난 주일), 그로부터 10일 뒤는 주님의 성령이 지상에 내려온 것을 기념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오늘)이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영어로 ‘펜테코스트(Pentecost)’라고 하는데, 이는 ‘50번째’라는 뜻의 그리스어 ‘πεντηκοστή(펜테코스테)’에서 유래했다.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은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기도 하다. 이 거룩하고 특별한 대축일날 로마 판테온에서는 돔 한가운데 뚫린 거대한 천창(天窓)에서 꽃비를 내리는 전통이 10세기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데, 이때 흩뿌려지던 꽃이 작약이다. 오늘날에는 주로 붉은 장미 꽃잎을(때로 흰색 꽃잎을 섞어) 뿌리는데, 이 꽃비는 사도행전 2장에서 언급되는 불꽃 모양의 혀를 형상화한 것이다. 작약이 이같이 사용된 데는 성령 강림 대축일이 있는 5월에 만개하는 개화 습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권 국가에서는 작약을 ‘성령 강림절 장미(Pentecost rose)’라고 부른다. 또 5월은 성모 성월이므로 ‘성모 마리아의 장미(Our Lady’s rose)’로도 불린다. 작약의 라틴어 속명 ‘페오니아(Paeonia)’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치유의 신 ‘페온(Paeon)’이 어원으로, 작약의 씨앗과 뿌리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약재로 널리 쓰였다. 서양의 경우 작약이 약초로서 재배된 기록은 무려 1세기부터 존재하지만, 화려한 외형의 겹꽃 품종을 앞세워 관상용으로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8~19세기의 일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작약이 약용으로 유익할 뿐만 아니라 악령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작약은 하느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을 상징하므로 흰색·붉은색·분홍색 등 색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성경 정원이나 기도 공간에 잘 어울린다. 꽃은 분홍색이 향기가 가장 진하고, 색깔이 진할수록 향기가 약해진다. 제철인 5월에는 성전 안 꽃꽂이에도 자주 활용하는데, 겹겹이 풍성하고 소담하게 피는 작약의 모습은 늘 ‘충만함’을 상기시킨다. 화려한 작약의 풍성한 모습에서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cpbc2026.05.20
![[사도직 현장에서] 내 안에 계신 아버지](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4/29/JgK1777441609546.jpg)
[사도직 현장에서] 내 안에 계신 아버지어렸을 때는 사실 아버지에 대한 정을 잘 모르고 살았다. 아버지·어머니는 부지런하셨고, 자식들 남 부럽지 않게 살게 하려고, 밤늦게까지 평생 일만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퇴직할 즈음에 나는 서울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었고, 나중에 청원자 휴가 때 가보니, 아버지께서 목포 경동성당에서 성 이레네오를 주보로 세례를 받으셨다. 엄마도 뒤따라 신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계속 성경공부 등을 하시다가 아예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에 등록해 큰오빠 집에서 늦깎이 공부를 하며 2년을 다니셨다. 그리고 2002년경 선교사가 되어 영월 상동공소에 파견되어 열악했던 공소 건물을 고치기 위해 여기저기 도움을 받으셨고, 비가 샜던 지붕과 먼지로 뒤덮인 성전을 깨끗하게 보수하셨다. 아버지는 주일이면 공소예절도 하고, 밥도 짓고, 커피도 끓여 신자들과 드시곤 하셨다. 그땐 요즘처럼 성가 반주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수원 유치원에 근무하던 시절, 수녀원에 전화해 음을 잡기 어렵다고 성가를 어떻게 부르는지 불러보라고 하셔서 불러드리면 어설픈 음을 따라 부르셨다. 그 상황에 대해 함께 살던 수녀님들이 두고두고 배꼽을 잡으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영월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휴가를 가면 버스가 어디서 정차하는지 모르셔서, 엄마는 공소 근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아버지는 밤 운전을 해가며 태백터미널까지 마중을 나갔다 돌아오신 적도 있다. 밤늦게까지 딸이 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이쪽저쪽에서 기다리는 두 분을 보고서야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깨달았다. 아버지는 이후 고향 근처 전라도 압해도 신장공소로 옮겨 1~2년 신자들과 함께하며 선교사로 지내셨다. 건강이 안 좋아져 은퇴하신 후엔 목포 옥암동에서 사셨다. 옥암동성당 성전 신축 땐 음식을 만들어 수익을 봉헌하고, 폐휴지와 빈 병을 수거해 보태셨다. 요즘 거울을 보면 이마에는 냇물처럼 잔주름이 흐르고, 얼굴에는 북두칠성처럼 큰 점들이 또렷하게 박혀있는 내 모습을 본다. 눈도 작아져 아버지 나이 드셨을 때 눈과 똑 닮았다. ‘세월은 못 막는구나’를 깨닫고 언제라도 주님이 부르실 때 “네, 여기 있습니다” 하며 하늘나라로 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천천히 행동으로 옮기며 지낸다. ‘비움의 미학’을 살기 위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 cpbc2026.05.20

필리피 (01) : 유럽 대륙의 첫 그리스도교인, 리디아[월간 꿈 CUM] 바오로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_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 순례기 (13) 그리스 필리피 순례객들이 리디아 성녀가 바오로 사도를 만난 냇가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아줌마가 좋다. ‘아줌마’라는 말에선 힘과 활력이 넘친다.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이 느껴진다. 가식이나 숨김이 없다. 삶에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소망하고, 스스로의 욕구를 땀을 통해 충족시켜 나간다. 이렇게 아줌마가 좋은 것은, 자주 만나는 신앙 아줌마들의 해맑은 ‘까르르’ 웃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교회의 각종 교육과 세미나, 연수회가 열릴 때마다 자리를 가득 메워 강사들을 뿌듯하게 하는 것은 어김없이 아줌마들이다. 본당 사목회 간부들은 대부분 아저씨지만, 정작 낮은 곳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언제나 아줌마들이다. 그러면서도 십자가 아래서 낮은 자세로 엎드려 “나는 죄인입니다” 한다. 아줌마들은 영성 생활의 달인들이다. 산전수전 겪다 보니 참고 사는 데는 이골이 났다. 그러다 보니 인내, 끈기, 절제, 겸손, 희생 등의 덕(德)에 별다른 영신 수련 없이 쉽게 다다른다. 성체조배실에서 4~5시간씩 기도하지 않아도 죄를 쉽게 성찰하고, 이웃의 죄를 쉽게 잊는다. 그리고 늘 남을 위해 산다. 섬김을 받지 않는다. 남편, 시부모, 아이들, 본당 신부님을 위해 산다. 아줌마에게선 공동체를 돌보는 땀 냄새가 난다. 성경에는 이런 아줌마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시리아의 위협 속에서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것은 유딧 아줌마였다. 부활한 예수의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도 마리아 막달레나 아줌마였다. 예수 체포 후 제자 아저씨들이 두려움에 떨며 숨었을 때, 겁 없이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간 이들은 예루살렘 아줌마들이었다. 여기 또 한 명의 위대한 아줌마, 유럽 대륙 첫 그리스도교 신자 리디아(Lydia Purpuraria, 축일 8월 3일)가 있다. 유럽 대륙에 건너간 바오로 사도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리디아 아줌마다. 성경은 이 만남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필리피에 도착해) 유다인들의 기도처가 있다고 생각되는 성문 밖 강가로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 그곳에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다.”(사도 16,13-14) 앞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소개하면서 잠깐 언급했듯이 리디아 아줌마의 고향인 티아티라는 자색 옷감 생산지로 유명했다. 당시 자색 옷감은 고가에 거래되었고, 리디아 아줌마는 고향인 티아티라에서 고급 자색 옷감을 수입해 필리피 일대에 유통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사람이 신심도 깊었다. 성경에 리디아는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라고 소개되는데, 이는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유대 신앙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리디아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리디아는 하느님 말씀에 완전히 매료된다. 그런데 여기서 리디아가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사도 16,14) 아줌마의 위대함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라는 점이다. 스스로 마음을 여는 것이 아니라 열도록 내맡기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인 마리아처럼, 그렇게 리디아는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아줌마가 고집이 아주 셌다. 자신만 세례받은 것이 아니라 온 집안사람을 세례로 이끌었다. 그리고 또 한 번 고집을 피운다.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사도 16,15) 리디아는 바오로 사도를 자신의 집으로 강제로(?) 끌고가 모셨다. 어쩔 수 없이 바오로 사도는 리디아 집으로 가서 짐을 풀었다. 유럽 대륙의 첫 선교 거점이 마련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리디아 덕분에 바오로 사도는 안정적으로 필리피에서 선교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테살로니카, 코린토, 아테네 등지로 선교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참고로, 성경에는 리디아와 같은 신앙 아줌마들의 이야기로 넘쳐난다. ‘아퀼라’와 ‘프리스카’(1코린 16,19 참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오로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로마 16,4 참조) 콜로새에서는 ‘아피아’가 그런 사람이었다.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1장 2절에서 아피아를 ‘자매’ (αδελφη)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녀가 초기 선교 활동에서 중요한 협력자였음을 의미한다. 소아시아 에페소 인근 라오디케아 교회에서는 ‘님파’가 그런 사람이었다. 님파는 리디아처럼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했다. 예루살렘에서는 베드로 선교 활동에 조력한 ‘성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다. 베드로는 감옥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직후 곧장 마리아의 집으로 향했다.(사도 12,12 참조)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믿을 수 있었던 사람은 마리아였다. 코린토 인근에 살았던 ‘포이베’(로마 16,1 참조)도 빼놓을 수 없다.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6장 1-2절에서 그녀를 ‘후원자’(프로스타티스, προστατις)라 부르면서 그녀의 공식 직함을 ‘디아코논’(διακονον), 즉 ‘일꾼’(협력자, 부제)으로 호칭한다. 바오로 사도가 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로마로 직접 배달한 사람이 포이베다. 필리피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리디아 성녀가 바오로 사도를 만났던 냇가를 찾았다.(사도 16,13-15 참조) 냇가 바로 옆에는 성녀 리디아 기념 경당이 소박하게 조성되어 있다. 2000년 넘게 흘러온 그 냇가에 발을 담갔다. 적막 속에서 한참 동안 그렇게 앉아있었다.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물소리가 다른 소리로 들렸다. 그것은 2000년 전 신앙 아줌마들의 ‘까르르’ 웃음소리였다. 2025.12.22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32주일-천주교 신자들은 십일조 내면 죽는 줄 알고...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오금동본당 주임)오늘 독서와 복음은 두 과부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에서는 '가난한 과부'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과부라고 해다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홀아비는 이가 서 말, 과부는 은이 서 말"이라는 말이 있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말하는 '과부'라는 표현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 주변에서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소외되고 힘없는 자를 뜻합니다. 제1독서의 사렙타 과부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 사랑을 음식으로 실천했고,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진 돈을 모두 봉헌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가장 구차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신자들은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고 하느님이 모든 것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행위로 교무금과 헌금을 봉헌합니다. 이는 신자들이 자신의 몸은 물론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신앙고백의 중요한 표현이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알몸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고,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 1/10을 봉헌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십일조라고 부릅니다. 레위기를 보면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다"(레위 27,30)라고 하셨고, 말라키서에서는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말라 3,1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통해 받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하느님께서 직접 보증해 주셨지요. 가난한 청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둘은 서로 성공을 다짐하면서, 성당에 가 하느님께 평생 동안 자신의 수입의 1/10을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매달 자신의 수입에서 무조건 1/10을 떼서 성당에 봉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수입이 워낙 별 볼일이 없어 수입의 1/10은 아주 적은 액수였지요. 시간이 지나 두 청년 중 한 사람이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됐습니다. 또 다른 청년 역시 그렇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둘은 자신들이 약속했던 수입의 1/10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둘 중 성공한 청년에게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 말합니다. "여보게 친구, 사실 내가 젊은 시절에 자네와 함께 맺은 약속을 이제는 취소하고 싶네. 내가 내 수입의 1/10인 10만원을 성당에 봉헌할 때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1/10이 몇 억씩 되다보니 얼마나 아까운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네.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이 행동을 그렇게 오랫동안 했으니 이제는 그만 둬도 되지 않을까?"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이 친구가 수십 억씩 버는 것이 이제 싫은가 봅니다. 도로 10만원씩 봉헌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함을 잊지 않고 겸손하게 나누며 살아야 하느님의 축복이 지속됩니다. 많은 축복을 받고도 하느님께 감사의 표현을 지속하지 못해 그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이 성경 안에 넘쳐납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돼서는 안 될 터인데 우리 현실은 어떠합니까? 천주교 신자들의 봉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에 한참 못 미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십일조를 내면 죽는 줄 알고, 개신교 신자는 십일조를 안 내면 죽는 줄 안다"는 웃지 못 할 말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난한 과부들의 정성과 축복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조은일2009.11.03
[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39(끝)-사추덕(四樞德) 4 - 절제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아야 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사추덕의 마지막 덕목인 절제는 정신의 경향인데, 이는 모든 정념과 행위에 그 한도를 정해 주어, 해야 할 바 이상을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 그래서 이 절제는 중용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덕은 과도함으로 말미암은 악덕과 부족함으로 말미암은 악덕 사이의 중용인데, 절제는 무감각과 방종 사이의 중용인 것이다. 유학에서 절제는 예(禮)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본시 "예란 인간됨의 근간이요, 예가 없으면 사람으로서 설 수 없다"(禮 人之幹也 無禮 無以立. 「春秋左氏傳」, '昭公 7년')고 해 예를 인간의 본질적 가치규범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유학에서 제시하는 많은 덕목들은 현실의 실천 과정에서 반드시 예의 조절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자는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수고롭고, 신중하되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하되 예가 없으면 어지럽고, 강직하되 예가 없으면 박절하게 된다"(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 「論語」 泰伯篇)고 말한다. 여기에서 예는 모자라거나 지나치지 않은 '중용(中庸)'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즉 예는 모든 덕목들을 현실에서 중용에 맞게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군자가 널리 글을 배우고 예로써 단속한다면, 또한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不畔矣夫. 「논어」 雍也篇)는 공자의 말도 바로 현실의 실천 과정에서 예를 통한 조절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학에서 禮는 핵심적 덕목인 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고, 현실에서 그것을 구현하고 완성하는 필수적 덕목이 된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가 거기에 미치더라도 仁으로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비록 얻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지혜가 거기에 미치고 仁으로 그것을 지킬 수 있더라도, 장엄함으로 임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지혜가 거기에 미치고 仁으로 그것을 지킬 수 있고 장엄함으로 임하더라도, 움직이기를 禮로써 하지 않으면 善하지 않다."(원문생략. 「論語」 衛靈公篇) 그래서 공자는 仁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제시하고, 그 구체적 조목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禮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論語」 顔淵篇 참조) 주자는 '극기복례'를 '자기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이겨서 禮, 즉 天理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극복하고 예를 회복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 이냐시오가 그의 '영신수련'에서 강조하고 있는 초연한 태도(indiferente)는 깊이 숙고할 만하다. 그는 먼저 인간의 창조 목적을 제시하고, 인간의 피조물 사용과 모든 행위는 이 목적에 부합되는 범위에서 선택돼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 부합되면 될수록 더(magis) 활용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치 유학에서 극기(克己)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복례(復禮) 즉 '天理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연재를 마치며 근 1년, 유학사상과 함께 신앙생활과 연관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러나 돌아보면 너무 부끄럽고 죄송하다. 늘 급박하게 글을 쓰게 되어, 깊은 묵상에서 나오는 정갈한 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분들에게서 분에 넘치는 격려와 질책 그리고 제안을 받았다.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얼마 전에는 그동안 몇 번 공동번역을 사용한 부분, 인용된 성경의 틀린 장절까지 지적해주신 분도 있었다. 감사드리고 싶다. 무엇보다도 늘 시한을 넘겨 마지막으로 오는 원고를 인내와 사랑으로 기다려주신 편집국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때, 독자들을 포함한 모든 평화가족들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기쁜 한 해 맞으시기를 기원하고 마음 모아 기도드린다. 감사합니다.조은일2008.11.18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26주일- 예수님의 충격 선언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너무나도 충격적인 예수님 말씀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자기들보다도 먼저 세리와 창녀들이 천국에 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혁명적 말씀이었지요. 왜 그렇게 된다는 말씀일까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끝내 그 답을 찾지 못해 멸망의 길을 가고 말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충격 선언을 들은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칠 줄은 모르고 남의 잘못만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외쳤고, 예수님이 가르쳤지만 정작 자기의 길을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행동으로 보인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들이었지요. 포도원을 경작하는 농부가 있었는데 그 농부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일이 아주 바빴던가 봅니다. 농부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 21,28)고 청합니다. 이 말에 첫째 아들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싫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아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아버지가 굉장히 실망을 했겠지요? 그리고 거기에 생각이 미친 맏아들은 곧 뉘우치고 일하러 갑니다. 맏아들에게 거절당한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똑같이 일을 시킵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요한 21,28). 그러자 둘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마태 21,30)하고 대답은 합니다. 하지만 대답만 하고 아버지의 일은 아랑곳없이 곧 다른 곳으로 놀러가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성경 안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선뜻 "맏아들입니다"(마태 21,31)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대답만 하고 따르지 않은 아들보다는 뉘우치고 밭에 간 아들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이라는 데에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곧 명확해집니다. 과거에 잘못된 삶을 살았더라도 반성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대답만 잘 하고 행동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부부가 차에 기름을 넣으려고 한 주유소에 들어갔습니다. 기름을 넣는 동안 주유소 직원이 다가와 차 앞 유리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기름이 거의 채워지고 유리가 거의 닦아질 무렵 남편이 주유소 직원을 불러 세웠습니다. "유리가 잘 닦이지 않았네요. 다시 한 번 잘 닦아주세요."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열심히 유리를 닦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남편은 직원을 불러 소리쳤습니다. "잘 좀 닦아보세요. 유리가 전혀 닦이지 않았잖아요." 직원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차 유리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닦이지 않는다고 화가 난 남편은 차 문을 열며 곧 뛰쳐나갈 태세였지요. 이때 옆에 있던 부인이 남편의 안경을 빼서 닦아주었습니다. 순간 남편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더러웠던 것은 차 유리가 아니라 자기 안경알이었던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며 남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사람보다는 과거에 잘못된 길을 걸었더라도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이 하느님께 더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의 탓을 하지 말고 자기를 닦아야 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내 눈에 남의 잘못들만 보인다는 것은 내 안에 나쁜 것이 있다는 증거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으로 나를 정화하고 상대방의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 어떠한 지식보다도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는 말씀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조은일2008.09.23
[생활 속의 복음]연중 제20주일- 혈통보다도 믿음을 보시는 예수님이기양 신부(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이 바로 그렇습니다. 마귀가 들어서 시도 때도 없이 거품을 문 채 여기 저기 머리를 부딪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는 백방으로 병을 고쳐보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지요. 그러던 중에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한걸음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로 가까이 갈 수가 없자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고 소리도 소용없자 예수님의 길을 막고 엎드려서 애원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 15,25).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예수님께서는 박정하게 거절하시지요. 그러나 이 어머니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며 자녀를 위해서는 개가 되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더욱 간절하게 예수님께 달려듭니다. 그때서야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받아들이시지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바로 그 순간에 여인의 딸이 나았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애절한 청에도 불구하고 큰 상처를 입을 정도로 한 이방 여인을 박정하게 대하셨던 이유는 당신의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전 세계 모든 민족에 해당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1, 2독서 역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이것이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하느님께서는 집요하게 청하는 사람을 결코 물리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처녀가 인도에 선교사로 가려다가 출발 직전에 좌절하게 됐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님이 중환으로 몸져눕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 후 어머니는 3년 동안 병고로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병간호에서 자유를 얻은 서른 살이 다 된 처녀는 다시 선교사로 떠나기 위한 수속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멀리 살고 있는 언니 집을 인사차 찾아갔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언니마저 중병으로 눕게 된 것을 알게 됐습니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언니마저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다섯 명의 어린 조카들은 울면서 그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도저히 어린 조카들을 버려둘 수가 없어서 언니 집에서 이들을 당분간 돌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형부가 몸져눕게 됐습니다. 그는 선교사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됐지요. 얼마 후 형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선교사 일보다도 어린 조카를 기르는 일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자기를 돌보지 않고 온전히 다섯 조카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초로의 할머니가 됐고 조카들은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그중 세 명은 인도의 선교사로 파견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른 지향을 가지고 정성껏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 뜻대로, 그것도 지금 당장 이뤄지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기도하기가 힘들고,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뜻대로 내 욕망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간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덧붙여 나의 소망을 청하면 주님께서는 인간이 생각할 수도 없는 넘치는 열매를 주십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민족에게로 펼쳐나감을 강조하셨고, 그 누구도 끊임없이 구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큰 은혜에 감사드리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성심 성의껏 기도한다면 축복은 자연히 덤으로 따라 올 것입니다. 조은일2008.08.12

말씀을 일상에서 사는 복음화·소공동체 의미 되새겨 주교회의 소공동체소위원회 제24차 소공동체 전국모임 제24차 전국 소공동체 모임 참가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말씀과 함께…’ 주제로 열려 소공동체 현실적 어려움 나눠 고령화·사제 무관심 등 지적 신자들이 주님 만나게 도와야 주교회의 소공동체소위원회(위원장 장신호 주교)가 전주교구 치명자산성지 평화의 전당에서 6월 29일~7월 1일까지 2박 3일간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주제로 제24차 소공동체 전국모임을 개최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평신도 봉사자와 사제·수도자들은 성령 안에서의 대화를 상호 경청하며, 일선 소공동체가 겪는 현실적 어려움을 나누고, 어려움 속에도 하느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실천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초청 강연을 맡은 수원가톨릭대학교 총장 한민택 신부는 ‘말씀을 품고 공동체로 살아가기’를 주제로 “성경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도록 하는 초대장”이라며 말씀에 대한 신앙적 관점을 강조했다. 한 신부는 온유함과 겸손함, 경청, 환대의 마음으로 예수님 모습을 닮아갈 것을 당부했다. 참가자들은 조별 논의에서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에서 소개된 성령 안에서의 대화를 체험했다. 모래시계를 놓고 발언 시간을 공평하게 배분하고 성령과 서로에게 경청하며, 침묵과 묵상을 병행했다. 이들은 소공동체가 복음 말씀을 품고 살아가며 주님 뜻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길에 관해 논의했다. 한 참가자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말 안에 머물면서 성령의 목소리를 듣게 됐다”고 전했다. 조별 나눔 시간에는 소공동체 모임 신자들의 고령화와 나눔 중 발생하는 언쟁, 사목자의 관심 부족 등 한계가 지적됐다. 한 참가자는 “본당의 고령화가 많이 진행돼 7단계 복음 나누기가 형식적으로 이뤄지곤 한다”고 했다. 다른 참가자는 “본당 신부님이 관심이 없어 아예 모임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제의 관심이 소공동체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짚었다. 제24차 전국 소공동체 모임에서 참가자들이 성령 안에서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이러한 고충 속에도 말씀을 일상 안에 잘 새기며 살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한 참가자는 “소공동체 모임 숫자에 매이지 말고 꾸준히 습관화하자”고 말했고, 다른 참가자는 “생명 말씀을 포스트잇에 적어 오고 가며 되새기자”고 제안했다. 제주교구 김기량본당 주임 황태종 신부는 ‘소공동체와 하느님 말씀’을 주제로 한 종합 강의에서 “복음 나누기, 성령 안에서의 대화, 성체성사 등 우리가 체험한 모든 과정은 결국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느님의 현존 체험’이라는 하나의 줄기로 연결돼 있다”며 “이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영원한 새 복음화를 위해 구슬을 꿰는 작업과 같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모든 방법은 결국 영원한 새 복음화를 주제로 하나로 꿰어진다”고 역설했다. 주교회의 소공동체소위원장 장신호(대구대교구) 주교는 파견미사 강론에서 “하느님 없이 대화하면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성토대회가 되고 말지만, 기도하고 준비하여 성령 안에서 대화를 나누면 내 옆 사람의 목소리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면서 “복음 나누기 7단계나 성령 안에서의 대화라는 방법론에만 머물지 말고, 신자들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촉진자가 돼달라”고 격려했다. 이준태 기자 ouioui@cpbc.co.kr이준태 2026.07.08

후기 비잔틴 미술의 정수 ‘코라 구세주 성당’ 성화레오 14세 교황 첫 해외 사목 방문지, 튀르키예에서 만나는 신앙 유산 <하> 1. 코라 구세주 성당의 돔과 벽면을 가득 채운 성화. 레오 14세 교황이 교황 즉위 이후 첫 해외 사목 방문으로 27일 튀르키예를 방문했다. 올해 니케아(현 튀르키예 이즈니크) 공의회 1700주년을 맞아 교회 일치 및 종교 간 대화를 위해 본격적인 사목 일정에 나선 곳은 수도 앙카라가 아니라 이스탄불이다. 지금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0년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옮겨온 곳이다. 5세기 중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기 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중세 그리스도교와 동방 교회의 중심이었고, 건축과 성화로 대표되는 비잔틴 예술의 보고였다. 지난호에 살펴본 성 소피아 성당이 비잔틴 건축의 걸작이라면 후기 비잔틴 미술의 정수는 코라 구세주 성당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사진1)돔 중앙에 성모자상이 자리하고, 그 주변을 천사들이 둘러싸고 있다. 3. (사진1) 돔 아래로 최후의 심판을 표현한 그림에 이어 지옥의 문을 부수고 중앙에 선 그리스도의 모습이 펼쳐진다. 아담과 하와를 무덤에서 끌어내고 있고, 그들 뒤로 요한 세례자, 다윗 왕 등 구약의 의인들이 서 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성경 속 180여 장면 관광 명소가 몰려 있는 술탄 아흐메트 지역에서 다소 떨어진 코라(Chora)구세주 성당은 현지에서는 카리예 자미(Kariye Camii)로 불린다. 수도원의 부속 성당으로 4세기에 지어졌고,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성곽 밖에 위치해 ‘시골의 성스러운 구세주 교회’라 칭했다. ‘코라’는 ‘도시 밖’ ‘지방’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다. 11세기에 재건된 성당은 13세기 십자군 전쟁으로 파괴된 이후 14세기 초반 지금의 돔 형태로 증·개축됐다. 규모면에서는 성 소피아 성당은 물론이고 여느 비잔틴 성당에 비해 상당히 소박한 편이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 마지막 시기에 제작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다. 이들 성화는 안드로니코스 2세 황제의 명에 따라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에 의해 장식됐다. 메토키테스는 정치가이자 성미술 후원가로, 말년을 이곳 수도원에서 보내기도 했다. 성당 벽면에서 그가 예수님께 성당을 봉헌하는 모습을 담은 모자이크를 확인할 수 있다. 코라 구세주 성당에는 전체적으로 주님의 탄생과 공생활, 부활과 승천, 최후의 심판, 성모 마리아의 모습 등 성경 속 180여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돔 중앙에 판토크라토르 초기 교회에서는 성당 안에 어떤 성화나 성상도 두지 않았지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이후 전례나 교리 전달을 목적으로 널리 사용됐다. 그러나 성화상 논쟁으로 대다수가 파괴됐다. 8세기부터 한 세기에 걸친 성상 논쟁이 종식되자 교회 내 이에 대한 방침이 강화됐다. 우선 돔의 중앙에 ‘전능하신 그리스도’라는 뜻의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 예수의 상반신을 그린 성화를 두게 했다. 6세기부터 제작된 판토크라토르는 주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배치했다. 대다수 동방 교회의 돔이나 앱스(반원형 공간) 뒷면에서 판토크라토르를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림 속 예수님은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대체로 왼손에는 성경을 들고 오른손으로 축복을 전한다.(사진4 참조) 십자가 모양의 후광이 감싸고 있는 예수님 모습은 신성과 인성과 삼위일체 하느님을 강조하며,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전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한다. 세속적 권력을 가진 황제들은 국가와 교회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성당의 돔에 판토크라토르를 배치하게 했다. 돔 바로 아래 벽에는 보통 성모 마리아, 열두 사도와 성인의 모습을 그렸는데, 코라 구세주 성당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당의 내부에는 두 개의 큰 돔이 있는데, 그 돔의 중앙에는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과 그리스도가 만물의 통치자임을 표현한 그림이 각각 자리한다.(사진25 참조) 그 아래로 천사들의 모습, 최후의 심판과 부활, 예수님이 행한 기적의 순간들이 펼쳐진다. 다른 한편에는 성모님의 생애도 전개된다. 비잔티움 제국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당 건축 곳곳에 이렇듯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광범위하게 사용됐지만,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수차례 이어진 전쟁과 십자군의 약탈 등으로 대부분 없어지거나 훼손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성 소피아 성당과 코라 구세주 성당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코라 구세주 성당. 4. 왼손에 성경을 들고 오른손으로 축복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은 전형적인 판토크라토르. 그 위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의 기적(왼쪽)과 오병이어의 기적(오른쪽)을 표현한 모자이크가 펼쳐진다. 메토키테스가 코라 성당을 예수님께 봉헌하는 모습. 5. 또 다른 돔의 중앙에는 판토크라토르, 전능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그 아래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왼쪽)과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오른쪽)이 그려져 있고, 성모님과 예수님의 모습이 그 아래 벽면을 채운다. 코라 구세주 성당, 모스크로 사용 코라 구세주 성당의 성화들 역시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며 회칠로 덮이고 성당은 이슬람 사원(모스크)이 됐으나, 1945년 박물관으로 전환되며 복원작업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되찾게 됐다. 성당은 2020년 다시 모스크로 바뀌었고 유료 입장을 통해 성화를 공개하고 있다.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를 바라볼 때처럼 고개를 한껏 꺾어 올려다 봐야 하지만, 신비롭고 성스러운 모습에 넋을 놓고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 또 별다른 해설 없이도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성경 내용을 그림에서 바로 유추할 수 있어 결국은 ‘하나인 그리스도교’를 생각하게 한다. 2025년 현재 성 소피아 성당과 코라 구세주 성당은 모스크로 이용돼 이슬람 교리에 따라 남녀 모두 어깨나 다리가 드러나는 옷은 입장이 제한되고, 특히 여성은 스카프 등으로 머리카락을 가려야 한다. 신발도 벗어야 하지만, 두 성당의 경우 무슬림이 기도하는 곳이 아니면 신발을 벗지 않고 입장할 수 있다. 하루 몇 차례 정해진 무슬림 기도 시간에는 들어갈 수 없는데, 대부분 1시간 이상 소요되므로 방문 전에 확인할 필요가 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윤하정2025.11.26

‘교의’와 ‘삶’의 일치가 역사를 바꿨다세 공의회 통해 본 그리스도교 신학 그리스도인이 되다 / 미켈리나 테나체 / 전인걸 신부 옮김 / 가톨릭대학교출판부 “이 책의 저술 의도는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도록 돕는 데 있다. 즉, 신앙의 내용인 ‘교의’와 특정 시대 속에서 믿고 살아가는 행위를 이어 주는 연결 고리를 탐구함으로써, 그 안에서 교의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맺는 살아 있는 관계를 드러내는 데 있다.”(17쪽) 교의(dogma)는 성경과 성전에 기초를 둔 믿을 교리를 의미하는 용어로, 교회가 그리스도께 받은 권한으로 신자들에게 믿으라고 가르치는 진리를 뜻한다. 즉 교의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진리를 담고 있는 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여정처럼 보인다. 둘 사이에서 어떤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이 되다」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본질을 상기하는 책이다. ‘초세기 세 공의회 안에서 교의와 삶’이라는 부제처럼 교의와 삶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신학을 통해 오늘날 교의신학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제시한다. 저자는 니케아 공의회(325),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 에페소 공의회(431)를 거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론·삼위일체 교의·신학적 인간학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말한다. 이들 가르침은 3세기에 걸친 순교자들의 피 위에서 성숙했고, 공의회에서 교의 정립에 기여한 교부들은 그에 상응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매우 구체적인 언어로 제시했다. ‘언어(교의)’와 ‘체험(삶)’의 일치는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새로움의 씨앗을 뿌렸다. 동일한 교의를 ‘살아 내고 공식화’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비로소 참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세상은 변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복음이 시대 안에서 육화되고, 현재화되는 방식은 변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매 시대 안에서 그리스도의 새로움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히브 13,8 참조)” 저자는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교수로 신학적 인간학, 영성 신학, 동방 그리스도교 관련 과목을 강의했고, 현재 교황청 신앙교리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윤하정 기자윤하정2026.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