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생명이야기] 23. 생명의 어머니- 마리아 Ⅲ](//cpbc.co.kr/CMS/newspaper/2014/07/rc/521816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생명이야기] 23. 생명의 어머니- 마리아 Ⅲ지영현 신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사무국장)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묵시 12,4): 악의 세력들이 위협하는 생명요한 묵시록에서 ‘여인’의 ‘큰 표징’에는 ‘또 다른 표징’ 즉 “크고 붉은 용”(묵시 12,3)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 용은 사탄, 개인적인 악의 힘과 아울러 역사 안에서 활동하며, 교회의 사명을 공격하는 모든 세력을 표현합니다.이 점에서도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빛을 비추어줍니다. 악의 세력이 지닌 적대감은 교활한 저항으로서, 예수님 제자들 곧 교회를 직접 공격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향합니다. 당신 아드님을 위협으로 여겨 두려워하는 사람들로부터 아드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마리아는 요셉과 아기와 함께 이집트로 피난을 가셔야만 했습니다(마태 2,13-15 참조). 그러므로 마리아는 교회로 하여금, 생명은 언제나 선과 악 사이의, 빛과 어둠 사이의 엄청난 투쟁의 핵심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용은 “해산하기만 하면”(묵시 12,4 참조) 삼켜 버리려고 합니다. 그 아기는 “때가 차자”(갈라 4,4) 마리아께서 낳아주신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모든 시대에 더욱더 많은 백성을 그분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그 아기는 모든 사람들, 특히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모든 힘없는 아기들의 형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자께서는 사실 당신의 강생으로 어떤 의미에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 안에서 당신을 계속 계시하시며, 우리들과의 형제애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러므로 인간 생명에 대한 거부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간에, 실제로는 그리스도께 대한 거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시는 진리이며, 그분의 교회가 꾸준히 선포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천사는 다음과 같이 안심시키는 말로써 마리아에게 잉태를 예고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0.37). 실로 동정 성모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께서 당신 가까이에 계시며, 그분께서 섭리로 보살펴 주신다는 확신으로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해 두신 처소”(묵시 12,6)를 발견합니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이면서 또한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합니다(호세 2,16 참조). 마리아는 죽음과 싸우는 교회에 위안을 주는 살아 있는 말씀이십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성자를 보여줌으로써, 그분 안에서 이미 죽음의 세력들은 패배하고 말았다는 것을 보장해 줍니다. 생명과 죽음의 싸움에서 돌아가신 생명의 주님께서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부활의 광채 속에 당신 수난의 표시를 간직하신 채 살아계십니다. 그분 홀로 역사의 모든 사건의 주인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역사의 ‘봉인’(묵시 5,1-10 참조)을 떼시며, 시간 안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생명의 힘이 죽음보다 강함을 선포하십니다. 인간의 역사가 나아가는 목적지인 새 세상, “새 예루살렘”에는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4).그리고 순례하는 백성, 생명의 백성이며 생명을 위한 백성인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에 대한 확신 속에서,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시’이신 마리아를 바라보며 나아갑니다(생명의 복음 104-105항). cpbc2014.07.30

감사한 일, 선행한 일 적다 보니 하루가 은총이네~ 광주대교구 북동주교좌본당, 자비의 특별 희년 맞아 「하루·하나 하기」 책자 보급 광주대교구 북동주교좌본당 「하루·하나 하기」 책자에 이처럼 신자들은 ‘감사 찾기’와 ‘선행하기’ 란에 기록한다. 광주대교구 북동주교좌본당(주임 오요안 신부) 신자들은 요즘 매일같이 ‘감사한 일’, ‘선행한 일’을 적는다. 그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개별적으로 돌아가며 매일 기도를 하고, 매주 두 차례 성당에 함께 모여 성체조배도 한다. 이 모든 일은 북동본당이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맞아 제작한 「하루ㆍ하나 하기」 책자로 이뤄지고 있다.북동주교좌본당 「하루ㆍ하나 하기」 책은 매일 ‘감사 찾기’, ‘선행하기’, ‘매일 3시ㆍ9시 기도하기’를 적는 꼭지로 구성돼 있다. 또 본당 복음화를 위한 기도, 자비의 희년에 바치는 기도는 ‘고리기도’ 형식으로 매일 정해진 사람이 돌아가며 바치고 있다. 고리기도가 끊기지 않기 위해 기도 순서 명단이 게재돼 있다. 매일 읽어야 할 말씀 구절도 적혀 있다. 90쪽 분량의 「하루ㆍ하나 하기」가 1년 치 신앙생활의 기록지 역할을 하는 셈이다.이 책자는 주임 오요안 신부가 ‘어떻게 하면 본당 공동체가 자비의 희년을 정말 자비롭게 보낼 수 있을까’하는 고민에서 비롯됐다. 2014~2015년 두 해 동안 각각 ‘선교’와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한 공동체’를 위해 고리기도, 성체조배, 성경 읽기 내용이 담긴 본당 복음 안내서를 제작해 호응을 얻은 것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오 신부는 “하루하루 사소할 수 있지만, 일부러 감사와 선행을 기록하다 보니 신자들 표정도 점점 달라졌다”고 했다. “아내 설거지를 도왔습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성당에 다닐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입니다.”지난해 12월 배포된 신자들 노트는 감사와 기도로 채워지고 있다. 책자 효과가 알려지면서 타 본당 요청에 따라 본당은 책자 200부를 더 찍어 각 본당에 전달했다. 본당은 예수 성탄 대축일 미사 때 신자 각자가 완성한 책을 봉헌할 계획이다.오 신부는 “책자는 본당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올바로 이끄는 작은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며 “매일 시간 맞춰놓고 기도하고, 사제 수녀도 함께 성체조배하며 더욱 하나 된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다”고 말했다.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평화신문2016.01.27
![[최기산 주교 선종] 갑작스러운 비보에 안타까움과 슬픔의 눈물만…](//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8040_1.0_titleImage_1.jpg)
[최기산 주교 선종] 갑작스러운 비보에 안타까움과 슬픔의 눈물만…빈소 답동주교좌성당 현장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과 주교들이 5월 30일 답동주교좌성당을 찾아 최기산 주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비보였다. 최기산 주교는 선종 전날(5월 29일)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경기 부천 심곡부활성당을 사목 방문하고 견진성사까지 주례했다. 최 주교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빈소가 차려진 답동주교좌성당을 찾은 신자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 거짓말 같다”고 말하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신자들은 최 주교를 ‘웃음이 넘치고, 사랑이 가득했던 주교님’으로 기억했다.○…30일 정오께 최 주교의 선종 소식이 전해졌다. 선종 시각은 11시 40분. 총대리 정신철 주교, 60년 지기 이찬우(인천교구 상동본당 주임) 신부, 이학노(인천성모병원장) 몬시뇰, 서품 동기 박복남(교구 원로사목자) 신부가 국제성모병원에서 임종을 지켰다.황급하게 장례위원회를 꾸리고, 답동주교좌성당과 인천교구청 강당에 빈소가 차려졌다. 정신철 주교가 장례위원장을 맡고, 교구청 사제들이 장례위원이 됐다. 오후 2시께 최 주교의 시신이 답동성당으로 이송됐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신자들은 갑작스레 하느님 곁으로 간 교구장을 눈물로 맞았다.○…오후 3시 정신철 주교 주례로 고인을 위한 첫 미사가 봉헌됐다. 정 주교는 강론에서 “최 주교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성경 말씀을 무척 좋아하셨다”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시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고 말했다. 이어 “주교님은 늘 신앙 안에서 굳건히 살아가라고 당부하셨다”면서 “가슴이 미어지지만,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는 주교님을 위해 기도하자”고 당부했다.이후 매시간 최 주교를 위한 미사가 봉헌됐고, 교구청 강당에서는 연도가 이어졌다. 밤 11시부터 이튿날 오전 7시까지는 답동성당에서 한 시간은 미사를 봉헌하고 한 시간은 연도를 바쳤다.○… 조문 행렬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자 답동성당엔 추모객이 줄을 이었고, 교구청 빈소도 발디딜 틈이 없었다. 30일 오후 주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가 조문했고, 저녁에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과 유경촌ㆍ정순택ㆍ손희송 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 주교가 함께 빈소를 찾았다. 염 추기경은 한참 동안 최 주교가 안치된 유리관 앞에 머물며 기도하고, 함께 연도를 바쳤다.소신학교 시절부터 5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이찬우 신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함께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오늘날까지 동료 사제로 함께했고 또 교구장 주교로서 보필해 왔다”면서 “항상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고 도와주는 ‘참 목자’이셨다”고 회고했다. 이어 “마지막 순간에 ‘보니파시오 잘 가시게’ 하고 인사드렸다”고 말했다.12년 간 비서로서 곁을 지킨 김 마리 페르페투아 수녀는 “주교님은 ‘자비’ 그 자체이셨다”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내색하시지 않고, 주변 사람의 어려움을 먼저 살피고 도와주신 분”이라고 기억했다.정기회(요셉) 전 인천평협 회장은 “손을 흔들며 저를 반겨주시던 주교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면서 “주교님 환갑을 기념해 중국 양쯔강 일대로 여행을 갔었는데, 좋으셨는지 ‘한 번 더 가자’고 말씀하셨다. 결국 그 바람을 들어드리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오빠 이렇게 떠나면 어떻게 해요.” 최 주교 유족들은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떠난 고인 영정 앞에서 오열했다. 막냇동생 최기종(안토니오씨)씨는 “최근 주교님 생일을 맞아 어머님을 모시고 가족끼리 모임을 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실 줄은 생각도 못 했다”면서 “남은 형제들의 상심이 너무 크다. 주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이루시길 기도드린다”고 말했다.○…교회 안팎 인사들 조문도 잇따랐다. 선종 이튿날인 5월 31일 박근혜 대통령은 빈소가 마련된 답동주교좌성당에 조화를 보내왔고, 오전에는 박강섭 청와대 관광진흥비서관과 원용기 문화체육관광부 종무실장이 조문했다.○… SNS에서도 추모가 이어졌다. 선종 직후 인천교구와 평화신문ㆍ평화방송을 비롯한 교회 기관들은 페이스북에 최 주교의 선종 소식을 알리는 게시물을 올렸고, 수백 명의 신자가 댓글로 최 주교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평화신문2016.05.31

갑작스럽게 목자 잃은 양 떼 찾아나선 추기경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난곡동본당 위로 방문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11일 선종한 강대호 신부가 사목했던 난곡동본당을 찾아 강 신부를 추모하고, 신자들을 위로하며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이정훈 기자 “강대호 신부님은 평생 믿고 따르던 하느님 곁에서 안식을 누리실 것입니다.”21일 서울 난곡동성당 교중 미사.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의 위로에 신자들은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본당 주임 강대호 신부를 지난 11일 갑작스럽게 주님 곁으로 보낸 신자들의 표정은 여전히 슬픔과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본지 제1352호 2월 21일 자 보도>염 추기경은 이날 난곡동성당을 찾아 미사를 주례하고,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선종한 강대호 신부를 추모하며 함께 신앙생활을 해오던 본당 신자들을 위로했다. 교구장의 선종 사제 본당 추모 방문은 이례적인 일로, 슬픔에 빠진 공동체에 목자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염 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강 신부님께서는 2015년 본당 설정 40주년을 맞아 성전을 이처럼 밝게 단장하고, 전 신자가 참여하는 묵주기도, 성경 필사 등으로 내적 영성 성장에도 크게 이바지하셨다”며 “강 신부님의 이같은 사목적 노력으로 2011년부터 3년간 매년 감소하던 본당 복음화율이 2015년부터 증가세로 돌아섰다”고 회고했다.염 추기경은 이어 “사순 시기 사제의 선종을 아픔으로 여기지 말고 우리 삶에서 주님 부활의 은총을 더욱 깨닫는 시간으로 삼자”며 “신부님께서도 하늘에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미사 내내 슬픔을 삼킨 신자들은 “여전히 신부님 빈자리가 느껴진다”, “예수님 곁에서 행복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했다.2012년부터 난곡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해온 강 신부는 지난해 성전 리모델링을 마친 후 줄곧 “성전 건축 잘 마쳤으니 이제 신자들과 더 즐겁게 지내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평소 운동을 좋아했던 강 신부는 최근 감기몸살을 앓았지만, 큰 지병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신자들은 “강 신부님께서 ‘맨날 남의 자식 키워주다 처음 아들(신학생)이 생겼다’며 본당 출신 신학생 탄생을 무척 기뻐했는데 입학도 못 보고 갑작스레 돌아가신 것이 눈에 밟힌다”고 안타까워했다.신자들은 또 “신부님께서 편찮으실 때마다 병원에 가보시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괜찮다’ ‘예약한 날 가면 된다’고 하셨다”면서 “늘 신자들을 먼저 살피시던 모습이 벌써 그립다”고 말했다.한편, 서울대교구는 이날 난곡동본당 새 주임에 오기오(교구 사목국 상설고해사목부 담당) 신부를 임명, 3월 2일 자로 부임한다고 밝혔다.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평화신문2016.02.24
![[자비의 특별 희년] (1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중부직업청소년학교 전 교장 송용순 클로틸다](//cpbc.co.kr/CMS/newspaper/2016/08/rc/649033_1.0_titleImage_1.jpg)
[자비의 특별 희년] (1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중부직업청소년학교 전 교장 송용순 클로틸다33년간 직업 청소년들을 배움의 길로 이끌어 송용순 할머니는 전신 화상과 남편, 큰딸을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평생 봉사의 삶을 살아왔다. “아이고, 이 하찮은 할머니를 왜 만나려고요?”96세 송용순(클로틸다) 할머니는 바빴다.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2~3개 일정이 있었고, 통화하려면 아침 일찍 해야 했다. 처음 전화를 건 지 2주 후에나 인터뷰 시간을 잡았다. 송 할머니는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며, 33년 동안 구두닦이와 신문배달원을 하며 배움의 시기를 놓친 학생들의 스승으로 살았다.“내가 시간은 없어도 늘 웃으며 살았어요. 즐거움을 갖고 살았지요. 지금도 하느님의 사랑을 강렬하게 느껴요.”백수에 가까운 나이지만 허리도 꼿꼿하고 생기가 넘쳤다.송 할머니는 1947년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넘어왔다.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 덕에 황해도 해주여고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 기예전문학교에서 의류디자인을 전공한 그 시절의 신여성이었다. 월남 후 셋방살이를 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고, 부산 피난길에 올랐다. 1951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충무로에 양장점을 열었다.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손재주가 있었던 만큼 그의 양장점은 단골로 북적였다. 견습생들도 그의 솜씨를 배우려 몰려들었다. 견습생 중에는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고 김봉남)도 있었다. 그는 1년 동안 양장점에서 일을 배웠다.송 할머니는 앙드레 김을 비롯한 견습생들에게 “늘 즐겁게 웃으면서 일하자. 옷을 백번을 빨아도 원형이 망가지지 않는 가치 있는 옷을 만들자”고 강조했다. 양장점을 운영하다가 1970년 그는 전신 3도 화상을 입는다. 한겨울, 양장점에서 난로에 물을 끓이다가 난로가 폭발했고 끓고 있던 주전자의 물이 그의 몸을 덮친 것이다. 그는 치료를 위해 잠시 양장점 문을 닫는다. 갑자기 닥친 사고에도 그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부산 피난 시절, 부산 국립사범학교 교무과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1980년부터 야간학교인 중부직업청소년학교 교장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낮에는 양장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당시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은 그의 품으로 몰려들어 새로운 꿈을 키웠다.성당에 다녔던 큰딸은 그에게 가톨릭 세례를 권했다. 마흔이 넘은 딸은 “엄마,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계시지만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고, 그는 “그래, 맞는 말이다!”며 1982년 하느님의 자녀가 됐다.1984년 그는 잿빛 하늘을 마주하게 된다. 공직의 길을 걷고 퇴직한 남편이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 그런데 심장병이 있던 큰딸이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딸이 떠난 지 두 달 후 남편도 눈을 감았다. 생기와 미소가 넘쳤던 할머니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할머니는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어떻게 그런 일이 내게…. 나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그는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에 매달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원망이 북받쳐 올랐지만 큰딸이 준 선물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었다. 선물은 신앙이었다. 딸 덕에 남편은 대세도 받았다. 송 할머니는 두 아들과 며느리의 보살핌으로 간신히 몸을 추슬렀다.“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위로가 느껴졌어요. 딸이 나를 하느님께 인도해 주지 않았더라면 점 보러 다니느라 재산을 탕진했을 겁니다.”그리고 송 할머니는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유산으로 남긴 ‘봉사의 삶, 베푸는 삶’을 이어갔다. 그의 어머니는 온 동네 일을 자기 일처럼 여겼다. 젊은 친구들이 싸우면 말리러 갔고, 배고프고 아픈 이들을 돌봤다. 그는 33년 동안 중부직업청소년학교에서 20여 명의 교사와 함께 800여 명의 학생을 졸업시켰다. 중학교 과정을 밟은 아이들은 대부분 검정고시를 쳤다. 당시 서울중부경찰서의 어머니 선도회장이었던 그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의 친부모도 찾아줬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학생들에게 진심 어린 사랑의 손길을 건넸다. 학생들은 그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제자들이 찾아온다. 그는 제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하다.“이렇게 각박한 세상에 이 늙은 할머니가 뭐가 대수롭다고 정을 안 떼고 찾아오겠어요? 거기서 난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요.”봉사의 삶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의 수첩에는 한 달 계획이 한자로 빼곡하다. 할머니의 명함에는 ‘고려대 여자교우회 자문위원’ ‘중구 여성단체연합회 고문’ ‘황해도 중앙부녀회 고문’ 등이 적혀 있다. 송 할머니는 한국부인회 총본부 부회장, 서울시 여성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종로본당 성소후원회장도 지냈다. 여성의 사회 참여를 위해 힘쓰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말벗 동무도 되어 줬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201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봉사는 하느님이 주신 숙제였어요. 하느님은 숙제를 못 할 사람에게 숙제 안 내 줘요. 이 하찮은 할머니를 보고서라도 많은 젊은이가 봉사하며 기쁘게 살면 좋겠어요.”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취재 후기 아흔 여섯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송용순 할머니는 활력이 넘쳤다. 2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 동안 할머니는 깔깔 웃다가도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다시 깔깔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손녀뻘 되는 기자에게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물었다.“내가 이렇게 나이 들었는데, 이런 생활을 유지하는 거면 괜찮은 거지? 이게 다 하느님 작품이야.” 운동할 시간이 없어 운동하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체력은 놀라웠다. “봉사에 대한 보상을 건강으로 주셨어. 하느님 덕이 아니고선 내가 이렇게 살 수 없지!”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세지고, 자기 주장만 강해진다는 말이 있는데 할머니는 달랐다. 그의 청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지혜 기자 평화신문2016.08.16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4)노르베르트 로핑크 (상)](//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5388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4)노르베르트 로핑크 (상)성경 말씀과의 직접적 만남 강조한 ‘구약학의 거목’ 노르베르트 로핑크(Norbert Lohfink, 86)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밝혀 놓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 국내에 알려져 있는 ‘로핑크’는 대개 구약학자 노르베르트 로핑크의 동생인 신약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라는 점이다.이들 형제 중 더 많은 저서를 쓴 것은 형인 노르베르트 로핑크이다. 로마 성서대학 도서관에서 검색해 보면 형 노르베르트 로핑크의 저서가 151건, 동생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저서가 25건 정도 검색된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1954년부터 2008년까지 노르베르트 로핑크의 저서 목록만 80쪽에 이르고 그 분야도 지극히 다양하다. 하지만 국내엔 동생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저서가 더 많이 소개됐다.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는 성서학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노르베르트 로핑크의 책은 단행본으로는 E. 쳉어와 공저인 작은 책 하나만 번역돼 있고 그 밖에 짧은 글들 두어 편이 소개된 것이 전부다. 그만큼 노르베르트 로핑크는 국내엔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50년간 끊임없이 왕성한 활동을 해 온 구약학의 거목이다.신명기 연구에 바친 생노르베르트 로핑크는 192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1947년 예수회원이 됐고, 1956년 사제품을 받았다. 뮌헨에서 철학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신학을 공부한 다음 1962년 로마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박사 논문을 발표한 시기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던 때랑 맞물려서, 그의 논문 발표에 저명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후 그는 1962년부터 1996년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장크트 게오르겐(Sankt Gerogen) 신학교 교수로 있었고, 로마 성서대학에서 한 학기씩 강의하기도 했다. 일찍 은퇴한 그는 지금까지 게오르크 브라울리크(Georg Braulik)와 함께 방대한 신명기 주석서를 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해 7월 85세 생일을 맞은 로핑크 자신도, 생전에 이 일을 끝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작한 지 10년도 넘었는데 이제 2장까지 쓴 모양이다. 어깨도 아프고 귀도 어두워졌을 텐데 당연하다.지난해, 그가 만일 살아서 4장 끝 부분까지 쓸 수 있다면 이러저러한 내용을 다루겠다고 말한 것을 전해 들었다. 그동안 쓴 원고 분량도 엄청나 출판사들이 받아주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그의 박사 논문은 신명기 5-11장에 대한 것이다. 그가 평생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 역시 신명기였고, 이제 얼마 남았는지 모를 삶도 신명기 주석에 바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그의 글을 중심으로 로핑크의 성경 해석 방법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가 현대의 성경 해석 방법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첫 회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헌장에 대한 그의 이해를 돌아볼 것이고, 이어서 공의회 직후에 그가 역사비평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는가를 되짚어볼 것이다. 마지막에는 구약학의 신학적, 학문적 성격에 관한 그의 견해를 요약, 제시할 것이다.균형잡힌 성경 이해 도모“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은 혁명이 아니라 전통으로의 회귀이다.” 로핑크가 「계시헌장」이 완성된 지 1년 만인 1966년에 한 말이다. 「계시헌장」은 19세기 말 이래로 근대적인 성경 연구가 발전하면서 교도권에서 성경 해석법의 변화를 수용해 온 과정을 한 단계 끝맺는 역할을 했다. 20세기 초반까지도 일각에서는 자연과학과 역사학의 연구 결과를 존중하고 성경 본문을 비판적으로 읽는 시도에 대한 경계가 남아 있었으나, 교회는 점차 학문적 성경 연구를 수용하면서 특히 역사비평의 가치를 인정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 이는 이미 완결됐다고 할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측면만을 강조한다면 「계시헌장」은 과거 전통을 떠나 새로운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공의회 이후 실제로 많은 이들은 「계시헌장」의 의미가 무엇보다도 역사비평을 수용했다는 데 있는 것으로 이해했고, 성경 연구도 역사비평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은 오래전 「계시헌장」의 일면적인 이해가 공의회 이후 성경 연구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지적한 바 있다. 역사비평의 가치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우는 것은 균형 잡힌 성경 이해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래서 교황청 성서위원회의 「교회 안의 성서 해석」(1993년)이나 베네딕토 16세의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2010년)에서는 역사비평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하고 성경 연구에서 고려해야 할 ‘다른’ 측면들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상 그 측면들은 「계시헌장」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고 바로 그 때문에 로핑크는 「계시헌장」이 “혁명이 아니라 전통으로의 회귀”라고 처음부터 지적했다. 그의 지적은 옳았다. 신앙 생활에서 성경 역할 강조로핑크는 무엇보다 「계시헌장」이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서 성경의 역할을 강조했다는 데서 출발한다. 당시 이러한 움직임은 새로운 것이었다. 로핑크는 먼저 가까이서 그 기원을 찾고, 전망을 역사적으로 확장시켜 교회의 시초까지 되돌아간다.가까이는 20세기 초에 유럽 곳곳에서 시작됐던 성경 운동을 지적하는데, 그 시작을 정확히 찾아낼 수는 없으나 전례 운동과 함께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같은 영성 전통의 영향도 인정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성령께서 시작하신 일로 본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한동안 교회에서 소홀히 여겨져 왔던 성경 말씀과의 직접적 만남을 강조한다.2000년 교회의 삶 안에서 성경이 핵심적 역할을 해온 것은 최근만의 일이 아니다. 고대 교회에서부터 형성돼 온 전례 본문들은 온전히 성경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초기 교부들이나 사막의 은수자들, 초기의 수도승들과 특히 베네딕토회 수도 전통은 모두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중시했다. 특별히 로핑크는 ‘성경의 네 가지 의미’에 관한 오랜 전통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성경의 개별 본문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이 언급은 로핑크를 이해하고 「계시헌장」과 이후의 성경 해석의 흐름, 그리고 근래의 교도권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개별 본문을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해석하는 것, 이것은 교회 전통 안에서 특히 교부들의 성경 주해에서 이뤄져 온 것이고, 「계시헌장」이 역사비평을 보완하기 위해 권고하는 것 가운데 하나며, 그 이후로 역사비평이 발전하면서 최근에 다시 강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점은 성경 주석과 신학이 분리되지 않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는 이러한 해석이 현대 학자들의 발명품이 아니라 고대 교회의 전통임을 늘 역설한다. 안소근 수녀▲2001년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종신서원 ▲2008년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 성서학 박사▲대전가톨릭대 교수, 한국 가톨릭교리신학원 가톨릭신학 연구실장 평화신문2014.10.21
![[생활 속의 복음] 나는 끝없는 욕심쟁이입니다](//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7022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나는 끝없는 욕심쟁이입니다성체성혈 대축일(루카 9,11ㄴ-17) 주수욱 신부(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주임) 신부가 되고 나서 처음 선물을 받았을 때에는 낯설어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익숙해졌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서 카드와 꽃을 받고, 음악이 담긴 테이프도 받았습니다. 선물은 점점 커졌습니다. 받을 때 거부감이 들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좋아하며 감사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점점 금액이 커지는 선물에 대해 제가 만족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항상 더 큰 선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저 말고도 사람들은 선물을 많이 주고받습니다. 부부 사이나 처음 연애할 때, 결혼 초기에 그렇겠지요. 부모는 자녀들에게 오랫동안 거저 베풀어줍니다. 그것 또한 선물입니다. 이 밖에도 우리는 많은 이들에게 감사하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지금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유공자들 덕입니다. 또 한국이 경제 강국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산재로 죽어간 많은 노동자 덕분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이처럼 세계에서 놀라울 정도로 활발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도 많은 순교자 덕분입니다. 그러나 부부도, 자녀도, 국민들도, 신자들도 사실 감사할 줄 모릅니다.왜 그럴까요? 이유는 항상 더 큰 선물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편으로 보면 매우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한한 갈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무한한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자신입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많은 구원 업적을 일으키시고 수많은 선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것을 찾았습니다.이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하느님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남겨놓은 선물입니다.“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다.”세상에 이런 위대한 선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목숨을 바쳐 인간에게 하느님 자신을 선물로 주시다니요!결혼 기념일은 왜 지낼까요? 그날을 기억하면서 오늘 새롭게 부부의 사랑을 지속하고 더 깊게 발전시키자는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감사의 미사성제에서 생생하게 그 최후 만찬을 기념합니다.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우리는 이제 영성체로써 하느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니 우리도 그분처럼 완성된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완성된 인간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초대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내어놓습니다. 먼저 가족들에게, 이웃에게, 그리고 멀리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같은 연대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시작된 삶은 죽음을 맞이하고 하늘나라에 가서도 계속될 것이고 완성될 것입니다.이제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사람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선물, 영원한 선물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하느님을 선물로 받아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 완전한 사랑은 항상 새롭게 다가옵니다. 영원토록 변함없이! 이렇게 완전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으니 나도 그 완전한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나도 성체성사를 닮은 사랑을 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이것은 나의 생명입니다. 이것을 선물로 받으십시오. 이는 당신을 위하여 바치는 나의 삶입니다.” “이제 저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을 위하여 수고하는 피땀을 기꺼이 내어주겠습니다.” 주님, 이 말씀은 제가 도저히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성령을 끊임없이 저에게 보내주시어 제가 예수님을 닮아 이 선언을 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저도 사람들에게 먹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cpbc2016.05.25
![[평화칼럼]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cpbc.co.kr/CMS/newspaper/2016/04/rc/628785_1.1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이창훈 알폰소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다.” 이제는 성인 반열에 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8년 12월 30일 자로 서명하고 발표한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첫 문장이다.여기서 ‘하느님 백성’은 누구인가. 세례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이들이 바로 하느님 백성이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거룩한 백성, 선택된 백성 또는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라고 부른다. 따라서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표현은 평신도들이 거룩한 백성, 성도, 거룩한 무리라는 것이다.또 ‘평신도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세례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성직자와 수도자를 제외한 신분을 가리킨다. 이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성직자나 수도자와 달리 세속을 고유한 삶의 자리로 삼고 세속 일에 종사하면서 현세 질서의 개선을 통해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다. 이것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 아니다. 반세기 전에 끝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식 가르침이다. 그러면서 공의회는 평신도의 이런 고유한 특성을 ‘세속성’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세속성과 ‘거룩함’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던가! 정말로 반대되는 개념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성과 속’을 대비시켜 사용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역사를 보면 성(聖)은 추구해야 할 것, 속(俗)은 피하고 멀리해야 할 것으로 성과 속을 구분하고 대비시키는 경향이 엄존해 왔다. 그래서 세속에 몸담고 있는 평신도는 성직자, 수도자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를 바로잡은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다. 공의회는 평신도도 성직자, 수도자와 똑같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해했다. 또 세속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개선해야 할 대상이며, 평신도들은 세속에서 누룩처럼 세속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20년을 지낸 교회와 세계에 있어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주제로 1987년에 열린 세계 주교 시노드의 후속 문헌이다. 문헌은 첫머리에서 평신도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짧은 표현으로 압축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성을 특징으로 하는 평신도들이 정말로 힘들여 개선해야 하는 현세 질서 가운데 하나가 정치 분야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적시한다. “…의회…정당의 인사들에게 가해지는 출세 제일주의, 권력에 대한 우상 숭배, 이기주의, 부패 등에 관한 비난이 있다고 하여, …정치 참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도덕적으로 위험하다는 일반적인 견해가 있다고 하여, 정치 생활에 있어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대한 회의주의나 포기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42항). 이 대목은 일차적으로 신자 정치인들, 정치에 뜻을 둔 신자들, 그리고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신자 정치인들에게 해당한다. 정치가 지저분하고 더럽다고 해 피할 것이 아니라 뛰어들어 바로잡고 개선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하지만 이게 어디 신자 정치인들에게만 해당할까. 정치 참여의 길이 투표로 보장돼 있는 신자 유권자들에게도 똑같이 해당한다. 13일, 총선이 치러진다. cpbc2016.04.06
![[세계청년대회] 전 세계 300만 청년들, 하느님 사랑과 자비에 ‘심쿵’](//cpbc.co.kr/CMS/newspaper/2016/08/rc/648248_1.0_titleImage_1.jpg)
[세계청년대회] 전 세계 300만 청년들, 하느님 사랑과 자비에 ‘심쿵’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를 주제로 열린 제31차 크라쿠프 세계청년대회는 전 세계에서 모인 300만 청년이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폴란드 교회에서 자비를 생각하고 배우는 시간이 됐다.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한국 청년들은 특히 7월 20일부터 닷새간 진행된 교구대회 기간 배려심 깊은 폴란드 신자들 가정에서 숙식하며 보낸 것에 대해 ‘폴란드 교회의 자비를 체험한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폴란드 신자들은 청년들을 손님이 아닌 한 가족으로 여겼다. 한국 청년들에게 자신들의 방을 기꺼이 내주고 거실과 다용도실에서 지낸 가족이 있는가 하면, 어떤 가족은 폴란드 곳곳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자 따로 시간을 내 시내 관광을 해줬다. 서울대교구 사제와 청년 여럿을 집에 따로 초대한 젊은 부부는 마지막 날 모두에게 일일이 성물을 선물하며 온정을 전했다. ○…주교회의 청소년사목위원회 위원장 정순택(서울대교구 보좌) 주교는 대회 모든 일정을 서울대교구 청년들과 함께했다. 교구대회 기간 조별 순례에 빠짐없이 동참했고, 본 대회 기간에도 청년들과 폴란드 교회 곳곳을 다니는 ‘청년들의 주교’가 됐다. 정 주교는 주교복 대신 일반 사제 복장으로 내내 ‘순례자’를 자처해 폴란드 신자들에게도 울림을 안겼다. 청년들과 격의 없이 사진 찍고, 꾸준히 대화를 나눈 것은 물론, 본 대회 폐막 미사 전 침낭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하는 비박 일정까지 소화했다. 주교가 비박까지 모든 일정에 참여한 것은 처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도 화제가 됐다. 교황은 유대인 학살의 참상이 빚어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철저한 침묵과 기도로 고통을 기억했다. 유대인 생존자들을 만날 때, 어린이 병원의 소아 환자들을 만날 때에도 말없이 그들의 아픔과 함께했다. 그러나 청년들 앞에만 서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큰 목소리로 연설했다. 장애인과 트램을 탈 때, 거리의 청년들을 마주할 때는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교황은 “안락한 소파에서만 행복을 찾지 말고 열정을 가지고 이웃과 함께 예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에 앞장서자”, “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기가 더 쉽다”는 연설로 청년들의 신앙 열정을 불태웠다. ○…불안한 치안과 엄격한 통제 속에 치러졌던 3년 전 브라질 리우 세계청년대회 때와는 달리, 이번 대회는 질서 정연한 분위기와 친절한 폴란드 사람들의 배려로 더욱 빛났다. 교구대회 때부터 각국 청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트램을 가득 메워도 시민들은 불평 없이 오히려 청년들을 반겼다. 대회 안전을 위해 투입된 군인과 경찰도 수많은 청년을 무조건 통제하려 하기보다 친절히 길을 안내하고 불필요한 제재를 삼가는 등 차분하고 성숙한 모습이었다. 대회 기간 내내 타국 청년들은 한국인을 만날 때마다 “다음 대회는 한국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한국 교회에 대한 관심이 컸다. 실제로 한국 교회는 차기 개최지로 파나마가 최종 선정되기 전까지 대회 유치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세계청년대회가 열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교회 안팎의 공감대 형성이 우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순택 주교는 “사제단을 비롯해 정부와 타 종교 등 국민적 공감대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며 “추진한다면 우리 교회가 지닌 역사성을 부각하고, 타 종교와 하나 되는 ‘한국적인 세계청년대회’를 구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대회 참가기 김주예(포르투나타, 21, 서울 고덕동본당) 나는 껍데기 신자다. 사람들은 성당 좀 그만 다니라고 할 정도로 내가 신앙에 열심 하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누구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현존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래서 세계청년대회 여정은 하느님을 믿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특히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주님, 당신은 어디 계신가요. 왜 어떤 이들의 기도는 들어주시고, 어떤 이들은 고통 속에 버려두시나요. 왜 다른 평범한 사람들만큼만 살게 해달라고 빌었던 제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셨나요.” 대회 기간 매일 미사를 드리며 간절히 기도했지만, 실은 이런 오만한 생각 속에 ‘답을 주시지 않으면 어떡하나’하는 조마조마함이 컸다. 그런 가운데 주님 숨결을 가장 크게 느낀 순간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서울대교구 청년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을 때였다. 신부님께서 강론 중 불러주신 ‘너는 내 것이다’라는 성가가 꼭 내게 해주시는 말씀 같았다. 불안해하던 모든 일에 대해 괜찮다며 따뜻하게 안아 주시는 것 같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주님, 당신 뜻을 제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제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부디 부족한 저를 도구로 써주시어 이웃을 위해 살게 해주세요. 교황님 말씀처럼 제가 당신께 받은 사랑으로 소파 위의 편안함이 아닌 삶을 추구하게 해 주세요. 아멘. 김재훈(비오, 27, 가톨릭대) 이번 청년대회를 위한 나의 지향은 다른 참가자들 위해 좋은 사람으로 함께하자는 것이었다. 3년 전 브라질 세계청년대회를 다녀온 경험자로서 다른 청년들을 위해 역할을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세계청년대회는 내게 큰 메시지를 줬다. 수백만 명의 인파 속에서 우리가 주님 안에 한 자녀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하나하나의 생명 가운데 나를 주님께서 사랑하고 계심을 느끼는 것은 놀라웠다. 그 메시지는 단순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서야 더욱 굳게 믿게 됐다. 늘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타인의 시선을 걱정했던 내가 주님을 향해 다시 단순해진 기분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라는 뜻은 무엇일지, 어렵게 다가오던 성경 구절이 비로소 쉽게 느껴진다. 걱정하지 않고 주님을 보고, 마음을 비우고 자비로 채우는 것. 그것이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는 길이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 보여주신 모든 순간에 감사드린다. 아멘. cpbc2016.08.10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6) 아버지 최경환의 순교와 수리산](//cpbc.co.kr/CMS/newspaper/2016/08/rc/648232_1.0_titleImage_1.jpg)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6) 아버지 최경환의 순교와 수리산믿음의 ‘바윗덩어리’ 최경환, 두 달간 고문받다 옥사 수리산 성지 최경환 성인 묘소. 최양업 신부는 수리산을 들를 때마다 아버지 묘소를 찾아 정성껏 기도하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최양업은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1836년 12월 3일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동행했다. 일행은 1836년 12월 28일 중국 변문에서 샤스탕 신부를 만났다. 이후 샤스탕 신부는 12월 31일 4명의 조선 신자와 함께 국경을 넘어 1837년 1월 15일 서울에 당도했다. 세 신학생은 샤스탕 신부의 길 안내자인 중국 서만자(西灣子) 출신 투안(Touan) 마리아노, 첸(Tchen) 요셉과 함께 6개월간 중국 땅을 걸어 종단한 후 1837년 6월 7일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했다. 최양업은 1837년 6월 7일부터 1842년 2월 15일까지 약 4년 8개월간 마카오 유학 시절을 보냈다. 최양업은 이 시기 “작은 방에 외톨이로 남아 있다”(1842년 4월 26일자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고 표현할 만큼 큰 상심을 겪었다. 바로 동료 최방제의 죽음이다. 최방제는 마카오에 도착한 그해 11월 27일 위열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더 큰 인간적 상심이 그에게 닥쳤다. 바로 부모의 순교다.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은 양업이 마카오 민란을 피해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고 있을 때 (1839년 4월 6일~11월 말)에 서울 포도청에서 옥사했다.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도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됐다. 최양업은 부모의 순교 사실을 1843년 3월 중국 만주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김대건에게 들었다. 김대건은 1842년 12월 27일 중국 변문 인근에서 조선 교회 밀사 김프란치스코를 만나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동료 양업의 부모가 순교한 것을 알았다.최양업은 이때 심정을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고백했다. “저의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면 탄식과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의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했으니 제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1844년 5월 19일자 편지에서). 사제가 돼 조선에 입국한 최양업은 수리산 뒤뜸이 담배촌(현 경기 안양 만인구 병목안로 408)에 들를 때마다 집안 식구들을 모두 불러 아버지 최경환 묘소 앞에서 정성을 다해 기도하며 슬픔을 달래곤 했다.부평에서 수리산 뒤뜸이로 이주학자들은 최경환 성인 가족이 부평에서 수리산 뒤뜸이로 이주한 때를 1838년 10월 이후로 보고 있다(수리산성지 안내서에는 1837년 7월께 이주했다고 적혀 있음). 1838년 10월 부평에 사는 정 바오로가 조상 위패를 부수는 바람에 12명의 신자가 체포되고, 50여 명의 신자가 피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최경환 가족도 수리산으로 들어갔으리라 추정한다. 이 같은 학자들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자료도 있다. 최양업의 첫째 동생 최의정이 증언한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이다. 그는 “자신이 12살 되던 해에 수리산으로 들어갔다”고 밝혔다. 그가 1827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12살 되던 해는 1838년이다. 수리산 뒤뜸이는 1820~1830년대에 충청도 신자들이 도망와 자리한 교우촌이다. 많은 이들이 최경환 일가처럼 1830년대 중반 이후 이곳에 피신했다. 1839년에는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살았다. 최경환의 신앙심과 인물됨을 익히 알고 있던 모방 신부는 그를 이곳 회장으로 임명했다. 최경환은 1839년 기해박해가 터지자 서울로 올라가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둬 매장한 후 순교를 각오한다. 그해 7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을 덮쳤다. 회장인 최경환은 당황하지 않고 그들에게 “어찌 이리 늦게 오셨소. 우리는 오래전부터 초조하게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소.…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잠시 쉬었다가 아침을 먹고 기운을 돋운 다음 질서 정연하게 떠납시다”라며 반갑게 맞았다. 의연하고 담대한 최경환의 모습을 본 포졸들은 “이 사람과 이 가족들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라고 감탄했다.이날 어린아이를 포함한 40여 명의 신자가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다음날 최경환은 맨 먼저 끌러나가 심문을 받았다. 배교를 거부하자 형리는 주리를 틀어 그의 팔다리를 으스러뜨렸다. 또 곤장을 110대나 때렸다. 맏아들 최양업이 사제가 되기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더욱 혹독한 형을 받았다. 그래도 배교하지 않고 소리 내 기도하고 포졸이 준 성경을 읽으며 신자들에게 순교를 권면했다. 형리들은 최경환을 ‘바윗덩어리’라 불렀다. 두 달여 동안 하루씩 걸러 고문을 받은 최경환은 1839년 9월 12일 옥사한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함께 옥에 갇혔던 둘째 아들 최의정은 아버지 최경환의 유언을 기해ㆍ병오박해 시복재판에서 하느님 앞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가 예수님의 표양을 따라 사형장으로 나가 칼 아래 죽자 하였더니 옥에서 죽게 되니 막비주명(莫非主命, 주님의 명령이 아님이 없음)이라”(101회차 재판에서).양업, 아버지 묘소에서 한 서린 슬픔을 최경환의 시신은 양업의 어린 형제들과 교우 두세 명에 의해 애오개(현재 서울 아현)에 임시 매장됐다가 그해 가을에 수리산으로 이장됐다. 최양업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애틋했다. 귀국 후 그는 광주 소리울(현 경기 용인 수지 손골)에 살던 넷째 동생 신정(델레신포로) 부부를 수리산으로 이주시켜 아버지 묘소를 지키게 했다.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 최경환의 묘소를 찾을 때마다 왜 한 서린 슬픔을 토해냈을까. 아버지를 쏙 빼닮은 자상한 최양업 신부의 심성으로 보아 아마도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함께 순교하지 못했다는 자책일 것이다. 글·사진=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6.08.10

「생명의 복음」은 가톨릭 생명윤리 교과서[성경 속 생명이야기] 〈25·끝〉 연재를 마치며 지영현 신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사무국장) 6개월간 ‘성경 속 생명 이야기’를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연재를 통해서 풀어 설명하고자 한 회칙 「생명의 복음」은 우리 시대 모든 이들에게 참된 사랑, 평화 그리고 희망을 안겨주는 살아있는 메시지입니다. 이 희망의 메시지를 정리하며 연재를 마칩니다. 「생명의 복음」은 ‘주교들에게, 사제들과 부제들에게, 남녀 수도자들과 신자들에게, 선의의 모든 이에게’ 보내는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으로 ‘인간 생명의 가치와 불가침성에 관하여’라는 부제로 1995년 발표됐습니다. 회칙의 목적은 “인간 생명에 대한 전례없는 다양하고 새로운 위협들과 죽음의 문화가 확산되는 현실에 직면하여 모든 인간의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복음, 유한한 시간 속에서 그 생명이 갖는 위대함과 고귀함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은 강력한 교도권으로 제시되는 일종의 가톨릭교회 생명윤리 교과서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생명윤리를 체계적이고 함축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현대사회를 향한 교회의 긴박한 호소를 담고 있습니다. 「생명의 복음」은 서론과 본론의 4개의 장 그리고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1장은 현대 사회에 전례 없이 자행되고 있는 생명에 대한 위협을 죽음의 문화로 규정지으며 그 원인과 죄의 뿌리를 알아봅니다. 죽음의 문화는 현대사회에 실재하는 구조적 죄의 문화로서 진리나 객관적인 선과는 거리가 먼, 개인주의적 권리만을 주장하는 왜곡된 자유 개념에 그 원인이 있다고 밝힙니다. 또한 현대 사회 안에서 죽음의 문화가 얼마나 뿌리 깊게 퍼져있는지, 또 우리 스스로가 부지불식간에 얼마나 죽음의 문화에 가담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합니다. 그럼에도 회칙은 이 죽음의 문화를 넘어서는 생명의 문화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생명의 문화를 만들고 「생명의 복음」을 선포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역할과 사명을 강조합니다. 제2장은 선물로 주어진 생명을 주제로 하는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교 메시지입니다. 「생명의 복음」이 이야기하는 핵심은 ‘위대한 인간 생명의 참된 가치’입니다. 인간 생명은 그 자체 안에 창조주께서 심어 주신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애정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 생명의 위대한 가치를 이렇게 함축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 생명을 취하시고 그것을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삼으셨으니 그 인간 생명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인간은 비록 흙으로 빚어졌지만 이 세상에 하느님을 증언하는 존재이고 그분께서 존재하신다는 표징이며 그분 영광의 흔적입니다”(「생명의 복음」 34~38항 참조).제3장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하느님의 신성한 법에 관해서 말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계약의 핵심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절대적이고 항구한 가치를 재천명합니다. 이 계명이 제재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존중과 봉사, 사랑의 길을 따르도록 초대하는 선물임을 제시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은 함축적으로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태도, 곧 인간을 위한 투신을 권고합니다.마지막 4장은 인간 생명의 새로운 문화 건설을 위한 전망을 매우 긍정적이고도 건설적인 관점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백성들이 기도와 전례 그리고 각기 다른 문화 속에서 생명을 경축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생명을 경축하는 방법으로 사랑에 찬 생명을 위한 봉사와 생명 운동, 예를 들어 호스피스 돌봄이라든가 낙태 후 치유사목, 태어나는 모든 인간생명을 위한 새 생명프로그램과 생명기념주간 설립 등과 같은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회칙은 새로운 생명의 문화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함께 하셔야만 한다는 점과 자발적 활동과 매일의 기도를 통해서 창조주이시며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탁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 위대한 과업에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정화해줄 위대한 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생명의 복음」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확신의 표지이신 성모님께 봉헌하는 기도로 마칩니다. 평화신문2014.08.13

장애인 사도직 투신 10년… “편견 사라졌다”서울 등촌1동본당, 해오름 주일학교 설립 10주년 기념 미사 10일 서울 등촌1동본당 해오름주일학교 장애우들이 설립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짧은 핸드벨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오세택 기자 지적 장애인 시설 명휘원 고등부 3년인 양현경(레지나, 19)양. 주말이면, 그는 멀리 경기 안산에서 집이 있는 서울 등촌동으로 와서 등촌1동본당 해오름주일학교(이하 해오름)를 찾는다. 이사온 지 1년밖에 안 됐지만, 친구들과도 낯이 익었다. 하늘 반과 바다 반으로 나눠 자신들 눈높이에 맞춰 전례 시기에 따른 성경 말씀을 쉽게 가르쳐주는 교사들에게 배우다 보니 흥미진진해 한다. “전에는 어른들과 미사를 같이 봉헌하다 보니 미사에 집중하지 못하고 많이 졸렸는데, 여기 와선 그런 게 싹 없어졌어요. 등촌1동성당에 해오름이 있어서 이사를 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뇌병변 1급에 하반신 마비 장애를 안고 있는 그를 해오름에 보낸 뒤에야 마음을 놓게 된 어머니 장원희(율리안나)씨는 “전에 다닌 성당에는 장애인 주일학교가 없어 인근 개신교회에 좀 다녔는데 마음이 무척 무거웠었다”며 “등촌1동성당에 오니 장애인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가 커서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해오름은 10일 본당 주임 김효성 신부 주례로 설립 10주년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직후 해오름 학생 17명은 교사 8명의 손짓에 맞춰 양희은 곡 ‘아름다운 것들’을 핸드벨로 연주했고<사진>, 교사들도 박영숙(마리아, 34)씨와 전종윤(마르코, 12)군의 바이올린,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율동을 선보이며 서로를 축하했다. 자모회장 한승우(크리스티나)씨는 “오늘 미사에서 우리 친구들이 실수도 했지만, 얼마나 기쁘고 가슴 벅찬 미사였는지 모른다”며 “장애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모습으로 인정하고 바라봐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담당 김도연 신부는 “교사들이 봉사하면서 순수한 장애우들로부터 오히려 배우는 게 더 많고 신앙도 키웠다는 고백을 듣곤 한다”며 “편견이나 두려움 없이 본당마다 장애인 사도직에 투신함으로써 장애인 주일학교를 활성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cpbc2016.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