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35) “주님께 소리 질러라, 딸 시온의 성벽아”(애가 2,18)](//cpbc.co.kr/CMS/newspaper/2015/08/rc/586786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35) “주님께 소리 질러라, 딸 시온의 성벽아”(애가 2,18)아~, 예루살렘도 성전도 무너졌구나! “아.”애가 1장, 2장, 4장이 “아”라는 탄식으로 시작됩니다. 이 한 단어로 이 책의 내용이 요약됩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특히 성전 파괴의 애통함을 표현하는 책이 애가입니다.애가에는 저자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전승에서는 예레미야가 애가를 썼다고 여겼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런 언급이 없지만,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는 이미 애가의 저자가 예레미야로 되어 있습니다. 타르굼과 대중 라틴말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주제 때문에 그렇게 여겼을 것입니다. 애가에서는 임금이 유배가 있는 상황을 언급하고 있고(4,20), 당시의 상황과 거기에서 느끼는 고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는 점 때문에 예루살렘 함락 직후에 작성된 책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그러나 실제 작성 연대는 더 늦은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임금과 예언자에 대한 태도 등 내용상 몇 가지 점들이 예레미야에게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애가가 히브리 성경에서 예언서에 속하지 않고 성문서에 속한다는 사실도 이 책의 작성 연대를 늦추어 잡게 합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다섯 편의 애가가 한 사람에 의해서, 또는 같은 시대에 작성되었는지도 분명히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노래는 예루살렘 함락에서 즉각적으로 느끼는 슬픔만을 표현하고 있고, 또 어떤 노래는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이루어졌을 신학적 성찰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각각 서로 다른 시대에 생겨났을 수도 있습니다.하느님께서 “원수처럼 되시어” 히브리 성경에서 이 책의 제목은 “아.”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에카’입니다. 우리말 ‘애가’와 발음이 비슷하지만, 히브리어로는 탄식을 나타내는 감탄사입니다. 탈무드에서는 이 책을 ‘키나’의 복수형인 ‘키노트’라고 지칭하기도 했다고 전하는데, ‘키나’는 본래 죽은 이를 애도하는 조가를 나타냅니다. 말하자면 시온을 한 사람처럼 의인화하면서 그 시온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애가에는 시온에 대한 애도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탄원도 있고 때로는 시온이 스스로 말을 하기도 하지만, 사용된 운율이나 전체적인 내용을 보아서는 시온에 대한 조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도시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는 구약 성경의 애가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원전 2000~1700년대 수메르와 고대 바빌론에는 멸망한 도시에 대한 조가들이 있었습니다. 이 노래들은 도시를 의인화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신의 분노로 멸망하게 된 도시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었는데, 애가는 이러한 문학 유형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생각됩니다.애가에는 바빌론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바빌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벽을 뚫고 성전을 불살랐어도, 애가는 예루살렘과 하느님에 대해 말할 뿐 바빌론을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예루살렘은 황폐하게 되어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과거에 벗이었던 이들도 모두 떠나갔습니다. 아무도 예루살렘을 위로해 주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된 것은 “그의 많은 죄악 때문에 주님께서 그에게 고통을 내리신 것”(1,5)으로 이해됩니다. 예루살렘을 멸망하게 하신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예루살렘을 선택하셨던 그 하느님께서 “원수처럼 되시어”(2,5) 예루살렘을 쳐부수셨기에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2장 18-19절에서는 딸 시온의 성벽에게 주님 앞에서 통곡하라고, 낮에도 밤에도 눈물을 시내처럼 흘리라고 말합니다. “보소서, 주님, 살펴보소서, 당신께서 누구에게 이런 일을 하셨는지”(2,20).3장은 애가 중에서도 가장 길고 문학적으로도 최고도의 기법을 보이며 책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마치 욥과도 비슷한 인물이 “나는 그분 격노의 막대로 고통을 겪은 사나이”(3,1)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앞에서와같이 자신의 고통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는 고통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둡니다. “젊은 시절에 멍에를 매는 것이 사나이에게는 좋다네”(3,27).여기서 말하고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유배를 겪었던 한 개인일 수도 있고, 특별히 예레미야와 연결시키기도 하며, 예루살렘 또는 유다 백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애가 전체의 맥락 안에서 본다면, 집단적 차원은 분명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시온을 치셨어도 돌아갈 곳은 하느님뿐특별한 점은, 이렇게 3장에서는 고통을 받아들이지만 5장은 다시 대답 없는 탄원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탄원에서,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애가의 마지막 말은 “정녕 저희를 물리쳐 버리셨습니까? 저희 때문에 너무도 화가 나셨습니까?”(5,22)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느님의 진노 속에서도 애가는 “주님께서는 영원히 좌정하여 계시고 당신의 어좌는 세세 대대로 이어집니다”(5,19)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께 달려 있다고 믿기에, 멸망도 그분께서 하신 일이고 회개도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일이라고 믿기에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5,21)라고 기도합니다.하느님께서 딸 시온을 치셨어도, 원수같이 무서운 분이 되셨어도 시온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갈 곳은 하느님뿐이십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5.08.11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 (41) 평화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평화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 진정한 화해와 용서로만 얻을 수 있어1996년 부제 시절 난생처음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비행기를 처음으로 타는 것도 설레었지만 첫 해외여행을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활동하신 이스라엘로 간다는 기쁨에 나나 동료 부제들은 많은 기대를 했다. 동료 부제들과 9일기도도 바치고, 성지에 대해 미리 공부하며 순례를 준비했었는데 막상 도착한 성지에서의 여정은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빡빡한 일정 탓에 한곳에 머물러 오래 기도도 못 하고 관광객처럼 기념 사진을 찍고 이동하기 바빴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갈 때는 보안 검색과 여권 심사가 엄격했다. 여행 가방을 일일이 열어 검색할 때에는 성지 순례객이 아닌 짜증 난 관광객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완전히 무장한 이스라엘 국경수비대의 모습에 약간은 주눅이 들어 꼭 이래야만 하는지 애꿎은 가이드에게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들어선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그러나 그곳 역시 이스라엘 군인들이 관광객들과 일반 주민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 “지금은 이스라엘 군인이지만 그 이전 시대에는 아랍 병사였을 것이고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 병사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이들이 거룩한 도성으로 신성하게 생각하는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으로 기도하는 장소가 되어야 했지만 아직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한 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했다. 진정한 평화의 의미 평화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하루라도 멈춘 적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현실은 평화와 요원해 보인다. 인류는 참혹한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경험했고 수 없는 국지전을 통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경험을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시리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 여러 나라의 내전은 인류의 삶에서 평화 정착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인류의 공통 관심사 중의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세상의 참된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볼 때, 평화는 평온하고 화목한 상태를 의미하거나 전쟁이나 분쟁 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사전적 해석은 평화가 내포하는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한 것 같다. 국가 간의 전쟁이나 개인 간의 분쟁이 해소됐다고 완전히 평화스러운 상태가 됐다고 말할 수 없기에 평화가 내포하는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전쟁이 멈춘 상태만을 평화로 볼 것이 아니라 이러한 평화가 지니고 있는 생명력과 충만함을 드러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용서와 화해로 평화를 이뤄야 성경에서는 평화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성경의 계시에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훨씬 넘어서서, 생명의 충만함을 나타낸다(말라 2,5 참조). 평화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의 하나이며,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순종을 내포한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는 축복의 결과이다”(「간추린 사회교리」 489항). 구약 성경을 보면 역사서 안에서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 간에 일어난 여러 전쟁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경험된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이웃 민족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경험했고 그 안에서 평화로운 세상을 꿈꿨다. 그들은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과 탈출, 그리고 새롭게 정착한 가나안 땅에 그들만의 국가를 건설했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외세의 침입과 지배 아래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민족이 전쟁과 고통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희망했다. 그리고 그들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의 중심에는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새로운 메시아가 있었다(이사 9,5 참조). 구약 성경의 평화에 대한 갈망과 약속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됐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평화를 선물하시는 분이시며, 평화 그 자체이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증오의 벽을 허무셨고, 그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에페 2,14-16 참조). 예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는 평화는 그 전제 조건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 아버지와의 화해는 곧 자기 형제자매들과 화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간추린 사회교리」 492항 참조). 예수께서는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계신 것이다.백영민2014.12.10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11> 489번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 하](//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7336_1.0_titleImage_1.jpg)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489번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 하노예들의 신앙과 한을 담은 미국판 아리랑 1871년 흑인 영가를 부른 최초의 흑인그룹 주빌리 싱어즈 단원들. 흑인들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고통이 담긴 흑인 영가를 널리 보급하는 계기를 마련한 첫 그룹이다. 미국 흑인 노예들은 백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강요당하다시피 했다. 흑인들은 백인들에게서 전해 들은 성경의 여러 인물 속에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했다. 이들은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의 씨앗을 싹 틔우고자 했는데, 이런 가운데 흑인 영가가 탄생한다. 가장 유명한 영가 중 하나인 ‘딥 리버’(Deep River)에서 이들은 이렇게 희망을 노래한다.“깊은 강, 나의 집은 요르단 강 건너에 있네. 주님 깊은 강이 있습니다. 강을 건너 야영지(사실 해방된 장소를 상징)로 가기 원합니다. 오, 당신은 원치 않으십니까? 약속된 땅, 잔치가 열려 있고, 모든 것이 평화스러운 곳, 오, 주님 깊은 강을 건너 그곳에 가기 원합니다.”1867년 최초 흑인 영가집 「미국 노예들의 노래집」이 출판됐고, 이어서 1871년에는 레이드(A. Reid) 목사가 조직한 최초의 흑인 그룹인 ‘주빌리 싱어즈’(The Jubilee Singers)가 피스크대학의 신앙집회에서 첫 연주를 하면서 흑인 영가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사실 앞서 언급했던 모세보다도 이들의 마음속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던 인물은 바로 ‘예수’였다. 매질과 가시관의 고통과 모욕,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두셨던 그 모습 속에서 이들은 탈출을 감행했다가 붙잡혀 매질을 당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어간 가족이나 동료의 모습을 보았다. 예수님이 겪으셨던 고통은 이들이 실제로 현재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고통이 절절하게 표현된 노래가 바로 489번 성가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이다.이 노래는 노동요와 같은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우리나라의 ‘쾌지나칭칭나네’처럼 개인의 선창과 집단의 후렴이 돌아가며 부르는 구조를 띠고 있다. 재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즉흥 연주의 기원도 이 개인의 선창 부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489번 성가의 가사는 이런 식이다.개인의 선창: ‘당신은 거기 있었나요? 그들이 내 주님, 십자가에 매달을 때?’선창자의 삽입구: ‘때로는 이 때문에 전율하고 몸서리치며 떨게 된다네.’함께: ‘그대 거기 있었나요? 그들이 내 주님, 십자가에 매달을 때?’이 영가는 ‘내 주님을 못 박을 때’를 ‘그분을 나무에 못 박을 때’나 ‘무덤에 누일 때’ 등으로 변화시키며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우리 「가톨릭 성가」 책에 수록된 가사처럼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이라고 노래할 때 사실 그들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 모습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나 형제가 똑같이 고통받고 죽어가는 모습을 투영시켜 같은 고통 속에 잠겼다. 우리의 ‘아리랑’이 그러한 것처럼 노래들은 때때로 그 노래를 처음 불렀던 이들의 고통이나 환희의 체험에 동참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489번 성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뿐 아니라 흑인 노예들이 겪었던 비참함과 더불어 여전히 오늘날 고통 속에 잠겨 있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노래의 힘이다.<가톨릭대 교회음악대학원 교수>* 가톨릭 성가곡들은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www.catholic.or.kr)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백영민2016.03.30
![[안소근 수녀와 함께 떠나는 구약 여행] (56) “내 아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들어라”(잠언 1,8)](//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6267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함께 떠나는 구약 여행] (56) “내 아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들어라”(잠언 1,8)하느님 지혜로 이끄는 성공 비결서, 잠언 루카 조르다노 작, ‘솔로몬의 꿈’, 1693년, 스페인 마드리드미술관 소장. 고전적 지혜. 구약 성경의 지혜 문학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인 「잠언」은 대대로 전해진 오랜 가르침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의 잠언집을 한 사람이 수집한 것도 아니지만, 한 사람이 모았다 해도 잠언들은 어느 한순간에 쓴 글들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가르침들입니다. 속담이나 격언들에 대해서 처음 그 말을 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잠언도 마찬가지입니다.잠언 1장 1절에서는 “이스라엘 임금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막상 뒷부분으로 가면 “현인들의 말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부분도 있고(22,17; 24,23), “유다 임금 히즈키야의 신하들이 수집한 것”(25,1)으로 되어 있는 부분도 있으며, 심지어 외국인의 이름으로 된 “마싸 사람 야케의 아들 아구르의 말”(30,1)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책 전체의 표제를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하는 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지혜를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외에도 「코헬렛」과 「지혜서」가 솔로몬을 저자로 내세우고 있고, 「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들 가운데 실제로 솔로몬이 쓴 책은 없습니다. (잠언의 경우 혹시 정말 솔로몬 시대의 잠언이 여기에까지 전해진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다윗이 처음 왕조를 세우고 영토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정하는 등의 일들에 바빴다면 솔로몬 시대는 이제 어느 정도 틀이 잡힌 나라에서 문화와 경제가 발전한 시대였기에, 그리고 솔로몬 자신도 지혜로운 사람으로 유명했기에 이 책들이 솔로몬의 권위에 의지하는 것입니다.잠언의 내용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생의 지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용이 다양하다 보니 좀더 세속적이어서 “인생의 성공 비결”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 겸손한 사람과 오만한 사람 등을 대비시키면서 바른 인생길을 알려주는 가르침들을 제시하기도 합니다.그리고 이러한 가르침들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인과응보’의 원칙입니다. 잠언은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원칙을 믿는 고전적인 지혜를 대변합니다. “착한 이는 주님에게서 총애를 받고 교활한 자는 단죄를 받는다”(잠언 12,2). 이와 유사한 잠언들이 매우 많습니다. 흥부 놀부식의 가르침들입니다. 더구나 그 복과 벌은 모두 현세에서 이루어집니다. 초기의 지혜 문학에서는 아직 내세에 대한 희망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정말로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습니까? 더구나 현세에서, 그 원칙이 정확하게 성립됩니까? 꼭 그렇지는 않지요. 욥이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욥은 바로 잠언에 표현되어 있는 전통적인 가르침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고, 그래서 지혜 문학에서 잠언보다 더 늦은 시기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잠언의 저자라고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잠언 16,33). 그러나 그가 역설하려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질서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세상은 혼돈과 무질서일 수 없고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이 끝까지 잘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잠언의 저자를 보고 너무 순진하고 현실을 모른다고 말할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제멋대로 굴러가게 내맡겨두지 않으시고 자연 질서와 이 세상의 정의를 지켜가시는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삶이 가능할까요. 잠언의 신앙은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과도 같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라도, 발밑에 땅이 있다는 믿음이 우리의 발걸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이들에게 바른 삶을 가르치려 할 때에 그러하듯이 잠언의 저자는 지혜의 스승으로서 아직 미숙한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원칙에 대한 믿음을 가르칩니다. 때로는 열심히 노력한 끝에 실망을 겪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선과 악에 대한 갚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속임수와 편법으로 성공하려 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올바르게 행동하여 후회 없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1─9장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지혜’라는 여인의 초대와 ‘우둔함’이라는 여자의 초대를 제시하면서 선택을 촉구합니다. 지혜는 번잡한 길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부르며 초대하며, 사람들에게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잠언 9,5)라고 초대합니다. 10장부터 이어지는 지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는, 임금들이 세상을 잘 통치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세상을 질서 있게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것도 바로 그 지혜를 통해서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로서 이 세상을 만드셨으니, 그 지혜의 길을 따라야 생명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런 전제들이 앞에 붙어 있음으로써, 단순한 인생 성공 비결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마저도 신앙생활의 가르침으로 변모됩니다. 축적된 인생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잠언의 첫 부분에 나오는 지혜의 초대는 잠언의 다양한 가르침들이 인간이 생명과 행복에 이르기 위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라 걷도록 인도해 주는 지침임을 제시해 줍니다.<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6.01.26
![[생활 속의 복음] “기가 막혀 죽겠네?”](//cpbc.co.kr/CMS/newspaper/2016/05/rc/634825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기가 막혀 죽겠네?”성령 강림 대축일(요한 20,19-23) 주수욱 신부(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주임) 기가 막힌 세상세상에는 기가 막혀 죽을 사건들이 매일 넘쳐납니다. 부모가 아이를 죽이는 것이 어쩌다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기막힌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기(氣)가 막히면 죽습니다. 창조 때 인간은 기가 막혀 있었습니다. 창조 때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숨을 불어넣으니 사람이 기가 뚫리고 생명체가 되었습니다(창세 2,7 참고).분노와 폭력의 거친 숨소리하느님의 숨을 받아 하느님과 함께 낙원에서 살던 인간은 ‘하느님처럼 되려는 욕심’을 부려서 하느님을 떠납니다. 하느님의 숨을 쉬지 못하고 맙니다. 탐욕을 부려서 그 열매를 따 먹은 인간(창세 3,6 참고)은 분노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창세 3,12 참고). 그리고 카인은 형제의 피를 손에 묻히는 살인을 저지르기에 이릅니다(창세 4장). 그 분노와 폭력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탐욕을 부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 무책임한 채 분노하곤 합니다. 여기에 더해 여러 종류의 폭력을 행사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해고된 사람들이 자살하고, 강도로 변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의 앞날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새롭게 숨을 불어넣으시려는 하느님하느님은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고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면서 함께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닮은 자유로운 인간은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하느님처럼 되어서 하느님 없이 스스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은 함께 살고 있는 인간으로부터도 떠나갑니다.이렇게 불충실한 인간을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 “너희 마른 뼈들아,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에제 37,4-6).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새로운 창조를 약속을 하십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때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요엘 3,1-2; 3,5).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결정적인 구원입니다.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주심이렇게 약속하신 하느님의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 홀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마술을 부리듯이 어느 한순간에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 인간이 하느님 곁을 떠나던 그 순간부터 하느님은 작정하고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부께서는 성령을 통해 아드님을 동정녀 마리아가 잉태하도록 하셨습니다. 마침내 인간이 되신 아드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성령을 보내 주십사고 기도하면서 성령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성령으로 숨 쉬며 살아가는 삶매일, 매 순간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느님의 숨으로 영원히 살아가는 우리는 하느님 평화의 숨, 사랑의 숨, 용서의 숨을 쉬면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 건설의 완성을 향하여 하느님의 협력자로 이 세상에 매일 새롭게 나섭니다.구체적으로는 첫째,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맙니다. 둘째,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면서 인류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도록 건설하는 것입니다. 셋째, 서로 존중하고 다양함을 인정하면서 참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의 기름을 받은 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을 풀어주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풀어 주고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루카 4,18 참고). cpbc2016.05.11
![[아! 어쩌나] 341. 신흥종교, 무엇이 문제인가](//cpbc.co.kr/CMS/newspaper/2016/04/rc/632251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341. 신흥종교, 무엇이 문제인가홍성남 신부(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문: 요즈음 신흥종교로 인하여 교회가 시끌시끌합니다. 여러 가지 신흥종교가 있지만, 이들이 가진 심리적인 문제는 무엇인지요?답: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 내부적인 것은 잘 모르지만, 전문가들 말씀에 근거하여 그들에 대해 심리분석을 한다면 그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종교 중독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술이나 약에 중독되기도 하지만 종교도 중독성을 갖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중독이란 말은 일상생활에서는 별 의미나 맛을 느끼지 못하지만 특정한 것, 즉 약이나 술, 종교와 같은 대상 속에서 생동감과 존재성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공부나 일에 중독되는 경우는 긍정적 중독이라고 합니다. 약이나 술에 빠진 경우는 가정이나 일상의 삶을 포기하는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살기에 끊어야 하는데 종교는 이와는 차원이 다른 중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그야말로 철저한 신앙인의 삶을 사는데 정서적으로는 황폐해진다는 점에서 다른 중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술이나 약물중독자와는 달리 자신이 환자라는 자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뽑힌 자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기에(종말에 뽑힘받은 14만 4000명이라는 자의식) 치료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신흥종교를 찾는 사람들은 불안감과 열등감이 큰 편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선민의식을 가지면 심리적 변형이 발생합니다. 선민의식을 가진 상태가 심리적으로 우월 콤플렉스가 작동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이 다 자기 마음대로 될 것 같은 착각 속에 삽니다. 그리고 다른 선민들과의 끈끈한 연대감이 주는 소속감이 있기에 자신이 속한 곳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을 환자로 보는 사람들을 오히려 사탄의 세력이나 자신을 박해하는 종말의 적그리스도들이라고 여기고 자족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족 상태, 자존감이 넘치는 상태에서는 교주가 신성시될 수밖에 없고 신흥종교의 교리들이 진리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많은 신흥종교 교단들이 자신들의 교주가 신적인 존재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성경 구절을 인용해 짜맞추기식 교리를 만들어도 아무런 의심도, 물음도 갖지 않는 것은 이미 정서적으로 중독 상태에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신흥종교가 중독성을 갖는 것은 기적과 개인적 체험에 대한 집착도 원인 중 하나입니다. 교주의 기도로 병이 낫는다든가 일이 잘된다든가 하는 일들이 발생하면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은 전적으로 교주에게 의존하고픈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종교인들에게 개인 체험, 기적 같은 일들은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학문적이고 논리적인 삶, 이성적인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신비적인 면이 있기에 이성적 차원을 넘어선 체험은 신앙생활을 한 단계 높이는 데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문제는 그런 신비적 현상에 집착하면 여러 가지 심리적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거나 직장 생활을 포기하고 기도만 한다든가 하는 등등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선택은 종말에 대한 긴박감이 원인이기도 합니다. 즉 여러 가지 요소들이 신비주의에 대한 집착을 강화시켜 일상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개인적 신비체험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심리적으로 고무줄과 같은 특성을 갖습니다. 깊은 신비체험을 하여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옛 성인들은 개인의 신비체험보다 일상 수도 생활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체험에 집착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병인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체험이 아닌 무의식이 착란 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상담을 원하시면 010-5032-7422로 ‘문자’를 보내주세요. cpbc2016.04.27
[성경 속 생명이야기] 19. 생명을 내어줌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사랑 성경화 체칠리아(가톨릭교리신학원 강사) 집회서 저자인 벤 시라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 자신처럼 그들에게 힘을 입히시고 당신 모습으로 그들을 만드셨다”(17,3)고 언급하면서 또한 인간에게 “지식과 이해력으로 그들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선과 악을 보여 주셨다”(집회 17,7)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혜를 추구하고 그를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향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는, 고의적 낙태, 배아 실험, 안락사 등이 사람들 양심의 감지 능력이 흐려지면서 법을 통해 합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권장되거나 허용되고 있다고 생명의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마도 이런 모습을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나쁜 것을 좋다 하는 자들! 어둠을 빛으로 만들고 빛을 어둠으로 만드는 자들!”(이사 5,20)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런 이들을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들 자신을 슬기롭다고 여기는 자들!”이라고 칭합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지혜로운 자들과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지혜를 찾아 얻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하면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셨기에 따로 누구를 따라갈(요한 6,68)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생명의 빵”(요한 6,48)이며 당신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요한 6,47)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복음」에서도 예수님 사명의 참된 목표는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37항)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여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시고자 한 것은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요한 6,33) 분이십니다. 창조 첫 순간에 하느님께서 첫 인간 아담에게서 세우신 생명 계획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이를 바오로는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다”(1코린 15,45)고 말합니다.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8,12)라고 말씀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생명은 “그분 안에 있었으며” “사람들의 빛이었고”(요한 1,4)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며, 그분의 충만한 사랑을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일치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다.(요한 3,15; 6,40) 그러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행하셨던 것과 같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셨고, 그를 통해 하느님의 모양을 회복하고 하느님의 생명을 영원히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몸을 빵으로 축성하여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먹으라고 주셨습니다. 이웃에게 먹으라고 빵이 되어 주심으로 다른 이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방법을 예수님께서는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19장에서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젊은이에게 계명 실천을 명하신 후, 가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19,21)고 하셨지만 이어지는 구절에서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19,29)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성부께 드리는 대사제의 기도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해 다시 한 번 밝히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2-3) 예수님을 알고 따르는 것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려는 우리는 매 순간 성체를 영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생명의 빵이 되어주기 위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평화신문2014.07.02

마을사목으로 소공동체 활성화의 답을 찾다수원 인계동본당 마을사목, 4개 지역 나눠 자치권 부여, 본당 운영 신자 참여 늘어 최인각 신부가 1월 24일 ‘믿음마을’ 미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신자를 배웅하고 있다. 임영선 기자 “믿음마을 회장님, 믿음마을은 올해 목표가 어떻게 되죠?”1월 24일 수원 인계동본당 ‘믿음마을 미사’. 강론 시간이 되자 본당 주임 최인각 신부가 신자 석으로 다가가 ‘믿음마을’ 임충기(도미니코) 회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공동체 활성화”라는 답이 돌아왔다.인계동본당이 관할 구역을 평화ㆍ행복ㆍ기쁨ㆍ믿음마을 등 4개 마을로 나누고, 각 마을에 ‘자치권’을 주는 ‘마을 사목’을 펼쳐 눈길을 끌고 있다. 매 주일 오후 3시에는 마을 미사도 봉헌한다. ‘마을 사목’은 지난해 부임한 최인각 신부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본당 안에 여러 개의 ‘작은 교회’를 만들고, 신자들이 그 교회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해 ‘소공동체 활성화’를 이끄는 것이 목표였다. 수원교구 대리구제를 모델로 삼았다.기존 4개 지역을 ‘마을’로 이름을 바꿨다. 각 마을에는 회장과 부회장이 있고 복음화위원회, 청소년위원회, 재정위원회 등 6개의 상임위원회가 있다. 각 마을은 자체적으로 운영한다. 예산도 따로 짠다. ‘지방자치제도’와 비슷한 개념이다.연초에는 신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마을별 ‘복음화 계획서’를 만든다. 올해는 4개 마을이 선교와 통일 기금 마련을 공통 목표로 삼았다. 그 밖에 평화마을은 성경 통독, 복음화 교육, 경로당 봉사를, 행복마을은 마을 걷기 대회, 청소년들을 위한 수영장 만들기, 음악 피정 등을 계획했다. 기쁨마을은 1월 29일 ‘마을 활성화를 위한 봉사자 피정’을 열기도 했다.마을 사목이 자리 잡아 가면서 본당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각 마을이 자치권을 갖게 되면서 본당 운영에 신자들의 참여가 부쩍 늘어난 것이다. 소공동체도 활기를 띠고 있다. 반 개수가 두 배 이상 늘어난 마을도 있다.행사에 참여하는 신자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최 신부는 “본당 송년회나 신년회, 체육대회를 열면 참여하는 신자가 보통 150여 명 정도였는데 마을별로 행사를 하면서 참여자가 몇 배나 늘었다”며 “지난달 행복마을 신년회에만 150명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고 말했다. 최 신부는 “처음에는 신자들이 낯설어 했는데, 이제는 다른 마을을 서로 본보기로 삼으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을을 꾸려가고 있다”면서 “본당은 마을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백영민2016.02.03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10> 489번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 상](//cpbc.co.kr/CMS/newspaper/2016/03/rc/626327_1.0_titleImage_1.jpg)
[이상철 신부의 성가 이야기] 489번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 상 노예생활 애환 속 피어난 흑인 영가 목화밭의 흑인 노예들. 우리 「가톨릭 성가」에서 ‘흑인 영가’라고 나와 있는 유일한 곡이 성가 489번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카리브 해 연안의 히스파뇨라 섬을 발견한 이후로 아메리카 대륙은 백인들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 백인 이주자들은 주로 광산이나 대농장을 운영했다. 노동집약적인 이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많은 인력이 필요했지만,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절대다수가 백인에 의해 이미 학살당한 뒤였기에 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이러한 인력 수급의 목적으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수입하는 사업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소위 ‘인간 사냥꾼’이라 불리던 백인에 의해, 혹은 돈을 벌 목적으로 동료나 민족들을 팔아넘긴 일부 다른 흑인에 의해 수많은 흑인이 짐승 취급을 받으며 미 대륙으로 건너오게 됐다. 이들은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기 때문에 대서양을 건너오는 선박에서도 마치 외양간에 소를 싣고 오듯이 실려 왔으며, 긴 항해 동안 정욕을 풀지 못한 뱃사람들에 의해 가족이 보는 앞에서 적지 않은 흑인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까지 벌어지기도 했다.이런 가운데 적지 않은 흑인들은 열악한 환경에 병이 걸려 죽거나 혹은 기회를 틈타 스스로 바다로 몸을 던져 자살하기도 했으며, 거칠고 오랜 항해 끝에 대략 절반 정도, 혹은 많으면 3분의 2 정도의 흑인들만 살아남아 미 대륙에 도착했다고 한다.미 대륙에 도착한 흑인들에게는 어떠한 종교적 집회와 행위도 금지됐고, 심지어 자신들의 토착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당함으로써 이들은 점차 아프리카에서 누렸던 자신들의 문화를 잊어갔다.이런 가운데 그들은 비밀스러운 모임을 열기도 했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underground railroad)라 불리는 노예 탈출을 돕는 비밀 조직이 생겨나기도 했고, 야밤에 울창한 숲 속이나 밀밭 등지에 자기들끼리 모여 비밀 집회를 하기도 했다. 흑인 노예들의 문화를 모두 없애버리려 했던 백인 소유주들은 대개 노동할 때 부르는 노래만은 허락했는데, 이때 발생한 노래들이 ‘플랜테이션 송’(Plantation song, 농민가)이라 불리며 새로운 아메리칸 흑인들의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한편 흑인 문화 말살의 목적으로 시행된 것이 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던 흑인들은 그저 예배 시간에 성경 속 인물들에 대해 그저 주워듣는 정도로 지내곤 했다. 그 가운데 이들에게 대표적으로 다가온 인물이 모세다. 하느님을 대신해 이스라엘 민족 해방을 이끌었던 모세라는 인물에 대한 열망이 노예들 가운데에 자라났고, 이 열망을 바탕으로 생겨나 구전된 노래가 유명한 ‘가라 모세!’(Go Down Moses)이다. 이 노래는 한편 독재 권력에 항거하던 시절에도 ‘저항 노래’로 많이 불리기도 했다.이렇게 강제로 주입받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노예생활의 애환 속에서 피어난 흑인들의 노래들을 ‘흑인 영가’(Negro Spirituals)라고 하는데, 이는 서구 신앙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의 토속 리듬 및 선율과 백인에게서 배운 서구 음악이 가미된 독특한 장르로 발전하기에 이른다.<가톨릭대 교회음악대학원 교수>* 가톨릭 성가곡들은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www.catholic.or.kr)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백영민2016.03.24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39> 강론 Ⅲ](//cpbc.co.kr/CMS/newspaper/2015/09/rc/594636_1.0_titleImage_1.jpg)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강론 Ⅲ비유의 언어와 신자 기도가 명강론 만든다 교황은 계속해서 모든 형태의 교리 교육은 ‘아름다움의 길’(via pulchritudinis)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단순히 마땅하고 옳은 일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의미”(167항)라고 설명했다. 시련 속에서도 삶을 새로운 빛과 심오한 기쁨으로 채울 수 있기에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면서 참된 아름다움의 모든 표현은 주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 될 수 있으므로 ‘예술’을 적극 활용하도록 권고했다. 새로운 ‘비유의 언어’로 신앙을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했다. “우리는 말씀을 전달하는 데에 필요한 새로운 표지와 새로운 상징과 새로운 형체를 찾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다양한 문화적 상황에서 소중히 여겨지는 아름다움의 다양한 형태들을 찾는 것입니다”(167항). 사목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미래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구원의 메시지를 담는 ‘비유의 언어’는 아름다움의 총화가 돼야 한다. 비유의 언어를 계발해야스스로 질문해 본다. 케리그마의 심화에 대한 교황의 가르침을 읽었다. 우리가 본당에서 교리교육 혹은 특강을 하거나 일상적인 신자 재교육을 준비할 때, 염두에 둬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교황은 이와 같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표지와 새로운 상징과 새로운 형체를 찾는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비유의 언어’를 계발하라는 말씀이다. 어떤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는가? 교황은 계속해서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는 성숙과정의 동행인들이기에, 서로를 존중하며 참다운 영적 동행으로 지상 여정을 순례하도록 권고했다. 이들의 함께함을 ‘동행의 예술’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했다. ‘예술’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는 말이다(탈출 3,5 참조). “이 동행은 힘차고 꾸준한 발걸음으로 이루어지고 존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시선이 담겨 있어야 한다”(169항). 바오로가 티모테오와 티토와 맺은 관계는 사목 활동 중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동행과 교육의 모범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복음화의 원천은 성경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말씀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한 신자들까지 성경 연구에 적극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 연구는 모든 신자에게 열린 문이 되어야 합니다.…우리는 하느님을 눈먼 채로 찾지 않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이미 말씀해 주셨으므로,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은,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시기를 기다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계시된 말씀의 숭고한 보화를 받아들이도록 합시다”(175항). 명강론은 신자들의 기도에서 나온다교황은 「복음의 기쁨」 3장 후반부 ‘강론’에 대해 말하면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동행의 예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좋은 동행자는 좌절하거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치유되어 다시 일어나고 십자가를 지며 모든 것을 뒤로하고 복음을 선포하고자 언제나 새롭게 출발하도록 권유합니다”(172항). 베트남 반 투안 추기경 이야기를 하고 싶다. 2000년 희년에 교황청 사순 피정 강론을 시작하며 이렇게 말했다. 반 투안 추기경은 예화를 들었다. “미국의 한 작가가 군중을 매혹 시킨 유명한 설교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저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어떤 노인이 설교를 충실히 듣고 있었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성공 앞에서 몹시 행복해했습니다. 어느 날 밤 꿈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명설교를 축하드립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설교를 들으려고 늘 당신 앞에 앉아 있는 그 노인을 기억하시나요?’ 그가 ‘예, 기억하고말고요’ 하고 대답하자 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당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 기도하려고 온다는 사실을 알아두세요. 그분의 기도 덕분에 당신의 설교는 신자들에게 언제나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강론에 대해 충분한 가르침을 받았다. 야단도 많이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의 강론이 시원찮으면,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평신도들이 형편없기(?) 때문이라고 억지로 푸념해보고 싶어 위의 예화를 인용해 보았다. 백영민2015.09.23
![[성경 속 도시] (17) 바오로의 고향, 타르수스](//cpbc.co.kr/CMS/newspaper/2014/05/rc/51138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도시] (17) 바오로의 고향, 타르수스철학·교육 등 수준 높은 문화도시 타르수스에 있는 성바오로성당 내부. 출처=「IN the steps of saint Paul」 오늘날 터키의 중남부에 있는 타르수스는 국제 교류의 중심이며 두 가지 문화가 경계를 이루는 옛 도시다. 타르수스는 고대 북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하나인 히타이트 문명의 영향 아래 건설된 도시다. 고고학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30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는 천연 항구 도시로 지중해의 물물교환과 교통 왕래를 통해 빨리 발전했으며, 기원전 7세기를 전후로 고대 그리스인이 소아시아 지역에 활발히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할 무렵 이들의 문화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치드누스 강에서 목욕하다가 익사할 뻔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타르수스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됐고, 기원전 64년에 로마에 병합됐다.사도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사도 9,11). 타르수스에는 유다인의 회당이 잘 형성돼 있었다. 바오로의 부친이 종교적으로 열성적이었기에 아들에게 히브리 원전으로 성경을 배우게 했다. 바오로는 학교에서는 그리스어로 된 칠십인역성경을 공부했고, 유다 정착촌 밖이나 집 안에서 그리스어로 말했다. 사도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필리 3,5). 회심 후 3년이 지난 36년께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난 다음(갈라 1,17-19),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가 약 8년 동안 지냈다.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다시 타르수스로 보냈다”(사도 9,30). 타르수스는 현재 거주민이 10만 명 남짓하지만 옛날에는 문화,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로마제국 시대의 타르수스는 킬리키아 지방의 행정수도 역할을 했으며, 도시의 문화 수준이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갔다고 전해진다. 바오로 사도 시대에 타르수스는 교육과 철학 분야에서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보다 훨씬 우위를 차지했다. 타르수스는 서쪽의 그리스·로마 문화와 동쪽의 셈족과 바빌로니아 문화가 만나는 곳이었다. 이처럼 타르수스는 당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고 스토아학파의 유명 철학자들이 활약했던 곳이었다. 이곳에는 많은 유다인들이 이민 와서 정착해 있었기에, 이런 배경 속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연스럽게 그리스어와 셈족어를 비롯한 문화를 익힐 수 있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부친에게 상속받아 로마 시민권을 지니게 됐는데, 그것은 훗날 그가 선교 활동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됐다.타르수스는 641년부터 아랍인의 침공을 받기 시작하면서 점점 쇠퇴했다. 현재 타르수스에는 바오로 시대의 유적이 거의 없다. 흔히 ‘클레오파트라 성문’이라 부르는 로마 시대의 성문만이 남아 있다. 이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와 함께 타르수스에서 신혼여행을 즐겼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배로 지중해를 건너 치드누스 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유혹해 만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평화신문2014.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