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호르무즈에 발묶인 선원들의 고통을 기억하자](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4/14/8wh1776130861445.jpg)
[특별기고] 호르무즈에 발묶인 선원들의 고통을 기억하자중동전쟁 발발 50여 일 ‘바다 위에 멈춰진 시간’(손지호 신부)미국은 2월 28일 ‘장대한 분노’ 작전으로 이란을 대규모 공습한 이후 때마다 자신들의 전쟁 정당성을 위해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교회는 이에 “전쟁에 하느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죄에 해당한다”고 비판했지만, 미 정부는 멈추지 않고 있다. 아울러 전쟁 후 현재 세계 원유 수송의 약 20%가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유조선들의 발이 묶인 상황이다. 12일 기준 해협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 선박은 26척, 선원은 173명에 이른다. 본지는 전쟁을 둘러싼 미 정부의 잘못된 발언에 대한 주교의 기고와 평소 선원들을 위해 사목해온 사제의 글을 통해 전쟁을 향한 어긋난 진실과 이면의 고통을 돌아봤다. 정리=박민규·박예슬 기자 부산교구 해양사목 관계자들과 선원들이 선박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손지호 신부 제공 매일 들려오는 전쟁의 소식 한복판에서,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바다 위의 선원들입니다. 호르무즈 해협 일대에 긴장이 고조되면서 많은 선박이 발이 묶였고, 그 안의 선원들은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 채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사실 선원들의 삶은 평소에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몇 달씩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 위에서 고립된 시간을 살아갑니다. 바다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그래서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은 평소의 어려움을 훨씬 넘어섭니다. 전쟁이라는 예측할 수 없는 위협 속에서 그들은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멀리서 갈매기 한 마리가 스쳐 지나가도 혹시 공격용 드론은 아닐지 불안을 느끼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간 속에서 점점 줄어드는 식량을 바라보며 막막함과 두려움을 함께 견뎌야 합니다. 이들은 군인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는 노동자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가장 직접적으로 전쟁 한가운데에 놓여있습니다. 이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각자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쉽게 다른 이들의 고통을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원료 수급이 불안하다는 소식에 쓰레기봉투를 미리 사두고, 라면 생산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뉴스에 불편을 먼저 떠올립니다. 물론 그것도 우리 삶에서는 중요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응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손가락 끝의 작은 불편에는 민감하면서도 누군가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고통에는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이 전쟁을 통해 평소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편안한 일상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물건과 자원들은 바다를 건너 우리에게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는 언제나 이름 없는 선원들의 수고와 인내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했을 뿐 우리의 삶은 이미 그들의 헌신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바다 위에서 두려움 속에 머물러 있는 이들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지금까지 묵묵히 감당해온 삶에 대한 고마움입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두려움의 공간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함께하십니다.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던 이들에게 건네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집니다. 두려움 속에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말고, 함께 기억하라는 초대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온이 누군가의 멈춰진 시간 위에 서 있지 않은지 돌아보며, 바다 위에 머물러 있는 이들을 마음에 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손지호 신부(부산교구 해양사목 담당)박예슬2026.04.14

세종대왕과 성삼문 : 교황 다마수스와 히에로니무스[월간 꿈 CUM] 교회의 길 _ 예수, 그 이후 베들레헴 성녀 카타리나 성당의 히에로니무스 경당.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성당 바로 옆에 성녀 카타리나 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에 히에로니무스 성인이 성경을 해석하고 번역한 공부방과 경당이 보존되어 있다. 출처: 월간 꿈CUM 우리나라에 세종대왕과 성삼문이 있다면,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교황 다마수스(Damasus I, 366~384 재위, 다마소)와 고결한 선비 히에로니무스(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7?~420, 예로니모, 제롬)가 있다.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세종대왕은 탁월한 리더십으로 조선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발전을 이끌었다. 특히 그는 한글 창제, 과학 기술 발전, 법률 제도 정비, 교육 체계 구축 등을 통해 백성들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런데 이 모든 업적은 혼자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세종대왕은 성삼문, 박연, 장영실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을 발굴, 그 능력과 역량을 십분 활용했다. 교황 다마수스의 재위 기간 역시 조선 초 세종대왕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했다. 정세는 불안했으며, 이단의 난립으로 교회 존립이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에 다마수스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 초기 교회가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몇몇 역사학자들은 교황 다마수스의 업적에 의문을 갖기도 한다. 다마수스가 영적인 차원이 아닌 세속적인 차원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폴 존슨은 「기독교 역사」에서 그가 개종시킨 여성들은 대부분 사교계 여성이었으며, 특히 부유층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적고 있다. 심지어 다마수스가 부유층 여성과 간통을 저지르고, 살인을 했다는 내용의 고발장이 지금까지 로마 공문서 기록에 남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당시 시대상을 제대로 감안하지 않은 오류로 보인다. 당시 교황 다마수스를 상대로 한 간통 및 살인 관련 고발은 교황과 대립하던 아리우스 이단 신봉자들에 의한 것이어서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 또 그가 부유000000층 선교를 위해 주력한 것은 당시 우상숭배가 로마 원로원과 부유층에 만연하고 있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다마수스의 선택은 영적인 차원에만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예수가 세상에 왔듯이 교회도 세상과 보조를 맞추고 세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황은 이를 통해 연약한 교회 기반을 다지고 내실을 튼튼히 하고자 했다. 이 선택은 세종대왕이 고결한 궁궐 속에 갇혀 있지 않고 백성을 위해 아래로 내려간 것, 그리고 국방을 튼튼히 한 것을 연상시킨다. 교황 다마수스는 특히 교회 시스템이 그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378년 즈음 교황은 시노두스를 개최하고 서방교회 주교들이 로마 교구에 복종하도록 했다. 이 결정이 없었다면 로마 교회의 우위성은 확립되지 못했을 것이고, 각 지역 교회별로 뿔뿔이 흩어져 신앙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마수스는 또 그리스어로 진행되던 미사를 라틴어 미사 의식으로 바꿨다. 이는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라틴어 미사를 각 나라말로 집전할 수 있도록 한 것과 같은 혁신적인 조치였다. 획기적인 개혁은 요즘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1600년 전에도 이미 이러한 대담한 개혁 조치들이 있었다. 교황 다마수스의 또 다른 업적은 가톨릭 전례의 정착이다. 세종대왕은 조선 음률을 바로 세우라는 어명을 내렸고, 천재 음악가 박연은 그 명을 받들어 예악을 정립했다. 4세기 말 가톨릭교회는 주류 종교 지위에 걸맞은 전례를 정립해야 했다. 그 일을 해낸 것이 교황 다마수스다. 당시 미사는 사도들의 언행록과 구약성경 낭독, 강론, 평화의 인사,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분배 등 큰 틀에서만 통일되어 있었다. 전례의 구체적인 용어나 체계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지역 교회마다 제각각이었다. 이에 교황 다마수스는 단순했던 미사 의식에 장엄한 요소들을 도입하여 좀 더 체계적인 틀을 갖추도록 했다. 교황 다마수스의 새로운 미사 전례에는 초보적이긴 했지만 찬양이 도입되었는데, 춤은 이교도 풍습이어서 배제됐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다마수스의 업적 중 대표적인 것은 히에로니무스를 시켜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세종대왕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한글 창제이듯, 교황 다마수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성경 완역이다. 원래 신약성경은 희랍어로,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백성을 위해, 교회 전례 통일을 위해 새로운 공식 성경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라틴어 번역본 성경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경우 원문 히브리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아닌, 히브리어를 희랍어로 번역한 70인역(Septuaginta)을 ‘재번역’한 것이어서 원문과 차이가 많이 났다. 이에 교황 다마수스는 히에로니무스에게 라틴어 성경 번역을 명했고, 이후 무려 15년이 걸려(연구자들에 따라 차이를 보이곤 있지만 서기 384년경 4복음서가 번역되었고, 386년경에 신약성경, 391~405년경에 구약성경이 번역되었다) 기적적으로 ‘불가타’(Vulgata)가 탄생한다. 불가타는 ‘대중적’이란 뜻이다. 불가타판 성경은 원문에 충실하고 번역이 정확할 뿐만 아니라, 당시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물론, 불가타 성경에도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모세의 뿔’이다. 구약성경 원문 히브리어 성경에는 모세의 얼굴이 ‘빛나는 얼굴’이 되어있는데, 히에로니무스는 이를 ‘뿔난 얼굴’로 오역했다. 유럽을 여행하 다 보면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등 모세 관련 성화와 조각에 뿔이 달려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모두 불가타의 오류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마수스의 명을 받들어 불가타를 탄생시킨 히에로니무스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히에로니무스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재원이었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어학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수도자 보다 더 철저하게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부부 사이에서도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히에로니무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있어 옮겨본다. “사막의 교부였던 히에로니무스의 회상에 따르면 젊은 시절 그는 넝마 자루를 걸치고 흑인처럼 새까맣게 탄 몸으로 사막에서 혈혈단신으로 수마와 싸웠다. 식단도 비참했다. 냉수와 빵 부스러기 몇 조각이 전부였다.”(「독신의 탄생」, 엘리자베스 애보트 Abbott Elizabeth, 이희재 옮김, 해냄, 2006)에서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였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에 있는 이 말은 원래 히에로니무스가 한 말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삶(고대 그리스어 히에로뉘모스 Ἱερώνυμος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이다)을 살았다. 그에게는 유명한 전설 하나가 전해온다. 성경 번역 작업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엄청난 덩치의 사자 한 마리가 절룩거리며 그에게 다가와 앞발을 내밀었다. 히에로니무스가 자세히 보니 사자 발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사자가 불쌍했던 그는 가시를 빼주었다. 그러자 사자는 히에로니무스가 죽을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고 한다. 베들레헴에 가면 히에로니무스가 성경을 번역했다고 알려진 장소에 경당이 마련되어 있다. 그는 베들레헴 예수님 탄생지 인근의 동굴에 머물며 성경을 번역했고, 소임을 다한 뒤인 서기 420년 9월 30일 선종해 주님 탄생 성당에 묻혔다. 히에로니무스는 번역가들의 수호성인이며, 그가 선종한 9월 30일은 세계 번역의 날이다. 교황 다마수스의 탁월한 선견지명과 리더십, 히에로니무스의 헌신은 성령의 섭리였다. 세종대왕과 성삼문 없는 조선을 생각할 수 있는가. 교황 다마수스와 히에로니무스 없는 교회 역사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들을 움직인 힘은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었다. 교황 다마수스는 자신의 묘비에 새겨질 문구를 직접 작성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다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진정시킬 수 있는 분, 죽어가는 모든 씨앗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분, 죽음의 끔찍한 쇠사슬을 푸실 수 있는 분, 3일 암흑 이후에 마르타의 오라버니를 이 세상에 다시 불러오실 수 있는 분,나 다마수스를 먼지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실 분, 나는 그분을 믿는다.” 글·사진 _ 우광호 (라파엘, 발행인)2025.09.04
[사설] 마산교구 60년, 희망의 공동체로 다시 서다마산교구가 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아 새 교구청사를 봉헌했다. 새 교구청은 마산교구가 AI 대전환 시대의 사회 복음화에 부응하고 참 복음적 신앙 공동체로 쇄신하는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60년 전 설정 당시 마산교구는 21개 본당, 신자 수 2만 8165명에 복음화율 1.3%에 불과했지만, 2025년 말 현재 본당 75개소, 신자 수 18만여 명, 복음화율 7.7%로 크게 성장했다. 마산교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 계명에 따라 지난 60년간 지역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참 교회 모습을 구현하고,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 징표를 확실히 읽고 사회 약자를 위해 투신하는 일에 집중해왔다. 마산교구민들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봉사와 증거의 삶을 사는 데 헌신해왔다. 성경과 교리교육에 집중하고, 젊은 그리스도인과 성소자 양성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또 사회 정의와 생명 운동,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에 적극 참여해 왔다. 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은 마산교구는 여전히 변함없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걸어가는 희망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제6대 마산교구장 이성효 주교는 ‘감사와 겸손, 기도의 보화’를 마산교구민과 나누며 사회 모든 계층, 특별히 AI 시대에 소외된 이들과 연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산교구는 한국 교회 안에서 젊은 교구에 속하지만 가장 먼저 AI 시대에 대비해 기존 틀을 과감히 조정하고 새로운 사목 비전을 마련하고 있는 교구이다. 마산교구의 새로운 비전이 한국 교회 전반에 새 복음화의 바람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길 기대한다. 다시 한 번 마산교구민 모두에게 교구 설정 60주년과 새 교구청사 봉헌을 축하한다. cpbc2026.04.22
![[출판] 일상에서 마음속 '황금' 찾는 혜안 가르쳐줘](//cpbc.co.kr/CMS/newspaper/2013/02/rc/441379_1.2_titleImage_1.jpg)
[출판] 일상에서 마음속 '황금' 찾는 혜안 가르쳐줘안셀름 그륀 신부가 들려주는 기쁨과 행복 이야기 2권 출간 숨어 있는 기쁨ㆍ숨어 있는 행복 안셀름 그륀 신부 지음/조규홍 옮김/가톨릭출판사/각 1만 원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영성가 안셀름 그륀(독일 성베네딕도회) 신부가 들려주는 기쁨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겪을 수 있는 상황을 예로 들며 그 속에서 성경 속 하느님 말씀, 옛 성인들의 지혜와 교훈을 찾아내 알려준다. 기쁨과 행복을 찾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길라잡이다. ▨숨어 있는 기쁨 누구에게나 매일 경험할 수 있는 소소한 기쁨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화창한 날씨, 출퇴근 시간 버스에 비어 있는 한 자리, 동료의 밝은 인사 등 우리 주변에는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일들로 가득하다. 이에 관해 그륀 신부는 매일같이 다가오는 수많은 기쁨을 의식하고 받아들일 것을 당부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 내면에는 적극적인 태도나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점점 증폭되고 확고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내면적 태도가 우리를 건강하게 해줄 것입니다."(22쪽) 실제로 기쁨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준다. 집회서는 "마음의 기쁨은 곧 사람의 생명이며, 즐거움은 곧 인간의 장수이다. 질투와 분노는 수명을 줄이고 걱정은 노년을 앞당긴다"고 했다(집회 30,22.24-25). 기쁨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기뻐할 일은 조용히 지나가면서도, 화가 나거나 못마땅한 일은 크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륀 신부는 이러한 태도에서도 긍정을 찾아낸다. "불만은 기쁨에 대한 커다란 열망의 표시"라면서 "슬픔 이면에 감춰져 있는 기쁨에 대한 열망도 지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곁눈질하며 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일러준다. "기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갑니다. 그것이 그가 기뻐하는 근거입니다."(58~9쪽) 그륀 신부는 이어 △자연에 △순간순간에 △좋은 음식에 △기도할 수 있음에 △작은 것들에서 발견되는 행복에 △친구가 있음에 기뻐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그중에서도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기쁨이야말로 사라지지 않는 기쁨이라고 강조한다. ▨숨어 있는 행복 그륀 신부는 행복을 황금 찾기에 비유했다. 여기서 황금은 물질적 황금을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신적 의미의 황금이다. 내면 혹은 영혼 깊숙한 곳에서 빛을 발하는 진리와 지혜를 가리킨다. 그륀 신부는 이 책에서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다양한 생활 속에서 마음속 황금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며 일상을 '잠겨 있는 보물 창고'에 비유했다. "이 보물 창고는 말 그대로 값지고 귀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보물 창고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면, 다시 말해 일상과 친해지는 법을 알게 된다면, 그 값지고 귀한 것은 우리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열쇠를 갖는다는 것은 '자명(自明)함, 곧 그 자체로 분명함'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65쪽) 일상에서 황금을 찾으려면 '분명함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물론 여기에는 지혜와 사랑이 바탕이 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보잘것없고 겉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에도 사랑 어린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특별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륀 신부는 또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기억하기 싫은 괴로운 경험에서도 "가슴 아픈 상처들이 발하는 황금빛을 알아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상처를 받고 나면 우리는 종종 스스로 무언가를 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 순간 자기 부모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 것을, 또 자기처럼 상처받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보호해줄 것을 스스로 다짐합니다."(96쪽) 그륀 신부는 "이기적인 욕심이나 아픔들, 소극적인 감정이나 쓸데없는 생각들, 스스로 쌓아 올린 열등감을 헤집어 볼 수 있다면 내면에 자리하는 그 모든 것에서 황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 책이 삶을 흔들어 놓은 모든 것들을 가만히 살펴서, 감춰져 있던 황금을 발견할 수 있는 격려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조은일2013.02.19
![[생활 속 복음]연중 제16주일-한적한 곳에서 만나는 하느님](//cpbc.co.kr/CMS/newspaper/2012/07/rc/420861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 복음]연중 제16주일-한적한 곳에서 만나는 하느님서광석 신부(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은 자신들이 한 일과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을 모두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하셨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조용한 곳을 찾아 떠나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는 것을 보고 육로로 앞질러 먼저 그곳에 도착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 홀로 또는 제자들과 가셨던 '한적한 곳, 외딴곳'은 예수님께서 이루실 사명의 비밀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양떼의 착하신 목자가 되려고 외딴곳에서 기도하셨다. 기도 중에 당신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 뜻에 따르고, 자신의 말이 아니라 성부 말씀을 옮기고, 자기 일이 아니라 하느님 일을 할 용기를 얻었다. 한 스님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암보살…"이라고 염불을 외웠다. 다른 스님이 불당 앞을 지나가다 이 소리를 듣고는 "아니, '관세음보살'을 왜 '관세암보살'이라고 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염불하던 스님은 "관세음보살이라니요? 관세암보살이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두 스님은 서로가 옳다고 우기다가 결국 스승이신 큰스님께 판정을 받자고 했다. 얼마 후 관세암보살로 외웠던 스님이 호박범벅죽을 큰스님께 드리면서 관세암보살이 맞는다고 말해달라고 청했다. 조금 뒤에 관세음보살이라 주장했던 스님도 국수를 큰스님께 드리면서 자신이 맞다고 해주길 부탁했다. 날이 밝고 약속했던 시간이 되자 두 스님은 스승에게 갔다. 큰스님은 "호박범벅경에 보면 관세암보살이라 되어있고, 국수경에는 관세음보살이라 적혀 있느니라"하는 말을 건네고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원래 가시덤불에는 봉황이 깃들지 않으며,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틀고, 현명한 사람은 스승을 골라 섬긴다고 한다. 지도자는 단순히 대중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나 전문분야에서 활동하는 권위자와 구별된다. 사랑과 책임감을 지니고, 구멍 뚫린 배로 항해하듯이 항상 조심해야 한다. 겸손하게 집단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구성원에게 삶과 행동의 방향을 제시하며 구심점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인류의 진정한 스승이며 착한 목자인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 뜻에 따르는 것이며, 성부의 창조 목적에 따라 양떼인 하느님 백성을 이끄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 삶의 핵은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라는 성경 기록 그 자체이다. 이것이 또한 그분 기도다. 예수님께서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뜻에 따라 우리에게 행하신 사랑과 가르치심은 완전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삶과 기도의 지향이다. 지금 이 세상은 돈이 힘이며, 지조요, 대의명분이고, 사랑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신뢰할 수 있고 믿는 자에게 마음을 연다. 아무리 덕(德)으로 분을 바르고, 의(義)로 치장해도 숨은 뜻이 아름답지 못하면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벼슬과 지위, 재물은 어쩌다 우리와 인연이 되어 잠깐 머물다 가는 것뿐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형제인 해와 자매인 달을 노래하듯, 창조에는 근본적으로 친밀성과 일체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탈렌트가 개인만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이가 어울려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역할을 나눠 서로에게 봉사하려고 주어진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삶을 통해서 명예는 정직한 수고에서 생성되고, 우리 자신이 우리 명예의 수호자가 된다. 비록 현실의 삶이 복잡하고 분주해도 우리는 마음의 '한적한 곳'을 찾아서 예수님 가르침을 묵상하자. 그리고 하느님 뜻만을 이루시려 한 생을 보내시며 기도하신 그분을 닮고 사랑하도록 은총을 구하자. ※서광석 신부님은 이번 주로 '생활 속의 복음'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깊은 기도와 묵상 속에서 복음의 정수(精髓)를 건져올려 독자들에게 안겨준 서 신부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8월 5일자(제1177호)부터 대전가톨릭대 교수 곽승룡(교의신학 박사) 신부님이 연재합니다.조은일2012.07.17
![[생활 속의 복음] 성령강림대축일-오소서 성령님, 가장 좋은 위로자](//cpbc.co.kr/CMS/newspaper/2011/06/rc/379301_1.1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성령강림대축일-오소서 성령님, 가장 좋은 위로자박용식 신부(원주교구 횡성본당 주임)사람은 누구나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더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더 나은 것을 얻으려고, 더 큰 행복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물질에서 행복을 얻으려던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지식이나 힘, 명예나 쾌락 등에서 행복을 찾던 사람들도 행복하지 못했고 건강에서 행복을 얻으려던 사람들도 건강만으로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더 나아지고 싶고 더 행복해지고 싶은 데 잘 안 됩니다. 우리네 인생에는 나약한 인간의 힘만으로 안 되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힘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특히 기적 같은 독특한 신앙체험이 있으면 신앙심이 더 깊어질 수 있고 행복도 더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일학교 어린이 한 명이 꿈에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됐답니다. 갓 영세한 신자 한 명은 꿈에 성모님을 보고는 확고한 신앙심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을 딱 한 번만 보았으면, 꿈속에서라도 좋으니 예수님 목소리를 딱 한마디라도 들어본다면, 예수님을 단 한 번만이라도 만져볼 수 있다면, 먼 발치에서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한 번 만져보았으면 신앙심이 더 깊어질 수 있고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손으로 만져보고 예수님 얼굴을 두 눈으로 보고 예수님 목소리를 귀로 들었다고 해서 예수님을 더 잘 믿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자그마치 삼 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수없이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무수히 만져보고, 수 천 번도 넘게 예수님 말씀을 똑똑히 들었지만 신앙심이 깊어졌던 것도 아니고 삶이 바뀌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지식이 풍부하고 신앙체험이 많으면 더 깊은 신앙심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제자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제자들만큼 많이 알고 많은 체험을 한 사람들도 없지만 그들처럼 형편없던 신앙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놀랍게 변했습니다. 그 많은 가르침을 예수님한테 직접 듣고도, 그 놀라운 기적을 생생하게 체험하고도,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변치 않던 완고한 마음이 성령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의심 없는 믿음과 평화로운 마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많이 알고, 많이 체험한다고 해서 신앙심이 깊어지고 행복이 커지는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풍부한 경험과 지식이 사업을 하고 돈을 벌고 출세를 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신앙심을 깊게 하거나 행복을 더 크게 만들어 가는데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지식과 체험, 노력이기에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는 데는 별 힘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태산같이 믿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자 제자들은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어서 다락방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무서워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이 그들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불혀 모양의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마치 전기충격을 받은 것처럼 뜨거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180도 변했습니다. 겁쟁이에서 용감한 자로, 불안에 떨던 마음에서 평화로운 마음으로, 미지근한 믿음에서 확실한 믿음으로, 고통에 짓눌린 찌든 삶에서 기쁨에 넘치는 은총의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도 더 나아지려하고 더 행복해지려 하지만 인간의 힘만으로는 잘 안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고 예수님 옷자락을 만진다고 해도 그 자체로 신앙심이 더 깊어지거나 행복이 더 커지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지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00년 전 사도들에게 내리셨던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신다면 틀림없이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 생기 돋우소서. 주님 도움 없으시면, 저희 삶의 그 모든 것, 해로운 것뿐이리라."(성령송가 중에서) 조은일2011.06.07
![[생활속의 복음] 대림 제1주일- 예수님 흉내내기로 예수님 태어나실 분위기를 만듭시다](//cpbc.co.kr/CMS/newspaper/2010/11/rc/358157_1.1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대림 제1주일- 예수님 흉내내기로 예수님 태어나실 분위기를 만듭시다박용식 신부(원주교구 횡성본당 주임)오늘부터 예수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인간은 한번 태어난 후 또 다시 태어날 수 없지만 예수님은 다시 태어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에 2000년 전 12월 25일에 태어나셨지만 또 다시 태어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성탄에 예수님이 또 태어나실 것을 기다리며 준비합니다. 내 안에 다시 태어나시어 나를 구원해 주십사고 청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학자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이신 주님이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탄생하시지만 만일 내 마음에 태어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하고 질문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태어나시지 않으면 성탄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 됩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어떤 사람 안에 태어나시는가? 어떻게 해야 내 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실 수 있을까? 내 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게 하려면 내 안에 예수님 태어나실 풍토와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집안 분위기를 예수님께서 태어나고 싶은 분위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사제가 태어날 만한 집안분위기에서 태어나서 자랐기에 사제가 된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자란 환경과 집안 분위기는 그야말로 사제를 탄생시킬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순교하시고 아버지마저 순교하실 만큼 신앙심이 깊은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집안의 모든 분위기가 신앙 중심이었고 신앙이 삶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환경에서 자연스레 신앙심이 몸에 배였던 풍토였습니다. 신학생으로 마카오에 뽑혀갔을 때 마카오의 세 신학생들을 맞이한 조선신학교 책임자 칼르리 신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에게 전적으로 맡긴 세 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신심, 겸손, 면학심, 선생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자라온 환경과 배경이 신부되는 데 손색이 없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우리의 집안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방마다 중심에 십자가가 걸려있고 성모상, 성인들의 상본, 성경책, 묵주 등 신앙적인 분위기입니까? 아니면 방의 중심에는 사진이나 장식물이 걸려 있고 십자가는 구석으로 몰려 있어 그 위에는 걸레나 옷가지들이 걸려있거나 덮여있지는 않습니까? 아침ㆍ저녁기도, 식사전ㆍ후기도, 묵주 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등을 자연스럽게 바치고 있습니까? 평일미사에까지 참여하며 성당에서 봉사하고 성서를 읽는 등 신앙적 분위기입니까? 아니면 일주일에 겨우 한번 마지못해 성당에 나오고 그 밖에는 예수님의 '예'자도 들어볼 수 없는 그런 환경입니까? 애들은 학교교육, 과외, 외모에만 신경을 쓰고, 연예인들이나 흉내내고 어른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잘 벌고 세속의 쾌락과 즐거움을 누리는 데만 중점을 두는 집안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실천하는 분위기입니까? 환경과 풍토가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 집안 분위기를 신앙 분위기로, 집안 환경을 기도하는 환경으로 만듭시다. 그리고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세속적으로 출세한 사람을 따라하고 흉내내는 분위기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하며 예수님을 흉내내는 분위기로 만듭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흉내 내고, 예수님을 따라하고,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하면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집안 분위기를 예수님을 소중히 여기는 분위기로, 우리의 풍토와 환경을 예수님을 탄생시킬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면 우리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또 다시 기다리는 것은 이번 성탄에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셔야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에 예수께서 우리 안에 다시 태어나셔야 우리가 안고 있는 그 많은 문제들까지 해결하거나 또는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성탄에 우리 안에 예수님을 탄생시킬 분위기를 만들어 봅시다. 평소에 안 하던 기도를 하든가, 성당봉사나 청소를 하든가, 전에 안 하던 구역반 모임에 참가하든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좋은 환경과 분위기를 만드는 방법은 많습니다. 이번 성탄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예수님을 흉내냄으로써 예수님을 탄생시킵시다. ▲박용식(시몬) 신부는 1979년 사제품을 받고 원주교구 풍수원본당 주임, 미국 버지니아 성바오로 정하상본당 주임, 황지ㆍ봉산동본당 주임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예수님 흉내내기」와 「예수님 따라하기」 등이 있다.조은일2010.11.23
[생활 속의 복음] 연중 제4주일- 성숙한 신앙인의 복음 선포홍승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오늘 복음은 나자렛 회당에서 주님께서 하신 첫 연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포하신 주님을 향해 사람들은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 반응을 보입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루카 4,23). 사람들의 비아냥거리는 이런 반응은 그들이 주님에게 원하는 바가 다름 아닌 기적과 같은 표징이라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차별화된 무엇인가를 보여 달라는 뜻입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내면에는 자신만을 우선시하는 마음, 더 나아가 자신만을 위해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편협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구미에 당기는 바람들을 들어줄 수 있다면 믿어 보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나타나엘이 처음 주님에 관한 말을 들었을 때의 반응과도 같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사람들의 이런 부정적 반응은 나자렛 회당에서 주님께서 하신 첫 복음 선포 연설이 실패한 듯이 보이게 합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나, 이방인이었던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 관한 주님 말씀은 사람들의 감정과 반응을 극에 달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나서 주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 합니다. 주님의 공생활 시작과 같은 첫 데뷔 연설이 실패하고 만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더욱이 주님은 왜 이런 방법으로 첫 데뷔 연설을 시작하셨는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바를 주님께서 반드시 만족시켜주고 채워주셔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주님을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잘못된 바람과 기대는 자신의 생각 속에 주님을 설정하고 끼워 맞추는 오류를 범하게 합니다. 자신 감성에 맞는 하느님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유혹과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실패를 무릅쓰고 복음 선포자가 진정 유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다고 봅니다. 복음 선포자는 사람들의 무조건적 기대와 필요에 따라 주님을 끼워 맞추는 유혹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지독한 유혹은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 내면으로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 방해물입니다. 외적 성공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한 복음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7.19). 우리는 스스로 반드시 무엇인가 이뤄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집착 때문에 두려워하고 떨곤 합니다. 잘해야 한다는 욕망이 실패하는 것을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오로 사도께서 들려주신 저 유명한 사랑의 찬가를 마음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입니다. 복음 선포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며, 그 체험을 통해 주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듯,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립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때의 것들을 그만둡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의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은 결코 실패한 복음 선포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신앙 성숙을 위해 실패한 듯이 비춰질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외적으로 무엇을 이루거나 성과를 거두기보다는 주님 자유와 사랑에 함께 동참하기를 더 바라시기 때문입니다.조은일2010.01.26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3주일- 주님 사랑에 새로운 영적 눈 떠야홍승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의 서문과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공생활 시작의 첫 연설을 듣습니다. 서문에 나오는 테오필로스라는 이름은 상징적 이름입니다. 테오필로스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루카 복음 저자는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에 관한 일들이 모두 진실임을 선포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사실 복음서가 기록되기까지는 일정한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사도들의 복음 선포, 그리고 구두전승에서 기록단계라는 3가지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생애와 복음이 기록된 사이에는 30~60년이라는 긴 시차가 존재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직접 남기신 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체험한 일들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기록하고 증언할 필요가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들을 역사적으로 입증할 만한 객관성을 찾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각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놀라운 일들을 단순히 역사적 검증으로만 찾으려 애쓴다면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안에서 검증되고 비춰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역사 자체를 창조하고 창조된 역사 안에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데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찾으려 한다면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믿음의 영적인 성장을 통해 새로운 눈으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일어난 일이 이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바로 이사야 예언자 말씀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용된 이사야서 61장 1-2절과는 다른 내용이 더 첨가돼 있습니다. 그것은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눈먼 이들이 다시 본다는 의미는 어쩌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하느님과 인간과 관계를 고립시키는 눈먼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은 아닌지 묵상해야 합니다.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거기에 눈먼 이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입맛과 감성에 따라 설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다양성을 인정 못하고, 오히려 생각이 다르면 틀리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포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포된 말씀이 성취되고 실현됐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창조하시는 바로 주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몸은 하나지만 많은 지체로 되어 있듯이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해 한 성령으로 태어나 그리스도의 같은 몸을 이루는 지체들인 것입니다(1코린 12,12-14). 우리는 다양한 지체를 구성하지만 주님 안에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성격, 생각, 습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각 지체들이 서로 분열되지 않고 동등하게 돌보게 하십니다. 그 방법은 단순합니다. 주님은 가장 모자란 지체를 더 돌보시고 더 큰 영예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게 하신 것입니다(1코린 12,24-25).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사랑에 영적인 새로운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의 모습은 현저히 달라진다고 합니다. 겸손한 사랑과 믿음을 갖고 옳은 방향을 바라보면, 의외로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낮도 필요하지만 밤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밤은 일하지 않기에 비생산적인 때가 아니라, 오히려 낮에 일할 수 있는 동력을 저축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혹시 자신이 눈먼 여정을 걸어왔다고 느낀다면, 이제 눈멀었던 인생의 밤은 새로운 삶을 위한 밑그림을 그렸던 때라고 생각하고, 모자란 지체를 더 크게 돌보시고 새롭게 눈을 뜨도록 이끄시는 주님께 은총을 청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조은일2010.01.19

역사·문화·신학으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신학적 해석·영적 성찰·역사 비평까지 한 권에 담아 예수님 가이드 / 마이크 보몽 / 황대기 신부 / 생활성서 “아주 오래전에 사셨던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우리가 정말 알 수 있을까? (중략) 최근 발견된 쿰란 문서(사해 사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예수님에 관한 성경 기록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1세기 유다교의 삶과 사상, 신앙과 정확하게 일치함이 드러났다. 결국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신뢰할 만하며, 더 나아가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한 오늘날의 연구에 확고한 토대가 될 수 있음을 그 어느 시대보다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8쪽) 지난 2000년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종교를 떠나 다양한 시대와 문화 안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예수님이 직접 남긴 기록이나 당대 그 모습을 담은 그림조차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실제로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리스도교는 무너질 것이다. 「예수님 가이드」는 외형이나 구성 면에서 예수님을 담은 여느 책과 다르다. 교과서나 잡지에 가깝다고 할까. 하지만 책 제목에 충실하게 예수님에 관한 핵심적인 내용을 신학적인 해석은 물론 영적인 성찰과 역사 비평까지 한 권에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다양한 근거 자료와 사진·명화·지도·도표 등을 더해 이해를 돕는다. 예수님 시대의 정치와 주변 환경, 문화와 생활상,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지역과 용어에 대한 풀이도 곁들였다. 한 인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한눈에 다각도로 파악할 수 있는, 원제대로 ‘The One-Stop Guide to Jesus’다. 책은 총 5부로 구성돼 예수님의 탄생과 삶, 그분의 사명과 가르침, 승천 이후 세상으로 나아간 교회와 오늘날까지 이어진 유산에 대해 종합적으로 다룬다. 기원후 1세기 전후의 유다 사회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함께 설명함으로써 예수님을 실제 역사 속 인물로 생생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신약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길잡이인 셈이다. 뉴욕주 사우샘프턴에 위치한 예수 성심 성모 마리아 성당 내부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 성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마태오는 요셉(예수님의 법적 아버지)의 계보를 따르고 루카는 마리아(예수님의 생물학적 어머니)의 계보를 따르며, 이는 요셉과 마리아 둘 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임금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는 유다교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느님의 약속을 이행할 권리를 가지셨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루카 복음서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예수님이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다는 점을 강조한다.”(19쪽) “최고 의회는 예루살렘의 최고 종교·정치·사법 기구로, 수석 사제와 율법 학자, 원로들 중에서 선출된 일흔한 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모세와 일흔 명의 원로를 반영한 것이다. 대사제가 의장을 맡았다. 최고 의회의 규정에 따르면 재판은 낮 시간에만 열어야 하고, 무죄를 입증할 증거부터 심리를 시작하며, 안식일이나 축제일 전날에는 재판을 열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재판에서는 이 모든 규정이 무시되었다.”(100쪽) 런던신학교를 졸업한 저자는 목사 및 강연가로 활동했다. 교황청립 성서연구원 성서학 박사과정에 있는 황대기(예수회) 신부가 우리글로 옮겼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6.03.11

전례란 무엇인가[월간 꿈CUM] 전례 _ 미사 해설 (01) 스페인 바르셀로나 근교 몬세라트 베네딕토 수도원 대성당 미사 어원 전례(典禮, liturgy)란 말은 희랍어의 ‘레이뚜르기아’(λειτυργια)에서 유래하며 그 본래의 뜻은 민중에 대한 봉사를 의미하였다. 또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교회의 구제 사업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였다.(2코린 9,12) 그런데 민중에 대한 봉사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 사업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페 5,30)에서 공동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훗날에는 교회의 공적인 의식이 전례라는 말로 굳어지게 되었다. 전례의 형성과 뜻 그리스도인은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묵시 1,10; 사도 20,7)에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로 모임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하고 있음을 서로 체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체험에는 먼저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다시 생각하고 기념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생애나 사적들을 기록해 놓았으며 그 결과 복음서가 탄생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는 성경을 봉독하게 되었고 빵을 나누고 기도를 하게 되었다.(사도 2,42) 이것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온 교회의 의식(儀式)인 전례라는 것이다. 전례란 교회가 성경이나 성전(聖傳)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공인한 의식으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시는 그리스도(1티모 2,5)의 사제직을 계속 수행하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드리는 공적(公的) 예배(public worship)이다. 따라서 전례는 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활동하실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며, 세상에 구원의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며 인간의 영혼을 초자연적 생명과 거룩함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전례의 목적 전례의 목적은 하느님께 합당한 영광을 드리고 인간 자신을 성화시키는 데에 있다.(전례헌장 7항) 참된 의미의 전례는 하느님과 인간의 쌍방통행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며, 전례 안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하강적인 면과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며 도움을 청하는 상승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따라서 전례는 하느님과 인간이 주고 받는 대화이며, 이러한 대화의 특성이 전례의 기본구조를 이룬다. 전례의 종류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이어 나간다. 전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희생제사인 미사와 우리를 초자연적 생명에 참여케 하는 성사와 교회가 매일 드리는 성무일도로 이루어진다. 미사(Mass) 그리스도는 당신의 인류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교회 안에, 특히 전례 안에 항상 현존하신다. 그리스도는 미사성제, 특히 성체 안에 그리고 더 나아가 사제의 인격 안에도 현존하신다. 곧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제헌하신 바로 그분께서 지금도 사제의 봉사를 통하여 제사를 봉헌하고 계시는 것이다.(「전례 헌장」 7항) 성사(Sacraments) 교회가 주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교회에 맡기신 은총을 주는 거룩한 표지이며 수단인 성사들을 집행할 때, 그리스도는 그 성사 안에 능력으로써 현존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성사 집행자를 통하여 친히 성사를 베푸시는 것이다.(「전례 헌장」 7항) 성무일도(Liturgy of the hours) 그리스도는 당신 말씀 안에서도 현존하신다.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 자신이요.(「전례 헌장」 7항) 교회가 기도할 때에도 그리스도는 그곳에 현존하신다. 이러한 전례는 우리의 신앙을 감각할 수 있는 표징으로 드러내는 교회의 완전한 공식 흠숭이다. 그러므로 모든 전례 의식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위이기 때문에 가장 거룩한 행위이며, 그 효과도 다른 어떤 행위보다 뛰어난 것이다.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주임을 지냈다.cpbc2026.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