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궁금증] 75. 성경에서 환자를 치유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687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75. 성경에서 환자를 치유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질병, 하느님의 심판과 진노ㆍ재앙 등으로 여겨… 예수는 전인적 치유 통해 죄를 용서하고 구원예수님의 환자 치유는 인간에 대한 전인적 차원의 치유다. 그림은 바르톨로메 무리요 작, '마비 환자를 고치는 예수'(1667~1670), 내셔널 갤러리, 런던. 옛날에는 환자가 병에 걸린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다. 특별히 유다인들은 질병을 '하느님의 저주'로 생각했다. 에덴에서의 인간 타락 후 인간과 만물에 내려진 하느님 저주의 결과로 본 것이다. 인간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질병'은 '죽음'과 함께 저주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구약성경에서는 질병을 '하느님의 심판과 진노' '재앙' 등으로 언급하고 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하느님이 사람에 대한 심판과 훈련의 수단으로 질병을 보내기도 하신다고 믿었다(욥 5,17-18). "주님께서는 너희에게서 온갖 병을 없애 주실 것이다. 또 너희가 이집트에서 본 온갖 나쁜 질병을 너희에게는 퍼뜨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는 그 질병들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7,15). 반대로 질병의 치유는 하느님 왕국의 도래를 나타내는 수단 중의 하나로 생각됐다.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이제 내가 너를 치유해 주겠다. 사흘 안에 너는 주님의 집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2열왕 20,5). 그러므로 유다인들은 사람이 질병에 걸리게 되면 반드시 하느님께 간구해야 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질병을 치유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을 잘 듣고,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며, 그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규정을 지키면, 이집트인들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낫게 하는 주님이다"(탈출 15,26).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의 어느 집에 계실 때, 어떤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다. 그 병자는 집에 군중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다가가지 못하자 집의 천장을 벗겨내고 구멍을 내어 들것에 실린 채 내려졌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환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고 먼저 말씀하셨다. 유다인들의 질병관을 잘 나타내는 대목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환자를 치유하고 그를 돌려보내신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외적이고 육체적인 차원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임을 보여 준다. 고통의 뿌리가 된 모든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그 외적인 병고와 장애까지도 낫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치유하시는 것은 아픈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롭고 온유한 마음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예수님의 치유는 인간에 대한 전인적 차원의 치유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온전함과 건강을 회복시켜 하느님의 구원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신다(마르 2,1-12 참조). 우리는 질병을 가진 환자를 치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엄격한 심판자가 아니라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하시는 모습이다.cpbc2013.06.04
![[복음 이야기] (18) 유다인 결혼 풍속](//cpbc.co.kr/CMS/newspaper/2014/06/rc/512639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18) 유다인 결혼 풍속하느님 뜻과 일치하는 일부일처제 따라 유다인의 오랜 종교적 전통은 하느님의 뜻과 자연법에 일치하는 남녀의 이상적 결합을 ‘일부일처제’로 여겨왔다. 사진은 베들레헴 가타리나 성당에서 거행되고 있는 혼인성사 장면. 유다인의 오랜 종교적 전통은 하느님의 뜻과 자연법에 일치하는 남녀의 이상적 결합을 ‘일부일처제’로 여겨왔다. 창세기에 나오는 여인의 창조이야기(창세 2,21-24)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된다”(창세 2,24)는 말씀에서 일부일처 혼인제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명확히 읽을 수 있다.가정생활의 교훈서인 토빗기는 일부일처 혼인 이야기만을 하고 있다. 또 예언자 호세아와 예레미야, 이사야, 에제키엘은 일부일처의 이상을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 계약의 표상’(예레 2,2; 에제 16,8; 호세 2,9; 말라 2,14)으로 묘사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두가이들은 자기들이 일부일처제도를 지키는 것을 크게 자랑했고, 대사제는 반드시 아내를 한 사람만 둬야 했다. 예수님께서도 부부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전 생애를 통해 완전히 결합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혼인에 대한 여러 가르침과 비유를 통해 볼 때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일부일처를 지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교회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 맺은 사랑을 ‘성사’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유다인 공동체에서 일부다처 관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카인의 자손 라멕은 두 아내를 둔 자로 처음으로 소개된다. (창세 4,19) 솔로몬(1열왕 11,1)과 기드온(판관 8,30-31), 사무엘의 아버지 엘카나(1사무 1,2)도 여러 아내를 뒀다.또 아내가 임신하지 못할 때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창세 1,28)는 성경 말씀을 따라 부득이 첩을 두는 일도 있었다. 그 대표 인물이 아브라함이다. 첩을 뜻하는 히브리말 ‘필레게쉬’가 유다인들이 쓰지 않는 외래어임을 고려, 노예제도가 축첩 관습을 조장했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성경 시대 결혼 풍속은 ‘조혼’이 일반적이었다. 랍비들은 “자식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는 동안 아들을 결혼시키라”고 가르쳐 18살을 남자의 결혼 적령으로 여겼다. 여자들은 이보다 훨씬 빨라 율법은 ‘12살 중반’이 출가 적령이라고 한다. 이 관습을 따라 동정녀 성모 마리아께서도 성령의 인도로 결혼 적령인 12살 무렵 약혼해 10대 중반에 예수님을 낳으셨다. (외경 「야고보 원복음」 참고)유다인 가정은 족장과 판관 시대 때부터 이어진 풍속을 따라 아버지가 자녀의 결혼 여부는 물론 아들의 신붓감도 결정했다. 하지만 성경 시대에도 배우자를 스스로 정하는 경우도 있었나 보다. 그래서 탈무드는 “아내를 고르기 전에 심사숙고하라. 미모를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것은 지나가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생각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남자의 아버지나 신랑이 직접 신부를 선택하면 결혼 준비를 위해 ‘약혼’을 한다. 약혼 기간은 대략 1년간이었다. 구약의 율법은 이 약혼 기간을 결혼한 배우자가 갖는 권리와 의무를 거의 동등하게 인정했다. 그래서 약혼 기간에 낳은 아이를 적자로 인정했고, 약혼한 남자가 죽으면 과부로 취급됐다. 정혼한 여자가 부정을 의심받으면 ‘쓴 물의 시험’(민수 5,11-31)을 받았다. 그리고 간음한 사실이 드러나면 돌로 쳐죽임을 당했다.성경 시대 유다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민족 여인과 결혼해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동족과 결혼하는 것을 관습처럼 여겼다. (탈출 34,16)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의 신부로 동족 가운데서 레베카를 찾았고,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 즉 외사촌과 결혼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인 여종 하가르에게서 첫아들 이스마엘을 낳았고(창세 16,15), 모세는 미디안인 이트로의 딸 치포라(탈출 2,21)와 에티오피아 여인(민수 12,1)을 아내로 맞았다. 다윗의 증조모 룻은 모압인(룻 1,4)이고, 다윗이 간음해 얻은 아내 밧 세바도 히타이트 출신 이방인(2사무 11,3)이었다.사실 구약 율법이 절대적으로 금한 혼인은 이방인과의 결혼이 아니라 ‘근친혼’이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살붙이를 가까이하여 그의 치부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레위 18, 6-18) 이 금령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레위 20,11) 혈족과 근친혼에 관한 이 세밀한 금령은 예수님 시대에도 효력이 있었다. 성경 시대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자기 맘대로 결혼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원치 않는 결혼도 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나 상속자가 죽은 이의 아내와 혼인하여 그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했다.(신명 25,5-10; 마태 22,24) 이를 히브리말로 ‘레비라’라 하는데 이 율법의 의무는 매우 엄격했다. 만약 이 레비라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죽은 이의 아내는 원로들 앞에서 결혼할 남자의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자기 형제의 집안을 세우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신명 25,9)고 저주를 퍼부었다. 예수님께서는 레비라 결혼 풍속을 들어 부활 논쟁 시비를 건 사두가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꾸짖으셨다.(마태 22, 23-33)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6.03
![[성경 속 궁금증] 67. 성경에 나오는 만나는어떤 음식인가?](//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604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67. 성경에 나오는 만나는어떤 음식인가?빵이 아니라 이슬처럼 내리는 희고 단 형성물…하느님 사랑 상기시킨 증거물로 성체의 예표만나를 모으는 이스라엘 백성(로베르티 작, 1479년).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생활을 할 때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정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가나안 땅 경계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은 만나를 먹었던 것이다"(탈출 16,35).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과연 어떤 음식이었을까? 탈출기에 나오는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음식이었다(탈출 16장). 이슬과 함께 내렸다는 하얀 만나는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내렸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긁어모아 양식으로 사용했다. 성경에 따르면 만나는 빵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집안은 그것의 이름을 만나라 하였다. 그것은 고수풀 씨앗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다"(탈출 16,31). 태양이 떠오르기 전인 이른 아침에 광야의 모래 위에서 '흰 서리 같은 것'(탈출 16,14)이 발견됐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탈출 16,14-15). 만나는 사막에서 자라는 나무나 관목의 잎사귀에 맺히는 이슬 모양의 형성물이다. 만나는 밤에 기온이 내려가면 비교적 단단하게 굳어지는데 맛이 단 편이다. 만나는 식량이 부족한 사막에서는 오늘날에도 식량으로 사용된다. 오늘날도 시나이 광야를 유랑하는 베두인족은 양식으로 만(man)이라는 것을 모은다. 광야를 뒤덮는 만은 결정화된 낟알로 돼 있는데, 햇볕에 녹는다. 그 낟알들을 두드리거나 찧으면 구울 수 있게 되는데, 꿀처럼 단맛이 나고 성경의 만나와 비슷하다. 만나는 영성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나는 먹을 양식으로서 생명과 연관돼 있으며,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상기시켜주는 눈에 보이는 증거물이었다. 만나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자연적인 만나를 기적적으로 제공하셨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하느님은 자연적인 일을 기적적인 방식으로 선사하셨다. 예수님께서 기적적인 방식으로 자연적인 빵을 많게 하시고 나눠주셨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 백성에게 시나이의 만나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주셨다. 사도 바오로는 이 만나가 성체의 예표라고 했다(1코린 10장).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실 때 비유적으로 만나를 들어 말씀하셨다(요한 6장). 예수님은 구약의 만나와는 다르게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만나로서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빵이라고 선언하신다."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8).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거행되는 성찬례 안에도 이와 같은 만나의 의미가 담겨 있다. cpbc2013.04.02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미카 5,1)](//cpbc.co.kr/CMS/newspaper/2015/06/rc/579133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29)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미카 5,1)전쟁의 폐허속에서 평화의 메시아를 예언 레오나에르트 브라머(Leonaert Bramer) 작, ‘동방박사들의 여행’. 미카서는 성경에서도 어디 있나 한참 찾으실 것이고, 역사 안에서 미카 예언자의 위치를 찾는 것은 아마 더 어려우실 것입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미카는 언제나 이사야에 붙여서 함께 기억하시면 됩니다. 미카서 첫머리의 “유다 임금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1,1)라는 연대 표시부터 미카를 이사야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기원전 8세기의 문제는 언제나 아시리아라고 했습니다. 미카 역시 아시리아의 침략을 겪습니다. 이사야와 차이가 있다면, 이사야가 예루살렘 귀족 출신이었던 데에 비하여 미카는 “모레셋 사람”, 곧 필리스티아 쪽에 가까운 지방 출신으로서 전쟁의 피해를 겪었던 가난한 이들과 더 가까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는 가난한 백성을 억누르는 부유한 이들에 대해서 비판합니다.미카서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 좀 어려운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미카서의 본문 가운데 어느 부분이 미카 예언자 자신이 쓴 것이고 어느 부분이 후대에 덧붙여진 것인지를 나누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미카가 썼다고 보이는 부분은 1─3장이고, 다른 부분들은 모두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미카가 유배 전 예언자이니,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고발하며 멸망을 선포하는 부분은 더 자연스럽게 미카 자신이 쓴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구원을 약속하는 부분은 후대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으려 하는 미카서 5장 1-5절은 이사야서에서도 나타나는 군왕 메시아 사상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기원전 8세기의 미카 자신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군왕 메시아 사상군왕 메시아 사상의 기원은 훌륭한 임금에 대한 기다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메시아’는 본래 ‘기름부음을 받은 이’를 뜻하고, 기름부음을 받는 이는 일차적으로 임금이었습니다. 구약을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읽는 데에 익숙해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뜻밖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사야서 9장 5절에서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라고 할 때나 이사야서 11장 1절에서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라고 할 때, 처음에 이사야가 생각한 것은 장차 태어날 임금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인용한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 ‘본래’ 이러한 예언들은 다윗 왕조의 임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하지만 성서 본문의 의미가 ‘처음에’, ‘본래’ 저자가 생각했던 의미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훌륭한 임금에 대한 기다림은 군왕 메시아 사상으로 이어지고, 다윗의 후손인 한 임금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주시리라는 희망은 나중에는, 특히 다윗 왕조가 무너진 후에는 장차 올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으로, 종말에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합니다.이사야서에서는 임마누엘 예언이 그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아하즈에게 아들 히즈키야의 탄생을 알렸던 이 예언은 특히 마태오 복음 1장 23절에 인용되면서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져도 하느님의 약속은 무너질 수 없다는 믿음이,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성취를 보았던 것입니다.마태오 복음사가도 구절 인용미카 예언서에도 그러한 예가 있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미카 5,1). 많이 들어보신 구절이지요. 신약의 사건들 안에서 구약 예언의 성취를 알아보는 전문가였던 마태오 복음 사가가 이 구절을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오 베들레헴 작은 고을아 너 잠들었느냐”라는 성가 때문에도 누구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유다인의 임금이 태어나신 곳을 찾아 나섰을 때,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는 당연히 임금은 궁정에서 태어났으리라 생각했는지 헤로데를 찾아갑니다. 새로 태어나신 유다인의 임금을 찾아왔다는 말에 당황한 헤로데는 급히 율법학자들에게 아기가 태어난 곳을 묻고, 그들은 미카 예언서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는 작은 고을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다시 기원전 8세기로 돌아갑시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아시리아는 엄청난 나라였습니다. 무엇보다 군사력으로 엄청난 나라였습니다. 여러 작은 나라들을 무력으로 짓밟은 나라였습니다. 이제는 남왕국 유다에도 아시리아의 힘이 미치고 있습니다. 산헤립의 침공 때에 예루살렘은 멸망을 면했다고 했지요. 그러나 ‘예루살렘만’ 멸망을 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히즈키야 임금 제십사년에,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유다의 모든 요새 성읍으로 올라와서 그곳들을 점령하였다”(이사 36,1).온통 짓밟힌 유다 땅에서 미카는 장차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평화로운 날들을 예고합니다. 작은 고을,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미카 5,1)가 태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는 목자처럼 백성을 이끌 평화의 임금이 될 것이고, 백성은 안전하게 살 것입니다.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 5,3).마태오 복음은 이 약속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마태 1,1 참조)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동방 박사들이 미카 예언서의 인도에 따라 찾아가서 경배한 그분은 평화의 임금, 아시리아의 지배자들이나 이 세상의 통치자들과는 달리 우리의 평화가 되신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5.06.30
![[스페인 가톨릭 문화와 역사 탐방] (4-끝)로욜라·몬세라트·만레사](//cpbc.co.kr/CMS/newspaper/2015/07/rc/583081_1.0_titleImage_1.jpg)
[스페인 가톨릭 문화와 역사 탐방] (4-끝)로욜라·몬세라트·만레사예수회의 고향에서 성 이냐시오 따라 회심의 기도를 몬세라트의 검은 성모상. 이냐시오 성인은 이 성모 앞에 칼을 봉헌하고 성모의 기사가 될 것을 약속한다. 예수회를 설립한 스페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년, 그림)는 그보다 3세기 앞서 탁발수도회를 세운 성 프란치스코(1181~1226년)와 참으로 많이 닮았다. 신분은 달랐으나 어릴 적부터 유복하게 자라 호기로운 생활을 했다. 둘은 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어 감옥생활을 하다 풀려나 요양을 하면서 성경과 성인전을 읽고 회심을 했다. 또 둘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삶의 방식으로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고 기도와 관상을 통해 탁월한 신비가가 됐다. 아울러 둘은 세상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수도회를 설립했고, 깊은 성체 신심과 교회 가르침에 대한 충실한 순명으로 교회 쇄신을 이끌었다. 교회가 내부적으로 이교와 프로테스탄트 분열로 혼란스러울 때 프란치스코와 이냐시오 성인 같은 인물이 나타나 쇄신과 개혁을 이뤄낸 것은 분명 하느님의 섭리, 성령의 이끄심이다. 물질만능주의와 반생명의 문화가 맘몬으로 자리한 오늘날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이 쇄신과 개혁의 십자가를 진 것은 분명 예사롭지 않다. 로욜라‘하느님의 보다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예수님의 벗들로 불림을 받은 예수회원들의 행동양식이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가 있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 로욜라의 대성당 벽과 성인상 곳곳에 이 모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예수님의 벗들은 이곳에서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도모한다. 이 영적 성장을 바탕으로 그들은 가난과 순명, 정결의 전통적 수도생활 양식과 함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과 결속해 신앙의 증거자로 파견되고 있다. 로욜라 성지 접견 책임자 아이노아 빌라씨는 “연간 10만여 명이 이곳을 찾아오고, 지난해만 4000여 명의 한국인 순례자가 다녀갔다”며 “순례자가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후 25%나 늘었다”고 말했다. 또 “한 번에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곳 영성센터는 연중 예약이 꽉 차 있다”며 “이곳에서 양성된 예수님의 벗들은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세상을 위해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돌벽으로 지어진 요새였던 생가는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를 누구나 꿸 수 있도록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특히 성인이 회심했던 방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는 이냐시오 성상이 있는데 그 강렬한 눈빛이 순례자들의 회개를 이끌고 있다. 몬세라트회심한 이냐시오는 31살 때인 1522년 집을 떠나 순례 길에 오른다. 그는 스페인 동북부 카탈루냐 지방 성 베네딕도회 산타 마리아 데 몬세라트 수도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또 한 번 회심의 밤을 겪는다. 총고해를 한 그는 입고 있던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벗어주고 거친 감자포대로 만든 넝마자루를 걸쳤다. 그리고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는 장검과 단검을 ‘몬세라트의 검은 성모’ 제단에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이 될 것임을 서약했다. 아울러 이냐시오는 몬세라트의 검은 성모상 앞에서 성모 마리아의 청빈과 겸손, 단순함을 닮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냐시오 영성의 두 기둥인 ‘가난’과 ‘겸손’은 만레사 동굴에서 완성되지만 아마도 그 시작은 죽음의 순례길을 체험하고 총고해를 한 몬세라트 수도원에서의 단련 시기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포로’라 스스로 고백했던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와 사막의 은수자 성 바실리오, 엄격한 수도규율 아래 수도공동체를 이끈 성 베네딕토를 존경했던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의 영성에 기초한 예수님의 벗들을 위한 수도 소명을 아마도 이곳에서 받았을 것이다. 해발 723m 뾰족한 톱날 산에 자리한 성 베네딕도회 산타 마리아 데 몬세라트 수도원은 이냐시오 성인 때와 변함없이 많은 순례자가 찾아와 검은 성모상 앞에서 회심의 전구를 청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검은 성모상은 성 루카가 조각한 것으로 베드로 사도가 스페인에 가져왔다고 한다. 검은 성모상은 무어인 지배 때 동굴 속에 감춰져 있다가 880년경에 우연히 발견됐다. 이후 12세기 들어 이 수도원에서 성모 발현과 기적이 있다는 소식이 퍼져 모여들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는 순례자들이 이냐시오 성인처럼 검은 성모상 앞에서 ‘성모의 기사’가 되길 간구하고 있다. 만레사 동굴몬세라트 산에서 내려온 이냐시오 성인은 수도원에서 15㎞ 떨어진 만레사 마을 인근 동굴 안에서 1년간 영신수련을 했다. 이 시기 그는 관상과 내적 쇄신을 통해 은총의 지배를 받는 속량된 몸으로 그리스도의 새로운 인간(로마 6장 참조)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영신수련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회심의 순간을 단 한시라도 잊지 않기 위해 몬세라트 산봉우리가 바라다보이는 동굴에서 그는 연일 단식과 고행을 하며, 때때로 나무를 깎은 탁발 그릇을 들고 문전걸식으로 생명의 끈을 유지한 채 추위를 견디며 어둡고 습한 동굴 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에 전념했다. 한때는 어두운 밤에 갇힌 자신의 영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살을 생각할 만큼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영신수련에는 기도방법뿐 아니라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지력과 의지의 수련법도 어우러져 있다. 이 만레사 동굴 위에는 바로크풍의 예수회 성당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도 영성센터가 있어 수많은 이들이 영신수련을 하기 위해 찾고 있다. 이냐시오 성인이 1년간 은수했던 동굴 경당 입구에는 그가 사용했던 500년 가까이 된 나무 탁발 그릇이 전시돼 있다. 경당 안에는 청동으로 만든 작은 원형 제대와 성체조배를 위한 감실이 있다. 제단 벽에는 몬세라트 산을 바라보면서 「영신수련」의 초안이 되는 수기를 적고 있는 이냐시오 부조상이 꾸며져 있다. ‘하느님의 보다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성모 마리아의 가난과 겸손, 단순함을 배우기 위해 회심의 칼을 품은 제2의 이냐시오들이 오늘도 이곳에서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글·사진=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5.07.21
![[생활 속의 복음] 머무름을 통해 좋은 열매를](//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8519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머무름을 통해 좋은 열매를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요한 15,1-8)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 그리고 열매의 관계를 설명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라 그런지 엄숙하고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명령어법을 통해 강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둘 중 하나의 삶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물질을 섬기며 두 길(1열왕 16,29-34; 예레 7,21-31)을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성경 저자들과 예언자들의 강렬한 질타가 생각납니다.예수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라며 “머무르라(요한 15,4)”는 중요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긴밀하고 철저하게 머무르듯이, 아기가 엄마 품 안에 머무르듯이,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온 정성을 다하여 배우고 실천하듯이, 사랑하는 연인을 매일 생각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철저하게 봉사하듯이 더욱 강하고 긴밀한 관계를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5월을 맞이하는 농부가 농사, 생명을 가꾸는 일에 머무는 것처럼 주님 가르침과 사랑에 머물고 있는지요? 교통사고로 실려 온 응급환자를 살리기 위해 화장실도 가지 않고 10시간 이상 집중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의사처럼 하느님 자비와 사랑을 간절히 바라며 머물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농부나 생명을 살리는 의사처럼 철저히 당신과 일치된 관계에 머문다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요한 15,8)”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머무르지 않으면 “그 가지는 잘린 가지처럼 될 것이며 던져져 말라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봅니다. 먼저 ‘열매’라는 단어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사회적인 성공, 인기, 돈을 많이 버는 것, 교회의 높은 직책에 임명되는 것일까요? 교우분들이 잘 아시듯이 ‘하느님의 열매’는 바로 하느님의 본질, 즉 하느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많은 사람, 자비로운 사람, 잘 용서하는 사람, 정직과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 용기와 위로를 주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가르침 안에 머무른다면 분명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그에 반해 세상의 가치와 이기적인 사랑을 기반으로 한 삶은 이스라엘 백성이 구약에서 표현한 것처럼 ‘들포도’(이사 5,2-6)와 같은 아무 쓸모 없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들포도는 요한 묵시록(21,8)에서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거짓말쟁이들”이라고 표현됩니다. 즉 욕심, 시기, 질투, 거짓과 같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행동을 의미합니다.시골 마을은 시간에 철저히 순응해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토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철저하게 머물러야 합니다. 땅에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인간의 정성과 자연이 어우러져야 올바른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시골 본당의 주일 미사는 날씨에 따라 자리의 여백 차이가 큽니다.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 아침까지 비가 오면 많은 교우 분들이 미사에 참례해 초롱초롱한 눈동자, 여유로운 태도로 미사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햇빛이 강렬하고 일하기 좋은 날씨일 때는 많은 빈자리가 보입니다. 여기저기서 ‘베드로 기도’(졸음)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교우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존경이 저절로 나옵니다. 세상에서는 나무에서 잘려나간 이들과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소중한 인간의 존엄성을 잊고 타인을 무시하고 억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이들, 염치없는 많은 지도자들….스스로 지금까지 사제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열매를 얼마나 맺고 있는지, 매일같이 만나는 사람을 진실하고 소중하게 대하고 있는지, 여러 이유로 무시당하고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또한, 자신들을 모욕하며 박해하던 바오로를 형제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맞이한 멋진 사도들의 열매를 보면서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성령의 위대함을 체험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cpbc2015.04.29
 종](//cpbc.co.kr/CMS/newspaper/2014/07/rc/518371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22) 종종과 주인, 차별 없었던 초대교회 유다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안식년과 희년 때 종을 해방시켜줬다. 사진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난민캠프에 있는 한 모녀의 모습으로 제 땅을 잃은 이들의 처지가 종살이나 다름없다. 【CNS】 예수님 시대 유다인 사회에는 노예제도, 즉 ‘종’이 있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도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마태 24,45-51)과 ‘가라지’(마태 13,36-42), 그 밖의 복음서 여러 곳(마태 10, 24; 20,27; 24,25; 루카 12,35; 17,7; 요한 8,35 등)에 종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유다인의 종은 로마나 그리스의 노예들과 처지가 사뭇 달랐다. “노예도 인간인가?”라는 말처럼 로마제국 시대 종은 법률적으로 물건과 같이 다루어졌다. 하지만 종에 대한 유다인의 태도는 훨씬 인간적이다(집회 33,25-31). 욥기에는 종에 대한 인권 존중 사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온다. “남종과 여종이 내게 불평할 때 내가 만일 그들의 권리를 무시하였다면 하느님께서 일어나실 때 내가 무엇을 하고 그분께서 신문하실 때 내가 무어라 대답하리오. 어머니 배에서 나를 만드신 분이 그도 만드시고 바로 그분께서 우리를 모태에서 지어내지 않으셨던가”(욥 31,13-15).이처럼 유다인들이 로마나 그리스인들과 달리 자신의 종들에게 관대했던 이유는 성경의 가르침에 기인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선조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노예들에게 관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또 율법은 노예를 죽인 주인을 벌하고, 구타를 당해서 상처를 입거나 실명하거나 그 밖의 가혹한 학대를 받은 노예는 석방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그러나 율법은 히브리인 종과 외국인 종을 차별했다(레위 25,44-55). 시장에서 사들인 외국인 종은 히브리인 종만큼 보호받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외국인 종이라고 해서 함부로 죽이거나 상처를 입히거나 학대해서는 안 되고, 안식일 휴식도 보장해줘야 했다(탈출 20,10; 23,12). 또 종이 도망하더라도 로마인처럼 원주인에게 강제로 넘겨서는 안 되고 이방인 출신이라 해서 지역에서 내치거나 구박해서도 안 되었다(신명 23,16-17). 하지만 외국인 종이라 하더라도 유다인 사회에 속해 있는 이상 성경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외국인 종들도 할례를 받아야 했다(창세 17,12). 그러나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 만약 외국인 종이 열두 달 이상 할례받기를 거부하면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는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나가야 한다”(창세 17,14)는 말씀에 따라 그를 외국인에게 팔아넘겨야 했다. 반면, 할례를 받은 외국인 종은 가족의 일원으로 간주해 사제에게서 ‘거룩한 예물’을 먹을 수 있었다(레위 22, 10-13). 그러나 외국인 종인 히브리인 종과 똑같은 종교적 의무나 공민권은 없었다.구약성경의 율법은 죄 없는 유다인을 종으로 만드는 것을 금했기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의 히브리인 노예 매매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나 훔친 물건을 변상할 수 없는 도둑은 제 몸을 팔아 종이 돼야 한다(탈출 22,3-6 참조)는 무서운 율법이 있었다. 또 굶어 죽기보다는 종이 되기를 원하는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경우 주인은 그의 오른쪽 귓바퀴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종의 표시를 남겼다(탈출 21,6).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이 이처럼 종으로 팔릴 때의 조건과 또 그의 주인이 보살펴야 할 조건을 대단히 세밀히 규정하고 있어 ‘히브리인의 노예를 사는 것은 그를 주인으로 맞는 것’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유다인의 가장 숭고한 전통인 ‘안식년’ 법은 정기적으로 7년마다 사회적 평형을 회복해 일체의 부채를 탕감하고, 사람은 물론 가축이나 토지까지도 휴식을 주도록 규정했다. 이 안식년 법에 따라 유다인 사회에서 히브리인 종에게는 여섯 해 동안 종살이를 하고, 일곱째 해에는 대가 없이 자유로운 몸으로 해방을 시켜줬다(탈출 21,2). 반면, 외국인 종은 원칙적으로 50년이 되는 해인 ‘희년’이 되어서야 해방됐다(레위 25,40). 이처럼 히브리인 종은 조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에 외국인 노예보다 값이 20분의 1이나 쌌다. 여자 종의 지위는 히브리인이건 외국인이건 남자의 경우와 달랐다. 원칙적으로 종과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해방되거나 전매될 때에 운명을 같이했다. 그러나 결혼하기 전에 어떤 주인에게 소속돼 있었으면 그 주인이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붙들어 둘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자 종 대부분은 그 주인이나 주인 아들의 첩이었다. 이런 경우 여자가 안식년의 해방을 요구하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지위를 잘 알고 계셨고(마태 10,24; 20,27; 24, 45-47; 루카 12,37; 17,7; 요한 8,35), 또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셨다. 예수님께서 더 마음에 쓰신 것은 모든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멍에를 멘 정신적 노예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주인과 종 간 일체의 차별을 폭넓은 사랑으로 없앨 것을 강조하셨다. 바오로 사도도 자주 주인에게 관용을, 종살이하는 이들에게는 복종을 권고했다(에페 6,5; 콜로 3,22; 티토 2,9). 초대 교회에는 주인도, 종도 없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7.09
[독자마당] ‘가난’이란이진희 사비에르(의정부교구 적성본당) 가난이란 돈이 없는 걸 두고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돈이 없는 굶주림의 고통, 그 비참함을 어찌 필설로 다할까. 그래서인지 성경 중에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는 말씀은 도무지 와 닿지를 않았다. 그 의문을 한 방에 날려버린 건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빈 곳을 하느님으로 채운 상태가 내적 가난”이라는 홍성남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였다. 그 상태는 하느님께서 이끄는 삶이고,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한 상태라는 내용을 들으며 깨달음을 얻었다. 얼마 전 노령 연금을 받게 되면서 시골로 와서 살고 있다. 농촌이니 당연히 공기가 도시와 다르다. 햇볕과 바람, 물도 좋다. 무엇보다 좋은 건 사람이다. 농촌 어르신들의 평균 연령은 대체로 일흔에서 여든 살이신데, 콩 한 쪽도 나누고 김장도 함께하고 갖은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는 걸 보며 나도 많이 행복해졌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 뜨면 일터로 가고, 해 지면 집으로 돌아와 주무시는 일상이 무척 아름다워 보인다. 벼농사를 주로 하지만 고추와 콩, 깨 농사를 지어 가장 좋은 건 도시에 사는 아들딸에게, 멀쩡한 건 시장에 내다 팔고, 가장 안 좋은 수확물이나 상처 난 건 정성껏 챙겨 드신다. 그렇게 아끼고 나누며 열심히 일하니 다들 부유하시다. 1억 원이 넘는 트랙터가 없는 집이 없다. 그런데 내적 부자는 찾기가 쉽지 않다. 육체적으로도 다들 병을 달고 사신다. 아프지 않은 분을 찾기는 비 오는 날 볕보다 어렵다. 영적 빈곤 상태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큰 병이 찾아오면 자살로 쉽게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분들에게 하느님을 알릴 수 있을까? 공소에서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고 돌아서면서 이분들에게 영적 가난의 삶, 그렇지만 내적으로 충만한 삶, 곧 신앙생활을 알릴 현명한 접근 방법을 고민해본다. cpbc2014.12.10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 공부]<9> 고백(마르 8,27-33)](//cpbc.co.kr/CMS/newspaper/2013/08/rc/470827_1.2_titleImage_1.jpg)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 공부] 고백(마르 8,27-33)나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의 구원 사명은 기적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선택한 예수 자신의 죽음으로 완성된다. 조르주 루오 작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1939년). 진실한 마음의 고백은 받아들임과 용서, 사랑을 불러온다. 신앙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힘을 얻는다. 예수님은 카이사리아의 필리피라는 곳으로 가셨다. 이곳은 헤로데 임금이 일찍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신 '판'이라는 신에게 신당을 지어 준 곳이다. 옛날 사람들은 판을 모든 자연의 신으로 믿었다. 이곳은 헤로데 임금의 아들 헤로데 필리포스가 기원전 2년께 헤르몬 산 밑에 샘이 솟아 오르는 곳에 세운 도시 중 하나로 잡신이 많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나를 누구냐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돌아올 찬란한 영광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다. 예수님도 자신이 행하신 기적과 가르침으로 인해 자신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을 통해 메시아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 사명은 당신이 행하신 기적으로써가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해 기꺼이 선택하신 당신의 죽음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속에 신앙이 온전히 자리 잡게 되는 것은 제자들이 체험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까지, 또 예루살렘에서 수난의 길을 걸으셨을 때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다. 유다는 예수님을 돈 주고 팔아넘겼다. 다른 제자들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모두 도망갔다.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은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악인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선고할 메시아를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은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참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고자 하신 구원은 힘과 권력으로 억압하는 악인들을 똑같은 힘과 권력으로 제압하는 게 아니다. 더 큰 사랑으로 감싸 안음으로써 회개와 용서로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앞에서 참 자유와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제자를 직접 뽑으셨다. 예수님은 율법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세우지 않고, 하늘나라를 토대로 제자들의 공동체를 세우셨다. 율법의 참된 의미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느님 현존 안에서 하느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과 삶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실지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다. 스스로 죽음이라는 사건을 앞두고,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당신의 부활을 기다리게 하는 힘을 불어넣어 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하고 질문하신다. 제자들이 대답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르 8,28)라고 답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동시대에 등장한 인물이다. 요한은 유다 지역에서 강력한 세례 운동을 펼친 분 중 한 분이다. 다가올 심판, 종말을 위해 회개하라는 징표로 세례를 베풀었다.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활은 세례자 요한에게 받으신 세례로 시작됐다.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한다. 루카 복음에서는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을 통해 자신이 어떤 그리스도인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해주고 계신다. 베드로가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 반박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고 죽으셔야 한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이 가셔야 할 길은 그 길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답답하게 생각했다. 제자들 생각은 그리스도는 반대자들에게 배척받고 죽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왕국을 세우는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하고 호통을 치셨다. 예수님이 모범으로 보이신 진정한 승리와 영광은 남을 지배하는 힘과 능력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는 진실과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않고,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살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신다. 그 힘을 바탕으로 우리는 죄를 끊어버릴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 사이에 분열보다는 일치를 이루는 힘을 주신다.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고, 하느님을 바라볼 힘을 주신다. 나는 예수님께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방송시간 : 화 오전 8시, 수 새벽 1시ㆍ오후 1시 40분, 금 오후 8시, 토 오후 10시 ※교재 문의 : grace@pauline. or.kr, 02-944-0945 cpbc2013.08.27
![[생활 속의 복음] 깨어있는 삶](//cpbc.co.kr/CMS/newspaper/2014/11/rc/541755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깨어있는 삶대림 제1주일(마르 13,33-37)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인사드립니다. 저는 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박재식 토마스 신부입니다. 시골에서 어르신들의 아들이자 형제로서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습니다. 1년간 잘 부탁드립니다. 글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나 의문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의견을 주시기 바랍니다. 혹 비뚤어지거나 편향된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겠지만 제 나름대로 고민과 정반(正反)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한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에 하느님 뜻과 말씀이 더욱 자라고 열매를 맺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세상과의 대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교우 여러분을 믿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 말씀이 우리 안에 열매를 맺기 위한 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월요일이면 농협을 찾아갑니다. 주일미사 봉헌금을 보관하기 위해서입니다. 창구 직원은 저를 정말 반갑게 맞이합니다. 제가 잘 생기거나 말을 잘해서도 아닙니다. 은행에 부족한 1000원권 지폐를 많이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은행을 가던 어느 날 문득 지폐에 새겨져 있는 인물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삶’을 묵상해 봤습니다.이황, 이이, 세종대왕, 신사임당. 모두 조선시대 인물이고 성(姓)씨가 ‘이’이거나 이씨의 부인입니다. 화폐에 새겨진 인물은 그 나라 국민 대부분에게 존경을 받고 국가의 영광을 위해 철저한 봉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씨조선을 그리워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요? 대한민국이 건국(1919년 임시정부 수립)된 지 100년이 다 돼가는데 아직 대한민국을 대표할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닌지요. 과연 누가 우리에게 모범적 인물이 될 수 있을까요? 누가 존경하는 인물이 될 수 있을까요? 긍정적인 삶, 확고하게 인간다운 삶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거나 삶의 모범을 보여준 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퇴계 이황(1501~1570)ㆍ남명 조식(1501~1572) 선생님의 삶을 조명해 보려 합니다.잘 아시다시피 두 분은 대학자이고 조선의 사상사에 큰 획을 그은 동시대 인물입니다. 두 분의 전성기는 명종(1534~1567) 시대입니다. 문정왕후의 8년간 수렴청정과 윤원형 등 외척 세력의 부정부패ㆍ전횡으로 백성들은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황 선생님은 관직 생활과 낙향을 반복하다가 안동에서 후진을 양성합니다. 그에 반해 조식 선생님께서는 철저하게 관직을 마다하고 목숨을 건 상소문으로 문정왕후와 명종에게 퇴진과 참다운 지도자의 길을 걸을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의병장 곽재우, 정인홍 등 훌륭한 후진을 양성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깨어 있는 삶을 권고합니다. 성경에서 ‘깨어 있음’은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유혹이나 세상의 가치로부터 흔들리지 않고 진리이신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의미합니다. 깨어 있는 삶은 기도와 믿음으로 우리 안에서 구체적으로 시작됩니다. 도시 본당 교우분들이 성경을 필사하고 하루에 묵주기도를 15단 이상 바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 신자분들이 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이야기들 들으면 정말 기분이 좋고 존경스럽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교우분들께 한 가지를 더 부탁드립니다. 하루하루 힘들게 생존경쟁을 하며 살아가고 있겠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의 위로로 떳떳하게 세상의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명료하고 확고하게 ‘믿음, 정의, 사랑’을 실천하길 바랍니다. 믿음과 정의, 사랑의 실천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한 마디로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녁 때에 다윗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왕국의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옥상에서 내려다보게 되었다(2사무 11,2)”라는 말씀을 통해 언제 깨어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윗왕은 무엇을 하였기에 남들은 잘 준비를 하는 저녁 시간에 일어났을까요. 밤낮이 바뀐 삶, 이는 다윗 임금이 죄에 빠져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오늘 대한민국의 존경할 대상을 그리워하면서 생각해봤습니다. 우리 교회와 대한민국에 깨어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시대의 요청에 동참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확고하고 명료하게 봉헌한 대한민국의 인물과 교회의 어른을 찾아보면서 새해를 시작합니다. cpbc2014.11.26
![[복음 이야기] (19) 이스라엘 여성](//cpbc.co.kr/CMS/newspaper/2014/06/rc/513640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19) 이스라엘 여성현모양처에서 품위있는 ‘인격’으로 여성을 품위있는 인간의 지위로 끌어올린 것은 신약성경이다. 사진은 팔레스타인 가톨릭 신자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모습.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남편은 아내를 재물과 같이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다. 율법에 따르면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탈출 20,17 신명 5,21)고 한다. 하지만 아내는 귀한 존재였기에 어떠한 자도 남의 아내를 건드릴 권리는 없었다. 유부녀인 줄 모르고 아브라함의 아내를 데려왔다가 여러 재앙을 입은 이집트 파라오의 이야기(창세 12,10-20)는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사회적 지위 불리 구약시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내는 남편에게 절대적으로 충실해야 했지만, 그 반대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아내를 팔 수는 없었지만 큰 어려움 없이 아내와 헤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극히 특별한 경우 외에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없었다. 모든 점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불리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아버지나 남편에게서 재산을 상속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인 여성에게 아무런 권리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자는 약한 존재이기에 율법의 보호를 받았다. 남자의 유혹을 받거나 강간당한 처녀, 누명을 쓰고 명예가 손상된 부인, 정복자에게 희롱당한 여자 노예를 성경은 보호하고 있다.(신명 21-22장 참조) 한 랍비는 모든 남자가 비록 이교도나 천민으로 태어날지언정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매일 하느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사야 예언자는 “시온의 딸들이 교만을 부리고 목만 빼고 걸어 다니면서 호리는 눈짓을 하고 살랑살랑 걸으며 발찌를 잘랑거린다”(이사 3,16)고 비하했고, 예레미야와 에제키엘 예언자는 ‘두 마음을 가진 자’가 여자라고 했다(예레 3 ; 에제 16,1). 탈무드의 랍비들은 대식가이고 게으름뱅이며 질투 잘하고 다투기 좋아하는 것이 여자이고 문 뒤에 숨어 남의 말을 엿듣는 것도 여자라고 가르쳤고, 하느님께서는 여자가 겸손하기를 바라시어 눈에 띄지 않는 몸의 숨은 갈빗대로 여자를 창조했다고 설교했다. 구약시대 여성에 대한 이러한 통념 탓에 여자는 남자와 함께 식사하지 않고, 서서 식탁 시중을 들었고, 길에서나 성전 앞뜰에서는 남자와 떨어져 있어야 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일부 유다인들은 남자가 길에서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은 비록 자기 아내라도 매우 불미스러운 행동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길에서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요한 4,27)고 기록하고 있다. 여성의 슬기로움하지만 유다의 모든 율법학자가 여성을 비하한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은 여자의 슬기와 부지런함, 강인함과 성실함을 칭찬했다. 바오로 사도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 랍비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교훈을 남겼다. “황제가 이스라엘의 한 현자에게 ‘너희 하느님은 도둑이다. 그는 여자를 만들기 위해 잠들어 있는 아담의 갈빗대를 훔치지 않았는가’ 했다. 현자는 대답할 바를 몰랐기 때문에 딸이 대신 나섰다. 딸은 황제를 알현해 호소할 일이 있다고 했다. 황제가 말해 보라고 하자 딸은 ‘밤에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와 은으로 만든 국자를 훔쳐 가고, 대신 금으로 만든 국자를 놓고 갔습니다’ 했다. 황제는 웃으면서 ‘그런 도둑은 나에게도 매일 밤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딸은 대답했다. ‘그렇겠지요. 저희의 하느님이 하신 일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은 첫 남자에게서 다만 갈빗대 하나를 빼냈을 뿐 그 대신 첫 남자에게 아내를 짝지어 주셨던 것입니다.’”신약에서 높아진 여성 품위자녀들은 아버지와 똑같이 어머니를 공경해야 했다. “너희는 저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경외해야 한다.”(레위 19,3) 가산의 유일한 관리인은 남편이었지만, 아내도 자기 손으로 번 돈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훌륭한 아내는 “밭을 봐 두었다가 사들이고 자기가 번 돈으로 포도밭을 사서 가꾼다.”(잠언 31,16)이처럼 사실상 성경도 전체 맥락에선 여성을 지극히 존중하고 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며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된다”(창세 2,23-24)며 여성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있다. 또 “아내를 얻은 이는 행복을 얻었고 주님에게서 호의를 입었다”(잠언 18,22)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성경은 드보라부터 마카베오가의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강인한 이스라엘의 부인들과 룻에서 유딧, 에스테르까지 희생적 여인들 모두가 이스라엘 민족의 본보기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경이 여성을 단순히 아이들의 어머니, 착한 주부, 남편의 훌륭한 아내로서 그 지위를 드러냈다면 신약성경은 여성을 품위있는 ‘인간’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인연을 인간 마음대로 풀 수 없음을 가르치셨고(마르 10,9-12), 바오로 사도는 부부 사랑을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유했다.(에페 5,21-29)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부부 사랑을 ‘성사’로 거행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6.10
![[신앙단상] 유다와 은화(2)](//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3166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유다와 은화(2)강금실 에스더(법무법인 원 변호사) 유다의 밀고에 이어 으뜸 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써 신뢰를 깨뜨렸다. 당시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의 소극적 부인과 유다의 적극적 밀고 행위 사이 어디쯤에선가 내면이 흔들렸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예수님이 잡혀갔을 때 처벌이 두려워서뿐 아니라, 믿음이 흔들리는 상태였기에 즉각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마리아가 잔치 식탁에서 예수님께 향유를 쏟아부은 사건은 느닷없이 일어났다. 그래서 상당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고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각 자신의 장례 준비를 위한 행위로 의미를 부여해서 곧 다가올 사건과 이를 결합시킨다. 예수님의 언표를 통해 향유 사건은 ‘옥합을 깨뜨리는’ 파국에 그치지 않고 수난과 부활의 창조적 상황으로 옮겨가는 표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세속의 눈에는 황당하고 재물을 낭비하는 데 불과한 한 여인의 어리석은 행위가 사랑으로 가득 찬, 영성적 밀도를 지닌 아름다운 행위로 들어 올려졌다. 뜻밖의 사태가 들이닥친 상황에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사건의 진면목을 꿰뚫어보는 예수님의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진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태 26,11; 마르 14,7; 요한 12,8)고 말씀하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 드려라”(마태 22, 21; 마르코 12,17; 루카 20,25) 하는 유명한 말씀과 결합해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빈곤 문제를 화폐 경제와 마찬가지로 세속의 원리로 인한 것으로, 하늘나라 일과는 별개라고 보았고 그래서 세속의 시스템에선 해결되기 어렵다고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자들이 가난의 해결책으로 생각한 분배적 정의보다는 마리아의 현실적 낭비를 두둔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 후 2000년이 지나도 빈곤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실물 경제 관점에서는 낭비에 해당하는 게 영성적 관점에서는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는 선물에 해당한다는 것을 향유 사건은 보여주고 있다. 신화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의 말을 인용하면 전체적인 사회적 사실의 심층에 놓인 영혼의 활동을 드러내는 ‘순수 증여’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향유 사건에서 경제 활동의 현실을 초월하는 영적 선물의 세계가 하늘나라의 가치관이며 그것이 가난의 궁극적 극복의 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예수님의 메시지를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서 값비싼 향유를 낭비하고 그것을 자신의 몸에 바르는 행위를 치하하는 예수님의 언동에서 유다는 예수님이 사치를 즐기는 위선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적어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분배적 정의관과 실물경제의 원리에 비춰볼 때 향유 사건은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정적인 측면을 폭로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유다의 배신을 성경은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루카 22,3; 요한 13,27)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광야의 유혹(마태 4,3-11)을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나라의 영광, 빵으로 상징되는 경제 활동 모두 세속의 가치관에 속하는데, 이것을 성경은 악마의 유혹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세속의 삶을 사는 우리가 하늘나라의 영성적 가치관을 과연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는 저서 「주님」에서 우리 모두는 유다의 내면을 지니고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평화신문2014.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