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1> 칼날 같은 하느님의 말씀](//cpbc.co.kr/CMS/newspaper/2014/11/rc/541647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칼날 같은 하느님의 말씀하느님 만나기 위해선 하느님을 버려야 한다!연재를 시작하며“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 4,12).연재 첫머리부터 무서운 말씀으로 운을 뗀다고 깜짝 놀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참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읽는 나보다 강하십니다. 나를 꺾어 놓고야 맙니다. 그래야 마땅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이런 말씀은 듣기 싫다고, 없었으면 좋겠다고 느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듣기 싫은데도,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끄듯이 꺼버릴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런 것은 싫다고, 구미에 맞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 읽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지금 바로 성경을 덮고 서점에 가서 훨씬 더 가벼운 책을 고르셔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관절과 골수를 가르고 내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내는 것이 싫다면, 무엇하러 성경을 읽으십니까?그리스도교는 스스로 다른 몇몇 주요 종교들과 달리 계시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추론해서 찾아낸 하느님도 아니고 열심히 정진하여 발견한 하느님도 아니십니다. 하느님 편에서 먼저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셔서 인간이 하느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 등)이라고 일컬어지시는 그 하느님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혼자 생각해서 알아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상을 고집하며 매달릴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내가 교리를 배운 신자로서 하느님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하지만, 하느님의 신비를 다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하느님께는 내가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분명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고 인간의 한계라면 겸손하게 인정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이 아닌 내 마음대로 상상해낸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으로 모시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깨뜨려버려야 할 그릇된 하느님 상입니다.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이들은 하느님에 대해 그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수난 예고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구약의 이스라엘도 결코 평탄치 않았던 그들의 역사 속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모습에 당황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했던 예언자들이 반대받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을 보아도, 하느님의 말씀은 분명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심판을 선고해도 회개하지 않고 그렇다고 구원을 선포해도 기뻐할 줄 모르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말씀에 꺾이기보다 그 말씀을 내 마음에 들게 맞추고 싶어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성경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원천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인지 객관적인 진술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호기심에서, 또는 다른 종교에 대한 관심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렇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창세기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밝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도 성경을 성경으로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곧 신앙의 규범으로 읽는다면 그 성경은 나의 신앙을 규정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 따로, 성경의 하느님 따로일 수 없습니다. 성경의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하느님이 아니라 그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나를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성경을 읽는 태도는 다른 책들을 읽는 태도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성경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끼셨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앞으로 느끼게 되실 수도 있겠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요구를 내세웁니다.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말씀은, 내가 하느님과 달리 생각하고 달리 판단할 때에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면서 회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두려워할 일만도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쌍날칼보다 날카로운 하느님의 말씀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이제부터 구약 성경의 책들을 읽으려 합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시대 순을 따를 것입니다. 성경의 책들이 형성된 순서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의 순서를 따라 창세기부터 시작하고, 지혜문학서들은 후반부에 모아서 다룰 것입니다. 중간에 때로는 성경 진도를 멈추고 한 시대의 역사나 성경 이해에 관련된 한 가지 주제를 다루기도 하겠고, 구약 성경의 책들이 모두 끝난 다음에는 신약 시대가 오기까지의 배경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 여정이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과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성경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원천이며, 성경을 읽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이다. 백영민2014.11.26
![[복음 이야기] (46) 하느님 나라, 하늘 나라](//cpbc.co.kr/CMS/newspaper/2015/03/rc/560622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46) 하느님 나라, 하늘 나라하느님 나라 입국엔 회개·믿음이 필수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다. 그림은 운보 김기창 화백 작품 ‘되찾은 아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이 설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신 첫 말씀이며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가르침, 즉 복음의 핵심어이기 때문이다. 헬라어 성경 본문에 각인된 ‘바실레이아 투 테우’(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을 구원하실 참된 세상의 지배자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다’라는 신앙 고백과 연결돼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설교의 주제로 삼으실 때 항상 그 가르침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고 설명하셨고, 이 놀라운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항상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응답은 바로 ‘회개’와 ‘믿음’이다. 따라서 신ㆍ구약 성경 전체 내용은 ‘예수님은 그리스도(구세주)이시다’라고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고,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인간은 ‘회개’하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도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모두 122번 나온다. 그중 99번이 마르코ㆍ마태오ㆍ루카 복음 곧 ‘공관복음서’에 나온다. 이 가운데 90개 본문이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직접 말하지 않고 ‘하늘 나라’(라틴어로 ‘Regnum Caelorum’-레눔 첼로룸)로 표현한다. 이는 유다인들이 즐겨 쓰던 표현으로 마태오는 복음서에 하늘 나라를 무려 51번이나 쓴 반면, 하느님의 나라는 단 4번만 표기했다. 이는 ‘하느님’이란 거룩한 단어를 직접 쓰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이스라엘식 관념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성경학자와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의 통치’로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인 로마 황제가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이미’ 온 나라이며, 구세주 재림하실 때 완성될 나라이다. 또 그리스도 도래 때까지 교회를 통해 이 땅에 현존하는 나라이다.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구약 시편(47편, 93편, 96-99편)을 통해 찬송되었고, 다니엘서는 하느님을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모든 생물을 지배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다니 14,5)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과 회당 전례를 통해 찬양하고 고대하던 나라이다.예수님께서는 직접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마태 13,3-9; 마르 4,1-9; 루카 8,4-8), ‘가라지’(마태 13,24-30.36-43), ‘저절로 자라는 씨앗’(마르 4,26-29), ‘겨자씨와 누룩’(마태 13,31-33; 마르 4,30-32; 루카 13,18-21), ‘보물과 진주 상인’(마태 13,44-46) 등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 눈에 초라한 모습을 띠지만 그 실상을 발견한 자는 모든 것을 처분해 손에 넣을 만큼 값진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루카 18,9-14),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5-37), ‘매정한 종’(마태 18,21-35), ‘되찾은 아들’(루카 15,11-32),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마태 7,15-20; 루카 6,43-45),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마태 7,7-11; 루카 11,9-13) 등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자신을 낮추어 자비를 청하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며, 하느님의 선하심과 용서의 삶을 닮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이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신다. 가장 악한 죄인들조차도 회개하고 성부의 무한한 자비를 받아들이라는 부름을 받았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서 이미 겸손한 마음으로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차지가 되고 있다”(107항)고 고백하고 있다.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5.03.17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47)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중)](//cpbc.co.kr/CMS/newspaper/2014/06/rc/512631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47)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중)전통적 성경 연구법 탈피해 대안적 해석학 제시 피오렌자 교수가 14년 동안 신학을 가르쳤던 노트르담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성모 동굴. 루르드의 성모 동굴을 본땄다. CNS 자료사진 노트르담대학교를 떠나 케임브리지의 성공회 대학으로 옮겨온 피오렌자 교수는 ‘해방을 위한 비판적 여성주의 해석학’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984년에서 1988년까지 케임브리지의 성공회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동안 많은 이들에게 비판적 여성주의 성경해석을 가르치고 소개하였습니다. 이때에 가톨릭 대학교인 노트르담대학교에서 가르칠 때보다 더 많은 가톨릭 여학생이 그의 수업을 들었다고 합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학문적 연구는 점차 학계의 인정을 받기에 이릅니다. 1985년에 그는 미국 성서학회의 첫 번째 여성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성서학계가 피오렌자 교수가 성경해석 분야에 끼친 공헌을 공식으로 인정하였음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성경 연구에서 비판적 여성주의적 관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피오렌자 교수는 주딧 플래스코(Judith Plaskow)와 함께 「여성주의 종교연구」라는 잡지(Journal of Feminist Studies in Religion)를 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잡지는 이후로 여성신학자들의 학문 업적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해왔습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1988년 이후 지금까지 하버드 신학대학에서 성경 해석학과 여성신학 분야에서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연구업적 및 주요 저서피오렌자 교수는 성서해석학과 여성신학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 업적을 남겼고 지금도 이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강의와 연구는 성경 및 신학과 관련된 인식론, 해석학, 수사학, 정치신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것이며, 신학교육과 평등성, 근원적인 민주주의와 관련된 주제들에도 꾸준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저술 활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왕성하다고 할 수 있는데, 현재까지 약 24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17권에 이르는 책의 편저자이며, 240편이 넘는 논문을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로 발표하였습니다. 현재, 「여성주의 종교연구」라는 잡지의 공동 설립자이자 공동 편집자이며, 「콘칠리움」(Concilium)이라는 잡지의 공동 편집자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성경 관련 주요 잡지들과 연구소들에서 상임위원직을 맡고 있습니다. 2001년에는 미국 인문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뛰어난 연구 활동을 인정하여 미국의 코네티컷에 있는 성 요셉 칼리지, 오하이오의 데니슨 대학교, 뉴욕 로체스터의 성 베르나르도 학교,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교, 독일의 뷔르츠부르그 대학교, 퍼킨스 신학대학, 남부 메토디스트 대학교,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타나 신학대학에서 피오렌자 교수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였습니다. 2002년에는 가톨릭 도서관협회에서 주는 성 예로니모 상을 수상하였습니다.피오렌자 교수의 책 「그녀를 기억하며」(In Memory of Her, 우리말 번역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신학적 재건」)은 현재 13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그밖에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피오렌자 교수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돌이 아니라 빵을」(김윤옥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4): Bread Not Stone: The Challenge of Feminist Biblical Interpretation (Boston: Beacon, 1985). 2) 「동등자 제자직」(김상분, 황종렬 역, 분도, 1997): Discipleship of Equals: A Critical Feminist Ekklsia-Logy of Liberation (New York: Crossroad 1993). 3) 「성서-소피아의 힘: 여성 해방적 성서 해석학」 (김호경 역, 다산글방, 2002): Sharing Her Word: Feminist Biblical Interpretation in Context (Boston: Beacon, 1998).신학사상여성 성경신학자로서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 해석의 방법들과 특권적 배경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습니다. 자신의 오랜 연구를 통하여 그는 성경 본문 자체와 그리고 그 성경을 설명하려는 해석 방법들이 종종 특권층에 속하지 못한 이들이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돕기보다는 오히려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경우가 많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과 그 해석 방법에 대한 다차원적 비평 방법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기존의 해석 방법들을 단지 비판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해석 방법에 대한 대안적 읽기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접근법은 복잡하고도 역동적이며 성경 해석의 윤리적 결과들을 깊이 고려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 해석에 관한 이러한 피오렌자 교수의 주장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 피오렌자 교수는 어떤 생각이든 어느 정도로는 이데올로기적일 수밖에 없으며, 성경 해석에 사용되는 관념이나 방법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대답합니다. 어차피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피할 수 없다면, 무엇보다 윤리적인 해석 방법을 취하는 것이 중요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만큼 성경은 사회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피오렌자 교수가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의 입장에서 성경 해석과 그 방법들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그가 어린 시절에 전쟁 난민으로서 경험하였던 고통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억압받는 이들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자 합니다.피오렌자 교수는 그가 저술한 수많은 책과 논문들에서 지속적으로 기존의 성경 연구 방법에 도전을 제기합니다. 성경 연구라고 하는 학문을 변모시키려는 피오렌자 교수의 노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오늘날의 성경 연구라고 하는 학문이 전제하고 있는 것, 곧 성경 본문 안에서 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들을 발견하는 것이 성경 연구의 목적이라는 전제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 본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부터 그것이 번역되고 해석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학문적, 사회적 문제들이 연루됐다고 주장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그 오류를 ‘주인중심제’(kyriarchy)라고 부르는데, 이는 소수의 엘리트 남성들이 특권 받지 못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사회적 지배의 복잡한 패턴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성신학자들이 가부장제 혹은 남성중심적 지배 체제를 비판한다면, 피오렌자 교수는 남성 중심적이라는 말이 서구사회를 지칭하는 적절한 말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남성 역시 그 지배 체제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여성과 남성 간의 대립에서 온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소수의 특권 계층이 전체를 지배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며, 불특정 다수는 그런 지배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체제에 있다고 보며, 이 체제를 피오렌자 교수는 ‘주인중심제’(kyriarchy)라고 부릅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 본문 안에, 그리고 성경의 해석 방법들 안에 주인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고, 또 특정한 성경 본문이나 해석 방법에 의해 어떻게 그것이 강화되고 있는지를 지적합니다. 둘째로 피오렌자 교수는 성경 연구 분야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주인중심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데서 나아가 대안적인 성경 연구 방법들을 찾고 제시하고자 합니다. 피오렌자 교수가 제시하는 전통적인 성경 해석 방법에 대한 대안은 ‘해방을 위한 비판적 여성주의 해석학’(a critical feminist hermeneutics for liberation)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제안하는 바가 유일한 대안이 아님을 피오렌자 교수는 강조합니다. 그리고 기존의 주인중심적 연구 풍토, 곧 소수의 주류 학자들이 전체 학계를 이끌어가는 풍토에서 벗어나 다양한 담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 철저하게 민주적인 공간이 만드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합니다. 피오렌자 교수가 제시하는 해방을 위한 비판적 여성주의 성경 해석의 내용은 제 3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김영선 수녀(마리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평화신문2014.06.03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54>](//cpbc.co.kr/CMS/newspaper/2016/02/rc/617685_1.0_titleImage_1.jpg)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한 백성이 되는 영적 기쁨 참다운 복음 선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랑과 용서의 뜨거운 시선으로 군중을 바라보고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자비의 눈길을 건네야 한다.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 스펠트 작 ‘용서받은 죄 많은 여인’. 출처=「아름다운 성경」 교황은 선교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두 번째 동기로 ‘한 백성이 되는 영적 기쁨’을 설명했다. ‘한 백성’의 의미는 ‘한 하느님 백성’이라는 말이다. 선교사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태어날 때마다 영적 기쁨에 충만케 된다. 이 기쁨은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을 제공해 준다. 선교사 자신을 선택된 사람으로 느끼게 하여 또 다른 백성을 찾아 나서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다운 복음 선포자는 세상 만민을 모두 하느님 백성으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세상 끝까지 나아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여 그들을 하느님 백성으로 만든다. 베드로 사도가 하신 말씀을 들어 보자.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1베드 2,10). 백성 한가운데서 맛보는 영적 기쁨 교황은 ‘한 백성이 되는 영적 기쁨’을 맛본 자는 선교 열정의 자극을 받는다고 했다. 이것이 새로운 동인이 되어 복음 선포자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한 백성이 되는 영적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백성 한가운데 존재해야 한다. 그곳에서 백성의 애환을 들어주고, 상처를 치유하여 주며, 그들에게 영원한 삶의 가치를 선포해야 한다. 마음으로 믿고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난 백성이 생길 때, 그 기쁨은 그 공동체를 더욱 풍요롭고 힘 있게 만든다. 복음 선포자는 그들 한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교황은 참다운 복음 선포자가 되려면, 사람들의 삶에 가까이 머무는 영적인 맛을 들이고, 이것이 더 큰 기쁨의 원천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하여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우리가 눈을 떠 다른 이를 알아볼 때, 우리 신앙의 빛이 더욱 밝아져 하느님을 알아 뵙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성 생활에서 성장하기를 바라면, 끊임없이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화 활동은 정신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고, 마음의 지평을 열어 주며, 성령의 활동을 더욱 민감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우리의 제한된 영적 도식을 뛰어넘게 해 줍니다. … 다른 이들에게서 도망치고, 숨고, 나누는 것도, 주는 것도 거부하고, 자신의 안위에 갇혀 있다면, 그 누구도 더 잘 살지 못합니다. 그러한 삶은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살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272항).참다운 복음 선포자 예수 그리스도교황이 설명하는 참다운 복음 선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의 삶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예수님의 삶은 백성 한가운데 존재하는 삶이었다. 은수자(隱修者, eremita)나 독수자(獨修者, anachorita)로 지내며 수도 생활을 하신 것이 아니다. 사랑과 용서의 뜨거운 시선으로 군중을 바라보시고,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 당신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자비의 눈길을 주신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마르 10,21). “예수님께서 눈먼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실 때(마르 10,46)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을 먹보요 술꾼이라고 생각할까 걱정하지 않으시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마르 2,16 참조), 우리는 그분께서 얼마나 다가가기 쉬운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여자가 당신 발에 향유를 바르도록 놓아두실 때(루카 7,36-50 참조), 밤에 찾아온 니코데모를 맞이하실 때(요한 3,1-15 참조), 우리는 예수님께서 늘 열려 계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236항). 관리자와 복음 선포자의 차이일선 본당의 사제들은 최전방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과 밀도 있는 만남을 하도록 주문받는다. 예수님 자비의 시선으로 하느님 백성을 보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 한가운데 존재하기 위해서 가정 방문은 기본이다. 사목자가 가정 방문을 하지 않는다면, 관리자로 머물 뿐이다. “신자들에게서 도망치고 숨고 나누는 것도 주는 것도 거부하고 자신의 안위에 갇혀 있다면 그 누구도 더 잘 살지 못합니다. 그러한 삶은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살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272). 사목자들은 “빛을 비추고, 복을 빌어 주고, 활기를 불어넣고,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사명으로 날인된 이들, 심지어 낙인찍힌 이들로 자신을 여겨야 합니다”(273항). 백영민2016.02.03
![[성서주간]성서못자리 25년](//cpbc.co.kr/CMS/newspaper/2014/11/rc/540289_1.0_titleImage_1.jpg)
[성서주간]성서못자리 25년말씀의 못자리, 실천으로 뿌리내려야 성서못자리 수강생들이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에서 강의를 듣고 있다. 성경의 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성서못자리는 서울대교구를 대표하는 성경 교육 프로그램이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서울대교구를 대표하는 성경 교육프로그램 ‘성서못자리’가 말씀의 모를 심어온 지 올해로 25년을 맞았다. 사제들의 성경나눔 모임으로 시작성서못자리 시작은 1986년 당시 가톨릭대 신학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던 안병철(현 평화방송 사장) 신부를 중심으로 한 교구 사제들의 성경 나눔 모임이다. 프랑스에서 신약을 공부하고 온 안 신부는 유학 시절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성경 교재 집필을 계획했다. 그러면서 성경 공부에 뜻을 같이하는 사제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성경을 읽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 모임은 3년 뒤인 1989년 ‘성서못자리’라는 이름으로 교회 정식 인가를 받게 됐고, 지금의 성서못자리 공식 출발점이 됐다. 성서못자리는 성경에 대한 신학적 기초 지식을 강조한다. 성경을 읽는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마음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데서 벗어나, 하느님 말씀의 배경과 그 뜻을 학문적으로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싹 틔우고 뿌리 내리도록 가르치는 것이 특징이다.성서못자리를 통해 말씀에 맛 들인 사제들은 말씀의 모를 신자들에게도 심어 주기 위해 강사로 나섰다. 안병철 신부는 1990년 명동성당 교육관에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성서못자리 1권 첫 강의를 시작했다. 이후 많은 사제들이 성서못자리에 동참, 사제들이 직접 가르치는 성경교육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독립 기구로 운영되던 성서못자리는 2006년 교구 사목국 성서사목부 산하로 편입됐다. 이수자들이 말씀의 봉사자로성서못자리는 크게 정기 강좌와 나눔터 강좌로 나뉜다. 정기 강좌는 3년 과정으로 성서못자리 교재 입문편과 1~5권을 가지고 운영된다. 현재 2014년 하반기 정기 강좌가 명동대성당을 비롯해 삼성동ㆍ구파발ㆍ대치2동성당, 국회에서 열리고 있다. 나눔터 강좌는 정기 강좌를 수료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심화 과정(1년)이다. 나눔터 강좌와 연수까지 마친 이들은 각 본당에서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말씀의 봉사자’로 활동할 수 있다. 현재 교구 내 25개 본당에서 말씀 봉사자들의 성경 강의가 진행 중이다. 성서못자리는 이 밖에도 청년들을 위해 3년 과정을 1년으로 압축한 ‘청년못자리’, 평화방송 라디오 성경강좌 ‘PBC 성서못자리’, 신약성경이 중심이 된 정기 강좌를 보충하는 ‘구약 특강’ 등을 마련, 외연을 넓히면서도 내실을 다졌다. 성서못자리 회장 전영준(가톨릭대 신학대 교수) 신부는 “성경 공부 핵심은 삶에서 자신이 배운 말씀을 사는 것”이라면서 성경 공부가 공부에서 끝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당부했다. 한편 교구 성서사목부는 24일 오전 10시 30분 명동대성당에서 조규만 주교 주례로 성서못자리 25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한다. 또한 성서 주간을 맞아 이날 미사에 교구 내 다양한 성서 사도직 단체를 초청, 풍성한 말씀 나눔의 장을 꾸릴 예정이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평화신문2014.11.18
![[나의 신앙 나의 기업] (17)임한복 요한 사도 (주)삼명테크 대표](//cpbc.co.kr/CMS/newspaper/2015/10/rc/598961_1.0_titleImage_1.jpg)
[나의 신앙 나의 기업] (17)임한복 요한 사도 (주)삼명테크 대표온돌 난방 전문기업으로 성장, 성모님이 함께 해주셨기에 조상의 지혜가 담긴 온돌 문화를 세계에 알려 국익을 도모하고, 친환경 온돌 난방 분야의 장인(匠人) 가문을 꿈꾼다. (주)삼명테크 임한복(요한 사도, 55) 대표다. 경기 광주시 초월읍 동막골 길 150. 거의 막다른 오르막 비탈에 위치한 (주)삼명테크는 ‘에코전기온돌난방시스템’ 전문 기업이다. 열선을 싼 스테인리스 강관들을 적당한 간격으로 유지하면서 이중내열방수피복연선을 연결해 만든 난방 장치다(그림 참조). 난방이 필요한 곳에 깔고 그 위를 마감재로 덮으면 온돌방과 마찬가지다. 온도조절기를 부착해 온돌 온도를 손쉽게 조절할 수 있다. 겉보기엔 간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관련 특허만 4개나 되고 의장등록 실용신안등록을 포함한 각종 등록증이나 인정서, 국내외 인증서 등 수십 가지에 이른다. 그만큼 기술 개발의 노력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는 표시다. 실제로 삼명테크는 ‘난방용 전열관’에 대한 조달청의 계약이행실행 평가에서 2011년부터 올해까지 5년 연속 업계 1위 최우수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삼명테크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인고의 세월이 있었다. 임 대표는 20대 초반인 1981년 ‘현대인테리어’로 사업을 시작했다. 실내 인테리어 및 난방 배관 사업이다. 1988년 상호를 ‘삼명데코’라고 바꿨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 1992년 부도를 맞았다. 유명 패션업체의 실내 인테리어를 해주고 공사비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 충격에 임 대표는 쓰러져 거의 식물인간처럼 지내야 했다. 그런 임 대표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최정숙(모니카, 54) 이사 덕이었다. 최씨는 1985년 결혼 후 경리 일을 맡아 남편 사업을 함께해 왔다. “누워 있는 남편과 5살, 2살 된 애들을 보고 있으려니 정말 막막했어요. 이혼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요. 그렇게 힘들어할 때 ‘네가 청해서 얻은 배필인데 왜 떠나려고 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어요. 성모님의 음성이었지요.”최씨는 처녀 때부터 늘 성모상을 곁에 두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지냈다. 원하는 남편감을 얻어 달라는 얘기도 수시로 했다. 결혼한 이후 기도생활이 쉽지 않았는데, 어려움이 닥쳐 기도하자 성모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래서 최씨는 마음을 다잡고 부도를 낸 회사로 돈을 받으러 다녔다. 변호사도 선임했다. 하지만 변호사 비용만 들뿐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때에 다시 성모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번에는 ‘포기하라’는 음성이었다.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느냐고 여쭸지요. 그랬더니 ‘그릇이 비어야 다시 찰 수 있지 않으냐’고 답하시는 거예요.”그래서 담요 싸들고 죽치고 있던 부도회사 사무실 복도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남편에게 귓속말로 ‘성모님이 포기하라고 하시네요’ 하고 전했다. 기적처럼 그 이후 남편이 서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주변의 도움을 얻어 부부가 다시 시작한 사업은 건물 유리창 등에 이스라엘에서 수입한 특수 필름을 부착해 유리창의 강도를 강화하는 일이었다. ‘오토디펜스’라는 상호를 내걸고 시작한 사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임 대표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남의 나라 물건을 수입해서 판다는 것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것을 외국에 팔아야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저는 퉁수쟁이(배관 설비공의 속된 말)였습니다. 만들고 조립하는 데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요.”그래서 임 대표가 생각해 낸 것이 온돌난방시스템이었다. 연탄이나 가스, 기름보일러가 아닌 전기 열을 이용한 시스템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기술 개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수백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좌절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내의 격려에 다시 힘을 얻었다. 그리고 아내는 신앙에 매달렸다. “힘들 때였어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는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성당에 갔는데, 신부님을 만나뵙자 신부님께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거였어요.”(최정숙 이사)오토디펜스 사업을 하면서 이스라엘에 있는 본사와 재계약을 하던 날이었다. 부부는 재계약이 성사될지 좌불안석이었다. 아내 최 이사는 평화방송을 즐겨 듣고 있었는데 그날 아침 평화방송에서 들은 성경 말씀이 ‘총애받는 사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너에게 평화가 있기를! 힘을 내어라, 힘을 내어라’(다니 10,19)는 내용이었다. 아내는 이 말씀을 전하면서 힘을 내자고 격려했고, 바로 이어서 재계약이 성사됐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임 대표는 2000년 (주)삼명테크 법인을 설립하고, 그해 겨울 매설형 전열 장치와 관련한 실용신안등록 특허를 내는 것을 시작으로 막바지 기술 개발에 혼신을 다했다. 마침내 2002년 매설형 전열 장치 발명 특허를 내고, 이듬해는 제조 방법 발명 특허도 등록했다. 10여 년에 걸친 꿈이 마침내 현실화한 것이다. 하지만 다시 재난이 닥쳤다. 2004년에는 불이 나서 공장 건물 3개 동 가운데 1개 동을 다 태웠다. 신심이 깊은 아내 최 이사는 불이 나자 제일 먼저 기도한 내용이 “남편이 하느님한테 삿대질하지 않도록 해주세요”였다. 하지만 임 대표가 불이 난 현장에 와서 한 일은 화재 진압에 수고하셨다고 동네 어른들에게 맥주 한 캔씩을 돌린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날 밤 임 대표는 이렇게 기도했다. “감사합니다. 불이 산으로 옮겨붙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명 피해가 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건물 두 동을 무사하게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수업료를 비싸게 받으십니까?”현재 국내 전기난방 시장의 30%를 점유할 정도로 (주) 삼명테크는 난방설비 분야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히고 있다. 또 일본을 비롯해 러시아 중국 키르기스스탄 이란 등지에 수출하고 있다. 임 대표는 특히 해외 시장 개척에 관심을 쏟고 있는데, 온돌이라는 고유의 문화를 알리고 외화도 벌어들이는 일석이조의 시장이기 때문이다. 삼명테크가 2대, 3대로 이어지는 친환경 온돌난방시스템의 명가로 자리 잡기를 바라는 것은 임 대표의 또 다른 꿈이다. 아들(임동관, 아우구스티노, 30)은 4년 전부터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고 있다. 이미 아버지 다음 가는 실력자로 성장했다. 글·사진=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열선 스테인리스 마그네시아 평화신문2015.10.20
![[복음 이야기] (42) 예수님의 형제자매들](//cpbc.co.kr/CMS/newspaper/2015/01/rc/549758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42)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외아들 나자렛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우리는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그 형제들도 알고 있다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진은 오늘날 나자렛 전경. 리길재 기자 복음서 해석에 있어 ‘예수님의 족보’보다 학자 간에 더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친형제자매가 있었느냐’ 하는 문제다. 이는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과 연관된 것으로 주로 개신교 측에서 줄기차게 제기하고 있다. 개신교는 성모님께서 예수님만을 동정 중에 성령으로 잉태하셨을 뿐(마태 1, 25 참조) 이후 요셉과의 부부 관계를 통해 예수님의 다른 형제들을 낳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톨릭처럼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을 믿고 있는 동방정교회는 요셉이 마리아와 혼인할 때 홀아비였으며, 예수님의 형제자매는 요셉이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자식들 즉 ‘이복형제’라고 위경을 근거로 말하고 있다. 예수의 형제·자매에 관한 다양한 이견의 근거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무시당하실 때(마르 6,1-6; 마태 13,54-58; 루카 4,16-30)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목하며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라고 복음서가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성경 대목도 여러 곳이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루카 8,19-21; 요한 2,12; 요한 7,3-10; 요한 20, 17; 사도 1,14; 1코린 9,5 등). 특히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19절에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라는 표현도 있다. 성경 외에도 유다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다 고대사」에서 ‘서기 62년 포르키우스 페스투스 총독 사후 대사제 한나스의 명에 의해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돌로 쳐 죽임을 당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 교부 에우세비우스 주교는 「교회사」에서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예수의 형제 유다의 손자들이 유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다고 의심해 그들을 신문했으나 보잘것없는 농사꾼이라는 것을 알고 풀어줬다’고 기록하고 있다.신약성경 문자인 헬라어는 ‘아델포이’(형제)와 ‘아넵시오이’(사촌)를 명확히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또 ‘바르나바의 사촌 마르코’(콜로 4,10)처럼 형제와 사촌을 혼동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정통 주석은 헬라어 ‘아델포이’가 형제를 뜻하는 히브리말 ‘아흐’의 의미를 축소했다고 풀이한다. 즉 히브리말 ‘아흐’는 친형제뿐 아니라 이복형제, 이종사촌, 친척까지 모두 포함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예로 아브라함과 롯(창세 13,8), 라반과 야곱(창세 29, 15) 관계는 삼촌과 조카 사이인데 ‘아흐’라고 한다. 또 모세가 아론의 삼촌 우찌엘의 두 아들 미사엘과 엘차판에게 나답과 이비후의 시신을 치우라고 할 때(레위 10, 1-5) 이들이 5촌 사이인데도 ‘아흐’(새 성경은 ‘조카’라 번역했다)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 교회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자매는 친족이 아니라 ‘이종사촌’이라는 게 기본 입장이다.가톨릭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친형제자매가 없었다는 결정적 증거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는 장면(요한 19,26-27)을 든다. 예수님을 따랐던 주님의 형제인 시몬과 야고보도 아닌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긴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톨릭 성경학자들의 주석을 종합하면 이렇다. 만약 친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어머니를 맡기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친형제를 배척하신 것이 된다. 그랬다면 야고보가 예루살렘 모교회를 이끌지도 않았을 것이고 돌에 쳐죽임을 당해 순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신 것은 예수님의 친형제가 없었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아울러 학자들은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형제들은 예수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이가 적은데도 복음서들은 항상 ‘마리아의 장자’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신할 때도 요셉과 ‘아기와 그 어머니’(마태 2,13-15) 3인만 등장한다. 아울러 성경에는 예수님만을 ‘마리아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형제라는 말은 있어도 ‘마리아의 다른 아들’이나 ‘마리아의 아들 야고보, 시몬, 유다, 요세’라는 표현은 전혀 없다. 성경은 오로지 예수님의 어머니로 ‘마리아’를, 마리아의 아들로 ‘예수’만을 가리키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5.01.13

‘자비의 해’라는데… 자비, 불교 용어 아닌가?하느님 자비가 절박하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교황 , ‘교황의 신학자’ 카스퍼 추기경이 전하는 하느님 자비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자비발터 카스퍼 지음/최용호 옮김/가톨릭출판사/2만 원요즘 가톨릭 교회 최대 화두는 ‘자비’다. 한국 교회 각 교구가 발표한 2016년 사목 교서에는 ‘자비를 실천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다짐이 가득하다. 세계 교회 시선도 온통 자비에 쏠려 있다. 교황청은 8일부터 시작하는 ‘자비의 해’ 준비로 분주하다. 이렇게 자비를 논의의 머리로 끌어놓은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교황은 봉헌생활의 해(2014년 11월 30일~2016년 2월 2일)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자비의 해(2015년 12월 8일~2016년 11월 20일)를 선포했다.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교회와 세상이 하느님 자비를 절박하게 필요로 한다는 교황의 판단이다. 교회에 부는 자비의 바람에 맞춰 자비를 새롭게 이해하는 자비의 신학이 주목받고 있다. 책은 교황이 말하는 자비에 관해 한층 깊이 있는 이해를 하도록 도와준다. 저자는 교황과 신학적 노선이 가장 닮아 ‘교황의 신학자’라고도 불리는 발터 카스퍼(독일) 추기경이다. 그는 자비야말로 21세기 신학의 중심임을, ‘시대적 징표’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근본 주제임을 간파했다. 3년 전 이 책을 펴낸 카스퍼 추기경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낙담하여 목표를 잃은 상황에서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복음이 ‘신뢰와 희망’에 관한 복음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하느님 자비의 모습을 철학적, 신학적, 교회사적, 교회론적, 성서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성경 핵심 주제인 하느님 자비에 대한 학문적 토대를 탄탄히 다진 것이다. 그는 “(자비를) 신학적으로 고찰하지 않을 경우, 자비라는 개념은 ‘유약한’ 사목과 영성을 가리키는 말로 여겨지기 쉽다”고 지적했다. 그의 연구가 여기서 그쳤다면 이 책은 신학자들만 읽는 전공 서적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아탑에서 내려왔다.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하느님 자비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현대 사회에서 자비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관찰했다. 특히 하느님이 그토록 자비로우신 분이라면 고통은 왜 있는지,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죄 없는 이들은 왜 죽어가는지를 묻는 이들의 항변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교회가 어떻게 답해야 하고, 하느님 자비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지를 성찰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복음을 믿을 만한 것으로 선포하려면 먼저 우리의 말이 자비로워야 합니다. …대화할 때도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말하고 실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아는 체하며 거만하게 청중들을 질책해서는 안 됩니다”(293쪽).빈센트 반 고흐의 ‘선한 사마리아 인’. 카스퍼 추기경은 라틴어 ‘자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마음을 지닌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며 자비 실천을 위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했다. 자연스럽게 교황의 목소리와 연결되는 대목이다. 교황은 2012년 교황 선출 선거가 열릴 때 마리오 호르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 참가했다. 그때 카스퍼 추기경은 베르골료 추기경에게 스페인어로 번역된 이 책을 선물했다. 이후 베르골료 추기경은 교황으로 선출됐고, 교황은 신자들과 함께한 첫 삼종기도에서 카스퍼 추기경의 책을 극찬하며 추천했다. 교황이 발표한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은 이 책의 요약판으로 불릴 정도로 닮았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백영민2015.12.02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은 ‘의탁’](//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6484_1.0_titleImage_1.jpg)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은 ‘의탁’38.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영성 ⑤ 성녀 에디트는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의탁이라고 가르친다. 사랑의 응답으로 초대하는 하느님 우리는 지난 호에서 자신의 허무에 대한 깊은 자각을 통해 오히려 우리 안에 현존하시며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성녀 에디트 슈타인의 조언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영원으로부터 사랑해 왔다는 그 사랑의 흔적을 발견하는 사람은 이제 그 하느님께 자신을 통째로 내어놓고 그분을 향해 진실하게 응답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그 누군가가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며 받아들여 준다는 체험으로부터 일어나는 응답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그에 합당한 응답을 드리도록 우리 각자를 초대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에디트 슈타인을,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알아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먼저 그분께 사랑을 드릴 수 없습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한 분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엄마가 갓난아이에게 먼저 미소를 지어 보이지 않는다면, 결코 그 아이는 미소 지을 수 없을 것이라는 비유를 드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먼저 그렇게 우리에게 미소 짓고 사랑을 건네주셨기에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그분께 응답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은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일치함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응답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보다도 그분 뜻에 우리 뜻을 일치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의지를 그분 뜻에 맞추고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것은 자유로운 행위에서 나오는 결실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핵심적 영역에 속합니다. 인간을 향한 그분의 구원 역사는 언제나 우리의 자유와 어우러진 하느님 은총의 역사입니다. 그분은 마지막까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셨고 그 자유를 통해 우리 역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원대한 구원 계획의 실현 과정에서 그분과 더불어 또 다른 주인공이 되도록 초대받았습니다.하느님께 드리는 최고 선물 ‘의탁’그런데 하느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그분의 뜻은 우리 각자가 성인(聖人)이 되는 데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우리 또한 그분의 자녀로서 완전한 자가 되는 것, 이것이 그분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달리 말해, 그분은 우리가 당신 안에서 온전히 우리 자신을 충만히 실현하길 원하십니다. 주님은 이러한 실현 과정에서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 응답하며 자유롭게 협력하길 바라십니다. 우리는 내면에서부터 우리 자신의 주인으로서 자유로운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온전하고 충만하게 하느님께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디트는 ‘의탁’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전합니다. 에디트는 불완전함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부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죄와 불완전함, 나약함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도록 초대했습니다. 에디트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함은 죄로부터 온전히 해방되는 것이라기보다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데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함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때 사랑 안에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죄와 불완전함, 나약함까지 내어드리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견지해야 할 삶의 근본 태도하느님으로부터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체험, 그 사랑에 힘입어 그분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체험은 우리를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인도해 줍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삶의 모습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로부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분의 뜻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나와 더불어 우리 모든 이가 구원되길 바라십니다. 에디트는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도록 우리를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삶의 근본적인 태도라고 가르쳤습니다. cpbc2016.01.27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36>](//cpbc.co.kr/CMS/newspaper/2016/01/rc/614222_1.0_titleImage_1.jpg)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성령칠은 성령칠은은 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과 하느님께 대한 경외다. 에기노 바이너트 작 ‘성령강림’. 그리스도인이 성화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인 성령의 활동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16.26). 약속대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오신 성령께서는 그들이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사도 2,1-4 참조).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성령의 활동을 재차 확인해 주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성사와 교역을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고 인도하시며 여러 가지 덕행을 꾸며 주실 뿐 아니라 또한 당신 은혜를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며 모든 계층의 신자들에게 특별한 은총도 나누어 주신다”(「교회 헌장」 12항). 이렇게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서 활동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더욱 거룩해지고 성덕을 완성하여 완덕에 다다르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인간 영혼은 조력 은총에 의해 수동적으로 자극받는 것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매우 능동적으로 초자연적인 습관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바로 ‘성령의 은사’가 작용하는 것입니다.성령의 은사(恩賜)는 초자연적 존재로서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짐작해 볼 수 있는 내용이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 하리라”(이사 11,2-3). 물론 이 구절에서는 총 여섯 개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지만, ‘주님을 경외함’이 두 번 언급되었으며 6보다는 7이 완전한 숫자인 것에 근거하여 가톨릭 교회는 그동안 ‘성령칠은’(聖靈七恩)을 가르쳐 왔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은 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과 하느님께 대한 경외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31항).각각의 성령 은사의 본질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성령칠은을 다양한 기준으로 재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어느 은사가 완덕에 더 가깝게 다가가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상태의 관점에서 분류해 본다면, 지혜의 은사가 가장 완덕에 가까운 상태에 놓인 은사이고, 하느님께 대한 경외의 은사가 상대적으로 덜 가까운 상태에 놓인 은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인간 영혼 안 어느 곳에서 어느 은사가 활동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작용의 관점에서 분류해 본다면, 인간 지성을 밝혀주는 지성적 은사로는 지식의 은사, 통찰의 은사, 지혜의 은사, 의견의 은사를 들 수 있으며 인간 의지를 강화하는 정감적 은사로는 공경의 은사, 용기의 은사, 경외의 은사를 들 수 있습니다.하지만 끝으로 그리스도인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점은 성령의 은사가 어느 주입덕행과 관련되어 그 덕행을 완성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견의 은사는 지덕을 완전하게 합니다. 공경의 은사는 의덕을 위해 경신덕을 완성시킵니다. 용기의 은사는 용덕을 완성시킵니다. 경외의 은사는 절덕을 완성시킵니다. 이상은 윤리덕(사추덕)과 관련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의 은사는 신덕을 완성시킵니다. 통찰의 은사는 망덕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지혜의 은사는 애덕을 완성시킵니다. 이상은 신학덕(향주덕)과 관련 있습니다.결국 성령의 은사는 윤리덕을 한 단계 승화시키고 신학덕을 인간 영혼에 부합시켜서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게 도와줍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인간 영혼이 유연성을 발휘해서 하느님의 은총을 재빨리 느끼게 해주며, 유순함을 실천하여 거룩함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수월하게 다가가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은사의 도움을 받으며 주입덕행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완덕에 다다르는 지름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백영민2016.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