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4> 이기적인 나태는 안 된다](//cpbc.co.kr/CMS/newspaper/2015/05/rc/572966_1.0_titleImage_1.jpg)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이기적인 나태는 안 된다이기적 나태, 하느님 주신 사명 거절하는 행위 나태는 교만과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과 함께 잠언에서 전하는 7가지 악에 속한다. 그림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작품 ‘칠죄종과 네 가지 종말’. 동기부여 안 된 일꾼은 일의 기쁨 잃고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나태에 빠져무기력증, 복음화의 기쁨을 뺏기는 일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이다. 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하다고 외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가난하게 살아도, 굶주림 속에서도, 지금 울고 있을지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그들을 미워하고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더라도, 하늘에서 받을 큰 상을 생각하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기에 그렇게 산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세상 속에서 모진 핍박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리스도인은 이를 철석같이 믿고 기쁨 가운데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이와 같은 기쁨은 선교 활력이 되어 선교 일꾼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들은 땅끝까지 나아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들의 발걸음을 지치지 않도록 만드는 힘의 원천은 바로 ‘기쁨’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어떤 조건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잃지 않도록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행복하여라!” 기쁘지 않은 선교 일꾼 교황은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이 기쁨을 잃지 않도록 당부하셨다. 만일 이 기쁨이 사라져 버리면, 선교 일꾼은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어 길 한가운데에 힘없이 주저앉아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구 교회의 신앙인들의 모습 속에서 발견되는 무기력증은 바로 이와 같은 기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기쁘지 아니한 사람은 희생과 봉사를 달가워하지 않고 교회를 위한 선교에도 뛰어들지 않는다. 시간과 능력이 있음에도 책임 맡기를 거부한다. 오로지 개인의 즐거움만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고자 한다. 교황은 이와 같은 상태를 ‘이기적인 나태’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기적인 나태는 안 된다”(80항).‘나태’란 자신의 일을 싫어하고 게으름에 빠진 상태를 말한다. 피로나 역부족 상태에 있어서 일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무기력에 빠져 기피하고 혐오하고 실망하며 변덕을 초래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거절하는 것이기에 칠죄종(七罪宗) 가운데 하나이다. 교황은 이와 같은 나태(懶怠)에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 란 말까지 붙였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선교 일꾼이 이기주의자이고 나태에 빠진 생활을 한다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교황은 강하게 이런 삶을 거부한다. 사목적 나태에 빠지는 이유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기쁨이 증발한 원인은 무엇인가? ‘이기적 나태’의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교황은 이렇게 설명한다. “언제나 문제는 과도한 활동이 아니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활동, 곧 적절한 동기가 없고 영성이 스며들지 못하여 즐겁게 수행하지 못하는 활동입니다. 그 결과 활동은 필요한 것이라기보다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심지어 때로는 병들게 합니다. 이 활동은 만족스럽고 행복한 피로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를 긴장시키고 힘겹게 만드는 것이고, 불만스럽게 느끼게 하고 마침내는 참을 수 없이 피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82항).자신이 왜 이 일을 하는지, 활동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지금 하는 일은 외부에서 부과된 노동에 불과하여 시간과 더불어 추진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어야 하고 필요한 영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와 같은 활동을 하는 궁극적 이유와 목적을 온전히 파악한 사람은 자신의 임무(mission)를 기쁘게 수용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다.교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목적 나태’에 빠질 수 있음도 지적했다. 몇 가지 원인을 열거했다. 과도한 계획, 실현 불가능한 계획, 특정 계획에 대한 집착, 즉각적인 성과 기대, 비판과 십자가의 불수용, 인내심의 부족 등이 그것이다(82항).무기력증에 빠진 미라가 될 것인가사목 일꾼들의 근본적 회개가 요청된다. 그렇지 않고 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그리고 일상과 타협하여 안주하다 보면, 아주 큰 위험이 자리하게 된다. 교황은 이 위험을 ‘회색의 실용주의’라고 했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이 약해지고 편협해집니다”(83항). 교황은 무기력증에 빠져 열정이 서서히 소진되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박물관의 미라로 비유하며 이는 환멸과 슬픔을 불러온다고 했다. 교황은 문학 작품의 표현을 이용하여 당신의 생각을 호소력 있게 전달했다. 환멸과 슬픔은 “악마의 가장 귀중한 영약”(「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교황은 힘주어 이렇게 강조했다. “복음화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백영민2015.05.26
![[복음이야기] 25. 대사제와 사제들(하)](//cpbc.co.kr/CMS/newspaper/2014/07/rc/522087_1.0_titleImage_1.jpg)
[복음이야기] 25. 대사제와 사제들(하)의식 거행과 성소재산 관리, 재판도 맡아 레위인들이 성전 봉사에 앞서 주님의 뜰에서 몸을 씻는 정결예식을 하고 있다. 출처=ubdavid.ord 대사제를 제외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무에 종사한 제관들은 아론과 차독의 후예인 사제들과 레위인들이었다. 이들은 24개 조로 나뉘어 성전 일을 했다. 각 조는 순번에 따라 일주일씩 당번을 섰다. 정해진 날에 복무 당번이 돌아오면 팔레스티나 각 지역에 흩어져 살던 사제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성전 사제들의 당번 일은 언제나 안식일 밤부터 시작됐다. 사제들은 당번 첫날밤을 성전 뜰에서 지냈다. 이 뜰에 모여 그들은 ‘13의 복무’ 제비를 뽑았다. 즉 희생을 바치는 자, 희생을 준비하는 자, 또 제물을 씻는 자, 향을 피우는 자, 나팔을 부는 자, 사람들을 축복하는 자 등등의 일을 제비뽑기로 구분했다. 그들은 또 당번 주간 중 성전 주님의 뜰 감시와 성소 재산 관리를 책임졌고, 그 안에서 범죄가 일어났을 때 재판도 했다. 아울러 안식일 당번 사제들은 삼 분의 일씩 짝지어 성전 문지방과 왕궁, ‘초석 대문’을 지켰다(2역대 23,4).요한 세례자의 아버지인 즈카르야는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 향을 피우는 당번으로 제비 뽑혀 제단에 분향하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 아들 요한의 잉태 예고를 듣게 된다(루카 1,5-20). 즈카르야는 아비야의 아들로서 가장 명성 높은 조의 하나인 여덟 번째 조에 속해 있었다. 대축제에 당번이 되면 사제들은 필요한 희생을 바치고 합당한 의식을 거행했다. 이때에는 여느 때보다 많은 헌금과 제물이 봉헌돼 당번이 된 사제들은 단단히 한 몫을 챙기기도 했다.레위는 우리말로 ‘연결하다’ ‘잇다’의 뜻으로 직무와 연관해서는 ‘하느님께 봉헌된 자’ ‘성소에 봉헌된 사람’을 가리킨다.성경에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모두 네 명이 나온다.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레위 지파의 선조가 된 레위(창세 29,34; 탈출 1,2; 1역대 2,1)와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멜키의 아들이요 마탓의 아버지인 레위(루카 3,24), 또 시메온의 아들이며 마탓의 아버지인 레위(루카 3,29)와 카파르나움 세관으로 있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르 2,14)이다.레위인의 조상인 레위는 원래 약탈을 일삼는 잔인한 사람으로 성경에 나온다. 레위는 그의 형제인 시메온과 함께 여동생 디나를 욕보인 대가로 스켐 성읍에 들어가 칼로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다(창세 34,25-31). 이 일로 아버지 야곱은 죽을 때 그들을 축복하지 않았다(창세 49,5-7). 이런 이유로 창세기에는 레위가 열두 지파의 하나로 나와 있지만(창세 49,3-27), 민수기에는 요셉의 아들인 에프라임과 므나쎄로 대체돼 레위가 열두 지파에 속하지 않고 있다(민수 1,5-15). 레위의 아들 게르손과 크핫, 므라리(창세 46,11)는 레위 지파 세 분파의 선조들인데 이들은 성전을 지키고 만남의 장막에서 여러 직무를 수행했다. 또한 사제 직무를 수행한 레위인과 아론 및 차독계 대사제들도 모두 레위에게서 유래됐다. 성경에는 레위 지파에서 분명히 제사장의 임무를 맡은 것이 나온다(탈출 2,1 이하; 6,20; 35,25 이하; 신명 33,9 이하). 하지만 요시아 왕이 예배 개혁을 시행한 후 레위인들은 예루살렘의 사제들보다 낮은 등급의 사제로 성전에서 봉사했다. 이에 레위인들은 희생 짐승의 각을 내고 가죽을 벗기는 사제의 조수, 제물에 쓰일 빵을 만드는 일, 창고 간수, 거룩한 수조를 감시하는 일을 맡아 했다. 레위인들은 십일조의 절반을 받은 것 외에는 모든 세금을 면제받고 병역에서도 면제됐다(민수 1,48-54). 레위인들은 성경에 따라 25세부터 50세까지 성전에서 일하고 은퇴했다(민수 8,24-26). 레위인들은 율법에 따라 하느님께 봉사하도록 봉헌돼야 할 첫 아들의 대리자였지만 그 지위에 비해 지나친 멸시를 받았다. 레위인들은 성소에 출입할 수 없었고, 제단에 접촉할 수도 없었다. 이 금령을 어기면 사형에 처해졌다. 이처럼 레위인들은 아론의 후손인 사제들에 비해 참으로 보잘것없는 존재들이었다.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은 레위인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탈무드에는 성전 경비대장이 순찰을 하다 졸고 있는 레위인을 발견하고는 곤봉으로 구타하고 옷에 불을 지른 일이 기록돼 있는가 하면 주님의 뜰에서 레위인들이 매 맞고 비명을 지르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제들의 일상이 소개되고 있다.신약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의 저자는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은 멜키체덱의 사제직에 따른 예수님의 사제직은 영원히 완전하여 레위의 불완전한 사제직을 완성하신다고 고백하고 있다(히브 7,11-28).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7.31
![[성경 속 궁금증] 66. 성경에서 세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5034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66. 성경에서 세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로마 총독 위임받아 세금 걷으며 수탈 자행…동족 착취하는 배신자로 미움ㆍ경멸의 대상세리들(이탈리아 작가 미상, 16세기경). 신약성경에는 세리들이 많이 등장한다. 유다인 사회에서 일부 직업 종사자들은 천대를 받았다. 예를 들어 수공업의 경우 업종 자체가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았으며, 여자와 함께 일을 해야한다는 점에서 무척 낮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심한 경멸과 미움을 받고 법의 보호로부터도 제외됐던 사람들이 바로 세리들이었다. 이들은 유다인 사회에서 구제받을 수 없는 죄인들로 간주됐다. 로마는 유다인에게 여러 종류의 조세와 관세, 인두세, 토지세, 악명 높았던 통행세, 시장세, 물품세 등을 거뒀다. 로마 총독의 위임을 받아 세금을 징수하던 세리들은 자본가 계층의 일원이었다. 세금 징수권을 독점하고 그 과정에서 드물지 않게 수탈을 자행했기에 유다인에게 원성을 샀다. 예수님 시대 정식 공무원이었던 세금 징수원과 세리는 구별됐다. 세금 징수원들은 인두세와 토지세를 관장하는 정부 관리였다. 그들은 주민에게 능력에 따라 세액을 할당하고 국가 권력에 의해 합리적 절차를 밟아 세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 금액의 일부를 봉급으로 받았다. 그런데 세리들은 일정 기간 어떤 지역의 통행세를 받을 권리를 지니게 된 세관장에게 소속된 부하 직원들이었다. 세리들에겐 각종 공민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들은 배심원이나 공증인이 될 수 없었다. 특히 세리들이 유다인들의 극심한 천대를 받았던 이유는 그들이 보인 부패와 부조리 때문이었다. 세관장들은 공개 입찰에 의해 예상 세입을 선불로 로마인에게 지불해야 했다. 그러니 입찰을 따낸 다음에는 일정 기간 자신이 투자한 돈 이상으로 수입을 갖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다. 세액을 책정하고 징수함으로써 경비와 이윤을 포함한 선불금을 회수했다. 따라서 세리들은 통행세를 징수할 때 무슨 조건을 붙여서라도 정해진 세금 이외에 자신들 호주머니를 채울 돈을 주민들로부터 더 걷어냈다(루카 3,12 참조). 그러니 지역 주민의 미움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세리들은 가장 악질적 집단으로 동족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사람들로 간주됐다. 따라서 유다인 사회에서 세리들은 배신자로 낙인찍혔고, 본인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도 미움과 경멸의 대상이 됐다. 세리들은 세금을 징수하는 로마 제국의 하수인이며 대리인들이었던 것이다. 대부분 유다인이었던 세리들이 동족에게 이런 악행을 저질렀으므로 이방인 또는 죄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됐다. 따라서 세리들은 유다인 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척당하고 추방됐다. 세리들에게 제시된 회개의 조건은 매우 엄격했다. 자신들의 직업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남들로부터 부당하게 빼앗은 몫에 5분의 1을 더해 되돌려줘야 했다. 이러한 혹독한 회개의 조건으로 인해 그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들의 우두머리인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셨다(루카 19,1-10). 예수님은 세리인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기도 했다(마르 2,13-17). 바리사이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몹시 못마땅해 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말씀하셨다. cpbc2013.03.27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7) 존 필 마이어 (중)](//cpbc.co.kr/CMS/newspaper/2015/02/rc/553620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7) 존 필 마이어 (중)예언자·세례자·치유자 등 다양한 얼굴 지닌 ‘역사적 예수’ 존 필 마이어 신부가 추구하는 역사적 예수는 역사 비평 방법으로 재구성된 학문적 결과이다. 그리하여 마이어는 역사적 예수의 학문적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처음부터 신앙을 배제하고 순전히 역사적 방법으로 복음서를 분석해 예수의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마이어에 의하면 역사적 연구의 목표는 역사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개연성을 확보하는 하는 것이다.「주변부 유다인 1」 - 문제와 인물의 뿌리 마이어는 자신의 저서 「주변부 유다인」 제1권에서 예수의 생애를 1세기 팔레스티나의 나자렛을 배경으로 살펴본다. 예수는 헤로데 대왕(재위 기원전 37~4년) 말년인 기원전 4~7년 사이에 베들레헴보다는 나자렛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예수는 기원후 28년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요한 복음서의 연대기에 따라 해방절과 안식일이 겹쳤던 30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으로 보인다. 마이어는 요셉이 다윗 가문의 후손이고 가족 구성원의 이름들이 과거 영광스러웠던 성조들, 이집트 탈출, 약속의 땅 정복 시기의 인물에게서 빌어왔다는 점에 주목하고 예수 가족의 이름들이 이스라엘 재건에 대한 열망을 지닌 갈릴래아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본다. 그러나 마이어는 예수의 동정녀 잉태가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의 자료에만 등장할 뿐, 마르코 복음과 요한 복음 나아가 사도 바오로 서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사성을 판단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고 본다. 마르코 복음 6장에 등장하는 요세와 야고보 등의 형제자매들이 예수의 사촌이라는 예로니모의 해석은 사촌(콜로 4,10)이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지지를 받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요셉의 전처 소생이라는 에피파니아의 견해도 성경 자체에 근거한 것이 아닌 구전 전승에 근거한 것으로 보고 일찍이 제기된 헤제시푸스(Hegessipus, 2세기)와 헬비디우스 (helvidius, 4세기)의 해석 전통에 따라 예수의 형제들은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낳은 자식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한다.예수의 직업인 목수(tekton)는 생계를 위해 힘들게 노동을 하는 요즘의 ‘블루칼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바오로처럼 전문적인 랍비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아람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면서 히브리 성경을 읽고 글을 쓸 줄 알았으며 이방인들을 만나고 생업에 필요한 기초적인 그리스어 지식을 습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는 당대의 유다교 전통과 달리 세례자 요한처럼 독신이었을 것이며, 사제 계급이 아닌 평신도 신분이었다. 「주변부 유다인 2」 - 멘토, 그리고 하느님 나라 말씀과 기적 마이어는 「주변부 유다인」 제2권에서 예수의 멘토(스승), 메시지, 기적을 주제로 예수의 말씀과 행위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예수는 한때 요한 세례자의 제자 그룹에 속해있었으며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루카 7,28)라고 칭할 만큼 요한을 위대한 예언자로 평가하였고 그에게서 세례 활동과 종말론적 전망을 이어받았다. 예수는 1세기 종말론적 유다인 예언자로서 하느님 나라가 임박한 미래에 다가오리라고 선포하였으며,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준비 예식으로 세례를 베풀었다(요한 3,23). 그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쳤고,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열두 사도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말론적인 재건이 이루어질 것이며 여기에 이방인들도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예언했다(루카 13,29). 동시에 예수의 구마 행위들과 기적적인 치유를 통해서 적어도 일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다고 선포됐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구원을 이미 중개해 주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구원 체험은 그가 세리 및 죄인들과 자유분방하게 식탁의 친교를 나누고, 제자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단식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예수가 누구였건, 그리고 그가 어떤 인물이었건 간에 그는 하나의 신학적 제목이나 사회학적 모델로 쉽사리 담아낼 수 없는 복합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주변부 유다인’(A Marginal Jew)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종말론적인 예언자, 세례자, 구마사, 기적을 행하는 자(miracle-worker), 치유자,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적 스승의 면모 등이 예수라는 인물 안에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여러분에게 왔다(루카 11,20)는 예수의 말씀은 결국 그분의 기적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하여 마이어는 기적 이야기가 복음서 모든 전승 층에서 언급되고 있다는 다수적 증언의 기준, 설화와 토막 말씀(로기아) 등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는 양식비평의 관점, 나아가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1세기의 유다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예수를 놀라운 일들(paradoxa)을 행하는 이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기적 전승의 역사성은 매우 견고하다고 평가한다. 마이어는 구마 행위 중에서도 특히 귀신 들린 소년 이야기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구마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으로 소급해 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마이어에 의하면 치유 전승은 비록 후대에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점에서 다시금 편집되기는 하였지만, 중풍 병자 이야기(마르 2,1-12), 벳자타 못의 중풍 병자(요한 5,1-9),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마르 10,46-52), 벳사이다의 눈먼 사람(마르 8,22-26), 실로암 연못에서 씻은 눈먼 사람(요한 9,1-7), 귀먹은 반벙어리(마르 7, 31-37),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는 이야기(마태 8,5-13;요한 4,46-54)는 역사의 예수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어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희귀하지만 다수적 증언의 기준과 다양한 형태의 문학 양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야이로 딸의 소생이야기(마르 5,21-43), 나인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 (루카 7,11-17), 라자로를 살리는 이야기(요한 11,1-46) 속에는 편집 이전의 초기 전승이 담겨 있다고 본다. 특히 어록 전승(마태 11,5)은 예수께서 공생활 중에 죽은 이를 살리셨음을 말해준다.‘자연 기적’이라고 분류된 이야기 중에는 군중에게 빵을 먹인 이야기만을 제외하면, 이런 이야기들은 다양한 신학적 목적을 위해 초기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다수적 증언과 종말론적인 특별함이 있는 즐거운 식사를 하는 예수 습관에 대한 일관성의 기준으로 볼 때, 빵의 기적 이야기의 근저에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본다. 마이어에 의하면 빵의 기적 이야기는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예수께서 많은 군중과 더불어 물고기가 곁들인 기억할 만한 식사를 했다는 역사적 사건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백운철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장) 평화신문2015.02.03
지역 사회 벗 될 것 다짐청주교구 미원본당, 설립 50주년 감사 미사 봉헌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미원본당 설립 50주년 기념미사를 통해 말씀과 성체 중심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선교 공동체가 되기를 당부했다. 장광동 명예기자 청주교구 미원본당은 11일 본당 설립 50주년 감사 미사를 봉헌하고 100주년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미원본당 신자들은 본당 50주년을 2년 전부터 다채롭게 준비해 왔다. 전 신자 국내 성지순례를 통해 순교 신심을 다졌고, 지난 4월 부활시기까지 2년간에 걸쳐 본당 수호성인인 ‘승리의 모후’ 성모상 가정 순례기도를 통해 가정 성화를 도모했다. 또 50주년을 50일 앞두고 ‘50일 새벽 미사 봉헌운동’을 통해 50가정이 새벽 미사에 참여하는 열심을 보였고, 미사와 묵주기도, 성체조배 등 영적 예물도 정성으로 준비했다. 이처럼 2년간 정성껏 준비한 영적 예물과 본당 교우들이 나눠 쓴 성경필사본을 50주년 기념미사 때 봉헌했다. 박민호 주임신부는 “설립 50주년을 맞아 본당 공동체가 새롭게 태어나고 지역에서 사람들에게 따뜻한 그늘이 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미사를 주례한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도 강론에서 “설립 50주년을 맞아 미원본당은 하느님 자녀 간에, 이웃 간에 서로 용서하고 새출발 하는 새날, 새 시작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면서 말씀 중심의 공동체, 성체 중심의 공동체, 가장 작은 이를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 선교하는 공동체로 거듭날 것을 당부했다. 장광동 명예기자 jang@pbc.co.kr 평화신문2014.10.14
![[가톨릭 신앙의 보물]<2>성경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하)- 홍승모 몬시뇰(인천가톨릭대 신학대학장)](//cpbc.co.kr/CMS/newspaper/2013/11/rc/483884_1.2_titleImage_1.jpg)
[가톨릭 신앙의 보물]성경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하)- 홍승모 몬시뇰(인천가톨릭대 신학대학장) 말씀 잘 뿌리내리도록 마음의 토양 가꿔야 성경에서 씨앗은 '생명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림은 장 프랑수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1850년).지난 호에서는 성경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을 살펴봤다. 이제 이 관점을 잘 적용해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장)를 살펴보자. 복음에서 비유적 상징으로 묘사된 씨앗은 마음의 토양에 뿌려진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말씀을 뜻한다. 씨앗은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서서히 성장하면서 풍요로운 결실을 얻으리라는 희망이다. 이 말씀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신앙 첫째는 길에 떨어져 새들이 먹어버린 씨와 같은 사람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 경우다. 말씀을 자신의 방법대로 수용한 사람도 포함한다. 하느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를 주관적으로 해석한 경우다. 이는 맹목적 가치관과 편견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 즉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가진 이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말씀을 자기 방법으로 이해하기에 주님과 이웃과 세상을 향해 부정적 시각에 노출돼 있어 주님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한다. 이 사례를 요나서에서 볼 수 있다. 요나는 니네베가 멸망한다는 심판의 말씀을 선언하라는 계시를 받고 기뻐했다. 니네베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자 심판을 철회하셨다. 요나는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나 주님께 기도했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요나의 이런 행동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보다 자기의 말을 하고 싶었던 것에서 비롯된다. 요나는 아주까리 나무를 통해서야 하느님 자비를 깨닫게 된다. 사실 요나는 연민이나 동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요나의 문제는 자신의 삶이나 필요성에 따라 감정이 일어난 것이다. 요나는 니네베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여기지 못했다. 이는 길 위에 떨어진 씨앗, 즉 자기의 관념 때문에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다. 둘째 유형은 돌밭에 떨어져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이다. 돌밭에서도 식물은 어느 정도까지 자라나지만 뿌리가 오래가지 못한다. 이는 한때 믿다가 환란이나 시련을 겪으면 넘어지는 사람을 상징한다. 이를 욥의 예에서 볼 수 있다. 욥은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행복해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삶의 고통과 시련에 직면해서 "내가 의롭고 죄 없이 살았는데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하느님께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했다. 물론 욥은 흠 없이 살아간 사람이지만, 하느님은 욥의 시련과 고통을 바라보며 인간 존재가 무엇이며 삶의 궁극적 목표가 뭔지 가르쳐 주신다. 욥은 하느님께 "저에게 왜 고통을 주십니까. 왜 시련을 주십니까" 하고 물었는데 하느님은 뜻밖의 대답을 한다. 창조 때 일어난 일을 욥에게 물으시며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라고 물으신다. 욥은 드디어 깨닫는다. 인간은 자신을 중심으로 희로애락을 느끼지만, 하느님은 우주의 한점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들여다보게 하신다. 이는 자신의 울타리, 인간 중심적 틀에서 벗어나 하느님 창조구원 계획을 하느님 자유에 따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무죄한 이들이 왜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우리는 정확한 답변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끝까지 우리에게 좋은 일을 이루신다는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모두 우리의 뜻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복음 통해 얻는 하느님 은총의 열매 셋째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기는 하지만 결국 가시덤불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세상의 탐욕,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 인간 본연의 모습을 황폐하게 이끄는 것을 뜻한다.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살아가면서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22??31). 마지막은 좋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잘 성장한 사람이다.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각자 마음의 토양을 기름지게 할 필요가 있다. 곧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해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을 의미한다. 복음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에서 마태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살펴봤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가 제시한 해석에 따라 성경 본문을 읽고 세 가지 관점에서 되새기고 숙지할 수 있다면 내면의 영성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신앙이 주는 보물처럼 중요한 성경해석 방법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씨앗을 담고 있는 하느님 말씀을 더욱 정확히 이해하고 올바르게 해석해야 할 책임이 있다. 더 나아가 주님 말씀을 올바로 듣고 거기에 머물고자 애쓴다면 사람들 목소리, 진실을 듣는 기회가 더 풍부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이 사회와 공동체 안에 뿌리내리도록 자신의 신앙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고 숙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하느님 은총의 열매가 아닌가 한다. 정리=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cpbc2013.11.19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신앙체험수기 우수상오늘도 나는 행복을 선택합니다<5> 남편의 병이 조금 나아지면 강원도 바닷가로, 충주에 있는 휴양림으로, 여수 요양원으로, 남편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24시간 버스, 택시, 또는 기차로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전처럼 원망을 하거나 걱정과 불안에 떨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저의 몸과 마음도 건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보는 시선도 달라졌습니다. "엄마는 아줌마도 아니야!"라며 자기가 보호해야 할 아주 나약한 여자로만 저를 보던 아이가 저의 변화를 느끼며 "엄마도 이제 아줌마가 됐네?" 하며 웃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병은 병원에서 2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지만 그 기간을 훨씬 넘기고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세상의 통계로 부정적인 말을 했지만 저는 긍정을 선택했습니다. 아이도 2년간 카투사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제대를 했습니다. 남편은 아이가 제대할 때까지 제 곁을 지켜 주었습니다. 아이가 제대한 후 6개월을 더 우리에게 희망의 불씨를 심어줬던 남편을 2010년 1월 30일 하느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결혼하고 아무 탈 없이 온실에서 살아온 저희 가족에게서 하느님은 2년 동안 사랑하는 조카, 남편, 아버님, 어머님을 차례대로 당신 품으로 데려 가셨습니다. 세속적으로만 살아왔던 저는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아마도 폐인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하느님을 몰랐던 과거가 있는 여자이지만 지금은 쓰러지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성당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세속에서 살고 있던 저희에게,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듯 저와 아이를 죄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준 남편이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성당으로 가족의 손을 잡고 간 것도 남편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직장생활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생각지도 못할 때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성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느님께서는 남편을 통해 저희 가족을 당신께로 이끌어주셨던 것입니다. 본인은 모세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채 하느님 나라로 갔지만 51년의 생을 마감하며 목숨 바쳐 사랑하는 가족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줬던 것입니다. 생활하면서 어렵고 힘들 일이 닥칠 때면 사랑하는 가족들, 특히 남편의 희생을 생각하며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아주 잘 살고 왔노라 당당하게 말하리라 다짐하며 이겨내고 있습니다. 남편을 보내고 먼저 시작한 일은 쓰다가 중단했던 성경필사였습니다. 성경필사를 시작했을 때는 2년 동안 완필하리라 계획하고 시작했으나 남편의 병 간호로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었기에 성경필사를 멈추고 있었습니다. 성경필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 신약을 먼저 쓰고 구약에 들어서자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도 안 되고 느낌도 없는, 그저 역사책을 베끼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체험한 후에 성경책을 펼치는 순간, 인생의 진리가 그곳에 다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2010년 10월 주교님께 축복장을 받았습니다. 성경필사를 시작한 지 5년 8개월 만이었습니다. 성경완필보다 제게 더 의미가 있었던 것은 포기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시작은 신중하게, 시작한 것에 대한 포기는 없다. 지금도 그 신념은 지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계속) 조인숙 아가타 수원교구 대천동본당 백영민2014.04.16
![[가톨릭 신앙의 보물]<13>가톨릭교회교리서(하)-](//cpbc.co.kr/CMS/newspaper/2014/03/rc/499167_1.0_titleImage_1.jpg)
[가톨릭 신앙의 보물]가톨릭교회교리서(하)-교회 가르침 전하는 신앙의 길잡이성경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쓰여진 교리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 삶의 지침이다. 교회는 어느 시대이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신앙인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 왔다. '성경만'으로도 아니고 '성경 없이'도 아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반드시 필요한데 그 교회의 가르침을 온전히 담고 있는 것이 「가톨릭교회교리서」이다. 이번 호에는 1992년 반포된 「가톨릭교회교리서」의 배경과 구조에 대해 알아보자. 새로운 교리서의 반포 1992년 10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로마교리서」가 나온 지 400여 년 만에 「가톨릭교회교리서」라고 불리는 새로운 교리서를 반포했다. 이미 1985년 세계주교대의원 회의에서 신앙교육을 위한 규범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교들의 의견이 모였고 1986년부터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이었던 요셉 라칭거 추기경의 책임 아래 6년에 걸친 작업이 진행됐다. 총 2865항으로 이루어진 교리서는 먼저 프랑스어로 출판됐고 5년 후 라틴어 표준어판이 발행됐다. 「가톨릭교회교리서」 발간 목적은 가톨릭 교리를 온전하고 완전하게 설명하여, 교회가 고백하고 거행하며 생활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고백하고 거행하고 생활하고 기도하는 것, 이것이 「가톨릭교회교리서」가 가지고 있는 구조이다. 우리는 주일미사에서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신앙을 고백한다. 그래서 「가톨릭교회교리서」 제1편에서는 사도신경을 해설한다. 또한, 우리는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례하는 등 성사 거행을 통해 신앙을 기념한다. 이것을 '전례'라고 하는데 제2편에서는 일곱성사에 대한 해설이 나온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할까?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래서 행복과 덕, 사회정의 등 윤리원칙과 십계명에 대한 설명이 3편에 뒤따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영성생활을 해야 할까? 기도를 통해서다. 교리서를 마무리하는 4편은 주님의 기도를 중심으로 신자들이 영위해야 하는 기도생활에 대해서 서술하고 '아멘'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처럼 교리서는 신앙의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들을 총망라하여 현대인들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제시한다. 2003년에 우리말로 번역된 이 책은 13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왜 이렇게 거대한 책이 나왔을까. 「가톨릭교회교리서」나 그 요약본의 우선적 목적은 예비신자 교리교육을 위함이 아니다. 이것을 다 외어야만 천주교 신자가 될 수 있다면 입교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을 것이다. 이 책의 우선적 목적은 각 지역에 맞는 교리서 발간에 도움이 되기 위함이다. 교리서, 신앙생활의 지침 교리교육은 단순히 교리시간에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교리교육은 교리서가 가지고 있는 구조대로 교리와 성사, 일상에서의 실천과 기도를 통해 종합적으로 이루어진다. 성경공부나 개인 기도, 신부님 강론을 듣는 것도, 신앙서적을 읽고, 봉사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교리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올바로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기준과 지침을 제공하는 책이 「가톨릭교회교리서」이다. 신앙생활에서 의심이 들 경우 궁금한 것이 있을 때 교리서는 누구에게나 큰 도움이 된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잘못된 관습과 가르침에 의해서 어려움에 빠졌을 때 교리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종교개혁시기 사람들은 개인 구원 문제에만 매달려 하느님의 기쁜 나라를 선포하며 살지 못했다. 종교개혁자들과 가톨릭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리서를 발간했다. 물론 신앙생활에 가장 큰 덕목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다. 하지만 "하느님만 믿으면 되지 뭐 그렇게 많이 알아야 하는가"라는 자세는 우리 신앙을 잘못 이끌 수 있다. 특히 '현세적 복'이 신앙의 목표가 되기 쉬운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위험은 더 크다. 많이 배운 사람이 반드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며, 「가톨릭교회교리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교리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일부에서는 개신교는 성경을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는데 천주교는 교리서를 으뜸으로 삼는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천주교 신자에게도 역시 성경은 신앙생활의 근본 규범이다. 교리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이뤄져 있다. 개신교를 출범시켰다고도 볼 수 있는 루터는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교리서를 저술했다. 그의 교리서는 천주교 교리서와 비슷하게 지킬 도리를 담고 있는 계명편, 신앙의 기본이 되는 믿을 교리, 기도와 성사의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이렇게 볼 때 개신교는 성경을, 천주교는 교리서를 중심으로 삼는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교리는 성경과 배치되는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이끌어낸 가르침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은 신앙의 결단과 무관하지 않은 현실의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하지만 생태계 파괴, 안락사, 국제사회와 평화, 생명윤리 등과 관련된 직접적인 가르침을 성경에서 찾을 수는 없다. 성경이 쓰일 때 그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이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신앙인이 아무런 자세나 가져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경에 직접 나와 있지는 않아도 성경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하여 그에 대한 대답을 찾는데 그것을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정리=백영민 기자백영민2014.03.04
![[성경 속 궁금증] 65. 성경에서 입맞춤의 의미는 무엇인가](//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3382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65. 성경에서 입맞춤의 의미는 무엇인가친밀함에 대한 외적 표현이자 존경 표시…주님 팔아넘긴 유다에 의해 '배반' 상징'유다의 입맞춤'(바르나 다 시에나 작, 1356년). 입맞춤은 공적 전례 때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공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오래된 전례 전통이다. 현재의 교회 전례에서는 제대와 복음서에 입맞춤으로 경의를 표하고 있다. 입맞춤은 예로부터 모든 문화에서 통속적 의미를 초월하는 의미를 갖는다. 입맞춤을 통해 힘이 옮겨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신전 입구 문지방과 제단과 신상에 종교 의례로 입맞춤을 했다. 이집트에서도 신과 동일시되는 지배자의 양발에 입맞춤하는 관습이 있었다. 동지적 결속에 대한 표시로서 같은 조직에 속한 사람들끼리 입맞춤을 하기도 했다. 성경에 나오는 입맞춤은 일종의 친밀함에 대한 외적 표현이다. 또한 화해나 친밀감의 회복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입맞춤은 보통 선의의 징표이자 신뢰와 우호, 화해와 애정을 나타낸다(창세 45,15). 구약성경에서 입맞춤은 존경의 표시로 사용됐다. "주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를 만나러 광야로 가거라.' 그래서 아론은 길을 떠나 하느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탈출 4,27). 성경에서 입맞춤은 순명이나 복종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사무엘이 사울에게 입맞춤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선택된 왕에게 순명의 뜻을 표한 것이다.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춘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1사무 10,1). 루카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는 돌아온 작은아들의 목을 껴안아 아들로 하여금 그의 발아래 엎드리는 행동을 막으며 입맞춤으로 용서와 친교의 사랑을 드러낸다. 발에 입맞춤하는 것은 회개와 용서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루카복음에서 죄 많은 여자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는 그 발에 입맞추었다.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8).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신자들이 서로 인사할 때 입맞춤을 했다. 베드로 사도도 신자들끼리 사랑의 입맞춤으로 인사를 하라고 가르쳤다. 입맞춤은 초대교회의 일반적 인사였음을 알 수 있다.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1베드 5,14). 우상숭배의 경우에도 바알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상에 입맞춤했다(1열왕 19,18). 특히 양발에 입맞춤하는 것은 무조건적 복종을 의미한다. 입맞춤은 본래 애정과 헌신의 표시였지만 주님을 배반한 유다에 의해 배반의 표시로 변하게 됐다.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으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그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나서 그분께 입을 맞추었다"(마태 26,48-49). 이처럼 성경에서 입맞춤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cpbc2013.03.12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15> 아버지의 뜻, 나의 뜻 (마르 14,32-42))](//cpbc.co.kr/CMS/newspaper/2013/10/rc/479540_1.2_titleImage_1.jpg)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아버지의 뜻, 나의 뜻 (마르 14,32-42))온전히 아버지 뜻에 맡겨야 엘 그레코 작, '겟세마니의 기도', 1608년.마르코복음의 종결 부분으로, 예수님의 수난사를 접하게 된다. 예수님이 수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장면이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때부터 예수님의 빈 무덤 사화까지를 수난사화(마르 14,1-16,8)라고 한다. 수난사화에는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기도, 최고의회의 신문, 빌라도의 신문, 십자가 처형, 부활 등 다양한 전승이 섞여 있다. 사형선고를 당하신 다음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난사화에는 십자가 사건을 깊이 새길 수 있는 의미가 있다. 11장부터 보자. 예수님이 성전 정화를 하셨다. 성전 정화를 하시면서 성전은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를 통해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봤다. 심판의 날을 앞두고 깨어 있으라고 예고하셨다. 14장에 와서는 예수님이 당신에게 다가올 시련과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다. 예루살렘 동쪽 올리브산에 겟세마니란 곳이 있는데, 겟세마니는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이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올리브 기름은 유용했다. 손님을 환대할 때나 잔치할 때는 올리브 기름을 발랐다. 팔레스티나 기후가 건조하기에 몸을 보습하기 위해 발랐다. 기름은 음식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됐다. 향수나 비누에도 올리브가 많이 쓰였다. 성경에 보면, 전통적으로 왕이나 대사제들이 특별히 하느님 백성과,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용했다. 이는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 풍요로움과 충만한 행복, 기쁨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되시기 전날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에서 고통과 불안에 싸여 기도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여러 가지 귀감을 준다. 첫째, 예수님은 철저하게 혼자서 하느님과 대면하며 기도하셨다. 기도에 대한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셨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고 여러 번 당부하셨다. 셋째, 예수님의 기도가 가장 중요한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있다. 예수님은 공포와 번민에 휩싸인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큰 공포와 번민에 싸여 계셨다. 예수님은 나약한 자신을 주님께 내어 보이면서 인간적인 기도를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 14,36). 이어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라고 하셨다. 온전히 아버지 뜻에 생명을 맡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도가 끝날 무렵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마르 14,41-42). 당신 스스로 그들에게 나아가신다. 육체적 나약함을 버리고, 하느님의 힘으로부터 강해진 것을 볼 수 있다. '탄원' 기도는 단순히 극도의 고통을 토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굳은 믿음으로 구원을 간청하고 확신하는 기도였다. 겟세마니 기도의 세 가지 특징은 두려움에 대한 원천적 경험, 죽음의 힘 앞에서 느끼는 전율, 무(無)라는 나락에서 밀려오는 공포다. 예수님의 결단처럼 우리도 삶에서 빛을 선택할 것인지, 어둠을 선택할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수님은 빛과 생명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겠다고 결단을 내리셨다. 겟세마니 기도를 통해 우리가 믿는 주님이 소름 끼치는 순간을 겪으시는 모습을 매우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 또 자신의 생명에 고군분투하는 예수님과 피곤함 때문에 깨어 있지 못하는 제자들 모습이 서로 대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고통 받으셔야 했다는 점에서 우리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인식할 수 있다. 예수님은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을 식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나의 뜻을 하느님이 이루시도록 하느님께 주입시킨다. '하느님 꼭~' 하면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 주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하셨다. 성장해 가는 아기들이 아버지를 친숙하게 부르는 말이다.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룰 수 있는 생활을 하면 좋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마르 14,42)고 말씀하신다. 당신 스스로 우리 죄인을 위해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방송시간 : 화 오전 8시, 수 새벽 1시ㆍ오후 1시 40분, 금 오후 8시, 토 오후 10시 ※교재 문의 : grace@pauline. or.kr, 02-944-0945 cpbc2013.10.22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4. 오도 카젤(하)](//cpbc.co.kr/CMS/newspaper/2014/07/rc/522083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4. 오도 카젤(하)그리스도 구원 신비, 교회가 거행하는 예식 통해 드러나 신비와 전례의 관계오도 카젤은 신비와 전례의 관계를 정립한 전례신학자이다. 신비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였다면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된 교회의 행위이다. 카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비는 육화한 아들의 행위와 교회의 구속과 치유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시로서 하느님이 영광스럽게 되시고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완전하게 되는 때, 곧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갈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예배의 신비 안에서 실제로 전달되고 이루어진다. 예배 안에서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당신의 구원 사업을 수행하시고 성령 안에서 현존하시면서 선한 뜻을 지닌 모든 사람들 위에서 활동하신다(루카 2,14 참조). 이 신비를 거행하는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주님은 당신의 신부인 교회와 함께 그 신비를 거행하신다(에페 5,14-20 참조). 그리고 주님은 교회에 당신의 모든 보물을 전달해주며 교회는 자신의 후손들에게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전달한다. 치프리아노 교부가 “교회의 단일성에 대하여”(de Unitate Ecclesiae)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이후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신다. 교회는 여인(하와)이 첫 번째 아담의 배우자가 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리스도의 동료가 되고 구속사업의 협조자가 되었다. 교부들은 우리에게 주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물과 피를 통한 신비를 말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에서 태어났고 신비는 교회와 함께한다고 가르친다(아우구스티노, ‘요한복음해제’ Tractatus in Ioannem 120,2 참조). 그래서 교회와 신비는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예배의 신비가 전례가 된 결정적 요인이다. 전례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신비전례(Liturgia)라는 그리스어의 의미는 도시에 봉사하는 개인 활동을 의미했다. 예를 들면 ‘전쟁에 쓰일 배를 만든다든가, 디오니시우스의 명예를 다룬 비극을 공연하는 합창단에 지원하는 일 등이었다. 이 용어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들어오면서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공적 예배에서의 개인적 활동을 뜻했다. 이런 관점에서 전례는 구약과 신약에서 사용되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전 안에서 그의 전례를 수행했다(루카 1,23). 로마의 성 클레멘스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전례는 신약성경의 봉사 모델이 되었다. 신약성경이 삶 전체의 거룩함과 하느님께 대한 봉사를 다루었다면, 교부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공통된 예배행위에 특별하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예식적 의미에서 구약성경에서의 전례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궁극적이고 가장 완전한 옛 계약의 완성을 드러내는 명백하고 고귀한 실재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그 신비를 교회의 고유한 예배의 신비로서의 전례로 가져왔을 때, 옛 계약은 새롭고 더 높은 차원의 실재를 형성하고 표현하며 새로운 예식 안에서 완성하였다. 신랑인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로 인해 생겨난 신부인 교회의 전례우리가 신비와 전례라는 단어를 나란히 놓았을 때 신비는 ‘예배의 신비’로 사용되며 이때 신비와 전례는 동일한 내용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라 하겠다. 신비는 전례행위의 심장 곧, 주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행위들을 통해 약속했던 부활하신 주님의 구속 사업을 의미한다. 전례는 ‘사람들의 일, 봉사’라는 본래의 언어적 의미와 연결되어 교회의 활동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와 연결되는 측면이 더욱 강하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신비 안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함께 활동한다. 그러나 이렇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활동을 명확하게 분리할 수 없어도 신비는 신랑의 활동으로, 전례는 신부의 활동으로 특징 지울 수 있다. 교회가 외적인 예식들을 거행할 때 그리스도는 그 예식들에서 내적으로 활동하신다. 따라서 교회는 실제로 신비를 거행한다. 교회의 신비 거행은 여전히 교회의 예식적인 행위를 드러내기 위한 고유한 방식이라는 의미에서 ‘전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새로운 계약의 신비는 어떻게 전례가 되었는가?교회 전례는 주님에 의해 명령됐고 성령을 통해 내적 충만성을 유지한다 새로운 계약의 신비를 드러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그 신비를 제공하셨다. 곧 신비의 본질적인 내용과 형식은 주님께서 직접 설립하셨고 명령하셨다. 주님께서는 교회가 행해야 하는 바를 알려주셨는데, 무엇이 필수적인지 혹은 공동적인 예식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세부 사항은 언급하지 않은 채, 행해야 하는 바를 알려주셨다. 다만 교회에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시어 교회에게 그러한 능력들을 부여해주셨고 성령을 통하여 교회에 위탁한 그 신비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무궁무진한 보물을 암시하셨다. 또한 새로운 언어들과 표현들을 통하여 그것을 발전시켜 후손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를 움직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양하도록 한다.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선함은 교회가 후손들을 충실히 돌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설명하도록 이끌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들 자신의 것이 되게 한다. 그래서 성령과 사랑의 충만함으로부터 태어난 전례는 아름다움과 현명함의 활동이 된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인간학적 조건 안에서 표현된다 신비의 고유한 요소는 그에 합당한 행동과 주님께서 직접 전해주신 말씀으로 이뤄진다. 주님께서는 가르치거나 새로운 구원을 알려주기 위해 전혀 새로운 방식을 만들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인류가 이미 알고 있는 오래된 방법을 사용하셨고, 그것을 변형하고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세례에 대한 생각과 어떤 형식들은 대부분 인류 안에서 존재하던 것으로 죄를 정화하거나 새롭고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표현하거나 사실화할 때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특히 외적인 예식과 사용된 재료들은 삶의 자연적인 활동과 연관되어 있으며 자연이 생성한 것으로,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정착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물은 물이다. 물이 정화의 자연적인 예식에 사용되거나 고도로 정교해진 예식에 사용된다 하더라도 물은 물이다. 말은 자유롭고 더 쉽게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은 또한 그것이 형성되어온 언어와 연관된다. 하느님은 자신을 계시하기 위하여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례 역시도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의 표현방법과 방식을 사용한다. 예식에 사용되는 텍스트들은 성경의 하느님 말씀에 따른 것이다. 예식에서 성령은 스스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인간의 입을 통하여 복음을 선포한다. 새로운 형식, 새로운 차원을 생성하는 가운데에서도 성경은 전례 안에서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 이 기록을 통해서 그 최초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카젤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교 예배의 신비」(Das christliche Kultmysterium)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님 안에서 충만하고 역사적이며 본질적인 진리에 따라 완성된 그리스도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상징적 형태들로 실행된다. 이것들은 단순한 외적 이미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은 새 생명의 실재에 의해 생명력을 지닌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특별하게 참여하는 것은 한 부분은 상징이고 다른 부분은 실재이다. 예전 사람들은 이를 신비라고 부른다. 신비는 단순한 이미지와 참되고 본래적인 실재 사이의 어떤 매개체(quid medium)이다.” 비록, 과거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원사건과 현재 교회가 거행하는 전례 사이의 효과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으며, 헬레니즘의 신비에 대한 개념과 너무나 유사하기에 생기는 우려 등이 있기는 하지만, 카젤은 그리스도께서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신 약속을 성령의 활동 안에서 교회가 거행하는 전례를 통해 지키고 계심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으로 완성된 구원 신비가 교회에서 상징적 예식을 통한 예배 신비로 드러났음을 이해하고 전례에 능동적으로 온전하게 참여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례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서 삶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또 다른 ‘그리스도의 신비’로 살아가기를 오도 카젤은 원할 것이다. 윤종식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교수)cpbc2014.07.31
![[생활 속의 복음] 하느님의 선물들](//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7226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하느님의 선물들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요한 10,11-18)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부활 축제는 잘 즐기고 계시는지요? 행복하고 힘차야 할 부활 축제 기간에 긍정적이고 밝은 내용을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본의 아니게 지난 원고 내용이 부정적이고 어두웠습니다. 오늘은 밝고 맑은 체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착한 목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해 ‘2015년은 봉헌 생활의 해’라는 교황청 발표를 듣고 의아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헌장 「인류의 빛」과 수도 생활 쇄신에 관한 교령 「완전한 사랑」 반포 50주년을 기념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혹시 예수의 데레사 성녀 탄생 500주년 때문인가?’, ‘수도회(예수회) 출신 교황님의 수도자 특별 우대는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이러한 의문은 지난 3월 다녀온 스페인ㆍ이탈리아 성지 순례 중 살라망카와 아빌라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과 예수의 데레사 성인을 만난 후 풀렸습니다. 두 성인의 삶과 가르침이 교회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위안과 기쁨을 주는가를 알게 됐습니다.두 성인 모두 유다인 가정 출신으로 개종했습니다. 수도회에 입회해 수도자 사이에도 존재했던 빈부ㆍ신분 차별을 철폐했습니다. 기도와 가난한 삶을 중심으로 한 수도회로 개혁을 해 나가면서 온갖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폐결핵으로 3일 동안 혼수상태와 3년 동안 온몸의 마비 상태 체험을 하고 나서 “인생이란, 죽음이라든가 또한 살아 있는 동안 일어난 사건을 두려움 없이 견뎌 가는 것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체험한 예수님 수난 고통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수도원 개혁을 하다가 반대파에 의해 톨레도 수도원 독방에 구금됐습니다(1577년). 그 당시 일주일에 한 번 마을 사람들 앞에서 매를 맞기 위해 걸어 나오는 게 유일한 운동이자 햇빛을 보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개혁으로 교회는 본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상주 가르멜수녀원에서 봉헌된 데레사 성녀 탄생 500주년 기념 미사에서 또 한 번 귀중한 체험을 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카르투시오 수도회 베드로 수사신부님을 만난 것입니다. 신부님은 스페인 세비야 출신이었습니다. 카르투시오 수도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12년 동안 한국에서 생활하신 신부님이 한국말을 못하고, 고기도 먹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폐쇄적인 극보수주의자는 아닌가?”하는 의심을 품었습니다. 성당에 돌아와 수도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후 제가 커다란 실수를 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카리스마는 ‘침묵과 기도’였습니다. 수사님들이 주중에 동료 수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월요일에 4시간여 동안 산책을 할 때뿐이었습니다. 방에서 각자 미사를 봉헌하고 시간 전례를 바칩니다. 수도자들은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수도회였습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도 카르투시오수도회에 입회하려 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후 그 신부님께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연락을 드리고 며칠 전 수도회를 방문했습니다. 산속의 봉쇄 수도원은 조립식 건물이었습니다. 작은 골방에서 지내며 기도와 노동을 통해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그들의 삶을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갖고 화려하게 사는 저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신부님 안내로 당신이 개인 미사를 드리는 아주 작은 공간을 들어갔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께서 계시는 집과 당신 영광이 깃드는 곳을 사랑합니다”(시편26, 8)라는 성경 구절과 “주님,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소서, 네 형제의 얼굴이 바로 나의 얼굴이다”라는 신부님의 묵상 주제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수도원을 나서기 전에 부엌에서 차 한 잔을 얻어 마시며 수도회 입회 58년이 된 스테파노 수사님을 만났습니다. 세상을 잊고 형제들을 위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시는 노 수도자의 맑고 환한 미소에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편견과 고통을 하느님과 일치로 승화시킨 십자가의 요한 성인과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영성은 죄와 유혹에 자주 넘어지는 제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또 수도원에서 만난 두 분 수도자에게서 욕심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철저히 의지하며 시간을 거슬러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습니다.착한 목자로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지 20년이 돼갑니다. 사제품을 받으면서 봉헌한 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하느님! 가난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소서!” 아멘. cpbc2015.04.22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여행] (22)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루카 1,70)](//cpbc.co.kr/CMS/newspaper/2015/05/rc/570472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여행] (22)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루카 1,70)멸망이 구원의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해 왕정 시대에 예언서들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8세기부터입니다. 이들을 시대순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예언서 일반에 대해 한 가지를 짚어 두려 합니다.예언이 무엇이고 가짜 예언은 무엇일까요? 가장 흔한 오해는 예언이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천문학에서 일식과 월식을 예고하면 그것도 예언일까요? 일기예보도 예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의 일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추측이나 점술, 그 밖의 어떤 인간적 기술에 의한 것일 때에는 예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다른 한 편으로, 성경 예언의 많은 부분은 미래에 대한 예고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의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보고 계신지를 전하는 말씀이 많습니다. 그리스 같은 고대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신탁들의 경우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어떤 말이 예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 말이 미래에 관한 것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 14장 14절에서 하느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에 대해서, “나는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말한 적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거짓 예언과 참된 예언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인가 그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말인가에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아닌데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그것이 거짓 예언입니다.어쩌면 하느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서도 예언서의 구절들과 비슷한 말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한 사람의 생각과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예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언서들에서 무수히 반복되며 그저 습관처럼 읽고 지나갈 수 있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라는 구절에 예언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대변인, 하느님의 입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예언자들의 메시지는 587년의 유다 왕국 멸망을 전후로 크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예언자들 각각의 시대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떤 예언서가 유배 전 시기에 속하고 어떤 예언서가 유배 후 예언서인지는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표를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이 표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예언서들은 연대를 정확히 말할 수가 없고, 어떤 예언서들은 편의상 약간 틀린 위치에 넣었습니다(오바드야서). 그리고 다니엘서의 경우 예언자 다니엘이라는 인물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다니엘서의 작성 연대를 기원전 2세기로 추정할 뿐입니다.이렇게 놓고 볼 때, 에제키엘을 분기점으로 하여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크게 변화됩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유배 전의 예언자들은 대체로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고하고, 유배 후의 예언자들은 주로 그 회복과 구원을 알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유배 전에 생겨난 예언서들도 그 후에 재해석과 편집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책 안에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모두 담기게 되기 때문입니다.예언자들의 역할은 이스라엘이 모세의 가르침에 따라 살도록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며, 하느님만을 섬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이사야, 미카,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에서, 멸망이 다가오고 있음을 봅니다. 예언자들은 절박하게 회개를 촉구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도 남왕국 유다도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지 않으며 결국 먼저 이스라엘이, 이후에 유다 왕국이 무너집니다.유배 중에 예언의 어조는 바뀝니다.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심판이 다가오는 것을 말했다면, 이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때문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느님의 주권, 하느님의 용서와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회복을 예고합니다. 이후의 예언자들, 특히 귀향 후의 예언자들도 올바른 삶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멸망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한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현세적 재건을 넘어선 종말론적 구원의 전망도 열리기 시작합니다.이와 같은 전체적 흐름은 심판과 멸망,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배를 더 넓은 전망 안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유배 이전 예언자들의 설교를 듣고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 예언자들은 실패한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점에서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멀리서 바라볼 때 이스라엘의 구원은 멸망하기 이전에 회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멸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유배를 통하여, 철저한 실패를 겪은 다음에 이스라엘은 구원은 스스로의 힘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고 이것이 비로소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은 구원 역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여러 달 동안 보게 될 내용의 요약입니다. “당신께서 한 처음에 창조하신 이들을 증언해 주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선포된 예언들을 성취시켜 주소서”(집회 36,20).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평화신문2015.05.12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12> 무화과나문의 교훈(마르 11.12-25))](//cpbc.co.kr/CMS/newspaper/2013/10/rc/476160_1.1_titleImage_1.jpg)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무화과나문의 교훈(마르 11.12-25))믿음 기도 사랑 없는 신앙 경계해야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경고하셨다. 사진은 무화과 열매. 평화신문 자료사진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티나 전 지역과 우리나라에서는 전남 영암지방에 많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명상과 기도를 했다.무화과는 꽃이 없다는 뜻이다. 무화과나무는 평화와 안전한 생활, 훌륭한 삶을 상징한다. 무화과나무 잎이 무성하면 그 안에 반드시 열매가 있다. 무화과나무가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알몸이라는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신의 치부를 가렸다는 이야기에서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기에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은 하느님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경고하셨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비유로 드신 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정리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파스카(무교절)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다의 가장 큰 장엄 축일이다. 순례객들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라고 외쳤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해 제일 먼저 성전으로 가셨다.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성전에서만 하느님과 백성의 공적인 만남이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인 동시에 하느님 현존의 장소다. 하느님의 집은 예수님의 집이다. 예수님은 성전에 계심으로써 예수님 당신이 하느님 이름으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임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날이 저물 때까지, 성전 곳곳을 둘러보며 성전에 머무셨다. 하느님의 백성이 어떤 상태인지 보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열두 제자와 다시 베타니아로 가셨다. 예수님의 활동은 둘째 날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신 중요한 일은 장사꾼들을 내쫓으신 것이다. 성전 정화 사건이다. 이는 하느님이 백성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이 둘째 날 다시 성전으로 오신다.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마르 11,12-13).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마르 11,14)라고 말씀하셨다. 무화과 철도 아닌데 예수님에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이 성전에 가서 보니 염소와 양, 소가 울고 아수라장 같았다. 예수님은 환전상의 탁자와 비둘기 장사의 의자를 엎는다. 요한복음서에는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요한 2,14-15)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방인들은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성전 안에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사제들의 뜰'을 비롯해 성소와 지성소 등이 있다. 이 지성소는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며, 대사제만 1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왜 격노하셨을까? 유다인들은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게 의무였다. 순례의 축제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의무 순례 대축제는 파스카(과월절,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해방절), 오순절(파스카 후 50일), 초막절(밀 추수 감사) 세 가지가 있다. 예루살렘에 온 그들은 제물을 바쳐야 했다. 제물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기에 흠이 있으면 안 된다. 먼 곳에서 귀중한 양 한 마리를 가져와도 흠 없이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성전 안에는 흠 없는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기 어려웠지만, 장사꾼들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 돈을 받고 팔았다. 성전에서만 사용하는 동전이 있었는데,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돈을 환전해야 했다. 환전을 해야 번제물을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성전을 관리하는 대사제와 장사꾼과의 뒷거래가 있었을 것이고, 이에 예수님은 격노하셨다. 예수님은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쫓아내셨고 환전상의 탁자를 엎으면서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 11,17)라고 하셨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모든 민족에게 전해야 하는데 자기네만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성전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다. 이것을 본 지도자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했다. 예수님은 마음의 성전을 모시고 있는 우리 공동체와 단체에 어떤 채찍을 드실까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님 일행은 셋째 날, 베타니아에서 다시 성전으로 가다가 뿌리째 말라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았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굳건한 믿음과 참된 기도, 진실한 사랑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겉만 화려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다인들의 삶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세 가지 교훈을 알려주신다. 의심하지 않는 굳은 믿음을 지녀야 하며(마르 11,23), 그런 믿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마르 11,24), 기도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마르 11,25)는 것이다.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방송시간 : 화 오전 8시, 수 새벽 1시ㆍ오후 1시 40분, 금 오후 8시, 토 오후 10시 ※교재 문의 : grace@pauline. or.kr, 02-944-0945 cpbc201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