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8> 옛날 옛날에(마르 7,1-5)](//cpbc.co.kr/CMS/newspaper/2013/08/rc/469658_1.1_titleImage_1.jpg)
[윤일마 수녀의 신나는 성경공부] 옛날 옛날에(마르 7,1-5) 사람의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필리프 드 샹파뉴의 '모세와 십계명'. 하느님이 십계명을 주신 것은 인간이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다.나라마다 전통이 있듯이 유다인에게도 전통이 있다. 유다교의 핵심 사상은 성전과 땅, 율법이다. 지금은 성전이 없지만 유다인에게는 성전이 민족의 삶의 심장이었다. 종교, 정치, 사회, 문화 이 모든 것의 구심점을 이루는 것이 성전이다. 성전이 도시를 거느리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도시의 25%를 차지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계신 곳이자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제사를 바치고 사제직을 수행하는 곳이자 하느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곳이다. 성전의 역사는 제1, 2성전 시기로 나뉜다. 제1성전 시기는 솔로몬 시대부터 바빌론 유배 시기까지다. 제2성전 시기는 유배 후 기원전 520년에 재건축된 때부터 로마인에게 완전히 함락된 기원후 70년까지다. 성전에는 매일 예배와 안식일 예배가 있었다. 안식일 예배는 사회적 구심점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충성을 결정짓는 표시 중 하나였다. '쉐마'와 '18개의 기도문'은 유다인의 자아의식을 지탱해주는 것 중 하나였다. 쉐마와 18개 기도문의 핵심 내용은 오직 하느님만이 계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며 하느님은 그들을 구원하러 오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통해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이었다. 이 땅은 빵과 포도주, 가축을 길러내는 하느님의 축복이 이뤄지는 현실 장소다. 또 이들은 율법을 하느님의 법, 하느님의 지혜라고 생각했다. 율법은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계약 헌장으로, 땅에 관한 약속과 축복의 성취를 위해 지켜야 할 규율을 제공했다. 율법을 지키는 실천적 사항 세 가지는 할례와 안식일, 정결례였다. 이는 유다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분해주는 표징이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예수님은 율법에 매여 계실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뛰어넘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유다인들이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이유는 율법은 하느님의 백성에 속해 있다는 표지이자, 구원의 약속을 앞당길 수 있는 충성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구원이 이뤄졌을 때 자신의 신원을 보증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전은 유다인들에게 사회ㆍ종교적 삶의 중심이었다. 유다인들에게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이며 하느님은 성전에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해주고 축복해 주신다고 믿었다. 하느님의 집이 있는 예루살렘을 하느님의 도성이라고 불렀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하느님 백성과 유다교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였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을까. (어쩌면 그들이 생각하기에) 갈릴래아에 남다른 권위를 지니고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랍비가 출연했다는 소문을 듣고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유다인들은 공동체 의식 때문에 제자가 잘못하면 스승이 책임을 진다.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따지듯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율법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정결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레위기 11-15장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산모의 정결례 △사람에게 생기는 악성 피부병 △악성 피부병 환자의 정결례 △남자와 여자가 부정하게 되는 경우 등의 정결규정이 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은 레위기나 율법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손 씻는 규정은 '조상들의 전통'(마르 7,5)이라 불리는 관습법에 속한다. 하느님께 나아갈 때는 정결해야 한다는 규정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인간이 만들었다. 하느님을 위해 만들어 놓은 전통법이 부작용을 낳았다. 이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보다 먼저 사람의 눈에 합당한지 합당치 않은지를 따지는 규정으로 변질됐다. 설에 부모에게 세배하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이다. 세배를 안 했다고 해서 고해성사 봐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도 때론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가치관과 전통이 있다. 그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이들은 예수님이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이 처음 십계명을 주신 것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행복을 주고 생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율법은 사람을 심판하고 생명을 빼앗는 도구로 전락했다. 종교 지도자들이 다 떠난 다음 예수님은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15).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우리 마음이 깨끗하면 좋지 않은 것이 들어와도 물리칠 수 있다. 마음이 악한 것으로 가득하면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 들어와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방송시간 : (화) 오전 8시, (수) 새벽 1시/오후 1시 40분, (금) 밤 8시, (토) 밤 10시 ※교재 문의 : grace@paul ine.or.kr, 02-944-0945 cpbc2013.08.20
![[복음 이야기] (29) 에세네](//cpbc.co.kr/CMS/newspaper/2014/09/rc/530688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29) 에세네광야서 엄격한 공동체 생활한 율법주의자 에세네는 하느님을 따르지 않는 세상을 떠나 광야에서 엄격히 율법을 지키며 살면서 종말을 기다리던 사람들이다. 사진은 에세네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쿰란 유적지. 평화신문 자료사진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와 유다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소(小) 플리니우스, 교부 성 히폴리투스 주교와 에우세비우스 주교 등은 자신의 저서에 한 특별한 유다 종파를 소개하고 있다. 바로 ‘에세네’이다. 에세네는 팔레스티나 사해 인근 엔게디 지방을 거점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오직 동료뿐인 집단 속에서 아내도 사랑도 돈도 없는 가운데 오로지 하느님에게만 관심을 두고 극히 엄격한 규율 생활을 했다”(요세푸스 「유다 고대사」참조). 필론에 따르면 이들 공동체는 적게는 10명 단위로 흩어져 살았고 전체 인원은 4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1951년부터 발굴한 도기 공방과 물 저장고, 식당, 1000기가 넘는 묘지석 등이 필론의 글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에세네는 시리아어 ‘에세노이’에서 나온 말로 ‘거룩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 말은 바리사이들이 자신과 조상을 가리켜 부른 ‘하시딤’(경건한 사람)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됐다. 에세네는 기원전 150년께 이스라엘 하스모네아 왕조가 이방인의 적과 화친 정책을 펴려 하자 이를 반대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로 들어가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종말을 기약하며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종파를 형성했다. 이들의 수장인 ‘정의의 스승’은 한평생 하느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철저히 준수하며 수호할 것을 가르쳤다. 그래서 자신들과 공동체를 ‘야하드’라 부르며 ‘빛의 아들’로서 악의 무리인 어둠의 자식과 용감히 싸워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생활했다. 또 자신들은 종말에 선별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들은 시험을 치르고 2년간 수련을 거친 후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입 단원은 공동체에 전 재산을 바친 다음 규율과 장상에 대한 복종을 서약하고, 부정한 사람들과 떨어져 진리와 정의, 사랑 속에서 생활할 것을 고백했다. 이렇게 단원으로 받아들여지면 매일 몇 차례씩 몸을 씻으며 정결례를 하고, 흰옷을 입고 하루의 정한 시간에 공동기도를 바치고 공동 식사로 채소만 먹으며 생활했다. 또 바리사이보다 훨씬 세심히 율법의 규정을 지키고 히브리말만 사용했다. 정의의 스승 밑에는 12명으로 구성된 참사회가 공동체를 운영하고 규율을 어긴 단원들을 단속했다.하스모네아 왕조 요한 히르카노스 1세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정의의 스승을 처형하자 에세네들은 다마스쿠스로 피신했다가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팔레스티나를 점령한 이후 쿰란으로 되돌아왔다. 이들은 서기 68년 갈리아(프랑스)인과 게르마니아인으로 구성된 로마군 티투스 장군 휘하의 제10군단에 의해 유린당할 때까지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 로마군의 학살 와중에도 에세네는 그들의 가장 귀중한 보물인 성경 필사본 두루마리를 비롯해 많은 문서를 도기에 넣어 인근 절벽 동굴에 숨겼다. 이 두루마리들은 1947년 한 양치기에 의해 발견됐고 이후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됐다. 이때 발굴된 문서를 ‘쿰란 사본’이라 부르는데 구약성경과 쿰란 공동체 규칙, 종말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칙 등 예수 시대 전후 유다이즘의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쿰란 사본은 예수님께서 설교하고 활동한 배경의 직접 정보를 전해주는 문서로 종교사 연구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기원을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사본이어서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예수님과 에세네의 가르침 사이에는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다. 유사성은 오랫동안 전승된 유다이즘을 같이 상속하고 있는 점이다. 사두가이는 모세오경에만 전승을 두고 있지만, 예수님과 에세네ㆍ바리사이는 경건주의인 하시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대해 예수님께서 사람이 안식일보다 더 위에 있다고 하신다(마르 2, 27). 반면 에세네는 안식일을 매우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리사이는 에세네보다 완화된 안식일 규정을 제시한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글자보다 그 정신을 더 중요시하는 점에서 에세네ㆍ바리사이와 차이를 보이신다.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9.24
![[복자 124위 열전] <46> 김세박·안군심·이재행·김사건](//cpbc.co.kr/CMS/newspaper/2015/01/rc/551489_1.0_titleImage_1.jpg)
[복자 124위 열전] 김세박·안군심·이재행·김사건1~12년에 걸친 모진 옥살이에도 신앙을 지키다 주님 품에 안겨124위 순교 복자 가운데 정해박해(1827년) 순교자는 4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신자가 정해박해 때 잡혀가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10년이 넘게 옥에 갇혀 ‘간난신고’ (艱難辛苦)의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옥중 생활은 현대의 인권 개념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관아 인근에 자리 잡고 있던 감옥으로 이송되면 차꼬를 차고 옥살이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다. 신자들은 곤형이나 장형, 치도곤형, 주리형뿐 아니라 때로는 톱질이나 학춤 같은 잔혹한 형벌을 받았다. 지방에선 무릎을 짓밟는 압슬과 같은 고문이나 산 채로 파묻는 생매장이 자행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옥살이는 그 자체로 이미 순교의 길이나 다를 바 없었다. 형벌보다 무서운 옥살이 고통은 배고픔이었다. 굶주림과 갈증으로 아사하거나 배교하는 신자들도 속출했고, 열악한 감옥 환경으로 전염병에 감염돼 병사한 경우도 많았다. 감옥이 신앙의 증거 터가 되고 순교 터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세박 암브로시오 복자정해박해 당시 대구 경상감영 감옥에 갇힌 순교자 중 김세박(암브로시오, 1761∼1828)과 안군심(리카르도, 1774∼1835), 이재행(안드레아, 1776∼1839), 김사건(안드레아, 1794∼1839) 등 네 복자의 경우도 비슷했다. 1786년께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토마스)의 먼 친척인 김세박 복자는 한양의 역관 집안 출신이었다. 신앙을 받아들인 뒤 부인과 자식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방해하자 그는 가족을 떠나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교리를 가르치고 교회 서적을 필사해주며 살았다. 정해박해가 일어나 피신할 수 없게 되자 안동 관아에 자수했으며, 훗날 대구로 이송돼 형벌을 받았으나 백절불굴의 인내로 참아냈다. 하지만 형벌과 금식으로 쇠약해진 탓에 옥중 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듬해인 1828년 12월 3일 옥사했다. 충청도 보령 출신의 안군심 복자는 8년을 더 갇혀 있어야 했다. 청년 시절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교회 서적을 베끼고 교리를 가르쳐 주는 걸 낙으로 알며 살던 중 정해박해 때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이후 대구로 이송돼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님께 대한 사랑은 더욱 열렬해졌고 동료들과 함께 고통을 겪다가 이질에 걸려 1835년 순교했다. 충청도 홍주 출신의 이재행 복자는 12년간을 대구 감옥에서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20세를 넘겨 교리를 듣고 입교한 그는 특히 기도와 독서, 부지런함, 덕행 실천으로 남다른 모범을 보여줬다. 정해박해가 일어나면서 경상도 순흥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문수로 일대)에서 체포돼 안동 관아를 거쳐 대구로 끌려가 힘든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또 충청도 서산 출신의 김사건 복자는 어려서 아버지 김창귀(타대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나 1815년 을해박해 때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고 석방됐다. 그렇지만 경상도로 이주한 뒤에는 기도와 성경 읽기, 전교에 힘쓰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했고, 정해박해 때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돼 대구 감옥으로 이송돼 12년을 고통 속에 살았다. 이재행ㆍ김사건 두 복자는 임금이 사형 집행을 윤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매우 기뻐하며 자신들이 쓰던 물건과 옷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눠주고 1839년 5월 26일에 형장으로 끌려나가 순교했다. 당시 이들의 순교 장면을 바라보던 죄수와 옥졸들이 모두 얼굴에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고 하는 데, 이는 이들이 오랫동안 보여준 모범 때문이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백영민2015.01.21

명동본당 사순특강 기도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 허성석 신부(성 베네딕도회) 허성석 신부 평화신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며 회개와 영적 준비를 하는 사순 시기를 좀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본당에서 실시하는 사순 특강을 연재한다. 특강 순서는 △2일 ‘기도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9일 ‘나를 넘어 그 너머로’ (정규한 레오나르도 신부, 예수회) △16일 ‘기도, 한 송이 꽃이 되어’ (윤해영 바실리사 수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23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기도’ (김용은 제오르지아 수녀, 살레시오 수녀회) 이다.1. 기도의 정의- 하느님과 영혼의 대화기도는 전부이며 신앙과 신앙생활 전체를 요약한다. 기도(祈禱, oratio)의 어원은 라틴말 동사 ‘오라레’(orare. 말하다, 이야기하다, 청하다, 빌다)에서 나온 말로 ‘오라시오’ (oratio,기도) 라 하는데 ‘하느님과 영혼의 대화’라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는 동방 그리스 교부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AD 150~215)와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AD 345~399)는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정의했다. 이 정의가 담고 있는 내용은 상당히 풍부하다.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했을 때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자 동시에 인격적인 분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대화는 인격과 인격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하느님은 인격신이다. 대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참된 대화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말을 받고 주는 것’이다. 말을 받는다는 것은 들음, 곧 경청을 의미한다. 주는 것은 들은 말에 대한 ‘응답’이다. 이처럼 대화는 ‘들음’과 ‘응답’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에 올바른 응답을 못 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역시 들음과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들은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의 응답은 들은 바를 일상에서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2. 기도의 단계인간 안에 몸과 혼, 영의 세 요소가 있는 것처럼 기도에도 세 가지 주요 단계가 있다. 바로 염경, 정신, 관상 기도이다. 몸의 기도인 염경 기도는 입으로 하는 말이며, 머리로 하는 혼의 기도는 정신으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영의 기도인 관상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대화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관상)은 우리 머리(정신)로서가 아니라 전(全) 인간, 즉 마음으로부터이다. 따라서 우리는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올 필요가 있다. 정신에서 마음으로 내려와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내려가는데, 먼저 자연적인 마음(심장)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더 이상 육신의 마음이 아닌 ‘깊은 마음’, 즉 마음의 ‘내적 궁방’으로 내려간다. 여기 마음의 심연에서 우리는 세례의 순간부터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는 하느님의 영을 알게 된다. 3. 기도의 방법기도는 무엇보다도 짧고 단순하게 해야 한다(단순성). 아주 단순하게 기도하라. 세리와 탕자는 한마디 말로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었다.기도는 하느님과의 어떤 거래가 아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로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모님의 기도, 즉 ‘당신 뜻이 제게 이루어지소서!’는 가장 이상적인 기도이다. 예수님도 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하라 가르쳐주셨다. 기도는 우리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도구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비울 필요가 있다. 4. 기도의 자세기도할 때 주의해야 하는 몇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는 겸손이다. 겸손은 기도의 토대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추구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성경 속 세리의 자세이다. 참된 기도를 위해 필요한 또 다른 태도는 감사다. 참된 기도의 정점은 성찬례다. 전례 안에서 창조된 모든 존재가 한 목소리와 하나의 사제적 행위로 하느님께 우리를 위해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또 우리 기도가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끌기 위해서는 항상 통회의 정신으로 드려야 할 필요가 있다. 통회는 영적 환상에서 해방되기 위한 열쇠이다. 정리=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백영민2015.03.04
![[복음 이야기] (45)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다](//cpbc.co.kr/CMS/newspaper/2015/03/rc/557994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45)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다머리보다 가슴을 울린 복음 선포자 예수님께서는 아주 쉬운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쳐주셨다. 사진은 심순화 작, ‘진복팔단’.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아주 쉬운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다양한 비유와 비상한 설득력으로 제자들과 회중을 회심시키는 예수님의 모습이 복음서 곳곳에 등장한다. 오늘날에도 종종 볼 수 있지만, 고대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광장이나 시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웅변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도 예루살렘 성전 앞뜰이나 길거리에서 사람들 앞에 나서 큰 소리로 자기 주장을 펼치곤 했다. 목소리가 작거나 수사적 재능이 부족한 랍비들은 옆에 말솜씨가 능란한 변사를 두고 자기 말을 큰 소리로 되풀이해 청중에게 들려주게 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하신 말씀도 이러한 풍속을 빗대어 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님처럼 당시 랍비들도 비유를 들어 설교했다. 바오로 사도의 스승인 저명한 율법 교사 가말리엘은 즉석에서 한 가지 주제로 300가지 이상의 예시를 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내 아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들어라.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마라. 그것들은 네 머리에 우아한 화관이며 네 목에 목걸이다”(잠언 1,8-9)라든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처럼 은유, 비유, 시, 예화적 표현으로 설교하길 즐겨했다. 이를 유다인들은 히브리말로 ‘마샬’이라 했고, 「잠언」의 책 이름도 ‘마샬’이다.하지만 히브리인의 설교법은 헬라(그리스)나 로마인의 수사학과 전혀 달랐다. 헬라와 로마의 수사학은 삼단 논법에 따른 사상 배열과 논리 증명이 분명했다. 반면, 유다인들은 논리보다 듣는 사람들의 감정과 교감하는 방법을 택해 직관적인 비유와 현실적인 교훈을 빌어 가르쳤다. 학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에서 선교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에는(사도 17,22-34) 이성과 감성에 호소하는 웅변술의 차이가 한몫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예수님께서도 분명 ‘마샬’을 알고 계셨고, 그것을 사용하셨다. 구체적으로 겨자씨의 비유(마태 13,31-32)라든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26-29), 혼인 잔치의 비유(루카 14,15-24), 목자의 비유(요한 10,1-6)가 예수님께서 하신 마샬이다. 탈무드에도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가 나오는데 혼인 잔치의 비유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그것이다.또 이러한 긴 비유가 아니더라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1)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루카 4,23) 등 단문의 짧은 말씀도 마샬이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를 비롯한 성경학자들은 복음서의 예수님 비유 말씀을 탈무드의 마샬과 비교하여 “지극히 간결하고 정확하며 참신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문학적 기교가 조금도 없지만,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에 있어서는 가장 뛰어나게 다듬어진 문학적 기교를 능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니엘 롭스는 “복음서의 비유는 가장 비근한 현실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고상한 개념을 뚜렷이 반영시킨다. 그것은 무지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지만, 학식있는 사람에게도 반성을 촉구한다”고 가르쳤다. 또 리치오티 몬시뇰은 예수님의 비유를 “인간 수준에서 최고의 언어요,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말씀’이 가장 낮게 우리에게까지 내리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고백했다. 아울러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거룩한 신비에 대한 가슴 벅찬 환호성”이라 표현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저서 「나자렛 예수」에서 “비유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핵심이다. 문명이 바뀌어도 비유는 그 신선함과 인간미 때문에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을 안겨 준다”며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그리고 본문에 비쳐 나오는 아람어의 특성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고, 또 어떻게 가르치셨는지가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즉 마샬은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말처럼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하느님 나라’로 믿으라”는 단문으로 정리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처럼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5.03.03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25>가난과 부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풍요로움은 하느님 축복, 재물에 가치 두기 보다 나눔 수단으로 써야
행복 판단 기준으로 경제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신분제 철폐로 얻은 인간 평등권이 무색할 만큼 새로운 신분제도가 생겨났다. 바로 경제적 부로 구별되는 신분계급 등장이다. 안타깝게도 돈이 중심인 사회에서는 재산의 유무로 사람 가치를 평가한다. 그래서인지 성공과 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세상이 됐다. 이익 추구를 위해 타인의 권리나 안전은 뒷전이고, 진리를 탐구해야 할 상아탑 대학은 더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하느님의 자리, 돈의 자리아버지는 6ㆍ25전쟁 중 남하한 평양 출신 실향민이셨다. 고향을 떠나 정착한 곳에서 아버지는 주류 기득권층이 되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지연ㆍ혈연ㆍ학연이 소중하게 여겨지던 사회에서 실향민이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어서일까? 아버지는 항상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근검절약하는 습관에 길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사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다. 가장 기본적인 것만 지녀도 사제로 살아가는 데 충분하기에 비싼 물건을 사거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내 모습을 아는 신자 몇 분은 “참 소박하게 사는 것 같아요”라고 칭찬을 한다. 사제의 소박함이 덕으로 칭해지는 것을 보며, 우리 사회 안에서 사제라는 신분 역시 부유층의 한 부류로 비친다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래 전 TV 녹화를 위해 평화방송에 간 적이 있었다.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가용이 없었다. 그래서 본당 교우 분에게 서울 방송국까지 운전 봉사를 부탁했다. 방송국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녹화를 마치고 왔더니 주차장 관리하시는 분이 주차비를 요구하였다. 그래서 방송 녹화를 위해 방송국에 왔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신부는 주차비 면제지만 신자분이 운전했기에 주차비를 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같이 자가용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직원분은 몹시 당황해 하셨다. “자가용이 없는 신부님도 계시냐?”는 말과 함께 말이다. 지금 사는 신학교는 강화도에 위치한 까닭에 자가용을 마련했지만, 아직도 그때 그 주차장에서 일하셨던 직원분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그분의 판단 기준에는 웬만한 신부들은 다 승용차가 있고 그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신학생 시절이나, 유학생 시절에 비하면 지금 나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소유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소유한 것이 많을수록 내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점점 더 적어지는 것 같다. 육체적으로 편해지기 시작하니 가난을 멀리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재화는 나눔 실천을 위한 수단교회에서는 부와 가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구약성경에서는 재화와 부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여준다. 성경은 우선 재화와 부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본다. 사치나 부유함이 아닌 풍요로움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복으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재화와 경제적인 부는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재화와 부에 대한 부정적 면 역시 나타나는데 문제의 핵심은 그 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구약의 여러 예언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기와 고리대금업, 착취를 커다란 불의로 단죄한다(이사 58,3-11; 예레 7,4-7; 호세 4,1-2; 아모 2,6-7; 미카 2,1-2 참조). 성경은 부의 소유 자체가 아니라 그 부를 쌓기 위해 쓴 수단과 방법, 부를 올바른 곳에 사용하지 않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누군가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올바르지 않은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다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재화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소유한 사람 역시 마땅히 비난받을 만하다(「간추린 사회교리」323항 참조).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는 조건으로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9,21 참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그가 부자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눌 줄 모르기 때문이다.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보다 자신이 소유한 것에 더 큰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기 쉬우며, 자기 손으로 한 일로부터 힘을 얻고 자신의 힘에만 신뢰를 두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은 재물에 모든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되며,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하느님을 신뢰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가난함의 진정한 도덕적 가치를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는 우리 사회가 소유보다는 나눔이라는 도덕적 가치에 더욱 힘을 쓰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평화신문2014.07.23
![[성경 속 궁금증] 59. 성경에서 팔레스타인은 어떤 곳인가](//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586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59. 성경에서 팔레스타인은 어떤 곳인가이스라엘 중심으로 한 지중해 동해안 일대 가나안으로 불리다 로마인들이 지명 바꿔다윗이 필리스티아 장수 골리앗을 쳐 죽인 이야기를 그린 '다윗과 골리앗'(구에르치노 작, 17세기). 얼마 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교전 소식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유엔은 최근 총회 결의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국가 자격과 독립국 건설을 65년 만에 인정했다. 이로써 국제사회에서 팔레스타인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이스라엘로부터의 독립 움직임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이스라엘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새로운 충돌의 계기를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따른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의 동해안 일대를 일컫는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과 레바논, 요르단과 시리아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지역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교, 유다교, 이슬람교에서 모두 거룩한 땅으로 여기는 곳이다. 팔레스타인은 '필리스티아 사람들(Philiscines)'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 필리스티아인은 바다를 떠돌던 해양민족이었는데, 지중해 연안에 도시를 세우고 정착한 것이다. 이들은 차츰 내륙으로 들어왔고, 당연히 이스라엘 민족과 부딪혔다. 초기에는 그들 군사력이 더 강했다(판관 13-16장 참조). 이후 필리스티아 민족은 B.C 11~12세기에 영토 팽창 정책을 펼쳤다. 바다에서는 가나안의 시돈, 티로, 비블로스와 해상무역 주도권을 다퉜고, 내륙에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크고 작은 싸움을 끊임없이 벌였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때'(판관 14,4)에 삼손이 등장해 눈부신 활약상을 보이기도 했다(판관 13-16장).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었던 야훼의 계약궤를 빼앗기도 했다(1사무 4,1-11). 필리스티아 민족은 다윗 왕 때 이르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패하게 됐다.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 위협을 주는 세력이 될 수 없었고,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솔로몬 임금은 이집트와 조약을 맺고 교류를 강화했다. 틈새에 끼인 필리스티아는 점점 무력해졌고, 강국들의 지배를 받다가 마침내 역사에서 사라졌다. 필리스티아인들 땅이라는 뜻의 팔레스타인이란 지명만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팔레스타인은 로마인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가나안으로 불리었다. 로마인들도 처음에는 가나안의 유다지방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을 평정한 뒤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지명을 바꾼다. 유다인과의 전쟁에 질린 나머지 연관성을 없애려는 의도였다. 로마인들은 유다인들의 끈질긴 저항과 마지막 독립전쟁(A.D 132~135)을 분쇄한 뒤 일부러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을 사용했다. 이제부터 이 땅은 이스라엘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강력한 표현인 셈이다.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을 하느님이 계시한 구원과 약속의 땅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본래 이곳에 살던 소수 민족들에게도 팔레스타인은 포기할 수 없는 삶의 터전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영토분쟁이 끝나고 중동 지역이 평화와 안정을 찾는 날은 언제쯤 오게 될까.퇴사자22012.12.25
![[출판] 책꽂이 -알기 쉬운 성경 등](//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4991_1.1_titleImage_1.jpg)
[출판] 책꽂이 -알기 쉬운 성경 등 알기 쉬운 사도신경 크리스토프 뒤포르 지음/이재정 옮김/가톨릭출판사/9000원 사도신경은 초대교회 때부터 전해온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종합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교회 신앙이 사도신경 안에 다 담겨있다. 그런 이유로 사도신경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은 교회가 해야 할 교육 가운데 최우선이었다. 이 책은 프랑스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장인 크리스토프 뒤포르(엑스 에 아를대교구장) 대주교가 쓴 사도신경 해설서로, 사도신경에 담긴 신앙적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풍부한 예화와 비유로 '육신의 부활', '영원한 삶'과 같은 심오한 신학적 개념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뒤포르 대주교는 "사도신경을 되새기며, 신앙 안에서 '예, 저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은총이 여러분에게 주어지기를 기원한다"며 "신앙은 인간을 영원한 사랑의 원천으로 이끌어준다"고 말했다.죽음 전봉순 지음/바오로딸/9000원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도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히브 9,27)이며,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여호 23,14; 1열왕 2,2)이라고 설명한다. 죽음은 모두가 가는 길임에도 필연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뒤따른다. 죽음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삶의 문제로 이어진다.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한다. 저자 전봉순(예수성심전교수녀회) 수녀는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난 죽음과 관련된 부분만 연구했다. 죽음에 관한 이해와 정의를 성경을 기초로 이해하기 쉽게 성찰한다. 전 수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이들에겐 죽음이 두려운 종말이 아니라 삶의 시작"이라며 "죽음과 부활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교회의 재산법 한동일 지음/성바오로/2만 원 교회법전 가운데 교회 재산을 다루는 제5권 '교회의 재산 제1254~제1310조'를 해설한 책이다. 교회가 재산법을 만든 취지는 재산의 부적절한 취득, 과도한 축적, 무분별한 관리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또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만 사용돼야 할 현세적 재산의 보호와 충실한 사용, 현명한 양도를 위해 제정됐다. 책은 교회법전 제5권과 같은 구성을 따라 △제1부 교회법 입문 △제2부 재산 취득 △제3부 재산 관리 △제4부 계약 및 특히 양도 △제5부 신심 의사 총칙 및 신심 기금으로 이뤄졌다. 부록으로 교구와 수도회, 본당 사목구, 교황청 등의 재산 관리 원칙을 실었다. 교황청 라테라노대학에서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고, 교황청 대법원 변호사로 활동하는 한동일 신부가 펴낸 첫 책이다. 철학의 멘토, 멘토의 철학 박승찬ㆍ노성숙 지음/가톨릭대학교출판부/2만 2000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키에르케고어에 이르기까지 세계 지성사를 주도한 위대한 서양 철학자들의 생애와 철학사상, 철학사적 의미를 살펴봤다. 저자 박승찬(가톨릭대)ㆍ노성숙(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철학자들은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이나 태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고, 때론 자신과 타인과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촉구한다"면서 철학자들을 인생의 멘토로 삼으라고 조언했다. 또 "철학자들 역시 좌절의 위기에서 자신의 멘토를 만나 성장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면서 "이 책이 시대를 뛰어넘어 철학자들과 철학적 대화를 통해 삶을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조은일2013.03.27

신부·목사·스님의 토크 신공은?TV 프로그램 인기, 삶의 지혜와 종교 간 이해 높여 토프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고 있는 홍창진 신부(왼쪽부터), 인명진 목사, 마가 스님. 모여앉은 신부·목사·스님의 대화가 심상치 않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자체도 신선한데 거침없이 이어지는 대화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못해 이야기 끝마다 웃음바다다. 지난 5월부터 유머 넘치는 성직자들의 허심탄회하고 유쾌한 세상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tvN 인기 프로그램 ‘종교인들의 토크 신공 - 오 마이 갓’이 시청자들의 꾸준한 주목을 받고 있다. 매주 유쾌한 화합의 장을 만드는 성직자는 홍창진(수원교구 광명본당 주임) 신부ㆍ인명진(갈릴리교회 담임) 목사ㆍ마가(동국대 정각원 교법사) 스님. 이들이 지금껏 나눈 주제는 △분노 △외모 불평등 △불신사회 △돈 △웰다잉 등 다양하다.“운명은 고스톱과 같아요. 자신이 쥐고 있는 패, 내가 살아야 할 깔린 패, 숨겨진 패가 있는 거예요. 어떤 패를 낼지는 자신의 선택이지만, 미래를 읽는 건 신의 영역인 셈이죠.”(인명진 목사)“불교에서는 ‘불살생’이라고 해서 작은 모기 한 마리도 죽이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하지만 요즘엔 작은 생명도 하찮게 여기잖아요. 윤리 의식이 뒷받침돼야 합니다.”(마가 스님)“예수님께서도 그 시대에 신고 다니셨던 샌들을 살 때 아무래도 더 예쁜 걸 고르지 않으셨을까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게 잘못은 아니죠.”(홍창진 신부)주제에 따라 알기 쉬운 비유와 교리가 덧붙여진다. 진중한 대화가 오가다가도 “신부님께 소개팅을 주선해달라는 분도 계세요?”, “스님이 어떻게 성경 내용을 그렇게 잘 아세요?” 등 당혹스러운 질문도 오간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시대가 필요로 하는 ‘위로’와 ‘공감’ 코드가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방청객들의 즉문즉설을 통해 궁금증 해소도 바로 이어진다.인명진 목사는 “종교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작은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저희 또한 이웃 종교인의 생각과 교리를 배울 수 있어 뜻깊은 자리”라고 말했다.마가 스님은 “이 자리야말로 종교 화합의 자리”라며 “방송이기 때문에 이따금 서로 재미있는 지적과 농담을 던지지만, 이런 모습이야말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 프로그램의 매력”이라고 말했다.홍창진 신부는 “저희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희망을 얻고, 치유를 느낄 수 있다면 저희 성무(聖務)는 성공한 것 아니겠느냐”고 웃음 지었다. 프로그램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30분 tvN 채널에서 방영된다.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평화신문2014.10.22

매주 수요일은 신앙 공부하는 날 공부 삼매경 빠진 서울 서초동본당서초동본당 신자들이 최승정 신부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이힘 기자 2일 오후 8시, 서울대교구 서초동성당(주임 이찬일 신부). 수요일이지만 성당 안은 500명이 넘는 신자들로 가득하다. 강의에 조금 늦은 신자들은 대성전에 자리가 모자라 2층 성가대석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이날은 서초동본당 '성경학교' 두 번째 강의가 있는 날로, 강사 최승정(홍은2동본당 주임, 가톨릭대 교수) 신부는 이날 주제인 역사서를 실생활에 빗대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최 신부는 "성서사도직의 목적은 함께 나누는 공동체성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라며 "성경공부를 통해 우리는 공동체적 존재임을 깨닫고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신앙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신부는 "건강에 자신이 있던 85세 어르신이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적이 있다"며 "주위에 단 한 명이라도 함께 늙어갈 친구가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고 말했다. 이날 강의는 밤 9시 30분이 넘어서 끝났지만, 강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는 신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신자들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최 신부 강의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들이었다. 꼼꼼히 강의를 메모하는 이도 눈에 띄었다. 본당은 올해 들어 매주 수요일을 공부하는 날로 지낸다. 지난 2월 '성체성사에 대한 영성학교'를 시작으로 올해 다섯 개 학교를 개설, 신자들이 1년 내내 매주 수요일마다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호응도 좋아 각 학교가 열릴 때마다 성당이 가득 찰 정도로 신자가 몰린다. 12서초지구 지구장좌 본당답게 지구 교육의 장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다섯 개 학교는 영성학교(2월 5~26일)에 이어 △성경학교-사순특강(3월 26~4월 9일), 대림특강(12월 3~17일, 오후 8시) △기도학교(5월 7~7월 23일, 오전 10시 미사 후) △생명학교(5월 7~6월 4일, 오후 8시) △가톨릭사회교리학교(9월 3~10월 15일, 오후 8시) 순이다. 모두 수요일에 열리는 강좌다. 이찬일 주임신부는 "본당이 마련한 다섯 학교는 약간의 교재비가 있는 기도학교를 제외하면 모두 무료 강좌"라며 "참된 신앙생활을 꿈꾸는 신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백영민2014.04.09

매주 수요일은 신앙 공부하는 날공부 삼매경 빠진 서울 서초동본당서초동본당 신자들이 최승정 신부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이힘 기자 2일 오후 8시, 서울대교구 서초동성당(주임 이찬일 신부). 수요일이지만 성당 안은 500명이 넘는 신자들로 가득하다. 강의에 조금 늦은 신자들은 대성전에 자리가 모자라 2층 성가대석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이날은 서초동본당 '성경학교' 두 번째 강의가 있는 날로, 강사 최승정(홍은2동본당 주임, 가톨릭대 교수) 신부는 이날 주제인 역사서를 실생활에 빗대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최 신부는 "성서사도직의 목적은 함께 나누는 공동체성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라며 "성경공부를 통해 우리는 공동체적 존재임을 깨닫고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신앙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신부는 "건강에 자신이 있던 85세 어르신이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적이 있다"며 "주위에 단 한 명이라도 함께 늙어갈 친구가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고 말했다. 이날 강의는 밤 9시 30분이 넘어서 끝났지만, 강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는 신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신자들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최 신부 강의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들이었다. 꼼꼼히 강의를 메모하는 이도 눈에 띄었다. 본당은 올해 들어 매주 수요일을 공부하는 날로 지낸다. 지난 2월 '성체성사에 대한 영성학교'를 시작으로 올해 다섯 개 학교를 개설, 신자들이 1년 내내 매주 수요일마다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호응도 좋아 각 학교가 열릴 때마다 성당이 가득 찰 정도로 신자가 몰린다. 12서초지구 지구장좌 본당답게 지구 교육의 장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다섯 개 학교는 영성학교(2월 5~26일)에 이어 △성경학교-사순특강(3월 26~4월 9일), 대림특강(12월 3~17일, 오후 8시) △기도학교(5월 7~7월 23일, 오전 10시 미사 후) △생명학교(5월 7~6월 4일, 오후 8시) △가톨릭사회교리학교(9월 3~10월 15일, 오후 8시) 순이다. 모두 수요일에 열리는 강좌다. 이찬일 주임신부는 "본당이 마련한 다섯 학교는 약간의 교재비가 있는 기도학교를 제외하면 모두 무료 강좌"라며 "참된 신앙생활을 꿈꾸는 신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백영민2014.04.09
![[복음 이야기] (23) 노동자](//cpbc.co.kr/CMS/newspaper/2014/07/rc/519408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23) 노동자노동은 신성, 노동자는 존경받아야 성경의 시대 유다인들은 경작에 관계된 노동을 특히 사랑하고 중히 여겼다. 사진은 한 유다인 농부가 농토를 돌보고 있다. 【CNS】 이스라엘에는 종살이하는 노예가 많지 않았고 또 오늘날의 중산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유다 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기본 계층은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었다. 복음서에는 이들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가 잘 나타난다. 복음서에는 밭 가는 사람, 씨뿌리는 사람, 목수, 어부 등 갖가지 직업인들이 등장한다. 예수님도 이 계층에 속해 있었기에 그들의 생활 양식을 잘 알고 계셨다.유다인은 노동에 대해 이중 관점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빵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인간의 원죄에 대한 결과로 명하신 것이라 여겼다(창세 3, 17-19 참조). 다른 하나는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9)는 말씀을 “하느님께서 노동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 바오로 사도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며 노동의 의무를 강조했다. 바오로 사도의 이 유명한 격언은 레닌이 그대로 인용해 더욱 세상에 알려졌다.아담도 에덴동산에서 ‘땅을 부치며’ 살았고,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 성조들과 예언자, 초기 왕들도 모두 노동을 했다. 토라(율법)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빵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 역시 생계를 위해 노동을 했다. 랍비 아키바는 나무꾼이었고, 요수아는 숯장이, 메일은 대서인, 요카난은 구두장이, 사울은 무덤 파는 인부, 힐렐은 하루 반 데나리온씩 받는 날품팔이였다. 이처럼 유다인들은 반드시 직업을 가져야 했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모두 노동자였고 바오로 사도 역시 “아무에게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2테살 3,8)라고 한 말처럼 천막 짜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유다인들이 특히 사랑하고 중히 여긴 직업은 토지와 관계있는 모든 노동이었다. 집회서의 저자 벤 시라는 “힘든 일을 싫어하지 말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창조하신 들일을 싫어하지 마라”(집회 7, 15)고 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역시 본질적으로 농업 및 목축의 나라로서 그 경제를 온전히 토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씨뿌리는 사람과 포도밭 일꾼, 길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 등 땅을 기반으로 한 생생한 비유가 펼쳐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예수님 시대 때 직업의 우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금은 세공사, 신발을 만드는 자, 목수 등은 다른 일보다 고상한 직업으로 간주했다. 한편, 가축의 털을 깎는 자, 가죽 무두장이는 냄새가 나기 때문에 존경을 받지 못했고, 향료나 화장품을 파는 상인은 품행이 좋지 않은 여자들과 거래하기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 됐다. 가장 평이 좋지 않은 직업은 뱃사람, 대상(隊商) 안내인, 점포 주인이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노동은 신성하다. 일하는 자는 존경받는다”는 통념을 항상 갖고 있었다.성경에는 주인과 일꾼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율법이 있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사회적 노동법을 제정한 것이 바로 유다인이다. 그 기원은 모세에게로 소급된다. 모세는 품삯에 관해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너희는 너희 동족들 가운데에서나, 너희 땅, 너희 성안에 있는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품팔이꾼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그의 품삯은 그날로 주어야 한다. 그는 가난하여 품삯을 애타게 기다리므로,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품삯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가 너희를 거슬러 주님께 호소하지 않을 것이고,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이다”(신명 24,14-15).성경은 또한 노동자들에게 주인을 존경하고 그에게 순종해 충실히 봉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랍비 요셉은 석수였는데 어느날 공사장 발판 위에서 일하고 있을 때 누가 찾아와서 종교 문제에 관한 의견을 들려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려갈 수 없으니 저녁때 봅시다. 나는 일당을 받고 있기에 주인에게 고용된 동안은 잠시도 일터를 떠날 수 없습니다”. 측량사였던 랍비 힐키아도 역시 누가 와서 기우제를 위해 쓸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비슷한 대답을 했다. 이들처럼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던 율법학자들도 고용주와의 관계에 대한 의무를 준수하며 노동을 했다는 것은 오늘날 눈여겨볼 대목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o.kr 평화신문2014.07.15
 루이 부이에(상)](//cpbc.co.kr/CMS/newspaper/2014/09/rc/527554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58) 루이 부이에(상)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보편적 영성 일깨워 20세기를 빛낸 또 한 명의 영성신학자를 추천하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물은 영적 묵상집과 에세이가 한국에 많이 소개된 영성작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과 헨리 나웬(Henri Nouwen, 1932~1996) 혹은 안셀름 그륀(Anselm Grn, 1945~) 등일 것이다. 필자는 영성신학을 본격적으로 접한 지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 한국 가톨릭교회에 그나마 한 권의 책이라도 번역되어 소개된 몇몇 영성신학자 가운데 한 명인 루이 부이에(Louis Bouyer, 1913~2004)를 소개하고자 한다. 독특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부이에는 20세기에 유럽권에서뿐만 아니라, 영미권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많은 저서도 남긴 신학자이기에 우리가 살펴볼 충분한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개신교 목회자 꿈꿔 루이 부이에는 1913년 2월 17일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소시민계층에 속했는데, 특히 부모님은 프랑스 루터교 신조에 가까운 프랑스 개혁교회 소속 개신교 신자였다. 부이에는 장래 희망으로 교회 목회자를 꿈꾸면서 프랑스 개혁교회나 감리교회와 접촉하기도 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루터교회와 연결의 끈을 만들었다. 부이에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프랑스 개신교 신앙 안에 다양한 주장들에 대한 일치 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 까닭에 파리에 소재한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할 무렵에는 파리에 있는 영국 성공회와 정교회와도 접촉하려고 시도하였다.부이에는 파리에서 시작한 공부를 프랑스 북동부 지역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끝마칠 수 있었다. 그는 루터교 신학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학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그의 학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영국 성공회 사제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801~1890)이었다. 아마도 이 주제가 훗날 부이에의 장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는 영향 중에 하나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부이에는 1936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루터교 목회자로 안수받았다.부이에는 계속해서 신학석사 과정을 공부하였고, 아타나시오 성인의 신학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훗날 사람들은 부이에가 아타나시오 성인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가톨릭교회 신조를 잘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1938년에 부이에는 자신의 첫 번째 신학 저서인 「네 번째 복음서」(Le quatrime vangile)를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부이에는 요한복음서의 교회론과 성사론에 대한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의 기본적인 사상을 받아들였다. 스트라스부르 출생인 쿨만은 루터교 전통을 따르는 신학자였지만, 교회일치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서 루터교와 가톨릭교회가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공부를 끝마친 부이에는 파리 소재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는데, 스트라스부르 시절부터 파리 시절까지 그는 러시아 출신 이민자들을 만나는 기회를 가지면서 정교회에도 개방된 자세를 갖게 되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부이에는 가톨릭교회에 가까이 다가갈 기회도 갖게 되었다.가톨릭 신앙 받아들여결국 1939년에 부이에는 자신의 목회 활동에서 떠나기로 하고 거의 일 년 동안 영국의 옥스퍼드에 머물면서 앞으로 할 일을 숙고하고 난 후, 같은 해 12월 말경에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위치한 생-방드릴(Saint-Wandrille) 베네딕도 수도원 성당에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때마침 부이에는 오라토리오회 총장 신부로부터 파리 근교 센에마른(Seine-et-Marne)에 위치한 쥬이 신학원(Collge de Juilly)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것을 제안받고 2년간 그들을 가르치다가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그 즉시 부이에는 파리 가톨릭 대학교에서 사제수품 준비를 위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이브 콩가르(Yves Congar, 1904~1995)는 부이에를 눈여겨보고, 1943년에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총서 시리즈에 부이에의 석사학위 논문 「성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강생」(L’Incarnation et l’glise Corps du Christ dans la thologie de saint Athanase)을 출판하기도 하였다.부이에는 1944년에 드디어 모(Meaux) 교구 주교에게 사제로 서품되었고, 1950년에는 석사학위 논문 주제를 발전시켜 역시 아타나시오 성인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즉시, 부이에는 파리 가톨릭 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어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를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면서 1962년까지 같은 대학에서 영성신학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강의하고 저서를 출판하였다.「영성생활입문」 등 저술이 시기에 부이에의 대표적 저서로는 1950년에 「수도원 생활의 감각」(Le sens de la vie monastique), 1952년에 「성경과 복음」(La Bible et l’vangile)과 「뉴먼 그의 생애, 그의 영성」(Newman. Sa vie, sa spiritualit), 1955년에 「교회에서 개신교주의에 대하여」(Du protestantisme l’glise), 1957년에 「지혜의 옥좌」(Le Trne de la Sagesse), 1960년에 「영성생활입문」(Introduction la vie spirituelle), 1961년에 「신약성경과 교부들의 영성」(La spiritualit du Nouveau Testament et des Pres) 등이 있다. 이중에 「영성생활입문」은 지금까지 한국에 번역된 부이에의 유일한 책이다. 또한 영성역사를 주제로 한 「신약성경과 교부들의 영성」 이외에도 부이에는 같은 해인 1961년에 공동 작업으로 출판한 「중세 영성」(La spiritualit du Moyen Age)과 1965년에 저술한 「정교회 영성과 개신교와 성공회 영성」(La spiritualit orthodoxe et la spiritualit protestante et anglicane)을 묶어 세 권으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 시리즈를 편찬하였다.이렇게 영성신학을 주제로 강의하던 시기에 또 다른 한편으로 부이에는 전례사목센터(Il Centro di Pastorale Liturgica)와 함께 전례에 관한 주제들을 연구하면서 저서들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이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 단계에서부터 고문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고, 공의회가 끝난 이후에도 전례 개혁을 위한 위원회 고문으로 참가하였다. 1969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발타사르(H.U. von Balthasar), 라너(K. Rahner), 라칭거(J. Ratzinger)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1960년대 이후 그는 미국 인디애나 주에 위치한 노트르담 대학을 비롯해 수도 워싱턴의 가톨릭대학교, 샌프란치스코의 가톨릭대학교 등을 다니며 1990년대까지 강의했다. 하지만 이런 여정이 무리가 되었는지 병을 얻게 되어 부이에는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부이에는 자신을 가톨릭 신앙으로 받아준 생-방드릴(Saint-Wandrille) 베네딕도 수도원에 손님으로 머물면서 오랫동안 알츠하이머병에 시달리며 고생하였다. 결국 부이에는 2004년 10월 23일 세상을 떠났고, 수도원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물론 부이에는 영성신학만을 연구하고 가르친 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부이에는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바탕으로 교회일치 차원에서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보편적 영적 여정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기에,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영성신학자 가운데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평화신문2014.09.02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20) 나무에 어린 마음](//cpbc.co.kr/CMS/newspaper/2013/06/rc/460184_1.1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20) 나무에 어린 마음자연과 소통하는 전능하신 하느님 지금까지 고대 근동에 등장하는 많은 신들에 대해 배웠다. 이번엔 '나무의 신'이다.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는 나무를 하나의 자본으로 여기며 산다. 하지만 고대 근동인들은 나무에 거룩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봤다. 나무에 특별한 마음, 지극한 종교심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나무 신'에 얽힌 종교심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예는 이집트의 독특한 보석 장식에 새겨진 나무 형상이다. 이집트어로 '벌떡 일어난 코브라'를 의미하는 '우래우스' 두 쌍이 나무를 보호하고 있는 문양이 그것이다. 파라오의 머리 장식에서 볼 수 있는 우래우스는 고대 이집트의 신적 주권과 왕권을 상징했다. 이는 고대 근동에서 나무를 얼마나 소중한 신으로 섬겼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고대 이집트 왕 투탕카멘의 머리장식에는 우래우스가 있다. 이 밖에도 나무는 고대 근동의 궁전과 신전 벽화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나무의 할례 구약성경에는 나무에 얽힌 다양한 종교심이 있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나무의 신'을 섬기지는 않았다. 다만 나무에 대한 종교적 경외심이 바탕에 깔려 있을 뿐이다. 레위기 19장은 나무의 성장 과정을 사람의 그것과 빗댔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온갖 과일나무를 심을 경우, 그 과일들을 할례받지 않은 포피로 여겨야 한다. 세 해 동안 그것들은 할례받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일들을 먹어서는 안 된다. 넷째 해의 과일들은 주님에게 축제 제물로 바쳐야 하고 다섯째 해부터는 너희가 그 과일들을 먹을 수 있다. 이는 너희의 소출이 많아지게 하려는 것이다"(레위 19,23-25). 과일나무의 생물학적 성장 단계에 종교적 의미가 있음을 하느님께서 친히 알려 주셨다. 이런 종교적 의미를 '할례'에 빗댄 점이 흥미롭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과일나무는 그저 때맞춰 열매를 맺는 식물이 아니었다. 마치 인격체처럼 생의 단계에 의미가 깃든 생명체인 것이다. 신명기 규정도 마찬가지다. 전쟁 중 적의 성벽 근처에 있는 과일나무는 공격에 방해되므로 성가시다. 당장 그 나무를 베어낸 다음 그 목재를 공성전에 사용하면 전략적으로 이득이다. 하지만 과일나무는 함부로 자르지 말아야 한다고 신명기는 이른다. "너희가 어떤 성읍을 점령하려고 싸움을 벌여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을 때, 그 성읍의 나무에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쓰러뜨려서는 안 된다. 너희는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베어서는 안 된다. 들의 나무는 너희가 포위해야 할 사람이 아니지 않으냐? 그렇지만 너희가 알기로 열매를 먹을 수 없는 나무는 쓰러뜨리고 베어서, 너희와 싸우는 성읍이 함락될 때까지 그 성읍을 포위하는 공격 보루를 만들어도 된다"(신명 20,19-20). 이 같은 표현에는 마치 나무가 인격체인 양 나무에 대한 종교적 심성이 깃들어 있다. 나무가 분명 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구 대할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우리 욕심대로 착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나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 다윗은 나무를 통해 하느님과 소통한다. 하느님은 나무 꼭대기에서 '발걸음 소리'를 내시고, 다윗은 그 하느님의 소리를 알아듣고 그대로 행하여 승리한다. 하느님은 나무 꼭대기에서 소리를 내시는 분. 나무 꼭대기는 하느님이 임하시는 곳, 그리고 인간에게 친히 신호를 보내시는 곳이다. 인간은 나무에서 나는 소리가 혹시 하느님의 음성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다윗은 '나무 꼭대기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었다. "다윗이 주님께 여쭈어 보자 주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바로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 발삼 향나무 숲 맞은쪽에서 그들에게 다가가거라. 발삼 향나무 꼭대기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거든 그때 습격하여라. 주님이 앞장서 나가 필리스티아인들의 군대를 칠 것이다.' 다윗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여 게바에서 게제르까지 필리스티아인들을 쳤다"(2사무 5,23-25). 자연은 신비로운 언어로 서로 소통하고 감응한다. 인간은 이런 자연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지만, 하느님은 완벽히 이해하신다는 사상이다. 시편은 하늘과 창공, 낮, 밤 등 자연계의 물체가 서로 이야기하고, 말을 건네고, 지식을 전하는 등 활발히 서로 소통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인간은 그들의 말과 이야기와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 이런 자연계를 지으신 하느님만이 이들과 완벽히 소통하신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그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는 온 땅으로,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가네"(시편 19,2-5). 자연과의 소통 능력은 창조주 하느님 고유의 권능이다. 그분은 자연계의 모든 소리를 듣고 소통하신다. 나뭇가지에서 나는 소리로 그분은 우리 인간과 소통하신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은 평화방송 TV 홈페이지(www.pbc.co.kr) 강좌/성경 꼭지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cpbc2013.06.25
![[가톨릭 신앙의 보물]<4>영적 독서 -홍승모 몬시뇰(인천가톨릭대 신학대학장)](//cpbc.co.kr/CMS/newspaper/2013/12/rc/487095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신앙의 보물]영적 독서 -홍승모 몬시뇰(인천가톨릭대 신학대학장)주님 말씀에 동화 변화돼 그에 맞갖은 삶을 신앙인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관상하는 삶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이를 세상에 실현해야 한다. 사진은 네 복음사가가 새겨진 성경 겉표지 장식.성경 읽고 묵상하고 관상하는 신앙인 영적 독서, 즉 성독((聖讀, 렉시오 디비나)은 성경에 쉽게 접근하는 방법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관상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구성돼 있다. 독서는 우리가 읽는 성경 구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숙독하는 것이다. 그날 전례에 제시되는 성경 본문을 읽고 또 읽으며 성경 본문에 나오는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핵심 용어와 등장인물, 그 인물의 행위와 특성 등을 찾아 성경 전체의 맥락도 살펴봐야 한다. 독자가 속한 시대 속에서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다. 주의할 점은 성경 본문을 이미 알고 있거나 들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한 본문이라도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 성경에 내재한 함축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 분석하며 읽어야 한다. 묵상은 성경 본문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살펴봐야 한다. 어떤 메시지, 어떤 가치를 전달해 주는가 하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말씀의 메시지에 대해, 자신에게 계시되는 영원한 가치에 대해, 그 메시지를 자신에게 알려준 성령에게 어떻게 협조해야 하는지 성찰해야 한다. 관상은 말씀을 통해 자신과 통교하길 원하시는 주님과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는 가장 내밀한 순간을 말한다. 관상을 통한 주님과의 만남은 기도와 실천을 통해 확장된다. 곧 성경을 숙독하고, 거기에 나타난 주님의 메시지를 깨닫기 위해 묵상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관상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기도하고, 그 깨달은 바를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제 삼천년기를 맞이하는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갖고 영적인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하셨다. 교황께서는 신앙인들이 손에 성경을 쥐고, 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말씀을 전하는 성경을 받아들이고, 생명의 말씀이 되는 성경을 받아 삼키고, 하느님 말씀에 맛들여 희망의 여정을 걸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육화하는 것이다. 세끼 밥을 먹듯이 우리 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관상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 맛을 들이라는 것은 하느님 말씀에 동화하고 변화하여 그 말씀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되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반항하는 인간들과 달리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구현하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라는 것을 말한다. 성독 통해 하느님 따르는 삶 살아야 주님께서 어린이를 축복하고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부모에게 의지한다. 우리도 그 어린아이가 부모의 말을 따르듯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성찰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을 닮아야 하며, 이는 하느님을 따르려는 삶이다. 성독을 통해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 곳곳에서 많은 이들의 삶 속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본다. 분열과 갈등과 폭력과 더욱 심화하는 빈부격차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반면 희망의 모습도 본다. 수많은 신앙인이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접하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접근방식을 통해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갈망을 갖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삶 속에서 구체적 실천으로 신앙을 살아간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어울려 살아가는 이 세상을 무관심하고 초연한 태도로 바라보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주님의 말씀이 생명의 원천이며 뿌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 내면에서부터 새로운 영의 뿌리의 새싹을 틔워 새로운 영의 인간이 돼야 한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이 삶의 근원으로 더 이상 체험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다. 성독은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방향을 명확히 제시한다. 성경을 읽는 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성경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고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그 깨달음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접하는 것, 성경이 품은 보화를 발견하기 위해 꼭 신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작하려는 용기만 있으면 됩니다. 나는 말씀을 듣고 잠시 가만히 머무르는 시간을 꼭 갖도록 권합니다. 침묵 중에 귀 기울이면 응답이 들리고, 삶의 의미도 떠오릅니다. 나는 귀 기울여 듣는 마음을 온전히 신뢰합니다"(카를로 마르티니 추기경 '예루살렘 밤의 대화' 중에서). 정리=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방송은 수요일 오전 7시 20분에 방송되며, 지난 회는 누리방(http://www.cpbc.co.kr/tv)을 통해 다시 볼 수 있습니다. cpbc2013.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