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진단] 교황과 브랜드](//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7031_1.0_titleImage_1.jpg)
[시사진단] 교황과 브랜드김성제 베드로(한국브랜드경영협회 회장) 나는 이 글의 제목을 ‘교황과 브랜드’라고 붙였다. 의아해 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브랜드는 사실 많은 성경 이야기 속에 소개되고 있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창세 1,4)고, 또 “뭍을 ‘땅’이라, 물이 고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창세 1,10)고 나오는데, 이것이 하느님께서 직접 이름 지어 붙이신 브랜드가 아니고 무엇인가. 브랜딩의 역사가 실로 천지창조와 함께 시작되었으니, 브랜드는 인류 문명보다 훨씬 앞서 발달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는 비약을 해온 셈이다.전통적으로 브랜드는 제품이나 서비스 또는 기업의 정체성, 차별성, 연상성을 강화해 경쟁 우위력을 갖기 위하여 사용된 이름이나 상징을 의미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 대상이 병원, 학교, 장소, 사람, 국가 심지어 종교에 이르기까지 확대되고 있다. ‘국가 브랜드’라는 용어가 일반화된 지 이미 수년이 지났고 올해에 들어와 ‘종교 브랜드’라는 새로운 개념의 용어가 소개되고 있다. 이렇게 브랜드 개념이 인물, 국가, 종교에 이르기까지 확산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브랜드는 곧 정체성’이기 때문이다.현 교황인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Jorge Mario Bergoglio) 추기경은 2013년 3월 13일 콘클라베에서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을 때 자신의 교황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선택했다. 짧은 순간에 선택한 이름이었겠지만 본인의 정체성과 또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확히 일치하는 이름이었다. 교황 스스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프란치스코는 제게 가난의 사람, 평화의 사람, 피조물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피조물과 그리 좋은 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이 평화의 영을 주는 가난의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은 제 가족의 뿌리가 있는 이 땅과 영적 관계를 강화해 줍니다.”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8월 방한 기간 중 자신이 이용할 자동차로 ‘쏘울(Soul)’ 브랜드를 선택하였다. 언론은 교황이 방한 중에 가장 서민적인 소형 승용차(1600cc)를 탄다는 사실에 뉴스의 무게를 실었다. 교황이 서민적인 선택을 한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감동했다. 그러나 이는 자동차 하드웨어의 표피적인 뉴스 내용이었다. 오히려 교황이 자동차 소프트웨어인 브랜드 네임 ‘Soul’을 선택한 의미를 놓쳤다. 교황이 선택한 자동차 ‘쏘울’은 크기로는 서민적이라 하겠지만 브랜드 네임으로는 참으로 교황의 품위에 맞는 적합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쏘울’(Soul)은 무형의 실존, 무형의 요체, 우주 만물의 영적 원칙, 극도로 선량하고 고상한 인품을 지닌 사람, 생기와 기백을 넣어주는 정신, 사물의 정수 등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의미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을 강하게 브랜딩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를 최강 종교 브랜드로 이끌고 있다. 교황 취임 이후, 바티칸과 교회 쇄신을 위해 세계적 경영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와 KPMG에 컨설팅을 의뢰함으로써 세속적인 도구로 성역의 잘못을 도려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교황은 「복음의 기쁨」이란 권고문에서 구조적 쇄신, 심지어 언어 쇄신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잘못을 바꿔야 함을 권고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추구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그래서 교황 자신이 세계 최강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톨릭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탄생시켰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 브랜드를 강화하고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평화신문2014.10.30
새해는 가톨릭 다이어리와 함께가족달력, 성화 특판달력, 말씀달력 등 다양 2014년 새해가 꼭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묵은 해를 마무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리며 교계 출판사에서 준비한 새해 달력과 다이어리로 알찬 한해 계획을 세워보자. ▨가톨릭출판사='세상에 하나뿐인 2014 우리 가족 달력'을 선보였다. 벽걸이 형식으로 가족 이름과 매달 중요 행사를 적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가족이 함께 한해를 만들어 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 밖에도 세계의 아름다운 성당 사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명화, 평화를 구하는 기도 캘리그라피로 꾸며진 벽걸이 달력 3종과 탁상 메모용 다이어리도 만들었다. 구입 문의 : 02-6365-1888 ▨바오로딸=여러 나라 성지를 그린 그림과 365일 성경 통독 계획표를 담은 '말씀과 함께' 다이어리를 선보였다. 황금색, 남색, 청회색 등 7가지 색상이 있다. '주님과 함께' 탁상용 말씀 달력은 매일 묵상할 짧은 성경 구절을 담아 하루에 한 장씩 넘길 수 있도록 했다. 문의 : 02-944-0944 ▨분도출판사=산티아고 순례길 사진, 이콘, 김옥순(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 성화가 담긴 벽걸이 달력 3종을 만들었다. 김옥순 수녀 성화가 크게 인쇄된 특판 달력은 선물하기에 좋다. 문의 : 02-2279-9581 ▨생활성서=속지를 리필해 쓸 수 있는 다이어리 'BIBLE and LIFE'를 제작했다. 매 주일 복음 묵상글과 성경 통독표, 가톨릭 주요 기도문 등을 담았고 카드와 신분증을 꽂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활용성을 높였다. 속지를 '성경쓰기노트'로 바꾸면 성경필사 다이어리로도 쓸 수 있다. 빨강, 연두, 군청 등 5가지 색상을 준비했다. 문의 : 02-945-5986 ▨성바오로=제병 사진과 성체 묵상글로 2014년 탁상용 달력과 내 영혼의 다이어리를 꾸몄다. 다이어리는 매일 메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넉넉히 마련해 뒀다. 하늘색과 분홍색 2종류가 있다. 문의 : 02-945-2972 박수정 기자 cpbc2013.11.26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5)기적의 강, 심판의 강](//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3232_1.0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5)기적의 강, 심판의 강'강의 심판의 날'에서 유래한 '환난의 날' 고대 근동인들은 강을 온몸과 마음으로, 영혼으로 느끼며 마치 신을 대하듯 강에 대한 두려운 마음, 곧 경외심을 지니고 살았다. 고대 근동인들은 구체적인 강들, 이를테면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에도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 강은 수메르 시대 이전부터 이미 신성을 지닌 존재였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 동산에는 네 개의 강이 있었는데, 이 중 두 강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다(창세 2,11-14 참조). 창세기에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은 신화적 의미, 곧 태초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창조의 강'의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을 신으로 언급하지 않고 지명으로만 사용했다. 구약성경에는 유프라테스 강이 훨씬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유프라테스는 지리적 경계의 의미로 사용돼 주로 이집트의 북쪽 경계를 의미했다. 요르단 강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대표적인 강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에도 요르단 강이 신으로 나오는 적은 없다. 요르단 강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최종 목적지인 약속된 땅의 경계였다. 엘리야와 그의 후계자 엘리사의 나아만의 치유에서 보이듯 구약성경에서 요르단 강은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였다. 기적의 장소로서 요르단 강의 의미는 신약성경으로 이어진다. 요르단 강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장소다. 예수님의 세례는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다. 요르단 강은 하느님께 향하는 상승 운동과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하강 운동이 교차하는 곳이자 예수님의 신원이 드러난 기적의 장소로, 신은 아니지만 의미가 큰 강이다. 한편 고대 메소포타미아 법에는 강에게 정의를 물어보는 절차가 있었다. 흐르는 강물이 정의를 밝혀낸다고 믿은 것이다. 고 바빌론인들은 겸허히 강의 신에게 정의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은 지나칠 만큼 단순했다. 강 한복판에 피고인을 풍덩 빠뜨렸다. 물에 빠진 자가 죄인이라면 강의 신이 그를 처벌해 익사하게 된다. 만일 그에게 죄가 없다면 정의의 신인 강의 신이 그를 자유롭게 풀어줄 것이다. 강가에서 산 채로 발견되면 그는 자유다. 그러면 그를 고소한 이는 무고죄에 걸린다. 죄 없는 사람에게 거짓으로 중죄를 뒤집어 씌우려 한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어느 쪽이든 신을 모독한 사람은 목숨과 집(재산)을 모두 내놓아야 한다. 이 같은 규범이 고대인의 원시적이고 미개한 악습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정의는 인류 종교사에서 오랜 전승을 지닌 관행과 같다. 종교학에서는 이렇게 특정한 징표를 사용해 신의 뜻을 물어 죄의 유무를 가리는 고대의 재판을 '신성 재판'이라 한다. 신성 재판의 방법에는 강이나 바다에 빠뜨리거나 불 위를 걸어가게 하고, 독약을 소량 섭취하게 하는 방식이 있었다. 이런 위험을 이겨내 살아난 사람은 죄가 없다는 보증을 받은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이처럼 '정의를 판결하는 강'이 있다. 신성 재판에 사용되는 강을 수메르어로 '이드'라고 불렀고, 아카드어로는 '이두'라고 했다. 이 낱말은 히브리어 '에드'로 계승된다. 에드는 '최종적이고 분명한 심판'이라는 의미다. 이 의미에서 보듯 구약성경에서 '강의 신'은 사라졌지만, '심판'의 의미는 그대로 남았다. 히브리 성경을 적은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이 낱말에서 강의 신을 연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다. 하지만 '신적 심판'이라는 뜻은 그대로 사용했다. 이런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표현이 바로 '에드의 날'이다.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강의 심판의 날'이란 뜻인데 문맥에 따라 '환난의 날' 또는 '재난의 날' 등으로 옮길 수 있다. 그들의 '에드의 날'(환난의 날, 재난의 날) 나는 그들에게 얼굴 대신 등을 보이리라(예레 18,17 참조). 한편 모세가 유언으로 남긴 노래에서도 비슷한 경고를 볼 수 있다. 주님이 심판하시는 날은 멸망의 날이요 재난의 날이다. 에드의 날(멸망의 날, 재난의 날)이 가까웠고 그들의 재난이 재빨리 다가온다(신명 32,35). 하느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유효하다. 이 심판의 날은 이민족들에게 '환난의 날'이 될 것이다. 이집트에 내릴 환난의 날을 경고하는 예레미야서의 말씀에서는 '에강의 날과 징벌의 때가 그들에게 닥치면 그들도 견뎌 내지 못하고 등을 돌려 함께 달아나고 만다'란 구절이 나온다(예레 46,21 참조). 여기서 에드의 날은 '신적 심판' 그 자체보다는 '신적 심판의 날을 연상할 만큼의 큰 환난과 고통의 때'를 의미한다. 에드의 날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됐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고대 근동 종교의 모티프를 사용해 자신들의 성찰을 표현했다. 고대 근동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면, 구약성경의 표현을 깊이 이해할 수 없다.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평화방송 TV 방송시간 : 수요일 오전 9시(본방송), 금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일요일 저녁 9시, 월요일 오전 4시ㆍ오후 3시퇴사자22013.05.14
![[나의 묵주이야기] 102. 나는 아직도 묵주기도를 제대로 못한다](//cpbc.co.kr/CMS/newspaper/2014/11/rc/539316_1.0_titleImage_1.jpg)
[나의 묵주이야기] 102. 나는 아직도 묵주기도를 제대로 못한다유영봉 몬시뇰(마산교구 양덕동본당 주임) 묵주기도는 일생을 살면서 가장 많이 바쳐온 기도가 아닐까 싶다. 사제나 수도자들이 의무로 바치는 성무일도(시간 기도)는 신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바치기 시작했지만, 묵주기도는 훨씬 어렸을 때부터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온 가족이 모여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할 때 항상 묵주기도를 함께했다. 그리고 중학교 다닐 때 반성에서 진주까지 기차 통학을 했는데, 기차 안에서 항상 손가락을 꼽아가며 묵주기도를 했다. 군 복무 중 전방에서 보초를 설 때, 특별히 월남전에서 보초를 설 때는 지뢰 폭발과 적의 공격으로 인한 죽음의 가능성이 생존하는 상태였기에 더욱 열심히 성모님께 매달리며 묵주기도를 드렸다.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도를 정해진 기도문을 바치는 염경기도와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나 말씀을 묵상하는 묵상기도로 나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묵주기도는 염경기도와 묵상기도를 겸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묵주기도는 환희ㆍ빛ㆍ고통ㆍ영광의 신비를 통해 예수님의 탄생부터 공생활과 수난,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 성모승천에 이르기까지를 묵상하는 기도이다.1. 염경기도(念經祈禱)로서 묵주기도: 묵주기도 때 되풀이되는 성모송의 구조를 살펴보며 뜻을 새겨보자.“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까지는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예수의 잉태를 알리면서 건넨 인사다. 그리고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라는 부분은 마리아가 성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바친 찬송이다. 말하자면 성모송 전편은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와 엘리사벳의 찬송에서 따온 것이다. 후편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하는 것은 교회가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님께 전구해 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이다. 염경기도로서 묵주기도를 제대로 바치기 위해서는 성모송 전편을 바칠 때, 가브리엘 천사와 성녀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인사하고 칭송하는 그 마음가짐으로 기도문의 뜻을 새기며 정성을 다해 바쳐야 한다. 그리고 후편을 바칠 때, 특별히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할 때 내가 기도해 줘야 할 대상과 지향을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염경기도로서 묵주기도가 제대로 되는 것이다. 2. 묵상기도로서 묵주기도: 성모송을 바치고 묵주 알을 넘기며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하며 성모님을 부를 때 각 단의 신비가 어우러지는 그 현장에 있는 성모님을 향해 바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적을 만들기 위해 나자렛을 떠나고, 여행길에 지치고 베들레헴에 도착해 해산할 방을 찾아 헤매고, 예수를 낳아 말구유에 눕히고, 천사들의 합창과 환호소리가 들려오고,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조배하고, 다시 나자렛으로 돌아가는 일련의 사건 현장에 계신 그 성모님을 향해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천주의 성모 마리아”를 부르며 묵주기도의 각 신비를 따라 구원사건을 묵상하는 것이다. 성경을 잘 알면 알수록 묵상을 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묵주 알을 넘길 때마다 각 단에서 전개되는 구원 사건이 이뤄지는 그 현장에 있는 성모님을 향해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며 한 알 한 알 넘기는 것이 묵상기도로서의 묵주기도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묵상기도와 염경기도를 겸하는 묵주기도를 나는 아직도 제대로 바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묵주이야기’에 실릴 원고를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8매 분량으로 연락처와 함께 pbc21@pbc.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채택된 원고에 대해서는 소정의 고료를 드립니다. 문의 : 02-2270-2516 평화신문2014.11.12

우리 가운데 거닐던 공생활 자체가 ‘구원사건’[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9.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⑨ 데레사 성녀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통해 우리 가운데 거닐던 예수님을 사랑했다. 사진은 예수님이 참행복을 선언하신 곳으로 알려진 갈릴래아 호수 주변 언덕의 봄 풍경. 【CNS】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성녀의 각별한 사랑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활동을 보려면 무엇보다도 그분께서 공생활 동안 하셨던 말씀과 행적에 주목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성녀 데레사는 자신의 영성생활에서 주님의 인성(人性), 즉 ‘인간’이신 예수님께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간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공생활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우선, 성녀는 기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했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생애로 가끔 되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야말로 우리에게 온갖 선이 왔고 또 올 테니 말입니다.(자서전 13,13) 성녀에게 주님의 공생활은 이미 그 자체로 ‘구원 사건’입니다. 성녀는 성경을 읽고 강론을 통해 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예수님의 공생활이 갖는 깊은 의미를 알아갔습니다. 성녀는 특히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만나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을 비롯해 당신의 비유 중에 소개된 여러 인물, 예를 들어 막달레나, 사마리아 여인, 마르타, 마리아, 사도들, 돌아온 탕자, 태생 소경 등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각각의 인물이 지닌 의미와 교훈을 자신의 영성생활에 체화시키려 노력했습니다.성녀는 또 공생활 동안 그리스도께서 하신 수많은 말씀을 기억하며 이를 자신의 여러 작품에 수없이 인용하곤 했습니다. 성녀는 공생활 동안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신 ‘스승(Maestro)’ 예수님의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권능을 통해 사람들이 앓고 있던 영적, 육체적 병을 고치는 가운데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동시에 말씀을 통해 권위 있게 가르치셨습니다. 성녀는 예수님께서 하신 스승으로서의 이 두 가지 모습을 보면서 복음서가 간직한 문자적인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보다 깊은 의미, 즉 영적 의미들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성녀가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주목한 그분의 각별한 모습 중에는 우리의 흥미를 끄는 대목도 있습니다. 성녀가 살던 16세기는 지극히 남성중심 사회이자 교회였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을 넘어서 혐오가 만연하던 시대였습니다. 성녀는 그런 잘못된 시대정신을 거슬러서 여인들의 권리를 옹호했고 공생활 동안 늘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을 사모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여인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특별히 그들을 마음에 두셨던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근거를 찾았습니다. “주님, 세상을 거니셨을 때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여인들에게 호의를 베푸셨고 남자들보다 그 여인들 안에서 더 많은 사랑과 믿음을 발견하셨습니다.”(완덕의 길 4,1) 또한 성녀는 어느 신비체험 중에 예수님에게서 들은 말씀을 다음과 같이 가감 없이 전하기도 했습니다. “학자들과 남자들은 나와 사귈 줄 모른다. 나는 곤궁한 자로 오지만 그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단다. 그래서 내가 쉬고 또 내 것들을 나누기 위해 여인들을 찾아왔다.” 신부님, 수사님들을 비롯해 남자 신자들이 들으면 복장이 터질 일이지만,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의 70~80%가 여성인 것을 고려하면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싶습니다.오늘날에도 현재화되는 예수님의 공생활성녀의 여러 작품에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언급이 산재해 있습니다. 성녀는 여러 현시 체험을 통해 관상한 주님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 거니시던 분”으로 소개하곤 했습니다. 이렇듯 성녀는 공생활을 통해 우리 가운데 거닐던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그분과 동시대에 함께 살 수 있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고 서운해 하진 않았습니다. 성녀는 자신이 몸담고 사는 이 현재를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예수님과 교감할 수 있는 구원의 순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거니시던 시대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저 웃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안에서 그분을 참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보였기 때문입니다.”(완덕의 길 61,3)그렇습니다. 성녀가 꿰뚫어보았듯, 예수님의 공생활은 성사(聖事)를 통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연장됩니다. 그래서 성녀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성사들에 호소합니다. 당신께서 거기(성사)에 두신 효능을 발견할 때 싱싱한 믿음이 솟아납니다. 그는 우리의 상처를 외적으로 막을 뿐 아니라 그것을 온통 없애버리는 이 약, 이 효능 있는 향유를 우리에게 남겨 주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이런 현상은 그를 경탄해 마지않게 합니다.”(자서전 19,6)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러 성사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성녀는 2000년 전 역사의 어느 순간에 사셨던 예수님과 오늘을 사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그리스도 사이에서 이 둘을 하나로 이어주는 다리가 성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 공생활을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여전히 오늘도 신비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사건으로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예수님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녀가 묵상했던 신약성경의 여러 인물은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취해야 할 다양한 태도들을 미리 보여주는 예형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어느 때는 자신을 유다로 느꼈고, 어느 때는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던 사마리아 여인으로, 또 어느 때는 주님 곁에서 그분을 관상하던 라자로의 누이동생인 마리아로 자신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뿜는 광채에 휩싸인 바오로라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성녀는 신약성경의 인물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영적 진보를 위해 자신이 취해야 할 모습이 반영되어 드러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 또한 성녀와 같은 거룩한 원의를 갖는다면 그들을 바라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만나러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성숙시키기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올바른 태도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cpbc2014.06.17
![[복자 124위 열전] <41> 고성대·성운 형제](//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4306_1.0_titleImage_1.jpg)
[복자 124위 열전] 고성대·성운 형제한날한시에 순교한 신앙 깊은 형제 복자 고성대 청송 노래산 교우촌을 이끈 지도자는 고성대(베드로, ?∼1816)ㆍ성운(요셉, ?∼1816) 형제였다. 원래 충청도 덕산 별암(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 태생으로,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형제는 모든 신자의 모범이 됐을 정도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형은 성품이 거친 편이었고, 동생은 착했지만 둘 다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형제는 아버지가 병석에 눕게 되자 8개월간 날마다 시간을 정해 부친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 신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또 늘 마음을 모아 성경을 읽고 주위 이웃에 신앙을 권면하는 데 열심을 보여 이들 형제에게 감복하지 않는 교우들이 없었다고 전해진다.형제는 박해의 손길이 계속해 뻗쳐오자 고산 저구리골(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로 이주했다. 그러나 형 고성대가 신유박해 때 체포돼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면서 신앙의 고비를 맞게 된다. 당시 관아에서 문초를 받던 고성대는 처음엔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으나 “배교하면 살려주겠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고 만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형은 동생을 데리고 청송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새노래길 일대)으로 숨어든다. 노래산에 숨어든 뒤에는 평온한 가운데서 신앙 생활을 했지만, 가끔 “이 엄청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선 단칼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며 자책하곤 했다. 10여 년간 공동체와 함께하는 신앙 생활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가난하고 척박한 삶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 하나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이었기에 행복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그 세월은 짧았다. 1815년 2월 말께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형제는 밀고자 전지수를 앞세워 교우촌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체포돼 경주 관아로 압송된다. 처음엔 도적이 급습한 줄 알고 동생 성운과 함께 대적하던 형 성대는 관청에서 파견된 포졸이라는 걸 알고 저항을 멈춘다. 관아로 압송돼 혹독한 문초를 받는 가운데서도 형제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굳게 신앙을 지켰다. 이에 경주 관장은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다른 교우들을 대구 감영으로 이송한다. 대구 감영에서의 문초와 형벌도 끝없이 이어졌다. 무려 17개월이었다. 하지만 형제는 그 고통을 참아내며 한결같이 신앙을 증거했다. 감옥에서 짚신을 삼은 뒤 이를 옥리들을 통해 팔아 양식을 구해 끼니를 해결했다. 당시만 해도 관에서 죄수들의 먹을거리까지 부담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옥리들에게 돈을 주고 짚을 구해 짚신을 삼은 뒤 옥리를 통해 팔고 일정 수익금은 옥리를 주고 나머지로 짚과 식량을 매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오랜 기간의 고통과 궁핍, 배고픔에도 형제는 항상 기쁨 안에 살았다. 형제는 혼인하지 않은 채 동정을 지켰다고 한다(「일성록」 순조 병자년 1816년 11월 8일 자 기록 참조).대구 감사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형제를 지켜본 뒤 이를 조정에 보고한다. “고성대ㆍ성운 형제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돼 깨달을 줄을 모릅니다. 엄한 형벌로 깨우쳐주려 했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이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형제는 드디어 1816년 12월 19일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서석봉(안드레아) 등 동료 5위와 함께 참수형에 처해진다. 순교 뒤 형제 등 7위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됐다가 이듬해 3월 초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거둬졌다. 그런데 매장된 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형제의 육신은 빛이 났고 눈부셨다고 한다. 조금 전에 죽은 것처럼 보였고, 잘 보존된 형제의 옷은 습기조차 스며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형제와 동료 순교자 5위의 이름과 덕행 실천, 신앙 고백의 발자취는 모든 교우의 기억에 아로새겨져 조선 교회의 빛나는 모범이 됐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백영민2014.12.10
![[홍보 주일 특집] 「소년」 「청소년의 햇살」 「평화신문」 구독권을 전 신자 가정에 부활 대축일 선물로// 심흥보 신부(서울대교구 삼성동성가정본당 주임)](//cpbc.co.kr/CMS/newspaper/2015/05/rc/570508_1.0_titleImage_1.jpg)
[홍보 주일 특집] 「소년」 「청소년의 햇살」 「평화신문」 구독권을 전 신자 가정에 부활 대축일 선물로// 심흥보 신부(서울대교구 삼성동성가정본당 주임)한 가정에 한 달 4000원으로 ‘신앙 성숙’을 선물합니다 서울 삼성동본당이 신자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주일학생과 전 가정에 교회에서 발행한 신문과 청소년 잡지를 선물했다. 홍보 주일을 맞아 교회 매스미디어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을 사목 현장에 적용하려 노력하고 있는 심흥보 주임 신부를 만났다. 1. 전 신자에게 부활 선물로 평화신문 6개월 구독을 해드리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이번 부활절을 맞아 본당 교우들을 위한 부활 선물을 보좌인 김동호 신부님과 상의하여 주일학교 초등부 어린이들에게는 제가 초등부 시절부터 접해왔던 가톨릭 출판사의 「소년」 잡지를, 중고등부 학생들에게는 청소년사목연구소의 「청소년의 햇살」지를, 신자 각 가정에는 「평화신문」 6개월분을 각각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지난 3월 26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복음을 묵상한 후, 이 선물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요한 8,54) 라고 말씀하십니다.제가 개인적으로는 평화방송·평화신문과 친근하지 않지만, 평화신문과 평화방송에 기고하고 출연하는 신부님과 수녀님, 평신도들의 노고가 우리 신자들의 성화뿐만 아니라 평화에도 기여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성당은 작게는 3000여 명 크게는 1만여 명의 신자들을 위해 지어지지만, 신문ㆍ방송은 보고 듣는 이들에게 전국적으로 또 미주 지역에까지 전달됩니다. 평화신문과 평화방송은 마음의 성전이기도 하며 실로 선교의 첨병입니다. 우리 본당 신자분들이 잘 보시고 필요한 부분은 스크랩도 하셔서 신앙생활의 맛깔 있는 양식으로 삼아 주시고, 보시고 난 다음에는 이웃에게 선물로 나눠주기도 하셔서 선교 도구로도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2. 경제적인 부담도 되셨을 텐데, 어떻게 이런 결단을 내리게 되셨습니까?첫째, 가톨릭 교회의 교구 본당 주임사제가 소속 본당 신자들에게 가톨릭 교회의 기관지(주보, 교회 신문, 방송, 잡지 등)를 보급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목 활동입니다.둘째, 여타 본당들은 1년 구독권도 선물하는 데 비해, 우리 본당에서 6개월 치만 선물하는 것은 과한 지출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가끔 근처 음식점에 가보면 다른 그리스도 교회와 불교계의 신문 잡지 등이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쪽으로는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쪽으로는 ‘누군가는 보겠지,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심정으로 하는 일이라면’ 하는 긍정적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어쩌면 악착같이 뛰고 있는데, ‘나는 뭐 하고 있나’ 하는 자책감과 부끄러움이 들기도 했습니다.셋째, 부활절 ‘선물의 내용’보다 ‘선물 비용’이 다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또 제가 의도한 만큼 신자 여러분들께서 스스로 영신 성숙을 위해 평화신문의 내용을 읽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데 충분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가격 대비 효과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따지고 보면, 한 세대별 약 한 주 1000원(한 달 4000원)입니다. 1000원에 강론, 성경공부, 신학, 교리, 체험수기, 교회 정보 공유를 다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가격 대비 효과로는 이만한 선물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 같아서는 주보와 같이 매주 드리면 좋겠습니다만, 그 효과를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워 실험적으로 6개월만 구독하실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6개월 후, 교회 복음화를 향한 좋은 사목적 결실이 싹트기 시작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3. 신자들에게 평화신문 구독을 통해 사목적으로 기대하는 바는 무엇입니까?제가 우리 신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이번 선물을 통해 우리 본당 신자분들이 신앙적으로 건강해지기를 바랍니다. 보다 많은 분이 신앙적으로 굳건해져서 자신들에게 쏟아부어 주시는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많이 깨닫고 실제 자신의 삶에서 체험하여, 현세를 힘차게 살아가고, 그런 삶의 증거로 더 많은 분이 선교되어 우리 교회에 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어떤 신자 분들은 평화신문이나 교회의 문화 영성 같은 것 말고,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을 받기를 원하시기도 합니다. 또 성지순례나 단체 행사비를 충분히 지원해주는 것을 바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언제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모르니 비축해 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시기도 합니다. 터키ㆍ그리스로 성지순례를 간 적이 있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와 성 요한 사도가 복음을 선포하여 번창했던 소아시아 지방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교회들의 현실을 접하면서, 교회가 교회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선교와 본당 공동체 건설’, ‘공동체 지도자 양성과 교육’, ‘불우 이웃 돕기’라는 교회의 본질을 끊임없이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유지되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교회사를 되돌아보면, 권력과 현세적인 필요에 따른 집단 개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권력과 필요의 등장으로 인하여 또 집단 개종하여 떠나버렸습니다. 또 신자들의 현세적인 욕구에 복음적으로 적절히 대응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율법적이거나 자신의 안전만을 채운 교회는 외면당해 왔습니다.교회의 본질인 복음과 교회 정신은 변하지 않지만, 시대적 변화 상황에 소외되는 신자들의 삶과 처지를 존중하며 함께하면서, 어떻게 사목적으로 적절히 대응하여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를 고심하고 교육하는 것이 교회 스스로 복음화하며 또 생존하는 길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저는 우리 본당 신자분들께 솔직히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어서, 여러 신자분이 복음적으로 변화하실 만큼의 충분한 매력이나 동기를 제공해 드리지 못합니다. 저는 사제이면서도 인간적인 면에서 신자분들을 주님께 충분히 안내하고 인도하지 못하는 것을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자 여러분을 하느님 사랑 안에 푹 잠기게 해 드리지 못합니다. 저는 이것 때문에 늘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못난 저를 주님의 좋은 도구로 써 달라고. 저는 저의 사목적 행위들이 주님의 복음 정신과 교회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신자분들께서 부족하고 부당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함께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제가 정하고 수행하는 어떤 사목 방침과 행위도 신자 여러분의 동참 없이는 실제로 그 가치를 구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4.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을 위해 한 말씀 해 주십시오.저는 평화신문이 보고 싶어서 찾는 신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때는 평화신문이 평화방송 케이블 텔레비전처럼 기본요금만 내면 누구나 볼 수 있고 쉽게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아니면, 기금이 충분히 있어서 많은 본당 신부님들이나 신자분들이 재정 부담 없이 쉽게 선택할 수 있었으면 또 좋겠고요….저희 반이 1988년 사제품을 받을 때 평화신문이 창간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서울대교구 서품 동기 사제들이 1인당 100만 원씩 후원한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애착도 갑니다. 각자 맡은 소임과 그에 따른 사목적인 역할과 몫이 있어서, 충분하고도 적절한 노력이나 희생을 다 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심으로는 평화신문과 평화방송이 우리 교구의 언론사이기에 우리가 지키고 육성하여야 하고 또 그 몫은 우리의 책임이라고 여기고 삽니다.저는 교회에서 제공하는 문화적인 지원과 보물을 통해서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하려는 교회의 노고가 세상 안에서 빛을 발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교구의 언론기관인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의 발전이 우리 교회와 사회의 복음화에 기여하기를 기도합니다.정리=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5.05.12
결혼생활 어려움 겪는 신자들 배려해야 가정 사목을 주제로 10월 열리는 세계 주교 시노드 임시 총회 의안집 발표 【바티칸시티=외신종합】 오는 10월 5∼19일 교황청에서 ‘복음화의 맥락으로 본 가정에 대한 사목적 도전’을 주제로 열릴 세계 주교 시노드 제3차 임시 총회의 ‘의안집’(Instrumentum Laboris)이 6월 26일 공개됐다. 총 75쪽으로 이뤄진 의안집은 오늘날 전 세계 가정이 직면한 어려움, 특히 혼인 및 가정에 관해 교회가 제시하는 가치들과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경향 간의 점증하는 갈등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문건은 많은 가톨릭 신자를 포함해 대다수 사람이 그리스도교적 혼인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산아 제한이나 이혼, 재혼, 동성 간의 결합 등과 같은 쟁점 사안들에 대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존중과 결혼 생활에서 어려움에 처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강조하고 있다. 의안집은 주교시노드가 지난해에 보낸 예비문서에 대해 세계 각국 주교회의와 동방 가톨릭교회들 그리고 개인과 기관 단체들이 보낸 답변들을 159개 항으로 요약하고 있다. 의안집은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가정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있거나 또는 일부 측면을 거부하고 있음을 직시하면서 다양한 사목적 도전들에 대한 주교들의 제안들도 요약하고 있다. 일례로 혼인 무효 소송 절차를 간소화해달라는 요청이 특히 유럽과 북미주에서 많이 제기하고 있지만 또한 간소화에 따르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경고하는 응답들도 있다고 의안집은 밝히고 있다.(96항) 의안집은 △현대 세계에 있어 가정에 관한 복음의 소통(1∼49항) △가정을 위한 새로운 사목 프로그램(50∼120항) △어버이로서 양육의 책임(121∼159항) 등 크게 3부로 구성돼 있다. 제1부 ‘현대 세계에 있어 가정에 관한 복음의 소통’은 가정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최근의 교도권 문헌들을 간략히 개관한 후(1~7항), 성경과 교회 문헌에 드러난 혼인과 가정에 관한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제시한다.(8~19항) 의안집은 그리스도교 전통이 살아 있고 사목적 프로그램이 잘 짜인 곳에서는 신자들이 혼인과 가정에 관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받아들이지만, 다른 곳들에서는 여러 이유에서 이런 가르침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8항) 의안집은 또 ‘가정 복음과 자연법’(20~30항)에 관한 부분을 요약하면서, 자연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켜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보고 자연법 개념이 없어짐으로써 사랑과 성과 출산의 상호 연관성이 배제되고 그 결과 교회의 성 윤리의 여러 측면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새로운 도전들에 비춰본 가정 사목 프로그램’에 관한 제2부에서는 가정 사도직을 증진하기 위한 각종 제안을 요약하면서(50~60항), 사목적 도전들을 △신앙의 위기(61~62항) △가정 안의 위기 상황(64~69항) △외부의 압력(70~75항) △특수 상황들(76~79항)로 나눠 고찰하고 있다. 이어 갈수록 어려워지는 사목 상황에 대해 다루면서(80~120항) 교회 밖 혼인으로 성사 생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와 관련, 재혼한 신자들에 대해 교회는 단죄하는 심판관이 아니라 자녀를 받아들이고 상처를 치유하는 어머니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지적한다. 2부에서는 이밖에도 동성 간 결합 문제, 성교육 문제 등도 다루고 있다. ‘생명에 대한 개방성과 부모의 양육 책임’에 관한 제3부는 생명에 대한 개방성에 관한 사목적 도전들을 다루면서(121~131항) 바오로 6세 교황의 회칙 「인간 생명」(Humane Vitae)이 부부 사랑과 자녀 출산이 긴밀하게 연관됨을 재천명함으로써 예언자적 특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의안집은 자녀 양육과 관련한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는 것으로 마친다.(132~157항)주교시노드 제3차 임시 총회에 이어 2015년에는 가정을 주제로 한 세계 주교 시노드 정기회의가 열린다. 이와 관련, 주교 시노드 사무총장 로렌조 발디세리 추기경은 이번 시노드 의안집 발표 기자회견에서 이번 임시총회에서 내려진 결론들은 2015년 정기총회의 의안집을 준비하는 데 활용될 것이라고 밝히고, 정기총회가 끝난 후에 교황의 결정에 따라 최종 문헌이 발표될 것이라고 밝혔다. 평화신문2014.07.02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9)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피](//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087_1.1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9)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피'치유하는 피'에 대한 고대 종교심 투영 고대 근동에서 피의 신 '다무'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찢긴 힘줄을 붙여주는 두 가지 역할을 했다. 피의 신은 치유의 신으로 여겨졌다. 고대 이스라엘인은 피의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셈어 공통어의 단어 '담'에 담긴 문화적 동질성은 공유했다. 히브리어로 '담'인 피는 생명력 자체를 의미했기 때문에 이들은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 소를 잡아 피를 받은 다음 절반을 제단에 뿌리고 절반은 백성에게 뿌린 다음 이렇게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 제단과 백성에게 피를 뿌린 이유는 피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모든 부정 타는 것, 잡귀를 물리치고 오직 주님과 백성의 순수하고 정결한 공간을 만들려는 행위라고 파악할 수 있다. 하느님과 맺은 이 계약은 거룩한 계약, 사람들을 정화하는 계약이다. 또한 악한 것을 물리치는 계약, 생명을 주는 계약이다. 계약의 피는 고대 근동 신화의 종교심이 농축된 표현이다. #포도주는 포도나무의 피 고대 근동에서는 포도주를 종종 포도나무의 피로 표현했다. 포도주는 애초부터 보통 음료가 아니었다. 포도주를 포도나무의 피로 표현한 것이 히브리인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아카드어로 '피'를 뜻하는 '다무'에는 '붉은 포도주'라는 뜻도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고대 근동을 정복하자 고대 근동에는 헬레니즘이 급속히 퍼졌다. 이스라엘인들도 그리스 교양을 익혀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쓰이게 됐다. 언어가 바뀌더라도 뿌리 깊은 문화적 표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신약시대 이스라엘인들도 히브리어를 잊고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식자층은 점차 교양어로 그리스어를 썼지만, 피에 대한 전통적 종교심은 간직하며 살았다.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성경에 셈족의 종교심이 자연스럽게 투영된 셈이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선포한다. 그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끗해졌다'고 표현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히브 10,22). 구약 전승에 비교적 충실하다는 히브리서에서 이런 상징이 자주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치유하는 피'로 우리의 죄악이 씻긴다는 구약성경의 피에 대한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생명의 피이기에 그 피로 우리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의 문학적 표상을 자연스럽게 사용해 그리스도 죽음을 설명하는 히브리서의 저자도, 독자도 셈족의 고대 종교심을 잘 알고 있다. 신약성경을 기술한 사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단지 '우연한 사건'이나 '전례의 한 요소'로 국한되지 않고 인류 구원의 핵심이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깨끗해졌다는 성찰은 히브리서 외에도 신약성경 곳곳에 등장한다. 예수님 자신도 피에 대한 고대 종교심을 공유하셨던 것 같다. 예수님은 최후 만찬에서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의 의미를 전하셨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도들 또한 이 상징을 그대로 수용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셈족의 종교심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 '구원자의 피가 온 세상과 인류를 깨끗하게 만든다.'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근동의 모습이 이제 조금씩 이해될 것이다. 셈족의 종교심을 공유하는 신약시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예수님도 이런 상징으로 구원의 신비를 가르치셨고, 그 가르침에 따라 신앙 공동체는 지금도 성찬례를 올린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구원자의 피로 온 세상의 죄가 씻긴다는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분의 피로 우리가 깨끗해진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성찬례를 '인육식사'로 오해했고, 그런 오해가 흉한 소문을 낳았다. 소문은 결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로마 박해가 촉발했다. 로마 박해가 일어난 원인은 이러한 문화적ㆍ종교적 배경의 차이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문화적 차이는 반드시 극복돼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대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비셈족에게 설득하고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전했다. 흥미로운 점은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교가 피에 대한 성경의 상징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로마 문화권 사람들이 피에 대한 의미를 이해 못해도 결코 그 의미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피는 교회 핵심 상징이다. 우리는 잔인한 박해에 맞서 흘린 '순교자의 피'로 모두가 깨끗해진다고 고백한다. 박해에 굴하지 않고 피를 흘리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함께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로 만민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길에 자신의 피를 뿌려 동참하는 것이 된다. 이로써 우리는 그분을 따라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피도 공경하게 되었다. 초대 교회의 순교신심은 조선 천주교도들의 마음에 혈서처럼 새겨졌다. 조선시대 말엽에 받았던 극심한 탄압은 한국 가톨릭 신심의 독특한 특징이 됐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은 평화방송 TV 홈페이지(www.pbc.co.kr) 강좌/성경 꼭지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퇴사자22013.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