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든 '생명의 강'[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19. 요르단 강요르단 강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크고 긴 강으로 강의 굴곡이 심해 총 길이가 360㎞나 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땅은 '단에서 브에르 세바'(판관 20,1; 1사무 3,20; 2사무 3,10; 17,11; 24,2; 24,15; 1열왕 5,5)까지 경계를 이뤘다. 어른 보통 걸음으로 최북단 단에서 최남단 브에르 세바까지 일주일이 걸리고, 나자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이틀 길,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은 하룻길이면 넉넉할 만큼 좁은 땅이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이스라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탈출 3,17; 레위 20,24; 민수 14,8)으로 생명을 유지해 주는 것이 바로 요르단 강이다. 창세기는 요르단 강 골짜기 어디나 물이 넉넉해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았다(창세 13,10)고 묘사하고 있다. 창세기의 묘사대로 요르단 강 골짜기는 계절에 따라 다채롭게 변한다. 짙푸른 하늘 아래 갖가지 빛깔이 풍요로운 색조를 이룬다. 포도밭의 자줏빛, 과수원의 부드러운 녹색, 무르익은 보리밭과 밀밭의 옅은 청동색, 광야의 금빛 황갈색 등 다양한 생명의 색조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채색하고 있다. 요르단 강은 팔레스티나 지역,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크고 긴 강이다. 또 세계에서 수면이 가장 낮은 강이다. 요르단 강의 발원지는 해발 2814m의 헤르몬 산이다. 이 산의 만년설이 녹아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바니야스ㆍ엘 레단ㆍ바라그히트ㆍ하스바니 네 곳에서 분출해 수원지 단에 모여 요르단 강의 원천을 이룬 후 사해까지 흘러간다. 요르단은 우리말로 '단 지방에서 흐르다'는 뜻이다. 요르단 강은 직선으로 200㎞가 넘지 않지만, 강의 굴곡이 심한 전형적인 사행천이어서 총 길이는 360㎞가 넘는다. 요르단 강에는 2개 호수가 있다. 생명의 바다 '갈릴래아 호수'와 죽음의 바다 '사해'다. 원래 갈릴래아 호수에서 16㎞ 가량 북쪽으로 요르단 강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훌레흐' 호수가 있었으나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간해 농토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 구간을 '상부 요르단 강'이라 한다. 반면 갈릴래아 호수에서 요르단 강 종착지인 사해 입구까지를 '하부 요르단 강'이라 한다. 또 하부 요르단 강 일대를 성경에서는 '요르단 골짜기'라고 한다. 이 골짜기에는 요르단 강의 범람으로 기름진 흙들이 쌓여 넓은 평야를 이뤘다. 그 대표적인 평야가 벧산과 하롯이다. ▨성경 속 요르단 강 오늘날 이스라엘과 요르단 왕국이 요르단 강을 경계로 하고 있듯 성경 시대에도 요르단 강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여호수아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차지했다(여호 1-4장).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르단 강물을 갈라 건너는 기적을 행했고(2열왕 2,6-14), 시리아 왕 군사령관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대로 요르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고 나병을 완치했다(2열왕 5,1-19).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요한 세례자로부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마르 1,5; 마태 3,5-6; 루카 3,3)으로 해서 이 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구원 현장이 된 지구상 유일의 강이 됐다. ▨단 요르단 강의 원천이며 수원지인 단은 풍부한 수량과 푸른 숲으로 한여름에도 서늘한 만큼 살기 좋은 비옥한 땅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곳을 텔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셈족어 '텔'은 우리말로 '흙더미''토총'이란 뜻이 있어 텔단은 '토총 단'이라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단은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한 지파로 야곱이 자신의 두 번째 아내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서 낳은 아들이다(창세 35,25). 단 지파는 처음 여호수아로부터 필리스티아인과 인접한 아얄론 초지와 지중해 연안 지역을 분배받았으나(여호 19,40-46), 필리스티아인과의 전쟁에서 패해 이 땅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이동해 가나안 원주민 성읍 '라이스'를 정복한 후 단이라 불렀다(판관 18,1-31). 또 북이스라엘의 첫째 왕 예로보암이 단과 베텔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에게 우상을 숭배하게 하면서 성경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1열왕 12,25-30). 단은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중요 성소 역할을 담당하지만 베텔과 함께 아히야 예언자로부터 부정한 장소로 멸망할 것이라는 저주를 받는다. 이후 단을 지배하고 있던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침입을 받아 기원전 721년에 멸망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2열왕 17,1-6). 단의 발굴은 1966년에 시작했다. 성문과 성벽, 토착민 가나안 사람들의 신석기 시대 도자기, 금송아지를 우상 숭배하던 제단 터 등이 발굴됐다. 또 1993년 7월에는 아람어로 된 길이 32㎝, 폭 22㎝ 크기의 '텔단 석비'가 발굴됐다. 아람의 임금 하자엘(1열왕 19,15-18)의 비문인 이 석비에는 '다윗 왕조'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이 발굴되기 전까지 다윗이란 이름은 성경에만 언급될 뿐 동시대 고대 근동 문헌 어디에도 거론되지 않아 성서학계 일부에선 '다윗이 실존 인물이 아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텔단 석비는 다윗의 실존설에 대한 의문을 풀어준 유일한 단서이며 유물이다. 이 석비는 현재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사해 사해는 요르단 강의 종착지이다. 사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해수면보다 400m가량 낮고 그 바닥까지는 400m를 더 밑으로 내려간다. 상부 요르단 강에서 사해까지의 낙폭은 무려 735m에 이른다. 사해는 배출이 안 되는 닫힌 강이다. 들어온 강물을 그대로 다시 흘려보내는 '생명의 바다' 갈릴래아 호수와 달리 사해는 그냥 받아들이기만 한다. 단에서 흘러 내려온 강물은 이곳에 갇혀 생명을 잃고 만다. 소금 농도가 무려 30%나 되기에 마실 수도 없고 생물이 살 수도 없다. 그런 연유로 '죽은 바다'(死海)라 한다. 이곳을 '사해'라고 처음으로 부른 이는 예로니모(347~419) 성인이라고 전해진다. 그가 이곳을 라틴말로 '마레 모르뚜움'(mare mortuum-죽은 바다)이라 부른 것이 그대로 지명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소금 농도가 높아 누우면 몸이 뜬다. 삼투압 현상으로 사해 물에 오래 들어가 있으면 몸속 염분이 빠져나가 갑자기 의식을 잃을 수 있다. 그런 탓인지 몸이 뜨는 사해인데도 매년 익사자가 생긴다고 한다. 현지 안전요원은 15분 가량 수영한 후 30분 가량 휴식을 취할 것을 권장한다. 글ㆍ사진=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4.01.21

공의회 문헌ㆍ교리서 공부로 신앙 기초 다져신앙의 해, 한국교회 어떻게 살았나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선포한 '신앙의 해'가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끝난다. 2012년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 「가톨릭교회 교리서」 반포 20주년을 맞아 믿음의 문을 연 신앙의 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가 실천하고 맺어온 결실들을 종합한다. ▨믿음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신앙의 해는 한 해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되며 신자들 신앙의 기초를 다지고 성장하고 활성화하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는 것이 교회 구성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앙의 해를 폐막하면서 11월 23일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결심한 성인 예비신자들과 그들을 가르쳤던 교리교사 등 신앙 입문 성사와 관련한 사람들을 성 베드로 대성전에 초대했다. 이 초대는 신앙의 해가 종료됐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삶을 통해 신앙의 기쁨을 증언하도록 주님께 초대됐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다. 신앙의 해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선포한 '바오로 해'와 '사제의 해'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녔다. 바오로 해는 사도 바오로 탄생 2000주년을 맞아, 사제의 해는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 선종 150주년을 맞아 성인의 신앙과 영성을 본받아 복음화에 투신하고자 새로운 결심을 하는 해였다. 하지만 신앙의 해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신앙을 회복해 주님께 대한 확신과 기쁨에 가득 차 부활하신 주님을 오늘의 세상에 증언하고, 신앙을 찾는 많은 사람을 '믿음의 문' 즉 교회로 인도할 수 있게 하려고 선포한 것이다. 신앙의 해를 시작하면서 한국 천주교회가 자기 진단한 당면 과제는 '허약한 신앙'이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신앙의 해 동안 신자들에게 신앙의 본질과 내용에 대해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흐트러진 신앙의 틀을 새롭게 세우는 데 매진했다. ▨교구별 신앙의 해 실천 프로그램 신앙의 해 동안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공부하는 열기가 한국 천주교회 내 크게 확산됐다. 서울대교구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 △교회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 △미사로 하나되는 신앙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 등 5가지 주제로 신자들의 허약한 신앙 기초를 강화해 나갔다. 명동 주교좌 성당을 비롯한 대부분 일선 본당은 성경과 가톨릭교회 교리서 공부로 신앙의 기초를 다져 나갔다. 특히 대치2동과 구파발ㆍ중화동본당은 성경 통독, 이어쓰기, 암송대회를 열었고, 아현동ㆍ가회동ㆍ이문동본당은 성경 말씀 전시회, 성경 말씀 봉헌 및 가훈 쓰기를 이어갔다. 목3동ㆍ미아동ㆍ송천동ㆍ화양동본당에서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공부를, 송현동ㆍ동작동ㆍ중앙동본당은 청년교리를 확대했다. 이전부터 해오던 사업이기는 하지만 서울평협은 3개월 과정 '공의회 학교'를 통해 132명을 수료시켰다. 대구대교구는 가톨릭교리신학원을 위시한 교구의 여러 기관ㆍ단체와 대리구 및 본당에서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공의회 문헌을 공부하고 특강을 마련했다. 교구에서는 한국 최초로 젊은이를 위한 견진 교리서를 편찬했다. 또 많은 본당 공동체와 신심 단체, 사도직 단체들에서 신앙의 해 동안 성경 통독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 신앙 쇄신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신앙의 해를 맞아 영성사진 경연도 실시했다. 청주교구는 대림ㆍ사순 판공 문제지와 교구 주보, 교구 누리방을 통해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톨릭교회 교리서, 암송교리ㆍ암송성경 자료 등을 배포했고, 본당, 교구 차원에서 교리경시대회를 개최했다. 또 '영적 11 운동'을 펼쳐 냉담교우를 찾아내 회두시키는 운동을 지속했다. 본당별로는 '불평 안 하기 운동'을 전개, 일상의 불평을 기도로 승화시키는 노력을 전개했다. 안동교구는 주보와 월간지 「틔움」을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가톨릭교회 교리서 내용을 연재했고, 교구 교리경시대회를 개최했다. 또 사목국에서는 '신앙의 해 5분 교리' 자료를 제작, 본당에 배부했고, 지구별 신앙의 날 행사도 가졌다. 의정부교구도 주보를 통해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신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해 왔고, 광주대교구와 인천ㆍ춘천교구 등은 학술심포지엄 과 신앙의 해 특강 프로그램 등을 마련, 신자들을 교육했다. 대전교구와 원주교구는 소공동체 대회와 지구별 신앙대회를 개최했고, 마산교구는 2016년 교구 설정 50주년과 연계해 신자 연수와 교육 프로그램을 펼쳤다. 대구대교구 사목국장 박영일 신부는 "단체장 교육 때 신자들 만나보면 '신앙의 해'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면서 "신앙의 해를 일시적 행사로 그치지 말고, 교회 사명인 복음화를 위해 앞으로 지속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앙의 해 평가 교구와 본당, 그리고 교회 안팎으로 신앙의 해 정신이 확산됐고, 한국교회가 새로운 복음화와 신자 재복음화에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아울러 한국천주교회는 그간 양적인 성장에 연연했는데 최근 질적 성장을 고려하는 부분이 많았다는 평가다. 그 대표적 사례가 신자 교육과 사회교리 실천이라고 관계자들은 지적했다. 신앙의 해 동안 대규모 행사를 지양하고 양성에 초점을 둔 신자교육이 확산됐다. 일각에서는 신자들이 성경과 친숙해지기 위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쓰고, 생활화하려는 노력은 '소공동체 운동'이 뿌리내리고 있는 증거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또 '선교'개념이 '복음화'로 확대된 것도 질적인 변화라고 긍정 평가했다. 사회교리 실천 확대 문제에 대해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신앙의 기준으로 보고 실천하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다만 사회교리 실천이 구체적인 '나눔'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김혜경(세레나) 박사는 "나눔은 영성의 한 표현이고, 가톨릭교회의 커다란 자산이며 끊임없이 지켜야 하고 실천해야 할 복음 정신"이라며 "신앙의 해는 한국교회가 세상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여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3.11.19
![[빛과 소금의 길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8> 사도법관 김홍섭 바오로](//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3264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의 길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 바오로인간 사랑의 재판관법원장 재임 시절 새벽미사 참례 사형 선고하며 연민과 번뇌 느껴 마음 다해 사람을 사랑으로 섬겨임기를 마치고 광주를 떠나며 남동본당 교우들과 함께 사진 찍은 김홍섭(앞줄 왼쪽에서 세번째).1962년 10월 12일 광주고등법원 대법정에서 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경주호 납북미수 사건의 공소심 판결 공판이었다. 법대 위에 앉은 재판장 김홍섭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김사배 사형, 박석운 사형, 정회근 사형!’ 3명의 피고인에게 형을 언도한 후 재판장은 잠시 멈췄다. 법정은 숙연한 침묵으로 일순 낮게 가라앉았다. 김홍섭 판사의 목소리가 다시 법정에 울려 퍼졌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판결을 내리고 있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는 누가 죄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제가 능력이 모자라 여러분에게 사형을 선고하니 그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 수인들 각자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방청석에서는 수인들 가족이 낮게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비록 죄를 지었으나 가련한 이들이었다.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의 목소리에는 고뇌와 연민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연민의 대상은 법대 아래에 선 피고인뿐만 아니라 법대 위에 앉은 재판장 자신을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제에게 죽음의 형을 내리는 자신을 김홍섭은 정죄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0년 12월 16일 일어난 경주호 납북미수 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상 최대의 해상 납치 사건이었다. 일단의 좌익 세력이 목포를 출발하여 제주로 가는 여객선 경주호를 탈취하였다. 애초 중국으로 향하려던 이들은 항거하는 군인 2명을 살해하는 등 필사적으로 월북을 시도했다. 그 무리 중에는 부녀자, 학생, 어린아이까지 섞여 있었다. 미수에 그친 이 사건으로 22명이 구속되었고 처음 1심 판결에서는 5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납북을 기도하고 인명을 살상한 이 사건에 대해 사회여론은 격앙되어 있었다. 동족상잔의 뼈아픈 기억이 여전히 고통스러운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다는 감정이 팽배했다. 그러나 김홍섭은 법관으로서의 공평무사한 정신을 보여주었다. 재심 판결을 맡았던 김홍섭은 심문 과정에서도 마치 친부모인양 부드럽게 처신했다. 그는 납북 범죄자들과 판사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러분과 나는 불행히도 서로 세계관이 달라 오늘 이렇게 서로 위치가 달리 있는 것입니다.” 범법자들에게 ‘세계관이 다르다’고 한 표현은 당시 분위기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용기 있는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김홍섭은 늘 자기 소신을 당당히 지켰다. 1961년 7월11일 대법원 판사 김홍섭은 국가재건최고회의로부터 혁명재판소 상소심 심판관 4명 중 한 사람으로 임명받았다. 혁명재판소의 재판장은 현역 장교가 맡았다. ‘반국가적 반민족적 반혁명적 범죄를 중점적으로 일벌백계주의로 엄정 신속 처리함으로써 혁명 정신 완수를 수행한다’는 기치 아래 정치깡패, 반혁명적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이 재판은 군법을 기준으로 진행되어 극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많았다. 김홍섭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분위기였을 것이다. 한 달 만인 8월에 김홍섭은 광주고등법원장으로 발령받았다. 그가 왜 광주로 떠나갔을지 그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김홍섭에게 사형은 선고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제도였다. 어찌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죽음으로써 처벌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신앙인 김홍섭에게 삶과 죽음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었다. 평소 그는 판결에서 되도록 사형을 피하고자 했으나 국가의 사법체계를 비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혁명재판소 재판을 피하려고 광주로 내려간 그가 다시 사형을 선고해야 하는 경주호 재판을 맡게 되었으니 그의 심정이 참으로 힘에 겨웠을 게 분명하다. 광주고등법원장 재임 시절 그는 늘 새벽미사와 저녁 성체조배를 빠트리지 않았다. 그의 본당이었던 광주 남동본당 교우들은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있는 김홍섭 바오로를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그 기도문을 김홍섭은 얼마나 깊게 묵상했을 것인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사형을 선고하는 자신도 분명 죄인이라고 그는 믿었을 것이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사법적 기준으로 보아 사형제도 자체를 반대하는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판사 김홍섭의 행보는 사형의 반인도적 본질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사형 제도 폐지 움직임이 나오기 반세기 이전에 이미 김홍섭은 사형 폐지 운동의 선구자로서 첫발을 떼놓았던 것이다. 그의 선구적 믿음은 ‘사형 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인도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올바른 방식 또한 없다’고 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메시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판사 김홍섭의 화두는 언제나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그는 ‘과연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재판한다는 말입니까?’(야고 4,12)라는 성경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신앙심 깊은 법관이었다. 이웃을 재판해야 하는 그 직을 떠나고자 애쓴 적도 있었던 그는 결국 법관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받아들이기로 한 다음부터는 늘 이렇게 다짐을 했다. ‘좋은 법관이기 전에 또는, 그와 동시에, 친절하고 성실한 인간이어야겠다.’ 죄지은 이들을 법으로 단죄할 때라도 그들이 어쩔 수 없는 힘에 압도당해 패배자가 되어버린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고자 했다. 김홍섭이 6·25 전쟁 후 있었던 부역자 재판에 관련된 일화도 그의 이런 성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재판이 있었던 날 저녁 밥상을 받은 김홍섭은 쉽게 수저를 들지 못했다. “오늘 재판에서 부역자로 재판정에 선 남자가 있었다오. 방청석에는 그 부인과 아이들이 넷이나 있었소. 나이 어린아이들이 올망졸망 쳐다보고 있었소. 재판하는데 아비가 공산주의자로 죄를 받으면 나중에 저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날지 걱정이 되더란 말이오.…내가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겠소. 그 아이들은 지금 저녁도 못 먹고 있을 텐데 말이오.” 광주고등법원장 재임 시절 그는 역시 겸손한 교우이기도 했다. 당시 남동성당은 한옥이던 옛 성당을 허물고 새로 짓기로 했는데 평신도 사도회 의장으로 뽑힌 김홍섭은 주일이면 직접 삽을 들고 벽돌을 나르며 앞장서 일했다고 한다. 허름한 차림으로 성당 마당에서 잡초를 뽑거나 돌을 치우는 김홍섭을 고등법원장으로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김홍섭의 광주 재임 기간은 거의 3년으로 꽤 긴 시간이었다. 1964년 3월 김홍섭이 서울고등법원장으로 부임해 간 다음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홍섭이 그동안 남모르게 했던 봉사 활동으로 광주 동광원 방문이 있었다. 동광원은 그 무렵 광주에서 가장 후미진 곳으로 갈 데 없는 환자나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김홍섭은 이곳을 찾아가 기도 모임을 함께했고 특강을 하기도 했다. 특히 환자 중 김인옥이란 청년을 돌보았는데 나무에서 떨어져 하반신 불구로 가족들에게서도 버려진 채 누워 지내는 불쌍한 환자였다. 김홍섭은 어둡고 냄새나는 움막에 누워있는 환자를 매주 찾아와 머리맡에서 복음서를 읽어주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김홍섭이 사제에 대해 표한 존경심은 아무도 따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갓 부임한 보좌신부를 대할 때도 귀한 부름에 응하듯 언제나 공손히 “예”라고 했고, 어떤 사제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공무를 제외하고는 지체 없이 찾아가 보살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남동성당 시절 김홍섭의 대자였던 임기석(아우구스티노)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김홍섭 판사님은 법관이라는 인상보다는 인자한 아버지 같고 조용하고 침잠한 영혼의 소유자 같았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무더운 여름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에 얼굴을 씻은 것 같고 유순한 가을 하늘을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법관 김홍섭은 ‘생은 누구에게나 대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앙인 김홍섭은 그 대견한 존재들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섬겼다. 다 같이 하느님의 자녀, 형제자매이기 때문이었다. <계속> 백영민2015.04.01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8, 끝) 존 필 마이어 (하)](//cpbc.co.kr/CMS/newspaper/2015/02/rc/554878_1.2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8, 끝) 존 필 마이어 (하)5부작 시리즈 통해 예수의 역사적 진실 세세히 파헤쳐 「주변부 유다인 3」 - 추종자들과 경쟁자들 존 필 마이어 신부는 제3권에서 군중, 열둘, 여자들로 구성된 추종자 그룹을 분석하고 아울러 경쟁자들의 역사적인 면모를 재구성한다. 예수의 경쟁자들로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쿰란 공동체 포함), 그리고 ‘제4 철학(the fourth philosophy)’을 분석한다. 제4 철학은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유일하고도 진실하신 통치자라는 믿음으로 서기 6년 유다 지방에 대한 로마의 지배와 조세에 저항한 갈릴래아 사람 유다와 그의 후계자들을 가리킨다. 흔히 혁명당원으로 동일시되는 젤롯당(Zealots)은 68년 로마 항쟁 때 출현한 조직이기에 예수의 직무 기간 중에 활동한 세력은 아니다. 예수의 직무 기간 동안 무장한 혁명당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쿰란 공동체가 속해 있던 에세네파는 종말론적인 지향성과 성전 사제 계급과의 거리감에서 예수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정ㆍ부정의 엄격한 기준과 이에 따른 탈속적인 삶의 모습에서 예수와 결정적인 차이를 지닌다. 성문화된 모세의 율법만을 인정하고 종말론적인 교리를 거부했던 사두가이파와 달리 바리사이파들은 ‘선조들의 전승들’(traditions of the fathers)을 율법과 함께 받아들이고 율법 해석의 관용성, 일상에서 사제적 이상을 지향하는 정결법에 대한 관심, 그리고 부활과 이스라엘의 재건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협동설을 강조하였다. 예수와 바리사이파와의 관계를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운 이유는 복음서에 나타난 바리사이들과의 논쟁은 초기 그리스도교와 바리사이들의 후신인 랍비 유대교와의 대립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70년대 이전에는 갈릴래아 지방에 바리사이파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고, 주로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에 퍼져 살았다. 이러한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도 갈랄래아의 예수가 유다의 바리사이파들과 얼마나 논쟁을 할 수 있었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주변부 유다인 4」 - 율법과 사랑 마이어는 제4권에서 예수와 율법(이혼 금지, 맹세 금지, 안식일, 정결법) 그리고 사랑의 계명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마이어는 4권의 연구를 요약하면서 결국 역사적 예수는 유다교의 틀 안에서 성장하고 율법을 준수하는 진실한 유다인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는 종말론적 예언자로서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조명하에 율법을 새롭게 해석했다. 마이어에 의하면, 바로 여기서 유다교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이중적인 면모가 드러난다고 본다.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할라카적 예수(halakic Jesus)의 본래 모습이 역사적으로 손실되었던 것은 양식 비평이 지적하듯이 초대 공동체의 상황이 예수 전승을 기억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이어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조명 아래 율법을 해석하는 할라카적 예수가 역사적 예수의 진실에 가깝다고 평가하고 있다종합 및 평가마이어의 「주변부 유다인」은 이제 마지막 5권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마이어는 5권에서 예수의 비유, 예수의 자기 지칭 표현 그리고 예수의 죽음이라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마지막 연구 과제로 남겨놓고 있다. 아직 5권이 출간되지 않았지만 4권까지 내용을 바탕으로 마이어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시도해보고자 한다.첫째, 무엇보다 마이어는 역사 비평의 통시적인 분석이 설화 비평이나 독자 반응 비평과 같은 공시적 분석 방법에 의해 대체되거나 평가 절하되는 현금의 주석학계에서 역사 비평의 정당성과 효용성을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탁월하게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이어에 의하면 공시적 분석은 전승이 형성되고 전달되어 문자로 정착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양식 비평을 전제할 때, 올바른 의미와 기능을 가질 수 있다. 복음서는 순전히 저자가 만들어낸 창작물이 아니라 기존의 전승들을 취합하고 편집한 결과라는 것이 역사 비평의 통찰이기 때문이다. 둘째, 마이어가 재구성한 예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정향된 예수 세미나의 오류를 극복하고 1세기 유다교에 뿌리를 둔 유다적인 예수를 그려준다. 역사 비평이 재구성한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미래와 현재를 선포하는 종말론적 예언자, 기적 수행자, 스승의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이른바 ‘주변부 유다인’이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예수는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 신앙에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셋째, 마이어에게 역사와 신앙은 서로 구별된다. 역사는 신앙을 증명할 수 없으나 신앙의 이유를 나름대로 제공할 수 있다. 예컨대 예수의 동정녀 잉태 전승에 대한 역사 비평적 연구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신앙의 근거를 역사적으로 제공할 수 없으나 그 신앙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할 수는 있다. 이 점에서 마이어는 역사의 예수와 실제의 예수, 그리고 복음서의 예수를 구별한다. 실제의 예수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간 예수를 의미하고 복음서의 예수는 복음서 저자 및 신앙 공동체가 기억하고 고백하는 예수를 가리킨다. 역사적 예수는 복음서가 말하는 신앙의 예수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역사적 개연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넷째, 마이어는 그러나 역사가 신앙에 개연성을 제공하는 역사적 작업에 철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이어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자 근거인 예수 부활을 역사적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정의하는 기적이란 시간과 공간 내에 발생한 비일상적 사건이고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건이다. 그런데 부활은 시공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사건이기에 기적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고 따라서 역사적 연구의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이어는 부활이 철저히 신앙의 문제이지 역사가의 탐구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마지막 작품이 될 제5권에서도 이 주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부활은 시공간 안에 발생한 초월적인 사건이다. 빈 무덤 이야기와 발현 이야기가 이 점을 암시한다. 사실 부활이 시공간 안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그리스도 신앙은 가현론 내지 영지주의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신약 성경의 어느 전승보다도 부활 전승이야말로 정작 마이어가 역사성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당혹성의 기준, 비유사성의 기준, 다수적 증언의 기준, 거부와 처형의 기준까지 충족시키는 소위 역사적 개연성을 지닌다. 마이어는 역사성 판단의 기준을 동정녀 잉태 전승을 포함하여 기적이야기에는 적용하고 왜 부활 이야기에는 적용하기를 거부하는가? 마이어는 부활을 역사적 범주 밖에 위치시킴으로써 신앙과 역사를 분리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마이어는 불트만 류의 불가지론 내지, 신앙과 역사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변증법적 신학의 틀로 회귀하고 만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어의 5부작 「주변부 유다인」은 예수의 역사적 진실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파헤친 세기의 대작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세계의 많은 독자는 마이어가 끝까지 건강을 유지하여 마지막 제5권의 집필을 완성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백운철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장)※이번 호로 창간 25주년 기념 특집으로 지난 2013년 5월 시작한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기획 시리즈를 모두 마칩니다. 집필에 참여해 주신 필자들과 가톨릭신학과사상학회 그리고 읽기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관심을 갖고 읽어 주신 독자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cpbc2015.02.11
![[출판]2012년 출판계를 돌아보다](//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5166_1.0_titleImage_1.jpg)
[출판]2012년 출판계를 돌아보다하느님 말씀으로 이끄는 성경 서적 풍성 2012년 올 한 해 출판계에는 성경 관련 서적들이 다양하게 선보여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안내했다. 요한복음 해설서 「비참과 자비의 만남」(바오로딸), 「요한복음 그 산에 오르다」(사람과 사랑), 「성경말씀 맛들이기-구약성경」(기쁜소식),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바오로딸) 등이 출간됐다. 또 「성경 인물에게 배우는 나이듦의 영성」(바오로딸)과 「오정희의 이야기 성서」(여백), 「성경의 노래」(바오로딸) 등은 성경 해설서의 폭을 넓혔다. 유명 저자들의 저서도 잇달아 발간됐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나자렛 예수」 시리즈 3권을 올해 마무리지었고, 차동엽 신부는 「주님의 기도」로 독자들과 만났다. 황창연 신부는 환경 에세이 「북극곰! 어디로 가야 하나?」로 가톨릭 매스컴상 출판부문상을 받기도 했다. 전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는 「은수잡록」(가톨릭출판사)으로, 한국교회 석학 정의채 몬시뇰은 「인류공통문화 지각 변동 속의 한국」 등을 통해 교회와 사회를 향해 어른의 목소리를 냈다. 이 밖에도 원전과 풍부한 사료를 담은 「세계교회사여행」(1ㆍ2권/가톨릭출판사)이 호평을 받았고,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위즈앤비즈)ㆍ「희망과 기도」(여백)ㆍ「기도와 관상」(분도출판사) 등 기도 관련 서적 출간도 꾸준했다. 그렇다면 올 한 해 교계 출판사마다 어떤 책이 가장 많이 팔렸을까. 가톨릭출판사가 발간한 가톨릭 청년교리서 「YOUCAT」은 10월 시작된 신앙의 해 열풍에 힘입어 출간 두 달 만에 출판사 올해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정기적으로 「YOU CAT」 공부모임을 갖는 본당이 점차 느는 추세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청년들이 함께 모여 「유캣」을 공부하며 신앙을 나누길 바란다"고 당부한 바 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를 청년 눈높이에 맞게 제작한 이 책은 30개 나라에서 200만 권이 넘게 팔린 세계적 베스트셀러다.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책은 김창렬 주교의 「은수잡록」. 올해 설립 50주년을 보낸 분도출판사에서는 50주년 기념도서로 선보인 「성경역사지도」가 가장 많이 팔렸다. 전면 컬러로 나온 이 책은 성경에 나온 지역에 관한 상세한 해설을 곁들인 지도는 물론 등장인물 이동경로, 풍부한 자료사진 등으로 '성경 옆에 둬야 할 첫 책'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정가 9만 5000원이라는 높은 가격에도 기꺼이 독자들 지갑을 열게 했다. 베스트셀러 2위는 역시 50주년 기념도서 중 하나인 노르베트르 베버 아빠스의 1911년 한국 기행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다. 바오로딸에서는 십자성호, 성수, 수호천사, 화살기도 등 가톨릭교회 아름다운 전통과 신심의 의미를 일깨워준 「가톨릭 신앙의 40가지 보물」이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명망있는 개신교 신학자였던 저자 스콧 한(55, 미국) 박사는 미사에 매료돼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가톨릭 신앙에 담긴 성경적ㆍ역사적 의미를 쉽고 명료한 해설로 풀어냈다. 두 번째로 사랑받은 책은 신앙의 해를 기념해 최근 발간된 교황 베네딕토 16세 저서 「나자렛 예수」다. 생활성서에서는 8남매를 키우는 아버지(전문석 레미지오)의 신앙일기 「최고의 선물」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8남매 하상이네 신앙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0가족이 신앙으로 똘똘 뭉쳐 사는 모습을 담고 있다. 아이 한 명 낳기도 버거워하는 요즘, 자녀 여덟 명을 낳아 성가정을 이뤄가는 여정이 생생히 펼쳐진다. 결론은 자녀는 하느님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 2위는 이현주 목사가 쓴 「하루기도」. 성바오로에서는 오상의 성 비오 신부(1887~1968, 이탈리아 카푸친 작은형제회) 어록을 정리한 「평화를 누리십시오」가 가장 많이 팔렸다. 성 비오 신부의 위로와 용기의 말을 담은 이 책은 최근 우리 사회를 강타한 힐링 열풍을 반영한다.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책은 고독을 다룬 책 「고독하되 고독하지 않게」.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박수정2012.12.18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1) 바람이 분다, 고대 근동 바람신](//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7316_1.0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1) 바람이 분다, 고대 근동 바람신신화적 표현 그러나 신이 아닌 '바람' 바람은 히브리어로 '루아흐'다. 루아흐는 '하느님의 숨결', 또는 '하느님의 영'으로 옮길 수 있다. 같은 낱말이 '숨'도 되고 '영'도 되고 '바람'도 되는 것이다. 바람은 가변적 성질을 지녔다.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넓은 지역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떠돌아다니는 바람은 허무나 불안을, 비를 뿌리는 바람은 풍요를, 약하고 부드러운 바람은 상쾌함을, 태풍같이 거센 바람은 파괴를 상징한다. 다양한 종교에서 바람은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며, 때로는 '인격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나라 단군신화에도 비와 구름과 바람을 상징하는 세 개의 신 우사(雨師)와 운사(雲師), 풍백(風伯)이 등장한다. 이 신들은 농경사회를 이뤘던 우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 바람신은 바다를 생활 터전으로 삼는 해양민족에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세계 여러 언어에서 '바람'과 '불다'의 어근이 비슷하게 나타난다. 특히 발음 소리가 그렇다. 우리말의 '바람'과 '불다'의 공통 자음은 'ㅂ'과 'ㄹ'이다. 입술소리 'ㅂ'과 치음의 공명음인 'ㄹ'의 순서다. '불다'를 뜻하는 영어 '블로우(blow)'나 독일어 '블라젠(blasen)'도 자음의 순서가 'b'과 'l'로 같다. 한자 '풍(風, p-ng)'의 우리말 발음과 중국어 발음 '펭(fe˘ng, f-ng)' 또한 같은 계통의 자음으로 구성된다. 이는 바람을 처음 배우는 아기 말인 '푸웅'(또는 뿌우-)처럼 입술을 모아 세차게 부는 음성어에서 자연스레 유래했을 것이다. #바람의 존재 구약성경의 무대인 팔레스티나는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이다. 팔레스티나는 바다와 육지가 접하고 산악지대와 강이 겹쳐 있는 지형을 갖췄다. 규칙적으로 부는 바람은 습기를 머금어 이슬을 맺게 하고, 농사에 도움을 주는 이로운 존재였다. 겨울이면 규칙적 바람은 잦아들지만, 때때로 지중해에서 폭풍이 몰려와 비를 뿌려준다. 강풍을 동반하거나 눈이 내리기도 한다. 한편 봄과 가을에는 동쪽 광야에서 먼지를 동반한 덥고 건조한 바람이 분다. 메마른 바람은 작물에 좋지 않으며, 인간에게도 파괴의 존재다. 물이 귀했던 고대 근동 지역에서 잎사귀에 맺히는 영롱한 이슬은 풍요의 전조였다. 구약성경에서 '하늘의 이슬'은 풍요를 묘사하는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모세는 유언으로 남긴 아름다운 시에서 하느님 말씀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다고 표현했다. 메마른 팔레스티나 땅에서 비는 풍요의 상징이었다. 이슬 또한 금방 증발돼 버리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비나 소나기처럼 풍요의 근원으로 당당히 이름을 알렸다. #고대 근동의 바람 헬레니즘 시대 이집트 유적에서 바람은 공통적으로 사람의 몸에 다양한 짐승의 머리가 붙은 모습, 또는 짐승의 몸에 양의 머리가 하나 또는 여러 개 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날개를 달고 머리마다 깃털이 꽂혀 있는 게 특징이다. 날개와 깃털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바람의 속성을, 머리가 여럿인 것은 바람의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한 것이다. 그리스어로 바람 신을 '아네모이'라고 한다. 아네모이는 넷이었다. 겨울을 일으키는 북풍 '보레아스'부터 여름을 일으키는 남풍 '노토스'와 동풍 '에우로스', 서풍 '제퓌로스' 등이다. 네 신은 석양의 신 아스트라이오스와 새벽녘의 신 에오스 사이에서 나온 자식인데, 제우스는 이 넷의 양육을 바람 신인 아일로스에게 맡긴다. 아일로스는 어린 바람 신 넷을 모아 섬에서 기른다. 그리스인들은 바람이 바다 쪽 섬에서 불어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듯하다. 한편 그리스어 '프네우마'는 본디 '숨'을 뜻했다. 원래는 호흡을 뜻했지만, 나중에는 우주 삼라만상에 깃든 '영(靈)'을 뜻하게 됐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선 바람과 숨이 모두 '루아흐'라는 하나의 낱말로 표현됐다. 그리스어에는 이처럼 바람과 관련한 단어가 많다. 이집트와 그리스 등에서 바람은 분명 인격신의 모습을 띠었지만, 구약성경에서는 인격신의 특성이 거의 사라진다. 구약성경에는 바람이 신으로서 경배받는 구절이 없다.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바람신도 탈신화했다. 하지만 바람의 독특한 신화적 모티프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물 위에 당신의 거처를 세우시는 분. 구름을 당신 수레로 삼으시고 바람(루아흐) 날개 타고 다니시는 분"(시편 104,3). "커룹 위에 올라 날아가시고 바람(루아흐) 날개 타고 나타나셨네"(2사무 22,11; 시편 18,11). 이처럼 구약성경에는 바람에 '날개'가 달렸다고 표현하는 곳이 나온다. 신화의 언어로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바람은 절대 신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평화방송 TV 방송시간 : 수요일 오전 9시(본방송), 금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일요일 저녁 9시, 월요일 오전 4시ㆍ오후 3시퇴사자22013.04.09
목자 없는 양떼, 척박한 환경에도 신앙의 향기 전해](//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4135_1.0_titleImage_1.jpg)
[방글라데시를 가다](하)목자 없는 양떼, 척박한 환경에도 신앙의 향기 전해현지 한국인 신자 공동체 방글라데시 다카 한인공동체 사목회장 김항진씨가 한인 신자들의 삶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목자가 없는 곳에서 양이 살 수 있을까?’11월 13일 방글라데시에서의 마지막 날. 한국인 신자 공동체를 만났다. 한국인 사제 한 명 없는 다카에서 20년 동안 공동체를 유지해온 이들이었다. 한국인 신자들은 사목자가 없는 곳에서 신앙적 갈증을 느끼면서도, 지역 사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신자 공동체방글라데시에 사는 한국인은 1200여 명, 그중 700명이 수도 다카에 살고 있다. 열 명 중 한 명이 천주교 신자인 한국 교회 복음화율과 마찬가지로, 다카의 한국인 신자 공동체 수도 700명 중 10%인 70명 안팎이다.1980년대부터 사업이나 해외 파견 근무차 방글라데시에 건너온 한인들은 1995년 처음으로 공동체를 꾸렸다. 본당 소공동체 성격의 ‘성심회’에서 자매들이 기도를 함께 바치고 친목을 쌓으면서 신자공동체가 방글라데시에 뿌리내렸다.하지만 머나먼 타국 땅에서 신앙을 이어가기란 녹록지 않았다. 다카 시내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곳은 방글라데시 대신학교 안에 있는 성당 한 곳뿐. 신학교 안에 있다 보니 신자들은 미사만 참례하고 돌아가는 ‘손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일에 외국인을 위한 미사가 있지만 이마저도 필리핀 신자들이 대다수여서 한국 신자들은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2002년 장인남(태국ㆍ캄보디아 교황대사) 대주교가 방글라데시 교황대사로 부임하면서 매주 토요일 한국어 미사를 따로 봉헌한 적이 있다. 사목자가 없어 ‘길 잃은 양 떼’처럼 흩어져 있던 신자들이 모여든 시기다. 하지만 2007년 장 대주교가 우간다로 떠나면서 신자들은 목자를 잃었다. 이후 몇몇 한국 수도회에서 방글라데시로 성직자를 보냈지만 얼마 못 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또다시 방글라데시에는 신자들만 남았다.현지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열악한 환경에서도 한국인 공동체는 신앙의 열정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 본당은 없지만 사목회장(김항진 레오, 51)과 친교회장(리승재 바오로, 45)을 뽑아 공동체 활성화에 힘을 쏟고 있다.이들이 한국인 공동체에 이토록 애정을 쏟는 이유는 공동체 활성화가 결국 지역 사회 발전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인 신자들은 현지의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가톨릭의 불모지인 방글라데시에 주님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대부분 방글라데시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신자들은 직원을 고용할 때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가장 소외된 이에게 직업을 가질 기회를 준다. 종교나 나이 등은 중요치 않다.부활이나 성탄을 앞두고는 바자를 열어 수익금을 현지의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한다. 섬유산업에 종사하는 신자들이 많아 의류가 후원 물품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공동체가 닦아놓은 신앙의 터전은 방글라데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에게 든든한 보금자리가 된다. 교우들 모임에 나가 형제애를 느끼고, 먼저 뿌리내린 선배들이 사업과 신앙생활에서 보이는 모범을 따라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 한국인 신자 공동체 사목회장 김항진씨 “한국인 신자 공동체에 신부님을 모시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다카 한국인 공동체 사목회장 김항진(레오, 51)씨는 신자공동체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공동체를 구성하고 연대하는 것이 신자들의 의무라고 강조하는 그는 바쁜 사업 활동 중에도 교우들을 살뜰하게 챙기고 있었다.김씨는 매일 아침 교우들에게 그날의 복음 말씀을 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틈나는 대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성경 특강 동영상을 공유하며 주님의 말씀을 생활화한다. 공동체 구성원간 화합을 위해 교우 모임을 자주 갖고 신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귀담아듣는 역할을 하고 있다.가장 가난한 곳이기에게 사랑 더 필요 그의 노력으로 대신학교 외국인 미사에 들쑥날쑥 참례하던 신자들이 꾸준히 주일 미사에 참례하기 시작했다. 한명 한명씩 관심을 갖고 정성을 쏟은 결과다. 하지만 본당도, 사목자도 없는 공동체를 현지인들만의 노력으로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채워지지 않는 신앙의 목마름을 호소하는 신자들이 많았다.김씨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방글라데시는 오히려 선교가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곳”이라며 “방글라데시 한국인 신자들에게 한국 교회의 사목적 배려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방글라데시이기에 그 어떤 곳보다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더 가난한 곳에서 더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려고 했던 주님의 모습대로, 가난한 방글라데시에 우리나라 교회의 관심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길 잃은 양떼 방글라데시에 한국인 사목자가 파견되면 한인 신자뿐 아니라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한인 신자들의 신앙이 성숙해진다면, 현지인에 대한 선교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작은 움직임이나마 한국인 사장들이 회사를 경영하는 데 근로자를 존중하는 모범을 보이고, 공동체 행사에서 나온 수익을 지역의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면서 가톨릭에 대한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다카에서 만난 한국인 공동체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김씨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고 했다. “여기 길 잃은 양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한마음으로 사목자를 기다리는 방글라데시 한인들의 모습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김유리 기자 lucia@pbc.co.kr 평화신문2014.12.10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67>주님의 기도(7, 끝) : 일곱 가지 청원 ⑥](//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5634_1.0_titleImage_1.jpg)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주님의 기도(7, 끝) : 일곱 가지 청원 ⑥ 여전히 악에 맞서 싸우는 교회, 인내의 은총 청하며 그리스도 다시 오심 기다려야 '악에서 구하소서' 는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악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청한다. 사진은 올리브산 주님의 기도 기념 성당 구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는 바위 옆에서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순례객들. 평화신문 자료사진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마지막 일곱째 청원은 “악에서 구하소서”입니다. 이 마지막 청원과 마침 영광송에 대해 살펴봅니다(2850~2856항)악에서 구하소서악에서 구해 달라는 청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 곧 주님의 기도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아버지께 하신 청원에도 나옵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요한 17,5). 여기서 악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닌 구체적인 인격체, 곧 하느님의 계획을 가로막는 자,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가로막는 자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성경과 성전을 토대로 이를 전통적으로 사탄, 악마, 혹은 하느님께 대항하는 천사라고 불러왔습니다. 이 악마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고 거짓말쟁이일 뿐 아니라 거짓의 아비입니다(요한 8,44). 그는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한 바로 그 자입니다. 이 악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결정적으로 패합니다. 악의 패배는 역설적으로 악이 초래한 그 죽음에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맡기심으로써 이뤄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에 자신을 내맡기신 것은 악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첫 조상인 아담이 악에 굴복함으로써 세상에 죄와 죽음이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순명하심으로써 세상에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공동체인 교회는 지상의 나그네살이를 하는 현세에서 여전히 악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청원은 지상의 나그네살이를 그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악과의 싸움에서 패하지 않도록 지켜달라는 청원입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실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기록하듯이,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하고 기도합니다. 악에서 구해주시기를 청하는 이 마지막 청원은 현재의 악만이 아니라 과거에 우리를 짓눌렀던 악,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악 등 과거와 미래의 악까지 모든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 청원은 또한 세상의 모든 괴로움에 대해 호소하면서 평화의 선물을 주시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꿋꿋한 인내의 은총을 주시도록 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사 중 영성체 예식에서 주님의 기도를 바친 후에 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마침 영광송 마침 영광송이란 주님의 기도를 바친 후 사제가 바치는 위의 기도에 이어 모든 신자가 바치는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하고 바치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 마침 영광송은 주님의 기도 전반부에 나오는 첫 세 청원, 곧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다시 말해 아버지의 구원 의지가 힘차게 드러나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침 영광송은 단순히 첫 세 청원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흠숭과 감사의 형태를 취합니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의 참된 주인은 오로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며 감사와 흠숭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 마지막은 “아멘”입니다. 아멘이란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바친 청원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동의하는 것입니다. 정리합시다-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일곱 청원 중 첫 세 청원은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목적이고, 나머지 네 청원은 우리의 소망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이 네 청원은 생명 유지를 위한 양식을 얻고 죄를 치유 받으며 악에 대한 승리를 위한 우리의 싸움과 관련됩니다(2857항).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마지막 청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더불어,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 계획에 직접 반대한 천사, 사탄, 이 세상의 권력자를 쳐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드러내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합니다(2964항).- 마침의 “아멘”으로, 우리는 주님의 기도 일곱 청원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입니다(2965항) 정리=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cpbc2014.10.22
![[나의 묵주이야기] 96. “묵주기도는 사랑의 신비, 그 이상이다”](//cpbc.co.kr/CMS/newspaper/2014/09/rc/530669_1.0_titleImage_1.jpg)
[나의 묵주이야기] 96. “묵주기도는 사랑의 신비, 그 이상이다”이윤희 세라피나(수원교구 광명본당) 사리분간을 하기 시작할 무렵 난 집 앞 개신교 예배당에 다녔다. 누가 가라고 했는지 누군가 내 손을 잡아끌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질 않지만, 우리 가족 중 아무도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어릴 적, 개신교 예배당은 나의 유일한 취미생활이고 놀이터였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신앙의 열정을 배운 고마운 곳이었다.하지만 내가 스무 살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열심히 다녔던 개신교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고 언니와 동생은 개신교를 먼저 다닌 나보다 더 이런저런 봉사도 하며 아주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 무슨 이유인지 성당에 다니겠다고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하셨다. 언니와 동생은 기왕에 신앙을 가지시려거든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 가자고 그렇게 말했건만 열심한 어느 자매의 손에 이끌려 우리 딸들의 말은 듣지 않으셨다. 나 또한 특별한 이유 없이, 먼저 입교하고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세례를 받으신 부모님을 따라 입교한 뒤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오랜 기간 개신교에 익숙해 있던 터라 성모신심이란 말 자체를 몰랐던 내게 성당 문 앞에서 언제나 우리를 반겨주시는 성모님은 동상에 불과했다. 성모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더군다나 묵주기도는 할 줄도 몰랐고 갓 입교한 아버지가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하시면서 새벽마다 묵주기도를 바치던 모습이 몹시 낯설기만 했다. 퇴행성으로 다리가 많이 아프셨던 아버지는 아픈 곳을 문지르며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시더니 어느 날 서서히 나으셨다.지금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 특별한 약을 쓴 것도 아닌데 말이다. 또 묵주기도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드셨는데, 촛대도 없이 얇은 합판 위에 작은 성모님을 모시고 그냥 초를 켜 놓고 기도를 드리다 잠이 들었다. 그런데 완전히 다 타버린 초가 불이 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꺼져 있는 놀라운 일도 있었다.그렇지만 세례만 받았을 뿐, 신앙의 열정이 끓어 오르지 않았던 나는 세례 받고 처음 1, 2년은 신앙생활을 하는 듯했지만 취직을 이유로 서울로 오고 난 뒤 냉담에 빠져 하느님을 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지하철을 타고 통근을 해야 했던 난 지하철에서 열심히 묵주반지를 돌리며 기도하는 여자 분을 보았다.휴대폰도 없던 시절, 매일 밀리는 지하철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무료하게 1시간 넘게 통근하던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멍하니 졸지 말고 나도 묵주기도나 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는 객지생활에 심신이 지쳐 있었고 자신감은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향수병에 너무도 힘겨웠다. 그런 내게 묵주기도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긴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묵주반지를 돌리며 불안한 미래와 지친 심신을 성모님께 맡기기로 했다. 가까운 성당을 찾았고, 그나마 주일은 지키기로 하고 정말 열심히 묵주반지를 돌리며 기도했다. 지금은 103위 성인과 함께하는 묵주의 9일 기도를 매일 바친다. 성모님과 성인 성녀들이 나를 위해 함께 빌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알고 계심을 느낀다. 우리의 바람과 지향을 하느님께 같이 바쳐 주신다. 하루를 의탁하고 나의 영적 성장을 성모님께 봉헌한다.우리 집 가훈인 성경 말씀은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이다. 성부, 성자, 성령님에 대한 마음과 목숨과 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분은 성모님이시다. 어릴 적 철없이 몰랐던 성모 어머니,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신뢰하고 감사드린다. 매일 드리는 묵주기도는 사랑의 신비 그 이상이다. ※‘나의 묵주이야기’에 실릴 원고를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8매 분량으로 연락처와 함께 pbc21@pbc.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채택된 원고에 대해서는 소정의 고료를 드립니다. 문의 : 02-2270-2516 평화신문2014.09.24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주님의 기도(6) : 일곱 가지 청원 ④ 원수조차 사랑할 때 그리스도의 모습 본받고 하느님의 자비 얻을 수 있어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녀야 하고 그러려면 기도가 필요하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3년 로마의 레비비아 교도소를 찾아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알리 아그자와 만나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다섯째 청원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입니다. 이 청원에 대해 살펴봅니다(2838~2845항). 이 대목은 두 구절로 이뤄져 있습니다. 핵심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입니다. 그런데 전제가 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먼저 용서하겠으니 하느님 아버지께서 저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 하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먼저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는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다섯째 청원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이를 좀 더 풀어봅시다. 용서는 사랑의 전제 조건“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는 청원에는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이 깔려 있습니다.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지요.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할 까닭이 없지요. 그래서 죄를 용서해 달라는 이 청원에는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리라는 굳은 희망도 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 한, 하느님의 넘치는 자비가 우리 마음속으로 스며들 수 없다”(2840항)는 데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1요한 4,20)는 성경 말씀을 상기해 봅시다. 우리의 형제·자매를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 마음은 닫히고 굳어져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스며들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는 부드러운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우리 마음은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리게 됩니다. 기도로 인간적 어려움 극복해야물론 인간적으로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너그러이 용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을 믿고 마음을 열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 끝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모욕을 당하고도 그것을 잊는다는 것은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 자기 마음을 바치는 사람은 모욕을 동정으로 바꾸며, 상심(傷心)을 전구(轉求)로 변화시켜 기억을 정화”합니다(2843항).이렇게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게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원수까지 용서하게 해줍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변화되어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는 “그리스도인이 바치는 기도의 정점”(2844항)입니다. 용서는 또한 이 세상에서 사랑이 죄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그 모범을 보이셨고, 우리의 순교 성인들, 순교 복자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재현하신 분들입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녀들과 그 아버지이신 하느님 사이의 화해를,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기본 조건입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용서는 한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께 빚을 진 자들입니다.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진 빚을 갚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바로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로마 13,8 참조). 정리=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백영민2014.10.08
![[출판] 책꽂이-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제사 등](//cpbc.co.kr/CMS/newspaper/2014/01/rc/492359_1.1_titleImage_1.jpg)
[출판] 책꽂이-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제사 등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제사알프레드 막스ㆍ크리스티앙 그라프 지음/권유현 옮김/백운철 감수/성서와함께/5000원 성경에 나타난 제사의 의미와 기능을 살펴봤다. 제사를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제사의 형태와 구조를 밝히며 제사가 지닌 긍정적 기능을 강조했다. 구약성경의 제사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통해 명맥을 유지해 온 이스라엘을 안정시키고 영속시킨 존재였고, 예언자들은 이러한 제사를 영성과 윤리 차원으로 심화했다. 신약성경의 제사는 성사의 형태를 지니는 예식으로 발전했다. '성사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선포와 함께 제사 예배의 양극(보상과 친교)을 수용하며 제사의 마지막 지점이 하느님과 친교임을 알려준다.교황 프란치스코프란치스코ㆍ프란체스카 암브로게티ㆍ세르히오 루빈 대담/이유숙 옮김/알에이치코리아/1만 4000원 교황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을 지냈을 당시 종교전문기자와 2년에 걸쳐 나눈 대담을 담았다.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교황 조부모의 삶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성직자'로서 교황의 사목 행보에 집중한 기존 책과는 차별을 두고 있다. 폐부전으로 사경을 해맸던 청년 시기,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 교사로 일하던 시절 등 교황의 '삶'과 '인간적 면모'에 초점을 맞췄다. 2010년 아르헨티나에서 초판이 출간됐고, 지난해 교황 선출을 계기로 재출간돼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번역됐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가톨릭 신학과 환경드류 크리스찬슨ㆍ월터 E. 그레이저 엮음/이재돈ㆍ이순ㆍ유정원 옮김/가톨릭대학교출판부/2만 4000원 폭우와 폭설, 한파와 폭염 등 이상 기후 현상과 같은 생태적 도전은 교회가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촉구한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생태 위기는 윤리 위기"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의 환경적 도전은 새로운 신학 연구와 비판을 필요로 한다. 책은 미국 주교회의 주관으로 1995년 미국 오레곤주에서 '생태와 가톨릭 신학 : 기여와 도전'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 자료를 모은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환경윤리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담았다. 마더 테레사, 넘치는 사랑오키 모리히로 찍고 쓰다/정창현ㆍ정호승 옮기고 다듬다/해냄/1만 4500원 복녀 데레사 수녀 사진작가로 유명한 오키 모리히로의 데레사 수녀 사진집이다. 1970년대 중반 빈민층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인도 콜카타로 떠난 그는 데레사 수녀와 사랑의 선교 수녀회 활동에 감동받아 렌즈의 시선을 수녀들 활동으로 돌렸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수녀들의 절절한 사랑과,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콜카타 거리 현장이 사진과 함께 생생히 펼쳐진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정호승(프란치스코) 시인의 아버지가 번역하고 정 시인이 번역을 다듬은 책이다. 나는 지옥에서 탈출했다폴 틱펜 지음/한 아오스팅 마리아 옮김/나이테미디어/1만 5000원 지옥에 떨어졌다 탈출한 주인공 '토마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토마스가 경험한 지옥은 폭음, 폭식, 분노, 폭력, 거짓, 위선, 도둑질, 배신 등 죄의 분류에 따라 구역이 나뉘어 있다. 그가 지옥에서 만난 이들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라기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소소한 죄를 저지르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미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가톨릭 언론인 폴 틱펜 교수다. 그는 "우리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려면 지옥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박수정 기자cpbc2014.01.14

출판단신▨내포문화의 탄생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방문하는 솔뫼성지와 해미성지가 있는 거룩한 신앙의 못자리가 충청도 내포 지역이다. 내포 지역은 역사가 기록되면서부터 한반도와 해양, 대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지식과 종교, 문화와 문물이 이곳을 통해 넘나들고 확산했다. 저자들은 고향 내포에 대한 사랑을 담아 내포를 공간지리학적ㆍ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세밀하게 관찰하고 풀어냈다. 한국문화 원형의 정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색하는 현장 안내서다. (김기현ㆍ김헌식 지음/북코리아/2만 원)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명한 성서학자요 사목자였던 마르티니(1927∼2012, 이탈리아) 추기경은 21개의 짧은 글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진지하게 되묻고, 그를 더 깊이 만나도록 이끈다. 60여 쪽 분량의 소책자로, 천천히 묵상하며 읽으면 언제나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희망찬 목표로 우리 앞에 계신 예수를 만나게 된다. 이미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이들은 물론 예비신자나 청소년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도록 도와준다.(C.M.마르티니 지음/안소근 옮김/성서와함께/4000원) ▨하느님과 하나 되어저자는 독일 마이스터 엑카르트 학회 회장으로, 중세 대표적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작품 가운데 독일어 논고 두 편, 독일어 설교 열 편, 라틴어 성경 주해ㆍ강의ㆍ설교 다섯 편, 라틴어 설교 초안 열두 편을 엄선해 편마다 해설을 달았다.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엑카르트의 중심 사상을 드러내면서도 비교적 쉽고 짧아 그의 사상을 좇는 데 크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엑카르트 사상의 핵심은 ‘모든 것’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떠나 영혼 속에 하느님이 탄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디트마르 미트 풀어 엮음/김순현 옮김/분도출판사/1만 6000원) ▨하느님과의 일치스페인의 위대한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이 지은 「가르멜의 산길」「어두운 밤」은 지금도 널리 읽히는 고전이지만 초보자들이 바로 읽기에는 아무래도 어렵다. 성 요한의 가르침을 개괄한 책은 하느님 뜻을 완전하게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완덕과 기도에 대한 입문서다. 성령의 활동에 온전히 맡기는 이탈과 포기의 필요성을 각자 삶의 상황에 맞춰 설명하면서 하느님과의 일치와 친밀한 사귐을 향해 나아가는 관상의 길로 이끈다.(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가브리엘 신부 지음/밀양 가르멜 여자 수도원 옮김/성바오로/1만 2000원)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백영민2014.07.02
![[문화/인터뷰]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설립 10주년, 연구소장 장긍선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8161_1.1_titleImage_1.jpg)
[문화/인터뷰]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설립 10주년, 연구소장 장긍선 신부이콘은 성경, 신앙 전례, 교리 담긴 영성의 보화 "이콘(Icon)이 옛것을 베끼는 것이라고요? 우상숭배와 세속화에 대처하는 교회 고민이 담긴 영성의 보화입니다." 서울대교구 이콘(초기 교회미술)연구소를 10년간 이끌어온 장긍선 신부는 새해 들어서 더 분주하다. 더 많은 이들에게 이콘을 알리고 보급하기 위해서다. 오는 3월 1일 설립 10주년을 맞는 연구소는 그간 졸업생을 150여 명 배출하고, 요즘도 수강생 100명이 3년 과정을 밟고 있다. 그리스말로 '모상', 또는 '형상'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이콘을 보급하고자 장 신부는 목판에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전통 이콘뿐 아니라 '이콘 유리화' 제작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해 가톨릭출판사 마리아홀 전실(前室)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이콘 유리화를 설치했고, 연구소 자료실 창문에도 이콘에서 즐겨 그리는 데이시스(Deisis, '청원'또는 '주님을 향한 행렬'라는 뜻) 주제 이콘 유리화를 설치했다. 모자이크 이콘도 제작했다. 때론 성경이나 예식서 속에 세밀화를 그리는 데 이 역시 이콘이다. 그야말로 이콘 다변화에 힘을 쏟고 있다. 또 설립 10주년을 맞아 오는 3월 6~12일 서울 명동 평화화랑에서 기념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연구소를 거쳐간 작가들 작품을 담은 이콘화집 발간, 기념 특강 및 교회 전례력에 따른 교회미술 특강도 계획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이콘에 대한 교회 전반의 인식은 부족한 편이다. 일각에선 옛 형태를 '그대로 베끼는' 단순한 작업이라 오해하기도 하고, 창의성이 없다고 매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장 신부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교회가 정한 규범과 틀 속에서 그리지만, 이는 그저 답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힌 초기 교회 성화 전통을 다시금 되찾고 살려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성화를 그릴 때 형태보다, 안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이콘 같은 초기 교회미술은 감성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기도 속에서 그려지기에 같은 성화가 단 한 점도 없는 것입니다." 장 신부가 바라보는 이콘의 실체는 성경과 신앙, 전례와 교리 그 자체다. 그 내용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가시화한 것이 이콘이며, 이콘을 제대로 감상하고 받아들이려면 초기 교회미술사와 그 안에 담긴 영성, 상징성 등을 먼저 이해하고 성경과 교리 내용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특히 "전례의 모든 순간은 이콘이 가진 의미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에 이콘은 단순한 성화가 아니라 영성생활로 이끌어주는 길잡이"라고 장 신부는 강조한다. 장 신부는 전례학이나 이콘 이론만 공부한 것은 아니다. 1997년부터 4년 6개월간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모스크바총대주교청 직할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 이콘 교사 양성과정을 밟으며 이콘 실습으로 디플롬을 받을 만큼 열정을 쏟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서방교회에서 이콘을 재발견하고 이를 되찾고자 많은 연구와 이콘 작업을 해온 걸 보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장 신부는 2003년 국내 최초로 이콘연구소를 세우고, 하느님의 신성과 영적 지혜의 충만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이콘 교육과 이콘 제작 및 복원 등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13.01.15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상)](//cpbc.co.kr/CMS/newspaper/2014/05/rc/511397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46)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상)‘금녀의 벽’ 넘어 대표적 여성신학자로 자리매김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Elisabeth Schssler Fiorenza)는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여성주의 성경 해석’을 가르치고 있는 가톨릭 여성신학자입니다. 그의 신학 방법론에 관한 강의는 미국의 보스턴 지역에서 신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는 거의 필수 과목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는 1996년에 한국을 방문해 이화여자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그리고 한국기독교공동학회의 25번째 정기 학술대회에서 강연한 적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삶과 신학 사상에 대한 다음의 소개는 글렌 에난더가 쓴 그의 전기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루마니아 태생의 똑똑한 여자아이엘리사벳 쉬슬러는 1938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9월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당시 여섯 살이던 엘리사벳은 부모와 함께 피난을 떠나 전쟁 난민이 돼 이곳저곳을 표류하다 전쟁이 끝나던 1945년에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엘리사벳의 아버지는 재봉사로 일했습니다. 전쟁으로 학교에 다니다 중단하기를 반복한 엘리사벳은 세 번째로 다시 1학년에 입학했는데, 곧 뛰어난 학업 수행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그리하여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됐는데, 루터교가 주를 이루고 있던 지방에서 한 가톨릭 소녀가 이토록 뛰어난 성적을 얻게 된 것이 당시에 많은 이의 이목을 끌었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은 10대 소녀였을 때 수도자가 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당신부님께서 엘리사벳은 순종 서원을 사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는 조언을 하시면서 수도 성소를 포기하게 하셨는데, 이후에 그 충고는 아주 현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본인이 밝히고 있습니다.남성들의 학문, 신학에 문 두드려 1958년 엘리사벳은 대학 예비과정을 마치고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독일 문학과 역사,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1962년에는 그곳에서 신학석사 학위(MDiv)를 취득하고 1963년에는 박사 학위 바로 밑에 해당하는 상급석사 학위(licentiate)를 취득했습니다. 그 후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뮌스터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대학에서 신학 교육을 받은 전 과정 동안 엘리사벳은 거의 모든 수업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그 때문에 엘리사벳의 뛰어난 성취는 더욱 많은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어떤 교수들은 엘리사벳에게 매우 협조적이었지만 일부 교수들은 여성이 신학 석ㆍ박사 학위를 얻으려고 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굳은 결심으로 이 학위들을 차례로 취득했습니다. 1960년대 독일에서, 신학이란 남성들의 학문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유일한 여학생으로서 처음 신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부터 여성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1964년 상급석사 학위를 받았을 때 엘리사벳이 쓴 논문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하는 봉사직에 초점을 둔 사목신학에 관한 것으로, 이 논문은 「잊힌 동반자」(Der vergessene Partner, [Dsseldorf: Patmos Verlag, 1964])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됐습니다. 엘리사벳의 첫 번째 저서인 이 책은 박사 학위를 받기에도 충분하다는 평을 얻었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은 뛰어난 성적으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4년에 같은 대학인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루돌프 쉬낙켄부르그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박사 학위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신학박사 학위 과정에서도 엘리사벳은 당연히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당시의 분위기에 적응하며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어서 겪어야 하는 불이익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도교수였던 쉬낙켄부르그는 당시 세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었는데, 그는 신학의 미래를 쥐고 있는 이들에게 장학금을 줘야지 미래도 없는 여학생에게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평신도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엘리사벳의 실망은 매우 컸습니다.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고 성적도 누구보다 뛰어났음에도, 엘리사벳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그의 학업성취능력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됐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엘리사벳은 뮌스터대학의 요셉 슈라이너 교수를 만나게 됐고, 그의 지도로 박사 학위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슈라이너 교수는 엘리사벳에게 대학의 연구직도 마련해줬습니다. 뮌스터대학으로 옮긴 후 그곳에서 장차 남편이 될 프란시스 피오렌자를 만나게 됩니다. 현재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가톨릭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프란시스 쉬슬러 피오렌자 교수는 당시엔 미국 볼티모어의 성 마리아 신학대학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1963년에 독일 뮌스터대학으로 가서 유명한 두 분의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와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종종 엘리사벳에게 뷔르츠부르크에서 장학금을 받지 못한 것이 얼마나 잘 된 일인가 하고 농담으로 말하곤 한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평생 서로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1964년에서 1970년까지 뮌스터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그의 논문을 읽어줄 교수들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1970년에 최고 졸업논문상을 받고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67년에 프란시스 피오렌자와 결혼하여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가 된 그는 남편과 함께 미국의 유명한 가톨릭대학인 노트르담 대학에 교수직을 얻어 1971년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종교학부 유일한 여성 교수신학 교육을 받는 동안 엘리사벳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교회가 세속 안에서 어떻게 현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주된 논제로 다루고 있었는데, 엘리사벳은 신학생들이 세속 사회에서 살고 그 사회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배우게 하려면 신학교가 여학생들에게 개방돼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이 제안은 1960년대의 독일에서는 꽤 충격적 제안이었고, 이런 주장을 제기한 엘리사벳의 첫 번째 책에 머리말을 썼던 지도교수는 그 문장 때문에 머리말을 쓰는 것을 주저했다고 합니다. 1971년 미국에 와서 신학을 가르치는 동안에도 피오렌자 교수(이후부터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는 피오렌자 교수로 지칭함)는 여성이 신학 고등교육 과정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잊지 않았고, 자신의 이런 경험이 이후의 학문 연구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됐다고 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1971년에서 1984년까지 14년간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칩니다. 당시에 노트르담 대학교의 종교학부에서 피오렌자 교수는 유일한 여성 교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피오렌자 교수가 대학 사회에 적응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노트르담에서 가르치던 거의 마지막 시기에 피오렌자 교수는 자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그녀를 기억하며: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한 여성신학적 재건」(In Memory of Her: A Feminist Theological Reconstruction of Christian Origin [New York: Crossroads, 1983; 1994]; 우리말 번역으로, 김애영 역,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신학적 재건」, 종로서적, 1986년)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성경 연구의 패러다임에 도전을 제기하는 것으로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책으로 인해 피오렌자 교수는 노트르담 대학에서 더욱 고립됐고 결국 그 학교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1984년에 노트르담 대학교를 떠난 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공회 대학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4년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1988년에 미국의 최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하버드 대학교로 옮겨가 그곳에서 최초의 ‘크라이스터 스탕달 교수’(하버드의 유명한 신약학 교수 크라이스터 스탕달을 기려 그 이름을 딴 교수직)가 됩니다. 케임브리지에서 피오렌자 교수의 삶은 어떻게 전개됐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그의 사상이 성숙하게 됐는지는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김영선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 ▲미국 보스턴 칼리지에서 구약성경으로 박사 학위 취득 ▲가톨릭대 성신교정, 서강대학교, 가톨릭교리신학원, 수도자신학원에서 히브리어와 역사서, 지혜문학, 구약입문 등 강의 평화신문2014.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