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구 설정 50주년-기쁨과 은총의 해를 맞이하며[사목교서] 마산교구장 안명옥 주교 교구는 2016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성경은 50이라는 숫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50년은 '희년' 또는 '은총의 해'로서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의미를 지니는 해입니다. 교구가 시작하던 때의 첫 마음을 회복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재정립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1.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희년은 기쁨과 축복의 해입니다. 모든 빚이 탕감되며 빼앗겼거나 팔린 땅은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아오고, 종노릇하던 노예는 해방을 누리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 희년의 정신이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는 해방과 자유로 수렴됩니다. 우리는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며 주님께서 선포하신 은혜로운 삶이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2.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희년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 헤매던 두 여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사도들이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큰 뜻을 품고 출발했던 그곳, 본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첫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우리 첫 마음이 머물러 있는 갈릴래아는 어디입니까? 복음입니다. 복음 말씀을 읽고 새김으로써 복음 말씀이 삶을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교구는 반세기의 격동기를 보내면서 복음을 열성으로 전파했으며,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열정은 식어버리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역복음화율, 미사참례 등 신앙 지표가 정체기에 들어선 지금 첫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3.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성경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6-47)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전해줍니다. 구성원 모두가 서로 아픔을 이해하고, 순박한 마음으로 가진 것을 나누며, 하느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구 설정 50주년을 기념해 영적 쇄신 운동과 기념사업을 실행해 나가고자 합니다. 단순히 통과의례적 행사가 아니라 교구가 실질적 영적 쇄신을 이루고, 기쁨과 은총을 누리는 참된 신앙 공동체를 이루도록 능동적인 동참을 요청드립니다. <실천 사항> 영적 쇄신 : △성경 필사 및 읽기, 공부하기 △가정기도 바치기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정신 회복하기 △사랑의 사회적 질서 확산을 위한 사회교리 공부하기 기념사업 : △생명운동과 사랑나눔 운동 전개 △순교자 묘지 정비와 교구청 이전을 위한 준비와 동참 △교구 규정집 재정비cpbc2013.12.17
![[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1.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2>어떻게 해야 주님 말씀에 맛들일 수 있을까](//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9542_1.0_titleImage_1.jpg)
[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1.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어떻게 해야 주님 말씀에 맛들일 수 있을까성경 읽기가 주님 말씀 맛들이기 첫걸음주님 말씀에 기대어 사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을 살찌우려면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한다. 사진은 경기도 부천시 꼰솔라따 선교수도회 본원에 있는 성경과 성모자상. 그리스도인에게 주님 말씀은 신앙의 출발점인 동시에 좌표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주님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희망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신앙을 튼튼히 하려면 먼저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삶의 기둥을 세워야 한다. 신앙의 해를 맞아 주님 말씀의 결정체인 성경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주님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방법으로 말씀을 하시지만, 성경보다 더 분명하고 힘이 넘치는 말씀이 담긴 것은 어디에도 없다. 성경에도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묵시 1,3)하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성경을 어려워하는 이가 여전히 많다. 초보 신자가 성경을 통해 주님 말씀을 익히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성경을 읽는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구절처럼 말씀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이다. 성경공부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차분한 마음으로, 꾸준히 주님 말씀에 맛들이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사목자들은 "주님 말씀에 맛을 들이려면 성경을 읽으라"고 권한다. 습관이 될 정도로 매일 읽고 묵상해야 주님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안동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황재모(사목국장) 신부는 "말씀에 맛을 들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읽는 것이다. 읽기가 선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 다음이 성경공부 모임이나 강의 등에 참여해 말씀을 심화시켜야 그 말씀이 자기 것이 된다고 강조했다. 예로니모 성인은 "우리는 결코 홀로 성경을 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성경을 함께 읽고 공부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혼자 읽기 어렵다면 가족들과 함께 읽는 것도 좋다. 하지만 방대한 분량 때문에 성경읽기에 도전하는 것조차 꺼리는 신자가 많다. 그렇다면 그날 독서와 복음이라도 미리 읽고 미사에 참례하는 방법도 있다. 3년 동안 매일미사에 참례하면 성경 주요 부분을 거의 대부분 봉독하게 된다. 미사 시간을 활용해 성경에 맛을 들이다 보면, 통독에 도전할 '믿음의 체력'이 길러진다. 잠들기 전 시간도 좋다. 성경을 잠자리에 두고 잠들기 전 10분을 성경 읽는 시간으로 정하자.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운 직장인과 학생 등에게 부담 없는 방법이다. 체계적으로 성경을 읽으려면 신약을 79일, 구약을 286일에 읽는 '성경 읽기표'를 활용해 1년 만에 완독할 수 있다. 요즘 참여 열기가 뜨거운 성경필사는 말씀을 마음 깊숙이 새길 수 있는 방법이다. 성경필사에 성공한 이들은 "성경을 두 번 읽은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며 "말씀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마음에 와 닿는 성경구절을 정해 자신만의 성구를 갖는 것은 어떨까. 또 가훈을 성경구절에서 고르는 것도 가족이 성경에 관심을 갖게 하는 방법이다. 고(故) 정호경 신부처럼 성경구절을 나무판에 새겨 거실에 걸어두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마르코 복음서」(가톨릭출판사)와 같은 성경 입문서나 해설서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하지만 성경읽기는 해설서가 아니라 성경 본문이 위주가 돼야 한다는 게 일반적 조언이다. 평화방송TV '장재봉 신부의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진행자 장재봉(부산교구 활천본당 주임) 신부는 "성경은 하느님 얼굴이고 삶의 거울이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알려준다"며 "처음엔 성경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여러 번 읽다 보면 말씀에 맛을 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8박 9일 간 신자들과 함께 성경통독 피정을 한 적이 있다"며 "73권 통독에 성공한 신자들 모습이 많이 달라졌음을 보고 하느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 지 새삼 체험했다"고 말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는 구절처럼 말씀에 맛을 들이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퇴사자22013.01.29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6)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cpbc.co.kr/CMS/newspaper/2013/02/rc/441414_1.0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6)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하늘, 유배 후 하느님 대체어로 사용#하늘의 새로운 인격성 유배 기간을 거치며 이스라엘 종교에 일어난 또 하나의 변화는 '하늘'이 '하느님'의 동의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 새로운 인격성을 부여받은 이같은 현상은 구약성경의 후대 본문으로 갈수록 두드러지는데, 특히 마카베오기와 다니엘서에서 잘 나타난다. 구약성경의 가장 마지막 역사를 다룬 마카베오기는 사람을 구하고 도와주는 주체를 '하느님'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표현한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1마카 12,15). "하늘이 너희를 도와주시기를 빈다"(1마카 16,3). 유배 이전 구약성경은 '하늘'이 어떤 인격성을 띠게 될까 봐 조심스러운 표현을 사용했다. 그래서 꼭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며, 심판하시고, 다스리신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유배 이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급증한 것이다. 또 하늘이 하느님과 동의어로 사용돼 때로는 '하느님'을 대체하기도 했다. 그 결과 하늘은 어느 정도 인격성을 부여받았다. 이후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하늘을 직접 찬양한다. 이때부터 하늘은 하느님의 완벽한 상징어로 사용됐다. 종교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재신화화'된 것이다. 하늘이 하느님을 상징하게 돼 야훼 신앙 안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았다. 이렇게 유배 이후 재신화화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왜 유배 이후 하늘을 하느님으로 부를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에는 유일신 신앙이 깊이 뿌리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하느님을 상징해도 하느님과 구별되는 '하늘 신'으로 오해할 소지가 그들 사이에선 그만큼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하늘관은 유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유배 이전에는 공간과 피조물의 탈신화화된 개념으로 인격적 요소를 탈색하는 데 주력했다. 혹시 하늘신이라는 요소가 있을까봐 걱정하는 태도를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반면 유배 이후에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낱말이 이스라엘의 신앙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그만큼 이스라엘에는 굳건한 유일신 신앙이 자리 잡았다. 하늘에 기도하고 하늘을 보고 청하며, 하늘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말해도 하늘신을 생각할 사람들은 적어졌다. 하늘이라고 말해도 모두가 하느님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신약성경의 '하늘들' 여러 차례 변화해온 구약성경의 하늘관은 신약성경으로 이어져 예수님의 '하늘 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신약성경에서 '하늘의'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또는 '거룩한'이라는 의미다. 유배 이후 하늘은 하느님의 상징어로 굳어져 신약 시대로 전승됐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의 하늘관을 가장 총체적으로 집대성한 책을 꼽으라면 신약성경을 여는 마태오복음이다. 마태오복음의 특징적인 하늘관은 다음의 두 가지 호칭에서 볼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마태 5,48). "하늘의 내 아버지"(마태 15,13; 18,35). 이 호칭들은 오직 마태오복음에만 나오는데, 유배 이후 정착된 '하늘의 하느님'이란 호칭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 '하늘의 하느님'이 하늘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하느님이 더욱 가까이 계신 분이 되셨다. 구약의 하느님은 우리가 감히 다가가기 어려운 분으로 여겨졌다. 물론 구약성경을 잘 읽다 보면 그분은 정말 친근하고, 마치 아기를 돌보는 아빠의 마음을 지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려운 하느님을 친근한 아빠 하느님이라고 하셨다. 이 밖에도 마태오복음은 유배 이전의 고전적 호칭, 곧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란 호칭도 즐겨 사용한다. 주님의 기도를 전하는 마태오복음 6장에서 하느님의 호칭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는 루카복음 11장의 호칭 '아버지'와 구별된다. 마태오복음 저자가 사용한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화된 하늘관이다. 마태오복음은 유배 이전 하나의 장소로 여긴 하늘관과 더불어 유배 이후 하늘의 하느님으로 표현한 하늘관이 모두 나오는 책이다. 이런 면에서 마태오복음은 구약성경의 하늘관에 정통한 책이요, 구약성경의 하늘관을 종합하는 책이다. 신약성경의 첫머리를 차지하는 마태오복음의 하느님은 '하늘의 님', 곧 '하늘님'이다. 이스라엘 종교신학사적 맥락에서 하늘이 하느님의 강한 상징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가 같은 의미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약 시대에 '하늘'과 '하느님'을 명확히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하늘관에 정통하고, 하늘이라는 상징어를 즐겨 사용한 마태오복음에서 '하느님 나라'(4번)보다 '하늘 나라'(32번)가 더 자주 나오는 현상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나라는 사실상 동의어다. 신약성경에서 드러나는 여러 겹의 하늘은 구약성경에서 시대마다 독특하게 형성된 것이다. 각각의 하늘 개념이 고대 이스라엘의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 형성돼 구약성경에 들어왔는지 알게 되면 신약성경을 더욱 풍요롭게 읽을 수 있다. 어떤 표현은 이스라엘 밖에서 유래했지만 그런 표현을 수용한 생각의 뿌리는 깊은 신앙심이었다. 이스라엘인들은 때로는 경계하고 때로는 적극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평화방송 TV 방송시간 : 수요일 오전 9시(본방송), 금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일요일 저녁 9시, 월요일 오전 4시ㆍ오후 3시퇴사자22013.02.19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7) 달신을 숭배하는 마음](//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2714_1.0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7) 달신을 숭배하는 마음달신, 운명 결정하는 왕권 상징 #달신 동양이나 서양이나 옛사람들은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숭배했다. 일월성신은 해, 달, 별이다. 여기에 깃든 영험한 기운이 인간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다. 고대 근동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특히 '달'을 섬겼는데, 이는 그들의 왕권 신학과 밀접히 관련됐다. 히브리인들도 달신 숭배와 무척 깊게 연관돼 있었다. 때로 그들은 달신 숭배에 적대적이어서 달은 철저하게 탈신화됐지만, 달신(月神) 숭배와 관련된 고대 근동의 문화적 흔적은 구약성경 곳곳에 매우 진하게 남아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달신 숭배의 대표적 고장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의 종교 가운데 태양신이 아니라, 달신이 왕권을 상징한 유일한 곳이다. 달은 왕권 신학의 핵심 상징으로서 종교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바빌론제국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 비문 등에서 달신은 초승달로 묘사되기도 한다. 달신이 초승달로 묘사되는 것부터 우리 정서와는 다른 점이다. #수메르의 달신 '난나' 우리는 보름달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꽉 찬 보름달은 마음에 떠올리기만 해도 넉넉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중동인들은 정반대의 생각을 지니고 있다. 보름달은 이미 꽉 찼으니 앞으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초승달은 이제부터 찰 것이기에 앞으로 더 차오를 것이라고 생각해 희망으로 여긴다. 그래서 달신을 초승달로 묘사한 것이다. 이런 정서적 차이가 구약성경에 스며들어 있다. 현대 이슬람에서 초승달을 중요한 상징으로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달신의 수메르어 이름은 '난나'(Nanna)다. '아누'에 이어 최고신에 오른 수메르의 주신(主神) 엔릴의 아들이 바로 난나다. 난나는 최고신은 아니지만, 최고신의 피가 흐른다. 수메르 시대 난나는 우르(수메르의 도시 국가)의 주신이었다. 신바빌론 시대에 접어들어 달신 '신'은 하란(메소포타미아 지역 문화ㆍ상업 도시)의 주신으로 유명해졌다. 달신 숭배의 근원지가 우르와 하란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 두 도시는 구약성경에서도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음양설에서 해와 달은 양과 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해는 달보다 세고 크며 우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수메르는 정반대다. 달신 '난나'는 태양신 '우투'의 아버지다. 분명 달신이 태양신보다 우월한 존재다. #달은 왕권의 상징 달은 왕권의 상징이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달이 '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인간의 운명에 관한 신탁을 내리며, 정의를 판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달신의 신학은 자연스레 왕권 신학과 연결된다. 달신은 태양신과 별신과 함께 '천체의 삼신'을 이룬다. 물론 달신이 중심이다. 달은 차고 기우는 변화가 매우 규칙적이다. 그래서 출산과 성장, 노화, 죽음이라는 인생의 단계에 대입시키기가 쉬웠다. 이를테면 초승달은 달의 탄생이다. 계속해 보름달까지 차오르는 것은 성장이다. 보름달 이후 저무는 것은 노화이며, 마지막 그믐달은 죽음이다. 또 28일마다 정확하게 차고 기우는 것도 달의 규칙성을 높여줬다. 그래서 달은 때를 알려주는 역할도 맡았다. 유목민들은 달을 보고 이동할 날짜를 결정했다. 가축의 교미 시기도 달을 기준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달과 관련한 문화는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다. 또한 달신은 풍요와도 관련돼 대중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달신 숭배에서 초하루는 무척 중요했다. 초하루가 되면 달은 부활한다. 밤하늘에 손톱만큼 달이 보이기 시작하는 매달 초하루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종교적 절기다. 구약성경에서도 보름달보다는 초하루가 훨씬 중요하다. 바로 이런 고대 근동의 풍습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를 알고 구약성경을 읽어야 한다. 달신의 다양한 역할 가운데 '정의의 수호자'는 일찍이 태양신으로 넘어갔다. 고바빌론 제국의 함무라비 임금은 법전을 태양신에게서 받았다. 그런데 태양신의 위치는 달신에 비해 불안해 보였다. 수메르의 태양신 우투는 남신이지만, 셈족의 태양신 '샤마쉬'는 본래 여신이다. 우가릿 신화에서도 태양신 '샵슈'는 여신이다. 그런데 달신 난나와 신이 합쳐졌듯이 우투와 샤마쉬도 융합돼 훗날 하나의 신으로 이해된다.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샤마쉬는 남신이 돼 버렸다. 태양신의 성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역사적 변천 과정은 태양신이 훨씬 약하고 달신이 원래 강했음을 드러낸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평화방송 TV 방송시간 : 수요일 오전 9시(본방송), 금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일요일 저녁 9시, 월요일 오전 4시ㆍ오후 3시퇴사자22013.03.05
![[복음이야기] <30> 나지르](//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1796_1.0_titleImage_1.jpg)
[복음이야기] <30> 나지르삼손·사무엘·마리아는 OOO인이다 나지르는 하느님께 성별된 사람으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삼손이다. 그림은 도메니코 피아 셀라 작품 ‘삼손과 데릴라’로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봉헌생활을 하는 수도자처럼 성경 시대 유다인 가운데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서원을 통해 일생을 멀리하고 기도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유다인들은 이들을 ‘나지르’라 불렀다.나지르는 우리말로 ‘따로 떼어놓인 사람’이란 뜻으로 ‘하느님께 성별된 사람’ ‘하느님께 스스로 봉헌된 사람’을 가리켰다. 이 말처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나지르를 일반인들과 다르게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거룩하게 성별해 태어나게 한 사람으로 여겼다. 나지르로 서원하기 위해선 일정 기간 여느 사람과 달리 특별한 생활을 해야 했다. 나지르는 술은 물론 포도나무에서 난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고, 부정한 것들을 일절 금하며 평생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아야 했다(민수 6,2-71). 구약 시대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피와 한가지로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자신을 바치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자도 민수기 6장에 나오는 서약 조건을 지키면 나지르가 될 수 있었다.오늘날 일반인에게까지 알려진 대표적인 나지르는 삼손이다. 그의 어머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으나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아들의 잉태를 예고했고, 삼손이 태어났다(판관 13장). 마지막 판관이었고 예언자였던 사무엘도 평생 나지르였다. 사무엘 역시 아기를 낳지 못하던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태어난 사람이었다(1사무 1,11 참조). 하지만 삼손과 사무엘은 큰 차이가 있다. 삼손과 달리 사무엘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주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자원해 세워진 나지르였다. 가장 대표적인 여자 나지르는 ‘성모 마리아’이다. 성모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고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기 때문이다. 또 천사의 예고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고 말한 동정 마리아의 응답은 나지르의 서원을 의미한다고 성서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일정 기간만 나지르 서원을 지키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들은 일정 기간 나지르로 서약해 술과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금하고, 부정한 것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세 규정을 지키다가 서원 기간이 끝나면 만남의 장막 문간에 나와서 속죄 제물과 번제물 등 각종 제물을 바치고 머리카락을 잘라 불에 태워 서원을 해소했다(민수 6,13-21). 탈무드에서는 서원 기간이 명시되지 않는 경우 보통 30일을 가리킨다고 적고 있다. 이같은 일시 서원 나지르 풍습은 구약 말기와 신약 시대까지 지속됐다. 마카베오 상권 3장 49-51절은 성전이 이방인들로 더럽혀져서 서원 기간이 끝났으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바칠 수 없는 나지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던 야고보 사도의 충고에 따라 바오로 사도가 그를 미워하는 유다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서원 기간을 마친 나지르 4명의 봉헌 비용을 댄 기록이 나온다(사도 21,23-26).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께 서원한 일로 코린토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은 행위(사도 18,18)를 두고도 나지르 서원의 해소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요한 세례자가 포도주나 독주도 마시지 않을 것이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루카 1,15)이라는 천사의 예고를 토대로 요한 세례자 역시 나지르로 보는 성서학자도 적지 않다. 더불어 마태오 복음 2장 23절 “그는 나자렛 사람(헬라어로 ‘나조라이오스’)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한 대목을 두고 예수님께서 나지르였음을 고백하는 말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이처럼 예수님 시대에는 하느님께 열심한 마음으로 특별한 서원 기간을 명시하지 않고도 남녀 누구나 나지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광야에서 신앙 수련을 했다. 광야는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명상하기에 적합한 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루카 3,2)는 것을 실제로 광야를 말하기보다 영적으로 공허한 장소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들은 ‘광야에 머문다’는 표현은 오늘날 ‘피정’과도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유다인의 나지르 서원 풍습은 예수님 시대 이후, 예루살렘 멸망 후에도 한동안 이어져 오다 중세 때 완전히 사라졌다.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0.01
![[생활속의 복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cpbc.co.kr/CMS/newspaper/2014/09/rc/527744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연중 제23주일(마태 18,15-20) 조재형 신부(서울대교구 성소국장) 9월의 첫 주일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달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보내는 시간만큼, 내가 원하는 것들을 위해서 쓰는 시간만큼 나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눌 수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병자 영성체 다닐 때, 봉사자는 늘 제가 편하도록 신발을 정리해 주곤 하였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다니니까, 신발을 신기 위해서 손을 대지 않아도 되도록 수고해 주십니다. 작은 일이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바로 그런 배려가 순교자의 열정을 삶 속에서 이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한 교우분이 제게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신부님도 외로우시죠?” 혼자 살기 때문에 외로울 거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주일 저녁 모든 미사가 끝나고 텅 빈 성당에 혼자 있는 사제가 외롭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사제가 외로워 보이시나요?교우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정호승님의 ‘수선화에게’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우리 모두는 어쩌면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병실에 누워 계신 형제님도, 혼자되신 저의 어머니도, 뜨거운 여름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재수생도, 결혼기념일도 잊어버리는 남편을 둔 아내도 모두 외로운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외로우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을 칩니다. 혼자 들기에는 너무 무거운 십자가이기에 넘어지는 그 순간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씀은 바로 외로움과 고독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외로움을 치유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고독을 넘어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이 함께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그 사랑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들었습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사랑의 실천은 신앙인들에게 의무입니다.정말 중요한 것은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것이고, 이웃의 걱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형제의 허물과 잘못을 진실한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보초’를 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경고를 슬기롭게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을 위해서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cpbc2014.09.02
[함께해요! 평화방송] 특별기획 미션2 등 TV ▨특별기획 미션 2 가난한 이들의 이웃이 되기 위해 먼 길을 떠난 사람들이 있다. '미션' 팀이 1년의 준비를 거쳐 멕시코와 칠레, 에콰도르 등 중남미 8개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 사제와 선교사들의 웃음과 눈물을 카메라에 담았다. ▶방송 일시: 매주 금요일 오전 9시, 주일 오후 11시, 목요일 오후 9시 ▨우리본당 행복쇼 함께해서 더 기쁜 신앙생활! 사제와 신자, 수도자가 한 마음으로 일궈가는 본당 공동체의 행복을 유쾌하게 나눈다. ▶방송 일시: 매주 목요일 오전 9시, 금요일 오후 9시, 주일 오후 2시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유은희(체칠리아) 수녀가 들려주는 윤치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124위 시복식을 더욱 뜻있게 맞이하도록 돕는다. ▶방송 일시: 매주 목요일 오전 7시 20분, 금요일 오후 10시 20분, 주일 오전 10시 20분라디오 ▨말씀의 빛, 사도 바오로의 편지 사도 바오로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빛으로 다가와 믿음이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시간이다. 김영남(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신부가 성경 공부를 원하는 청취자들에게 바오로 서간을 중심으로 쉬운 해설을 곁들여 말씀 묵상을 함께한다. 현재 바오로의 여러 편지 중에서 가장 길고, 신학적 내용도 풍부한 로마서를 공부하고 있다. 방송됐던 테살로니카1서, 코린토1서, 필리피서 강의는 평화방송 라디오 누리집으로 다시 들을 수 있다. ▶방송 일시: 매주 월~토요일 오전 6시 5분~6시 50분 ▶진행: 지승신 아나운서 ▶제작: 박승배 PDcpbc2014.03.18

흥행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숨겨진 가톨릭 코드는?동생의 희생, 예수 구원과 닮아 관객수 약 1000만을 동원하며 올 겨울 가장 흥행한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 주제곡 'Let it go' 열풍을 불러 일으키며 전국의 유치원생들을 얼음 마법의 주인공 엘사로 만든 영화. 월트 디즈니가 '왕자와 공주', '멋진 남ㆍ여 주인공'의 판에 박힌 러브 스토리를 깨고, '가족애'라는 새로운 주제를 다룬 이 영화에 '가톨릭 코드'가 숨어 있다. 미국의 한 침례대학 교수는 "겨울왕국은 가장 교회적인 영화로 여주인공 엘사는 사탄의 상징성을 일부분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을 내놔 눈길을 끌었다. 그는 엘사와 여동생 안나의 관계는 성경 속에서 죄인을 위해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고 했는데, 엘사는 원죄를 저지른 인간의 모습을, 안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힘겨운 순례 여정을 떠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서석희(전주교구 홍보국장) 신부는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다른 이들이 힘을 합쳐 구원해주는 여정을 통해 결국 희생을 통한 진정한 사랑과 그보다 더 큰 가치를 일깨우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며 "이는 성경이 말하는 전형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와 일치한다"고 말했다. 영상미가 돋보이는 엘사의 얼음 마법은 가족인 동생마저도 해치는 무시무시한 힘이다. 하지만 동생 안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언니를 만나기 위해 힘겹게 얼음산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여정에서 만난 이가 순록 스벤을 탄 젊은 청년 크리스토프. 이들은 깊은 산속 늑대들을 물리치고, 거대 얼음괴물과도 맞서며 위험을 무릅쓰고 언니 엘사를 구하러 가는데…. 이쯤에서 배역 이름에서도 흥미로운 가톨릭 코드를 찾을 수 있다. 엘사(Elsa)의 'El'은 히브리어 신(God)을 뜻하는데, 엘사는 신처럼 전지전능한 힘을 보이려는 죄 많은 인간을 나타낸다. 안나(Anna)는 히브리어로 '은혜로운(graceful)'이란 뜻으로, 신의 권능을 부리려는 언니를 저주에서 구해 주님 곁으로 인도하고자 고군분투하는 하느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크리스토프(Kristoff)의 영문 이름 'Christopher'를 그리스어로 풀이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다. 크리스토프가 타는 순록 '스벤(Sven)' 또한 노르웨이어로 청년인데, 이 둘은 모두 젊은 열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청년들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올라프(Olaf)는 '조상(ancestor)', '조상의 가보(family treasure)'란 뜻을 지녔다. 영화에서도 올라프는 마치 곁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신앙의 선조처럼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일행을 돕는다. 언니 엘사를 구하기 위해 힘겨운 여정 끝에 눈보라를 뚫고 다가간 안나. 하지만 엘사 앞에 다가선 순간 온몸은 꽁꽁 굳어 얼음석상이 돼버린다. 그제서야 엘사는 여동생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그만 눈물을 흘리고, 이 눈물은 얼어붙은 안나를 녹인다. 관객들의 마음을 울린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고, 다시 부활하여 우리에게 더 큰 사랑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부활의 신비와 일맥상통한다. "네가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희생한 거니?" "난 언니를 사랑하잖아." "아! 진실한 사랑의 행동만이 얼어붙은 심장을 녹일 수 있구나." 마지막 대사처럼 영화가 지닌 신앙적 코드를 적용해 보면서 우리를 위해 목숨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금 떠올려보고, 우리 스스로 진정 예수님 사랑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주님 영광이 드러남을 일깨워보자.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cpbc2014.03.04

신약의 비유<5>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상)추수 때가 되기 전에 하느님 나라 체험해야 ‘뿌려진 씨’ 비유가 전하는 핵심은 농부도 씨도 아닌 바로 하느님 나라다. 벼를 추수하는 모습. 평화신문 자료사진 1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는 공관복음에서 씨(씨앗)를 소재로 하는 세 비유 중 하나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비유로, 마르코복음만이 이 비유를 전해준다. 하느님 나라를 알려주는 비유‘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다’라고 시작하는 비유는 씨가 자라나는 것을 내용으로 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깨닫게 해주는 비유다.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비유 내용은 다음과 같다.성경에 번역된 것을 따르면, 비유는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그리스어 원문에 따라 “하느님 나라는 마치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려 놓은 것과 같다”로 고쳐 읽을 수도 있다. 어떤 번역을 따르든 ‘하느님 나라는 과연 무엇과 비교가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다른 말로 하자면, ‘씨를 뿌리는 어떤 사람’과 ‘뿌려진 씨’ 중에 ‘이 비유에서 말하는 중심은 무엇일까?’하는 문제다. 비유에서 씨 뿌린 사람과 뿌려진 씨가 모두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사람의 경우 그에게 해당되는 표현은 ‘씨를 뿌렸다-모른다-낫을 댄다’이다. 반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란다-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낟알이 영근다’라고 표현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비유를 살펴본 후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것은 유다인들의 하루 계산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다인들은 지금의 우리와 달리 ‘해 질때부터 다음날 해 질 때까지’를 하루로 계산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27절의 내용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 모습을 나타낸다. 씨가 싹이 터서 자라는 것 역시 우리가 보통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잠언 20장 4절의 내용을 떠올릴 수도 있다. “게으름뱅이는 제철에 밭을 갈지 않고 수확철에 소출을 찾지만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잠만 자는 농부의 게으른 태도가 아니라, 농부의 활동이 직접적으로 싹이 트고 자라는 것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 표현은 이런 강조점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씨가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농부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농부의 역할은 없다. 복음서는 그것을 ‘저절로’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 비유 이외에 이 표현이 사용된 것은 사도행전 12장 10절이 유일하다. “그들(천사와 베드로)이… 쇠문 앞에 다다르자, 문이 앞에서 저절로 열렸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사도행전의 문맥에 따라 비유의 의미를 보면 저절로 열매가 맺는다는 것은 외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하느님에 의해라는 말을 덧붙여 이해할 수 있다.“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마르코복음의 비유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이 규칙에 따라 서술된 과정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꽤 긴 시간을 암시한다. 하지만 다시 등장하는 농부의 행동은 사못 다르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많은 경우 비유에서 강조되는 것은 대조인데 여기서도 긴 시간 동안의 성장과 곧 낫을 댄다는 표현이 서로 대조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수확의 때는 주로 종말의 시기와 관련이 있다.(마태 13,24-30 ‘가라지의 비유’ 참조)처음 던진 질문에 답하자면, 이 비유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농부도 아니고 씨도 아니다. 이 비유는 이야기 전체가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우선 농부의 행동과 씨가 자라는 과정을 한데 묶어서 보면 비유의 내용은 이렇다. 농부는 씨를 뿌렸다-씨는 싹이 터서 자란다-하지만 농부는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씨는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낫을 댄다.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씨를 뿌렸다’는 표현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씨를 뿌린 농부조차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씨는 땅에서 저절로 자라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라난 씨에게 낟알이 영글면 농부는 수확을 하는데, 이것은 미래에 올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의미한다.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이 비유를 듣는 청중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 비유가 전해주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또 마치 없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특별히 아픈 이들을 낫게 하고, 악령을 쫓아내는 일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드러난다. 하지만 여전히 제자들과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마치 농부는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 완성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것이 당장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마치 씨가 싹이 터서 자라고 또 그 후에 낟알이 영그는 것처럼, 아직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다.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종말론적 시간, 곧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가 이 비유에서 표현된다. 이 종말론적 시간은 우리에게 회개 가능성을 열어놓는 시간이다. 여전히 우리는 그 과정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부가 수확철이 되면 지체없이 곧 낫을 들어 수확을 하는 것처럼, 종말 때에는 더 이상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이다. 평화신문2014.06.18
![[신년 특집] 주님 손 꼬~옥 잡은 가족 보기 참 좋다!](//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6711_1.0_titleImage_1.jpg)
[신년 특집] 주님 손 꼬~옥 잡은 가족 보기 참 좋다! 네오까떼꾸메나도 길을 걷는 박성락·문아로 부부와 시끌벅적한 다섯 아이의 신앙 이야기 새해, 새 아침. 전국의 각 교구장은 하느님 말씀과 기도, 가정 복음화,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에 초점을 맞추고, 「복음의 기쁨」이 전해주는 가르침과 방법론에 따라 복음 선포의 주역이 될 것을 주문한다. 이에 하느님 말씀과 전례, 공동체라는 세 다리, 곧 정족(鼎足)과도 같은 균형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박성락(시몬, 40)ㆍ문아로(리타, 39)씨 부부와 다섯 자녀를 만났다. 초대 교회 공동체 운동으로 불리는 ‘네오까떼꾸메나도 길’ 안에서 신앙의 여정을 걷는, 마치 ‘도반’(道伴)과도 같은 부부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즐겁고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말씀과 기도, 공동체 생활을 빼놓고 박성락·문아로씨 가정을 설명할 수 없다. 박성락ㆍ문아로씨 부부와 다섯 자녀가 성탄 트리와 구유를 장식하고 있다. 네오까떼꾸메나도 길을 걷는 부부는 ‘예뻤다’. 질투가 날 정도였다. 살아가는 일상이나 직장 생활, 본당 공동체와 함께하는 신앙 생활은 더 예뻐 보였다. 일터로, 학교로, 유치원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 모두를 만나기 위해 선택한 시간은 저녁나절.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후문 아차산역 인근에 자리한 단독 주택 2층 보금자리에 들어서니 아이들로 야단법석이다. 손님이 왔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다들 거실로, 부엌으로 뛰어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아이들답다. 손님이 오셨으니 인사하라고 엄마가 큰소리를 하자 그제야 아이들은 현관으로 달려와 건성으로 인사를 한 뒤 거실로, 부엌으로 조르르 달려간다. 엄마가 저녁마다 해주던 목욕 준비를 하느라 다들 바쁘다. 여느 집과 다른 건 아이들이 하나둘이 아니라 다섯이나 된다는 점. 새해로 10살이 된 초등생 희언(이사야)이를 시작으로 다음 해 12월 31일에 태어난 9살 주안(아기 예수의 데레사)이, 한 해 걸러 태어난 7살 준언(그레고리오)이, 한참 있다가 태어난 4살 첼리나, 이제 6개월밖에 안 된 막내 이레네까지 2남 3녀다. 이들 부부가 처음부터 다섯 자녀를 낳겠다고 작정한 건 아니다. 부부 역시 남들과 마찬가지로, 하나 혹은 둘만 낳으려 했다. 그런데 셋째를 낳고 나니 이 아이들을 언제, 어떻게 키우나 싶어 그만 낳으려고 했다. 그래서 셋째와 넷째는 터울이 3년이나 난다. 그런데 부부는 그때 “자녀를 낳는 건 하느님 몫”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생명의 주관자가 되려 했다는 자성에 넷째를 낳게 됐고, 넷째가 태어나니 하도 예뻐서 다섯째를 받아들였다.그렇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건 역시 쉽지 않다. 특히 자녀들에게 믿음을 전하기 위한 가정 전례가 가장 어렵다. 아침, 저녁기도가 이 가정에선 일상이다. 특히 주일 아침은 시간전례(성무일도)로 바치는 아침기도를 통해 자녀들을 축복하고 믿음을 물려주는 데 힘을 쏟는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 기도를 바치려면 ‘한없는’ 인내가 필요하다. 주모경에 영광송, 개별 자유기도에 이어 복음이 각자의 삶을 어떻게 비추는지 서로 나누는 ‘메아리’ 시간까지 가지려면, 아빠든 엄마든 큰 소리가 날 수밖에 없고 때론 회초리까지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믿음을 전할 수 없고, 또 성경이 현재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나아가 매주 수, 토요일이면 성당(서울대교구 구의동성당)에서 공동체와 함께 말씀의 전례, 혹은 미사를 거행한다. 또 한 달에 한 번씩은 공동체별로 월 피정, 곧 꼰비벤자를 갖는다. “가장이 아는 만큼, 배운 만큼 복음 해설과 함께 권고하고 자녀들도 이 말씀에 대해 한마디씩 해보도록 합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사실 통제가 되지 않기는 하지만, 자녀들을 위해 복음을 나누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아침기도는 믿음을 물려주는 핵심이자 아이들과 부모의 대화 시간이기도 합니다. 특히 메아리 시간은 사춘기로 엇나갔던 자녀들도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메아리를 통해 부모들과 화해하고 부모 또한 자녀들을 받아주며 축복을 해주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날마다 기도하려 하지만, 때로 기도를 빼먹을 때도 있다. 수도자들처럼 기도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날은 다들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 일어나 촛불 하나 켜놓고 마음을 모으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과 함께 필요한 은총을 하느님께 청하고 그 은총의 의미를 깨달으며 기도의 여정을 걸어가는 일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이들 부부가 처음부터 이렇게 네오까떼꾸메나도 길 안에서 가정기도에 열심이었던 건 아니다. 다 구교우 가정 출신에 모태 신앙이었지만, 혼인 전에는 학생회나 청년회, 성가대 활동을 하며 평범하게 신앙 생활을 했다. 물론 나름으로는 열심히 살았지만, 신앙에 대한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2년께 이제는 아내가 된 리타 씨의 초대로 둘이서 네오까떼꾸메나도 길을 걷게 되면서 신앙에 새롭게 눈을 떴다. 그 덕에 믿음 안에서 혼인했고,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받아들여 신앙으로 키워나갔다.고비가 없을 리 없다. 극한 상황으로 치닫는 부부 싸움도 당연히 한다. 하지만 날이 저물기 전에 서로 먼저 화해와 용서를 청한다. 삶 안에서,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신앙과의 괴리도 당연히 있다. 그래서 직장을 비롯해 그 어디에서든 당당히 성호를 그으며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세속과 일정한 선을 긋기도 한다. 술을 좋아하던 것도, 접대의 유혹도 네오까떼꾸메나도 길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 준비 모임 등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극복했다.2년 전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온 것도 공동체 안에서 기도로 결정했다. 다니던 지점이 폐쇄되면서 명예 퇴직을 할지, 아니면 서울로 올라올지 고민이 컸는데, 기도 속에서 서울에 올라왔다. ‘주님께서 어디로 이끄시는지 가보자’는 결론을 내리고 울산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 집 크기를 줄여 전셋집을 구하고 구의동성당에서 공동체 활동을 하며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 요리 강사로 활동하던 부인은 잠시 일을 접고 다섯 아이를 돌보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결국은 기도하는 삶을 통한 체험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네오까떼꾸메나도 길 안에서 세 다리, 곧 하느님 말씀과 전례, 공동체가 주는 체험이 개인의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갈지 겸손되이 기다리며 기도하는 체험 말입니다.”글·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백영민2014.12.24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 교육자 김익진 프란치스코 <10>](//cpbc.co.kr/CMS/newspaper/2015/01/rc/552556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 교육자 김익진 프란치스코 장님이 된 프란치스코내심낙원 출간.수입이 거의 없어서 가재도구와 아내의 패물들이 팔려 나갔다. 자식들은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야 할 지경이었다. 간간이 글을 써서 받는 고료가 수입의 전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초근목피라는 말이 연상되던 어느 봄날이었다. 반가운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 영어판 「레지오 마리애」 교본을 한국어로 번역해주시기 바랍니다. 번역료로 500달러를 미리 보내드립니다. … 1955년 3월 15일. 광주교구장 현 하롤드 주교.’ 작년까지 광주교구장 서리로 목포 산정동본당에서 사목했던 주교였다. 1953년 5월 31일에 현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로 산정동본당에 레지오 마리애 남성, 여성, 혼성 쁘레시디움을 세웠다. 말하자면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산파역이었다. 번역 의뢰는 모든 걸 나눠주고 떠난 나를 위한 배려였다. 아니, 하느님이 베풀어준 은혜였다. 나는 곧바로 번역에 착수해 이듬해 유월에 「레지오 마리애 직무 수첩」을 냈다. 그것이 한국 교회에 레지오 마리애가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됐다. 그 무렵 나는 미국 예수회의 주간지 「아카데미」에 실린 서평을 보고 꼭 번역하고 싶은 책이 한 권 있었다. 우징숑(吳經熊)의 「동서의 피안」이었다. 저자는 사상 편력 끝에 느지막이 가톨릭에 귀의한 중국의 법리학자였다. 그 책에서는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과 성경의 말씀을 비교하며 진리를 찾고 있었다. 동서양의 종교 사상을 비교 분석하여 동서를 초월한 피안의 세계가 바로 그리스도교임을 제시했다. 일종의 자기 신앙고백서였다. 나는 당시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던 우징숑 박사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 저는 일본과 중국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불교 등을 섭렵하다 가톨릭에 귀의했습니다. 선생님도 저와 비슷한 길을 걷다 가톨릭에 입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선생님의 귀중한 책을 번역해 한국의 지식인들이 영적으로 깨우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얼마 후 답장이 왔다. ‘… 형이 영세하신 것이 저와 같은 해이기는 하지만, 주님께 나아가기를 저보다 두 달이나 먼저 하셨습니다. 이는 곧 하느님의 뜻이기에 마땅히 형으로 모시겠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저자였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위인 그는 나를 영적인 형으로 불렀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나는 그 책을 번역하는 데 꼬박 7년이란 세월을 들였다. 영어판 책을 적당히 의역하고 싶지 않았다. 한문으로 쓰인 원문을 꼼꼼히 대조하며 번역해나갔다. 미심쩍은 대목이 있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인 신부와 교수들을 찾아가 의견을 들었다. 마침내 1961년 12월에 가톨릭출판사에서 번역판이 나왔다. 지식인들은 동서고금을 아우른 걸작에 환호했다. 나는 여세를 몰아 우징숑의 또 다른 신심 서적인 「내심낙원」 번역에 착수했다. 저자는 그 책에서도 동양 철학을 통해 그리스도교 사상을 탐구했다. 극기, 온유, 박애, 평화, 기쁨을 통해 사랑의 발아, 개화, 결실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저자의 삶과 견해가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낄수록 더욱 신중하게 번역에 임했다. 1966년 4월, 성바오로출판사에서 소포가 도착했다. 드디어 「내심낙원」 번역본이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웬일일까! 소포를 뜯는 순간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눈알이 쏟아질 것 같이 흔들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앞이 희미하게 보였다. 안과 의사의 목소리가 근엄했다. “왼쪽 눈은 완전 실명! 오른쪽 눈은 망탈(網脫), 안저생혈(眼底生血)입니다.” 신경과로로 인한 고혈압 때문이었다. 번역을 위해 일 년 동안 객지에서 주야로 과로한 탓이었다. 나는 이미 「동서의 피안」 번역에 몰두하던 6년 전에 왼쪽 눈을 실명한 처지였다. 그때도 신경과로가 원인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쪽 눈마저 그리되었다니……. 앞이 잘 보이지 않고 눈이 아파 글을 통 쓸 수 없었다. 처음에는 억울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하느님을 원망하며 따지기도 했다.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그러나 그때 어두움 속에서 분명하게 깨달은 게 있었다. 시력을 잃어 고생하고 있는 건 회심에 필요한 주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게 진정한 통회의 생활을 하라는 계시였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묵상 기도 중에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세속에서 멀리 떠나 내심의 낙원을 더욱 절실히 맛보아라!” 나는 하느님이 내려주는 고통의 은혜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내 통회와 보속이 끝나는 날 건강을 되돌려 줄 것이라 믿었다. 그날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문서 전교에 힘을 쏟으리라 다짐했다. 내 영적 지도자이자 동반자인 오기선 신부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셋째 딸 화영이를 지팡이 삼아 사제관을 방문하자 오 신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허! 큰일 났군요. 두 눈이 저렇게 어두워서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답했다. “내 주보이신 오상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도 봉사가 돼 세상을 마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눈을 잘 못 보는 것까지도 그분을 닮으렵니다.” 1967년 초겨울, 아내와 나는 대구 대명동에 있는 대지 40평에 건평 15평의 시멘트블록 집으로 이사했다. 가르멜 수도원 근처였다. 나는 매일 2㎞를 걸어가 수도원 성당에서 성체조배와 묵상을 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하느님에게 의탁하는 시간이었다. 텅 빈 껍데기에 밝은 빛이 넘치도록 가득 차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하루에 한 시간씩 노인들에게 시조창을 배웠다. 목소리를 길게 빼기도 하고 떨기도 하며 천천히 시조를 읊조렸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마음이 유쾌해졌다. 뿐만 아니라 심호흡을 하면서 내장 운동을 하게 돼 소화에도 도움이 됐다. 우리 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여백의 미를 즐겼다. 날이 갈수록 지치고 힘들었지만, 지나온 날을 성찰하며 지복직관의 희망을 꿈꾸었다. “아버지!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세요?” 화영이의 목소리에 빛바랜 사진첩이 스르르 닫힌다. 애련한 음성이 찻집 분위기와 어울린다. 은은한 차향이 감미롭다. 비발디의 ‘사계’가 대미로 치닫고 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내 선종 준비로 눈병을 허락하신 게 틀림없구나. 난 삼왕이 아기 예수를 찾아오신 날 떠나고 싶어.” 수녀가 안경을 벗고 눈가를 훔친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오래 오래 저희 곁에 계셔주세요.” 나는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약속한다. “우리 수녀님이 원하면 그러지 뭐.” 난 그날 화영이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한 달 뒤인 1969년 12월 29일에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64세 되던 1970년 1월 6일에 눈을 감았다. 삼왕내조축일(지금의 주님 공현 대축일)이었다. 인자한 주님이 내 소원을 들어준 모양이었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일본과 중국 유학을 하며 진리를 찾아 방황했다. 마침내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나 가톨릭을 알게 됐다.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찾았다. 그 뒤 가진 걸 나누고 봉사하며 빛과 소금처럼 살고자 애썼다. 평생 지니고 다녔던 곰방대와 만년필만 남겼다. 나를 인도한 맨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긴 한 건가. 후세의 우리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나와 같은 평신도가 이 땅에 살다갔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길까. 아니, 기억이나 해줄까. 내 장례 미사는 대구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됐다.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가 된 덕분에 범물동 성당묘지의 묘비명이 참 길다. ‘天主公敎會友方濟各安東金公益鎭之墓(천주공교회우방제각안동김공익진지묘)’ <끝> 다음 호부터는 김홍섭(바오로) 판사 편이 소개됩니다. 백영민2015.01.28
![[복음 이야기]<14> 이스라엘 도량형](//cpbc.co.kr/CMS/newspaper/2014/04/rc/505487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이스라엘 도량형 짧은 길이는 인체 일부분을 표준으로 측정 성경 속 유다인이 사용한 도량형은 대단히 복잡하다. 길이와 부피의 단위가 지방에 따라 달랐다. 또 전통 이스라엘 도량형에 바빌론 유배 후 도입된 바빌로니아 계량법과 알렉산더와 로마의 지배로 헬라와 로마식 도량형이 혼용됐다. 유다인들은 헬라(그리스)와 로마인처럼 비교적 짧은 길이를 재는 데는 인체 일부분을 표준으로 삼았다. 길이의 기본 단위인 '암마'(한 자, 창세 6,15; 탈출 25,10)는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 길이로 통상 46~54㎝ 정도였다. 1암마는 '2제레스'(두 뼘)로, 1제레스는 잔뜩 벌린 손의 엄지손가락 끝에서 새끼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로 평균 약 23㎝이다. 그리고 1제레스는 '3토파'(tofah)로, 1토파는 네 손가락 너비 즉 네 손가락을 합친 것(예레 52,21)을 가리켰다. 또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상을 만들 때 사용된 '손바닥 너비'(탈출 25,25)는 약 7.5㎝이다. 긴 길이를 잴 땐 유다인들은 일상의 오랜 경험에서 얻은 방법,즉 '화살 한바탕 거리'(화살 사정거리, 창세 21,16)나 '하룻길'(민수 11,31; 1열왕 19,4; 루카 2,44), '안식일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사도 1,12, 약 1㎞)로 단위를 계산했다. 긴 길이를 잴 때 기준이 되는 '한 걸음'(2사무 6,13; 마태 5,41)은 약 90㎝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팔레스티나 점령 후 '스타디온'(루카 24,13; 요한 6,19. 11,18; 사도 14,20 등)이란 길이 단위가 도입됐다. 1스타디온은 600보 정도로 400암마 약 185m이다. 랍비들은 '안식일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를 6스타디온'이라 규정했다. 또 로마인들의 상용단위인 '밀레'도 예수 시대 때 사용됐는데 1밀레는 1000걸음 약 1478m였다. 물 깊이를 재는 데는 주로 '오르귀아'(한 길, 약 1.85m) 단위를 사용했다. 사도행전 27장 28절에는 로마로 압송 중이던 바오로 사도가 탄 배의 선원이 물의 깊이를 재는데 '스무 길''열다섯 길'이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헬라어 본문에는 '20오르귀아' '15오르귀아'로 나온다. 면적을 재는 방법은 오늘날 우리가 '평방미터'(㎡), '평방 킬로미터'(㎢)를 말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쟀다. 작은 면적을 재는 데는 '까네'(에제 40,3)라는 측량 장대를 사용했다. 까네는 3m보다 좀 더 길었으므로 잰 단위 면적은 약 10㎡이다. 이보다 넓은 면적을 측량할 때는 '아마 줄'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일반적으로 토지를 말할 때 '측량줄'(시편 15,6)이라고 했다. 보통 농부들이 토지 면적을 말할 때 두 마리의 황소가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을 단위로 썼다. 고대 유다인들은 고체와 액체의 용량을 재는 방법은 전혀 몰랐다. 제일 흔히 쓰는 계량 단위는 복음서에서 '함지'(「공동번역」은 '됫박'. 마태 5,15; 마르 4,21)라 번역되고 있는 단위다. 이는 헬라인과 로마인이 사용한 '모디오스'를 말하며, 1모디오스는 약 8.65리터다. '세스테스'는 1모디오스의 6분의 1로 1세스테스는 약 1.4리터다. 또 '섹스타리온'은 우리 말 '되'를 뜻하며, 1섹스타리온은 약 1.1리터다. 또 예수님 시대에는 밀이나 보리의 양을 재기 위해 토기나 나무 그릇, 놋그릇 등을 사용했는데 이를 '세아'라 불렀다. 1세아는 13리터가 넘었다. 카나의 혼인 잔치 때 예수께서 첫 기적을 행하실 때 독 크기는 '두세 동이'였다(요한 2,6). '동이'는 헬라인들이 사용한 '메트레타스'로, 1메트레타스는 약 400리터다. 로마인이 사용한 1 우르네(urnae)는 130리터다. 예수님 시대엔 중량 단위도 유다인과 이방인의 것이 혼용됐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바르기 위해 향유 한 리트라를(요한 12,3),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향유 100리트라(요한 19,39)를 가져왔다. 이 '리트라'(라틴어 '리브라')는 로마인이 사용한 단위로 1리트라는 약 327.5g 또는 327.5리터다. 성경에는 '탈렌트'(탈출 25,39; 마태 18,24; 묵시 16,25), '미나'(1열왕 10,17; 느헤 7,70; 루카 19,11), '세켈'(창세 23,15; 탈출 30,13) 등이 자주 나온다. 이것들은 바빌로니아 단위로 1탈렌트(약 34㎏)는 60미나(약 570g)고, 1미나는 60세켈(11.4g)이다. 1미나는 4~5리트라와 비례했다. 예수님 시대 때 '탈렌트'는 중량 단위로 사용하지 않고 은이나 금의 액수를 계산하는 데 사용했다. 유다인들은 동물 모양을 나타내는 것은 율법으로 금했기에 무게를 다는 저울추(잠언 16,11)는 단단한 돌이나 청동, 납덩어리로 사용했다. 이 추에는 검인이 찍혀 있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cpbc2014.04.16

기쁨으로 가득한 신앙의 뿌리 찾기 50년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50주년, 기념식 및 기념전·설립자 최석우 몬시뇰 추모의 장 마련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을 인가한 라틴어 설립 공문. 교회사 연구 50주년, ‘기쁨의 희년’이다. 17일로 희년을 맞는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이사장 조규만 주교)는 20일 오후 5시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성당 문화관 꼬스트홀에서 실증적 사료 비판과 연구에 터 잡아 걸어온 외길 교회사 연구 50년을 기념한다. 연구소는 이날 기념식에 전임 이사장인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을 비롯해 현 이사장 조규만 주교 등 주교단과 교회사 연구에 함께해 준 교구 원로 사제, 수도자, 교회사학자, 교회사연구동인회원과 후원회원 등 450여 명을 초대해 기쁨을 함께한다. 이날 기념식은 1964년 8월 17일 가톨릭대 부설연구소로 출범, 한국 교회사 연구를 심화하고 순교정신을 드높임으로써 한국 근대사 연구와 한국 문화 발전에 기여해온 지난 50년을 경축하는 자리다. 또 ‘움직이는 연구소’로 불린 초대 소장 고 최석우 신부와 2대 소장 김성태 신부를 축으로 연구원들이 흘린 땀과 노고, 기도를 기억하는 자리다. 아울러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이라는 기념비적 연구업적을 이루는 데 함께한 은인을 감사하며, 앞으로의 연구에도 함께해 줄 것을 당부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사연구소는 이날을 기념해「성년광익」 영인본과 50주년 기념 논총「한국천주교사 연구의 성찰과 전망」을 펴냈다. 아울러 연구소의 어제와 오늘을 정리한 「한국교회사연구소 50년사」를 발간한다. 또 1975년 9월호부터 올해 8월호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역사 총목차」를 호수별, 주제별, 필자별로 정리했고, 「도서목록」도 펴내 그간 연구소에서 간행한 도서 간행 연혁과 도서 내용을 표지와 함께 소개한다. 이밖에 지난 4월 시성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축일인 10월 22일에 맞춰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을 소개하는 「오.늘.성.인.」을 펴낸다. 연구소는 또 20일 기념식에 앞서 당일 오후 4시 평화화랑 제1,2전시실에서 연구소 설립 50주년 전을 개막하고, 26일까지 전시를 가진다. 전시장은 네 마당으로 구성, 첫 마당 ‘사진으로 보다’는 연구소의 발자취와 영상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둘째 마당 ‘역사의 층 겹겹이 쌓이다’는 연구소가 출판한 잡지 및 간행도서를, 셋째 마당 ‘기억을 불러내고 역사를 불러내다’는 연구소 자체 소장 자료를 선보인다. 끝으로 넷째 마당 ‘최석우 몬시뇰을 기억하며’는 연구소 설립자인 최석우(안드레아, 1922∼2009) 몬시뇰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영상으로 꾸민다. 전시 자료도 △한글교리서와 성인전, 성경 등 고서류 △연구소 간행도서 △서울교구 보좌 드브레 주교의 주교서품식과 순종황제 즉위식, 철도개통식,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성당 낙성식 등 초대장 △신학생과 아버지의 서약서,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천묘 자료, 안명근(야보고)의 옥중 서한 △교민조약문 등 100여 점에 이른다. 문의 : 02-756-1691(내선 1번)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한국교회사연구소 약사 ▲1964년 8월 17일 가톨릭대 부설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서울 혜화동) ▲1967년 절두산성지 한국순교자기념관으로 이전 ▲1975년 합정동으로 이전 ▲1986년 명동 가톨릭회관으로 이전 ▲1996년 12월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허가 ▲2002년 저동 평화빌딩 이전 ▲2006년 5월 한국가톨릭대사전 전 12권 완간 ▲「교회와역사」총 471호 발간 ▲「교회사연구」 총 44집 발간 ▲‘한국교회사연구자료집’ 28집, 한국교회사연구총서 8집, 한국천주교회사 통사 5권 등 24종 803권(단행본 포함) 발간 ▲교회사연구발표회 총 182회 개최 ▲2014년 8월 20일 서울 명동성당 문화관 꼬스트홀 설립 50주년 기념식 오세택 기자 백영민2014.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