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의 순교자들] (40, 끝)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박현동 아빠스에게 하느님의 종 38위 시복 의미와 경과를 듣다](//cpbc.co.kr/CMS/newspaper/2014/07/rc/518365_1.0_titleImage_1.jpg)
[덕원의 순교자들] (40, 끝)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박현동 아빠스에게 하느님의 종 38위 시복 의미와 경과를 듣다북녘에서 형제애와 신앙 증거한 ‘사랑의 순교자들’ 김형주 작 ‘하느님의 종 덕원의 순교자 38위’, 200×300㎝, 캔버스에 유채, 2014. 평화신문 2013년 5월 26일자 제1217호부터 시작한 ‘덕원의 순교자’의 연재를 끝맺는다. 이 기획은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의 권고에 따라 한국교회 신자들이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 38위를 널리 알리고 이들의 현양 운동을 교회 안에 확산하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했다. ‘덕원의 순교자’를 끝맺으면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박현동 아빠스를 통해 하느님의 종 38위 시복 경과와 그 의미를 들어보았다. - 덕원의 순교자 시복 의미와 재판 경과가 궁금합니다.“‘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의 시복재판은 20세기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첫 시복건이란 점에서 교회 안팎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첫 시복재판은 2009년 12월 28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성당에서 개정된 이후 12차례 예비심사 회기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회기 과정에서 16명에게서 목격자 증언을 청취했고, 시성성으로부터 시복재판에 ‘장애 없음’ 판정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역사위원회 최종 보고와 예비심사 보고서 작성에 관한 두 차례 회기가 남아 있으며, 이 회기가 마무리되면 가능한 한 올해 안으로 재판 기록을 시성성에 보고하려 합니다.이에 앞서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아 연합회 한국 진출 100주년을 두 해 앞둔 2007년 5월 10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덕원의 순교자들’ 38위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 교령을 반포했습니다. 여기에는 2007년 2월에 열린 오틸리아 연합회 평의회 권고와 같은 해 봄에 열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총회의 격려가 큰 힘이 됐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시대 최근 연도까지 신앙에 대한 배척 때문에 피 흘린 모든 이를 미래에도 기억하자고 호소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종 38위에 대해 그동안 신문에서 연재했습니다만, 이분들은 어떤 분들인지요.“덕원의 순교자들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 정치 사회적 혼란, 그리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스도인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란 이유만으로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순교자들입니다. 북녘땅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을 증거하던 사제와 수도자들이 6·25전쟁을 전후해(1949~1952) 공산주의자 손에 적잖이 희생됐습니다. 이 가운데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연길수도원·원산수녀원 소속 수도자들과 함흥대목구·연길대목구 소속 사제들이 포함돼 있는데, 이분들이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입니다. 이 가운데는 한국인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가 13명이고, 독일인 사제와 수도자가 25명입니다. 교계 직분으로 좀 더 세분하면 주교 1명, 성직수사 14명, 덕원·함흥교구 사제 4명, 평수사 13명, 수녀 3명, 평신도 1명으로 구성돼 있고 연길교구 사제 2명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25명은 독일 7개 교구 출신 수도자들입니다. 또 이들 38위 순교자 중 23명은 평양인민교화소와 자강도 만포 관문리수용소 등지에서 총살 등으로 살해됐고, 13명은 옥사덕 수용소에서 영양실조 등으로 굶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한윤승(필립보)·신윤철(베드로)신부는 해주인민재판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근처 바닷가에서 생매장됐습니다.주요 인물로는 초대 원산교구장이며 덕원 수도원장이었던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덕원 수도원 출신 첫 한국인 사제인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 그리고 고 구상 시인의 형인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등이 있습니다. 또 루치우스 로트 덕원수도원장 신부는 교황 비오 12세가 독일 주재 교황대사로 있을 때 대사 비서로 일했고, 아르눌프 슐라이허 신부는 한국어 신약성경을 번역 출간해 성경 보급에 앞장섰습니다. 백작 가문의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두메 본당 신부’로 희생적 삶을 산 수도자였습니다. 또 김종수(베르나르도) 신부는 한국인 첫 수련장 수사였고, 성 남종삼(요한)의 후손인 부산 출신 김동철(마르코) 신부는 월남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자기 본당을 버리지 않고 신자들과 함께 있다가 체포돼 순교했습니다.”- 덕원의 순교자들이 조선 시대 순교자들과 다른 특징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20세기 순교자로서 덕원의 순교자들이 지니는 각별한 의미는 이들이 우리 역사의 한복판에서 우리 민족과 운명을 함께 나누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대로 덕원의 순교자들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정치·사회적 혼란, 그리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의 절망과 아픔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은 분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삶과 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한국 현대사의 일부이며, 그들의 순교 사건은 한민족의 비극과 별개가 아닙니다. 덕원의 순교자들이 우리 현대사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이들의 순교 행적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이가 가슴에 품고 공경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덕원의 순교자들은 수도 공동체의 형제적 친교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주신 분들입니다. 조선 왕조시대 순교자들이 신앙을 지키려고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용덕’을 증거했다면, 덕원의 순교자들은 오랜 강제수용소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 즉 ‘애덕’과 ‘형제애’를 증거했습니다. 수용소 안팎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 나누는 과정에서 한국인 독일인, 성직자 수도자를 떠나 형제애를 실천한 것이 더 중요한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또 갇힌 형제들이 악조건 속에서도 서로 돌보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서로 격려하고 애쓴 면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이전의 순교자들이 고신 극기와 영웅적 덕행으로 신앙을 증거했다면, 덕원의 순교자는 강제 노역의 일상에서도 형제애와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 ‘사랑의 순교’ 측면이 더 두드러지는 듯합니다.” -시성성 장관의 권고대로 시복재판 과정에서 이들의 현양사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덕원의 순교자 하느님의 종 38위는 남북한교회를 연결하는 촉매제요 고리입니다. 이들에 대한 평가와 현양은 이념보다는 사랑과 인도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독일의 경우 모원인 상트 오틸리엔수도원과 순교자들의 출신 본당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시복과 현양 운동이 있었습니다. 왜관수도원에서도 음악회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활동을 통해 이들을 알리고 있습니다. 또 수도원 성당 벽면에 이들을 위한 기도와 현양 공간도 꾸미고 있습니다. 또 8월 초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릴 ‘동소문별곡’ 전에 덕원 순교자에 관한 자료를 전시할 계획입니다. 무엇보다 공산주의자들 특히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우리 수도회 형제들에게 전이되지 않고 그들에 대한 연민이 생겼다는 점이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덕원의 순교자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북한과 북한 침묵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 인도적 지원이 확대될수록 덕원 순교자들의 현양도 확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07.09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9) 이스라엘에도 널리 퍼진 달신 숭배](//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5164_1.0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9) 이스라엘에도 널리 퍼진 달신 숭배안식일만큼 중요했던 '초하룻날' 고대 근동세계에서 달신은 최고신의 피가 흐르는 강한 남성신이었다. 달신은 왕권의 상징이었고, '해와 달과 별의 군대'라는 삼신론을 이뤘다. 고대 근동인들은 달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으로 여겨진 초하룻날을 중요시했다.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선 달신이 중요한 신으로 여겨졌지만, 북서셈어를 쓰는 지역에서 달신은 별 볼 일 없는 신이었다. 달신 숭배의 중심지는 우르(수메르의 도시 국가)와 하란(메소포타미아 지역 상업도시)이었다. 우르 출신이었던 아브라함은 하란에 머물다 이스라엘로 갔다. 하느님을 섬긴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75년 넘게 살았다. 아브라함은 달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달신 문화를 이스라엘로 최초로 옮겨온 이도 아브라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엘리야 예언자의 수제자 엘리사는 많은 기적을 행했다. 엘리사 예언자와 수넴 여인 이야기(2열왕 4장)는 고대 이스라엘의 민간 신앙에서 초하룻날이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들을 잃은 수넴 여인이 어느날 엘리사 예언자를 찾아가려 하자 남편은 "왜 꼭 오늘 그분에게 가려 하오? 오늘은 초하룻날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니지 않소?"(2열왕 4,23)라고 묻는다. 이는 초하룻날이 안식일과 같이 중요하게 취급됨을 나타내고 있다. #이스라엘과 초하룻날 다윗의 행적이 적힌 사무엘기에도 초하룻날과 관련된 기록들이 나온다. 다윗을 시기한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 했다. 사울왕에게 여러 차례 죽임을 당할 뻔한 다윗은 사울의 아들 요나탄 왕자를 찾아갔다. 요나탄은 다윗편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요나탄에게 "왕자님 아버님께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분께서 이렇게 제 목숨을 노리신단 말입니까?"(1사무 20,1)하고 묻는다. 이 대목에서 요나탄은 "자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네"(1사무 20,4)하고 말한다. 이에 다윗은 "내일이 초하룻날입니다. 제가 임금님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모레 저녁때까지 들에 숨어 있도록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1사무 20,5)"하고 말한다. 이스라엘 왕실에서 '초하룻날'에 특별한 식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특별한 식사는 특별한 전례와 관련됐을 것이다. 초하룻날 임금과 신하가 모두 참석하는 전례와 식사의 기원은 고대 근동일 것이다. 초하룻날에 어떤 특별한 전례를 행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초하룻날은 이렇게 고대 근동의 일반적 문화로 이해해도 좋을 정도로 달신 숭배가 문화적으로 이미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사실 초하룻날은 이스라엘 전례력에서 무척 중요한 날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종교적 절기를 엄밀히 지키며 성전에서 전례를 올리는 일을 담당했던 레위인에게도 초하룻날은 안식일과 함께 지켜야 할 기념일이었다. "안식일과 초하룻날과 축일에 주님께 번제물을 바칠 적마다 법규에 따라 정해진 때에 주님 앞에 바치는 일을 맡았다"(1역대 23,31)는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인 예언자들도 초하룻날을 매우 중요한 날로 보았다. 이사야 예언자가 거짓 경신례를 경고하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장면에서도 초하룻날이 언급된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이사 1,13). #달은 하느님이 만드신 피조물? 초하룻날을 중히 여기는 관습은 유배 이후에도 면면히 이어진다. 유배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기쁨에 넘쳤다. 그들은 예루살렘 시온산에 정성 들여 새로운 주님의 성전을 지었다. 이후 마음껏 주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그들은 매일 번제물을 바치며 '초하룻날'과 모든 거룩한 축일을 지켰다. 그들은 일일 번제물 외에 초하룻날과 주님의 모든 거룩한 축일에 드리는 제물과 주님께 자원 예물로 드리는 모든 이의 제물을 바쳤다(에즈 3,5 참조). 초하룻날뿐 아니라 그믐날도 이스라엘의 중요한 절기였다. 마치 수넴 여자처럼 유딧도 초하룻날을 경건하게 보냈던 것 같다. 유딧은 성경에서 신앙심 깊은 경건한 사람으로 나온다. 두 여인은 시대가 무척 차이가 나지만, 달신 숭배에서 기원한 초하룻날을 잘 섬겼다는 점에서 같은 모습을 보인다. 유딧은 그믐날도 챙겼다. "그리고 과부 생활을 하는 동안 안식일 전날과 안식일, 그믐날과 초하룻날, 이스라엘 집안의 축제일과 경축일 말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단식하였다"(유딧 8,6). 그런데 과연 달신 숭배를 수용하기만 했을까.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진 달신 숭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펼친다. 신명기계와 사제계(제관계) 학자들은 달은 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평화방송 TV 방송시간 : 수요일 오전 9시(본방송), 금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일요일 저녁 9시, 월요일 오전 4시ㆍ오후 3시퇴사자22013.03.27
![[20세기를 빛낸 가톨릭 신학자들]<29>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중)](//cpbc.co.kr/CMS/newspaper/2013/12/rc/490211_1.1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가톨릭 신학자들]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중)우주적 진화의 시작과 끝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 통합 샤르댕은 오메가 포인트를 통해 우주와 인간의 탄생과 발전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지고 마침내 완성에 이르는지를 설명하며 창조와 진화를 통합하는 새로운 전망을 제시했다. 창조와 진화의 통합적 전망 제시 프랑스 신학자 테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이 전개한 보편적 차원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우주와 인간의 탄생과 발전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지고 마침내 완성에 이르는가를 설명한다. 이는 우주의 전체적 진화 현상에 대한 과학적 고찰을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차원에서 새로이 해석해 수용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물론 샤르댕의 사상에 대해선 긍정적 평가와 비판적 평가가 교차된다. 하지만 샤르댕의 가장 큰 공헌은 당시 도저히 양립 불가능하며 심지어 적대적으로까지 간주되던 그리스도교 창조론과 과학적 진화 사상을 통합하는 신학적 전망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올바른 관계가 과연 무엇이고 교회가 진화론을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는지를 잘 알 필요가 있는데, 샤르댕의 신학사상을 아는 것은 이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창세기의 신학적 의미 먼저 성경의 창조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과학적 진화론자의 창조론 비판, 혹은 창조론에 입각한 진화론 비판의 양쪽 모두에서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부족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즉, 유물론적 관점에서 진행되는 극단적 진화론도 배척되어야 하겠지만, 성경을 글자 그대로 정보적 관점에서만 이해하려는 축자적(逐字的) 입장 역시 지양돼야 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내용은 세상의 기원과 전개 과정에 대한 실제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를 통해 드러나는 세상의 실재와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의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다. 사실 창세기 1-11장의 태고사(원역사)는 다른 부분보다 더 후대에 기록됐지만 창세기의 맨 앞에 자리하게 됐다. 구약성경이 전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창세기 12-50장의 '성조사'(聖祖史), 즉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이야기 및 이어지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진정한 하느님 체험은 바로 이집트 탈출 사건에서부터 출발한다. 창세기 저자와 편집자들은 역사적 체험을 통해 이스라엘이 구원자이신 주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選民) 사상을 펼치면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계약을 강력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계약을 태초의 기원으로까지 끌어올리면서 창세기 1-11장의 창조 이야기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특히 창세기 1-3장에서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두 번 나오며 문학적 긴장이 발견되는 것은, 창세기 1,1-2,4a(기원전 6~5세기의 사제계 문헌)과 2,4b-3,24(기원전 10~9세기의 야훼계 문헌)이 서로 다른 전승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이 두 전승이 결합돼 편집된 시기는 바빌론 유배 생활이 끝난 직후인 기원전 400년쯤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간 기원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창세기 도입부에 함께 모여 여러 편집 과정을 거치며 문학적 긴장을 자아내는 현재의 형태로 형성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서 바로 온 세상과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이는 주 하느님에 대한 시각이 이스라엘의 민족신 개념을 벗어나 보편적 창조주의 차원으로 확대됨을 의미한다. 하느님 말씀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지만 이제 이스라엘을 넘어 전 인류를 지향하게 된다. 창세기 편집자들은 이처럼 신관(神觀)에 대한 재성찰을 통해 주 하느님의 권능과 약속에 대한 기대와 전망을 보편적 차원에서 새롭게 함으로써, 바빌론 유배라는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겪어야 했던 어둡고 부정적인 체험을 이겨내는 강력한 희망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므로 창조와 계약을 연결시키는 관점에서 편집된 창세기 도입부는 고통스러운 현재적 체험에서 출발해 태초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련의 신학적 성찰이며 반성이다. 창조론과 진화론 이처럼 창세기는 창조 역사에 대한 실제적 객관적 보도가 아니라 하느님 창조에 관한 신학적 메시지를 전한다. 즉, 창세기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체적인 역사 속에 작성된 신앙고백적 성격을 지니기에 우주의 생성 장면을 직접 목격한 누군가가 마치 구체적 사건 보도를 하듯이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창세기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이해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진화론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거나 아니면 일방적으로 배척하는 양 극단을 피해야 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현대적 논쟁과 관련해 비오 12세 교황(재위 1939~1958)은 1950년 회칙 「인류」(Humani Generis)를 통해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교회 교도권은 진화론적 주장이 이미 선재(先在)하는 생물체로부터 유래하는 인간 육체의 기원에 대하여 연구하는 한, 과학과 신학의 현재 상태에 따라 그 양쪽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해 진화론적 주장이 연구와 토론의 대상으로서 다뤄지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다만 가톨릭 신앙은 영혼들이 하느님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창조됐다고 생각할 것을 우리에게 의무로서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와 토론은, 진화론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양편의 주장 모두가 마땅히 신중함과 중용에 의해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숙고되고 판단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또 양편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성경 해석과 신앙교리 수호의 임무를 위탁하신 교회의 판단에 승복할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언급된 인간 영혼이 하느님에 의해서 직접 창조되었다는 관점은 진화론과의 대화와 토론에 있어 결코 가톨릭 신앙이 포기할 수 없는 핵심 논점임이 1966년 바오로 6세 교황(재위 1963~1978)에 의해 재확인된다.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재위 1978~2005) 역시 1996년 '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주제로 열린 교황청 과학원 총회에 보낸 담화에서 이 원칙을 거듭 천명한다. "진화의 이론들에 영감을 준 철학들에 따라, 인간 정신이 생물체의 힘에서 나온다든지 또는 생물체의 단순한 부수 현상이라고 여기는 진화론들은 인간에 대한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러한 이론들은 또한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샤르댕의 통합적 전망 이러한 창조론과 진화론의 상관관계를 이해함에 있어 샤르댕 신학사상은 큰 도움이 된다. 샤르댕에게는 우주의 신비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과학적 탐구의 목표였다. 그는 지질계로부터 생명의 발생과 인간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우주를 하나의 통일체로 놓고 이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을 추구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탐구를 시작으로 생명체를 고찰하던 샤르댕은 '진화'라는 중요한 현상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샤르댕이 생각한 진화는 「종의 기원」의 저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을 비롯한 생물학적 진화론자들의 특정 주장에 갇히는 것이 아니었다. 샤르댕의 과학적 진화 현상론은 보다 고차원적으로 만물이 어떤 성장 과정에 의해 존재하게 됨을 말하는 우주 전체의 진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발전 단계 중 생명의 발생과 인간의 출현은 우주 진화의 결정적 현상이다. 그리고 그 상승적 발전 과정이 종결되는 모든 우주적 진화의 최종 수렴점으로서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가 제시되기에 이른다. 샤르댕은 이 오메가 포인트를 설명함에 있어 세상과 우주 안에 역동적인 사랑의 순환을 가능케 하는 인격적 중심이 존재함을 말하면서, 이를 그리스도교 계시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 이는 나자렛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의 강생이 우주적 신화(神化)를 위한 결정적 사건이며 궁극적으로는 신성화된 우주를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최종 수렴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샤르댕은 육화하신 하느님 아드님의 사건, 즉 그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로써 모든 '인간 현상'의 전체적 의미가 충만히 드러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샤르댕의 이러한 사상은 신약성경의 대표적 그리스도 찬가인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15-20절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과학적 언어로 설명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성자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중재자이자 원동력이며, 중심이자 목표로서 드러난다. 요한 묵시록에서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창조부터 종말론적 완성에 이르기까지 전체 구원 역사의 우주적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자리하심이 드러난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충만함'이 드러난다고 말하는데 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향하여' 완성되어 갈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4-10절의 그리스도 찬가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물의 수렴'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10). 샤르댕이 말한 '오메가 포인트'는 바로 우주적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지는 종말론적인 '만물의 수렴과 충만' 사상을 과학의 언어로 표현하려 시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샤르댕은 우주의 진화를 과학적 차원에서 탐구한 후 이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창조와 진화를 통합하는 새로운 전망을 제시했다. ※주요 참고문헌 : 「창조론, 아름다운 세상의 회복을 꿈꾸며」(박준양 지음, 생활성서사, 2008) 박준양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 )cpbc2013.12.31
![[위령성월/주교회의 편찬「죽음, 심판, 지옥, 천국」] (4, 끝)천국](//cpbc.co.kr/CMS/newspaper/2013/11/rc/483882_1.1_titleImage_1.jpg)
[위령성월/주교회의 편찬「죽음, 심판, 지옥, 천국」] (4, 끝)천국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 행복, 죽음도 넘어서 그리스도인에게 천국은 희망이다. 그림은 천국에 있는 103위 한국 순교성인을 그린 103위 순교성인화(문학진 작, 1977년). 평화신문 자료사진1. 천국은 하느님과의 궁극적인 만남 천국(天國)은 성경의 '하늘 나라'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심판, 연옥과 지옥이 하느님과 우리 관계 안에서 이해되듯, 천국도 같은 맥락이다. 하느님 없는 천국은 없다. 가톨릭교회가 죽음 이후 삶을 말할 때 쓰는 '천국'이라는 개념은 하느님과의 친교가 죽음을 넘어서까지 지속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 연인들은 늘 함께 있고 싶어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기쁨과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도 비슷하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는 사람들은 하느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그 친교가 영원히 지속하기를 바란다. 구약성경 다니엘서, 마카베오기 하권 등에는 좀 더 분명하게 내세의 영원한 행복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그 저자들이 죽음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내세의 영원한 행복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세상에서 믿고 사랑하던 바로 그 하느님께서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도 다스리는 주님이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2. 천국에서 우리는 완전한 행복 누려 하느님과의 친교는 큰 행복과 기쁨을 준다. 하느님과의 친교는 죽음으로 중단되지 않는다. 그 친교가 주는 행복과 기쁨도 죽음을 넘어서 계속된다. 지상에서 누리던 하느님과의 친교가 죽음을 넘어서 완성되면, 그 어떤 행복보다고 더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천국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천국의 모습은 인간의 모든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서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루카 20,36 참조). 성경은 천국의 이러한 새로움을 표현하고자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상을 사용한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묵시 21,1-4).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되는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올 수 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고백한 대로, 인간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을 향하도록 만들어져 있기에 하느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의 마음이 평온하지 않다. 천국은 하느님과의 친교가 완성된 곳으로 우리는 거기서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나 혼자가 아닌 함께 누리는 기쁨이다. 3.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에 초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께서 베푸시는 천국이라는 선물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것은 성경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진리다. 마태오 복음의 '혼인 잔치의 비유'와 마르코 복음의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 필요하다"(2,17)는 말씀 등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무상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인간의 결단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참행복의 선언'(마태 5,3-12)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등 당신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어떤 이들의 것인지 알려 주신다. 또한 하느님 초대를 받은 이들은 선교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초대를 전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마련하신 길이다. 교회를 통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하느님께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으며, 말씀과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고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4. 천국은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 백정 출신 순교자 황일광(시몬)은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선포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시작됐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고,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당신 통치를 힘차게 실현하시는 것처럼, 이렇게 지금 이 세상에서 아버지 뜻이 이뤄질 때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부활로 죄와 죽음은 그 기세가 꺾였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비로소 죄와 죽음, 모든 고통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 그분께서는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당신 친히 말씀하시고,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와 다른 성사들 안에 현존하시며, 교회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현존하신다"(「거룩한 공의회」 7항). 따라서 성경 말씀과 성사들,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자주 친교를 이룰 때 우리는 천국의 행복을 한 조각 미리 맛볼 수 있다. 5. 천국은 우리의 절대적 희망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 것이다. 시편은 이러한 믿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저를 위하여 누가 하늘에 계십니까?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제 마음의 반석,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십니다.…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시편 73,25-28).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하고 말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완성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을 간절히 희망하면서, 그 나라를 향해 가는 나그네들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 내가 곧 간다"고 약속하셨고, 지상을 순례하는 교회는 이 말씀에 희망을 두면서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하고 기원한다.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에 대한 희망, 그때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지상의 나그넷길을 인내심을 갖고 걸어갈 수 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정리=이힘 기자 lensman@pbc.co.krcpbc2013.11.19
![[위령성월 이야기]-죽은 이들을 위해 언제부터 기도했을까?](//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6914_1.0_titleImage_1.jpg)
[위령성월 이야기]-죽은 이들을 위해 언제부터 기도했을까?2세기부터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널리 퍼져 연혹 영혼 기억하며 자신의 삶·신앙 돌아봐야 그리스도인은 위령성월에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긴다. 사진은 신자들이 서울 용산 성직자묘역에서 세상을 떠난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 평화신문 자료사진 11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이다. 위령성월을 맞아 위령성월의 유래와 함께 죽음에 관한 교회 가르침을 살펴본다. 위령성월 유래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관련된 기록은 구약성경 마카베오기에 나온다. 기원전 2세기 유다 지도자 마카베오는 전쟁터에서 죽은 유다인들의 장사를 지내면서 그들이 지은 죄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기도와 헌금을 바쳤다.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5). 서기 2세기부터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널리 퍼졌다. 초대 교회 로마 카타콤바(지하묘지) 안에 새겨진 기도문에는 죽은 이들이 죄를 용서받고 천상 행복에 들게 해달라는 내용이 많았다.교회는 이러한 관행을 연옥 교리로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천국에 들기 전 자신의 죄를 깨끗이 씻는 상태를 뜻하는 연옥은 13세기 리용공의회와 15세기 피렌체공의회를 거쳐 1545년 트리엔트공의회에서 공식 가르침으로 선포됐다.이에 앞서 609년 성 보니파시오 4세 교황은 11월 1일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정하고 이날에 교회력에 축일이 따로 없는 성인들을 기억하도록 했다. 이후 998년 프랑스 클뤼니수도원 오딜로 원장은 모든 성일 대축일 다음 날인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했고, 이런 관습이 확산하면서 11월을 위령성월로 지내게 됐다.죽음에 관한 교회 가르침가톨릭교회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죽음은 이 세상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관문이기에 적극적 자세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죽음관이다. 교회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후에 세 가지 상황 가운데 하나에 처하게 된다. △하느님 은총과 사랑을 간직하고 죽거나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 (천국) △하느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 (연옥)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거부한 사람은 영원한 벌을 받는다. (지옥) 이처럼 개별 심판(사심판)을 받은 인간은 세상 종말이 오면,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면 모두 부활해 최후 심판(공심판)을 받는다. 이때 육체와 영혼이 영광스럽게 된 의인들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지만 악인은 단죄를 받게 된다. 종말의 시기와 방법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이러한 교회 가르침을 다시 쉽게 푼다면, 인간은 죽어서 하느님과 만난다.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전 생애가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것을 체험한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파노라마처럼 적나라하게 되돌아보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연옥은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통감하며 후회와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대면하는 정화의 과정이다. 생전에 죄를 지은 것이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며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상태가 바로 연옥이다. 연옥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고 정화하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기대어 하느님과의 일치, 즉 천국을 희망한다. 교회는 연옥 영혼이 최후 심판 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바쳐온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이다. 연옥 영혼들은 지상에서 살고 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미사, 선행 등으로 도움을 받는다. 이른바 ‘통공’ (通功) 신앙이다. 천국, 곧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복락을 누리는 어떤 곳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룸으로써 누리는 충만한 기쁨의 상태다. 이를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 부른다. 반면 지옥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이웃을 거부한 인간이 절망과 악의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현세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는 것처럼 지옥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최후 심판, 즉 종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이기에 인간이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종말 때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을 믿을 뿐이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다. 천국과 지옥이 내세의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라고 한다면 천국과 지옥은 이미 현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완성될 종말에 희망을 거는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하느님을 만날 것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한 가운데 종말에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둔다. 이 희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죽는 그 순간까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이끈다.위령성월에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된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자연스럽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게 되고, 이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위령성월을 맞아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두 손을 모아야겠다.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평화신문2014.10.29

젊은이여, 신앙의 근본을 재발견하라- YOUCAT으로 묻고 답하기 [평화신문·가톨릭출판사 공동기획] <3>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생명을 얻는가?루카스 크라나흐 ‘간음한 여자와 예수’, 1532년, 예술 미술관, 부다페스트, 헝가리.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붙잡혀 끌려 온 여자를 일으켜 세우신 다음 사람들에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고 말씀하셨다. 133. 죄란 무엇이고,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나요? 죄란 인간이 뚜렷한 의식 상태에서 의지를 지닌 채 하느님이 사랑으로 계획했던 일들의 참된 질서를 깨뜨리려는 의도나 말 또는 행동을 말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49-1851항, 1871-1872항). 죄란 결국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처럼 “하느님을 경멸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자기애”라고 할 수 있으며, 극단에까지 이르면 이 죄짓는 피조물을 “나는 하느님처럼 될 거야”라고 말합니다(창세 3,5 참조). 인간은 양심을 통해 자기의 죄를 깨닫습니다. 양심 덕분에 자신의 잘못을 비난하고, 이를 하느님 앞에서 시인합니다(1797ㆍ1848항). 134. 죄를 지은 사람이 하느님에게 도움을 구하고 용서를 청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심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하느님은 전적으로 선한 분이시며, 선의 근원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며, 그분과 맺는 관계를 통해 다시 원상태를 회복해야 합니다(1847항). 수많은 성경 구절이 하느님을 자비로운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잃었던 아들을 반갑게 맞이해 아무 조건 없이 그를 받아들이고 잔치를 열어 아들의 귀환과 화해의 기쁨을 나누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루카 15장 참조, 1846ㆍ1870항). 그분은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세리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후에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 28) 하고 자기 죽음을 하느님의 자비로우며 주도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해석하셨습니다. 135. 대죄(죽을죄)와 소죄(용서받을 죄)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요? 대죄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라는 신성한 힘을 파괴하는데, 그 힘이 없으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대죄를 사죄(죽을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소죄는 그저 하느님과 맺은 관계에 해를 끼치는 데 그치지만, 대죄는 그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1852-1861항, 1874항). 대죄는 생명이나 하느님과 직접 관련된 매우 중요한 가치에 맞서는 죄, 즉 살인, 신성 모독, 간음 등입니다. 또한, 이를 온전한 의식 상태에서 완전한 동의로 행했을 경우에 대죄입니다. 소죄는 명예나 진실, 재산과 같은 하위 가치들과 관련한 것이든지, 죄의 결과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거나 완전한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지은 죄를 말합니다. 136. 우리에게 다른 이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개인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거나 그의 죄에 동참했다면, 또한 다른 사람이 죄를 짓도록 부추기거나 제때에 경고하지 않아 도와주는 일을 게을리했다면, 우리도 다른 이들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1868항). 137. 대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다시 결합할 방법은 무엇인가요? 가톨릭 신자는 고해성사를 통해 대죄로 끊긴 하느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느님과 화해해야 합니다(1856항). cpbc2014.07.14

'신앙의 해' 맞아 볼만한 영화- 진흙 속의 진주, 가톨릭적 수작을 찾아신화, 성경 주제 얽힌 '나니아...' 연작, 수도회 일상 담은 다큐 등 추천 수많은 신화와 성경 주제가 얽힌 세계 3대 판타지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작품으로, 2010년에 나온 '나니아 연대기 : 새벽 출정호의 항해'. 최근 들어 노골적으로 종교에 적대적이거나 이단적이고 나아가 반가톨릭적인 영화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지난 1월 개봉한 '파이의 생애(Life of Pi)'처럼 자신이 마주하는 종교는 모두 받아들이면서 힌두교에 대한 믿음을 키워 결국은 '가톨릭 힌두교'라는 자신만의 종교를 갖게 되는 영화도 있고,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처럼 500년 시ㆍ공간을 불교의 환생과 윤회, 인연, 인과응보, 업보 등의 관념으로 여섯 개 이야기를 얽는 형태로 영화를 이끌기도 한다. 그럴수록 영화적 구성이나 내용에서 가톨릭적 특질을 반영하는 진정성 있는 가톨릭 영화가 더 절실해지고 있다. '신앙의 해'를 맞아 가톨릭 통신사들이 추천하는 가톨릭 영화들을 골라 소개한다.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 연작=세대를 뛰어넘어 사랑을 받는 20세기 최고의 판타지 소설인 C.S. 루이스 원작'나니아 연대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2005년에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 2008년에 '나니아 연대기 : 캐스피언 왕자'이, 2010년에 '나니아 연대기 : 새벽 출정호의 항해' 등이 나왔다. 나니아 탄생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화와 함께 성경 주제가 얽혀 있는 세계 3대 판타지 문학의 하나로 꼽히는 역작으로, 수도자들조차 "하느님에 대해 더 깊이 체험하는 계기가 됐다"고 고백할 정도다. DVD로 나와 있다. ▲위대한 침묵(Into Great Silence)=필립 그로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2005)도 관상수도회인 카르투시오회 수도자들의 일상을 담아내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세상과 단절한 채 오롯이 기도와 공부, 노동뿐인 단순한 삶을 수백 년 넘게 이어온 알프스 계곡 카르투시오회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공동체의 일상을 담고 있다. 2장으로 구성된 DVD에는 제작 과정과 전 교황청 문화평의회 의장 폴 포파르 추기경 추천 영상도 함께 실려 있다. ▲신과 인간(Of Gods and Men)=자비에 보부아 감독의 영화 '신과 인간'(2010)은 이슬람권 알제리 산골 수도원을 배경으로 정치적 사건에 의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직면한 프랑스 출신 수사 7명의 고뇌와 갈등을 그린 영화다. 2010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그랑프리 수상작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 그리고 신앙적 결단과 이상이 현실과 괴리를 띠게 될 때 그로부터 빚어지는 갈등에 초점을 맞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지난해 1월 국내에서도 개봉돼 화제를 뿌렸다. ▲잔 다르크의 수난(The Passion of Joan of Arc)=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걸작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이 첫 손에 꼽힌다. 칼 드레이어의 마지막 무성영화로, 비평계에선 잔 다르크라는 성녀를 다룬 가장 뛰어난 영화로 평가했지만 흥행에선 참패했다. 이 영화에서 잔 다르크 역을 맡은 배우 팔코네티는 감독 지시에 따라 아무런 분장을 하지 않고 등장했다. 잔 다르크나 심문자들을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촬영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국내에선 출시된 적이 없어 아쉽다. 다만 최근에 베네딕도 미디어에서 자크 리베트 감독의 '잔 다르크(Jeanne la Pucelle)'(1994)를 출시했다. ▲로메로(Romero)=엘살바도르 로메로 대주교를 다룬 존 듀이건 감독의 '로메로'(1989)도 특기할 만하다. 국내에선 베네딕도 미디어에서 비디오로 나온 적이 있지만,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아마존(www.amazon.com)같은 외국 쇼핑몰을 통해 구입이 가능하다. 늘 "복음이 누구에게 기쁜 소식인가?"하고 물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1980년 3월 피살된 로메로 대주교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전통을 사랑하고 고요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지만, 가난한 이들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한 뒤로 죽기까지 헌신한 그의 죽음은 자유와 평화의 씨앗이 되고 복음적 희망이 실현되는 신호탄이 됐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조은일2013.02.05
![[교황 방한 결산] 교황이 주고 받은 선물](//cpbc.co.kr/CMS/newspaper/2014/08/rc/526592_1.0_titleImage_1.jpg)
[교황 방한 결산] 교황이 주고 받은 선물정성 선물하고, 그리스도의 따뜻한 온기 받아 ‘교황님 안전하게 모셔줘서 고맙다!’ 서울 광화문 시복미사 등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이 돼준 오픈카 2대가 교황방한위원회가 별도로 마련한 서울의 한 주차장에 주차돼 있다. 현대기아차는 교황 방한 때 사용한 오픈카 등을 최근 방한위에 기증했다. 방한위는 이들 차량을 전시하거나 내년 1월 교황이 스리랑카와 필리핀 사목방문 때 다시 사용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 ‘서울 가톨릭 공동체 모든 분께, 이 도시에서 복음의 효소가 나날이 되어가시기 빕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성모님의 도우심을 빕니다. 프란치스코 2014년 8월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18일 서울대교구에 남긴 글이다. 교황은 성작과 성반, 124위 복자 동판이 새겨진 메달을 선물하고, 성당 머릿돌 글씨, 교구청 현판을 축성했다. 교황이 한국에서 주고받은 물적 선물은 어떤 것이 있는지 정리했다.프란치스코 교황이 받은 선물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교구민을 대표해 18일 명동대성당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휴전선 철조망으로 만든 가시관과 파티마 성모상을 선물했다. 대전교구는 묵주기도 1500만 단 이상과 미사 200만 회, 교황을 위한 기도 328만 9179회 등 영적 선물을 적은 자기, 아르헨티나 루한 성모상과 김대건 신부상을 새긴 나전칠기를 전했다.서울가톨릭목공예 장재덕(바실리오) 회장은 16일 교황께 순교자 칼을 형상화한 나무 조각상을 선물했다. 이 조각상에는 복자 황일광(시몬)의 신앙고백인 ‘내가 천민임에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해주시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는 글이 이탈리아어로 새겨져 있다. 강희덕(가롤로) 교수도 성 요한 바오로 2세와 성 요한 23세, 프란치스코 교황의 웃는 얼굴을 형상화한 청동 작품을 선물했다.교황은 세월호 유가족들로부터 15일 배 그림과 ‘We want the truth’(우리는 진실을 원한다)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와 노란 리본, 세월호 십자가를 받았다. 장애인들 선물도 빼놓을 수 없다. 16일 꽃동네 희망의 집을 찾은 교황은 장애인들로부터 자수로 짠 초상화를 받았다. 뇌성마비로 평생 두 손을 쓰지 못하는 김인자(체칠리아, 74)씨가 발가락으로 접은 학과 거북이를 선물해 교황과 수행단 일행을 감동케 했다. 꽃동네 수도자들은 자신이 제작한 음반 「복음의 기쁨」을, 아시아 청년들은 티셔츠와 수건 등을 선물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자신의 아픔을 표현한 고 김순덕 할머니 작품 ‘못다 핀 꽃’ 그림을 교황에게 전했고, 김복동(89) 할머니는 ‘희망 나비’ 배지를 선물했다. 소프라노 조수미(아기 예수의 데레사)씨는 자신의 음반 「온리 바흐」를 선물했다.박근혜 대통령은 14일 교황께 ‘화목문 자수 보자기’를 선물했고, 교황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프란치스코 교황 가면을 쓴 동영상을 제작해 화제를 모은 최종수(전주교구 진안본당 부귀공소) 신부는 18일 아침 주한 교황대사관에서 자신의 저서 「당신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와 음반 「어느 신부의 사랑 고백」을 교황에게 선물했다. 교황의 선물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영상 주인공 최종수 신부에게 자신의 ‘얼굴’을 선물했다. 교황은 최 신부에게 “신부님은 책과 CD를 선물하고 나는 내 얼굴을 선물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교황은 14일 한국 주교단에게 ‘팔리움 벽감의 그리스도상’을 선물했다. 이는 성 베드로 대성전 교황 제대 밑 베드로 성인 무덤의 벽감(壁龕, 조각 등을 안치하는 벽의 움푹 들어간 곳)의 그리스도 모자이크 상을 본뜬 작품이다.또 17일에는 자신에게 세례받은 이호진(프란치스코)씨에게 교황 묵주와 성경, 양초 등을 선물했다. 교황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로마대지도 동판화’를 선물했다. 로마대지도는 로마 지도를 구리에 새겨 인쇄한 것으로, 전 세계에 300장만 있는 한정판이다. 교황은 이외에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묵주를 선물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선물은 한국을 찾아온 것 그 자체이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의 손을 아낌없이 잡아준 따뜻한 그리스도의 온기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오세택ㆍ이힘ㆍ김유리 기자 평화신문2014.08.27
![[성경 속 궁금증] 43. 성경에서 돼지는 왜 부정한 동물일까?](//cpbc.co.kr/CMS/newspaper/2012/08/rc/422692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43. 성경에서 돼지는 왜 부정한 동물일까?이방인들만이 먹고 키운 동물로 이방인 거부와 혐오의 상징으로돼지들과 함께 있는 집 나간 아들(알브레이트 뒤러작, 1497년). 성경을 읽다 보면 돼지에 대해 언급된 내용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다. 심지어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2베드 2,22)는 속담까지 등장한다. 중동지방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돼지를 먹지 않는다. 음식에 돼지고기가 조금이라도 들어 있다면 입에도 대지 않을 정도로 엄격하다. 모세 율법에서도 돼지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먹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돼지는 굽이 갈라지고 그 틈이 벌어져 있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도 안 되고, 그 주검에 몸이 닿아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레위 11,7-8). 성경에서는 왜 돼지를 부정한 짐승이라고 하는 것일까? 본래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돼지가 없었다.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유목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돼지는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또 오늘날처럼 냉장고가 없었으니 근동지방처럼 더운 지역에서 돼지고기는 부패하기 쉬운 음식이었다. 유다인들이 돼지를 접하게 된 것은 이방인들과 접촉을 하면서부터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의 포로가 되는 쓰라린 경험을 한 후, 이방인인 바빌론의 정신적ㆍ문화적 지배로부터 벗어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이방인의 것이라면 하나에서 열까지 혐오스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만이 기르는 동물인 돼지에게서 이방인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유다인들이 바빌론을 정신적ㆍ문화적 차원에서 제압하고 있었다면 돼지를 그토록 혐오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추수하는 날에 흰 돼지를 잡아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마카베오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이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당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매우 뛰어난 율법 학자들 가운데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자진해서 형틀로 나아가며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목숨이 아까워도 법에 어긋나는 음식은 맛보는 일조차 거부하는 용기를 지닌 모든 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2마카 6,18-20).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고 부정한 몸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다인들은 돼지라는 말을 하는 것조차도 꺼릴 정도로 돼지를 혐오했다. 그래서 돼지고기를 '흰고기'라고 돌려서 불렀다. 또 유다인들은 돼지 기르는 것을 그리스의 학문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 체면을 구기는 일로 여겼다. 그러다 보니 유다인들은 돼지와 이방인의 불결함을 상징적으로 연관시켰다. 그래서 후대에 돼지는 개와 함께 이방인들을 상징하는 경멸적 용어가 됐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퇴사자22012.08.07

양 찾던 목동이 동굴에서 '사해 두루마리' 발견[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9. 쿰란사해 협곡 유다 광야에 있는 쿰란 동굴. 1947년부터 1956년까지 대대적 발굴을 통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사본을 찾아냈다. 예루살렘에서 43km 떨어진 사해 북서 연안 해발 300m 고지 유다 광야에 '키르베트 쿰란'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20세기 고고학의 최대 발견이라 평가받고 있는 사해 두루마리(사해 사본) '쿰란 문서'가 발견된 곳이다. 쿰란 문서는 구약성경과 공동체 규칙, 종말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칙 등 예수 시대 전후 유다이즘의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위대한 발견 대부분이 우연에 기인하듯 쿰란 문서 발견도 극적이다. 1947년 봄 어느 날, 15세의 베두인 목동 무하마드 아드-디브가 친구와 함께 황폐한 바위산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이어지는 쿰란 협곡에서 가축을 몰고 있었다. 문득 양 한 마리가 뒤처진 것을 알아챈 그는 주변을 찾아 헤매다가 머리 위 절벽에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동굴 입구를 보았다. 소년은 그 동굴에 양이 숨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놀래켜서 나오게 하려고 돌을 집어 던졌다. 소년의 기대와 달리 동굴에서 들려온 것은 양 울음소리가 아니라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였다. 호기심에 친구와 함께 동굴에 들어간 아드-디브는 8개의 항아리를 발견했다. 이후 쿰란 일대 탐사가 시작돼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예루살렘 성서 및 고고학연구소와 요르단 문화재 관리국에서 대규모 발굴 작업을 펼쳤다. 그 결과 키르베트 쿰란 일대 200여 개 동굴 가운데 11개 동굴에서 850여 종 양피지와 파피루스 두루마리, 4만여 개의 사본 단편들을 찾아냈다. 아울러 200여 명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러 우물과 물 저장고, 1000여 개의 식기류가 보관된 식방, 토기 작업장, 사본 제작과 필사를 위한 필사실, 수로, 대부분 남자인 1100여 기의 무덤을 발굴했다. 이로써 사해 사본을 남긴 사람들이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서기 68년까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음을 확증하게 됐다. ▨쿰란 공동체 쿰란 문서와 유적 발굴로 이곳에 살았던 공동체 정체에 대한 다양한 가설이 제기됐다. 최근에는 초세기 학자 필로와 요세푸스, 소 플리니우스의 문헌에 소개된 '에세네파' 가설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에세네파는 기원전 2세기 초에 시작된 '하시딤'(정의, 경건, 충절) 운동에 기원을 두고 있다. 마카베오 독립전쟁(기원전 166~160년) 때 마타티아스를 추종한 하시드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헬레니즘과 시리아의 안티오코스에 저항했다.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1마카 2,29). 이후 기원전 152년 셀레오코스 왕조 안티오코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에피파네스가 요나탄을 예루살렘 성전 대사제로 임명했다(1마카 10,18 이하). 이때 쫓겨난 성전 대사제는 추종자들과 함께 유다 광야에 공동체를 꾸리고 스스로 '에세네'(빛의 자녀들, 의로운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라고 불렀다. 이들은 흰 옷을 입고 독신으로 살면서 재산을 공유하고 공동식사를 하면서 정기적으로 정결례를 위한 침수 예식을 했다. 또 스스로를 '참된 이스라엘' '남은 자'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마지막 시대에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라고 이해했다. 아울러 이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을 대신한다고 여기며 메시아 사상과 종말론에 심취해 유다 전통에 충실하고 율법도 철저히 지켰다. 쿰란 에세네파 공동체는 서기 68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후 로마군의 주둔지가 됐다. ▨쿰란 문서 쿰란에서는 에스테르기를 제외한 모든 구약성경 사본 200여 개가 발견됐다. 대부분 문서는 히브리말과 아람어로 양피지와 파피루스에 쓰였고, 일부 헬라어(그리스말) 문서도 있다. 쿰란 문서는 당시까지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사본이었던 「알레포 사본」(925년께 기록)보다 최소 1000년 이전에 쓰인 성경이다. 이 쿰란 문서 발견으로 '구약성경 내용이 중세를 거치면서 왜곡됐다'는 일부 주장이 일축됐고, 제2 경전까지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인정하는 가톨릭교회의 거룩한 전통이 올바른 것임을 확인해줬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3.09.03
![[출판]성경 속 비유에 담긴 예수님의 참 가르침, 아하!](//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4479_1.0_titleImage_1.jpg)
[출판]성경 속 비유에 담긴 예수님의 참 가르침, 아하!정진석 추기경, 다양한 비유 말씀 풀이집 펴내가라지가 있는 밀밭(정진석 추기경 지음/가톨릭출판사/1만 2000원)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의 40겨 개 비유 설명시대적 사회적 배경과 풍습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비유의 요점과 의미 깨닫고 실천하는 삶 당부 정진석 추기경 새 책 「가라지가 있는 밀밭」이 6일 니콜라오 영명축일에 맞춰 나왔다. "책을 읽고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정 추기경의 51번째 책이다. 정 추기경은 이번 책에서 씨 뿌림의 비유, 그물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등 다양한 비유를 들어가며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전했던 예수님 말씀을 풀이했다. 지난해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나 거처를 서울 혜화동 신학교로 옮긴 뒤, 후배 사제들을 생각하며 쓴 책이다.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마태오ㆍ마르코ㆍ루카 복음서에는 40개가 넘는 비유가 나온다. 비유는 예수님께서 즐겨 사용한 화법이다. 정 추기경은 "하느님 나라는 우리 논리와 상식을 뛰어넘기에 비유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가르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예수 시대에는 글을 쓰거나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책도 드물었다. 때문에 여러 부류의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할 때, 어렵고 지루한 설명은 피해야 했다. 누구나 쉽게 알아듣고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하려면 비유만한 것이 없다. 아무리 심오한 하늘나라 진리라 해도 일상생활에서 겪는 체험을 바탕으로 상징과 비유, 예화와 우화를 곁들여 설명한다면 귀에 쏙쏙 들어오기 마련이다. 성경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마태 13,34-35;마르 4,33-34)고 까지 전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그물, 물고기, 값진 진주, 밀가루와 누룩, 밀과 가라지, 혼인잔치 등은 당시 팔레스티나 서민들 생활을 반영한 생활밀착형 소재였다. 정 추기경은 세 복음서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비유로 말씀한 예수님 가르침을 상세하게 해설했다. 당시 시대적, 사회적 배경과 풍습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이해를 도왔다. 또 각 복음서에 공통으로 사용된 비유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찾아냈고, 서로 다른 비유를 비교하며 유사성도 알려줬다. 이와 함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강조했다. "예수님 시대에 살면서 메시아를 보고 그 말씀을 들었는데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측근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보고 듣는 모든 것에 내포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실상을 깨달은 제자들은 예수님 표현대로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행복하게도 인생의 참된 길을 찾은 이들입니다."(129쪽) 정 추기경은 "주님 비유 말씀과 가르침을 듣는 것만으로 부족하며 비유의 요점과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성실히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행동이 뒤따르는 삶을 당부했다. 정 추기경은 머리말에서 "장차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영광스럽게 맞이하기 위해 예수님 비유를 잘 알아듣고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는 은총을 청한다"고 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박수정2012.12.11
중동 종교박해, 이슬람교 내에서도 일어나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이슬람교 내 박해 확대에 우려 표명 【바티칸시티=CNS】 대표적 종교분쟁 지역인 중동 지역의 박해가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이슬람교 내에서도 자행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2일 라틴 전례를 따르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좌 누리집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요르단, 키프로스 교회 지도자들은 담화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중동 내 폭력단체에 의해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받는 게 사실이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인만의 문제는 아니다"면서 "이슬람교도 또한 분파별로 개종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박해가 극단주의자나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교회 지도자들은 "인구 다수가 시아파인 이라크에서는 수니파가 박해를 당하고, 때로 수니파가 장악한 지역에선 시아파가 고통을 겪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중동 지역의 종교 분쟁이나 박해가 가톨릭이나 정교회, 개신교 등 특정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데도 그리스도교만이 피해자라고 보는 것은 이슬람교에 대한 불필요한 편견과 증오심을 갖게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중동의 종교 갈등은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이후 리비아, 이집트 등지에서 무장단체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폭력성이 심해졌다. 이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집 안에까지 침입해 사람을 죽이는 일부 무장 세력 때문에 많은 주민이 공포에 떨고 있다"며 "중동의 종교 갈등은 아주 힘든 상황이지만 종교별로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지키는 신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들은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는 성경 말씀을 인용한 뒤 "종교를 이유로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서 위안을 얻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아울러 "이처럼 빈발하는 종교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중동 지역 형제들이 다같이 힘을 합쳐야 한다"면서 "국제 사회나 지역 정치 세력 또한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갈등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cpbc2014.04.09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27> 크리스토프 쇤보른(하)](//cpbc.co.kr/CMS/newspaper/2013/12/rc/487058_1.2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크리스토프 쇤보른(하)그리스도, 인간 사고 넘어선 하느님의 새로움 알려주는 분 초대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신앙 고백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거부되고 박해받았다. 쇤보른은 초대교회가 혹독한 박해와 몰이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었던 확신에 주목한다. 【CNS】 쇤보른의 그리스도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자신의 역작 「나자렛 예수」 제2권 머리말에서 가톨릭 신학의 중요한 그리스도론 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크리스토프 쇤보른을 언급한다. 쇤보른이 2002년 출간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라는 제목의 그리스도론 작품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스위스 루가노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와 앙리 드 뤼박의 신학노선을 따르는 신학자들이 현대 신학 교재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가톨릭신학교과서협회(AMATECA)를 설립한다. 여기에 독일어권과 프랑스어권, 스페인어권과 영어권 신학자들이 공동으로 종교학, 철학에서부터 기초신학,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성사론, 전례학, 사목신학, 교회법, 교회사, 인간학, 영성신학, 윤리신학, 사회교리, 종말론 등을 망라하는 방대하고도 체계적인 신학교재 23권을 기획했고, 각 저작은 현재 꾸준히 출판 중이다. 이 시리즈물은 현대 신학의 전망 위에서 신학 개념을 충실히 소개하며 신학 교육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데, 세계 각국 언어로도 번역 중이다. 쇤보른은 가톨릭신학교과서협회 대표로 교재 편찬 작업에 적극적이고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시리즈의 제5부 그리스도론 부분을 집필했다. 위기의 그리스도 쇤보른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신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는다. 많은 이가 종교를 심리학적 투사물이라고 주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만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만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살아계신 주님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리스도론을 한 채의 건물로 비유한다면, 이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은 성경과 전승, 경험이라 하겠다. 성경의 근거와 교회의 가르침, 믿는 이들의 신앙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이래 이 세 기둥이 차례차례 흔들리며 무너져 간다. 그 시작은 전승의 기둥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순수 복음을 왜곡한다고 전제하며 전승을 버리고 성경만으로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승의 확실성이 파괴된 것이다. 그 다음 계몽주의가 도래해 역사학의 방법으로만 성경을 연구하면서 성경 또한 오류와 조작의 과정을 거쳐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성경 역시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어서 심리학이 등장해 종교적 경험을 다만 인간 욕구의 투사라고 이해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신앙생활을 심리적인 작용으로만 설명했다. 신앙 경험은 착각이고 환상이라는 것이다. 전승과 성경과 경험의 세 기둥이 무너져가는 이때, 그리스도론이라는 건물을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는가. 여기에 더해 쇤보른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긴장감을 조성한 세 가지 위기를 언급한다. 먼저 자연과학이 가져온 위기다. 근대 이전 세계상에서 인간은 창조계의 화관이고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된 강생의 신비는 우주의 중심인 지구 위에서 피조물의 정점인 인간을 수용하는 사건으로 이해돼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는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생명체의 유구한 진화 과정의 한 단계이고, 지구는 우주의 극미한 한 부분이라는 인식이 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강생을 우주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구원사건이라고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두 번째는 역사의 위기다.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역사의 우연 진리는 필연적 이성 진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의식이 퍼졌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한 사건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또한 모든 역사 사건에 매여 있는 근원적 상대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과거의 다른 역사적 인물이 현재에 던져주는 교훈 그 이상의 의미를 그분에게서 찾아내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쇤보른은 여기서 '신-아리우스주의'를 말한다. 많은 이가 예수님에게서 위대한 한 인간을 바라볼 뿐, 하느님의 아드님이고 주님이신 그분의 신원을 망각하고 훼손하며 또 이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가장 심각한 실존적 위기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선포하는 교회의 구성원은 과연 그 진리를 증언하며 살아왔는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며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는가. 메시아가 왔다고 하는데 세상은 왜 여전히 고통으로 점철돼 있는가. 이러한 위기 상황을 마주 대할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믿는 신앙은 조작된 것처럼 보인다. 인간 예수를 하느님으로 신격화한 교회의 음모에 대해 말하는 책들이 지금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실 이러한 위기는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줄기차게 감싸고 있었다. 그 근원적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에게 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 1,23)라고 밝혔다. 율법의 백성인 유다인에게 십자가는 하느님 저주의 표징이요, 지혜로운 그리스인에겐 어리석음의 상징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신명 22,22-23 참조). 희랍 철학자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고통을 겪을 수도 배신을 당할 수도 죽을 수도 없다. 십자가 위에 죽으신 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신앙은 사람들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는다. 초대교회 시대 이방인 철학자 켈수스는 그리스도교를 조롱하며 말한다. "자신이 약속한 바를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한 그 사람을, 우리가 고발하고 심판하고 형벌 받을 죄인으로 단죄했을 때 숨어있던 그 사람을, 비겁하게도 도망쳤다가 소위 자기 제자 일당에게 배신당해 붙잡힌 그 사람을 어떻게 하느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인가. 그가 하느님이라면 도주하지 말았어야 하고 체포되지 않았어야 하고 배반당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구원자, 위대한 하느님의 아드님, 기쁜 소식의 선포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가?" 켈수스의 말은 일리가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고 또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관습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초대교회 구성원 역시 이를 이해하기 매우 어려워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처음 예고하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한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흠모하고 존경하는 스승이 죽임을 당하리라 말씀하시는데 과연 어떤 제자가 베드로처럼 행동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사람의 생각에서 보면 베드로나 켈수스의 입장이 훨씬 더 합당하지만, 하느님의 생각은 여전히 하느님의 생각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가 아무리 치밀하게 사유한다고 해도 하느님의 생각을 결론으로 도출해내지 못한다. 초대교회 믿음에 주목 신학은 우리의 생각으로 하느님의 생각을 구축하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를 신앙으로 수용하고 이성으로 성찰하면서 심화된다. 하느님은 자유로우신 분, 당신의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유로 이뤄내시는 행위를 인간 편에서 속박할 수 없다. 신학은 하느님의 사건을 대면하며 그 안에 작용하는 하느님 논리를 찾아가는 것이지 인간의 생각으로 하느님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계몽주의 이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분을 신격화해 하느님이라 불렀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그리스도교가 헬레니즘화 됐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삼위일체 교의 및 예수님의 강생, 부활, 동정 마리아로부터 탄생 교의는 교회가 희랍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작하거나 미화한 내용이다. 그런데 역사적 궤적을 따라 진지하게 살펴보면 문제가 달라진다. 초대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신앙 고백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거부되고 박해받았다. 초대교회로선 혹독한 박해와 몰이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조작할 이유가 없었다. 쇤보른은 바오로 사도를 주목한다. "그분(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6-11). 주님, '호 퀴리오스'는 구약성경에서 오직 한 분 하느님께만 드린 호칭이다. 바오로 역시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선포한다고 박해했는데,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하고 찬가를 부르고 있다. 근본적 전환이 발생한 것이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사건은 바오로를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이전의 그는 예수님을 갈릴래아의 위험분자, 신성모독자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제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는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주도권을 분명히 밝힌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6). 부활하신 분의 현현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는 의미가 있다고, 그분의 죽음과 지상 행적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지탱되고 또 의도됐다고, 그분의 말씀은 참되고 그분의 가르침은 올바르다고, 이는 모두 하느님 그분의 행위 자체라고 확신하게 됐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사고와 관습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새로움을 알려주신다. 하느님은 세상의 가장 낮고 어둡고 절망스러운 곳, 그보다 더 밑으로 내려오시어 죄와 고통, 유한성과 죽음을 당신 품 안에 껴안으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어둠을 아래에서부터 끌어안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 생명과 진리가 드러나고 전해지는 자리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성령의 거처로 성장해 나간다. 노우재 신부 (부산가톨릭대 신학대 교수)cpbc2013.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