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이달의 교계잡지](//cpbc.co.kr/CMS/newspaper/2013/10/rc/476183_1.1_titleImage_1.jpg)
[출판] 이달의 교계잡지 ▨가톨릭 디다케 특집으로 '내 서랍속의 묵주'를 주제로 △묵주기도의 역사와 기도 방법(편집팀)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홍진주) △기도를 배운 시간(조은진) △묵주기도 성월 교리자료, 여기에 다~있소!를 실었다. '이달엔 이 교안!'에서는 '성사로서의 혼인'을 다뤘고, 교리 아락실에선 '전교의 달'을 상세히 소개했다.(서울대교구 청소년국/3500원) ▨가톨릭 비타꼰 비타꼰 인터뷰에서는 신앙교리서 「가슴으로 따라 걷는 믿음의 길」를 펴낸 수원교구 복음화국 기획연구팀의 한민택 신부를 만나 교리와 실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묵주기도 성월 신앙여행에서는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를 소개했고, 가톨릭 신앙유산 기행에서는 이탈리아 로마의 카타콤바를 찾았다.(마리아의 아들수도회/4000원) ▨경향잡지 경향돋보기에서는 '신앙의 해 돌아보기'를 주제로 △본당에서 신앙의 해를 보내며(주수욱) △회칙 「신앙의 빛」 길라잡이(김영선) △「신앙의 빛」과 우리의 삶(안명옥)을 실었다. 21세기 교회 도전들에서는 '세속주의'를 살펴봤고 성경과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는 '새 법, 은총과 복음의 법'(고성균)에 관해 알아봤다.(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3300원) ▨교회와 역사 한국교회의 인물상에서는 순교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가족묘를 전주 치명자산으로 이장하고, 현재 사적 288호로 지정된 전주교구 전동성당을 지은 '보두네 신부'에 관해 다뤘다. 9월 열린 '2013 한국교회사연구소 신앙의 해 기념 심포지엄―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과제'에서 발표된 논문과 토론문을 요약해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한국교회사연구소/3000원) ▨그물 나누는 손길따라에서는 윤경일 '한끼의 식사기금' 이사장이 쓴 에티오피아 구호 현장 방문기를 게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한 시리아와 중동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을 소개하며 중동 포콜라레 공동체 곳곳에 이어지는 평화를 위한 증거의 삶을 소개했다.(마리아사업회/3000원) ▨레지오 마리애 레지오 영성으로 △살아있는 믿음은 사랑으로 행동한다(권혁주) △레지오와 청년(맥그리거/구자륭) △묵주기도를 어떤 마음으로 바치나요?(한재호) △평신도 사도직에 있어서 사제의 의미(피노라/이재호)를 다뤘다. 신학여행에서는 '성령의 보편적 현존과 활동에 관한 식별'에 관해 살펴봤다.(한국레지오마리애협의회/비매품) ▨말씀지기 한 달간 복음과 독서 말씀을 영한대역으로 실었다. 여는 글 '아침뜨락'에서는 전원(서울대교구) 신부가 가출하고 싶다는 고3 여학생을 상담한 내용을 들려주며 인간관계 갈등의 해법으로 사랑을 제시했다. 영성 에세이로는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게재했다.(가톨릭출판사/3000원) ▨사목정보 '성전 건축,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특집 주제로 △성전 건축-이것은 지켜야 합니다(황원옥) △성전 건축 양식의 수용과 변천, 그리고 전망(김정신) △성전 건축, 본당신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을 실었다. '다원 종교 시대, 신앙의 부흥'에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과 노력'을 살펴봤다.(미래사목연구소/1만 원) ▨생활성서 '만나고 싶었습니다'에서는 '노래하는 하느님의 작은 새' 소프라노 임선혜(아녜스)씨를 만나 유럽 무대와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특집에서는 '눈물'을 주제로 △눈물은 힘이 세다(이명수) △성경 속 인물들의 눈물(허영엽) △이백 프로요(김인숙)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눈물(이창근) △눈물 명언(편집부)을 실었다.(생활성서사/3900원) ▨성서와 함께 새로봄에서는 '이 시대의 신앙 언어'를 주제로 △언어를 통해 나를 발견합니다(강재형) △삶에 충실한 신앙언어(황종렬)를 다뤘다. 성경 첫걸음에서는 '성경의 백성에 대해 알아볼까요'를, 복음 속 풍습과 친해지기에서는 '나병 환자의 정결례'를 알아봤다.(성서와함께/3000원) ▨소년 묵주기도 성월 특집으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께 기도해요'를 싣고 묵주기도 성월 유래와 묵주기도 방법, 매듭묵주 만들기 방법을 소개했다. '함께해요 어린이 전례 달력'에서는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 감실을 설명했다. 부모님과 함께보는 영화에서는 '몬스터 대학교'를 추천했다.(가톨릭출판사/4000원) ▨야곱의 우물 '공의회를 사는 사람들'에서는 비폭력 평화운동 단체 '평화를 가꾸는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김태진(요한 사도)ㆍ배윤경(아녜스) 부부 이야기를 실었다. '구약성경에 남긴 신들의 흔적'에서는 '빛'을 주제로 다뤘고, 이슬람 이야기에서는 '메카 순례'를 알아봤다. 초대교회의 삶과 영성에서는 '성령의 선물'에 관해 설명했다.(바오로딸/2800원) ▨참 소중한 당신 '걷고 기도하고 순례하고'를 특집 주제로 △특별한 도보 성지순례(김형균) △탈핵 희망 국토 도보 순례기(성원기) △2013 DMZ 평화의 길 도보 순례(권예진) △야훼이레(이혜현)를 소개했다. 20년 넘게 소공동체 운동에 헌신해온 소공동체 연구위원회 서정헌(야고보) 회장을 만나 소공동체 활성화 방안을 들었다.(사단법인 미션3000/3500원) 박수정 기자 cpbc2013.10.01
![[성경 속 궁금증] 64. 예수님이 비난하신 사두가이파는 어떤 사람들인가](//cpbc.co.kr/CMS/newspaper/2013/02/rc/44206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64. 예수님이 비난하신 사두가이파는 어떤 사람들인가모세오경 통해 하느님 계시 완성됐다고 믿어 인간 자유의지 강조하며 부활ㆍ천사ㆍ영 부정사두가이는 대사제 등 유다교 고위 성직을 독점한 집단이다. 그림은 '대사제 카야파 앞에 선 예수님'(조토 작, 14세기).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은 모두 야훼를 믿는 같은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다양한 정신적 흐름이 있었고, 여러 종교적 당파들도 있었다. 사두가이파는 유다인들의 종교나 사회, 정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중요한 집단 중 하나이다. 사두가이파는 제관 계급이 주축을 이뤘다. 사두가이는 다윗 시대 대사제 차독의 후예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희랍문화에 개방적이었고 헤롯 왕조와 로마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사두가이파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사두가이는 유다교 대사제와 고위 성직 계층의 직책을 독점하는 자들로, 바리사이들과 달리 영혼의 불사불멸, 육체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이들은 하느님 심판도 없다고 주장했으며, 현세에서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전부였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사도 23,8). 유다인들은 삶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향한 굳은 신앙이 있었지만, 사두가이들은 율법에 부활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기에 부활을 믿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부활에 대해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하는 장면이 있다.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 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루카 20,29-33). 신명기에는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죽은 그 사람의 아내는 다른 집안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남편의 형제가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시숙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신명 25,5)고 기록돼 있었다. 사두가이들은 이 율법을 근거로 언쟁을 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명쾌하게 밝히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 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4-36.38). 사두가이들은 바리사이들이 받아들인 구전 전승을 인정하지 않고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을 통해 하느님 계시가 완전히 이뤄졌기에 새로운 계시는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 의지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바리사이파는 하느님에 의해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 의지를 동시에 믿었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은 여러 면에서 정반대 입장을 취했지만 예수에 대해 반대하는 일에서는 서로 합세하기도 했다. 율법을 극도로 보수적으로 해석한 사두가이들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 사회에서 자기들이 누리는 부와 지위를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의 표시로 여기고 현 체제 유지를 옹호했다. 그래서 사두가이들은 백성을 더욱더 율법의 노예로 만들고, 율법을 통해 기득권을 누리던 자기들 입장을 정당화했기에 예수님과는 정반대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cpbc2013.02.26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 프란치스코 <5>](//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5474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 프란치스코 <5> 온 가족이 새로 태어나다 “… 김익진 프란치스코에게 세례를 줍니다.”도쿄의 간다 거리에서 숙명적으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났다. 감성적인 측면에서 가톨릭에 큰 감동을 받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적 고뇌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이어 중림동약현성당 사제관에서 우연히 경제에 대한 가톨릭의 관점을 접했다. 이성적인 측면에서 가톨릭이 납득됐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념적 갈등이 해소되는 찰나였다. 거북 등처럼 갈라터진 땅에 단비가 내리는 듯했다. 나는 세례 받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가족들의 마음을 돌리는 게 급선무였다. 유교적 전통 속에서 살아오던 이들이었다.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완고했다. 동도서기를 주장할 만큼 열려 있던 분이었다. 하지만 진리는 어디까지나 우리 쪽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서양에서 받아들일 건 기술이나 기기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달랐다. 하나밖에 없는 친아들이 이복형의 길을 갈까 늘 두려워하던 차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였다. 사별한 순천 박씨가 큰형 우진, 둘째형 철진을 낳았다. 어머니는 내가 큰형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그 역시 나를 끔찍이 아끼는 걸 보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런 큰형이 현해탄에 투신한 뒤부터는 태도가 달라졌다. 끈 떨어진 연처럼 방황하는 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혹시라도 큰형의 뒤를 따를까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내가 마음잡은 걸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어머니에게 제안했다. “우리 모두 성당에 다니면 좋겠어요. 날 구해주신 천주님을 믿는 게 어떨지요?”“성당이 어떤 덴진 모르지만, 우리 익진이를 꼭 붙들어준 걸 보면 틀림없이 좋은 곳일 게야.”1936년 정월, 어머니 동복 오씨는 아녜스 성녀 축일에 산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우리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밝던 어머니의 표정이 심각했다. 어머니의 한숨소리가 깊었다. “저 장성 네거리에 골롬반 수도회라고 있대. 그 신부님들이 좀 근사한 성당을 짓고 싶은데, 땅이 없다지 뭐냐.” 장성은 일찍이 아버지가 군수를 지낸 곳이었다. 선조들의 재실도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내 앞으로 많은 땅을 물려준 곳이기도 했다. 수도회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으며 언젠가 들은 부자 청년과 낙타의 비유가 떠올랐다. 문득 재물은 소용할 데에 쓰라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이 문제였다. 며칠간 곰곰이 생각하다 마침내 묘안이 떠올랐다.“어머니, 장성 제봉산 아래에 있는 우리 과수원 아시죠?”“암, 알다마다.”“그 위에 성당을 지으면 어떨까요? 장성 읍내와 들판은 물론이고 황룡강까지 한눈에 다 보이잖아요. 그럼 많은 사람들이 성당 건물을 보며 궁금해서라도 찾아올 거 같은데요.”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러나 금세 시무룩해지며 입을 열었다.“그렇지만 과수원 위쪽은 우리 땅이 아니잖니?”“걱정 마세요. 장성 읍내에 있는 우리 땅을 내준다고 하면 그쪽 땅은 아주 쉽게 내놓을 거예요.”말대로 이루어졌다. 읍내의 금싸라기 땅과 제봉산의 황무지를 바꾸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국 골롬반 수도회에 성당 지을 땅, 만 삼천 평을 봉헌했다. 백여 걸음 떨어진 바로 아래의 과수원에는 아담한 초가집을 지었다. 거기에 어머니와 막내 누이동생인 신득이 살도록 했다. 언덕을 넘어가면 바로 성당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길을 닦고 소나무를 심었다. 두 모녀가 평생 그곳에서 살 만큼 아름답고 평온하게 꾸몄다. 나중에는 내게도 마음의 고향이 됐지만 …….아버지는 그 해에 선종했다. 비록 가톨릭에 입교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세례받는 걸 신기해 하며 흐뭇하게 바라보던 분이었다. 그 뒤 나와 가족들도 교리 교육을 받고 1937년 9월 26일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날 아내 이신영 모니카, 맏딸 우영 골롬바, 맏아들 효신 아오스딩(아우구스티노), 작은아들 충신 토마스가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됐다. 1925년에 시복된 한국 79위 순교 복자 축일이었다. “여러분은 천주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신앙을 청합니다!”“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패트릭 모나한 신부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여러분은 천주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죄를 끊어버립니까?”우리 식구들의 합창이 우렁찼다. “끊어 버립니다!”나 김익진은 그렇게 과거를 참회하며 구령(救靈)과 영생(永生)의 길에 들어섰다. 맨발의 성자 프란치스코로 다시 태어났다. 그간 내가 벌였던 일 중 가장 잘 한 일이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불교를 넘나들며 방황했던 젊은 날을 마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토록 기쁜 날이 언제 있었던가. 세례식 내내 여러 차례 안경을 벗고 뜨거운 눈물을 닦았다. 갓난아기처럼 다시 태어난 감격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적처럼 내게도 일어났던 것이다. 세례 후 우리 가족은 모두 장성으로 이사했다. 과수원에 있는 어머니의 집 바로 아래에 집을 지었다. 세 칸 한옥에 양철지붕을 얹었다. 마당에는 빨간 장미와 흰 백합을 심었다. 한 쪽 구석에는 닭장을 만들었고, 그 뒤 텃밭에는 채소를 심었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집이었다. 성당으로 가는 솔밭 길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와 다름없었다. 주일마다 온 가족이 그 길에 올라섰다.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손을 맞잡고 걸었다. 우리 부부는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걸었다.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며 흥겨워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길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렸다. 소풍가는 날이 따로 없었다. 방랑길에서 누리지 못했던 행복에 흠뻑 젖었다. 성경 구절이 실감났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그런 행복은 그림책에서 만난 성모 마리아의 모성미로부터 비롯됐다. 그때부터 나는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을 공경하고자 했다. 묵주기도는 내게 음악과도 같았다. 동정 마리아의 반주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 연주될 수 없었다. 묵주기도야말로 그리스도의 일생을 재현하는 뮤지컬이었다. 성모님의 반주가 있어 그리스도의 멜로디가 더욱 아름다웠다. 각 신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생각하면, 묵주기도는 인류 역사의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서로 엇갈리는 웅대한 교향곡이었다. 묵주만 손에 쥐고 있어도 힘이 났다. 세례식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동(지금의 서울 혜화동) 성당을 찾았다. 오기선 주임 신부에게 내 뜻을 전했다. “영세 본명을 프란치스코로 했으니 저도 그분의 길,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분이 향유하시는 행복을 지상에서부터 나누어 갖고 싶습니다.” 공교롭게도 내가 영세를 하던 날, 프란치스코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했다. 그에 발맞추어 오기선 신부와 이광재 신부가 프란치스코회 제3회에 입회했다. 나 역시 오 신부의 주선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해 착복식을 했다. 세례받은 지 두 달쯤 지난 11월 19일이었다. 평신도로서는 처음이었으니 감개무량하기 그지없었다. 흰 띠와 갈색 수도복이 그처럼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마치 프란치스코 성인이 된 느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청빈을 서약했다. 성인의 삶을 실천하고자 결심했다. 그러자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공에 솟구쳐 오르는 봉황처럼 자유로워졌다. 순간 환희의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주례하던 오기선 신부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바늘로 찔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나였다. 하지만 가톨릭을 알고 나서부터는 울보가 되고 말았다. 영락없는 눈물단지였다.“주님! 오늘이 제 생일 맞죠?” <계속> 백영민2014.12.17
![[새해 희망을 여는 사람] 한민족 선교 꿈꾸는 박광선씨](//cpbc.co.kr/CMS/newspaper/2014/01/rc/492364_1.1_titleImage_1.jpg)
[새해 희망을 여는 사람] 한민족 선교 꿈꾸는 박광선씨중국동포 나아가 북녘 사람들에게 주님 사랑과 생명의 말씀 전하고파 2008년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들어온 중국동포(조선족) 박광선(마르코, 43, 사진)씨는 오늘도 일터인 순대공장으로 향한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냄새나는 돼지머리를 나르고, 직접 순대를 만들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 결코 힘들다고 여기지 않는다. 대신 "영원한 하느님 말씀과 사랑을 깨닫고 살아간다면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되뇐다. 새해를 앞두고 지난 12월 명동에서 만난 박씨는 시종 특유의 친근한 웃음을 연발했다. "어제도 내내 순대공장에서 순대를 만들었다"고 하면서도 힘든 기색이 없다. 힘든 타지생활 중에도 그는 시간을 쪼개 꾸준히 어르신 목욕봉사에도 나가고, 새터민 모임에 참석해 한국생활에 대한 조언도 해주고 있다. "20여 년 전 우연히 제가 살던 중국 연변 화룡시의 한 성당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한족과 조선족들이 어우러져 사는 그곳에 미국인 신부님과 한국인 수녀님, 신자들은 식사도 거르며 어려운 이웃을 찾아 봉사했어요. 그 모습을 보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3년간 교리를 독학해서 연길성당에서 주님 자녀가 됐어요." 이후 그는 2008년 한국에 왔지만 누구나 그렇듯 타지에서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액세서리 공장, 김치공장, 전자기기 회사 등을 전전했다. 누구 하나 관심 가져주지 않는 사회에서 기댈 곳은 오직 신앙뿐이었다. "거처를 마련할 때에도 근처에 성당이 있는지 먼저 살폈어요. 한국에 돈을 벌러 오긴 했지만, 영원한 하느님 말씀과 사랑에 비하면 돈은 잠깐이죠. 신앙 안에 살려 애쓰다 보니 여러 수녀님들께서 도움도 많이 주셨습니다. 저처럼 어려움을 겪는 중국동포들을 위한 신앙모임이 교회에도 활성화돼야 합니다." 수소문한 끝에 그가 찾은 곳은 인천교구 이주ㆍ해양사목부(담당 정윤섭 신부) 소속 중국동포 신자 모임인 '에파타공동체'. 그는 선교사 김숙자(카리타스)씨가 봉사하고 있는 에파타공동체에서 중국동포 50여 명과 열심히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을 해오다 2년 전부터 공동체 회장직을 맡고 있다. 이들은 매월 둘째 주일에 모여 역곡2동성당에서 미사를 함께 드리고, 성경공부와 성지순례도 하며 마음의 위로를 얻고 있다. "신앙을 갈망하는 중국동포들이 전국 각지에서 우리 공동체를 찾습니다. 그중에는 불법체류자도 있고, 노동ㆍ가정문제를 겪는 이들도 많습니다. 또 코흘리개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가족들도 있습니다. 이곳은 '사랑과 희망의 공동체'이자 '중국동포 선교 네트워크' 입니다. 하느님과 소통하며 각자 믿음과 위로를 키우는 공동체에 교회 관심이 절실합니다." 그는 '하느님 사랑', '선교'란 단어를 여러 차례 되뇌었다. 얼른 자신이 받은 하느님 사랑을 한 민족인 중국동포와 북한 사람들에게 빨리 전하고 싶다고 했다. "더 많은 중국동포들이 천주교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길 소망합니다. 교회가 우리에게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는 중국동포들을 통한 그물망 선교가 되겠죠. 또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은 자연스럽게 중국 선교사가 됩니다. 중국에서 만났던 북한 사람들 중에는 성경과 십자가를 숨기느라 마당에 묻어가면서까지 주님을 믿는 이들도 상당수였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일으키고 훗날 중국ㆍ북한 동포, 우리 모든 민족에게 따뜻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역군으로 살고 싶습니다." 문의 : 032-662-4017, 에파타공동체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cpbc2014.01.14
![[이땅에 평화] 교회는 왜 현실 문제에 소리를 내는가](//cpbc.co.kr/CMS/newspaper/2014/09/rc/528043_1.4_titleImage_1.jpg)
[이땅에 평화] 교회는 왜 현실 문제에 소리를 내는가 세상에 있는 교회, 세상 문제에 무관심해서는 안돼 그리스도인이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지난 6월 전국 각 교구 주교들이 새만금 현장을 방문해 현지 주민과 환경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며 공동선과 사회정의 실천에 노력하는 이유는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방한 귀국길에서 “인간의 고통 앞에 서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며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교회가 야전병원이 되어 세상 사람과의 참다운 형제애를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형제애와 정의의 복음적 삶을 살아가려는 열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실천할 때 많은 사목자들이 인용하는 성경 말씀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그를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0-37). 교회의 현실 참여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 가톨릭교회는 세상과 아무 상관 없이 하느님 나라만을 추구하는 피안의 종교가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인간 구원사의 무대인 세상에 뿌리를 둔 종교이다. 이 세상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보존되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육화의 강생 신비가 바로 교회가 세상을 등한시 할 수 없는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세상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의 지체인 교회는 온 인류 사회를 그리스도의 빛으로 밝게 비추고, 정의의 규범에 부합해 세상에 평화가 퍼져나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포한다(「교회헌장」 36항 참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이들인 모든 그리스도인은 행동으로써 진리를 증언하고,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에 동참해 악을 거슬러 싸워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신자들 사이에서 “교회가 왜 사회 문제에 관여하느냐!”며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신앙’ 때문에 교회는 인간 삶의 기반인 사회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이다. 교회가 신앙을 부정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으므로, 교회의 사회 문제 참여는 당연한 일이자 의무라는 뜻이다.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박동호 신부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그분 아들 예수를 보내 교회를 세우셨다”며 “하느님의 교회가 세상에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도 내외신 언론 인터뷰에서 “역대 교황의 일관된 가르침 역시 사회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어떠한 정치ㆍ사회적 활동도 망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며 “정치ㆍ사회 문제에 대해 침묵하면 안 된다”고 밝힌 바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 기준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역설했다. 또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며 현실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교회는 “단지 영적 차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과 역사의 구체적 상황 안에 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고 하느님 계획에 협력하도록 부름 받는다”(간추린 사회교리 60항). 교회가 현실 문제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회는 현실 문제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고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이것이 사회교리다. 사회교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데 반드시 따라야 할 성찰 원리와 판단 기준, 행동 지침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행동을 사회교리 가르침에 일치시켜야 한다. 쉽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이다. 사회교리의 기본 원리는 인간 존엄성의 원리ㆍ공동선의 원리ㆍ보조성의 원리ㆍ연대성의 원리ㆍ재화의 보편적 가치 등이다. 이 원리들을 바탕으로 사회교리는 사회의 기본 세포인 가정과 인간 노동의 문제를 비롯해 경지 경제 문화 국제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에 전반에서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지침들을 제시한다. 이 모든 것의 바탕은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이다 . 교황청에서는 사회교리 전반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간추린 사회교리」를 이미 10년 전에 펴냈고, 우리말 번역본도 2006년에 나와 있다. 하지만 신자들의 삶에서 사회교리는 여전히 낯설다.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를 중심으로 사회교리 학교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신자들의 적극적 참여와 관심이 여전히 아쉽기만하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cpbc2014.09.04
![[호외] 교황, 세월호 추모 노란 리본 달고 미사 집전](//cpbc.co.kr/CMS/newspaper/2014/08/rc/524605_1.0_titleImage_1.jpg)
[호외] 교황, 세월호 추모 노란 리본 달고 미사 집전대전월드컵경기장서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 KTX 타고 이동 8월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가 봉헌됐다.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는 방한 이후 대중과 함께 처음으로 드리는 미사다.새벽 4시부터 입장이 시작된 신자들은 경기장 부근 교통 통제로 단체 버스와 지하철을 주로 이용했다. 특히 지하철은 대전도시철도의 협조로 기존 운행 시작 시각을 한 시간 반 당긴 새벽 4시에 첫차가 출발했고, 평일 218회이던 열차 운행 횟수도 302회로 늘려 운행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헬기 대신 KTX로 서울에서 대전까지 이동, 오전 9시30분 대전역에 도착, 포프모빌 쏘울을 타고 대전월드컵경기장으로 이동. 대전월드컵경기장에는 10시 20분경 도착하자 꽃다발 증정과 함께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와 권선택 대전시장 등이 교황을 영접했다. 대전월드컵경기장에는 전광판을 통해 이 장면이 실시간 중계됐다. 이어 싼타페 무개차에 탑승해 경기장으로 들어온 교황은 성모초등학교 학생들의 열렬한 환영에 잠시 무개차를 내려 한 어린이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줬다. 그리고 신자들과 악수를 하고 축복을 하느라 경기장 입구로 들어서는 데만 10분이 걸렸다. 10시19분 “비바 파파”를 연호하는 5만여명에 이르는 신자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경기장에 입장. 29분까지 경기장 트랙을 한 바퀴 돌며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 중 김준현(토마스모어, 81년생, 대전 탄방동본당 신자), 이상은(아가타, 82년생)씨 부부 아들 김경환(2012년생)군 머리에 손을 얹고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기도 했다. 또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와 함께 무개차에서 내려 환호하는 신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3-4분가량 신자들과 대면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이어 제의실로 들어간 교황은 이번에 세월호 사태로 사랑하는 딸 김빛나라(안산고 2학년3반)양을 잃은 아버지 김병권 세월호가족대책위원회 위원장과 유족들, 생존 학생 2명 등 총 10명을 만나 9시30분부터 10여분간 비공개 만남을 갖기도 했다. 김병권 위원장은 미사 직후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처음엔 교황님을 만난다는 사실에 너무 떨려 많은 말씀을 못드렸는데 지금이라도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올리고 싶다”며 “꼭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돼 4월 16일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른 제대로된 대한민국이 되기를 바란다고 교황님께 간곡히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10시 48분 입당성가 ‘서로 사랑하십시오’(김현주 시몬 곡)를 시작으로 성모승천대축일 장엄미사가 막을 올렸다. 교황이나 주교가 사목방문을 할때는 현지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여서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ayd)가 열리는 대전교구를 방문하면서 대전교구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게 된 것. 미사가 시작되자 교구 사제단과 한국, 아시아 주교단, 교황이 중앙 통로를 통해 행렬하며 입당했다. 제대에 다다른 교황은 제대 주위에 분향하며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과 기도가 향이 타오르듯 하늘에 올라가기를 기원했다. 제대는 성모승천 미사와 남북 화합을 바라는 의미에서 색동 이미지를 담았고, 순교자의 정신과 교황님의 소박함, 화려하지 않는 단아함을 담았다. 미사 제대의 흰색은 일어나 비추어라를 상징하는 빛의 의미이며, 한국교회와 신자들이 빛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흰색을 선택했다. 지붕 아래 선은 날아갈 듯 멈춘 선으로 표현했고, 푸른색은 성모님을, 색동은 분단된 남북의 화합을, 옹기와 거적 덮개는 순교자의 정신을, 환영 플래카드는 빨강과 파랑, 노랑, 초록을 사용했다. 미사 제단 디자인은 색동화가 이규환씨가 디자인했다. 이어 교황과 공동집전자들은 제대 앞에 서서 성호경을 긋고 죄를 반성하는 고백기도와 자비송, 대영광송을 바친 뒤 교황이 미사 주제를 드러내는 본기도를 바쳤다 성경을 읽고 풀이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말씀 전례’에선 신약의 두 부분과 복음서를 읽었다. 신약성경은 제1독서로 신석범(라우렌시오, 58년생, 대사동본당)씨가 요한묵시록(묵시 12,1)을, 제2독서로 한양희(바울라, 57년생, 금산본당)씨가 사도 바오로 서간(1코린 15,24-25)을 읽었고, 이른바 ‘성모의 노래(마니피캇)’이라고 알려진 복음서는 루카복음 1장39절에서 56절까지 읽고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은혜에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다. 복음 낭독 뒤 교황은 이탈리아어로 한 강론을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 말씀에 따라 새롭게 회개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론 뒤 신자들은 사도신경을 바치며 신앙고백을 하고 보편지향기도를 바쳤다. 기도 지향는 가톨릭교회와 세계평화, 정치인들,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민족화해와 일치 등 다섯 가지였으며, 시각장애인과 필리핀 이주노동자 출신으로 다문화가정 가장, 어린이, 남녀 신자 각 1명씩 5명이 바쳤다. 첫 번째 보편지향기도를 바친 신자대표 박원규(토마스 아퀴나스, 58년생)씨, 세계평화는 성모초등학교 학생 노하성(글로리아, 2003년생)양, 우리나라를 위해서는 시각장애인은 문성준(프란치스코, 68년생)씨,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서는 이주노동자 출신으로 한국 여성과 결혼해 다문화가정을 이룬 라자르도 에밀리아노 JR 라노스(41세)씨, 우리나라의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는 여성대표 김정중(에디타, 1955년생)씨가 각각 기도를 바쳤다. 노하성 어린이는 “처음 교황님을 뵙게 되는데 보편지향기도를 바치게 돼 영광이고, 학교에서 하던 것보다 더 열심히 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날 성가대는 대전교구 합창단 도나데이와 천안지구 합창단 아숨, 서산지구 합창단 유빌라떼 등이 연합성가대를 이뤄 250여 명이 지난 7월부터 준비해왔으며, 지휘는 강대원 신부가 맡았다. ‘성찬 전례’는 성체성사에 사용할 빵과 포도주를 바치는 예물봉헌으로 시작됐는데, 대전교구 매리지 엔카운터(Marriage Encounter, ME) 부부인 김재홍(미카엘, 60세), 이경애(미카엘라, 57세)씨 부부와 만삭의 딸 김진아(가브리엘라, 31),최석원(가브리엘, 32)씨 부부가 예물봉헌자로 선정돼 빵과 포도주를 각각 봉헌했다. 대전교구 측은 이와 관련 “가정과 생명 사랑에서 모범이 되는 가족을 봉헌자로 선정했다”며 “이들 부부는 오래전부터 부부일치운동과 선택 프로그램을 통해 성화에 힘써왔고, 장기기증도 했다”고 밝혔다. 봉헌예식 직후에는 감사기도를 바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에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을 기념했다. 이어 교황은 성체성사를 통해 한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고, 신자들이 하느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의 전구를 청했다.또 주님의 기도와 평화 인사, 영성체를 마치고 교황은 신자들이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리기를 기도했다.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미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복음의 기쁨 1항)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과 썩지 않을 소금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며 “오늘 교황님을 위해 영적 선물을 준비했는데, 전 교구 공동체가 묵주 기도를 150만 단 이상, 미사를 200만 번 이상, 교황님을 위한 기도를 330만 회 이상 바쳤고 앞으로도 교황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겠다”고 다짐했다. 대전교구는 햇빛 가리개 모자와 물, 구급차, 의료장비와 인력 등에 소홀함이 없도록 꼼꼼히 준비했다. 경기장 외부에서 미사 봉헌하는 이들에게도 모든 미사 과정에 불편함이 없도록 의자와 대형 스크린 설치를 준비했다. 특히 평신도들의 활약이 눈에 띄었는데 일반 봉사자 450명, 운전기사사도회 115명, 성체분배에도 155명이 참여해 손님을 맞았다. 이날 미사 참석자들은 새벽 4시부터 입장을 시작했으며 6시부터 경기장 내 LED 전광판에는 평화방송이 제작한 교황방한 특집 다큐멘터리 ‘일어나 비추어라’가 상영됐다. ‘일어나 비추어라’는 2부작으로 1부 ‘그들이 꿈꾼 세상’(50’), 2부 ‘새로운 도전’(50‘)으로 구성됐으며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교회의 역사(유일하게 자생적으로 가톨릭을 받아들임)를 알리기 위해 제작됐다. 이후 참석자들은 영광의 신비 묵주기도 5단을 바쳤다. 기도 지향은 1단 교회를 위하여, 2단 세계 평화를 위하여, 3단 청년들을 위하여, 4단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5단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봉헌됐다. # 입장 전 공연 : 8시40분부터 시작된 공연에서 대전 가톨릭 소년소녀 합창단은 ‘가우데아무스(Gaudeamus)’, ‘다함께 감사해’, ‘아리랑’을, 대전교구 도나데이 합창단은 ‘살베 레지나(Salve Regina ? Lambillotte)’와 Doug Holck의 글로리아, A.Vivaldi의 글로리아를 합창했다. 이어서 인순이(체칠리아)가 ‘친구여’, ‘우산’, ‘거위의 꿈’을 열창했다. 인순이는 “교황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노래하겠다”고 말했고, “이 자리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오신 걸로 알고 있으며 그분들을 위해 서로 힘이 되어주자”고 말했다. 다음으로 소프라노 조수미(소화 테레사)의 ‘La Fantasia’, ‘Nella Fantasia’, ‘Ave Maria(Gounod)’가 불려졌다. 노래에 앞선 짧은 인터뷰에서 조수미는 “이 자리에 함께 하기 위해 이틀 전에 한국에 돌아왔다”며 “많은 무대를 서봤지만 교황님 앞에서 노래한다고 생각하니 3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떨리는 마음을 고백했다. 또 “여러분도 함깨 해 달라”면서 “가장 존경하는 분 앞에서 노래하는 꿈을 이루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입장 전 공연의 마지막은 대전 가톨릭 소년소녀 합창단과 대전교구 도나데이 합창단의 브릿지 공연으로 막을 내렸다. # 교황에 영적선물 전달 : 환영사에 이어 유흥식 주교가 영적 선물을 전달했다. 영적 선물은 30만 대전교구 신자들의 마음을 모아 바친 묵주기도 1500만단, 교황의 지향을 위한 미사 200만 번, 교황을 위한 기도 328만9179회다. 영적 선물은 상자 모양의 백자 안에 청자로 된 기록물이 담겨 있는 형태로 경기도 이천 광주요에서 제작했다. 함께 전달된 채화칠기함은 자개가 가미돼 있으며 한글로 새겨진 기도문과 아르헨티나의 성모님, 성 김대건 신부 등이 새겨져 있다. 두 선물 모두 한국의 전통미가 살아있는 선물들로 교황은 선물을 받고 유흥식 주교와 포옹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cpbc2014.08.15
![[사도직 현장에서] 군종 사제의 미사](//cpbc.co.kr/CMS/newspaper/2014/04/rc/503400_1.0_titleImage_1.jpg)
[사도직 현장에서] 군종 사제의 미사김창중 신부(군종교구 성레오본당 주임) 군인들은 미사 때 바로 성당으로 들어가질 않습니다. 담배를 피우거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들어가자!"고 호통을 쳐야 움직입니다. 성당은 엎드려 자는 병사들, 이야기하는 이들로 어수선합니다. 저는 제대 앞에 인사하고서 이야기합니다. "다 같이 왼손을 들어 심장에 대고 느껴보세요. 오늘 어떤 마음과 생각,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왔는지."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다시 병사들을 향해 말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는 하느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모르면 안 되겠죠." 침묵 가운데 다소 엄숙한 분위기로 바뀝니다. "이제 오른손을 들어 저를 따라 하세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러나 말씀전례 시간이 되면 어수선해집니다. 다시 외칩니다. "오른손을 들고 엄지를 치켜세우세요. 머리, 입술, 가슴에 십자가를 새기는 겁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선포하고, 가슴에 새긴다는 의미로, 알겠죠!" 복음을 선포하고 강론을 시작합니다. 그날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 꼭 기억해야 할 성경 구절을 반복해서 복창하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한 번 두 번, 소리가 작거나 반응이 없으면 세 번. 그렇게 이 말씀만이라도 기억하고 가라고 강조합니다. 성찬 전례 때가 되면 다시 어수선해집니다. 거룩한 성찬례!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 살과 피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감사기도를 시작하면 "이제 고개를 들고 여기를 바라보세요. 미사 중 가장 거룩한 순간입니다"라고 외칩니다. 시선을 쭉 한번 살피면서 저 역시 '그래 거룩한 몸과 마음으로 임해야지' 하고 결심합니다. 성체분배 때가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참례자의 20% 이하만 성체를 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아닌 이들을 파악하고, 세례 받아 신자가 돼 영성체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미사의 은총을 받고 힘차게 파견하는 순간, "자 상체를 세우고, 손은 모아 가슴높이까지 들고, 고개는 겸손하게 약간 숙이세요"라고 말하고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하고 축복합니다. "주님 오늘도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힘이 드네요. 주님, 그러나 군인들이 점점 당신 은총과 사랑을 이 미사를 통해 체험하고 있음을 믿나이다. 아멘!" 제의를 벗고 저는 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주러 갑니다. 군종신부로 살아가면서 미사는 저의 첫 자리입니다. 미사를 통해 변화돼 가는 이들이 저의 선물입니다. cpbc2014.04.01
가족 사랑 체험 소중한 시간생활성서사 '신난다 가족 피정' 큰 호응생활성서사의 '신난다 가족 피정'에 참가한 영통영덕본당 부모와 자녀들이 머리를 맞대며 성경 구절을 찾고 있다.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가 운영하는 출판사 생활성서사가 마련한 '신난다 가족 피정'이 신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올해 초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원래 첫영성체를 앞둔 자녀와 그 부모를 위한 피정이었지만, 피정이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게 해준다는 참가자들 입소문이 퍼지면서 점차 주일학교 학생을 둔 모든 가정을 위한 피정으로 확대됐다. 그동안 의정부교구 대화동ㆍ원당본당, 인천교구 청라본당, 수원교구 인계동본당 등에서 가족 피정이 열렸다. 신난다 가족 피정은 성경구절 암송, 가족 장점 자랑하기, 성경 가훈 정하기, 레크리에이션, 화해와 축복의 시간 등을 통해 자녀와 부모가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서로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도록 이끄는 한나절 프로그램으로 짜여 있다. 가족이 함께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서로 대화하며 사랑이 넘치는 성가정을 이루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수원교구 영통영덕본당에서 열린 피정에 참가한 가족들은 "가족 간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고, 하느님 말씀 안에서 마음껏 즐거워했던 선물같은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 "평소 말하지 않아 쌓였던 오해를 풀 수 있었고, 서로 꼭 안아주고 축복해주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고도 했다. 생활성서사는 피정을 요청하는 본당에 직접 찾아가 가족 피정을 진행하고 있다. 문의 : 02-945-3300, 생활성서사 교육부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cpbc2013.08.20

천에 새긴 주님 사랑, 신자 마음 감싸안았다수원교구 왕곡성당 제대에 섬유 십자가 설치, 따뜻한 느낌에 공동체 호응 높아국내 첫 제대 십자가 태피스트리로 수원교구 왕곡본당 제대에 내걸린 김효린 작가의 태피스트리 작품. 오세택 기자국내에 첫 제대 십자가 태피스트리(Tapestry, 섬유예술)가 등장했다. 수원교구 왕곡성당(주임 최재철 신부) 제대에 최근 설치된 ‘십자가 태피스트리’로, 조각 십자고상 일색인 한국 천주교회에 제대 그림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전망이다. 국내 유일의 제대 십자가 태피스트리가 등장한 데는 전국 성당에 똑같이 내걸린 십자고상을 배제한 왕곡본당 공동체의 선택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를 위해 본당 공동체는 지난 8개월간 태피스트리 작품을 기다렸고, 마침내 성주간에 김효린(사비나) 작가의 태피스트리 작품이 제대에 내걸렸다. 작품 크기만 해도 밑바탕을 이루는 1단 작품이 500×800㎝, 위에 겹쳐진 2단 작품이 300×600㎝나 된다. 성전의 웅장함과 함께 씨실과 날실로 엮어 한 폭 회화 같은 느낌을 주는 섬유예술인 태피스트리만의 독특한 미학을 보여준다. 원래 기원전 5~6세기께 콥틱 직물 예술로 출발한 태피스트리는 이집트 콥트 정교회 신자들이 성경 내용을 다채로운 선염색사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작품을 선보이면서 교회 미술의 전면부에 등장, 유럽으로 번져나가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이나 프랑스를 중심으로 성행했다. 왕곡성당의 태피스트리는 우주의 절대 고독을 상징하는 별 무리를 배경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아름답게 형상화했다. 신비롭고 그윽한 보랏빛 색채가 제대 벽과 잘 조화를 이룬다. 벽에 내걸리는 작품이어서 방음이나 습도 조절, 방화, 소리 흡수(흡음) 등에 중점을 뒀다. 특히 내구성이 강한 양모 실로 짠 태피스트리는 양모 특유의 따뜻한 느낌 덕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더 깊이 와 닿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공기 차단 기능과 장식성을 겸비했을 뿐 아니라 콘크리트로 이뤄진 공간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요즘도 태피스트리는 바티칸미술관의 주요 분야(Section) 가운데 하나여서 왕곡성당 제대 태피스트리는 특별한 작품으로 한국교회의 기억에 남을 것으로 기대된다. 2012년 같은 본당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제작 봉헌했던 김효린 작가는 “10년 이상 양모 실로 짠 태피스트리 제작 경험을 살렸는데, 기도 중에 우주공간에서 외롭게 우리를 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제작했다”면서 “한 올 한 올 정성을 들여 제작한 작품 속에서 작가의 기도와 신자들의 기도가 한데 어우러지고 응답받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황우회(베드로, 57) 총회장은 “주임 신부님이나 우리 공동체나 획일화된 십자고상보다는 다양성, 즉 태피스트리의 방음 또는 흡음이라는 음향적 효과와 시각적 부드러움, 상상력을 도출해내는 재질감 등 감성적 효과를 이끌어내고자 했다”면서 “설치한 지 며칠 안 됐는데도 신자들의 반응이 좋고 벌써 사회적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고 말했다.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백영민2014.05.07
![[복음이야기]<7>팔레스티나 지리적 배경](//cpbc.co.kr/CMS/newspaper/2014/02/rc/498123_1.1_titleImage_1.jpg)
[복음이야기]팔레스티나 지리적 배경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느님의 선물 팔레스티나는 지도상으로 아시아 서단 북위 31˚15´에서 33˚20´, 동경 34˚30´에서 36˚사이에 위치하고, 북쪽 시리아 산맥에서 남쪽 네겝초원, 동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서쪽 지중해 연안까지 장방형을 이룬 지역을 말한다. 면적은 요르단 건너편 초원지대를 포함해 2만 5000㎢, '(북쪽)단에서 (남쪽) 브에르 세바까지' 길이가 235㎞, 동쪽 요르단 고르에서 서쪽 지중해 연안까지 폭이 40㎞이다. '팔레스티나'는 '필리스티아'에서 유래한 말로, 이스라엘 민족은 판관 삼손 시대와 사울과 다윗 왕 시대에 이 민족과 치열한 전쟁을 해 승리했다. 유다인들은 정복한 적의 이름을 보존하기 위해 필리스티아인이 살던 일부 지방을 가리켜 히브리말로 '펠레쉐트'라 했고, 이 말을 그리스 사람이 이 나라 전체에 적용해 '팔레스티네'라 불렀다. 헬라어 본문을 번역한 라틴어 역본 「불가타 성경」은 '팔레스티니'라고 표기했다. 이 말이 그리스 로마 세계에 퍼져 오늘날까지 이 지역을 '팔레스티나'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유다인은 이 지역을 종교적 역사적 표현을 사용해 '가나안 땅''이스라엘 땅'(1사무 13,19) '거룩한 땅'(즈카 2,16) '약속받은 땅'(히브 11,9)이라 불렀고, 탈무드에선 '빼어난 땅' '하느님의 땅'이라 했다.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신명 26,9)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젖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는 기본적 양식을, 꿀은 귀한 양식으로 하느님의 충만한 축복을 상징한다. 기원전 1900년께 기록된 이집트 우화 「시누헤 이야기」에는 가나안 땅에 대해 "그곳에는 무화과와 포도가 있었다. 그곳에는 물보다 포도주가 더 많았다. 꿀도 풍부했고 올리브도 가득했다. 온갖 종류의 과일이 나무에서 열렸다. 그곳에는 보리와 밀이 있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온갖 가축이 있었다"고 부러워하고 있다. 이스라엘 지형은 크게 일곱 지대로 나뉜다. '해안 평야'는 모래 언덕과 숲, 늪지대가 대부분인 쓸모없는 땅이다. 하지만 지중해 동쪽 연안 욥바에서 카르멜 산에 이르는 '사론'은 이스라엘의 가장 비옥한 땅에 속한다. 해안 평야와 중부 산악지대 사이 완충지인 '세펠라'는 넓이 19~24㎞의 평원으로 대표적 지역이 엘라 골짜기(1사무 17,2)이다. '중부 산악지대'는 이스라엘 영토 심장부로 예루살렘과 헤브론 같은 성읍이 자리하고 있다. '므기또 평원'은 중부 산악지대와 갈릴래아 언덕 사이의 동서 평원을 이루고 있다. 이 평원은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남북을 잇는 무역 도로가 통과했기에 수많은 전쟁이 벌어진 전략 지역이었다. 요한 묵시록은 인류 최후의 전쟁인 '하르마게돈'(16,16)이 이곳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갈릴래아'는 레바논 산들과 이어지는 산악지대로 비옥한 언덕들과 갈릴래아 호수가 있다. '요르단 골짜기'는 북쪽 갈릴래아 호수에서 남쪽 사해까지 이어지는 골짜기로 요르단 강이 흐르고 있다. 특히 해수면보다 400m 낮은 사해는 지구 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마지막으로 요르단 골짜기 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요르단 건너편'은 갈릴래아 동쪽(해발 580m)에서 사해 남동쪽(해발 2000m)까지의 오르막으로 강수량이 많아 훌륭한 목초지가 펼쳐져 있다. 거주지역에 따라선 유다ㆍ사마리아ㆍ갈릴래아 지방과 해외 이산민으로 구분한다. 유다 지방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가난한 산지로서 이 지방 사람들은 신앙을 엄수했다. 북쪽 갈릴래아와 남쪽 유다 사이 위치한 사마리아 지방 사람들은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점령당한 후 타민족의 이주로 말미암아 혼혈민이 됐으나 모세 5경의 가르침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다인이 바빌론에서 돌아온 후 사마리아인과 유다인은 대립하게 됐다. 갈릴래아 지방은 전반적으로 아브라함과 모세로부터의 조상 대대의 신앙을 충실히 지켜 왔으나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서 신앙 행사는 매주의 안식일 집회가 중심이었다. 국제 교역로가 있어 외국인의 교류가 잦아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방인의 갈릴래아'라고 불렀다. 해외 이산 유다인은 '디아스포라'라고 해 특히 지중해 주요 항구도시에 많이 거주했다. 특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많은 유다인들이 살았다. 디아스포라 이산 유다인들은 각 거주 지역에서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을 충실히 지키며 히브리말 성서 외에 헬라어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했다. 이런 이유로 복음이 전파되자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쉽게 받아들였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4.02.25

신약의 비유자라나는 씨앗의 비유(하)다양한 비유로 전하는 하느님 나라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이 뻗는다. 겨자씨와 10원짜리 새 동전을 비교 촬영한 사진. ‘겨자씨의 비유’는 앞선 비유에 이어 세 번에 걸친 도입 구문으로 시작한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이 뻗는다.” 마르코 복음은 풀로 표현하지만,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는 나무라고 표현한다.일상 삶으로 전하는 복음원래 겨자씨는 풀의 형태로 자라는데 어떤 경우에는 2m 정도의 크기까지 자란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오와 루카 복음은 강조를 위해 나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에제 17,23) 이스라엘의 유배시기 이전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에제키엘 예언자의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이루게 될 국가에 대한 이상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표현되는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는 표현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선포와 연결되어 있고, 마태오와 루카 복음이 나무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누룩의 비유’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만이 전한다. “또 다른 비유”라는 도입문을 통해 앞서 이야기된 겨자씨의 비유와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 나라를 표현한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 그리고 그 누룩을 통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여인과 가정의 이미지 안에서 말해지는 누룩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가 얼마나 일상생활에서 쉽게 불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삼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신앙을 돌아봐야이 두 비유는 모두 작은 것과 큰 것,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것을 통해 큰 결과를 얻는다는 것을 대조적으로 나타낸다. 가장 작은 겨자씨는 어떤 풀보다 크게 자라고, 얼마 되지 않는 누룩은 밀을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한다. 하느님 나라는 가장 작은 씨앗과 얼마 되지 않는 누룩과 비교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지만, 그 성과는 시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비유를 통해 강조하신다. 이것은 다른 한 편으로 제자들과 군중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지금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작고 보잘것없을지 모르지만 생각지도 못한 결과와 성과를 내게 되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그리고 누룩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지만, 겨자풀을 보며 작은 겨자씨를 생각하지 않고, 빵을 먹으면서 그것을 부풀게 한 누룩을 생각하지 않듯이 우리는 잘 이해하거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삶 안에 녹아들어 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와 다가올 완성,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의 시간, 곧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는 그 가능성의 시간을 살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언제, 어떻게 그 완성이, 곧 세상의 종말이 오게 될지를 묻기보다, 지금 나에게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나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며 살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매주 금요일 오전 9시, 월요일 오후 8시, 수요일 오후 4시에 평화방송 TV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백영민2014.06.25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 결정...<25>황일광 시몬
천민 서러움 털고 양반들과도 어울리며 주님 찬미하다 순교 황일광 시몬. 하느님의 종 124위 순교자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은 황일광(시몬, 1757∼1802)이다. 약전엔 ‘천한 신분’ 출신이라고만 기록돼 있지만, 실은 백정이었다.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천민이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당신 이름을 증거할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했고, 그는 ‘살아서는 지상 천국’을, ‘죽어서는 내세 천국’을 살아갔다. 부질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때로는 124위 시복 건의 제목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서 ‘황일광 시몬과 동료 순교자 123위’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순교 사화는 감동적이다. 충청도 홍주(현 홍성) 출신의 황일광이 살아갔던 시대는 18세기 후반이었다. 백정이란 게 본시 가축 도살과 육류 판매, 유기(柳器, 고리) 제조 등에 종사하던 계층이었다. 그런 만큼 제대로 대접을 받고 살았을 리 없다. 그의 어린 시절은 특히 불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아이까지도 반말에 무시하기 일쑤였고, 그런 대접을 당연한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땀과 노고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였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은 그에게 놀라운 지능과 열렬한 마음, 명랑하고 솔직한 성품을 주셨다.1792년, 홍주를 떠나 홍산으로 이주하던 무렵 그는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우연하게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렸지만, 그를 찾아가 교리를 배운 그는 신앙을 접하자마자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고 나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했다. 교우들은 물론 그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애덕으로 감쌌고, 이러한 교우들의 사랑 실천은 양반가에서도 똑같이 이뤄졌다. 그가 얼마나 감격스러웠을지는 미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당시 그의 발언이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통해 지금까지도 전해온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이같은 백정은 얼마나 됐을까? 기록은 일제강점기 중 조선총독부 조사뿐이다. 일제강점기까지도 7538가구에 3만 3712명이 남아 있었다는 1920년대 초 통계가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700만 명쯤 됐으니, 0.19%에 해당한다. 이처럼 차별을 받던 백정들의 해방 운동은 1923년 ‘형평사’(衡平社) 운동이 전개되면서 사회의 수면 위로 떠올랐는데, 그 운동이 시작되기 130년 전에 이미 황일광을 통해 백정의 해방 운동이 사실상 이뤄졌던 셈이다. 경상도에서 자유롭게 살던 그는 1800년 2월 경기도 광주에 살던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 회장의 이웃집으로 이주한다. 이때 만난 인물들이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 김한빈 (베드로, 1764∼1801) 등이다. 당시에 그의 열심은 양반, 중인, 평민을 막론하고 모든 교우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러다가 정약종이 한양으로 이주하면서 함께 상경한 그는 자신의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가 팔면서 생계를 꾸렸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또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기쁨도 누렸다.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형리들의 매질은 물론 모든 것을 기쁨으로 굳건하게 견뎌냈다. 이윽고 이듬해 1월 30일 고향 홍주로 이송돼 참수됐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통해 “우리 교우들이 이 사람(황일광)을 공경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교황 성하께서 그를 제대 위에 올려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진정한 종교예식을 드리게 허락하여 주신다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경 말씀이 순교자 황일광을 통해 이뤄졌다. “억눌린 이를 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거름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 그를 귀족들과 당신 백성의 귀족들과 한자리에 앉히시기 위함이라”(시편 113,7-8). 인간 존엄과 자유, 평등 가치를 담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지, 당시 사회 변혁에 얼마나 큰 동인으로 작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실제 사례, 그게 바로 황일광의 믿음과 순교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평화신문2014.08.06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 프란치스코 <6>](//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6739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 프란치스코 <6> 비우고 내려놓기 “오메! 참말로 땅을 그냥 준다고요?”아담한 장성성당 바로 곁에는 어울리지 않게 큰 종탑이 서 있었다. 하지만 속 빈 강정처럼 그 안에는 종이 없었다. 더욱이 한국 최초의 콘크리트 성전 안에는 하느님을 찬송할 풍금조차 없었다. 새 성전 짓기에도 빠듯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중국 상하이에 종을 주문하는 한편, 서울에 가서 풍금을 사왔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심금을 울리는 풍금 소리는 여운이 풍부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거룩함이 솟아올랐다. “그 양반 천주교 신자가 됐대. 알짜배기 땅까지 팔아서 성당 지으라고 줘버렸대.”내가 가톨릭에 입교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목포와 장흥 일대의 지식인들과 유지들의 일대 관심사가 됐다. 명실공히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인텔리 아니었던가. 일거수일투족이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는 건 당연했다. 성탄절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잘 알고 지내던 외인 교사들에게 말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일세. 최초의 미사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었지. 그러니까 말뜻 그대로 크리스마스를 경축하는 데는 가톨릭 교회뿐 아닌가? 이번 크리스마스 때 우리 성당에 와서 보게.”아뿔싸! 성탄 자정 미사에 술에 얼큰하게 취한 교사들이 정말 왔다. 그렇게 추운 날, 술 마시다 말고 미사에 올 생각을 했다니……. 때마침 나는 교우들이 많아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곤 반가워하며 큰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메리 크리스마스!”“이렇게 사람이 많아서야 어디 미사 구경이나 하겠나?”나는 급히 그들을 성당 옆으로 이끌었다. 옆문으로 들어가 그들을 제대 바로 앞에 앉게 했다. 우리 일행의 낌새를 챈 본당 신부의 얼굴에 환한 빛이 감돌았다. 나 역시 선교의 기쁨을 한껏 누렸다. 다음날 지청구를 사방에서 들었지만 말이다.“술주정뱅이들을 미사에 끌고 오다니…….” 목포 북교동성당. 하지만 나로 인해 장성 일대가 가톨릭에 관심을 가졌던 건 사실이었다. 장성으로 이사한 이듬해에 79명이, 그 다음 해에도 42명이 세례를 받았다. 장성성당의 교세가 쭉쭉 뻗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외조카딸 영길이가 헐떡이며 달려왔다. “아저씨! 큰일 났어요. 제 동생이 다 죽어가요.” 나는 일본인 의사를 데리고 단숨에 달려갔다. 이질이었다. 약을 지어 먹이자 한고비를 넘긴 듯했다. 그래도 다급한 상황이라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만에 하나 순탁이가 죽게 되면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자.”외사촌인 오재복과 식구들이 모두 숙연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대세를 줬다. 다행히 외조카는 며칠 뒤 건강하게 일어났다. 그 일을 계기로 외사촌 식구가 모두 그해 성탄절에 세례를 받았다. 순탁이는 나중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누나인 영길이는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해 수녀가 됐다. 우리 집 뜰에서 뛰놀던 김종남 로마노가 사제가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한편 졸지에 남편을 잃은 큰형수도 나와 뜻을 같이했다. 26살에 청상과부가 돼 어린 남매를 키우던 그녀 역시 산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큰형의 빈자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웠던 것이다. 급기야 자신이 살던 좋은 집을 교회에 봉헌해 그 자리에 북교동성당이 들어섰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던 내 마음이 주위 사람들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고 그 무엇이었으랴! 나는 장성에 전통 차밭을 일구어 일본과 중국처럼 농업을 개량하고자 했다. 그리고 농업학교를 세워 기술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싶었다. 그 뒤 수도회를 초대해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 사업을 맡기고자 했다. 자그마한 하느님 나라를 일구고자 한 셈이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선 장성군 동화면 동호리 일대의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이만여 평의 야산과 농지를 사들였다. 토지를 정리하고, 차밭을 조성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대동아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일본은 더욱 악랄해져 갔다. 탄피를 만들기 위해 집집마다 놋그릇과 놋수저를 강탈해갔다. 장성 성당의 종마저 떼어가 버렸다. 내 꿈의 터전 역시 고스란히 날아가 버렸다.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논밭을 마구잡이로 징발했다.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땅을 빼앗긴 건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하지만 토지 징발 과정에서 총독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인들에 대한 분노는 참을 수 없었다. 일본에 대한 간사한 충성보다는 나에 대한 비열한 배신이 더 충격이었다. 그간의 내 호의와 자비를 그렇게 잔인하게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성에 터를 잡고 신심 깊은 교인으로 살고자 했던 지난 몇 년이 허망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경찰은 1945년 초에 나를 아무 이유 없이 장성경찰서에 가뒀다. 일본에 유학한 지식인임을 잘 알고 있던 그들이었다. 그런 내가 땅을 빼앗긴 울분 때문에 그들에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게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유학을 하고 온 나를 요시찰 인물로 주목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나의 홍군입대 경력을 그들에게 귀띔해 주었으리라는 짐작도 갔다.“대한독립 만세!”마침내 일본이 손을 들었다. 투옥된 지 6개월 만에 해방이 됐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은 잠시였다. 미군은 남쪽에, 소련군은 북쪽에 주둔하면서 분단이 시작됐다. 정치인과 정부 관리들이 나를 찾아와 미군정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미8군 정보처의 고문과 미군정의 자문을 맡아달라는 청이었다. 하긴 일본과 중국을 환히 알고, 일본어와 중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드물던 시절 아니었던가. 매일 미군 지프차가 집으로 와서 나를 데려갔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댔다.“금방 고관대작이 되겠네.”“몇 년 안에 이 장성 땅을 전부 사고 말 거야.” 부러움 반 시샘 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일은 오래 하지 않았다.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는 게 가슴 아팠다. 게다가 맨발의 성자를 따르고자 한 내게 재물과 지위는 걸맞지 않았다. 나는 미련 없이 손을 훌훌 털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찰서 감옥에서 한 결심을 실행에 옮길 때라 생각했다. 한때나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부르짖던 사람이 지주로 산다는 게 늘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1945년 말 총 농가 206만 5,477호 가운데 자립농가는 28만 6,824호로 13.9%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자작을 겸한 소작농이거나 순소작농이었다. 묵상 중에 내 땅을 모두 소작농민들에게 나눠주기로 작정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비우고 내려놓았던 것처럼…. 성경 말씀이 결정적이었다.‘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이들에게 모든 걸 내주고 싶었다. 장흥과 목포 일대의 소작농민들을 한 사람씩 불렀다. 1948년 정월 대보름 무렵이었다.“형제여, 날 용서하시오. 지주 행세하며 토지세 받던 어제의 내가 아니오. 당신이 소작하던 그 논밭은 이제 당신 겁니다.”일 년 뒤인 1949년 6월, 정부의 유상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었다. 나는 그 전에 무상으로 농지 개혁을 한 셈이었다. 소유권 양도 문서를 건네받은 농민들의 반응은 실로 다양했다. 의심의 눈초리로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기만 하던 이, 기쁨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엎드려 절하던 이, 하염없이 흐느끼며 감사의 말을 쉬지 않고 하던 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이 그럴까 싶었다. 나 역시 온전히 비움으로써 모든 짐을 내려놓았다. 내게도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아버지! 위민(爲民)과 청렴(淸廉)을 이제야 실천했습니다.” <계속> 백영민2014.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