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동본당 사순특강 기도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 허성석 신부(성 베네딕도회) 허성석 신부 평화신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며 회개와 영적 준비를 하는 사순 시기를 좀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본당에서 실시하는 사순 특강을 연재한다. 특강 순서는 △2일 ‘기도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9일 ‘나를 넘어 그 너머로’ (정규한 레오나르도 신부, 예수회) △16일 ‘기도, 한 송이 꽃이 되어’ (윤해영 바실리사 수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23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기도’ (김용은 제오르지아 수녀, 살레시오 수녀회) 이다.1. 기도의 정의- 하느님과 영혼의 대화기도는 전부이며 신앙과 신앙생활 전체를 요약한다. 기도(祈禱, oratio)의 어원은 라틴말 동사 ‘오라레’(orare. 말하다, 이야기하다, 청하다, 빌다)에서 나온 말로 ‘오라시오’ (oratio,기도) 라 하는데 ‘하느님과 영혼의 대화’라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는 동방 그리스 교부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AD 150~215)와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AD 345~399)는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정의했다. 이 정의가 담고 있는 내용은 상당히 풍부하다.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했을 때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자 동시에 인격적인 분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대화는 인격과 인격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하느님은 인격신이다. 대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참된 대화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말을 받고 주는 것’이다. 말을 받는다는 것은 들음, 곧 경청을 의미한다. 주는 것은 들은 말에 대한 ‘응답’이다. 이처럼 대화는 ‘들음’과 ‘응답’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에 올바른 응답을 못 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역시 들음과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들은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의 응답은 들은 바를 일상에서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2. 기도의 단계인간 안에 몸과 혼, 영의 세 요소가 있는 것처럼 기도에도 세 가지 주요 단계가 있다. 바로 염경, 정신, 관상 기도이다. 몸의 기도인 염경 기도는 입으로 하는 말이며, 머리로 하는 혼의 기도는 정신으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영의 기도인 관상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대화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관상)은 우리 머리(정신)로서가 아니라 전(全) 인간, 즉 마음으로부터이다. 따라서 우리는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올 필요가 있다. 정신에서 마음으로 내려와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내려가는데, 먼저 자연적인 마음(심장)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더 이상 육신의 마음이 아닌 ‘깊은 마음’, 즉 마음의 ‘내적 궁방’으로 내려간다. 여기 마음의 심연에서 우리는 세례의 순간부터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는 하느님의 영을 알게 된다. 3. 기도의 방법기도는 무엇보다도 짧고 단순하게 해야 한다(단순성). 아주 단순하게 기도하라. 세리와 탕자는 한마디 말로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었다.기도는 하느님과의 어떤 거래가 아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로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모님의 기도, 즉 ‘당신 뜻이 제게 이루어지소서!’는 가장 이상적인 기도이다. 예수님도 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하라 가르쳐주셨다. 기도는 우리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도구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비울 필요가 있다. 4. 기도의 자세기도할 때 주의해야 하는 몇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는 겸손이다. 겸손은 기도의 토대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추구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성경 속 세리의 자세이다. 참된 기도를 위해 필요한 또 다른 태도는 감사다. 참된 기도의 정점은 성찬례다. 전례 안에서 창조된 모든 존재가 한 목소리와 하나의 사제적 행위로 하느님께 우리를 위해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또 우리 기도가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끌기 위해서는 항상 통회의 정신으로 드려야 할 필요가 있다. 통회는 영적 환상에서 해방되기 위한 열쇠이다. 정리=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백영민2015.03.04
![[복음 이야기] (45)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다](//cpbc.co.kr/CMS/newspaper/2015/03/rc/557994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45)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다머리보다 가슴을 울린 복음 선포자 예수님께서는 아주 쉬운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쳐주셨다. 사진은 심순화 작, ‘진복팔단’.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아주 쉬운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다양한 비유와 비상한 설득력으로 제자들과 회중을 회심시키는 예수님의 모습이 복음서 곳곳에 등장한다. 오늘날에도 종종 볼 수 있지만, 고대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광장이나 시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웅변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도 예루살렘 성전 앞뜰이나 길거리에서 사람들 앞에 나서 큰 소리로 자기 주장을 펼치곤 했다. 목소리가 작거나 수사적 재능이 부족한 랍비들은 옆에 말솜씨가 능란한 변사를 두고 자기 말을 큰 소리로 되풀이해 청중에게 들려주게 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하신 말씀도 이러한 풍속을 빗대어 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님처럼 당시 랍비들도 비유를 들어 설교했다. 바오로 사도의 스승인 저명한 율법 교사 가말리엘은 즉석에서 한 가지 주제로 300가지 이상의 예시를 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내 아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들어라.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마라. 그것들은 네 머리에 우아한 화관이며 네 목에 목걸이다”(잠언 1,8-9)라든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처럼 은유, 비유, 시, 예화적 표현으로 설교하길 즐겨했다. 이를 유다인들은 히브리말로 ‘마샬’이라 했고, 「잠언」의 책 이름도 ‘마샬’이다.하지만 히브리인의 설교법은 헬라(그리스)나 로마인의 수사학과 전혀 달랐다. 헬라와 로마의 수사학은 삼단 논법에 따른 사상 배열과 논리 증명이 분명했다. 반면, 유다인들은 논리보다 듣는 사람들의 감정과 교감하는 방법을 택해 직관적인 비유와 현실적인 교훈을 빌어 가르쳤다. 학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에서 선교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에는(사도 17,22-34) 이성과 감성에 호소하는 웅변술의 차이가 한몫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예수님께서도 분명 ‘마샬’을 알고 계셨고, 그것을 사용하셨다. 구체적으로 겨자씨의 비유(마태 13,31-32)라든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26-29), 혼인 잔치의 비유(루카 14,15-24), 목자의 비유(요한 10,1-6)가 예수님께서 하신 마샬이다. 탈무드에도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가 나오는데 혼인 잔치의 비유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그것이다.또 이러한 긴 비유가 아니더라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1)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루카 4,23) 등 단문의 짧은 말씀도 마샬이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를 비롯한 성경학자들은 복음서의 예수님 비유 말씀을 탈무드의 마샬과 비교하여 “지극히 간결하고 정확하며 참신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문학적 기교가 조금도 없지만,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에 있어서는 가장 뛰어나게 다듬어진 문학적 기교를 능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니엘 롭스는 “복음서의 비유는 가장 비근한 현실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고상한 개념을 뚜렷이 반영시킨다. 그것은 무지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지만, 학식있는 사람에게도 반성을 촉구한다”고 가르쳤다. 또 리치오티 몬시뇰은 예수님의 비유를 “인간 수준에서 최고의 언어요,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말씀’이 가장 낮게 우리에게까지 내리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고백했다. 아울러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거룩한 신비에 대한 가슴 벅찬 환호성”이라 표현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저서 「나자렛 예수」에서 “비유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핵심이다. 문명이 바뀌어도 비유는 그 신선함과 인간미 때문에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을 안겨 준다”며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그리고 본문에 비쳐 나오는 아람어의 특성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고, 또 어떻게 가르치셨는지가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즉 마샬은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말처럼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하느님 나라’로 믿으라”는 단문으로 정리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처럼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5.03.03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25>가난과 부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풍요로움은 하느님 축복, 재물에 가치 두기 보다 나눔 수단으로 써야
행복 판단 기준으로 경제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신분제 철폐로 얻은 인간 평등권이 무색할 만큼 새로운 신분제도가 생겨났다. 바로 경제적 부로 구별되는 신분계급 등장이다. 안타깝게도 돈이 중심인 사회에서는 재산의 유무로 사람 가치를 평가한다. 그래서인지 성공과 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세상이 됐다. 이익 추구를 위해 타인의 권리나 안전은 뒷전이고, 진리를 탐구해야 할 상아탑 대학은 더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하느님의 자리, 돈의 자리아버지는 6ㆍ25전쟁 중 남하한 평양 출신 실향민이셨다. 고향을 떠나 정착한 곳에서 아버지는 주류 기득권층이 되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지연ㆍ혈연ㆍ학연이 소중하게 여겨지던 사회에서 실향민이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어서일까? 아버지는 항상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근검절약하는 습관에 길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사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다. 가장 기본적인 것만 지녀도 사제로 살아가는 데 충분하기에 비싼 물건을 사거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내 모습을 아는 신자 몇 분은 “참 소박하게 사는 것 같아요”라고 칭찬을 한다. 사제의 소박함이 덕으로 칭해지는 것을 보며, 우리 사회 안에서 사제라는 신분 역시 부유층의 한 부류로 비친다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래 전 TV 녹화를 위해 평화방송에 간 적이 있었다.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가용이 없었다. 그래서 본당 교우 분에게 서울 방송국까지 운전 봉사를 부탁했다. 방송국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녹화를 마치고 왔더니 주차장 관리하시는 분이 주차비를 요구하였다. 그래서 방송 녹화를 위해 방송국에 왔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신부는 주차비 면제지만 신자분이 운전했기에 주차비를 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같이 자가용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직원분은 몹시 당황해 하셨다. “자가용이 없는 신부님도 계시냐?”는 말과 함께 말이다. 지금 사는 신학교는 강화도에 위치한 까닭에 자가용을 마련했지만, 아직도 그때 그 주차장에서 일하셨던 직원분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그분의 판단 기준에는 웬만한 신부들은 다 승용차가 있고 그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신학생 시절이나, 유학생 시절에 비하면 지금 나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소유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소유한 것이 많을수록 내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점점 더 적어지는 것 같다. 육체적으로 편해지기 시작하니 가난을 멀리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재화는 나눔 실천을 위한 수단교회에서는 부와 가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구약성경에서는 재화와 부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여준다. 성경은 우선 재화와 부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본다. 사치나 부유함이 아닌 풍요로움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복으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재화와 경제적인 부는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재화와 부에 대한 부정적 면 역시 나타나는데 문제의 핵심은 그 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구약의 여러 예언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기와 고리대금업, 착취를 커다란 불의로 단죄한다(이사 58,3-11; 예레 7,4-7; 호세 4,1-2; 아모 2,6-7; 미카 2,1-2 참조). 성경은 부의 소유 자체가 아니라 그 부를 쌓기 위해 쓴 수단과 방법, 부를 올바른 곳에 사용하지 않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누군가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올바르지 않은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다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재화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소유한 사람 역시 마땅히 비난받을 만하다(「간추린 사회교리」323항 참조).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는 조건으로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9,21 참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그가 부자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눌 줄 모르기 때문이다.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보다 자신이 소유한 것에 더 큰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기 쉬우며, 자기 손으로 한 일로부터 힘을 얻고 자신의 힘에만 신뢰를 두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은 재물에 모든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되며,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하느님을 신뢰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가난함의 진정한 도덕적 가치를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는 우리 사회가 소유보다는 나눔이라는 도덕적 가치에 더욱 힘을 쓰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평화신문2014.07.23
![[성경 속 궁금증] 59. 성경에서 팔레스타인은 어떤 곳인가](//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586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59. 성경에서 팔레스타인은 어떤 곳인가이스라엘 중심으로 한 지중해 동해안 일대 가나안으로 불리다 로마인들이 지명 바꿔다윗이 필리스티아 장수 골리앗을 쳐 죽인 이야기를 그린 '다윗과 골리앗'(구에르치노 작, 17세기). 얼마 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교전 소식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유엔은 최근 총회 결의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국가 자격과 독립국 건설을 65년 만에 인정했다. 이로써 국제사회에서 팔레스타인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이스라엘로부터의 독립 움직임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이스라엘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새로운 충돌의 계기를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따른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의 동해안 일대를 일컫는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과 레바논, 요르단과 시리아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지역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교, 유다교, 이슬람교에서 모두 거룩한 땅으로 여기는 곳이다. 팔레스타인은 '필리스티아 사람들(Philiscines)'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 필리스티아인은 바다를 떠돌던 해양민족이었는데, 지중해 연안에 도시를 세우고 정착한 것이다. 이들은 차츰 내륙으로 들어왔고, 당연히 이스라엘 민족과 부딪혔다. 초기에는 그들 군사력이 더 강했다(판관 13-16장 참조). 이후 필리스티아 민족은 B.C 11~12세기에 영토 팽창 정책을 펼쳤다. 바다에서는 가나안의 시돈, 티로, 비블로스와 해상무역 주도권을 다퉜고, 내륙에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크고 작은 싸움을 끊임없이 벌였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때'(판관 14,4)에 삼손이 등장해 눈부신 활약상을 보이기도 했다(판관 13-16장).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었던 야훼의 계약궤를 빼앗기도 했다(1사무 4,1-11). 필리스티아 민족은 다윗 왕 때 이르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패하게 됐다.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 위협을 주는 세력이 될 수 없었고,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솔로몬 임금은 이집트와 조약을 맺고 교류를 강화했다. 틈새에 끼인 필리스티아는 점점 무력해졌고, 강국들의 지배를 받다가 마침내 역사에서 사라졌다. 필리스티아인들 땅이라는 뜻의 팔레스타인이란 지명만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팔레스타인은 로마인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가나안으로 불리었다. 로마인들도 처음에는 가나안의 유다지방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을 평정한 뒤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지명을 바꾼다. 유다인과의 전쟁에 질린 나머지 연관성을 없애려는 의도였다. 로마인들은 유다인들의 끈질긴 저항과 마지막 독립전쟁(A.D 132~135)을 분쇄한 뒤 일부러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을 사용했다. 이제부터 이 땅은 이스라엘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강력한 표현인 셈이다.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을 하느님이 계시한 구원과 약속의 땅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본래 이곳에 살던 소수 민족들에게도 팔레스타인은 포기할 수 없는 삶의 터전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영토분쟁이 끝나고 중동 지역이 평화와 안정을 찾는 날은 언제쯤 오게 될까.퇴사자22012.12.25

신부·목사·스님의 토크 신공은?TV 프로그램 인기, 삶의 지혜와 종교 간 이해 높여 토프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고 있는 홍창진 신부(왼쪽부터), 인명진 목사, 마가 스님. 모여앉은 신부·목사·스님의 대화가 심상치 않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자체도 신선한데 거침없이 이어지는 대화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못해 이야기 끝마다 웃음바다다. 지난 5월부터 유머 넘치는 성직자들의 허심탄회하고 유쾌한 세상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tvN 인기 프로그램 ‘종교인들의 토크 신공 - 오 마이 갓’이 시청자들의 꾸준한 주목을 받고 있다. 매주 유쾌한 화합의 장을 만드는 성직자는 홍창진(수원교구 광명본당 주임) 신부ㆍ인명진(갈릴리교회 담임) 목사ㆍ마가(동국대 정각원 교법사) 스님. 이들이 지금껏 나눈 주제는 △분노 △외모 불평등 △불신사회 △돈 △웰다잉 등 다양하다.“운명은 고스톱과 같아요. 자신이 쥐고 있는 패, 내가 살아야 할 깔린 패, 숨겨진 패가 있는 거예요. 어떤 패를 낼지는 자신의 선택이지만, 미래를 읽는 건 신의 영역인 셈이죠.”(인명진 목사)“불교에서는 ‘불살생’이라고 해서 작은 모기 한 마리도 죽이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하지만 요즘엔 작은 생명도 하찮게 여기잖아요. 윤리 의식이 뒷받침돼야 합니다.”(마가 스님)“예수님께서도 그 시대에 신고 다니셨던 샌들을 살 때 아무래도 더 예쁜 걸 고르지 않으셨을까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게 잘못은 아니죠.”(홍창진 신부)주제에 따라 알기 쉬운 비유와 교리가 덧붙여진다. 진중한 대화가 오가다가도 “신부님께 소개팅을 주선해달라는 분도 계세요?”, “스님이 어떻게 성경 내용을 그렇게 잘 아세요?” 등 당혹스러운 질문도 오간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시대가 필요로 하는 ‘위로’와 ‘공감’ 코드가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방청객들의 즉문즉설을 통해 궁금증 해소도 바로 이어진다.인명진 목사는 “종교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작은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저희 또한 이웃 종교인의 생각과 교리를 배울 수 있어 뜻깊은 자리”라고 말했다.마가 스님은 “이 자리야말로 종교 화합의 자리”라며 “방송이기 때문에 이따금 서로 재미있는 지적과 농담을 던지지만, 이런 모습이야말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 프로그램의 매력”이라고 말했다.홍창진 신부는 “저희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희망을 얻고, 치유를 느낄 수 있다면 저희 성무(聖務)는 성공한 것 아니겠느냐”고 웃음 지었다. 프로그램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30분 tvN 채널에서 방영된다.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평화신문2014.10.22

매주 수요일은 신앙 공부하는 날 공부 삼매경 빠진 서울 서초동본당서초동본당 신자들이 최승정 신부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이힘 기자 2일 오후 8시, 서울대교구 서초동성당(주임 이찬일 신부). 수요일이지만 성당 안은 500명이 넘는 신자들로 가득하다. 강의에 조금 늦은 신자들은 대성전에 자리가 모자라 2층 성가대석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이날은 서초동본당 '성경학교' 두 번째 강의가 있는 날로, 강사 최승정(홍은2동본당 주임, 가톨릭대 교수) 신부는 이날 주제인 역사서를 실생활에 빗대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최 신부는 "성서사도직의 목적은 함께 나누는 공동체성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라며 "성경공부를 통해 우리는 공동체적 존재임을 깨닫고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신앙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신부는 "건강에 자신이 있던 85세 어르신이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적이 있다"며 "주위에 단 한 명이라도 함께 늙어갈 친구가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고 말했다. 이날 강의는 밤 9시 30분이 넘어서 끝났지만, 강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는 신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신자들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최 신부 강의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들이었다. 꼼꼼히 강의를 메모하는 이도 눈에 띄었다. 본당은 올해 들어 매주 수요일을 공부하는 날로 지낸다. 지난 2월 '성체성사에 대한 영성학교'를 시작으로 올해 다섯 개 학교를 개설, 신자들이 1년 내내 매주 수요일마다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호응도 좋아 각 학교가 열릴 때마다 성당이 가득 찰 정도로 신자가 몰린다. 12서초지구 지구장좌 본당답게 지구 교육의 장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다섯 개 학교는 영성학교(2월 5~26일)에 이어 △성경학교-사순특강(3월 26~4월 9일), 대림특강(12월 3~17일, 오후 8시) △기도학교(5월 7~7월 23일, 오전 10시 미사 후) △생명학교(5월 7~6월 4일, 오후 8시) △가톨릭사회교리학교(9월 3~10월 15일, 오후 8시) 순이다. 모두 수요일에 열리는 강좌다. 이찬일 주임신부는 "본당이 마련한 다섯 학교는 약간의 교재비가 있는 기도학교를 제외하면 모두 무료 강좌"라며 "참된 신앙생활을 꿈꾸는 신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백영민2014.04.09

매주 수요일은 신앙 공부하는 날공부 삼매경 빠진 서울 서초동본당서초동본당 신자들이 최승정 신부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이힘 기자 2일 오후 8시, 서울대교구 서초동성당(주임 이찬일 신부). 수요일이지만 성당 안은 500명이 넘는 신자들로 가득하다. 강의에 조금 늦은 신자들은 대성전에 자리가 모자라 2층 성가대석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이날은 서초동본당 '성경학교' 두 번째 강의가 있는 날로, 강사 최승정(홍은2동본당 주임, 가톨릭대 교수) 신부는 이날 주제인 역사서를 실생활에 빗대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최 신부는 "성서사도직의 목적은 함께 나누는 공동체성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라며 "성경공부를 통해 우리는 공동체적 존재임을 깨닫고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신앙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신부는 "건강에 자신이 있던 85세 어르신이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적이 있다"며 "주위에 단 한 명이라도 함께 늙어갈 친구가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고 말했다. 이날 강의는 밤 9시 30분이 넘어서 끝났지만, 강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는 신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신자들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최 신부 강의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들이었다. 꼼꼼히 강의를 메모하는 이도 눈에 띄었다. 본당은 올해 들어 매주 수요일을 공부하는 날로 지낸다. 지난 2월 '성체성사에 대한 영성학교'를 시작으로 올해 다섯 개 학교를 개설, 신자들이 1년 내내 매주 수요일마다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호응도 좋아 각 학교가 열릴 때마다 성당이 가득 찰 정도로 신자가 몰린다. 12서초지구 지구장좌 본당답게 지구 교육의 장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다섯 개 학교는 영성학교(2월 5~26일)에 이어 △성경학교-사순특강(3월 26~4월 9일), 대림특강(12월 3~17일, 오후 8시) △기도학교(5월 7~7월 23일, 오전 10시 미사 후) △생명학교(5월 7~6월 4일, 오후 8시) △가톨릭사회교리학교(9월 3~10월 15일, 오후 8시) 순이다. 모두 수요일에 열리는 강좌다. 이찬일 주임신부는 "본당이 마련한 다섯 학교는 약간의 교재비가 있는 기도학교를 제외하면 모두 무료 강좌"라며 "참된 신앙생활을 꿈꾸는 신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백영민2014.04.09
 루이 부이에(상)](//cpbc.co.kr/CMS/newspaper/2014/09/rc/527554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58) 루이 부이에(상)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보편적 영성 일깨워 20세기를 빛낸 또 한 명의 영성신학자를 추천하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물은 영적 묵상집과 에세이가 한국에 많이 소개된 영성작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과 헨리 나웬(Henri Nouwen, 1932~1996) 혹은 안셀름 그륀(Anselm Grn, 1945~) 등일 것이다. 필자는 영성신학을 본격적으로 접한 지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 한국 가톨릭교회에 그나마 한 권의 책이라도 번역되어 소개된 몇몇 영성신학자 가운데 한 명인 루이 부이에(Louis Bouyer, 1913~2004)를 소개하고자 한다. 독특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부이에는 20세기에 유럽권에서뿐만 아니라, 영미권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많은 저서도 남긴 신학자이기에 우리가 살펴볼 충분한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개신교 목회자 꿈꿔 루이 부이에는 1913년 2월 17일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소시민계층에 속했는데, 특히 부모님은 프랑스 루터교 신조에 가까운 프랑스 개혁교회 소속 개신교 신자였다. 부이에는 장래 희망으로 교회 목회자를 꿈꾸면서 프랑스 개혁교회나 감리교회와 접촉하기도 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루터교회와 연결의 끈을 만들었다. 부이에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프랑스 개신교 신앙 안에 다양한 주장들에 대한 일치 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 까닭에 파리에 소재한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할 무렵에는 파리에 있는 영국 성공회와 정교회와도 접촉하려고 시도하였다.부이에는 파리에서 시작한 공부를 프랑스 북동부 지역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끝마칠 수 있었다. 그는 루터교 신학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학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그의 학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영국 성공회 사제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801~1890)이었다. 아마도 이 주제가 훗날 부이에의 장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는 영향 중에 하나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부이에는 1936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루터교 목회자로 안수받았다.부이에는 계속해서 신학석사 과정을 공부하였고, 아타나시오 성인의 신학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훗날 사람들은 부이에가 아타나시오 성인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가톨릭교회 신조를 잘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1938년에 부이에는 자신의 첫 번째 신학 저서인 「네 번째 복음서」(Le quatrime vangile)를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부이에는 요한복음서의 교회론과 성사론에 대한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의 기본적인 사상을 받아들였다. 스트라스부르 출생인 쿨만은 루터교 전통을 따르는 신학자였지만, 교회일치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서 루터교와 가톨릭교회가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공부를 끝마친 부이에는 파리 소재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는데, 스트라스부르 시절부터 파리 시절까지 그는 러시아 출신 이민자들을 만나는 기회를 가지면서 정교회에도 개방된 자세를 갖게 되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부이에는 가톨릭교회에 가까이 다가갈 기회도 갖게 되었다.가톨릭 신앙 받아들여결국 1939년에 부이에는 자신의 목회 활동에서 떠나기로 하고 거의 일 년 동안 영국의 옥스퍼드에 머물면서 앞으로 할 일을 숙고하고 난 후, 같은 해 12월 말경에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위치한 생-방드릴(Saint-Wandrille) 베네딕도 수도원 성당에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때마침 부이에는 오라토리오회 총장 신부로부터 파리 근교 센에마른(Seine-et-Marne)에 위치한 쥬이 신학원(Collge de Juilly)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것을 제안받고 2년간 그들을 가르치다가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그 즉시 부이에는 파리 가톨릭 대학교에서 사제수품 준비를 위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이브 콩가르(Yves Congar, 1904~1995)는 부이에를 눈여겨보고, 1943년에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총서 시리즈에 부이에의 석사학위 논문 「성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강생」(L’Incarnation et l’glise Corps du Christ dans la thologie de saint Athanase)을 출판하기도 하였다.부이에는 1944년에 드디어 모(Meaux) 교구 주교에게 사제로 서품되었고, 1950년에는 석사학위 논문 주제를 발전시켜 역시 아타나시오 성인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즉시, 부이에는 파리 가톨릭 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어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를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면서 1962년까지 같은 대학에서 영성신학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강의하고 저서를 출판하였다.「영성생활입문」 등 저술이 시기에 부이에의 대표적 저서로는 1950년에 「수도원 생활의 감각」(Le sens de la vie monastique), 1952년에 「성경과 복음」(La Bible et l’vangile)과 「뉴먼 그의 생애, 그의 영성」(Newman. Sa vie, sa spiritualit), 1955년에 「교회에서 개신교주의에 대하여」(Du protestantisme l’glise), 1957년에 「지혜의 옥좌」(Le Trne de la Sagesse), 1960년에 「영성생활입문」(Introduction la vie spirituelle), 1961년에 「신약성경과 교부들의 영성」(La spiritualit du Nouveau Testament et des Pres) 등이 있다. 이중에 「영성생활입문」은 지금까지 한국에 번역된 부이에의 유일한 책이다. 또한 영성역사를 주제로 한 「신약성경과 교부들의 영성」 이외에도 부이에는 같은 해인 1961년에 공동 작업으로 출판한 「중세 영성」(La spiritualit du Moyen Age)과 1965년에 저술한 「정교회 영성과 개신교와 성공회 영성」(La spiritualit orthodoxe et la spiritualit protestante et anglicane)을 묶어 세 권으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 시리즈를 편찬하였다.이렇게 영성신학을 주제로 강의하던 시기에 또 다른 한편으로 부이에는 전례사목센터(Il Centro di Pastorale Liturgica)와 함께 전례에 관한 주제들을 연구하면서 저서들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이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 단계에서부터 고문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고, 공의회가 끝난 이후에도 전례 개혁을 위한 위원회 고문으로 참가하였다. 1969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발타사르(H.U. von Balthasar), 라너(K. Rahner), 라칭거(J. Ratzinger)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1960년대 이후 그는 미국 인디애나 주에 위치한 노트르담 대학을 비롯해 수도 워싱턴의 가톨릭대학교, 샌프란치스코의 가톨릭대학교 등을 다니며 1990년대까지 강의했다. 하지만 이런 여정이 무리가 되었는지 병을 얻게 되어 부이에는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부이에는 자신을 가톨릭 신앙으로 받아준 생-방드릴(Saint-Wandrille) 베네딕도 수도원에 손님으로 머물면서 오랫동안 알츠하이머병에 시달리며 고생하였다. 결국 부이에는 2004년 10월 23일 세상을 떠났고, 수도원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물론 부이에는 영성신학만을 연구하고 가르친 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부이에는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바탕으로 교회일치 차원에서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보편적 영적 여정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기에,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영성신학자 가운데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평화신문2014.09.02
![[복음 이야기] (23) 노동자](//cpbc.co.kr/CMS/newspaper/2014/07/rc/519408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23) 노동자노동은 신성, 노동자는 존경받아야 성경의 시대 유다인들은 경작에 관계된 노동을 특히 사랑하고 중히 여겼다. 사진은 한 유다인 농부가 농토를 돌보고 있다. 【CNS】 이스라엘에는 종살이하는 노예가 많지 않았고 또 오늘날의 중산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유다 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기본 계층은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었다. 복음서에는 이들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가 잘 나타난다. 복음서에는 밭 가는 사람, 씨뿌리는 사람, 목수, 어부 등 갖가지 직업인들이 등장한다. 예수님도 이 계층에 속해 있었기에 그들의 생활 양식을 잘 알고 계셨다.유다인은 노동에 대해 이중 관점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빵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인간의 원죄에 대한 결과로 명하신 것이라 여겼다(창세 3, 17-19 참조). 다른 하나는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9)는 말씀을 “하느님께서 노동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 바오로 사도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며 노동의 의무를 강조했다. 바오로 사도의 이 유명한 격언은 레닌이 그대로 인용해 더욱 세상에 알려졌다.아담도 에덴동산에서 ‘땅을 부치며’ 살았고,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 성조들과 예언자, 초기 왕들도 모두 노동을 했다. 토라(율법)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빵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 역시 생계를 위해 노동을 했다. 랍비 아키바는 나무꾼이었고, 요수아는 숯장이, 메일은 대서인, 요카난은 구두장이, 사울은 무덤 파는 인부, 힐렐은 하루 반 데나리온씩 받는 날품팔이였다. 이처럼 유다인들은 반드시 직업을 가져야 했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모두 노동자였고 바오로 사도 역시 “아무에게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2테살 3,8)라고 한 말처럼 천막 짜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유다인들이 특히 사랑하고 중히 여긴 직업은 토지와 관계있는 모든 노동이었다. 집회서의 저자 벤 시라는 “힘든 일을 싫어하지 말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창조하신 들일을 싫어하지 마라”(집회 7, 15)고 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역시 본질적으로 농업 및 목축의 나라로서 그 경제를 온전히 토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씨뿌리는 사람과 포도밭 일꾼, 길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 등 땅을 기반으로 한 생생한 비유가 펼쳐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예수님 시대 때 직업의 우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금은 세공사, 신발을 만드는 자, 목수 등은 다른 일보다 고상한 직업으로 간주했다. 한편, 가축의 털을 깎는 자, 가죽 무두장이는 냄새가 나기 때문에 존경을 받지 못했고, 향료나 화장품을 파는 상인은 품행이 좋지 않은 여자들과 거래하기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 됐다. 가장 평이 좋지 않은 직업은 뱃사람, 대상(隊商) 안내인, 점포 주인이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노동은 신성하다. 일하는 자는 존경받는다”는 통념을 항상 갖고 있었다.성경에는 주인과 일꾼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율법이 있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사회적 노동법을 제정한 것이 바로 유다인이다. 그 기원은 모세에게로 소급된다. 모세는 품삯에 관해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너희는 너희 동족들 가운데에서나, 너희 땅, 너희 성안에 있는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품팔이꾼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그의 품삯은 그날로 주어야 한다. 그는 가난하여 품삯을 애타게 기다리므로,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품삯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가 너희를 거슬러 주님께 호소하지 않을 것이고,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이다”(신명 24,14-15).성경은 또한 노동자들에게 주인을 존경하고 그에게 순종해 충실히 봉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랍비 요셉은 석수였는데 어느날 공사장 발판 위에서 일하고 있을 때 누가 찾아와서 종교 문제에 관한 의견을 들려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려갈 수 없으니 저녁때 봅시다. 나는 일당을 받고 있기에 주인에게 고용된 동안은 잠시도 일터를 떠날 수 없습니다”. 측량사였던 랍비 힐키아도 역시 누가 와서 기우제를 위해 쓸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비슷한 대답을 했다. 이들처럼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던 율법학자들도 고용주와의 관계에 대한 의무를 준수하며 노동을 했다는 것은 오늘날 눈여겨볼 대목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o.kr 평화신문2014.07.15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20) 나무에 어린 마음](//cpbc.co.kr/CMS/newspaper/2013/06/rc/460184_1.1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20) 나무에 어린 마음자연과 소통하는 전능하신 하느님 지금까지 고대 근동에 등장하는 많은 신들에 대해 배웠다. 이번엔 '나무의 신'이다.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는 나무를 하나의 자본으로 여기며 산다. 하지만 고대 근동인들은 나무에 거룩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봤다. 나무에 특별한 마음, 지극한 종교심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나무 신'에 얽힌 종교심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예는 이집트의 독특한 보석 장식에 새겨진 나무 형상이다. 이집트어로 '벌떡 일어난 코브라'를 의미하는 '우래우스' 두 쌍이 나무를 보호하고 있는 문양이 그것이다. 파라오의 머리 장식에서 볼 수 있는 우래우스는 고대 이집트의 신적 주권과 왕권을 상징했다. 이는 고대 근동에서 나무를 얼마나 소중한 신으로 섬겼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고대 이집트 왕 투탕카멘의 머리장식에는 우래우스가 있다. 이 밖에도 나무는 고대 근동의 궁전과 신전 벽화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나무의 할례 구약성경에는 나무에 얽힌 다양한 종교심이 있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나무의 신'을 섬기지는 않았다. 다만 나무에 대한 종교적 경외심이 바탕에 깔려 있을 뿐이다. 레위기 19장은 나무의 성장 과정을 사람의 그것과 빗댔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온갖 과일나무를 심을 경우, 그 과일들을 할례받지 않은 포피로 여겨야 한다. 세 해 동안 그것들은 할례받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일들을 먹어서는 안 된다. 넷째 해의 과일들은 주님에게 축제 제물로 바쳐야 하고 다섯째 해부터는 너희가 그 과일들을 먹을 수 있다. 이는 너희의 소출이 많아지게 하려는 것이다"(레위 19,23-25). 과일나무의 생물학적 성장 단계에 종교적 의미가 있음을 하느님께서 친히 알려 주셨다. 이런 종교적 의미를 '할례'에 빗댄 점이 흥미롭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과일나무는 그저 때맞춰 열매를 맺는 식물이 아니었다. 마치 인격체처럼 생의 단계에 의미가 깃든 생명체인 것이다. 신명기 규정도 마찬가지다. 전쟁 중 적의 성벽 근처에 있는 과일나무는 공격에 방해되므로 성가시다. 당장 그 나무를 베어낸 다음 그 목재를 공성전에 사용하면 전략적으로 이득이다. 하지만 과일나무는 함부로 자르지 말아야 한다고 신명기는 이른다. "너희가 어떤 성읍을 점령하려고 싸움을 벌여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을 때, 그 성읍의 나무에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쓰러뜨려서는 안 된다. 너희는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베어서는 안 된다. 들의 나무는 너희가 포위해야 할 사람이 아니지 않으냐? 그렇지만 너희가 알기로 열매를 먹을 수 없는 나무는 쓰러뜨리고 베어서, 너희와 싸우는 성읍이 함락될 때까지 그 성읍을 포위하는 공격 보루를 만들어도 된다"(신명 20,19-20). 이 같은 표현에는 마치 나무가 인격체인 양 나무에 대한 종교적 심성이 깃들어 있다. 나무가 분명 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구 대할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우리 욕심대로 착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나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 다윗은 나무를 통해 하느님과 소통한다. 하느님은 나무 꼭대기에서 '발걸음 소리'를 내시고, 다윗은 그 하느님의 소리를 알아듣고 그대로 행하여 승리한다. 하느님은 나무 꼭대기에서 소리를 내시는 분. 나무 꼭대기는 하느님이 임하시는 곳, 그리고 인간에게 친히 신호를 보내시는 곳이다. 인간은 나무에서 나는 소리가 혹시 하느님의 음성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다윗은 '나무 꼭대기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었다. "다윗이 주님께 여쭈어 보자 주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바로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 발삼 향나무 숲 맞은쪽에서 그들에게 다가가거라. 발삼 향나무 꼭대기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거든 그때 습격하여라. 주님이 앞장서 나가 필리스티아인들의 군대를 칠 것이다.' 다윗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여 게바에서 게제르까지 필리스티아인들을 쳤다"(2사무 5,23-25). 자연은 신비로운 언어로 서로 소통하고 감응한다. 인간은 이런 자연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지만, 하느님은 완벽히 이해하신다는 사상이다. 시편은 하늘과 창공, 낮, 밤 등 자연계의 물체가 서로 이야기하고, 말을 건네고, 지식을 전하는 등 활발히 서로 소통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인간은 그들의 말과 이야기와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 이런 자연계를 지으신 하느님만이 이들과 완벽히 소통하신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그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는 온 땅으로,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가네"(시편 19,2-5). 자연과의 소통 능력은 창조주 하느님 고유의 권능이다. 그분은 자연계의 모든 소리를 듣고 소통하신다. 나뭇가지에서 나는 소리로 그분은 우리 인간과 소통하신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은 평화방송 TV 홈페이지(www.pbc.co.kr) 강좌/성경 꼭지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cpbc2013.06.25
![[신약의 비유] <21> 공관복음서의 비유 정리 <끝>](//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5617_1.0_titleImage_1.jpg)
[신약의 비유] 공관복음서의 비유 정리 이성근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탈리아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 예수의 비유는 공관복음서에만 나오며,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셨다는 것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다. 비유란 그리스어 ‘비교’에서 나온 것으로 “영원하고 초월적인 실제를 인간 경험과 친근한 것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유와 우화가 구별되면서 비유의 정의는 더욱 명확해졌지만 여전히 어려움이 따른다. 어려움은 무엇보다 복음서의 어떤 단락이 비유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학자들에 따라 20개에서 60개까지 열거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30~40개 정도를 비유로 본다.예수 비유의 특징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셨지만, 비유로 가르치신 최초의 스승도 아니고 유일한 스승도 아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는 분명한 특징이 있으며, 다른 비유에 대한 우월성과 독창성이 드러난다. 우선 예수의 비유는 청중들에게 직접 전달된 것이다. 이는 여러 전승에서 나타나며,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진정성의 표지이기도 하다. 이는 특별히 청중들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 질문들을 통해 예수께서는 청중을 어려움에 처하게 하거나 대답을 촉구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청중의 관심을 이끌고 이야기에 동참시키신다. 두 번째로, 예수의 비유는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어떤 주장이나 이론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예시로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자체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청중들에게 전달된 독립적이고 통일적인 단락을 형성한다. 또 랍비들처럼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매우 자유로운 의미로 비유를 사용하셨다. 세 번째는 소재의 단순함과 친숙함이다. 청중들은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특별한 종교적 문화적 기초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유다교 전승에 대한 막연한 지식, 당시의 일상적인 지식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네 번째는 하느님에 대해 놀라운 방법으로 묘사하신다는 점이다. 분명히 신학적이면서 이론적인 분석이나 하느님의 속성을 말씀하지 않으신다. 예리하면서도 일상적인 은유를 통해 하느님과 친밀함과 친교를 강조하신다. 다섯 번째는 많은 비유에 나타나는 의외성과 과장법이다. 하느님의 모습은 포도원 주인, 두 아들의 아버지, 잃어버린 양의 목자나 결혼잔치를 벌이는 왕의 모습에 비교된다. 이 등장 인물들은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태도나 행동을 보이며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과장법도 보인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왕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는데, 한 데나리온을 10만 원으로 계산해도 이 액수는 6조 원에 해당한다. 여섯 번째는 유다교의 지혜 전승과 종말론적 전승의 합치이다. 현명한 처녀들이나 충실한 종의 비유에서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함을 말씀하시는데, 비유에서 현명함과 영리함은 종말에 대한 이해와 준비하는 자세를 일컫는다.완성될 하느님 나라 준비해야교부 시대부터 근대까지 비유를 해석하는 주도적 방법은 우화적 해석이었다. 비유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교의 교의에 맞추어 해석하는 방법이었다. 비유와 우화가 구별되면서 우화적 해석은 종결됐지만, 문제는 예수님 당시에 비유와 우화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화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또한 해석의 대상에 있어서도 현대 학자들은 비유를 현재 맥락에서 분리하여 예수의 공생활 맥락에서 본래의 의미와 환경을 규명하려고 시도하였고, 그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역사적 연구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확실성을 위해 성경 본문의 맥락 안에서 해석할 것을 더 강조하기도 한다. 여러 방법론을 통해 예수의 비유는 그 풍요로운 의미를 보여줄 것이다.비유의 메시지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핵심적 주제인 하느님 나라와 그 하느님 나라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집중돼 있다. 하느님 나라 혹은 하늘나라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자애로운 통치권 혹은 통치 행위를 지칭하며 악의 세력을 굴복시키고 억눌리고 소외된 백성을 구원하는 것도 포함한다.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당신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실현되었음과 미래에 완성될 것을 가르치신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비유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분, 사랑에 항구하신 분으로 잃었던 사람을 찾아 친히 나서시고, 되찾은 사람들에 대한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하느님 나라는 비록 예수께서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 많은 사람에게 거부당하지만 하느님의 위업으로 성장하고 풍성한 결실을 볼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미래에 완성되며 심판을 동반하는 것이다. 심판은 징벌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인간 구원의 실현으로 보아야 한다. 종말은 늦어질지라도 반드시 올 것이며, 언제 닥치더라도 충실하고 현명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그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며, 지금부터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중요한 것은 종말이 언제 어떻게 오는지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체험하며 완성에 대한 희망으로 사는 것이다.이번 호로 ‘신약의 비유’ 연재를 마칩니다. ※금요일 오전 9시, 월요일 오후 8시, 수요일 오후 4시에 평화방송 TV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백영민2014.10.22
![[가톨릭 신앙의 보물]<4>영적 독서 -홍승모 몬시뇰(인천가톨릭대 신학대학장)](//cpbc.co.kr/CMS/newspaper/2013/12/rc/487095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신앙의 보물]영적 독서 -홍승모 몬시뇰(인천가톨릭대 신학대학장)주님 말씀에 동화 변화돼 그에 맞갖은 삶을 신앙인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관상하는 삶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이를 세상에 실현해야 한다. 사진은 네 복음사가가 새겨진 성경 겉표지 장식.성경 읽고 묵상하고 관상하는 신앙인 영적 독서, 즉 성독((聖讀, 렉시오 디비나)은 성경에 쉽게 접근하는 방법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관상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구성돼 있다. 독서는 우리가 읽는 성경 구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숙독하는 것이다. 그날 전례에 제시되는 성경 본문을 읽고 또 읽으며 성경 본문에 나오는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핵심 용어와 등장인물, 그 인물의 행위와 특성 등을 찾아 성경 전체의 맥락도 살펴봐야 한다. 독자가 속한 시대 속에서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다. 주의할 점은 성경 본문을 이미 알고 있거나 들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한 본문이라도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 성경에 내재한 함축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 분석하며 읽어야 한다. 묵상은 성경 본문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살펴봐야 한다. 어떤 메시지, 어떤 가치를 전달해 주는가 하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말씀의 메시지에 대해, 자신에게 계시되는 영원한 가치에 대해, 그 메시지를 자신에게 알려준 성령에게 어떻게 협조해야 하는지 성찰해야 한다. 관상은 말씀을 통해 자신과 통교하길 원하시는 주님과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는 가장 내밀한 순간을 말한다. 관상을 통한 주님과의 만남은 기도와 실천을 통해 확장된다. 곧 성경을 숙독하고, 거기에 나타난 주님의 메시지를 깨닫기 위해 묵상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관상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기도하고, 그 깨달은 바를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제 삼천년기를 맞이하는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갖고 영적인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하셨다. 교황께서는 신앙인들이 손에 성경을 쥐고, 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말씀을 전하는 성경을 받아들이고, 생명의 말씀이 되는 성경을 받아 삼키고, 하느님 말씀에 맛들여 희망의 여정을 걸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육화하는 것이다. 세끼 밥을 먹듯이 우리 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관상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 맛을 들이라는 것은 하느님 말씀에 동화하고 변화하여 그 말씀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되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반항하는 인간들과 달리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구현하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라는 것을 말한다. 성독 통해 하느님 따르는 삶 살아야 주님께서 어린이를 축복하고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부모에게 의지한다. 우리도 그 어린아이가 부모의 말을 따르듯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성찰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을 닮아야 하며, 이는 하느님을 따르려는 삶이다. 성독을 통해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 곳곳에서 많은 이들의 삶 속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본다. 분열과 갈등과 폭력과 더욱 심화하는 빈부격차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반면 희망의 모습도 본다. 수많은 신앙인이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접하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접근방식을 통해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갈망을 갖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삶 속에서 구체적 실천으로 신앙을 살아간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어울려 살아가는 이 세상을 무관심하고 초연한 태도로 바라보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주님의 말씀이 생명의 원천이며 뿌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 내면에서부터 새로운 영의 뿌리의 새싹을 틔워 새로운 영의 인간이 돼야 한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이 삶의 근원으로 더 이상 체험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다. 성독은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방향을 명확히 제시한다. 성경을 읽는 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성경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고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그 깨달음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접하는 것, 성경이 품은 보화를 발견하기 위해 꼭 신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작하려는 용기만 있으면 됩니다. 나는 말씀을 듣고 잠시 가만히 머무르는 시간을 꼭 갖도록 권합니다. 침묵 중에 귀 기울이면 응답이 들리고, 삶의 의미도 떠오릅니다. 나는 귀 기울여 듣는 마음을 온전히 신뢰합니다"(카를로 마르티니 추기경 '예루살렘 밤의 대화' 중에서). 정리=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방송은 수요일 오전 7시 20분에 방송되며, 지난 회는 누리방(http://www.cpbc.co.kr/tv)을 통해 다시 볼 수 있습니다. cpbc2013.12.10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17>](//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4522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1사무 8,5) 다윗의 도유, 14세기 작. 판관기의 마지막 말은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판관 21,25)입니다. 임금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요? 사무엘기의 앞부분에는 왕정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충돌합니다.왕정에 찬성하는 입장이 더 간단하니 그쪽부터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위에 인용한 판관기의 마지막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임금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판관기 마지막 부분에 나타난 여러 가지 혼란상과 끊임없이 외적과 전쟁을 치러야 했던 판관 시대의 상황을 생각해도 임금은 현실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지금까지 위험이 닥칠 때마다 하느님께서 판관을 세우시어 이스라엘을 구해 주셨다 해도, 필리스티아를 비롯한 주변의 민족들은 언제 다시 침입할지 모릅니다. 그 순간에 하느님께서 판관을 보내주실지 어떻게 압니까? 판관은 그때 그때 하느님께서 세우시는 인물들이어서, 항구적인 제도가 아닙니다. 임금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적어도 임금이 없을 때는 그렇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언제 침입을 당하더라도 안정된 국가 조직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신명기계 역사서에서는 왕정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 옵니다. 그 시작은 판관기에서부터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찾아가 “당신과 당신의 자자손손이”(판관 8,22) 다스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왕정에 반대합니다. 그도 그의 아들도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다스리실 분은 주님이십니다”(판관 8,23). 이것이 기드온이 임금이 되기를 거부한 이유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왕정을 반대하는 첫째 이유는 이스라엘의 임금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임금 자리를 차지하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사무엘기에서도 같은 이해가 나타납니다. 백성이 임금을 요구할 때 사무엘이 언짢아하자,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1사무 8,7). 판관이냐 임금이냐, 그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느님을 버리고 임금에게 의지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기 상권 12장에 실린 사무엘의 고별사에서도 사무엘은, 임금을 요구한 것은 하느님을 거슬러 큰 악을 저지른 것이라고 말합니다.그 다음에 사무엘은 왕정 제도의 폐해를 백성들에게 알려 줍니다. 임금이 군사를 징발하고 부역을 시키며 세금을 거두고, 백성은 임금의 종이 되고 말리라고 일러 줍니다.이렇게 서로 대립되는 의견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판관기와 사무엘기를 포함한 신명기계 역사서들은 한 번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두 번의 편집을 거쳤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왕정 시대에는 친왕정적인 본문들이 형성되었고 왕정이 무너진 후에 반왕정적인 본문들이 덧붙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책들의 편집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고 학파들도 갈라져 있습니다. 우리는 편집층을 구분하지 않고, 우리 눈 앞에 있는 완성된 성경 본문들을 들여다보기로 합니다. 양편의 의견을 모두 듣고 나서, 이들을 어떻게 종합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 판관이면서 이스라엘에 왕정을 수립하는 역할을 했던 사무엘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이 두 입장을 묶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무엘 자신은 왕정을 원하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명에 따라 사울과 다윗을 기름부어 임금으로 세우는 역할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사무엘도 이스라엘도, 왕정을 끝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에 왕정이 수립된 가장 주된 요인은 외적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주변 민족들에게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임금이 필요하고 군대가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도 사회적, 문화적 발전에서 그들과 비슷한 단계에 있었다면 왕정 수립은 언젠가는 이루어질 일이었습니다.하지만 이스라엘의 임금은 절대 군주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은 하느님이시고 임금은 그 하느님 아래에 있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인간이 아니신데 어떻게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며 임금이 하느님 아래에 있을 수 있을까요? 신명기와 신명기계 역사서를 모두 읽고 나면 그 답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그리고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임으로써입니다.신명기 17장 14-20절에는 이스라엘의 임금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왕정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임금은 군마를 많이 늘리거나 아내를 늘리거나 금과 은을 너무 많이 모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임금이 해야 한다고 명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평생 율법을 익히면서 “계명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신명 17,20)는 것입니다. 임금이 그 말을 잘 들으면 좋지요! 그것이 안 될 때에 일어나는 것이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임금이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왕정에 관한 논란은 계속됩니다. 그것은 곧 국가에 대한, 정치 체제에 대한 논란입니다. 왕정이나 국가, 그 자체가 악하고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 아래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백영민2015.04.08
![[성경 속 궁금증] 63. 성경에서 예수님은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cpbc.co.kr/CMS/newspaper/2013/02/rc/440234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63. 성경에서 예수님은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하느님 나라는 논리와 상식 뛰어넘는 신비…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비유 들어 설명예수님이 비유의 소재로 사용한 혼인잔치를 그린 '카나의 혼인잔치'(지오토 작, 1306년). 복음서에는 약 40개 비유가 나온다. 예수님의 다양한 비유 말씀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논리와 상식을 뛰어넘는 신비이기에 비유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예수님 시대에 글을 쓰거나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때문에 여러 부류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할 때, 어렵고 지루한 설명은 피해야 했다. 누구나 쉽게 알아듣고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려면 비유만한 것이 없다. 아무리 심오한 하늘 나라 진리라 해도 일상생활에서 겪는 체험을 바탕으로 상징과 비유, 예화와 우화를 곁들여 설명한다면 귀에 쏙쏙 들어오기 마련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비유 없이는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마태 13,34). 대중에게 하느님 나라 신비를 가르치실 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게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그물, 물고기, 값진 진주, 밀가루와 누룩, 밀과 가라지, 혼인잔치 등은 당시 팔레스티나 서민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였다. 호기심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하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3.16)고 하신다.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따로 그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셨다(마태 4,18-23; 루카 8,11-15; 마르 14,13-20). 인간의 말(言)은 어떤 사실과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말은 그 특성상 화자(話者)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담아내는 데에 부족한 점이 많다.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듣는 이의 경험이나 주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유는 아주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 방법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보거나 생각한 적이 없는 하느님 나라와 당신 아버지를 그려 보이기 위해 다양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다. 비유를 통해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1코린 2,9)을 이해하는 열쇠를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후 거듭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 4,9)고 말씀하신다. 비유를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뜻을 잘 알아 새기고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자신이 가진 오해와 편견을 내려놓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 비유의 참뜻을 알 수 있다.cpbc2013.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