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2) 구약성경의 무대, 고대 근동](//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8192_1.0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2) 구약성경의 무대, 고대 근동교역의 요충지에 있던 약소국 구약성경의 무대는 지금의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등이 있는 중동 지역이다. 그렇다면 고대(古代)는 어느 시대를 가리킬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군을 이끌고 동방을 원정해 페르시아 제국을 붕괴시켰다. 이때가 B.C.332~B.C.330년께다. 토착 지배민족인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종말을 맞았다. 그래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을 '고대 근동의 종말'이라고 한다. 구약성경의 시간적 무대는 인류 최초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시작된 B.C.3300년부터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시기까지다. #구약신학과 구약학 '구약신학'은 구약성경의 신학이다. 구약성경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공부하는 학문이다. '구약학'은 구약성경과 관련된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한다. 구약성경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도 구약학의 대상이다. 구약학은 언어와 사회ㆍ역사학적 접근을 비롯한 고대 근동 문화와 종교까지 다룬다. 구약학은 구약신학의 기초다. 신학적으로 말해 구약신학은 구약학의 꽃이다. 구약학과 구약신학은 고대근동학의 기반 위에서 더욱 풍부해진다. 고대 근동은 하나의 '세계'였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꽃을 피웠다. 그들은 활발히 교류하면서 살았다. 실제로 이집트에서 인기가 높았던 오시리스 신상은 아나톨리아 반도와 유프라테스 강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마찬가지로 이집트 파라오의 문서 창고에서는 동쪽의 아시리아 제국에서 보낸 외교문서가 상당히 발견됐다. 이스라엘은 교역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중요한 교통로에 있는 고대 이스라엘에 고대 근동의 문물이 흘러들어오고 나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장사를 했다. 주변 민족과 물건을 교환하고 영수증을 주고받았으며, 편지와 외교문서를 교환했다. 우리나라와 일본 또는 중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주변 민족과 교류하면서 상대방 문화와 종교에 익숙해졌다. 고대 이스라엘 문화는 이렇게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다채롭게 뒤섞인 문화를 먹고 자랐다. 고대 이스라엘은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약소국이었지만, 하느님은 이집트나 바빌론과 같은 크고 강한 나라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강대국 속에 끼인 작은 나라를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하느님은 언제나 작고 약한 존재를 통해서 당신의 큰 뜻을 이루신다. 구약성경에 고대 근동 신화의 자국이 크게 남은 이유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신화적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다. 풀과 나무와 짐승에 영험함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고, 하늘과 산을 섬기는 일을 당연시 여겼다. 합리주의와 과학의 언어에 익숙한 현대인은 고대 근동 종교의 종교심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하늘과 달, 바람, 강 등을 말할 때 하늘은 저 높이 우주까지 뻗은 공간이고, 달은 지구의 주위를 도는 행성이며,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고대 근동인들은 하늘은 거룩한 신이 또는 신들이 사는 곳으로 여긴다. 달은 밤하늘의 별을 지배하는 존재이며, 바람은 성령처럼 우리에게 불어와 하느님 숨결을 알려주는 존재라고 여긴다. #신화의 언어라고? 신화를 공부한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많다. 비과학의 언어, 혹은 낡은 언어로 여긴다. 고대 근동 신화의 언어를 알아야 구약성경의 내용과 고대인들의 정서를 알 수 있다. 신화는 과학과 달리 '의미'와 '상징'을 전달한다. 의미와 상징을 표현하고 전달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식이다. 구약성경은 신화적 언어와 매우 비슷한 언어로 쓰였다. 성경은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기보다 더 심원한 것, 단순한 사실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약성경에는 신화의 언어가 매우 풍부히 사용되고 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 말씀이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경전이다. 구약성경은 분명히 하느님 한 분께만 정성과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고대 국가의 역사적 산물이기도 하다. 고대 이스라엘의 배경, 곧 고대 근동 세계를 이해해야 구약성경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의 모든 표상을 깊게 들여다보면 그 밑바닥에 수천 년간 일어났던 다양한 교류와 소통이 전제됨을 알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이 이웃 민족 종교에 상당히 적극적이고 열린 자세로 대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웃 종교의 다양한 표상을 접하며 깊이 성찰했고, 고유한 자신의 신앙으로 결국 훌륭하게 소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고대 근동 종교의 표상들은 구약성경을 풍부하게 살찌웠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퇴사자22013.01.15

“현관문을 열면 여덟 아이, 행복이 달려와 안겨요”제2회 이원길 가톨릭인본주의상 수상한 전문석·최보향씨 부부 전문석ㆍ최보향씨 부부가 1일 가톨릭대 교정에서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왼쪽부터 민경양, 하경ㆍ하민군. 임영선 기자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를 안았을 때 십자가처럼 느껴진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힘들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이 아이들을 다 만나지 못했다면 제 인생의 즐거움이 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입니다.”1일 ‘제2회 이원길 가톨릭인본주의상’ 시상식이 열린 부천 가톨릭대 성심국제캠퍼스 김수환추기경국제관.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던 전문석(레미지오, 50)씨는 목이 메어왔다. 남편을 지켜보던 최보향(안나, 47)씨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이날 상을 받은 전문석ㆍ최보향 부부는 22살 민아(안나)양부터 6살 하민(마르티노)군까지 8남매를 키우고 있다. 자녀를 셋만 낳아도 “많다”고 생각하는 요즘 세상 사람들 눈에는 마냥 신기해 보이는 대가족이다.부부는 “수상을 하리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하느님 이야기를 빼놓고는 우리 가족이 살아온 길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하느님께서 우리 가족을 세상에 드러나게 해서 다른 이들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시려는 것 같다”면서 열 식구의 이야기를 들려줬다.생명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 첫째 민아, 둘째 민지(가타리나, 20)에 이어 셋째 하진(사무엘, 18)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전씨 가족은 ‘평범한’ 가정이었다. 하진군이 태어났을 때는 아들을 기다리던 양가 부모님이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최씨가 넷째 하윤(베르나르도, 16)이를 가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제 셋째를 낳았으니 됐다”면서 아이를 그만 낳길 바랐던 시아버지는 드러내놓고 마뜩잖아하는 기색을 비쳤고 친정 식구들도 축하인사를 건네기보다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최씨를 바라봤다.하윤이가 태어난 후에도 축하해주지 않던 시아버지는 100일이 지나서야 처음 손주를 안아주며 “그래도 예쁘니까 좋네!”하고 마음을 열었다. 시아버지는 “요즘 세상에 누가 그렇게 아이를 많이 낳느냐?”면서 “너희가 힘들 게 걱정돼서 기뻐할 수 없었다”고 속마음을 전했다. 하윤이가 태어난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정부 정책의 영향으로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전씨 부부는 ‘가족계획’을 한 적이 없다. 전씨는 “가족계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생명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인데 인간이 생명을 ‘계획’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우연히 생명에 대한 교육에 참가했어요. 인간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이고, 피임 등으로 하느님 뜻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정말 많은 것을 느꼈어요. 그때부터 하느님 뜻을 따르기로 했고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죠.”‘피임해서는 안 된다’는 교회 가르침이 ‘세상 물정 모르는 말’로 여겨지고 웃음거리가 됐던 세상에서 하느님 뜻, 교회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전씨는 “다만 몇 명이라도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무책임한 사람, 미개인 취급받아 많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도 힘들었지만 부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주변 시선이었다. 다섯째 하상(바오로, 14), 여섯째 하경(요한 비안네, 10)이가 태어났을 때는 본당 신자들까지 찾아와서 “이렇게 아이를 많이 낳는 게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느냐?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면서 아이를 그만 낳으라고 충고했다. 부부는 “마치 우리를 미개인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라 산 것뿐인데 부부는 어느 순간 ‘무책임한 사람’, ‘미개인’이 돼 있었다. 정신적 고통이 다가 아니었다. 육체적 고통도 부부를 때때로 지치게 했다. 첫째부터 다섯째까지 2년 터울로 아기를 낳고, 키운 최씨는 나이가 들수록 힘에 부쳤다. 너무 피곤해 젖을 물리고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든 적도 있었고, 갓난아기를 안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며 밖에서 울고 있는 다른 아이를 달랜 적도 있었다. 최씨는 “몸은 늙어가는데 어린아이들을 키우면서 임신까지 계속 하니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며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넷째를 임신한 후부터 부쩍 힘들었다. 하지 정맥류도 있었다”고 말했다.일곱째 민경(아녜스, 8)이 돌이 지난 후 얼마 안 돼 많이 아파서 최씨가 한숨도 자지 못한 날이 있었다. 그 다음 날 막내 하민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씨는 남편에게 “이제는 정말 힘들다”면서 통곡했고 전씨는 미안한 마음에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다.신앙과 기도로 어려움 이겨내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게 해 준 것은 신앙과 기도,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었다. 결혼 이튿날부터 기도와 성경 읽기로 하루를 시작한 부부는 지금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 기도로 마무리한다. 온 가족이 매일 아침 그날 성경을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 기억에 남는 구절은 공책에 적어놓는다. 주일 저녁에는 한자리에 모여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체험한 내용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전씨는 아이들에게 늘 자상한 아빠이지만 신앙교육만큼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시킨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도 항의하기도 하지만 주일미사 참례나 가족 기도를 거르는 일은 없다. 아이들은 복사와 소년 쁘레시디움 활동 등을 하며 항상 하느님 곁에 머물고 있다. 첫영성체 후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하경이는 본당 신부에게 “우리 본당에서 제일 열심히 한다”고 칭찬을 받는다.경제적 이유로 인간 생명 조절해선 안 돼1970~90년대 ‘경제 발전’을 이유로 출산 억제 정책을 펼쳤던 정부는 십여 년 전부터 출산율이 가파르게 하락하자 이번에도 ‘경제 발전’을 이유로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전씨는 “경제적 이유로만 인간 생명을 조절하려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키울 형편만 되면 많이 낳고 싶은데…”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경제적인 걱정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갖고 있어요. 하지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서 아이를 키우는 동안 아무 것도 하시지 않을까요? 주변 사람들은 아이들 교육비 때문에 힘들 거라고 많이 걱정했는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어요. 하느님께서는 늘 형편에 맞게 돌봐주세요. 오늘 저희 부부의 수상이 출산을 망설이는 분들에게 격려가 돼서 ‘인간의 선택’보다 ‘하느님의 선택’을 따르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8남매를 키우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최씨는 “대학에 다니느라 먼 곳에 떨어져 생활하고 있는 큰딸ㆍ둘째 딸이 집에 와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함께 먹을 때 행복하다”고 했고, 전씨는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현관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서 품에 안겨요. 여러 아이를 한꺼번에 안다가 허리를 다친 적도 있어요(웃음). 신발도 벗지 못하고 아이들을 끌어안고 바닥에 뒹구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이원길 가톨릭 인본주의상=가톨릭 인본주의를 삶으로 실천한 이원길(베르나르도, 1917~2001) 선생의 정신을 확산하고자 가톨릭대 BWL(Bernard Wonkil Lee) 가톨릭 인본주의 국제포럼 운영위원회가 제정한 상이다. 모범적 생활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인간 존중을 실천하며 가톨릭 인본주의를 삶으로 실천한 이에게 수여하며, 상금은 1000만 원이다. 지난해 제1회 수상자는 ‘노숙자들의 주치의’ 성가복지병원 박용건(폰시아노, 66) 내과과장이었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평화신문2014.10.08

명동본당 사순특강 ‘나를 넘어 그 넘어로’정규한 신부(예수회) 정규한 신부 1. 잠심(潛心)이란사람은 자기 생각에 따라 세상을 둘로 나눈다. 몸이 아플 때는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으로 나눌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을 넘어 그 너머로 가면 어떤 세상일까? 그것은 아마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의 구분을 넘어 건강과 병듦을 알되 그것이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바로 ‘잠심(潛心)’이다. 잠심은 ‘알되 그 앎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지금 여기저기서 기침하는 소리가 들린다. 잠심은 기침 소리가 들려도 그 소리가 나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다. 기침이 신경 쓰이는 사람은 그 소리에 잡혀 있는 것이다.우리는 기도하는데 별 잡념이 다 떠오른다. 사순 특강을 듣는 지금도 여러분은 자녀가 저녁은 먹었는지 걱정이 든다. 잠심은 내가 분심이 들건 고통을 받을 때건, 화가 날 때라도 그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것 즉,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2. 잠심을 하면기도의 목표는 ‘하느님과의 일치’다. 그러려면 먼저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 뜻을 알기 전에 내 생각을 하느님께 관철하려 하기에 문제가 생긴다. 참된 기도는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문제 해결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내 생각과 문제를 하느님께 아뢰고 내 것을 모두 내려놓는 잠심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그러려면 일치할 대상의 뜻을 알고 하느님 뜻을 알아야 일치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일치가 아니라 하느님을 부리겠다는 일치를 하려 한다. 그래서 안 된다. 하느님을 부리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용서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서로 다퉜다고 하자. 그들에게 용서란 싸운 사건을 잊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다. 현실적으론 그렇게 되기는 매우 힘들다. 그래서 용서를 위한 용서를 한다. 성경에서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은 완전한 용서를 하라는 의미다. 나는 용서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만 만나면 어제 일이 생각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우리는 우리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하느님의 역할은 용서해 주시는 것이고 나는 내 역할만 하면 된다. 막연한 용서가 아니라 용서의 참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3. 행복과 불행의 차이여러분이 돈을 믿으면 돈에 휘둘려 살고, 권력을 믿으면 권력에 휘둘려 산다. 믿는 대상에 따라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예수님 말씀 알아듣고 이것이 예수님 뜻인지 내 뜻인지 계속 기도하면서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진짜 하느님 말씀이라는 확신이 들 수 있다. 행복이 무엇일까. 무엇을 해도 행복이 안 찾아온다고 믿고 살아온 사람한테 행복을 말할 수 있을까. 만약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가진 생각이 이렇다’ 혹은 ‘이것이 행복이다’ 하고 여기기 때문에 행복이 오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 앞에 닥친 불행이 과연 불행일까. 대학에 합격한 것이 행복이고 떨어지면 불행인가? 대학에 떨어진 것이 외려 당사자에게는 더 넓은 세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다. 잠심을 해야 한다. 잠심하면 그냥 행복해진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사시기에 행복하다. 내가 비록 가난하고 건강이 좋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이다. 하느님이 주신 고통이나 슬픔도 모두 좋은 것일 수 있다.4. 잠심을 위해 실천해야 할 세 가지첫째,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다. 둘째는 하느님 뜻을 알아듣는 것이고, 셋째는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이 가장 어렵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 머리에서 가슴까지인데, 이보다 더 먼 것이 가슴에서 발까지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실천이 어렵다. 속담 중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과거의 경험 때문에 우리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거를 정화하고 내려놓는 작업이 잠심이다. 생각과 과거의 경험을 알아내고 잠심을 해야 한다. 실천이 어렵다는 의미는 어려운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를 편하게 한다.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수고 없이 하느님 뜻을 편하게 알려고 한다. 수고하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가 없다. 배우자가 뭘 좋아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틀을 깨야만 한다. 우리가 가진 생각을 깨라는 의미다. 이것을 깰 때만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다. 바로 깨는 작업이 잠심이다. 잠심을 제대로 해야 하느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다. 사순을 지내면서 잠심을 화두로 삼으며 자기 생각의 틀을 깨는 실습을 해보면 어떨까. 정리=이힘 기자 lensman@pbc.co.kr 백영민2015.03.11
![[나의 신앙 나의 기업] (8) 김현조 스테파노 (주)일신밸브 대표이사](//cpbc.co.kr/CMS/newspaper/2015/05/rc/570485_1.0_titleImage_1.jpg)
[나의 신앙 나의 기업] (8) 김현조 스테파노 (주)일신밸브 대표이사기업 성장과 더불어 ‘제도화된 나눔’으로 사회 공존 지향 밸브 제작에 사용되는 부품을 설명하고 있는 김현조 대표. 원자재부터 완제품으로 생산되기까지 과정을 파악할 수 있도록 부품마다 고유한 식별 번호가 새겨져 있다. 대학 졸업과 함께 국세청에 취직했다. 곧이어 공인회계사가 됐다. 1967년이었다. 하지만 남들이 선망하는 국세청 직원, 공인회계사 개업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직장을 옮겨 투자공사 같은 공기업과 증권사에서 일했다. 한 그룹 방계의 밸브 회사 대표이사까지 지냈다. 하지만 내 사업을 하고 싶었다. 1982년 독자적으로 밸브 회사를 세웠다. (주)일신밸브의 시작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일신밸브는 품질 면에서 세계적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기술력과 경쟁력을 지닌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교회 안에서는 성령쇄신봉사자협의회 회장으로 더 잘 알려진 김현조(스테파노, 73, 수원교구 과천본당) 대표이사다. 창업 초기에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국내 유망 중소기업 1호로 선정됐을 정도였다. 잘 나가던 회사는 3년 만에 큰 위기를 만났다. 회사 자체로는 문제가 없었다. 전에 대표이사로 있던 회사의 그룹 전체가 부도 나는 바람에 덩달아 신용 불량자가 된 것이다. 당시 대표이사 명의로 발행한 채권 탓이었다.“회사와 집이 압류됐지요. 아내는 보험을 해서 생계를 꾸렸고, 저는 채권자들을 만나 사정을 호소하고 기다려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팔면 고철 덩어리밖에 되지 않는 자재 재고를 활용해 남은 몇 명 직원과 함께 고난의 행군을 계속했습니다. 회사는 제 이름으로 운영할 수 없어서 아내 이름으로 바꿨지요.”새벽 6시면 어김없이 출근했고, 직원들이 꺼리는 일을 손수 했다. 손톱 밑이 새까매졌다. 7년을 이렇게 일했다. 빚을 갚아야 하는 사람이 30명이 넘었다. 순서를 매겨 돈이 들어오는 대로 갚아나갔고, 더 급한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 돈부터 먼저 해결했다. 이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르고서야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당연히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채권자들은 김 대표는 본의 아니게 빚을 지게 됐다는 사정을 알고 기다려줬고, 포항제철 같은 대기업도 거래를 터줬다. 이전부터 김 대표와 알고 지내던 이들이 도움을 준 것이다. 티를 내지 않는 소박함과 겸손함, 그리고 성실과 정직이 그의 자산이었다. 품질 향상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도 주효했다. S-Oil, GS-Caltex 같은 정유 회사들, 현대, 삼성과도 거래를 텄고, 외국 수출도 재개했다. 빚을 갚고 나서도 3년이 지난 1998년 마침내 적색 신용 불량자 딱지가 떨어졌고, 김 대표는 비로소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회사를 경영할 수 있었다. “빚을 다 갚고 나니 IMF 구제 금융 사태가 왔습니다. 은행에서는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오고 우리 제품을 구매하겠다는 외국 구매자들의 발길도 줄을 이었습니다. 당시 부천에 있던 회사를 지금의 시흥 시화공단으로 신축 이전한 것도 이때였습니다.”회사가 활기를 띠면서 김 대표가 최우선에 둔 것이 품질 향상과 기술 개발이었다. “특히 원자력 발전소에 사용되는 밸브는 강도나 내구성이 뛰어나야 할 뿐 아니라, 정밀도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합니다. 최고의 품질만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봤습니다.”김 대표는 1999년부터 기술 개발 연구소를 두고 있다. 지금도 전체 직원 110여 명 중 연구 개발 인력이 10%가 넘는다. 회사는 원자력과 석유 화학 같은 설비에 사용되는 각종 밸브뿐 아니라 밸브 제작에 쓰이는 고정밀 핵심 부품을 독자적으로 개발, 회사 신인도를 높이고 있다. 늘 새롭게 나아가는 것, 이것은 또한 기업의 사명이기도 하다. 일신(一新)이라는 회사 이름도 그래서 정했다. 김 대표는 기업이 이재(理財, 돈벌이)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기업은 창업 목적을 지향하지만 회사와 근로자는 물론 소비자와 공공 기관, 지역 사회까지 아울러서 함께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존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기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2007년, 김 대표는 지역 사회를 위해 ‘제도화된 나눔’을 시작했다. 회사 인근 시흥시 매화동에 지역 결손 가정 자녀들을 위해 연건평 500㎡(약 150평) 규모의 일신매화지역아동센터를 설립하고, 지속적인 후원을 하고 있다. 설립 비용을 제외하고도 유지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이 연간 6000~7000만 원에 이른다. 중소기업으로서는 적지 않은 비용이다. 김 대표가 ‘제도화된 나눔’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나눔을 제도적으로 마련해 시행하지 않으면 책임감이 줄어들어 끝이 흐려지고 만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화된 나눔 외에도 김 대표는 주변의 불우한 이웃이나 교회를 위한 나눔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빚에 쫓기면서도 형편이 되는 대로 어려운 이웃 특히 청소년을 도왔으며, 본당 총회장을 두 번 지내면서 두 번이나 성당을 신축하는 데 정신적 물질적 힘을 보탰다. 부산이 고향인 김 대표는 35년 전에 세례를 받았다. 그때까지 아내만 신자였다. “당시 아내가 암 투병 중이었습니다. 살려 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렸지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살려 달라고….”아내는 위를 75% 잘라내는 대수술 끝에 살아났고, 김 대표는 1980년 겨울 서울 방배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고는 바로 본당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3년 후에는 성서모임 봉사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참다운 변화는 1985년 성령 쇄신 세미나를 받고 난 이후부터였다. “저는 성령 세미나를 두 번 받았습니다. 한 번 받고서는 잘 몰라서 다시 받았지요. 그리고 이후에 한 철야 기도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체험했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을 받으려고만 살아왔다는 것을…. ‘이중 인격자로 잘못 살았습니다’ 하고 고백했지요. 이제는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이후 김 대표의 삶은 30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사업, 특히 성령 쇄신 운동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본당 기도 모임 봉사자를 시작으로 지구 대표, 교구 임원과 회장, 전국협의회 부회장을 거쳐 2012년 말 전국 회장에 선임돼 3년째 봉사하고 있다. 요즘엔 성령 쇄신 운동의 길을 나름대로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김 대표는 기업하는 이들에게 세 가지를 조언했다. “이재(理材)를 하지 마십시오. 과당경쟁, 뒷거래, 정치력의 유혹에 넘어가면 기업은 끝납니다. 기업가의 정도를 걸으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글·사진=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평화신문2015.05.12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11> 인간의 한계 상황 속에서 선교](//cpbc.co.kr/CMS/newspaper/2015/02/rc/554908_1.1_titleImage_1.jpg)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인간의 한계 상황 속에서 선교복음 선포자, 용어와 상황 한계 극복하고,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 전해야 2013년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를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폭우 속에서도 참가 청년을 꼭 끌어안고 있다. 【CNS】 인간은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닌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발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교황은 이와 같은 여정 속에서 선교를 위해 뛰어든 사목자들이 지녀야 할 태도와 덕목에 대해 일러준다. 먼저 어느 시대이든지, 그 시대 상황 속에서 계시된 말씀을 해석하고 진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40항). 또한 그 시대에 맞는 진리의 표현 방식을 습득해야 한다(40항). 그리고 부족한 인간의 한계 상황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에게 사랑이 담긴 위안과 격려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전달해 주는 자비의 사목자가 되어야 한다(44항).복음을 더 정확히 전하기 위한 수단학문의 발전은 진리를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게 해준다. 그 결과, 우리의 신앙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성경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의 책무는 교회의 판단이 더욱 성숙하도록 돕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사회과학’ 역시 교회를 위해 봉사함을 언급하기도 했다. “교회는 교도권의 직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 정보를 얻기 위해, 사회과학의 공헌에 관심을 갖습니다”(40항). 철학과 신학과 사목의 다양한 사상의 발전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복음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이 모든 학문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러한 모든 것이 한없이 풍요로운 하느님 말씀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40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내용 속에는 이유와 논증의 명백한 영역을 넘어서는 것들이 있다. 교황은 “어떤 모호함으로 표현되는 신앙의 십자가”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이것 때문에 신앙인의 믿음의 동의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노의 말대로, 계시된 진리를 알기 위해서 믿을 때, 신앙의 동의는 언젠가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믿음의 동의를 드러내야 한다. 비신앙인들과의 친교 그리고 그들 안에서의 사랑과 증언의 삶을 통해, 그들도 마음으로부터 동의할 수 있도록 일깨워야 하는 것이다(42항). 또한 현대 사회의 급격한 문화적 변화에 발맞추어 ‘진리의 표현 방법’을 계속해서 탐구해야 한다. 진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나, 그 표현 방법과 용어는 그 시대의 문화 속에서 재해석돼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같은 문화적 적응을 하지 못하고 과거의 표현에 집착한다면, 그 본질은 왜곡되고 복음의 아름다움은 실종되고 말 것이다. 더 이상 매력적이지 못하게 된다.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을 인용하며 이렇게 강조한다. “진리의 표현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변함없는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려면, 이러한 표현 형태들이 반드시 쇄신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41항). 고해소, 치유의 장이 돼야교황은 고해실은 고문실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사제들이 자비의 사목자가 되길 당부했다. 죄악에 떨어지는 인간 존재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자비와 인내를 갖고 그들과 동행해야 한다고 했다. 교황은 「치빌타 카톨리카」(예수회 잡지)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고해 신부는 너무 엄격하거나 너무도 느슨한 사람이 될 위험이 항상 있습니다. 이 두 형태의 고해 신부 모두 자비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누구도 참된 의미에서 이 고백자의 부담을 덜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격한 사제는 그 책무를 계명에 넘기며 자신의 손을 씻은 사람입니다. 방임적 사제는 단순히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하거나 이와 비슷하게 처신하며 자신의 손을 씻은 사람입니다. 고백자들을 그렇게 홀로 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상처는 치유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제약과 한계 속에서 용기를 갖고 내딛는 사람들의 작은 발걸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저마다의 잘못과 실패를 넘어 모든 사람 안에서 신비롭게 움직인다(44항). 자비의 사목자는 그들에게 이렇게 선포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습니다.”신발이 더럽혀지더라도이렇게 복음화의 임무는 용어와 상황의 한계 속에서 수행된다. 선포자들은 이러한 한계들을 잘 알고 스스로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고…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1코린 9,22) 되어야 한다. 결코 자기 자신 안에 갇혀서도 안 된다. 거리의 진흙탕에 신발이 더럽혀지더라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45항). cpbc2015.02.11

서평-신약성경학자 클라우스 베르거의 「예수」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낸 예수 이야기클라우스 베르거(1940~ )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복음주의 신학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다가 2006년에 은퇴한 가톨릭 신약성경학자다. 그동안 50권이 넘는 책을 쓴 베르거는 당대에 유행하던 여러 학문방법론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온 다분히 도발적이고 독창적인 학자로서 국제적 명성을 지니고 있다. 그가 2004년에 저술한 「예수」는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만큼 일반 독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베르거의 유명한 저서 「예수」가 마침내 전헌호 신부의 탁월한 솜씨로 번역돼 성바오로 출판사가 제1권을 2012년에, 제2권을 2013년에 각각 출간했다.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필자는 무엇보다 이 방대한 양의 글을 유려한 문체로 번역해주신 역자의 노고와 열정에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처럼 훌륭한 신학 서적을 펴냄으로써 한국교회의 신학 토론과 학문 발전에 기여한 성바오로 출판사 관계자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리고 싶다. 클라우스 베르거가 그리는 예수는 무엇보다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분석한 예수가 아니라는 특징을 지닌다. 교회문헌들도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역사비평적 방법에 대해 그는 지나치게 부정적이다. 그에 의하면 역사비평은 19세기 실증주의적 세계관의 산물이기에 초월적 종교적 경험을 이야기하는 복음서 연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신학대학에서 역사비평적 성경 해석 때문에 신앙을 잃은 학생들을 많이 봤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증언한 바 있다. 베르거는 예수 전승이 동시 다발적으로 전달됐기에 단편적 전승들을 모아서 일종의 모자이크를 만들어야 나자렛 예수의 전체적 진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공관복음 전승과 요한복음 전승을 종합할 때에야 비로소 예수에 대한 모자이크적 종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베르거는 정경독서의 방법을 취하는데 이 점에서 베네딕토 16세의 「나자렛 예수」와 방법론적으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신비로만 전해질 수 있는 분이기에 베르거는 사회학적 관점이나 심리학적 관점에서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 내지 심리치료가로 축소시켜 이해하는 환원적 방법을 적극 비판한다. 복음서를 열린 마음으로 읽는 베르거는 예수의 참된 신원이 어떤 신학적 선입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인간, 세상에 대해 그분이 가르친 내용과 행동 방식을 통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진가는 저자가 성경주석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느님, 참된 행복, 여인들, 마귀, 고통, 정치와 경제, 폭력, 유다인들, 돈, 진리, 하느님 나라와 교회, 기적과 성찬례, 예수의 죽음과 부활, 묵시주의적 미래와 현재 등 가장 관심을 끌 만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주제를 현대적 감각으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는 데 있다. 베르거는 이 책을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갈망하고 삶의 신비에 경도돼 궁극적 질문을 던지는 수많은 구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썼다. 이 기념비적 저작이 분량 때문에 읽기에 부담스럽게 보일 수 있겠으나 내용은 따라가기가 수월한 편이다. 베르거의 「예수」가 한국의 지성인 그리스도인들과 진리를 추구하는 많은 이들에게 오늘의 관점에서 예수를 이해하는 데 매우 훌륭한 지침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백운철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백영민2014.05.07
![[생활 속의 복음] 더러운 영과 ‘갑을관계’](//cpbc.co.kr/CMS/newspaper/2015/01/rc/552526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더러운 영과 ‘갑을관계’연중 제4주일(마르 1,21-28)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인지 미사를 봉헌할 때 교우들 표정이 썩 좋지 않습니다. “왜 인상을 쓰고 계세요?”라고 물으면 억지로 웃으면서 “감기 때문이지요. 신부님이 옮기신 듯합니다” 하고 답합니다. 이번 겨울에는 제가 신자들에게 ‘더러운 영’을 전파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죄송하고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모습을 △큰소리를 지른다(마르 1,23) △괴성을 지른다(마르 9,26) △사납다(마태 8,26) △고통스러워한다(마태 12 45) △실신 상태나 경련을 일으킨다(마르 9,18) 등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특성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결국 타인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기 힘든 사람이며, 주변인들에게 외면당하는 부류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에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길 수 있는 사소한 일인데도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갑을관계’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대부분 식당을 비롯한 상점에서 손님(갑)과 종업원(을)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시골에서 곡물이나 과일을 도시에 판매할 때도 이런 문제가 부지기수로 발생합니다. 배나 곶감 등을 보내면 “색상이나 빛깔이 동일하지 않다”며 일정 기간이 지났는데도 반품을 요구하는 소비자가 있고, 과일을 먹다 보니 썩은 것이 있다며 바꿔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농민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변상을 해야 합니다. 인간 관계 속에서 이와 비슷하게 벌어지는 차별이나 억압을 미국 ABC방송사의 프로그램 ‘What would you do?’(어떻게 할 생각이세요?)에서 자주 봅니다. 연기자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현상(모욕당하는 노숙인, 인종차별 등)을 연기하고 몰래카메라로 시민들의 반응을 살펴봅니다. 반응을 보인 시민들에게는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묻습니다. ‘What would you do?’는 우리가 타인의 상황이나 사회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그것도 권위를 지니시고 말입니다. 권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입니다. 영어로는 ‘authority’(지휘권, 권한)입니다. ‘au’는 ‘늘리다. 증가하다’라는 의미이므로 ‘autor’는 ‘자라게 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참된 권위는 ‘하느님의 힘으로 누군가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초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릇된 권위는 누군가에게 공포와 억압, 두려움을 주고 서로 대화와 소통을 어렵게 하며 개개인의 삶을 축소시키거나 단절시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릇된 권위는 독재정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공자는 군자가 ‘덕’과 ‘예’에 의한 교화를 통한 정치로 질서를 회복하고 태평한 세상을 이루는 것이 참된 정치적 권위라고 봤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람을 살리시고, 서로 만남과 대화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으로서 완성을 향해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참 권위를 보여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저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등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존경과 배려를 통해 참다운 권위가 흘러넘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1월 10~11일 도시 손님 25명이 성당을 다녀갔습니다. 토요일 저녁 주일 미사를 마치고 교육관 마당에 나오니 본당 어르신들과 손님들이 어우러져서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며 웃으시는 어르신들 옆에서 장단을 맞추면서 추임새를 넣고 흥을 돋우는 손님들 모습은 기쁨과 환희 그리고 존경이라는 단어가 현실로 드러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함께할 수 없는 멋진 축제였습니다. 참 기쁨의 인간 관계를 보았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도 예수님처럼 참 권위를 가지고 더러운 영을 추방해 힘차고 신명 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갑시다. 아멘. cpbc2015.01.28
![[생활 속의 복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cpbc.co.kr/CMS/newspaper/2014/07/rc/519552_1.0_titleImage_1.jpg)
[생활 속의 복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조재형 신부(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은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구원의 개념은 ‘땅의 축복’이었습니다. 더 많은 가축을 기를 수 있고, 가족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땅을 소유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며, 구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더 많은 가축과 더 많은 땅을 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으며, 믿음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모세 시대에 구원의 개념은 ‘자유와 해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자녀 중에 아들은 태어나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비록 이집트 땅에서 풍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자유와 해방이 없는 삶은 굴욕과 굴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와 해방을 말씀해 주십니다. 자유와 해방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과감하게 행동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용기를 주셨고, 드디어 근심의 바다, 두려움의 바다, 허무의 바다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 시대에 구원의 개념은 ‘정의의 실현’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막에 물이 솟아나고,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어노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묶인 이들이 자유를 얻고, 눈먼 이들은 눈을 뜨고, 굶주린 이들은 배불리 먹게 되는 세상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소수의 사람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복지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말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시대에 구원의 개념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였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의 품격을 높여 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순교한 다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과 풍요로움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였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들처럼 날개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추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는 새들에게는 없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절망 속에서도 웃을 수 있고,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기심과 시기 욕망과 질투 그리고 분노와 저주와 같은 악한 기운도 숨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없이 선하신 하느님의 모상도 깃들어 있습니다.오늘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위로를 주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관용을 보여 주셔서 우리가 죄를 지으면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회개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한없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이웃과 형제들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야겠습니다.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우리들 또한 거저 줄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cpbc2014.07.16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4)구약성경에 하늘신은 없다](//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9562_1.1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4)구약성경에 하늘신은 없다하늘신, 신격 아닌 공간 의미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일군 수메르인들에게 하늘신은 선과 악을 관장하는 최고신이었다. 하늘신은 모든 신의 아버지였으며, 왕권을 지정하는 존재였다. 그러한 최고신도 시대가 바뀌면 다른 신들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는 '물러난 신'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하늘신이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히타이트와 우가릿 등이 있었던 북서셈어(가나안어ㆍ아람어ㆍ히브리어 등) 지역과 남부셈어(아랍어ㆍ에티오피아어 등)를 쓰는 이집트 일대에서는 하늘신을 최고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장소의 뜻으로 많이 썼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어떨까. 히브리어로 하늘을 '샤마임'이라 한다. 샤마임은 늘 복수형으로 쓰였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하늘이 여러 겹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파란 하늘이 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하늘 위에 또 여러 겹의 하늘이 존재하며, 그곳에는 신들이 산다고 생각했다. 가장 높은 하늘에는 최고신이 산다고 믿었다. 그래서 하늘을 복수형으로 썼다. 샤마임은 구약성경에 무려 420번 이상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하늘은 하늘신을 의미하기보다 공간을 뜻했다. 구약성경에서 하늘이 신적 존재로 등장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수메르인부터 고바빌론시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하늘신은 최고신의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서 하늘신의 의미는 철저히 탈색됐다.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이 하늘신에 대한 표현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늘은 일차적으로 공간일 뿐이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표현한다. '하늘에 좌정하신 분께서 웃으신다'(시편 2,4),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궁전에 계시고 주님의 옥좌는 하늘에 있어 그분 눈은 살피시고 그분 눈동자는 사람들을 가려내신다'(시편 11,4)고 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하늘이 아니고, 하늘도 하느님이 아니다. 하늘은 하느님이 계신 공간일 뿐, 신은 아니다. 구약성경은 하늘에 인격이 있다고 오해할 만한 표현을 최대한 피하려고 애썼다. 아브라함이 하늘에 대한 믿음을 보이고자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때 창세기 저자는 하늘에서 주님의 천사가 말했다는 표현을 쓴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하늘이 인격화되는 표현을 삼간 것이다. 하늘을 장소로 이해한 까닭은 하늘을 하느님의 피조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탈신화화(脫神話化, Entmythologisie rung)란? 유명한 신약성경 학자 불트만(Bultmann)은 1920년대 '탈신화화'란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신약시대 세계관은 신화적이어서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큰 차이가 나므로 일종의 해석학적 여과장치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신화의 언어를 탈신화화해서 그 속뜻을 합리성과 과학에 익숙한 현대인의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탈신화화를 통해 고대 표현을 살리고 현대인들의 이해를 돕는 해석학적 틀을 제시했다. 성경은 신화적 세계관과 신화적 언어에 익숙한 옛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였다. 과학과 합리주의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신화의 내용을 낯설게 느낄 수 있기에 신화의 언어에 담긴 속뜻을 잘 이해해야 한다. 불트만의 주장처럼 우리는 당시 세계관을 먼저 파악하고, 신화의 언어를 벗겨내(탈신화화) 하느님 뜻을 이해해야 한다. 탈신화화는 '의미의 현재화'다. 탈신화화는 시대를 넘어 그 의미를 해석하고 전달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한다. 신약성경학에서 널리 수용되는 이 이론은 고대 이스라엘의 믿음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유일신 신앙이란 독특한 믿음을 보존한 고대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의 신화에서 많은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야훼 신앙에 맞춰 섭취하고 소화하여 고유한 믿음을 지켜냈다.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고대 근동 종교의 표상을 탈신화화해 야훼 신앙으로 소화했다. 이를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화'와 '재신화화'(再神話化)라고 부를 수 있다. 탈신화화와 재신화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다. 큰 나라의 큰 신들을 한낱 피조물로 만들어 그 권위를 추락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평화방송 TV 방송시간: 수요일 오전 9시(본방송), 금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일요일 저녁 9시, 월요일 오전 4시, 오후 3시퇴사자22013.01.29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상)](//cpbc.co.kr/CMS/newspaper/2014/04/rc/507594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43)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상)가난과 종교심의 상호작용 통한 아시아 토착화 신학 제시 가난과 종교심의 교차 아시아 신학을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가톨릭 신학자 중 하나는 바로 스리랑카의 예수회 사제인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Aloysius Pieris, 1934~ )다. 신학자이며 동시에 불교학자인 피어리스는 가난과 종교심이라는 두 가지를 아시아 신학의 핵심 요소로 여겨, 이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강요된 가난’이라는 냉엄한 실재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아시아 대륙에서, 전통적 종교문화 유산을 통해 내려오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복음적 요소를 재발견해 그리스도교 신앙적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아시아의 해방신학’(Asian theology of liberation)이라는 통합된 신학적 전망을 제시하고자 시도했다. 국내에서는 피어리스가 발표한 논문들을 한데 모아 번역한 「아시아의 해방신학」(성염 옮김, 분도출판사, 1988)이 출간돼 소개된 바 있다. 이 책이 피어리스의 본격적인 첫 저서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피어리스의 신학적 기조 사상이 잘 드러난다. 이처럼 아시아 상황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하는 피어리스의 신학은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전개됐으며, 이후 아시아 신학의 본격적 흐름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이러한 피어리스의 계속된 신학적 작업은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의 1999년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Ecclesia in Asia)라는 중요한 문헌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 그 배경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시아 교회」는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열린 1998년 아시아 주교대의원회의 후속 문헌으로 발표된 것이다. 이는 아시아 지역에 위치한 한국 교회를 위해서도 의미 있는 지침과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문헌이다. 아시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선포하는 길은 무엇이며, 또 성령의 인도를 따라 어떻게 복음 선포를 위해 투신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아시아 교회」는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고 봉사하며 복음의 증인이 돼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안내서이자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과 구원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는 아시아 상황을 규정짓는 첫 특징적 요소로서 ‘가난’을 제시한다. 「아시아 교회」(1999) 역시 통해 아시아의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현실들에 대한 분석을 제시한 바 있다. 여기에서 “아시아는 풍부한 자원과 위대한 문명들의 대륙이지만 몇몇 국가는 지구 상의 가장 가난한 나라이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결핍과 가난 그리고 착취로 고통받고 있는 곳”(34항)임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렇듯 절박한 상황에서 가난과 소외 속에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임무에 속한다. 바로 이러한 기본 사명에 대한 인식에서 피어리스의 신학적 성찰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다. 피어리스는 아시아의 종교문화 안에서 명맥을 이어오는 ‘자발적 가난’의 전통에 대한 복음적 해석과 그 보편적 실천을 통해 ‘강요된 가난’이라는 비복음적 실재를 넘어서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참다운 해방과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루카 6,20; 마태 5,3 참조)고 말씀하시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발적 가난을 통해 이뤄지는 해방과 구원 개념은 지극히 성경적이며, 이는 개인의 내면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전인적 차원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러한 가난과 구원의 긍정적이고 역동적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초대 교회 사막교부들의 삶과 그 뒤를 이은 수도생활의 전통이라고 피어리스는 말한다. 종교와 구원 한편, 종교는 가난과 더불어 피어리스의 아시아 해방신학의 중심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핵심적 요소이다. 피어리스는 성경에서 출발해 가난의 영성을 정립했고, 성경에서 발견되는 복음적 가난이 해방과 구원을 매개한다는 신학적 기조 사상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아시아의 종교문화 전통 안에서 발견되는 자발적 가난의 실천을 성경의 복음적 가난과 연결하게 해 재해석함으로써, 이제 아시아의 종교전통들 안에 내포된 구원론적 의미를 신학적으로 성찰해 제시하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 아시아의 가난과 종교심이 이루는 구원론적 교차가 이뤄지며 아시아적 특성을 구성하기에, 바로 여기에서 아시아 신학이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피어리스의 신학적 주장이다. 피어리스는 아시아에서 종교는 삶의 한 기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삶 자체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즉, 종교는 인간 실존의 포괄적이고도 모든 차원에 삼투된 ‘에토스’(ethos)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종교들이 단지 비그리스도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척돼 그 안에 담긴 포괄적 구원 사상들이 모두 매몰돼서는 안 된다고 피어리스는 주장한다. 종교는 “구원을 찾는 순수한 노력의 사회-문화적 체현(體現)”이라고 정의한다. 아시아의 가난이 단순히 경제적 문제로 환원돼서는 안 되는 것처럼, 아시아의 종교심 역시 단지 문화적 차원으로 축소돼서는 안 된다. 이 둘은 함께 교차하며 광대한 아시아 대륙에서 아시아 백성들의 실존적 삶의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종교심 피어리스는 가난의 차원을 도외시하고 순전히 문화적 차원에서만 이뤄지는 토착화 시도를 ‘문화순응’이라 부르며 비판한다. 반면에 아시아의 종교심을 염두에 두지 않고 경제적-사회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빈곤 극복의 시도 역시 올바른 토착화를 이룰 수 없다고 비판한다. 피어리스는 문화순응과 해방을 대당시키는 토론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고 말한다. 즉, 아시아의 가난을 간단히 ‘해방’으로, 아시아의 종교심을 단순히 ‘문화순응’으로 환원시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피어리스는 아시아의 가난과 종교심을 함께 통합적으로 볼 때에만, 아시아의 참다운 토착화 신학이 요구하는 문화적 맥락과 구원론적 의미를 모두 함께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피어리스는 아시아의 전통종교들과 만나 영성적 차원에서 대화하고 ‘자발적 가난’을 실천함으로써, 지금 ‘강요된 가난’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구원론적 의미를 일깨우고 연대해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아시아 교회의 참된 사명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피어리스는 아시아의 가난과 종교심의 상호작용이라는 아시아적 실재에 대한 기본 인식에서 출발해, 문화순응(inculturation)과 맥락화(contextualization)를 통합시키는 관점에서 자신의 ‘아시아 해방신학’을 형성하고자 하며, 바로 이것이 아시아의 참된 토착화 신학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피어리스는 아시아 신학의 핵심어를 ‘가난한 이들의 종교심’(the religiousness of the poor)이라고 표현하면서, 바로 이것이 성경의 중심 사상이라고 설명한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인도를 따라 이집트로부터 해방과 구원의 길을 걸어갔던 것처럼, 고난받는 아시아 백성들이 이제 하느님과 함께 참다운 구원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가난한 이들의 종교심’이란 핵심어이다. 광야의 위협과 고통,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으며 하느님을 믿고 ‘인간성의 온전한 실현’(full humanity)을 향해 나아가는 아시아 백성들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해방과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요르단 강의 세례에서 시작해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교회가 걸어가는 고난의 길은 마침내 온전한 자기희생을 통해 부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피어리스는 믿고 희망한다. 박준양 신부(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cpbc2014.04.30

“언제 어디서든 주님과 소통하고 대화하십시오”[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48. 데레사 성녀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기도 생활 ② 일거수일투족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자 세상 구원을 위한 수고가 되게 하겠다는 지향으로 일을 한다면, 그것이 곧 기도다. 기도의 초석인 선한 양심기도 생활을 떠받치는 또 다른 주춧돌로 ‘선한 양심’을 들 수 있습니다. 양심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지성소(至聖所)로 하느님께서 내밀한 당신의 음성을 속삭여 주시는 곳입니다. 그 음성에 귀 기울이며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기도는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평소에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경청하고 삶으로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녀 데레사도 이렇게 가르치곤 했습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그 첫째 주춧돌은 바른 양심입니다. 즉, 온 힘을 기울여 소죄를 피하고 가장 완전한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완덕의 길」 5장 3절).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양심을 통해 듣게 되는 자기 신분에 요구되는 모든 것을 충실히 실천하는 삶이 전제됩니다. 십계명을 어기는 사람, 죄를 짓는 사람, 남을 헐뜯고 미워하며 거짓말하는 사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제대로 기도할 리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삶의 회심을 전제로 하며 기도 그 자체가 회심으로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안일함은 기도의 적또한 성녀 데레사가 말하는 기도는 복음의 메시지가 초대하는 대로 주님의 구원 메시지를 전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기존에 안주하던 편안한 삶, 자신의 아성(牙城)을 포기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기도는 그 자체로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입니다. 그것은 ‘거짓 나’를 죽임으로써 하느님의 빛 안에서 ‘참된 나’를 발견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결코 나태, 안일함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기도 생활에 전념하던 수도자들은 나태하지 않고 깨어 있기 위해 끊임없이 화살기도를 바치고 성경 구절을 암송했으며 노동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자 노력했습니다. 성녀 데레사 역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안일과 기도는 서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완덕의 길」 4장 2절). 그 사람이 제대로 기도하는지 신앙 안에서 제대로 수덕(修德) 생활을 하는지는 그가 평소에 부지런한지 나태한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속이 주는 즐거움을 적당히 누리며 대충 살아선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헛된 집착에서 벗어날 것또한 성녀는 현세의 물질적, 영적 보화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마음이 기도에 큰 걸림돌이 된다며 그런 것에 애착하지 말도록 권했습니다. 물론 현세를 살아가며 그런 것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재산, 명예, 사람, 지식 등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것을 우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 마음에 하느님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당연히 기도에도 진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명예욕과 재산욕이 있는 한, 아무리 기도로 오랜 세월을 보냈다 하더라도 절대로 크게 진보하지 못할 것이고, 기도의 진미를 맛보지도 못할 것입니다”(「완덕의 길」 12장 5절). 은행에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재벌이라 할지라도 죽을 때 1원 한 푼 가져갈 수 없습니다. 세상을 발아래 두고 호령하는 최고 권력자라도 임기가 끝나면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뒷방 노인네일 뿐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 역시 주님을 향한 여정에서 함께 걷는 벗일 뿐입니다. 인간 아무개가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착각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헛된 것에 두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사랑을 옭아매는 헛된 미망(迷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그분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연장된 기도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는 숨 돌릴 여유조차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세계화로 인한 무한경쟁에 노출됨으로써 매일 일터에서 생존을 위한 피나는 전투를 치러야 합니다. 과연 그런 오늘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성녀 데레사가, 아니 교회가 가르치는 기도가 설 자리가 있을까요? 기도를 가르치는 영성 서적들은, 제대로 된 기도를 하려면 적어도 한 번에 30분에서 1시간은 고요한 곳에 앉아 집중해서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게 과연 현대인의 삶에서 가능할까요? 그럴 수 없다면 기도를 포기해야 합니까? 기도는 주님과 만나고 소통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덧없는 우리의 삶을 의미로 바꾸어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방향타입니다. 기도가 없다면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무의미하고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포기하는 것은 참된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진득하게 앉아서 기도할 수 없다면,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가운데 기도하십시오.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며 그 일을 봉헌하고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자 세상 구원을 위한 수고가 되게 하겠다는 지향으로 그 일을 하십시오. 걸으며 밥을 먹으며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상 모든 것이 기도가 되게 하십시오.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여러분은 어디서든 주님과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참된 의미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cpbc2015.03.04

비우고, 낮추고, 섬기는 공동체를 향해서울 역촌동본당 40주년, 다양한 행사로 공동체 활력 불어넣어서울 역촌동본당은 올해 설립 40주년을 뜻깊게 보내고자 '비워라, 낮춰라, 섬겨라'를 주제로 신자 성화에 힘쓸 계획이다. 서울 역촌동본당(주임 정병조 신부)이 올해 설립 40주년을 맞아 공동체 성화(聖化)에 힘쓰고 있다. 본당은 '비워라, 낮춰라, 섬겨라'를 주제로 올 한해를 보내기로 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누는 따뜻한 신앙 공동체로 거듭나고자 특별한 시간을 마련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보낸 40년, 노아가 대홍수 때 방주에서 보낸 40일, 예수께서 광야에서 단식하며 기도했던 40일 등 성경 속 '40'이란 시간이 지닌 의미에 맞춰 어려움과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여정' 성경공부에 300여 명이 참여해 말씀을 익히고 있으며, 본당은 구역별로 성경 전권(73권) 이어쓰기를 실시하고 있다. 어르신 시니어 아카데미에서도 120여 명이 복음을 되새기고 있다. 구세사의 여정에 비춰 신앙을 성찰하는 연례 신앙강좌도 마련했다. 3월 23일 '새 출발을 위한 떠남과 비움'을 주제로 한 서울대교구 총대리 조규만 주교의 강연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8차례 연중 특강을 마련했다. 조 주교는 첫 강좌에서 신앙선조인 아브라함과 모세의 떠남과 비움의 여정을 중심으로 강의하며 사순시기 기도와 자선, 단식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강좌는 △지극한 근심에 짓눌리는 예수님(4월 6일 오후 2시, 송봉모 신부) △ 들어라, 하느님 백성아(5월 9일 오후 8시, 차동엽 신부) △광야의 고독 그리고 침묵(6월 12일 오후 8시, 정순택 주교) △섬김으로 순교 영성을 오늘에 되살리기(9월 21일 오후 2시, 김길수 교수) △마리아의 선택과 우리의 결단(10월 12일 오후 2시, 손희송 신부) △죽으면 살리라, 십자가의 역설(11월 9일 오후 2시, 김혜윤 수녀) △새로운 탄생, 거듭남을 향해(12월 14일 오후 2시, 유경촌 주교) 등으로 진행된다. 본당은 또 4월 22일 기념 음악회를 열어 주님을 찬양하는 날을 보내고, 5월 25일 조규만 주교 주례로 설립 40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할 예정이다. 정병조 주임신부는 "뜻깊은 해를 맞은 본당 공동체가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내실을 다지고, 신앙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시간을 마련했다"며 "쇄신과 도약으로 새 시대 새 복음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1974년 불광동본당에서 분리, 설립된 역촌동본당은 유치원을 임시 성전 삼아 첫 미사를 봉헌한 후 그해 새 성전을 봉헌했으며, 이후 1980년과 2005년 새롭게 성전을 증ㆍ개축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신자 수는 7200여 명에 이른다.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백영민2014.04.01
![[신앙단상] 마지막 날에 주님을 기다리며](//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4314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마지막 날에 주님을 기다리며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우리의 삶은 기다리고 만나고 헤어지는 것의 연속이다.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자녀와 손자 손녀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며 산다. 지하철에서도 줄 서서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고 직장인은 즐거운 점심 시간을 기다리며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린다. 농부는 단비를 기다리고 학생은 졸업과 취업을 기다리며 복권을 산 사람은 거액 당첨의 요행을 기다린다. 이렇듯 기쁜 마음에, 조바심을 내며, 희망과 기대를 가지며 기다리고 지내는 것이 세월이고 인생이다. 그런데 기다림은 힘들고 초조한 일이다. 내 인생에서 기다린다는 것이 참 힘든 것임을 가장 심각하게 경험한 것, 그것은 초등학교 때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전차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제나 오실까 저제나 오실까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는 전차에서 내리지 않으셨다. 시간은 점점 지나 전차 간격이 뜸해지기 시작하면 머릿속에서는 온갖 걱정이 가득 차기 시작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집에서 기다리나 정류장에서 기다리나 기다리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그때는 정류장에 나가 하염없이 어머니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애가 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어머니가 전차에서 내리면 마음이 내려앉고 반가웠다. 그리고 어머니 손에 든 물건이 있으며 어린 내가 대신 들었다. 대학원생 때에는 지금의 내 아내가 된 어떤 여자를 만났다. 다 경험하는 바이겠지만 나도 이런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하면 하던 일도 힘이 나고 하루하루가 기대에 가득 찼었다. 그러다가도 만날 약속 시간에 늦기라도 하면 초등학교 때 어머니를 기다리는 것과 거의 똑같이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아무리 인생이 기다림의 연속이라 해도, 주님을 기다림이 어머니나 아내가 된 여인을 기다리는 기다림과 어찌 같을 수 있으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그마치 4000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렸고 이들의 역사 전체가 대림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온 인류의 희망이 되고 우리를 마지막 날 구원하실 주님을 기다린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구절이 “오십시오, 주 예수님!”(마라나 타)이 아니던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다림은 딱 두 가지다. 우리의 부활과 주님께서 다시 오심이다. 그래서 그런가, 미사통상문에는 기다린다는 표현이 꼭 두 번 나온다. 하나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는 또 달리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때가 있다. 최인호 베드로는 이렇게 주님을 기다렸다. “최 베드로는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9월 23일 오후 딸 다혜가 물었습니다. ‘아빠 주님 오셨어?’ ‘… 아니…’ 그 다음 날 다시 다혜가 물었습니다. ‘아빠 주님 오셨어?’ ‘… 아니…’ 다음 날, 9월 25일(선종하던 날) 같은 시간에 딸 다혜가 물었습니다. ‘아빠 주님 오셨어?’ ‘주님이 오셨다. 이제 됐다.’” 인생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이렇게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순간이 닥쳐올 것이다. 성할 때는 성가 91번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 하며” 하고 노래한다. 그러나 내 인생의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오심을 과연 초조하고 안타깝게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 아, 이 주님의 오심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 그런데 만일 그때 주님이 오시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cpbc2014.12.10
황창의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인간 노동과 셩경의 가르침노동, 삶을 더욱 소중히 살게 돕는 도구 노동 하면 쉽게 떠오르는 말은 무엇일까? ‘힘들다’, ‘어렵다’, ‘하기 싫다’ 등일 것이다. 사실 전통적인 사고 안에서 육체적인 노동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좋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족을 위해 육체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본다. 가족 부양을 위한 노동교육방송에서 즐겨 보는 것 중 하나가 극한의 직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자주 나오는 질문이 “어떻게 이리도 어려운 일을 계속할 수 있느냐”는 것이고, 출연자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아버지의 모습은 평생 가족을 위해서 어떤 힘든 일도 마다지 않는 모습으로 비친다. 육체적으로 힘든 극한의 일이지만 그 육체 노동을 이겨내는 힘은 아버지를 응원하는 사랑하는 가족이다. 어린 시절 내 아버지 역시 베트남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하셨다. 모두 힘들었던 60년대 말,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를 고향에 남겨두고 4년여 동안 전쟁이 한창이던 이국 땅에서 가족을 위해 일하셨다. 그리고 귀국 후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당뇨병이란 지병을 얻으셨다. 자신의 건강까지 해치면서 벌어온 외화는 아버지와 가족은 물론 우리나라 살림에도 큰 보탬이 됐다. 우리 아버지들은 70~80년대에 가족을 위해 독일의 광부로, 베트남의 기술자로, 중동의 건설 노동자로 나가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노동, 사랑 실천의 도구성경에서는 노동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까? 누군가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셨냐고 묻는다면, 예수님께서 양부였던 목수 요셉의 아들로 사셨기에 지상 생활의 대부분을 목수의 작업대에서 노동하면서 사셨던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마태 13,55; 마르 6,3 참조) 예수님께서도 인간과 똑같이 육체적인 노동을 하셨으며, 이를 통해 노동의 중요성을 몸소 알려주셨다.(「간추린 사회교리」 259항 참조)또한 공생활 이후 예수님의 설교에 나타난 다양한 비유는 노동하는 인간의 삶과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시대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가장 보편적인 일상의 삶을 예로 드셨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탈렌트의 비유’ 등 수 많은 성경 속 비유는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 동안 경험하셨던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유로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활 동안 끊임없이 일하셨으며, 인간을 병과 고통, 죽음에서 해방하는 놀라운 일을 이루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노동의 중요성을 가르치셨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일의 노예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간추린 사회교리」 260항 참조) 예수님의 이러한 노동 이해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땅을 지배하고 온갖 생물을 다스리라는 임무를 맡기셨다.(창세 1,28 참조)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 말씀을 거역함으로써 하느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졌다. 과거의 일부 신학자들은 죄에 대한 형벌과 저주의 결과로 인간이 노동하게 됐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가톨릭 사회교리는 인간 노동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다. 사회교리에 따르면, 인간 노동은 인간의 본래 상태에 속하는 것이고,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있었으므로 형벌이나 저주가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인간 노동은 그 자체로 선한 것이며 명예로운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노동은 부의 원천이고 적어도 품위 있는 생활을 위한 조건이기 때문에 명예로운 것이며 원칙적으로 빈곤을 막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256~257항 참조)사회교리는 이러한 노동의 긍정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동시에 인간이 노동 자체를 숭배하려는 유혹에 빠져 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에게 노동은 필수적이지만, 생명의 기원과 인간의 최종 목적이 하느님께 달려 있기에 인간은 노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노동이 안식일 계명과 깊이 연관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비록 노동의 숙명에 묶여 있지만, 안식일 규정은 더 충만한 자유와 영원한 안식의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일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고, 모든 종류의 착취로부터 인간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한다. 안식일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위한 것으로 모든 사람을 인간 노동의 반사회적 타락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계명이다.(「간추린 사회교리」 258항 참조) 오늘날 사회에서 인간 노동이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인간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노동의 소중함을 깨닫고 노동으로 얻은 소중한 재화로 주변의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백영민201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