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주교회의 편찬「죽음, 심판, 지옥, 천국」] (3)연옥과 지옥](//cpbc.co.kr/CMS/newspaper/2013/11/rc/482812_1.1_titleImage_1.jpg)
[위령성월/주교회의 편찬「죽음, 심판, 지옥, 천국」] (3)연옥과 지옥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 위해 연옥서 정화 죽은 후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정화되는 것이 연옥이다. 그림은 단테 「신곡」에 나오는 연옥 이미지. 연옥 1.연옥은 죽은 후의 정화를 뜻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삶을 마친 후에는 하느님께 심판을 받는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살려면 우리 또한 온통 사랑이어야 한다.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위해서는 티끌만한 이기심도 없어야 한다. 여기서 정화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가톨릭교회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정화를 연옥(燃獄)이라 부른다. 연옥은 '불의 감옥'이라는 뜻이다. 불은 정화를 뜻한다. 본디 연옥은 라틴어 푸르가토리움(Purgatorium)을 번역한 것으로, 이 단어의 동사형이 '정화하다'는 뜻이다. 교회는 이미 구약에서 나타나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관습에 근거해 죽은 후에도 정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다(2마카 12,38-45 참조). 교회는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해 왔다. 마지막 정화를 거쳐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역시 성경에 근거해 죽은 후에도 정화할 수 있다고 가르쳤고, 교회도 피렌체공의회(1439년)와 트리엔트공의회(1563년) 등 여러 공의회를 통해 연옥의 존재를 공식 인정했다. 2. 죽은 후의 정화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세계다. 오랫동안 연옥에서 겪는 정화를 불과 연결지어 생각해 왔는데, 불은 비유적 표현이다. 은과 금이 용광로 속에서 불순물이 제거되듯, 우리의 죄스러운 요소는 정화를 거쳐 주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에 합당한 상태로 바뀐다. 마지막 정화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뤄진다. 성경에는 하느님을 만난 이들이 여럿 등장한다. 이들의 공통적 특징은 두려움이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창세 3,8-10),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 떨었다(탈출 20,18). 고기잡이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루카 5,8). 우리가 죽은 다음 하느님을 만날 때도 이런 체험을 할 것이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정화의 순간으로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도록 건너가는 시간이다. 이 과정에는 고통이 수반된다. 정화의 고통은 우리의 구원, 곧 영원한 행복을 위한 것이기에 축복이기도 하다. 정화하는 사랑의 불에 타면 탈수록, 더욱더 순수해져서 하느님에게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죽은 이들의 정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영원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 정화 중인 이들에게 살아 있는 이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산 이들이 죽은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성인들의 통공'에 근거한다. 교회는 성인들의 통공을 명백히 인식했기에, 초대 그리스도교 이래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쳐왔다. 정화 중인 죽은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속한 이들이기에 살아 있는 신자들은 기도와 희생, 선행을 통해, 자신이 받을 대사를 연옥영혼에게 돌림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다. 지옥 1. 지옥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단절이다 성경은 다양한 표현으로 지옥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님께서도 '지옥'(게헨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다. "자기 형제에게…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교회는 '하느님과의 관계' 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지옥을 이해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부께서 당신에게 심판의 권한을 주셨다고 말씀하신다(요한 5,21-22 참조). 또한 최후 심판과 관련해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이고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라고 하시며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벌이 당신 자신과 관련돼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셨다. 2. 지옥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최종적 거부다 예나 지금이나 지옥과 천국을 하늘이나 우주, 지하세계에 있는 장소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교회는 지옥을 공간적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차원에서 이해한다. 지옥은 인간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부함으로써 그분과 영원히 결별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상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인간이 큰 죄를 짓고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받아들여 회개하기를 거부하면서 계속 고집스럽게 그 상태에 머문다면, 이는 스스로 빛을 버리고 어둠을 택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고통과 괴로움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지옥은 죽음 다음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체험할 수 있다. 일상 삶에서 하느님을 등지면 결국 자기 스스로 미움과 분노, 다툼, 살상과 같은 지옥의 상태를 만들게 된다. 3. 지옥은 하느님의 사랑과 모순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지옥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모순된다고 주장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지옥은 앞서 살핀 것처럼 인간 스스로 초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거듭 인간을 당신과의 친교로 초대하시는데, 인간이 이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지옥의 상황이 만들어진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는 이런 점을 잘 밝혀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거부하고 떠난 죄인이 회개해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를 큰 인내로써 기다려 주신다. 이 위대한 사랑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이 지옥이다. 4. 지옥 교리는 회개로의 초대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심판과 관련해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결정적으로 배제될 가능성을 분명히 언급하시며 경고하셨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4). 종말에 대한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회개로의 초대다. 지옥 교리는 우리가 영원한 벌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금 이 세상에서 참회와 회개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지옥에 대한 성경과 교회 가르침은 인간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위해 책임감을 갖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라는 호소이자 회개하라는 절박한 외침이기도 하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36항). 정리=이힘 기자 lensman@cpbc2013.11.12

서울대교구 노인의 날 행사- 은빛 노년, 주님 은총 가득하여라1년간 실천사항 봉헌 노인의 날 경축행사에 참석한 어르신들이 오락 시간에 서로 얼싸안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박하나 명예기자 '노인의 날'(2일)을 맞아 어르신들을 위한 잔치가 경기도 안성시 미리내성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서울대교구 노인사목부(담당 홍근표 신부) 가톨릭 서울 시니어 아카데미는 이날 '제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를 주제로 경축행사를 열고, 노년이 주님이 주신 은총의 시간임을 되새겼다. 교구 48개 본당 3500여 명의 어르신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전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주례하고, 교구 사제단이 공동집전하는 경축미사로 시작됐다. 미사 후에는 초대 가수 축하공연과 9개 본당 시니어 아카데미 발표, 시니어 아카데미 교사 축하공연 등이 이어졌다. 경축미사는 신앙의 해를 맞아 어르신 학생들이 신앙의 해 교구 5대 표어에 맞춰 1년간 실천한 활동을 봉헌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어르신들은 지난해 10월부터 이날까지 △성경공부 1558명 △묵주기도 22만 6409단 △신앙강좌 참여 1226명 △미사봉헌 10만 4480회 △가정성화 활동 1009명 등을 실천했다. 어르신들은 또 성경과 초, 「가톨릭교회 교리서」, 빵, 심장 모형을 봉헌했다. 정 추기경은 강론에서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은 첫째, 부모 뜻을 따라 사는 효자처럼 주님 뜻을 받들어 사는 것이고, 둘째, 남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인정하며 용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론 중 내린 소나기를 인생사에 비유한 정 추기경은 "오늘 날씨가 마치 여러분들이 살아온 인생과 비슷한 것 같다"며 "굴곡진 삶을 위로하고 남은 인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고 당부했다. 본당 발표 시간에 재미있는 율동을 선보인 권영화(모니카, 중앙동본당)씨는 "율동을 선보이기 위해 두 달 여 꼬박 연습에 매달렸다. 연습할 때는 매우 힘이 들었는데 무사히 발표를 마치니 뿌듯하다"며 "함께 고생한 여러 어르신들, 교사들과 더 친해졌다"고 웃음을 지었다. 홍근표 신부는 "추기경님 말씀처럼 먹구름 가득한 소나기가 지난 뒤 밝은 태양이 비춘 것이 어르신들 노년을 축복하는 것 같다"며 "어르신들이 한마음으로 즐기는 모습에 참으로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20, 23일 오후 4시에 평화방송 TV를 통해 방송된다. 박하나 명예기자cpbc2013.10.08
![[명동성당 사순특강] 1.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cpbc.co.kr/CMS/newspaper/2013/02/rc/441346_1.0_titleImage_1.jpg)
[명동성당 사순특강] 1.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사순, 하느님 만나는 희망의 시기… 말씀인 성경 통해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 가져야안병철 신부(서울대교구 사무처장 겸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사장) 평화신문은 18일 서울대교구 사무처장 겸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사장 안병철 신부의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 특강으로 시작된 서울 명동주교좌본당(주임 여형구 신부) 신앙의 해 사순특강을 이번 호부터 5회 연재한다. 특강은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대성당에서 열린다. △25일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조규만 주교) △3월 4일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양승국 신부) △3월 11일 '미사로 하나 되는 신앙'(손희송 신부) △3월 18일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서영남) 순이다. 사순은 단순히 담배나 술을 끊는 시기가 아니라 희망을 꿈꾸는 시기다. 우리 자신을 추스르는 시간이자 그동안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했던 걸림돌을 치우는 시간이다. 현대 정보화사회는 소통의 시대다. 스마트폰을 사는 것도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다. 하지만 '소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부부간에, 이웃 간에 진정한 소통이 없다. 언어는 얼마나 진정성과 진실성을 부여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이 먼저 그들을 선택해서 하느님을 알게 된 이들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정성과 진실성을 갖고 다가오셨다. 당신 백성을 통해, 또 그들의 응답을 통해 관계를 맺으셨다. 하느님과 백성은 소통이 잘 이뤄진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언어는 뜻 전달에 필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어떤 언어로 어떻게 통교하는가는 그때그때 다르다. '사랑'도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다르다. 사랑의 실체를 내 것으로 만들려면 구체적 삶이 뒤따라야 한다. 서로 소통한 결실이 이뤄져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알아듣는 표현으로 다가오신다. 엄마는 아기에게 '엄마'라고 부르게 하려고 수천 번 그 말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인내심과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갓난아이에게 '사랑'을 알려주려면, 수천 번 말해도 아이는 모른다. 그걸 가르쳐주려면 아기를 끌어안아주고 먹여주며 알아들을 수 있도록 눈맞춤을 하는 등 사랑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이처럼 당신께 다가갈 수 있도록 소통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말씀은 인격과 인격을 합체시키는 그분 자신이다. 우리가 하루에 한 말 중에 진정성과 진실을 담은 것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거짓말이나 자기 이익을 채우려는 습관화된 언어가 아닐까 싶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제인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를 강제하시지 않으시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부르시고 소통하신다. 그 방식은 그분 인격 자체다. 사순은 진정성을 가진 대화, 나와 하느님과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다. 내가 하느님을 선택했다면 내가 스스로 버릴 자격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주셨기에 내가 하느님을 선택할 수 없다. 응답하고 소통하고 그분 공동체에 들어갔다면, 내 실존은 그분의 응답 안에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말씀이며, 하느님은 당신 뜻을 말씀으로 전하신다. 하느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영원으로부터 계셨던 말씀이 하느님이시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보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욕망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면 응답해주신다. 탈출기에서 모세를 따라온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것이 없다고 걱정했을 때 만나를 내려주셨다. 성경도 언급했듯,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 이것은 당신의 모든 권한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최근 김수환 추기경님 선종 4주기를 지냈다. 평화방송TV 다큐멘터리에서 추기경님이 상계동 철거민들과 손잡고 이야기하시는 모습이 나왔다. 추기경님은 당신 것을 포기했기에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즉, 내 것을 포기함으로써 하느님을 만나고 소통할 수 있다. 사제들이 5년에 한 번씩 소임지를 이동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좋은 전통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것을 포기하게 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이다. 하느님은 묘하게 역사하신다. 버려야 하는 것과 통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신다. 암 덩어리는 신체 기관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죽게 된다. 이처럼 말씀이신 하느님과 소통하지 못하면 죽은 신앙인이다. 하느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양식이 돼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는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다. 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내가 기쁘게 살아야 한다. 결국 우리는 말씀을 따라야 한다. 사람의 기초체력이 좋아지면 하루를 더 활기차게 살 수 있다. 성당에 가는 것이 기쁨과 활력, 에너지를 주는 것이 돼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한다. 죽은 다음에 하느님 곁에 갈까 고민할 힘이라도 있으면, 오늘 당장 하느님 말씀을 읽어라. 조금씩 꾸준히 읽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성장한다. 말씀과 친숙해져라. 성경을 문학작품이 아닌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여겨 말씀 안에서 행복해져라. 정리=이힘 기자 lensman@pbc.co.kr cpbc2013.02.19
![[사도직 현장에서] "사람아, 너는 무엇으로 사는가?"](//cpbc.co.kr/CMS/newspaper/2014/02/rc/497117_1.0_titleImage_1.jpg)
[사도직 현장에서] "사람아, 너는 무엇으로 사는가?"김경식 신부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중고등학교사목부 가톨릭학생회 담당) 사제관 옥상에 올라가서 저녁 하늘을 바라봅니다. 오늘따라 무척이나 별들이 크게 보입니다. 큰 별들이 반짝이는 저녁 하늘 밑자락에는 아파트들이 즐비합니다. 환하게 불이 켜진 아파트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부엌에서 맛난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엄마도 보이고, 소파에 편안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아버지도 보이고, 손주들과 함께 숨바꼭질하는 할아버지도 보이고, 홀로 책을 읽고 있는 소년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 다들 사랑하며 행복하기 위해 살고 있겠지?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고, 아빠와 엄마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자, 손녀를 사랑하며 다들 행복하기 위해 살고 있을 거야. 가끔은 시련이 닥치겠지만, 그래도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서로 토닥이며 살고 있을 거야.' 그들을 바라보니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이내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이 제게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지? 나는 과연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성경에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고 하였는데, 나는 그렇게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정말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신자들에게는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는데, 정작 나는 그런 사랑을 하며 살고 있는가? 저들은 가정 안에서 사랑하고,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과연 사랑을 위해, 행복을 위해 깨어 살고 있는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4.27). 신자들이 열심히 사랑과 행복을 위해 달음박질치는 것처럼 사제인 저도 열심히 달음박질쳐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사랑의 달음박질에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사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님, 제가 언제나 당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cpbc2014.02.18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중)](//cpbc.co.kr/CMS/newspaper/2014/05/rc/508384_1.1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44)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중)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불교적 지혜, 상호보완 이뤄야 사랑이 지혜를 만날 때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Aloysius Pieris, 1934~ )는 스리랑카 출신의 예수회 사제로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아시아 신학을 전개했다. 그는 가톨릭 신학자이면서도, 전통적인 소승불교 국가인 스리랑카 출신답게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고 소승불교 연구를 통해 불교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그러므로 그의 아시아 신학이 전개되면 될수록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이라는 주제가 중심적 흐름으로 드러나게 된다. 피어리스 신학의 전반기에는 ‘가난과 종교심의 교차’라는 주제로 ‘아시아의 해방신학’이 개진됐다면, 후반기에는 ‘사랑이 지혜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이 강조되기에 이른다. 지난 2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전통 복장을 한 스리랑카 신자들과 만나는 프란치스코 교황 【CNS】 실천적 해석학 피어리스는 신학이란 한마디로 ‘하느님의 백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오늘날 주로 제3세계 사람들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등장하게 됨을 말한다. 여기에서 제3세계 사람들이란 어느 특정 지역의 거주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빈곤과 불의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참으로 행복하다고 선언하신 복음서의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21 참조)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사실,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도 1994년의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참조: 마태 11,5; 루카 7,22) 오셨음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에 어찌 더 큰 역점을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그토록 수많은 갈등과 참을 수 없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으로 점철된 우리의 세계에서 정의와 평화에 대한 투신은 희년의 준비와 경축을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51항). 피어리스에 따르면, 신학이란 하느님 백성의 가난과 고통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단순히 하나의 추상적, 이론적 차원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다. 즉, 신학이란 하느님 백성의 해방과 구원에 관한 실천(praxis) 혹은 그 과정(process)에서 기원하고 발전해 마침내 절정에 도달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이야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오늘날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 범주를 전통적 경계선으로부터 확장해야 함을 피어리스는 주장한다. 예를 들어, 아시아 신학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단순히 아시아의 그리스도 교회에 속한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난과 종교심이 교차하는 아시아 대륙에서 해방과 구원을 열망하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로 확장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시아 신학은 고난받는 아시아 백성들의 구원에 대한 열망이 표출돼 담겨 있는 아시아 종교 문화와의 만남과 대화를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즉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의 하느님 백성들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노력이 담겨 있는 종교 문화들에 주목해야 하고, 그 안에 있는 생생한 체험을 복음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피어리스는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 백성들의 가난과 종교심이 교차하고 합류하는 지점에서 드러나는, 구원에 관한 아시아적 체험들을 어떻게 복음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혹은 ‘해방에 대한 비그리스도교적 체험들에 대한 그리스도적 묵시’(Christic apocalypse of the non-Christian experiences of liberation)를 어떻게 개진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갖게 된다고 피어리스는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적 해석 작업에 있어, 피어리스는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긍정의 길’(via positiva)보다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택한다. 새로운 아시아 신학의 형성이 이론과 분석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결단과 행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언어적 사변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비구원적 상태에 대한 예언자적 선포와 새로운 미래를 위한 투신 속에서 참다운 구원의 실재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아시아적 종교심이 지니는 특유의 침묵이 말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즉 ‘하느님 체험’(God-experience)이라는 깊은 침묵과 그것이 가시적 언어로 표출되는 ‘인간에 대한 관심’(man-concern) 사이의 조화가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부정의 길’에 입각한 신학적 전개는 이론과 실천의 상호연관성을 전제하며, 나아가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성을 드러내게 된다고 피어리스는 말한다. 영성은 이론적 신학의 실천적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깊은 침묵 속에서 실천과 투신으로 드러나는 영성이 곧 언어적 신학을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길(way)이신 예수님을 직접 따름으로써 진리(truth)이신 그리스도를 잘 알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의 생명(life)을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6-7 참조). 사랑과 지혜의 만남 피어리스는 ‘부정의 길’을 통한 새로운 아시아 신학의 형성을 위해, 그리스도교가 아시아의 종교심 안에 담겨 있는 구원 사상과 만나야 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로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을 강조한다. 사실 불교는 아시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에게 퍼져 있는 종교 전통이기 때문이다. “내가 불교를 택했다면 그것은 내게 친숙한 분야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종교가 문화적 총괄성으로 보나 수적인 세력으로 보나 지리적 분포라든가 정치적 성숙도로 보나 범(汎)아시아적 현상이 돼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인도의 정신적 유산이지만 지금은 스리랑카에서만 인도 고유의 형상을 갖추고 있고 실제로는 모든 문화권 속에 침투해 있다. 힌두교와 도교와는 달리 불교는 단일 언어권이나 국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아시아의 여러 우주적 종교에 스스로 동화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불교가 여러 아시아 문화들을 형성해내었다”(「아시아의 해방신학」, 성염 옮김, 분도출판사, 1988, 179쪽). 그런데 피어리스가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대화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사랑(Christian agape)과 불교적 지혜(Buddhist gnosis)의 만남이다. “수도생활의 전통이라는 자리에서 동양이 그 창조적인 침묵을 통해 서양에 현존하고 있다. 여기서 동과 서를 대조시키는 것은 지리적 구분보다는 인간의 불완전한 두 가지 충동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하나가 없으면 불완전한 채로 남는다. 구태여 구분한다면 하나는 성경적이고 다른 하나는 비성경적 종교로서, 그 언어가 하나는 아가페적이고 하나는 그노시스적이다. 그리스도교 정통 교리는 언제나 아가페적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합법적인 그노시스가 있었다”(「아시아의 해방신학」, 111쪽). 피어리스는 그리스도교에서 본래부터 사랑(아가페)을 강조하는 전통이 주류적 흐름을 이뤘지만, 초대 교회부터 신비적 지혜(그노시스) 추구에 대한 합법적 전통 또한 존재했음을 말한다. 하지만 영지주의 이단의 악영향, 그리고 중세 이후의 지성주의적 신학 흐름과 법률주의적 교회관의 성립 속에서 이처럼 신비적 지혜를 추구하는 신학적 흐름은 약화, 간과됐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오늘날 불교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교 초기 전통의 신비 사상을 재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전기가 마련됐음을 피어리스는 강조한다. 사실, 불교 역시 신비적 지혜를 추구하는 기본 흐름에서 시작됐지만, 보살의 자비를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출현 등으로 아가페적인 추구의 흐름이 생겨나 내적 상호 보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아가페와 그노시스는 구원을 향한 인간의 초월적 추구의 두 가지 흐름이면서도 결국 상호 보완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피어리스의 주장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날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불교적 지혜의 만남이 세계사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 피어리스 신학 사상의 핵심인 것이다. 박준양 신부(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cpbc2014.05.07

주님 만날 준비하셨어요?사순시기 유래와 의미 곧 사순 시기다. 사순(四旬)은 말 그대로 40일을 의미하며, 예수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회개와 보속을 통해 주님 부활을 준비하는 때이다. 2014년 사순은 재의 수요일인 3월 5일부터 성주간 목요일이자 주님 만찬 목요일(4월 17일)까지인 약 40일이다. '사순'하면 늘 회개와 보속, 단식이 친구처럼 따라 붙는다. 사순기간에는 잘못을 뉘우치고, 선행을 하며 단식을 하는 등 일종의 고행을 통해 우리 몸과 마음, 영혼의 정화를 한다. 교회가 예수님 부활을 앞두고 사순 시기를 지내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기 전 성부 하느님 뜻을 따르기 위해 수난과 죽음을 겪으셨지만 이 때문에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는 영광을 받으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느님 자녀인 우리도 삶 안에서 주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다. 사순 시기는 또한 그리스도의 파스카(이스라엘 민족의 과월절 축제) 신비를 집중해서 묵상하는 시기다. 주님의 고통과 죽음을 슬퍼하는 시기가 아니라, 차분한 기쁨 속의 부활에 비춰 고통과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는 때이다.사순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는 시기다. 사진은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 세워진 대형 십자가. 평화신문 자료사 사순의 유래 「가톨릭 대사전」에 따르면, 사순이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기 전 이를 준비하는 시간을 두고 싶은 마음에서 부활 전 금요일과 토요일 엄격한 단식을 한 데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3세기 동방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금요일과 토요일 엄격한 단식 이전에 조금 덜 엄격한 단식을 하며 예수 부활 대축일을 며칠 동안 준비하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190~265?) 성인도 "일주일간 느긋하게 단식하며 부활을 준비했다"고 증언한 바 있으며 니케아공의회(325년) 역시 예수 부활 대축일 이전 40일 동안 준비 기간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3세기에서 4세기 초 이집트 신자들은 예수님이 세례 후 단식과 유혹을 받은 것을 기념해 40일 단식을 했는데, 이후 참회와 단식으로써 예수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것으로 뜻이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사순의 의미 사순을 뜻하는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는 하느님을 만나기 전 거치는 정화의 기간을 상징하는 숫자다. 이스라엘의 40년 동안의 방랑,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머문 것, 예언자 엘리야의 40일 단식,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40주야의 단식, 예수님 부활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을 지상에서 머문 것 등에서 40이라는 숫자가 언급돼 있다. 4세기 말 예루살렘에서는 부활 성야 전 주일에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예식이 행해졌는데, 이것이 예수 부활 대축일 전 주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탄생 배경이다. 사순기간이 예비신자들을 교육하는 기간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6세기께부터다. 당시 편찬된 「젤라시오 성무 집전서」에는 사순 제3~5주일에 예비신자들 모임이 있었고, 6세기 중엽부터 예비신자 모임이 주간 평일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다. 사순에 달라지는 전례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기도문과 성경 독서들의 적절한 선택과 배치로 하여금 세례를 준비할 수 있게 하고, 예수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삼기 위해 사순 시기 전례를 개편했다. 재의 수요일에서부터 성목요일 주님의 만찬 미사 전까지를 사순으로 지낸다고 지정한 것도 이때다. 단식과 기도의 시기임을 강조하기 위해 기쁨을 드러내는 요소인 대영광송과 알렐루야가 생략된다. 사순 평일에는 회개와 세례성사를 주제로 하면서 예수 부활 준비 시기로서의 주제를 드러내는 독서가 나온다. 평일마다 고유 성찬례 기도문이 있고, 사순 4주간부터는 요한복음을 거의 순서대로 읽는다.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순 사순은 예수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이지만, 우리 삶 안에서 회개와 보속, 기도와 같은 준비의 시간,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준비 시기로 삼을 수 있다. 시험을 앞두고 1년 넘게 열심히 공부한 수험생이 합격의 기쁨을 누리고, 국가대표 스케이트 선수가 피땀 흘려 연습한 결과 올림픽에서 값진 메달을 획득하는 것, 엄마가 가족과 행복한 저녁을 먹기 위해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에서도 사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주변 이웃과 내가 사는 이 세상을 둘러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사순을 의미 있게 보내는 방법이다. 국내외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사순 저금통'을 마련, 가족들과 함께 매일 조금씩이나마 저금통을 채워가는 것은 어떨까. 또한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고 물과 에너지를 아껴쓰며,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등 즐거운 불편 운동을 실천하는 것은 '생활 밀착형' 사순 보속이라 할 수 있다. 박기석(서울대교구 성서사목부) 신부는 저서 「기쁨의 편지」에서 "사순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으며 기획해 보라"면서 "이를 구체적으로 옮기는 숨은 일(자선ㆍ기도ㆍ단식)을 지금 이 은혜로운 때, 구원의 날에 시작하라"고 권했다. 그러면서 △겸손 △감사 △선교 △사랑 △특권의식 버리기 △용서 △비우고 낮추기 등을 제시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백영민2014.02.25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결정<17>윤점혜·정순매 첫 동정녀 공동체 만들며 신앙 모범 보이다 참수형 당해
오동희 화백이 그린 하느님의 종 윤점혜 아가타 영정. 그림제공=수원교구 어농성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가운데에는 ‘바르바라(Barbara)’라는 세례명을 쓴 순교자가 유난히 많다. 심아기(1783∼1801)와 정순매(1777∼1801), 구성열(?∼1816), 심조이(1813∼1839), 최조이(1790∼1840) 등 5위나 된다. 이들이 이처럼 바르바라를 자신의 세례명으로 쓴 데는 이 성녀가 ‘동정녀’라는 데 이유가 있다. 성인전을 통해 중세 때 가장 인기가 높고 대중적인 동정 순교자라는 걸 알게 된 조선 여인들이 자신의 수호성인으로 ‘바르바라’를 선택했다.그런데 또 다른 동정 순교자 ‘아가타(Agatha)’를 자신의 수호성인으로 삼은 윤점혜(아가타, ?∼1801)와 정순매(바르바라, 1777∼1801)는 실제로 동정녀의 삶을 살았다. 특히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의 지시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든 윤점혜는 그 공동체의 회장에 임명돼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사학징의」에 따르면, 윤점혜와 김경애, 조도애, 박성염, 이득임, 정순매 등 6명이 드러나 있는 이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사에 등장하는 첫 동정녀 공동체로, 처녀가 혼인하지 않은 채 혼자 산다거나 수도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던 당시의 엄혹한 유교 체제 속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려는 열망을 현실화했다. 124위 가운데 한 명인 윤유일(바오로, 1760∼1795)의 사촌 동생인 윤점혜는 양근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고, 어머니 이씨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일찍부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자 동정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그는 주위에서 혼인을 재촉하자 어머니가 마련해둔 혼수 옷감으로 남장을 지어 그 옷을 입은 채 사촌오빠 바오로의 집에 가서 숨었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온 뒤 가족과 이웃의 질책을 꿋꿋이 견녀내던 중 그는 1795년 주 신부가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해 2년 뒤 세례를 받았다. 상경한 뒤 남편을 잃은 과부 행세를 하며 동정을 지켜나가던 그는 어머니가 선종하자 여회장 강완숙(골룸바, 1761∼1801)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했으며, 동정녀 공동체를 형성한 뒤 회장에 임명돼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이후 그는 교리와 계명, 재(齋)를 엄격히 지키고 극기와 성경 읽기, 묵상에 열중해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됐다. 이뿐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자주 바치며 아가타와 같이 순교하기를 열망했다. 그러던 중 일어난 1801년 신유박해로 강완숙 등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포도청과 형조에서 신문을 받고 나서 양근으로 압송돼 그해 7월 4일 참수됐다. 당시 그의 목에서 흐른 피는 우윳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수원교구 이천 어농성지에는 그의 시신이 없는 의묘(가묘)가 조성돼 있다.1795년 오빠 정광수(바르나바, ?∼1802)ㆍ윤운혜(루치아, ?∼1801) 부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정순매는 자신의 올케인 윤운혜의 언니인 윤점혜가 회장으로 있던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1800년 주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로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애덕 실천에 정성을 다했다. 그렇지만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아주 뛰어난 용덕을 보여줬다. 단 한 사람의 교우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죽임을 당할지라도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말하며 여러 차례 신앙을 증거했다. 마침내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자신의 고향인 여주로 이송돼 그해 7월 3일 참수형을 받고 24세로 순교했다.신체적으로 순결성을 지키는 상태를 뜻하는 ‘동정’의 목적은 사랑의 도구로서 하느님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의 결실을 보는 데 있다. (1코린 7,32-35 참조) 그러기에 혼인생활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제각기 다른 생활양식을 하고 있지만, 혼인생활이나 동정생활은 사랑으로 자신을 해방한다는 공통된 목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점혜가 회장으로 있던 동정녀 공동체 또한 ‘영육으로 신성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또 이들은 이 목적을 성취하고자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체 생활을 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평화신문2014.06.10
![[가톨릭 문화산책]<40> 문학(8) 김남조 시인의 연작 '막달라 마리아'](//cpbc.co.kr/CMS/newspaper/2013/11/rc/482799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문학(8) 김남조 시인의 연작 '막달라 마리아' 지금 우리 앞에 예수님 재림을 희망하며 노래 마리아 막달레나는 신약성경에 12회나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 여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상반된다. 부활한 예수를 처음 목격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돼 있고, 예수의 또 다른 제자였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창녀였다는 악평도 있다.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는 591년, 루카복음에 나오는 '죄인 여자'를 근거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였다고 강론했다. 이후 1400년 가까이 마리아 막달레나는 창녀로 낙인이 찍혔다. 1988년에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사도들의 사도'로 격상했다. 마르코ㆍ루카ㆍ요한복음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묘사를 종합해본다.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 조르주 드 라 투르, 1640~45년경, 캔버스에 유채, 128×94㎝,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파리.성경에 묘사된 마리아 막달레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귀신에 들린 여인이었다.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해대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거나 자신의 몸을 스스로 해하는 거친 행동도 했다. 한 귀신도 아니고 무려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광기어린 행동을 했던 것이다. 이렇듯 막달라 마리아는 몸과 마음이 망가진 채 살고 있었다. 이 여인을 감싸주고 바른 길로 인도한 이가 예수였다. 마리아는 이후 예수를 따라다니며 옆에서 수발했다. 마리아와 예수의 만남은 예수가 행한 기적 덕에 이뤄졌다. 죽은 지 나흘이 돼 악취를 풍기던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를 예수가 살려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까지 예수를 믿게 됐다. 바리사이파 시몬이 그 일을 축하하며 연회를 베풀었다. 마리아는 인도산 값비싼 향유인 감송유(甘松油)를 가지고 나와 감사의 표시로 예수의 머리에 조금 뿌렸다. 마리아의 돌발적인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예수는 미소 지었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가운데 마리아는 몸을 굽혀 의자에 앉아 있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르기 시작했고 향기는 집안 가득 퍼졌다. 순간 유다가 일어나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저런 아까운 일이 있나! 저 향유를 팔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을 수 있을 텐데!" 계산이 빠른 유다로서야 당연히 분노할 일이었다. "왜 이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습니까?"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였다. "이 여인이 하는 대로 그냥 두어라." 예수는 유다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내 장례 준비를 위해 그것을 장만해 두었다고 생각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그대들과 함께 있을 것이나 내가 그대들과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것을 전하여 기억토록 하라." 예수는 이 말로써 마리아의 행동이 염문으로 와전될 것을 막았고, 그와 함께 마리아를 남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줄 아는 여인으로 격상시켰다. 김남조 시인이 생각한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는 두 가지 큰 역할을 한다. 예수의 십자가 임종과 땅으로의 하강, 묘소에 안치되기까지 최후를 지켜본 증인 역할과 부활 후 예수 발현을 최초로 목격한 이의 역할이다. 하지만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발라준 일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를 일반적인 남녀관계로 간주한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 영지주의(靈智主義) 외경 중엔 두 사람 연인관계로 그린 것이 있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나 록 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이를 따르고 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에선 두 사람이 부부였다고 나온다. 시인 김남조(마리아 막달레나, 86)는 「나아드의 향유」라는 시집에서 처음 '막달라 마리아 1'이라는 제목으로 연작시의 첫 번째 시를 쓴 이래 7번까지 쓴다. 첫 번째 연작시가 1955년에 나온 뒤 두 번째 시가 제 9시집 「동행」에, 세 번째 시가 제 12시집 「바람세례」에, 4~7번째 시가 제 14시집 「희망학습」에 실려 있으므로 연작시 7편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이 장장 43년이다. 시인은 이 긴 세월 마리아 막달레나란 인물에 대해 생각했다. 왜일까? 당신이 임종하시올 때/ 더욱 당신께의 귀의를 기원하였습니다/ 주여/ 더운 눈물이 돌 속으로 스며들고/ 음산한 바람이 밤새워 부는 무덤에까지/ 일체의 비교를 넘으신/ 당신의 죽으심을 섬기려 왔사옵니다/ 주여// ―'막달라 마리아 1' 제 1연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또는 기도하는 듯한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시의 내용은 예수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이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이 「나아드의 향유」인 만큼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와의 관계가 시인에게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시집 제목과 같은 시 '나아드의 향유' 위에 정리한 성경 내용을 시로 쓴 것이다. 십자가 처형 이후 마리아의 입을 빌려 "우주만치 남던 자비"를 지닌 예수에 대한 시인의 찬미가이기도 하다. 신을 사랑한/ 사람 세상의 여자 마음아 여자 마음아/ 천만 줄기의 냇물의 지하수의/ 그 더 깊은 데에까지/ 끓는 단맛의 피로 흘러 흘러서/ 진홍의 폭죽/ 천하 삼월의 꽃나무로/ 처연히 솟아난다 ―'막달라 마리아 2' 끝 연 예수를 사랑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을 시인은 진홍의 폭죽을 터뜨리는 삼월의 꽃나무에 비유했다. 생전엔 차마 말할 수 없어 가슴앓이를 하던 막달라 마리아가 죽어서 꽃나무로 피어난다니 보통의 순애보가 아니다. 나머지 연작시도 예수에 대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갈망이 주요 모티브가 된다. "언제 어디서나/ 주를 따라 맨발로 달려가는/ 머릿단 길고 검은/ 유태 여자"(막달라 마리아 3)의 참사랑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고귀한 것이라고 시인은 믿고 있다. 천지간 오직 변치 않는 건/ 죽음과 참사랑뿐/ 하여 당신에게선/ 어느 새벽 어느 밤에도/ 손발에 못박는 아픔/ 그치지 아니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4' 끝 부분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고 예수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긴다. 시인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를 연모했다는 이유에만 흥미를 느껴 여러 차례 시화했던 것이 아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를 독자에게 들려주기 위해 마리아 막달레나의 입을 빌렸던 것이다. 부활의 아침/ 날빛보다 밝으신 어른이/ 친히 이름 부르시며 당신 앞에 보이셨기에/ 비통은 환희로 보답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5' 부분 사랑한 이와의 이별 중에서/ 신으로 승천하신 분과의 이별은/ 당신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6' 부분 시인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 예수에 대한 경배의 뜻을 담아서 이런 시를 썼을 수도 있다. 시인 자신이 예수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고자 성경 속의 인물인 마리아 막달레나를 끌어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예수를 존경하고 따른 마리아 막달레나가 돼 두 편의 시에서 예수의 부활과 승천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본 시인은 연작시 7번에 가서는 그 옛날에 약속한, 재림을 할 것인지 예수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그것도 한국인으로 할 것인가를. 당신은 환생을 하시는지요/ 한 번은 한국인으로/ 이 땅에서 태어나실는지요 (…)// 아아 모처럼/ 형장에도 햇빛 부시듯/ 통한 중에 감격하는/ 이 한국의 봄날에/ 당신은 오실는지요 와서 그렇게/ 살아주실는지요 ―'막달라 마리아 7' 1연, 끝 연 화자는 어느 봄날 "통한 중에 감격하는"데, 이 좋은 봄날에 이 땅에 와서 나랑 살아줄 수 없겠느냐고 묻는 질문 속에는 시인 자신이 마리아 막달레나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이 마음은 결코 세속적인 것이 아니다. 시인에게는 "당신의 장기이신/ 파도 같은 통곡과 참회/ 그리고 사랑을/ 울창한 숲으로 땅 끝까지/ 자라게 해주실" 분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고 예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려는 시인 의지의 산물이기도 하다. 시인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를 아무 사심 없이 사랑했다고 생각해 예수를 모성으로 감싸안으려고 한다. 이윽고 만민의 구세주인 예수가 부활하여 우리 마음속에서 살아난다. 이 새벽 막달라의 여자 마리아는/ 맨발로 숲길을 달려가고/ 흘리신 보혈에선/ 빛의 폭포수 솟아나나이다/ 섭리하신 모든 것 성숙되었으니/ 주께서 무덤을 나서실 일만 (…)// 영혼의 밑바닥을 울음으로 흔드시는/ 그분 정녕 이상하여라/ 그 이상한 하느님 지금 살아나시네/ 부활의 주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리스도, 아멘.―'이제 잠을 깨시는 주여' 부분 앞에서는 재림을 간절히 소망했을 따름인데 제 13시집 「평안을 위하여」에 와서는 "그 이상한 하느님 지금 살아나시네" 하면서 부활했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2000년 전 그때의 부활이 아니다. 수많은 인간의 울음소리와 비명소리가 하늘나라를 울려, 예수가 마침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뒤 인류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표명하고 있다. 구세주로서 예수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주기를 소망할 정도로 시인의 현실 인식은 비관적이다. 끊임없는 전쟁, 에이즈 등의 질병, 온갖 사회 범죄, 크고 작은 테러…. 시인의 슬픔은 이런 수많은 비극에 연유한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분신이 되고자 원했던 것은 현세의 슬픔에서 벗어나려는 눈물겨운 노력의 소산이었으리라.이승하 교수(프란치스코, 중앙대 문예창작학과)cpbc2013.11.12
 심판](//cpbc.co.kr/CMS/newspaper/2013/11/rc/481757_1.1_titleImage_1.jpg)
[위령성월/ 주교회의 편찬 「죽음ㆍ심판ㆍ지옥ㆍ천국 」](2) 심판 주님 자비 드러나는 최후 심판, 희망의 날 인간의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온다. 사진은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이 있는 바티칸 성 시스티나성당에서 교황과 추기경, 주교단이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 【CNS자료사진】1.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온다 가톨릭교회는 사람이 죽으면, 하느님께 심판을 받는다고 믿고 가르쳐왔다. 모든 인간은 상선벌악(常善罰惡) 원리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1)개별 심판 하느님의 심판은 '개별 심판'(私審判)과 세상 종말에 있을 '최후 심판'(公審判)으로 구분된다. 개별 심판은 각 사람이 죽은 후에 즉시 받게 되는 심판으로, 살아 있던 동안의 행실과 믿음에 의한 셈을 치르는 것이다. 개별 심판 관련 성경 구절로는 불쌍한 라자로의 비유(루카 16,22 참조),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죄수에게 하신 말씀(루카 23,43 참조) 등이 있다. 모든 인간이 죽음 직후에 하느님 앞에서 그 삶의 행실에 따라 즉각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기본 교리다. 이러한 심판 교리는 우리에게 삶을 더욱 진지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촉구한다. 2)최후 심판 신약성경은 최후 심판에 대해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31-33,46) 하고 분명히 말한다. 이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적인 심판이 이뤄지고, 각자 삶의 행실대로 상 또는 벌이 주어진다. 최후 심판의 심판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최후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이라고 가르쳐 주셨던 이웃 사랑(루카 10,27-37 참조), 특히 곤경에 놓인 사람들에게 대한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최후 심판은 악에 대한 단죄만이 아니라 세상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 최후 심판을 통해 불완전한 것, 악한 것이 모두 끝나는 가운데 궁극적 완성이 이뤄진다.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극복되고, 죽은 이들이 부활해 산 이들과 함께 모두 주님을 맞이하게 된다. 최후 심판을 거쳐 완성될 세상은 모두가 초대된 혼인잔치, 자연과 인간의 평화가 실현되는 낙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된다. 2. 심판을 통해 하느님 정의와 자비가 함께 이루어진다 교회는 최후 심판에 관한 가르침을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자비로운 호소와 희망에로의 초대로 이해한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은혜로운 때에 구원의 날에'(2코린 6,2) 회개하라고 하느님께서 아직도 사람들에게 하시는 호소이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믿는 이들 가운에서 칭송을 받으실'(2테살 1,10) 주님의 재림에 대한 '복된 희망'(티토 2,13)을 알리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41항). 이사야 예언서는 "정녕 만군의 주님의 나이 오리라. 오만하고 교만한 모든 것, 방자하고 거만한 모든 것 위로 그날이 닥치리라"(이사 2,12)며 하느님의 무서운 심핀이 이뤄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한다. 하지만 심판의 날은 꼭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만은 아니다. 그분의 자비로우심과 진리로 드러나는 희망의 날이기 때문이다. 재림하실 예수님 뜻대로 살아온 이들에게 최후 심판은 크나큰 희망의 날이다. 세상 모든 불의가 극복되고 하느님 정의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맞을 개별 심판도 두려움과 공포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정의만을 앞세우는 분이 아니라, 풍성한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 그분의 심판은 하느님의 충만한 정의를 드러내는 동시에 자비로우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3. 인간의 전 존재가 심판받는다 교회 가르침에 따르면, 최후 심판에서는 모든 사람이 영혼과 육신 모두를 포함해 심판을 받는다. 이에 반해 개별 심판에서는 죽음으로 육신과 분리된 영혼이 즉시 심판을 받는다.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지만, 둘은 서로 갈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죽으면 영혼과 결정적으로 분리돼 영혼만이 불멸성을 얻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인간을 전체적고 전인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1)육신의 부활을 믿는다 죽음 이후의 심판과 부활은 영혼만이 아닌, 영혼과 육신을 포함한 인간 전체 차원에서 이뤄진다. 그리스도교는 영혼만의 구원을 주장하는 이들을 반대했고, 사도신경을 통해 '육신의 부활'이 이뤄질 것임을 고백한다. 그런데 세상 종말에 이뤄질 육신의 부활이란 땅에 묻혀 썩어 없어졌거나 화장된 옛 육체의 생물학적 회복이 아니다. 새로운 차원에서의 불사 불멸성이 우리 전인적 인격에 주어진다는 의미다. 바오로 사도는 육신의 부활이란 우리의 육신이 새로운 차원의 몸, 곧 '영적인 몸'으로 다시 나는 것이라고 했다(1코린 15,42-44 참조). 우리가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나서 불사불멸성을 지니게 되는 것은 온전히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2)죽음 이후에는 어떤 상태가 되는가? 교회는 죽음 다음에 영혼과 육신이 잠정적으로 분리되는 '중간 상태'는 인정한다. 인간이 죽으면 육신은 썩고 없어지지만, 그 영혼은 개별 심판을 받게 된 후에 마지막 날에 육신의 부활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근거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를 들 수 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개별 심판을 받은 후 최후 심판까지인 '중간 상태'에 대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체험하고 있는 물리적 시간관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시간은 이 세상의 시간 계산법을 적용할 수 없는 질적인 시간이며, 변화와 축복의 신비로운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시간은 우리의 직선적이며 양적인 시간관을 초월한다. 왜 개별 심판 이후에 최후 심판이 있을까? 한 인간의 선한 행동이든 악한 행동이든 그것은 그 한 사람에게만 머물고 끝나지 않고, 인간 공동체에 연쇄적으로 미치게 된다. 우리 계산으로는 인간 죄악의 깊이와 처참함을 올바르게 알 수 없으며, 인간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결정적 사건인 심판은 우리에게는 아직 신비로 남아 있다. 정리=이힘 기자 lensman@pbc.co.krcpbc2013.11.05
사순 특강ㆍ피정으로 기쁜 부활 준비하자 서울ㆍ광주ㆍ청주 등 각 교구 다양한 프로그램 마련 회개와 보속을 통해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시기(5일~4월 17일)를 맞아 전국 교구와 각 본당은 사순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다양한 주제의 특강과 피정을 마련하고 있다. 주요 사순특강을 소개한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서울대교구 서울대교구는 명동본당을 비롯한 여러 본당에서 사순특강을 개최한다. 명동본당은 17일부터 4월 7일까지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대성전에서 사순특강을 연다. 17일, 24일에는 최승정(홍은2동본당 주임, 가톨릭대 교수) 신부가 '구약성경과 성서'를 강의하고 31일, 4월 7일에는 허규(가톨릭대 성신교정) 신부가 '사순의 의미', '나자렛 사람'을 주제로 강의한다. 논현동본당은 광주가톨릭대 총장 노성기 신부의 특강을 준비했다. 19일(사제직에 대한 교부들의 두려움과 떨림), 26일(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교부들의 명언), 4월 2일(은총의 삼위일체 신비의 삶) 오후 8시에 강의한다. 광주대교구 광주대교구는 전현직 주교들이 강사로 나서는 '주교님과 함께하는 사순특강'을 마련했다. 광주가톨릭대 평생교육원에서 열리며 3월 19일 옥현진(교구 총대리) 주교를 시작으로 25일 윤공희(제7대 교구장) 대주교, 4월 2일 최창무(제8대 교구장) 대주교, 4월 9일 김희중(현 교구장) 대주교의 강의로 이어진다. 저녁 7시. 청주교구 청주교구는 9일부터 30일까지 매주일 오후 2시 충주문화회관에서 사순 특강을 개최한다. 강의는 9일 '성사생활-사목교서를 바탕으로 준비'(곽승룡 신부, 대전가톨릭대 총장)를 시작으로 16일 '올바른 신앙생활'(최창무 대주교), 23일 '참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두봉 주교, 전임 안동교구장), 30일 '복음 선포'(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장)로 이어진다. 대전교구 대사동본당은 12일부터 4월 2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30분 '향심 기도'를 주제로 특강을 마련했다. 이승구(서울대교구 사목국 영성사목부) 신부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 '기도가 깊어지는 과정', '향심기도 이론ㆍ실제'를 주제로 강의한다. 내동본당은 9일부터 4월 13일까지 매 주일 교중미사 강론을 사순특강으로 한다. 9일 '용서할 수 있는 신앙인이란?'(오태순 신부,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16일 '신앙인이 체험하는 고통'(곽승룡 신부, 대전가톨릭대 총장), 23일 '영원한 생명수 복음'(함세웅 신부,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30일 '주님을 알아보는 신앙인'(홍문택 신부, 花(화)요일아침예술고등학교), 4월 6일 '죄인이 찾는 세상'(김정남 신부,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4월 13일 '고통이 주는 은총'(김정수 신부, 내동본당 주임) 순으로 진행된다. 춘천교구 춘천교구 겟세마니 피정의집 원장 신호철 신부가 14일부터 4월 11일까지 '회개, 보속, 은총'을 주제로 강원 인제군 피정의 집에서 '사순절 금요일 하루 피정'을 연다. 피정은 미사와 고해성사, 십자가의 길 등으로 진행된다.백영민2014.03.04

예수 그리스도, 진정한 삶의 길 보여준 스승[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5.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⑮ 데레사 성녀는 예수님을 ‘신랑’으로서만 아니라 참 ‘스승’으로 모셨다. 사진은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콘. 예수님을 스승으로 고백하고 따른 성녀 데레사성녀 데레사가 예수님과 더불어 맺었던 관계는 다양하고 풍요로웠습니다. 성녀는 예수님을 자신의 ‘신랑’으로서만이 아니라 ‘스승(Maestro)’으로 고백하고 따랐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이미 복음서,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이 그리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만, 성녀에게 있어서 특이한 점은 이를 자신의 삶 속에서 독특한 영성적 색채로 승화시키고 실제적인 인격적 관계로 풀어냈다는 점입니다. 성녀에게 있어서 ‘스승’이란 말은 인간 예수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호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여정에서 그를 가장 잘 가르치고 인도해주는 참된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녀가 혼신을 기울여 노력했던 기도와 관련해서 보면, 복음서 곳곳에 나오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신자들이 매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할 중요한 가르침일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이 기도 가르침의 대상이자 목적이었습니다. 성녀는 이 점을 자신의 기도에 잘 통합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성녀에게 예수님은 ‘스승’이자 스승께서 가르치는 ‘내용 그 자체’이고 그 내용이 가르치는 ‘궁극적인 지향점’이기도 했습니다.참된 지혜이신 천상의 스승 예수무엇보다도 성녀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뿌리를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근본 사실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예수님을 ‘천상의 스승’, ‘지혜의 스승’, ‘신적 스승’이라 부르곤 했습니다. 성녀가 예수님을 스승으로 본 것은 그분이 온 우주 만물의 근원인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그분의 인성(人性)을 통해 비로소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분의 인간적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늘 인간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특징짓는 측면 중에 하나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전통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의 지혜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부의 영원한 지혜께서 우리를 위해 강생하심으로써 이 시간 안에서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지혜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천상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참된 스승이자 지혜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천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스승’이신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다고 성녀는 보았습니다.인류의 스승이신 인간 예수이렇듯 인간이 되신 영원한 지혜인 예수님은 강생을 통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가르치십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의 인성이야말로 영원한 지혜께서 우리에게 이르기 위해 거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그래서 성녀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지혜는 나자렛 사람 예수 안에서 드러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으로 회자되곤 했습니다. 또한 이런 선상에서 성녀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영성생활을 통해 모든 면에서 닮아 가야 할 모델이자 사랑으로 온전히 일치해야 하는 궁극적인 대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 행복의 일체이시요 구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을 일부러 떠나다니, 그게 될 말입니까?… 길잡이, 어지신 예수님을 놓쳐 버릴 때, 바른길을 가늠하지 못하는 법… 주께서는 당신을 길이시라 말씀하십니다”(「영혼의 성」 6궁방 7장 6절). 인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을 즉시 만나게 해 주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이요 하느님이신 예수님 안에 뿌리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하느님 체험에 이를 수 있습니다.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성녀가 스승이신 예수님과 그분이 인류에게 전하는 가르침에 대해 말할 때 전제했던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계시’였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다는 의미에서 성녀는 그분을 유일하고 참된 스승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가르침의 내용은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분의 인격 자체야말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공간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 내면에 빛을 비춰주셔서 계시된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성녀는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 사건인 예수님을 단순히 지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존적인 삶의 차원에서 감지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이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 되어 가는 과정은 단지 그분이 가르치신 말씀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럴 때 그는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며, 그렇게 영적으로 변화될 때 비로소 그분의 가르침을 충만히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녀가 이르고자 했던 완덕(完德)이란 스승이신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내용, 즉 그리스도의 신비를 머리로만이 아니라 삶을 통해 구현하고 그 신비와 하나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을 진리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참된 스승, 큰 어른의 존재가 아쉬운 오늘 한국 사회에서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여러분 인생의 참된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렵니까? 그분이야말로 여러분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보여줄 스승이 되어주실 겁니다. cpbc2014.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