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다[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13. 타브가 '빵의 기적 기념성당'교회 전승은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장소가 바로 타브가라고 한다. 초세기부터 많은 신자가 이곳을 순례했고, 예수께서 빵을 얹으셨다는 바위 위에 제대를 쌓고 성당을 지었다. 사진은 빵의 기적 성당 제대 모습. ▨ 빵의 기적 복음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40개를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네 복음서 모두가 소개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빵의 기적'이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마르 6,30-44; 마태 14,13-21; 루카 9,10-17; 요한 6,1-15) 내용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 빵의 기적이 예수의 일생에서뿐 아니라 구원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직접 이 빵의 기적에 관한 의미를 자세히 설명(요한 6,22-59)해 주셨다. 빵의 기적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묵상 글로 정리했다. "하느님께서 땅을 통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 세 가지는 빵과 포도주, 올리브 기름(시편 104편)이다. 빵은 창조주가 선하시고 피조물이 좋다는 사실을 실체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단순한 일상생활의 소박함을 상징한다. 갈릴래아에서 벌인 예수의 활동이 끝나갈 무렵 그분이 이루신 빵의 기적은 그분의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보여주는 탁월한 표징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그분 활동의 갈림길이 되기도 했으며 그때부터 그분의 활동은 뚜렷하게 십자가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빵의 기적이 이뤄진 끝에, 사람들이 예수를 임금으로 모시기에 앞서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구원을 순전히 물질적으로만,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만 보았다. 그래서 인간을 그런 존재로 축소시키고 아울러 하느님을 사실상 완전히 제외시켜 버렸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먹여 살리는 선물은 그보다 더 위대하고 다른 수준에 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 말씀을 양식으로 삼을 수 있다(요한 4,34 참조). 그러나 율법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뒷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율법은 '그림자'일 뿐이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이것은 예수께 대한 믿음으로 이뤄진다. 이 말씀에는 육화, 곧 말씀이 사람이 되신 행위가 최종 목표에 이르게 되었으며 최종적인 완성이라는 사실이 암시된다. 그것은 죽음에까지 이르는 예수의 자기 헌신과 십자가의 신비다. 무엇보다 성체성사의 근본이 되는 예수의 제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하신 빵의 담화에서는 육화에서 부활에 이르는 길을 거치면서 성체성사를 향해 방향을 잡는다. 그리하여 성찬례는 그리스도인의 실생활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됐다"(「나자렛 예수」 1권, 390~402쪽 참고) ▨타브가 예수께서 이 빵의 기적을 행하신 곳이 '일곱 우물'이 있던 타브가 지역이라고 교회 전승은 밝히고 있다. 타브가는 예수께서 '참행복'에 관해 산상설교를 했던 쉐이크 알리 산 아래 갈릴래아 호수 서북쪽 연안에 있다. 예수 시대 이전부터 이 지역을 '일곱 우물'을 뜻하는 히브리말 '엔 세바', 아랍말 '아인엣 타브카', 그리스말 '헤프 타페곤'이라 불렀다. 타브가는 성경 표현대로 '외딴 곳'(마태 14,13; 마르 6,32)이다. 오늘날도 순례자들의 발걸음 소리만 메아리칠 정도로 한적한 곳이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자신이 거주했던 카파르나움에서 약 3㎞ 거리에 있는 외딴 이곳을 간혹 찾아와 군중을 피해 조용히 쉬며 기도를 했다. 그런데 마르코ㆍ마태오ㆍ요한 세 복음서는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장소를 모두 '외딴 곳'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루카만이 '벳사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벳사이다는 타브가와 정반대 지역이다. 카파르나움에서 타브가는 서쪽, 벳사이다는 동쪽에 있다. 유일하게 루카만이 빵의 기적 장소를 밝히는데도 베드로와 안드레아, 필립보의 출생지인 벳사이다에서 빵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성경고고학자들의 일반적 입장이다. 우리말로 '어촌'이란 뜻의 벳사이다는 많은 상인이 드나드는 항구 마을로 결코 외딴 곳이 아니다. 또 루카는 다른 세 복음서 저자들과 달리 예수의 목격 증인이 아니고, 팔레스티나의 지형도 잘 모르는 저자였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빵의 기적 장소가 타브가라는 증거는 교회 전승에서 찾을 수 있다. 타브가는 초대 교회 때부터 순례의 중심지였다. 350년께 예수께서 빵을 얹으셨다고 하는 바위를 제대로 하는 성당이 세워졌고, 많은 순례자가 이곳을 방문해 바위의 작은 돌들을 가져갔다. 또 450년께에는 비잔틴 양식의 새 성당이 세워졌고, 그때 설치한 모자이크를 지금도 볼 수 있다. 타브가 성당은 614년 페르시아군과 637년 무슬림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된 후 1300여 년간 폐허로 남아있다가 1932년 독일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됐다. 지금의 타브가 성당은 독일 가톨릭교회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1982년 봉헌된 이 성당은 성 베네딕도회 예루살렘의 성모승천수도원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성당 주변 성지는 '독일 성지회' 소유다. 넓은 정원을 지나 성당으로 들어서면 제대 주변으로 5세기 비잔틴 성당의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바닥 모자이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는 바위 바로 위에 제대가 있고, 바위 밑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4개가 들어있는 성합이 모자이크 돼 있다. 빵 4개만이 모자이크가 돼 있는 까닭은 매일 미사를 통해 행해지는 성체성사가 나머지 하나의 빵이기 때문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3.10.22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 나타난 연대성 인간 존재가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속해 있는 사회 안에서 공동선 이용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사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공동의 참여가 개인 차원이나 작은 집단 사이에서만 아니라 ,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돼 상호 의존성이란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연대성’(Solidarity)이라고 부른다. 연대성 개념은 ‘전체’ 혹은 ‘전액’을 의미하는 라틴어 ‘solidium’에서 유래한다. 다시 말하면 연대성의 의미는 전체 혹은 공동의 이익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연대성은 인간들이 깊이 연계해 서로 원조를 주고받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연대성 개념은 흔히 형제애, 원조, 상호 이해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이 연대성의 개념을 통해 모든 인간이 고유한 인격체이며 동시에 사회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이러한 사회성으로 인해 인간은 서로 도울 때 비로소 가장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며, 이런 도움을 통해 자기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연대성의 감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삶에서 이해 되지 않는 부분들이 꽤 많이 나타난다. 예수의 공생활은 그야말로 파격적 삶의 연속이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은 결코 주인이나 군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통과 시련의 연속,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철저히 파괴되고 오해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분의 제자들과 친구들은 창녀, 세리, 어부, 혁명 당원, 절름발이, 맹인, 고아, 과부, 이방인들이었다.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인간적 성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주축을 이뤘다.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삶은 그야말로 죄인들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인간 공동체 안에서 가장 힘들고 어렵고 버림받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대의 삶을 사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가난, 절망, 고통으로 인해 좌절하고 포기하는 삶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의 삶을, 고통을 넘어서는 기쁨의 삶을 보여주셨다.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류와 하나가 되신 새 인간으로서 나자렛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항상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나약함을 취하시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시며,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 하나 되도록 해 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그 생활이 아무리 모호하고 모순투성이로 보인다더라도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 덕분에 그 사회를 생명과 희망의 장소로 재발견할 수 있게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196항 참조).프란치스코 교황도 이러한 연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 결속은 더 가진 사람들과 덜 가진 사람들 간에 존재하는 고통스러운 균열을 봉합하고 가깝게 해 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사회에서 꿈을 펼칠 기회를 갖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결속은 천대받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또한 그것은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린 모든 사람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결속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이민자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이민자들은 계속해서 우리 사회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일생을 바친 노인들과 결속해야 합니다. 그분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전해 주는 현자이자 스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들과의 결속을 통해 그분들에게 합당한 지위를 찾아주어야 합니다”(「한 목자의 성찰 프란치스코 자비」, 생활성서, 195-196쪽).예수님께서는 연대성과 사랑의 관계를 모든 사람에게 밝게 비추어 주심으로써 이 관계의 온전한 의미를 밝혀주셨다.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연대성은 그 자체를 초월해, 전적인 무상성, 용서, 그리고 화해와 같은 그리스도교적인 차원을 띠고 있다. 이렇게 될 때, 이웃은 단지 자신의 권리를 지닌 평등한 존재인 인간으로만 비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고 성령의 항구적인 활동을 입고 있는 아버지 하느님의 살아 있는 모상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이웃이 비록 원수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를 사랑하신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간은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96항 참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연대의 삶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세상 안에 살며 이웃들과 함께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삶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문채현2014.05.15
![[성경 속 궁금증] 52. 유다인들은 속죄일에 어떤 일을 했나요](//cpbc.co.kr/CMS/newspaper/2012/10/rc/429978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52. 유다인들은 속죄일에 어떤 일을 했나요열흘간 준비해 제사와 예식 거행 단식 등 다섯 가지 금욕 꼭 지켜속죄일은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사건에서 유래한다. 그림은 '십계명판과 황금 송아지'(코시모 로셀리 작, 1482년). 하느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말씀에서 속죄일에 관한 규정이 나온다. "이 일곱째 달 초열흘날은 속죄일이다.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고행하며,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날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주 너희 하느님 앞에서 너희를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는 속죄일이기 때문이다. 이날에 고행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날에 어떤 일이라도 하면, 내가 그자를 자기 백성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겠다.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너희가 사는 곳 어디에서나 대대로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칙이다. 이날은 너희에게 안식일, 곧 안식의 날이며 고행을 해야 하는 날이다. 그달 초아흐렛날 저녁, 곧 그날 저녁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레위 23,27-32). 속죄의 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전례 축제 중 가장 엄숙한 날이다. 속죄의 날은 하루지만 그날을 보내기 위해 열흘 준비 기간을 가진다. 속죄일은 죄를 벗는 날로 안식일 중 안식일이다. 그래서 단식을 하고 속죄를 위한 제사와 예식을 거행해야 하는 날로 규정돼 있다. 이날은 이스라엘의 모든 축제 중 가장 경건한 날이자 이스라엘이 개인으로서나 국가적으로 죄를 씻고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이다. 속죄일의 유래는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저질렀던 우상숭배를 회개하며 모세가 전 이스라엘을 대신해 하느님 용서를 받고 두 번째 십계판을 갖고 내려오는데, 그날이 바로 첫 번째 속죄일이다. 이후 이날은 대대로 죄지은 이스라엘이 하느님 용서를 받는 날로 기념돼 왔다. 유다인들은 악을 저질렀다고 해도 속죄를 통해 원래의 깨끗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유다인들은 또 인생을 일종의 사다리 같은 것으로 봤다. 인간은 그 사다리를 오를 수도 있고 내려갈 수도 있다. 성경에 나오는 속죄일 관습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섯 가지 금욕이다. 속죄일이 언급된 부분에는 매번 금욕이 명해져 있다. 성경은 금욕을 강조하면서도 어떤 식의 금욕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금욕을 다섯 가지 형태의 육체적 욕망을 극기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먹고 마시는 것, 씻고 목욕하는 것, 기름 바름, 부부관계, 그리고 가죽신을 신는 것을 삼갔다. 특히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삼가야 했는데, 그럼에도 단식이 생명에 위협을 줄 경우는 예외적으로 음식을 먹도록 했다 회개는 성경에서 자주 강조되는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 회개의 가능성은 인간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성경은 아무리 악인 중의 악인이라도 그가 죄에서 완전히 돌아서기만 한다면 하느님은 결코 그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구원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하고 있다. 퇴사자22012.10.30
![[생활속의 복음] 하느님 나라의 지도](//cpbc.co.kr/CMS/newspaper/2014/05/rc/509768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하느님 나라의 지도부활 제5주일(요한 14.1-12) 조재형 신부(서울대교구 성소국장)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강론할 때, 강론대가 왼쪽에 있었기 때문에 주로 왼쪽을 보고 강론을 했습니다. 한 교우가 오른쪽도 보면서 강론을 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안 그러면 다른 성당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사제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용인 쪽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었습니다. 주인이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점심만 먹으러 갔는데 동동주를 공짜로 주셔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를 치료하러 치과에 가도, 머리를 손질하러 미장원에 가도, 약을 사러 약국에 가도 신자들이 하는 곳엘 가면 아주 친절하게 대해 줍니다. 신학생 면담을 하러 신학교에 갔습니다. 3학년인 신학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신부님, 사제가 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첫째는 건강입니다. 아무리 의욕이 앞서도 몸이 아프면 제대로 사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 체력을 키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운동은 거의 체육학과 수준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지식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 철학, 성경, 심리학, 교리 교수법을 충실히 배우라고 했습니다. 군대 갔다 와서 좀 힘은 들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기도입니다. 정해진 기도 시간에 충실하고, 시간을 더 내서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건강해도, 지식이 뛰어나도 금세 지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적 독서를 하고, 가능하면 일기를 좀 쓰라고 했습니다. 건강과 지식은 눈에 보이는데 기도는 분심도 들고 어렵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일들에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돈 버는 일, 명예를 얻는 일, 권력을 얻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소중한 일에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돈을 10년 동안 벌 수 있어도 돈 번 10년 동안에 잃어버린 건강은 다시 살 수 없는데도 우리는 건강보다 돈을 버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곤 합니다. 소중한 일이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가족을 돌보는 일, 건강을 돌보는 일, 이웃과 신뢰를 쌓는 일, 명상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일 등이 있습니다. 바로 인생을 주도적으로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주도적인 삶을 살면 여유가 생기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생기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끊임없이 주도적인 삶을 사셨다고 하겠습니다. 제자의 배반에도, 유다인들의 조롱에도, 하느님의 무심함까지도 예수님은 반사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주도적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너희에게 평화를 빈다.’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음식을 나누는 일, 재산을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욱 소중한 일을 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는 오직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만 힘쓰겠습니다.” 그리고 재물과 음식을 나누는 일은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에게 맡기게 됩니다.” 그러자 하느님의 말씀은 널리 퍼졌고 예루살렘에서는 신도들의 수효가 부쩍 늘어났으며 수많은 사제도 예수를 믿게 됐다고 합니다.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재물과 권력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래서 영원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지도’입니다. 지도에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의 길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어느 길이 가장 빠르고 손쉬운 길인지, 어느 곳에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가게가 있는지, 어느 곳에서 피곤한 몸을 쉴 수 있는지 나와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나는 너희가 머무를 곳에 미리 가 볼 것이다. 그곳은 머무를 곳이 참으로 많다. 이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너희가 들어갈 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가 가야 할 하느님 나라의 지도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과 기적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표시된 지도입니다. 우리의 지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한 번뿐인 우리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평화신문2014.05.15
![[생활속의 복음] 나는 언제 예수님을 알아보았나](//cpbc.co.kr/CMS/newspaper/2014/05/rc/507810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나는 언제 예수님을 알아보았나부활 제3주일((루카 24,13-35)조재형 신부(서울대교구 성소국장) 2011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부친께서 하느님 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어느덧 3년이 지났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지혜로우셨고, 세상의 흐름을 잘 아셨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경륜과 지혜를 닮고 싶었지만, 아버님의 체질을 닮았습니다. 혈압이 높은 것, 치아가 좋지 않은 것, 일찍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는 것입니다. 혈압이 높기 때문에 건강에 신경 썼고 지금은 정상 혈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치아가 좋지 않아서 관리를 잘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상한 이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지혜와 경륜이 모자라기 때문에 좀 더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계절에 하느님 품으로 가신 아버님께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사도들이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예수님에 대해 아주 열성적으로 증언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바쳐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을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왜 그렇게 열성적으로 주님 부활을 전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게 해서 무슨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서 사도들이 명예나 권력을 얻는 것도,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도, 특별한 혜택을 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희망과 신앙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가치였습니다. 신학생들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사제 생활하시면서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사제직을 앞두고 고뇌하는 모습일 수도 있고, 이제 곧 다가올 사제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사제가 되면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 자유롭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혼하면 직장에 매이고, 가족을 돌봐야 하고, 앞날을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지만, 사제 생활은 그런 면에서는 자유롭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제 생활은 일을 하면서 결과를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보좌신부는 2년, 주임신부는 5년 동안 한 본당에서 사목하기 때문에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추진하는 일에 대해서 싫든 좋든 결과를 볼 수 있고 그것이 좋다고 말해줬습니다. 사제 생활은 보람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나 때문에 절망 중에 있던 사람이 희망을 찾는 것을 봤고, 나 때문에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찼던 사람이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을 봤으며, 죽으려고 했던 사람에게 삶에 대한 용기를 줄 수 있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제 생활 중에 힘든 일은 왜 질문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힘든 것은 나중에 생각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신학생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저 자신도 사제직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바로 그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고, 그분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이 봄에 들과 산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나무들은 새순이 돋아 생명의 기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연은 이렇게 봄이 왔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그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 마음 안에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이웃에게 드러내고 증거해야겠습니다. cpbc2014.05.01
![[생활속의 복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cpbc.co.kr/CMS/newspaper/2013/12/rc/486052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대림 제2주일ㆍ인권주일(마태 3,1-12)조재형 신부(서울대교구 성소국장) 대림 제2주일입니다. 대림 제2주일은 인권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모든 사람의 인권을 지켜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림 제2주일을 지내면서 소외된 이웃들, 가난한 이웃들, 굶주린 이웃들, 장애인들, 버려지는 생명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들이 늘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남자들과 여자들은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조금 다른 것을 봅니다. 여성들은 대부분 가방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 가방 안에는 정말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들은 잘 모릅니다. 남자들은 보통은 지갑, 열쇠, 손수건 같은 것들을 지니고 다닙니다.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저는 '휴대폰'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새로 나온 '스마트폰'은 단순히 전화를 걸고 받는데 익숙한 분들에게는 그 기능이 하도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예전에 휴대폰은 전화를 걸고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추가된 기능은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스마트폰은 손안에 있는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전자우편은 기본이고, 각종 기능을 내려받을 수 있어서 원하는 것은 거의 다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은 이스라엘 백성의 꿈과 희망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솔로몬 왕이 죽은 다음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됐고, 그 두 나라는 강대국에 의해 모두 멸망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은 뿔뿔이 흩어졌고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서 그루터기만 남은 것과 같이 돼버렸습니다.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에 이사야 예언자는 놀라운 꿈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을 것이고 그 싹이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아브라함에게 강한 믿음을 주셔서 새로운 민족이 될 수 있게 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모세에게 놀라운 지도력을 주셔서 파라오의 압제를 벗어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다윗에게 용기를 주셔서 거인 골리앗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스라엘 왕국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하느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이며 경륜과 용맹의 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면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사자와 함께 놀 수 있게 만든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꿈이고, 이것은 어떠한 과학과 기술로도 이룩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거짓된 영들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나는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상처를 곪게 하는 미움과 분노를 버려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는 우리의 육체까지도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이러한 행위를 '회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거짓된 영들을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기능의 제품을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의 영혼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낡은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영은 이웃의 아픔을 보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보았던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맹의 영'으로 현실이 되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대림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영을 받을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영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로마 15,4-6). cpbc2013.12.03
![[성경 속 궁금증] 42. 나지르인은 어떤 사람인가?](//cpbc.co.kr/CMS/newspaper/2012/07/rc/422022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42. 나지르인은 어떤 사람인가?하느님께 바쳐진 선별된 사람.삼손과 들릴라. 페터 파울 루벤스. 1610년. 삼손은 자신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 묻는 들릴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머리는 면도칼을 대어 본 적이 없소. 나는 모태에서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기 때문이오. 내 머리털을 깎아 버리면 내 힘이 빠져나가 버릴 것이오. 그러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처럼 된다오"(판관 16,17). 삼손은 자신을 나지르인이라 지칭한다. 성경을 읽다 보면 '나지르인'이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아모 2,12; 민수 6,13; 마카 3,49). 나지르인은 하느님께 신비로운 은사를 입어 '주님의 영'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판관 13,25; 14,19; 15,14).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삼가다' 또는 '스스로를 봉헌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Nazar'에서 유래됐다. 히브리말을 소리 나는 대로 옮긴 나지르는 속(俗)의 세계에서 뽑혀 성(聖)의 세계에 속하게 된 사람, 그렇게 해서 하느님께 바쳐진 선별된 사람을 가리킨다. 나지르인은 본래 자신의 의지보다는 하느님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부르심에 따라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누구든 원하면 특별한 서원을 통해 남녀 구분 없이 일시적으로 나지르인이 될 수 있게 됐고, 나중에는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려고만 하면 나지르인이 될 수 있었다(민수 6,1-21). 나지르인이 되려면 세 가지 규칙을 지켜야했다. 첫째, 모든 종류의 술을 삼가야 한다. 팔레스티나 땅에서는 술을 주로 포도로 만드는데, 심지어 날포도와 건포도도 먹어서는 안 된다. 나지르인이 될 아기를 임신한 어머니도 출산할 때까지 술을 멀리해야 한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사제보다 더 큰 절제 생활을 해야 했다. 둘째, 머리에 면도칼을 대서는 안 된다.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기간이 다 찰 때까지 그는 거룩한 사람이 돼야 한다. 그래서 머리털이 길게 자라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나지르인이 머리카락에 칼을 대지 않는 것은 '머리카락을 하느님께 헌신한 표'(민수 6,9)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것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래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태어난 아이를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서원하면서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1사무 1,11)하고 다짐했던 것이다. 셋째, 어떠한 경우에도 죽은 이에게 다가서면 안 된다. 이는 부모나 형제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사람들은 시체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부정한 것은 하느님께 제사를 바친다거나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 세 규정을 지킨 나지르인은 봉헌하기로 정한 기간이 끝났을 때 만남의 장막 문간에 나와 각종 제물을 바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불에 태웠다.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해 나지르인이 되는 풍습은 구약 말기와 신약 시대에도 계속되다 중세에 이르러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본래 나지르인은 금욕과 고행생활을 하도록 뽑힌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으로서, 한평생 그분께만 충성을 바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퇴사자22012.07.31

일치ㆍ친교 다지며 하느님 사랑 체험서울 중고등부 '하느님과 하나되는 캠프', 11개 본당 300여 명 참가캠프에 참가한 학생들이 본당별로 모여 성경 구절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다. "주일학교 친구들끼리 평소보다 더 친해졌어요. 앞으로는 본당 친구들끼리도 이런 프로그램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서울대교구 목4동본당 주일학교 김다빈(헬레나,14)ㆍ박가용(소피아,14) 학생이 활짝 웃으며 밝힌 캠프 참가 소감이다.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중고등부(담당 박범석 신부)는 2~4일 경기 양주시 한마음청소년수련원에서 중고등부 연합캠프 '하느님과 하나되는 캠프'(이하 하하캠)를 개최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1)'를 주제로 열린 이번 캠프에는 서울대교구 11개 본당 주일학교 학생 300여 명과 교사 30여 명, 교구 동반자 16명이 참가해 하느님 사랑 안에서 기쁨을 느끼고 공동체 일치와 친교를 다졌다. 하하캠은 교사와 주일학교 학생 수가 적고 재정적 문제 등으로 캠프를 자체적으로 기획하기 어려운 본당을 위해 교구가 마련한 위탁 연합 캠프다. 4년 전에도 위탁 캠프를 실시한 바 있는 교구는 이번에는 특별히 △본당 연대성 증진 △본당 주일학교 교사 자질 함양에 초점을 뒀다. 일반적으로 위탁 캠프는 타 교구 타 본당 학생들과 섞여 조 활동이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이유로 본당 학생들끼리 소속감을 느끼며 유대감을 형성할 시간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하하캠은 이 같은 위탁 캠프의 단점을 보완해 본당 공동체를 강조했다. 캠프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그분과 빵을 나눈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눈을 뜬 이야기(루카 24,13-35)를 큰 틀로 하면서 성경 구절을 체험하는 것으로 이뤄졌다. 학교생활에 지쳐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학생들을 생각해서다. 학생들은 조별 대항 게임 '깨져라 팍팍', 야간 추적 프로그램 '나는 지난날 일어난 일들을 알고 있다', 공동체 마을 만들기 프로그램 '예수님을 품은 마을' 등을 통해 화합을 이뤘다. 캠프의 백미는 둘째 날 시작된 본당별 '아가페' 시간이었다. '갈망 나무'에 자기 갈망을 써넣고 캠프를 하는 동안에 변화된 자기 모습을 나눴다. 조원ㆍ교사ㆍ예수님ㆍ성찰ㆍ신앙 등을 주제로 자기 모습을 뮤지컬, 연극, 그림, 텔레비전 광고 등으로 표현했다. 다음 날까지 학생들은 본당 별로 모여 캠프에서 느낀 다양한 소감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박범석 신부는 파견미사 강론에서 "내가 사랑하는 법을 잊고 지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라며 "내가 먼저 희생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되자"고 당부했다. 교리교사 김안나(안나, 30, 서울 월곡동본당)씨는 "하하캠을 준비하면서 받은 여러 가지 교육 중에 캠프 프로그램 운영이나 실질적 방법 등을 본당에 응용해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라로사(로사, 26, 서울 답십리본당)씨는 "성경을 충분히 읽고 느낀 묵상 경험을 토대로 학생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짤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캠프에 참가하는 학생들을 보며 힘을 많이 얻었다"고 전했다. 김규리(마리스텔라, 17, 서울 인헌동본당) 학생은 "다른 성당 친구들과 활동하는 것도 좋았지만, 본당 친구들끼리 활동하는 게 더 익숙했고 실제로도 더 좋았다"며 "아가페 프로그램을 통해 나 자신도 하느님과 더 가까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강성화 기자 michaela25@pbc.co.krcpbc2013.08.06

어머니 마리아 요청으로 행하신 예수님의 첫 기적 현장[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15. 카나 혼인잔치기념성당성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포지본시 니콜로가 쓴 1347년 여행기에 "갈릴래아 카나 마을은 그리 크지 않은데…거기에는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념 성당이 있다"면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물동이에 채웠던 물을 길어온 우물을 언급했다. 오늘날 카나 혼인잔치기념성당 제단 중앙에는 예수님의 첫 기적을 상징하는 물동이가 놓여 있다. 사진은 카나 혼인잔치기념성당 제단 위에 놓인 6개 물항아리와 성화. ▨혼인잔치 묵상 포도주는 잔치의 표현이다. 유다인들은 안식일과 파스카 축제의식, 혼인잔치 때 반드시 포도주를 마신다. 또한 포도주는 하느님께서 인류와 함께 벌이실 궁극의 잔치,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그 잔치가 어떠한 것인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시온)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복음서에서 새 포도주 선물의 의미는 카나 혼인잔치 이야기(요한 2,1-12)에서 중심 주제로 펼쳐진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 이야기를 '사흘째 되는 날'로 시작한다. 언제부터 따져서 사흘째 날에 카나 혼인잔치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성경에서 '사흘째 날'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사흘째 날 아침에 인간에게 나타나셨다(탈출 19,16-18). 또 예수께서 죽으시어 무덤에 묻히신 지 사흘째 날 부활하셨다. 사흘째 되는 날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첫 기적이 행해진 것은 하느님의 자기현시가 처음으로 실현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직 당신 때가 오지 않았는데도 그 때를 앞당겨 하느님과 온 인류가 함께할 혼인잔치를 보여주셨다. 이 혼인잔치는 미사 성찬례를 통해 똑같은 일이 계속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카나의 넉넉함은 인류와 하느님의 잔치가 시작됐고,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선사하기 시작했다는 표징이다"며 "이 혼인잔치는 기적 그 자체를 뛰어넘어 하나의 상징으로서 메시아 시대를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그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벌이시는 혼인잔치의 시간이 예수의 오심과 함께 이미 시작됐고, 세말에 실현될 약속이 지금이라는 시간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풀이했다(「나자렛 예수」 1권 357-420쪽 참고). ▨혼인잔치기념성당 카나는 예수의 첫 번째 기적뿐 아니라 죽기 직전인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주는 두 번째 기적도 행한 장소이다(요한 4,46-54). 카나는 또한 '나타나엘'이라고도 불리는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고향(요한 21,2)이기도 하다. 종말에 하느님과 인류가 함께할 혼인잔치를 미리 보여준 카나의 정확한 지리적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요한복음서는 '갈릴래아 지방 카나'(요한 2,1;4,46)라고 명시함으로써 페니키아 지방 티로의 남쪽에 위치한 카나(여호 19,28)와 구별 짓는다. 이어 예수께서 혼인잔치를 마치고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셨다'(요한 2,12)고 기록함으로써 카나가 갈릴래아 호수 서편 어느 산악지대나 언덕배기에 위치한 곳임을 암시하고 있다. 성경고고학자들은 오늘날 나자렛에서 북동쪽 6㎞ 떨어진 갈릴래아 지방 작은 마을 '케페르 카나'를 예수께서 첫 기적을 행한 바로 그 '카나'라고 단정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의 '혼인잔치기념성당'이 있는 곳도 바로 케페르 카나이다. 가톨릭성당은 작은형제회 예루살렘 성지 관구가 세운 것으로 성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은 카나 유적지를 보존하려고 1641년부터 노력했으나 거의 200년이 지난 1879년 다마스쿠스 통치자의 도움으로 겨우 획득했다. 이미 동방정교회에서는 1566년 카나에 혼인잔치기념성당을 건립했다. 이 시기 작은형제회 수도자들은 폐허가 된 유적지 근처에 있는 아랍인 집에 살고 있었다. 작은형제회 예루살렘 성지 관구는 1881년 이곳에 성당을 봉헌했고, 1901년 보수, 현재의 성당 정면을 만들었다. 1997년 가을에는 대대적인 고고학 발굴 작업을 시행해 초세기 유다인 회당과 그리스도인 무덤, 5세기경 아람어 모자이크 등을 찾아냈다. 오늘날 성당은 대희년을 맞아 2000년에 아랍인 본당과 혼인잔치기념성당으로 재건축됐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3.11.19

신약의 비유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상)허규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씨부리는 사람의 비유는 말씀을 들은 우리 마음이 그 말씀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됐는가를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믿음이 없다면 ‘구원의 씨’인 복음은 결코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삽화=양예환 허규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원 교수)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공관복음에서 모두 전해주는 내용이다.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위해 당시 이스라엘의 지형과 농경법을 아는 것이 도움된다. 예수께서 주로 활동하시던 갈릴래아 지역에는 이즈르엘 평야가 있다. 갈릴래아 호수는 해저 200m 정도에 있는데 이 호수 주변 지역은 높은 산악지형에 둘러싸여 있다.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남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타보르 산이 있고 이 주변에는 이즈르엘 평야라는 큰 평지가 자리한다. 예수께서 주로 갈릴래아 호수와 그 주변에서 활동을 주로 하셨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 이즈르엘 평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에서는 우리와 다르게 우기가 시작되는 늦가을 즈음에 파종을 준비한다. 알려진 바로는 우선 씨를 땅에 뿌리고, 그 후에 밭을 간다고 한다. 미리 고랑을 만들고 거기에 파종을 하는 우리 농사법과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이렇게 씨를 뿌리고 밭을 간 후에는 씨가 잘 보존될 수 있도록 그 위에 살짝 흙을 덮어주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말씀을 듣는 것, 하느님과의 관계 시작예수께서는 가장 먼저 “들어 보아라”(마르 4,3)는 말로 비유를 시작하신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지만 원문의 의미를 조금 더 강조한다면 ‘너희는 들어라!’이다. 명령형이다. 그리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지막을 보면 비슷한 문장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 4,9).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명령형이 사용된다. 가장 처음 볼 수 있는 특징은 ‘듣다’는 동사를 통해 이 비유를 시작하고 마친다는 점이다. ‘듣다’ 또는 ‘듣는다’는 표현과 관련해서 몇 가지 참조해 볼 내용이 있다. “들어라!”는 표현은 우선 신명기 6장 4절의 ‘쉐마 이스라엘’이라는 형식을 생각하게 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이 말씀은 유다인들이 매일 바치던 기도로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분명히 유다인들에게 “들어라!” 하는 예수님의 외침은 신명기 말씀을 생각나게 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로마 10,17) 이 구절은 우리에게 ‘듣는 것’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마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거꾸로 나열해 본다면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처럼 들린다. ‘듣는 것, 듣는 행위’는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이다. 계시된 말씀을 듣는 것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은 예수께서 강조한 제자의 덕목이기도 하다.비유에 담긴 하느님 가르침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비유의 제목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인 것을 보면 이 비유의 주인공은 ‘씨 뿌리는 사람’이지만 정작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비유가 시작되자마자 ‘씨 뿌리는 사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씨’로 옮겨간다. “그가 씨를 뿌렸다.”“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4,4)는 동일한 내용을 전해주는 루카 복음 8장 5절에서는 “짓밟히기도 하고”라는 표현이 추가되어 있다. 아마도 루카는 길 근처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기도 했다’는 표현을 추가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비유에 대한 직접적인 예수님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버린다.” (마르 4,13~14)예수님의 해설을 보면, 비유에 등장하는 씨는 말씀으로 그리고 씨가 뿌려진 다양한 땅은 그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드러난다. 길에 뿌려진 씨가 짓밟히고 새가 와서 먹어 치워서 땅에 싹을 내리지 못하는 것처럼, 말씀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말씀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루카 복음은 이것을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루카 복음의 표현대로라면 뿌려진 씨는 말씀이고 말씀을 통해 사람들은 믿음을 가질 수 있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 결국, 씨는 ‘구원의 씨’처럼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매주 금요일 오전 9시, 월요일 오후 8시, 수요일 오후 4시에 평화방송 TV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백영민2014.06.05
![[신년 특집]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에게 2015년 교회를 묻다](//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6696_1.0_titleImage_1.jpg)
[신년 특집]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에게 2015년 교회를 묻다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한다면 복음화가 ‘성큼’ 2015년 을미년(乙未年) 양띠의 해가 떠올랐다. 새해를 맞아 1943년에 태어난 양띠 염수정(서울대교구장) 추기경에게 양 냄새 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그리고 한국 사회가 분열과 갈등에 딛고 전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물었다. 정리=남정률 기자 njyul@, 박수정 기자 catherine@사진=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새해가 밝았습니다. 새로운 다짐, 새로운 희망으로 설레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의 아픔은 여전하고, 경제 불황 속에 어려운 이웃들은 계속해서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어 마냥 설렐 수만은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국민들에게 새해 덕담 부탁드립니다. “새해에도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께서 베푸시는 평화와 은총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해는 특별히 국민 전체가 뜻밖의 참사로 인해 어려움과 슬픔을 많이 겪었던 한 해였습니다. 이런 비극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정부 당국과 관계자들, 그리고 모든 국민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상처받은 이들의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번 참사를 겪으면서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인간의 생명이나 가치보다 세속의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슬픔과 고통 안에서 지혜롭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함께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해 한국 교회와 사회를 돌아볼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교황님께선 방한 당시 많은 메시지를 남기셨는데요, 한국 교회가 교황님께서 남기신 메시지를 잘 실천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까.“교황 방한의 모든 순간은 그야말로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이나 꽃동네 장애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등 우리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 함께하시면서 진심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많은 분이 그러하듯이 저 역시 잊을 수 없습니다. 방한 이후 로마에서 교황님을 알현했을 때는 저의 감사 인사에 “제가 위로를 받은 시간이었습니다”라고 인사하기도 하셨습니다. 어쩌면 교황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우리도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교황님처럼 맑은 영혼으로 주위를 기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황님께서 전해주신 ‘사랑과 희망과 나눔’의 메시지를 우리 사회가 잘 받아들여 서로가 포용하고 화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증거하고 가난한 이와 함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목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복음의 기쁨을 사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성직자들부터 솔선수범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선 지난해와 올해 연이어 가정을 주제로 세계주교시노드를 소집하셨습니다. 교회와 사회의 근간이 되는 가정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추기경님께선 시노드에도 직접 참석하셨기에 느끼신 바가 더 크시리라 생각합니다. 가정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요. “이번 주교시노드에서 다루었던 가장 큰 주제는 ‘가정’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가정사목에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모든 일이 잘된다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듯, 화목한 가정을 위한 사목에 더욱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특히 생명은 가정이 가꾸고 보호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교회가 중점을 둬야 할 핵심 사목 주제입니다. 사목 일선의 본당 사목자들이 이 가정 사목에 대한 신자들의 삶과 의식과 실천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목자들은 가정에 대한 교회 가르침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이해 없이 신자들과 대화할 수 없고, 가르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목자들을 위한 가정사목 교육 프로그램도 필요합니다.‘기도는 새로운 복음화의 활력’이라는 제목의 2015년 서울대교구 사목교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에 전념하며 살아간다면 자기 자신은 물론 가정, 교회와 세상의 참된 복음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가족이 하루 생활 중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가정에서 실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족이 함께 미사를 봉헌한다든지, 가족이 함께 ‘말씀 나누기’나 성경을 읽고 쓰는 것도 권장할만합니다.”▲세계주교시노드에 이어 교황님 권고로 지난 11월 스페인에서 열린 대도시 사목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셨습니다. 서울처럼 큰 대도시도 세계적으로 드뭅니다. 회의에서는 어떤 내용을 다뤘는지 궁금합니다. “회의 제목 그대로 대도시 안에서의 사목을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세계 인구는 점점 더 대도시에 집중할 뿐 아니라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대도시 안에서 생겨나는 많은 문제 중 가정 문제, 청소년 문제, 취업 문제 등 이런 구체적 문제에 대해서도 어떻게 사목적으로 접근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대도시 안에서 소외된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노인들의 문제는 우리가 당면한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대도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이 회의의 방향이었습니다. 서울은 세계에서도 손꼽힐 만큼 인구가 많은 도시입니다. 대도시 사목 회의에서 언급한 많은 문제점과 함께 서울대교구가 시행하고 있는 알코올·교정·경찰 사목, 병원 호스피스 상담 등을 더욱더 복음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 변화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 필요한 것은 모든 사목적인 체계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 위해서 네트워크를 잘 형성하는 것입니다. ”▲2015년 서울대교구 사목교서를 통해 사목자와 교구민들 모두 기도생활에 전념하기를 당부하셨습니다. 신앙인이라면 기도를 생활화해야겠지만, 사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며 일상에 지친 신자들에게 기도 생활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기도 생활을 위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신앙 해설」에서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이며,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기도생활의 모범은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하고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신앙인인 우리도 하느님과 눈동자를 마주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기도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뜻에 맞게 저를 사용하도록 맡겨드린다고 기도합니다. 신자들께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기도보다 나를 하느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기도 안에서는 휴식과 같은 믿음을 선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기심이 판치는 현대 사회에서 나를 내어놓는 기도 생활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것입니다. 나와 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교회와 세상, 무엇보다 가난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기도 안에서 주님과 가까이 지낸다면 복음의 기쁨을 누리면서 교회와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참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올해는 교구가 생명위원회를 설립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생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계신 추기경님께선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 생명의 문화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생명위원회가 더 중점을 두고 활동해야 할 생명수호 활동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우리 교구는 10년 전 12월 첫째 주일을 ‘생명 수호 주일’로 정해 지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날 모든 본당에서도 동시에 생명 미사를 함께 봉헌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생명 수호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우리 교구는 나름대로 생명 사랑의 운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 생명은 예외 없이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에로 참여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하고 소중한 생명을 책임 있게 보존하고 사랑으로 완성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 생명은 이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함과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생명의 뿌리는 우리 가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 존중을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생명의 존중은 우선 우리 가정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가정부터 인간의 올바른 가치가 교육되고 실현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 수호에 대한 우리의 노력은 신앙 행위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고 어떠한 생명도 소외시키거나 경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가장 기본적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생명 존중’이라는 교회의 기본적 가치 수호는 예언자로서의 교회 소명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교구 생명위원회의 기본 방향입니다.”▲지난해 1월 12일 추기경에 임명되신 후 1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지난 1년은 어떠셨습니까. 또, 2015년은 양띠 해인데 추기경님께서 양띠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양 냄새 나는 목자’의 의미가 더 깊이 다가오실 것 같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첫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사제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또한 ‘양 냄새 나는 목자’ 즉, 착한 목자가 되라고 사제들에게 권고하십니다. 저부터 이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지난 8월 말 새남터성당에서 복자 주문모 신부님을 기리는 미사를 집전한 적이 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현대 사제들에게 착한 목자의 모델이라 생각합니다. 주 신부는 1794년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디딘 최초이자 유일한 성직자였습니다. 그분 덕분에 한국 교회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성사에 목말랐던 신자들을 주 신부는 직접 찾아 나섰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푸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에 지칠 줄 몰랐고 식사 시간과 잠자는 시간 외에는 성사를 집행했으며, 나머지 시간에는 책을 썼다”고 교회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신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나중에는 목숨까지 바친 주문모 신부님 같은 분이 착한 목자의 귀감이라 생각합니다. 새해가 양띠 해라고 하는데, 한 해 동안 복자 주문모 신부님을 본받으며 더 많은 양을 만날 것이라 다짐해봅니다.” ▲요즘 한국 사회는 세대와 이념, 빈부 문제로 서로를 적대시하며 갈라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위로와 함께 희망과 치유를 필요로 하는 한국 사회에 어떤 지혜가 필요하겠습니까.“우리가 다른 이의 성격과 장점을 인정하면 그 사람의 말이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인정해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협력할 수 있고, 협력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랑이 모든 일의 해결책인 것이죠. 교황님께서는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 “화해, 일치, 평화라는 하느님의 은혜는 우리 각자의 회심(回心)과 분리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적대시하지 않고 이해와 관용, 대화와 포용을 추구할 때 하느님께서는 화해와 일치, 평화라는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위험하고 잔인합니다. 사랑이 있기에 모든 사람이 서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에 바탕을 둔 정책, 능력이 부족한 이들도 돌보며 함께 가는 것이 바로 공동선입니다. 우리 모두가 남을 생각하고 기다리며 배려하는 사랑의 운동을 일으켰으면 좋겠습니다.”▲마지막으로 평화신문 독자들과 평화방송 시ㆍ청취자에게도 새해 인사 부탁드립니다.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은 우리 교회가 하느님 말씀을 좀 더 효율적으로 전하려고 만든 매체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늘 가까이 두고 생활하고 싶다면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을 챙겨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다양한 프로그램과 기사를 통해 내게 맞는 기도 방법과 신앙 생활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미사 때 들었던 복음 말씀이 새롭게 들리기도 할 것입니다.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은 우리 교우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신앙 생활의 벗으로 가까이하시면 좋겠습니다.” 평화신문2014.12.24
![[성경 속 궁금증] (26) 성경에 나오는 천사는 어떤 존재인가](//cpbc.co.kr/CMS/newspaper/2012/03/rc/409613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26) 성경에 나오는 천사는 어떤 존재인가하느님 심부름을 하는 영적 존재'천사들과 성(聖)모자' (피에트로 페루지노 작, 15세기). 우리가 천사의 존재나 활동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이나 성전을 통해서다. 우리는 보통 착한 사람을 두고 '천사 같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사실 천사라는 말은 하느님 심부름을 하는 영적 존재들 직명(職名)으로, 본성(本性)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중국과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천신(天神)이라는 본성을 가리키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래 메신저를 뜻하는 천사라는 말이 중세 초기부터 일반화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천사는 실제 존재하는 것일까? 교회는 천사의 존재에 대해 명백하게 선포한다. "성경이 보통 천사라고 부르는, 육체를 가지지 않은 영적인 것들의 존재는 신앙의 진리다. 성전 전체의 증언이 일치하듯이, 성경의 증언도 명백하다."(「가톨릭교회교리서」 332항) 구약성경에는 천사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천사는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부르고(창세 22,11), 죄악에 물든 소돔을 멸망시킬 때 의로운 사람 롯을 구한다(창세 19,29). 또 천사는 하느님 백성을 인도하고(탈출 23,20-23), 예언자들을 도와주며(1열왕 19,5),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 탄생을 알리기도 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천사는 철저하게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존재다. 천사는 하느님 심부름꾼으로 파견돼(창세 16,7) 사람을 보호하거나 처벌하는 심판자 역할을 한다(2사무 24,16). 유다인들은 하느님 처소를 왕궁으로 생각해 천사를 왕궁에서 심부름하는 존재로 묘사했다. 그래서 천사를 하느님을 모시는 신하나 군대로 생각했다(여호 5,14 참조). 바빌론 유배 시기 이후부터는 하느님 명을 받아 이 세상 많은 자연현상과 인간역사를 관장하는 천사들이 등장한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영(욥 1,6), 혹은 하늘의 아들이나 거룩한 자, 수호자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착한 천사와 악한 천사, 즉 악마의 구별이 생기고, 개인이나 도시, 나라의 수호천사 개념도 발전했다. 신약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은 탄생 때부터 하늘에 오르실 때까지 천사들의 경배와 봉사를 받으셨다.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노래한다(루카 2,14). 또 천사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시중을 들었고(마르 1,13), 그리스도 부활 소식을 제일 먼저 알리기도 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 심판을 도와드리게 될 이들도 천사들이다(마태 13,41; 루카 12,8-9). 이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는 하느님 심부름을 하는 영적 존재들이다. 천사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도움을 주도록 창조하셨다. 천사는 하느님께서 창조한 피조물 중에 가장 뛰어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천사들은 인간에게 많은 위험을 피하게 해주고, 악마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지켜준다. 또 천사는 인간에게 선한 생각과 의지를 갖게 하고 인간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해주고,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한다. 우리가 천사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인간을 위해 봉사한다고 믿는 것은 바로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에서 천사의 존재를 신앙교리로 선포했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퇴사자22012.03.27
![[평화칼럼]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cpbc.co.kr/CMS/newspaper/2013/11/rc/481806_1.0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남정률 요한 사도(기획취재부 차장)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신앙의 깊이가 다 다르고, 교리에 대한 이해도 조금씩은 다르기 마련이다. 가톨릭이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교회 교리서」라는 통일된 교리서를 갖고 있다는 것은 교리에 관한 혼선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 방대한 교리서를 다 읽었는지, 그리고 그 가르침을 어떻게 수용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부활한 예수님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예수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려 했던 토마스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실증주의자에 가깝다. 직접 겪어 보지 않은 것은 못 믿겠다는 태도는 좋게 말하면 신중한 것이지만 신앙의 관점에서는 불충한 것이기도 하다. 과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는 토마스 같은 신자도 많을 것 같다. 과학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가 별개의 진리가 아니라면 신앙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할 때 더 잘 믿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평소 죽음에 관해 관심이 많은, 아니 죽음이 두려운 필자는 최근 가톨릭대 생명대학원을 졸업하면서 '근사(近死)체험 연구'라는 제목의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임사(臨死)체험'이라고도 불리는 근사체험은 사고나 질병으로 임상적으로는 사망 진단을 받았거나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그 사이에 겪은 체험을 말한다. 근사체험에서 중요한 요소인 체외이탈(육체와 의식의 분리)은, 죽음 뒤에도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이 논문의 요지다.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논문이 쓸데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성경과 성경에 기반을 둔 교리서가 하늘나라에서의 부활과 심판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굳이 근사체험을 빌려 영혼의 존재 가능성을 입증하겠다는 것은 '내 믿음이 이 정도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실증적 연구가 교리를 뒷받침한다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가 지난 봄 발간한 「죽음ㆍ심판ㆍ지옥ㆍ천국-가톨릭교회의 사말교리(四末敎理)」에서 '근사체험이 가톨릭교회 가르침과 닮은 점이 있으며, 가톨릭교회 가르침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밝힌 대목을 접했을 때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신앙교리위원회는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 육신과 영혼의 분리, 변화된 육신, 죽은 이들과 재회, 심판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새로운 삶 안에서 누리는 행복 등을 근사체험과 가톨릭교회 가르침의 공통분모로 꼽았다. 근사체험이 교회 가르침과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근사체험을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객관적 정보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도 잊지 않았다. 근사체험을 주제로 논문을 쓴 것을 괜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 않을 뿐, 필자와 같은 토마스의 후손이 한둘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강화할 수 있는 과학적ㆍ실증적 연구가 있다면 교회가 이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앙은 과학을 넘어서는 것이지, 결코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11월 위령성월을 보내고 있다. 아무리 굳은 신앙을 가졌다 해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흔치 않을 것이다. 막상 죽음에 맞닥뜨리게 되면 정말 죽음이 마지막은 아닌지, 죽음 이후 세계가 존재하는지 회의가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닐 수 있음은 교회 가르침뿐만 아니라 실증적 연구인 근사체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꼭 전해주고 싶었다. 적지 않을 토마스의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cpbc2013.11.05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3> 앙리 드 뤼박(하)](//cpbc.co.kr/CMS/newspaper/2014/02/rc/495063_1.1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앙리 드 뤼박(하)"성찬례가 교회를 만든다" 며 미사 참례의 신비 되새겨 노년의 앙리 드 뤼박 추기경. 새로운 신학 방법론, 원천으로 돌아가기 앙리 드 뤼박은 당시 주류를 이루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추종하는 신-토미즘(신-스콜라 신학)과 다른 방식의 신학을 했다. 본디 신??스콜라 신학은 교회를 위기로 몰았던 이성주의(합리주의)에 맞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옹호해야 했기에,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순수 이성(철학)에서 출발해서 호교론적 신학을 펼쳤던 것이다. 그들에게 토미즘(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신학)은 당대의 합리주의, 무신론적 이데올로기, 과학지상주의 등 모든 반그리스도교 사상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로 여겨졌다. 이미 레오13세 교황은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 1879)를 통해 모든 신학교에서 토미즘을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했고, 토미즘을 최고의 사상이요, '영원한 철학'으로 여기게 했다. 그런데 앙리 드 뤼박과 그를 중심으로 하는 젊은 신학자들, 예컨대 예수회의 게스탕 페사르(G. Fessard), 오귀스트 발랑생(A. Valensin), 이브 몽셔이(Yve de Moncheuil), 앙리 부이야르(Henri Bouillard)와 같은 신학자들과 역사학적 방법론으로 토미즘을 새롭게 해석했던 도미니코회의 슈뉘(M, Dominique Chenu)와 이브 콩가르(Yve Congar) 등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에 바탕을 둔 신학 방법에서 탈피해서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신학에 적용했던 것이다. 그를 특징짓는, 교부들에 대한 연구는 단지 과거의 신앙 진술을 반복하거나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교부들이 자기 역사 안에서 어떻게 신앙의 진리를 살아 있는 진리로 파악하고 진술했는지를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살핀 다음 그로부터 당대의 문제를 푸는 해결책을 끌어내고 제시하는 것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단지 과거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復古主義)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가지고 있던 신앙의 풍요로움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고, 당대 이성주의에 입각한 신앙 해설이 갖는 위험을 타파하는 것이다. 때문에 드 뤼박은 자신을 '고전적 신학'의 방법과 대립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신학자'로 불리기를 바라지 않았고, 오히려 정당한 의미로 '전통적 신학자'로 불리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 기득권을 가졌던 로마의 도미니코회 신학자들(Garrigou-Lagrange)과 프랑스 남부 툴루즈의 신-스콜라 신학자들(Labourdette, Bruckberger et Nicolas)은 그들의 스승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미 성경과 교부를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토미즘을 연구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고, 드 뤼박의 전통으로의 회귀는 복고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오해했다. 외부주의 신학의 극복 앙리 드 뤼박이 일생 싸워야 했던 적은 외부론적 신학방법론이었다. 이 외부론적 신학을 펼친 이들은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신-토마스주의자들이었다. 당시의 신-스콜라 신학자들은 자연의 세계와 초자연의 세계를 완전히 분리하고, 양자가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 구조로 봤다. 또 인간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는 기이한 현상으로 보고, 기이한 현상의 사실 자체를 증명하는 데에 만족했다. 당시에는 근대의 이성주의 영향으로 초이성적인 것을 배제하며 이성적인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초월적 진리인 신앙적 진리를 배제하고 순수 이성적으로만 접근한 다음, 이성적으로 밝힐 수 없는 기적과 예언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증명하는 데 급급했다. 자연적으로 알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도 초자연적인 계시를 통해 더욱 확고해지므로 그리스도교야말로 절대적인 종교로 증명했던 것이다. 이러한 외부론적 신학사상은 드 뤼박이 볼 때 교회의 전통적 초자연성에 대한 이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예로 인간 이해를 든다. 인간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 모상'대로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해 이미 초자연적인 목적이 새겨져 있는 것이지 신-스콜라 신학자들처럼 자연적 존재로서 순수상태였던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본성이 파괴된 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의 한순간에 개입해 인간을 구원하심으로써 인간에게 또 다른 목적인 초자연적 목적을 추가로 받게 됐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이렇게 설명하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은총이 더 부각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순수 자연적 본성을 지닌 인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설명은 역사적 실재와는 무관한 추상적 설명일 뿐이다. 드 뤼박의 주장은 이렇다. 성경과 교부들의 일관된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여러 자연적 존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본래 하느님을 향하도록 창조된 하느님의 모상이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향하는 하느님의 영을 풍부하게 받았으며, 하느님과 만남을 통해 자기 인격을 완성하는 존재다. 인간의 최종 목적은 하느님과 영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며, 하느님을 직접 뵙는 것(至福直觀)이고, 하느님의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적 존재로 보이는 인간 안에 이미 초자연적인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의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자연적 열망'이라는 교리를 통해 강조했다.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초월성 그의 이러한 외부론적 사상의 극복은 그리스도교 이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역사학의 발달은 그리스도교를 포함해 모든 종교를 역사학적 입장에서 다뤘다. 이들은 외부론적 신학자들이 구축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부정했다. 역사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자체도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난 하나의 종교이기에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절대성, 계시 종교로서의 초자연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보았다. 드 뤼박은 이를 초자연성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여겼다. 초자연성은 저 멀리 다른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초월성은 내재적 초월성으로서 역사의 시작부터 역사의 종말까지 역사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말한다. 하느님을 저 세상에 홀로 계시거나 인간의 마음속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구체적으로 살아 계시면서 역사를 이끄시는 영(靈)으로 이해했다(「영과 역사」, 1950). 그리스도교는 역사 안에서 발전해 왔다는 면에서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만을 본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에 숨어 계시면서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나타남을 이루신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교는 신적인 것이며 그러한 면에서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초월성은 '외부적 초월성'이 아니라 '내부적 초월성'이다. "사상이나 신조들의 계보로 촘촘히 짜인 조직을 가로질러 균열이나 찢김도 없이 새로운 영, 곧 성령이 지나갔다. 성령은 부드럽게 스며들어왔으나 강력하게 드러나게 했다. 성령은 인간의 역사를 관통했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변했다.… 이것은 진정한 창조다. 그리스도의 영이 온전히 새로운 그리스도의 종교를 세웠다." 교회의 신비, 성찬례가 교회를 만든다 그러므로 드 뤼박은 교회를 숙고하며, 교회를 단지 교리체계나 사람의 조직으로 보지 말고, 그것을 가능케 한 하느님 활동으로 볼 것을 강조했다. 교회가 신자 모임으로만 여겨지는 것에 대항해서, '교회'라는 용어 자체가 부름을 받아 모인 것임을 강조하며 모임이라는 결과보다 그것을 가능케 한 부름이 더 근본적인 것임을 자주 상기시킨다. 그는 교회의 여러 표상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신비체인 교회의 표상을 강조했다.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 성찬례와 교회를 말하면서 "성찬례가 교회를 만든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성찬 거행으로 축성된 그리스도의 몸(성체)을 우리가 영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성찬거행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룬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종말에 이뤄질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9-10). 이 종말에 이뤄질 은총이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에서 일어나고 있다. "교회는 구원의 수단, 아니 위대한 구원의 수단이며 동시에 창조의 목적, 아니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다. 교회는 가시적인 몸이며 동시에 신비롭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에 이르는 길이요 동시에 이 길의 종착점인 생명 자체이시다. 교회를 이와 같이 생각할 때 교회는 구원의 길이요 동시에 종점이다. 교회는 구원의 실재인 영적인 단일체이다." 우리가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교회를 이룬다는 신비를 오늘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앙리 드 뤼박은 초기부터 신학과 교회의 쇄신을 이룬 신학자였다. 성경과 교부들에게서 전해진 그리스도의 진정한 새로움을 깊이 숙고하며, 그리스도의 빛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면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드 뤼박은 한국 신학자들이 배워야 할 신학자이다. 특히 드 뤼박은 추상적인 신학을 펼쳤던 신-스콜라 신학에서 벗어나 신앙 자체가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삶과 실천적 진리이며,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영원한 새로움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며 그로부터 오늘의 쇄신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곽진상 신부(수원 가톨릭대 교수)cpbc2014.02.04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신앙체험수기 우수상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4> 이렇게 시작한 경찰기관에서의 봉사활동은 초기에는 병아리 선교사로서 좌충우돌, 천방지축의 수많은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본당의 예비신자 교리교사, 성서못자리 봉사 등을 함께하면서 서서히 궤도에 올라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말할 수 없는 인간적 방황으로 인해 얼마나 갈팡질팡 해 왔는지' 너무나 부끄러운 자신을 뒤돌아보게 된다. 제2의 삶의 길로 인도해주신 주님의 은총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면서 들어선 봉사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다가오는 인간적 한계는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정도로 떨어질 때가 있으니…!! 그렇게 사랑을 베풀었음에도 일부 대원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등을 돌릴 때 느끼는 인간적 배신감, 순수한 봉사의지를 왜곡해 배타적이고 모욕적인 언행으로 나오는 일부 경찰관들의 태도, 삶의 희망을 전하기 위해 찾아간 유치장에서 오히려 유치인들로부터 삿대질을 받으며 거꾸로 죄인 취급을 받는 당혹감 등….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봉사의지는 꺾이고 심지어 "이들에게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자괴감에 휩싸일 때가 너무 많았다. 어느 봉사 단체나 마찬가지겠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공동체 내 동료들 간의 갈등으로 맥 빠지는 경우였다. 이럴 때마다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매일 저녁에 드리는 기도를 통해 받은 하느님의 에너지이다. 따지고 항의하고 불평을 아무리 늘어놓아도 다 들어주시고 다시 마음의 평화를 주시는 주님의 은총은 나로 하여금 다시 선교현장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또한 성경 봉사를 하면서 배웠던 바오로 사도의 선교 자세는 약한 나를 강하게 만드는 데 큰 힘이 됐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 4,7). 복음의 이 귀중한 보물이 깨지기 쉽고 한없이 나약한 질그릇 같은 우리 마음에 들어 있으나,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죽음을 넘나드는 수많은 고통과 고난과 실패 속에서도 오히려 더욱 강해졌던 바오로 사도의 영적 메시지가 미약한 나에게 더욱 강한 선교 의지를 북돋아줬다. 이와 함께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참 사랑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고 의지에 속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결심에서 출발해 그 결심을 지키는 의지로써 지속됩니다"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매일 매일 새로운 결심을 통해 마음을 정리해오곤 했다. "신앙은 결과가 아니고 과정이며, 업적이 아니고 노력이다. 그리고 무엇을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10년 이상을 선교현장에서 활동하면서 이제야 겨우 어렴풋하게나마 복음 전파의 참된 의미와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의 정신을 깨달을 수 있으니 참으로 굼벵이 같은 신앙을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약 3개월 전 제대한 한 대원의 세례준비 공부를 시키기 위해 동대문 인근 학원은 물론 심지어 시간이 없다고 해서 지하철 역내 벤치에서 요점정리를 해주는 등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으나 막상 세례를 앞두고 포기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인간적 아쉬움이 밀려온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후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경찰관을 희망하는 그에게 관련 취업정보를 알려주는 등 계속 관심을 쏟았다. 이런 나 자신을 보면서 '신앙의 걸음마에서 한 발짝 겨우 앞으로 나가지 않았나' 스스로 생각해본다.(계속)이계상 분도(서울 명일동본당) 백영민2014.03.11
![[생활속의 복음] 살아 있는 감실](//cpbc.co.kr/CMS/newspaper/2014/05/rc/508738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살아 있는 감실부활 제4주일·성소주일(요한 10,1-10)조재형 신부(서울대교구 성소국장)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며, 성소주일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들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교회는 사제 성소와 수도자 성소를 위해 기도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삶을 통해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증언할 사제와 수도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늘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욕심과 교만함으로 나만을 위해 살았다면 겸손과 희생으로 타인을 위해 살도록 마음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어진 능력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능력과 재능으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개’했는지 아니면 우리 뜻대로 살아가는지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오늘 성소주일을 맞아 신앙생활의 3가지 요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의 3가지 요점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과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세례를 받았지만, 우리의 생각과 가치에서 그리스도는 늘 주변부로 밀려가는 것을 봅니다. 가정에서, 이웃과의 만남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피어나는 공동체를 만들기보다는 잘난 사람은 시기하고, 못난 사람은 무시하며 항상 나만 내세우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공동체의 형성 과정은 4단계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거짓 공동체인데, 이는 인사는 하지만 서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공동체입니다. 두 번째는 혼돈의 공동체인데, 마치 고슴도치가 서로 가까이하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듯이 함께 살면서 상대방의 장점과 허물을 보게 되고, 그래서 다투고 실망하는 공동체입니다. 세 번째는 ‘비움’의 공동체입니다. 이는 이제 어느 정도 상대방에 대해 포기하기도 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공동체입니다. 네 번째는 성숙한 공동체인데 3단계를 거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는 공동체입니다. 신앙인은 혼돈의 과정을 거치면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숙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 공동체를 이뤘으면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해주고, 그들을 신앙인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ㄷ-18ㄱ) 늘 기도하면 기뻐하게 되고, 늘 기도하면 감사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바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우리 교회가 오랜 전통으로 지켜온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이 묵주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단순히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온몸으로 모신 최초의 감실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겸손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는 굳센 믿음으로 예수님을 가슴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의 시련을 겪으신 후, 하느님을 온몸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이제 우리 신앙인들은 말씀을 통해,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통해 살아 있는 감실이 돼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양들의 음성을 알고, 양들도 나를 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들의 귀와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 회개의 길입니다. cpbc2014.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