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2>세상 안의 교회](//cpbc.co.kr/CMS/newspaper/2014/01/rc/491257_1.1_titleImage_1.jpg)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세상 안의 교회성찰, 판단, 행동은 사회교리의 기본 방향 사회에 드러나는 여러 문제에 대해 교회가 윤리적인 가르침을 주는 일은 과연 정당한 일인가? 21세기 한국의 복잡한 정치 현실 속에서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여러 가지 사회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떠한 판단을 내려야 할지 혼동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더욱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일 경우, 이러한 긴장감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그럴 때면 흔히 듣는 질문이 "신부님도 정의구현사제단이세요? 신부님들이 사회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것이다. 그때마다 질문을 던진 신자분들에게 되묻곤 한다. "형제님, 형제님은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신가요? 그분들의 주장을 정확히 알고 계신가요?" 하고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만을 기반으로 판단할지 모른다. 자기 생각이나 뜻에 맞지 않을 경우 쉽게 비판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할 것인가 한국 가톨릭교회는 1974년 지학순 주교님의 체포와 구속 사건을 계기로 정의구현사제단을 발족해 직접적인 사회참여 활동을 해왔다. 성장과 발전이란 기치 아래서 억압된 인간의 기본 권리와 존엄성에 대해 교회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고, 그 중심에 가톨릭교회와 정의구현사제단이 서 있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공포정치와 독재의 그늘에서 사람들은 진실에 대해, 그리고 정의에 대해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교회는 자신의 예언자적 역할에 충실했고, 이러한 교회의 실천적인 결단과 행동 속에서 사람들은 도덕성을 찾아냈다. 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이 교회로 찾아들었고, 그들은 교회가 진리를 추구하는 정의로운 모습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민주화되었지만 교회의 사회정의에 대한 몸부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 안에는 사회적 약자들이 많은 까닭이다.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과 더불어 많은 발전이 이뤘지만, 아직도 교회는 진정한 인간 발전이 인간성의 기초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새롭게 등장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교회는 이러한 선택을 위해 세 가지 기본 방향을 제시한다. 바로 성찰 원리, 판단 기준, 행동 지침이다. 그 첫 단계는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으로 성찰의 단계이다. 우선 발생한 사건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주어진 정보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발생한 사회 문제에 대해 객관적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필요하다. 찬성 쪽이나 반대쪽 한 부분만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만일 누군가 한쪽 정보에만 집중한다면 그는 다음 단계인 윤리적 판단 단계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윤리적 판단은 자신에게 주어진 윤리 지식과 교육 환경 등의 영향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습득된 정보를 통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한 사실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비판을 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사회생활의 나침반, 사회교리 판단의 단계에서는 판단을 내릴 기준이 필요하다. 우리는 한국인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이기에 판단 기준을 두 군데에서 동시에 찾아야 한다. 우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가법에 충실하면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부분까지도 충분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교회가 사회에 주는 공식적인 가르침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기록한 성경과 교도권의 가르침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윤리적 판단을 내릴 준거틀이 된다. 성경 말씀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인 「가톨릭교회 교리서」, 「공의회 문헌」, 교황님들의 가르침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해야 한다. 마지막 단계는 행동하는 실천의 단계다. 문제점을 정확히 살펴보고, 준거틀에 의한 판단이 내려졌으면 이내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교회가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신앙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도록 노력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하느님 나라가 천상 세계에만 속해 있는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 속에서 실현되는 구체적인 것이 되어야 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삼천년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류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순례하는 백성으로서의 교회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며 세상 안에서 함께 살아왔다. 교회는 사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존재다. 교회는 단지 사회와 구별되어 존재할 뿐이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교회가 교회 일에만 힘쓸 수 없는 까닭 역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진정한 인도주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사회교리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통합적이고 연대적인 인도주의를 촉진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성찰 원리와 판단 기준과 행동 지침을 교회의 사회교리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간추린 사회교리」 7항).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기 위해 사회교리를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이다.cpbc2014.01.07
![[아! 어쩌나] 227. 자꾸 실수를 합니다](//cpbc.co.kr/CMS/newspaper/2013/11/rc/484947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227. 자꾸 실수를 합니다 Q. 어려운 일이 닥치면 가슴이 떨리고 생각이 좁아져 자꾸만 실수하고 일을 그르치곤 합니다. 부모님도 늘 "너는 왜 하는 게 그 모양이니?" 하고 핀잔을 주십니다. 이제는 여자친구마저 '새가슴'이라고 놀려대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실수하고 나면 제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고, 자책하곤 하는데 나아지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의젓하게 일을 처리하는데, 왜 저는 천덕꾸러기처럼 사는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A.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세상 사람 가운데 힘든 일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여러 번 경험해 익숙해진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왜 나만 이럴까' 하고 자기 마음 안에 무덤을 파서는 안 됩니다. 대체로 다른 사람을 보고 새가슴이니, 남자답지 못하다느니 하며 비아냥거리는 사람일수록 겁쟁이이거나 새가슴일 가능성이 높으니,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귀를 막고 듣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인생길에 훼방을 놓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왜 당황할까요? 인생은 '학습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이 학습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명시적 학습'과 '묵시적 학습'입니다. 자동차 운전을 예로 들지요. 운전하는 법을 처음 배울 때는 명시적 학습 즉, 의식적 학습을 합니다. 그러나 익숙해지면 묵시적 학습 즉, 무의식적으로 운전하게 되지요. 그런데 아주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역으로 행동합니다. 자연스럽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조급하고 많은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생각의 폭이 좁아지고 경직되며, 자신이 하는 생각 이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명 '재앙화 사고'라고 합니다. 재앙화 사고란 가장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거나,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일이 일어날 가능성 즉, 덜 부정적인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하지 못합니다. 막연한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마치 지금 바로 일어날 것처럼 인식합니다. 중간과정을 건너뛰는 생각을 합니다. 좋지 않은 상황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려면 적어도 몇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러한 중간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바로 최후 종말을 생각해 스스로 불안을 증폭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심하게 하고, 스스로 더 위축되게 만듭니다. 재앙화 사고의 근본적 문제는 막연한 부정적 추론입니다. 그런데 이런 막연한 생각은 재앙적 상상을 촉발하고, 자신이 그것에 대처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가지게 합니다. 특히 불안감이 심해지면 재앙화 사고는 더 기승을 부려 실착하거나 실수하게 하고, 다시 더 심한 당황감과 당혹감에 빠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에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싸움터의 장수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임전무퇴의 기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매번 긴장하고 싸움닭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장수가 연일 승승장구를 해서 왕이 손수 전장을 방문했습니다. 왕이 장수에게 비법을 물었더니 장수가 말하기를 "밥을 먹을 때는 병풍을 치고 제대로 상을 차려 먹고, 시간 나는 대로 풍악을 즐겼으며, 싸움을 하지 않고 쉴 때는 시를 짓고 꽃구경을 하며 지친 심신을 달랬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승리의 비결은 '마음의 여유'라고 하더랍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면 당당한 인생을 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황스러움은 변화를 줘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진정되고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 당황하는 것은 덜된 사람 또는 열등감이 많거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마음의 준비가 덜 돼서 그런 것뿐입니다. 따라서 포기하지 말고 차분한 마음으로 대처할 방법을 생각하면 됩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태풍에 시달리는 배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이런 때 가장 효과적인 안정 수단은 '성경 말씀'과 '묵주기도'입니다. 다른 여러 가지 심리치료방법도 좋지만 단조롭게 같은 기도문을 외우는 묵주기도는 하면 할수록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성모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게 해 불안감을 감소시켜주는 최상의 심신 안정제입니다. 또한 성경의 좋은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 품 안에 머무르는 기도 시간도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홍성남 신부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cpbc2013.11.26
![[오늘을 사는 사람들] 한의사 염수현 원장( 서울 화곡본동본당 데이케어센터 봉사자)](//cpbc.co.kr/CMS/newspaper/2014/05/rc/508463_1.1_titleImage_1.jpg)
[오늘을 사는 사람들] 한의사 염수현 원장( 서울 화곡본동본당 데이케어센터 봉사자)'봉사하라' 부르심에 5년째 치매 어르신 진료 평화신문은 이번 호부터 새 연재 기획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시작합니다.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자신이 지닌 크고 작은 재능을 나누며 그리스도 신자들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삶을 전하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애독을 바랍니다. 염수현 원장이 데이케어센터 어르신들에게 침을 놓아주고 있다. 이힘 기자1일 오전 서울대교구 화곡본동성당 데이케어센터(센터장 김정애 수녀)에 도착한 한의사 염수현(안드레아, 41, 밝은아침한의원) 원장이 치매 어르신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할머니 안녕하셨어요?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염 원장) “응~알지. 나 아프게 하는 (침 놓는) 의사 양반.” (치매 어르신) 염 원장은 매주 화요일에 한의원이 아닌 센터로 출근해 이곳 어르신들 건강을 돌봐주는 봉사를 한다. 그가 목요일인 이날에도 센터를 찾은 것은 이날이 근로자의 날이어서 한의원에 갈 필요가 없어 어르신들을 찾아온 것이다. 그는 어르신들을 다시 만날 때마다 기억력 향상을 위해 매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언제 만났는지 기억하느냐’고 질문한다. 염 원장을 기억한 한 어르신은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짓고는 엄지손가락을 지켜 세우며 고마워했다. 염 원장은 5년 전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한 뒤 봉사자로 거듭났다. 그가 주일미사를 마치고 오는데 갑자기 ‘봉사하라’는 네 글자가 왼쪽 머리를 통해 한 글자씩 몸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2009년 어느 가을날이었어요. 다른 본당에서 밤 10시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차 안에서 특별한 체험을 한 거죠. 아직도 생생해요.” 그는 신비한 체험을 한 그 다음 날에도 놀라운 경험을 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 미사에 참례하고 집에 가려던 그를 당시 본당 수녀였던 김정애(멜라니아) 수녀가 붙잡고 “같이 봉사하자”고 말을 걸어온 것이다. 본당에서 사회사목을 담당하던 김 수녀는 동네 홀몸노인 가운데 몸이 아픈 어르신이 많아 ‘봉사자로 의사 한 명만 보내 달라’고 6개월 넘게 간절히 기도해왔던 터였기에,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은 주님의 이끄심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인연으로 시작한 염 원장의 봉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 수녀가 화곡본동본당 데이케어센터장으로 부임하면서 이곳에서 봉사하게 됐다. 염 원장은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을 돌보며 얻는 기쁨으로 자신이 변화됐다고 말했다. 봉사를 통해 내가 이웃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얻는다는 것이다. 그는 “부족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더 노력하게 된다”면서 “봉사 덕분에 직장은 물론, 가정생활도 기쁨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꾸준히 봉사하면서 이 마리아 할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 마리아 할머니는 척추를 다쳐 방바닥을 기어 다니고 계셨어요. 여든이 넘으신 분이 의지할 데도 없고 체질에 안 맞는 음식만 해 드시는 바람에 건강이 나빠져 갔죠. 체질에 따라 식단을 다시 짜드리고, 침도 놔드렸더니 지금은 아주 건강해지셨어요.” 그가 정성스레 간호하고 친자식처럼 돌봐준 덕분에 할머니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 자녀로 거듭났다. 봉사가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는 순간이었다. 열심인 천주교 신앙인 가정에서 출생한 염 원장은 자신이 한의사가 된 것도 하느님의 이끄심이었다고 여긴다. 서울대 의대 진학을 목표로 했던 그가 시험을 망쳐 집안이 초상집 분위기였을 때 한 사제의 권고로 한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또 봉사하라는 주님 목소리를 듣고 김 수녀를 따라 봉사하기 시작하면서 한의원이 경영난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했다. 2003년 개원했을 때만 해도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근무하고, 야간진료까지 했을 때는 늘 경영난에 허덕였다. 그런데 요즘은 일주일에 4일만 일하는데도 늘 환자로 북적인다. 매주 화요일은 데이케어센터 어르신들 건강을 돌보고, 목요일에는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주일은 당연히 성당에서 지낸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하느님이 계시다고 확신합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이끄시는지도 알게 됐어요. 제가 수녀님을 만나 봉사하게 된 것은 생각해보면, 몸이 아픈 어르신들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신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어려운 이들의 청을 거절하시는 법이 없으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 cpbc2014.05.07
 할례- 하느님 백성의 표식 새기는 정결 예식](//cpbc.co.kr/CMS/newspaper/2014/05/rc/508382_1.2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16) 할례- 하느님 백성의 표식 새기는 정결 예식 아들은 생후 8일째 되는 날 의무적으로 할례 예식태어난지 여드레 날을 맞은 한 유다인 아기가 가족 친지들의 축복 속에 할례 예식을 하고 있다. 유다인들은 가정에 아기가 출생하면 곧 이 소식을 동네에 알리고 기쁨을 나누기 위해 친척, 친구, 이웃을 초대해 큰 잔치를 연다. 유다인에게 아기는 하느님의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이다. “보라, 아들들은 주님의 선물이요 몸의 소생은 그분의 상급이다”(시편 127,3). 그래서 랍비들이 “아이 없는 자는 목숨이 끊어진 자로 보아도 좋다”고 경멸할 정도로 여성에게 불임은 ‘치욕’이었다(루카 1,25). 구약 시대 여성은 아이를 가지는 것이 큰 소망이었기 때문에 순산을 자랑했다(탈출 1,19 참조). 해산 때에는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됐다. 남편은 아내가 해산하는 것을 어떠한 경우든 지켜봐서는 안 됐다. 해산하면 제일 먼저 남편이 와서 갓난아기를 무릎에 받아 안았다. 아버지는 아기의 피부를 튼튼하게 하도록 소금으로 비벼 몸을 씻기고 강보에 싼 다음 가족과 친지, 이웃에게 아기를 선보였다. 아기가 사내면 극진한 축사를 들었지만, 딸이면 그렇지 못했다. 훗날 결혼해 다른 집 식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탈무드는 “딸들은 거짓 보배요. 일상 그들을 감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첫 아기가 사내면 그 기쁨은 대단했다. 첫 아들은 아버지의 힘이요 청춘의 첫 소생으로 장자권이 보장됐기에 히브리 말로 ‘베코르’라 불렀다. 쌍둥이가 태어날 경우 먼저 난 아기의 발에 빨간 실을 매어 장자를 구별했다. 어머니는 아기가 2~3살 될 때까지 의무적으로 젖을 물려야 했고, 젖을 뗄 때에는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잔치를 열었다(창세 21,8). 유다인에게 첫 아들과 짐승의 맏배, 첫 수확 농작물은 하느님 것이었다. 그래서 맏배의 대속물로 은 다섯 세켈을 바쳐야 했다(민수 18,15). 요셉과 마리아도 모세의 이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 아기 예수를 봉헌하고 제물을 바쳤다(루카 2,22-24). 이스라엘의 모든 사내아이는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다(창세 17,9-14. 21,4; 레위 12,3). 구약시대부터 생후 일주일이 지나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했다. 예수님께서도 이 관습을 따르셨다(루카 1,59). 할례 날이 안식일이라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됐다(요한 7,23). 모든 유다인 사내들이 할례를 하는 유래는 ‘하느님께서 당신과 아브라함, 또 그 후손과 맺으신 계약의 표지로 할례를 요구하셨기 때문’(창세 17,10-11)이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를 ‘하느님 백성의 참된 표지’로 여겼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 할례를 계약의 육체적 표지뿐 아니라 정결 예식으로 여겼다. 유다인은 아기가 할례를 받는 날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요셉도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유다 관습에 따라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루카 2,21; 마태1,21). 유다인 이름은 우리처럼 가문을 나타내는 ‘성’(姓)이 없었다. 아들의 이름에는 의무적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덧붙여 “누구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아들을 뜻하는 히브리말은 ‘벤’이다. 그래서 유다 사회에서 예수님을 부를 땐 ‘예슈아 벤 요셉’(요셉의 아들 예수)이라고 불렀다. 아이의 이름은 신앙을 담은 것도 있고, 동물과 식물, 자신의 소망을 표해 지은 것 등 다양하다. 예수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 요한은 ‘하느님에 의해 소망 되었기에’, 미리암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뜻이다. 또 ‘끝순이’처럼 ‘자우레’(귀찮은 딸) ‘타만’(인제 그만)이란 이름도 있다. 그리고 ‘데보라’(꿀벌) ‘요나’(비둘기) ‘타마르’ (종려나무) ‘에론’(떡갈나무) 같은 장수를 기원한 동식물 이름도 성경 시대에 흔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산모는 ‘정결례’로 속죄 예식을 바쳐야만 정상적으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 율법은 산모를 시체를 만진 남자의 경우처럼 또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한 몸으로 규정했다. 피로 더럽혀진 산모의 몸이 정결하게 될 때까지 기간은 사내를 낳은 경우 40일, 딸을 낳으면 그 두 배인 80일이었다. 이 기간에 산모는 어떤 거룩한 것에 몸이 닿거나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몸이 정결하게 될 때까지 오직 자기 집 안에서 머물러야 했다. 기간이 차면 산모는 아들이나 딸을 위해 번제물로 바칠 1년 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 제물로 바칠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사제에게 바친다. 양 한 마리를 바칠 형편이 안 되면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2마리를 바치면 된다. 예물을 받은 사제가 산모를 위해 속죄 예식을 행하면 산모는 정결한 몸이 된다(레위 12,1-8).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cpbc2014.05.07
![[평화칼럼] 사랑 때문에](//cpbc.co.kr/CMS/newspaper/2014/03/rc/502360_1.0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사랑 때문에박군수 미카엘(평화방송 라디오국장) 지난 20일 바흐의 '마태오 수난곡' 연주회에 다녀왔다. 공연에는 유럽에서 활동하는 소프라노 임선혜(아녜스)씨가 참여해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았다. 임선혜씨는 공연에 앞서 평화방송 라디오 '교회음악으로의 초대' 프로그램에 출연, 공연에 임하는 소회를 밝혔다. 주일 아침 6시에 방송되는 '교회음악으로의 초대'는 교회 전례에 사용되는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으로 가톨릭대 교수 최호영 신부가 진행한다. "유럽에 가서 미사에 참례했을 때 할머니 몇 분만 계셨을 뿐 성당이 텅텅 비어 있었어요. 신앙의 본고장이 이럴 수가 있나 생각했지요. 그런데 '마태오 수난곡' 연주를 처음 성당에서 하게 됐는데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찼어요. 사순시기에는 수난곡을 들으면서 마음을 정화하고, 대림시기에는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들으면서 성탄 맞을 준비를 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임선혜씨의 이 말에 최호영 신부도 거든다. "미사 전례에는 성실하지 않을 수 있어도 가톨릭 문화 안에 생활하는 것은 풍성하지요." '수난곡'(Passio)은 예수님이 겟세마니 동산에서 붙잡히신 다음 재판의 과정을 거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다. 가톨릭 전례에서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마태오ㆍ마르코ㆍ루카 복음서의 수난 내용을 3년 주기로 돌아가면서 듣고, 성 금요일에는 요한복음의 수난기를 듣는다. 이렇게 다양한 수난 복음들은 일찍이 그레고리오 성가 낭송 음률로 여러 명이 배역을 나눠 입체 낭송을 했다. 또한 신자들이 군중으로 참여하는 등 성경봉독이 점차 극적이고 음악적 성격을 띠게 됐다. 바흐의 '마태오 수난곡'은 이런 의식의 바탕에서 만들어진 음악의 절정이다. '마태오 수난곡'의 첫 곡은 합창으로 시작한다. "오라, 딸들아. 와서 나를 슬픔에서 구하라. 보라! 누구를? 신랑을. 그를 보라. 어떤 모습을? 마치 어린양과 같은 모습을." 예수님은 신랑에, 우리 모두는 딸에 비유된다. 이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베이스 음역으로 노래된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제 이틀이 지나면 과월절이 되는데 그때에는 사람의 아들이 잡혀가 십자가형을 받게 될 것이다." 거기에 우리 교회의 대답처럼 코럴이 나온다. "오, 사랑의 예수님, 당신이 대체 무슨 죄를 지으셨기에 그토록 잔혹한 판결을 받으시나이까?" 소프라노가 아리아로 응답한다. "사랑 때문에, 사랑 때문에/내 주님은 죄 하나 지은 일이 없으신데/죽으려 하시네/영원한 파멸과/심판의 벌로부터/나를 영원히 구원하시기 위함이네." 그러나 군중은 한목소리로 외친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임선혜씨는 말한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아요. 선동된 군중. 우리도 그렇게 선동될 수 있고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분명히 그 안에 있었을 것 아니겠어요? 이 장면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나임을 고백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사순시기가 깊어가고 있다.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 머물면서 새로운 삶을 희망할 수 있는 시간, 참으로 은혜로운 때다. 음악, 영화, 신앙서적, 특강 등 나름의 방식으로 신자들은 정화 시기를 지낸다. 평화방송에서도 사순특강을 마련, 신자들을 돕고 있다. 서울대교구 최승정 신부는 이렇게 권한다. 사순시기 동안 적어도 한번은 마음에 와 닿는 십자가의 길 안내 책자를 가지고 혼자서 기도를 바치라고. 내 삶의 힘듦, 어려움, 수고로움을 봉헌하면서 하느님과 일대일로 만나 십자가의 길을 걷는 체험을 꼭 하라고. 다가오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 금요일에는 수난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내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친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닌지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겠다. cpbc2014.03.25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 목요특강 지상중계]<9> 예수 시대의 문화적 환경과 예수의 문화의식](//cpbc.co.kr/CMS/newspaper/2013/12/rc/487094_1.1_titleImage_1.jpg)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 목요특강 지상중계] 예수 시대의 문화적 환경과 예수의 문화의식복음 선포, 그리스도교 문화 만드는 것안병철 신부(평화방송 평화신문 사장) 문화는 형이상학적 개념도, 학문적 개념도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실존적 개념이라 생각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삶의 자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문화는 10년 전, 20년 전 문화와는 분명히 다른 문화다. 예수님을 말하려면 복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을 문화적 관점에서 정리해 보면 현실 문화에 대한 도전, 혹은 문화의 바꿈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복음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의 이야기다. 지금 살아가는 내 실존에 관계되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2000년 전 인물이지만 그분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실존적이고 실재적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내 믿음이 어떠한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2000년 전 예수님의 문화의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 시대는 로마제국의 동방정책으로 이교 문화가 확산되던 시기였고, 그 문화에 직면해 살던 사람들의 문화는 셈족 문화였다. 이미 유다인들은 로마의 지배와 더불어 문화 충돌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로마가 앞세운 이방 문화는 쉽게 말해 그리스 문화다. 그리스 문화는 사람이 중심인 인본주의 문화로, 내가 살면서 필요하기에 신도 만들고 절대자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유다인에게 신은 근본적으로 계시적인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며 신앙은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은총의 결과였다. 이처럼 신관 자체가 이방 문화와 유다 문화가 달랐다. 유다교 신앙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구원자, 해방자 하느님께 기원을 두고 있지만 긴 세월 동안 신앙의 형태나 관점이 일관되게 정리된 상태는 아니었다. 모두가 율법을 믿었지만 바리사이, 사두가이, 열혈당원, 에세네파 등 다양한 분파가 존재했다. 유다인의 신앙마저도 하나로 통일된 신앙은 아니었다. 성경이 정경으로 공식 선포된 것은 기원후 70년이었다. 성전 파괴의 비극을 눈앞에 두고 구심점이 없어지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생각한 것이 구약성경의 정경화다. 그 이전에는 각 분파들이 각자의 경전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했던 그 시기는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신이 만들어진 시대였기에 그런 문화에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기존 문화에 대한 도전이었다. 새로운 가치, 그리스도의 가치를 살아가도록 하는 복음은 이방 문화나 셈족 문화에 엄청난 도전이었기에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방 문화와 셈족 문화의 결탁이 새로운 가치를 선포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수님은 이방 문화와 셈족 문화에 맞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하신 것이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신으로부터 얻기 위해서는 신의 마음에 들든지, 신을 흡족하게 하든지 해야 한다. 그 방법이 예식이다. 그리스도교 문화도 똑같다. 하느님이라는 신과 나라는 실존이 있고, 예식(전례)을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인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출발한다. 하느님이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셨기에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 응답의 형태로 예식을 하는 것이다. 예식이라는 수단은 똑같지만 그 수단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근본적으로 관점이 다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기존 문화를 완전히 바꿔야만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절대적 가치다. 양보할 수 없고 타협의 여지도 없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절대 가치다. 예수님은 복음 선포를 통해 당대의 이방 문화에 도전하면서 기존 문화가 왜 잘못됐고,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분명히 이야기해주셨다. 그것은 사도 바오로도 마찬가지였다.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교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절대 가치로 삼고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절대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이며 내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절대 가치가 무엇인지 개념 정립이 돼야 한다. 그리고 나로부터 시작된 복음적 삶이 복음적 행동양식으로 변화될 때 이것이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이며 토착화다. 예수님 시대의 문화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형태가 돼야 하는가.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양보할 수 없는 절대 가치를 살아감으로써 그런 삶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줘서 다른 사람도 그 삶을 닮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문화는 만나지 않으면 형성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한 절대 가치로서 복음을 내 삶의 본질로 알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나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복음을 사는 것이다. 내 삶을 통해 복음적 문화를 전하는 것이 성탄을 앞둔 우리의 자세다. 정리=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cpbc2013.12.10
![[평화칼럼] 공동선과 평화 위한 교황의 네 가지 원칙](//cpbc.co.kr/CMS/newspaper/2014/03/rc/501291_1.0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공동선과 평화 위한 교황의 네 가지 원칙이창훈 알폰소(편집국장)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11월 24일 '신앙의 해'를 마치면서 발표한 문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7월 회칙 「신앙의 빛」을 발표한 바 있어 「복음의 기쁨」은 두 번째 문헌이지만, 「신앙의 빛」은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작성한 초안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복음의 기쁨」이 사실상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복음의 기쁨」 한국어판이 발행 2주 만에 주문량 2만 부를 기록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입 대열에 동참했다. 주말을 이용해 책을 펼쳤고 이틀 만에 완독했다. 정독이 아니라 속독이었으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도 이것만은 놓치지 말아야겠다며 밑줄 쳐 놓은 부분이 있었는데, '공동선과 사회 평화를 위한 네 가지 원칙'에 관한 대목이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측면이 있지만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첫째 원칙, '때가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 무슨 뜻인가. 때는 완성 또는 목적을 향한 긴 흐름과 관련되지만 시간은 눈앞의 상황을 장악하려는 짧은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교황은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이따금 사회 정치 활동에서 보는 잘못들 가운데 하나는 권력의 시간을 진전의 때보다 더 중시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당장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의미합니다. …때를 우선시한다는 것은 시간을 장악하기보다는 전진을 시작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223항). 말하자면, 순간의 성공에 집착하지 말고 확고한 신념과 끈기를 지니고 길게 보라는 것이다. 둘째 원칙, '일치가 갈등을 이긴다.' 갈등은 덮어 버린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이를 새로운 전진의 연결 고리로 만드는 것"(227항)이다. 그러나 혼합주의나 일방적 흡수가 갈등의 해결은 아니다. 오히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평화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황은 참행복에 관한 성경 말씀 한 대목을 인용,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마태 5,9)이라고 천명한다(227항). 셋째 원칙,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이상과 현실은 다른데 이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천사 같은 순수주의, 공허한 미사여구,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 선의가 없는 도덕주의, 지혜가 없는 지성주의 등을 거부해야 한다고 교황은 지적한다. 특히 지도자들은 교황의 다음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정치인들과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제안이 매우 분명하고 논리적인데도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순전히 생각의 영역에 틀어박혀 있어서 정치나 신앙을 어떤 미사여구로 전락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232항). 넷째 원칙,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크다.' 당연한 말이다. 교황은 나아가 '전체는 그 부분들의 단순한 총합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발붙여 살고 있는 우리 자리를 떠나서도 안 되겠지만, 더 큰 전망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더 넓은 안목으로 우리 모두에게 유리한 더 큰 선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네 원칙은 처음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고 되새길수록, 참으로 이 시대와 우리 사회에, 내 삶의 보금자리인 가정과 내가 하루 절반 이상을 몸담고 있는 회사에도 더없이 필요한 원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자신했나 보다. "저는 이 네 가지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모든 나라가 그리고 전 세계가 평화를 향한 진정한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221항). cpbc2014.03.18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11>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중)](//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5269_1.1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중)역사의 중심인 십자가 사건, 삼위일체 주님 사랑의 표현 그리스도 중심으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한 발타사르.발타사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규범과 기준으로 제시한 다음, 역사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발타사르는 역사를 그리스도교 이전의 역사, 예수의 시대, 역사의 완성인 십자가 사건으로 나눴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역사는 '하느님의 오랜 인내의 시간'으로 또 다시 두 부분, 성경 밖의 역사와 구약이라고 부르는 성경의 역사로 구분된다. 발타사르는 성경 밖 역사에서 인류가 완성을 추구하며 문명 형성에 큰 도움을 받았던 세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 그것은 신화와 철학과 종교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역사, 하느님의 오랜 인내의 시간 신화에서 인간의 완성은 수직적 차원, '위로부터 빛의 개입'으로 이뤄진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신화는 인간과 세상을 오직 신들의 실재로부터 해석하고 파악하기에 환상에 머문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철학이 등장한다. 철학에서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비극적 한계를 벗어나 불멸을 얻으려고 시도하기에 구원은 존재 자체를 향한 열정(에로스)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철학은 초월적 이성이 도약하는 양식을 신과 인간의 차이를 망각할 정도로 그 유사성을 크게 받아들여, 기도와 예배가 없는 독백의 차원에 머문다. 신화와 철학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종교가 나타나는데, 종교는 신화와 철학, 곧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에서 해석하는 신화적 종교(Vergil)는, 인간이 신에게 받은 사명을 순종으로 이행함으로써 구원이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가치를 자신의 비전(das Eine)으로 통합하는 철학적 종교(Plotin)는 구원을 하나의 신비로, 곧 신에게 온전히 참여하는 모습으로 제시한다. 발타사르는 성경 밖 역사를 신화와 철학과 종교로 나눠 해석한 다음 성경의 역사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며 성경 밖 역사를 탁월하게 넘어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무조건적 사랑으로 선택됐고, 스스로 완성을 추구하고 시도한 성경 밖 역사와 달리 역사 안에서 하느님 구원의지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는 모든 관계를 위한 세계 역사적 모델이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특히 하느님과 인간의 긴밀한 관계를 잘 나타낸다. 하느님에게 선택받고 무조건적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제 그 응답으로 하느님만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부르실수록 그분에게서 멀어져 갔다(호세 11,2 참조). 하느님께선 이스라엘을 가까이 하려 많은 예언자를 보내셨고, 마침내 하느님 종의 모습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암시하신다. 결국 구약은 다가오는 구원자를 향하며 점점 메시아 기대 사상으로 충만해진다. 역사의 상승,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결과 그리스도교 이전의 역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을 발타사르는 이렇게 지적한다.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과 무관하게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시간적으로 뒤늦게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미리부터 암시하고 있다. 역사를 수평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사건을 향해 점진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역사는 단계적으로(신화→철학→종교→구약) 상승하면서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이런 상승 운동은 역사 자체의 힘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역사가 자신의 힘으로 완성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역사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사건은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역사 운동의 결과물이 아닌데,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류 역사가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사의 상승 운동은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그리스도의 사건에 의해,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이 사건 안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 신비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통해 성령 안에서 계시하신 인류를 향한 보편적 사랑은 인류 역사를 그 사랑 안으로 단계적으로 끌어당겼으며, 그렇기에 역사는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상승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발타사르의 역사관 한가운데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의 시간을 이해하려면 발타사르가 그리스도론의 해석학적 길잡이로 제시하는 '사명'의 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명은 예수님 인격만이 아니라 그 행적에도 깊이 관련된다. 예수님께선 하느님께 받은 일정한 사명을 지니고 세상에 파견되신다. 예수님 안에서 인격과 사명은 절대적으로 하나가 된다. 예수님께서 사명을 지니고 이 세상에 파견되신 근본 이유는, 그분이 이미 영원 안에서 성부에게서 나시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의 사명은 영원에서 이뤄지는 성자 출현의 결과다.예수님의 시간, 하느님께서 끌어당기시는 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 전체를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기꺼이 그리고 의식적으로 완수하는 데 헌신하신다. 발타사르는 항상 예수님의 절대적 사명의식을 강조한다. 당신의 사명을 철저하게 의식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명을 철저히 의식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움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영원에서 성부와 성자를 중개하고 사랑으로 서로를 완전히 일치시키듯이, 구원역사 안에서도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계획을 예수님에게 전달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분명히 의식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이런 사명의식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시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예수님 시간은 수평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스라엘 구원역사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예수님 시간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생 동안 하느님 구원의지와 계획을 알리고 또한 직접 실현하는 사명을 철저하게 완수하셨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영원이 이 세상 시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예수님의 시간은 하느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개입하신 시간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삶은 결국 하느님에 의해 결정된 때, 십자가 죽음의 순간을 향해 달려간다. 이 죽음은 하느님 구원의지로 결정된 죽음이며 또한 궁극적으로 하느님 영광을 계시하는 죽음이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순종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하느님의 구원계획으로 이뤄졌기에, 발타사르는 예수님 시간을 하느님께서 '끌어당기시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십자가 사건, 역사의 완성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명 구원역사의 중심이다. 이 십자가에서 역사가 완성된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위한' 사건이다. 유한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께선 인간의 죄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심판한 사건이다. 이 십자가 사건에서 모든 사람의 죄가 낱낱이 밝혀진다. 인간의 절망적 상황과 죽음이 십자가 사건에서 극복됐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발타사르는 세 가지로 든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을 죽음으로 이끈 모든 죄를 온전하게 심판하심으로써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께서 성금요일에 저승에 내려가시어 하느님에게서 이미 영원히 버림받았던 과거의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을 해방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버림받은 자들과 연대해 그들의 저주를 이겨내신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죽은 이들을 심연에서 일으키신다. 부활로 죽음을 극복, 구원을 결정적으로 선포하신다. 따라서 인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십자가는 과거와 현재의 실제적인 죄만이 아니라, 미래에 범할 수 있는 모든 죄까지도 받아들이고 이겨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타사르에게 역사는 십자가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발타사르는 이 완성 사건이 영원하신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화해하려는 성부의 의지가 성자의 사명 안에서 실현된다. 성자께서는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모두 완수하신다. 이런 구원활동에서 성령께서는 성부의 뜻을 성자에게 전달해 성부와 성자를 결합시키신다. 성부께서 세상 모든 죄를 당신 아들에게 짊어지게 하시는 그 희생적 사랑 안에서, 동시에 성자께서 성령 안에서 성부의 모든 뜻을 완수하는 동일한 희생적 사랑 안에서, 세상은 하느님과 결합하고 하나 된다.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부와 성자의 상호 희생적 사랑은 인간의 모든 죄악보다 더 강하고 더 힘이 세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일어난 구원과 완성의 사건인 십자가 사건이 단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면, 십자가는 결국 삼위일체의 신비를 계시한다. 김선태 신부(전주교구 화산동본당 주임, 신학박사)조은일2013.07.23

가톨릭교회와 한국천주교회반석 위 참된 교회, 시련 이기고 복음의 꽃 피워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으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역사와 한국가톨릭교회사를 간략히 소개한다. 73권이나 되는 신·구약 성경 내용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7)면서 이 일들을 증언하고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복음서를 썼다(요한 21,24 참조)고 고백한다. 사도 베드로 베드로 위에 세워진 참된 교회 가톨릭교회의 시작은 ‘예수는 그리스도(구세주)이시다’는 신앙 고백에서 출발한다. 이 교회는 인류 가운데 첫 번째로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기초로 그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직접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하며 사목권을 주셨다. 아울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참조)고 세 번씩이나 당부하며 수위권을 주신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맡겨진 교회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지는 신앙과 사랑의 일치를 간직한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참된 교회’(폴리카르포 교부 고백)로 이해되는 가톨릭교회는 그래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지 50일 되는 날 성령강림을 통해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 증언하면서 교회는 시작됐다(사도 2장).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땅끝까지 가서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선포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인 안티오키아인들은 ‘온 인류를 위한 구원과 신앙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담아 가장 먼저 교회를 ‘보편적’ 즉 ‘가톨릭’이라 고백했다. 박해와 신앙자유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탄생부터 박해를 받았다. 급속한 교세 성장으로 정치적 불안감을 느낀 로마 제국 황제들은 200여 년간 신자들을 잡아다 십자가형에 처하고 맹수들의 먹이로, 검투사의 놀잇감으로 처형했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테르툴리아누스)이 되어 마침내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됐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가톨릭을 국교로 선언했다. 박해를 딛고 이겨낸 교회에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정통과 이단 사이의 격렬한 교리 논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주요 쟁점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문제, 인간 구원에 대한 문제였다. 가톨릭교회는 사도단의 전통에 따라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여 일련의 공의회를 개최, 최종적으로 정통 가톨릭교리를 정립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미사 때 신앙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사도신경’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 믿을 교리 12가지를 나열한 이 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 구원을 위해 강생하시어 수난하시고 부활하셨으며, 성령과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과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중세교회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유럽의 새 주인으로 게르만 민족이 등장하면서 유럽은 중세 시기로 접어든다. 이 시기에 교회는 성 베네딕도회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쳐 한 신앙 위에 일치된 중세기 가톨릭교회의 새 기원을 열었다. 교황청과 프랑크왕국이 융합해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을 창설한 가톨릭교회는 8세기 성화상논쟁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학적 충돌로 1054년 동방교회와 완전히 결별했다. 이후 교회는 클뤼니수도회와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교회 쇄신운동으로 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키고 평신도 영성 강화에 영향을 미쳐 11세기 십자군운동과 청빈운동을 일으켰다. 청빈운동은 교회의 쇄신을 불러일으켰지만 극단적 근본주의와 이단으로 변질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종교재판이 생겨났고,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와 같은 탁발수도회가 생겨나 이단자 개종과 선교활동에 힘썼다. 교회분열과 쇄신운동 14~15세기 교황의 아비뇽 유배와 서구대이교로 인한 교황권 약화로 공의회 우위설이 확산됐고,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신심에 치중돼 개혁의 요구가 확산됐다. 그 결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분열되는 시대(1500~1650년)가 왔다. 이 시대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교회 쇄신의 필요성을 자극받아 1545년 12월 트리엔트 공의회가 개최돼 교회를 재정비하고 종교개혁 바람을 수습했으며, 예수회와 맨발의 가르멜회가 설립돼 ‘밖으로의 개혁이 아니라 안으로의 쇄신’을 이끌었다. 또 신대륙 발견으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예수회가 중심이 되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의 선교활동을 펼쳐 가톨릭교회가 동서양에 존재하는 세계적 종교가 됐다. 근대와 현대교회 17세기 후반 유럽에 몰아닥친 국가지상주의와 경건주의, 엄격주의를 내세운 얀세니즘 이단,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종교 보편주의 확산, 프랑스대혁명, 마르크스의 무신론적 사회주의운동으로 강력한 도전을 받은 교회는 제1차 바티칸공의회와 노동헌장이라 불리는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반포로 가톨릭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20세기 들어 가톨릭교회 안에 전례쇄신과 교회일치운동, 평신도 운동 등이 일어나면서 교회는 교회 내적 개혁과 외적 대화와 개방을 통한 쇄신을 도모했다. 그 역사적 사건이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다. 가톨릭교회는 급변하는 현대세계에 적응하며 자신을 쇄신했으며, 갈라진 형제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비그리스도교 종교와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또 새로운 교회법(1983년)과 「가톨릭교회교리서」(1992년)를 탄생시켰다. 한국가톨릭교회사 한국가톨릭교회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서적을 통한 교리 연구로 신앙을 받아들인 전세계 유일무이한 교회이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베드로)이 이벽을 비롯한 김범우 등에게 세례를 주고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한국교회가 탄생했다.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조선 신자들은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라 여겨 거부하고, 신분제도를 무시, 양반과 천민까지 함께 어울리자 곧바로 조정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4차례 대박해를 거치면서 1만여 명이 넘는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교회는 1831년 조선교구가, 1962년 교계제도 설정되면서 보편교회의 일원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아시아 대륙 복음 선교의 몫을 한국교회에 맡긴다’는 사명을 받은 한국교회는 내적으로는 토착화와 쇄신을 통해, 외적으로는 인적ㆍ물적 나눔을 통해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고 있다. 한국가톨릭교회는 2013년 12월 말 현재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16개 교구에 신자 544만 2996명으로 인구 대비 10.4%의 교세를 이루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백영민2014.08.13
![[출판]히브리서 강해- 영원한 사제직으로 그리스도 신비 설명](//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045_1.1_titleImage_1.jpg)
[출판]히브리서 강해- 영원한 사제직으로 그리스도 신비 설명이영헌 신부, 히브리서 강의 정리히브리서 강해(이영헌 지음/생활성서/1만 원) 학창시절 한 학년이 끝날 때쯤이면 교과서는 늘 앞부분만 때가 타 있고 뒷부분은 새 책이나 다름없었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성경도 구약은 모세오경, 신약은 복음서에서 번번이 벗어나지 못한 경험도 그렇다. 그래서 신약 끝 부분에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은 조금 낯설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딱 떠오르지 않는다. 미사 때 말고는 거의 접해 본 적이 없고 히브리서 관련 해설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이유도 있다. 이 같은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이영헌(광주대교구 저전동본당 주임) 신부가 최근 '히브리서 주해서'를 펴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09년 사제의 해를 선포할 당시 신학생과 평신도를 대상으로 1년간 히브리서를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 신약성경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칭하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제직'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고 있는 히브리서야말로 사제의 해에 꼭 맞는 성경이기 때문이다. 책은 히브리서 개요부터 시작해 △구원 역사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과 역할(1,1-2,18) △충실하고 자비로운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3,1-5,10) △그리스도의 사제직 이해에 필요한 예비 훈화(5,11-6,20)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7,1-28) △대사제의 직무와 구원 업적(8,1-10,39) △영성생활의 근본; 믿음과 인내(11,1-12,1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12,14-13,17) △맺음말(13,18-25) 등 모두 13장으로 이뤄진 히브리서를 핵심 주제별로 나눠 상세히 살펴봤다. 히브리서는 초창기 바오로 서간(편지) 계열로 분류됐지만, 오늘날 대부분 학자들은 히브리서를 바오로 서간 계열로 보지 않는다. 서간이라기보다 설교나 연설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 히브리서는 사제직이 사제만이 아니라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모든 신자에게도 해당된다며 이를 '그리스도의 사제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일상에서 희생과 봉사를 실천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의 사제직인 것이다. 이영헌 신부는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영원한 사제직으로 표현한 가르침을 설명해주고, 그에 따른 삶을 살도록 그리스도인을 훈화, 격려하는 가르침을 담은 독특한 책"이라며 "이 해설서가 신자들이 그리스도 사제직의 본질과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며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1984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에서 성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광주가톨릭대 교수와 총장을 역임했다. 박수정 기자박수정2013.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