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궁금증] 54. 성경에 나오는 눈물을 담는 병은 무엇인가요?](//cpbc.co.kr/CMS/newspaper/2012/11/rc/431259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54. 성경에 나오는 눈물을 담는 병은 무엇인가요?각자 눈물병에 눈물 모아 소중히 간직, 사람이 죽으면 그 눈물병도 함께 매장이란 에스파한 박물관에 전시된 눈물병."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라는 베드로의 질문을 제목으로 한 영화 '쿼바디스'에 폭군 네로가 눈물을 억지로 짜내 병에 담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네로의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났던 베드로 사도는 도망치던 중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개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다.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교인을 탄압하려고 로마 시가지에 불을 놓고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네로는 눈물단지를 가져오게 한 뒤 긴 대롱에 억지로 짜내듯 눈물을 받아 담는다. 페르시아에서는 장례식을 주례하는 사제가 손에 면 헝겊을 들고 있다가 가족과 친지들이 눈물을 흘리면 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정성껏 닦은 후 병에다 짜넣고 아주 조심스럽게 보관하는 관습이 있었다. 또 죽음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장례식에서 모은 눈물을 입 속에 한 방울 떨어뜨리면 죽어가던 사람이 소생하는 것으로 믿기도 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눈물을 받아두는 병이 있었다. 이 눈물단지들은 유리나 질그릇 같은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졌으며,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눈물단지 대부분은 밑 부분이 넓은 대신 목이 호리호리하고 깔때기 모양의 주둥이를 갖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한 토기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 이 눈물단지는 가정에 어떤 재난이 생겼거나 마음이 상해 눈물을 흘리게 될 때, 흐르는 눈물을 모아 보관하는 데 쓰였다. 식구들은 제각기 눈물병을 하나씩 갖고 있었는데, 슬픈 일로 눈물을 흘리는 동안 눈 아래에 병을 대고 흐르는 눈물을 병에 담았다. 그리고는 병을 밀봉해 집안의 잘 보이는 곳에 보관했다. 가족이나 친척 중에 재난이 생기면 그 눈물병을 챙겨서 그 재난이 일어난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물병을 매우 소중하게 간직하고 성스럽게 여겼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눈물병을 함께 매장했다. 이 눈물단지를 깨뜨리거나 그 안의 눈물을 쏟아 풍습대로 함께 매장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다. 시편에 눈물단지에 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저는 뜨내기, 당신께서 적어 두셨습니다. 제 눈물을 당신 부대에 담으소서. 당신 책에 적혀 있지 않습니까?"(시편 56,9). 신약성경에 죄인인 한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 발을 씻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자신의 눈물단지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8). 눈물은 인간의 격한 감정과 슬픔을 표현한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비탄, 애도의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눈물은 겸손, 좌절, 실망의 상징으로 이런 인간적 감정과 연관돼 나타난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라자로의 죽음에 몹시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신다. 그리고 그를 다시 살리시는데, 예수님 눈물은 사랑의 표현과 인간적 면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요한 11,1-44). 바오로 사도도 사목자로서 신자들을 향한 걱정과 연민 때문에 자주 눈물을 흘렸다(2코린 2,4).퇴사자22012.11.13
![[신앙단상] 카인의 분노](//cpbc.co.kr/CMS/newspaper/2014/09/rc/529681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카인의 분노강금실 에스더(법무법인 원 변호사) 성경은 오직 온유와 겸손, 인내로 마음 안을 가득 채우고 넘쳐서 세상의 관계 속에 드러내고 실천하는 수준이라야 ‘사랑’이라고 했다(1코린 13).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신명 6,5) 사랑해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에서 ‘의지’를 무질서한 집착에서 말끔히 씻어내어 영혼의 기능과 감정과 욕구를 하느님과 합일에 써야 한다고 했다. 무질서한 집착과 감정은 기쁨과 바람과 슬픔과 무서움이다. 하느님과 합일을 향해 영혼을 ‘의지’로 단련시켜야만 온전한 사랑의 에너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랑은 경계가 없고 막힘이 없는 것이어서 그 본질에서는 비교나 경중이 없다. 사랑의 에너지로 존재를 가득 채운 수준에 이르러야, 사심이 비워져 투명하므로 진리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도 진리를 온전히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1코린 13,11-12). ‘사랑’은 정신의 궁극적 성숙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는 것인데(1코린 13,4-5). 사람의 몸을 통해 태어난 첫 번째 사람 카인은 시기와 분노로 살인을 저질렀다. 하느님은 아담을 내쫓되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었듯이,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도 벌을 내리되, 표징을 찍어 그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세 4,15). 그러니 하느님 사랑을 닮으려면 악에 대해 응징은 하되, 악인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마태 5,44). 카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아벨과 비교했고, 분노와 시기로 아벨을 죽이고도 죄책감이 없었다. 하느님이 카인에게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카인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하고 말대꾸를 한다. 이것은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반발적 언사이기도 하다. 인정 욕구는 죄책감을 무디게 할 정도로 강렬한 추동력이고, 그만큼 죄악이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창세 4,7) 쉽사리 틈을 비집고 들어오게 하는 유혹에 노출된다. 카인의 분노는 우리 생활 속에서 통상적으로 빈번히 일어나는 양태다. 인정 욕구에서 비롯하는 분노와 시기는 그 정도를 달리할 뿐이며 쉽사리 사랑으로 착각된다. 다만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만큼은 절제하는 성숙함을 갖춰야 타인과의 관계 형성, 심지어 적대적 관계에서도 공존이 원활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사랑과 악의 통로로서의 분노에 대한 성찰이 없고서는 올바른 가치기준과 행위 윤리를 갖추기 어렵다.하느님의 명령을 위반한 아담의 행위를 노아가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해서(창세 6,22) 만회했다면, 카인의 말대꾸는 아브라함에 이르러 수정된다. 아브라함은 그를 시험하고자 부르는 하느님에게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창세 22,1). 아무리 시험이라 해도 자식을 죽이라고 한 하느님이나, 또 실제로 칼을 뽑아든 아브라함이나 너무 잔혹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태어난 첫 번째 사람 카인이 살인을 저질렀으니, 아브라함이 뽑아든 칼로서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을 정도의 의지 속에서 죄를 범함과 죄 사함이 대칭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가르침에 의지를 내어 노력함으로써 시기와 분노가 살아 움직이는 카인으로부터 아브라함에게로 옮겨가기를 소망해 본다. 평화신문2014.09.17

거짓 종말론 빠진 신자, 교회가 구해야 가톨릭대 사목연구소·신학과사상학회, ‘묵시록과 종말론’ 학술 심포지엄 가톨릭대 사목연구소와 신학과사상학회는 8일 묵시록과 종말록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을 열고, 교회와 사회 안팎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신천지 문제를 신학적 측면에서 살펴봤다. 왼쪽부터 백운철 신부, 이성근(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신부, 허규 신부, 이혜정(예수의까리따스수녀회) 수녀, 김준철·한민택·박준양 신부. “신자들이 사이비, 이단과 같은 신흥종교에 빠지는 것은 신흥종교의 교리에 매혹됐다기보다, 기성 교회에선 느낄 수 없던 공동체 의식, 사목적 관심과 배려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기성 교회가 잊거나 도외시한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적 측면을 신흥종교가 새롭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한민택(수원가톨릭대) 신부는 8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대 신학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이같이 말하며 “신천지에 가입한 가톨릭 신자가 지속해서 증가하는 현상은 우리 자신의 민낯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신부는 “신흥종교 연구는 우리의 지금 모습이 어떻고, 어떤 방식으로 다시 본질로 돌아가야 하는지 살펴보게 한다”면서 “신천지뿐 아니라 한국의 다양한 신흥종교에 대한 신학적, 사목적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가톨릭대 사목연구소와 신학과사상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날 학술심포지엄은 교회와 사회 안팎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의 교리와 실태를 신학적, 학술적 측면에서 분석, 성찰한 자리였다. 제1발표에서는 신천지 교리의 핵심인 ‘요한묵시록’의 올바른 이해와 해석에 대해 살펴봤고, 제2발표에서는 신천지를 중심으로 국내 그리스도교계 신흥종교의 종말론을 신학적으로 분석했다. 심포지엄 시작 30분 전부터 300석이 넘는 대강당이 신자와 수도자, 신학생들로 꽉 들어찼다. 박준양(가톨릭대 신학대) 신부는 “신천지 운동은 치밀하고 강력한 조직적 성격을 띤 신흥종교 운동 범주에 속하면서도, 내용 면에선 신(新)영지주의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교 초기에 이단으로 분류된 사상으로 세상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이원론을 주장하며, 물질세계를 거부하고 비밀스러운 실천으로 얻어진 참된 인식을 통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박 신부는 “신흥종교의 거짓된 종말론적 주장에 담긴 오류와 위험성을 분명히 지적하는 예언자적 고발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교리적 분석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사목자들은 신자들이 신흥종교에 빠지지 않도록 영성적 사목적으로 돌볼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김준철(서울 돈암동본당 주임) 신부는 “신천지는 신천지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폐쇄적이며 자체 교리서와 출판물을 외부에 공개하고 있지 않기에 그 교리를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면서 신천지 연구에 어려움이 있음을 설명했다.한민택 신부는 “신천지는 종말론을 다룬 마태오 복음 24장과 요한묵시록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며 왜곡된 성경 지식을 주입하는데, 누군가에게 비판을 받으면 때때마다 교리를 바꾸고 있어 신천지에서 주장하는 종말론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고 말했다. ‘요한묵시록과 그 해석’을 발표한 허규(가톨릭대 신학대) 신부는 “종말과 다양한 상징적 표현으로 가득찬 요한묵시록은 종말을 강조하는 신흥종교들에게 애용돼 왔고, 이들의 작위적 해석은 듣는 이들을 솔깃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허 신부는 “묵시록은 겉으로 보기엔 심판과 단죄, 재앙과 전쟁을 다룬 책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오히려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라면서 “종말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단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줄 뿐, 이러한 결과는 묵시록이 전하고자 했던 희망이나 위로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한국 신흥종교 연구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노길명(요한 세례자, 고려대) 명예교수가 참석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노 교수는 “신흥종교 단체에선 천주교 신자를 신흥종교의 예비군으로 여기고 있다”면서 사목자들이 신자들의 교리교육을 강화하고 사목적 돌봄과 배려에 더욱 힘쓸 것을 당부했다. 가톨릭대 신학대 학장이자 사목연구소 소장인 백운철 신부는 “신천지 문제를 다루면서 결국 우리 자신이 복음적으로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 됐다”면서 “신천지를 비롯한 신흥종교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평화신문2014.11.13

사랑과 존경이 있는 이곳이 어르신 천국서울 서초구립노인요양센터, 입주 어르신 가족처럼 모시고 맞춤 서비스 제공서울 서초구립노인요양센터 어르신들이 문화공연을 즐기고 있다. 사진제공=서초구립노인요양센터 "우리 같은 노인들에게 이만한 시설은 없어요. 수녀님, 직원들이 진정 마음으로 우리를 대해주니까요."(정성중 요셉, 91) "종일 마음껏 기도하지, 성경 공부하지, 미사 참례하지, 이런 곳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주님께서 이뤄주셨어요."(임귀임 마르타, 92)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340길 21 서초구립노인요양센터. 우면산 자락 한편 평온한 곳에 자리한 센터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센터에서의 생활에 더할나위 없이 만족한다고 입을 모았다. 미술ㆍ원예ㆍ심리상담ㆍ종교활동 등 수십 가지에 이르는 프로그램과 갖가지 문화활동을 하며 사는 어르신들은 365일 센터가 주는 즐거움에 산다. 복도 벽을 한가득 메운 사진 속에는 고령의 어르신들이 휠체어를 타고 힘겨운 몸을 이끌고서 성지순례하며 기도하는 모습, 꽃단장하고 신바람 나는 공연을 즐기는 환한 얼굴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어르신들의 참여도가 높은 것은 종교활동이다. 센터는 미사, 예배, 법회 등 각 종교에 맞는 신앙생활을 배려하고 있다. 개신교 신자 어르신도 수녀가 가르치는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에 빠지지 않을 정도다. 치매 어르신이 70%, 한해 40여 명이 센터에서 주님 곁으로 떠나지만 대부분 보호자들은 병원 중환자실보다 이곳 센터에서 수도자들의 따뜻한 기도 안에서 임종을 맞길 원한다. 어르신들의 편안한 안식처인 센터가 설립 3주년을 맞았다. 서울 25개 구 가운데 최초 구립노인요양시설이자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소속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센터에는 입주 어르신 200명이 6개 마을로 나눠 살고 있다. 수녀 3명을 포함해 직원 130여 명은 어르신 각자 성향을 반영한 '케어 플랜'에 따라 어르신들이 평생 살아온 모습 그대로 생활하도록 돕는다. 쾌적한 입지 조건과 문화ㆍ케어 서비스, 나아가 영적 배려까지 심혈을 기울여온 센터는 3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교회가 운영하는 모범 노인요양시설로 손꼽히고 있다. 한달 생활비 수백만 원에 이르는 대기업 시니어타운 관계자들이 10분의 1에 불과한 생활비로 운영하는 이곳 센터에 대기자만 700여 명에 이른다는 소문을 듣고 수시로 찾아와 비결을 캐물을 정도다. 센터는 14일 센터에서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장 정성환 신부 주례로 3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인터뷰 / 센터장 박지숙 수녀 "'어르신이 주체로서 행복한 삶의 구현'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어르신 돌봄을 넘어 한분 한분이 매일 기쁘게 주체적 삶을 사시도록 힘쓰는 일은 꾸준히 이어져야죠." 센터장 박지숙(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수녀는 "어르신들이 조금이라도 웃으며 생활하실 수 있도록 직원들은 '오감(五感)'이 열린 생활로 존중하며 섬기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박 수녀는 "200명 어르신 뒤에 수백 명 보호자들의 기대가 있어 때론 힘들 때도 있지만, 대부분 저희를 또 하나의 가족으로 여겨주신다"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어르신과 더불어 살도록 직원 영성교육 또한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박 수녀는 "어르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사랑과 존경을 담고, 어르신 말씀에 늘 귀 기울이고, 그분들 동작 하나에도 기뻐하는 센터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다"며 "어르신들을 천국으로 배웅하는 데 저희를 도구로 써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백영민2014.04.16
![[성경 속 궁금증] 49. 성경에서 마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cpbc.co.kr/CMS/newspaper/2012/09/rc/426505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49. 성경에서 마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인간 참된 모습 존재하는 마음,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예수 성심(이남규 작, 1978년). 성경시대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적ㆍ내적 움직임을 몸의 어떤 특정 기관 활동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인체 중심인 심장은 마음과 동일한 것이었다. 인간의 참된 모습은 외면의 아름다움이나 힘에 있지 않고 마음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도 인간의 진실을 외적 행동으로 보지 않으시고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으로 살피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하느님은 인간에게 굳은 마음을 없애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 여기서 새 마음은 단순히 깨끗한 마음을 뜻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종의 마음이다. 성경에서 마음은 모든 인간 감정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된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화를 내며 말씀하셨다. '레위인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그가 말을 잘하는 줄 안다. 그가 지금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 그는 너를 보면 마음으로 기뻐할 것이다.'"(탈출 4,14). 따라서 성경에서 절망이나 슬픔, 신뢰나 분노 등도 모두 사람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들로 나타난다. 그래서 새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적으로 변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인간 마음은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음은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만 아니라 행동을 선택하기도 한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1-23). 이처럼 사람이 속으로 품는 부정적ㆍ긍정적 생각이나 의도나 자세만이 아니라 모든 구체적 행동까지 마음에서 흘러나온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생각하고 기억하는 자리가 마음이다. 즉, 지식을 얻는 곳, 지식이 저장되는 곳도 마음이라는 것이다(잠언 15,14). 재미있는 것은 사람 마음이 몸의 건강과도 직결된다고도 믿었다는 사실이다.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다"(잠언 14,30). 이처럼 성경에서는 마음을 감정과 이성, 의지 그리고 도덕과 신앙의 중심으로 여겼다. 그래서 마음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삶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도 바오로는 신앙은 사고나 감정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의 문제라고 가르쳤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결국 마음은 곧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가 된다. "거기에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찾게 될 것이다.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 4,29). 동시에 마음은 성령께서 머무시는 곳이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2고린 1,22).퇴사자22012.09.18

복자 124위 열전 이경도·경언독실한 신앙의 부모 밑에서 자라, 형에 이어 동생도 순교 복자 이경도 이경도(가롤로, 1780∼1802)와 순이(루갈다, 1782∼1802), 경언(바오로, 1792∼1827) 3남매를 얘기하자면, 그의 부모를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유명한 실학자인 이익(1681∼1763)의 외손으로, 조선 교회 설립 직후인 1794년에 신앙을 받아들였고, 모친 안동 권씨는 조선 교회 설립 초기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로, 신앙에 열심이었다.이처럼 신앙적 가정환경을 만든 부모 슬하에서 자라난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교리 실천에 열심일 수밖에 없었고, 3남 2녀 중 세 남매가 신앙적 용덕을 보이며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이들 중 이순이 복녀는 이미 남편 유중철(요한, 1779∼1801) 복자와 함께 소개한 바 있기에 이번에는 이경도ㆍ경언 형제만 소개한다.본래 성격이 온순하고 너그러웠던 이경도는 장성해서도 학문에 재능을 보여 교회 서적을 연구하는 데 힘썼다. 어릴 때 병을 앓아 척추 장애인이 됐지만, 신앙으로 신체적 결함을 보완했다. 1793년 혼인을 한 지 석 달 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장남으로서 제사를 피하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모든 제사 참여에 거리를 두는 데 성공했다. ‘척추 장애’를 핑계로 제사에 참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가장으로서 집안을 이끌며 아랫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동정 생활을 하고자 유중철과 혼인한 누이 이순이의 혼사 때 거센 폭풍과도 같은 반대를 감수해야 했다.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가문은 조선 사회에서 불문율처럼 내려오던 가통(家統)과 학통(學統), 대통(大統)이라는 3통, 곧 집안과 학문적 전수 계통, 왕통 계승 등 질서에서 보자면 한참 못 미쳤기 때문이었다. 양반도 다 같은 양반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이경도는 모든 반대를 동요하지 않고 견뎌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최필공(토마스)이나 홍재영(프로타시오) 등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익혔다. 그랬기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체포돼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1802년 1월 29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이경언은 그의 형이 순교한 지 25년 뒤에 순교한다. 부친이 선종할 때 2살밖에 되지 않아 그는 부친의 가르침은 받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형의 훈육 속에서 신앙 실천에 열심을 보였다. 신유박해 당시 형과 누나가 순교하면서 집안이 몹시 가난해졌지만, 그는 신앙으로 가난을 견디며 중인 집안의 딸과 혼인했다. 아내의 성품이 고약해 갖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모범적 인내로 이를 극복했으며, 성경 봉독과 묵상에 빠지곤 했다. 그는 특히 냉담교우들에게 신앙을 권면하고 격려하며 미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열중했다. 또 자신보다 가난한 이들의 곤경을 덜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명도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교회서적을 필사하거나 상본을 모사해 교우들에게 나눠주는 한편 가난한 가운데서도 베이징을 왕래하는 정하상(바오로) 등 밀사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대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 늘 순교 원의를 품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자주 묵상을 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난 뒤 자신이 나눠준 서적과 상본이 발각돼 전주 관아에 고발되면서 한양에 살고 있던 그는 포도청에 끌려갔다가 전주로 이송됐다. 그 뒤 여러 차례의 혹형에 자신의 마음을 채찍질하며 순교를 위해 노력하던 그는 옥중에서 어머니와 가족, 아내, 그리고 명도회원들에게 보내는 서한 3통을 써서 보낸다. 그 서한에 당시 그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상처의 괴로움으로 말하자면 나의 너무나 연약한 육체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습니다. 천주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찌 한시인들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신앙을 증거하는데 노력하던 그는 1827년 6월 27일 옥중에서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복자 124위 열전 <33> 이경도·경언 백영민2014.10.14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3089_1.0_titleImage_1.jpg)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2> 구약 시대의 역사이집트 탈출, 이스라엘 민족에 결정적 사건 외세 침입에 왕정 요구하지만 혼란 지속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함락되는 아픔 겪어이스라엘의 역사 오늘은 나무가 아닌 숲만을 보는 날입니다. 두 주에 나누면 앞부분을 잊어버리실까봐, 무리가 가더라도 한 회에 끝내겠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살펴보게 될 구약 시대 전체의 역사를 한번 맛보기로 훑어 놓으려는 것입니다. 앞으로 천천히, 자세히 다시 다룰 것이므로 이번에는 흐름만 보시면 됩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확인할 내용들이 아닙니다. 그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기원전 2000년대에 떠돌이 유목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그려진 성조 시대의 모습은 대략 기원전 1800년 정도의 생활상에 해당하는 듯합니다. 역사적으로 연대를 따질 수 있는 것은 이집트 탈출에서부터입니다. 물론 이것도 정확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기원전 1200년대에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에서부터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이 사건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탈출기에서는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맺어진 것도 이 때부터라고 전해 줍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요르단 강 동쪽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을 건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열두 지파에게 분배합니다.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때부터 왕정이 설립되던 때까지의 판관 시대는(기원전 1200~1030년쯤), 왕정으로 넘어가기 이전의 과도기였습니다. 이때의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나뉘어 있어서, 아주 견고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판관은 일시적인 지도자로서, 세습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판관기는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판관을 일으키시어 이스라엘을 구해 주셨다고 전하지만, 필리스티아와 같이 계속 이스라엘을 침범하는 세력들에 맞서기 위해서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 같은 왕정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정은 찬반 논란이 그치지 않은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왕정을 세우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처음에는 벤야민 지파의 사울이 임금으로 뽑힙니다. 하지만 그의 왕국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기원전 1010년쯤 유다 지파의 다윗이 왕위에 올라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수도도 예루살렘으로 정합니다. 이어서 970년쯤에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임금이 되어, 왕국이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번성했던 그 왕국은 분열의 요인들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933년에는 왕국이 둘로 분열됩니다. 솔로몬의 신하였던 예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고,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은 남왕국 유다만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로 남왕국 유다에서는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다윗 왕조가 이어졌지만, 반란으로 시작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차례 반란이 거듭되고 왕조가 바뀌었습니다. 이제부터가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실 때 복잡한 부분입니다. 도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왕정이 설립된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온통 외세에 시달려온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기원전 8세기 이래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티나 지역을 지배했던 큰 세력이 누구인지를 파악하시면 됩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아시리아가 패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시리아가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아시리아의 뒤를 이어 큰 세력이 되었던 것은 바빌론이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는 바빌론이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도 불에 탔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뒤흔드는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무너뜨리자,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에 끌려와 있던 유다인들을 팔레스티나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시기의 중요한 인물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였습니다. 그들의 활동에 힘입어 성전이 재건되었고, 이스라엘은 미약하나마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기원전 333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즉위하여 짧은 시간에 페르시아도 꺾고 광대한 제국을 이룩하였습니다.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기원전 160년대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던 이들은 유다교를 금지시켰고,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마카베오 형제들은 일시적으로나마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몬 왕조를 세웁니다. 그러나 이 하스몬 왕조의 내분으로 기원전 63년에 로마군을 끌어들이게 되어 결국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기원후 66년에는 독립을 위한 항쟁이 일어났지만 로마군에 진압되고, 기원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최소한으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성경의 하느님은 전쟁 한번 겪지 않은 평화와 번영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끊임없이 죽음을 체험한 역사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당신을 알게 하십니다. 이 역사의 모든 순간은 하느님을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 당신 백성에 대한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시편 106,4). 백영민2014.12.03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2>구약 시대의 역사 이집트 탈출, 이스라엘 민족에 결정적 사건외세 침입에 왕정 요구하지만 혼란 지속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함락되는 아픔 겪어오늘은 나무가 아닌 숲만을 보는 날입니다. 두 주에 나누면 앞부분을 잊어버리실까봐, 무리가 가더라도 한 회에 끝내겠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살펴보게 될 구약 시대 전체의 역사를 한번 맛보기로 훑어 놓으려는 것입니다. 앞으로 천천히, 자세히 다시 다룰 것이므로 이번에는 흐름만 보시면 됩니다.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확인할 내용들이 아닙니다. 그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기원전 2000년대에 떠돌이 유목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그려진 성조 시대의 모습은 대략 기원전 1800년 정도의 생활상에 해당하는 듯합니다.역사적으로 연대를 따질 수 있는 것은 이집트 탈출에서부터입니다. 물론 이것도 정확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기원전 1200년대에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인이 이집트에서부터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이 사건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형성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탈출기에서는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맺어진 것도 이 때부터라고 전해 줍니다.그러나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요르단 강 동쪽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을 건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열두 지파에게 분배합니다.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때부터 왕정이 설립되던 때까지의 판관 시대는(기원전 1200~1030년쯤), 왕정으로 넘어가기 이전의 과도기였습니다. 이때의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나뉘어 있어서, 아주 견고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판관은 일시적인 지도자로서, 세습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판관기는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판관을 일으키시어 이스라엘을 구해 주셨다고 전하지만, 필리스티아와 같이 계속 이스라엘을 침범하는 세력들에 맞서기 위해서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 같은 왕정을 요구합니다.이스라엘에서 왕정은 찬반 논란이 그치지 않은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왕정을 세우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처음에는 벤야민 지파의 사울이 임금으로 뽑힙니다. 하지만 그의 왕국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기원전 1010년쯤 유다 지파의 다윗이 왕위에 올라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수도도 예루살렘으로 정합니다. 이어서 970년쯤에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임금이 되어, 왕국이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번성했던 그 왕국은 분열의 요인들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933년에는 왕국이 둘로 분열됩니다. 솔로몬의 신하였던 예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고,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은 남왕국 유다만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로 남왕국 유다에서는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다윗 왕조가 이어졌지만, 반란으로 시작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차례 반란이 거듭되고 왕조가 바뀌었습니다.이제부터가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실 때 복잡한 부분입니다. 도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왕정이 설립된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온통 외세에 시달려온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기원전 8세기 이래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티나 지역을 지배했던 큰 세력이 누구인지를 파악하시면 됩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아시리아가 패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시리아가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아시리아의 뒤를 이어 큰 세력이 되었던 것은 바빌론이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는 바빌론이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도 불에 탔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뒤흔드는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무너뜨리자,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에 끌려와 있던 유다인들을 팔레스티나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시기의 중요한 인물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였습니다. 그들의 활동에 힘입어 성전이 재건되었고, 이스라엘은 미약하나마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기원전 333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즉위하여 짧은 시간에 페르시아도 꺾고 광대한 제국을 이룩하였습니다.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기원전 160년대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던 이들은 유다교를 금지시켰고,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마카베오 형제들은 일시적으로나마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몬 왕조를 세웁니다. 그러나 이 하스몬 왕조의 내분으로 기원전 63년에 로마군을 끌어들이게 되어 결국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기원후 66년에는 독립을 위한 항쟁이 일어났지만 로마군에 진압되고, 기원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됩니다.이스라엘의 역사를 최소한으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성경의 하느님은 전쟁 한번 겪지 않은 평화와 번영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끊임없이 죽음을 체험한 역사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당신을 알게 하십니다. 이 역사의 모든 순간은 하느님을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주님, 당신 백성에 대한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시편 106,4). 평화신문2014.12.03
![[복음이야기]<9> 이스라엘의 절기- 유다력](//cpbc.co.kr/CMS/newspaper/2014/03/rc/500208_1.1_titleImage_1.jpg)
[복음이야기] 이스라엘의 절기- 유다력하느님 자비 빌고 관용 드러내는 '축제' 이스라엘의 한 해 절기는 가톨릭교회의 전례력처럼 율법으로 정해진 축제일을 지키는 '유다 종교력'에 따라 규정됐다. 유다인의 일상생활에 중요한 구실을 한 이 축제들은 파종제와 추수제 등과 같은 계절적 풍속에 구세사의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는 종교적 축제를 연계시킨 것이 특징이다. 또 유다인의 축제 대부분은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비를 비는 '회개'의 성격이 강한 것이 다른 민족의 여느 축제와 다른 점이다. 이는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탈출 19,17)이라는 축제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리기 위한 호소이다. 유다인의 축제는 종교력에 따라 대축제와 소축제로 구분된다. 대축제는 가장 중요한 축제로 △과월절(파스카, 무교절, 유월절) △오순절(추수절, 주간절) △초막절(장막절)이 있다. 신명기 16장 16-17절에 따르면 유다인 가운데 모든 남자는 해마다 세 번씩, 곧 무교절과 주간절과 초막절에 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곳(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쳐야 한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이 대축제를 '순례축제'라 불렀다. 소축제는 역사적 사건이나 관습에 기원을 둔 기념일로 초여름 양털을 깎는 행사(창세 31,19; 38,12)와 아다르 달(2월 중순~3월 중순) 14~15일 이틀간 유다인 왕비 에스테르가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를 움직여 유다인의 원수를 제거하고 동족을 구한 사건을 기념해 지내는 '푸림절'(에스 9,17-32) 등이 있다. 또 마카베오 형제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해 성전을 봉헌한 것을 기념해 키슬레우 달(11월 중순~12월 중순) 25일부터 8일 동안 지낸 '제단 봉헌 축일(하누카)'(1마카 4,36-59)이 있다. 마카베오 형제들이 니카노르 장군을 무찌른 것을 기념한 아다르 달 13일은 '승전 기념일'(1마카 7,49)로 지냈다. 이외에 유다인은 율법에 따라 '정한 때'라 불리는 안식일과 관련된 축제를 지냈다. 이 공식 축제는 △안식일(탈출 16,23) △매달 초하룻날(민수 28,11) △첫째 달 초하룻날(탈출 40,2-16) △칠월 초하룻날(레위 23,24-25) △안식년(레위 25,1-7) △희년(레위 25,8-22) 등이 그것이다. 유다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과 연관된 이 축제들은 하느님의 무한한 관용과 자비를 드러내는 축제로 종교적, 사회적, 인도적, 경제적 사면이 시행됐다. 율법은 안식년에 유다인 노예들, 특히 부채 때문에 팔려온 사람들을 해방시킬 것을 명했다. 동시에 이 해에는 모든 부채도 면제됐다. 또한 이 해에는 토지도 한 해 동안 완전히 휴식을 줘야 했다. 안식년을 일곱 번 보내고 난 50년째인 희년에는 모든 노예는 예외 없이 해방됐다. 또한 가난한 사람이 부채를 갚기 위해 부자에게 팔았던 토지는 율법이 엄격하게 정한 가격으로 반환됐다. 유다인은 또 율법에 따라 '금식일'을 정해 지켰다. '정한 때'에 지내는 금식일은 재앙을 막기 위해 회개와 속죄의 뜻으로 금식하는 티쉬리 달(9월 중순~10월 중순) 10일의 '속죄일'(욤 키푸르, 레위 16장, 민수 29,7-11)이 있다. 또 관습에 따라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파괴된 것(2열왕 25,9; 예레 52,12-13)을 애도해 다섯째 달(7월 중순~8월 중순) 7일을 금식일로 지키고 있다. 유다인은 달 이름을 두고 3가지 체계를 따랐다. 첫째 가나안식 달 이름으로 바빌론 유배 이전까지 사용했다. 구약성경은 그 가운데 과월절과 관련된 '아빕 달'(탈출 13,4; 탈출 23,15; 신명 16,1)과 솔로몬 성전 봉헌과 연관된 '지우 달'(1열왕 6,1),'에타님 달'(1열왕 8,2),'불 달'(1열왕 6,38)'을 전하고 있다. 이 네 달 이름 뜻은 모두 농사 절기와 관련되는데 봄의 첫 달 아빕은 '푸른 밀 싹'을, 지우는 봄의 화려한 색을 가리키는 '찬란함' 또는 '밝음'을, 가을의 에타님은 '흐르는 개울'을, 불은 '소출' 또는 '가축'을 뜻한다. 하지만 가나안식 달 이름은 왕정시대 초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고 첫째 달, 둘째 달 등 숫자로 달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숫자로 달 이름을 부르는 방식은 바빌론 유배 이후에도 상당히 늦은 시기까지 사용됐고, 구약성경은 이 체계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숫자 달 이름은 춘분을 기점으로 정한다. 구약 성경은 가나안식 네 달이 어느 달인지 숫자로 밝히는데 아빕은 '첫째 달'(춘분이 낀 달), 지우는 '둘째 달'(춘분 다음 달), 에타님은 '일곱째 달'(추분이 낀 달), 불은 '여덟째 달'(추분 다음 달)이다. 마지막 달 이름은 바빌론식으로 바빌론 유배 이후 이 체계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랍비 시대에 와서 완전히 정착됐다. 바빌론식 달 이름은 △니산 △이야르 △시반 △탐무즈 △압 △엘룰 △티쉬리 △마르케쉬반 △키슬레우 △테벳 △스밧 △아다르 순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cpbc2014.03.11
![[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1.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4>"집어라, 읽어라!" (끝)](//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2682_1.2_titleImage_1.jpg)
[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1.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집어라, 읽어라!" (끝)힐링 원하는 시대, 사랑의 치유 '성경'에 귀 기울여야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시다. 성경을 읽어야만 예수님을 알 수 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강아지 언어 인간은 인간의 언어를 쓰고, 강아지는 강아지 말을 쓴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같이 있으면 자꾸 정이 쌓인다. 무릎에 턱을 고이면 뭔가 주고 싶고, 혀 내밀고 꼬리를 흔들면 쓰다듬어 주고 싶어진다. 강아지 마음을 좀 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강아지의 언어를 이해하면 가능하다. 집에 혼자 있을 때 심하게 어지른다면, 물건을 입에 물고 놓아주질 않는다면, 다가와서 주인 얼굴을 핥는다면, '아, 이런 뜻이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이다.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 주지 않는 것이 좋고, 외출이나 귀가할 때 인사 안 하는 것이 좋다. 밥 시간이 되면 마음이 조급해져 화가 나게 되고, 나갈 때 이별 예고를 알아들은 강아지는 초조해진다.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강아지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하느님은 거룩하고 순수한 영이시다. 하지만 썩을 육신을 취해 오셨다. 하느님은 말이 필요 없는 분이다. 하지만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왜 그랬을까? 좋아하니까, 예뻐 죽겠으니까 어떻게든 같아지고 싶었던 것이다. 눈높이로 내려와 앉은 사랑. 인간이 알아들을 방법과 언어로 인간의 말로 표현된 하느님의 마음, 그것이 말씀이다. 인간의 글로 표현된 하느님 사랑, 그것이 성경이다. #말씀과 신앙 '신앙의 해'다. 굳은 믿음을 가지자는 것이다. 세속화와 허약한 신앙을 극복하자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고백한다. 마음에 와 닿지 않은 채 몸만 오간다고 고민한다. 믿음이 없다고 푸념한다. 왜 그럴까?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그렇기 때문이다. 신앙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믿음은 약한 사람이나 찾는 위로라고 말한다. 종교가 없는 것이 지성인의 자격처럼 여겨진다. 정신보다 물질이 우선시되는 사회. 실패보다 성공이 미화되는 세상.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압도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느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뿌리 깊은 나무가 될 수 있을까? 책을 읽어야 한다. 말씀을 섭취해야 한다. 하느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한다. 하느님에 대해 완전히 알려주신 분.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시다. 구약은 예수님을 약속한 책이고, 신약은 예수님을 증언한 책이다. 예수님을 알면 하느님을 아는 것과 같다. 결국, 성경을 읽지 않고 하느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하느님 사랑을 알고 보답하지 않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주인의 사랑을 알게 되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를 위해 영생을 얻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분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앉아!" 하면 앉고, "일어서!"하면 일어설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진리를 찾아 방황했다. 젊은 시절 수사학을 배워 출세하기를 원했다. 마니교에 심취해 어머니 속을 썩여드렸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목마름이 가시지 않았다.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헌신적 사랑. 스승 암브로시오의 자애로운 보살핌. 어느 날 창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목소리. "집어라, 읽어라, 집어라, 읽어라." 가서 읽으면 된다. 집어 먹으면 된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에제 2,8). 신앙은 의무가 아니다. 진리를 따르는 인간의 보편적 선택이다. #말씀 씨앗과 세상이란 땅 말씀이 뿌려질 씨앗이라면, 세상은 씨앗이 움트는 토양이다.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교회가 존재하는 곳은 천상이 아니라 세상이다. 세상이 구사하는 언어를 익히고 소통해야 한다. 적극 경청하고 쉽게 말해야 한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다. 가난한 과부와 배고픈 소작인도 알아듣는 말씀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인간 사회에 현존해야 한다. 교회는 그 사회에서 살아가거나 그 사회에 파견된 자기 자녀들을 통해 현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존경과 사랑으로 저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야 하며, 그들이 살아가는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을 인식해야 하고, 온갖 인간적 교류와 활동을 통해 사회 문화생활에 참여해야 한다. 또 그들의 민족적, 종교적 전통에 익숙해져야 하고 그들 안에 감추어진 말씀의 씨앗을 기꺼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찾아내야 한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2항). 하지만 오늘날 교회가 처한 환경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개인과 무관해진 신앙, 문화로 대체된 종교의 시대를 살고 있다. 모차르트나 바흐의 곡을 들으면서도 그들 신앙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가우디의 건축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그의 종교와는 거리를 둔다. 그들 예술이 신앙 속에서 꽃피운 결정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말씀의 힐링 한때는 '웰빙'이 유행이었다. 요즘은 '힐링'이 대세다. 힐링 캠프, 힐링 트래블, 힐링 푸드. 붙이기만 하면 트렌드가 된다. 힐링은 치유와 회복이란 뜻이다. 힐링이 요즘 시대를 진단하는 상징 언어가 됐다.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다쳤기 때문에, 아프기 때문이다. 힐링(Healing)과 동음어로 'Heeling'이라는 단어가 있다. 배가 기울어진 상태, 경사를 말한다. 다시 말해 균형 잡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인간의 몸과 영혼은 연결돼 있다. 조금 어려운 말로 '영육의 단일체'라 부른다. 몸과 영혼이 균형 잡히지 않으면 병이 난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은 힐링이며, 우리가 진단한 세계의 상태는 '병이 들었다'인 것이다. 문화로 대체된 종교, 세속화와 허약한 신앙. 우리의 영혼은 치유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2-23). 성부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신다. 성자께서는 말씀 그 자체이시다. 성령께서는 말씀 안에 생생히 살아계신다. 말씀 안에서 활동하길 원하신다. 말씀은 우리 영혼에 힘을 불어 넣고, 벅차게 살아 숨 쉬게 하신다. 말씀은 힘이 있다. 깊고 내밀한 영혼의 언어를 다시 찾아야 한다. 말씀 안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가서 읽고, 집어 먹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이석균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사목부)퇴사자22013.03.05
![[신앙단상] 노아의 비극](//cpbc.co.kr/CMS/newspaper/2014/09/rc/530729_1.0_titleImage_1.jpg)
[신앙단상] 노아의 비극강금실 에스더(법무법인 원 변호사) 창세기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 대홍수 후 생명의 싹을 틔우는 창조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인류 종말을 초래하는 비극적 역할을 한 노아가 있으니, 작가 정용준의 장편소설 「바벨」의 주인공이 그 사람이다. 말더듬이에 외톨이던 소년 노아는 동화 ‘얼음의 나라 아이라’를 읽고 매혹된다. 아이라에서는 사람들이 말을 하면 사라지지 않고 얼음으로 변한다. 얼음이 녹으면 말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라의 봄은 말들이 녹아 되살아난 소리로 정신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아이라에 봄이 오면 얼음이 녹아서 누군가는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노래하며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고 슬프게 울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 수많은 말을 듣는다. 오래전 곁을 떠난 이들의 목소리도 듣는다. 아이라인들은 영원히 죽지 않고 되살아난다. 소년 노아는 과학자로 성장해 동화를 현실화하는 상상력 가득 찬 실험에 도전한다. 노아의 실험은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펠릿’(pellet, 원래는 육식성 새가 토해내는 불소화 물질을 뜻하는 말)이라는 형체로 바뀌게 된다는 점에서는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펠릿은 지독한 악취가 나고 뱀처럼 미끈거리거나 비늘에 뒤덮여 칙칙하고 흉측했다. 사람들이 말을 하면 펠릿이 입에서 끝없이 흘러나와 쌓였다. 펠릿은 ‘외부로 드러난 마음’이었고 ‘밝히기 싫은 비밀이자 추문’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쌓여가는 펠릿과 그 악취로 인해 질식해 죽고, 사회 전체가 악성 폐기물 같은 펠릿으로 뒤덮이는 전무후무한 재난상황에 직면하게 됐다.노아의 실험으로 형성된 시대를 ‘바벨’이라 부른다. 바벨은 인류에게 ‘말에 대한 끔찍한 형벌’을 내렸다. 하느님은 홍수로 이 세계를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창세 9,11)을 지켰으나, 그 대신 ‘느린 속도로 서서히 차오르는 말의 바다’를 만들었다. ‘인간들은 자신이 내뱉은 말속에 잠겨 질식했고 아무도 스스로를 구원해내지 못했다’.한 비평가는 이 소설을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묵시록 이후의 묵시록)의 한 유형이라고 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란, 최근에 와서 부쩍 늘어나고 있는 인류 종말에 관한 영상 서사들이 이전과는 달리 재앙을 더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전제하고 파멸 이후의 세계를 이야기의 무대로 한다는 점을 가리켜 이름 지은 것이라 한다. 묵시록이 죄의 성찰을 촉구하고 예수 재림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반해서, 대체로 종말론을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를 접해보면 요즘 와서는 인류가 자초하는 비극적 결말이 풍미한다는 실감을 한다. 이 소설은 더이상 개선의 방법이 없어 모든 노력이 중단되고 파국을 기다리는 상황을 설정해서 비극 그 자체를 묘사한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노아의 상상력을 현실화하는 과학적 실험이 정부의 개입으로 응용방식에 실패해 펠릿을 출현시켰다. 과학의 진전에 개입된 정치적 의도와 자금의 힘, 그리고 인간의 육체성을 벗어난 말의 차원을 창조했으나 상호 소통은 더 어려워지는 언어 현실 그 자체가 비극의 원인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데에 이 소설의 독창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소설을 읽는 동안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8; 마르 7,23)고 한 성경 말씀이 거듭 떠올랐다. 과학의 시대에 진정한 소통 능력을 잃어버린 채 쏟아져나오는 말들이 그 자체로 인간을 질식시켜버릴 것이라는 이 소설의 메시지는 깊이 새겨볼 만하다. 평화신문2014.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