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궁금증] 48. 성경에서 사탄은 어떤 존재를 가리키나요](//cpbc.co.kr/CMS/newspaper/2012/09/rc/425816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48. 성경에서 사탄은 어떤 존재를 가리키나요하느님 창조질서 파괴하는 존재, 인간을 타락으로 유혹하는 악마성 미카엘과 사탄(라파엘로 작, 1518년). '사탄'하면 마치 전설 속 이야기나 환상이나 비유, 허구나 비과학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사탄의 가장 은밀한 간계는 오늘날 우리에게 사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시키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몇 년 전 이탈리아 주교회의는 공식 성명을 통해 최근 사탄주의, 점성술, 마술, 마법 등이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한 적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만연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섭리에 대해 불신하게 하고 하느님을 인간의 즉각적 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이탈리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성경을 보면 사탄의 존재가 자주 등장한다. '적대자'로 번역되는 사탄은 악마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과 반대되는 어떤 악한 세력에 의해 인간생활이 물들고 타락했음을 암시하고 있다(창세 3장). 그래서 악마는 하느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이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사탄은 하느님 명령을 받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와 타락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그때에 하느님께서 아비멜렉과 스켐의 지주들 사이에 악령을 보내시니, 스켐의 지주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게 되었다"(판관 9,23). 그리고 또 죽은 영들을 불러내는 자들은 악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 속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는 자와 혼령이나 혼백을 불러 물어보는 자와 죽은 자들에게 문의하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신명 18,11).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능력과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인식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권고한다(1베드 5,6-9). 또한 성찬례와 이교 제사를 비교하면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고 사탄과 상종하지 않도록 권고한다(1고린 10,14-20).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사탄을 만나셨고 당신의 구마 능력으로 대항하셨다(마태 4,1-11). 성경에는 악령에 사로잡혀 겪는 고통이 육체적 병고는 물론 정신적 질병과도 구별되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행사하던 구마 능력을 제자들에게 부여하시고 그들을 복음 전파에 파견하셨다. 교회는 오늘날도 사탄을 쫓아내는 구마 능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과거와 같이 오늘날에도 악령에 사로잡히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2).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모든 피조물이 근본적으로 선한데, 그중 천사가 타락해 사탄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즉 타락한 인간이 있듯이 타락한 영, 곧 악마도 실제로 존재하며 이 세상 안에서 악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악마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안전한 곳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가 늘 악마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며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회 성인들도 악마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다. 특히 "성인들은 악마에 굴복당하지 않았지만 악마로 인한 시련과 고통을 많이 겪었다"는 성녀 테레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퇴사자22012.09.11

이달의 교계잡지 ▨가톨릭 디다케 ‘오월의 세 가지 키워드’를 특집 주제로 △성모님 관련 교리와 축일ㆍ기념일 △신학교 오솔길에서 나눈 ‘성소’에 대한 이야기 등을 담았다. ‘본격 조명 한국의 순교자’는 윤유일 바오로ㆍ최인길 마티아ㆍ지황 사바를, ‘향기로운 역사서 해설’은 사무엘기 상권을 다뤘다. (서울대교구 청소년국/4500원) ▨가톨릭 비타꼰 ‘함께 느낌 : 짝짝짝!’에서는 △한 처음에… △5월의 주례사 △너의 그리움을 찾아가는데 여기가 끝이면 안 된다 △이달의 상본 등을 실었다. ‘신앙의 눈으로-영화’는 ‘죽은 시인의 사회’(1989년)를, ‘신앙의 눈으로-한자’는 성모영보(聖母領報)를 해설했다.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4000원) ▨경향잡지 경향 돋보기에서는 용서와 화해를 주제로 △용서와 화해의 징검다리인 과거사의 진실 △넬슨 만델라-자유와 화해를 위한 삶 △우리 사회 갈등 극복을 위하여 등을 다뤘다. ‘사제 & 선교사의 요람’은 대전가톨릭대를 탐방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3300원) ▨교회와 역사 한국교회 인물상에서는 성 베네딕도회 갈리스투스 히머(1884~1968) 신부를 소개한다. 1949년 북한군에 체포돼 옥살이했던 그는 1953년 극적으로 살아남아 독일로 귀국했다. 또 대감마을, 주어사 터, 천진암 5위 묘역 등을 돌아본 연구동인회 사적지 순례기를 실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3000원) ▨그물 4월 27일 성인품에 오른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현대 가톨릭교회사에서 지니는 의미와 두 교황이 포콜라레 운동과 맺었던 인연을 살펴본다. 청소년의 달을 맞아 청소년들이 프란치스코 교황께 드리고 싶은 이야기 코너도 마련했다. (마리아사업회/3000원) ▨레지오 마리애 레지오 영성으로 다룬 주제는 △레지오의 멘토 △레지오와 오늘날의 심각한 문제들 △어떻게 대대손손 축복받는 가문을 이룰 것인가? △부모 : 인간과 교회의 길 등이다. ‘신앙의 땅’은 광주대교구 목포 산정동성당과 부산교구 오륜대 순교자성지를 찾았다. (한국레지오마리애협의회/비매품) ▨말씀지기 영한 대역 매일 묵상집. 5월호 아침 뜨락은 이진호(대구대교구) 신부가 ‘범사에 감사하십시오’를 썼고, 영성 에세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사랑이 전부입니다를 게재했다. (가톨릭출판사/3000원) ▨사목정보 ‘성(性)교육을 성(聖)교육으로!’를 특집 주제로 △만인의 관심사, 성(性) △틴스타를 통해 본 교회 내 청소년 성교육 실태 △청소년들이 알아두면 좋을 만한 성 지식들 △본당에서의 청소년 성교육을 조명했다. 두봉(전 안동교구장) 주교가 ‘교황님 방한을 한국 교회의 봄으로’라는 시론을 썼다. (미래사목연구소/1만 원) ▨생활성서 ‘어머니의 기도’를 특집 주제로 △엄마, 그냥 주무세요! △저렇게 약해 빠져서야 원 △고맙습니다, 어머니 딸이게 해 주셔서 △농부인 어머니가 말하는 걸 쓰며 살다 △그 뒤에는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등을 실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의 주인공은 강금실(에스텔) 변호사다. (생활성서사/3900원) ▨성서와함께 새로봄에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가족’을 주제로 △가족은 사랑입니다 △입양, 생명을 살리고 길러 내는 사랑을 담았다. ‘프란치의 영화 피정’이 소개한 영화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년)이며,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주제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다. (성서와함께/3000원) ▨소년 어린이날을 맞아 동생과 함께 보는 그림 동화 ‘쉿! 비밀이에요!’를 게재했고, 서현승 신부가 그리는 만화 ‘용감한 목자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연재를 시작했다. ‘성경 속 인물 이야기’ 주인공은 하느님을 굳게 믿었던 이방인 코르넬리우스다. (가톨릭출판사/4000원) ▨야곱의 우물 ‘표지 이야기’에서 도서출판 서광사 공동대표 김신혁(야고보)ㆍ이숙(카리타스) 부부를 찾았다. ‘교회와 사회’ 이번 호 주제는 ‘다국적기업을 위한 꿀벌 퇴치’. 볼만한 책으로는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안득수 지음)를 추천했다. (바오로딸/2800원) ▨참 소중한 당신 ‘신앙의 프런티어’에서 43년간 초등학교 교사와 30년간 교리교사로 참 스승의 길을 걸어온 방희자(가타리나) 선교사를 만났다. ‘영화에 비친 세상’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를 소개했다. (미션3000/3500원)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백영민2014.04.30
![[성경 속 궁금증] 72.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나요?](//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322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72.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나요?유다인, 민족 해방 가져올 정치적 메시아 고대 …예수,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구세주유다인들은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했다. 그림은 '전능하신 분,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이탈리아 체팔루성당 모자이크, 1170년경). 성경에서 일컫는 '메시아'는 믿는 이들이 기다리는 구세주(救世主)를 뜻한다. 메시아는 히브리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축성된 자'란 뜻이다. 그리스어로는 기름 부어 세운 영도자를 의미하는 그리스도(Christus)를 뜻한다. 유다인에게 메시아는 임금이나 대제관으로 뽑혀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직책을 수여받은 자이다(다니 9,2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은 초대교회 복음 선포자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기도 했다(사도 2,31-32; 로마 1,3-4 참조). 그래서 초대교회는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셨지를 보여줘야만 했다. 루카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공적인 직무를 시작하시며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이뤄졌음을 밝히고 있다(루카 4,18-2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라는 칭호와 메시아로서의 직무를 받아들이셨지만 공개적으로 메시아라고 불리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마태16,16-17.20). 그 이유는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칭호)라는 용어를 자신에게 사용하도록 내버려 둘 경우 사람들이 당신을 정치적인 임금으로 오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유다인들은 메시아라고 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자기 민족을 억압이나 압제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대단한 영웅으로 믿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행복에 대한 염원을 풀어주고, 어둠을 헤치고 광명을 주실 백성의 왕이었다. 결국 유다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는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아, 민족 해방을 가져오는 소위 정치적 메시아로서 만민을 정복하고 그들을 무릎 꿇게하는 이 세상에 속하는 메시아였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다윗 왕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정치적인 해방자로서가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의 아들로, 그리고 이사야서의 고통받는 주님의 종으로 이해하고 계셨다(이사 52,13∼53,12).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들의 잘못된 메시아 개념을 올바로 잡아주셨다고 볼 수 있다(마르 8,30-33). 유다인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유다인들은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셨던 예수님께 실망했고 급기야 예수님을 처형하라고 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것이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와 동일한 메시아가 아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기대를 뛰어넘는 분이셨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한 나라를 통치하는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진정한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cpbc2013.05.14
![[제2회 신앙체험 수기] 우수상 수상작](//cpbc.co.kr/CMS/newspaper/2015/03/rc/558332_1.0_titleImage_1.jpg)
[제2회 신앙체험 수기] 우수상 수상작저의 삶에 늘 함께하신 주님 (상) 글 황점순(카아린, 마산 하동본당)11월 위령성월이 되면 특별히 윤봉문 요셉 순교 복자님을 떠올리면서 감사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저에게는 아주 특별한 사연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가 되기 전 ‘여호와의 증인’들이 저를 찾아와 하느님 말씀 공부하는 사람들이라기에 저의 집 문을 열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7년 가까이 그들과의 만남과 공부가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공부한 지 6개월이 지나면 침례를 받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데 저는 증인이 되기를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계속되는 그들의 방문에 남편도 싫은 내색을 하면서 저에게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 말고 신앙을 꼭 갖겠다면 천주교에 다니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저보다 먼저 가톨릭 신자가 된 여동생 내외도 “천주교에 대해서도 공부해보고 어떤 종교를 선택할지를 결정하자”면서 교리 공부를 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1985년 정흥식 마르코 신부님에게 교리를 받고 세례 준비를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남편이 비신자이니 남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남편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하니, 열심한 불자이신 시어머님 핑계를 대면서 어머님 돌아가신 후에나 성당에 나가라고 하면서 반대했습니다. 시어머님은 다음 해인 1986년 향년 95세로 돌아가셨고, 저는 다시 교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교리 기간이 끝나고 남편에게 세례받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하였고, 남편은 “꼭 성당에 다니고 싶으면 1년에 한 번 정도 나간다는 조건으로 승낙하겠다”라며 마지못해 허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86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황봉철 베드로 신부님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의 감정이나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새로이 태어난 순수한 아가의 마음이 이러했을 것만 같았습니다. 세례 때 선물로 받은 십자고상, 성모상 등을 안방 장식장 위에 고이 모셔 두고, 처음으로 저희 가정을 축복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저녁 무렵 귀가한 남편이 낯선 십자가와 성모상을 보는 순간 화를 벌컥 내면서 “도대체 이것들이 뭐냐?”며 성물들을 문밖으로 집어 던져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습니다. 축복받기를 바랐던 저의 마음도 남편의 이런 모습 때문에 부서진 성물 파편들처럼 조각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용기를 내어 평일 미사, 주일 미사 그리고 레지오 활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물론 남편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이지요. 남편에게 흠 잡히지 않으려 집안일이며 남편 뒷바라지, 육아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세례받기 전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습니다. 새벽 미사가 있는 날은 남편 잠을 깨울까 싶어 더 조심스러웠습니다. 그 와중에 건넌방에서 잠들어 있던 여섯 살배기 막내도 살그머니 나와서 함께 미사를 다녔습니다. 세례받은 그해 11월 어느 날 새벽 미사에 가서 보니, 신자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5시에 미사가 시작되는데, 4시도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참을 혼자 성체조배하고 미사까지 마치고 성전을 나오니까 저의 삼 남매가 “엄마 큰일 났어요. 막내가 주무시는 아빠한테 엄마가 혼자만 성당 갔다고 울면서 얘기한 바람에 아빠가 화가 많이 나서 빨리 엄마 데려오랬어요” 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온몸이 굳어지면서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불안 불안했던 폭탄이 터져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집에 들어서니 대문은 못을 박아 열지 못하게 해 놓고, 현관이며 창문의 유리는 모두 박살 나 있었고, 성경, 십자가, 성모상 등 성물들을 밖에 모아 놓고 휘발유를 그 위에 뿌려 놓았습니다. 남편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모두 태워 버리고 같이 죽자”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삽화=문채현이런 상황을 도저히 견뎌 낼 수 없어서 한참을 고민한 끝에 도망을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막내만 데리고 가면 남아 있는 두 녀석이 너무 힘들어 할 것 같아서 아이들의 담임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으니 아이들을 집에 보내주세요”라고 연락을 드렸고, 집으로 달려온 아이들을 보고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는 너희 아빠가 무서워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으니까 엄마 따라갈래? 아니면 아빠랑 살래?” 그랬더니 세 아이 모두 엄마 따라가겠다며 저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 당시 첫째가 10살, 둘째는 8살, 막내가 6살이었습니다. 급히 서둘러 현금과 통장, 패물, 옷가지 등을 챙겨 마을 어귀에서 구례행 버스를 탔습니다. 구례역에 도착해서 자장면을 시켜 아이들을 먹이니 얼마나 맛있게 먹고 신 나 하는지 참 어이가 없고 앞이 깜깜했습니다. 서울행 기차를 탄 후 막상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즈음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저를 짓누르기 시작했습니다. 끊임없이 묵주기도를 바치며 주님께 빌고 또 빌었습니다. “주님! 저에게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너무너무 무섭고 두렵습니다” 하면서요. 이튿날 새벽 서울역에 도착해서 신림동에 살고 있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더니 깜짝 놀란 동생 내외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우리의 행색을 본 제부는 ‘뭔가 큰일이 생겼구나’ 싶었는지 모르는 척해 주었고, 저는 민망해서 “아이들이 가정 실습을 해서 놀러 왔다”며 어설픈 변명을 했습니다. 여동생에게는 “형부에게서 나를 찾는 전화가 오면 절대로 모른다고 해라” 하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지만 난감하고 엄청난 사건이라 참으로 힘들었을 겁니다. 동생네에 도착한 다음 날 신림동성당에 가서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남편 때문에 신앙생활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 삼 남매를 데리고 도망 나왔습니다”라며 경상도 여인의 고해를 다 들어주신 신부님께서 “미사 끝난 뒤 사제관으로 오십시오” 하며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사제관에서 신부님께 자초지종을 모두 말씀 드렸고, 저의 사연을 들으신 신부님께서는 한참을 고심하시더니 “신앙 때문에 힘들게 하는 남편과는 이혼 사유가 됩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제가 수녀님들과 함께 카아린씨를 위해 기도해 드릴 테니 고향으로 내려가서 잘 참고 견뎌서 성가정을 이루게 되면 주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실 겁니다”. 신부님의 그 말씀에 힘을 얻어 집으로 내려가야겠다고 결정을 하고 난 후에는 불안하고 괴롭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여동생은 이왕 이렇게 서울 올라온 김에 성지순례도 하고 쉬었다 가라고 했습니다. 다음날부터 동생네 아이들과 우리 식구가 함께 절두산성지에 가서 남편을 위한 생미사도 봉헌하고, 아이들에게는 묵주 반지와 목걸이도 사주면서 겁도 없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고 있던 그 시간에 하동에 같이 살고 있는 큰집에서는 딸 다섯에 아들 하나인 귀한 아들이 가출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저와 저의 아이들의 가출은 아무도 몰랐고, 남편과 큰집 식구들은 집 나간 조카 찾느라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제부에게 전화해서 큰집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너희 처형을 빨리 집으로 내려보내라”고 부탁하더랍니다. 일주일을 서울에서 보내고 하동에 내려와 집에 들어서니 남편은 반갑게 맞아주면서 “이제부터는 절대로 성당 다니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겁니다. 그런 남편에게 저는 주일만은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저와 아이들은 아빠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복사도 열심히 서고, 삼 남매 모두 주일학교도 빠지지 않고 잘 다녔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레 남편이 따돌림당한 느낌을 주었고, 심기가 편치 않아 보이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저의 마음도 또한 불안해져만 갔습니다. <계속> 백영민2015.03.04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주님의 기도(4) 일곱 가지 청원 ②... 기도 통해 하느님 뜻 분간할 수 있고, 그 뜻 이루기 위한 인내 얻을 수 있어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일곱 가지 청원 가운데 두 번째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이고 세 번째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입니다. 이 둘째와 셋째 청원에 대해 살펴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2816~2821항)신약성경에서 ‘나라’는 왕권, 왕국, 통치라는 세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이 아버지의 나라, 곧 하느님 나라는 사실 우리가 있기 이전에 먼저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주권과 그분의 다스림이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는 태초부터 영원히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하느님의 아들, 강생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활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로써 결정적으로 도래했습니다. 또 성찬례 안에서 우리 가운데 펼쳐지고 있습니다. 치프리아노(200~258) 성인은 「주님의 기도 해설」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날마다 기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어서 빨리 우리에게 당신의 도래를 앞당겨 드러내 보이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이렇게 밝힙니다. “하느님 나라는…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14,17).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기, 곧 교회의 시기는 바로 성령께서 오시어 함께하시는 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충만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소서, 주 예수님”(마라나 타) 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충만한 도래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따른 분별력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문화와 사회의 진보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구별은 분리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인간의 소명은,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에 투신하기 위해 창조주께 받은 힘과 수단을 유용하게 활용해야 하는 의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합니다”(2820항).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2822~2827항)셋째 청원은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기를 청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 아버지의 뜻,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1티모 2,4)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또한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은 또한 모든 계명의 요약이기도 합니다(2822항).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히브 10,7). 예수님께서는 고난 중에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히브 10,1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고 일치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하느님 아버지 뜻, 곧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기도를 통해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분간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인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을 들어 주십니다.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 특별히 성찬례에서 드리는 기도의 힘도 그러합니다”(2827항). 정리=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백영민2014.09.02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사회교리의 출발점인 가정 공동체 어린 시절 나의 공동체 생활은 가정에서 시작됐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4남매는 함께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배우며 성장했다. 요즘처럼 핵가족화된 사회에서는 가족 구성원 개인이 더 중요하게 생각될지 몰라도 당시 우리 가정의 중심에는 항상 나보다는 아버지 먼저, 형 먼저와 같은 보이지 않는 ‘우리’라는 공동체가 우선이었다. ▨공동체 정신을 배운 가정우리 가정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절약정신으로 서로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전기ㆍ물ㆍ물자 등 모든 것을 아끼고 나눈다는 것을 배운 곳이 가정이다. 집안의 큰일을 결정할 때도 아버지는 가족 구성원 전체의 의견을 물으시곤 하셨다. 명절 때는 사촌 형제들과 함께 정을 나눴고 함께 차례를 드리고 음식을 나눴다. 이런 생활로 개인보다는 가족이란 공동체를 더 우선하는 삶을 배울 수 있었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내 삶의 중심은 항상 가정이었고, 그 안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관과 신앙심이 형성됐다. 신학생이 된 이후의 삶 역시,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간이었다. 함께 기도하고, 공부하고, 운동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갈등들을 해결해 나갔고, 동료 신학생의 슬픔과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기도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처음으로 동료 하나가 성소를 포기하고 신학원을 떠났을 때 우리는 가슴으로 아파하며 그의 결정을 안타까워했다. 함께 사는 신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첩 제목이 ‘Familia’(파밀리아)란 라틴어 제목이었는데, 이 단어가 뜻하는 것이 바로 ‘가족’이었다. 신학원 공동체는 그 형태와 구성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Familia’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가족의 연장선이었다. 항상 신학원 전체에 도움이 되는 것을 생각했고, 남들에 대한 배려와 나눔이 어떠한 것인지를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사제 수품 후 떠난 유학 생활에서도 이러한 공동체성은 중요한 것으로 다가왔다. 나는 초기 유학 시절을 제외한 기간 대부분을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수사들과 살았다. 처음 손님으로 들어갈 때, 원장 신부는 나를 수도원 공동체에 받아들이는데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는 수도원에서 공동으로 하는 모든 기도 시간과 미사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사실 유학하는 사제들은 학업 때문에 기도 시간에 종종 빠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원장 신부님은 그러한 생활이 수도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둘째 조건은 공동 식사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원장 신부님의 조건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기숙사비로 얼마를 내야 할지 물어보았는데, 돌아온 답변은 그야말로 단순했다. “네가 결정해서 내고 싶은 만큼 내면 된다.” 짧은 답변 속에서 원장 신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금전적인 것보다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수도원 안에서 모든 공동체 생활을 함께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공동체 기도와 미사에 참여했고 매주 토요일마다 이어지는 거룩한 독서 시간, 그리고 복음 묵상 나누기가 이탈리아 말로 진행됐다. 초기에는 잘 알아듣지 못해 힘들었지만, 언어적 어려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됐다. 그리고 방학 중에는 이탈리아 수사들의 개인 가정을 방문해 인간적 관계를 쌓았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얼마 가지 않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가족이 된 것이다.▨최초의 사회 가정공동체가톨릭교회는 가정을 최초의 자연 사회로서 명확하게 표현한다. 이처럼 가정이 개인과 사회에 지니는 중요성과 중심성은 성경에 거듭 강조돼 나타나고 있다. 창조주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가정은 개인과 사회를 위한 인간화의 첫 자리이며, 생명과 사랑의 요람임을 가톨릭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주님의 사랑과 충실성, 그리고 이러한 사랑에 응답할 필요성을 배우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 교회는 성경 메시지에 비추어서 가정을 고유한 근본 권리를 지닌 최초의 자연 사회로 여기며, 가정을 사회생활의 중심에 두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219-211항 참조). 사회교리의 출발점 역시 이 가정 공동체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가정 공동체가 파괴된다면 결국 사회 공동체 전반의 붕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처럼 점점 무너져 가는 가정을 다시 살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한 사회 복음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너져 가는 가정 공동체를 먼저 살려야만 할 것이다. 문채현2014.05.21
![[가톨릭 문화산책]<44> 건축(9)-독서대와 강론대, 하느님 말씀이 선포되는 곳](//cpbc.co.kr/CMS/newspaper/2013/12/rc/487079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건축(9)-독서대와 강론대, 하느님 말씀이 선포되는 곳하느님 말씀의 식탁, 제대 가까이에 작더라도 위엄있게 이탈리아 로마의 산클레멘테 대성당의 복음 독서대(왼쪽)와 서간 독서대(오른쪽).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가시어 성경을 펴시고 이사야서를 봉독하셨으며, 이어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신 다음, 회당에 모인 이들에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6-21)고 말씀하셨다. 루카복음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몸소 읽으시고 성경의 말씀이 그 자리에서 이뤄졌음을 선포하셨다고 알려준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펴시고 읽으신 자리가 독서대이며, 성경 말씀이 그 자리에서 이뤄졌음을 선포하신 자리가 강론대다. 그러므로 독서대와 강론대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 두 자리는 하나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회당 전례가 시작됐을 때도 높은 곳에서 말씀을 읽었다. "율법 학자 에즈라는 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느헤 8,4-5). 또한 이사야서에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이사 40, 9)라고 말한다. 이것이 독서대의 의미다. 그래서 독서대는 화려하거나 존엄하게 장식되며 요한복음을 상징하는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독서대를 받치고 있다. 그뿐인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 높은 곳에 오르신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마태 5,1-2).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친 자리가 강론대다. 독서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를 먹이는 주님의 두 식탁을 말한 바 있다. 주님께서 희생하시는 빵의 식탁인 제대와, 하느님 말씀의 식탁인 독서대가 그것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다. 때문에 새 성당을 봉헌할 때 주교는 부제에게서 복음서를 건네받고 "하느님의 말씀이 이 집을 채우소서"라고 외친다. 성당 안에서 가장 고유한 시설은 제대, 독서대, 세례대 이 세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독서대다. 제대는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현존하시는 성찬 전례의 중심이고, 독서대는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말씀 안에 계시는 복음을 선포하는 말씀 전례의 중심이다. 사제가 복음을 읽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사의 주요한 두 부분인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가 이뤄지는 주님의 두 식탁에는 각각 고유한 자리가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말씀 전례에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됐고, 독서자, 시편 독창자, 성가대에 의해 하느님 말씀이 새로운 생명을 입게 됐다. 오늘날 독서대의 자리가 특별히 정해진 바는 없다. 그러나 독서대는 제대 가까이에 놓이되, 제대보다 작더라도 위엄 있게 마련돼야 한다. 또 높은 곳에 두어 모든 신자가 쉽게 볼 수 있게 하고, 그곳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초기 교회에서 복음은 사제가 읽었으며 주교는 그의 주교좌나 제단에 놓인 의자에서 강론했다. 교회가 커지자, 특히 밀라노 칙령 이후에는 존귀한 하느님의 말씀을 회중에게 말하기 위해 들어 올린 단을 사용하고 흔히 계단으로 올라가게 만들었다. 이를 '암보'(ambo, 독서대)라 불렀다. 'ambo'라는 말은 그리스어 '아나바이네인'(anabainein)에서 나온 것인데, 이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라는 뜻이다. 5~6세기부터 대부분 회중석의 중앙 통로 윗부분에 독서대가 있었고 이곳을 계단으로 올라갔다. 이것은 구약에 있는 한 형태를 참조했거나 같은 시대의 유다 회당에서 따온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크고 돋보이며 화려해졌다. 한 시리아 교회에는 부제들이 앉는 벤치와 주교 의자가 있을 정도로 큰 말굽 모양의 독서대가 있었다. 예전에는 신자들이 말씀을 잘 들을 수 있게 독서대를 회중석에 두는데, 이에는 계단이 두 개 붙었다. 하나는 동쪽의 제대 옆에서 올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쪽에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동쪽 계단에서는 차부제가 제대를 향해 서간을 읽고, 서쪽 계단에서는 부제가 회중을 향해 복음서를 읽었다. '미사 전례서 총지침' 272항을 따르면, 독서대에서는 독서 봉독, 화답송, 복음으로 말씀이 선포된다. "백성과 함께 드리는 미사에서 성경 봉독은 언제나 독서대에서 한다." 부활성야에는 부활찬송을 독서대에서 부르고 제3독서를 독서한 이가 독서대에 서서 화답송 선창을 부른다. 화답송과 보편지향기도도 독서대에서 행하기를 적극 권고하고 있다. 따라서 독서대는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이지, 독서대라는 설비가 놓인 곳이 아니다. 또 독서대에서는 강론을 하기도 한다. 독서대와 강론대를 함께 '복음 선포대'라고도 하지만, '독서대'라는 말이 더 일반적이다. 제대나 해설대에서는 성경을 봉독하지 않는다. 따라서 해설자, 성가대원, 성가대 지휘자 등의 봉사자가 독서대에 올라가는 것은 적합치 않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은 975년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는데도 2층짜리 장대한 독서대의 흔적이 아직 제단 가까이 남아 있다. 아래에서는 서간을 읽고 위에서는 복음을 읽는다. 성당에는 독서대를 하나만 둔다. 그러나 독서대를 두 개 둔 로마의 산클레멘테 대성당에서는 제대를 향해 왼쪽인 성가대의 북쪽 변에는 더 크고 장식이 많은 복음 독서대를 두었고, 오른쪽의 남쪽 변에는 더 작고 단순한 서간 독서대를 두었다. 복음 독서대가 이렇게 큰 것은 독서자만이 아니라 좌우에서 초를 들고 있는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끔 서간 독서대가 위아래로 나뉘는데, 윗단은 서간을 노래로 할 때 쓰이고 아랫단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쓰였다. 8세기에서 10세기까지 성경을 노래로 읽을 때는 독서대가 널리 사용됐으나, 13세기부터는 사용하지 않게 됐다. 강론대 비잔틴이나 중세에서 말씀을 노래로 하던 것에서 말씀을 강론하는 것으로 변화하게 되자, 점차 강론대(pulpit)가 독서대를 대신하게 됐다. 현재 남아 있는 강론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2세기의 것이다. 이것에는 간단한 단이 기둥에서 내쌓기를 하여 만들어졌고 이에는 난간이 붙어 있었다. 1000년 전에는 강론대가 독서대와 마찬가지로 다른 요소보다 더 크고 높고 뚜렷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15세기나 16세기, 특히 개혁교회에서는 말씀이 크게 강조되어 강론대 위에 닷집을 두는 등 화려하게 만들었으며, 후에 생긴 강론대는 회중석에 가깝게 놓였다. 그러나 강론대는 오직 강론을 위해서만 사용됐다. 강론대에는 씨 뿌리러 나가는 사람을 새긴 것이 많다. 오늘날에는 음향설비가 발달해 가장 큰 성당을 제외하고는 강론대가 사용되지 않게 됐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독서대를 더욱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독서대인 'ambo'를 강론대로도 번역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독서대는 말씀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제대와 독서대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해 당신을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시지만 그러나 하나이심을 표현한다. 그렇다고 해서 제대와 독서대가 다툰다는 뜻은 아니다. 제대는 성체성사의 중심으로서 중심성이나 탁월성을 요구하며, 독서대는 제대와 적극적인 관계를 갖되 제대에 종속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만큼 독서대와 제대는 건축적으로도 강력한 공간적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는 독서대가 해설대와 짝을 이뤄 설계되는 예를 많이 본다. 독서대는 제대와 같이 존엄한 장소이므로 기품이 있게 만들어야 하며, 해설대와는 분명히 구별돼야 한다. 독서대와 강론대와는 구별되는 'lectern'이라는 용어가 하나 더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해설자, 성가대 지휘자 등이 사용하는 흔히 나무로 만들어진 가구를 말하며, 전례와 무관한 소식이나 내용을 설명할 때 쓰인다. 김광현(안드레아, 건축가,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cpbc2013.12.10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2) 바람은 하느님의 종이다](//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8440_1.0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2) 바람은 하느님의 종이다하느님 나타나심의 징조 '바람' 우리는 바람이 공기의 흐름이라 알고 있다. 하지만 구약성경을 읽을 때는 과학적 시각으로 바람을 이해하기보다 신학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고대 근동 세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바람 신은 큰 힘이 없었지만, 이집트에서는 강력한 바람 신 '슈'가 있었다. 구약성경에 바람에 날개가 달렸다는 표현이 나온다는 것을 지난호에서 말했다. 이런 상상의 동물이 성경에 나온다고 해서 비과학ㆍ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 사람들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 또한 우리 세대에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듯이 그 시대 사람들도 당시 생활 속 언어로 하느님을 찬미한 것이다. #완전 수 4와 10의 의미 고대 근동의 상징 숫자인 '4'는 동서남북 온 세상을 상징하는 완전한 수로 사용됐다. 완전 수이자 길한 숫자인 '4'에 '10'이란 또 다른 완전 수를 곱한 '40'은 더욱 완벽하고 충만한 시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됐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에서 40년 세월을 보냈고,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 단식한 모습이 나온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유혹을 받았다. 고대 근동인들에게 40이란 숫자는 이처럼 온전히 충만한 시간을 뜻했다. 40을 채웠다는 사실은 주님이 마련해주신 시간을 다 채웠다는 뜻도 된다. 솔로몬과 다윗은 이스라엘의 훌륭한 임금이었다. 주님이 허락하고 마련해주신 시간을 꼭 채워 40년간 다스렸다. 구약성경에는 네 개의 바람이 등장한다. 이는 사방에서 불어오는 온전한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예레미아 예언자는 '하늘 네 끝에서 오는 네 바람'을 하느님의 명령을 받는 존재로 묘사했다.(예레 49,35-36 참조) 네 가지 바람을 하느님이 쓰시는 무기로 표현한 것이다. 유배 이후에 나온 다니엘서에서도 하늘에서 불어오는 네 큰바람이 큰바다를 휘저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다니 7,2 참조) 사방의 바람은 하느님께서 조정하신다. #바람은 하느님의 종이다 이집트 탈출 사건에는 10개 재앙이 나온다. 이 중 8번째 재앙인 메뚜기 떼 재앙은 바람(동풍)이 일으킨 것이다.(탈출 10,13 참조) 공포심을 느낀 파라오는 모세에게 메뚜기를 거둬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하느님은 바람(서풍)으로 메뚜기 떼를 없애셨다.(탈출 10,19 참조) 하느님은 이처럼 동풍, 서풍 등 바람을 마음대로 조정하셨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은 파라오와 싸웠다. 당시 신으로 여겨진 파라오는 하느님의 힘에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또한 하느님은 우주에서 큰 분이시란 것을 알고 있었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바람)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하느님의 영은 바람을 뜻한다. 하느님은 천지창조 때부터 바람을 부리셨다. 하느님의 영이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는 것은 하느님이 바람으로 혼돈을 제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권능을 나타내기 이전부터 하느님은 바람을 제어하셨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바람은 하느님이 나타나신다는 징조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신의 자리를 잃고 그저 하느님 도구로 '탈신화화'했던 바람의 '재신화화'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이 엘리야 예언자에게 나타나실 때 몇 가지 징조 중 첫 번째가 루아흐(바람)이다. 루아흐는 주님 현현의 첫 번째 표징이었다.(1열왕 19,11-13 참조) 하지만 바람이 파괴의 도구가 될 때도 있다. 하느님이 우리를 바람으로 꾸짖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를 내몰고 내쫓으시어 벌하시고 샛바람이 부는 날 그를 거센 바람으로 몰아내셨다'(이사 27.8), '주님의 바람이 불어오리니 그의 샘은 마르고 우물은 메말라 버리리라'(호세 13,15). 구약성경에서 동풍, 샛바람은 이처럼 하느님 꾸짖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바람(소망)을 하느님 바람으로 가득 채워주시길 기도하자.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평화방송 TV 방송시간 : 수요일 오전 9시(본방송), 금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일요일 저녁 9시, 월요일 오전 4시ㆍ오후 3시퇴사자22013.04.16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든 '생명의 강'[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19. 요르단 강요르단 강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크고 긴 강으로 강의 굴곡이 심해 총 길이가 360㎞나 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땅은 '단에서 브에르 세바'(판관 20,1; 1사무 3,20; 2사무 3,10; 17,11; 24,2; 24,15; 1열왕 5,5)까지 경계를 이뤘다. 어른 보통 걸음으로 최북단 단에서 최남단 브에르 세바까지 일주일이 걸리고, 나자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이틀 길,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은 하룻길이면 넉넉할 만큼 좁은 땅이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이스라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탈출 3,17; 레위 20,24; 민수 14,8)으로 생명을 유지해 주는 것이 바로 요르단 강이다. 창세기는 요르단 강 골짜기 어디나 물이 넉넉해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았다(창세 13,10)고 묘사하고 있다. 창세기의 묘사대로 요르단 강 골짜기는 계절에 따라 다채롭게 변한다. 짙푸른 하늘 아래 갖가지 빛깔이 풍요로운 색조를 이룬다. 포도밭의 자줏빛, 과수원의 부드러운 녹색, 무르익은 보리밭과 밀밭의 옅은 청동색, 광야의 금빛 황갈색 등 다양한 생명의 색조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채색하고 있다. 요르단 강은 팔레스티나 지역,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크고 긴 강이다. 또 세계에서 수면이 가장 낮은 강이다. 요르단 강의 발원지는 해발 2814m의 헤르몬 산이다. 이 산의 만년설이 녹아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바니야스ㆍ엘 레단ㆍ바라그히트ㆍ하스바니 네 곳에서 분출해 수원지 단에 모여 요르단 강의 원천을 이룬 후 사해까지 흘러간다. 요르단은 우리말로 '단 지방에서 흐르다'는 뜻이다. 요르단 강은 직선으로 200㎞가 넘지 않지만, 강의 굴곡이 심한 전형적인 사행천이어서 총 길이는 360㎞가 넘는다. 요르단 강에는 2개 호수가 있다. 생명의 바다 '갈릴래아 호수'와 죽음의 바다 '사해'다. 원래 갈릴래아 호수에서 16㎞ 가량 북쪽으로 요르단 강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훌레흐' 호수가 있었으나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간해 농토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 구간을 '상부 요르단 강'이라 한다. 반면 갈릴래아 호수에서 요르단 강 종착지인 사해 입구까지를 '하부 요르단 강'이라 한다. 또 하부 요르단 강 일대를 성경에서는 '요르단 골짜기'라고 한다. 이 골짜기에는 요르단 강의 범람으로 기름진 흙들이 쌓여 넓은 평야를 이뤘다. 그 대표적인 평야가 벧산과 하롯이다. ▨성경 속 요르단 강 오늘날 이스라엘과 요르단 왕국이 요르단 강을 경계로 하고 있듯 성경 시대에도 요르단 강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여호수아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차지했다(여호 1-4장).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르단 강물을 갈라 건너는 기적을 행했고(2열왕 2,6-14), 시리아 왕 군사령관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대로 요르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고 나병을 완치했다(2열왕 5,1-19).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요한 세례자로부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마르 1,5; 마태 3,5-6; 루카 3,3)으로 해서 이 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구원 현장이 된 지구상 유일의 강이 됐다. ▨단 요르단 강의 원천이며 수원지인 단은 풍부한 수량과 푸른 숲으로 한여름에도 서늘한 만큼 살기 좋은 비옥한 땅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곳을 텔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셈족어 '텔'은 우리말로 '흙더미''토총'이란 뜻이 있어 텔단은 '토총 단'이라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단은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한 지파로 야곱이 자신의 두 번째 아내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서 낳은 아들이다(창세 35,25). 단 지파는 처음 여호수아로부터 필리스티아인과 인접한 아얄론 초지와 지중해 연안 지역을 분배받았으나(여호 19,40-46), 필리스티아인과의 전쟁에서 패해 이 땅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이동해 가나안 원주민 성읍 '라이스'를 정복한 후 단이라 불렀다(판관 18,1-31). 또 북이스라엘의 첫째 왕 예로보암이 단과 베텔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에게 우상을 숭배하게 하면서 성경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1열왕 12,25-30). 단은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중요 성소 역할을 담당하지만 베텔과 함께 아히야 예언자로부터 부정한 장소로 멸망할 것이라는 저주를 받는다. 이후 단을 지배하고 있던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침입을 받아 기원전 721년에 멸망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2열왕 17,1-6). 단의 발굴은 1966년에 시작했다. 성문과 성벽, 토착민 가나안 사람들의 신석기 시대 도자기, 금송아지를 우상 숭배하던 제단 터 등이 발굴됐다. 또 1993년 7월에는 아람어로 된 길이 32㎝, 폭 22㎝ 크기의 '텔단 석비'가 발굴됐다. 아람의 임금 하자엘(1열왕 19,15-18)의 비문인 이 석비에는 '다윗 왕조'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이 발굴되기 전까지 다윗이란 이름은 성경에만 언급될 뿐 동시대 고대 근동 문헌 어디에도 거론되지 않아 성서학계 일부에선 '다윗이 실존 인물이 아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텔단 석비는 다윗의 실존설에 대한 의문을 풀어준 유일한 단서이며 유물이다. 이 석비는 현재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사해 사해는 요르단 강의 종착지이다. 사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해수면보다 400m가량 낮고 그 바닥까지는 400m를 더 밑으로 내려간다. 상부 요르단 강에서 사해까지의 낙폭은 무려 735m에 이른다. 사해는 배출이 안 되는 닫힌 강이다. 들어온 강물을 그대로 다시 흘려보내는 '생명의 바다' 갈릴래아 호수와 달리 사해는 그냥 받아들이기만 한다. 단에서 흘러 내려온 강물은 이곳에 갇혀 생명을 잃고 만다. 소금 농도가 무려 30%나 되기에 마실 수도 없고 생물이 살 수도 없다. 그런 연유로 '죽은 바다'(死海)라 한다. 이곳을 '사해'라고 처음으로 부른 이는 예로니모(347~419) 성인이라고 전해진다. 그가 이곳을 라틴말로 '마레 모르뚜움'(mare mortuum-죽은 바다)이라 부른 것이 그대로 지명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소금 농도가 높아 누우면 몸이 뜬다. 삼투압 현상으로 사해 물에 오래 들어가 있으면 몸속 염분이 빠져나가 갑자기 의식을 잃을 수 있다. 그런 탓인지 몸이 뜨는 사해인데도 매년 익사자가 생긴다고 한다. 현지 안전요원은 15분 가량 수영한 후 30분 가량 휴식을 취할 것을 권장한다. 글ㆍ사진=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4.01.21

공의회 문헌ㆍ교리서 공부로 신앙 기초 다져신앙의 해, 한국교회 어떻게 살았나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선포한 '신앙의 해'가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끝난다. 2012년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 「가톨릭교회 교리서」 반포 20주년을 맞아 믿음의 문을 연 신앙의 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가 실천하고 맺어온 결실들을 종합한다. ▨믿음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신앙의 해는 한 해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되며 신자들 신앙의 기초를 다지고 성장하고 활성화하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는 것이 교회 구성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앙의 해를 폐막하면서 11월 23일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결심한 성인 예비신자들과 그들을 가르쳤던 교리교사 등 신앙 입문 성사와 관련한 사람들을 성 베드로 대성전에 초대했다. 이 초대는 신앙의 해가 종료됐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삶을 통해 신앙의 기쁨을 증언하도록 주님께 초대됐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다. 신앙의 해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선포한 '바오로 해'와 '사제의 해'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녔다. 바오로 해는 사도 바오로 탄생 2000주년을 맞아, 사제의 해는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 선종 150주년을 맞아 성인의 신앙과 영성을 본받아 복음화에 투신하고자 새로운 결심을 하는 해였다. 하지만 신앙의 해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신앙을 회복해 주님께 대한 확신과 기쁨에 가득 차 부활하신 주님을 오늘의 세상에 증언하고, 신앙을 찾는 많은 사람을 '믿음의 문' 즉 교회로 인도할 수 있게 하려고 선포한 것이다. 신앙의 해를 시작하면서 한국 천주교회가 자기 진단한 당면 과제는 '허약한 신앙'이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신앙의 해 동안 신자들에게 신앙의 본질과 내용에 대해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흐트러진 신앙의 틀을 새롭게 세우는 데 매진했다. ▨교구별 신앙의 해 실천 프로그램 신앙의 해 동안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공부하는 열기가 한국 천주교회 내 크게 확산됐다. 서울대교구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 △교회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 △미사로 하나되는 신앙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 등 5가지 주제로 신자들의 허약한 신앙 기초를 강화해 나갔다. 명동 주교좌 성당을 비롯한 대부분 일선 본당은 성경과 가톨릭교회 교리서 공부로 신앙의 기초를 다져 나갔다. 특히 대치2동과 구파발ㆍ중화동본당은 성경 통독, 이어쓰기, 암송대회를 열었고, 아현동ㆍ가회동ㆍ이문동본당은 성경 말씀 전시회, 성경 말씀 봉헌 및 가훈 쓰기를 이어갔다. 목3동ㆍ미아동ㆍ송천동ㆍ화양동본당에서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공부를, 송현동ㆍ동작동ㆍ중앙동본당은 청년교리를 확대했다. 이전부터 해오던 사업이기는 하지만 서울평협은 3개월 과정 '공의회 학교'를 통해 132명을 수료시켰다. 대구대교구는 가톨릭교리신학원을 위시한 교구의 여러 기관ㆍ단체와 대리구 및 본당에서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공의회 문헌을 공부하고 특강을 마련했다. 교구에서는 한국 최초로 젊은이를 위한 견진 교리서를 편찬했다. 또 많은 본당 공동체와 신심 단체, 사도직 단체들에서 신앙의 해 동안 성경 통독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 신앙 쇄신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신앙의 해를 맞아 영성사진 경연도 실시했다. 청주교구는 대림ㆍ사순 판공 문제지와 교구 주보, 교구 누리방을 통해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톨릭교회 교리서, 암송교리ㆍ암송성경 자료 등을 배포했고, 본당, 교구 차원에서 교리경시대회를 개최했다. 또 '영적 11 운동'을 펼쳐 냉담교우를 찾아내 회두시키는 운동을 지속했다. 본당별로는 '불평 안 하기 운동'을 전개, 일상의 불평을 기도로 승화시키는 노력을 전개했다. 안동교구는 주보와 월간지 「틔움」을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가톨릭교회 교리서 내용을 연재했고, 교구 교리경시대회를 개최했다. 또 사목국에서는 '신앙의 해 5분 교리' 자료를 제작, 본당에 배부했고, 지구별 신앙의 날 행사도 가졌다. 의정부교구도 주보를 통해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신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해 왔고, 광주대교구와 인천ㆍ춘천교구 등은 학술심포지엄 과 신앙의 해 특강 프로그램 등을 마련, 신자들을 교육했다. 대전교구와 원주교구는 소공동체 대회와 지구별 신앙대회를 개최했고, 마산교구는 2016년 교구 설정 50주년과 연계해 신자 연수와 교육 프로그램을 펼쳤다. 대구대교구 사목국장 박영일 신부는 "단체장 교육 때 신자들 만나보면 '신앙의 해'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면서 "신앙의 해를 일시적 행사로 그치지 말고, 교회 사명인 복음화를 위해 앞으로 지속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앙의 해 평가 교구와 본당, 그리고 교회 안팎으로 신앙의 해 정신이 확산됐고, 한국교회가 새로운 복음화와 신자 재복음화에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아울러 한국천주교회는 그간 양적인 성장에 연연했는데 최근 질적 성장을 고려하는 부분이 많았다는 평가다. 그 대표적 사례가 신자 교육과 사회교리 실천이라고 관계자들은 지적했다. 신앙의 해 동안 대규모 행사를 지양하고 양성에 초점을 둔 신자교육이 확산됐다. 일각에서는 신자들이 성경과 친숙해지기 위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쓰고, 생활화하려는 노력은 '소공동체 운동'이 뿌리내리고 있는 증거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또 '선교'개념이 '복음화'로 확대된 것도 질적인 변화라고 긍정 평가했다. 사회교리 실천 확대 문제에 대해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신앙의 기준으로 보고 실천하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다만 사회교리 실천이 구체적인 '나눔'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김혜경(세레나) 박사는 "나눔은 영성의 한 표현이고, 가톨릭교회의 커다란 자산이며 끊임없이 지켜야 하고 실천해야 할 복음 정신"이라며 "신앙의 해는 한국교회가 세상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여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3.11.19
![[빛과 소금의 길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8> 사도법관 김홍섭 바오로](//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3264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의 길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사도법관 김홍섭 바오로인간 사랑의 재판관법원장 재임 시절 새벽미사 참례 사형 선고하며 연민과 번뇌 느껴 마음 다해 사람을 사랑으로 섬겨임기를 마치고 광주를 떠나며 남동본당 교우들과 함께 사진 찍은 김홍섭(앞줄 왼쪽에서 세번째).1962년 10월 12일 광주고등법원 대법정에서 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경주호 납북미수 사건의 공소심 판결 공판이었다. 법대 위에 앉은 재판장 김홍섭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김사배 사형, 박석운 사형, 정회근 사형!’ 3명의 피고인에게 형을 언도한 후 재판장은 잠시 멈췄다. 법정은 숙연한 침묵으로 일순 낮게 가라앉았다. 김홍섭 판사의 목소리가 다시 법정에 울려 퍼졌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판결을 내리고 있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는 누가 죄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제가 능력이 모자라 여러분에게 사형을 선고하니 그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 수인들 각자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방청석에서는 수인들 가족이 낮게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비록 죄를 지었으나 가련한 이들이었다.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의 목소리에는 고뇌와 연민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연민의 대상은 법대 아래에 선 피고인뿐만 아니라 법대 위에 앉은 재판장 자신을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제에게 죽음의 형을 내리는 자신을 김홍섭은 정죄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0년 12월 16일 일어난 경주호 납북미수 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상 최대의 해상 납치 사건이었다. 일단의 좌익 세력이 목포를 출발하여 제주로 가는 여객선 경주호를 탈취하였다. 애초 중국으로 향하려던 이들은 항거하는 군인 2명을 살해하는 등 필사적으로 월북을 시도했다. 그 무리 중에는 부녀자, 학생, 어린아이까지 섞여 있었다. 미수에 그친 이 사건으로 22명이 구속되었고 처음 1심 판결에서는 5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납북을 기도하고 인명을 살상한 이 사건에 대해 사회여론은 격앙되어 있었다. 동족상잔의 뼈아픈 기억이 여전히 고통스러운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다는 감정이 팽배했다. 그러나 김홍섭은 법관으로서의 공평무사한 정신을 보여주었다. 재심 판결을 맡았던 김홍섭은 심문 과정에서도 마치 친부모인양 부드럽게 처신했다. 그는 납북 범죄자들과 판사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러분과 나는 불행히도 서로 세계관이 달라 오늘 이렇게 서로 위치가 달리 있는 것입니다.” 범법자들에게 ‘세계관이 다르다’고 한 표현은 당시 분위기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용기 있는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김홍섭은 늘 자기 소신을 당당히 지켰다. 1961년 7월11일 대법원 판사 김홍섭은 국가재건최고회의로부터 혁명재판소 상소심 심판관 4명 중 한 사람으로 임명받았다. 혁명재판소의 재판장은 현역 장교가 맡았다. ‘반국가적 반민족적 반혁명적 범죄를 중점적으로 일벌백계주의로 엄정 신속 처리함으로써 혁명 정신 완수를 수행한다’는 기치 아래 정치깡패, 반혁명적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이 재판은 군법을 기준으로 진행되어 극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많았다. 김홍섭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분위기였을 것이다. 한 달 만인 8월에 김홍섭은 광주고등법원장으로 발령받았다. 그가 왜 광주로 떠나갔을지 그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김홍섭에게 사형은 선고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제도였다. 어찌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죽음으로써 처벌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신앙인 김홍섭에게 삶과 죽음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었다. 평소 그는 판결에서 되도록 사형을 피하고자 했으나 국가의 사법체계를 비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혁명재판소 재판을 피하려고 광주로 내려간 그가 다시 사형을 선고해야 하는 경주호 재판을 맡게 되었으니 그의 심정이 참으로 힘에 겨웠을 게 분명하다. 광주고등법원장 재임 시절 그는 늘 새벽미사와 저녁 성체조배를 빠트리지 않았다. 그의 본당이었던 광주 남동본당 교우들은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있는 김홍섭 바오로를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그 기도문을 김홍섭은 얼마나 깊게 묵상했을 것인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사형을 선고하는 자신도 분명 죄인이라고 그는 믿었을 것이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사법적 기준으로 보아 사형제도 자체를 반대하는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판사 김홍섭의 행보는 사형의 반인도적 본질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사형 제도 폐지 움직임이 나오기 반세기 이전에 이미 김홍섭은 사형 폐지 운동의 선구자로서 첫발을 떼놓았던 것이다. 그의 선구적 믿음은 ‘사형 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인도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올바른 방식 또한 없다’고 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메시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판사 김홍섭의 화두는 언제나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그는 ‘과연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재판한다는 말입니까?’(야고 4,12)라는 성경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신앙심 깊은 법관이었다. 이웃을 재판해야 하는 그 직을 떠나고자 애쓴 적도 있었던 그는 결국 법관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받아들이기로 한 다음부터는 늘 이렇게 다짐을 했다. ‘좋은 법관이기 전에 또는, 그와 동시에, 친절하고 성실한 인간이어야겠다.’ 죄지은 이들을 법으로 단죄할 때라도 그들이 어쩔 수 없는 힘에 압도당해 패배자가 되어버린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고자 했다. 김홍섭이 6·25 전쟁 후 있었던 부역자 재판에 관련된 일화도 그의 이런 성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재판이 있었던 날 저녁 밥상을 받은 김홍섭은 쉽게 수저를 들지 못했다. “오늘 재판에서 부역자로 재판정에 선 남자가 있었다오. 방청석에는 그 부인과 아이들이 넷이나 있었소. 나이 어린아이들이 올망졸망 쳐다보고 있었소. 재판하는데 아비가 공산주의자로 죄를 받으면 나중에 저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날지 걱정이 되더란 말이오.…내가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겠소. 그 아이들은 지금 저녁도 못 먹고 있을 텐데 말이오.” 광주고등법원장 재임 시절 그는 역시 겸손한 교우이기도 했다. 당시 남동성당은 한옥이던 옛 성당을 허물고 새로 짓기로 했는데 평신도 사도회 의장으로 뽑힌 김홍섭은 주일이면 직접 삽을 들고 벽돌을 나르며 앞장서 일했다고 한다. 허름한 차림으로 성당 마당에서 잡초를 뽑거나 돌을 치우는 김홍섭을 고등법원장으로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김홍섭의 광주 재임 기간은 거의 3년으로 꽤 긴 시간이었다. 1964년 3월 김홍섭이 서울고등법원장으로 부임해 간 다음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홍섭이 그동안 남모르게 했던 봉사 활동으로 광주 동광원 방문이 있었다. 동광원은 그 무렵 광주에서 가장 후미진 곳으로 갈 데 없는 환자나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김홍섭은 이곳을 찾아가 기도 모임을 함께했고 특강을 하기도 했다. 특히 환자 중 김인옥이란 청년을 돌보았는데 나무에서 떨어져 하반신 불구로 가족들에게서도 버려진 채 누워 지내는 불쌍한 환자였다. 김홍섭은 어둡고 냄새나는 움막에 누워있는 환자를 매주 찾아와 머리맡에서 복음서를 읽어주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김홍섭이 사제에 대해 표한 존경심은 아무도 따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갓 부임한 보좌신부를 대할 때도 귀한 부름에 응하듯 언제나 공손히 “예”라고 했고, 어떤 사제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공무를 제외하고는 지체 없이 찾아가 보살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남동성당 시절 김홍섭의 대자였던 임기석(아우구스티노)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김홍섭 판사님은 법관이라는 인상보다는 인자한 아버지 같고 조용하고 침잠한 영혼의 소유자 같았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무더운 여름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에 얼굴을 씻은 것 같고 유순한 가을 하늘을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법관 김홍섭은 ‘생은 누구에게나 대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앙인 김홍섭은 그 대견한 존재들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섬겼다. 다 같이 하느님의 자녀, 형제자매이기 때문이었다. <계속> 백영민2015.04.01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8, 끝) 존 필 마이어 (하)](//cpbc.co.kr/CMS/newspaper/2015/02/rc/554878_1.2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8, 끝) 존 필 마이어 (하)5부작 시리즈 통해 예수의 역사적 진실 세세히 파헤쳐 「주변부 유다인 3」 - 추종자들과 경쟁자들 존 필 마이어 신부는 제3권에서 군중, 열둘, 여자들로 구성된 추종자 그룹을 분석하고 아울러 경쟁자들의 역사적인 면모를 재구성한다. 예수의 경쟁자들로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쿰란 공동체 포함), 그리고 ‘제4 철학(the fourth philosophy)’을 분석한다. 제4 철학은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유일하고도 진실하신 통치자라는 믿음으로 서기 6년 유다 지방에 대한 로마의 지배와 조세에 저항한 갈릴래아 사람 유다와 그의 후계자들을 가리킨다. 흔히 혁명당원으로 동일시되는 젤롯당(Zealots)은 68년 로마 항쟁 때 출현한 조직이기에 예수의 직무 기간 중에 활동한 세력은 아니다. 예수의 직무 기간 동안 무장한 혁명당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쿰란 공동체가 속해 있던 에세네파는 종말론적인 지향성과 성전 사제 계급과의 거리감에서 예수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정ㆍ부정의 엄격한 기준과 이에 따른 탈속적인 삶의 모습에서 예수와 결정적인 차이를 지닌다. 성문화된 모세의 율법만을 인정하고 종말론적인 교리를 거부했던 사두가이파와 달리 바리사이파들은 ‘선조들의 전승들’(traditions of the fathers)을 율법과 함께 받아들이고 율법 해석의 관용성, 일상에서 사제적 이상을 지향하는 정결법에 대한 관심, 그리고 부활과 이스라엘의 재건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협동설을 강조하였다. 예수와 바리사이파와의 관계를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운 이유는 복음서에 나타난 바리사이들과의 논쟁은 초기 그리스도교와 바리사이들의 후신인 랍비 유대교와의 대립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70년대 이전에는 갈릴래아 지방에 바리사이파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고, 주로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에 퍼져 살았다. 이러한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도 갈랄래아의 예수가 유다의 바리사이파들과 얼마나 논쟁을 할 수 있었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주변부 유다인 4」 - 율법과 사랑 마이어는 제4권에서 예수와 율법(이혼 금지, 맹세 금지, 안식일, 정결법) 그리고 사랑의 계명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마이어는 4권의 연구를 요약하면서 결국 역사적 예수는 유다교의 틀 안에서 성장하고 율법을 준수하는 진실한 유다인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는 종말론적 예언자로서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조명하에 율법을 새롭게 해석했다. 마이어에 의하면, 바로 여기서 유다교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이중적인 면모가 드러난다고 본다.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할라카적 예수(halakic Jesus)의 본래 모습이 역사적으로 손실되었던 것은 양식 비평이 지적하듯이 초대 공동체의 상황이 예수 전승을 기억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이어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조명 아래 율법을 해석하는 할라카적 예수가 역사적 예수의 진실에 가깝다고 평가하고 있다종합 및 평가마이어의 「주변부 유다인」은 이제 마지막 5권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마이어는 5권에서 예수의 비유, 예수의 자기 지칭 표현 그리고 예수의 죽음이라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마지막 연구 과제로 남겨놓고 있다. 아직 5권이 출간되지 않았지만 4권까지 내용을 바탕으로 마이어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시도해보고자 한다.첫째, 무엇보다 마이어는 역사 비평의 통시적인 분석이 설화 비평이나 독자 반응 비평과 같은 공시적 분석 방법에 의해 대체되거나 평가 절하되는 현금의 주석학계에서 역사 비평의 정당성과 효용성을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탁월하게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이어에 의하면 공시적 분석은 전승이 형성되고 전달되어 문자로 정착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양식 비평을 전제할 때, 올바른 의미와 기능을 가질 수 있다. 복음서는 순전히 저자가 만들어낸 창작물이 아니라 기존의 전승들을 취합하고 편집한 결과라는 것이 역사 비평의 통찰이기 때문이다. 둘째, 마이어가 재구성한 예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정향된 예수 세미나의 오류를 극복하고 1세기 유다교에 뿌리를 둔 유다적인 예수를 그려준다. 역사 비평이 재구성한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미래와 현재를 선포하는 종말론적 예언자, 기적 수행자, 스승의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이른바 ‘주변부 유다인’이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예수는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 신앙에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셋째, 마이어에게 역사와 신앙은 서로 구별된다. 역사는 신앙을 증명할 수 없으나 신앙의 이유를 나름대로 제공할 수 있다. 예컨대 예수의 동정녀 잉태 전승에 대한 역사 비평적 연구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신앙의 근거를 역사적으로 제공할 수 없으나 그 신앙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할 수는 있다. 이 점에서 마이어는 역사의 예수와 실제의 예수, 그리고 복음서의 예수를 구별한다. 실제의 예수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간 예수를 의미하고 복음서의 예수는 복음서 저자 및 신앙 공동체가 기억하고 고백하는 예수를 가리킨다. 역사적 예수는 복음서가 말하는 신앙의 예수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역사적 개연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넷째, 마이어는 그러나 역사가 신앙에 개연성을 제공하는 역사적 작업에 철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이어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자 근거인 예수 부활을 역사적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정의하는 기적이란 시간과 공간 내에 발생한 비일상적 사건이고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건이다. 그런데 부활은 시공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사건이기에 기적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고 따라서 역사적 연구의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이어는 부활이 철저히 신앙의 문제이지 역사가의 탐구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마지막 작품이 될 제5권에서도 이 주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부활은 시공간 안에 발생한 초월적인 사건이다. 빈 무덤 이야기와 발현 이야기가 이 점을 암시한다. 사실 부활이 시공간 안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그리스도 신앙은 가현론 내지 영지주의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신약 성경의 어느 전승보다도 부활 전승이야말로 정작 마이어가 역사성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당혹성의 기준, 비유사성의 기준, 다수적 증언의 기준, 거부와 처형의 기준까지 충족시키는 소위 역사적 개연성을 지닌다. 마이어는 역사성 판단의 기준을 동정녀 잉태 전승을 포함하여 기적이야기에는 적용하고 왜 부활 이야기에는 적용하기를 거부하는가? 마이어는 부활을 역사적 범주 밖에 위치시킴으로써 신앙과 역사를 분리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마이어는 불트만 류의 불가지론 내지, 신앙과 역사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변증법적 신학의 틀로 회귀하고 만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어의 5부작 「주변부 유다인」은 예수의 역사적 진실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파헤친 세기의 대작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세계의 많은 독자는 마이어가 끝까지 건강을 유지하여 마지막 제5권의 집필을 완성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백운철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장)※이번 호로 창간 25주년 기념 특집으로 지난 2013년 5월 시작한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기획 시리즈를 모두 마칩니다. 집필에 참여해 주신 필자들과 가톨릭신학과사상학회 그리고 읽기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관심을 갖고 읽어 주신 독자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cpbc2015.02.11
![[출판]2012년 출판계를 돌아보다](//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5166_1.0_titleImage_1.jpg)
[출판]2012년 출판계를 돌아보다하느님 말씀으로 이끄는 성경 서적 풍성 2012년 올 한 해 출판계에는 성경 관련 서적들이 다양하게 선보여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안내했다. 요한복음 해설서 「비참과 자비의 만남」(바오로딸), 「요한복음 그 산에 오르다」(사람과 사랑), 「성경말씀 맛들이기-구약성경」(기쁜소식),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바오로딸) 등이 출간됐다. 또 「성경 인물에게 배우는 나이듦의 영성」(바오로딸)과 「오정희의 이야기 성서」(여백), 「성경의 노래」(바오로딸) 등은 성경 해설서의 폭을 넓혔다. 유명 저자들의 저서도 잇달아 발간됐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나자렛 예수」 시리즈 3권을 올해 마무리지었고, 차동엽 신부는 「주님의 기도」로 독자들과 만났다. 황창연 신부는 환경 에세이 「북극곰! 어디로 가야 하나?」로 가톨릭 매스컴상 출판부문상을 받기도 했다. 전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는 「은수잡록」(가톨릭출판사)으로, 한국교회 석학 정의채 몬시뇰은 「인류공통문화 지각 변동 속의 한국」 등을 통해 교회와 사회를 향해 어른의 목소리를 냈다. 이 밖에도 원전과 풍부한 사료를 담은 「세계교회사여행」(1ㆍ2권/가톨릭출판사)이 호평을 받았고,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위즈앤비즈)ㆍ「희망과 기도」(여백)ㆍ「기도와 관상」(분도출판사) 등 기도 관련 서적 출간도 꾸준했다. 그렇다면 올 한 해 교계 출판사마다 어떤 책이 가장 많이 팔렸을까. 가톨릭출판사가 발간한 가톨릭 청년교리서 「YOUCAT」은 10월 시작된 신앙의 해 열풍에 힘입어 출간 두 달 만에 출판사 올해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정기적으로 「YOU CAT」 공부모임을 갖는 본당이 점차 느는 추세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청년들이 함께 모여 「유캣」을 공부하며 신앙을 나누길 바란다"고 당부한 바 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를 청년 눈높이에 맞게 제작한 이 책은 30개 나라에서 200만 권이 넘게 팔린 세계적 베스트셀러다.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책은 김창렬 주교의 「은수잡록」. 올해 설립 50주년을 보낸 분도출판사에서는 50주년 기념도서로 선보인 「성경역사지도」가 가장 많이 팔렸다. 전면 컬러로 나온 이 책은 성경에 나온 지역에 관한 상세한 해설을 곁들인 지도는 물론 등장인물 이동경로, 풍부한 자료사진 등으로 '성경 옆에 둬야 할 첫 책'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정가 9만 5000원이라는 높은 가격에도 기꺼이 독자들 지갑을 열게 했다. 베스트셀러 2위는 역시 50주년 기념도서 중 하나인 노르베트르 베버 아빠스의 1911년 한국 기행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다. 바오로딸에서는 십자성호, 성수, 수호천사, 화살기도 등 가톨릭교회 아름다운 전통과 신심의 의미를 일깨워준 「가톨릭 신앙의 40가지 보물」이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명망있는 개신교 신학자였던 저자 스콧 한(55, 미국) 박사는 미사에 매료돼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가톨릭 신앙에 담긴 성경적ㆍ역사적 의미를 쉽고 명료한 해설로 풀어냈다. 두 번째로 사랑받은 책은 신앙의 해를 기념해 최근 발간된 교황 베네딕토 16세 저서 「나자렛 예수」다. 생활성서에서는 8남매를 키우는 아버지(전문석 레미지오)의 신앙일기 「최고의 선물」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8남매 하상이네 신앙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0가족이 신앙으로 똘똘 뭉쳐 사는 모습을 담고 있다. 아이 한 명 낳기도 버거워하는 요즘, 자녀 여덟 명을 낳아 성가정을 이뤄가는 여정이 생생히 펼쳐진다. 결론은 자녀는 하느님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 2위는 이현주 목사가 쓴 「하루기도」. 성바오로에서는 오상의 성 비오 신부(1887~1968, 이탈리아 카푸친 작은형제회) 어록을 정리한 「평화를 누리십시오」가 가장 많이 팔렸다. 성 비오 신부의 위로와 용기의 말을 담은 이 책은 최근 우리 사회를 강타한 힐링 열풍을 반영한다.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책은 고독을 다룬 책 「고독하되 고독하지 않게」.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박수정2012.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