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1) 바람이 분다, 고대 근동 바람신](//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7316_1.0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1) 바람이 분다, 고대 근동 바람신신화적 표현 그러나 신이 아닌 '바람' 바람은 히브리어로 '루아흐'다. 루아흐는 '하느님의 숨결', 또는 '하느님의 영'으로 옮길 수 있다. 같은 낱말이 '숨'도 되고 '영'도 되고 '바람'도 되는 것이다. 바람은 가변적 성질을 지녔다.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넓은 지역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떠돌아다니는 바람은 허무나 불안을, 비를 뿌리는 바람은 풍요를, 약하고 부드러운 바람은 상쾌함을, 태풍같이 거센 바람은 파괴를 상징한다. 다양한 종교에서 바람은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며, 때로는 '인격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나라 단군신화에도 비와 구름과 바람을 상징하는 세 개의 신 우사(雨師)와 운사(雲師), 풍백(風伯)이 등장한다. 이 신들은 농경사회를 이뤘던 우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 바람신은 바다를 생활 터전으로 삼는 해양민족에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세계 여러 언어에서 '바람'과 '불다'의 어근이 비슷하게 나타난다. 특히 발음 소리가 그렇다. 우리말의 '바람'과 '불다'의 공통 자음은 'ㅂ'과 'ㄹ'이다. 입술소리 'ㅂ'과 치음의 공명음인 'ㄹ'의 순서다. '불다'를 뜻하는 영어 '블로우(blow)'나 독일어 '블라젠(blasen)'도 자음의 순서가 'b'과 'l'로 같다. 한자 '풍(風, p-ng)'의 우리말 발음과 중국어 발음 '펭(fe˘ng, f-ng)' 또한 같은 계통의 자음으로 구성된다. 이는 바람을 처음 배우는 아기 말인 '푸웅'(또는 뿌우-)처럼 입술을 모아 세차게 부는 음성어에서 자연스레 유래했을 것이다. #바람의 존재 구약성경의 무대인 팔레스티나는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이다. 팔레스티나는 바다와 육지가 접하고 산악지대와 강이 겹쳐 있는 지형을 갖췄다. 규칙적으로 부는 바람은 습기를 머금어 이슬을 맺게 하고, 농사에 도움을 주는 이로운 존재였다. 겨울이면 규칙적 바람은 잦아들지만, 때때로 지중해에서 폭풍이 몰려와 비를 뿌려준다. 강풍을 동반하거나 눈이 내리기도 한다. 한편 봄과 가을에는 동쪽 광야에서 먼지를 동반한 덥고 건조한 바람이 분다. 메마른 바람은 작물에 좋지 않으며, 인간에게도 파괴의 존재다. 물이 귀했던 고대 근동 지역에서 잎사귀에 맺히는 영롱한 이슬은 풍요의 전조였다. 구약성경에서 '하늘의 이슬'은 풍요를 묘사하는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모세는 유언으로 남긴 아름다운 시에서 하느님 말씀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다고 표현했다. 메마른 팔레스티나 땅에서 비는 풍요의 상징이었다. 이슬 또한 금방 증발돼 버리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비나 소나기처럼 풍요의 근원으로 당당히 이름을 알렸다. #고대 근동의 바람 헬레니즘 시대 이집트 유적에서 바람은 공통적으로 사람의 몸에 다양한 짐승의 머리가 붙은 모습, 또는 짐승의 몸에 양의 머리가 하나 또는 여러 개 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날개를 달고 머리마다 깃털이 꽂혀 있는 게 특징이다. 날개와 깃털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바람의 속성을, 머리가 여럿인 것은 바람의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한 것이다. 그리스어로 바람 신을 '아네모이'라고 한다. 아네모이는 넷이었다. 겨울을 일으키는 북풍 '보레아스'부터 여름을 일으키는 남풍 '노토스'와 동풍 '에우로스', 서풍 '제퓌로스' 등이다. 네 신은 석양의 신 아스트라이오스와 새벽녘의 신 에오스 사이에서 나온 자식인데, 제우스는 이 넷의 양육을 바람 신인 아일로스에게 맡긴다. 아일로스는 어린 바람 신 넷을 모아 섬에서 기른다. 그리스인들은 바람이 바다 쪽 섬에서 불어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듯하다. 한편 그리스어 '프네우마'는 본디 '숨'을 뜻했다. 원래는 호흡을 뜻했지만, 나중에는 우주 삼라만상에 깃든 '영(靈)'을 뜻하게 됐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선 바람과 숨이 모두 '루아흐'라는 하나의 낱말로 표현됐다. 그리스어에는 이처럼 바람과 관련한 단어가 많다. 이집트와 그리스 등에서 바람은 분명 인격신의 모습을 띠었지만, 구약성경에서는 인격신의 특성이 거의 사라진다. 구약성경에는 바람이 신으로서 경배받는 구절이 없다.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바람신도 탈신화했다. 하지만 바람의 독특한 신화적 모티프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물 위에 당신의 거처를 세우시는 분. 구름을 당신 수레로 삼으시고 바람(루아흐) 날개 타고 다니시는 분"(시편 104,3). "커룹 위에 올라 날아가시고 바람(루아흐) 날개 타고 나타나셨네"(2사무 22,11; 시편 18,11). 이처럼 구약성경에는 바람에 '날개'가 달렸다고 표현하는 곳이 나온다. 신화의 언어로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바람은 절대 신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평화방송 TV 방송시간 : 수요일 오전 9시(본방송), 금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일요일 저녁 9시, 월요일 오전 4시ㆍ오후 3시퇴사자22013.04.09
목자 없는 양떼, 척박한 환경에도 신앙의 향기 전해](//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4135_1.0_titleImage_1.jpg)
[방글라데시를 가다](하)목자 없는 양떼, 척박한 환경에도 신앙의 향기 전해현지 한국인 신자 공동체 방글라데시 다카 한인공동체 사목회장 김항진씨가 한인 신자들의 삶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목자가 없는 곳에서 양이 살 수 있을까?’11월 13일 방글라데시에서의 마지막 날. 한국인 신자 공동체를 만났다. 한국인 사제 한 명 없는 다카에서 20년 동안 공동체를 유지해온 이들이었다. 한국인 신자들은 사목자가 없는 곳에서 신앙적 갈증을 느끼면서도, 지역 사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신자 공동체방글라데시에 사는 한국인은 1200여 명, 그중 700명이 수도 다카에 살고 있다. 열 명 중 한 명이 천주교 신자인 한국 교회 복음화율과 마찬가지로, 다카의 한국인 신자 공동체 수도 700명 중 10%인 70명 안팎이다.1980년대부터 사업이나 해외 파견 근무차 방글라데시에 건너온 한인들은 1995년 처음으로 공동체를 꾸렸다. 본당 소공동체 성격의 ‘성심회’에서 자매들이 기도를 함께 바치고 친목을 쌓으면서 신자공동체가 방글라데시에 뿌리내렸다.하지만 머나먼 타국 땅에서 신앙을 이어가기란 녹록지 않았다. 다카 시내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곳은 방글라데시 대신학교 안에 있는 성당 한 곳뿐. 신학교 안에 있다 보니 신자들은 미사만 참례하고 돌아가는 ‘손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일에 외국인을 위한 미사가 있지만 이마저도 필리핀 신자들이 대다수여서 한국 신자들은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2002년 장인남(태국ㆍ캄보디아 교황대사) 대주교가 방글라데시 교황대사로 부임하면서 매주 토요일 한국어 미사를 따로 봉헌한 적이 있다. 사목자가 없어 ‘길 잃은 양 떼’처럼 흩어져 있던 신자들이 모여든 시기다. 하지만 2007년 장 대주교가 우간다로 떠나면서 신자들은 목자를 잃었다. 이후 몇몇 한국 수도회에서 방글라데시로 성직자를 보냈지만 얼마 못 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또다시 방글라데시에는 신자들만 남았다.현지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열악한 환경에서도 한국인 공동체는 신앙의 열정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 본당은 없지만 사목회장(김항진 레오, 51)과 친교회장(리승재 바오로, 45)을 뽑아 공동체 활성화에 힘을 쏟고 있다.이들이 한국인 공동체에 이토록 애정을 쏟는 이유는 공동체 활성화가 결국 지역 사회 발전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인 신자들은 현지의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가톨릭의 불모지인 방글라데시에 주님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대부분 방글라데시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신자들은 직원을 고용할 때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가장 소외된 이에게 직업을 가질 기회를 준다. 종교나 나이 등은 중요치 않다.부활이나 성탄을 앞두고는 바자를 열어 수익금을 현지의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한다. 섬유산업에 종사하는 신자들이 많아 의류가 후원 물품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공동체가 닦아놓은 신앙의 터전은 방글라데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에게 든든한 보금자리가 된다. 교우들 모임에 나가 형제애를 느끼고, 먼저 뿌리내린 선배들이 사업과 신앙생활에서 보이는 모범을 따라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 한국인 신자 공동체 사목회장 김항진씨 “한국인 신자 공동체에 신부님을 모시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다카 한국인 공동체 사목회장 김항진(레오, 51)씨는 신자공동체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공동체를 구성하고 연대하는 것이 신자들의 의무라고 강조하는 그는 바쁜 사업 활동 중에도 교우들을 살뜰하게 챙기고 있었다.김씨는 매일 아침 교우들에게 그날의 복음 말씀을 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틈나는 대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성경 특강 동영상을 공유하며 주님의 말씀을 생활화한다. 공동체 구성원간 화합을 위해 교우 모임을 자주 갖고 신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귀담아듣는 역할을 하고 있다.가장 가난한 곳이기에게 사랑 더 필요 그의 노력으로 대신학교 외국인 미사에 들쑥날쑥 참례하던 신자들이 꾸준히 주일 미사에 참례하기 시작했다. 한명 한명씩 관심을 갖고 정성을 쏟은 결과다. 하지만 본당도, 사목자도 없는 공동체를 현지인들만의 노력으로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채워지지 않는 신앙의 목마름을 호소하는 신자들이 많았다.김씨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방글라데시는 오히려 선교가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곳”이라며 “방글라데시 한국인 신자들에게 한국 교회의 사목적 배려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방글라데시이기에 그 어떤 곳보다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더 가난한 곳에서 더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려고 했던 주님의 모습대로, 가난한 방글라데시에 우리나라 교회의 관심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길 잃은 양떼 방글라데시에 한국인 사목자가 파견되면 한인 신자뿐 아니라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한인 신자들의 신앙이 성숙해진다면, 현지인에 대한 선교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작은 움직임이나마 한국인 사장들이 회사를 경영하는 데 근로자를 존중하는 모범을 보이고, 공동체 행사에서 나온 수익을 지역의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면서 가톨릭에 대한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다카에서 만난 한국인 공동체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김씨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고 했다. “여기 길 잃은 양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한마음으로 사목자를 기다리는 방글라데시 한인들의 모습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김유리 기자 lucia@pbc.co.kr 평화신문2014.12.10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67>주님의 기도(7, 끝) : 일곱 가지 청원 ⑥](//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5634_1.0_titleImage_1.jpg)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주님의 기도(7, 끝) : 일곱 가지 청원 ⑥ 여전히 악에 맞서 싸우는 교회, 인내의 은총 청하며 그리스도 다시 오심 기다려야 '악에서 구하소서' 는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악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청한다. 사진은 올리브산 주님의 기도 기념 성당 구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는 바위 옆에서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순례객들. 평화신문 자료사진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마지막 일곱째 청원은 “악에서 구하소서”입니다. 이 마지막 청원과 마침 영광송에 대해 살펴봅니다(2850~2856항)악에서 구하소서악에서 구해 달라는 청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 곧 주님의 기도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아버지께 하신 청원에도 나옵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요한 17,5). 여기서 악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닌 구체적인 인격체, 곧 하느님의 계획을 가로막는 자,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가로막는 자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성경과 성전을 토대로 이를 전통적으로 사탄, 악마, 혹은 하느님께 대항하는 천사라고 불러왔습니다. 이 악마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고 거짓말쟁이일 뿐 아니라 거짓의 아비입니다(요한 8,44). 그는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한 바로 그 자입니다. 이 악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결정적으로 패합니다. 악의 패배는 역설적으로 악이 초래한 그 죽음에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맡기심으로써 이뤄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에 자신을 내맡기신 것은 악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첫 조상인 아담이 악에 굴복함으로써 세상에 죄와 죽음이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순명하심으로써 세상에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공동체인 교회는 지상의 나그네살이를 하는 현세에서 여전히 악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청원은 지상의 나그네살이를 그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악과의 싸움에서 패하지 않도록 지켜달라는 청원입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실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기록하듯이,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하고 기도합니다. 악에서 구해주시기를 청하는 이 마지막 청원은 현재의 악만이 아니라 과거에 우리를 짓눌렀던 악,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악 등 과거와 미래의 악까지 모든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 청원은 또한 세상의 모든 괴로움에 대해 호소하면서 평화의 선물을 주시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꿋꿋한 인내의 은총을 주시도록 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사 중 영성체 예식에서 주님의 기도를 바친 후에 사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마침 영광송 마침 영광송이란 주님의 기도를 바친 후 사제가 바치는 위의 기도에 이어 모든 신자가 바치는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하고 바치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 마침 영광송은 주님의 기도 전반부에 나오는 첫 세 청원, 곧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다시 말해 아버지의 구원 의지가 힘차게 드러나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침 영광송은 단순히 첫 세 청원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흠숭과 감사의 형태를 취합니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의 참된 주인은 오로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며 감사와 흠숭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 마지막은 “아멘”입니다. 아멘이란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바친 청원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동의하는 것입니다. 정리합시다-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일곱 청원 중 첫 세 청원은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목적이고, 나머지 네 청원은 우리의 소망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이 네 청원은 생명 유지를 위한 양식을 얻고 죄를 치유 받으며 악에 대한 승리를 위한 우리의 싸움과 관련됩니다(2857항).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마지막 청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더불어,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 계획에 직접 반대한 천사, 사탄, 이 세상의 권력자를 쳐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드러내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합니다(2964항).- 마침의 “아멘”으로, 우리는 주님의 기도 일곱 청원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입니다(2965항) 정리=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cpbc2014.10.22
![[나의 묵주이야기] 96. “묵주기도는 사랑의 신비, 그 이상이다”](//cpbc.co.kr/CMS/newspaper/2014/09/rc/530669_1.0_titleImage_1.jpg)
[나의 묵주이야기] 96. “묵주기도는 사랑의 신비, 그 이상이다”이윤희 세라피나(수원교구 광명본당) 사리분간을 하기 시작할 무렵 난 집 앞 개신교 예배당에 다녔다. 누가 가라고 했는지 누군가 내 손을 잡아끌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질 않지만, 우리 가족 중 아무도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어릴 적, 개신교 예배당은 나의 유일한 취미생활이고 놀이터였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신앙의 열정을 배운 고마운 곳이었다.하지만 내가 스무 살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열심히 다녔던 개신교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고 언니와 동생은 개신교를 먼저 다닌 나보다 더 이런저런 봉사도 하며 아주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 무슨 이유인지 성당에 다니겠다고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하셨다. 언니와 동생은 기왕에 신앙을 가지시려거든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 가자고 그렇게 말했건만 열심한 어느 자매의 손에 이끌려 우리 딸들의 말은 듣지 않으셨다. 나 또한 특별한 이유 없이, 먼저 입교하고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세례를 받으신 부모님을 따라 입교한 뒤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오랜 기간 개신교에 익숙해 있던 터라 성모신심이란 말 자체를 몰랐던 내게 성당 문 앞에서 언제나 우리를 반겨주시는 성모님은 동상에 불과했다. 성모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더군다나 묵주기도는 할 줄도 몰랐고 갓 입교한 아버지가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하시면서 새벽마다 묵주기도를 바치던 모습이 몹시 낯설기만 했다. 퇴행성으로 다리가 많이 아프셨던 아버지는 아픈 곳을 문지르며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시더니 어느 날 서서히 나으셨다.지금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 특별한 약을 쓴 것도 아닌데 말이다. 또 묵주기도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드셨는데, 촛대도 없이 얇은 합판 위에 작은 성모님을 모시고 그냥 초를 켜 놓고 기도를 드리다 잠이 들었다. 그런데 완전히 다 타버린 초가 불이 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꺼져 있는 놀라운 일도 있었다.그렇지만 세례만 받았을 뿐, 신앙의 열정이 끓어 오르지 않았던 나는 세례 받고 처음 1, 2년은 신앙생활을 하는 듯했지만 취직을 이유로 서울로 오고 난 뒤 냉담에 빠져 하느님을 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지하철을 타고 통근을 해야 했던 난 지하철에서 열심히 묵주반지를 돌리며 기도하는 여자 분을 보았다.휴대폰도 없던 시절, 매일 밀리는 지하철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무료하게 1시간 넘게 통근하던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멍하니 졸지 말고 나도 묵주기도나 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는 객지생활에 심신이 지쳐 있었고 자신감은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향수병에 너무도 힘겨웠다. 그런 내게 묵주기도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긴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묵주반지를 돌리며 불안한 미래와 지친 심신을 성모님께 맡기기로 했다. 가까운 성당을 찾았고, 그나마 주일은 지키기로 하고 정말 열심히 묵주반지를 돌리며 기도했다. 지금은 103위 성인과 함께하는 묵주의 9일 기도를 매일 바친다. 성모님과 성인 성녀들이 나를 위해 함께 빌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알고 계심을 느낀다. 우리의 바람과 지향을 하느님께 같이 바쳐 주신다. 하루를 의탁하고 나의 영적 성장을 성모님께 봉헌한다.우리 집 가훈인 성경 말씀은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이다. 성부, 성자, 성령님에 대한 마음과 목숨과 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분은 성모님이시다. 어릴 적 철없이 몰랐던 성모 어머니,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신뢰하고 감사드린다. 매일 드리는 묵주기도는 사랑의 신비 그 이상이다. ※‘나의 묵주이야기’에 실릴 원고를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8매 분량으로 연락처와 함께 pbc21@pbc.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채택된 원고에 대해서는 소정의 고료를 드립니다. 문의 : 02-2270-2516 평화신문2014.09.24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주님의 기도(6) : 일곱 가지 청원 ④ 원수조차 사랑할 때 그리스도의 모습 본받고 하느님의 자비 얻을 수 있어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녀야 하고 그러려면 기도가 필요하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3년 로마의 레비비아 교도소를 찾아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알리 아그자와 만나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다섯째 청원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입니다. 이 청원에 대해 살펴봅니다(2838~2845항). 이 대목은 두 구절로 이뤄져 있습니다. 핵심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입니다. 그런데 전제가 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먼저 용서하겠으니 하느님 아버지께서 저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 하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먼저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는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다섯째 청원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이를 좀 더 풀어봅시다. 용서는 사랑의 전제 조건“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는 청원에는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이 깔려 있습니다.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지요.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할 까닭이 없지요. 그래서 죄를 용서해 달라는 이 청원에는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리라는 굳은 희망도 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 한, 하느님의 넘치는 자비가 우리 마음속으로 스며들 수 없다”(2840항)는 데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1요한 4,20)는 성경 말씀을 상기해 봅시다. 우리의 형제·자매를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 마음은 닫히고 굳어져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스며들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는 부드러운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우리 마음은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리게 됩니다. 기도로 인간적 어려움 극복해야물론 인간적으로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너그러이 용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을 믿고 마음을 열어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 끝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모욕을 당하고도 그것을 잊는다는 것은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 자기 마음을 바치는 사람은 모욕을 동정으로 바꾸며, 상심(傷心)을 전구(轉求)로 변화시켜 기억을 정화”합니다(2843항).이렇게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게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원수까지 용서하게 해줍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변화되어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는 “그리스도인이 바치는 기도의 정점”(2844항)입니다. 용서는 또한 이 세상에서 사랑이 죄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그 모범을 보이셨고, 우리의 순교 성인들, 순교 복자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재현하신 분들입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녀들과 그 아버지이신 하느님 사이의 화해를,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기본 조건입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용서는 한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께 빚을 진 자들입니다.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진 빚을 갚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바로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로마 13,8 참조). 정리=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백영민2014.10.08
![[출판] 책꽂이-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제사 등](//cpbc.co.kr/CMS/newspaper/2014/01/rc/492359_1.1_titleImage_1.jpg)
[출판] 책꽂이-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제사 등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제사알프레드 막스ㆍ크리스티앙 그라프 지음/권유현 옮김/백운철 감수/성서와함께/5000원 성경에 나타난 제사의 의미와 기능을 살펴봤다. 제사를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제사의 형태와 구조를 밝히며 제사가 지닌 긍정적 기능을 강조했다. 구약성경의 제사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통해 명맥을 유지해 온 이스라엘을 안정시키고 영속시킨 존재였고, 예언자들은 이러한 제사를 영성과 윤리 차원으로 심화했다. 신약성경의 제사는 성사의 형태를 지니는 예식으로 발전했다. '성사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선포와 함께 제사 예배의 양극(보상과 친교)을 수용하며 제사의 마지막 지점이 하느님과 친교임을 알려준다.교황 프란치스코프란치스코ㆍ프란체스카 암브로게티ㆍ세르히오 루빈 대담/이유숙 옮김/알에이치코리아/1만 4000원 교황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을 지냈을 당시 종교전문기자와 2년에 걸쳐 나눈 대담을 담았다.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교황 조부모의 삶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성직자'로서 교황의 사목 행보에 집중한 기존 책과는 차별을 두고 있다. 폐부전으로 사경을 해맸던 청년 시기,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 교사로 일하던 시절 등 교황의 '삶'과 '인간적 면모'에 초점을 맞췄다. 2010년 아르헨티나에서 초판이 출간됐고, 지난해 교황 선출을 계기로 재출간돼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번역됐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가톨릭 신학과 환경드류 크리스찬슨ㆍ월터 E. 그레이저 엮음/이재돈ㆍ이순ㆍ유정원 옮김/가톨릭대학교출판부/2만 4000원 폭우와 폭설, 한파와 폭염 등 이상 기후 현상과 같은 생태적 도전은 교회가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촉구한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생태 위기는 윤리 위기"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의 환경적 도전은 새로운 신학 연구와 비판을 필요로 한다. 책은 미국 주교회의 주관으로 1995년 미국 오레곤주에서 '생태와 가톨릭 신학 : 기여와 도전'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 자료를 모은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환경윤리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담았다. 마더 테레사, 넘치는 사랑오키 모리히로 찍고 쓰다/정창현ㆍ정호승 옮기고 다듬다/해냄/1만 4500원 복녀 데레사 수녀 사진작가로 유명한 오키 모리히로의 데레사 수녀 사진집이다. 1970년대 중반 빈민층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인도 콜카타로 떠난 그는 데레사 수녀와 사랑의 선교 수녀회 활동에 감동받아 렌즈의 시선을 수녀들 활동으로 돌렸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수녀들의 절절한 사랑과,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콜카타 거리 현장이 사진과 함께 생생히 펼쳐진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정호승(프란치스코) 시인의 아버지가 번역하고 정 시인이 번역을 다듬은 책이다. 나는 지옥에서 탈출했다폴 틱펜 지음/한 아오스팅 마리아 옮김/나이테미디어/1만 5000원 지옥에 떨어졌다 탈출한 주인공 '토마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토마스가 경험한 지옥은 폭음, 폭식, 분노, 폭력, 거짓, 위선, 도둑질, 배신 등 죄의 분류에 따라 구역이 나뉘어 있다. 그가 지옥에서 만난 이들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라기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소소한 죄를 저지르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미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가톨릭 언론인 폴 틱펜 교수다. 그는 "우리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려면 지옥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박수정 기자cpbc2014.01.14

출판단신▨내포문화의 탄생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방문하는 솔뫼성지와 해미성지가 있는 거룩한 신앙의 못자리가 충청도 내포 지역이다. 내포 지역은 역사가 기록되면서부터 한반도와 해양, 대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지식과 종교, 문화와 문물이 이곳을 통해 넘나들고 확산했다. 저자들은 고향 내포에 대한 사랑을 담아 내포를 공간지리학적ㆍ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세밀하게 관찰하고 풀어냈다. 한국문화 원형의 정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색하는 현장 안내서다. (김기현ㆍ김헌식 지음/북코리아/2만 원)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명한 성서학자요 사목자였던 마르티니(1927∼2012, 이탈리아) 추기경은 21개의 짧은 글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진지하게 되묻고, 그를 더 깊이 만나도록 이끈다. 60여 쪽 분량의 소책자로, 천천히 묵상하며 읽으면 언제나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희망찬 목표로 우리 앞에 계신 예수를 만나게 된다. 이미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이들은 물론 예비신자나 청소년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도록 도와준다.(C.M.마르티니 지음/안소근 옮김/성서와함께/4000원) ▨하느님과 하나 되어저자는 독일 마이스터 엑카르트 학회 회장으로, 중세 대표적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작품 가운데 독일어 논고 두 편, 독일어 설교 열 편, 라틴어 성경 주해ㆍ강의ㆍ설교 다섯 편, 라틴어 설교 초안 열두 편을 엄선해 편마다 해설을 달았다.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엑카르트의 중심 사상을 드러내면서도 비교적 쉽고 짧아 그의 사상을 좇는 데 크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엑카르트 사상의 핵심은 ‘모든 것’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떠나 영혼 속에 하느님이 탄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디트마르 미트 풀어 엮음/김순현 옮김/분도출판사/1만 6000원) ▨하느님과의 일치스페인의 위대한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이 지은 「가르멜의 산길」「어두운 밤」은 지금도 널리 읽히는 고전이지만 초보자들이 바로 읽기에는 아무래도 어렵다. 성 요한의 가르침을 개괄한 책은 하느님 뜻을 완전하게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완덕과 기도에 대한 입문서다. 성령의 활동에 온전히 맡기는 이탈과 포기의 필요성을 각자 삶의 상황에 맞춰 설명하면서 하느님과의 일치와 친밀한 사귐을 향해 나아가는 관상의 길로 이끈다.(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가브리엘 신부 지음/밀양 가르멜 여자 수도원 옮김/성바오로/1만 2000원)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백영민2014.07.02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상)](//cpbc.co.kr/CMS/newspaper/2014/05/rc/511397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46)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상)‘금녀의 벽’ 넘어 대표적 여성신학자로 자리매김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Elisabeth Schssler Fiorenza)는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여성주의 성경 해석’을 가르치고 있는 가톨릭 여성신학자입니다. 그의 신학 방법론에 관한 강의는 미국의 보스턴 지역에서 신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는 거의 필수 과목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는 1996년에 한국을 방문해 이화여자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그리고 한국기독교공동학회의 25번째 정기 학술대회에서 강연한 적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피오렌자 교수의 삶과 신학 사상에 대한 다음의 소개는 글렌 에난더가 쓴 그의 전기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루마니아 태생의 똑똑한 여자아이엘리사벳 쉬슬러는 1938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9월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당시 여섯 살이던 엘리사벳은 부모와 함께 피난을 떠나 전쟁 난민이 돼 이곳저곳을 표류하다 전쟁이 끝나던 1945년에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엘리사벳의 아버지는 재봉사로 일했습니다. 전쟁으로 학교에 다니다 중단하기를 반복한 엘리사벳은 세 번째로 다시 1학년에 입학했는데, 곧 뛰어난 학업 수행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그리하여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됐는데, 루터교가 주를 이루고 있던 지방에서 한 가톨릭 소녀가 이토록 뛰어난 성적을 얻게 된 것이 당시에 많은 이의 이목을 끌었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은 10대 소녀였을 때 수도자가 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당신부님께서 엘리사벳은 순종 서원을 사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는 조언을 하시면서 수도 성소를 포기하게 하셨는데, 이후에 그 충고는 아주 현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본인이 밝히고 있습니다.남성들의 학문, 신학에 문 두드려 1958년 엘리사벳은 대학 예비과정을 마치고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독일 문학과 역사,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1962년에는 그곳에서 신학석사 학위(MDiv)를 취득하고 1963년에는 박사 학위 바로 밑에 해당하는 상급석사 학위(licentiate)를 취득했습니다. 그 후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뮌스터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대학에서 신학 교육을 받은 전 과정 동안 엘리사벳은 거의 모든 수업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그 때문에 엘리사벳의 뛰어난 성취는 더욱 많은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어떤 교수들은 엘리사벳에게 매우 협조적이었지만 일부 교수들은 여성이 신학 석ㆍ박사 학위를 얻으려고 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굳은 결심으로 이 학위들을 차례로 취득했습니다. 1960년대 독일에서, 신학이란 남성들의 학문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유일한 여학생으로서 처음 신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부터 여성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1964년 상급석사 학위를 받았을 때 엘리사벳이 쓴 논문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하는 봉사직에 초점을 둔 사목신학에 관한 것으로, 이 논문은 「잊힌 동반자」(Der vergessene Partner, [Dsseldorf: Patmos Verlag, 1964])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됐습니다. 엘리사벳의 첫 번째 저서인 이 책은 박사 학위를 받기에도 충분하다는 평을 얻었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은 뛰어난 성적으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4년에 같은 대학인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루돌프 쉬낙켄부르그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박사 학위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신학박사 학위 과정에서도 엘리사벳은 당연히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당시의 분위기에 적응하며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어서 겪어야 하는 불이익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도교수였던 쉬낙켄부르그는 당시 세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었는데, 그는 신학의 미래를 쥐고 있는 이들에게 장학금을 줘야지 미래도 없는 여학생에게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평신도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엘리사벳의 실망은 매우 컸습니다.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고 성적도 누구보다 뛰어났음에도, 엘리사벳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그의 학업성취능력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됐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엘리사벳은 뮌스터대학의 요셉 슈라이너 교수를 만나게 됐고, 그의 지도로 박사 학위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슈라이너 교수는 엘리사벳에게 대학의 연구직도 마련해줬습니다. 뮌스터대학으로 옮긴 후 그곳에서 장차 남편이 될 프란시스 피오렌자를 만나게 됩니다. 현재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가톨릭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프란시스 쉬슬러 피오렌자 교수는 당시엔 미국 볼티모어의 성 마리아 신학대학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1963년에 독일 뮌스터대학으로 가서 유명한 두 분의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와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종종 엘리사벳에게 뷔르츠부르크에서 장학금을 받지 못한 것이 얼마나 잘 된 일인가 하고 농담으로 말하곤 한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평생 서로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1964년에서 1970년까지 뮌스터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그의 논문을 읽어줄 교수들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1970년에 최고 졸업논문상을 받고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67년에 프란시스 피오렌자와 결혼하여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가 된 그는 남편과 함께 미국의 유명한 가톨릭대학인 노트르담 대학에 교수직을 얻어 1971년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종교학부 유일한 여성 교수신학 교육을 받는 동안 엘리사벳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교회가 세속 안에서 어떻게 현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주된 논제로 다루고 있었는데, 엘리사벳은 신학생들이 세속 사회에서 살고 그 사회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배우게 하려면 신학교가 여학생들에게 개방돼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이 제안은 1960년대의 독일에서는 꽤 충격적 제안이었고, 이런 주장을 제기한 엘리사벳의 첫 번째 책에 머리말을 썼던 지도교수는 그 문장 때문에 머리말을 쓰는 것을 주저했다고 합니다. 1971년 미국에 와서 신학을 가르치는 동안에도 피오렌자 교수(이후부터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는 피오렌자 교수로 지칭함)는 여성이 신학 고등교육 과정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잊지 않았고, 자신의 이런 경험이 이후의 학문 연구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됐다고 합니다. 피오렌자 교수는 1971년에서 1984년까지 14년간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칩니다. 당시에 노트르담 대학교의 종교학부에서 피오렌자 교수는 유일한 여성 교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피오렌자 교수가 대학 사회에 적응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노트르담에서 가르치던 거의 마지막 시기에 피오렌자 교수는 자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그녀를 기억하며: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한 여성신학적 재건」(In Memory of Her: A Feminist Theological Reconstruction of Christian Origin [New York: Crossroads, 1983; 1994]; 우리말 번역으로, 김애영 역,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신학적 재건」, 종로서적, 1986년)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성경 연구의 패러다임에 도전을 제기하는 것으로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책으로 인해 피오렌자 교수는 노트르담 대학에서 더욱 고립됐고 결국 그 학교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1984년에 노트르담 대학교를 떠난 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공회 대학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4년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1988년에 미국의 최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하버드 대학교로 옮겨가 그곳에서 최초의 ‘크라이스터 스탕달 교수’(하버드의 유명한 신약학 교수 크라이스터 스탕달을 기려 그 이름을 딴 교수직)가 됩니다. 케임브리지에서 피오렌자 교수의 삶은 어떻게 전개됐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그의 사상이 성숙하게 됐는지는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김영선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 ▲미국 보스턴 칼리지에서 구약성경으로 박사 학위 취득 ▲가톨릭대 성신교정, 서강대학교, 가톨릭교리신학원, 수도자신학원에서 히브리어와 역사서, 지혜문학, 구약입문 등 강의 평화신문2014.05.27
![[문화/인터뷰]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설립 10주년, 연구소장 장긍선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8161_1.1_titleImage_1.jpg)
[문화/인터뷰]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설립 10주년, 연구소장 장긍선 신부이콘은 성경, 신앙 전례, 교리 담긴 영성의 보화 "이콘(Icon)이 옛것을 베끼는 것이라고요? 우상숭배와 세속화에 대처하는 교회 고민이 담긴 영성의 보화입니다." 서울대교구 이콘(초기 교회미술)연구소를 10년간 이끌어온 장긍선 신부는 새해 들어서 더 분주하다. 더 많은 이들에게 이콘을 알리고 보급하기 위해서다. 오는 3월 1일 설립 10주년을 맞는 연구소는 그간 졸업생을 150여 명 배출하고, 요즘도 수강생 100명이 3년 과정을 밟고 있다. 그리스말로 '모상', 또는 '형상'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이콘을 보급하고자 장 신부는 목판에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전통 이콘뿐 아니라 '이콘 유리화' 제작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해 가톨릭출판사 마리아홀 전실(前室)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이콘 유리화를 설치했고, 연구소 자료실 창문에도 이콘에서 즐겨 그리는 데이시스(Deisis, '청원'또는 '주님을 향한 행렬'라는 뜻) 주제 이콘 유리화를 설치했다. 모자이크 이콘도 제작했다. 때론 성경이나 예식서 속에 세밀화를 그리는 데 이 역시 이콘이다. 그야말로 이콘 다변화에 힘을 쏟고 있다. 또 설립 10주년을 맞아 오는 3월 6~12일 서울 명동 평화화랑에서 기념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연구소를 거쳐간 작가들 작품을 담은 이콘화집 발간, 기념 특강 및 교회 전례력에 따른 교회미술 특강도 계획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이콘에 대한 교회 전반의 인식은 부족한 편이다. 일각에선 옛 형태를 '그대로 베끼는' 단순한 작업이라 오해하기도 하고, 창의성이 없다고 매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장 신부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교회가 정한 규범과 틀 속에서 그리지만, 이는 그저 답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힌 초기 교회 성화 전통을 다시금 되찾고 살려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성화를 그릴 때 형태보다, 안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이콘 같은 초기 교회미술은 감성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기도 속에서 그려지기에 같은 성화가 단 한 점도 없는 것입니다." 장 신부가 바라보는 이콘의 실체는 성경과 신앙, 전례와 교리 그 자체다. 그 내용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가시화한 것이 이콘이며, 이콘을 제대로 감상하고 받아들이려면 초기 교회미술사와 그 안에 담긴 영성, 상징성 등을 먼저 이해하고 성경과 교리 내용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특히 "전례의 모든 순간은 이콘이 가진 의미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에 이콘은 단순한 성화가 아니라 영성생활로 이끌어주는 길잡이"라고 장 신부는 강조한다. 장 신부는 전례학이나 이콘 이론만 공부한 것은 아니다. 1997년부터 4년 6개월간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모스크바총대주교청 직할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 이콘 교사 양성과정을 밟으며 이콘 실습으로 디플롬을 받을 만큼 열정을 쏟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서방교회에서 이콘을 재발견하고 이를 되찾고자 많은 연구와 이콘 작업을 해온 걸 보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장 신부는 2003년 국내 최초로 이콘연구소를 세우고, 하느님의 신성과 영적 지혜의 충만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이콘 교육과 이콘 제작 및 복원 등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13.01.15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5)하늘의 신격화](//cpbc.co.kr/CMS/newspaper/2013/02/rc/440245_1.0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5)하늘의 신격화유배 후 다른 종교 새 호칭의 수용 고대 근동 사람들은 현대의 합리주의와 과학, 대량 소비주의 의식이 아닌 신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살았다. 구약성경은 그런 고대 근동 세계를 배경으로 탄생한 책이다. 고대 인류는 하늘을 최초, 최고의 신으로 여겼지만 구약성경은 하늘을 신으로 여기기보다 일종의 장소로만 여겼다. 이는 최고신인 하느님이 다른 이들에게 잘못 이해되지 않을까 하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우려와 더불어 애초부터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강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과 이스라엘의 귀환 고대 근동 패권은 신아시리아부터 신바빌론 제국과 페르시아를 거쳐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 제국으로 옮아갔다.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신바빌론 제국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국으로 끌고 갔다. 이때 신바빌론 제국은 이스라엘 백성을 유배시키는 등 잔인한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바빌론을 함락시키고 기원전 538년 새로운 시대를 연 페르시아 제국은 종교적 관용정책을 폈다. 총칼이 아닌 문화로 다스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적 관용정책에 따라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유배 이후 이 시기는 구약성경의 전체적 모습이 지금과 비슷한 형태로 완성되는 때이다. 이때 고대 근동의 공용어가 바뀐다. 신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의 언어는 아카드어였다. 그런데 이미 신바빌론 제국 말기부터 고대 근동 사회에는 아람어가 실질적 표준어로 쓰였다. 페르시아 제국은 자신의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를 강제하지 않고 널리 쓰이는 아람어를 표준어로 삼았다. 이때부터 국제공용어(lingua franca)는 아람어가 됐다. 교역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인에게도 아람어는 일상 언어가 됐다.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새 호칭 바빌론 유배가 끝난 뒤 페르시아 시대에 들어서면서 구약성경 본문에 주목할 만한 현상이 발생한다. '하늘의 하느님'이란 호칭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유배 이후 역사를 전하는 에즈라서와 느헤미야기에는 이런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늘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뜻을 이루게 해주실 것이오(느헤 2,20), 하늘의 하느님께서 내리신 법의학자인 에즈라 사제(에즈 7,12) 등이 그것이다. 하늘을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라고만 여겼던 고대 이스라엘인은 이때까지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만 써왔다. 그런데 '하늘의 하느님'이라니? 이런 표현은 함부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신의 호칭, 곧 우리 하느님을 어떻게 부르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신의 호칭은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특정 시대에 왜 하느님을 이런 호칭으로 갑자기 바꿔 부른 것일까? 하늘관이 급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 유배 이후 이어진 종교적 변화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적 관용정책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누리며 살았다. 이때 이스라엘은 혼란스럽지만, 역동적 시대를 맞이했다. 이때 유다인들은 자연스럽게 페르시아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후 히브리어는 종교적 언어로 축소되고, 아람어는 이스라엘 일상어로 사용되는 이중 언어생활이 확산했다. 아람어가 유다인 일상에 깊이 침투한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 구약성경 일부는 아예 처음부터 아람어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일상 언어의 급변은 문화적 변화를 동반했다. #페르시아 종교의 확산 이 시기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는 주변 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로아스터교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는 다양한 호칭을 지녔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 호칭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늘의 하느님'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이 호칭을 과감히 수용해 야훼 하느님에 적용했다. 따라서 유배 이후 본문에 '하늘의 하느님'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새 호칭을 수용했지만, 그 의미는 매우 다르게 사용됐다. '참된 하늘의 하느님'은 대제국 페르시아의 신이 아니라 '오직 우리 야훼 하느님뿐이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 호칭의 수용은 '신학적 반론'의 성격을 띤다. 이는 대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확산하는 데 대한 적극적 대응이었다. 아마 이 호칭을 주도한 세력은 유배 이후 활약했던 사제들로 보인다. 새로운 호칭은 고대 근동 패권을 새롭게 거머쥔 막강한 문화 제국인 페르시아의 종교적 영향력을 차단하고 야훼 신앙을 지키려는 신학적 노력의 결과다. 또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주변 종교의 영향력을 일방적으로 차단하려고만 하지 않고, 때로는 적절히 흡수해 야훼 신앙을 더욱 두텁고 튼튼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하느님에 대한 올곧은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명기에 잘 드러나는 이런 믿음의 태도야말로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이다. 그들은 이런 태도로 다른 종교에 대해 적절히 대응했던 것이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평화방송 TV 방송시간 : 수요일 오전 9시(본방송), 금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일요일 저녁 9시, 월요일 오전 4시ㆍ오후 3시퇴사자22013.02.05

어린 시절 '주님의 기도'로 예수님과 첫 만남[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1.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①순교하러 가는 어린 데레사와 오빠. 아빌라 생가 성당의 색유리화. 성경과 교리서만으로도 성인(聖人)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는 우리가 주일 미사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핵심 중의 핵심을 이룹니다. 신ㆍ구약 성경을 비롯해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가르치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인ㆍ성녀가 되는 데는 사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전해주는 성경 한 권과 그 진리를 풀어서 설명해 주는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이 담긴 교리서 한 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신심 깊은 겸손한 촌부(村夫)가 신학자보다 훨씬 더 하느님께 가까이 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중세 당시 사회 내에서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 성녀는 부모님 덕분에 글을 깨치고 어려서부터 적지 않은 신심 서적들을 읽고 실천하며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불태워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정이 구체적으로는 강생하신 하느님, 즉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점점 깊어 갔습니다. 성녀 데레사가 성인이 된 것은 이러한 '초심'(初心)에 끝까지 충실했고 그렇게 그분과의 관계를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녀의 일생을 '예수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훑어보는 것은 성녀의 영성을 올바로 이해하게 해주는 틀입니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다 어린 시절 성녀가 처음 만난 대상은 예수님이라는 구체적인 한 인격이라기보다 조금은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추상적인 하느님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데레사가 접한 하느님은 무엇보다 우리를 훨씬 너머 저 세상에 계시며 광대무변하시고 모든 것에 침투해 계시며 전능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느님은 아직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하느님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성녀는 부모님과 미사에 참례하면서 들은 신부님들의 강론과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벗이며 신랑으로서 무엇보다 강생을 통해 우리 곁에 오셨다는 진리를 들어서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하느님 개념을 전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서 배운 묵주기도 드리길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를 즐겨 읊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완덕의 길」 후반부에 보면 주님의 기도 해설이 있는데, 거기서 우리는 성녀가 그 기도의 매 구절을 예수님과 연관지어 설명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묵주기도를 하면서 주님의 기도에 익숙해졌고 이를 통해 그 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을 조금씩 맛 들여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데레사는 이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강생하셔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신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 안에 각인시켜 갔습니다. 이렇듯 어린 시절에 아직 자아가 형성되기 전부터 가졌던 하느님에 대한 관념 그리고 주님의 기도를 통한 예수님과의 만남은 훗날 성녀의 영적 성장에 토대가 됐습니다. 예수님과 만나는 여정에서 성녀에게 도움이 된 또 다른 것으로 성모님 신심을 들 수 있습니다. 성녀의 어머니는 성녀가 어렸을 때부터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갖도록 자주 가르쳤습니다. 성모님 신심은 모든 그리스도교 영성에 중심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강생 교리로 인도해 주실 뿐 아니라 사실 강생 교의 자체이십니다. 그분의 '피앗'(fiat: 예)을 통해 오랫동안 인류가 고대해 오던 구세주께서 인간이 돼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느 현대 신학자는, 성모님이야말로 예수님과 관련된 교회의 가르침들을 보호하는 최고 수호자라고까지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은 어린 데레사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해준 좋은 환경이 돼줬습니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묵주기도, 더 나아가 성모님과 성인들에 대한 깊은 신심, 다양한 성인전에 대한 독서, 16세기 당시 스페인에 널리 퍼져 있던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성화들은 어린 데레사의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강생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을 형성하게 해줬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린 데레사는 인간과는 먼 상당히 추상적인 하느님, 심판관이신 하느님에서 인간과 가까이 계신 하느님, 그래서 인간의 육(肉)을 취해 오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서기 시작했습니다. '겟세마니의 예수님'을 사랑한 소녀 데레사 그러나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세상에 대한 관심, 인간적 애정에 대한 관심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성녀는 그만 냉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태를 극복하게 해준 것은 아버지로 인해 들어가게 된 아우구스티노 수녀원 기숙사에서의 신앙 체험이었습니다. 당시 그곳 사감 수녀님들의 모범적 신앙생활을 보면서 성녀는 점차 어린 시절의 거룩한 열정을 다시 키워가기 시작했고 막연하게나마 수녀가 되겠다는 원의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성녀는 점점 기도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특히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예수님 모습에 깊이 빠졌다고 합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마셔야 할 고통의 잔 앞에서 고뇌하며 피땀을 흘리시는 예수님, 그러나 성부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으며 그 잔을 받아 마신 예수님. 사춘기 소녀 데레사의 마음은 그렇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잦아들어 갔습니다. 성녀는 그렇게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맡긴 채 늘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을 묵상하며 잠들었다고 합니다(자서전 9,4). 그래서 성녀는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예수님의 수난 사화를 읽곤 했습니다(자서전 3,1). 이렇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성녀에게는 추상적이고 멀리 계시던 하느님이 인격적인 하느님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인간 예수님께서 내면에서부터 자신을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점차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사춘기 소녀 데레사가 관계를 맺기 시작한 하느님은 예수님으로서 그분은 데레사에게서 모든 실존을 건 전인적 응답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당시까지 성녀의 삶에서 예수님이 신앙으로 받아들인 사실로서 객관적인 존재론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체험되는 신앙이자 의미 충만한 신앙으로서 심리적인 차원에서도 성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cpbc2014.04.10
![[전교주일]‘프란치스코 효과’ 서서히](//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4538_1.1_titleImage_1.jpg)
[전교주일]‘프란치스코 효과’ 서서히명동본당 9월 교리반 예비신자 두 배 이상 늘어나 교황 방한 60여 일이 지난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프란치스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천주교에 대한 호감도가 크게 상승했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리는가 하면,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인’(시사저널 9월호) 조사에서 염수정 추기경과 고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이 각각 1ㆍ2ㆍ4위에 올랐다. 전교주일(19일)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이 가져온 선교 효과’를 살폈다. 교황 방한은 결론적으로 한국교회 성장에 자양분이 됐다는 평가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신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프란치스코 효과’ 가운데 하나는 “미사 때 신자들이 늘었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본당은 교황 방한 이후 지난 9월 예비신자 교리반에 문을 두드린 이들이 예년보다 평균 2배 이상 늘었다. 2012년 9월 165명, 2013년 9월 102명이 예비신자 교리반에 입교 신청했으나 올해 9월에는 300명이 넘는 이들이 몰렸다.명동대성당의 연도별 세례자 추세도 ‘프란치스코 효과’를 기대하게 한다. 2004년 771명이던 세례자 수는 2005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선종 뒤 951명으로 급증했고, 2006년에는 1351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후 1200~1300명 선을 유지하다가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으로 세례자가 다시 1489명으로 늘었다. 명동대성당 세례자 수는 이후 다시 줄기 시작해 2010년부터 현재까지 1100명 대를 유지하고 있다 <표 참조>.냉담자들, 고해성사 보러 성당으로 명동본당 우연호(선교ㆍ교육 담당) 신부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김수환 추기경 선종 당시 예비신자와 세례자 수가 증가했듯이 이번 예비신자가 배로 늘어난 데에는 분명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효과가 선교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고 분석했다.프란치스코 효과는 예비신자 입교 증가뿐 아니라 냉담 교우를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전국에서 보이고 있다. 광주대교구 사목국장 우원주 신부는 “알고 있는 냉담 교우들로부터 교황 방한 기간 동안 교황님 때문에 다시 성당에 나가겠다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며 말했다. 한국평협 권길중(바오로) 회장은 “만나는 신부님마다 미사 참례자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성당에 나오는 이들이 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대전평협 이명수(아벨) 회장 역시 “탄방동본당만 하더라도 교황 방한이 계기가 돼 냉담했던 신자들이 성당을 찾아오는 경우가 늘었다”며 “요즘은 교중미사 때 자리가 없을 정도”라고 전했다. 또 “수년에서 수십 년 냉담했던 이들이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보려고 미사 전에 길게 줄을 서는 모습을 요즘 자주 본다”며 확실한 교황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선교에 적극 나서는 움직임도 있다. 서울대교구 포이동ㆍ고덕동본당은 교황 방한을 전후로 새 가족 찾기 운동에 나섰고, 잠실3동본당(주임 박성칠 신부)은 외짝교우를 대상으로 ‘속성 예비신자 교리반’을 운영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신자들의 선교 열의도 커져 올해 ‘선교의 해’로 지내고 있는 안동교구는 사제와 평협 회장단이 11월부터 6주간 안동ㆍ동해ㆍ북부 등 6개 지구장좌성당을 돌며 선교운동을 펼친다. 안동 평협 이한양(그레고리오) 회장은 “전에는 사목자가 신자들에게 선교하자고 권해도 미온적 반응이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은 행동에 옮기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며 “교황 방한을 계기로 ‘우리도 선교하자’는 의지가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대전교구도 내년 사목목표를 ‘선교’로 정할 기세다. 지난 6일 개최한 교구 사목평의회는 교황 방한의 큰 은총을 받은 교구가 현재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며, 교구 설정 70주년(2018년)을 준비하면서 2015년을 선교의 해로 정할 것을 논의했다.프란치스코 효과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의 소리도 나온다. 수원교구 복음화국장 이근덕 신부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사제들과 신자들이 지금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며 “더 가난해져야 함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만 머물지 말고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서울대교구 선교전례사목부 이영제 신부도 “교황님이 만나고 체험하신 예수님을 우리도 만날 때 전할 수 있다. 교황 방한을 계기로 지금 내 신앙부터 돌아봐야 한다”고 권했다. 그러면서 “성경 말씀과 전례, 봉사 등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할 때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다”며 “기쁘게 사는 사람은 말씨와 표현, 행동이 달라지며, 이러한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선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화신문2014.10.16

국내 첫 성모순례지, 풍요로운 성체신심 행렬로 물들다청주교구 감곡매괴본당 ‘감곡 성체현양대회’ 100주년 감사 미사 흰옷을 입은 소녀들이 오색 꽃잎을 뿌리는 가운데 형형색색의 톱밥길을 밟으며 장봉훈 주교가 성체를 모시고 감곡성당에 들어서고 있다. 9일 감곡 매괴성모 순례지는 막 수확을 앞둔 가을 들녘만큼이나 풍요로운 ‘성체 신심’의 행렬로 물들었다. 이 날은 1914년 감곡본당 주임이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임 가밀로(Camille Bouillon) 신부 주도로 서울ㆍ대구대목구 사제 25명 중 12명이 감곡에 모여 국내 첫 성체현양대회를 거행한 지 꼭 100주년이 된 날이었다.국내 첫 성모 순례지로서 ‘성모 신심’의 못자리인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지본당(주임 반영억 신부)은 이날 감곡성당과 매괴성모동산 일원에서 교구장 장봉훈 주교와 교구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감곡 성체현양대회 100주년 감사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 공경의 의미를 새겼다. 1941년 일제 강점기와 1950년 한국 전쟁 때 다섯 차례 중단됐기에 100차를 채우지는 못하고 96차였지만 그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았다. 만국기가 성당 경내에 휘날리는 가운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5000여 명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층 풍요롭게 하고 신앙생활을 더욱 알차게 만듦으로써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바칠 수 있게 돕는 성체 신심의 의미를 더욱 새롭게 되새겼다. 올해로 성체현양대회 거행 100주년을 맞는 본당공동체는 특히 이번 성체현양대회를 앞두고 전 신자가 함께한 가운데 성경쓰기와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성체현시 및 성체강복, 성시간을 통해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 공동체가 하나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써달라며 전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모은 5000만 원을 이날 감사미사 중에 물적 예물로 봉헌함으로써 애덕 실천을 드러냈다. 장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감곡 성체현양대회는 성체 신심에 대한 전 공동체의 장엄한 신앙고백”이라며 “하느님의 전능을 온전히 믿고 신뢰할 때 성체 신심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찬 전례 직후 감곡매괴성모순례지본당은 장 주교 주례로 프랑스 루르드성지에 있는 마사비엘 동굴을 그대로 재현해 세울 성모동굴 부지 축복식을 갖고 내년 5월 성모성월에 완공해 봉헌키로 했다. 이에 앞서 본당 측은 루르드성지 측의 허락을 받고 (주)네이쳐 아키 건축사사무소(대표 권태석)에서 이틀간 현지 마사비엘 동굴을 실측해 3차원 입체영상 기법(3D)으로 설계했으며, 문화재 심의를 거쳐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지난 7일 건축 허가를 받았다. 이로써 감곡 매괴성모순례지는 ‘성모신심의 못자리’로서 본래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어 장 주교와 사제단, 수도자, 평신도 등 참가자들은 흰옷을 입은 소녀들이 오색 꽃잎을 뿌리는 가운데 성당 뒤 ‘장미의 언덕’ 매괴성모동산을 돌며 우리나라의 복음화와 평화 통일을 이루도록 매괴 성모께 전구를 청했다. 또 성체 현시대에 성체를 모시고 매산 정상에 오른 장 주교와 교구 사제단은 산상 성체강복을 통해 신자들을 축복했다. 이날 성체현양대회는 성체거동을 마친 뒤 장 주교와 사제단이 본당 연령회(회장 장사일)와 매괴고(교장 박영봉 신부) 미술반 학생들이 조성한 솔가지 성문과 톱밥길 등을 지나 대성당에 들어가 마지막 성체강복을 하는 것으로 끝났다. 성당 왼쪽엔 본당 신자들이 닷새에 걸쳐 성체와 장미 꽃다발, 포도, 보리 등을 형상화한 톱밥 조형물이 성체현양대회 100주년을 자축했다.한편 성당 구내 가밀로 영성의 집 정원에선 성체현양대회 거행 100주년을 맞아 올해로 설립 118주년을 맞는 본당 공동체의 발자취와 지난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진전이 열렸으며, 성당 내 박물관에선 전통 소재와 기법, 문양으로 제의를 만들어 온 이지영(로사리아)씨의 전통 제의전도 함께 열렸다. 반 신부는 인사말을 통해 “100년 전 임 가밀로 신부님께서 외교인들이 주님께서 부르시는 손길을 느끼고 믿는 이들은 주님을 더욱더 흠숭하고 찬미할 수 있도록 하고자 거행하신 성체현양대회가 100주년을 맞게 돼 기쁘기 그지없다”며 “100주년을 맞아 임 가밀로 신부님의 유지를 받들어 세우게 된 성모동굴이 매괴 성모님의 전구로 은총과 치유의 자리, 희망의 터가 되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글·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cpbc2014.10.15
![[제2회 신앙체험 수기- 가작 수상작] 해바라기](//cpbc.co.kr/CMS/newspaper/2015/04/rc/568792_1.3_titleImage_1.jpg)
[제2회 신앙체험 수기- 가작 수상작] 해바라기글=노중호 신부(수원교구 서부본당 주임) 그림=문채현 준비운동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4). 어떻게 하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너무 궁금해집니다. 인생의 산과 바다, 어떤 우여곡절을 지나야만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호기심까지도 듭니다. 2000년 전에 혹시 기네스북이 있었다면 다니신 거리로만 따져도 바오로 사도가 기네스북의 원조가 되실 것 같습니다. 한순간도 쉴 틈 없이 사도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복음 선포의 길이었습니다. 지치지 않는 그 열정의 원천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를 통해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에서 증거하는 자로 변신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신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본받은 모습이셨습니다. 이제는 저의 차례입니다. 이 시간, 이 글을 통해 하느님께서 나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이끄셨는지, 섭리 안에 쫓아가며 달려야 할 길을 서투르지만 차근차근 달려가려고 합니다.전반전“한 처음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제가 처음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지의 어머니, 바로 할머니가 계십니다. 할머니께서는 몸이 약하셔서 예전부터 병을 많이 앓으셨습니다. 특별히 ‘속앓이’를 하셨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하늘이 노랗게 되고, 땅이 돌고 오장육부가 끊어진다고 말씀을 들었지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고통입니다. 한해의 마무리가 될 즈음 연말이 되면 너무 아프셔서 쓰러질 지경이셨습니다. 어느 때는 젊은 새댁이 속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장사를 지낼 준비를 할 정도로 살아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묏자리와 관까지 맞추셨습니다. 그런데 무당을 불러 한 상 거하게 차리고 굿판을 펼치면 신기하게도 할머니께서는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심지어는 다 죽어가던 할머니께서 일어나시어 굿을 구경 온 동네 사람들의 시중을 들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생사를 오가며 굿을 하는 것도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집안의 형편까지 어려워 죽을 판에, 매년 반복되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 할머니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 죽기 전에 성당이나 나가 보고 죽을래요.” 무속과 불교가 뿌리 깊은 동네에서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동네에서 천주교 성당을 다니는 분은 한 분이셨습니다. 그 할아버지 한 분의 도움으로 그 날로 바로 예비신자 교리를 다니셨고, 힘들고 어려운 모든 교리와 기도를 외우신 다음 참으로 어렵게 세례성사를 받으셨습니다. 미사와 첫영성체를 하신 할머니께서는 그다음은… 참으로 놀랍게도 할머니의 속앓이는 씻은 듯이 없어지고 아주 건강해지셨습니다. 아멘입니다. 할머니의 기적을 체험한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등 모든 가족이 악습을 끊고 천주교 신앙의 발걸음을 걷게 됩니다. 다른 가정은 신부님과 수녀님께서 또는 선교사나 봉사자분들의 도움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희 가정은 아버지께서 농담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마귀가 선교했어.” 그렇게 무속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의 꽃을 피웠습니다. 1784년, 이 황무지 땅에 지혜로운 조상들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임과 비슷한 길을 걸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시어머니의 배턴을 받은 며느리, 곧 저의 어머니의 특기 사항은 ‘담 넘기’였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너무 순하시고 선하셨는데, 딸이 주일마다 어디를 가는 것 같아 주일에는 특별히 많은 집안일을 시키셨습니다. 그렇게라도 집안에 묶어두시려고 하셨나 봅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께서는 더 정성껏 빨리빨리 다해 놓으시고 외할머니께서 대문을 지키면 뒤뜰의 담을 넘으셨습니다. 공세리성당…. 하느님의 집으로 가는 달음질이었습니다. 제가 커서 자동차를 운전할 때가 되어 외할머니댁인 둔포에서 공세리성당까지 가 보게 되었는데 자동차로도 거리가 꽤 멀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께서는 그 먼 길을 달리고 또 달리셨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하느님 사랑에 흠뻑 빠지십니다. 어머니께서는 학창 시절 수녀원 가실 준비도 하셨는데, 그때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낭만적인 연애 이야기를 기대하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언젠가 여쭈어 봤는데, “응, 성당에서 교리 공부하다가 만났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좀 재미없다 시시하다 생각했는데 “그럼 연애 편지는 어떻게 쓰셨어요?” 여쭈어 보았더니 천주교 교리 문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셨다고 합니다. 못 말립니다. 그래서 그 신앙적 차원으로 볼 때도 어머니께서는 저와 형의 첫 번째 교리 선생님이셨습니다. 예전에 영어 조기교육 열풍이 불었는데, 저희 형제는 교리 조기교육 열풍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어려운 교리가 쉽게 다가왔습니다. 저와 형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저절로 자연스레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수 우리나라 말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이라는 뜻의 ‘시나브로’가 있습니다. 그 말처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성가정의 성모 마리아와 같으셨습니다. 그렇게 준비시키셨나 봅니다. 하느님께서는….너무나도 지혜로우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화목한 가정으로 이끄셨습니다. 싸움이 일어나고 마음이 닫히게 되어 서로 말하는 것도 꺼려질 때, 할아버지께서는 그날 밤 온 가족을 안방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농번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농사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기 때문에 화목했던 가정이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시며,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저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이상하게도 신기하게도 할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가족 대화 시간이 지나면 불같이 화났던 마음이 사그라지고, 힘들었던 마음도 위안이 되며 평안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겨운지 벌써 잘 아신 것 같습니다. 세상의 멍에가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럽고 하느님께 영광을 올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일하는 소가 참된 주인을 만나고 주인과 만남의 연결고리인 멍에를 제대로 멜 때 세상의 밭을 잘 일구어낼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가족 대화 시간이 끝나면 꼭 묵주기도를 봉헌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동그란 묵주를 보면 동그랗게 둘러앉아 기도하던 가족의 자리가 생각납니다. 그렇게 행복함도 오래가지 않아, 할아버지께서는 간암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청천벽력,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표현도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로 말하면 솔로몬과 같으셨고, 가장으로 말하면 나자렛 성가정의 요셉과 같으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처음에 간암이라는 소식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습니다. 온몸이 앙상하게 나뭇가지처럼 마르고, 배는 복수가 너무 차서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하셨습니다. 극심한 고통의 나날이셨는데 하루는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부르셔서 “중호야, 할아버지가 너무 아파. 할아버지를 위해서 성가 좀 불러 줄래?” 말씀하셨습니다. 가슴이 아프고, 놀라고, 눈물이 눈을 가려서 도통 성가책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었습니다. 울먹이는 소리였지만 할아버지 위해서 가톨릭 성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성가 중에 할아버지께서는 50번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주님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주 나를 이끌어 주네.” 할아버지 손을 잡고 이 성가를 부르면 신비롭게도 할아버지께서는 허덕이고 가빠졌던 숨이 평안해지고, 고통으로 짓눌렸던 얼굴과 온몸이 갓난아기처럼 순하게 변모되셨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하느님 품으로 보내드렸습니다.경기중할아버지께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시면서까지도 유언으로 “내가 하느님 품에 가서도 성호가 신부님이 되길 기도할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형은 이미 집안에서 준비된 신부님이셨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복사를 서면서 신부님의 하얀 제의를 보고는 ‘나도 신부님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표현하기 조심스러웠고, 제 안에서 저 스스로 종이 접듯 접어야 했습니다. 누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형과 저 둘뿐인 집안에서 형이 먼저 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의 길을 걷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청개구리 심보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용기를 내어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너무 의외로 어머니께서는 “형 때 보니깐 교구청에 가면 예비신학생 모임으로 학사님들과 신부님들께서 잘해 주시고, 맛있는 곰탕에 깍두기도 주시더라, 맛있게 먹고 와!” 도대체 이런 말씀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지금 생각해도 어머니의 내공에 많은 점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안성에 있는 안법고등학교에서 일곱 명의 친구들과 예신 모임을 다녔습니다. 너무나도 신이 났습니다. 우리 다 같이 신학교 가자고 손을 맞대고 파이팅을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고3, 이제 신학교 입학 1년도 남지 않았던 봄, 예신 모임을 룰루랄라 다니던 7총사 중 한 명의 친구가 자꾸 다리가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반이었고 제 뒤에 앉았기에 저는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 몰래 친구의 저린 다리를 주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자주 결석을 하더니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병문안을 친구들과 같이 갔는데, 친구의 어머니께서는 퇴원해서 기도원에서 치료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병명은 골수암이었는데, 잘못된 기도원으로 가서 친구는 고통 속에서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꼭 같이 신부님 되자고 약속했었는데 그렇게 허망하게 친구를 보내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이 소식을 아시게 되었고, 또한 제가 신학교에 가는 것을 원한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셔서 할머니께서는 고모들, 작은아버지까지 5남매를 총출동시키셨습니다. 온 가족이 제 앞에 둘러앉으셔서 모두 반대의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형이 먼저 신학교에 갔고, 아버지 어머니는 누가 모시게 될 것이냐로 시작하여 모두 걱정의 소리이셨습니다. 온 가족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저는 단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비록 육적으로 효도를 못 해도, 영적으로는 누구보다도 지극한 마음으로 효도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더 이상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끝에 신학교에 입학했고, 2008년 8월 22일 주님의 제단 앞에 엎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평화의 사도, 가난한 이들의 벗,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지금으로부터 벌써 800년 전, 1200년대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부푼 꿈을 간직하고 보좌 신부 3년, 오전동ㆍ하안ㆍ상대원 본당의 소임을 마치고 첫 주임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안산의 원곡본당입니다. 그렇게 동고동락을 하던 안산에서의 3년 차인 2014년은 유난히 아픔과 상처가 많은 해였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라는 시에서 죽음을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라고 표현했지만, 소풍이라고는 도대체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 벌어졌습니다. 하물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야 하는 부활은 얼마나 더 깨지고, 아파하고, 희생하고, 우리가 수없이 변화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인지 뼈저리게 알게 되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성주간 수요일 그날을 기억합니다. 2014년 4월 16일…. 다시 생각하는 것조차 너무 아픔이고 죽음이어서 다시 꺼내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다시 용기를 내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다. 아이들과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보좌 신부 생활을 마치고 처음으로 주임 신부의 소명을 받고 저는 오자마자 수원교구 사제 체육대회 때 농구를 하다가 십자인대가 파열되어서 생전 처음 휠체어와 목발 신세를 지며 불편하게 미사를 봉헌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실망하거나 기분 상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옆의 복사 친구들이 “신부님 괜찮으세요? 휠체어 타는 것 재미있으시죠?” 너무나도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장난도 치며 잘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휠체어를 탈 때는 밀어주고, 목발을 짚을 때는 잡아주고, 저는 한순간도 불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정이 팍팍 들었습니다. 이제는 실명을 거론해도 될 것 같습니다. 성주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십자가 행렬을 할 때도, 중고등부 학생 미사를 할 때도 늘 밝고 명랑한 ‘장준형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복사 단장이어서 동생들을 잘 챙기고, 복사 배정표를 잘 계획했으며, 빠지는 친구가 있으면 ‘제가 하면 되지요’ 하고 허허 웃으며 대신 복사를 섰던 학생이었습니다. 중고등부 주일학교 임원으로서 학생회를 이끌고 따르는 후배들이 많아 말 그대로 인기쟁이었습니다. 특출나게 잘 생겼고, 본당의 모든 신자분에게 인사도 잘하여서 사랑을 너무나도 많이 받는 학생이었습니다. 또한 예비신학생이었기 때문에 훗날 거룩한 미사성제를 집전할 신부님이 되실 분이었습니다. 전례의 꽃이고, 1년 중 가장 중요한 파스카 성삼일을 준비하며,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부터 복사단장만이 할 수 있는 향 복사를 하기로 약속하고 연습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준형이가 안 옵니다. 축구도, 농구도, 배드민턴도, 장난도 하며 정말 잘 지냈기에 이번에도 장난스레 말하며 ‘왜 안 와? 왜 이렇게 늦어?’ 혼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안 옵니다. 중고등부 교감 선생님께 “준형이가 안 오네요”하고 말씀드리니 선생님께서는 장난꾸러기 준형이는 평소에도 늦잠 자고 늦게 올 때가 있었다며, 그렇지만 늦어도 꼭 오는 아이이니 기다리면 온다고 하였습니다. 준형이와 가장 친한 친구는 “바닷물 차갑다. 그만 놀고 돌아와라”라는 카톡 프로필 글을 써서 눈물바다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본당 공동체가 눈물로서 기다림의 고리기도를 하였습니다. 준형이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드디어 왔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두 발로 껑충껑충 뛰어오며 “신부님 늦었어요, 늦어서 죄송해요”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올 줄 알았는데 들것에 실려 온몸에 따뜻함은 다 사라지고 싸늘하게 누워서 왔습니다. ‘왜 이러셔야 했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고려대 안산병원 장례예식장에 빈소가 차려지는데, 저에게는 눈물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치고 또 치고, 오열하고 싶은데 눈물까지 흘리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릴 것 같아 이를 악물었습니다. 학생증 사진으로 영정 사진을 만드는데, 도통 준형이와 영정사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주일학교 모든 친구가 “이 나라에서는 못 살겠습니다. 이민 가려고 합니다.” 모든 것에 포기였고, 절망뿐이었습니다. 차가운 진도 바닷속에서 일주일 내내 추위 속에서 꽁꽁 지내 왔을 준형이인데, 정부의 장례 절차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다른 실종자 가족들의 상황 때문에 장례 예식장에 와서도 6일이나 냉동고에 있어야 했습니다. 매 순간 연도와 미사와 많은 조문객이 오셨고, 7일째 되는 날 화장을 하여 하늘나라에 보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화장을 하여 장례를 지내야 하는 그때, 진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준형이로 알고 있었던 학생은 DNA 확인 결과 다른 반 친구였습니다. 헛구역질이 납니다. ‘두 번 죽이는 꼴’이라는 말도 표현조차 되지도 않습니다. “내 자식도 못 알아봤다….” 대성통곡을 하시며 아버지와 이모와 이모부는 일주일 내내 한숨 주무시지 못한 몰골로 바로 6시간 진도의 길로 다시 내려가셔야 했습니다. “찾아올게요. 내가 바다에 들어가서라도 우리 아들 찾아올게요.” 준형이 아버지의 울부짖음 속에 그렇게 보름이 지난 5월 1일 노동자의 성 요셉 축일에 준형이는 진짜 우리 곁에 왔습니다. 그날은 본당의 날이었습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지 멀리하십시오”(1테살 5,19-22). 신자들에게 말했습니다. 특별히 가장 큰 아픔을 겪고 있는 유가족과 주일학교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민 가려는 생각이나, 욕하고 피하려는 것이나, 쓰러져서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하자, 그래야만 준형이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는 것이니….” 장례를 두 번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안산의 장례 예식장 전체가 포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성당 대강당에 빈소를 차리고, 끊임없이 연도를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 하는 연도도 이제 곧잘 하였습니다. 다음날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하며 하느님 품 안에 잘 보내 주려고 제의방에서 제의를 갈아입고 미사 입당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대에 오르기 전 보았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프고, 눈앞에 아른거려 한동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아이들이 먼저 하고 있었습니다. 준형이가 사고 나기 전 주까지 주일 미사 때 학생회 밴드로 앉아 있던 빈 의자에 베이스 기타와 꽃바구니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장례 미사지만 여느 때와 같이 슬픔으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교사들과 아이들의 의견으로 평소 청소년 미사처럼 경쾌하게 학생회 밴드 미사곡으로 하였습니다. 준형이는 전혀 악기 연주를 못 하였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남아로 태어나 악기 하나는 해야 멋진 사람이지’라는 친구의 말에 독학을 하였습니다. 베이스 기타는 밴드 가운데 전자 기타나 드럼처럼 화려하지 않습니다. 낮은 음이지만 묵묵히 리듬과 박자를 맞추며 가장 기본이 되는, 밴드의 감초 역할을 합니다. 준형이의 삶이 베이스 기타였음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고별식 때 장준형 사무엘이 가장 좋아했던 ‘사랑한다는 말은’ 성가를 불렀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 어둠 속에서도 훤히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그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장례미사에서 육안으로 보기에 베이스 기타는 빈 의자에 그냥 올려져 있었지만, 영안으로 보기에 그 소리가 들렸습니다. 좋아했던 성가처럼 준형이는 우리 곁에서 베이스 기타를 멋지게 연주해주고 있었습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러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이사 45,8). 후반전 세상은 폭우나 소나기를 좋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돈, 명예, 빠름…. 우리가 최고로 여기는 것들은 수없이 많고, 감각적이고, 큰 성과를 얻어야 성공한 것으로 오해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말해주듯,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 의인을 이슬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안산에서 3년의 임기를 마치고 하남의 서부본당으로 소임지가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둥지에서 새로운 신자들과 함께 지내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끄시는지 그 섭리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신앙적 질풍노도의 시기를 아직도 겪고 있고, 앞으로도 겪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기’라는 말은 ‘위험 더하기 기회’라고 하는데 고통이 있으면 은총이 더욱 크다는 진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배우는 중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성경의 맨 끝, 요한 묵시록에서 재미난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묵시2,5). 이 진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천사였습니다. 날개를 잃어버리고 잊어버려 추락했습니다. 날개는 가벼움, 깨끗함, 거룩함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삶의 무게에 너무 짓눌려서, 죄의 더러움으로 얼룩져서,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지’라는 세상과의 타협과 안주로 날개를 부러뜨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천상의 날개를 회복, 부활시켜야 함을 다시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남의 서부본당은 아주 작고 아담한 공동체입니다. 오자마자 성당 벽면의 곰팡이가 먼저 보였습니다. 그래서 누구한테 시키지 않고 소수정예 아이들과 벽면에 하얀 페인트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바라기를 그렸습니다. 해바라기가 햇빛을 보며 고개를 향하고 꽃을 피우듯이, 우리도 빛의 자녀들이기에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성당 벽면에 표현하였습니다. 유치원 같기도 하고, 어설프기도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손수 그린 벽화이기에 모든 신자분이 행복해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일들’을 우리는 합니다. 마무리로 성당 입구 돌판에 ‘천당 같은 우리 성당’이라고 썼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노중호 신부(수원교구 서구본당 주임)문채현2015.04.30

이달의 교계잡지 ▨가톨릭 디다케‘피보다 더 붉게 타오른 신앙’을 특집 주제로 △지도로 알아보는 124위 순교복자 △성지에서 만나는 124위 순교복자 △복자 윤지충과 권상연을 중심으로 한 순교자성월 교리 등을 담았다. ‘본격 조명 한국의 순교자’는 주문모 신부와 강완숙 골룸바를 다뤘다. (서울대교구 청소년국/4500원)▨가톨릭 비타꼰‘함께 느낌 : 비바 파파!’에서는 △말씀으로 읽는 ‘Viva Papa’ △교황님보다 더 소중한 내 이웃 △천주교 신앙인인 것에 감사합니다 △미사 10분 전 등을 실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특집으로 교황 방한 어록과 사진, 메시지까지 다채롭게 엮었다.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4000원)▨경향잡지경향 돋보기에서는 ‘4대강은 다시 흘러야 한다’를 주제로 △4대강 재자연화는 병든 사회의 치유입니다 △그들이 유린한 4대강, 지금은 △애물단지 4대강 사업, 철저한 청산이 필요하다 등을 다뤘다. 대구가톨릭대 평신도신학교육원을 탐방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3300원)▨교회와 역사‘시복식과 교황 방한’이 주제다. 노길명 고려대 명예교수의 ‘시복식과 교황 방한의 의의와 남은 과제’, 124위 시복미사 참관기를 수록했다. ‘지상중계’에서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50주년 기념식과 기념 전시회 이모저모를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3000원)▨그물△정약종 가족 순교사(1) △교황의 방한 기간 메시지들을 주제별 어록으로 다시 살펴보는 ‘한국을 사랑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한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AYD) 등으로 특집을 꾸몄다. (마리아사업회/3000원)▨레지오 마리애레지오 영성으로 다룬 주제는 △순교, 지식과 삶의 거리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레지오 △겸손과 순명의 덕을 기본으로 등이다. ‘신앙의 땅’은 수원교구 수원화성성지(북수동성당)를 찾았다. (한국레지오마리애협의회/비매품)▨말씀지기영한 대역 매일 묵상집. 9월호 영성 에세이는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새로운 순교-말하기보다 들어 주기를 게재했다. (가톨릭출판사/3000원)▨사목정보‘교황 방한의 열매, 어떻게 거둘 것인가?’를 주제로 △교황 방한 이후 본당 사목과 (자연) 증가 신자 대응 방안 △아시아ㆍ한국 청년대회에서 무엇을 배웠나? △124위 시복식은 순교자 현양 운동의 여정을 비추는 횃불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통한 선교 활성화 방안 등을 짚었다. (미래사목연구소/1만 원)▨생활성서‘교회의 현실 참여’에 관한 11개의 질문과 대답이 이번 호 특집이다. 특집 부제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한, 하나인 교회를 위한,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른,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하는’. ‘만나고 싶었습니다’의 주인공은 작가 신현림(로사)씨다. (생활성서사/3900원)▨성서와함께새로봄에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를 주제로 △평화를 희망하는 땅 예루살렘 △예루살렘 성도(聖都)의 어제와 오늘을 담았다. ‘프란치의 영화 피정’이 소개한 영화는 ‘신과 인간’(2010년)이며,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주제는 ‘콜카타, 고통과 사랑의 용광로’다. (성서와함께/3000원)▨소년특집으로 ‘여기는 라디오 방송 현장!’과 ‘「용감한 순교자 윤지충 복자」의 주인공을 만나다’를 게재했고, ‘만화로 보는 한국 순교 복자’(1)는 슬기로운 순교자 강완숙 복녀를 소개했다. ‘아름다운 성지’의 주인공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이다. (가톨릭출판사/4000원)▨야곱의 우물‘표지 이야기’에서는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된 시복식에서 첫선을 보인 124위 순교복자 걸개그림을 그린 김형주(이멜다)씨를 만났다. ‘교회와 사회’ 이번 호 주제는 ‘이윤보다 생명, 멈춰라 의료 민영화!’이며, ‘바오로의 선교여정’이 찾은 곳은 키프로스다. (바오로딸/2800원)▨참 소중한 당신124위 복자 탄생을 특집으로 △124위 시복의 의미와 앞으로의 과제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 124위 시복시성’ 추진 과정 △124위 복자님들의 고귀한 모습을 그리며 △124위 순교 복자 시복식에 부쳐 등을 게재했다. (미션3000/3500원) 남정률 기자 평화신문2014.09.02
![[복음 이야기] (32) 회당(상)](//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4148_1.0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 (32) 회당(상)유배 시절 성전 대신 생겨난 공공장소 예수님과 사도들은 유다인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때 주로 ‘회당’에서 하셨다. 회당은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던 기도의 집일 뿐 아니라 주민의 물질적 생활을 감독하고, 지방 재판관을 임명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유다인 사회의 중요한 공공장소였다.회당은 기원전 6세기 유다인의 바빌론 유배 시절에 성전의 역할을 대신해 생겨났다는 것이 통설이다. 유다인들은 3차례에 걸쳐 바빌론으로 유배됐다. 기원전 597년 신바빌로니아왕국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에제키엘 예언자를 비롯한 유다인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켰다. 이후 이집트군의 개입으로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티나의 몇몇 도시가 바빌로니아에 항거해 독립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고 말았다. 바빌로니아 군은 기원전 587년 18개월간 항거하던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성전을 파괴하고 사제와 관리, 귀족들을 처형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바빌론으로 다시 강제이주시켰다. 이것이 제2차 바빌론 유배이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신바빌로니아왕국은 점령지인 팔레스티나 지역에 자국민을 이주시키고 지역의 가난한 이들에게 땅을 나눠줬다(2열왕 25,12; 예레 39,10). 또 유다인을 다스릴 총독으로 그달야를 임명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달야는 매국노로 간주돼 이스마엘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기원전 582년 신바빌로니아왕국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반란자들을 처단하고 유다인들을 다시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켰다(예레 52,30). 이방인의 땅 바빌론으로 끌려온 유다인들은 당장 부정한 곳에서 어떻게 하느님께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을지를 모색해야 했다. 그래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민족들 사이로 쫓아 버리고 여러 나라로 흩어 버렸지만,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얼마간 그들에게 성전이 되어 주겠다”(에제 11,16)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경신례를 바칠 ‘민가’(예레 39,8)를 정했다. 그리고 예언자들과 랍비들은 이 시기부터 ‘기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일부 랍비들은 성전이 없는 곳에서도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도가 모든 희생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탄후마 레위」)고 가르치기까지 했다.신바빌로니아 왕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는 기원전 538년 키루스 칙령을 통해 바빌론에서 유배 중이던 유다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시켰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은 제단을 다시 세우고 희생 제사를 바쳤다. 하까이 예언자는 성전을 빨리 재건할 것을 유다인들에게 독촉했고, 기원전 446년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복구를 마무리하고 종교ㆍ사회 개혁을 단행했다(느헤 1-6장 참조). 유다인들이 고향으로 귀환했음에도 회당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수가 늘었다.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고 도시에는 여러 개가 있었다. 유다인이면 누구나 자신의 집을 회당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 서기 1세기 로마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79년) 시대 예루살렘에는 480개의 회당이 있었고 팔레스타인 지역 밖으로 흩어져 있던 유다인 거주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에는 1000개가 넘는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복음서에는 나자렛(루카 4,16)과 카파르나움(마르 1,21) 회당이, 사도행전에는 다마스쿠스(9,2)와 살라미스(13,5),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13,14), 이코니온(14,1), 테살로니카(17,1), 베로이아(사도 17,10), 아테네(17,17), 코린토(18,4), 에페소(18,19)의 회당이 등장한다.회당은 주택지대보다 높은 데 세워졌다. 랍비들은 “아무도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집을 지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동시에 정결례를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시냇물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그 좋은 예가 ‘성문 밖 강가’(사도 16,13)에 있던 필리피 회당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곳에서 티아티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와 그의 온 집안 식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다.회당 건물은 소박했다. 양식은 지방에 따라 달랐으나 통상 3개의 입구가 있고 정면에 계단이 있었다. 카파르나움에서 발굴된 회당은 주랑에 둘러싸인 뜰이 있고 중앙에는 정결례용 수반이 있고, 바깥벽에 작은 방들이 딸려 있었다. 이 회당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르치셨던 회당(마르 1,21)을 기초로 200년 후에 증축된 건물이다. 이 회당의 맨 아랫단에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회당의 검정 현무암이 남아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