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노동자들 위한 복합문화센터 마련'인천교구 노동자센터' 개소, 쉼터 심리상담실 카페 등 갖춰 365일 누구나 와서 휴식하고 피정할 수 있는 쉼터부터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소성당까지, 거기에 웬만한 옷가게 부럽지 않은 의류매장에, 마음껏 담소를 나누며 희망찬 앞날을 이야기할 카페도 있다. 각종 노동문제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인천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이 같은 공간이 생겼다. 인천교구는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481-4에 복합 문화센터를 방불케 하는 '인천교구 노동자센터'를 마련하고, 10월 31일 교구 총대리 정신철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했다. 교구 노동사목부(담당 김윤석 신부)가 3년여에 걸쳐 약 15억 원을 들여 조성한 노동자센터는 연면적 약 165㎡, 건축면적 약 730㎡에 지상 1~6층 규모의 사목공간으로, 심리카페ㆍ맘에 드는 가게(마을기업)ㆍ강당ㆍ교육실ㆍ사무실ㆍ노동 및 심리상담실ㆍ쉼터 등을 갖춰 다양한 분야에 걸쳐 노동자들을 보살필 수 있는 공간이다. 정신철 주교는 축복식에서 "전 노동사목부 담당 장동훈 신부께서 3년 전 처음 노동자들의 인성과 영성계발을 위한 센터 건립 제안서를 들고 왔을 때 꼭 하고 싶은 일임에도 비용 마련 문제 탓에 고심했던 기억이 난다"며 "기도의 응답으로 마련된 이곳이 40년 가까이 교구가 일궈온 노동사목의 중심으로 거듭나 우리 사회에 공동선의 빛을 실현하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사목에 힘써온 교구는 2002년부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노동자 주일'을 제정해 고된 노동자들을 위로하고 있는데, 이날 노동자센터를 조성함으로써 다시 한 번 노동사목에 새 전기를 가져오게 됐다. 교구 노동사목부는 센터 건립을 통해 경기 부천시ㆍ인천 부평구ㆍ주안동 등에 흩어진 노동자들을 위한 공간과 업무를 한데 모은 것은 물론, 센터에 상주하게 될 심리상담가와 노무사를 통해 더욱 전문적인 노동ㆍ법률ㆍ심리상담과 교육을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나아가 성경모임과 동아리, 피정 등 신앙생활까지 돌볼 수 있게 됐다. 센터는 노동자들을 위해 상시로 강당, 교육실, 쉼터 등을 대여해 줄 계획이다. 김윤석 담당신부는 "지금도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해 더욱 전문적이고 폭넓은 사목으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돕는 총체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문의 : 032-865-6792, 인천교구 노동자센터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cpbc2013.11.05
![[성경 속 궁금증] (20) 성경에서 문학 유형 이해가 왜 중요한가](//cpbc.co.kr/CMS/newspaper/2012/01/rc/401610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20) 성경에서 문학 유형 이해가 왜 중요한가진정한 메시지 올바로 알기 위해 17세기 교회는 성경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천동설을 주장했다. 그림은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종교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1616년 교회가 '지구는 돈다'고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단죄할 때 다음 성경구절을 근거로 제시했다. "주님께서 아모리족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으로 넘겨주시던 날, 여호수아가 주님께 아뢰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외쳤다. '해야, 기브온 위에, 달아, 아얄론 골짜기 위에 그대로 서 있어라'"(여호 10,12). 당시 교회는 성경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지구를 중심으로 해와 달이 돈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이후 교회는 지동설을 단죄한 것에 대해 잘못을 인정했다. 성경, 특히 구약의 많은 문장들은 여러 가지 표현양식으로 기록됐다. 그렇기에 우리가 성경의 글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글의 문학 유형을 올바로 알아야만 한다. 이는 시와 소설, 논문, 보고서 등의 글이 서로 다른 특성을 가졌기에 각각의 글들이 가진 문학 유형을 제대로 알아야만 그 글들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은 2000~3000년 전 오늘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기록된 책이다. 그렇기에 이 글들을 오늘날의 시선과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면 그 뜻을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또 성경은 사건 현장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자신들이 서 있는 현재 위치에서 조상들에게서 전해 내려온 창세기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기록한 것이다. 또 창세기와 모세오경은 일종의 회고에 의한 신앙체험 고백 이야기를 당시 민담과 설화 형식을 빌어서 기록한 것이다. 모세오경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민족으로 등장하는 초기에 겪은 역사적ㆍ종교적 체험을 확고한 기반으로 한다. 역사적 사건이 먼저 있었고, 후대에 구전과 기록으로 자신들의 체험을 전달하려 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한 사료들은 긴 구전 전승 과정을 거치면서 지역, 사건, 인물에 따라 내용이 추가되기도 하고 빠지기도 했으며, 때로는 해설을 덧붙이는 등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다. 저자들은 이런 전승 사료들에 다시 지역, 사건, 인물에 따라 기원적 의미를 덧붙였고, 그 시대에 쓰이던 문학 방식을 이용해 자신들 신앙을 고백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 영감을 받은 성경 저자가 역사적 진리를 토대로 한 인물, 사건, 이야기를 자기 시대와 연관지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에서 역사적 진리를 발견하는 가운데, 늘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또 성경의 모든 문학 유형은 보편적 인간 가치를 알려주고 있으며, 성경 속 이야기들은 민담, 설화 형식을 이용해 하느님과 그 앞에 선 인간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의 문학 유형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와 전달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퇴사자22012.01.11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7>나의 살던 고향(마르 6,1-6)](//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6465_1.0_titleImage_1.jpg)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나의 살던 고향(마르 6,1-6)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메시아라고?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성경 말씀이 이뤄졌다는 예수님 말씀을 믿지 않았다. 동정 마리아는 천사의 전갈에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다. 사진은 나자렛 주님탄생예고 대성당 모자이크화. [CNS 자료사진]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을 찾아가 보자. 나자렛은 갈릴래아 지역에 있다. 팔레스티나는 유다, 사마리아, 갈릴래아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갈릴래아는 어떤 곳일까. 세 지역 중 가장 북쪽에 있는 갈릴래아는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다. 남쪽은 비가 많이 내려 땅이 비옥해 농사일을 주로 한다. 밀과 보리, 포도와 석류가 많이 난다. 호수가 있어 어업도 많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 갈릴래아는 헤로데 임금의 아들 헤로데 안타피스(기원전 4년~ 기원후 39년)가 다스리고 있었다. 기원후 70년쯤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완전히 함락된 후 갈릴래아는 유다교 학문의 중심지가 됐다.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의 탄생지는 베들레헴, 삶의 터전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공적 직무 수행의 중심지였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기적은 갈릴래아에서 가장 많이 행하셨다. 예수님 제자도 대부분 갈릴래아 출신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리래아로 가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 곳도 갈릴래아에 있는 산이었다. 이처럼 갈릴래아는 예수님과 밀접한 곳이다. 나자렛은 '(꽃이) 만발하다', '감시하다, 보호하다'는 뜻이다. 구약에서는 나자렛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신약에서는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구약성경에서 나자렛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엘이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하고 반발한다. 메시아는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나자렛 출신이라고 밝히는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과 다름없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내가 나자렛 출신이라고 하니, 메시아로 여기지 않았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중요한 두 시기를 보내셨다. 잉태와 아동기, 그리고 어른이 되어 사람들을 가르치신 곳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에서 하혈하는 여인과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신 후 제자들과 나자렛으로 이동하셨다. 나자렛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사시는 곳이다. 예수님이 고향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하셨다. 예수님이 고향을 더 이상 방문하지 않으신 것은 고향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쯤에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을 요셉의 아들로 여겼다"(루카 3,23).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에 공생활을 시작하셨고, 그 전에는 줄곧 나자렛에 사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여러 곳을 다니며 군중에게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도록 기적을 행하셨다. 그런 분이 고향에 가고 싶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기쁜 마음으로 고향에 가셨다.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스승으로 가셨다. 첫날은 안식일이었다. 유다인들에게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배하는 중요한 날이다. 고향에 가신 예수님은 회당에 가셨다. 예수님은 예언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을 봉독하셨다. 예언서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하느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이가 바로 메시아라고 밝히고 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같은 뜻의 그리스어다. 예수님은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이사 61,2). 은혜로운 해는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시간 △하느님과 화해가 이뤄지는 시기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치유와 자유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 시간이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것이 메시아의 역할이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기름부음 받은이가 나라고 밝히신다. 이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하느님의 은총이 예수님을 통해 드디어 주어졌음을 뜻한다. 예수님은 "오늘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구나'라며 기뻐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마르 6,2-3) 하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다.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3) 하면서 못마땅해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하며 이름을 나열하고,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라며 믿을 수 없어 했다. 부모와 친척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은 자기들과 예수님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의미다. 너무 잘 알던 이가 남다른 권위와 능력을 지니고 나타난 사실이 못마땅한 것이다.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유명한 율법학자의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부잣집 아들이었다면…. 완전히 다르게 대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내게 오신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맞을 것인가?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방송시간 : (화) 오전 8시, (수) 새벽 1시/오후 1시 40분, (금) 밤 8시, (토) 밤 10시 ※교재 문의 : grace@paul ine.or.kr, 02-944-0945 퇴사자22013.07.30
![[가톨릭교회교리서]<46>십계명 : 첫째 계명(하)](//cpbc.co.kr/CMS/newspaper/2014/04/rc/504681_1.0_titleImage_1.jpg)
[가톨릭교회교리서]십계명 : 첫째 계명(하)부적 지니고 점 보는 일 첫째 계명 거스른다첫째 계명은 온갖 유형의 미신이나 우상숭배를 금한다. 교회는 그러나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사진은 지난해 브라질 세계청년대회에서 성모자상을 모시고 가는 청년들. 【CNS】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2110~2128항) 하느님만을 섬기라는 첫째 계명은 또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금합니다. 따라서 미신과 불경은 모두 첫째 계명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미신(2111항) 미신은 쉽게 말해 헛되고 바르지 못한 믿음이나 그런 믿음의 실천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경배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미신 행위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지적합니다."미신은 또한 우리가 참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의 형태로 치장될 수 있다.…기도나 성사들이 요구하는 마음가짐을 경시하면서 그 외적인 요소들에만 효력을 부여하는 일도 미신에 빠지는 것이다"(2111항). 우상숭배(2112~2114항)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를 거부하고 다른 신, 곧 우상을 모시는 것은 첫째 계명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단지 이교(異敎)의 그릇된 예배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신격화하는 것 또한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잡신이나 마귀(예를 들어 악마 숭배), 권력, 쾌락, 인종, 조상, 국가, 재물 등 인간이 하느님 대신에 어떤 피조물을 숭배하고 공경한다면 이는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2113). 하느님보다는 하느님이 아닌 어떤 것을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점과 마술(2115~2117항) 첫째 계명은 또한 모든 형태의 점복을 물리치기를 요구합니다. 사탄이나 마귀들에게 의뢰하는 것,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 미래를 꿰뚫어 본다며 헛되이 추측하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탄생 별자리를 믿거나 점성술이나 손금에 의지하거나 무당(점쟁이)에게 물어보는 일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역사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믿으며 하느님께 신뢰하며 자유와 책임의식을 갖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워야겠지만 점복을 통해 미래를 미리 내다보거나 장악하려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만 드려야 하는 영예와 존경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마술이나 요술 행위 역시 경신덕에 크게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부적을 지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경(2118~2122항) 말이나 행위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 신성 모독죄와 성직 매매가 모두 불경에 해당하는 죄들입니다. 신성 모독은 성사와 전례행위, 그리고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성직자, 수도자)과 물건(축복한 십자가), 장소(성당) 등을 모독하거나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모독하는 것은 중죄가 됩니다. 성직 매매는 영적인 것을 금전으로 사고 파는 행위를 말합니다. 영적인 선물은 자기 것이 아니기에 마치 자기가 주인인 듯이 행세하는 것은 첫째 계명을 거스릅니다. 교회법은 이렇게 규정합니다."성직자는 성사 집전을 위해 관할권자가 정한 봉헌금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못하며, 가난한 이들이 가난 때문에 성사의 도움이 박탈되지 아니하도록 항상 주의하여야 한다"(교회법 제848조). 무신론(2123~2126항) 무신론의 형태는 다양합니다만, 하느님의 존재를 배격하거나 거부한다는 면에서 경신덕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무신론이 생겨나고 확산되는 데는 신앙인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신앙인들이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거나 교리를 잘못 제시하거나 종교, 윤리, 사회 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리기 때문"(사목헌장 19항)입니다. 흔히 무신론은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신 긍정이 인간의 존엄성에 조금도 배치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인간 존엄성은 바로 하느님 안에 기초를 두고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불가지론(2127~2128항) 불가지론은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입장을 말합니다. 불가지론은 여러 형태를 띠는데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초월적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는 형태가 있는가 하면 하느님의 존재 증명이 불가능하다며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형태도 있습니다. 불가지론은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을 찾는 것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무관심주의나 윤리적 양심의 게으름 등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 불가지론은 실천적 무신론이 됩니다. 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새기지 마라(2129~2132항) 구약성경은 "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어 타락하지 않도록 하여라"(신명 4,16)라고 지시합니다.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 이유로 개신교 신자들은 성당에 성모상이 있는 것을 보고 우상숭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구약시대부터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상징적으로 가리켜 주는 형상들을 만들도록 명령하시기도 합니다. 구리뱀을 만들라는 말씀이나(민수 21,4-9), 계약의 궤와 커룹을 만들라는 말씀(탈출 25,10-22)이 그러합니다. 8~9세기에 일어난 성화상 논쟁(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을 그린 그림을 공경하는 것과 관련한 논쟁)과 관련, 교회는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에 맞서 그리스도뿐 아니라 천주의 성모, 천사와 모든 성인의 성화상 공경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성화상 공경은 우상을 금지하는 첫째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를 공경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그림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표상하는 분 곧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 또는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유념할 것은 성화에 표하는 공경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정리=이창훈 기자 백영민2014.04.10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4>십계명과 사회교리<6>교회,](//cpbc.co.kr/CMS/newspaper/2014/02/rc/497110_1.0_titleImage_1.jpg)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십계명과 사회교리교회,사회교리 가르침, 더불어 사는 삶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성당 순례를 빼놓고는 거의 볼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는 유럽은 하느님 창조물의 결과인 자연경관의 빼어남보다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과 인간의 인공적 구조물이 어우러진 곳이다. 사물에 깃든 그리스도교 신앙 유학 시절, 로마로 성지순례나 여행을 오는 사람들을 가끔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로마 안내를 하다 보면 주로 찾아가는 곳이 성당이었다.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기에 별 불만이 없었지만 가끔 신자가 아닌 분들도 있었다. 그중 신자가 아닌 지인이 불평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신부님, 로마에는 성당 아니면 갈 곳이 없나요? 저는 신자도 아닌걸요." 나는 "로마에는 성당 빼고는 더는 가 볼 만한 곳이 없다"고 대답했다. 주요 관광 명소도 대부분 성당이었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가더라도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품이 거의 없었다. 중세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높이에서 미술 작품들을 창작했다.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 수많은 중세 미술가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관과 신앙적 체험 안에서 자신의 작품에 정신을 투영했고 예술혼으로 승화시켰다. 유학 시절, 어머니께서 아들 신부를 보러 오셔 성 베드로 대성당 순례를 하신 적이 있다. 머물던 수도원에서 식사하던 중 이탈리아인 노사제께서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고 어머니께 물으셨다. 어머니는 뜻밖에도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성당 중앙의 비둘기 모습이 가장 마음에 와 닿네요"라고 답하셨다. 어머니는 성당의 규모나 미술 작품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셨고, 스테인드글라스의 비둘기 모습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신 것 같았다. 인간의 인공적인 미술품 속에 녹아든 작가의 노고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모습을 찾아내신 것이다. 평생을 평범하게 신앙으로 살아오신 어머니께서는 어떤 위대한 미술 평론가보다 더 아름답고 훌륭한 소감을 말씀하셨다. 사제인 나 역시 처음 유학을 와서 대성당 안에 자리하고 있는 예술 작품들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마음을 뺏겼었는데, 어머니는 사제인 나보다 더 나은 신앙인이셨다. 성당 안에 자리한 미술 작품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신 것이다. 교회, 하느님께서 인간과 머무는 곳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부터 교회는 신자를 교육할 목적으로 성당 내에 수많은 벽화를 그려 장식했다. 예술적인 차원이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교육할 목적이었다. 작품 대부분은 성경의 여러 이야기나 성인들의 삶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일종의 시청각 교육이었다. 문자를 아는 이들은 소수 지배계층이었고 대중은 그러지 못했다. 따라서 교회는 대중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심어주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미술 작품과 음악을 사용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 미술, 음악, 건축 등 대부분의 중세 예술 작품은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화려하게 성전을 꾸미는 것이 단순히 외적인 부분만 아니라 개개인의 영적인 차원까지도 배려한 꼼꼼한 조치였다. 오늘날처럼 교회 밖에서도 즐길 거리가 많은 사회 안에서는 교회라는 공간적 장소가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곳이다. 한 교회 안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형제 자매들이 모여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며, 공동체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오늘날에도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성적 차원의 필요성은 오늘날에도 교회가 세상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과 깊이 연관되어 나타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분리시킨 채 살아갈 수 없으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니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인간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통해 영적인 것과 세상의 것들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얻는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함께 머무시는 구체적인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추상적이거나 영적인 차원을 넘어서 인간 세상과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 함께 존재하는 곳이다. 따라서 인간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협력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60항 참조).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하는 곳이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은 세상 안에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사회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회교리가 우리 인간 사회를 더욱 풍요롭고 충만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간추린 사회교리」 62항 참조).백영민2014.02.18
소통과 친교로 '나눔교리' 익혀부산교구 청소년사목국, CUM(꿈) 캠프캠프 참가자들이 소통을 주제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부산교구 청소년사목국 부산교구 청소년사목국(국장 권동국 신부)은 7월 22~24일, 29~31일 두 차례에 걸쳐 부산 남천동 푸른나무 교육관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나눔과 소통'을 주제로 캠프를 열었다. 캠프는 청소년사목국이 본당 중고등부 학생 눈높이에 맞춰 발행하는 월간지 'CUM'(꿈)의 활용도를 높이려는 취지로 기획됐다. 주일학교 교재로도 쓰이는 CUM은 복음을 읽고 나누는 나눔교리와 게임을 통해 교리를 익히는 별난교리, 전례 상식, 여행지 소식 등을 담고 있다. 캠프에 함께한 170여 명의 청소년과 교사들은 2박 3일 동안 마당극과 퍼포먼스 등을 함께하며 자신을 알아가고, 표현하며, 상대와 소통했다. 잡지에 실린 나눔교리, 즉 소통과 나눔으로 교리를 몸으로 익히는 시간도 가졌다. 이병준(스테파노, 덕계본당) 교리교사는 "본당 교리 시간에는 성경을 읽고 문제를 푸는 등 교사와 학생과의 소통이 중심이었는데, 이번 캠프는 학생들이 배운 것을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나누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청소년사목국 중고등부 담당 박난묵(안드레아)씨는 "나눔교리를 어려워하는 청소년들의 이해를 높이고, 잡지를 활용한 본당 교리교육을 활성화하고자 캠프를 열고 있다"고 설명했다. CUM은 부산교구는 물론 타 교구에서도 구독할 수 있다. 문의 : 051-0629-8742 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cpbc2013.08.06

걷기ㆍ빈그릇 식사로 가톨릭 영성 체험서울 우리농, 남양주 슬로푸드 국제대회서 '밥과 영성' 진행남양주 슬로푸드 국제대회에서 열린 천주교 걷기명상과 빈 그릇 식사 체험 참가자들이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다. 이힘 기자 세상이 빨리빨리를 외치며 속도를 높여갈 때 '느리게''천천히' 먹거리의 참 의미를 생각하자는 것이 '슬로푸드' 정신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체육문화센터에서 열린 2013 남양주 슬로푸드 국제대회에서 '음식에 대한 종교적 깨달음'을 얻는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대교구 우리농운동본부(본부장 조해붕 신부)는 3일 체육문화센터 야구장에서 '밥과 영성'을 주제로 걷기명상과 빈 그릇 식사 체험을 진행하고, 50여 명의 참가자들이 먹거리에 대한 가톨릭교회 영성을 체험하도록 이끌었다. 진행자로 나선 서울 환경사목위원회 생태유아교육소위 김영주(요한어린이집 원장) 수녀는 "밥이 하늘이다. 한 톨의 쌀, 한 그릇의 밥은 농부의 땀일 뿐 아니라 흙과 벌레, 물과 구름 같은 자연이 함께 만든 우주의 공동작품"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밥을 먹는 행위는 이들의 우주적 생명을 먹는 거룩한 의식이며, 우리 몸은 이러한 수많은 요소로 구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김 수녀는 이어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빵을 나눠 주신 성찬례와, 먹고 남은 빵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차는 기적 등 성경에도 먹거리에 관한 부분이 많이 있다"면서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듯, 우리는 먹거리를 통해서도 주님 뜻을 헤아리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이날 야구장에서 주변 산책로를 따라 자연생태공원까지 1㎞가량을 걸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맞으며 풀벌레 소리와 나뭇잎 밟는 소리 등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점심때는 모든 음식을 남기지 않고 비우는 빈 그릇 식사 체험을 했다. 빈 그릇 체험이 인상 깊었다는 이경희(히야친타, 서울 목3동본당)씨는 "원래 음식을 빨리 많이 먹는데, 양을 조금 줄이고 천천히 먹으니 많이 먹었을 때보다 배가 부르다"며 "우리 모두 여유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조금 줄여 먹으면 음식물 쓰레기도 생기지 않을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cpbc2013.10.08
![[성경 속 궁금증] 35. 이스라엘 백성은 왜 성막을 만들었을까?](//cpbc.co.kr/CMS/newspaper/2012/06/rc/41685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35. 이스라엘 백성은 왜 성막을 만들었을까? 하느님 만나 대화하는 거룩한 장소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세운 성막.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거나 움직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신들에게는 저마다 다스리는 관할 영역이 있으며, 그곳을 벗어나면 힘을 쓸 수 없다고 믿었다. 또 이들은 신전을 만들어 신들의 장소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를 분리시켰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느님을 위한 공간인 성막(聖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성막은 당시 근동에서 갖고 있던 신전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 시나이 광야에 도착했을 때,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사십일 동안 머무르며 하느님에게서 십계명이 적힌 돌판과 성막에 관한 법규를 받는다. 성막에 관한 법규는 성막을 짓는 방법부터 그 안을 장식하는 방법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너는 가늘게 꼰 아마실, 자주와 자홍과 다홍 실로 짠 천 열 폭으로 성막을 만들어라. 커룹들을 정교하게 수놓아 그 폭을 만들어야 한다.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 암마, 각 폭의 너비는 네 암마로 하되, 폭마다 치수를 같게 하여라. 다섯 폭을 옆으로 나란히 잇고 다른 다섯 폭도 옆으로 나란히 이어라…"(탈출 26장 참조). 성막은 내부와 외부를 나눠 거룩한 곳과 거룩하지 않은 곳을 구별해놓았다.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쪽 하나밖에 없었고, 이 문을 통해서만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막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공간으로, 이스라엘 최초 성막은 천막 형식으로 운반이 가능했다. 이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동할 때나 행진할 때 성막은 늘 그 가운데 있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 중심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성막은 하느님 현존의 증표였고,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성막을 매개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다. 성막이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중심부에 위치했던 것은, 당시 신전들이 사람이 사는 거주지와 떨어진 곳에 건립된 것과는 대조된다. 성막에는 '하느님 말씀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사상이 깃들어 있다. 유다인들은 예로부터 말에는 힘과 인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무한한 능력을 지닌 하느님 말씀은 반드시 이뤄진다고 믿었다. 유다인들이 성막을 세운 목적은 하느님과 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종교는,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백성은 그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데서 형성된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무엇보다 대화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막은 사람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또 성막은 신앙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사람들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막의 영적 의미는 이스라엘만이 아닌 모든 인간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막은 교회의 예표이며, 하느님과 대화하기 위해 만나는 장소이다. 퇴사자22012.06.05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9>순교자, 두 개의 천국을 살다간 사람들](//cpbc.co.kr/CMS/newspaper/2014/03/rc/500225_1.0_titleImage_1.jpg)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순교자, 두 개의 천국을 살다간 사람들 아프리카 선교사 모임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케냐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신부님에게 나이로비 쇼핑몰 테러사건에 대해 들었다. 테러범들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었는데 쇼핑몰 안에 있던 인질 중에 이슬람교도와 아닌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 신앙을 물었다고 한다. 인질들에게 코란을 읽게 하고, 마호메트에 대해 질문해 제대로 답하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고 한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희생자 중 몇몇은 테러범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을 떳떳이 밝히고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I'm Christian!"(나는 그리스도교인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순간이 오면 과연 가톨릭 신앙을 떳떳이 고백하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신분 초월한 신앙 선조의 형제애 이처럼 가톨릭 신앙을 고백한 이들이 우리 신앙 선조들이다. 그들은 200년 전 수차례의 모진 박해를 통해 아무런 죄 없이 천주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다. 세상 불의와 싸우며 신앙을 고백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난 2월 8일, 평화방송 라디오를 통해 교황청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초기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을 결정했다는 바티칸 통신의 소식을 들었다. 124위 시복 결정은 사제인 나에게도 큰 기쁨인 동시에 한국 가톨릭교회의 큰 기쁨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신앙의 자유가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지만, 순교자들은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신앙 자유를 위해 싸웠다.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면서까지 신앙을 지켰을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용기는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초기 순교자들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부터 그들의 삶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하느님을 알게 됨으로써 얻게 된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재산도, 가족도, 권력도 하느님을 만나서 얻게 된 진정한 기쁨을 대체하지 못했다. 124위 중 황일광(시몬)의 삶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1757년 충청도 홍주에서 천민으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몹시 어렵게 보냈다. 그러나 1792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그의 모든 삶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황일광은 입교 후 상상도 못한 대접을 신자들에게 받았다. 신자들은 그가 백정임을 알았지만 똑같이 대했다. 심지어 양반 집 방안까지 초대받아 들어갔다. 신분제도가 철저했던 조선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황일광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교우들에게 감동해 살아생전 두 개의 천당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울 정약종(아우구스티누스)의 집 근처에서 살다 체포됐다. 관헌들이 무자비한 형벌을 가하며 배교할 것을 강요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진 고문에 다리가 부러져 들것에 실려 고향인 홍주로 보내졌지만 명랑함을 잃지 않았다. 결국, 1802년 1월 30일 고향인 홍주에서 참수를 당했다. 평상시 농담처럼 말했던 것처럼 두 번째 천국으로 갔다. 신분제도를 뛰어넘는 가톨릭교회의 보편적 형제애는 황일광이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게 했고, 죽어서도 천국을 살게 했다. 그리스도인, 욕심과 거짓을 버려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사도 10,34; 로마 2,11; 갈라 2,6; 에페 6,9 참조)는 성경 가르침은 시대를 넘어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지닌 존엄성은 인간이 다른 사람 앞에서 갖게 되는 존엄성의 기초가 된다. 또한 인간 존엄성은 인종, 국가, 성별, 출신, 문화, 계급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평등과 우애의 궁극적인 바탕이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144항 참조). 순교자 황일광은 출신이나 계급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형제애를 통해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살았다. 이 세상 안에서 이미 천국을 맛보았던 것이다. 초기 신앙 선조들의 사상은 돈, 신분, 학벌, 직업 때문에 차별화돼 가는 오늘 세상에 다시 한 번 일침을 놓는다. 만일 우리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의지하여 살며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욕심과 거짓을 던져 버려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이 하느님 뜻에 맞는 세상으로 변화하길 바란다. 세상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과 다르게 살아간다고 말했지만, 실제는 세상 여러 가지 욕심에 마음이 팔려 점점 더 세속화돼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부끄럽게 다가왔다. 나도 순교자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찾는 기쁨의 삶을 지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총칼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상황에서 과연 진리와 정의 편이 돼 내 전 존재를 걸 수 있을까?백영민2014.03.11
![[생활속의 복음] 버려야 할 것과 채워야 할 것](//cpbc.co.kr/CMS/newspaper/2014/03/rc/500228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버려야 할 것과 채워야 할 것사순 제2주일(마태 17,1-9)조재형 신부 (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구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뜻을 따르고, 하느님과 함께 가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그릇된 길로 가려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행복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행복한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무엇일까요? 행복은 원하는 것이 채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돼야 행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다음은 문화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자금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안정된 직업이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이 예쁘고 명석하게 자라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행복일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원한다면 바로 이와 같은 행복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행복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탄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편안한 의식주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능력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지위와 명예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행복도 좋지만 또 다른 행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또다른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채워져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비우고 버리고 떠나는 행복입니다. 인류 역사에 새로운 빛을 밝혀준 분들은 채워서 얻는 행복이 아니라, 비우고 떠나는 행복을 통해서 빛을 보여줬습니다. 석가모니는 화려한 궁궐을 떠났습니다. 왕이 될 수 있는 지위와 명예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보리수 아래에서 7년 동안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비우고 떠나야 얻는 행복을 깨우쳤습니다. 그것이 불교의 시작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편안하고 정들었던 땅을 떠났습니다. 비우고 버려서 새로운 행복을 얻게 됐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시작입니다. 거친 광야에서 뜨거운 햇빛 아래 목이 마를 수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씨앗은 부서지고 깨져야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듯이, 아이는 따뜻하고 편안한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만 하나의 인격체가 돼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듯이,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명예와 권력을 모두 버리고 떠났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머물 수 있는 아름답고 순결한 '타볼 산'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거친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고, 죽음의 길일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갈매기 조나단은 무리와 어울려 거친 바다에서 먹이를 잡고, 하늘을 나는 것이 삶의 전부라는 것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높이, 좀 더 멀리 날고 싶어했습니다. 갈매기는 주린 배를 채우는 일, 동료들과 어울려 하늘을 나는 일도 좋지만 더 높은 세상, 더 먼 세상을 향해 동료들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느낄 수 없는, 전에는 배울 수 없었던 참된 비행의 기쁨을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떠나지 않고 비우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인내, 겸손, 사랑, 희생, 헌신, 나눔'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그러한 것들로 채우면 우리는 좀 더 가벼워져서 더불어 살아가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천상의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버리고 비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분노, 욕심, 이기심, 질투, 시기,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을 버릴 줄 알면 우리 영혼은 맑고 순수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게 되고, 이해받기보다 이해하게 됩니다.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비움의 영성, 버림의 영성, 떠남의 영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채워야 할 것들을 너무나 쉽게 버리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정작 버리고 비워야 할 것들은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2티모 1,9-10). 바오로 사도는 왜 우리가 비우고 버려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불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cpbc2014.03.11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28>기도(2)](//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5298_1.0_titleImage_1.jpg)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기도(2)믿음의 문으로 들어가 성령에 힘입어 기도기도를 하려면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에는 기도의 길잡이들이 많다. 사진은 성체를 현시한 채 기도를 바치고 있는 신자들. [CNS 자료사진]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 10).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기도에 대해 계속 살펴봅니다. 기도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도를 하려면 원의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고픈 또는 기도해야겠다는 원의가 없다면 기도가 나올 수 없습니다. 또 기도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전통인 성전을 통해 교회 안에서 하느님 자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성령께서는 기도하는 마음 속에 솟아 올라 영원히 살게 하는 살아 있는 물이십니다(2650~2652항, 2661항). ◇살펴봅시다 ㉠ 기도의 원천(2652~2662항) : 기도의 원천으로 먼저 하느님 말씀을 꼽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자주 읽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얻도록 권고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이뤄지도록 기도가 따라야 함을 명심해야"(2655항)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하느님 말씀을 읽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전례 또한 기도의 원천입니다. 신자들은 전례가 거행되는 동안에만 아니라 그 후에도 기도를 통해서 그 전례를 내면화하고 그 전례에 동화됩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덕도 기도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문을 통해서 기도 안으로 들어갑니다. 또 성령께서는 희망을 갖고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나아가 교회의 기도와 개인의 기도는 우리 안에 희망을 길러줍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이 사랑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응답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기도의 원천입니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는 이는 기도의 정상에 도달"(2658항)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특별히 파스카 신비 곧 성체성사에 참여할 때에 기도를 배우지만, 또한 매일매일의 사건 속에서 언제나 우리는 기도를 샘솟게 하시는 주님의 성령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제도 아니요 내일도 아닌 바로 오늘"(2660항) 아버지를 만납니다. 매순간 일어나는 일들 안에서 기도하는 것, 일상의 사소한 상황들에 기도가 배어들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기도의 길(2663~2682항) : 공동체가 바치는 기도이든 개인이 바치는 기도이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가 돼야만 하느님 아버지께 다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의 길입니다. 우리는 또 교회의 기도를 통해서 주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교회의 기도는 성부께 드리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많은 호칭들이 있지만, 그 모든 호칭들은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라는 이름으로 집약됩니다. "예수님을 부르면서 기도드리는 것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요,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을 부르는 것"(2666항)입니다. 하지만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할 때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기도의 길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날마다, 특별히 모든 중요한 활동을 시작하고 마칠 때 성령께 간청하라"(2670항)고 권고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성령과 일치할 때 교회의 기도가 됩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기도의 길이시라면,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그 길의 '이정표'이십니다. 마리아는 "완벽한 기도자, 교회의 표상"(2679항)이십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기도할 수 있고, 나아가서 마리아께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의 기도는 교회의 기도를 떠받쳐 주며, 교회의 기도는 희망 안에서 마리아의 기도와 일치합니다. ㉢ 기도의 길잡이(2683~2696항) : 기도의 길잡이로 우선 기도의 수많은 증인들을 들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가 '성인'으로 인정하는 이들의 모범적 삶과 글과 기도들은 오늘에까지 살아 있는 기도의 전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 교회의 역사가 이어오면서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다양한 영성이 발전해 왔는데, "그리스도교의 갖가지 영성은 기도의 살아 있는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며 신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안내자"(2684항)입니다. 기도를 가르치는 첫째 자리는 가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그래서 '가정 교회'라고 부릅니다. 가정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교회'로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성직자, 수도자들도 기도의 봉사자들입니다. 교리교육, 기도모임이나 기도학교 그리고 영성지도 또한 기도의 길잡이들입니다. ◇알아둡시다 그렇다면 기도를 하는 데 적합한 장소는 어디일까요. 교리서는 이렇게 제시합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당은 본당 공동체가 바치는 전례 기도에 적합한 곳이다. 본당은 또한 성체 안에 실제로 현존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흠숭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이기도 하다"(2691항). 개인 기도를 드리기 위한 장소로는 성경과 성화들이 비치돼 있는 '기도의 골방'이 있으면 좋습니다. 특히 신자 가정에 기도를 드리는 이런 작은 공간이 있다면 가족의 공동 기도를 촉진시켜 줍니다. 수도원이 있는 지역의 경우에는 수도공동체가 신자들과 함께 성무일도(시간전례)를 드리도록 노력할 소명이 있습니다. 지상에서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여정을 상기시켜 주는 성지순례는 전통적으로 기도를 쇄신하게 하는 아주 좋은 기회로 여겨져 왔습니다. 순례자들에게 성지는 그리스도교 기도를 체험하는 특별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퇴사자22013.07.23

산상설교 통해 새로운 계명인 '참행복' 선언[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12. 참행복 선언기념성당예수께서 산상설교를 하신 장소에 지어진 참행복 선언 기념성당은 여덟 가지 참행복을 상징해 팔각 모양으로 아담하게 지어져 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 5,1-12; 루카 6,20-23) ▨ 예수의 초상ㆍ그리스도인의 윤리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통해 새로운 계명으로 선포하신 '참행복 선언'이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산상설교는 넓은 세상을 향해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면서 하시는 말씀이다. 이 산상설교는 제자가 되라고 요구하시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산상설교의 말씀은 예수를 뒤따름으로써만, 그분과 길을 함께 걸음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고 또 실제의 삶으로 옮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베네딕토 16세는 덧붙여 "누군가 하느님을 근거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또 예수와 함께 길을 걸으면, 그때부터 그는 새로운 척도를 기준으로 삼아 살게 되고 '종말에 가서 이루어질 것', 이 다음에 올 것이라 하더라도 그중 일부는 지금부터 현실적인 것이 된다. 예수께서 참행복 선언에서 제시하시는 역설들은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처해있는 참된 상황을 표현한다"(「나자렛 예수」 1권 4장 참조)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참행복 선언은 '그리스도인의 윤리'다. 선언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내면이요 그분의 초상이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가난하시며, 온유하고 겸손하며 의로운 분으로 평화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또 마음이 깨끗하여 자비로워 하느님을 위해 고통당하는 분이시다. 참행복 선언은 곧 그리스도 자신을 드러내신 말씀이다. 따라서 이 선언은 교회와 그리스도인 삶의 지침, 바로 '신약의 십계명'이다. 예수를 제대로 따르기 위해선 그분의 본성처럼 가난하고 의롭고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비롭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 땅에 평화를 건설해야 한다. 그래서 베네틱토 16세 교황은 "참행복 선언이 제시하는 길이야말로 생명이라는 높은 산으로 이끄는 참된 길이다. 산상설교에는 사랑의 길로 가는 여정을 그려놓았다. 이 사랑의 길을 걸어야만 삶의 풍요로움과 인간 소명의 위대함이 밝혀진다"(「나자렛 예수」 1권, 162쪽)고 강조한다. ▨참행복 선언 기념성당 예수께서 참행복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하셨던 장소로 전승돼 내려오고 있는 곳은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쉐이크 알리'라 부르는 갈릴래아 호숫가 구릉이다. 카파르나움에서 남쪽으로 약 2~3㎞떨어진 이곳은 그리 높지 않은 구릉이지만, 복음서에 '산'(Mount of Beatitudes)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예수 시대 사람들 눈에는 제법 높은 지대로 보였나 보다. 그래서 성경은 이곳에서 행한 예수의 가르침(마태 5-7장)을 '산상설교''산상수훈'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예수께서 참행복 선언을 하셨던 곳에 예쁜 성당이 세워져 있다. 1937년 작은 형제회가 세운 '참행복 선언 기념성당'이다. 예수께서 여덟 가지 참행복을 선언하신 것을 기념해 팔각 모양에 가운데 돔을 얹은 아담한 성당이다. 성지를 들어서는 순간 너나할것없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마치 하느님 나라에 들어선 듯한 평화로움에 저절로 터져나오는 탄성이다. 세상의 속된 티끌까지 털어내려는 듯 온몸을 감싸는 공기의 청량함, 행복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대지의 고요함, 높고 낮음도 잘남도 못남도 없는 조경의 소박함이 새색시의 수줍은 입맞춤마냥 천상에서 누릴 참행복의 달콤함을 살짝 맛보여준다. 바람이 전해주는 들꽃의 찬미와 이에 화답하는 새들의 절제된 합창이 순례자의 지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한다. 성당에 들어서면 한가운데 제대와 감실이 있고, 성당 입구에는 그 날의 복음이 담긴 라틴말 그레고리오 악보가 펼쳐져 있다. 신자석은 팔각형 성당 벽면에 배치돼 있다. 제대는 돔과 통해 있고 제대 정중앙과 돔 가운데 종탑이 일직선으로 돼 있다. 돔을 바치는 8개 벽면 색유리화 창에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참행복 내용이 라틴말로 새겨져 있다. 가운데 돔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11)는 예수님 말씀을 상징한다. 성당 왼편 정원을 따라 호수 쪽으로 내려가면 야외 성당이 나오고 좀 더 가면 조그마한 동굴이 나온다. 1933년에 발굴한 이 동굴에는 비잔틴 시대(4~7세기경) 때 제작된 모자이크가 남아 있다. 성경고고학자들은 이 동굴이 예수의 참행복 선언을 기념하는 경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3.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