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6> 이브 콩가르(하)](//cpbc.co.kr/CMS/newspaper/2014/03/rc/499147_1.1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이브 콩가르(하)성령, 교회와 세상 안에서 하느님 계획 완성하고자 활동 이브 콩가르는 성령께서 참으로 모든 인간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사진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표현한 색유리화. 미국 뉴욕 몬탁의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성당. 【CNS】 성령의 보편적 현존과 작용 프랑스의 이브 콩가르 추기경은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 3권의 저서를 통해 성령의 보편적 현존과 작용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지혜 1,7)라는 성경 말씀처럼, 성령께서는 교회 내부에서뿐 아니라 세상 안에서도 우주적인 활동을 통해 신비로이 역사하신다. 이러한 성령의 보편적 현존과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다음과 같이 성경적, 신학적 관점에서 단계적으로 고찰해 볼 수 있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하시는 성령 콩가르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짐을 말한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그 고귀하고 자비로운 선물의 원리가 바로 성령이다. 이처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서 결정적인 성취를 이루게 된다. 성령께서는 성모 마리아의 동정 잉태(참조: 마태 1,18-20; 루카 1,35)를 통해 그리스도 육화의 신비를 인도하신다. 또한 성령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내려오셨다(마르 1,10-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공적 활동을 시작하며 기쁜 소식을 선포하실 때, 이사야 예언서 61장 1-2절을 인용해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4,18)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루어짐을 기뻐하신다(루카 10,21 참조). 이처럼 성령께서는 나자렛 예수님의 지상 생애 중에 함께하시며 많은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게 하셨다. 그런데 이처럼 나자렛 예수님과 함께하셨던 성령께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과 다른 존재가 아닌, 항상 동일한 성령이시다. 이는 역사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 안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성령의 종말론적 활동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마침내 성령이 주어질 것임이 선포된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7-39). 그러므로 파스카 사건으로 나아가는 맥락에서, '파라클레토스', 즉 보호자이며 협조자, 또한 위로자이고 중개자이며 변호자인 "진리의 영"(요한 14,17; 15,26; 16,13), 곧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다. 예수님께서 청하면, 아버지께서 파라클레토스 성령을 보내시어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참조).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처음 하셨던 말씀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라는 인사와 더불어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는 것이었다. 교회의 영혼이신 성령 성령 강림 사건(사도 2,1-13 참조)을 통한 사도들의 성령 체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파라클레토스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신 약속의 실현이었다. 이는 또한 구약 성경에 나타난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설교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주실 것이라는 구약 성경의 예언(요엘 3,1-5 참조)이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됐음을 선포한다(사도 2,14-21 참조). 나자렛 예수님에 의해 정초된 교회가 이제 성령 강림을 통해 온 세상에 드러나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성장과 발전 과정에 늘 함께하며 인도하신다. 오순절의 첫 세례 사건 때, 베드로 사도는 회개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군중들이 이에 응답해 3000명이 넘는 이들이 제자들에게 세례를 받았다(사도 2,37-41 참조). 이러한 사도들의 복음 선포와 찬미 안에 성령이 가득 충만했다(사도 4,23-31 참조). 사도들은 성령의 힘에 의한 여러 가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일으켰다(참조: 사도 5,12-16; 8,4-8). 사도들은 박해를 받는 중에도 성령에 가득 차 용기 있게 대답하였으며(사도 4,8 참조), 고난을 기쁨으로 여겨 굴하지 않고 복음 선포에 매진하였다(참조: 사도 5,40-42; 13,50-52). 스테파노의 경우, 은총과 능력이 충만했다. 그래서 스테파노와 논쟁하던 사람들은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 때문에 그에게 대항할 수가 없었다(사도 6,8-15 참조). 심지어 죽기까지 박해를 받으면서도 스테파노는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7,54-60 참조). 베드로와 요한은 안수를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받게 했다(사도 8,14-17 참조). 베드로 사도의 복음 선포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인종과 민족의 장벽을 뛰어넘어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내렸다(사도 10,44-48 참조). 성령께서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선교 여행을 인도하시고 그들과 함께 동반하신다(사도 13,1-12 참조). 성령께서는 바오로의 선교 여행 중에 바오로와 그 일행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 주셨다(사도 16,6-7 참조).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의 제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셨다(사도 19,1-7 참조). 바오로 사도는 앞으로 다가올 고통을 예견하면서도, 이를 피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한다(사도 21,10-16 참조). 이렇듯 성령은 참으로 교회를 이끄는 생명의 원리로 작용하신다. 성령을 체험한 초대 교회의 공동생활 양식은 어떠했는가?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으며,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사도 4,32-33). 바로 이것이 초대 교회 공동체가 성령의 힘으로 이루었던 놀라운 친교와 일치의 실상이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하느님의 영은 그 백성과 늘 함께하시어, 세상을 향한 교회의 복음 선포 사업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마치 '교회의 영혼'과도 같이 생명력을 불어 넣으신다. 생명의 원리이신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마음에 머무르시고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모아주신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 친교와 봉사로 일치시켜 주신다. 또한 교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선물로 교회를 가르치시고 이끄시며 당신의 열매로 꾸며 주신다. 마침 영광송을 바치며 지상 여정 중에 있는 교회는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순례하는 교회다. 교회의 첫 시작에서부터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그 모든 과정 중에 성령께서는 교회와 함께 계시며, 교회를 끊임없이 쇄신하고 거룩하게 해 진리로 이끄신다. 성령의 재촉을 받아 교회는 그리스도를 온 세상 구원의 근원으로 세우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실현되도록 협력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종말론적 완성을 향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위해 교회를 인도하신다. 성령께서는 또한 교회의 '가시적 경계선을 넘어' 온 세상 안에서도 충만하게 활동하신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 헌장」에서 이미 제시된 바와 같이, 성령께서는 교회의 가시적 경계 밖에서도 인간 구원을 위해 신비로이 활동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22항). 콩가르는 성령께서 이 세상 어디에서나 마치 바람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것처럼 활동하시며,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신비로이 보편적인 작용을 하신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성령께서는 이 세상에 하느님을 향해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마침내 하나로 결합시키실 것이라는 전망이야말로 콩가르가 제시하는 성령론의 마지막 결론이다. 바로 여기에서 성령론과 종말론이, 그리고 성령론과 삼위일체론이 서로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브 콩가르 추기경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성령께서 참으로 모든 인간을 새롭게 하신다는 점이다. 오늘날 인간 세상의 어둠과 고통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되는 시점에서, 콩가르가 제시하는 성령론은 우리에게 마치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던져준다. 이 세상 모든 죄악과 절망을 이기시고 마침내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드러나리란 희망을 간직하며, 이브 콩가르 추기경과 함께 간절한 기도를 바친다. '마침 영광송'(doxology)을 통한 기도야말로 콩가르의 명저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의 최종 결론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 박준양 신부(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cpbc2014.03.04

"성심당 빵에는 모든 이를 위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신앙 나의 기업] 성심당 대표 임영진 요셉, 김미진 아녜스 부부 성심당 대표 임영진(왼쪽)·김미진(오른쪽)씨 부부가 직원과 함께 성심당 대표 메뉴 튀김 소보로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70년 전 해방 당시 함경도 함주에서 과수원을 하던 임길순(암브로시오)씨.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종교 탄압이 갈수록 심해졌다. 전쟁이 터졌다. 1ㆍ4후퇴 때 임씨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가기로 작정했다. 보따리를 꾸리고 아내와 어린 네 자녀를 데리고 나섰다. 도처에 미군들이 막고 있었지만 묵주를 보여주고 통과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흥남 부두에 도착해 배를 탈 수 있었다. 교우들만 탄 배였다. 임씨는 ‘가족과 함께 무사히 살아난다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그 다짐을 예수 성심께 봉헌했다. 전쟁 후 인근 진해에서 한동안 지내던 임씨는 먹고 살길을 찾아 서울로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다. 서울에 간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정착한 곳이 대전이었다. 임씨는 대전 역 앞에서 노점상처럼 천막을 치고 찐빵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1956년이었다. 임씨는 예수 성심(聖心)을 기린다는 뜻에서 빵집 이름을 ‘성심당’이라고 지었다. 그로부터 59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성심당은 대전을 대표하는 향토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빵으로, 건강한 기업 문화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공유 경제로, 어려운 이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사랑과 나눔으로, 그리고…. -----------------------------------------------대전의 중심인 중구 은행동 로데오거리. 주교좌 대흥동성당이 길 건너 한 눈에 보이는 곳에 4층 건물 성심당(성심당 신관)이 있다. 1층은 케이크 전문 매장인 케익부띠끄, 2층은 이탈리아식 전문 레스토랑 플라잉팬이다. “성심당이 여기로 옮겨온 것은 1970년이었습니다. 성당 십자가가 보이고 성당 종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아버지께서는 이곳을 택하셨다고 합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성당에는 먼저 갔다와야 한다고 여기신 거지요. 그런데 이곳 지번이 153이랍니다.”임길순(1997년 선종) 창업주에 이어 1980년부터 성심당을 맡아 운영하고 있는 아들 임영진(요셉, 61) 대표의 말이다. 153이란, 부활하신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들이 그물을 치자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잡혔다는 요한복음 21장 11절에 나오는 숫자다. 마르타와 마리아“빵집을 열면서 아버지께서는 피란길에 결심하셨던 것을 바로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역 주변의 배고픈 이들을 찾아 빵을 나눠주기 시작하신 거지요. 빵을 파는 것도 좋지만 많이 만들어서 굶주리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셨습니다.”처음에는 빵을 나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당을 통해 나오는 옷가지 등 구호물품들도 함께 나눴다. 어머니(한순덕 마르가리타, 2012년 선종)는 빵을 만들어 팔고, 아버지는 빵과 옷가지를 싸들고 굶주린 이들과 입을 것 없는 이들을 찾아 나섰다. 때로는 빵 재료를 사기 위해 모아둔 돈마저도 갖고 나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썼다. “아버지의 이런 삶을 보고 어머니는 ‘천당엔 혼자만 가려고 하느냐?’고 다투기도 하셨지요. 두 분은 마치 마르타와 마리아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빵을 만들어 파는 일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일도 예수 성심을 기리며 하는 일이었다. 봉사와 나눔은 계속됐고, 성심당은 번창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이런 나눔이 못마땅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베풀면 백 배으상을 받을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이해하게 됐습니다.”대학을 졸업하면서 아버지를 이어 성심당 경영에 뛰어든 임 대표는 아버지의 사랑 나눔을 이어가면서 빵을 만드는 재료에서 제조법, 포장, 서비스까지 새롭게 바꿨다. 성심당의 명물 ‘튀김 소보로’를 비롯해 포장 빙수, 판타롱 부추빵 같은 핵심 제품들이 속속 개발됐다. 아내와 함께 알게 된 ‘포콜라레’는 여기에 불을 지폈다. 지금까지는 부친의 뜻을 이어 나눔을 실천하면 ‘착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포콜라레는 복음을 생활로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1980년대 중반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후원하는 것보다 그 과정마다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지요. 똑같은 재료로 똑같은 빵을 만들어 판매하더라도 억지로 하는 것과 즐겁게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고객은 이를 느끼지요.” 임 대표의 아내 김미진(아녜스, 56) 이사의 말이다. 포콜라레 영성인 사랑과 일치의 정신을 성심당 경영에 접목시켜 나가면서 임 대표 부부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성심당 본관(은행동 145번지)에 1992년 국내 최초로 베이커리 레스토랑(테라스키친)을 연 것이다. 대성공이었다 외식업 진출은 플라잉팬, 피아토 개점으로 이어졌다. 성심당은 국내 제빵제과업의 아이콘이 됐다. 투명 경영과 공유 경제 2000년 부부가 함께 필리핀에서 열린 포콜라레 운동의 사회학교에 참석한 것은 새로운 전기가 됐다. 투명 경영, 공유 경제 같은 개념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부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귀국한 후 부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포콜라레 창시자 끼아라 루빅에게 편지를 썼고, 얼마 후 답신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 12,17). 이때부터 부부는 이 말씀을 화두로 삼아 모든 것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고객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혹은 직원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고객과 직원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를 고민했다. 매장 인테리어 하나를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을 모두 생각했다. 너무 화려해서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기를 꺼리지 않도록, 또 너무 초라해서 있는 이들이 외면하는 매장이 되지 않도록 했다. 회사 사훈도 ‘모든 이가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로 바꿨다. 투명 경영을 도입, 법인을 설립했다. 주식회사로 바꾸고 부부는 월급쟁이 사장과 이사가 됐다. 매출을 공개하고, 직원들과 함께 결산하고, 100% 정직한 납세를 했다. 공유 경제 기업 정신을 경영에 반영한 것도 이때부터다. 포콜라레 창시자 키아라 루빅(1920~2008)이 주창한 공유 경제 개념은 기업 수익의 3분의 1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몫으로, 3분의 1은 재투자에(회사와 직원을 위한 재투자뿐 아니라 사회 인력 양성을 위한 재투자도 포함),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임직원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기업 문화를 소유 중심에서 나눔 중심으로, 경제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다. 공유 경제를 실천하면서 회사는 직원 1명분의 임금을 매달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는 일도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이에게 좋은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희 부부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대화하고 나누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회사로서는 어려운 때였지요.” 신도시가 생겨나면서 상권이 옮겨갔다. 시내 중심의 생활은 주거지 중심의 생활로 바뀌고, 각종 프랜차이즈 사업이 생겨나면서 경쟁업체도 많아졌다. 회사 매출은 자꾸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2005년 1월 본관에 불이 나 전소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제 성심당은 끝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직원들이 먼저 달려와서 복구 작업에 앞장서더군요. 그해 말 결산을 해보았더니 전년도에 비해 매출이 30%나 올랐습니다.” 한가족 신문과 무지개 프로젝트 임 대표 부부는 기도하고 대화했다. 하느님께서 성심당을 일으켜 세워주셨으니 거기에는 분명 뜻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성심당의 정체성을, 존재 이유를 찾고자 했다. 기도하고 노력하는 사이에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성심당은 단지 빵을 만들어 파는 곳이 아니라 사랑을 전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빵으로 기업 분위기를 바꾸고 고객을 바꿀 뿐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이 성심당의 존재 이유였다. 이를 위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실행에 옮겼다. 소통을 위한 ‘한가족 신문’이 그 하나였다. 매주 발행하는 한가족 신문은 각 부서마다 명예기자를 두어 부서 소식을 알리면서 회사의 사정을 공유하고 직원들의 의견을 나누는 소중한 소통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소통을 위해 직원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프로그램도 시행했다. 원하는 직원에 한해서 그 직원의 가정을 방문, 집안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임직원들이 서로 알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사랑의 챔피언’도 시작했다. 사랑의 챔피언은 한 해 동안 사랑을 많이 실천한 직원을 승진시키는 것이다.2010년 성심당은 무지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개인과 회사와 사회의 변화를 위한 일곱 가지를 설정, 실행에 옮겨 나갔다(표 참조).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들도 있고,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것들도 있지만 성심당은 사랑의 무지개를 활짝 띄울 때까지 이 프로젝트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생명과 사랑의 빵이 되고자 내년이면 60주년이 되는 성심당은 일반 기업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추진하는 두 가지를 여지껏 하지 않고 있다. 하나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전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성심당의 존재 이유는 단지 돈을 벌고 이름을 얻고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끼아라 루빅이 주창하는 포콜라레 정신이기도 하지요.”그래서 대전을 떠나지 않는다. 2011년 대전 롯데백화점에 입점한 후 서울에서도 거듭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했다. 대전 시민의 사랑 속에 성장했으니, 대전의 기업으로 계속 머무르기 위해서다. “성심당 빵이 인기 있다고 서울에서 영업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대전에 오지 않습니다. 대전 성심당을 찾지 않지요. 성심당은 빵만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빵을 통해서 경영주와 직원이, 직원 서로가, 직원과 고객이, 회사와 지역 사회가 더불어 사랑의 문화, 나눔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곳입니다.”프랜차이즈를 하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덕분인지, 한때는 신도시 상권에 밀려 공동화되어 가던 은행동 일대도 활기가 넘친다. 성심당 때문만은 아니지만 성심당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빵을 사러 오는 고객들 외에도 견학 오는 외부 손님들로 연일 붐비는 현장이 이를 말해준다. 성심당은 2012년에는 빵집을 시작한 대전역에 입점, 59년 전 예수 성심께 찬미를 드리며 시작한 자리를 감격스럽게 되찾았다. 성심당의 변화는 예수 성심의 사랑의 불이 지역 사회에 활활 타오르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임영진 김미진 부부는 이것이 성심당을 통해 자신들이 수행하는 또 수행해야 하는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여긴다. 성심당은 지금도 매월 4000만원 어치의 빵을 후원한다. 지난 4월 네팔 지진 사태 때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3일 만에 700만원이 넘는 성금을 모았다. 성심당 직원은 현재 정규직 290여 명을 포함 해 410여 명이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포콜라레(Focolare) : 1943년 이탈리아의 키아라 루빅이 창시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 영성 운동. 한국을 포함해 82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서울가톨릭경제인회는 ‘나의 신앙, 나의 기업’에 소개할 교우 기업인들을 추천받습니다. 아울러 경제인회 활동에 함께할 교우 기업인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문의 : 02-755-7060 cpbc2015.05.27

본당 재탄생을 위한 새 복음화(2)-가정 복음화의 해[사목지침] 부산교구장 황철수 주교 현대 세계의 주요한 징후 한 가지는 신앙의 약화 현상입니다. 신앙이 약화됐다는 것은 하느님께 가치와 기준을 두기보다는 인간의 지식, 기술, 물질에 더 큰 가치와 기준을 둔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우리 교구 공동체는 2013년부터 신앙의 약화를 직시하며 강한 믿음의 공동체로 거듭나고자 5년간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본당 재탄생을 향한 새 복음화'입니다. 그 첫걸음으로 '신심운동 복음화의 해'를 지냈습니다. 각 본당에서는 말이나 구호로만 그치지 않고 신심단체의 활성화, 신앙교육, 성경 통독 및 필사, 성지순례와 피정 등을 통해 영적 목마름을 채우며 신앙을 증진해 왔습니다. 신앙의 약화 현상은 가정에도 영향을 끼쳐 '하느님께 가치와 기준'을 두지 않는 공동체가 되게 합니다. 그 결과 가정이 재물, 소유와 같은 세속적 가치에 과도한 무게를 두고, 사랑이나 희생과 같은 신앙적 가치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건강한 신앙 공동체의 기초가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구 공동체는 본당 재탄생을 향한 두 번째 해인 2014년을 '가정 복음화의 해'로 지냅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학교폭력과 청소년 문제, 가정폭력, 부부갈등, 이혼으로 인한 가족해체 등은 우리 사회 가정에 적신호가 켜져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에 바탕을 두는 가정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그 사랑'을 바탕으로 살아갑니다. 타자를 이용하는 사랑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 여기에 그리스도인 가정의 깊은 본질이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가정이 나아가는 길은 인간적 약점과 시대적 유혹의 무수한 난관 속에 있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끊임없이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은총을 간구해야 하는 삶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 가정의 기도는 가정의 모든 생활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가정의 크고 작은 일,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이별과 만남, 출생과 죽음, 그 모든 삶에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신뢰하고 하느님의 섭리에 가정을 맡기며 굳건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모의 한결같은 믿음의 삶과 기도는 자녀에게도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며 인생의 모범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가정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믿음으로 새롭게 되어 '기도하는 가정, 사랑을 실천하는 가정, 봉사하는 가정, 그리하여 진정으로 건전하고 행복한 가정'으로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합시다. ◇복음화의 원동력인 가정 복음화 실천지침 1.기도하는 가정 △가족이 함께하는 가정기도 △가족 성경 이어 쓰기 △성경가훈 만들기 2.본당 공동체의 신심 운동에 참여하는 가정 △본당 월 가정미사 설치와 가족 공동체 참여 △본당 혼인갱신식 마련 △아버지학교, ME 운동, 노인대학 △가족단위 성지순례 △가족 캠프 3.봉사하는 가정 △가족 봉사활동과 체험 △가족 공동체의 본당 봉사 활동 cpbc2013.12.10

보고싶은 목자 김 추기경, 영화로 만난다 평화방송이 선종 마지막 1000일 모습을 담아 제작한 다큐 영화 「그 사람 추기경」 , 8월 7일 개봉 8월 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그 사람 추기경」 포스터. 선종 5주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보고 싶은 참 사목자’로 남아있는 고 김수환 추기경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영화가 개봉한다.가톨릭 종합 매스컴 평화방송이 김 추기경 선종 마지막 1000일간의 모습을 그의 주변 사람들의 기억을 따라 그려낸 다큐멘터리 영화 「그 사람 추기경」(감독 전성우)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앞두고 8월 7일 전국에서 개봉하는 이 영화는 교황이 말한 양 냄새 나는 목자 김 추기경을 120분간 만나도록 이끈다.“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네.”영화는 생전 인터뷰 중 느닷없이 던지는 김 추기경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 교회 어른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누구도 시원하게 답하지 못한다. 늘 소외된 이들 곁을 지키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그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영화는 추기경의 이처럼 인간적인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배우 우기홍(미카엘)씨가 출연해 영화 내내 추기경을 만나도록 이끌어준다.영화는 김 추기경과 인연이 깊었던 교회 안팎 인사들 증언을 통해 그를 만나는 여정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은 김 추기경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아쉬움이 꾸밈없이 이어진다. 김 추기경이 사목했던 안동의 한 본당 신자들, 추기경의 친척, 많은 주교와 사제, 수도자, 주치의 등 가까이서 그를 봐왔던 이들의 기억 속 김 추기경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의 증언 사이사이 등장하는 김 추기경의 생전 모습들은 어디에서도 공개된 적 없는 미공개분이어서 더 눈길을 끈다.무작정 혜화동 주교관에 들이닥친 방송 카메라 앞에서도 불평 없이 미소 지으며 반기고, 말 한마디 내뱉기 힘겨운 병환 중에도 나라와 이웃을 걱정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자면 마치 그가 곁에 와서 이야기하는 느낌마저 든다. 2008년 위독했던 순간, 침상 위에서 산소마스크를 한 채 입을 벌리고 숨쉬기조차 힘들어하는 추기경 모습, 병환 중에도 성경 읽기와 기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모습, 그를 기억하며 이야기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지인들을 보다 보면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인간 김 추기경의 몰랐던 면모와 하늘에서 들려주는 듯한 그의 음성을 듣고 싶다면 주저할 필요 없다. 2시간 동안 그를 만날 수 있다.전성우(이냐시오, 평화방송 PD) 감독은 17일 시사회에서 “추기경님 닮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영화를 만들었다기보다 추기경님 모습을 기억하는 분들의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했다”면서 “오늘 무엇보다 (하늘의) 추기경님께서 어떻게 보셨을지 모르겠다”며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영화를 통해 추기경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가까이서 뵙고, 그분이 강조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기길 바란다”고 전했다.현재 CGV와 평화방송 누리방에는 영화 관련 시사회 이벤트가 진행 중이다. 문의 : 02-2270-2547, 평화방송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평화신문2014.07.23
![[성경 속 궁금증] 71.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왜 알아보지 못했나요?](//cpbc.co.kr/CMS/newspaper/2013/04/rc/451012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71.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왜 알아보지 못했나요?부활, 물리적ㆍ역사적 차원 넘어선 초월적 사건… 라자로 소생과 본질 달라'부활하신 예수와 의심하는 토마스'(카라바조 작, 1602년). 성경에서 예수님 부활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과 지인들이 정작 예수님께서 부활해 그들 앞에 나타나셨는데도 잘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20,15). 예수님 부활에 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시신이 다시 그 모습 그대로 소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 이야기가 나온다(요한 11,44 참조). 예수님 부활은 라자로의 소생과는 전혀 다르다. 라자로의 경우는 지상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지상의 삶으로 돌아오신 것이 아니라 이승과는 전혀 다른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심을 보여준다. 부활한 육신은 예수님이 확실히 부활하셨음을 증명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고 실제로 몸을 가진 분으로 나타나신다(요한 20,20.27-2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9). 실제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만지도록 하시고(루카 24,36-40),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요한 21,9-13).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도들과 증인들의 증언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모습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뤄졌는지도 알 수 없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은 시공간을 초월해 원하는 때, 원하는 장소에 마음대로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5-16). 부활하신 몸은 인간의 지상생활에서의 통상적 법칙에서 벗어난다(요한 20,19). 때문에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요한 20,9). 이런 제자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발현은 여러 날 동안 이뤄진다(사도 13,31). 신약성경은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성경의 '지진', '주님 천사의 발현'과 같은 전통적인 표현을 빌려 올 수밖에 없었다(마태 28,2-3). 물론 구약성경에 나오는 표현들로 부활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표현들이 부활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부활은 초자연적 영역에 속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물리적ㆍ역사적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적 사건이다. 초월적 사건이란 하느님께서 이루신 사건임을 뜻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은 죽음과 부패의 사슬에서 벗어나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져 그 영광스러운 상태로 하느님께서 마련하시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 부활은 신앙의 신비이다.cpbc2013.04.30

교구 설정 50주년-기쁨과 은총의 해를 맞이하며[사목교서] 마산교구장 안명옥 주교 교구는 2016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성경은 50이라는 숫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50년은 '희년' 또는 '은총의 해'로서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의미를 지니는 해입니다. 교구가 시작하던 때의 첫 마음을 회복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재정립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1.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희년은 기쁨과 축복의 해입니다. 모든 빚이 탕감되며 빼앗겼거나 팔린 땅은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아오고, 종노릇하던 노예는 해방을 누리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 희년의 정신이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는 해방과 자유로 수렴됩니다. 우리는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며 주님께서 선포하신 은혜로운 삶이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2.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희년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 헤매던 두 여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사도들이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큰 뜻을 품고 출발했던 그곳, 본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첫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우리 첫 마음이 머물러 있는 갈릴래아는 어디입니까? 복음입니다. 복음 말씀을 읽고 새김으로써 복음 말씀이 삶을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교구는 반세기의 격동기를 보내면서 복음을 열성으로 전파했으며,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열정은 식어버리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역복음화율, 미사참례 등 신앙 지표가 정체기에 들어선 지금 첫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3.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성경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6-47)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전해줍니다. 구성원 모두가 서로 아픔을 이해하고, 순박한 마음으로 가진 것을 나누며, 하느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구 설정 50주년을 기념해 영적 쇄신 운동과 기념사업을 실행해 나가고자 합니다. 단순히 통과의례적 행사가 아니라 교구가 실질적 영적 쇄신을 이루고, 기쁨과 은총을 누리는 참된 신앙 공동체를 이루도록 능동적인 동참을 요청드립니다. <실천 사항> 영적 쇄신 : △성경 필사 및 읽기, 공부하기 △가정기도 바치기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정신 회복하기 △사랑의 사회적 질서 확산을 위한 사회교리 공부하기 기념사업 : △생명운동과 사랑나눔 운동 전개 △순교자 묘지 정비와 교구청 이전을 위한 준비와 동참 △교구 규정집 재정비cpbc2013.12.17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6)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cpbc.co.kr/CMS/newspaper/2013/02/rc/441414_1.0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6)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하늘, 유배 후 하느님 대체어로 사용#하늘의 새로운 인격성 유배 기간을 거치며 이스라엘 종교에 일어난 또 하나의 변화는 '하늘'이 '하느님'의 동의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 새로운 인격성을 부여받은 이같은 현상은 구약성경의 후대 본문으로 갈수록 두드러지는데, 특히 마카베오기와 다니엘서에서 잘 나타난다. 구약성경의 가장 마지막 역사를 다룬 마카베오기는 사람을 구하고 도와주는 주체를 '하느님'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표현한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1마카 12,15). "하늘이 너희를 도와주시기를 빈다"(1마카 16,3). 유배 이전 구약성경은 '하늘'이 어떤 인격성을 띠게 될까 봐 조심스러운 표현을 사용했다. 그래서 꼭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며, 심판하시고, 다스리신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유배 이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급증한 것이다. 또 하늘이 하느님과 동의어로 사용돼 때로는 '하느님'을 대체하기도 했다. 그 결과 하늘은 어느 정도 인격성을 부여받았다. 이후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하늘을 직접 찬양한다. 이때부터 하늘은 하느님의 완벽한 상징어로 사용됐다. 종교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재신화화'된 것이다. 하늘이 하느님을 상징하게 돼 야훼 신앙 안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았다. 이렇게 유배 이후 재신화화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왜 유배 이후 하늘을 하느님으로 부를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에는 유일신 신앙이 깊이 뿌리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하느님을 상징해도 하느님과 구별되는 '하늘 신'으로 오해할 소지가 그들 사이에선 그만큼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하늘관은 유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유배 이전에는 공간과 피조물의 탈신화화된 개념으로 인격적 요소를 탈색하는 데 주력했다. 혹시 하늘신이라는 요소가 있을까봐 걱정하는 태도를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반면 유배 이후에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낱말이 이스라엘의 신앙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그만큼 이스라엘에는 굳건한 유일신 신앙이 자리 잡았다. 하늘에 기도하고 하늘을 보고 청하며, 하늘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말해도 하늘신을 생각할 사람들은 적어졌다. 하늘이라고 말해도 모두가 하느님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신약성경의 '하늘들' 여러 차례 변화해온 구약성경의 하늘관은 신약성경으로 이어져 예수님의 '하늘 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신약성경에서 '하늘의'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또는 '거룩한'이라는 의미다. 유배 이후 하늘은 하느님의 상징어로 굳어져 신약 시대로 전승됐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의 하늘관을 가장 총체적으로 집대성한 책을 꼽으라면 신약성경을 여는 마태오복음이다. 마태오복음의 특징적인 하늘관은 다음의 두 가지 호칭에서 볼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마태 5,48). "하늘의 내 아버지"(마태 15,13; 18,35). 이 호칭들은 오직 마태오복음에만 나오는데, 유배 이후 정착된 '하늘의 하느님'이란 호칭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 '하늘의 하느님'이 하늘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하느님이 더욱 가까이 계신 분이 되셨다. 구약의 하느님은 우리가 감히 다가가기 어려운 분으로 여겨졌다. 물론 구약성경을 잘 읽다 보면 그분은 정말 친근하고, 마치 아기를 돌보는 아빠의 마음을 지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려운 하느님을 친근한 아빠 하느님이라고 하셨다. 이 밖에도 마태오복음은 유배 이전의 고전적 호칭, 곧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란 호칭도 즐겨 사용한다. 주님의 기도를 전하는 마태오복음 6장에서 하느님의 호칭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는 루카복음 11장의 호칭 '아버지'와 구별된다. 마태오복음 저자가 사용한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화된 하늘관이다. 마태오복음은 유배 이전 하나의 장소로 여긴 하늘관과 더불어 유배 이후 하늘의 하느님으로 표현한 하늘관이 모두 나오는 책이다. 이런 면에서 마태오복음은 구약성경의 하늘관에 정통한 책이요, 구약성경의 하늘관을 종합하는 책이다. 신약성경의 첫머리를 차지하는 마태오복음의 하느님은 '하늘의 님', 곧 '하늘님'이다. 이스라엘 종교신학사적 맥락에서 하늘이 하느님의 강한 상징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가 같은 의미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약 시대에 '하늘'과 '하느님'을 명확히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하늘관에 정통하고, 하늘이라는 상징어를 즐겨 사용한 마태오복음에서 '하느님 나라'(4번)보다 '하늘 나라'(32번)가 더 자주 나오는 현상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나라는 사실상 동의어다. 신약성경에서 드러나는 여러 겹의 하늘은 구약성경에서 시대마다 독특하게 형성된 것이다. 각각의 하늘 개념이 고대 이스라엘의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 형성돼 구약성경에 들어왔는지 알게 되면 신약성경을 더욱 풍요롭게 읽을 수 있다. 어떤 표현은 이스라엘 밖에서 유래했지만 그런 표현을 수용한 생각의 뿌리는 깊은 신앙심이었다. 이스라엘인들은 때로는 경계하고 때로는 적극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평화방송 TV 방송시간 : 수요일 오전 9시(본방송), 금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일요일 저녁 9시, 월요일 오전 4시ㆍ오후 3시퇴사자22013.02.19
![[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1.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2>어떻게 해야 주님 말씀에 맛들일 수 있을까](//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9542_1.0_titleImage_1.jpg)
[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1.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어떻게 해야 주님 말씀에 맛들일 수 있을까성경 읽기가 주님 말씀 맛들이기 첫걸음주님 말씀에 기대어 사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을 살찌우려면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한다. 사진은 경기도 부천시 꼰솔라따 선교수도회 본원에 있는 성경과 성모자상. 그리스도인에게 주님 말씀은 신앙의 출발점인 동시에 좌표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주님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희망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신앙을 튼튼히 하려면 먼저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삶의 기둥을 세워야 한다. 신앙의 해를 맞아 주님 말씀의 결정체인 성경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주님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방법으로 말씀을 하시지만, 성경보다 더 분명하고 힘이 넘치는 말씀이 담긴 것은 어디에도 없다. 성경에도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묵시 1,3)하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성경을 어려워하는 이가 여전히 많다. 초보 신자가 성경을 통해 주님 말씀을 익히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성경을 읽는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구절처럼 말씀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이다. 성경공부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차분한 마음으로, 꾸준히 주님 말씀에 맛들이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사목자들은 "주님 말씀에 맛을 들이려면 성경을 읽으라"고 권한다. 습관이 될 정도로 매일 읽고 묵상해야 주님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안동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황재모(사목국장) 신부는 "말씀에 맛을 들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읽는 것이다. 읽기가 선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 다음이 성경공부 모임이나 강의 등에 참여해 말씀을 심화시켜야 그 말씀이 자기 것이 된다고 강조했다. 예로니모 성인은 "우리는 결코 홀로 성경을 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성경을 함께 읽고 공부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혼자 읽기 어렵다면 가족들과 함께 읽는 것도 좋다. 하지만 방대한 분량 때문에 성경읽기에 도전하는 것조차 꺼리는 신자가 많다. 그렇다면 그날 독서와 복음이라도 미리 읽고 미사에 참례하는 방법도 있다. 3년 동안 매일미사에 참례하면 성경 주요 부분을 거의 대부분 봉독하게 된다. 미사 시간을 활용해 성경에 맛을 들이다 보면, 통독에 도전할 '믿음의 체력'이 길러진다. 잠들기 전 시간도 좋다. 성경을 잠자리에 두고 잠들기 전 10분을 성경 읽는 시간으로 정하자.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운 직장인과 학생 등에게 부담 없는 방법이다. 체계적으로 성경을 읽으려면 신약을 79일, 구약을 286일에 읽는 '성경 읽기표'를 활용해 1년 만에 완독할 수 있다. 요즘 참여 열기가 뜨거운 성경필사는 말씀을 마음 깊숙이 새길 수 있는 방법이다. 성경필사에 성공한 이들은 "성경을 두 번 읽은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며 "말씀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마음에 와 닿는 성경구절을 정해 자신만의 성구를 갖는 것은 어떨까. 또 가훈을 성경구절에서 고르는 것도 가족이 성경에 관심을 갖게 하는 방법이다. 고(故) 정호경 신부처럼 성경구절을 나무판에 새겨 거실에 걸어두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마르코 복음서」(가톨릭출판사)와 같은 성경 입문서나 해설서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하지만 성경읽기는 해설서가 아니라 성경 본문이 위주가 돼야 한다는 게 일반적 조언이다. 평화방송TV '장재봉 신부의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진행자 장재봉(부산교구 활천본당 주임) 신부는 "성경은 하느님 얼굴이고 삶의 거울이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알려준다"며 "처음엔 성경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여러 번 읽다 보면 말씀에 맛을 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8박 9일 간 신자들과 함께 성경통독 피정을 한 적이 있다"며 "73권 통독에 성공한 신자들 모습이 많이 달라졌음을 보고 하느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 지 새삼 체험했다"고 말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는 구절처럼 말씀에 맛을 들이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퇴사자22013.01.29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7) 달신을 숭배하는 마음](//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2714_1.0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7) 달신을 숭배하는 마음달신, 운명 결정하는 왕권 상징 #달신 동양이나 서양이나 옛사람들은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숭배했다. 일월성신은 해, 달, 별이다. 여기에 깃든 영험한 기운이 인간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다. 고대 근동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특히 '달'을 섬겼는데, 이는 그들의 왕권 신학과 밀접히 관련됐다. 히브리인들도 달신 숭배와 무척 깊게 연관돼 있었다. 때로 그들은 달신 숭배에 적대적이어서 달은 철저하게 탈신화됐지만, 달신(月神) 숭배와 관련된 고대 근동의 문화적 흔적은 구약성경 곳곳에 매우 진하게 남아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달신 숭배의 대표적 고장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의 종교 가운데 태양신이 아니라, 달신이 왕권을 상징한 유일한 곳이다. 달은 왕권 신학의 핵심 상징으로서 종교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바빌론제국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 비문 등에서 달신은 초승달로 묘사되기도 한다. 달신이 초승달로 묘사되는 것부터 우리 정서와는 다른 점이다. #수메르의 달신 '난나' 우리는 보름달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꽉 찬 보름달은 마음에 떠올리기만 해도 넉넉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중동인들은 정반대의 생각을 지니고 있다. 보름달은 이미 꽉 찼으니 앞으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초승달은 이제부터 찰 것이기에 앞으로 더 차오를 것이라고 생각해 희망으로 여긴다. 그래서 달신을 초승달로 묘사한 것이다. 이런 정서적 차이가 구약성경에 스며들어 있다. 현대 이슬람에서 초승달을 중요한 상징으로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달신의 수메르어 이름은 '난나'(Nanna)다. '아누'에 이어 최고신에 오른 수메르의 주신(主神) 엔릴의 아들이 바로 난나다. 난나는 최고신은 아니지만, 최고신의 피가 흐른다. 수메르 시대 난나는 우르(수메르의 도시 국가)의 주신이었다. 신바빌론 시대에 접어들어 달신 '신'은 하란(메소포타미아 지역 문화ㆍ상업 도시)의 주신으로 유명해졌다. 달신 숭배의 근원지가 우르와 하란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 두 도시는 구약성경에서도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음양설에서 해와 달은 양과 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해는 달보다 세고 크며 우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수메르는 정반대다. 달신 '난나'는 태양신 '우투'의 아버지다. 분명 달신이 태양신보다 우월한 존재다. #달은 왕권의 상징 달은 왕권의 상징이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달이 '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인간의 운명에 관한 신탁을 내리며, 정의를 판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달신의 신학은 자연스레 왕권 신학과 연결된다. 달신은 태양신과 별신과 함께 '천체의 삼신'을 이룬다. 물론 달신이 중심이다. 달은 차고 기우는 변화가 매우 규칙적이다. 그래서 출산과 성장, 노화, 죽음이라는 인생의 단계에 대입시키기가 쉬웠다. 이를테면 초승달은 달의 탄생이다. 계속해 보름달까지 차오르는 것은 성장이다. 보름달 이후 저무는 것은 노화이며, 마지막 그믐달은 죽음이다. 또 28일마다 정확하게 차고 기우는 것도 달의 규칙성을 높여줬다. 그래서 달은 때를 알려주는 역할도 맡았다. 유목민들은 달을 보고 이동할 날짜를 결정했다. 가축의 교미 시기도 달을 기준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달과 관련한 문화는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다. 또한 달신은 풍요와도 관련돼 대중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달신 숭배에서 초하루는 무척 중요했다. 초하루가 되면 달은 부활한다. 밤하늘에 손톱만큼 달이 보이기 시작하는 매달 초하루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종교적 절기다. 구약성경에서도 보름달보다는 초하루가 훨씬 중요하다. 바로 이런 고대 근동의 풍습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를 알고 구약성경을 읽어야 한다. 달신의 다양한 역할 가운데 '정의의 수호자'는 일찍이 태양신으로 넘어갔다. 고바빌론 제국의 함무라비 임금은 법전을 태양신에게서 받았다. 그런데 태양신의 위치는 달신에 비해 불안해 보였다. 수메르의 태양신 우투는 남신이지만, 셈족의 태양신 '샤마쉬'는 본래 여신이다. 우가릿 신화에서도 태양신 '샵슈'는 여신이다. 그런데 달신 난나와 신이 합쳐졌듯이 우투와 샤마쉬도 융합돼 훗날 하나의 신으로 이해된다.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샤마쉬는 남신이 돼 버렸다. 태양신의 성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역사적 변천 과정은 태양신이 훨씬 약하고 달신이 원래 강했음을 드러낸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평화방송 TV 방송시간 : 수요일 오전 9시(본방송), 금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일요일 저녁 9시, 월요일 오전 4시ㆍ오후 3시퇴사자22013.03.05
![[복음이야기] <30> 나지르](//cpbc.co.kr/CMS/newspaper/2014/10/rc/531796_1.0_titleImage_1.jpg)
[복음이야기] <30> 나지르삼손·사무엘·마리아는 OOO인이다 나지르는 하느님께 성별된 사람으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삼손이다. 그림은 도메니코 피아 셀라 작품 ‘삼손과 데릴라’로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봉헌생활을 하는 수도자처럼 성경 시대 유다인 가운데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서원을 통해 일생을 멀리하고 기도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유다인들은 이들을 ‘나지르’라 불렀다.나지르는 우리말로 ‘따로 떼어놓인 사람’이란 뜻으로 ‘하느님께 성별된 사람’ ‘하느님께 스스로 봉헌된 사람’을 가리켰다. 이 말처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나지르를 일반인들과 다르게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거룩하게 성별해 태어나게 한 사람으로 여겼다. 나지르로 서원하기 위해선 일정 기간 여느 사람과 달리 특별한 생활을 해야 했다. 나지르는 술은 물론 포도나무에서 난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고, 부정한 것들을 일절 금하며 평생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아야 했다(민수 6,2-71). 구약 시대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피와 한가지로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자신을 바치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자도 민수기 6장에 나오는 서약 조건을 지키면 나지르가 될 수 있었다.오늘날 일반인에게까지 알려진 대표적인 나지르는 삼손이다. 그의 어머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으나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아들의 잉태를 예고했고, 삼손이 태어났다(판관 13장). 마지막 판관이었고 예언자였던 사무엘도 평생 나지르였다. 사무엘 역시 아기를 낳지 못하던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태어난 사람이었다(1사무 1,11 참조). 하지만 삼손과 사무엘은 큰 차이가 있다. 삼손과 달리 사무엘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주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자원해 세워진 나지르였다. 가장 대표적인 여자 나지르는 ‘성모 마리아’이다. 성모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고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기 때문이다. 또 천사의 예고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고 말한 동정 마리아의 응답은 나지르의 서원을 의미한다고 성서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일정 기간만 나지르 서원을 지키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들은 일정 기간 나지르로 서약해 술과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금하고, 부정한 것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세 규정을 지키다가 서원 기간이 끝나면 만남의 장막 문간에 나와서 속죄 제물과 번제물 등 각종 제물을 바치고 머리카락을 잘라 불에 태워 서원을 해소했다(민수 6,13-21). 탈무드에서는 서원 기간이 명시되지 않는 경우 보통 30일을 가리킨다고 적고 있다. 이같은 일시 서원 나지르 풍습은 구약 말기와 신약 시대까지 지속됐다. 마카베오 상권 3장 49-51절은 성전이 이방인들로 더럽혀져서 서원 기간이 끝났으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바칠 수 없는 나지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던 야고보 사도의 충고에 따라 바오로 사도가 그를 미워하는 유다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서원 기간을 마친 나지르 4명의 봉헌 비용을 댄 기록이 나온다(사도 21,23-26).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께 서원한 일로 코린토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은 행위(사도 18,18)를 두고도 나지르 서원의 해소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요한 세례자가 포도주나 독주도 마시지 않을 것이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루카 1,15)이라는 천사의 예고를 토대로 요한 세례자 역시 나지르로 보는 성서학자도 적지 않다. 더불어 마태오 복음 2장 23절 “그는 나자렛 사람(헬라어로 ‘나조라이오스’)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한 대목을 두고 예수님께서 나지르였음을 고백하는 말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이처럼 예수님 시대에는 하느님께 열심한 마음으로 특별한 서원 기간을 명시하지 않고도 남녀 누구나 나지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광야에서 신앙 수련을 했다. 광야는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명상하기에 적합한 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루카 3,2)는 것을 실제로 광야를 말하기보다 영적으로 공허한 장소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들은 ‘광야에 머문다’는 표현은 오늘날 ‘피정’과도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유다인의 나지르 서원 풍습은 예수님 시대 이후, 예루살렘 멸망 후에도 한동안 이어져 오다 중세 때 완전히 사라졌다.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평화신문2014.10.01
![[생활속의 복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cpbc.co.kr/CMS/newspaper/2014/09/rc/527744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연중 제23주일(마태 18,15-20) 조재형 신부(서울대교구 성소국장) 9월의 첫 주일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달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보내는 시간만큼, 내가 원하는 것들을 위해서 쓰는 시간만큼 나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눌 수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병자 영성체 다닐 때, 봉사자는 늘 제가 편하도록 신발을 정리해 주곤 하였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다니니까, 신발을 신기 위해서 손을 대지 않아도 되도록 수고해 주십니다. 작은 일이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바로 그런 배려가 순교자의 열정을 삶 속에서 이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한 교우분이 제게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신부님도 외로우시죠?” 혼자 살기 때문에 외로울 거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주일 저녁 모든 미사가 끝나고 텅 빈 성당에 혼자 있는 사제가 외롭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사제가 외로워 보이시나요?교우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정호승님의 ‘수선화에게’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우리 모두는 어쩌면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병실에 누워 계신 형제님도, 혼자되신 저의 어머니도, 뜨거운 여름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재수생도, 결혼기념일도 잊어버리는 남편을 둔 아내도 모두 외로운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외로우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을 칩니다. 혼자 들기에는 너무 무거운 십자가이기에 넘어지는 그 순간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씀은 바로 외로움과 고독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외로움을 치유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고독을 넘어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이 함께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그 사랑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들었습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사랑의 실천은 신앙인들에게 의무입니다.정말 중요한 것은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것이고, 이웃의 걱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형제의 허물과 잘못을 진실한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보초’를 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경고를 슬기롭게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을 위해서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cpbc2014.09.02
[함께해요! 평화방송] 특별기획 미션2 등 TV ▨특별기획 미션 2 가난한 이들의 이웃이 되기 위해 먼 길을 떠난 사람들이 있다. '미션' 팀이 1년의 준비를 거쳐 멕시코와 칠레, 에콰도르 등 중남미 8개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 사제와 선교사들의 웃음과 눈물을 카메라에 담았다. ▶방송 일시: 매주 금요일 오전 9시, 주일 오후 11시, 목요일 오후 9시 ▨우리본당 행복쇼 함께해서 더 기쁜 신앙생활! 사제와 신자, 수도자가 한 마음으로 일궈가는 본당 공동체의 행복을 유쾌하게 나눈다. ▶방송 일시: 매주 목요일 오전 9시, 금요일 오후 9시, 주일 오후 2시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유은희(체칠리아) 수녀가 들려주는 윤치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124위 시복식을 더욱 뜻있게 맞이하도록 돕는다. ▶방송 일시: 매주 목요일 오전 7시 20분, 금요일 오후 10시 20분, 주일 오전 10시 20분라디오 ▨말씀의 빛, 사도 바오로의 편지 사도 바오로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빛으로 다가와 믿음이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시간이다. 김영남(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신부가 성경 공부를 원하는 청취자들에게 바오로 서간을 중심으로 쉬운 해설을 곁들여 말씀 묵상을 함께한다. 현재 바오로의 여러 편지 중에서 가장 길고, 신학적 내용도 풍부한 로마서를 공부하고 있다. 방송됐던 테살로니카1서, 코린토1서, 필리피서 강의는 평화방송 라디오 누리집으로 다시 들을 수 있다. ▶방송 일시: 매주 월~토요일 오전 6시 5분~6시 50분 ▶진행: 지승신 아나운서 ▶제작: 박승배 PDcpbc2014.03.18

흥행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숨겨진 가톨릭 코드는?동생의 희생, 예수 구원과 닮아 관객수 약 1000만을 동원하며 올 겨울 가장 흥행한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 주제곡 'Let it go' 열풍을 불러 일으키며 전국의 유치원생들을 얼음 마법의 주인공 엘사로 만든 영화. 월트 디즈니가 '왕자와 공주', '멋진 남ㆍ여 주인공'의 판에 박힌 러브 스토리를 깨고, '가족애'라는 새로운 주제를 다룬 이 영화에 '가톨릭 코드'가 숨어 있다. 미국의 한 침례대학 교수는 "겨울왕국은 가장 교회적인 영화로 여주인공 엘사는 사탄의 상징성을 일부분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을 내놔 눈길을 끌었다. 그는 엘사와 여동생 안나의 관계는 성경 속에서 죄인을 위해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고 했는데, 엘사는 원죄를 저지른 인간의 모습을, 안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힘겨운 순례 여정을 떠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서석희(전주교구 홍보국장) 신부는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다른 이들이 힘을 합쳐 구원해주는 여정을 통해 결국 희생을 통한 진정한 사랑과 그보다 더 큰 가치를 일깨우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며 "이는 성경이 말하는 전형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와 일치한다"고 말했다. 영상미가 돋보이는 엘사의 얼음 마법은 가족인 동생마저도 해치는 무시무시한 힘이다. 하지만 동생 안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언니를 만나기 위해 힘겹게 얼음산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여정에서 만난 이가 순록 스벤을 탄 젊은 청년 크리스토프. 이들은 깊은 산속 늑대들을 물리치고, 거대 얼음괴물과도 맞서며 위험을 무릅쓰고 언니 엘사를 구하러 가는데…. 이쯤에서 배역 이름에서도 흥미로운 가톨릭 코드를 찾을 수 있다. 엘사(Elsa)의 'El'은 히브리어 신(God)을 뜻하는데, 엘사는 신처럼 전지전능한 힘을 보이려는 죄 많은 인간을 나타낸다. 안나(Anna)는 히브리어로 '은혜로운(graceful)'이란 뜻으로, 신의 권능을 부리려는 언니를 저주에서 구해 주님 곁으로 인도하고자 고군분투하는 하느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크리스토프(Kristoff)의 영문 이름 'Christopher'를 그리스어로 풀이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다. 크리스토프가 타는 순록 '스벤(Sven)' 또한 노르웨이어로 청년인데, 이 둘은 모두 젊은 열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청년들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올라프(Olaf)는 '조상(ancestor)', '조상의 가보(family treasure)'란 뜻을 지녔다. 영화에서도 올라프는 마치 곁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신앙의 선조처럼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 일행을 돕는다. 언니 엘사를 구하기 위해 힘겨운 여정 끝에 눈보라를 뚫고 다가간 안나. 하지만 엘사 앞에 다가선 순간 온몸은 꽁꽁 굳어 얼음석상이 돼버린다. 그제서야 엘사는 여동생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그만 눈물을 흘리고, 이 눈물은 얼어붙은 안나를 녹인다. 관객들의 마음을 울린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고, 다시 부활하여 우리에게 더 큰 사랑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부활의 신비와 일맥상통한다. "네가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희생한 거니?" "난 언니를 사랑하잖아." "아! 진실한 사랑의 행동만이 얼어붙은 심장을 녹일 수 있구나." 마지막 대사처럼 영화가 지닌 신앙적 코드를 적용해 보면서 우리를 위해 목숨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금 떠올려보고, 우리 스스로 진정 예수님 사랑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주님 영광이 드러남을 일깨워보자.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cpbc2014.03.04

신약의 비유<5>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상)추수 때가 되기 전에 하느님 나라 체험해야 ‘뿌려진 씨’ 비유가 전하는 핵심은 농부도 씨도 아닌 바로 하느님 나라다. 벼를 추수하는 모습. 평화신문 자료사진 1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는 공관복음에서 씨(씨앗)를 소재로 하는 세 비유 중 하나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비유로, 마르코복음만이 이 비유를 전해준다. 하느님 나라를 알려주는 비유‘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다’라고 시작하는 비유는 씨가 자라나는 것을 내용으로 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깨닫게 해주는 비유다.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비유 내용은 다음과 같다.성경에 번역된 것을 따르면, 비유는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그리스어 원문에 따라 “하느님 나라는 마치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려 놓은 것과 같다”로 고쳐 읽을 수도 있다. 어떤 번역을 따르든 ‘하느님 나라는 과연 무엇과 비교가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다른 말로 하자면, ‘씨를 뿌리는 어떤 사람’과 ‘뿌려진 씨’ 중에 ‘이 비유에서 말하는 중심은 무엇일까?’하는 문제다. 비유에서 씨 뿌린 사람과 뿌려진 씨가 모두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사람의 경우 그에게 해당되는 표현은 ‘씨를 뿌렸다-모른다-낫을 댄다’이다. 반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란다-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낟알이 영근다’라고 표현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비유를 살펴본 후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것은 유다인들의 하루 계산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다인들은 지금의 우리와 달리 ‘해 질때부터 다음날 해 질 때까지’를 하루로 계산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27절의 내용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 모습을 나타낸다. 씨가 싹이 터서 자라는 것 역시 우리가 보통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잠언 20장 4절의 내용을 떠올릴 수도 있다. “게으름뱅이는 제철에 밭을 갈지 않고 수확철에 소출을 찾지만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잠만 자는 농부의 게으른 태도가 아니라, 농부의 활동이 직접적으로 싹이 트고 자라는 것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 표현은 이런 강조점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씨가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농부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농부의 역할은 없다. 복음서는 그것을 ‘저절로’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 비유 이외에 이 표현이 사용된 것은 사도행전 12장 10절이 유일하다. “그들(천사와 베드로)이… 쇠문 앞에 다다르자, 문이 앞에서 저절로 열렸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사도행전의 문맥에 따라 비유의 의미를 보면 저절로 열매가 맺는다는 것은 외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하느님에 의해라는 말을 덧붙여 이해할 수 있다.“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마르코복음의 비유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이 규칙에 따라 서술된 과정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꽤 긴 시간을 암시한다. 하지만 다시 등장하는 농부의 행동은 사못 다르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많은 경우 비유에서 강조되는 것은 대조인데 여기서도 긴 시간 동안의 성장과 곧 낫을 댄다는 표현이 서로 대조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수확의 때는 주로 종말의 시기와 관련이 있다.(마태 13,24-30 ‘가라지의 비유’ 참조)처음 던진 질문에 답하자면, 이 비유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농부도 아니고 씨도 아니다. 이 비유는 이야기 전체가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우선 농부의 행동과 씨가 자라는 과정을 한데 묶어서 보면 비유의 내용은 이렇다. 농부는 씨를 뿌렸다-씨는 싹이 터서 자란다-하지만 농부는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씨는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낫을 댄다.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씨를 뿌렸다’는 표현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씨를 뿌린 농부조차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씨는 땅에서 저절로 자라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라난 씨에게 낟알이 영글면 농부는 수확을 하는데, 이것은 미래에 올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의미한다.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이 비유를 듣는 청중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 비유가 전해주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또 마치 없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특별히 아픈 이들을 낫게 하고, 악령을 쫓아내는 일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드러난다. 하지만 여전히 제자들과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마치 농부는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 완성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것이 당장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마치 씨가 싹이 터서 자라고 또 그 후에 낟알이 영그는 것처럼, 아직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다.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종말론적 시간, 곧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가 이 비유에서 표현된다. 이 종말론적 시간은 우리에게 회개 가능성을 열어놓는 시간이다. 여전히 우리는 그 과정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부가 수확철이 되면 지체없이 곧 낫을 들어 수확을 하는 것처럼, 종말 때에는 더 이상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이다. 평화신문2014.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