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이달의 교계잡지](//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5628_1.1_titleImage_1.jpg)
[출판]이달의 교계잡지▨가톨릭 디다케 신앙의 해 신앙의 핵에서는 '안락사, 악인가 선인가?'를 다뤘고, 신앙의 뼈대 공의회 바로 맞추기에서는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관해 알아봤다. 성경꼭지에서는 '예수님의 발자국 따라 밟기'와 '띵호아 모세오경'을 실었다.(서울대교구 청소년국/3500원) ▨가톨릭 비타꼰 특집으로 신흥종교단체 신천지교회를 다루며 피해사례와 가톨릭교회 대처 방안을 실었다. 이승환 기자와 함께 떠나는 신앙여행에서는 대전교구 공세리 성지성당을 방문했고, 영성의 빛에서는 천주교 사도직회(팔로티회)를 소개했다.(마리아의 아들수도회/4000원) ▨경향잡지 경향 돋보기에서는 '정전 60년, 한반도 한민족'을 주제로 △정전 60년, 절반의 성공 한국과 위기 국가 북한(조한범) △북한의 3차 핵실험, 더욱 불안해진 정전 질서(고유환) △남북한 평화를 위한 교회의 노력(이기헌)을 게재했다.(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3300원) ▨교회와 역사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가 미사를 봉헌한 기념 경당이 있는 초남이성지, 사적 제288호로 지정된 전동성당 등 전주시 일대 성지 순례기를 실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와 한국교회에서는 최재선 본부 이사와 김기준 전 사무국장을 인터뷰했다.(한국교회사연구소/3000원) ▨그물 민족화해의 길을 특집으로 다루며 '어느 북한 이탈 주민의 호소'를 싣고 북한 이탈 주민의 현실과 고충을 살펴봤다. 지난 호에 이어 '일치의 영성을 살아가는 주교들'을 소개하며 포콜라레운동에 참여하는 주교들의 삶과 신앙을 소개했다.(마리아사업회/3000원) ▨레지오 마리애 레지오 영성으로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선교합시다(여형구) △레지오 마리애와 두 분의 교황님(맥그리거/구자륭) △레지오 단원의 소명은 무엇입니까?(서철) △교회 선교에 있어 사제와 평신도(죠셉 머피/이재호)를 다뤘다. 도란도란에서는 '레지오 입단기'를 실었다.(한국레지오마리애협의회/비매품) ▨말씀지기 매일 복음과 말씀 해설을 영한대역으로 실었다. 아침뜨락에서는 김종오(예수성심전교수도회) 신부가 '불완전함을 안고 산다는 것'을 기고했고 영성에세이는 △새 복음화를 향한 부르심 △가족 같은 본당에서 시작하는 새 복음화를 다뤘다.(가톨릭출판사/3000원) ▨사목정보 '중남미교회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를 특집주제로 △라틴아메리카 가톨릭교회의 역사와 현실(김항섭) △기초 교회공동체와 해방신학이 세계교회에 끼친 영향(유혜숙) △종들의 종!(백남해) △중남미 가톨릭교회를 주목한다-한국교회의 중남미 선교를 게재했다.(미래사목연구소/1만 원) ▨생활성서 특집으로 '신앙의 해에 아브라함을 만나다'를 주제로 △아브라함에게서 배운다(방교원) △신앙의 해에 아브라함을 만나야 하는 이유(손희송)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편집부)을 실었다. 밀양 송전탑 반대 촛불집회 100회 현장을 찾아갔다.(생활성서사/3900원) ▨성서와 함께 10주년을 맞는 민들레 국수집 서영남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창세기 궁금해요에서는 '선조들은 정말 그렇게 오래 살았어요?'를 다뤘고, '배워봅시다 성경의 언어'에서는 아브라함, 야훼, 아멘 등 히브리어로 쓰인 이름과 주요 표현을 알아봤다.(성서와함께/3000원) ▨소년 특집기사로 '신부님이 되고 싶어요!'를 게재하며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과 방법을 자세히 소개했다. 예수님이 살던 곳 꼭지에서는 '시온산에서'를 다뤘고 성경 속 인물이야기에서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인 오바드야'에 관해 알아봤다.(가톨릭출판사/4000원) ▨야곱의 우물 표지 이야기에서는 1인 NGO 문화운동단체 '문화를 생각하는 사람들' 이종수(라우렌시오) 사무국장을 만나 인터뷰했다. 청년공감에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주제로 탈북 청년의 이야기와 탈북자 현실과 미래에 관한 대학생 견해를 실었다.(바오로딸/2800원) ▨참 소중한 당신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을 특집 주제로 △교육의 천년 대안을 생각하며(안영) △불멸의 영혼, 신사임당(이명희) △시대를 앞서 간 여성, 신사임당(최제영) △가정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사임당(편집부)을 실었다. 표지 인물로 재즈 피아니스트 진보라를 만났다.(사단법인 미션3000/3500원) 박수정 기자조은일2013.05.29
 루치우스 로트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4/04/rc/506544_1.0_titleImage_1.jpg)
[덕원의 순교자들](33) 루치우스 로트 신부교황대사 비서직 대신 선교사의 길 택한 주님의 종루치우스 로트 신부(Lucius Roth) ▲출생: 1890년 2월 19일, 독일 뷔르츠부르크 바이흐퉁엔 ▲세례명: 콘라드 ▲한국명: 홍태화(洪泰華) ▲첫서원: 1910년 10월 16일 ▲종신서원: 1913년 10월 16일 ▲사제 수품: 1914년 7월 5일 ▲한국 파견: 1924년 8월 17일 ▲소임: 육도포ㆍ원산주교좌본당 주임, 덕원수도원 원장 겸 부감목, 덕원신학교 교수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9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3일/4일, 평양인민교화소 루치우스 로트 신부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에게서 수도원과 선교 사업의 모든 책임을 떠맡아 운영한 ‘덕원수도원의 맏아들’이었다. 수도원에서 소임을 분배할 때마다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이 가장 힘든 일을 맡아 한 그는 육도포ㆍ원산주교좌본당ㆍ수도원장ㆍ원산대목구 부감목ㆍ신학교 교수ㆍ원산수녀원 고해신부ㆍ새 선교사들의 한국어 교사 등 셀 수 없는 과중한 업무를 맡아서 했다. 로트 신부는 1890년 2월 19일 독일 뷔르츠부르크교구 베르머릭스하우젠 바이흐퉁엔에서 아버지 이시도로 로트와 어머니 가타리나 라이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콘라드. 9남매 가운데 누이 둘이 툿찡 포교 베네딕도회 수녀원에 입회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했다. 신앙심과 재능을 본 본당 신부의 추천으로 소신학교인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09년 9월 ‘루치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을 시작, 1910년 10월 16일 첫서원을 했다. 첫서원 후 로마 성 안셀모대학으로 유학 간 그는 1913년 10월 16일 종신서원을, 1914년 7월 5일 사제품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여파로 그는 독일인이란 이유로 로마에서 추방돼 1920년에 가서야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후 상트 오틸리엔 선교신학교에서 지리와 영어ㆍ이탈리아어 등을 가르친 그는 1921년 2월부터 1923년 1월까지 뮌헨 주재 교황대사 에우제니오 파첼리 대주교의 비서 및 보좌관으로 일했다. 훗날 비오 12세 교황(재위 1939~1958)으로 즉위한 파첼리 대주교는 교황이 된 후에도 로트 신부의 노력과 정확함, 능력을 잊지 못해 안부를 챙길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 교황대사 비서직을 그만둔 그는 1924년 8월 17일 한국으로 파견돼 원산주교좌 본당과 육도포본당 선교기지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는 본당 사목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처지에 대해 푸념하지 않았다. 공소 방문길에 눈보라로 탈진해 얼어 죽기 직전 극적으로 구출돼도, 독감으로 나흘간 의식이 없어도, 생활비가 없어 우유만 먹고 살아도, 마적의 습격을 받고 늪지대에 빠져도 단 한 번도 비관하거나 비난한 적이 없었다. 로트 신부는 자신에 대해선 엄했지만, 신자들에겐 자상한 목자였다. 그는 생활비를 아껴 신자들이 겨울에 성당 맨바닥에 앉지 않도록 마루 판자를 깔았다. 또 시골 공소에서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성당으로 와야 하는데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할 수 없다며 자신이 직접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줬다. 로트 신부의 이런 인간적 면은 평양인민교화소 수감 때도 많은 간수에게 감화를 줘, 한 간수는 교화소 담장 너머로 비밀편지를 전해주고 훗날 세례를 받기도 했다.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쁜 일상에도 그는 한국인 신자들과 새 독일인 선교사를 위해 우리말 「미사경본」을 펴냈다. 그리고 「연습 문제가 포함된 독ㆍ한 문법」, 「아이들의 미사 고해성사 안내」, 한국어와 일본어로 된 「덕원수도원과 성당 안내」, 평수사용 우리말 성무일도서 「수사통경기도」 등을 번역 출간했다. 덕원수도원 연대기 작성자는 로트 신부의 책 출간을 반기며 “이로써 한국어 공부가 편하고 쉬워졌으니 수도자들은 35살쯤으로 되돌아가 이 책을 손에 들고 한국어 공부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은 좀 복잡한 소설처럼 읽히지만 라틴어를 익히기 위해 쏟아야 했던 노력의 1/3도 필요 없다”고 극찬했다. 루치우스 로트 신부는 덕원의 다른 수도자들보다 앞서 1949년 5월 9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루페르트 클링자이스ㆍ아르눌프 슐라이허 신부와 함께 덕원수도원에서 체포돼 함께 평양인민교화소에 갇혔다. 그의 철두철미함과 정확성은 감옥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비밀편지를 작성해 덕원 수도자들이 갇힌 이유와 그 부당함을 세상에 알렸다. 또 그때까지 덕원 수도자 가운데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은 이춘근(라우렌시오) 신부에게 ‘전권 위임’ 편지를 보내 수도원의 명맥을 유지하게 했다. “나를 비롯한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루페르트 신부, 요셉ㆍ그레고르 수사는 각각 5년 형을, 그레고르 신부와 다고베르트 신부는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모든 것은 이른바 ‘나쁜 사상’ 때문이었다.” 나쁜 사상이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대치되는 성경과 그리스도교 이념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감옥생활은 혹독했다. 수도자 18명이 8㎡ 감방에서 온종일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어야 했다. 물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밤에는 자리가 부족해 모두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했다. 돌아누울 때도 구령에 맞춰 18명이 동시에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로트 신부는 좌절하지 않고 수도자들을 격려하고, 작은 목소리로 십자가의 길과 묵주 기도를 함께 바쳤다. 또 서로의 기억을 되살려 성무일도 대부분을 짜 맞춰 기도했다. 그는 비밀편지에서 “우리는 이와 빈대들 사이의 더러움 속에 있으며… 신앙을 위해 고통받고 있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반격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퇴각하면서 평양인민교화소 수감자 5000여 명을 학살했다. 루치우스 로트 신부도 10월 3~4일 밤에 처형됐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 수도자 증언 “그분은 수년 동안 수요일마다 더위와 추위, 폭풍과 비를 무릅쓰고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덕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려오셨습니다”(크리소스토마 슈미드 수녀). “루치우스 원장신부는 맡은 일을 대충 처리하는 법이 결코 없다. 우리 원장신부는 전혀 쉬지 못하고 하는 일들이, 다른 사람이라면 10명이라도 벌써 망가뜨렸을 중노동이기에, 언젠가 그분이 몹쓸 병에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원장 신부가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온전한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 여기시는 것이 참으로 존경스럽다”(에르네스토 지베르츠 신부). cpbc2014.04.23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1) 토마스 베리(하)](//cpbc.co.kr/CMS/newspaper/2014/07/rc/517257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1) 토마스 베리(하)자연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 되찾아 생태문명 추진 토마스 베리 신부와 함께한 필자 이재돈 신부. 아퀴나스와 테이야르토마스 베리의 신학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신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와 테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이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13세기 유럽에 새롭게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종합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적 관점에 익숙해져 있던 당시의 신학적 고정 관념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아퀴나스의 새로운 종합은, 중간에 갈등은 있었지만, 새로운 세계관 안에서 신앙을 되살리는 작업이었고 결국 중세 교회가 근대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현대과학인 진화론과의 종합을 시도한 테이야르의 새로운 종합 역시 신학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테이야르는 진화론적 과학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테이야르는 그가 살고 있는 두 세계의 분열에 관심이 있었다. 하나는 종교적 의미를 잃은 세속적이고 과학적인 세계와 다른 하나는 현대 인류와 소통하기를 실패한 그리스도교의 세계이다.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추구는 이 두 개의 세계를 통합하는 일이었다. 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테이야르는 존재와 실체에 의존하는 창조론 대신에 되어감과 과정에 의존하는 진화론을 이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대한 테이야르의 재해석은 다윈의 진화론을 염두에 둔 해석이며, 그런 면에서 성서와 전통적 교리가 전제하는 정적인 우주관과는 다른 설명 방식이다. 테이야르의 이런 새로운 시도는,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13세기 아퀴나스가 했던 시도의 현대판이라고 할 것이다.베리의 생태사상과 신학사상은 테이야르의 우주관과 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우주는 처음부터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영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우주 이야기와 인간 이야기는 한 이야기의 두 가지 면이라는 것, 구원 과정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창조과정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는 것 등이다. 더 나아가 베리는 테이야르를 사도 바오로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의 하나로 평가한다. 이런 의미로 베리는 근본적으로 테이야르 계통의 사상가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베리는 생태적 관점에서 테이야르와 일정한 거리를 둔다. 베리는 테이야르가 인간 중심주의적 우주론에 근거한 진보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 태도를 지녔다고 비판한다.역사적 추진력베리는 현대의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에 필요한 것은 자연 안에 깃든 신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가르침을 회복하는 것과 그것에 근거해서 새로운 생태문명을 실현해 낼 수 있는 역사적 추진력이라고 지적한다. 이 두 가지 중에서 베리는 그리스도교는 이미 강력한 역사적 추진력을 지니고 있다고 진단한다.베리는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더욱 강한 역사적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교는 천년왕국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가 있는데 그것이 역사성에 대한 의식에 있어서 어느 종교보다도 그리스도교가 가장 강력해진 이유이다. 역사적 변화보다는 원형적 경험에 주로 관심이 있는 아시아 종교들과 달리, 그리스도교의 강점은 완성의 시간에 이를 때까지 역사적 발전에 대하여 의식하고 있고 그것의 실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추진력이 서양 역사를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대로 변화시켜 온 힘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베리는 생태문명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도 그리스도교가 지닌 역사적 역동성이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죄와 원복(原福)그 때문에 그리스도교에 요청되는 것은 자연 안에 깃든 신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동안 하느님의 초월성은 강조하였지만 내재성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자연 안에 깃든 신성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은 그동안 지나치게 구원 중심적인 영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도 바오로가 사용한 원죄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구원 중심의 영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원죄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내려 주셨다는 원복 개념도 있으며, 원복이 하느님께서 이 세계와 맺으신 더 근본적인 관계이다. 창조를 긍정하는 창조 중심의 영성이 회복할 때 창조세계에 깃든 신성을 회복할 수 있다.종교 간 대화와 협력그리스도교가 자연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을 되찾기 위해 베리는 다른 종교와의 대화와 협력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자연이 지닌 신비,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로운 삶은 아시아 종교들 안에서 더 발전하였기에 그리스도교는 거기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이다. 아시아 종교들로부터 자연 세계의 신성함,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 모든 생명체에 대한 깊은 사랑, 대우주와 소우주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배워야 한다고 베리는 강조한다. 그리고 인디언 같은 원주민들의 토착 종교들로부터 땅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는 지구에 대한 인간의 깊은 유대를 배울 때 자연에 깃든 신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본다. 자연 속에 깃든 신성의 회복우주 속에 깃든 신성을 체험할 때, 창조세계 안에는 하느님의 뜻 즉 하느님의 창조 질서가 그대로 새겨져 있고 하느님의 손길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연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배우는 첫 번째 학교이며 자연의 신비 속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체득할 수 있다. 현대인들이 하느님을 체험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연 속에서 신비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 갖기가 어려운 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어린이들을 보면 자연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없다. 많은 어린이가 인위적인 환경에서만 지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이럴 경우 자연과의 직접 체험이 없어서 하느님 체험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베리는 걱정하고 있다. 자연 앞에서 느끼는 신비 체험은 종교 체험의 원형적 요소라고 할 것이며, 때문에 자연 보호는 종교인들의 첫 번째 과제가 되어야 한다. 생태신학 발전에 끼친 영향베리는 일차적으로 문명사학자이며 생태사상가이지만, 그의 생태사상과 생태신학적 전망은 기존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들이 그동안 고민해 왔던 신학적 주제들을 생태적 전망으로 확대해야 할 근거와 방향을 제공하고 있다. 우선, 전통적 신학 주제들을 생태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시도들이 전개되고 있다.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저서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범재신론 (panentheism)적으로 설명하면서 생태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성부는 초월적인 하느님을 드러내지만 성자와 성령은 창조 세계 안에 깃든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의 초월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내재를 깊이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기치 아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던 해방신학자들도 그 신학적 전망을 생태 문제로 확대하였다. 많은 해방신학자들이 처음에는 생태적 관심은 제1세계에 속한 부유한 사람들의 한가한 관심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생태계 보전과 생태정의의 실현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긴박한 주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환경파괴의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생태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가 이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여성신학자들도 생태신학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 가부장제도가 여성 억압의 도구만이 아니라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 형태라는 것이 학문적으로 연구되면서 여성의 해방은 자연스럽게 자연의 해방을 동반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로즈메리 류터나 샐리 맥페이그의 저서들은 여성신학이 여성생태신학으로 심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산업문명을 생태문명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이 과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생태문명에 대한 꿈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역사적 추진력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교가 인간과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 줄 수 있는 가르침을 회복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생태 위기를 극복하고 생태문명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평화신문2014.07.02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8>칼 라너(중)](//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1344_1.1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칼 라너(중)시대, 사회적 문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응답하고자 노력 #사목과 교육, 연구활동 병행 라너는 1936년 12월 19일 「그리스도의 늑방으로부터」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잘츠부르크에서 '종교철학의 기초'를 주제로 강의했는데, 강의록은 1942년 「말씀의 청자」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라너는 1937년 가을 인스브루크대에서 정식으로 강의를 시작했는데 첫 강의는 '은총론'이었다. 그러나 인스브루크 신학대는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하고 새로운 교육법을 제정하면서 해체됐다. 신학 교수들은 무기한 정직을 당했고 예수회 회원들은 추방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신학과는 스위스로 이전했다. 형 후고 라너는 스위스로 갔지만 동생 칼 라너는 비엔나로 가서 사목을 하며 영신수련을 지도했다. 그는 사제양성과 사제 평생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이 기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사목신학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세상에서 어떠한 과제를 가졌는지 숙고했다. 그는 다양한 장소에서 강연했고, 교회 일치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개방적인 자세로 교회 고위 성직자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갈등은 그가 비오 19세 교황의 지지를 이끌어내 무마됐다. 전쟁이 끝나자 라너는 다시 인스브루크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학술활동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부지런한 성격 탓에 새벽 5시에 미사를 봉헌한 뒤 연구교육 활동을 했다고 한다. 강의 분야는 창조론, 원죄론, 고해성사론, 성품성사론, 병자성사론이었고, 라틴어로 강의했다. 학술 활동 외에도 주일미사, 고해성사, 영신수련 동반, 본당공동체 지도 등 사목활동을 병행했다. 칼 라너의 탁월한 학문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는 마지막까지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열정을 불태웠다. #탁월한 학문적 업적 그의 탁월한 학문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는 다양한 학회를 통해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신학의 관계를 연구하고 발표했다. 라너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1905~1988)과 함께 새로운 가톨릭 교의신학을 기획하기도 했다. 또 다양한 신학종합사전과 여러 총서 그리고 신학저널이 탄생하도록 힘썼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작업한 중요한 기초자료로는 「신학과 교회를 위한 사전」, 「세상의 성사」, 「신학 소사전」, 「논의제기」, 「사목신학편람」, 「구원의 신비」, 「공의회」, 「공의회 소문헌」 등이 있다. 개인논문 모음집으로는 16권에 이르는 「신학논총」이 있다. 라너는 시대 문제에 즉각 응답하기 위해 소논문을 주로 작성했다. 저술은 4000여 편에 이른다고 알려졌다. 그중에는 체계적으로 작성된 방대한 분량의 저술도 찾아볼 수 있다. 철학박사 청구 논문인 「세계 내 정신」은 라너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서양의 중세 사상과 근대주의를 현대적 차원에서 접목하려는 시도였다. 그의 두 번째 대표작인 「말씀의 청자」는 철학 및 기초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에 대한 숙고다. 여기서 라너는 인간을 하느님 계시를 순종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실존적 존재라고 표현했다. 라너는 영성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가 쓴 영성서적으로는 「침묵 속의 만남」, 「성시간과 수난묵상」, 「기도의 필요성과 축복」 등이 있다. 그의 학문적 열의는 평생 그칠 줄 몰랐다. 1972년에는 「교회의 구조변경」을, 1976년에는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을, 그리고 그가 사망하던 해인 1984년에는 「교회 일치-실질적인 가능성」을 출판했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신학자문으로 참여해 큰 공헌을 했고, 공의회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개최된 독일 주교회의(1971~1975)에도 참가해 영향을 미쳤다. #마리아에 관한 새로운 이해로 교황청과 충돌 신학자로서 삶이 성공과 명성으로만 치장되진 않았다. 그는 1950년대 교회와 마리아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의혹의 시선을 받았다. 라너는 기존 이해방식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수용하고자 했다. 라너의 눈에 교회는 분명히 거룩한 것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행업을 바탕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회는 인간의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교회는 죄 있는 인간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 이후 파괴된 유럽 사회에서 새로운 교회상을 세우려 했다. 1947년 '죄인의 교회', 1954년 '현대세계에서의 그리스도교인의 위치에 대한 신학적 의미'와 '성령을 끄지 마시오!'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당시 주교들은 라너의 새로운 교회관에 거세게 반대했다. 라너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마리아론과 관계된 것이었다. 1950년 '마리아 몽소승천'(성모승천) 교리가 반포되자 라너는 여기에 반대 의견을 썼다. 마리아 교리를 반대한다기보다 '교리 반포' 행위에 대한 다른 견해를 표명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라너에 따르면 교리 반포는 교의 발전에 대한 정당성과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중에서도 성경적 근거가 매우 중요한데 성경에는 성모승천과 관련된 내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성경에서 근거를 찾기 어려운데 교리를 반포하는 것은 가톨릭 지성인뿐만 아니라 타 교파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성모승천을 인간학적ㆍ종말론적 관점으로 이해 라너가 보기에 성모승천은 교리로 선포되지 않고도 단순히 교회의 믿을 내용으로도 충분히 유지될 수 있었다. 이는 라너가 마리아론을 현대인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학적ㆍ종말론적 관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라너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주목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자 십자가 위로 어둠이 덮치고 지진이 일어났다고 증언하는데 이것은 바로 죄와 죽음의 옛 세상이 몰락했음을 뜻한다고 라너는 말한다. 그와 동시에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성경의 증언은 새로운 세상이 들어섰음을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옛 세상의 종말이자, 인간 영육의 완성이 이뤄지는 세상의 새로운 창조다. 성모 마리아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모승천을 인간학적ㆍ그리스도론적ㆍ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인간들의 종말론적 구원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라너의 견해였다. 그는 성모승천에 관한 믿음을 교리로 선포할 정도로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라너는 이에 대해 393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논문 「오늘날 마리아론의 문제들」을 작성했다. 그러나 로마의 시각에선 라너의 마리아론은 마리아의 독특한 구원적 위치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죽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대를 통해 인간 부활이 이뤄진다는 라너의 인간학적ㆍ종말론적 숙고는 마리아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완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라너의 새로운 마리아론이 마리아만의 독특한 위치를 흔드는 것으로 이해했다. 라너의 저술은 출판 검열로 출판되지 못했다. 라너는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서도 숙고했다. 그는 교회가 믿고 있는 마리아의 동정성을 원죄론적 관점보다는 오히려 구원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마리아의 동정 출산은 구원을 약속하신 하느님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행위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에 하느님을 받아들여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 하느님 구원 은총이 구체적으로 시작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동정 출산은 생물학적ㆍ육체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학적ㆍ구원론적 관점, 즉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인간의 전적인 긍정이라는 시각에서 고찰돼야 한다고 라너는 말한다. 라너의 이러한 주장에 교황청은 다시 한 번 의혹의 눈길을 보냈고, 율리우스 되프너(1913~1976) 추기경의 중재로 정직을 면했다. #미사 공동 집전 보편화에 기여 라너는 '미사 공동 집전'에도 새로운 이해를 시도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제의 미사 공동 집전은 생소했다. 라너는 교부들의 저술을 역사적으로 탐구해 「다수의 미사와 하나의 희생」이라는 논문을 1951년 완성했다. 여기서 라너는 미사 공동 집전은 교회 전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공동 집전이 드물었던 이유는 다수의 사제가 한 미사 안에서 오직 한 성체성사를 거행하기에 하느님 은총이 적게 베풀어진다는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비오 12세 교황은 이러한 문제를 더는 언급하지 말라고 라너에게 경고했지만 결국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라너의 주장을 받아들여 미사 공동 집전을 허용했다. 이규성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조은일2013.07.02
 오도 카젤(상)](//cpbc.co.kr/CMS/newspaper/2014/07/rc/519410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52) 오도 카젤(상)전례의 신학적 개념 규명과 일반화에 기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쇄신이 있기 전까지 사제는 신자들을 등 뒤로 한 채 벽에 붙은 제대에서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전례에 따른 미사를 드렸다. 사진은 트리엔트 방식의 미사 봉헌 모습. 【CNS】 그리스도인이 되는 입문성사인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신자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성사 생활, 폭넓게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가 함께 거행하는 전례에 참여할 때가 아닐까 한다. 소비문화와 물질주의 그리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믿으며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오늘도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전례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구원 사업을 지속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살아간다면 신앙인으로서 기쁨이 생겨난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가 앞으로 걸어갈 새 길을 제시하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2013.11.24.) 첫머리에 이렇게 복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세상이 주는 기쁨은 지속성과 깊이 면에서 복음이 주는 기쁨에 비길 수가 없지만 그 기쁨의 달콤함과 자극성이 사람들을 금방 빠져들게 하며 중독성을 지닌다. 반면에 복음의 기쁨을 맛보려면 준비가 필요하고 또 그 맛은 그렇게 달콤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지만 한번 맛을 본 사람은 세상의 것보다 훨씬 강한 매력에 빠진다. 이런 복음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첫째 장소는 교회에서 복음이 선포되는 전례 공간이다. 복음의 기쁨은 그것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때 가능하다. 미사 말씀 전례 중 ‘복음 환호송’을 외칠 때는 모두 일어난다. 왜 일어날까. 앉고 일어나고 하는 동작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의식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하는 동작은 보이지 않는 실재의 의미를 담은 상징 동작이라고 전례학자들은 말한다. 복음 환호송을 바치면서 일어나는 동작은 복음을 맞이하는 기쁨과 환호, 그리고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자세다. 예수님은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에 당신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다”(「전례헌장」 7항). 예수님께서 2000년 전 팔레스티나에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교회가 세세대대로 선포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 예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사들, 폭넓게 이야기하면 전례를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신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 계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복음의 핵심은 구속의 신비이며 교회는 그것을 계속 기억하며 은총을 충만하게 전한다. 가톨릭의 가장 큰 보물 중 하나는 전례주년이다.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한 해의 흐름을 통하여 지정된 날들에 하느님이신 자기 신랑의 구원 활동을 거룩한 기억으로 경축하는 것을 자기 임무라고 여긴다.” 곧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실현하신 신비 전체를 인간 역사에 자연스럽게 접목해서 일상화했다. 그럼으로써 “구속의 신비들을 기억하며, 자기 주님의 풍요로운 힘과 공로가 모든 시기에 어떻게든 현존하도록 그 보고를 신자들에게 열어 신자들이 거기에 다가가 구원의 은총으로 충만해지도록 한다”(「전례헌장」 102항). 사랑이 충만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신비를 통해 이미 인류를 구원하셨으면서도 그것이 현실이 되게 하시려고 지금도 당신의 사제직을 교회가 드리는 전례를 통해 지속하고 계신다(「전례헌장」 7항 참조). 전례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이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인해 가능하게 됐다. 전례 본연의 개념과 의미를 되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령이 이룬 사건이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는 전례를 통한 이 심오한 신학적 원리, 곧 예수님의 현존(Præsentia), 기억(Anamnesis), 그리고 신비(Mysterium)라는 개념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본래의 중요한 요소 대신 외적인 예식 절차와 세부 규칙 등 부수적 요소들이 더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면서 잊고 지낸 것이다. 그러다가 계몽주의와 고고학, 인쇄술의 발전이 원전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증진시키는 계기가 됐으며, 이는 전례 분야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시대적 영향으로 전례 쇄신을 위한 전례운동이 일어났다. 전례운동은 전례의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였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전례운동이라는 용어는 1894년 독일 신부 A. 쇼트가 쓴 Vesperale에서 나왔다. 여기서 전례운동은 “‘오늘’을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의 표징으로 생겨나 성령께서 당신 교회 안에서 이끄시는 움직임”을 가리킨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 말을 요약해 “거룩한 전례를 증진하고 쇄신하는 열정”(전례헌장 43항)이라고 전례운동을 정의했다. 전례운동의 흐름을 좀 좁혀서 살펴보자면 피스토이야 주교회의(18세기), 신학적 각성과 수도회 쇄신(19세기), 새로워진 교회 개념(20세기) 등을 들 수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17세기까지 이어온 전통적인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이념들을 배척하고 새로운 이념들을 추구하던 계몽주의를 받아들여 이를 교회에 적용하였다. 그들은 가톨릭의 가르침과 삶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 교의를 아주 순수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이탈리아 피스토이야에서 열린 주교회의(1786년)는 이 관점을 전례에 적용했다. 비록 얀세니즘의 영향이 있었고 1794년 교황 비오 6세에 의해 7가지 항목이 단죄되기는 했지만, 이 주교회의의 많은 결정사항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전례 쇄신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19세기 들어와서 영국에서는 뉴만 추기경과 키블 그리고 푸세이 등이 중심이 돼 옥스퍼드 운동을 통해 가톨릭 신앙의 몇몇 원칙들과 잃어버렸던 원천들을 복구하려는 노력을 전개했다. 또 독일에서는 요한 세일러, 요한 묄러, 마티아스 시번과 같은 저술가들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mysticum Christi)로 보는 교의를 강조했다. 이 교의는 전례를 이해하는 데 필수 개념이 된다. 프랑스 솔렘과 독일 보이론에서 있었던 수도회 쇄신도 큰 역할을 했다. 전례운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솔렘 수도원의 프로스페르 게랑제(1805~1875)는 전례를 기도하고 삶으로 실천해야 할 그 무엇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성음악을 재정립해 신자들도 쉽게 전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보이론 수도회의 창설자인 마오로 플라치도(1825~1890)와 볼터(1828~1908) 형제, 벨기에의 마레수 수도원, 루벵의 몽 세자르 수도원들이 게랑제의 영향을 받아 전례운동을 이어갔다. 오도 카젤(1886~1948)은 예수님의 구원 신비가 교회 전례에서 구현되고 있음을 밝혀낸 신비신학자다.전례운동의 본격적 시작은 1909년 벨기에 말린에서 개최된 가톨릭 회의다. 이때 랑베르 보뒤엥(1873~1960) 신부는 전례 쇄신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그는 「미사경본」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신자들의 주요 기도서로 배포할 것을 호소하면서, 가톨릭 신앙은 미사와 성무일도에 기반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자들이 미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신앙은 전례에 기반을 둬야 올바로 성숙할 수 있다고 밝힌 것이다. 그는 또 그레고리오 성가와 성가대의 영적, 전례적 기능을 장려할 것을 호소했다. 독일에서는 일데폰세 헤르베겐(1874~1946)이 전례총서 「기도하는 교회」(Ecclesia Brans)를 창간했고, 로마노 과르디니(1885~1948)은 「전례 정신」을 저술했다. 또한 벨기에의 오도 카젤(1886~1948년)은 그의 유명한 신비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전례운동가들의 노력은 서서히 전례 쇄신의 바탕을 이뤄 비오 12세의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 1947)를 거쳐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첫번째 헌장인 「전례헌장」(Sacrosanctum Concilium, 1963) 으로 결실을 맺게 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전례가 단순히 외적이며 법률적인 예식 체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공동체가 드리는 공적 예배임을 온 교회에 선포했다. 이로써 엄숙하면서도 장엄하며 잘 연출된 연극 같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예식은 이제 주례자를 마주보며 그가 하는 동작 하나하나를 자세히 볼 수 있게 됐다. 또 자신들의 언어로 기도하고 하느님의 구원 신비에 대해서 좀더 가까워질 수 있게 됐다. 미사가 이제 더는 평신도들이 못 알아듣고 성직자만이 아는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예식이 아니라, 참여하는 모든 이들 앞에서 구원의 신비가 펼쳐지는 위대한 사건으로 인식됐다. 지금까지 전례 변화의 역사적 과정을 전례 운동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다음에는 이 전례의 신학적 개념을 밝혀내고 일반화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오도 카젤은 누구이며, 그의 연구 업적들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본다. 윤종식 신부 의정부교구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전례학을 가르치면서,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평화신문2014.07.15

35년 내공 쏟아부은 마지막 전시 투병 중인 서예가 강주관 개인전, 25일부터 평화화랑 한글서예가 강주관씨와 그의 작품 '천주공경가'(105×35㎝). 35년간을 한결같이 한글서예에만 몰두해온 달물결(月波) 강주관(이레네오, 67, 수원교구 광주 도척본당)씨. 초기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의 신앙글이나 천주가사, 최양업 신부 서한 등을 단아한 궁체로 옮겨 교회 안팎에서 호평을 받은 그가 뇌종양으로 힘겹게 투병하는 와중에 25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 명동 평화화랑(02-727-2336)에서 개인전을 마련한다. 1969년부터 2년간 베트남전에 의무병으로 참전했다가 앓게 된 고엽제 후유증에도, 또 지난 2월엔 3개월 시한부 뇌종양 판정을 받고도 붓끝에 마음을 담아 한 획 한 획 써내려간 하느님 말씀, 그리고 초기 조선교회 신앙 선조들의 신앙적 성찰 내지 가르침을 담은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출품작은 성경 말씀과 황사영 백서, 김대건 신부의 옥중서신,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담인 신앙고백적 내용들, 윤형중 신부의 '사말의 노래' 등 40여 점에 이른다. 신앙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과 애주애인의 정신이 녹아 있는 '천주공경가'와 '십계명가', '사향가', '피악수선가' 등 천주가사도 빼놓을 수 없다. 다산 정약용의 아들인 운포(耘逋) 정학유(1786∼1855)의 농가월령가도 병풍 작품으로 선보인다. 투병 중인 남편을 대신해 인터뷰에 응한 부인 정인숙(아녜스, 64)씨는 "이제는 손발이 떨리고 정신이 희미해져 더 이상 작품활동을 할 수 없기에 지난 5월까지 제작했던 작품과 소장작을 모아 마지막 전시를 연다"며 "새로 작품을 쓰지 못하고 그간 보유하고 있던 작품을 모아 전시를 하게 됐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인사를 남편이 꼭 전해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1979년 한글서예에 입문한 그는 초기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의 피땀이 밴 글과 천주가사 등을 써왔으며, 충북미술대전 특선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서예대전(미협) 입선 4회, 동양서화대전 최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수원ㆍ대전ㆍ청주교구청과 천진암 성지, 배티성지 등 30여 곳 교회기관은 물론 해외 여러 곳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오세택 기자 cpbc2013.09.10

하느님 시선으로 생각의 벽 넘어야교파 초월 선교 성찰, 성 골롬반회 한국 선교 80주년 세미나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교구 지원 사제로 필리핀에 파견돼 마닐라 시내에 있는 말라떼본당에서 사목하는 박찬인 신부가 현지 아이들을 껴안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현대의 선교 개념은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에 쏠려 있다. 내가 선교하는 게 아니라 선교 주체는 하느님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뜻을 이행하는 것,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을 선교로 인식하고 실천해 가는 새로운 선교 비전이다. 그렇다면 다문화, 다종교사회로 이행하는 사회에서 '하느님의 선교'는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지부장 오기백 신부)가 2월 25~26일 서울 동소문로 골롬반 선교센터에서 마련한 한국 선교 80주년 기념 세미나는 이를 집중적으로 논의한 자리였다. '문화와 종교 안에서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참가자들은 교파를 추월해 선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사목적 성찰과 현장에서의 활동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종교와 문화, 생각의 벽을 넘어 모두가 하느님의 시선으로 더 좋은 대화와 상호 이해의 방법을 모색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서공석 신부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복음의 선교사명과 실천'에 관한 발제를 통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복음의 선교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김'이라는 구약성경의 언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며 "교회는 보살핌이라는 단어가 대표하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기억하며 그것이 역사 안에 살아있게 하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례적으로 기억하면서 신앙인들이 그분의 사랑과 보살핌을 자기들의 삶 안에서 실천하게 하는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수행(修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미씨오 데이(Missio Dei)'를 주제로 발표한 감리교 이현주 목사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는 사람이 주체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체인 활동"이라며 "그리스도인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 살도록 애쓰고 노력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수행이라고 한다면, 하느님 안에서 스스로가 실종돼 없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수행은 곧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목사는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수행은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를 좇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며 "이 목적이 이뤄지는 현장이 곧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가 실현되는 현장이요, 하느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 위에서 이뤄지는 현장"이라고 강조했다. 아일랜드 출신 선교사 임영준(E. Adaams) 신부는 '다종교와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에 관한 발제를 통해 "종교 다원사회에서 역사적으로 대화보다 다른 종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훨씬 많은 시간과 돈을 쓰고 더 많이 강조하는데, 이런 잘못을 바로 잡으려면 대화의 이론과 실제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문화와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주제로 발표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이찬수 교수는 "하느님이 일하시지 않는 곳이 없고 선교하시지 않는 적이 없기에 다문화는 물론 다종교 현상에 담긴 다양성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존재방식의 다양성을 드러내주는 세상의 성사(聖事)"라고 주장했다. 정복동(마리아) 음성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상담팀장은 '다문화 가정과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실천'에 관한 발표에서 역선교을 제안해 눈길을 끌었다. 골롬반 평신도 선교사 출신인 정 팀장은 "미국교회에서 해외에 파견했던 선교사를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되돌아오도록 해 역선교(Reverse Mission)를 하는데, 이제 우리 사회도 저개발국 선교지에서의 선교체험을 새롭게 바라보고 깨달으며 국내에서의 역선교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또 국내 다문화 가정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주 여성을 무시하고 천대하는 추악한 모습에서 돌아서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나가서 하는 선교든 다시 돌아와서 하는 선교든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평신도 선교사 양 수산나(Susannah Mary Younger)씨는 "1959년에 한국에 입국할 당시 제가 생각했던 하느님은 선교지 한국에서 체험한 하느님과는 다른, 훨씬 더 큰 떨림을 주고 풍요로운 하느님이셨다"며 그래서 "56년 세월을 대구대교구에서 청소년들과 함께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이라고 고백했다. 한국외방선교회의 김병수 신부는 "중국교회가 한국 천주교회 태동기에 모교회 역할을 한 측면을 생각하면 다른 어느 지역교회보다도 한국교회는 중국과 중국교회에 남다른 마음을 더해야 한다"면서 "중국은 보편교회가 끝까지 끌어안고 가야할 운명이자 사명"이라고 역설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임영선2014.03.04
![[생활속의 복음]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cpbc.co.kr/CMS/newspaper/2014/03/rc/499176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사순 제1주일(마태 4,1-11) 조재형 신부 (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유혹'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을 이겨내는 방법입니다. 악의 세력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방법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다음에 하지!'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이 '다음에 하지'라는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부부 싸움을 한 후에 퇴근해서 먼저 "미안해"라고 말하기로 했는데 막상 집에 와서는 그 말을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한마디 했으면 쉽게 풀릴 냉랭한 분위기는 그 한마디 말을 못하고 다음에 하자고 마음을 먹으면서 일주일, 한 달이 가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잘못된 습관을 고치겠다고 하지만 '다음에 하지' 하는 이 유혹 때문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기도 합니다. 아직 기회가 있다고, 아직 시간이 있다고 그래서 다음에 하자고 미루는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기도 하고, 하늘로 가는 기차는 떠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도 다 그러는데!'입니다. 예전에 광화문에서 종로경찰서 쪽으로 가는데 빨간불에 앞의 차가 멈추지 않고 가기에 저도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경찰관은 앞의 차는 잡지 않고 제 차만 잡더군요. 그래서 왜 앞의 차는 잡지 않고 제 차만 잡느냐고 하니까 경찰이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제 맘입니다. 면허증 주세요." 아무 말도 못 하고 범칙금을 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적당히 법을 어기고, 양심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니까 나도 그래도 된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닮아야 하는 분이 있다면 하느님을 위해 희생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 10년째 몸져 누워 있는 아내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남편,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성당의 화장실을 깨끗하게 치우고 성체조배를 하고 가는 형제를 닮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따르고 닮아야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나는 안 돼!'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절망을 버렸고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고, 다시금 주님의 커다란 사랑을 받아 교회의 큰 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희망을 버렸고 절망을 가졌기 때문에 구원의 빛을 볼 수 없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악의 세력은 '나는 안 돼!'라는 유혹으로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자녀를 키울 때도 그렇습니다. '너는 안 돼!'라는 말을 들은 아이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움츠러들며 패배 의식을 갖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너는 잘 할 수 있어, 잘 될 거야'라는 말을 들은 아이는 실패와 좌절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것을 봅니다. 중국에서는 원숭이를 쉽게 잡는 법이 있다고 합니다. 입구가 좁은 항아리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과일을 듬뿍 놓아둡니다. 그리고 그 항아리를 땅에 묻습니다. 그러면 원숭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과일 냄새를 맡고 나무에서 내려와 그 항아리를 보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 항아리 안으로 손을 넣어서 과일을 움켜잡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와도 원숭이는 과일을 놓지 못하고 그렇게 사람에게 잡힌다고 합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숭이처럼 그렇게 쉽게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존재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너무나 쉽게 유혹에 넘어가 자신은 물론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카인은 자신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교만이라는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다윗은 욕정이라는 유혹에 빠져서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카인은 이제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낳은 자식입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름부음 받은 왕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훌륭한 학식이나 능력으로는 유혹을 이길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 우리는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 우리는 교만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 우리는 권력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시기가 시작됐습니다. 주님께 의지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 삶의 유혹을 이겨내고 주님의 충실한 자녀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cpbc2014.03.04
![[성경 속 궁금증] 36. 계약의 궤는 왜 황금으로 만들었을까?](//cpbc.co.kr/CMS/newspaper/2012/06/rc/417457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36. 계약의 궤는 왜 황금으로 만들었을까?스스로 빛나는 영원불변성 상징2008년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제 49회 세계 성체대회 때 상징으로 사용된 '새 계약의 궤'. "그들이 아카시아 나무로 궤를 만들게 하여라. 그 길이는 두 암마 반, 너비는 한 암마 반, 높이도 한 암마 반으로 하여라. 너는 그것을 순금으로 입히는데, 안팎을 입혀라. 그 둘레에는 금테를 둘러라. 금 고리 네 개를 부어 만들어 네 다리에 다는데, 한쪽에 고리 두 개, 다른 쪽에 고리 두 개를 달아라. 그리고 아카시아 나무로 채를 만들어 금을 입혀라.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끼워 궤를 들 수 있게 하고, 채를 궤의 고리에 그대로 두어 거기에서 빠지지 않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내가 너에게 줄 증언판을 그 궤 안에 넣어라"(탈출 25,10-16). 성전의 모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계약의 궤(契約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계약의 궤를 모시고 이동했으며, 이 계약의 궤를 모시기 위해 성전을 만들었다. 그래서 초기 성전은 이동이 가능한 천막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계약의 궤는 모세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십계판(十誡板)을 담은 상자다(탈출 30,6). 계약의 궤는 시나이 산에서 제작된 후 길갈에 안치됐고, 이는 다시 베델(판관 20,27)과 실로(1사무 3,3)를 거쳐 잠시 불레셋인들에게 빼앗겼다가(1사무 4,11) 다윗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안치됐다. 다윗은 왕국의 수도로 정한 예루살렘에 계약의 궤를 모셔놓음으로써 이 도시를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계약의 궤를 만들고 보관하는 자세한 방법이 나온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궤는 모두 순금으로 덮여 있었다. 계약의 궤를 황금으로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순금으로 돼 있다고 믿었다. 태양이 황금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고 숭배했던 이유는 오로지 황금만이 스스로 빛을 만들어 뿜어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광채를 발하고 영원히 색이 변하지 않는 황금은, 모든 것이 변하고 없어지는 세상에서 시간을 초월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황금이야말로 모든 물질과 생명의 가치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제사장 의복이나 제사도구에 사용된 황금은 영원한 영광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는 초대교회까지 이어지는데, 중세 성화(聖畵)에서 황금색 밑바탕은 일반적으로 초현세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암시한다. 또 민간 풍습이나 전승은 아기 예수님이 황금 관을 쓰거나 황금 조랑말을 타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금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황금이 부정적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았다. 귀금속은 현세의 덧없는 재화에 불과하며, 황금보다 더 귀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라 가르친다(1베드 1,7). 이처럼 황금은 극히 현세적이며 무상한 것이다. 또 성경은 심판의 날에 불의 시련을 당할 귀금속에 황금이 포함돼 있다고 경고한다. "그 기초 위에 어떤 이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다면, 심판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 한 일도 명백해질 것입니다. 그날은 불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1코린 3,12-13).퇴사자22012.06.12

스무 살 때 그리스도의 정배로 거듭나다[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2.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②성경과 함께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성녀 데레사. 아빌라 생가 성당 색유리화. 수도성소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 사춘기 소녀 데레사는 아우구스티노 수녀원 기숙사에서 약 1년 반을 지내며 신앙의 열정을 회복했고, 사감 수녀들의 모범을 보며 수녀가 되고 싶은 막연한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병에 걸려 그만 기숙사 생활을 접어야 했고 아버님의 뜻에 따라 살라망카 근교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큰 언니 마리아의 집에서 휴양하게 됩니다. 그 근처에는 성녀의 숙부님이 사셨는데 성녀는 가끔 그곳에 가서 숙부님에게서 신앙과 관련된 유익한 얘기며 숙부님이 귀히 여기던 영성서적들을 뒤적여 보는 걸 낙으로 삼았습니다. 어느 날 그곳 서가를 뒤적이다가 성녀는 「성 예로니모의 서간집」을 읽으며 심금을 울리는 성인의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기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현명한 일인가?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가던 길을 멈춰서야 되겠는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던 데레사에게 수녀가 되겠다는 원의에 부담이 됐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굳센 결의를 다지며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도록 촉구하는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을 들으며 데레사는 그만 정신이 번쩍 뜨였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성녀는 큰 용기를 얻어 아버지께 수녀가 되겠다는 원의를 말씀드리며 수도자로서의 첫걸음을 걷게 됩니다(자서전 3,7). 수도성소를 키우는 힘이 됐던 주님의 수난 묵상 이 사건 이후 성녀의 삶에서 예수님의 현존은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갔습니다. 어린 시절 막연한 추상적 진리이자 머나먼 당신으로 여겨졌던 하느님이 이제 살과 뼈를 가진 분, 즉 예수님 안에서 투영되어 드러났으며 그분이 자신을 원한다는 걸 성녀는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칠 당시 여성으로서 누군가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동시에 온전히 사랑받고 싶었던 원의를 이제 성녀는 사람이 아닌 육화 강생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데레사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버지는 이내 딸의 수도성소를 반대하고 맙니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수도성소를 키워가는 데 있어 성녀에게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묵상'이었습니다(자서전 3,6). 이 시기를 거치며 성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구체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란 진실을 더욱 깊이 알아들었으며 결국 아버지의 반대에도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성녀는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정배로 받아들이다 이렇게 해서 성녀는 1535년 스무 살에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이때부터 성녀는 온전히 수도생활에 투신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성녀는 자신이 공적으로 발한 수도 서원을 '혼인 서약'으로 생각했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정배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는 점점 더 성녀의 인격 안에 깊이 뿌리내려갔습니다. 한 마디로 성녀는 수도생활을 그리스도와의 결혼생활로 이해하며 살았습니다. 훗날 성녀가 자주 자신의 허물에 대해 얘기하면서 인간적인 우정이 양심의 걸림돌이 되곤 했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성녀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결혼 관계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서 요구되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에 비춰봤을 때 인간적인 우정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영혼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만나다 이 시기에 성녀는 당대의 대표적 영성가 중 한 사람인 오수나 신부의 「제삼 기도 초보」라는 책을 접하게 됩니다. 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던 성녀는 치료를 위해 잠시 수녀원을 나와 베세다스라는 작은 마을에 살며 예전에 도움을 받았던 숙부님 댁에 가끔 들렀고 거기서 바로 그 책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 책은 당시 새로운 영성 운동 가운데 하나인 '거둠 기도' 방법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 영성 교과서였는데, 성녀는 이 책을 보면서 '거둠 기도'를 수련하는 가운데 더욱 깊은 영성 생활을 위한 도약을 하게 됩니다. 성녀는 이 기도를 통해 자기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이미 현존해 계신 그리스도를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처럼, 성녀는 그간 자기 바깥에서 주님을 찾아왔는데, 비로소 그분이 이미 자신 안에 거하고 계심을 깨달았으며 그때부터 자기 내면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성녀는 당시 자신의 기도가 어땠는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저는 제 안에 계시는 우리의 보화이시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 안에 현존시키려 애를 썼습니다"(자서전 4,7). 또한 당시 성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자 노력했습니다(자서전 11,9). 가장 힘쓸 바는 주님의 일생을 묵상함 성녀 데레사와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궤적을 따라가며 알 수 있듯이, 성녀가 예수님을 알아가고 사랑했던 데에는 근본적으로 '주님의 생애와 수난에 대한 묵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주제야말로 구원 역사의 정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는 데는 어떤 거창한 지식이나 신묘한 초자연적 체험이 필요치 않습니다. 성성(聖性)을 향한 길은 여러분 가까이, 아니 여러분 안에 이미 씨앗처럼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 이미 살고 계시는 주님을 느끼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 궁구(窮究)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준주성범」 1권 1장 1절의 말씀은 늘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신앙생활의 규범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니, 우리가 진정으로 광명을 받아 깨우칠 마음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생활과 행실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쓸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함이다." cpbc2014.04.17
![[예수 부활 대축일] 부활 대축일 전례와 풍습](//cpbc.co.kr/CMS/newspaper/2014/04/rc/505744_1.0_titleImage_1.jpg)
[예수 부활 대축일] 부활 대축일 전례와 풍습부활 성야에 자리한 신자들은 빛의 예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회상한다. 사진은 지난해 미국 위스콘신 루르드의 성모 성당에서 빛의 예식을 시작하는 모습. 【CNS】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코린 15,12-13).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자라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부활 대축일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기쁜 날이다. 참으로 부활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부활 신앙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사도신경 기도문으로 부활 신앙의 의미를 알아보고 부활 대축일 전례와 부활 풍습에 담긴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다가오는 예수 부활 대축일에 기쁨의 알렐루야를 외쳐보자. ▨부활 신앙 신경은 라틴어로 'Credo', '나는 믿나이다'라는 뜻이다. 즉 사도신경 기도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어야 할 신앙의 요약문과 같다. 주일 미사 때마다 고백하는 기도문 속에 부활 신앙은 어떻게 담겨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부활 신앙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고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사건 자체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신화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고 시신 또한 매장됐다. 성경이 이것을 증언한다.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기 전 군사 하나는 예수님 옆구리에 창을 찔러 재차 죽음을 확인했고 그때 예수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제자들은 예수님 시신을 유다인들의 장례관습에 따라 향료와 아마포로 감싸 매장했다(요한 19,34-40). 하지만 예수님은 3일 만에 부활하셨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어 함께 식사도 하시고 육신의 상처도 보여주셨다(루카 24,36-43).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물리쳤으며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지닌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음을 알 수 있다.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부활 신앙은 우리 또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 것이다.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한 첫 사람인 예수님께서 몸소 부활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을 믿는다.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부활 소식을 들은 사람은 더는 슬픈 표정으로 돌아다니거나 희망과 유머가 없는 삶을 살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이 더 이상 죽음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이자 우리 신앙을 지탱하는 중심 내용이며, 우리 확신의 강력한 수단이고, 모든 두려움과 불확실함, 모든 의혹과 인간적 계산을 날려 버리는 강력한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이며 믿음의 근거다. 따라서 이 믿음이 이뤄진 예수 부활 대축일은 당연히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기쁜 날이 되는 것이다. ▨예수 부활 대축일 전례 부활 대축일의 큰 특징은 '부활 성야'를 지낸다는 것이다. 이때 치러지는 예식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교회 전례 중에서 가장 성대하게 거행된다. 또한 부활 성야는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깨어 있다가 주인과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는 밤이다. 이날 전례는 △빛의 예식 △말씀 전례 △세례 예식 △성찬 전례 등 모두 4부로 이뤄진다. '빛의 예식'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둠 속에 있는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오시는 것을 느끼고, '말씀 전례'를 통해 신자들은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되새긴다. 이어지는 '세례 예식'에서는 회중 전체가 세례 서약을 갱신하고 새로워진 마음으로 '성찬 전례'에 임한다. 부활 성야는 미사가 자정 전에 집전되더라도 부활 대축일 미사로 인정하며 부활 성야에서 영성체한 사람도 다음 날 부활 대축일 미사에서 한 번 더 영성체할 수 있다. 이날부터 사순시기에 금지했던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노래한다. 특히 알렐루야를 노래하는 것은 전례적으로 감사와 기쁨을 드러내는 것이다. 부활시기는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50일간이며 부활 팔일 축제에 부활을 기념하는 6주간 전례가 더해진 것이다. 부활 대축일은 성탄 대축일과 달리 날짜가 해마다 달라진다. 교회는 춘분 이후 보름날이 지난 다음 첫 주일을 부활 대축일로 정하고 있다. ▨부활을 맞이하는 풍습 부활하면 대부분 부활 달걀을 떠올린다. 달걀은 죽은 듯 보이나 때가 되면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온다. 이처럼 달걀은 생명의 상징이다. 또한 예수가 부활한 동굴의 상징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맞아 달걀에 그림을 그려 넣어 서로 나눈다. 지금처럼 달걀을 나누는 풍습은 17세기 수도원에서 시작됐다. 금육을 엄격히 지켰던 수도사들은 사순시기 때 물고기나 달걀도 먹지 않았다. 그래서 부활 대축일 아침에야 비로소 기쁜 마음으로 달걀을 먹으며 부활을 맞이했다. 이밖에 '달걀 굴리기'나 '달걀 찾기'도 외국에서 많은 사람이 즐기는 대표적인 부활 풍습이다. 백악관은 지금도 부활절이 되면 마당에서 달걀 굴리기 행사를 연다. 그리고 행사를 통해 얻은 수익금을 자선사업에 사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특별한 달걀 찾기를 즐긴다. 숨겨 놓은 달걀 중에는 색을 입힌 진짜 달걀도 있지만 달걀 모양으로 된 장난감도 있다. 그리고 장난감 달걀 중에는 돈이 들어 있는 것도 있어 색다른 즐거움을 더한다. 폴란드에는 '딘구스'라 불리는 다소 독특한 부활 풍습이 있다. 부활절이 되면 남성들은 노래를 부르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는데, 젊은 여자들을 만나면 버드나무 회초리로 때리거나 물을 뿌린다. 이때 사람들이 뿌리는 물은 죄인을 깨끗하게 해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cpbc2014.04.17
![[성경 속 궁금증] 40.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바알신을 경계했을까?](//cpbc.co.kr/CMS/newspaper/2012/07/rc/42025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40.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바알신을 경계했을까?토착민의 생활양식 모방하며 우상 섬기는 정신적 타락 우려바알신 상상도. 바알신을 상징하는 동물은 황소다. 구약성경에는 바알(Baal)에 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바알을 숭배해 하느님을 화나게도 했으며, 엘리야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하기도 했다. "그때에 엘리야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사로잡으시오.' 백성이 그들을 사로잡아 오자, 엘리야는 그들을 키손천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죽였다"(1열왕 18,40). 바알은 어떤 존재였을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을 마친 후 가나안에 정착했지만 계속해서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토착민이나 주위 적들과 전쟁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바로 가나안 농경문화를 뒷받침하고 있는 토착민들의 종교와의 갈등이었다. 반유목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한곳에 정착해 농사짓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토착민들이 섬기는, 농사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을 섬기게 됐다. 가나안 토착민들은 바알과 아스타롯을 숭배했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 그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겼다"(판관 2,12-13). 바알은 '주인' 또는 '소유주'라는 뜻으로, 땅을 소유하고 풍요와 다산을 지배하는 남성 신이다. 아스타롯은 바알의 배우자다. 바알과 아스타롯을 숭배하는 이들은 남자는 바알로, 여자는 아스타롯과 동일시해 신전 안에서 매음 행위를 벌였는데, 이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두 신을 결합시켜 풍요와 다산을 가능하게 한다고 여겼다. 특히 바알은 비를 지배한다고 믿었고, 비가 오지 않을 때 바알에게 비를 청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토착민들 문화에 매료돼 그들 생활양식을 많이 모방했다. 한 백성의 멸망은 보통 외부의 군사적 압력보다는 내부의 정신적 타락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이냐 바알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백성들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엘리야가 온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1열왕 18,21). 가나안 토착민들의 바알 숭배와 이스라엘의 하느님 신앙은 인간과 신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달랐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알을 숭배하면서도 하느님에게서 떠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느님과 바알을 나란히 섬기는 데 큰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 이것은 판관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혼합주의 경향을 잘 반영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혼합주의 종교의 형태는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가장 위험하고 유혹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렵고 힘든 상황일수록 미신과 우상의 유혹이 강하기 때문이다. 퇴사자22012.07.10
![[사도직 현장에서] "저도 좀 편애해 주시지"](//cpbc.co.kr/CMS/newspaper/2013/11/rc/481755_1.0_titleImage_1.jpg)
[사도직 현장에서] "저도 좀 편애해 주시지"황영화 신부(안동교구 춘양본당 주임) 후배 신부가 성당 부속 건물을 짓는다며 기금 마련에 걱정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분의 은인이 거의 다 해결해 주셨다고 한다. 감사할 일이다. 감사할 일인가? 나는 성전 건립을 위해 그보다 10배가 넘는 기금이 필요한데, 후배 신부가 받은 액수의 반도 기부받은 적이 없다. 나의 성덕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하느님의 편애에 좀 섭섭했다. 부족한 성덕을 발품으로라도 메워야 하니, 이곳저곳 참 많이도 다녔다. 한번은 신자들과 함께 서울 모 성당으로 모금하러 올라갈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식사를 시켜 먹는데, 한 신자가 몇 푼이라도 아끼겠다고 김밥을 싸 오셨다. 처음 같이 가는 분이어서 잘 모르기도 했겠지만, 모금 가는 것이 궁색해 보였나 보다. 식사 후 가져오신 음료수를 또 주셔서,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으로 단번에 다 마셨다. 그런데 맛과 향이 원래의 것과 다른 것 같아 살짝 유통 기한을 확인해 보니, 3년 전 내가 이 본당에 온 그 해 그달까지였다. 무탈하게 해 주시리라 믿으며 손을 살포시 배에 갖다 대었다. 두어 시간 더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고, 본당 신부님께 인사를 드렸다. 반갑게 맞이하며 커피를 주시는데, 아무래도 초면에 못 마신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유통기한 지난 음료수보다 커피가 더 무서운데…. 토요 특전 미사를 마치고 신자들과 함께 숙소로 향했다. 그 날 여관방에서의 밤은 어느 때보다 길었던 것 같다. 제발 내일 미사를 무사히 드릴 수 있도록, 모금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닌데 저도 좀 편애해 주시기를…. 성당에서 5분 거리에 사시는데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데레사 할머니. 사정이 어떤지 찾아뵈었다. 성경의 표현 그대로, 보잘것없는 귀먹고 눈먼 소경이었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으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분이셨다. 어쩌다 두유 한 통 갖다드리면, 할머니는 뭘 이런 걸 사오느냐며, 그럴 거면 다음부터는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신다. 아니, 바쁜데 그냥도 오지 말라는 분이시다. 그런데 할머니가 주일에 성당에 나오셨다. 신부한테 직접 전해 줄 것이 있다며 부축을 받아 겨우 오셨다. 성당 짓는다고 들었다며 다 닳아빠진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내미셨다.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렙톤 두 닢을 봉헌하는 과부를 보신 예수님의 마음이 이랬을까? 가진 것을 다 내어 놓으신 분. 그날 미사는 준비된 강론이 아니라 '과부' 이야기를 했다. 눈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감사합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시니, 이런 것이었다면 계속 편애해 주시길….cpbc2013.11.05
![[가톨릭 여성운동 단체를 소개합니다]<끝> (4)가톨릭여성신학회](//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4262_1.0_titleImage_1.jpg)
[가톨릭 여성운동 단체를 소개합니다] (4)가톨릭여성신학회하느님 모성적 사랑 전하며 평등문화 건설여성 수도자와 여성 평신도가 동등한 신앙인으로 만나 신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삶과 체험을 나누는 모임은 가톨릭 여성신학회가 유일하다. 사진은 2010년 제2차 무료공개강좌 현장. 가톨릭여성신학회(회장 허귀희 수녀)는 한국 여자수도자장상연합회 자문기관으로, 1997년 여성 수도자와 여성 평신도가 모여 여성의 존엄성과 소명감을 찾고, 여성들 체험과 시각으로 신학적 성찰을 하며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어 가기 위해 설립했다. 여자장상련은 1996년 정기총회 때 가톨릭여성신학회 설립을 논의했다. 교회 내 여성에 대한 연구와 여성문제 전문가 양성이 시급하다는 인식에서다. 당시 여자장상련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하고, 가톨릭여성신학회 출발에 적극 나섰다. "여성의 존재와 역할을 간과, 무시, 과소평가하는 편중된 성경해석에서 벗어나 성경을 바르게 재해석하고, 참된 하느님의 이미지를 찾기 위해 하느님의 모성적인 면도 더 깊이 깨닫고 전하도록 노력한다. 체계적인 연구를 위하여 '가톨릭 여성신학자모임'(가칭)을 결성하여 수도자와 평신도가 함께 연구, 의식화 및 평등문화 건설에 힘쓴다." 이듬해 한순희(성심수도회) 수녀를 초대 회장으로 교육부장 최혜영 수녀, 총무 겸 회계 강영옥 박사 등으로 임원진을 구성하고 가톨릭여성신학회 활동을 시작했다. 여성 수도자와 여성 평신도가 동등한 신앙인으로 만나 신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삶과 체험을 솔직히 나누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격려하는 모임은 가톨릭여성신학회가 유일하다. 가톨릭여성신학회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여성신학 연구에 집중했다. 2001~2002년에는 한국 초기교회 여성 활약상과 신유박해 순교자들 삶을 재조명해 여성 신앙선조들의 신앙유산이 현재 우리에게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고민했고, 2003년에는 강영옥 박사의 논문 '한국 가톨릭 여성운동의 흐름'을 발표,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어 한국교회 내 여성 위치를 진단했다. 2004년에는 제1차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는데, 주제는 '현대 여성 수도자의 정체성과 서원생활-3대 서원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 수도자의 정체성과 삶, 성소 감소 문제를 폭넓고 깊이 있게 다뤘다. 2005년에는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여성 영성가를 새롭게 조명하는 한 해를 보냈다. △빛의 영성가, 아시시의 성 클라라(허귀희 수녀) △하느님께 사로잡힌 조선여성, 강완숙의 영성(송종례 수녀) △에디트슈타인의 삶과 영성(박경미 수녀, 이은기 교수) 등을 소개했다. 2006년에는 '루이즈 드 마리약을 통해 본 21세기 가톨릭 여성 수도자와 평신도의 사도직 활동과 전망'을 주제로 제2차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2010년에는 무료 공개강좌를 열어 여성신학의 문턱을 낮췄다. '여성, 복음과 다시 만나다'를 주제로 △에디트 슈타인이 바라본 마리아와 모성(최우혁 박사) △성화를 통해서 본 마리아 막달레나 영성(강영옥 박사) △수도생활과 돈(강운자 수녀) 등을 다뤘다. 제2차 무료 공개강좌는 2012년에도 이어졌는데 '다시 만난 여성 신비가'를 주제로 △빙엔의 힐데가르트와 푸르름의 영성(유정원 박사) △노리치의 줄리안 영성(안은경) △도로시 데이의 영성(강영옥 박사) △베긴회의 영성(최우혁 박사) 등을 소개하며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신비가의 삶과 영성이 현대 여성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찰했다. 가톨릭여성신학회가 발행한 책으로는 「열린교회를 꿈꾸며」(바오로딸/2004)와 「신학 그 막힘과 트임 : 여성신학개론」(분도출판사/2004), 「여성과 그리스도교」 1~3권(2008~2012) 등이 있다. 가톨릭여성신학회는 현재 매달 둘째 주 토요일에 모임을 하고 있고, 매달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회원은 10여 명이다. 앞으로 성경, 신학, 영성을 전공한 여성 전문가 참여를 독려하며 회원 확충에 노력을 꾀할 계획이다. 또한 여자 장상련 자문기관으로 여성 수도자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에 집중하기로 했다. 정리=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퇴사자22013.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