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사랑 체험 소중한 시간생활성서사 '신난다 가족 피정' 큰 호응생활성서사의 '신난다 가족 피정'에 참가한 영통영덕본당 부모와 자녀들이 머리를 맞대며 성경 구절을 찾고 있다.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가 운영하는 출판사 생활성서사가 마련한 '신난다 가족 피정'이 신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올해 초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원래 첫영성체를 앞둔 자녀와 그 부모를 위한 피정이었지만, 피정이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게 해준다는 참가자들 입소문이 퍼지면서 점차 주일학교 학생을 둔 모든 가정을 위한 피정으로 확대됐다. 그동안 의정부교구 대화동ㆍ원당본당, 인천교구 청라본당, 수원교구 인계동본당 등에서 가족 피정이 열렸다. 신난다 가족 피정은 성경구절 암송, 가족 장점 자랑하기, 성경 가훈 정하기, 레크리에이션, 화해와 축복의 시간 등을 통해 자녀와 부모가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서로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도록 이끄는 한나절 프로그램으로 짜여 있다. 가족이 함께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서로 대화하며 사랑이 넘치는 성가정을 이루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수원교구 영통영덕본당에서 열린 피정에 참가한 가족들은 "가족 간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고, 하느님 말씀 안에서 마음껏 즐거워했던 선물같은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 "평소 말하지 않아 쌓였던 오해를 풀 수 있었고, 서로 꼭 안아주고 축복해주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고도 했다. 생활성서사는 피정을 요청하는 본당에 직접 찾아가 가족 피정을 진행하고 있다. 문의 : 02-945-3300, 생활성서사 교육부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cpbc2013.08.20

천에 새긴 주님 사랑, 신자 마음 감싸안았다수원교구 왕곡성당 제대에 섬유 십자가 설치, 따뜻한 느낌에 공동체 호응 높아국내 첫 제대 십자가 태피스트리로 수원교구 왕곡본당 제대에 내걸린 김효린 작가의 태피스트리 작품. 오세택 기자국내에 첫 제대 십자가 태피스트리(Tapestry, 섬유예술)가 등장했다. 수원교구 왕곡성당(주임 최재철 신부) 제대에 최근 설치된 ‘십자가 태피스트리’로, 조각 십자고상 일색인 한국 천주교회에 제대 그림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전망이다. 국내 유일의 제대 십자가 태피스트리가 등장한 데는 전국 성당에 똑같이 내걸린 십자고상을 배제한 왕곡본당 공동체의 선택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를 위해 본당 공동체는 지난 8개월간 태피스트리 작품을 기다렸고, 마침내 성주간에 김효린(사비나) 작가의 태피스트리 작품이 제대에 내걸렸다. 작품 크기만 해도 밑바탕을 이루는 1단 작품이 500×800㎝, 위에 겹쳐진 2단 작품이 300×600㎝나 된다. 성전의 웅장함과 함께 씨실과 날실로 엮어 한 폭 회화 같은 느낌을 주는 섬유예술인 태피스트리만의 독특한 미학을 보여준다. 원래 기원전 5~6세기께 콥틱 직물 예술로 출발한 태피스트리는 이집트 콥트 정교회 신자들이 성경 내용을 다채로운 선염색사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작품을 선보이면서 교회 미술의 전면부에 등장, 유럽으로 번져나가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이나 프랑스를 중심으로 성행했다. 왕곡성당의 태피스트리는 우주의 절대 고독을 상징하는 별 무리를 배경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아름답게 형상화했다. 신비롭고 그윽한 보랏빛 색채가 제대 벽과 잘 조화를 이룬다. 벽에 내걸리는 작품이어서 방음이나 습도 조절, 방화, 소리 흡수(흡음) 등에 중점을 뒀다. 특히 내구성이 강한 양모 실로 짠 태피스트리는 양모 특유의 따뜻한 느낌 덕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더 깊이 와 닿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공기 차단 기능과 장식성을 겸비했을 뿐 아니라 콘크리트로 이뤄진 공간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요즘도 태피스트리는 바티칸미술관의 주요 분야(Section) 가운데 하나여서 왕곡성당 제대 태피스트리는 특별한 작품으로 한국교회의 기억에 남을 것으로 기대된다. 2012년 같은 본당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제작 봉헌했던 김효린 작가는 “10년 이상 양모 실로 짠 태피스트리 제작 경험을 살렸는데, 기도 중에 우주공간에서 외롭게 우리를 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제작했다”면서 “한 올 한 올 정성을 들여 제작한 작품 속에서 작가의 기도와 신자들의 기도가 한데 어우러지고 응답받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황우회(베드로, 57) 총회장은 “주임 신부님이나 우리 공동체나 획일화된 십자고상보다는 다양성, 즉 태피스트리의 방음 또는 흡음이라는 음향적 효과와 시각적 부드러움, 상상력을 도출해내는 재질감 등 감성적 효과를 이끌어내고자 했다”면서 “설치한 지 며칠 안 됐는데도 신자들의 반응이 좋고 벌써 사회적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고 말했다.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백영민2014.05.07
![[복음이야기]<7>팔레스티나 지리적 배경](//cpbc.co.kr/CMS/newspaper/2014/02/rc/498123_1.1_titleImage_1.jpg)
[복음이야기]팔레스티나 지리적 배경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느님의 선물 팔레스티나는 지도상으로 아시아 서단 북위 31˚15´에서 33˚20´, 동경 34˚30´에서 36˚사이에 위치하고, 북쪽 시리아 산맥에서 남쪽 네겝초원, 동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서쪽 지중해 연안까지 장방형을 이룬 지역을 말한다. 면적은 요르단 건너편 초원지대를 포함해 2만 5000㎢, '(북쪽)단에서 (남쪽) 브에르 세바까지' 길이가 235㎞, 동쪽 요르단 고르에서 서쪽 지중해 연안까지 폭이 40㎞이다. '팔레스티나'는 '필리스티아'에서 유래한 말로, 이스라엘 민족은 판관 삼손 시대와 사울과 다윗 왕 시대에 이 민족과 치열한 전쟁을 해 승리했다. 유다인들은 정복한 적의 이름을 보존하기 위해 필리스티아인이 살던 일부 지방을 가리켜 히브리말로 '펠레쉐트'라 했고, 이 말을 그리스 사람이 이 나라 전체에 적용해 '팔레스티네'라 불렀다. 헬라어 본문을 번역한 라틴어 역본 「불가타 성경」은 '팔레스티니'라고 표기했다. 이 말이 그리스 로마 세계에 퍼져 오늘날까지 이 지역을 '팔레스티나'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유다인은 이 지역을 종교적 역사적 표현을 사용해 '가나안 땅''이스라엘 땅'(1사무 13,19) '거룩한 땅'(즈카 2,16) '약속받은 땅'(히브 11,9)이라 불렀고, 탈무드에선 '빼어난 땅' '하느님의 땅'이라 했다.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신명 26,9)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젖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는 기본적 양식을, 꿀은 귀한 양식으로 하느님의 충만한 축복을 상징한다. 기원전 1900년께 기록된 이집트 우화 「시누헤 이야기」에는 가나안 땅에 대해 "그곳에는 무화과와 포도가 있었다. 그곳에는 물보다 포도주가 더 많았다. 꿀도 풍부했고 올리브도 가득했다. 온갖 종류의 과일이 나무에서 열렸다. 그곳에는 보리와 밀이 있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온갖 가축이 있었다"고 부러워하고 있다. 이스라엘 지형은 크게 일곱 지대로 나뉜다. '해안 평야'는 모래 언덕과 숲, 늪지대가 대부분인 쓸모없는 땅이다. 하지만 지중해 동쪽 연안 욥바에서 카르멜 산에 이르는 '사론'은 이스라엘의 가장 비옥한 땅에 속한다. 해안 평야와 중부 산악지대 사이 완충지인 '세펠라'는 넓이 19~24㎞의 평원으로 대표적 지역이 엘라 골짜기(1사무 17,2)이다. '중부 산악지대'는 이스라엘 영토 심장부로 예루살렘과 헤브론 같은 성읍이 자리하고 있다. '므기또 평원'은 중부 산악지대와 갈릴래아 언덕 사이의 동서 평원을 이루고 있다. 이 평원은 이집트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남북을 잇는 무역 도로가 통과했기에 수많은 전쟁이 벌어진 전략 지역이었다. 요한 묵시록은 인류 최후의 전쟁인 '하르마게돈'(16,16)이 이곳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갈릴래아'는 레바논 산들과 이어지는 산악지대로 비옥한 언덕들과 갈릴래아 호수가 있다. '요르단 골짜기'는 북쪽 갈릴래아 호수에서 남쪽 사해까지 이어지는 골짜기로 요르단 강이 흐르고 있다. 특히 해수면보다 400m 낮은 사해는 지구 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마지막으로 요르단 골짜기 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요르단 건너편'은 갈릴래아 동쪽(해발 580m)에서 사해 남동쪽(해발 2000m)까지의 오르막으로 강수량이 많아 훌륭한 목초지가 펼쳐져 있다. 거주지역에 따라선 유다ㆍ사마리아ㆍ갈릴래아 지방과 해외 이산민으로 구분한다. 유다 지방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가난한 산지로서 이 지방 사람들은 신앙을 엄수했다. 북쪽 갈릴래아와 남쪽 유다 사이 위치한 사마리아 지방 사람들은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점령당한 후 타민족의 이주로 말미암아 혼혈민이 됐으나 모세 5경의 가르침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다인이 바빌론에서 돌아온 후 사마리아인과 유다인은 대립하게 됐다. 갈릴래아 지방은 전반적으로 아브라함과 모세로부터의 조상 대대의 신앙을 충실히 지켜 왔으나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서 신앙 행사는 매주의 안식일 집회가 중심이었다. 국제 교역로가 있어 외국인의 교류가 잦아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방인의 갈릴래아'라고 불렀다. 해외 이산 유다인은 '디아스포라'라고 해 특히 지중해 주요 항구도시에 많이 거주했다. 특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많은 유다인들이 살았다. 디아스포라 이산 유다인들은 각 거주 지역에서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을 충실히 지키며 히브리말 성서 외에 헬라어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했다. 이런 이유로 복음이 전파되자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쉽게 받아들였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4.02.25

신약의 비유자라나는 씨앗의 비유(하)다양한 비유로 전하는 하느님 나라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이 뻗는다. 겨자씨와 10원짜리 새 동전을 비교 촬영한 사진. ‘겨자씨의 비유’는 앞선 비유에 이어 세 번에 걸친 도입 구문으로 시작한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이 뻗는다.” 마르코 복음은 풀로 표현하지만,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는 나무라고 표현한다.일상 삶으로 전하는 복음원래 겨자씨는 풀의 형태로 자라는데 어떤 경우에는 2m 정도의 크기까지 자란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오와 루카 복음은 강조를 위해 나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에제 17,23) 이스라엘의 유배시기 이전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에제키엘 예언자의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이루게 될 국가에 대한 이상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표현되는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는 표현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선포와 연결되어 있고, 마태오와 루카 복음이 나무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누룩의 비유’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만이 전한다. “또 다른 비유”라는 도입문을 통해 앞서 이야기된 겨자씨의 비유와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 나라를 표현한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 그리고 그 누룩을 통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여인과 가정의 이미지 안에서 말해지는 누룩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가 얼마나 일상생활에서 쉽게 불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삼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신앙을 돌아봐야이 두 비유는 모두 작은 것과 큰 것,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것을 통해 큰 결과를 얻는다는 것을 대조적으로 나타낸다. 가장 작은 겨자씨는 어떤 풀보다 크게 자라고, 얼마 되지 않는 누룩은 밀을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한다. 하느님 나라는 가장 작은 씨앗과 얼마 되지 않는 누룩과 비교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지만, 그 성과는 시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비유를 통해 강조하신다. 이것은 다른 한 편으로 제자들과 군중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지금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작고 보잘것없을지 모르지만 생각지도 못한 결과와 성과를 내게 되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그리고 누룩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지만, 겨자풀을 보며 작은 겨자씨를 생각하지 않고, 빵을 먹으면서 그것을 부풀게 한 누룩을 생각하지 않듯이 우리는 잘 이해하거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삶 안에 녹아들어 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와 다가올 완성,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의 시간, 곧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는 그 가능성의 시간을 살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언제, 어떻게 그 완성이, 곧 세상의 종말이 오게 될지를 묻기보다, 지금 나에게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나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며 살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매주 금요일 오전 9시, 월요일 오후 8시, 수요일 오후 4시에 평화방송 TV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백영민2014.06.25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 결정...<25>황일광 시몬
천민 서러움 털고 양반들과도 어울리며 주님 찬미하다 순교 황일광 시몬. 하느님의 종 124위 순교자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은 황일광(시몬, 1757∼1802)이다. 약전엔 ‘천한 신분’ 출신이라고만 기록돼 있지만, 실은 백정이었다.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천민이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당신 이름을 증거할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했고, 그는 ‘살아서는 지상 천국’을, ‘죽어서는 내세 천국’을 살아갔다. 부질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때로는 124위 시복 건의 제목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서 ‘황일광 시몬과 동료 순교자 123위’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순교 사화는 감동적이다. 충청도 홍주(현 홍성) 출신의 황일광이 살아갔던 시대는 18세기 후반이었다. 백정이란 게 본시 가축 도살과 육류 판매, 유기(柳器, 고리) 제조 등에 종사하던 계층이었다. 그런 만큼 제대로 대접을 받고 살았을 리 없다. 그의 어린 시절은 특히 불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아이까지도 반말에 무시하기 일쑤였고, 그런 대접을 당연한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땀과 노고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였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은 그에게 놀라운 지능과 열렬한 마음, 명랑하고 솔직한 성품을 주셨다.1792년, 홍주를 떠나 홍산으로 이주하던 무렵 그는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우연하게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렸지만, 그를 찾아가 교리를 배운 그는 신앙을 접하자마자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고 나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했다. 교우들은 물론 그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애덕으로 감쌌고, 이러한 교우들의 사랑 실천은 양반가에서도 똑같이 이뤄졌다. 그가 얼마나 감격스러웠을지는 미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당시 그의 발언이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통해 지금까지도 전해온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이같은 백정은 얼마나 됐을까? 기록은 일제강점기 중 조선총독부 조사뿐이다. 일제강점기까지도 7538가구에 3만 3712명이 남아 있었다는 1920년대 초 통계가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700만 명쯤 됐으니, 0.19%에 해당한다. 이처럼 차별을 받던 백정들의 해방 운동은 1923년 ‘형평사’(衡平社) 운동이 전개되면서 사회의 수면 위로 떠올랐는데, 그 운동이 시작되기 130년 전에 이미 황일광을 통해 백정의 해방 운동이 사실상 이뤄졌던 셈이다. 경상도에서 자유롭게 살던 그는 1800년 2월 경기도 광주에 살던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 회장의 이웃집으로 이주한다. 이때 만난 인물들이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 김한빈 (베드로, 1764∼1801) 등이다. 당시에 그의 열심은 양반, 중인, 평민을 막론하고 모든 교우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러다가 정약종이 한양으로 이주하면서 함께 상경한 그는 자신의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가 팔면서 생계를 꾸렸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또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기쁨도 누렸다.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형리들의 매질은 물론 모든 것을 기쁨으로 굳건하게 견뎌냈다. 이윽고 이듬해 1월 30일 고향 홍주로 이송돼 참수됐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통해 “우리 교우들이 이 사람(황일광)을 공경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교황 성하께서 그를 제대 위에 올려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진정한 종교예식을 드리게 허락하여 주신다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경 말씀이 순교자 황일광을 통해 이뤄졌다. “억눌린 이를 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거름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 그를 귀족들과 당신 백성의 귀족들과 한자리에 앉히시기 위함이라”(시편 113,7-8). 인간 존엄과 자유, 평등 가치를 담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지, 당시 사회 변혁에 얼마나 큰 동인으로 작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실제 사례, 그게 바로 황일광의 믿음과 순교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평화신문2014.08.06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 프란치스코 <6>](//cpbc.co.kr/CMS/newspaper/2014/12/rc/546739_1.0_titleImage_1.jpg)
[빛과 소금 20세기 이 땅의 평신도] 가진 바를 나눈 참교육자 김익진 프란치스코 <6> 비우고 내려놓기 “오메! 참말로 땅을 그냥 준다고요?”아담한 장성성당 바로 곁에는 어울리지 않게 큰 종탑이 서 있었다. 하지만 속 빈 강정처럼 그 안에는 종이 없었다. 더욱이 한국 최초의 콘크리트 성전 안에는 하느님을 찬송할 풍금조차 없었다. 새 성전 짓기에도 빠듯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중국 상하이에 종을 주문하는 한편, 서울에 가서 풍금을 사왔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심금을 울리는 풍금 소리는 여운이 풍부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거룩함이 솟아올랐다. “그 양반 천주교 신자가 됐대. 알짜배기 땅까지 팔아서 성당 지으라고 줘버렸대.”내가 가톨릭에 입교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목포와 장흥 일대의 지식인들과 유지들의 일대 관심사가 됐다. 명실공히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인텔리 아니었던가. 일거수일투족이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는 건 당연했다. 성탄절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잘 알고 지내던 외인 교사들에게 말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일세. 최초의 미사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었지. 그러니까 말뜻 그대로 크리스마스를 경축하는 데는 가톨릭 교회뿐 아닌가? 이번 크리스마스 때 우리 성당에 와서 보게.”아뿔싸! 성탄 자정 미사에 술에 얼큰하게 취한 교사들이 정말 왔다. 그렇게 추운 날, 술 마시다 말고 미사에 올 생각을 했다니……. 때마침 나는 교우들이 많아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곤 반가워하며 큰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메리 크리스마스!”“이렇게 사람이 많아서야 어디 미사 구경이나 하겠나?”나는 급히 그들을 성당 옆으로 이끌었다. 옆문으로 들어가 그들을 제대 바로 앞에 앉게 했다. 우리 일행의 낌새를 챈 본당 신부의 얼굴에 환한 빛이 감돌았다. 나 역시 선교의 기쁨을 한껏 누렸다. 다음날 지청구를 사방에서 들었지만 말이다.“술주정뱅이들을 미사에 끌고 오다니…….” 목포 북교동성당. 하지만 나로 인해 장성 일대가 가톨릭에 관심을 가졌던 건 사실이었다. 장성으로 이사한 이듬해에 79명이, 그 다음 해에도 42명이 세례를 받았다. 장성성당의 교세가 쭉쭉 뻗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외조카딸 영길이가 헐떡이며 달려왔다. “아저씨! 큰일 났어요. 제 동생이 다 죽어가요.” 나는 일본인 의사를 데리고 단숨에 달려갔다. 이질이었다. 약을 지어 먹이자 한고비를 넘긴 듯했다. 그래도 다급한 상황이라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만에 하나 순탁이가 죽게 되면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자.”외사촌인 오재복과 식구들이 모두 숙연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대세를 줬다. 다행히 외조카는 며칠 뒤 건강하게 일어났다. 그 일을 계기로 외사촌 식구가 모두 그해 성탄절에 세례를 받았다. 순탁이는 나중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누나인 영길이는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해 수녀가 됐다. 우리 집 뜰에서 뛰놀던 김종남 로마노가 사제가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한편 졸지에 남편을 잃은 큰형수도 나와 뜻을 같이했다. 26살에 청상과부가 돼 어린 남매를 키우던 그녀 역시 산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큰형의 빈자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웠던 것이다. 급기야 자신이 살던 좋은 집을 교회에 봉헌해 그 자리에 북교동성당이 들어섰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던 내 마음이 주위 사람들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고 그 무엇이었으랴! 나는 장성에 전통 차밭을 일구어 일본과 중국처럼 농업을 개량하고자 했다. 그리고 농업학교를 세워 기술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싶었다. 그 뒤 수도회를 초대해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 사업을 맡기고자 했다. 자그마한 하느님 나라를 일구고자 한 셈이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선 장성군 동화면 동호리 일대의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이만여 평의 야산과 농지를 사들였다. 토지를 정리하고, 차밭을 조성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대동아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일본은 더욱 악랄해져 갔다. 탄피를 만들기 위해 집집마다 놋그릇과 놋수저를 강탈해갔다. 장성 성당의 종마저 떼어가 버렸다. 내 꿈의 터전 역시 고스란히 날아가 버렸다.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논밭을 마구잡이로 징발했다.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땅을 빼앗긴 건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하지만 토지 징발 과정에서 총독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인들에 대한 분노는 참을 수 없었다. 일본에 대한 간사한 충성보다는 나에 대한 비열한 배신이 더 충격이었다. 그간의 내 호의와 자비를 그렇게 잔인하게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성에 터를 잡고 신심 깊은 교인으로 살고자 했던 지난 몇 년이 허망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경찰은 1945년 초에 나를 아무 이유 없이 장성경찰서에 가뒀다. 일본에 유학한 지식인임을 잘 알고 있던 그들이었다. 그런 내가 땅을 빼앗긴 울분 때문에 그들에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게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유학을 하고 온 나를 요시찰 인물로 주목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나의 홍군입대 경력을 그들에게 귀띔해 주었으리라는 짐작도 갔다.“대한독립 만세!”마침내 일본이 손을 들었다. 투옥된 지 6개월 만에 해방이 됐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은 잠시였다. 미군은 남쪽에, 소련군은 북쪽에 주둔하면서 분단이 시작됐다. 정치인과 정부 관리들이 나를 찾아와 미군정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미8군 정보처의 고문과 미군정의 자문을 맡아달라는 청이었다. 하긴 일본과 중국을 환히 알고, 일본어와 중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드물던 시절 아니었던가. 매일 미군 지프차가 집으로 와서 나를 데려갔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댔다.“금방 고관대작이 되겠네.”“몇 년 안에 이 장성 땅을 전부 사고 말 거야.” 부러움 반 시샘 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일은 오래 하지 않았다.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는 게 가슴 아팠다. 게다가 맨발의 성자를 따르고자 한 내게 재물과 지위는 걸맞지 않았다. 나는 미련 없이 손을 훌훌 털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찰서 감옥에서 한 결심을 실행에 옮길 때라 생각했다. 한때나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부르짖던 사람이 지주로 산다는 게 늘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1945년 말 총 농가 206만 5,477호 가운데 자립농가는 28만 6,824호로 13.9%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자작을 겸한 소작농이거나 순소작농이었다. 묵상 중에 내 땅을 모두 소작농민들에게 나눠주기로 작정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비우고 내려놓았던 것처럼…. 성경 말씀이 결정적이었다.‘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이들에게 모든 걸 내주고 싶었다. 장흥과 목포 일대의 소작농민들을 한 사람씩 불렀다. 1948년 정월 대보름 무렵이었다.“형제여, 날 용서하시오. 지주 행세하며 토지세 받던 어제의 내가 아니오. 당신이 소작하던 그 논밭은 이제 당신 겁니다.”일 년 뒤인 1949년 6월, 정부의 유상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었다. 나는 그 전에 무상으로 농지 개혁을 한 셈이었다. 소유권 양도 문서를 건네받은 농민들의 반응은 실로 다양했다. 의심의 눈초리로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기만 하던 이, 기쁨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엎드려 절하던 이, 하염없이 흐느끼며 감사의 말을 쉬지 않고 하던 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이 그럴까 싶었다. 나 역시 온전히 비움으로써 모든 짐을 내려놓았다. 내게도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아버지! 위민(爲民)과 청렴(淸廉)을 이제야 실천했습니다.” <계속> 백영민2014.12.24

‘천주가사’ 용어 도입한 하성래 선생 팔순 기념 논총 발간천주가사, 고전문학의 한 장르로 정립시켜 우리 학계에 ‘천주가사’라는 용어를 도입한 원로 국문학자이자 교회사연구자인 하성래(아우구스티노) 전 수원교회사연구소 고문이 20일로 팔순을 맞았다. 이에 서종태(스테파노)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등 후진들은 최근 「규운 하성래 선생 팔순 기념논총」을 발간하고, 17일 서울 화양동 무스쿠스 건대점에서 기념 논총 봉정식을 가졌다. 봉정식에는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를 비롯해 수원교회사연구소장 정종득 신부 등 성직자와 교회사학자 30여 명이 함께했다.하 박사는 “별로 업적도 없는 사람인데 후학들의 권유에 못이겨 기념논총까지 내게 돼 부끄럽기만 하다”고 겸양을 표했다. 그러나 그는 1971년 「한국언어문학」에 국내 첫 천주가사 연구 논문을 발표한 데 이어 1985년 고려대에서 「천주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최근까지도 논문을 낼 정도로 천주가사 연구에 독보적 업적을 남겼다. “가사문학을 연구하다가 천주가사 연구에만 매달리게 됐는데, 그야말로 맨땅을 파는 일이었지요. 선행 연구자가 단 한 사람도 없어 정말 외로웠습니다. 언젠가 지인이 왜 하필 천주가사를 했느냐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했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아무도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웃고 말았지요.”하 박사는 천주가사도 불교가사나 동학가사 같은 다른 종교가사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결속력 △강한 포교성(선교성) △작자 자신의 신앙고백이라는 특성을 지닌다며 “천주가사의 백미이자 결정판, 원형(archetype)은 천주가사의 모든 것이 집약된 최양업 신부의 ‘사향가’이며, 나머지는 다 사향가의 아류다”고 잘라 말했다. 하 박사는 이어 “천주가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천주교 용어 문제였는데, 이를 학술적으로 정리해준 분이 윤형중 신부님이셨다”며 “윤 신부님께서는 당신이 쓴 「천주교 요리 상해」전 3권 중 2ㆍ3권을 헌 책방에서 구했는데 1권을 못 구했다고 말씀드리자 선뜻 당신 서가에서 1권을 빼주셨고, 이 책을 바탕으로 연구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고 귀띔했다. 당시 연구에 활용된 천주가사 자료수집에는 윤형중 신부는 물론 오기선 신부, 최석우 신부 등 교회사학자들도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성경에 시편이나 아가가 있듯이 우리나라에는 ‘천주가사’가 있다고 보면 됩니다. 중국에도 성인을 꿈꾸는 노래라고 해서 성몽가(聖夢歌)’라는 게 있습니다. 고생은 했지만 천주가사를 고전문학의 한 장르로 정립시킨 건 보람으로 남습니다. 이제는 젊은 후배학자들이 계속 연구해 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하 박사는 교회사연구에도 몰입, 지난해엔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를 통해 「영혼의 횃불」,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재판록」을 펴냈으며, 곧 나올 「병인박해 시복재판록」 연구에도 관여했다. 요즘엔 연구보다는 잡문만 쓰고 있다는 하 박사는 “전남 화순의 규남박물관을 선조들이 남긴 지도와 간찰로만 채울만큼 훌륭한 조상의 후순으로 태어났음에도 학문적으로 깊이, 폭 넓게 정진하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오세택 기자 평화신문2014.05.21
![[성경 속 궁금증] 58. 메시아가 탄생한 베들레헴은 어떤 곳인가](//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5228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58. 메시아가 탄생한 베들레헴은 어떤 곳인가구약시대부터 예고된 '성스러운 땅' 콘크리트 장벽에 가로막힌 분쟁지역'동방박사의 경배' (지오토 작, 1306년) 미카 예언자는 현세 죄악을 경멸하면서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예언했다(미카 4-5장). 유다인들은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다줄 메시아가 장차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미카 5,1).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고 선포하고 있다. 메시아가 탄생한 베들레헴은 어떤 곳일까? 예수님 탄생지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약 8km 떨어진 언덕 위에 세워진 작은 마을이다. 오늘날 '베이트람'이라 불리는 베들레헴은 구약시대에는 '에프라타'라 불리기도 했다. 베들레헴은 구약시대 때부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마을이었다. 히브리어로 베들레헴은 '빵의 집', 아랍어로는 '푸줏간'을 뜻한다. 이곳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무덤이 있었다. "라헬은 이렇게 죽어, 에프라타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가에 묻혔다"(창세 35,19). 또 다윗 왕의 고향으로 구약시대 때부터 성스러운 땅으로 여겨졌다(1사무 16,1-13 참조). 오늘날 베들레헴은 어떤 모습일까. 오늘날 베들레헴은 팔레스티나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땅인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이곳이 분쟁지역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이 지역은 콘크리트 장벽을 지나서 가야 한다. 베들레헴에는 '예수 탄생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베들레헴을 순례한 어머니 성녀 헬레나의 청을 받아들여 예수님 탄생지로 전해오는 동굴 위에 339년 건축했다. 이 성당 중앙 제대 바로 아래에는 '예수 탄생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은 가톨릭과 그리스정교회, 아르메니아정교회가 각각 소유권을 갖고 있다. 제대 왼쪽은 아르메니아정교회, 오른쪽은 그리스정교회 소유이다. 예수 탄생 동굴은 그리스정교회 소유이지만, '베들레헴의 별'이라 불리는 동굴 바닥의 은색 별은 가톨릭에서 설치한 것이다.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6세기 초반 화재로 소실된 성당을 개축했다. 지금의 요새형 성당 외형은 12세기 초 십자군이 베들레헴을 탈환한 후 재보수한 것이다. 바닥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성당 바닥을 장식한 모자이크가 남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성당이 전쟁 통에도 이슬람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고 지금까지 1500년 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성당 정면에 있는 모자이크의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이 페르시아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군은 이 모자이크를 보고 매우 감동해 성당을 허물지 않고 참배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이유는 「쿠란」에 동정녀 마리아가 하느님의 종이며 예언자인 예수를 종려나무 아래에서 낳았다고 하는데, 이 종려나무가 바로 베들레헴에 있다는 이슬람의 전설 때문이다. 오늘날 무슬림들이 예루살렘 이슬람 황금사원과 헤브론 성조사원을 순례한 후 베들레헴 예수 탄생 성당을 참배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퇴사자22012.12.18
[가톨릭 신앙의 보물]사순시기와 부활시기-정의철 신부(전례학 박사) 서울 중앙동본당 주임낡은 인간성 버리고 하느님 사람으로 거듭나야전례주년(교회 달력)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 교회의 전례주년 안에는 성탄 축일과 부활 축일이 양대 큰 축일이다. 그러나 이 부활 축일은 성탄 축일보다 전례주년 안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활 축일을 준비하는 사순시기와 이 부활 축일을 더 연장하고 싶어 이루어진 부활시기에 관해 이야기하자. 주님 부활을 기다리는 사순시기 사순시기는 재의 수요일에 시작해 성 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로 마감된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인 사순 제6주일부터 한 주간을 성주간으로 지내는데 이 시기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한다. 이 사순시기에서 40이라는 숫자는 구원의 의미를 상징하는 성경에서 유래했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십계를 받기 위해 40일간 시나이 산에서 준비한 일이나(신명 9,18) 엘리야가 야훼의 계시를 받기 위해 40일 동안 걸어서 호렙산으로 간 이야기(1열왕 19,4-8)가 있고, 신약의 경우 예수님께서 공생활 전 40일 동안 단식하신 것(루카 4,1-13)과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사도들과 함께 계신 것(사도1,1-3)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성경의 40이라는 숫자가 가진 의미가 사순시기에 드러나는 것이다. 사순시기는 장차 이루어질 사건(부활)을 준비하고 하느님과 만나기 위한 합당한 준비를 하는 기간이다. 초기 교회에서는 옛 성삼일(성 금요일~부활)부터 역산해서 40일간의 준비기간(사순시기)을 지켰다. 오늘날의 성삼일은 주님 만찬미사부터 주님 부활 대축일까지였지만, 예전에 성삼일은 금ㆍ토ㆍ일요일이었다. 옛 성삼일일인 금요일부터 5일을 거슬러 올라가고, 그 전 5주를 합쳐 40일을 이룬 것이다. 그 후 재(齋)를 지키는 사상이 강해지며 사순시기도 늘어나게 됐다. 주일을 빼고(6일×5주=30일) 옛 성삼일 전까지(월~목, 4일) 34일간 사순시기를 지내기도 했다. 주일은 작은 부활, 기쁨의 날이라 재를 지키지 않았다. 또 34일에 이전부터 재(齋)를 지켜온 성 금요일과 성토요일 이틀을 더해 36일의 준비기간을 지내기도 했는데 36일의 준비기간(사순시기)은 1년의 11조를 지내는 의미로 재를 지켰다. 하지만 사순 기간 전부 재를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현재는 36일에 4일을 더해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40일간의 사순시기를 지낸다. 이 기간이 40일이냐 아니냐보다는 이 시기가 갖는 의미가 무엇이고 이에 따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40일이라는 사순시기의 상징적 의미는 속죄로서 우리 생활을 혁신하기를 촉구하며,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장차 이루어질 큰 사건(부활)을 합당하게 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사순시기 동안 신자들의 삶을 성화시키고 하느님께 다가서며,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사순시기를 맞는 신자들은 단식과 금육제, 자선행위 등 외적 준비와 함께 매일 미사에 참여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잘 읽고 묵상하며 기도를 통해 예수님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는 내적 준비를 한다. 은총의 시기인 사순시기 동안 신자들은 40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의미를 묵상하고 그 의미처럼 살려 노력해야 한다. 파스카 신비를 묵상하는 부활시기 부활 대축일은 구약의 전승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축일로 이동이다. 유다인들의 전승을 따라 니산달 14일에 지내자는 동방교회의 주장과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초점을 맞춰 니산(NISAN)달 14일인 만월 이후 처음 맞는 주일을 부활 축일로 지내자는 서방교회의 의견이 엇갈렸다. 니케아공의회에서 오늘날처럼 춘분이 지나고 그 다음 첫 번째 만월(니산달 14일) 후 첫 주일을 부활축일로 지낼 것을 결정했다. 동방교회에서는 8주간의 사순 시기를 지내지만 서방교회에서는 성주간을 포함한 7주간의 사순시기를 보낸다. 사순시기는 우리의 주님이요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고 성화시키기 위해 부르시는 은총의 시기다. 참회와 속죄로 은총에 감사하며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묵상하고 준비하면서 이 시기를 보내야 한다. 부활의 기쁨을 더 연장하기 위해 만든 것이 50일간 이어지는 부활시기이다. 부활시기는 부활 팔일 축제와 주님 승천 대축일, 성령 강림 대축일로 부활의 기쁨을 50일간 연장하며 기념하는 시기이다. 예수님의 구원 사업의 완성이란 측면에서 부활 이후 40일째 되는 날을 기념해서 지내는 것이 주님 승천 대축일이다. 또 구약시대 밀과 보리의 수확을 기념하던 오순절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이날 이루어진 성령 강림 사건과 연결해 예수님의 부활 이후 50일째 되는 날을 성령 강림 대축일로 지냈다. 사도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 성령 강림 대축일은 교회의 창립일이다. 정리=백영민 기자]※수요일 오전 7시 20분에 방송되며, 지난 회는 누리(http://www.cpbc.co.kr/tv)을 통해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백영민2014.03.11
![[성경 속 궁금증] 60. 예수님은 왜 율법학자들을 질책했을까](//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6645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60. 예수님은 왜 율법학자들을 질책했을까모세 율법 필사하며 백성 교육 담당하던 계층, 율법 근본정신 하느님 사랑 잊고 형식에 매몰'예수와 간음한 여인'(렘브란트 작, 1644년, 부분). 율법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려고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 돌로 쳐 죽일지를 울었다. 성경에는 율법학자가 자주 등장한다. 율법은 '지침, 규정, 법령, 명령, 계명'의 의미를 지닌다. 율법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토라'는 본래 가르침이란 뜻이다. 율법이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 백성의 생활과 행위에 관한 하느님 명령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 모든 이가 하느님 뜻을 따르게 하고자 하느님께서 내리신 도덕적ㆍ종교적ㆍ법률적 명령을 말한다. 율법학자란 대개 모세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하며 율법학자들을 공격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나온다(마태 23,1-36). 율법학자들은 법조문에 너무 얽매여 예수님과 항상 적대관계를 이뤄왔다(마태 15,1-20). 율법학자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율법학자는 원래 율법을 필사하는 직분을 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현존하는 구약성경 대부분도 이들이 필사로 남겼기에 보존이 가능했다. 외세 지배 속에서도 율법의 근간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 역시 이들 공로다. 이들이 율법을 가르치게 된 것은 바빌론 포로시대 이후다. 당시 사제 에즈라는 해이해진 백성을 교육하기 위해 이들을 교사로 활용했다. "에즈라가 바빌론에서 올라왔는데, 그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학자였다. 주 그의 하느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펴 주셨으므로, 임금은 그의 청을 다 들어주었다"(에즈 7,6). 에즈라 이후 율법 연구가 활발해졌고, 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오던 계율들을 모아 '613조항'의 규정을 확정 짓게 된다. 이처럼 율법학자들이 전문계층으로 등장한 것은 바빌론 유배 이후다. 유배를 거치면서 율법이 삶의 중심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에 율법학자라 불리는 집단이 탄생하게 됐다. 본래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추구했다. 후에 율법학자들은 랍비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 보수를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생활비를 구하기 위해 대부분 가내 수공업을 하고 있었다. 간혹 제사장을 겸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자신의 직업을 갖고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대제사장과 원로들을 만나는 위치에 있었다. "이튿날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사도 4,5). 후대 들어 율법학자들은 오히려 율법의 노예가 됐다. 모세가 전해준 기존 율법은 변질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이 지시하는 것들을 연구했고, 그 모든 규정을 빈틈없이 일상생활에 적용했다. 그러다 보니 율법은 사람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구속이 돼버렸다. 율법의 준수와 형식만 강조됐을 뿐 본래 율법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 사랑이 율법을 통해 드러나지 않게 됐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형식적 율법주의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심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바로 길이고 생명이므로 그분이 곧 율법의 완성이 된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시고 완성하셨다(마태 5,38-48).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허영엽 신부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cpbc2012.12.31

"영성서적으로 내면의 평화 다져요" 가톨릭출판사 독후감 공모, 6월 29일 마감 가톨릭출판사(사장 홍성학 신부)가 제3회 독후감 공모전을 실시한다. 공모전 대상 도서는 지난해 가톨릭출판사가 출간한 도서 중 24종이다. 일반 부문(성인과 청소년)은 「나를 살리는 말」 「괜찮아」 「별의 길」 「키릴 악셀로드 신부」 「단테의 신곡 (상)ㆍ(하)」 「미ㆍ사ㆍ일」 「미사의 역사」 「기도의 ABC」 「성자처럼 즐겨라!」 「알기 쉬운 사도신경」 「예비 신자 궁금증 105가지」 「내적인 삶의 발견」 「숨어 있는 기쁨」 「숨어 있는 행복」 「정의와 사랑」 「크리스토퍼 하루 3분 묵상」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전 (상)ㆍ(하)」 「전원 신부 묵상 1ㆍ2권」 「안셀름 그륀 신부의 작은 선물 시리즈」(축복, 감사, 쾌유, 위로, 치유) 등 19권이며, 어린이 부문(초등학생 이하)은 「나는 곰 친구가 있어요!」 「똑똑! 우리 아이 첫 성경」 「이솝 아저씨의 이야기 가게」 「사라진 은성작의 비밀」 「아빠와 함께 성인 교황님을 만나요!」 등 5권이다. 공모기간은 3월 5일부터 6월 29일(마감일 소인 유효)까지며 1인당 7편까지 응모할 수 있다. 원고 분량은 200자 원고지 기준 30매 안팎, 어린이 부문은 20매 안팎이다. 전자우편(bookreport@catholi cbook. kr)이나 우편(서울시 중구 중림로 27번지 가톨릭출판사 본관 3층 편집국)으로 보내면 된다. 일반 부문 최우수상(1명) 수상자에게는 상금 300만 원과 상패가, 우수상(2명)과 장려상(3명) 수상자에게는 각각 상금 70만 원과 50만 원, 상패가 수여된다. 어린이 부문 최우수상(1명) 수상자에게는 상금 50만 원과 상패가, 우수상(3명)과 장려상(5명) 수상자에게는 각각 상금 20만 원과 10만 원, 상장이 수여된다. 수상작은 8월 3일 출판사 누리집을 통해 발표하며, 시상식은 8월 28일 열린다. 홍성학 사장 신부는 "갈등과 가치 혼란에 휘둘리기 쉬운 이 시대에 온전한 내면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영성 서적을 읽어야 한다"면서 독후감 공모전이 신자들의 영성을 깊게 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했다. 문의 : 02-6365-1856, 가톨릭출판사 편집국 남정률 기자 백영민2014.02.18

젊은이여, 신앙의 근본을 재발견하라- YOUCAT으로 묻고 답하기[평화신문·가톨릭출판사 공동기획] <2> 그리스도의 신비를 어떻게 거행하는가?니콜라 푸생 '최후의 만찬', 1640년, 유화,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158. 미사에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요? 미사는 크게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로 이뤄져 있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46-1347항). 말씀 전례에서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독서들과 복음을 듣습니다. 그 밖에 강론과 보편지향기도도 말씀 전례에 속합니다. 이어서 거행되는 성찬 전례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봉헌되고 축성되며 영성체를 통해 신자들에게 주어집니다. 159. 미사는 누가 집전할 수 있나요? 본래 미사 집전자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지만, 주교나 사제가 그분을 대신해서 미사를 집전합니다(1348항). 사제는 그리스도의 명을 받아 그분을 그저 대신해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제 자신이 성품성사에 근거해, 교회의 머리로서 그를 통해 활동하시는 그리스도가 됩니다. 160. 미사를 거행할 때 교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다시 말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모심'으로써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영혼과 육신을 지닌 우리에게 자신을 내주신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 우리 삶 전체를 위한 자리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과 고통, 기쁨 등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희생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봉헌할 때 우리는 변화됩니다. 즉 우리는 이렇게 하느님 마음에 들게 되며, 우리 이웃들을 위해 유익하고 영양이 풍부한 빵이 됩니다(1368-1372항, 1414항). 161. 성체를 내 안에 모시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요? 가톨릭 신자만이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으며, 중대한 죄를 지은 경우에는 먼저 고해성사를 해야 합니다. 또한 제대 앞으로 나아가기에 앞서 이웃과 화해해야 합니다(1389ㆍ1417항). 오늘날 교회는 적어도 영성체 한 시간 전부터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공복재'를 지킬 것을 권고합니다. 미사 참례 시에 좋은 옷을 골라 입는 것도 경외심을 표현하는 또 다른 표징이 되는데, 세상의 주인이신 분과 우리가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62. 가톨릭 신자가 아닌 다른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나요? 영성체는 그리스도의 몸이 지닌 단일성을 표현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공유하며 가톨릭교회와 일치하는 가운데 사는 사람은 가톨릭교회에 속한 사람입니다. 교회가 교회의 신앙과 삶을 아직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을 영성체에 초대한다면 그것은 모순된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성체성사라는 표징이 지닌 신뢰성에 금이 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1398-1401항).cpbc2013.11.19

젊은이여, 신앙의 근본을 재발견하라- YOUCAT으로 묻고 답하기[평화신문·가톨릭출판사 공동기획] <3>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생명을 얻는가?코시모 로셀리 '산상설교', 1481년, 시스티나성당, 바티칸. 196.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설명하나요? 인간은 누구나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침해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닙니다. 하느님이 그를 영원토록 원하셨고 사랑으로 지어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구원받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정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99-1715항). 하느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에 의해 침해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지닙니다. 197. 인간이 행복을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성경을 읽으면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있나요? 하느님이 우리 마음속에 행복을 향한 무한한 갈망을 심어주셨기 때문에 그 갈망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오로지 그분밖에 없습니다(1718-1719항). 우리는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하신 '행복선언'(마태 5,3-12 참조)의 내용을 신뢰함으로써 행복해집니다(1716-1717항). 198. 영원한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영원한 행복이란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기쁨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1720-1724항). 그분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무한한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런 행복을 스스로 만들 수도 없고, 그 고귀함을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199. 자유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요? 진정한 자유란 악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요? 자유란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온전히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1730-1733항, 1743-1744항). 악은 그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거나 그것을 선택하면 자유로워질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악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며, 참된 선을 빼앗아 갑니다(1730-1733항). 120. 선한 결과를 얻기 위해 악한 짓을 해도 되나요? 선한 결과를 얻으려고 악한 일을 하거나 그 일을 용인해서도 안 됩니다. 더 큰 악을 피하려고 그보다 작은 악을 용인해야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습니다(1755-1756항, 1759-1761항). 의학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줄기세포를 연구하려고 배아를 사용하는 것은 그릇된 일입니다. 성폭행 피해자가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 낙태수술을 해서 그를 돕겠다는 것도 그릇된 일입니다. cpbc2014.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