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궁금증] 39. 성경에서 과부는 왜 가장 불쌍한 사람인가?](//cpbc.co.kr/CMS/newspaper/2012/07/rc/419585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39. 성경에서 과부는 왜 가장 불쌍한 사람인가?경제·사회적 보호자 없는 여인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엘리야(포드 매독스 브라운 작, 1868년). 성경에서 과부는 고아와 함께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성경에서 과부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남편이 죽어 혼자가 된 여자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과부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여자, 남편이나 장성한 아들 같이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는 이가 없는 여자, 사회적ㆍ법적 보호자나 후원자가 없는 여자 등도 함께 일컫는다(루카 18,1-8 참조).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남자에 비해 여자가 절대적으로 지위가 낮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없는 과부는 생활의 어려움이 더욱 컸을 것이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보호자가 없는 과부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디 호소할 데가 마땅히 없었다. 그렇기에 과부를 고아와 함께 최우선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약자로 규정했을 것이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그 부인은 소박한 과부 옷을 입어야 했다. "그는 자기 집 옥상에 천막을 치고 살면서 허리에 자루옷을 두르고 과부 옷을 입었던 것이다"(유딧 8,5).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과부가 평생 혼자 살아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아들이 없으면 남편의 형제와 수숙혼(嫂叔婚)을 할 수도 있었고, 친정으로 돌아가서 살거나 아직 젊고 지참금이 충분하면 재혼도 할 수 있었다. 아들이 있으며 남편이 남긴 재산이 많은 경우에는 재가하지 않고, 아들과 함께 그 재산을 관리하며 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과부는 대부분 재산 없이 어린 자녀를 데리고 있거나, 가난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젊은 여인을 의미한다(1열왕 17,8-16 참조). 이러한 과부는 고아와 이방인과 함께 사회의 하층 계급, 빈곤층을 이뤘다. 그래서 과부는 공동체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사람이었다. 먼저 임금은 과부를 비롯한 약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주요 직무로 삼았다. 물론 구약성경에서 임금은 과부를 돌봐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곳은 없다. 그러나 과부를 보살피는 일이 이스라엘에서 통치자의 본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시편 72장 참조). 이스라엘에서 과부를 돌보는 것은 하느님 뜻이라고 생각했다. 또 이런 점에서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과 이민족들의 신들이 다르다고 인식했다. "또한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신명 10,18). 또 항상 과부들을 잘 대해줘야 하며, 그들 재산을 더 잘 지켜줘야 한다고 여겼다(탈출 22,21-23). 그래서 과부들을 괴롭히거나 학대하고, 금전적 손해를 입히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들을 비난하는 대목에서 과부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촉구하셨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40). 또한 초대교회 공동체도 과부들을 특별히 돌봤고, 고통 중에 있는 과부들과 고아들을 찾아보는 일이 하느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 1,27).퇴사자22012.07.03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9. 연중 제3주일- 성경](//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8878_1.1_titleImage_1.jpg)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9. 연중 제3주일- 성경말씀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구원 섭리예수님께서 방문하신 나자렛 회당 자리의 기념 경당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있는 순례객들."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나자렛 회당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 곧 하느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살펴봅시다 ㉠하느님 말씀인 성경(105~108항):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글로 담겨지고 표현되어 보존된 것"(105항)이 성경입니다. 이로부터 성경의 몇 가지 중요한 특성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의 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직접 성경을 쓰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저술한 이들은 인간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저술하는 데에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선택하시고, 자기의 능력과 역량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활용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몸소 그들 안에 그들을 통하여 활동하시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또 원하시는 것만을 그들이 참 저자로서 기록하여 전달하도록 하셨다"(106항). 이렇게 본다면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의 공동 작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적인 표현 방법과 기술을 이용해서 기록한 것이지만 그 기록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기에 성경의 저자를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렇게 영감을 받아 기록된 성경은 진리를 가르칩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경에 기록되기를 원하신 진리를 확고하고 성실하게 그르침없이 가르친다고 (우리는) 고백해야 한다"(107항). 셋째,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죽은 문자로 머물지 않으려면,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도움을 통해 성경을 깨닫도록 우리 마음을 열어 주셔야 한다"(108항)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성경 해석(109~119항): 성경의 원 저자인 하느님께서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성경 해석에서 지켜야 할 원칙들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 저자들의 진술 의도를 알아내려면 그 시대와 문화의 상황을 비롯해서 당시 일반적 문학 유형과 이해, 표현, 서술 방식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그 진리가 표현되는 방식은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비롯해 표현 양식과 화법 등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책이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죽은 문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경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 교회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1) 성경 전체의 내용과 단일성에 특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성경의 책들이 다양하지만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이 지향하는 그 단일한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성경을 읽을 때는 전체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聖傳)에 비춰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이 글로 기록된 하느님 말씀이라면 성전은 교회의 공식 권위 즉 교도권에 위탁된 하느님 말씀입니다. 3) 성경을 읽을 때는 '신앙의 유비'에 유의해야 합니다. 신앙의 유비란 성경에 제시되는 신앙 진리들이 서로 모순되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일관성을 지닌다는 것을 뜻합니다. ㉢정경(正經): 성경은 한 권으로 된 책이 아닙니다. 여러 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크게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옛 계약의 성경이라는 뜻을 지닌 구약성경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오심과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준비합니다. 구약성경은 모두 46권인데, 유형에 따라 오경(五經,모세 오경) 5권, 역사서 16권, 시서(詩書)와 지혜서 7권, 예언서 18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새 계약의 책이라는 뜻을 지닌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전하는 복음서 4권과 사도들의 복음선포 행적을 담은 사도행전, 바오로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의 서간 21권, 그리고 요한 묵시록 등 모두 27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알아둡시다㉠성전(聖傳)(74~79항): 교회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려 주시고 드러내시는 계시(啓示)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드러났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모든 계시를 자신 안에서 이루신 그리스도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되고 당신 친히 전파하신 복음을 모든 이에게 선포하도록 분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명령에 따라 복음은 두 가지로 전해졌습니다. 한편으로, 사도들과 그 직제자들은 성령의 감도로 구원의 소식을 문서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문서로 기록된 것들 가운데서 교회가 정경(正經)으로 인정한 것이 성경 곧 네 복음서를 포함한 신약성경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분과 함께한 공생활에서 받은 것과 성령의 일깨우심으로 배운 것들을 입으로, 곧 "설교와 모범과 제도로써" 전달해 주었습니다. 사실, 복음은 문서로 기록되기 전에 구두(口頭)로 먼저 전달됐습니다. 사도들은 이 복음이 온전하게 또 생생하게 전달되고 보존되도록 후계자들 곧 주교들을 세워 계승하게 했는데, 이를 사도(적) 계승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사도 계승을 통해 구두로 전달된 것들은 성경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으면서도 성경과는 구별되는데, 이를 성전, 혹은 사도 전승(傳承)이라고 부릅니다. ㉡성경과 성전 그리고 교도권의 관계(80~86항): 교회는 "성전과 성경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또 서로 통한다"고 가르칩니다. 성경과 성전은 "동일한 신적 원천에서 솟아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를 이루며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80항)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똑같이 경건한 애정과 존경으로써 받아들이고 공경해야 한다"(82항)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 기록된 하느님 말씀(성경)이나 전해지는 하느님 말씀(성전)을 올바로 해석하는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敎導權), 곧 로마 주교인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를 이루는 주교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교도권이 하느님 말씀 위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도권은 하느님 말씀에 종속돼 봉사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퇴사자22013.01.22
[평화화랑] 유프라시아의 집 한지공예전 등 착한 목자 수녀회가 운영하는 유프라시아의 집과 한국화가 심홍(心弘) 이소영(수산나, 46, 서울 서교동본당)씨는 2월 5~11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1층 평화화랑 제1ㆍ2전시실에서 각각 전시를 연다. 문의 : 02-727-2336 ▨유프라시아의 집 한지공예전 서울대교구 여성복지시설 유프라시아의 집(원장 김성수 수녀)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소녀들의 한지공예 작품전. 사회적 폭력으로부터 치유돼 가는 과정에서 제작한 작품<사진>을 선보이는 자리로, 중1에서 고3까지 아이들의 꿈과 자립심을 키워주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출품작은 보석함이나 뒤주, 접시, 쟁반, 경대, 교자상, 소품 수납가구 등 생활소품 20여점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닥종이 공예가 이옥주(안나)씨에게 배워 익힌 실력을 보여주는 자리다. ▨이소영 '투명의자' 주제 개인전 권력이나 경제력, 명예 등을 향해 질주하는 인간의 자리다툼을 상징하는 '의자'를 소재로 삼은 개인전이다.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도 잊은 채 더 높이 오르려 경쟁하다가 길을 잃는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투명 의자'라는 제목의 전시에 담았다. '투명 의자'는 각자의 마음자리에서 추구하는 바에 따라 세상을 보고 느끼고 살아가게 됨을 형상화했다.작품 '닫을 수 없는 문'에서는 요한묵시록 3장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통해 신앙적 진리로 나아가는 문을 그리고 있다. 전통 문자도(文字圖)에 등장하는 전통적 문방구들을 다 빼고 비둘기나 성체, 성혈(포도주 형상), 성경, 종려나뭇가지, 물고기 등 형태로 '믿을 신(信)'자를 그려내기도 한다. 오세택 기자 cpbc2014.01.21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59>십계명 : 열째 계명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이웃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것도 죄
열째 계명은 현제 재물에 대한 무절제한 애착이나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명한다. 사진은 노천시장에서 전을 펴고 과일이나 채소를 살 손님을 기다리는 아이티의 여인들. 【CNS】 열째 계명은 아홉째 계명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를 해설하고 보충합니다. 재물은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재물, 특히 남의 재물에 대한 탐욕이 생길 때는 일곱째 계명에서 금하는 도둑질이나 사기 또는 약탈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십계명의 마지막으로, 타인의 재물에 대한 탐욕을 금하고 있는 열째 계명에 대해 살펴봅니다(2534~2557항). 탐욕의 무질서(2535~2540항) 우리는 배가 고플 때 먹기를 원하고 추울 때는 몸을 따뜻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원의 또는 욕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욕망이 한계를 넘어설 때 문제가 생깁니다. 내 소유가 아닌 타인의 것을 혹은 마땅히 타인에게 줘야 할 것을 부당하게 탐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열째 계명은 이런 탐욕과 세상 재물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을 금합니다. 또 재물과 그 힘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발생하는 무절제한 욕망도 금합니다. 이웃의 현세 재물에 해를 끼치는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고자 하는 욕망도 마찬가지로 금합니다. 그러나 이웃의 소유를 정당한 방법으로 손에 넣기를 바라는 것은 열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열째 계명을 주의해서 지켜야 하지만, 교회는 전통적으로 특별히 이 열째 계명을 잘 지키도록 권고받아야 할 유형의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습니다. △물품의 품귀나 가격 상승을 바라는 상인들 △같은 종류의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물건값을 올리거나 내리지 못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사람들 △팔 때는 더 비싸게 팔고 살 때는 더 싸게 사서 큰 이익을 남기기 위해 동료 상인이 곤경에 빠지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 △병자가 발생하기를 바라는 의사들 △중요하고 많은 소송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법조인들 등입니다. 열째 계명은 탐욕과 함께 시기심을 몰아낼 것을 요구합니다. 심각한 범죄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기심에 빠진 사람은 타인의 재산을 볼 때 침울한 마음을 갖고, 그 재산을 옳지 않은 방법으로라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무절제한 욕망을 갖는 사람이다”(2539항). 시기심은 탐욕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증오와 비장과 모함을 낳습니다. 또 이웃의 불행에 기쁨을 느끼게 하는 반면 이웃의 성공에는 불쾌감을 갖게 합니다. 나아가 시기심은 사랑의 거부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자비심으로 시기심과 싸워야 합니다. 시기심은 또 교만에서 나오기에, 겸손하게 사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성령의 소망(2541~2543항)법과 은총의 섭리로, 인간의 마음은 탐욕과 시기심에서 해방됩니다. 법과 은총은 인간 마음속에 ‘최고선’에 대한 갈망을 일으켜 주고, 인간의 마음을 채워주는 성령의 소망에 귀 기울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온갖 유혹에 주의합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소망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가난(2544~2547항)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것과 모든 사람 위에 당신을 더 사랑하라고 명하시면서 당신과 복음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버리라고 권고하십니다(루카 14,33 참조).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자기 마음을 바로 다스리도록 정신을 차려야 하며, 복음적 청빈 정신에 어긋나는 현세 사물의 사용이나 재산에 대한 집착으로 완전한 사랑의 추구를 가로막지 않게 하여야 한다”(교회헌장 42항). 부자들은 풍부한 재산에서 위안을 얻으며, 교만한 사람은 지상의 나라를 찾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섭리에 온전히 맡겨드릴 때에 내일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신뢰하는 가난한 이들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을 뵈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뵙고 싶습니다(2548~2550항)진정한 행복에 대한 갈망은, 현세 재물에 대한 무절제한 애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행복을 누리게 될 때 충족됩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오(332?~395?) 성인은 참행복에 관한 강론에서 이렇게 설파합니다. “하느님을 뵈오리라는 약속은 모든 행복을 초월합니다. 성경에서 본다고 말하는 것은 곧 소유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뵙는 사람은 이 보는 행위 안에서 좋은 것을 모두 얻을 것입니다.”하느님을 소유하고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 그리스도 신자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죽이고,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쾌락과 권세에 대한 유혹을 물리칩니다. 정리=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평화신문2014.07.23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0) 달의 날과 해의 날 - 일주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6052_1.0_titleImage_1.jpg)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10) 달의 날과 해의 날 - 일주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창세기는 신화적 사고 극복의 헌장 달신은 고대 근동세계에서 최고신의 피가 흐르는 강한 남성신이었다. 달신 숭배의 중심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도시국가 우르와 하란이었다. 고대 이스라엘 등 북서셈어를 쓰는 지역에서 달신은 작은 신이었지만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달신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면면히 이어졌다. 유일신 신앙을 키워오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후 광범위하게 퍼진 달신 숭배 문화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첫째는 신명기계 신학자가 닦은 신명기의 길이고, 둘째는 사제계 신학자가 닦은 창세기의 길이다. 첫 번째 노력인 신명기의 길은 달신 숭배에 대한 '직접적인 경고'를 했다. 신명기계 학자들은 달신 숭배를 이스라엘 신앙에 위협이 되는 요소로 인식해 이스라엘에서 달신 숭배 자체를 뿌리 뽑고자 했다. 남유다의 요시야(기원전 640~609) 임금 또한 달신 숭배를 아예 없애려 했다. 신명기 개혁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이기도 했던 그는 야훼 신앙이 위기에 처한 것을 깨닫고 종교 개혁을 시도했다. 그의 개혁은 신명기계 신학자들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달의 탈신화 요시야 임금은 외래 문물의 범람 속에서 신앙이 흐려지는 것을 우려하며 야훼 신앙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나라의 기강을 다시 세우고자 했다. 그 가운데 일월성신(日月星辰), 즉 달신과 해신, 별신을 몰아냈다.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제들도 내쫓았다. 바알신과 해, 달, 별자리들과 하늘의 모든 군대에 분향하던 자들도 내쫓았다(2열왕 23,5 참조). 이후 그는 다윗 왕조의 영화를 새롭게 적는 신명기계 역사서를 만들어 그 내용을 전파했다. 구약성경에는 달신 숭배를 직접 경고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신' 아니라 그저 '피조물'일 뿐이라고 했다. 달을 탈신화(脫神話)해 달신 숭배를 극복한 것이다. 신이 아닌 한 물건으로 여겼다. 이 같은 새로운 신학적 고백은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의 신학적 성찰에 기반을 둔다. 그들은 가장 밝은 빛은 하느님 한 분뿐이라 믿었다.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작은 나라였다. 큰 제국의 위협에 시달렸고 늘 조공을 바쳤다.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 일부가 유배 길에 나선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대 제국의 큰 신들에게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먼 옛날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킨 야훼 하느님 한 분만이 유일한 신이고, 다른 제국의 신은 그저 그분 손으로 만든 것으로 여겼다. 이렇듯 구약성경은 크고 작은 신들을 야훼 신앙을 바탕으로 탈신화한다. 이 같은 신학적 성찰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창세기 1장'이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야훼 하느님은 삼라만상을 모두 만드셨다. 그분은 또 다른 어떤 신들보다도 우월하며, 세상 어떤 것도 그분 권능에 견줄 수 없다. 더구나 하느님이 첫 나흘 만에 만드신 하늘과 땅, 해와 달은 수메르 시대 주신들이었다. 수메르의 가장 중요한 일곱 신(하늘ㆍ바람ㆍ산ㆍ물ㆍ달ㆍ태양ㆍ금성)은 세상 운명을 결정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창세기 1장은 이런 신들을 한낱 피조물로 만들어 그 권위를 추락시켜 버렸다. 하늘신도, 달신도, 태양신도 없다. 야훼 하느님은 나흘 만에 대제국의 높은 신 대부분을 만드셨다. 아무리 다른 신의 권능이 대단해 보여도 그들은 피조물일 뿐이다. 이처럼 약소국 이스라엘의 사제계 신학자들은 대담했다. #일주일 체계의 의미 우리가 쓰고 있는 날짜 개념인 '일주일 체계'도 수메르에서 나왔다. 수메르 사람들은 일곱 신의 이름에 따라 각 날에 이름을 부여했다. '태양신의 날', '달신의 날'하는 식으로 부른 것이다. 이들은 일곱 날을 한 주기로 신들의 이름이 순환되는 체계를 만들었다. 일주일 체계는 로마 시대로 이어졌다. 로마인은 그들 방식으로 이를 토착화했다. 이들은 로마 신들의 이름을 붙여 '화금수목월일토'(MarsㆍVenusㆍ MercuryㆍJupiterㆍMoonㆍSunㆍSaturn)의 '로마식 일주일 체계'를 사용했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이 신들의 순서는 조금씩 바뀌었다. 오늘날 우리는 고대 근동 신들의 이름을 지칭한 일주일 체계 안에 살고 있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은 일곱 날에서 신들의 이름을 모두 제외했다. 일주일을 신들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야훼 하느님의 창조 행위 순서에 따라 '첫째 날', '둘째 날'하는 식으로 불러 다른 신들을 연상시킬 여지를 없앴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숫자로 이름을 붙였지만, 마지막 날은 하느님께서 쉬신 날, 곧 '안식일'로 불렀다. 이로써 창세기 1장의 탈신화화는 완성된다. 다시 말해 일주일 체계는 유지됐지만, 그 체계에 깃든 고대 근동의 신화는 완전히 탈색되고 야훼 신앙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됐다. 창세기 1장은 단편적으로 흩어진 '고대 이스라엘 탈신화 본문'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은 거대한 주변 민족의 다양한 신화와 종교에 맞서 고유한 신앙을 지키려 한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적 프로젝트의 결론이다. 창세기 1장은 고대 이스라엘 탈신화화의 헌장(憲章)이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평화방송 TV 방송시간 : 수요일 오전 9시(본방송), 금요일 저녁 9시(이하 재방송), 일요일 저녁 9시, 월요일 오전 4시ㆍ오후 3시퇴사자22013.04.02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결정 <23>이현 안토니오배교 뒤 더 다져진 신앙
이현 124위 중 한 명인 이현(안토니오,?~1801)은 여주 출신이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다. 그가 천주교를 접한 건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때에 이미 그는 교회서적을 얻어보고 신앙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자신의 숙부 이희영이 노론(老論) 출신의 유일한 천주교 신자인 김건순(요사팟, 1776∼1801)의 집에서 살게 되자 그 집을 자주 왕래하다가 1797년 김건순에게 교리까지 배우게 된다. 점차 천주교 교리가 진리라고 여기게 된 그는 한양에 올라와 홍필주(필립보, 1774∼1801)의 집을 찾아가 교리를 더 깊이 공부한 뒤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그러고나서 정광수(바르나바, ?∼1802), 최필제(베드로, 1770~1801) 등과 함께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기도모임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그후 그는 홍익만(안토니오, ?~1802)의 딸과 혼인해 홍필주와 동서 사이가 됐다.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이현은 붙잡혀 포도청에 끌려가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계속된 문초와 형벌에 일시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고 마음을 고치겠다”고 답변했다. 물론 교우들을 밀고하지는 않았다. 다시 형조로 이송된 그는 포도청에서의 변절을 깊이 뉘우치고 신앙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하며 회두했다. 이때부터 박해자들이 아무리 형벌을 가해도 그는 배교를 하지 않았고, 굳게 신앙을 지키다가 1801년 7월 2일 한양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순교자 이현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숙부 이희영(루카, 1756∼1801)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현은 그리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아니지만, 이희영은 김두량(1696∼1763), 박제가(1750∼1805) 등과 함께 서양화법을 조선화에 도입한 당대의 화가였다. 그래서 저명한 서화가 오세창(1864∼1953)은 이희영이 그린 ‘견도’(犬圖,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가 서양화법을 이용해 그린 최초의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다 이희영은 당대에 이미 성화와 상본을 그린 작가로도 유명했다. 물론 그의 성화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지만, ‘백서’를 쓴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에게 예수상 3본을 보낸 일이 드러나 처형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성화가로서 이희영을 부인하는 역사가는 없다. 그렇지만 조카 이현은 순교자로서 시복을 눈앞에 두게 됐지만, 이희영은 대역죄인이라는 죄명을 쓰고 죽었으며 순교 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희영은 1794년 말 주 신부가 입국한 후 이중배(마르티노, ?∼1801), 원경도(요한, 1774∼1801) 등과 함께 입교했다. 입교 후 한양으로 이사한 그는 향교동에 살며 그림을 그려 생활했다. 성화에도 능했지만, 영묘화(靈描畵, 동물이나 곤충 그림)나 남종화풍 산수화도 그에 못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세례명이 루카였던 것을 보면, 그가 이미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성화가 루카 사도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조카보다 먼저 체포된 이희영은 신문을 받던 중 배교했다. 그러나 그는 석방되지 못하고 이현의 순교에 앞서 그해 5월 11일 김건순의 종형 김백순(?∼1801) 등과 함께 45세의 나이로 참수됐다. 김건순 또한 그해 6월 1일 처형됐는데,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그가 용감히 신앙을 고백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조선 조정의 형벌 관련 문서인 ‘결안(結案)’은 그가 신문을 받으며 한 번도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배교로 일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희영과 김건순이 ‘배교했으나 석방되지 못하고 참수됐다’고 기록된 대목은 좀 이상하다. 천주교 신자로 끌려가 배교했다면 석방되는 게 정상적일 텐데 그렇지 않아서다. 김건순이야 당대 집권층인 노론인데다 척화파 김상헌(1696∼1763)의 양자였기에 배교에도 불구하고 양자 파기, 곧 파양까지 당하며 처형됐다지만, 그의 친구인 이희영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금부 추국 당시 결안에는 이희영의 배교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하지만 황사영의 백서나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그가 순교자로 나오고 있을 뿐 아니라 조정 대신들도 그의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처형했다. 이를 감안하면 이희영은 순교 여부는 향후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성화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이희영이 자료 부족으로 순교 여부를 확인할 수 없고 현양할 수 없는 건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평화신문2014.07.22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23>발터 카스퍼(중)](//cpbc.co.kr/CMS/newspaper/2013/11/rc/481724_1.1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발터 카스퍼(중)개별 역사적 사실과 보편적 진리 아우르는 통합적 신학 전개 카스퍼의 신학은 한 편에선 자유주의적 또 다른 한 편에선 보수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외부 비판에 전혀 동요치 않고 튀빙겐 신학자로서 길을 오롯이 걷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 신학계에는 신앙과 교회의 주요 핵심 사안과 관련해 이전처럼 단일한 입장이 아니라 복수의 입장들이 공존하면서 작지 않은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특히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불리는 신학 노선들 사이에는 신앙과 교회 생활의 주요 진리의 의미를 둘러싸고 확연히 구별되거나 대립하는 입장이 평행선을 긋다시피 양립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신학 풍토에서 카스퍼의 신학은 한편에선 '자유주의적' 또 다른 한편에선 '보수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외부 비판에 전혀 동요치 않고 '튀빙겐 신학자'로서 입장을 의연한 자세로 일관되게 유지해 오고 있다. "그들(튀빙겐 신학자)에게 보수적이고 진보적인 것은 서로를 배제하는 반대들이 아니다. 이들은 서로 양립불가하지 않고 보완적으로 작용한다. 이에 비해서 극단적 주장들은 항시 더 단순하다. 이와 반대로 극단들을 함께 응집시키고 가급적 함께 생각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이는 '조정하다'를 뜻하는 것이며, 이는 '신학은 생각해야 한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아니다." 카스퍼 신학의 인식원리 카스퍼의 신학은 방법과 내용 면에서 '튀빙겐 신학'의 입장을 오늘날의 역사 상황 안에서 충실히 대변한다. 이 신학의 인식원리와 방법으로부터 신앙의 핵심 진리 및 교회 주요 현안과 관련해 다른 신학자나 노선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입장을 형성하면서,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활동하는 다수 신학자들의 공감과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카스퍼 신학의 특성은 튀빙겐 학파의 전통 개념을 '신학적 인식원리'를 적용한 방법을 통해 신앙의 여러 진리를 구명하는 데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튀빙겐 신학의 전통은 재래 전통 개념과 구별돼 하느님의 자기전승으로서 계시에 관한 모든 진술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지닌다.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는 영원한 하느님 말씀이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 시점과 공간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자기 전달(증여)로서 나자렛 예수로 강생했다는 믿음이다. 이는 바로 신앙 핵심이 그 내용과 현실 그리고 매개와 전체 지평 안에서 역사적임을 가리킨다. 고대에서 시작해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는 교회와 신학 안에서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이 기간에 역사나 역사적 변천 현상은 교회와 신학 안에서 그리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상사적으로 인간학적 전환을 이룩한 근세에 이르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역사가 우주의 포괄적 질서 안에서 한 소인이 아니라 모든 질서 자체가 그것을 즉시 상대화하는 역사 내에서의 한 소인으로 간주되기 시작하면서 세계 실재 자체가 심층으로부터의 역사로 파악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초 튀빙겐 신학자들이 도모했던 그리스도 신앙과 역사의 만남이 한 세기 훨씬 지나고 나서야 가톨릭 신학계 안에서도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신학자나 노선에 따라 신학과 역사의 만남이 상당히 상이한 방법으로 이뤄졌기에, 현격한 입장 차를 드러내는 여러 신학적 입장들이 형성돼 혼선을 빚은 것이다. 신학계에서 그동안 이뤄진 신학과 역사의 만남으로 종교사와 역사ㆍ비평적 주석학이 태동했다. 이로써 영원불변한 하느님 말씀이 담긴 성경의 역사적 제약성, 타종교로부터의 영향, 당대의 문학형식과 사고형식, 기술형식으로부터의 영향, 그들의 역사적 발전 그리고 그로써 주어진 개별 진술 사이의 긴장 상태가 속속 밝혀지기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성서 진술이며 신앙 진리에 관한 역사적 인식은 교회의 많은 교리 체계나 구조형식을 역사적인 것으로 드러내면서 교계나 신학계에서 신앙과 역사의 문제 처리를 둘러싸고 서로 구별되는 입장들이 갈등을 빚는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카스퍼는 현대 신학의 이러한 갈등 상황 안에서 튀빙겐 학파의 전통 원리에 따라 작업을 수행해 왔다. 그에게도 전통은 살아있는 전통, 즉 사람들이 생활해 전수함으로써만 전승을 지닐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신앙 인식의 기초가 역사(특정 시간과 장소) 안에서 발생한 나자렛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전승의 계시로 규정된다. 그런데 계시와 계시된 것의 전달로서 전승이 중세 이래 지난 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명제(命題)처럼 생각됐다. 이것은 하느님 계시가 그 원천과 역사적 증거 안에서 명제들의 총합으로 이해됐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풍토 안에서 성경과 성전, 교도권 등의 문헌들이 초역사적 교리의 구성요소로 간주됐다. 하지만 카스퍼는 이러한 재래 전통 개념과 구별되는 튀빙겐 신학의 입장에 따랐다. 그는 전통을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현재화에 이르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요, 성령 안에서 이뤄지는 그리스도의 기억"으로 이해한다. 튀빙겐 신학자들이 내내 강조하는 '하느님의 자기전승'으로서 전통은 교회 역사를 거치면서 축적되고 물화(物化)된 소유자산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생활하는 신자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자기전승은 교회와 신자를 전통주의로 속박하지 않고, 역사의 개방된 조류 안에서 미래의 길로 자유롭게 가도록 하는 살아 있는 전통이다. 따라서 카스퍼는 신앙 진리를 '추상된 명제로 구성된 교리 체계의 축적(蓄積)'과 간단히 동일시하지 않고 '교회 존재와 동일시되는 생동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견지한다. 카스퍼 신학 방법 카스퍼 신학은 튀빙겐 학파의 전통 개념에서 출발해 신앙과 신학을 조명하는 길을 걷는다. 여기서 교회성은 역사 진행에서 축적된 추상적 교리체계와 일치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주석이 늘 새롭게 이뤄지는 생동적 전통과 소통의 과정으로 들어서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입장은 성경 진술과 결정된 교리 사실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신학적 실증주의나, 이를 무리하게 하나의 체계로 압축하는 교리주의 입장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카스퍼는 역사적 개별 해석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신학적 개별 자료에 내재하는 활력에서부터 실재 일반의 종말론적인 궁극의 의미가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로 모든 것이 통합되는 체계적 연관성을 제시하는 것을 최대 관건으로 여겼다. 말하자면 그는 한편으로는 세계 안에서 발생한 다양한 역사와 개별적 역사적 사실(부분), 또 다른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집중적이며 극적으로 주어져 있는 보편적 진리(전체)를 모두 중시하는 일종의 통합적 신학을 전개한다. 그의 이러한 작업방법은 '시대의 열린 조류 안에서 신학'을 전개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보편적 신앙 진리로서 복음 진리의 의미를 온전히 구명하기 위해 성경과 전승의 개별적 자료에 대한 엄밀한 역사적 연구 작업과 교회와 세계의 열린 조류 안에서 성령을 통해 생동적으로 이뤄지는 계시의 종말론적 자기전승의 의미를 구명하는 작업을 함께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을 특정 과거 시점에 머물러 있는 고정된 교리 내용을 담은 보편적 진리 전체로 간주하기보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계시 자체와 인격적으로 관련을 맺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카스퍼는 신앙 진리에 대한 역사적 개별 연구와 체계적 개관을 적절한 관계로 맺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제양성교령」의 가르침과도 부합한다고 본다. "교회 학문을 재검토하는 데에 있어서 우선 철학과 신학을 보다 적절히 조화시켜 학생들에게 인간의 전 역사를 관통하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점차로 명백히 이해시키는 단일 목적에 철학과 신학이 함께 이바지해야 하겠다"(14항). 지난 공의회 이후에 신학계 안에는 신앙 진리에 관한 역사적 개별 연구를 생략하다시피 건너뛰고 기존의 개관 내용의 정당성을 제시하는 작업에만 치우치는 입장들이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앙 전체의 성격은 도외시하고 오로지 개별 진리에 관한 성서적거나 사변적 분석 작업, 세부 천착에 매몰되는 입장들이 목격된다. 카스퍼 신학에서는 특정 진리의 개별 연구 자체가 주된 연구 대상이 아니라 역사적 개별 해석을 유념하면서도 그리스도 신앙 전체를 살피며 앞으로 발생할 종말론적 차원의 실상을 구명하는 입장이 시종 관건이 된다. 그 때문에 그는 개별 논구 대상의 성경적이고 전승적인 근거뿐만 아니라 역사적 차원의 정신사적 발전 근거에도 주목하면서 이를 통해 도전을 받는 신학의 구체적 역사에 자기 자신을 세움으로써 보편적 신앙 진리의 종말론인 궁극적 면모를 제시하려고 진력하는 것이다. 카스퍼는 튀빙겐 신학의 이러한 입장이 인류 사회와 교회 안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주목하면서 그 신학적 의미를 구명하는 작업을 소홀히 한 채, 재래 신학의 내적 논리 체계 안에서 순수 사변 일변도로 아니면 성경 실증주의적으로 또는 교리주의적으로 보편적 신앙 진리의 의미를 제시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다른 신학 노선과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소신을 피력해 왔다. 그는 다른 신학자와 논쟁에서 상대방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개진해 왔다. 그가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와 관계 설정과 관련해 라칭거와 벌인 논쟁을 통해, 또 라칭거의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이나 교황 재위 기간 중에도 평소의 소견을 일관되게 개진한 사실을 통해 신학자로서 그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심상태 몬시뇰(수원교구, 한국그리스도사상 연구소)cpbc2013.11.05
"연중 고해성사, 판공으로 인정" 64%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주일미사 전례와 고해성사 의무'교구별 토론결과 종합 보고서 사목자와 신자들은 '일 년 중 어느 때라도 고해성사를 했다면 판공성사 의무를 한 것으로 인정하자'는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일미사 참례와 고해성사 관련,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가 14개 교구에서 보내온 121개 의견을 분석한 결과 일반 고해성사도 판공성사로 인정하자는 의견이 64%에 이르렀다. 이는 주교회의가 신앙의 해를 맞아 전국 교구에 '신자들의 주일미사 참례 의무와 고해성사에 관한 사목적 배려방안'을 주제로 토론한 후 결과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제출받은 결과를 분석한 것이다.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는 "부활 판공성사를 부득이한 사정으로 제 시기에 받지 못한 신자는 성탄 판공 때나 다른 때에라도 받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복음화위원회는 토론 자료에서 '다른 때'를 '일 년 중 어느 때'로 해석하고 있다. 복음화위원회 제안에 찬성하는 이들은 △신자들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고해성사가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냉담교우를 상당 수 줄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연중 판공성사'가 부활ㆍ성탄 판공성사의 의미와 전통을 퇴색시키고 신앙생활의 해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또 판공성사는 신자 재복음화 효과가 있고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고해성사(판공성사) 활성화를 위한 사목적 제안'을 주제로 한 토론에서는 고해성사를 행하는 사제의 태도를 지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사제가 고해소에서 야단치듯 말하지 말고, 적어도 미사 30분 전에는 고해소 안에서 신자들을 기다렸으면 좋겠다는 의견부터 형식적인 훈화, 일사천리로 외우는 사죄경을 들으면 고해성사의 은총을 신자들이 느낄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주일미사 참례 의무'에 관한 토론에서는 '미사나 공소 예절에도 참례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묵주기도, 성경 봉독, 선행 등으로 그 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고 명시한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74조 4항과 관련해 '부득이한 경우'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지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부득이한 경우'에 대한 세부지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57%에 달했지만 묵주기도, 성경 봉독 등으로 주일미사 의무를 대신했더라도 고해성사는 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신앙교리위원회, 교리주교위원회 등 관련 위원회들은 '부득이한 경우'를 직업상 또는 신체적ㆍ환경적 이유로 주일미사에 일시적ㆍ지속적으로 참례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 묵주기도는 5단, 성경 봉독은 주일독서와 복음 봉독, 선행은 희생과 봉사활동이라는 기준을 제시했다. 세부지침을 만드는 데 찬성하는 이들은 신자나 사제 개인마다 '부득이한 경우'에 대한 이해가 다를 수 있으므로 명시적 해석과 기준,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부득이한 경우에 대한 구체적 사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반면 반대하는 이들은 세부 조항의 남용 가능성과 율법적 접근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또 부득이한 경우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신자 개개인의 '양심 법정'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주일미사 참례 의무를 대신한 경우 고해성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교회의 위원회 해석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이 59%로 찬성(41%)보다 1.5배 가량 많았다. 고해성사 면제는 주일미사 참례 중요성에 대한 의식을 약화시키고 냉담교우를 양산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반면 찬성하는 이들은 "그동안 교회가 '주일미사에 빠지면 죄가 된다'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며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미사에 빠지는 신자들의 심리적 압박감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번 토론은 광주ㆍ의정부교구를 제외한 14개 교구에서 자율적인 방법으로 진행됐다. 서울ㆍ수원ㆍ원주ㆍ마산ㆍ전주교구는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가, 안동교구는 사제와 평신도가 토론을 함께 했지만 나머지 교구는 사제들만 토론에 참여했다. 토론 내용을 분석한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는 "교구마다 토론 방식, 정리 방식이 달라 분석 내용을 일선 사목현장 입장이라고 일반화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한계를 지적했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cpbc2013.11.19
![[성경 속 궁금증] 61. 모세는 왜 구리 뱀을 장대에 달아 놓았을까](//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8182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61. 모세는 왜 구리 뱀을 장대에 달아 놓았을까구리 뱀, 죄와 배신 넘어서는 하느님 사랑… 영원한 생명 얻게 하려는 십자가 사건 예시'모세와 구리 뱀'(틴토레토 작, 1576년).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처음 나오는 뱀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악마의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창세 3장). 그러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앞에 보인 장대에 감긴 구리 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예시(豫示)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이 십자가 사건의 예형은 구약시대의 '구리 뱀 사건'(민수 21장)이다. 이집트를 탈출해 사막생활을 할 때 부족한 음식과 물 때문에 노예생활을 다시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벌하신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이집트 탈출 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주변 다른 민족들에게 항상 생존의 위협을 겪어야 했다. 한 곳에 안주하는 생활이 아니었고, 약속의 땅을 찾을 때까지 돌아다니고 방랑해야 하는 삶이었다. 이러한 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5-9). 하느님의 자비는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누구나 목숨을 건지게 하셨다. 이처럼 모세를 통해 하느님께서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구리 뱀이다. 당시 매일 끊임없이 장소를 이동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 신의 유혹을 받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리 뱀 사건을 통해 체험한 것은 구원과 풍요는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충실과 신뢰 속에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구리 뱀은 이미 그 자체가 백성의 배신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 그리고 생명이라는 하느님 선물이 드러난 상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와 배신을 넘어서는 하느님 사랑이며,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구리 뱀은 신약에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에 비유된다. 십자가 자체가 세상에 구원과 생명을 주기보다는 십자가에 높이 달려 못 박혀 돌아가신 사람의 아들, 즉 하느님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구원은 아래로부터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느님 은총임을 나타낸다. cpbc2013.01.15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4>십계명과 사회교리](//cpbc.co.kr/CMS/newspaper/2014/02/rc/495088_1.0_titleImage_1.jpg)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십계명과 사회교리법 없이도 살 사람 줄어드는 사회 인간이 세상을 사는데 여러 가지 기준이 존재한다. 인간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통용되는 윤리규범을 만들며, 이를 실천함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선을 추구한다. 우리는 항상 올바른 규정과 규범을 지키는 사람들을 일컬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법 없이 살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 같다. 모든 분쟁을 법으로만 해결하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져간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넘어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인류의 보편적 윤리규범 얼마 전, 한 본당에서 특별 강의를 부탁받았다. 내가 사는 학교는 강화도에 있어 저녁 특강을 하려면 퇴근 시간을 피해 시간 여유를 두고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이날은 출발이 늦어 교통 체증에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뒤차와 작은 접촉사고가 났다. 차에서 내려 뒷범퍼를 살펴보는데 뒤차의 운전자가 와서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를 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실수했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순간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신자분들에게 사랑과 용서를 주제로 강의하러 가는데 내가 화를 내고 싸우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느님은 우리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가르치셨는데, 내가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겠다." 운전자에게 앞으로 조심히 하라는 말을 하고 그냥 보내드렸다. 본당에 도착해 몇몇 신자분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병원에 입원하면 돈 좀 벌 수 있는데, 몇백만 원은 손해보셨다"면서 웃으셨다. 그분들의 웃음이 불쌍하고 한심해서가 아닌, 그래도 사제로서 잘했다는 웃음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따금 자동차 뒷범퍼 사고 자국을 보면 "그때 사제로서, 신앙인으로 올바른 일을 했구나"라는 생각에 웃는다. 어린 시절 나는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어린이였다. 도로를 무단횡단하거나 쓰레기를 길에 버리는 것은 어린 나에게 절대 있을 수 없었다. 그런 습관에 길들어 지금도 교통신호를 철저히 지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살다 보니 주변에는 윤리규범을 무시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공중도덕을 지키거나 양심적인 일을 하는 것에 무관심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자라고 교육받은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른 윤리관과 가치관을 갖고 산다. 따라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윤리규범이 필요하다. 만일 가톨릭교회에서 제정된 윤리규범이 인류의 보편적 윤리관과 정반대의 것이라면 더 이상 교회의 윤리관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 교회의 윤리규범 역시 인류의 공통 윤리규범에 어긋나면 안 된다. 하느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야 윤리규범의 보편성은 이미 성경을 통해 제시됐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선택된 민족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이집트 탈출 후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 시나이 산의 십계명 사건이다. 인간으로서 하느님과 지켜야 할 기본적 계명을 계약으로 맺은 것이다. 그런데 십계명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어느 조항 하나도 인류의 윤리규범과 충돌되거나 배치되지 않는다. 이는 십계명이 윤리규범으로서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인 「간추린 사회교리」는 십계명의 윤리적 보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십계명은 삶의 훌륭한 지침이며 죄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는 것으로서 자연법을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십계명은 보편적인 인간 윤리를 설명한다"(22항). 또한 이 십계명은 인간 사회의 상호 관계성에 주목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권리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한 분이신 참 하느님께 충실하고 또 계약의 백성들이 서로 사회관계에 충실해야 할 의무는 십계명에서 나온다. 이러한 관계는 특히 이른바 가난한 이들의 권리로써 규정된다"(23항). 십계명과 더불어 7년마다 거행되는 안식년 규정과 50년마다 거행되는 희년 규정은 하느님의 무상 은총과 정의로운 나눔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이처럼 안식년, 희년 규정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사건이 정의와 사회적 연대의 원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준다. 올바른 윤리규범이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비록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법이 충분히 스며들지 못했어도 우리는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 안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계명을 생활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법을 지키는 이들은 세상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백영민2014.02.04

기도, 하느님과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8. 성녀 데레사의 기도 가르침 ① 데레사 성녀의 영성에서 가장 핵심은 기도이다. 성녀는 기도를 하느님과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이라고 보았다. 하느님과의 친밀한 우정의 나눔인 기도성녀 데레사의 영성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기도’입니다. 그만큼 기도는 성녀 영성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녀에게 기도는 ‘성성(聖性)’을 향한 여정 그 자체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기원인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게 해주는 길이자 동시에 인간이 걸어가야 할 궁극적 목적인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루게 해주는 필수 도구입니다. 성녀는 완덕(完德)에 이르기 위해 인간이 걸어야 할 길과 기도의 여정을 동일시했습니다. 다시 말해, 성성에 이르는 길이 다름 아닌 기도의 정상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회심에서부터 성성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거쳐야 할 완덕의 단계들은 ‘기도 안에서’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실현된다고 성녀는 보았습니다.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성성의 길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아니면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 수도 없고, 그분을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기도에 충실했는가, 기도를 통해 얼마나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였으며 그분 말씀에 응답했는가가 한 인간의 영적 진보의 정도를 가늠하는 시금석(試金石)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비밀은 성녀가 「자서전」(8,5)에서 전해주는 기도에 대한 정의에 잘 드러납니다. “나는 기도란 자기가 하느님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하느님과 단 둘이서 자주 이야기하면서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 맺음인 기도성녀 데레사가 몸소 실천했고 우리에게 가르친 기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그 관계를 ‘우정’에 비유했습니다. 하필이면 왜 ‘우정’에 비유했을까? 성녀가 자신의 생애와 그 생애 동안 주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기억하며 쓴 「자서전」 초반부를 보면, 사춘기 시절부터 많은 친구들과 더불어 좋은 우정을 나눴다는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강생 수녀원에 들어간 후에도 훌륭한 인품을 가진 여러 사람들, 그리고 영성적으로나 학적으로 잘 준비된 신부님들과 좋은 영적 우정을 계속 맺었습니다. 성녀는 그런 우정들이 지닌 가치, 긍정적 측면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성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떻게 좋은 우정을 맺고 키워나갈 수 있는지를 체험적으로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건강한 인격적 관계를 맺는 측면에서 볼 때 성녀는 이미 본성적으로 준비가 잘 된 여인이었습니다. 영성생활에 있어서 이제 인격적 관계를 맺는 대상이 인간이 아닌 하느님으로 발전한 것일 뿐입니다.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격적인 분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인격적 관계 맺음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분이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며 세 위격 간에 서로 사랑하며 온전히 친교를 나누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세 위격 사이의 사랑이 넘쳐흘러 창조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그 창조의 정점인 인간이 창조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특별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란 말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마치 아들이 아버지의 DNA를 전수받아 아버지를 꼭 빼닮듯이, 그렇게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닮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우리 손으로 잡히지 않는 뜬구름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우리와 전혀 상관없이 머나먼 옥좌에 앉아 그저 우리를 관망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사랑스럽게 관심을 갖고 눈여겨보시며 섭리적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역사 안에 함께 동행하면서 그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등 그의 모든 삶의 굽이굽이에 함께하시며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그래서 마침내 당신이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로 데려다 주시는 역사의 하느님이십니다.하느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시간인 기도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분으로 꼽히는 성 토마스는 자신의 명저 「신학대전」 1부 50~55문항에서 다양한 개념들을 바탕으로 창조에 대해 설명한 다음, 마지막에 이렇게 반문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것 중에 창조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개념에 대해 꼽는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관계(relatio)’라고 그는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본래 사랑이 충만하신 나머지 그 사랑을 나눌 대상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조건 없이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하느님을 닮았다는 말이고 먼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건네신 그분께 사랑으로 응답해 드릴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존재의 신비를 깨닫게 되고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바로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건네신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듣는 시간이자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 그 사랑에 응답함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가 그저 우리가 갖고 싶은 것,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해달라고 떼만 쓰는 시간이라면, 서낭당에 가서 물 한 그릇 떠놓고 비는 것과 뭐 그리 다르겠습니까? 진정한 기도는 우리를 내신 분을 알고 사랑하고 그 사랑에 응답해 드리는 데 있습니다. cpbc2014.09.02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영성이란 무엇인가?영성, 하느님 사랑에 대한 나만의 응답영성, 하느님 사랑에 대한 나만의 응답 흔히 성녀 데레사는 '영성의 대가'라고들 말합니다. 어느 특정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사람을 대가(大家)라고 합니다. 영성의 대가인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반추하려면 무엇보다도 '영성'의 올바른 개념을 아는 데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영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가장 유행하는 말이 있다면 그건 분명 이 '영성'이란 말일 겁니다. 사제 영성, 수도자 영성, 평신도 영성, 순교자 영성, 영성 심리, 매스컴 영성 등 도대체 교회에서 사용되는, 좀 있어 보인다 하는 말들은 죄다 '영성'이란 말과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아마 몇 퍼센트도 되지 않을 듯 싶습니다. 성삼위 하느님께 이르는 것 넓은 의미에서 보면, '영성'은 인간의 행위를 유발하는 어떤 태도나 정신으로서 일종의 종교적, 윤리적 가치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영성' 하면 어떤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신 혹은 절대자를 믿는 사람이면 어떤 종교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영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영성뿐만 아니라 선(禪)의 영성, 불교도 영성, 유다교 영성, 회교도 영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협소한 의미에서 본다면, '영성'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신앙생활,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느님과 신자 간의 인격적인 관계성을 의미하며 그 관계에 바탕을 둔 생활양식을 의미합니다. '영성'(spiritualitas)이란 말은 '영(靈)'을 의미하는 라틴어 '스피리투스(spiritus)'와 그리스어 '프네우마(pneuma)'에서 유래합니다. 이러한 선상에서 성령(聖靈)을 '스피리투스 상투스(Spiritus Sanctus)'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영성이 성령과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계시 진리에 비춰볼 때, 진정한 의미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분을 통해서 성삼위 하느님께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성'에는 이런 일반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중심인 로마에서 영성신학으로 권위 있는 교황청 테레시아눔 대학원에서 40여년 이상 가르쳐 오신, 명강의로 유명한 라우다치 신부님은 '영성신학의 근본 주제들'이라는 과목을 가르치실 때 늘 다음과 같은 질문과 함께 첫 강의를 시작하곤 하십니다. "여러분은 영성을 뭐라 생각하십니까?" 필자 역시 거의 20년 전 이 강의를 들을 당시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만, 저를 비롯해 대강의실에 꽉 들어찬 수많은 신부님, 수녀님들 가운데 그 누구도 이 신부님이 의도하신 답을 제대로 맞히진 못했습니다. 결국 신부님께서는 저희들의 대답을 종합하시며 다음의 한 마디로 영성의 핵심을 지적하셨습니다. 영성은 하느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성을 표현한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 각자가 그분께 드리는 고유한 사랑의 표현 방식이라고.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참하고 예쁜 아가씨,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처럼 '엄친딸(완벽한 여성을 이르는 말)'이 있다고 합시다. 그 아가씨에게 반한 세 청년이 있습니다. 한 청년은 시인이고 다른 한 청년은 음악가이며 마지막 한 청년은 미술가입니다. 세 청년 모두 그 아가씨를 사랑합니다만, 저마다 사랑의 표현은 달랐습니다. 시인 청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주옥같은 시구(詩句)를 인용하며 심금을 울리는 편지를 써 보내 그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반면, 음악가 청년은 그녀를 생각하며 가끔씩 산책하다 떠오른 악상을 갖고 세레나데를 작곡해 어느 날 저녁 그 아가씨가 사는 집 창문가에서 그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미술가 청년은 그 아가씨의 초상화를 예쁘게 그려서 선물하는 것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시인, 음악가, 미술가 모두 그 아가씨를 사랑했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로 상황을 바꿔보기로 합시다. A라고 하는 신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당신을 돕는 것이라 하신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반면, B라고 하는 신자는 노래를 잘 부르는 자신의 능력을 봉헌하기 위해 본당 성가대에 들어가 매주 미사 때 성가로 주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C라고 하는 신자는 평소 성경 공부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당 성경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새로 입교한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세 신자 모두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지만, 그것을 표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세례 통해 영성의 바탕 마련 그러므로 영성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나만이 응답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사랑의 방식, 고유한 사랑의 색깔을 뜻합니다. 우리 각자는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모두 다릅니다. 태어난 곳도 다르고 자라난 가정환경도 다릅니다. 취향도 다르고 교육 정도도 다릅니다. 또한 하고 있는 일도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걸어온 삶의 역사가 다릅니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나를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바로 이 모든 나 자신의 독특함을 바탕으로 하느님과 맺는 고유한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나만의 방식으로 하느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통해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시작한 우리는 이미 잠재적으로 영성의 바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토대 위에 하느님에 대한 각자의 고유한 사랑의 방식을 갈고 닦으며 그분을 향한 고유한 사랑의 색깔을 곱게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영성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전이나 영성 서적들을 통해 만나는 성인들은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님께 나아가는가 하는 개괄적인 여정과 영성적인 원리에 대해 가르쳐주지만, 여러분은 성 프란치스코, 성 이냐시오, 성녀 데레사가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여러분 자신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걸어야 할 여러분만의 영성의 길입니다. cpbc2014.01.07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 목요특강 지상중계]<8> 영성의 예술, 정교회 예술의 상징과 의미](//cpbc.co.kr/CMS/newspaper/2013/12/rc/486060_1.1_titleImage_1.jpg)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 목요특강 지상중계] 영성의 예술, 정교회 예술의 상징과 의미교리 가르쳐주는 성화, 또다른 복음서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조그라포스 대주교(한국 정교회)교회가 동방과 서방으로 나뉘기 전 1000년 동안 교회에서 성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컸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서방교회는 성화 대신 동상을 사용했고, 동방교회는 성화를 계속 사용하며 성화가 원래 지닌 의미와 가치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성화가 제작되기 이전 초대 그리스도교 시기에는 상징을 많이 이용했다. 박해 시기 예배 장소였던 지하무덤(카타콤)에선 여러 상징물을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빵과 물고기, 알파, 오메가, 포도나무 등이다. 당시 신자들은 이런 상징물로 소통했다. 빵과 물고기는 감사의 성사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많이 사용됐다. 고대 그리스 단어 'ΙΧΘΥΣ'(익튀스)는 Ιησουζ(예수), Χριστοζ(그리스도), θεου(하느님의), Υιοζ(아들), Σωτηρ(구원자)라는 다섯 단어의 첫음절을 합친 것인데 물고기라는 뜻이다. 예수님에 관한 상징은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어린 양이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표현했다. 성경에도 예수님을 양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1,29).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 표현되기도 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포도나무도 있다. 포도나무는 성찬 예식 때 많이 언급되는데 성찬례에서 포도주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5). 이처럼 상징물은 성경과 교회 가르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성화에도 여러 상징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 '손'과 관련된 상징이 많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 중에 XP가 있다. 영어로 엑스, 피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키, 로라고 읽어야 한다. 이것이 성화에 사용될 때는 우리를 축복하는 예수님의 손으로 나타난다. 사제들이 신자를 축복할 때 들어 올리는 바로 그 손 모양이다. 7세기쯤 테살로니카 성 디아토리오스성당에 그려진 디아토리오스 성인 모자이크화를 보면 성인이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박해 당시 그리스도를 부정하라는 회유를 받았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이집트 시나이산에 세워진 성 가타리나수도원에는 페브로니아와 테오도시아 성인을 그린 성화가 있다. 이 성화에서 성인들은 한 손엔 십자가를 들고 다른 한 손은 들어서 무언가를 거부하고 있다. 이는 사탄을 거부하며 사탄 뜻대로 따르지 않겠다는 모습이다. 터키 이스탄불 성 소피아성당에 가면 1261년 그려진 예수님 성화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2층 벽면에 그려져 있는데 굉장히 아름답고 훌륭하다. 당시 예술가의 기술과 영성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지 잘 보여주는 모자이크다. 성화는 이처럼 예술적 가치가 높지만 장식을 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성화를 통해 교리를 배운다는 것이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성화는 침묵을 지키지만 많은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고 했다. 정교회에서는 성화를 다섯 번째 복음서로 부른다. 글로 쓰인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표현된 성경이라는 것이다. 성 소피아성당의 예수님 성화 모자이크를 보면 예수님께선 한 손으로는 우리를 축복하고 있고, 다른 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계신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주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고, 주님의 자비와 은총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 스스로는, 혼자서는 구원받을 수는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시나이산 성 가타리나수도원에는 나무에 그려진 예수 그리스도 성화가 있다. 6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누가 그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성화를 보면 예수님의 왼쪽과 오른쪽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왼쪽은 부드럽고 평온한 표정이며 오른쪽은 엄격한 모습이다. 이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을 표현한 것으로 주님께선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신 분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 그림을 어느 각도에서 보든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게 그렸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표현했다. 동방교회에선 성부 하느님을 인물로 표현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기에 그릴 수 없는 것이다. 정교회에선 빛과 같은 상징으로만 하느님을 나타낸다. 또 정교회에선 예수님을 표현하는 모습이 옛부터 지금까지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아프리카에선 아프리카 사람으로, 중국에선 중국 사람으로 표현하는데 정교회는 이를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서 한 장소에 한 인종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cpbc2013.12.03

착한 사마리아인은 '일곱 성사의 치유 선물' 상징[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16.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비잔틴 시대 바실리카 성당 터. 장방형의 이 성당은 바닥에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다. 성당 뒤편 붉은 암반에서 유래돼 이곳을 '마알레 아둠밈'이라 불렀다. 리길재 기자 ▨ 성경의 이웃과 교부들의 해석 '이웃'이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 성경에서 이웃은 이스라엘 동족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결속된 공동체로서 그 안에서는 누구나 서로에게 책임을 지고 있으며 각 개인은 자신에게 삶의 공간을 마련해 주는 공동체 전체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함께 사는 이주민도 동족 사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도 이단자와 밀고자, 반역자들은 이웃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유다인 혼혈로 다신을 믿었던 사마리아인은 기원 후 6년과 9년 사이에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 하필이면 파스카 축제 기간에 사람의 뼈를 뿌려 성전을 더럽힌 죄로 이스라엘의 '이웃'이 될 수 없었다. 교부들은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그리스도와 연관지어 해석한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가에 초주검이 돼 쓰러져 있는 사람은 '인간'을 상징한다. 사제와 레위는 그냥 지나쳐 버린다. 본디 역사 자체만으로는, '문화와 종교'만으로는 치유가 이뤄지지 않는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다름 아닌 인간을 상징한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낯설고 멀리 계신 분이다. 그 하느님이 몸소 나서시어 당신의 얻어맞은 피조물을 보살피신다. 먼데 계신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 되어주셨다. 당신이 몸소 기름과 포도주를 우리 상처에 부어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일곱 성사의 치유 선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분은 우리를 여관까지 데려다 주셨다. 이 여관은 '교회'를 상징한다. 하느님은 교회에 우리를 보살펴 주라고 맡기시고는 우리를 돌보는 데 드는 비용까지 대신 치러주셨다.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유적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려면 광활한 유다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 해발 1000m 높이에 36㎞나 펼쳐진 유다 광야에는 대상들과 여행자를 위한 여관인 '칸'이 있었다.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루카 10,29-37)이 있던 곳의 성경 지명은 '마알레 아둠밈'(Maale Adummim)으로 우리말 새 성경에서는 아둠밈 오르막'(여호 15,7)으로 옮겨놓았다. 히브리말로 마알레는 '오르막, 언덕'을, 아둠밈은 형용사 '붉은'의 아돔(adom), '피'를 뜻하는 명사 담(dam, 복수는 damim)에서 유래한다. 우리말로 '붉은 오르막' 또는 '피의 언덕'으로 불린 이유는 이 지역 바위가 붉은색을 띠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노상강도의 빈번한 습격으로 여행자들이 피를 많이 흘린 곳이기 때문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터는 예루살렘 8개 성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다마스쿠스 문에서 출발해 올리브산, 벳파게와 베타니아를 지나 예리코 가는 길 중간쯤인 18㎞ 지점에 있다. 기원전 10세기 때에는 이 길을 예루살렘에서 아리바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라 해서 '아리바 길'이라고도 했다. 이 길은 예리코에서 갈라져 갈릴래아로, 또 요르단의 예수님 세례터 베타니아까지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분리장벽에 가로막혀 벳파게에서 팔레스타인 지역 베타니아로 바로 갈 수 없다.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1번 국도에서도 붉은 암반 사이로 자리 잡은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유적을 볼 수 있다. 일교차와 기후 변화가 심한 광야 지대인 이곳의 주민들은 제2차 성전 시대(기원전 538~서기 70년)에 연한 석회암을 파서 만든 동굴집에서 살았다. 기원전 1세기 이곳은 헤로데 대왕의 예리코 겨울궁전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헤로데의 행차를 돕기 위한 작은 궁이 있었다. 궁은 목욕탕과 모자이크 마루, 프레스코화로 치장된 방들을 갖추고 있었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 이 궁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와 대상들의 여관이 됐다. 또 로마 제국시대 '아둠밈 오르막'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한 후 새로이 지은 '엘리아 카피톨리나'의 수비대 요새가 있었다. 아둠밈 오르막이 착한 사마리아인을 기념하는 장소라고 처음 말한 이는 4세기 예로니모 성인이다. 4세기 비잔틴 시대부터 13세기 십자군 시대까지 유다 광야 아둠밈 오르막에는 여러 수도원이 세워졌다. 6세기께 이곳에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기념 성당과 순례자를 위한 여관이 지어졌다. 여관은 26x24m 크기로 남쪽으로 문이 있고 중앙 정원과 물저장고가 있었다. 21x11m 규모의 장방형 바실리카 성당은 두 줄로 된 기둥들이 신자석을 구분했고, 바닥은 기하학적인 문양의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었다. 십자군 시대에는 아둠밈 오르막에 수천 명의 순례자를 위한 대규모 성당이 지어졌다. 성전기사단이 1169~1172년까지 3년에 걸쳐 지은 이 성당은 규모가 60×70m에 달했다. 성전기사단은 비잔틴 시대 물저장고를 너비 16×7m, 깊이 7m로 더욱 확장해 돔으로 덮었고, 성당 북동쪽 끝에 요새를 만들었다. 그들은 요새 둘레에 암반을 잘라 폭6~7m, 깊이 4m 해자를 만들고 높이 9m의 망루를 세워 사방을 감시했다. 테오도로스가 쓴 1172년 기행문에는 "베타니아 넘어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4마일에 성당과 함께 붉은 물저장고가 산꼭대기에 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 의해 버려진 곳이라고 한다. 또 전승에 의하면 유다의 마지막 왕 치드키야 임금이 이곳에서 바빌로니아 군대에 사로잡혔다(2열왕 25,5)고 한다. 성전기사단은 이곳을 튼튼하게 요새화했다"고 적고 있다. 오늘날 폐허가 된 착한 사마리아인의 여관 유적은 1번 국도를 사이로 북쪽에는 요새, 남쪽에는 성당으로 분리돼 있다. 성전기사단이 지은 요새와 성당, 순례자 숙소는 이슬람 제국에 함락되면서 19세기 중반까지 보잘것없는 형태로 남아 있었다. 순례자 여관은 카라반(대상)의 숙소 칸으로 이용됐고, 1903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 경찰서로 사용되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됐다. 영국군 위임통치 시기(1934~1936)에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기념 성당을 발굴 부분적으로 복구했으나 관리 소홀로 순례자들이 기념물로 성당 모자이크 대부분을 떼어가 버려 크게 훼손됐다. 다행히 최근 수년에 걸친 복원 작업으로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기념 성당 모자이크는 제모습을 찾았다. 현재 이곳은 이스라엘 국립공원과 관광성에서 관리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cpbc2013.11.26
![[나의 묵주이야기] 70. 묵주기도는 하느님과 나를 이어주는 숨통](//cpbc.co.kr/CMS/newspaper/2014/01/rc/493330_1.0_titleImage_1.jpg)
[나의 묵주이야기] 70. 묵주기도는 하느님과 나를 이어주는 숨통김경남 베드로 (서울대교구 자양동본당 남성 총구역장) 26년 전 천주교가 어떤 종교인지 모르던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성당 문을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영세 대부님은 26년 전 제 회사에 업무차 오셨던 분이셨고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사업에 지칠 대로 지친 저는 그분 덕분에 성당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용기를 냈습니다. 저와 아내는 교리공부를 시작했고 베드로와 나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즐겁고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로 힘들고 어려웠던 사업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이런 저에게 구역 형제자매님들은 구역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업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구역장은 저에게 너무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습니다. 더욱이 교회 가르침에 대해서 부족함이 많았고 무엇을 어떻게 할지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역의 일은 주님의 손과 발 역할이고 소공동체, 본당 활성화로 이어진다는 사명감이 저에게 용기를 주었고 기도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구역 공동체와 반장님들, 형제자매님들을 위한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구역장 임기 3년 내내 바친 묵주기도는 저의 구역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길잡이가 됐습니다. 소공동체가 활성화되고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형제자매들을 가까운 이웃으로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감사한 마음에 구역ㆍ반 일이라면 집안일까지도 잠시 미룬 채 동참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삶이 아니겠느냐며 모두가 입을 모았습니다. 소공동체 활성화는 본당 활성화로 이어져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24년이 지났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설레고 입가에 웃음이 나옵니다. 이제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와 살고 있지만, 지금의 본당에서도 성소후원회원과 성체분배자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4년을 되돌아보면 저에게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힘은 하루를 시작하면서 바친 묵주기도 20단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기도생활이 저를 행복한 신앙생활로 이끌어준 것이라 확신합니다. 묵주기도는 하루의 시작이요, 생활이 됐습니다. 최근 묵주기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지난해 11월 중순 저는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베드로씨, 내일 저녁 시간 어때요?"라고 묻는 본당 주임 신부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예,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이튿날 신부님을 만나 뵙게 됐는데 신부님께서는 저의 활동에 대해 수고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시며 "2014년 남성 총구역장을 맡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남성 총구역장이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걱정도 하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저는 지금껏 주변의 형제자매님들께서 힘들고 어려워할 때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음을 상기시키며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해 보았느냐"고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걱정하고 고민하는 일에는 감사기도를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에 하는 묵주기도는 물론, 부족한 제가 남성 총구역장을 맡아야 하는지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기도하는 저에게 어느 날 성경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49-50) 저는 바로 성경을 읽어내려 갔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한참 후 묵주를 들어 저에게 지혜와 용기의 힘을 주시길 간구하고 기도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귀한 선물을 이제 형제자매님들께 나눠 드려야겠습니다. 2014년 교구에서는 신앙의 해 5가지 표어 중 그 첫 번째인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을 사목지침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소공동체 활성화를 지향하고 성모님과 함께 바쳐지는 묵주기도는 계속될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저의 기도를 주님께 전구해주시는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 ※'나의 묵주이야기'에 실릴 원고를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9매 분량으로 연락처와 함께 pbc21@pbc.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채택된 원고에 대해서는 소정의 고료를 드립니다. 문의 : 02-2270-2516 cpbc2014.01.21

우리를 사랑으로 완성하시는 하느님 -교우ㆍ수도자ㆍ성직자 일치의 해[사목교서] 원주교구장 김지석 주교 교구 설정 50주년을 준비하는 마지막 해인 2014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를 사랑으로 완성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사목목표를 가지고 '교우, 수도자, 성직자 일치의 해'로 지내고자 합니다. 교구 설정 50주년인 2015년을 준비하는 마지막 3년을 믿음, 희망, 사랑의 해로 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 사랑 중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 믿음이라는 거울이 있으면 희망을 볼 수 있기에 더 열심히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실천이 없다면, 그 거울은 희망을 비추어 주지 않습니다. 내가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도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 대상을 지향합니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이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그 사랑은 신앙의 기본 행위들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주일을 지키고, 성사생활에 참여하며, 성경을 읽으며, 기도생활을 실천하십시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우리 신앙의 기초를 다져줍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은 누누이 서로 사랑하도록 당부하십니다. 내가 머무르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참다운 공동체를 이뤄 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소외된 이들을 향해 우리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심판 때에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심판의 기준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소외된 이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동아줄임을 기억하고 그것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일치를 지향합니다. 우리의 모상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닮아가야 하기에 각자 삶의 자리에서 일치를 지향해야 하며, 그것은 사랑 실천을 통해 이뤄집니다. 참다운 교회 공동체로서 교우들과 수도자, 성직자들의 일치라는 것 또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며 하나로 만들어 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고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성경은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이라 말하며 거룩한 해로 선포합니다. 우리 원주교구 설정 50주년이 되는 2015년은 '원주교구의 희년'이라 할 것입니다. 이 희년이 교구의 참다운 축제의 해가 되기 위해서는 올 한해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제까지 교구의 모든 구성원이 신앙 안에서 일치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또 삶으로 그 기쁨을 드러내 왔던 것처럼 올 한 해 더욱 일치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완성하실 수 있도록 합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욱 닮아가는 원주교구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사랑에 내어 맡기도록 합시다. 실천을 통해 키워 나가는 사랑이야말로 언젠가 우리를 하느님 곁에 영원히 머무르게 해줄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8).cpbc2013.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