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사는 사람들] 한의사 염수현 원장( 서울 화곡본동본당 데이케어센터 봉사자)](//cpbc.co.kr/CMS/newspaper/2014/05/rc/508463_1.1_titleImage_1.jpg)
[오늘을 사는 사람들] 한의사 염수현 원장( 서울 화곡본동본당 데이케어센터 봉사자)'봉사하라' 부르심에 5년째 치매 어르신 진료 평화신문은 이번 호부터 새 연재 기획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시작합니다.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자신이 지닌 크고 작은 재능을 나누며 그리스도 신자들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삶을 전하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애독을 바랍니다. 염수현 원장이 데이케어센터 어르신들에게 침을 놓아주고 있다. 이힘 기자1일 오전 서울대교구 화곡본동성당 데이케어센터(센터장 김정애 수녀)에 도착한 한의사 염수현(안드레아, 41, 밝은아침한의원) 원장이 치매 어르신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할머니 안녕하셨어요?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염 원장) “응~알지. 나 아프게 하는 (침 놓는) 의사 양반.” (치매 어르신) 염 원장은 매주 화요일에 한의원이 아닌 센터로 출근해 이곳 어르신들 건강을 돌봐주는 봉사를 한다. 그가 목요일인 이날에도 센터를 찾은 것은 이날이 근로자의 날이어서 한의원에 갈 필요가 없어 어르신들을 찾아온 것이다. 그는 어르신들을 다시 만날 때마다 기억력 향상을 위해 매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언제 만났는지 기억하느냐’고 질문한다. 염 원장을 기억한 한 어르신은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짓고는 엄지손가락을 지켜 세우며 고마워했다. 염 원장은 5년 전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한 뒤 봉사자로 거듭났다. 그가 주일미사를 마치고 오는데 갑자기 ‘봉사하라’는 네 글자가 왼쪽 머리를 통해 한 글자씩 몸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2009년 어느 가을날이었어요. 다른 본당에서 밤 10시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차 안에서 특별한 체험을 한 거죠. 아직도 생생해요.” 그는 신비한 체험을 한 그 다음 날에도 놀라운 경험을 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 미사에 참례하고 집에 가려던 그를 당시 본당 수녀였던 김정애(멜라니아) 수녀가 붙잡고 “같이 봉사하자”고 말을 걸어온 것이다. 본당에서 사회사목을 담당하던 김 수녀는 동네 홀몸노인 가운데 몸이 아픈 어르신이 많아 ‘봉사자로 의사 한 명만 보내 달라’고 6개월 넘게 간절히 기도해왔던 터였기에,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은 주님의 이끄심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인연으로 시작한 염 원장의 봉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 수녀가 화곡본동본당 데이케어센터장으로 부임하면서 이곳에서 봉사하게 됐다. 염 원장은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을 돌보며 얻는 기쁨으로 자신이 변화됐다고 말했다. 봉사를 통해 내가 이웃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얻는다는 것이다. 그는 “부족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더 노력하게 된다”면서 “봉사 덕분에 직장은 물론, 가정생활도 기쁨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꾸준히 봉사하면서 이 마리아 할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 마리아 할머니는 척추를 다쳐 방바닥을 기어 다니고 계셨어요. 여든이 넘으신 분이 의지할 데도 없고 체질에 안 맞는 음식만 해 드시는 바람에 건강이 나빠져 갔죠. 체질에 따라 식단을 다시 짜드리고, 침도 놔드렸더니 지금은 아주 건강해지셨어요.” 그가 정성스레 간호하고 친자식처럼 돌봐준 덕분에 할머니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 자녀로 거듭났다. 봉사가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는 순간이었다. 열심인 천주교 신앙인 가정에서 출생한 염 원장은 자신이 한의사가 된 것도 하느님의 이끄심이었다고 여긴다. 서울대 의대 진학을 목표로 했던 그가 시험을 망쳐 집안이 초상집 분위기였을 때 한 사제의 권고로 한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또 봉사하라는 주님 목소리를 듣고 김 수녀를 따라 봉사하기 시작하면서 한의원이 경영난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했다. 2003년 개원했을 때만 해도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근무하고, 야간진료까지 했을 때는 늘 경영난에 허덕였다. 그런데 요즘은 일주일에 4일만 일하는데도 늘 환자로 북적인다. 매주 화요일은 데이케어센터 어르신들 건강을 돌보고, 목요일에는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주일은 당연히 성당에서 지낸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하느님이 계시다고 확신합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이끄시는지도 알게 됐어요. 제가 수녀님을 만나 봉사하게 된 것은 생각해보면, 몸이 아픈 어르신들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신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어려운 이들의 청을 거절하시는 법이 없으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 cpbc2014.05.07
 할례- 하느님 백성의 표식 새기는 정결 예식](//cpbc.co.kr/CMS/newspaper/2014/05/rc/508382_1.2_titleImage_1.jpg)
[복음 이야기](16) 할례- 하느님 백성의 표식 새기는 정결 예식 아들은 생후 8일째 되는 날 의무적으로 할례 예식태어난지 여드레 날을 맞은 한 유다인 아기가 가족 친지들의 축복 속에 할례 예식을 하고 있다. 유다인들은 가정에 아기가 출생하면 곧 이 소식을 동네에 알리고 기쁨을 나누기 위해 친척, 친구, 이웃을 초대해 큰 잔치를 연다. 유다인에게 아기는 하느님의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이다. “보라, 아들들은 주님의 선물이요 몸의 소생은 그분의 상급이다”(시편 127,3). 그래서 랍비들이 “아이 없는 자는 목숨이 끊어진 자로 보아도 좋다”고 경멸할 정도로 여성에게 불임은 ‘치욕’이었다(루카 1,25). 구약 시대 여성은 아이를 가지는 것이 큰 소망이었기 때문에 순산을 자랑했다(탈출 1,19 참조). 해산 때에는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됐다. 남편은 아내가 해산하는 것을 어떠한 경우든 지켜봐서는 안 됐다. 해산하면 제일 먼저 남편이 와서 갓난아기를 무릎에 받아 안았다. 아버지는 아기의 피부를 튼튼하게 하도록 소금으로 비벼 몸을 씻기고 강보에 싼 다음 가족과 친지, 이웃에게 아기를 선보였다. 아기가 사내면 극진한 축사를 들었지만, 딸이면 그렇지 못했다. 훗날 결혼해 다른 집 식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탈무드는 “딸들은 거짓 보배요. 일상 그들을 감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첫 아기가 사내면 그 기쁨은 대단했다. 첫 아들은 아버지의 힘이요 청춘의 첫 소생으로 장자권이 보장됐기에 히브리 말로 ‘베코르’라 불렀다. 쌍둥이가 태어날 경우 먼저 난 아기의 발에 빨간 실을 매어 장자를 구별했다. 어머니는 아기가 2~3살 될 때까지 의무적으로 젖을 물려야 했고, 젖을 뗄 때에는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잔치를 열었다(창세 21,8). 유다인에게 첫 아들과 짐승의 맏배, 첫 수확 농작물은 하느님 것이었다. 그래서 맏배의 대속물로 은 다섯 세켈을 바쳐야 했다(민수 18,15). 요셉과 마리아도 모세의 이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 아기 예수를 봉헌하고 제물을 바쳤다(루카 2,22-24). 이스라엘의 모든 사내아이는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다(창세 17,9-14. 21,4; 레위 12,3). 구약시대부터 생후 일주일이 지나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했다. 예수님께서도 이 관습을 따르셨다(루카 1,59). 할례 날이 안식일이라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됐다(요한 7,23). 모든 유다인 사내들이 할례를 하는 유래는 ‘하느님께서 당신과 아브라함, 또 그 후손과 맺으신 계약의 표지로 할례를 요구하셨기 때문’(창세 17,10-11)이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를 ‘하느님 백성의 참된 표지’로 여겼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 할례를 계약의 육체적 표지뿐 아니라 정결 예식으로 여겼다. 유다인은 아기가 할례를 받는 날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요셉도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유다 관습에 따라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루카 2,21; 마태1,21). 유다인 이름은 우리처럼 가문을 나타내는 ‘성’(姓)이 없었다. 아들의 이름에는 의무적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덧붙여 “누구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아들을 뜻하는 히브리말은 ‘벤’이다. 그래서 유다 사회에서 예수님을 부를 땐 ‘예슈아 벤 요셉’(요셉의 아들 예수)이라고 불렀다. 아이의 이름은 신앙을 담은 것도 있고, 동물과 식물, 자신의 소망을 표해 지은 것 등 다양하다. 예수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 요한은 ‘하느님에 의해 소망 되었기에’, 미리암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뜻이다. 또 ‘끝순이’처럼 ‘자우레’(귀찮은 딸) ‘타만’(인제 그만)이란 이름도 있다. 그리고 ‘데보라’(꿀벌) ‘요나’(비둘기) ‘타마르’ (종려나무) ‘에론’(떡갈나무) 같은 장수를 기원한 동식물 이름도 성경 시대에 흔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산모는 ‘정결례’로 속죄 예식을 바쳐야만 정상적으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 율법은 산모를 시체를 만진 남자의 경우처럼 또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한 몸으로 규정했다. 피로 더럽혀진 산모의 몸이 정결하게 될 때까지 기간은 사내를 낳은 경우 40일, 딸을 낳으면 그 두 배인 80일이었다. 이 기간에 산모는 어떤 거룩한 것에 몸이 닿거나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몸이 정결하게 될 때까지 오직 자기 집 안에서 머물러야 했다. 기간이 차면 산모는 아들이나 딸을 위해 번제물로 바칠 1년 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 제물로 바칠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사제에게 바친다. 양 한 마리를 바칠 형편이 안 되면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2마리를 바치면 된다. 예물을 받은 사제가 산모를 위해 속죄 예식을 행하면 산모는 정결한 몸이 된다(레위 12,1-8).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cpbc2014.05.07
![[평화칼럼] 사랑 때문에](//cpbc.co.kr/CMS/newspaper/2014/03/rc/502360_1.0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사랑 때문에박군수 미카엘(평화방송 라디오국장) 지난 20일 바흐의 '마태오 수난곡' 연주회에 다녀왔다. 공연에는 유럽에서 활동하는 소프라노 임선혜(아녜스)씨가 참여해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았다. 임선혜씨는 공연에 앞서 평화방송 라디오 '교회음악으로의 초대' 프로그램에 출연, 공연에 임하는 소회를 밝혔다. 주일 아침 6시에 방송되는 '교회음악으로의 초대'는 교회 전례에 사용되는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으로 가톨릭대 교수 최호영 신부가 진행한다. "유럽에 가서 미사에 참례했을 때 할머니 몇 분만 계셨을 뿐 성당이 텅텅 비어 있었어요. 신앙의 본고장이 이럴 수가 있나 생각했지요. 그런데 '마태오 수난곡' 연주를 처음 성당에서 하게 됐는데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찼어요. 사순시기에는 수난곡을 들으면서 마음을 정화하고, 대림시기에는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들으면서 성탄 맞을 준비를 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임선혜씨의 이 말에 최호영 신부도 거든다. "미사 전례에는 성실하지 않을 수 있어도 가톨릭 문화 안에 생활하는 것은 풍성하지요." '수난곡'(Passio)은 예수님이 겟세마니 동산에서 붙잡히신 다음 재판의 과정을 거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다. 가톨릭 전례에서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마태오ㆍ마르코ㆍ루카 복음서의 수난 내용을 3년 주기로 돌아가면서 듣고, 성 금요일에는 요한복음의 수난기를 듣는다. 이렇게 다양한 수난 복음들은 일찍이 그레고리오 성가 낭송 음률로 여러 명이 배역을 나눠 입체 낭송을 했다. 또한 신자들이 군중으로 참여하는 등 성경봉독이 점차 극적이고 음악적 성격을 띠게 됐다. 바흐의 '마태오 수난곡'은 이런 의식의 바탕에서 만들어진 음악의 절정이다. '마태오 수난곡'의 첫 곡은 합창으로 시작한다. "오라, 딸들아. 와서 나를 슬픔에서 구하라. 보라! 누구를? 신랑을. 그를 보라. 어떤 모습을? 마치 어린양과 같은 모습을." 예수님은 신랑에, 우리 모두는 딸에 비유된다. 이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베이스 음역으로 노래된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제 이틀이 지나면 과월절이 되는데 그때에는 사람의 아들이 잡혀가 십자가형을 받게 될 것이다." 거기에 우리 교회의 대답처럼 코럴이 나온다. "오, 사랑의 예수님, 당신이 대체 무슨 죄를 지으셨기에 그토록 잔혹한 판결을 받으시나이까?" 소프라노가 아리아로 응답한다. "사랑 때문에, 사랑 때문에/내 주님은 죄 하나 지은 일이 없으신데/죽으려 하시네/영원한 파멸과/심판의 벌로부터/나를 영원히 구원하시기 위함이네." 그러나 군중은 한목소리로 외친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임선혜씨는 말한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아요. 선동된 군중. 우리도 그렇게 선동될 수 있고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분명히 그 안에 있었을 것 아니겠어요? 이 장면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나임을 고백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사순시기가 깊어가고 있다.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 머물면서 새로운 삶을 희망할 수 있는 시간, 참으로 은혜로운 때다. 음악, 영화, 신앙서적, 특강 등 나름의 방식으로 신자들은 정화 시기를 지낸다. 평화방송에서도 사순특강을 마련, 신자들을 돕고 있다. 서울대교구 최승정 신부는 이렇게 권한다. 사순시기 동안 적어도 한번은 마음에 와 닿는 십자가의 길 안내 책자를 가지고 혼자서 기도를 바치라고. 내 삶의 힘듦, 어려움, 수고로움을 봉헌하면서 하느님과 일대일로 만나 십자가의 길을 걷는 체험을 꼭 하라고. 다가오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 금요일에는 수난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내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친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닌지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겠다. cpbc2014.03.25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 목요특강 지상중계]<9> 예수 시대의 문화적 환경과 예수의 문화의식](//cpbc.co.kr/CMS/newspaper/2013/12/rc/487094_1.1_titleImage_1.jpg)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 목요특강 지상중계] 예수 시대의 문화적 환경과 예수의 문화의식복음 선포, 그리스도교 문화 만드는 것안병철 신부(평화방송 평화신문 사장) 문화는 형이상학적 개념도, 학문적 개념도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실존적 개념이라 생각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삶의 자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문화는 10년 전, 20년 전 문화와는 분명히 다른 문화다. 예수님을 말하려면 복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을 문화적 관점에서 정리해 보면 현실 문화에 대한 도전, 혹은 문화의 바꿈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복음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의 이야기다. 지금 살아가는 내 실존에 관계되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2000년 전 인물이지만 그분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실존적이고 실재적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내 믿음이 어떠한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2000년 전 예수님의 문화의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 시대는 로마제국의 동방정책으로 이교 문화가 확산되던 시기였고, 그 문화에 직면해 살던 사람들의 문화는 셈족 문화였다. 이미 유다인들은 로마의 지배와 더불어 문화 충돌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로마가 앞세운 이방 문화는 쉽게 말해 그리스 문화다. 그리스 문화는 사람이 중심인 인본주의 문화로, 내가 살면서 필요하기에 신도 만들고 절대자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유다인에게 신은 근본적으로 계시적인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며 신앙은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은총의 결과였다. 이처럼 신관 자체가 이방 문화와 유다 문화가 달랐다. 유다교 신앙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구원자, 해방자 하느님께 기원을 두고 있지만 긴 세월 동안 신앙의 형태나 관점이 일관되게 정리된 상태는 아니었다. 모두가 율법을 믿었지만 바리사이, 사두가이, 열혈당원, 에세네파 등 다양한 분파가 존재했다. 유다인의 신앙마저도 하나로 통일된 신앙은 아니었다. 성경이 정경으로 공식 선포된 것은 기원후 70년이었다. 성전 파괴의 비극을 눈앞에 두고 구심점이 없어지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생각한 것이 구약성경의 정경화다. 그 이전에는 각 분파들이 각자의 경전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바오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했던 그 시기는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신이 만들어진 시대였기에 그런 문화에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기존 문화에 대한 도전이었다. 새로운 가치, 그리스도의 가치를 살아가도록 하는 복음은 이방 문화나 셈족 문화에 엄청난 도전이었기에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방 문화와 셈족 문화의 결탁이 새로운 가치를 선포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수님은 이방 문화와 셈족 문화에 맞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하신 것이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신으로부터 얻기 위해서는 신의 마음에 들든지, 신을 흡족하게 하든지 해야 한다. 그 방법이 예식이다. 그리스도교 문화도 똑같다. 하느님이라는 신과 나라는 실존이 있고, 예식(전례)을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인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출발한다. 하느님이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셨기에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 응답의 형태로 예식을 하는 것이다. 예식이라는 수단은 똑같지만 그 수단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근본적으로 관점이 다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기존 문화를 완전히 바꿔야만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절대적 가치다. 양보할 수 없고 타협의 여지도 없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절대 가치다. 예수님은 복음 선포를 통해 당대의 이방 문화에 도전하면서 기존 문화가 왜 잘못됐고,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분명히 이야기해주셨다. 그것은 사도 바오로도 마찬가지였다.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교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절대 가치로 삼고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절대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이며 내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절대 가치가 무엇인지 개념 정립이 돼야 한다. 그리고 나로부터 시작된 복음적 삶이 복음적 행동양식으로 변화될 때 이것이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이며 토착화다. 예수님 시대의 문화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형태가 돼야 하는가.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양보할 수 없는 절대 가치를 살아감으로써 그런 삶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줘서 다른 사람도 그 삶을 닮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문화는 만나지 않으면 형성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한 절대 가치로서 복음을 내 삶의 본질로 알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나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복음을 사는 것이다. 내 삶을 통해 복음적 문화를 전하는 것이 성탄을 앞둔 우리의 자세다. 정리=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cpbc2013.12.10
![[평화칼럼] 공동선과 평화 위한 교황의 네 가지 원칙](//cpbc.co.kr/CMS/newspaper/2014/03/rc/501291_1.0_titleImage_1.jpg)
[평화칼럼] 공동선과 평화 위한 교황의 네 가지 원칙이창훈 알폰소(편집국장)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11월 24일 '신앙의 해'를 마치면서 발표한 문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7월 회칙 「신앙의 빛」을 발표한 바 있어 「복음의 기쁨」은 두 번째 문헌이지만, 「신앙의 빛」은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작성한 초안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복음의 기쁨」이 사실상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복음의 기쁨」 한국어판이 발행 2주 만에 주문량 2만 부를 기록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입 대열에 동참했다. 주말을 이용해 책을 펼쳤고 이틀 만에 완독했다. 정독이 아니라 속독이었으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도 이것만은 놓치지 말아야겠다며 밑줄 쳐 놓은 부분이 있었는데, '공동선과 사회 평화를 위한 네 가지 원칙'에 관한 대목이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측면이 있지만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첫째 원칙, '때가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 무슨 뜻인가. 때는 완성 또는 목적을 향한 긴 흐름과 관련되지만 시간은 눈앞의 상황을 장악하려는 짧은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교황은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이따금 사회 정치 활동에서 보는 잘못들 가운데 하나는 권력의 시간을 진전의 때보다 더 중시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당장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의미합니다. …때를 우선시한다는 것은 시간을 장악하기보다는 전진을 시작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223항). 말하자면, 순간의 성공에 집착하지 말고 확고한 신념과 끈기를 지니고 길게 보라는 것이다. 둘째 원칙, '일치가 갈등을 이긴다.' 갈등은 덮어 버린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이를 새로운 전진의 연결 고리로 만드는 것"(227항)이다. 그러나 혼합주의나 일방적 흡수가 갈등의 해결은 아니다. 오히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평화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황은 참행복에 관한 성경 말씀 한 대목을 인용,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마태 5,9)이라고 천명한다(227항). 셋째 원칙,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이상과 현실은 다른데 이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천사 같은 순수주의, 공허한 미사여구,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 선의가 없는 도덕주의, 지혜가 없는 지성주의 등을 거부해야 한다고 교황은 지적한다. 특히 지도자들은 교황의 다음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정치인들과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제안이 매우 분명하고 논리적인데도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순전히 생각의 영역에 틀어박혀 있어서 정치나 신앙을 어떤 미사여구로 전락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232항). 넷째 원칙,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크다.' 당연한 말이다. 교황은 나아가 '전체는 그 부분들의 단순한 총합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발붙여 살고 있는 우리 자리를 떠나서도 안 되겠지만, 더 큰 전망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더 넓은 안목으로 우리 모두에게 유리한 더 큰 선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네 원칙은 처음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고 되새길수록, 참으로 이 시대와 우리 사회에, 내 삶의 보금자리인 가정과 내가 하루 절반 이상을 몸담고 있는 회사에도 더없이 필요한 원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자신했나 보다. "저는 이 네 가지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모든 나라가 그리고 전 세계가 평화를 향한 진정한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221항). cpbc2014.03.18

가톨릭교회와 한국천주교회반석 위 참된 교회, 시련 이기고 복음의 꽃 피워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으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역사와 한국가톨릭교회사를 간략히 소개한다. 73권이나 되는 신·구약 성경 내용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7)면서 이 일들을 증언하고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복음서를 썼다(요한 21,24 참조)고 고백한다. 사도 베드로 베드로 위에 세워진 참된 교회 가톨릭교회의 시작은 ‘예수는 그리스도(구세주)이시다’는 신앙 고백에서 출발한다. 이 교회는 인류 가운데 첫 번째로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기초로 그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직접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하며 사목권을 주셨다. 아울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참조)고 세 번씩이나 당부하며 수위권을 주신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맡겨진 교회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지는 신앙과 사랑의 일치를 간직한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참된 교회’(폴리카르포 교부 고백)로 이해되는 가톨릭교회는 그래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지 50일 되는 날 성령강림을 통해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 증언하면서 교회는 시작됐다(사도 2장).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땅끝까지 가서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선포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인 안티오키아인들은 ‘온 인류를 위한 구원과 신앙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담아 가장 먼저 교회를 ‘보편적’ 즉 ‘가톨릭’이라 고백했다. 박해와 신앙자유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탄생부터 박해를 받았다. 급속한 교세 성장으로 정치적 불안감을 느낀 로마 제국 황제들은 200여 년간 신자들을 잡아다 십자가형에 처하고 맹수들의 먹이로, 검투사의 놀잇감으로 처형했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테르툴리아누스)이 되어 마침내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됐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가톨릭을 국교로 선언했다. 박해를 딛고 이겨낸 교회에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정통과 이단 사이의 격렬한 교리 논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주요 쟁점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문제, 인간 구원에 대한 문제였다. 가톨릭교회는 사도단의 전통에 따라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여 일련의 공의회를 개최, 최종적으로 정통 가톨릭교리를 정립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미사 때 신앙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사도신경’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 믿을 교리 12가지를 나열한 이 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 구원을 위해 강생하시어 수난하시고 부활하셨으며, 성령과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과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중세교회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유럽의 새 주인으로 게르만 민족이 등장하면서 유럽은 중세 시기로 접어든다. 이 시기에 교회는 성 베네딕도회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쳐 한 신앙 위에 일치된 중세기 가톨릭교회의 새 기원을 열었다. 교황청과 프랑크왕국이 융합해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을 창설한 가톨릭교회는 8세기 성화상논쟁과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학적 충돌로 1054년 동방교회와 완전히 결별했다. 이후 교회는 클뤼니수도회와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교회 쇄신운동으로 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키고 평신도 영성 강화에 영향을 미쳐 11세기 십자군운동과 청빈운동을 일으켰다. 청빈운동은 교회의 쇄신을 불러일으켰지만 극단적 근본주의와 이단으로 변질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종교재판이 생겨났고,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와 같은 탁발수도회가 생겨나 이단자 개종과 선교활동에 힘썼다. 교회분열과 쇄신운동 14~15세기 교황의 아비뇽 유배와 서구대이교로 인한 교황권 약화로 공의회 우위설이 확산됐고,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신심에 치중돼 개혁의 요구가 확산됐다. 그 결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분열되는 시대(1500~1650년)가 왔다. 이 시대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교회 쇄신의 필요성을 자극받아 1545년 12월 트리엔트 공의회가 개최돼 교회를 재정비하고 종교개혁 바람을 수습했으며, 예수회와 맨발의 가르멜회가 설립돼 ‘밖으로의 개혁이 아니라 안으로의 쇄신’을 이끌었다. 또 신대륙 발견으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예수회가 중심이 되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의 선교활동을 펼쳐 가톨릭교회가 동서양에 존재하는 세계적 종교가 됐다. 근대와 현대교회 17세기 후반 유럽에 몰아닥친 국가지상주의와 경건주의, 엄격주의를 내세운 얀세니즘 이단,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종교 보편주의 확산, 프랑스대혁명, 마르크스의 무신론적 사회주의운동으로 강력한 도전을 받은 교회는 제1차 바티칸공의회와 노동헌장이라 불리는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반포로 가톨릭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20세기 들어 가톨릭교회 안에 전례쇄신과 교회일치운동, 평신도 운동 등이 일어나면서 교회는 교회 내적 개혁과 외적 대화와 개방을 통한 쇄신을 도모했다. 그 역사적 사건이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다. 가톨릭교회는 급변하는 현대세계에 적응하며 자신을 쇄신했으며, 갈라진 형제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비그리스도교 종교와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또 새로운 교회법(1983년)과 「가톨릭교회교리서」(1992년)를 탄생시켰다. 한국가톨릭교회사 한국가톨릭교회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서적을 통한 교리 연구로 신앙을 받아들인 전세계 유일무이한 교회이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베드로)이 이벽을 비롯한 김범우 등에게 세례를 주고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한국교회가 탄생했다.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조선 신자들은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라 여겨 거부하고, 신분제도를 무시, 양반과 천민까지 함께 어울리자 곧바로 조정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4차례 대박해를 거치면서 1만여 명이 넘는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교회는 1831년 조선교구가, 1962년 교계제도 설정되면서 보편교회의 일원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아시아 대륙 복음 선교의 몫을 한국교회에 맡긴다’는 사명을 받은 한국교회는 내적으로는 토착화와 쇄신을 통해, 외적으로는 인적ㆍ물적 나눔을 통해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고 있다. 한국가톨릭교회는 2013년 12월 말 현재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16개 교구에 신자 544만 2996명으로 인구 대비 10.4%의 교세를 이루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백영민2014.08.13
![[출판]히브리서 강해- 영원한 사제직으로 그리스도 신비 설명](//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045_1.1_titleImage_1.jpg)
[출판]히브리서 강해- 영원한 사제직으로 그리스도 신비 설명이영헌 신부, 히브리서 강의 정리히브리서 강해(이영헌 지음/생활성서/1만 원) 학창시절 한 학년이 끝날 때쯤이면 교과서는 늘 앞부분만 때가 타 있고 뒷부분은 새 책이나 다름없었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성경도 구약은 모세오경, 신약은 복음서에서 번번이 벗어나지 못한 경험도 그렇다. 그래서 신약 끝 부분에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은 조금 낯설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딱 떠오르지 않는다. 미사 때 말고는 거의 접해 본 적이 없고 히브리서 관련 해설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이유도 있다. 이 같은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이영헌(광주대교구 저전동본당 주임) 신부가 최근 '히브리서 주해서'를 펴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09년 사제의 해를 선포할 당시 신학생과 평신도를 대상으로 1년간 히브리서를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 신약성경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칭하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제직'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고 있는 히브리서야말로 사제의 해에 꼭 맞는 성경이기 때문이다. 책은 히브리서 개요부터 시작해 △구원 역사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과 역할(1,1-2,18) △충실하고 자비로운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3,1-5,10) △그리스도의 사제직 이해에 필요한 예비 훈화(5,11-6,20)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7,1-28) △대사제의 직무와 구원 업적(8,1-10,39) △영성생활의 근본; 믿음과 인내(11,1-12,1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12,14-13,17) △맺음말(13,18-25) 등 모두 13장으로 이뤄진 히브리서를 핵심 주제별로 나눠 상세히 살펴봤다. 히브리서는 초창기 바오로 서간(편지) 계열로 분류됐지만, 오늘날 대부분 학자들은 히브리서를 바오로 서간 계열로 보지 않는다. 서간이라기보다 설교나 연설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 히브리서는 사제직이 사제만이 아니라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모든 신자에게도 해당된다며 이를 '그리스도의 사제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일상에서 희생과 봉사를 실천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의 사제직인 것이다. 이영헌 신부는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영원한 사제직으로 표현한 가르침을 설명해주고, 그에 따른 삶을 살도록 그리스도인을 훈화, 격려하는 가르침을 담은 독특한 책"이라며 "이 해설서가 신자들이 그리스도 사제직의 본질과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며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1984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에서 성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광주가톨릭대 교수와 총장을 역임했다. 박수정 기자박수정2013.06.18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신앙체험수기 우수상오늘도 나는 행복을 선택합니다<3> 병원에서 절망적인 말만 들었던 저는 마음이 조급해져 한시라도 빨리 남편이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마음만 앞섰던 저는 남편과 아이에게 성경 공부하기를 강요하며 남편의 행동, 말 한마디 한마디를 참견하고 있었습니다. 휴가를 나온 아이에게도 저의 하느님 체험을 이야기하는데, 아이가 저에게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의 병이 치유된 것은 감사하나 사람들이 아프면 왜 종교에 빠져드는지 알아요?" 엄마가 병이 치유돼 기쁘지만 신앙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깨달아야 진정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십여 년 동안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던 나를 떠올리며 하느님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자 결심한 후 실천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절대로 원망하지 않기, 판단하지 않기, 칭찬해 주기, 부정적 생각 하지 않기,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인정하기, 하루를 시작할 땐 반드시 행복을 선택하기 등. 그리고 실천한 것에 대해서는 칭찬을 해줬습니다. 그렇게 하니 먼저 저의 자존감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며 마음 뿌듯해지고 스스로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하루하루 그렇게 지내기를 한 달여, 예전과 다른 저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힘들게만 느껴졌던 남편의 병간호도 남편으로 인해 제가 사람이 되어가니 그저 감사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남편 건강이 조금 나아지면 주일에는 본당 미사에 참석하고 평일에는 성지를 다녀 왔습니다. 그러던 중, 미리내성지 전례 봉사하시는 자매님 권유로 매주 월요일엔 미리내성지로 미사를 가게 됐습니다. 미사 중 독서를 봉독하게 됐는데 그때 그 말씀이 저를 재창조했습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이사 65,17-18). 당신은 제 육신을 창조하심에 육신의 병을 치유시켜 주시더니 새로운 창조로(즐거움과 기쁨으로) 마음의 병까지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남편의 변화를 바라며 마음 졸이는 시간들을 안타깝게 여기셨던 하느님께서는 저를 새로이 창조하시어 새 사람을 만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남편과 아이를 바라보는 저의 시선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저보다 더 간절했을 남편의 마음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부디 남편도 하느님 체험을 통해 긍정적 생각으로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나날이 되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제가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어리석은 저를 용서하소서. 남편과 아이를 당신께 맡깁니다. 저는 그저 보호자일 뿐이지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7월에 군대에 간 아이도 아픈 엄마 아빠 걱정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느날 뜨거운 태양 아래서 훈련하는 도중에 "하느님 저에게 그늘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면 어느새 구름이 해를 가려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시원한 바람을 원하면 산들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 주더라고 하느님 현존을 이야기해줬습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하느님을 50년 동안 모르고 살아왔는데 '스무살에 하느님을 체험한 아이는 30년을 먼저 행복을 선택할 줄 알게 됐구나'라고 생각하니 아이에 대한 걱정과 근심, 집착도 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로 내가 잘 키워 보겠다고 나의 욕심과 집착으로 인해 아이를 학대한 것은 아닌지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후에도 남편은 병의 재발로 수술, 입원, 퇴원, 방사선치료, 항암치료를 되풀이했습니다. 그때마다 의사 선생님은 절망적인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절망에서 희망을 볼 수 있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계속) 조인숙 아가타(수원교구 대천동본당)백영민2014.04.09

평화방송·평화신문 신앙체험수기 가작 어떤 부르심 평화방송·평화신문 신앙체험수기 가작 당신은 왜 성당에 오게 됐나요? 아마 모두 성당에 다니며 한 번쯤 혹은 수십 번은 받아본 질문일 것입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누군가의 전도로, 모태신앙이라, 삶이 너무 힘들어서, 어떤 유명인을 따라 하고 싶어서, 저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 한 신부님이 성당에 다니게 된 이유가 햄버거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주일마다 교리 선생님이 사 주는 패스트푸드 때문에 친구 따라 강남, 아니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계기로 사제까지 됐으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부분 신자가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그러나 저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불현듯 제 머릿속에 떠오른 성경 구절 때문입니다. "몸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으로는 항상 함께 있습니다"(공동번역 골로 2,5). 제 지갑에 항상 넣고 다니는 이 말씀은 제가 성당에서 ‘말씀 사탕’으로 뽑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하느님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됐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긴 냉담을 풀고 성당에 나가게 된 것입니다. 정말 ‘말씀’으로 하느님이 저를 성당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벌써 7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06년 여름. 무더운 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작은 볕조차 저에게 비추지 않았던 해였습니다.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아빠를 떠난 보냈던지라 제 마음과 몸은 서늘할 정도로 추웠으니까요. 여기서 제가 그 말씀 사탕을 뽑기까지의 이야기를 조금 풀어놓으려고 합니다. 제가 성당에 왜 나오게 됐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 아빠는 젊었을 때부터 당뇨병이 있었습니다. 가끔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요양을 위해 집에서 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생활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기에 사회생활도 꾸준히 해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병원에 있는 날이 늘어갔고 점점 몸은 쇠약해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2002년부터는 거의 병원에 있는 날이 많아졌고 아빠의 활동 공간은 병원과 집 두 군데로 한정되고 말았습니다. 가족들 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나름 그 변화에 잘 적응했습니다. 아빠의 병이 더 깊어지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걱정이 늘어났지만 가족 중 누구 하나 불평을 한 이도 없었고, 우리 앞에 불행한 미래가 있을 거라고 단정 짓는 이도 없었습니다. 아빠가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에 누구 하나 의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족들이 긍정적인 편이라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나빠지는 아빠의 몸에 우리가 적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그 끝이 아빠의 죽음이라고는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아침도 다른 날과 별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녁은 전과 아주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빠의 호흡이 힘들어졌고 금세 혼자서는 숨을 쉴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병원으로 급히 옮겨지고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밖에서 마음을 졸이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빠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돼 불안하고 걱정됐습니다. 아빠가 받고 있을 고통이 느껴져 힘겹고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몇 번의 고비를 잘 넘겼기에 이번에도 그리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루하루 지나갔지만 아빠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희미한 호흡이 남아 있을 때 의사는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참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손과 발이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음에도 누워 있는 아빠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아빠, 그래도 조금만 더 힘을 내 봐.’ 아빠는 듣고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의사들 말은 거짓말이지, 언제나 그랬듯 병원에서 다시 집으로 갈 거지, 그렇지?’ 하고…. 끊임없이 속말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 엄마가 어떤 분을 소개해줬습니다. “엄마 대모님이셔.” 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엄마의 대모님에게. 그 몇 달 전, 엄마는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냉담한 지 20년이 훨씬 넘었는데. 모태신앙이었던 엄마는 서울에서 객지생활을 하며 점점 성당에 가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그러다 삶에서 신앙을 떼어놓은 것입니다. 저도 10년 넘게 안 나가고 있었기에 엄마가 성당에서 다시 나가겠다고 했을 때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뿐이었습니다. 누구도 같이 성당에 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말리는 이도 없었고. 모두의 관심 밖이라 엄마가 견진을 받았다는 것도 잊고 있었습니다. (계속) 이진아 율리안나 서울 미아동본당 백영민2014.05.15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5)장 르클레르크(상)](//cpbc.co.kr/CMS/newspaper/2014/08/rc/522766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5)장 르클레르크(상)그리스도인 영적 여정 연구하는 영성신학 기틀 다져 베네딕도회 수도자인 장 르클레르크는 중세기의 유명한 신비신학자 시토회 수도자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연구자가 됐다. 사진은 바티칸 정원에 있는 베르나르도 성인의 석상. 【CNS】 영성신학 분야에서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를 추천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신학 분야에 비해 독립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고 본격적으로 연구한 지 100여년밖에 되지 않은데다가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학문으로서의 영성신학을 접하고 제대로 살펴보기 시작한 지는 불과 10여 년밖에 되지 않기에 어느 학자를 추천하더라도 모두 낯설고 관심 갖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18~19세기에는 주로 ‘신비신학’과 ‘수덕신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20세기에 와서 서서히 ‘영성신학’이라 불리며 그리스도교인의 영적 여정에 대한 통합적 연구가 이뤄진다. 다만 공교롭게도 대부분 프랑스 출신의 다양한 수도회 소속 신학자들이 지난 몇 세기 동안 신비신학과 수덕신학을 연구하면서 학문으로서 영성신학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에 필자도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출신 베네딕도회 영성신학자인 장 르클레르크(Jean Leclercq, 1911~1993)를 소개하고자 한다.평수사 원했으나 사제로 서품 르클레르크는 1911년 1월 31일 프랑스 북부 아베느(Avesnes)에서 태어났다. 얼마 후 제1차 세계대전(1914~18)이 발발하면서 그는 어린 시절에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게 지냈다. 만 16세가 되던 1927년 그는 수도자가 되길 바라면서 룩셈부르크 북부 클레르보(Clervaux)에 위치한 생-모리스(Saint-Maurice) 수도원에 입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그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르클레르크는 그냥 평수사로 살기를 원했는데, 이와 같은 원의가 수도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수도원 의향에 순명하기로 하여 이듬해인 1928년에 수도원에 입회할 수 있었고, 1930년에 수도서원을 하였으며 1936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1933~1937년에 르클레르크는 로마 성 안셀모 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 그는 ‘신비신학’이라는 주제로 활발하게 연구를 하던 베네딕도회 신학자 안셀름 슈톨츠(Amselm Stolz, 1900~1942)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됐고, 훗날 그와 같은 주제로 저술 활동을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1937년 박사 학위 논문 작성을 시작하게 되었을 즈음에, 르클레르크는 파리에서 잠시 강의를 맡기도 했다. 결국 그는 1940년에 파리 가톨릭 대학교에서 자신의 학위 논문을 마칠 수 있었고 1942년에 출판했다. 르클레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1939~45) 기간 중 파리와 프랑스 서부 리구게(Ligug)에 소재한 수도원에서 지냈다.스승 질송의 영향과 베르나르도 연구 이 시기에 르클레르크는 자신의 앞날에 또 다른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에티엔느 질송(Etienne Gilson, 1884~1978)을 파리에서 만나 중요한 조언을 듣게 됐다.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사를 연구하던 질송은 르클레르크에게 11~12세기의 수도원운동(Monasticism)에 대해 연구해 볼 것을 제안했다. 결국 질송의 제안이 계기가 되어 그는 이후 중세 그리스도교 수도원운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가 됐다.1946년에 르클레르크는 먼저 중세 베네딕도회 쎌르의 베드로(Peter of Celle, 1115~1183), 가경자 베드로(Peter the Venerable, 1092~1156), 패캉의 요한(John of Fcamp, ?~1079)에 대한 저서들을 발표하였다. 또 1948년에는 완덕의 삶에 대한 주제와 수도원의 용어를 다룬 저서를 비롯하여 시토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에 관한 저서 「신비체험가 성 베르나르도」(S. Bernard Mystique)를 발표하였다.이 연구가 계기가 돼 르클레르크는 자신의 생애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 중의 하나를 맞게 되었다. 즉 1948년에 시토회 총장은 베네딕도회 젊은 수도자인 르클레르크에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저서들에 대한 비판본 작업을 의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르클레르크는 샤를 탈보(Charles H. Talbot)와 앙리 로쉐(Henri Rochais)의 도움을 받아 공동 작업으로 약 30년에 걸쳐 베르나르도 저서의 비판본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방대한 프로젝트는 1957~1977년에 총 8권으로 구성된 「성 베르나르도 작품」(Sancti Bernardi Opera)이 출간되면서 마무리되었다.르클레르크는 비판본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베르나르도에 관한 2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특히 1962~1992년에 베르나르도에 관한 연구를 모은 총 5권으로 구성된 「성 베르나르도와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 모음집」(Recueil d’tudes sur S. Bernard et ses crits)을 발간하였다. 결국 르클레르크는 베네딕도회 수도자이면서도 오늘날 시토회 수도자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연구자가 될 수 있었다.수도신학 연구 한편, 르클레르크는 모교인 안셀모 대학교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자신의 생애의 또 다른 중요한 연구 주제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1955~1956년에 가르쳤던 강의 내용을 1957년에 「학문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갈망」(Amour des lettres et le dsir de Dieu)이라는 제목으로 저서를 출간하였다. 이러한 연구가 계기가 되어 르클레르크는 중세 ‘스콜라 신학’과 대조가 되는 ‘수도 신학’(Monastic Theology)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 10월 28일에 있었던 일반 알현 강론에서 르클레르크가 정한 이 저서 제목은 ‘수도 신학’의 특징을 지혜롭게 잘 정의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이후에도 르클레르크는 수도원운동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하면서, 1968년에 「수도원운동의 모습, 어제와 오늘」(Aspects du monachisme, hier et aujourd’hui)과 1969년에 「수도의 삶과 관상의 삶」(Vie religieuse et vie contemplative)을 출간하였다.활동하는 학자 르클레르크는 학자로만 머무르지 않고, 1960~1980년대에 자신의 연구 분야와 관련된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먼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베네딕도회와 시토회가 전 세계에 수도원을 설립할 때, 르클레르크는 ‘수도원 연맹’(AIM: Alliance Inter Monastres)을 도와서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강의와 수도원 설립에 관한 조언을 하였다. 또 타종교와 수도생활에 관한 대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수도원 타종교 대화’(DIM: Dialogue Interreligieux Monastique)라는 기구를 창설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1980년대 중반에 르클레르크는 정교회 신학자 존 메이엔도르프(John Meyendorff, 1926~1992)와 함께 공동 편집자가 되어 그리스도교 영성역사에 관한 작품을 기획하여 1985년에 「그리스도교 영성 제1권: 초세기에서 12세기까지」(Christian Spirituality I. Origins to the Twelfth Century)를 편찬하여 발간하였다.르클레르크는 1990년 로마에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탄생 9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한 이후 은퇴해 자신이 입회하였던 생-모리스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93년 10월 27일에 마침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평신도 신학자 버나드 맥긴(Bernard Mc-Ginn)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수도자로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과 함께 장 르클레르크를 꼽았다. 머튼은 영어권에서 활동한 영성작가라서 우리에게 잘 알려졌다면, 르클레르크는 불어권에서 활동한 영성신학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개될 기회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가 장 르클레르크가 우리에게 잘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전영준 신부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81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영성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퇴계원본당(1999~2002)과 가양동본당(2204~2008) 주임을 역임했으며, 2008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영성신학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성경에서 시작하는 영성생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등이 있다. 평화신문2014.08.05
![[가톨릭 문화산책]<29> 문학(6) 여름휴가, 예수 생애 다룬 책과 함께](//cpbc.co.kr/CMS/newspaper/2013/08/rc/467571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문학(6) 여름휴가, 예수 생애 다룬 책과 함께혁명가, 희생자, 구원자.... 예수는 '사랑'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 나자렛에서 목공 요셉의 아들로 자라난 예수. 2년 3개월 동안 하느님의 아들로서 공적인 전도 활동을 했던 예수.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주장했다고 십자가 처형을 당해 죽은 예수.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한 뒤 하늘에 올라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성자 예수. 가장 짧게 요약하면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번에는 여름 휴가기간을 맞이해 여행지에서 한두 권 꼭 읽어보기를 권하며, 예수의 생애를 다룬 13권의 책을 한꺼번에 소개한다. 조르주 루오 작, '예수 그리스도'. 소설가에게 상상력 불러일으킨 예수 예수의 생애는 지극히 짧았지만 그 생애는 불꽃보다 찬란했고 태양만큼 뜨거웠다. 그래서 소설가들은 예수의 생애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스의 세계적인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최후의 유혹」에서 예수를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하고자 한 혁명가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열심 당원의 일원인 유다는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일본의 대표적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는 「예수의 생애」에서 고통받는 인간과 함께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를 그리고 있다. 이타적인 삶을 살다 자기 구원조차 못 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그럼으로써 인류를 구원하는 외유내강형 인물로 예수를 이해하고 있다. 김동리는 「사반의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한 두 범죄자 중 한 사람인 사반에게 초점을 맞춰, 하늘나라(영원의 세계)를 향한 구원과 지상(실존의 세계)에서의 구원이라는 대립적인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을 했다. 정찬의 「빌라도의 예수」는 예수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정치적 배경이 어떤 작용을 했고, 특히 정치권력이 왜 예수를 죽이게 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예수를 시대 상황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고만 인물로 보고 있다. 예수를 누가, 왜 죽였을까? 프랑스 소설가 엘리에트 아베카시스는 현대에 일어나는 연쇄 살인사건을 예수의 죽음과 이스라엘 쿰란 사해문서와 연결시켜 「쿰란」이라는 추리소설을 썼다.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의 재림을 다룬 소설'이라는 부제를 붙인 어니스트 앵그리의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길, 휴거」도 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성경 속 예수 이야기가 아니어서 필자를 당혹하게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으나 곧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탈출해 비밀리에 결혼한 뒤 프랑스 남부 해안까지 배를 타고 도피했으며,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 사라가 프랑스의 귀족과 결혼해 그 후손이 지금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는 독자의 흥미를 유발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예수의 생애를 연구한 여섯 사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863년에 나온 에르네스뜨 르낭의 「예수의 생애」일 것이다. 르낭은 성직자의 길을 걷는 대신 예수의 생애를 과학적인 엄밀성을 갖고 사실적이고 총체적으로 연구해 이 책을 썼다. 복음서들 간의 차이와 성경 저자들의 착오를 바로잡은 것은 르낭의 집요한 분석적 연구 자세 덕분이다. 전에는 성경의 내용을 무조건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르낭은 당시 시대상황의 전후 맥락을 퍼즐 맞추기처럼 맞춰 성경을 신화 차원에서 비종교인도 믿을 수밖에 없는 현실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이것은 오히려 비신앙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고, 르낭 자신 또한 신앙심을 버린 적이 없었다. 르낭의 전기를 읽은 독일 신학자 루돌프 슈나켄부르크 신부는 철저하게 네 복음서에 근거해서 예수를 살펴보았다. 저자는 역사적 인물인 예수와 하느님이 약속한 구원의 사도로서의 예수를 잘 조화시켜 우리 가슴에 살아 있는 예수를 각인케 한다. 이 책이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다.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괴테, 링컨, 클레오파트라, 루스벨트 등의 전기를 쓴 독일의 전기 작가 에밀 루드비히는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이고 사회사적인 관점에서 기술하기 위해 이적을 행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 요한복음을 배제했다. 그는 인간 예수를 살펴보자는 관점에서 「사람의 아들」을 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문열의 같은 제목 소설이 있어서 「예수의 전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세계 역사 전개에 있어서 로마제국과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다와 시리아, 그리고 기원전 44년부터 서기 70년까지 유럽과 중동, 예수가 살았던 시대의 세계 정치상황과 지리, 그 시대의 풍습 등을 세밀하게 살펴보면서 결국은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살펴본 책은 미국 작가 콜린 듀리에즈가 쓴 「AD 33」이다. 영국 BBC 방송국에서는 예수 행적을 더듬어 이스라엘과 인근 몇 나라를 취재했다. 톰 라이트는 영국 성공회 주교이자 신학자인데,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흥미를 느낄 주제로 프로그램을 제작한 뒤 책 「예수」를 엮어 발간했다. 산상수훈, 하느님의 얼굴, 복음서 시대의 유다사회 등 여러 가지 주제를 많은 사진자료와 함께 담은 흥미로운 책이다. 예수의 최후에 대한 상세한 기록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작가 짐 비숍은 「예수 최후의 날」이란 책을 냈는데 부제가 '기원 30년 4월 6일과 7일의 기록'이다. 예수의 공적 행적을 잘 추적해 면밀히 다룬 전기 작가로 르낭, 슈나켄부르크, 루드비히 등이 있었지만 극적인 재미와 함께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선물한 책이 바로 「예수 최후의 날」이다. 비숍은 예수를 신격화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앞서 언급한 작가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최후의 날을 앞둔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시간대별로 나눠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에서 이 책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책은 소설처럼,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그들은 끝나가는 여행길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처럼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그들 열한 사람은 몸에 흰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의 샌들은 길바닥에 널려 있는 분필 같은 푸석돌로 말미암아 보얀 가루를 뒤집어썼으며, 옷자락은 먼지와 때에 절어 거무스름하고, 얼굴에는 어딘가 근심스러운 빛이 감돌고 있다. 그들은 과월절 축제를 위해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으로 길을 재촉하는 인파 속의 마지막 한 무리였다." 특히 최후의 만찬에 대한 자세한 묘사나 유다가 배신하는 과정에 따른 내면 묘사, 대사제 카야파의 계략, 빌라도의 예수 심문, 헤로데 왕의 예수 조롱, 골고타 언덕에서의 일, 십자가에 매달리는 과정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는 영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비숍은 기자 정신을 발휘, 네 복음서에 조금씩 다르게 설명되고 있는 마지막 이틀의 상황을 주도면밀한 현장분석 능력과 감식안으로 재현해낸다. 이 책을 쓰기 위한 자료가 장장 1200쪽에 달했다고 하니, 얼마나 열심히 역사적 자료와 신학적 자료를 모아 분석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쓰게 한 힘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 예수가 삼위일체의 두 번째라는 사실과 진실로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그것을 입증했다는 데 대한 신념이었다. 저자의 어머니는 비숍이 세 살 때부터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의 전능하심과 타인을 용서하는 힘, 사랑의 정신을 말이다. 책을 쓰는 동안 격려를 아끼지 않던 어머니가 이 책을 완성할 무렵 실명하고 만 일은 독자인 필자를 안타깝게 했다. 이승하 교수(프란치스코, 중앙대 문예창작학과)cpbc2013.08.06
![[가톨릭 신앙의 보물]<5> 성화로 본 예수님의 탄생 -장긍선 신부(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소장)](//cpbc.co.kr/CMS/newspaper/2013/12/rc/488200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신앙의 보물] 성화로 본 예수님의 탄생 -장긍선 신부(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소장)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참된 선물은? 성화와 성상은 단순히 장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언어와 사고방식이 다른 이들에게 주님의 말씀, 즉 성경의 내용과 교리를 오류 없이 전달하고자 생겨났다. 가시적인 형태로 성경과 교리를 더 생생하게 내 안에 각인시켜 신앙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성탄 이콘과 그 안에 상징을 통해 '강생구속'의 참된 의미와 정신을 살펴보자.강생구속의 교리가 담겨 있는 이콘 '예수 탄생'. 성화에 담긴 성탄의 의미 예수 탄생 성화<그림>를 보면 붉은 천 위에 누운 성모를 볼 수 있다. 붉은 천은 자궁을 뜻하며 이는 성모가 교회의 어머니 되심을 드러낸다. 검은 동굴은 마구간을 묘사한다. 해마다 성탄을 앞두고 우리 정서에 맞게 초가를 얹은 말구유를 꾸미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 시대 마구간은 마을 인근에 있는 천연 동굴이었다. 예수님은 동굴로 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그림에서 검게 묘사된 동굴 입구에 예수님이 놓여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세상에 오신 것을 드러낸다. 아기 예수가 누워 있는 말구유의 모양 역시 나무 구유라기보다는 돌로 만든 관에 가깝다. 아기 예수를 감싼 천 역시 흔히 보는 포대기보다는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이를 염하는 천을 떠올린다. 이는 예수님이 훗날 죽음을 맞이하고 돌관에 묻히는 예표를 보여주는 것이다. 동굴 위 오른쪽에는 천사가 보인다. 천사들은 중앙 부분에 있는 목자를 향해 주님의 성탄을 알리고 있다. 왼쪽 위를 보면 목자들과 반대로 동방의 세 박사가 별을 보고 주님을 찾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동방박사는 두 가지 상징을 담고 있다. 교회에서는 성탄 구유를 꾸밀 때 이들 중 한 명은 꼭 흑인으로 하는데 이는 흑인, 황인, 백인 세 인종을 나타낸다. 주님께서 온 세상 만민을 위해 오셨고 또 온 세상 만민이 그분께 경배함을 드러낸다. 두 번째는 이들이 가지고 온 예물인 황금과 유향, 몰약이다. 황금은 고귀한 왕을 상징하고 유향은 하느님께 살라 바치는 향이며 몰약은 죽은 이를 염할 때 사용한다. 예수님이 왕 중의 왕이며, 참 하느님이며, 참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성화 오른쪽 구석에는 여인 둘이 아기 예수를 씻으려고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예수가 진정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음을 보여준다. 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 중 살로메라고 불리는 이는 베들레헴 지역의 산파였다고 한다. 마을로 가 산파를 구한 요셉은 아기 예수가 성령으로 나온 거룩한 아이라고 말했지만, 산파 살로메는 이를 비웃었다. 순간 살로메의 팔이 말라 비틀어졌고 그 손에 아기 예수의 손이 닿자 회복됐다고 한다. 살로메는 처음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신자라고 전해지고 있다. 아기 예수께 사랑의 선물을 전하는 성탄 되기를 성화 왼쪽 아래 금색 옷을 입고 턱을 괴고 고민하는 이는 요셉이다. 요셉의 번민 앞에 지팡이를 든 이는 요셉을 유혹하는 이다. 요셉이 그랬듯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아기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 역시 믿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강생 교리는 더 이상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일 것이다. 성화 중앙의 또 다른 상징을 살펴보자. 아기 예수 주위를 보면 예수님을 향한 소와 나귀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성탄의 장소가 마구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동시에 말 못하는 짐승인 소와 나귀도 먹이를 주는 주인을 알아보는데 우리는 생명을 주신 주인이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한 우매함을 꼬집는 것이다. 구약시대부터 수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 잉태를 예언했고 온갖 시련 속에서도 그분이 오신다는 희망으로 버텼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가 눈앞에 왔음에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메시아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인간의 욕심으로 그분의 참모습을 바라보고 깨닫지 못했다. 2000년 전이나 오늘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투르(tour)지방에서는 매년 11월 11일, 성 마르티노의 선행을 기억하며 성탄을 준비했다. 마르티노는 미신자로 평범한 군인이었다. 몹시 추운 겨울날 성문 앞을 지나갈 때 헐벗은 걸인을 보고 돕고 싶었지만 그는 가진 게 없었다. 그래서 자기가 걸친 망토의 반을 잘라 걸인에게 주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날 밤, 망토 반을 걸치신 예수님이 나타나 그를 칭찬했다. 그는 신앙을 받아들였고 투르 지방의 주교가 됐다. 그는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지나치는 어려운 이웃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살피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참된 뜻인 강생을 몸으로 실천했다. 우리는 일상에서 예수님 만나고 또 놓치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 안에 이미 계심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선입견과 고정관념 때문이다.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의 주님이 그분의 참된 모습이라고 착각한다. 이런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분이 다시 세상에 오셔도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우려를 범할지 모른다. 성탄이다. 이제는 반짝 선행과 선물로 기억되는 이미지를 벗고 성탄의 참된 정신과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슨 선물을 받을까"가 아니라 "어떡하면 주님께 참된 선물을 드릴까" 고민해야 한다. 성당에 꾸며진 성탄 구유를 보고 단순히 2000년 전 오신 예수님을 떠올리는데 그치지 말고 진정한 신앙을 행동에 옮겨야 할 것이다. 정리=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방송은 수요일 오전 7시 20분에 방송되며, 지난 회는 누리방(http://www.cpbc.co.kr/tv)을 통해 다시 볼 수 있습니다. cpbc2013.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