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신앙] (50) 먼지가 되어(전성호 베르나르도, 경기 효명고 과학교사)](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10/15/PWW1728980105959.jpg)
[과학과 신앙] (50) 먼지가 되어(전성호 베르나르도, 경기 효명고 과학교사) 미국 록밴드 캔자스(Kansas)는 1977년 ‘Dust in the wind (바람 속 먼지)’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 곡은 밴드의 한 멤버가 미국 원주민들의 시를 모은 시집에서 ‘우리는 그저 바람 속의 먼지입니다’란 문장과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라는 구약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쓴 가사라 한다. 캔자스는 이 노래에서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우리는 모두 바람 속의 먼지입니다) / Dust in the wind (바람 속에 흩날리는 먼지) / 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모든 것이 바람 속의 먼지입니다)’라며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서정적인 멜로디로 표현했다. 이 곡은 1978년 빌보드 인기 순위 6위까지 올라갔으며 전 MBC 라디오 DJ였던 김기덕씨가 네티즌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하고 펴낸 책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곡」(2002년)에도 포함되어 있다. 먼지란 사전적 의미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가벼운 고체 입자’로 바람에 의해 운반되고 중력에 의해 지표면에 퇴적된다. 먼지란 단어 자체는 굉장히 하찮은 뉘앙스를 주지만 인류의 시작은 캔자스의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먼지였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주요 원소는 질량을 기준으로 산소(65%)·탄소(18.5%)·수소(9.5%)·질소(3.3%)가 96% 이상을 차지하는데, 질량비가 아닌 개수로 가장 많은 것은 수소이며 몸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수소는 우주를 구성하는 비율이 75%나 될 정도로 우주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별의 주요 구성 원소가 수소이기 때문이다. 빅뱅과 우주의 진화 과정 이론에 의하면 생명체의 몸을 구성하는 수소는 우주에서 왔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인간의 몸을 이루는 원소들이 별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모두 별의 먼지(star dust)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 말을 통해 인류는 우주와 연결된 존재이므로 별처럼 빛나는 존재여야 하며 동시에 광활한 우주 속에서 겸손해야 함을 강조했다. 구약 성경도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고 하였듯이 인간의 시작과 끝은 먼지다. 그 옛날 권력과 부를 누리던 왕후장상(王侯將相)과 평범한 민초(民草)들도 결국 생을 마감할 때는 먼지로 돌아갔다. 11월 2일 주일은 교회가 정한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다. 나 역시 언젠가는 미래의 누군가에게 과거의 존재로 기억될 것이다. 정호승(프란치스코) 시인은 그의 시 「햇살에게」에서 ‘이른 아침에 / 먼지를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제는 내가 /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시처럼 나도 먼지이리라. 먼지로 시작하여 결국 먼지로 돌아갈 나의 삶이여! 캔자스의 노래처럼 속세의 풍파(風波) 속에서 흩날리는 먼지인 나는 어떤 존재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가? 세상을 흐리게 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황사나 미세먼지 같은 존재가 아니기를, 겸손하고 별처럼 빛나는 별의 먼지이기를 간구한다. 전성호cpbc2025.10.29
![나귀를 타고 오신 겸손한 왕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91)](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5/07/fdT1715067341708.jpg)
나귀를 타고 오신 겸손한 왕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91) 사순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던 이들이 곧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은 언제 생각해도 살벌하고 애처롭다. 고금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사람들의 환호는 종종 질투와 실망의 출발점이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원하는 상을 그려 놓고 열광하다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등을 돌린다. 시대를 막론하고 반복되어 온 모습이다.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를 외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들이 아니다. 상당 부분 같은 군중이었고,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조차 최후의 순간에 함께하지 못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선택한 믿음이었고 무리의 분위기에 휩쓸린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는 신앙을 통해 자신이 돌봄을 받고 특별히 여겨진다는 경험을 갈구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믿으면 잘살게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세상의 삶이란 유한한 것을 나누는 구조이기에, 누군가가 이득을 보면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고, 어느 나라가 잘살면 다른 한편에는 반드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생긴다. 그러나 이단의 논리 구조는 대개 ‘믿음이 현세적인 성공을 가져오고, 그 성공이 곧 믿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반면 그리스도교 복음의 구조는 전혀 다르다. 믿음으로 주님 뜻에 따라 살며 회개하고, 그 끝에서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 어디에서도 주님이 현세의 성공을 약속하거나 성공을 부활의 조건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 현세에서의 부와 성공을 위한 신앙이라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예수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종려나무를 흔들던 이들이 곧 당신의 죽음을 외칠 것을 아시면서도, 그 운명을 거역하지 않고 나귀를 타고 그들 가운데로 들어가셨다. 말이나 낙타가 아닌 나귀를 타고 가신 선택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은 힘과 전쟁·지배를 상징하고, 낙타는 부와 높은 지위를 떠올린다. 반면 나귀는 평화와 겸손, 그리고 일상의 짐을 묵묵히 지는 존재를 상징한다. 구약에도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고 예언되어 있다. 이는 주님께서 세속의 왕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것을 미리 알린 말씀이다. 이렇게 분명히 알려 주셨음에도 끝내 세속의 왕을 기대했던 인간의 어리석음 앞에서 혀를 차게 된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는 관현악곡 「로마의 분수」 중 ‘트레비 분수’ 악장에서 나귀가 끄는 마차 소리를 묘사한다. 그는 나귀를 도시의 화려함을 떠받치는, 평범하지만 중심을 이루는 존재로 그려내며, 찬란한 분수와 대비되는 소박한 생명을 드러낸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향해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로 묵묵히 걸어가던 그 나귀의 발걸음을, 이 곡을 통해 투영해본다. 리카르도 샤이가 지휘한 레스피기의 트레비 분수 //youtu.be/u4beF7X69hM?si=siONBndygT8sZI9U 작곡가 류재준cpbc2026.03.25
나는 주님을 찾습니다[월간 꿈CUM] 평신도 기도 출처: 월간 꿈CUM 우리의 희망이신 주님!나는 주님을 찾습니다. 그 얼굴, 그 모습을 형제들 가슴속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사랑, 기쁨) 그러나 무엇을 했나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루를 지내고 주님 앞에 앉아 뒤돌아볼 때 깊은 기도, 묵주 기도, 성경 읽기, 미사참례를 제외하고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한 일이 떠오르지 않지만 소소한 일을 꺼내보면, * 황톳길 걷다가 지렁이가 보이면 흙으로 보내주기 * 지인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며 이야기 나누기 * 교사들과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사랑 표현 많이 하기 의지적으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해 보기로 결심해 봅니다.그런 행동이 곧 열매이고, 기도하고 생활한 제물이 되어 봉헌될 테니까요. 말씀을 들으라 하셔서 듣기를 원했지만 주님은 언제나 침묵하십니다. 문득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이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침묵으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오감을 열어놓습니다. 들으려고만 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깊이 생각할수록 많은 지혜들이 생겨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희망의 시간을 보내면서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물은 마셔야 갈증이 해소되고, 밥은 먹어야 배고픔이 사라지고, 와서 보고 경험을 해봐야 깊을 맛을 느끼게 되겠지요? 아직은 미숙하지만, 언젠가 주님과 마주 보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날을 꿈꾸며 오늘도 하염없이 주님을 바라봅니다. 밝은 빛으로 눈을 뜨게 하시고, 생명의 말씀으로 귀를 열게 하시고, 아름다운 찬양으로 입을 열도록 끊임없이 이끄시며, 도움 주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기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글 _ 구정회 (프란체스카, 서울대교구 수락산 본당)2025.12.27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저는 믿나이다] (51) 한 분이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며 전능하시고 유형무형의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미켈란젤로, ‘천지 창조’, 프레스코화, 1511,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은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좀더 구체적이고 교리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본성과 실체와 본질에서 오직 한 분이시다”라고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어떻게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알 수 있느냐고요?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통해,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이 유일하신 분이심을 확실하게 알려주셨기 때문이죠.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 곧 “야훼”라는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을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써 당신이 누구이시며 어떤 이름으로 당신을 흠숭해야 할지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이름으로 당신만이 영원히 있는 분으로 모든 것의 시작이시며 마지막이심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고 일깨워줍니다. 그리스도교, 유다교, 이슬람교 등 야훼 하느님을 믿는 종교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주로서 만물의 근원이시며 초월적인 권위를 지니셨기 때문에 ‘아버지’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 분’(탈출 34,6)으로 당신의 모든 자녀를 자비와 사랑으로 보살피시기에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구세주이시며 아버지 하느님과 한 하느님이시다고 믿는 그리스도교는 유일하게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계시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당신 외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그 아들은 오직 당신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서만 영원히 아들이시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가톨릭교회 교리서」 240)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전능하심’은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을 ‘무한한 사랑’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다. 그분의 부성애와 전능은 서로를 밝혀준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심으로써(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에게 아들딸이 되리라 - 2코린 6,18), 그리고 무한한 자비를 통하여 아버지로서 전능을 보여 주신다. 당신 자비로 죄인들을 자유로이 용서하심으로써 그 권능의 극치를 드러내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70) 하느님의 전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부활과 영광을 통해 신비가 아닌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명료함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문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전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 어떻게 성부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성자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가톨릭교회 교리서」 278) 그리스도교는 아버지 하느님이 ‘창조주’이심을 믿습니다. 성경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하느님께서 유형무형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인간과 우주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기원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인간과 모든 만물의 존재 목적이 하느님께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동시에 우리의 행복을 돌보시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고백합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교 교령 「만민에게」 2 참조) “당신의 선하심으로 그리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유일하신 참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행복을 더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당신의 완전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들에 부여하신 선을 통하여 당신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가장 자유로운 계획 안에서, 모든 것을 한 번에, 한처음에, 유형무형의 피조물 하나하나를 무에서 창조하셨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드님」 1장) 교회는 창조의 업적을 아버지 하느님께 돌리기는 하지만,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창조의 유일하고 분리될 수 없는 근원이시라고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구약 성경 안에 암시되고 새로운 계약 안에 계시된, 성부의 창조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성자와 성령의 창조 활동은 교회의 신앙 규범으로 분명하게 확언된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 그분은 아버지이시고, 그분은 하느님이시며,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그분은 주인이시며, 그분은 만드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 자신, 곧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지혜를 통하여, 당신의 두 손이신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조는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공동 업적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92)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11.12

주님의 날을 준비하여라[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5·끝) 요한 묵시록 신약 성경의 마지막 정경인 요한 묵시록은 주님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라고 권고한다.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 1536~1541,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요한 묵시록은 읽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정경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성경의 여느 정경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많은 상징을 담은 ‘환시’를 통해 종말에 드러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를 전달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요한 묵시록을 읽고 그 내용을 제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의 권위 있는 주석과 주해를 바탕으로 요한 묵시록을 대해야만 이 정경을 제대로 읽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신약 성경의 마지막 정경입니다. ‘계시’ ‘묵시’ ‘묵시록’으로 번역된 헬라어 성경 본문을 ‘아포칼립시스(Αποκαλυψιs)’라고 합니다. 아포칼립시스는 우리말로 ‘가려져 있는 것을 열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곧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묵시문학과 예언서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묵시문학에서는 한 인물에게 어떤 초월적인 내용이 전달됩니다. 그 내용은 시간적으로는 종말에 관해, 공간적으로는 천상 세계에 관해 계시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계시받는 사람이 그 받은 내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천사나 다른 어떤 존재가 해석해 줍니다.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 묵시록이 묵시문학에 속합니다. 물론 예언서에도 환시가 등장합니다. 아모스·예레미아 예언자가 환시를 보았지요. 또 예언서도 ‘주님의 날’인 종말에 관해 말합니다. 아모스·즈카르야·말라키 예언자가 종말을 경고했지요. 하지만 묵시문학의 종말은 예언서의 그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예언서는 종말을 말하지만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고한 종말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의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의 종말은 현재의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 역사의 흐름이 단절되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시작됨을 나타냅니다. 묵시문학은 미래에 닥칠 종말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세사 전체를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앞이 보이지 않는 현재를 하느님의 계획 일부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Αποκαλυψιs Ιωαννου(아포칼립시스 요안누)’,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Apocalypsis(Apocalypsis B. Ioannis Apostoli)’, 한국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요한 묵시록’으로 표기합니다. 교회는 요한 묵시록의 저자를 넷째 복음서를 쓴 요한 사도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과거부터 넷째 복음서와 묵시록은 한 저자가 썼다고 하기에는 문체와 신학이 너무 다르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 예로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의 그리스도론이 중심인데 반해 요한 묵시록에는 육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성경학자 중에는 팔레스티나 지역에 살다가 유다 전쟁(66~73년) 이후 소아시아 지방으로 이주한 유다인 출신 순회 예언자 중 한 명이 묵시록을 저술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로마의 황제 숭배 의식이 강요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말기의 박해 상황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어 95년께 쓰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요한 묵시록의 수신인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입니다.(1,4.11; 2─3장) 에페소·스미르나·페르가몬·티아티라·사르디스·필라델피아·라오디케이아 교회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요한 묵시록은 이 일곱 교회에만 보내진 종말에 관한 계시가 아니라 소아시아 전체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이라고 설명합니다.(22장 참조) 가장 큰 이유는 ‘7’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일곱, 곧 7은 하느님의 세상 창조에 필요했던 시간으로 이후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약속된 것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부터 주어진 하느님의 구원을 위한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을 드러냅니다. 요한 묵시록은 22장으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짧은 편지(1─3장)와 환시들(4─22장)로 구성돼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일곱 교회에 ‘니콜라오스파’를 경계하라고 경고합니다.(2,6) 이들은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2,2), “사탄의 무리”(2,9),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2,14), “이제벨이라는 여자”(2,20), “사탄의 깊은 비밀”(2,24)로 우상 숭배를 조장하고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환시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환시는 ‘어좌에 앉은 분’과 ‘어린양’에 대한 환시로 이뤄져 있습니다. 어좌에 앉은 분은 하늘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어린양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12번에 걸쳐 표현되는 스물네 원로는 천사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과 성가대를 나타내는 숫자에서 왔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1역대 24─25장 참조) 또 사자·황소·사람·독수리로 묘사된 네 생물은 네 복음서를 상징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종말의 모습을 악의 세력과의 전쟁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사이에 ‘천 년 통치’라는 중간 시간을 계시합니다. 이 시기는 ‘평화의 시대’(이사 11,1-9)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실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환시입니다.(마태 19,28) 신약 성경의 마지막 정경인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주님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리길재 선임 기자teotokos@cpbc.co.kr리길재 선임2024.10.30

속죄와 참회로 지내는 사순 시기 사순 의미와 전례 특징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창세 3,19)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첫날이다. 성경에서 ‘재와 먼지’는 속죄와 참회의 상징으로,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참회와 슬픔을 표현할 때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자루 옷을 입었다.(2사무 13,19; 에스 4,1) 이러한 참회 예식이 교회 전통 안으로 받아들여지며 재의 수요일이 형성됐다. 이날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는다. 이를 통해 인간은 흙에서 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겸손과 회개의 삶으로 돌아가도록 초대받는다. 재의 수요일은 단식재와 금육재를 함께 지켜야하는 날이기도 하다. 재의 예식의 핵심 의미는 단순한 참회를 넘어 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데 있다. 하느님 뜻에 따라 회개하고, 하느님께 향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라는 권고가 담겨 있다. 올해 재의 수요일(18일)은 설 명절 공휴일과 겹친다. 재의 수요일은 보편 교회가 동일한 날짜에 지내는 전례일로, 변경할 수 없다. 재의 예식에 참여하려면 당일 미사에 참여해야 한다.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는 사순 시기는 참회와 속죄를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기간으로, 5주간 이어진다. 이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맞이하며 전례력 중 가장 거룩한 시기인 성주간이 시작된다. 성주간 중 성목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신비를 기념하는 파스카 성삼일이다. 전례력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목요일에는 성유 축성 미사와 주님 만찬 미사가 거행되며, 성금요일에는 미사 없이 말씀의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로 구성된 수난 예식만 거행된다. 성토요일은 예수님의 무덤 곁에 머물며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날로, 해가 진 뒤 파스카 성야 예식을 통해 부활의 기쁨을 맞이한다. 이날은 시간전례 외에 다른 전례가 없는 유일한 날이다. 사순 시기 전례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알렐루야와 대영광송, 사은 찬미가를 바치지 않는 것이다. 제의는 회개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바뀌고, 성인 축일도 이 시기에는 기념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 말씀과 성사, 전례를 통해 신자들이 신앙을 더욱 깊이 성찰하도록 이끈다. 특히 십자가의 길 기도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고 공동체와 다시 결합하도록 권고한다. 사순 시기의 단식과 고행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자선, 수난과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희망과 깊이 연결돼 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박민규2026.02.11
![[생활속의 복음] 산 이들의 하느님](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3/18/ZFV1773800245402.jpg)
[생활속의 복음] 산 이들의 하느님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라자로의 소생’, 1517년~1519년. ‘카나의 혼인 잔치’를 시작으로 일곱 표징을 배열하는 요한 복음은 ‘죽은 라자로의 소생’을 마지막 표징으로 소개한다. 이 표징 때문에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11,45-57 참조)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11,3)이며 “친구”(11,11)인 라자로를 살린 표징에서 예수님의 ‘눈물’(슬픔)이 눈길을 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우는 장면(루카 19,41 참조)과 대조하여, 예수님은 죽은(잠든) 친구 때문에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져’(11,33 참조) “눈물을 흘리셨다.”(11,35) ‘예수님이 참 하느님’(1,1 참조)임을 도입부터 주창한 요한 복음은 눈물을 통로로 ‘예수님이 참 인간’임을 공표하였다. 예수님은 아픔과 슬픔을 느끼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흙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나 흙으로 돌아가듯”(집회 41,10)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죽음은 자연의 이치다. 인간의 죽음은 의학적 관점에서 심폐 혹은 뇌 기능의 영구적 정지로 정의된다. 그리스도교는 이와 다른 관점에서 죽음을 이해한다. 신앙 언어의 고유 의미가 일상 언어와의 혼용으로 인해 곡해되는 사례들이 발생하는데, 대표적 예가 죽음이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은 세상 창조 후 ‘세상 밖에서’ 방관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이다.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라는 전례 문구가 이를 표명한다. 하느님의 지속적인 창조 업적에 대응하여, 슬픈 숙명인 피조물의 죽음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요청된다. 성경은 첫 인간의 죄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보도한다.(로마 5,12 참조) 죄는 일차적으로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과의 ‘친교 거부’이며, 그 결과인 죽음은 ‘단절 상태의 연속’(하느님 밖)이다. 반면 생명은 ‘하느님 안’에 있는 상태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죽음과 관련하여 이렇게 부연한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4)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 안’(무덤)에 갇힌 인간을 ‘생명 안’(부활)으로 해방하였다.(에페 2,5 참조) 인간은 ‘죽음 전’(이승)과 ‘죽음 후’(저승)의 분리에 익숙하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위령 감사송 1)이라고 고백한다.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산 이들(생명)의 하느님’은 ‘죽음 안’(어둠/거짓 속)에서 ‘생명 안’(빛/진리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사망진단이 내려진 망자가 ‘생명 안’에 있을 희망을 제시하는 사후세계 교리는 ‘생명’(하느님 안)과 ‘죽음’(하느님 밖)의 경계에 선 이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면서 ‘죽음 후 생명 안’(천국)에 있기 위해 ‘죽음 전 생명 안’(사랑)에 있기를 재촉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14) 라자로를 무덤(죽음 안)에서 나오게 하였듯, 태초부터 ‘생명 안’(아버지 안: 10,38 참조)에 있는 예수님은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 곧 ‘생명 안’(아들 안: 3,15 참조)을 선사한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참 인간’으로 죽고 묻히셨으며, ‘참 하느님’으로 부활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cpbc2026.03.18

서툰 가위질에서 희망의 박음질로… 난민 자립 일구는 ‘함께’ 공동체부활르포 - ‘함께’ 공동체 의정부 엑소더스 ‘평화공간’에서 2024년 재봉틀 교육으로 시작 패브릭 브랜드 ‘함께’로 성장 수익보다 ‘성장 가치’에 무게 둬 재봉틀로 이주민·난민의 경제적 자립을 꿈꾸는 핸드메이드 패브릭 브랜드 ‘함께’ 공동체 구성원들이 한국 봉사자들과 함께 동두천성당 내 작업실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전쟁과 기후위기, 종교 박해로 전 세계 난민은 1억 명을 훌쩍 넘어섰다. 난민 문제는 현재 국제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꼽힌다. 우리나라도 난민협약 가입과 난민법 시행으로 대응해왔고, 교회 역시 이들을 ‘가난한 이 가운데 우선되는 형제자매’로 보며 보호와 환대를 강조한다. 레오 14세 교황은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는 ‘희망의 선교사’로서 이들이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하는 주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법도 교황의 메시지도 현실 안에서 손을 내밀어 주는 이들이 없다면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만다. 제도가 닿지 못한 빈자리를 아무 조건 없이 메워주는 이들 덕에 새 생명이 움튼다. 부활 시기를 맞아 이주민·난민들이 재봉틀로 희망을 꽃피운 ‘함께’ 공동체를 찾았다. 이주민·난민들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신앙 매주 토요일 의정부교구 동두천성당 지하 교리실 한편에선 아프리카 이주민·난민들의 재봉틀 작업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오른쪽 상단이 조금 비뚤어졌네요. 여기를 잡고 더 내려서 박음질해야 해요. 이건 합격! 오늘 공임비는 10만 원이에요. 고생했어요.” 일주일간의 작업을 마친 이들은 꼼꼼한 검수를 거쳐 보람을 확인한다. 공임비를 받아든 순간,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에 몸을 맡기며 기쁨을 표현한다. 처음엔 직선 긋기조차 어려웠던 손끝이 1~2년 만에 재봉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들이 만든 결과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제품은 매일미사·성경·성무일도 커버와 묵주 파우치다. 한 땀 한 땀 손끝에서 시작된 공동체의 온기가 신앙인의 기도로 이어지고, 다시 제품을 만드는 거룩한 순환이 이곳 ‘함께’에서 이뤄지고 있다. 함께’ 소속 아프리카 출신 이주민들이 작업물을 들어 보이고 있다. 우연한 시작 시작은 ‘우연’이었다. 서성희(안젤라, 의정부교구 마두동본당)씨는 동두천에 있는 의정부 엑소더스 ‘평화공간’에서 사용하지 않는 재봉틀 5대와 자재를 발견했다. 코로나19로 중단된 재봉 교실의 흔적이었다. 그 자리에서 이주민들이 재봉에 관심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곤 바느질 잘하기로 소문난 본당 교우 주현영(엘리사벳)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통역은 주씨 남편 김장섭(프란치스코)씨가 맡으면서 3명의 봉사자가 아프리카 출신 이주민·난민 5명을 대상으로 2024년 2월 17일 재봉틀 교육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봉틀 사용법과 기초 바느질 기술을 교육하는 4~5주 과정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위질조차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정밀한 수작업을 요구하는 재봉과 바느질은 결코 짧은 시간에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다음 기수 참여를 희망하는 이들도 생기면서 자연스레 2기, 3기 교육이 이어졌다. 선한 사람들 미약한 시작이었기에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봉사자와 교육생 모두에게 난관의 연속이었다. 늘지 않는 실력에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면 그 뜻에 동참하는 이들도 생기기 마련이다. 교우들의 후원으로 중고 재봉틀을 기증 받았고, 교육생들은 가정에서도 연습할 수 있었다. 봉사자들도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 영상을 제작해 한글과 영어 자막으로 공유했다. 원단 수급이나 기타 비용 문제가 생길 때도 적절한 조력자가 나타났고, 작지만 후원회도 꾸려졌다. 그렇게 선한 이들의 뒷받침 속에 교육생들의 기술은 눈에 띄게 향상됐다. 교육을 수료한 이주민이 강사가 되는 경우도 생겼다. 이주민·난민이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함께’가 만든 매일미사 커버 야훼이레 단기 교육으로 시작했지만, 제품을 판매해도 좋겠다는 데 뜻이 모였다. 마침내 교육 시작 7개월 만인 2024년 9월 29일 ‘엑소더스 축제’를 통해 핸드메이드 패브릭 브랜드 ‘함께’가 첫 선을 보였다. 이후 교구 봉사자 연수와 피정, 본당의 날 등 다양한 현장에서 판매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성물 판매소와 소품 매장 등과도 협력해 계속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갑곶 성지에서 상설판매도 시작했다. 품목도 앞치마와 손수건·스카프 등 40여 개로 늘어났다. 가나 출신 글라디스씨는 “취미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직업 의식마저 생겼다”며 “재봉 일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좋을 것 같다”고 열정을 보였다. 열정에 답하듯 지난해 1월에는 모든 사용 비용을 무상으로 지원받으면서 동두천성당 지하 교리실로 작업장을 이전했다. 현재까지 6기, 30명이 참여했고, 그중 13명이 활동하고 있다. 4월 1일 7기가 시작됐다. 서성희씨는 “야훼이레,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일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고 말했다. “사실 이 일을 하기 전까진 이주민과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어요. 부끄럽지만 관심이 크게 없었죠. 지금은 저희 봉사자들 집이 원단으로 가득 차 있을 만큼 ‘함께’는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가족 공동체 ‘함께’ 짐바브웨 출신 아폴로니아씨는 세 자녀와 함께 작업실을 찾는다. 모임에 가지 못하는 날이면 아이들이 먼저 아쉬워할 정도다. “여기서는 모두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느낌입니다. 제가 바느질 기술을 배우면, 아이들은 소통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 덕에 자폐가 있는 첫째 아이도 이곳에서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슬람 무장세력의 종교 박해를 피해 한국에 정착한 나이지리아 출신 기프트씨는 2기 교육생으로 참여해 현재 강사가 됐다. 그는 “한국 교회의 환대 덕에 자리를 잡아 아들도 복사를 서고 있다”며 “‘함께’ 공동체 일원이 되면서는 더 끈끈한 가족애가 생겼다”고 했다. 이웃사랑과 관심으로 신앙도 더욱 단단해진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어려워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한국 봉사자분들과 남편 격려로 다시 나올 수 있었어요. 하다 보니 욕심이 나더군요. 실력을 키워 가르쳐주신 보람을 안겨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손으로 만든 성경 커버를 보고 선생님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요.” 기프트씨를 처음부터 이끌어온 주현영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두 손 크게 하트를 만들어 화답했다. 서성희씨도 “돌려받지 않아도 줄 수 있는 사랑을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교육생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큰 걸 받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봉사자 선주민과 교육생 이주민은 서로가 서로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이렇듯 ‘함께’는 이주민·난민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공동체면서, 일주일에 한 번 한자리에 모이는 가족 공동체 역할도 하고 있다. 희망의 선교사 하지만 공동체가 커지고 판로가 늘어나면서 봉사자 인원 부족과 판매 구조의 지속 가능성, 재정 안정성 등 구조적 한계도 드러났다. 이에 ‘함께’는 사회적협동조합 설립을 꿈꾼다. 법적·재정적 지원을 확보하고, 조직 운영의 안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김장섭씨는 “단순한 수익 창출을 넘어 이웃에 제품을 기증하는 ‘상생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며 “이 과정을 통해 이주민은 도움받는 대상에서 자신의 노동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희망의 선교사’이자 사회적 가치 창출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미 저희 모습 안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낯선 땅에 뿌리내리며, 서툰 손끝으로 한 땀 한 땀 새 삶을 꿰매온 이들이다. 어둠 끝에 비치는 부활의 빛처럼, 그렇게 바늘이 지나간 자리마다 공동체는 ‘함께’ 살아나고 있다. 후원문의: 0505-566-0001 박민규 기자 mk@cpbc.co.kr박민규2026.04.08

하느님의 지혜를 삶의 근본으로 삼아야[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0) 야고보 서간 야고보 서간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지탱해 주는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실천함으로써 완성되고 구원받는 사람들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주교이며 야고보서 저자로 전해지고 있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 성인 이콘. 신약 성경 가운데 야고보 서간과 베드로의 첫째·둘째 서간,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 그리고 유다 서간을 ‘가톨릭 서간’이라고 부릅니다. 이 일곱 서간을 가톨릭 서간이라 부르는 이유는 특정인이나 개별 교회를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보편 교회의 모든 신자에게 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 서간 첫머리에 수신자가 나옵니다. 야고보 서간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야고 1,1), 베드로 서간은 “폰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1베드 1,1), 요한의 둘째 서간은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2요한 1절), 요한의 셋째 서간은 “가이오스”(3요한 1절)이라고 수신인이 명시돼 있지만, 바오로 사도 서간의 수신인보다 훨씬 보편적인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들 서간을 ‘가톨릭 서간’으로 처음으로 부른 이는 2세기 말 아폴로니우스입니다. 그는 2세기 중엽 소아시아 프리기아 지방에서 종말론에 심취해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니 세상을 멀리하고 회개해 단식과 생식을 하고, 독신 생활을 하며 성생활을 자제하고, 자선과 순교를 권했던 몬타누스 이단에 맞서 정통 신앙을 수호했던 교부입니다. 야고보 서간(이하 야고보서)의 저자는 자신을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1,1)라고 밝힙니다. 야고보는 히브리어로 ‘야곱’입니다. 이사악의 아들이자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과 같은 이름이죠. 예수님과 사도 시대 당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야고보 곧 야곱이라는 이름이 매우 흔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세 명의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인 야고보(마태 10,2; 마르 1,19-20)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르 3,18; 루카 6,15; 사도 1,13)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주님의 형제”(사도 12,17; 15,13-21; 21,18-25; 갈라 1,19)이자 “교회의 기둥”(갈라 2,9)이라고 불렀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저술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학자들은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팔레스티나 사람으로 헬라 문화와 상당히 거리가 멀었기에 헬라어와 헬레니즘 문화와 사상에 능통한 그의 협력자가 야고보의 말을 대필했거나 그의 이름을 빌려 썼다고 봅니다. 그는 62년께 순교했고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 대략 50년께 쓰인 것으로 보아 50년대 말에 야고보서가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Ιακωβου’(야코보),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Iacobi’,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야고보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야고보서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보아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팔레스티나 지역을 떠나 세상에 흩어져 사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특히 유다교 회당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아울러 부자들을 혹평하고(5,1-6), 가난한 사람들이 믿음의 부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상속하게 되었다(2,5)는 내용, 그리고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보다는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어울리려 했고(2,1-4 참조),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다(2,15-16 참조)고 나무라는 것을 보아 부자는 아니더라도 먹고 사는 데는 걱정이 없는 일반적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서간인 듯합니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야고보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분열이나 반목을 해결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어떠한지를 제시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시련과 시험을 통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는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려면 하늘에서 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순수하고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3,17)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아울러 지혜에서 오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 자기의 실천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3,13) 야고보서는 또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되고 교만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는 지고한 법을 이행해야 합니다.(2,1-13 참조) 야고보서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자기들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4,6)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지혜는 다툼과 분열을 가져다주고 참신앙과 거리가 멉니다.(4,1-12 참조)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무엇보다 형제를 심판하지 말며, 자만하지 말고 허세를 부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재림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고통을 겪는 이들, 아픈 이들, 죄지은 이들, 교회 원로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5장 참조)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 선임2024.09.25

영원한 생명 희망하도록 생의 마지막 동반청년들을 위한 생명 지킴 안내서(50·끝) 영화 ‘리스본 특급’에 출연했던 배우 알랭 들롱의 생전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즈 제10장 삶의 끝에서 – 죽음과 고통의 문제 결론 현대 사회의 문화적 분위기에서는 사실 죽음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것이며, 피할 수 없다면 안락사와 같은 방법으로 고통의 시간을 줄이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이는 더 많은 돌봄과 관심을 받아야 하는 말기 환자의 삶과 생명을 경시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렇게 해 주는 것이 그를 위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그가 희망을 잃지 않고 인간으로서 품위 있는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동반하고 지지하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도움을 위해서는 말기 환자 자신뿐만 아니라, 그를 돌보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우리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드높은 소명은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더 밝혀 주며, 영원한 삶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이들의 마지막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줍니다. 성경은 그 희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0-22) 죽음을 넘어선 희망은 결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성을 지닌 우리는 세상의 온갖 불의와 억압을 볼 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현실에 희생된 무죄한 이들의 삶이 그냥 그렇게 끝나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불합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 안에는 이미 영원한 삶의 씨앗이 심겨 있습니다. 믿는 이에게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활짝 열린 문이며,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삶은 우리의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는 행복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영원한 삶에는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4)라고 가르쳐 줍니다. 생의 말기를 보내는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이러한 신앙과 희망은 어떤 것보다 큰 위안을 가져다주며,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그들을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줍니다. 추천 도서 1. 김형숙,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뜨인돌, 2013 2.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신에게 보내는 편지」, 김민정 역, 열림원, 2013 3. 군나 두트게·신동일 공편,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존엄성」, 세창출판사, 2016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5 덧붙이는 묵상 지금은 선종했지만 세기의 배우 알랭 들롱은 생전 “노화는 끔찍하다”며 안락사를 원했습니다. 젊은 시절 화려한 인생을 보냈던 그에게 나이 들고 병환에 지쳐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끔찍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치 고통 속에 몸부림치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느니, 차라리 짧은 고통 속의 죽음이라는 처방전을 선택하는 듯합니다. 소위 ‘조력 존엄사’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고통의 치료제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고통을 없애기 위해 고통받는 사람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진정한 치료이자 사랑일 수 있을까요? 또 세상에서 쓸모가 없어 보인다고 해도 과연 그가 진정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이유가 될까요. 이런 시선은 인간을 효용 가치로만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고, 하느님 모습을 닮은 존귀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에 고통받는 이들에게 진정한 처방전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물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희망과 신앙을 잃지 않고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건네야 할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혼자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는 동반이지, 죽음이라는 절망이 될 순 없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조차 사랑으로 동반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죽음은 삶의 허무한 붕괴이거나 벽이 아닙니다. 고통 속에 있더라도 우리 손으로 억지로 열어야 할 문도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선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인위적인 끝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생명을 껴안고 사랑할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cpbc2025.12.17
![광야에서 들려오는 침묵의 음악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87)](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05/07/fdT1715067341708.jpg)
광야에서 들려오는 침묵의 음악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87) 사순 시기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과 시험을 겪으신 사건을 기념하는 시간이다. ‘사순(四旬)’이라는 말 자체가 ‘마흔’을 뜻하며,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중요한 사건을 앞둔 준비와 정화의 기간을 상징한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시나이산에서 40일을 지냈고, 엘리야 역시 호렙산으로 향하는 길을 40일 동안 걸었다. 광야에서의 40일 역시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기존의 삶이 해체되고 새로운 사명이 태어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선지자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향했던 광야는 일상 질서가 완전히 사라진 공간이다. 광야에 홀로 고립되면 유혹과 두려움·절망·지독한 향수에 시달리게 된다. 유목 민족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이 ‘광야로의 추방’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그 공포와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극한의 고행 속에서 얻는 자기 정체성은 단순한 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비상을 만들어낸다. 문학에서 광야는 오래전부터 빼어난 소재다. 특히 ‘황무지’로 대표되는 T.S. 엘리엇의 시 세계는 현대 문명의 정신적 광야를 상징한다. 그가 말하는 ‘오지 않는 비’는 구원의 부재를 뜻하며, 파편화된 시어들은 20세기 문명의 분열과 붕괴를 드러낸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문학은 더 이상 선형적 서사를 고집하지 않고, 구조·파편·인용이 중심이 되는 현대적 글쓰기로 나아간다. 프랑스의 올리비에 메시앙은 작품 ‘기도(Oraison)’에서 광야에서의 기도와 침묵을 극단적으로 느린 시간 속에 담아낸다. 이 음악에는 멜로디를 따라가려는 욕망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고독과 갈구가 묘하게 얽혀 들을 때마다 심연의 외로움을 불러낸다. 유리를 공명시킬 때 들리는 듯한 소리, 공기 자체가 떨리는 것 같은 음향은 음악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끌어들인다. 메시앙 - 기도 러시아 출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시편 교향곡’에서 흔히 말하는 ‘비 없는 기도’, 즉 황무지적인 종교성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그는 작품의 첫 장에 “신의 영광을 위해 작곡된 교향곡”이라는 문구를 적어넣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편성이다. 스트라빈스키는 교향곡에서 가장 윤택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악기군인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그 결과 따뜻함 대신 메마름을, 풍요 대신 고독을 들려준다. 네덜란드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폴란드 작곡가 헨릭 구레츠키는 ‘교향곡 3번’에서 절규 이후의 텅 빈 공간을 형상화한다. 이 작품은 발표된 지 14년이 지난 1991년 빌보드 클래식 차트에 등장해 무려 31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50분을 넘기는 연주 시간과 세 악장 모두 ‘렌토(Lento, 아주 느리게)’로 진행되는 작품이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킨 사실은 기적 같다. 이 음악은 흔히 ‘슬픔을 치유하는 음악’ ‘고독을 넘어서는 기도’로 불린다. 적막한 광야를 가로질러 다가오는 주님의 발걸음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펜데레츠키가 지휘하는 구레츠키의 ‘슬픔의 노래’ 작곡가 류재준cpbc2026.02.25

조선 교회의 ‘성가정’, 신앙 잇고 순교자 길러내다[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22) 박해 시기 그리스도인 가정 한국 가톨릭교회 순교자들은 가정 안에서 조부모와 부모에게 기도와 신앙 교육을 배우며 성장했다. 문학진(토마스 아퀴나스), ‘103위 순교 성인’ 일부, 서울 혜화동성당. 신앙의 씨앗을 뿌리는 곳은 ‘가정’이다.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는 ‘나자렛 성가정’뿐 아니라 모든 가정과 연결돼 있다. 참하느님이시고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을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 가정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단지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꾸준히 신앙을 권면해야 하며 가정을 ‘성가정’으로 가꿔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권고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상이다.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 공동체를 이룬 것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큰 자랑이다. 이것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것이 있다. 바로 수많은 가정에서 순교자들을 배출하고 복자와 성인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이다. 성인·복자 배출한 한국 가톨릭교회 성가정들 정약종(아우구스티노) 가족 모두는 순교자이다. 정약종과 장남 정철상(가롤로)은 복자품에, 정약종의 부인 유 체칠리아와 아들 정하상(바오로), 딸 정정혜(엘리사벳)는 성인품에 올랐다. 정철상의 장인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처남 홍인(레오), 홍교만의 사촌 서(庶)동생 홍익만(안토니오), 홍익만의 사위 홍필주(필립보)와 그의 어머니 강완숙(골룸바) 역시 복자다. 유항검(아우구스티노) 가정 또한 순교자 집안이다. 유중철(요한)·유문석(요한)이 아들이고, 이순이(루갈다)가 며느리이다. 유중철·이순이는 동정부부다. 그리고 유중성(마태오)은 조카다. 이들 모두 복자로 공경받고 있다. 부인 신희 또한 순교자로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돼 있다. 이순이의 오빠 이경도(가롤로)와 동생 이경언(바오로)도 복자다. 이들 세 남매의 어머니 안동 권씨가 하느님의 종 권철신(암브로시오)·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동생이다. 따라서 이들 세 남매는 권일신의 자녀인 복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권 데레사 남매와 외척 간이다. 세 남매의 아버지 이윤하(마태오) 또한 초기 조선 가톨릭 신앙공동체의 핵심 인물이었다. 한국 가톨릭교회 첫 순교자인 복자 윤지충(바오로)은 복자 윤지헌(프란치스코)의 형이고, 복자 권상연(야고보)과는 이종사촌 간이다. 또 정약종 일가와는 고종사촌 간이고, 유항검 일가와는 가까운 인척이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 당고모 김 데레사가 성인이고, 증조부 김준후(비오)와 작은할아버지 김종한(안드레아)이 복자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아버지는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이고, 어머니는 복자 이성례(마리아)이다. 복자 최해성(요한)도 최 신부의 먼 친척이다. 허계임(막달레나)과 딸 이영희(막달레나)·이정희(바르바라), 외손녀 이 바르바라, 시누이 이매임(데레사) 모두 성인이다. 이광헌(아우구스티노)·권희(바르바라) 부부와 딸 이 아가타, 동생 이광렬(요한) 모두 성인품에 올랐다. 최창흡(베드로)·손소벽(막달레나) 부부와 딸 최영이(바르바라), 사위 조신철(가롤로) 또한 한 가족으로 성인이 됐다. 복자 현계흠(바오로)은 현경련(베네딕타)·현석문(가롤로) 성인의 아버지다. 남명혁(다미아노)·이연희(마리아), 남이관(세바스티아노)·조증이(바르바라), 박종원(아우구스티노)·고순이(바르바라) 부부 세 쌍은 모두 성인품에 올랐다. 유진길(아우구스티노)·유대철(베드로), 조화서(베드로)·조윤호(요셉) 성인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고, 한영이(막달레나)·권진이(아가타), 이 가타리나·조 막달레나 성인은 어머니와 딸 사이다. 박큰아기 마리아·박희순(루치아), 김효임(골룸바)·김효주(아녜스), 이영덕(막달레나)·이인덕(마리아) 성인은 자매들이고, 홍병주(베드로)·홍영주(바오로) 성인과 복자 김대권(베드로)·김화춘(야고보)은 형제다. 아울러 복자 최인길(마티아)·최인철(이냐시오) 형제는 복자 최창현(요한)의 아저씨뻘이다. 복자 김이우(바르나바)·김현우(마태오) 형제의 배다른 형이 김범우(토마스)다. 윤유일(바오로)은 윤유오(야고보)의 형이며, 윤점혜(아가타)·윤운혜(루치아) 자매의 사촌 오빠로 이들 모두 복자다. 또 윤운혜의 남편 정광수(바르나바)와 시누이 정순매(바르바라) 역시 복자품에 올랐다. 교회 가르침 충실히 지키며 가정 내 신앙 교육 한국 가톨릭교회처럼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공경하는 성인과 복자가 가족과 혈연으로 얽혀 있는 예는 보편 교회 안에서도 거의 없다. 이는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증명해주는 본보기다.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대 그리스도인 가정은 매일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삼종기도, 아침·저녁 기도뿐 아니라 성경과 기도서를 읽고 외우며 주일과 축일의 의무를 충실히 지켰다고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증언했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이런 분위기가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의 상당수 집안에서 3~4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했고, 때로는 배교를 했다가도 다시 신앙을 회복하는 원천이 됐다. 복자 이경언(바오로)은 순교를 앞두고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내 아들과 딸아,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어머니께 효의 도리를 다하는 데 힘을 쏟도록 하여라. 모든 사람을 상냥하게 사랑으로 대하고, 너희가 이 세상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면 너희는 당연히 천국에 오를 것이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6.05.27
![[금주의 성인] 성 론지노 (10월 16일)](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4/10/08/Sdc1728367346049.jpg)
[금주의 성인] 성 론지노 (10월 16일)+1세기경, 출생 미상 및 튀르키예 선종, 순교자, 성경 인물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는 론지노 성인. 사진=굿뉴스 전설에 의하면 론지노 성인은 빌라도 총독의 지시를 받고 예수님께서 매달린 십자가 곁에 서 있다 창으로 주님의 옆구리를 찌른 군인입니다. 그는 주님의 상처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요한 19,34) 예수님의 오상(五傷) 가운데 창에 찔려 마지막으로 생긴 다섯 번째 상처 이야기는 공관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요한 복음서에만 나옵니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예수님을 찌른 군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분을 지키고 있던 다른 이들과 함께 지진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두려워하며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말한 백인 대장이라고 합니다.(마태 27,54) ‘롱기누스’라는 이름도 「빌라도 행전」으로 알려진 「니코데모 복음서」라는 외경(外徑)에서 처음 나왔습니다. 학자들은 대체로 그 이름이 요한 복음 19장 34절에서 ‘창’을 뜻하는 그리스어가 라틴어로 바뀌면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론지노가 신앙을 갖게 된 계기나 기적 이야기 등은 13세기 제노바의 주교이자 연대기 작가인 야고보 데 보라지네 복자가 편집한 「황금 전설」에서 전해집니다. 여기서 론지노는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군인들의 백인 대장으로, 예수님 상처에서 나오는 피와 물을 본 뒤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은 나이 들어 병으로 시력을 거의 잃었을 때, 예수님을 찔렀던 ‘창’에서 흘러내린 피를 눈에 갖다 대자 즉시 시력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후 론지노는 군인 생활을 그만두고 사도들의 제자가 되었고, 오늘날 튀르키예인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에서 28년 동안 수도생활에 전념하며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습니다. 그러다 박해를 받았는데, 지방 장관은 우상 숭배를 거부하는 론지노의 이를 뽑고 혀를 자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론지노의 설교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론지노는 도끼를 들고 이교도의 신상을 부수며 “이것이 무슨 신들인가!”하고 외쳤습니다. 신상이 부서지면서 쏟아져 나온 마귀들은 지방 장관을 사로잡아 그의 눈을 멀게 만들었습니다. 론지노는 자신이 죽어야 지방 장관의 눈이 나을 것이라 했는데, 그 말대로 론지노가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자 지방 장관의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지방 장관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해 남은 생애 동안 선행을 실천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론지노의 유해는 직접 십자가 아래에서 모은 그리스도의 피가 담긴 유물과 함께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 만토바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에 모셔졌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지방과 성당에서 그의 유물을 보존하며 공경하고 있습니다.cpbc2024.10.08

땀과 기도로 세운 신앙의 집... 141년 이어온 ‘일치와 성덕’ [리길재 기자의 공소를 가다] 34. 전주교구 진안본당 봉암공소 전주교구 진안본당 봉암공소는 올해로 설립 141주년이 되는 유서 깊은 공소이다. 봉암공소 전경. 전주교구 진안본당 봉암공소는 전북 진안군 부귀면 부귀로 86-14 봉암리 원봉암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이름이 봉암(鳳岩)으로 불리는 데는 두 유래가 있다. 약 400여 년 전 봉황이 이 마을 한 바위에서 나와 그때부터 봉암 마을이라 했다는 것이다. 봉황이 나왔다는 바위는 오늘날 흔적조차 없다. 다른 하나는 마을 뒤편에 마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의 봉란산(鳳卵山)이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봉암 마을의 옛 이름은 ‘미실’이었다. 해발 1126m 운장산 어귀에 자리한 고랭지 마을로 쌀이 많이 나서 불린 이름이다. 지금도 봉암 저수지 농업용수로 주민 대부분이 벼농사뿐 아니라 풍부한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공소 입구 옆 마당에 모신 성모상. 봉암공소는 오래된 교우촌이다. 진안 지역에 그리스도인들이 본격적으로 교우촌들을 이루고 산 것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다. 대부분 전라도 고산에 살던 교우들이 진안의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사 기록에 따르면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 충청도 금산과 용담, 내포 지방 교우들이 진안 지역으로 이주해와 살았고, 그들 중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덕산, 전주 숲정이, 여산, 나주 무학당 등지에서 순교했다. 봉암공소는 ‘일치와 성덕’을 지향으로 교우들이 매일 기도로 살아가는 모범적인 공소이다. 봉암공소 내부. 교우 30명 미실공소, 10년 새 교우 8배로 봉암공소는 조선대목구 소속 파리외방전교회 교황 파견 선교사 리우빌(Liouville, 한국명 유달영, 1855~1893) 신부가 1885년에 설립했다. 당시는 ‘미실공소’라 불렀다. 미실공소 설립 당시 교우 수는 30명에 불과했으나 10년 후인 1896년에는 232명으로 크게 성장했다. 리우빌 신부는 1874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878년 사제품을 받고 교황 파견 조선 선교사로 임명됐다. 그는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 주교가 체포돼 옥에 갇히는 바람에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만주대목구에 2년간 머물면서 우리말과 글, 그리고 한자를 익혔다. 그런 다음 1880년 두 차례 시도 끝에 그해 11월 조선 입국에 성공해 황해도와 서울, 충청도에서 사목했다. 그는 1884년 제7대 조선대목구장 주교로 블랑 신부가 임명되자 주교의 옛 임지를 맡아 6년간 전라도 지역을 사목했다. 이후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교수로 사제 양성에 헌신하다 1893년 4월 장염으로 인한 복막염으로 선종했다. 봉암공소가 10년 사이 8배 가까이 교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교우들의 열심함 때문이었다. 그들은 조선 왕조 치하에서 박해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철저히 기도 생활을 했고, 진실하게 살았다. 누구에게도 편파적이지 않았고, 마을의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신심 깊고 열심한 봉암공소 교우들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박해를 피해 봉암에 정착해 교우촌을 이루었던 그분들의 많은 후손이 아직도 공소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쁜 농사철에도 제일 먼저 공소를 찾아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봉암공소 교우들의 기도 지향은 ‘일치와 성덕’이다. 이제 나이가 지긋해진 교우 모두가 하나 되고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는 성덕을 키워가게 해달라고 나날이 기도하고 있다. 봉암공소는 ‘일치와 성덕’을 지향으로 교우들이 매일 기도로 살아가는 모범적인 공소다. 지금의 봉암공소는 공소 설립 100주년을 맞아 공소 교우들과 옛 본당과 지금의 본당 교우들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봉암공소 제대. 경운기 10대 몰고 와 새 공소 건립 힘 보태 지금의 봉암공소 건물은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1985년 9월 12일 봉헌했다. 그해 관할 본당인 한들본당이 폐쇄돼 진안본당 공소로 개편됨에 따라 공소 신축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런데 한들공소 청년들이 공소를 짓는데 돈을 보태진 못해도 힘은 보태겠다며 봉암공소를 찾아왔다. 이들은 공소 터를 파고 경운기 10대를 동원해 한들에서 모래 자갈을 싣고 왔다. 봉암공소 교우들이 급하게 시멘트를 구해 그날 기초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66.12㎡(20평) 규모의 공소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공소 교우 중 건축일 경험이 있던 몇몇이 나서 벽돌을 쌓고 미장을 했다. 그렇게 공소와 사제방이 있는 집이 번듯하게 세워졌다. 제대와 십자가, 성상, 십자가의 길 14처 등은 진안본당이 지원해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봉암공소는 공소 교우들과 옛 본당과 현 본당의 교우들이 힘을 합쳐 지은 하느님과 그 백성의 집이다. 봉암공소 교우들은 새 공소 건립과 함께 레지오 마리애 ‘샛별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창단하고 가톨릭 농민회 활동도 시작했다. 지금은 진안본당 관할 공소 가운데 이 두 활동을 가장 활발히 하는 공소가 됐다. 16명 레지오 단원 가운데 8명이 성경을 완독했고, 그 절반이 완필했다. 또 이들 모두 매일 평균 묵주 기도 300단을 하고 있다. 어은동공소와 한들공소의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와 똑 닮은 봉암공소 14처 성화들이 유서 깊은 공소의 흔적을 잘 보여준다. 신심 깊은 교우들의 기도 체험 풍성 기도를 통한 체험도 크다. 봉암공소 교우들이 몇몇 기도 체험을 자랑했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해야 했는데 교우들의 기도로 절단 없이 완치되었고, 한 교우가 대학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장례 준비를 해 놓았는데 공소에서 끊임없이 기도해 완치됐다고 한다. 봉암공소는 봉암 마을 주택가 안에 있다. 여느 옛날 시골집처럼 벽돌 집에 시멘트로 마감해 놓았다. 건물 안팎이 모두 흰색으로 칠해져 깔끔하다. 공소 입구 옆 마당에 성모상을 마련하고 아담한 정원을 꾸며놓았다. 공소 내부는 단출하다. 입구 왼편 벽면에 긴 책상 하나를 두고 그 양쪽에 의자를 놓아뒀다. 여기서 교우들이 기도하고 레지오 회합을 한다. 친교 모임도 갖는다. 책상 뒤편 중앙에 나무 제대가 있다. 정갈한 흰색 제대포 위에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 촛대가 놓여 있다. 그 뒤로 십자가가, 양쪽 벽면에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가 설치돼 있다. 십자가의 길 14처 성화는 어은동과 한들공소의 그것과 똑 닮았다. 올해로 공소 설립 141주년이 된 봉암공소는 여전히 ‘일치와 성덕’의 모범을 보여주는 유서 깊은 공소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6.09.09
![[덕원의 순교자들]<5>-카누트 (베네딕토) 다베르나스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053_1.2_titleImage_1.jpg)
[덕원의 순교자들]-카누트 (베네딕토) 다베르나스 신부백작 아들, 모든 것 하느님께 바친 열정적 사제로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Canut Graf des Enffans d'Avernas)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 1884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쉬름도르프 ▲세례명 : 베네딕토 ▲첫서원 : 1912년 7월 28일 ▲사제수품 : 1914년 8월 13일 ▲종신서원 : 1915년 8월 27일 ▲한국 파견 : 1921년 1월 16일 ▲소임 : 원산대목구 내평ㆍ고산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0년 11월 6일, 만포수용소"누가 백작 아들의 그런 최후를 예상했겠습니까? 그보다 먼저 간 여섯 분 중 누구도 그렇게 참혹하게 죽지는 않았습니다." "수도생활 내내 가난을 사랑하셨던 카누트 신부님은 죽을 때도 온전히 가난하게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 시신은 대충 자루에 싸여 한국인 피랍자들이 들고 갔습니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의 임종을 지켜본 제르트루다 링크ㆍ디오메데스 메페르트ㆍ아르사시아 아이그너 수녀들의 증언이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1884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그라츠-세카우 교구 쉬름도르프에서 태어났다. 쉬름도르프는 현재 슬로베니아 무르스카 소보타 교구 아프체이다. 그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2세로부터 1805년 작위를 받은 하인리히 엉팡 다베르나스 백작이고, 어머니는 안나 플라이다. 세례명은 베네딕토, 한국명은 나국재(羅國宰)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자기 재산을 버리지 못해 예수의 제자가 되길 포기했지만 카누트 다베르나스는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거적 한 장에 싸여 묻힌 그리스도의 참 제자다. #삼형제 신부 그는 티롤 황제 사냥대 소위로 인스부르크대학 법학과 3학기를 다니던 1906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 청원서를 냈다. 그리고 내적으로 수도생활을 잘 준비했던 펠트키르크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11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청원기를 거쳐 덴마크 임금으로 성인품에 오른 '카누트'를 수도명으로 받고 수련기를 시작, 1912년 7월 28일 유기서원을 했다. 이어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친 후 1914년 8월 1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듬해 1915년 8월 27일에 종신서원을 한 후 1921년 1월 16일 한국 선교사로 파견됐다. 카누트 신부의 두 형제도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었다. 형 레오폴드 다베르나스 신부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회 소속으로 그보다 먼저 한국에 와 덕원수도원 부원장 겸 덕원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다 1944년 12월 20일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또 그의 동생 하인리히 다베르나스 신부는 세카우 수도원에 입회해 1952년 브라질의 한 보이론 연합회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영하 30℃에도 난방 안 되는 사제관에서 1921년 4월 9일 빈첸시오 슈스터ㆍ마르코 바잉거 신부와 함께 서울에 도착한 다베르나스 신부는 한국말을 채 배우기도 전인 그해 6월 13일 압록강 건너 간도 지역 한국인 본당을 인수하러 가는 선발팀에 소속돼 연길로 갔다. 그는 이질에 걸려 1923년 봄 서울 수도원으로 후송되기 전까지 삼원봉과 팔도구 성당에서 사목했다. 그는 영하 30℃가 넘는 날씨에도 난방이 안 되는 사제관과 창호지가 찢어지고 무너질 듯한 삼원봉성당에서 1921년 겨울을 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새벽 미사부터 밤 10시까지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를 줄 만큼 열정적으로 사목했다. "미사 중에 성작 속의 얼음을 세 번이나 녹여야 했습니다. 위만 살짝 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작 밑바닥까지 꽁꽁 얼었습니다. 미사 경본대 옆에 있는 촛불로 얼음은 쉽게 녹였지만, 미사의 경건함은 반감됐습니다. 손가락이 얼얼해 미사 내내 신경이 쓰였습니다"(다베르나스 신부 보고서 중에서). 수도원에서 건강을 회복한 다베르나스 신부는 1923년 10월 내평 선교기지 책임자로 부임했다. 1930년 그는 옹색하고 외딴 마을에 신자라고는 열다섯 가구밖에 없는 내평을 떠나 인근 소읍인 고산으로 본당을 옮겼다. 고산이 제대로 된 본당 모습을 갖추자 1931년 원산수녀원 첫 분원을 설립, 유치원을 운영했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신자들을 위해 살았다. "정말 영웅적이며 가없는 희생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단순히 개인적으로 편안한 삶을 포기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사에 필요한 용품들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제대포, 사제복, 제대 장식 등은 없으며 늘 가난에 짓눌려 살아야 했습니다"(제르트루다 링크 수녀, 1935년 보고서 중에서). #심장ㆍ신장 약화, 다리부종도 앓아 그의 '희생적 삶'은 건강을 앗아갔다. 심장과 신장이 크게 나빠졌고 다리 부종을 앓았다. 하지만 그는 매일 수녀원 미사를 집전하고 수녀들의 영성 지도를 맡아 했다. 공동 기도에도 참여했고, 또 신자들에게 힘닿는 데까지 고해성사를 줬다. 건강 악화로 덕원수도원에서 한 달 남짓 요양 중이던 다베르나스 신부는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1949년 5월 11일 공산당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를 거쳐 옥사덕 수용소로 끌려갔다. 심장병을 앓던 그는 세 시간 동안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무리가 돼 심장마비로 쓰러져 소 등에 실려 옮겨졌다. 건강이 나쁜데도 그는 담배 수확과 가공 등 농사일과 부엌일을 도왔다. 1950년 10월 유엔군의 북진과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인민군은 옥사덕 수용자들을 압록강 연안 만포 수용소로 옮겼다. 미군의 공습이 더욱 거세지자 수용소 경비병들은 만포 수용자들을 압록강 넘어 중국 땅 들판으로 내몰아 추위와 굶주림, 사람들의 조롱에 내던져진 채 끔찍한 3일을 보내게 했다. "날씨가 몹시 추웠다. 새벽 흰 서리에 옷이 흠뻑 젖었다. 배가 몹시 고팠으나 먹을 것은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빙 둘러서 있었다. 우리는 너덜너덜한 죄수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우리를 비웃고 조롱했다. 대부분 우리를 미군 포로로 알았다"(「북한에서의 시련」 중에서). #고결한 평온함 속으로 결국 들판에서 살을 에는 사흘 밤을 보낸 후 걸어서 만포수용소로 돌아온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1950년 11월 6일 병자성사를 받고, 단발마의 고통도 없이 조용히 사망했다. 수도자들은 그를 품위 있게 안치할 그 어떤 방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음날까지 수도자들은 그가 짧은 잿빛의 죄수복을 입고 머리엔 통나무를 벤 채 빈 옆방의 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봐야만 했다. "우리는 외적인 상황이 그렇게 궁핍했음에도 그의 얼굴에 퍼져있는 고결한 평온함과 숭고한 기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 증언). 다음날인 7일에 한국인 포로들이 와서 다베르나스 신부의 시신을 넝마에 담아 들고 나갔다. 수도자들은 그의 시신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나중에 그의 시신을 옮긴 포로 중 한 사람이 수도자들에게 매장지를 정확하게 알려줬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조은일2013.06.18
![[연재] 산골 선교사 임보나의 전교일지<2> 서석공소 터를 닦으며](//cpbc.co.kr/CMS/newspaper/2012/07/rc/420870_1.2_titleImage_1.jpg)
[연재] 산골 선교사 임보나의 전교일지 서석공소 터를 닦으며 모세에게 주신 용기, 지혜 약속하신 주님 22살 젊은 나이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두메산골 서석(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에 들어가 선교사로 살 것인가, 아니면 서울에 가서 새 출발을 할 것인가 결정해야 했다. 내게 공소 선교사 자리를 제의하고 며칠 생각할 말미를 준 조선희 필립보 신부님과 마주 앉았다. 신부님은 "서석이 돌아오지 못할 지옥은 아닙니다. 힘들거나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나오면 됩니다"하고 말씀하셨다. 마음을 정하고 신부님을 뵌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부족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신부님은 월급 1만 5000환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한 달 치를 미리 주셨다. 신부님은 서석 일대를 답사하신 후 성당부지로 사용할 야산을 매입해 두신 상태였다. 그리고 야산 앞에 있는 초가 6칸을 사놓으시고 나를 선교사로 파견하시는 것이었다.홍천본당 서석공소 선교사 시절 눈 쌓인 공소 앞에서(가운데가 임 보나 선교사). 하느님은 내게 착하고 부지런한 예비신자와 협조자를 많이 보내주셨다. #면(面)에 천주교 신자 단 한 명 1956년 10월 10일, 얼마 안 되는 부엌 살림살이와 이불을 챙겨 신부님 차를 타고 서석에 들어갔다. 홍천에서 서석까지 3시간 반이나 걸려 도착하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신부님은 뭐가 그리 바쁘셨는지 우리 모자(母子)만 초가에 덩그러니 남겨놓으시고는 바로 홍천으로 돌아가셨다. 큰 집에서 대가족과 함께 살았던 터라 낯선 초가에 촛불만 켜들고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7살배기 어린 아들은 집에 가자며 칭얼거렸다. 아이는 울면서 방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신부님이 서석에 공소를 세우기로 한 이유는 연규필(안드레아) 형제 때문이다. 연 안드레아 형제는 6ㆍ25 전쟁 중에 하반신을 조국에 바친 1급 상이용사였다. 육군병원에서 세례를 받고 귀향한 그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홍천본당 조 신부님께 공소를 세워달라고 청한 터였다. 그날 저녁 연 안드레아 형제가 식사하자며 허름한 마을 식당으로 데려갔다. 그때 난생처음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는 경험을 했다. 더구나 처음 만난 상이군인(안드레아 형제)은 왜 그리 무서웠던지…. 1950, 60년대는 나라가 가난해서 조국을 위해 싸우다 불구가 된 그들에게 호구지책을 세워주지 못했다. 악에 받친 그들은 가는 곳마다 울분을 토하며 행패를 부렸다. 그러면 주민들은 물론 경찰도 무서워서 슬금슬금 피했다. 서석면을 통틀어 천주교 신자는 안드레아 형제 한 명뿐이었다. 그의 부인도 신자가 아니었다. 주민들은 "천주교라는 걸 처음 들어본다"며 무슨 신흥종교 대하듯 했다. 주민들은 불교와 유교를 믿었다. 터줏대감, 산신령, 서낭당, 손각시(처녀귀신), 아들바위(소원을 들어준다는 암석) 등 잡다한 무속에 빠진 주민도 많았다. 그리고 마을마다 자리 잡고 있는 단골무당들은 "예수 믿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소문을 내고 다녔다. 경험도 없는 내가 이토록 터가 센 마을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모든 게 피난살이할 때보다 더 어려워 보였다. 신부님이 공소에 오셨기에 용기를 내서 말씀드렸다. "부족한 게 많아서 여기서 일할 자신이 없습니다." 신부님은 한참 생각하신 후에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참아보세요. 보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잘 될 겁니다"하며 다독여 주셨다. 그날 저녁기도를 마치고 성경을 펼쳤다. 탈출기 3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하였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누가 사람을 말 못하게 하고 귀먹게 하며, 보게도 하고 눈멀게도 하느냐? 나 주님이 아니냐? 그러니 이제 가거라. 네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탈출 3,10-4,11). #한밤중 외딴 길에서 맞닥뜨린 나병환자들 복음을 묵상하면서 크게 깨달았다. 콕 집어 내게 하시는 말씀 같았다. 그 순간 용기가 솟았다. 다음날부터 서석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에 속하는 생곡리 생비라는 마을까지 오르내리면서 천주교를 알렸다. 하반신을 나라에 바친 25살 연 안드레아 형제는 나머지 상반신을 하느님 사업에 바치겠다는 각오로 선교활동을 도와줬다. 하느님은 착하고 부지런한 예비신자와 협조자를 많이 보내주셨다. 서석면 생곡1리 교우집에 집회소를 정하고 주1회씩 예비신자 교리교육을 할 때다. 낮에는 농사일이 바빠 밤에 모여 교리공부를 하다보면 밤 11시에 끝이 났다. 아무리 선교사라고 해도 젊은 여자 몸으로 밤길 6㎞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게 쉽지 않았다. 고맙게도 황 사무엘(19살)과 심 사베리오(18살)가 보디가드처럼 밤늦게 데리러 왔다. 어느 추운 날 밤, 황 사무엘이 혼자서 나를 데리러 왔다. 얼굴이 새파랗게 얼었다. 우리는 밝은 달빛을 손전등 삼아 매서운 바람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검산리 아들바위를 돌아서니까 도로 한가운데서 몇 사람이 화톳불을 피워놓고 불을 쬐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교통사고 사망자의 시신을 지키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때는 객사(客死)하면 시신을 집에 들여놓지 않았던 터라 길에서 그런 광경을 더러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깜짝 놀랐다. 장날마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나병환자들이었다. 나병환자들이 몹쓸 짓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시절이다. 장날에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광경도 실제 보았다. 발길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남장을 할 겨를도 없었다. 사무엘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큰일 났어요. 이쪽에 여자가 있는 걸 본 것 같아요." 도로 오른쪽은 가파른 산이고, 왼쪽은 낭떠러지였다. 그야말로 피할 곳 없는 외나무다리였다. "회장님, 지금이라도 돌아가요. 빨리 뛰면 돼요." 나는 마음을 다잡고 독백처럼 말했다. "아냐, 늦었어. 그냥 땅만 보고 지나가." 그 순간 무리에서 한 사람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고 소리쳤다.(계속)조은일2012.07.17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42)] 19.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개혁과 의의)](//cpbc.co.kr/CMS/newspaper/2011/12/rc/398042_1.2_titleImage_1.jpg)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42)] 19.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개혁과 의의)교회 개혁, 쇄신으로 가톨릭 정통 교리 확립 ▨ 공의회 이후 개혁 1545년 12월 13일에 개회한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 12월 4일 폐회하기까지 18년에 걸쳐 25차 회기를 통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교리 문제와 교회 개혁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에서 마무리하지 못하고 사도좌에 넘긴 사안들이 있었습니다. 신앙에 폐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이른바 금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 공의회에서 결정한 교리와 전례에 따라 교리서와 미사경본을 간행하는 일,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위한 기도서 성무일도를 발간하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비오 4세 교황은 1564년 3월 칙서릍 통해 공의회에서 준비한 자료를 토대로 금서 목록을 간행합니다. 이어 공의회 결정들을 올바로 해석하고 시행하는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 해석 추기경 위원회'를 구성합니다. 비오 4세는 또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들, 신학자들이 휴대할 수 있도록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리를 요약한 「트리엔트 신앙 고백」을 발간합니다. 나아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규정과 어긋나는 모든 특전이나 관면, 권한 등이 폐지됐음을 공식으로 선포합니다. 1565년 12월 9일 비오 4세 교황이 선종하고 후임 교황에는 로마 종교재판관으로 이름을 떨친 보스코 바렌고 추기경이 선출됩니다. 그가 성 비오 5세(재위 1566~1572) 교황입니다. 종교재판관으로 이단 척결에 단호함을 보여 유화적인 선임 비오 4세 교황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지만, 비오 5세 교황은 선임 교황의 개혁 노선을 따라 공의회와 선임 교황이 남긴 과제를 계속 수행해 나갑니다. 본당 신부들을 위해 가톨릭교회의 주요 교리와 규범인 「로마 교리서」를 발간했으며,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위한 기도서 「로마 성무일도」를 간행했습니다. 「로마 미사경본」도 간행, 서방 교회 전체가 통일된 로마 전례로 미사를 거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비오 5세 교황은 교황청을 수도원처럼 꾸며 검소하게 생활하고 공의회에서 결정한 성직자 상주 의무를 엄격히 적용해 장기간 임지를 비우는 주교들에게는 사목직과 성직록을 박탈하기도 했습니다. 공의회의 개혁 정신은 비오 5세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재위 1572~1585) 때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달력 그레고리오력을 도입한 교황으로도 잘 알려진 그레고리오 13세는 상주 교황대사 제도를 도입, 교황대사들을 통해 트리엔트 공의회 개혁 교령들이 지역 교회에서 제대로 시행되는지 지도, 감독토록 했습니다. 이를 통해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이 유럽 각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또 로마에 신학원을 재건하는 것을 비롯해 여러 신학원을 신설 또는 통합 확대해 공의회에서 역점을 둔 성직자 양성 교육을 뒷받침했습니다. 그레고리오 13세 후임 교황 식스토 5세(재위 1585~1590)는 공의회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머리 개혁' 곧 교황청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식스토 5세는 1588년 1월 반포한 교황령을 통해 15개 성으로 이뤄진 교황청 편제를 확립했습니다. 9개 성은 보편 교회 업무를 , 6개 성은 교황국 통치를 담당토록 했습니다. 이에 앞서 1585년 12월 교황과 주교들과의 일치 증진을 위해 사도좌 정기방문(앗리미나, ad limina)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와 인접 국가들 주교들은 3년에 한 번, 그밖의 유럽 주교들은 4년에 한 번, 아메리카 같은 나머지 지역 주교들은 5년에 한 번 로마를 방문해 지역 교회 상황을 보고하며 신앙의 유대를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시행되고 있는 앗리미나가 이때 처음 시작된 것입니다. 교황들의 개혁 못지않게 지역 교회 주교들도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노선에 따라 교회 생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교구 신학교 설립, 주일 및 축일 강론, 주교들의 임지 상주 및 교구 순시 같은 사목 조치들이 각 교구에서 이뤄졌습니다. 특히 교황 비오 4세의 조카로서 밀라노 대교구장을 지낸 성 가를로 보로메오(1538~1584) 추기경은 개혁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는 공의회 개혁의 효과적 실현을 위해 대교구를 12개 지역으로 나눠 교구장 대리들에게 맡기면서 그들에게 실질적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사제 양성을 위해 신학교와 부속 소신학교를 세우고 별도로 교리학교도 세웠습니다. 보로메오 추기경이 교회 개혁 내용을 요약해 1582년에 간행한 「밀라노 법령」은 스페인과 프랑스 지역 교회들에 유용한 길잡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의의 19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트리엔트 공의회는 무엇보다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 주장에 맞서 가톨릭 정통 교리를 확립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공의회는 은총과 의화 교리, 원죄 교리, 성경 경전, 성체성사와 실체변화, 일곱 성사와 전례, 연옥 교리 등 가톨릭교회의 주요 교리를 정립했습니다. 주요 교리와 관련해서 일부 부족한 점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교회론과 교황 수위권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교황 수위권 문제를 제대로 다룰 상황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지닙니다. 공의회 우위설이라든가 또는 주교들도 교황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게서 권한을 직접 받았다는 주교 신수설 같은 이론들이 당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자칫하다가는 공의회가 파국으로 끝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공의회는 또 프로테스탄트들의 개혁에 맞서 개혁 교령들을 통해 가톨릭 개혁과 쇄신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개혁 교령들은 철저한 개혁을 부르짖는 진보적 주교들과 전통을 고수하려는, 특히 머리인 교황청 관리들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지만 그럼에도 교회 생활의 폐해와 악습을 청산하고 제도와 규율을 정비해 개혁과 쇄신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석이 됐습니다. 한편에서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이 머리(교황청)보다 지체(지역 교회와 본당, 수도회) 개혁에 그쳤다는 지적도 있지만 공의회 이후에 개혁 성향들의 교황들이 잇따라 선출돼 공의회의 개혁 노선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발표한 수도생활에 관한 개혁 교령과 자선 활동에 대한 권면 등은 기성 수도회들의 개혁을 촉발시키는 한편 사회복지와 자선 사업에 투신하는 새로운 수도회들을 탄생시키는 데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혁 수도회인 맨발의 가르멜회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실천을 쇄신하는 밑거름이 됐고 이후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릴 때까지 거의 400년 동안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조은일2011.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