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서 오이소” 대구대교구, ‘착한 목자’ 김종강 대주교 환영 대구대교구 부교구장 김종강 대주교 임명 발표 현장 김종강 대주교(가운데)가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와 악수하며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오른쪽은 총대리 장신호 주교. 청주교구장 김종강 주교의 대구대교구 부교구장 대주교 임명은 5월 26일 오후 7시(로마시각 낮 12시)에 교황청 공식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를 통해 공식 발표됐다. 대구대교구는 같은 시각 교구청 경당에서 새로운 부교구장 대주교를 맞이하는 임명 발표식을 마련하고 김 대주교를 환영했다. 임명 발표식에는 대구대교구 교구청 사제단과 대리구장, 평협 임원을 비롯해 주교회의 사무국장 송영민(대구대교구) 신부, 청주교구 사무처장 주영길·선교사목국장 박규선·교구장 비서 김인환 신부 등이 함께했다.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는 “가톨릭교회에서 주교는 교황 명에 따라 움직이며 사제는 교구장 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고, 이런 원칙을 지켜왔기에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이어져 왔다”면서 “이번에 명에 따라 오신 김종강 대주교님께선 정말 훌륭하신 분이고 4년 이상 교구장 경험을 하셨기에 우리 교구에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신호 보좌 주교는 “우리 교구 사제단과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응원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축하인사를 전했고, 교구 평신도위원회 김성교(루카) 총회장은 “신자들을 대표해 대구대교구에 오심을 환영하며, 교구 일을 잘 해나가실 수 있도록 평신도들이 함께 대주교님을 위해 기도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김종강 대주교는 인사말에서 “그저 저의 바람이라면 빨리 이 시간이 끝나는 것”이라며 부담스러운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으면서도 “그나마 이 자리에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신부님들과 선배님들이 계셔서 조금 안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하느님 뜻을 잘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은 항상 저를 앞서 가기에, 그 부르심에 따라가고자 이 자리에 왔다”면서 환영해준 모든 이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이어진 축하식에선 샴페인과 간단한 다과가 차려졌다. 참석자들은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고 환영과 축하 인사를 건넸다. 건배사를 맡은 김준우(5대리구 교구장대리) 신부는 “사제 생활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위로받는 성경 말씀이 요한 복음 13장 1절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라면서 “대주교님께서도 우리 대구대교구 사제들과 신자들을 끝까지 사랑해주시고 항상 품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명 발표식 후 열린 축하식에서 대구대교구 평협 임원과 사제들이 박수를 치며 김종강 대주교를 환영하고 있다. 이튿날 오전 교구청 로비에선 직원들이 마련한 김 대주교 환영 행사가 짧게 진행됐다. 로비에는 김 대주교의 사진과 함께 ‘Deo Gratias 김종강 시몬 주교님의 천주교 대구대교구 부교구장 대주교 임명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적힌 초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 장신호 보좌 주교, 교구청 사제단도 함께한 가운데, 임수빈(헬레나) 관리국 직원이 김 대주교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박지현(프란체스카, 문화홍보국) 직원회 회장은 축하 인사를 하며 “교회를 향한 깊은 사랑과 헌신이 새로운 사목 안에서 더욱 빛나시기를 기도드린다”고 전했다. 김 대주교는 “이곳에서 하루 지내면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드라마 대사가 생각났는데, ‘사랑은 변하는 건가’라는 복잡한 마음도 들었다”면서 “제가 이곳에 와서 많은 일을 하기보다는 조용히 머무르며 여러분 안으로 더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편집팀 조은일2026.06.01

신앙이 어우러진 색채의 향연, 샤갈의 세계 속으로신앙인 눈으로 본 ‘마르크 샤갈전’ ‘마르크 샤갈 특별전’ 전경 탈출기 등 성경 연작 눈길 사로잡아 스테인드글라스 미디어아트로 구현 원화 7점 첫 공개… 170여 점 한자리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샤갈의 작품 170여 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한 ‘마르크 샤갈 특별전: BEYOND TIME(비욘드 타임)’. 샤갈 서거 4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번 전시에서는 전 세계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원화 7점을 포함해 회화·드로잉·석판화·유화·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은 러시아 비텝스크(지금의 벨라루스)에서 태어나 러시아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파리·베를린·뉴욕·예루살렘 등을 오가면서 국경과 언어·시대를 초월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예술의전당 큐레이터 장윤진 과장은 “샤갈은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품에 가족·유다인·인류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고, 98년이라는 긴 생애 동안 굴곡진 세상사를 겪었지만 시대사조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는 유년기 추억이 어린 러시아정교회 성당의 독특한 돔들이 어우러진 비텝스크와 유다인 공동체 마을, 생의 후반기를 중심으로 50년가량을 머문 프랑스의 파리와 니스 등 지중해의 다채로운 모습, 강렬한 존재감으로 일상의 덧없음과 삶의 연약함을 반영하는 꽃다발 작품 등이 걸려 있다. 국내에서 몇 차례 열렸던 샤갈전과 비교해 작가 특유의 강렬한 색채와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신앙인들의 눈길을 더욱 사로잡는 건 샤갈이 작업한 ‘성경’ 연작이다. 1923년 파리에서 샤갈은 저명한 미술상이자 출판인인 앙브루아즈 볼라르로부터 고골의 「죽은 혼」과 라퐁텐의 「우화」, 「성경」 같은 작품의 삽화를 의뢰받아 뛰어난 판화 기법을 선보였다. 샤갈은 특히 성경의 땅을 직접 보고자 1931년 팔레스타인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빛과 땅, 그리고 물질을 동시에 발견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 ‘홍해를 건넌 사람들’ 등으로 이어지는 성경 연작은 1931년부터 1939년 볼라르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고, 전쟁과 망명의 시기를 지나 1952년 다시 시작해 1956년 완성했다. 샤갈은 “어릴 적부터 성경에 마음을 빼앗겼고, 성경은 언제나 그리고 지금도 인류가 가진 가장 위대한 시의 원천처럼 느껴진다”며 “성경은 ‘자연의 울림’과 같고, 나는 그 비밀을 그림 속에 담아 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전시장에는 「탈출기 이야기」도 소개되고 있다. 진열된 석판화 연작은 1966년 출판인 레옹 아미엘에 의해 출간됐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이야기,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구약성경의 탈출기는 억압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혁명과 전쟁으로 여러 차례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샤갈은 한 시대의 종교적인 사건뿐 아니라 자유를 향한 인간의 보편적인 갈망을 표현했다. 파리 위의 신부 ‘탈출기’ 혹은 ‘탈출기의 배’, 1948. 탈출기 이야기. 샤갈이 작업한 예루살렘 하다사 의료센터 내 회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몰입형 미디어 아트로 구현, 관람객들이 체험하고 있다. 특히 1948년경 제작된 ‘탈출기’ 혹은 ‘탈출기의 배’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다인들이 겪은 고통과 추방의 현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난민들의 집단 이주 등을 생각하게 한다. 노란빛으로 떠오른 십자가 위의 인물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유다인의 고통을 상징하고 그림 전체적으로는 절망과 상실·어둠이 느껴지지만, 화폭 왼쪽 위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백색의 빛은 꺼지지 않는 희망을 내포한다. 장윤진 큐레이터는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샤갈은 망명과 전쟁 등을 거치며 종교에 많이 의지했던 작가이며, 성경 연작은 그가 평생을 바쳐 만들어낸 거대한 예술적 여정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전했다. 특히 “샤갈은 익히 알고 있는 성경의 이야기를 단순히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희망이나 믿음·사랑·희생처럼 우리 삶 속의 이야기를 같이 녹여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런가 하면 샤갈은 1958년 프랑스 랭스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 후 1959~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하다사 의료센터 내 회당에 설치한 12개의 스테인드글라스도 제작했다. 각 창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주제로 삼고 있으며, 성경 말씀에 바탕을 두고 색과 상징·시적 은유를 결합해 섬세하게 배치했다. 빛에 따라 색감과 깊이를 달리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샤갈의 걸작 중 하나로, 이번 전시에서는 하다사 의료센터 스테인드글라스의 밑그림뿐만 아니라 미디어아트로 실물 크기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구현해 현장을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꾸몄다. 파리 오페라하우스(오페라 가르니에)의 천장화도 몰입형 미디어아트로 연출했다. ‘꿈의 꽃다발’로 불리는 이 천장화는 샤갈이 1964년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의 요청으로 제작했다. 220㎡에 달하는 오페라하우스 천장에 샤갈은 글루크·베토벤·베르디·비제·아당·차이콥스키·스트라빈스키·라벨·드뷔시·라모·베를리오즈·바그너·모차르트·무소륵스키 등 자신이 사랑한 음악가 14명의 작품세계를 펼쳐 보였다. ‘마르크 샤갈 특별전: 비욘드 타임’ 전은 9월 21일까지 이어진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윤하정2025.06.11
![[조승현 신부 사제의 눈] 다시, cpbc](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5/03/04/tZ71741079913784.jpg)
[조승현 신부 사제의 눈] 다시, cpbc조승현 베드로 신부(cpbc 주간)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타임스(NYT)의 변화는 기적에 가깝다. 뉴욕타임스는 한때 종이신문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는 대신, 신문을 넘어선 ‘디지털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으로 스스로를 재정의하며 혁신에 나섰다. 뉴욕타임스는 기존 미디어 문법이 아닌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 문법을 받아들인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뉴스라는 핵심 가치를 지키면서도 제품 리뷰, 요리 레시피, 게임과 같은 정보를 구독 형태로 제공한다. 독자들이 뉴스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뉴욕타임스를 찾게 만든 전략이다. 뉴욕타임스 구독자들은 하루를 시작할 때 뉴욕타임스 앱을 켜고, 점심에 게임을 하며, 저녁에 레시피를 본다. 뉴욕타임스는 ‘뉴스(정보)’가 아니라 ‘라이프(시간)’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변신했다. 결과는 놀랍다. 미국 전체 뉴스 구독 시장 점유율 50%를 넘기며, 절대 강자가 되었다. 그럼 우리 가톨릭 미디어도 이런 ‘라이프(시간)’를 제공하는 모델이 성공할 수 있을까. 미국의 가톨릭 기도 앱 ‘할로우(Hallow)’의 성공은 우리에게 더욱 구체적인 미래를 보여준다. 할로우를 개발한 알렉스 존스는 가톨릭 신앙을 잃었다가 기도를 통해 다시 신앙으로 돌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의 기술과 영적 전통을 잇기 위해 앱을 만들었다. 알렉스 존스는 ‘할로우’를 통해 종교 콘텐츠가 테크놀로지와 결합했을 때 얼마나 강력한 선교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려고 했다. 할로우도 뉴욕타임스처럼 ‘라이프(시간)’를 제공한다. 할로우는 신앙은 성당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 앱을 켜는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이어지는 ‘거룩한 습관(라이프)’이라고 말한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주일날 성당에만 머물지 않는다. 학교에 있어도 회사에 있어도 가정에 있어도,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계속되어야 한다. 과거 TV나 라디오가 하루종일 사람들의 일상을 함께했던 것처럼, 이제는 똑똑한 가톨릭 앱이 사람들의 일상을 함께한다. 할로우는 단순히 그날 전례문이나 기도문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선다. 할로우는 AI 기술을 활용한 맞춤형 영적 코칭을 제공한다. 할로우가 있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묵주기도·관상기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유명한 가톨릭 연예인이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주는 목소리 가이드를 한다. 여기에 게임화(gamification) 요소를 도입해 사순 시기나 대림 시기에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과 기도 챌린지를 한다. 결과는 폭발적이다. 북미 기준 애플 앱스토어 다운로드 1위를 기록했다. 종교 앱 최초다. 미국 미식축구 슈퍼볼 광고도 했다. 지금은 영어·스페인어·프랑스어 등 8개 언어로 150개국 이상에서 사용되고 있다. 가히 가톨릭의 ‘넷플릭스’가 되었다. cpbc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이 창립 38주년을 맞았다.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던 1988년의 설렘은 어느덧 서른여덟 해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 우리 cpbc가 마주한 미디어 지형은 그 어느 때보다 가파른 절벽 위에 서 있다. 종이 매체의 위기와 디지털 플랫폼의 범람, 그리고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파도는 cpbc와 같은 종교 미디어에도 “혁신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준엄한 명령을 내리고 있다. 뉴욕타임스와 할로우의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우리 cpbc도 혁신해야 한다. 기술은 도구로 삼고, 사랑은 본질로 품으며, 혁신은 우리의 일상이 돼야 한다. 세상 끝까지 기쁜 소식을 전하겠다는 우리의 약속은 38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도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다. cpbc가 걸어가는 혁신의 길 끝에서 주님의 평화가 우리 cpbc를 통해 온 세상에 흐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cpbc2026.05.13

성모님과 성 요셉 차례로 발현하신 프로방스의 성가정 순례 마을[중세 전문가의 간김에 순례] 94. 코티냐크 베시용 성 요셉 성지와 베르다유 은총의 성모 성지 프랑스 코티냐크의 베시용 언덕에 자리한 성 요셉 성지. 1660년 6월 7일 성 요셉 발현으로 시작된 순례지로 은총의 성모 성지를 맡고 있던 오라토리오회가 순례 사목을 맡아 오다가 프랑스 혁명으로 수도 생활과 순례가 단절됐다. 1975년 알제리에서 온 성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정착해 수도원을 복구했으며 2019년부터는 마테르 데이 수도회 수녀들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출처=베시용 성 요셉 성지 유럽에는 성모 발현 성지가 많지만, 성 요셉 발현 성지는 보기 드뭅니다. 그런데 두 성인이 한곳에 발현하여 성가정의 신앙 유산을 남긴 특별한 마을이 있습니다. 오늘 가볼 프랑스 남동부 바르주의 시골 마을 코티냐크(Cotignac)입니다. 마르세유에서 A8 고속도로를 달리다 국도로 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지중해의 푸른 바다 대신 프로방스의 정겨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완만한 구릉 사이로 포도밭과 올리브나무 숲이 이어지고, 드문드문 작은 마을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코티냐크가 가까워지면 마을 뒤로 병풍처럼 솟은 황갈색 절벽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주민들이 그저 ‘바위’라고 부르는 높이 80m, 길이 400m의 거대한 석회암 절벽입니다. 절벽에는 중세 주민들의 피난처이자 저장고였던 동굴이 뚫려 있고, 정상으로 옛 두 방어탑이 남아 있습니다. 마을에 도착하면, 좁은 골목을 따라 늘어선 가옥과 색색의 덧문, 작은 광장과 분수대가 순례자를 맞이합니다. 베시용 성 요셉 성지의 수녀원 성당 내부(위)와 아버지들의 순례 모습(아래). 아버지들의 순례는 1970년대 아내와 뱃속 아기의 무사함을 청한 한 남자의 서원에서 시작된 순례로 엑상프로방스에서 코티냐크까지 약 90㎞를 걸어 감사 기도를 바친다. 이 도보 순례는 해마다 참가자가 늘며 공동 순례로 발전했다. 발현하신 성모님 약속 듣고 세운 성전 이곳이 바깥세상에 알려진 건 성모 마리아의 발현 덕분입니다. 마을 남서쪽 베르다유 언덕에 있는 은총의 성모 성당이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1519년 8월 10일 참나무 숲에서 기도하던 나무꾼 장 드 라 봄에게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곁에는 미카엘 대천사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도 함께였지요. 성모님은 이곳에 성당을 세우고,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찾아와 기도하면 은총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민들은 그해 성당을 짓기 시작했고, 1521년 레오 10세 교황은 순례자들에게 대사를 내렸습니다. 은총의 성모 성지는 프랑스 왕실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오랫동안 후계자가 없던 루이 13세 부부가 성모님의 전구를 청한 뒤, 1638년 ‘태양왕’ 루이 14세가 태어납니다. 루이 14세는 스물한 살이던 1660년, 결혼을 위해 생장드뤼즈로 향하던 중 어머니와 함께 이곳을 순례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지요. 그로부터 넉 달 뒤, 인근 베시용 언덕에서 성 요셉의 발현이라는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납니다. 코티냐크 베르다유 언덕에 자리한 은총의 성모 성지(위)와 ‘성 요셉의 길’로 향한 문(아래). 1519년 성모 발현 전승을 간직한 곳으로 성당 주변에 십자가의 길과 묵상길, 성물방이 마련되어 있다. 성 요한 공동체 수도자들이 순례 사목을 맡고 있으며, 순례자를 위한 ‘성가정의 집’을 운영한다. 베시용 성 요셉 성지와 연결되는 도보 순례길 ‘성 요셉의 길’도 조성되어 있다. 목마름으로 지친 목동 앞에 나타나신 성 요셉 1660년 6월 7일 목동 가스파르 리카르가 뜨거운 햇볕 아래 갈증에 지쳐 있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자신을 요셉이라고 밝힌 그는 “저 바위를 들어 올려라. 그러면 물을 마실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스파르가 바위를 옮기자 맑은 물이 솟았고, 물을 마신 뒤 돌아보니 요셉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후 발현을 기념하는 기도처가 세워졌고, 1661년 교구장은 은총의 성모 성지를 관리하던 오라토리오회에 이곳의 순례 사목도 맡겼습니다. 성모와 성 요셉을 함께 공경하도록 하려는 취지였고, 그 결과 코티냐크에 성가정 순례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은총의 성모 성당에서 발현 장소인 베시용 언덕까지는 숲길을 따라 ‘성 요셉의 길’이 이어집니다. 요셉의 꿈, 이집트 피난 등 성 요셉의 삶을 묵상하며 걷다 보면 나무들 사이로 소박한 성당과 수녀원이 나타납니다. 프랑스혁명으로 이곳 순례와 수도 생활이 단절됩니다. 하지만 1975년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정착하면서 다시 기도의 불이 밝혀졌고, 2019년부터 마테르 데이(하느님의 어머니) 수녀회가 이어받아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수녀원 옆으로 프로방스 로마네스크 양식의 소박한 석조 성당이 붙어 있습니다. 안에 들어서면 돌벽과 아치형 천장 아래로 작은 제대가 자리하고 그 위로 십자가가 걸려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 들보에 새겨진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3)는 성경 구절이 성 요셉 발현의 의미를 떠올립니다. ‘성 요셉의 샘’에서 시작되는 순례 성 요셉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성가정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초기 교회에서는 순교자를 중심으로 성인 공경이 발전했기에 성 요셉 신심은 상대적으로 늦게 퍼졌습니다. 성인의 삶도 복음서를 통해 단편적으로 알려졌을 뿐입니다. 성 요셉은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와 가르멜회를 통해 널리 공경받기 시작했습니다. 대 데레사 성녀는 성 요셉을 공경하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성인의 전구를 청했고, 1562년에 세운 첫 개혁 수도원도 성 요셉에게 봉헌했습니다. 1604년에는 가르멜회가 프랑스에 진출하지요. 신심이 확산하던 시대에 성인의 발현이 있었던 겁니다. 이후 1870년 비오 9세 교황은 성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2020년 프란치스코 교황도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를 통해 그 공경을 한층 깊이 다졌습니다. 성당 앞 작은 마당에 성지의 시작인 ‘성 요셉의 샘’이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요셉의 말이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듣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행동에 옮긴 ‘의로운 사람’입니다. 가족의 보호와 노동, 일상에서 아버지로서 책임, 평범함에서 거룩함을 꽃피운 성인입니다. 성 요셉이 이곳에서 남긴 말은 길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목마른 이에게 바위를 들어 올려 물을 마시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도 가족에 대한 걱정과 말 못 할 고민을 안고 오겠지요. 샘 앞에서 누군가의 목마름을 헤아렸던 성 요셉의 사랑을 되새겨 봅니다. <순례 팁> ※ 마르세유·니스 연결 고속도로(A8) 이용(각 100㎞, 120㎞ 거리로 1시간 30분 소요), 레자르–드라기냥역에서 버스·택시 이용 가능하나 렌트카 권장. ※ 은총의 성모 성지 미사: 주일 및 대축일 11:00·18:30, 평일 11:30, 18:30(화-금), 베시용 성 요셉 성당 미사: 주일 및 대축일 10:30, 평일 8:30. 수녀원 내 순례자 숙소.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마련한 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 차윤석cpbc2026.10.20
![[덕원의 순교자들]<5>-카누트 (베네딕토) 다베르나스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053_1.2_titleImage_1.jpg)
[덕원의 순교자들]-카누트 (베네딕토) 다베르나스 신부백작 아들, 모든 것 하느님께 바친 열정적 사제로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Canut Graf des Enffans d'Avernas)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 1884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쉬름도르프 ▲세례명 : 베네딕토 ▲첫서원 : 1912년 7월 28일 ▲사제수품 : 1914년 8월 13일 ▲종신서원 : 1915년 8월 27일 ▲한국 파견 : 1921년 1월 16일 ▲소임 : 원산대목구 내평ㆍ고산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0년 11월 6일, 만포수용소"누가 백작 아들의 그런 최후를 예상했겠습니까? 그보다 먼저 간 여섯 분 중 누구도 그렇게 참혹하게 죽지는 않았습니다." "수도생활 내내 가난을 사랑하셨던 카누트 신부님은 죽을 때도 온전히 가난하게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 시신은 대충 자루에 싸여 한국인 피랍자들이 들고 갔습니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의 임종을 지켜본 제르트루다 링크ㆍ디오메데스 메페르트ㆍ아르사시아 아이그너 수녀들의 증언이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1884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그라츠-세카우 교구 쉬름도르프에서 태어났다. 쉬름도르프는 현재 슬로베니아 무르스카 소보타 교구 아프체이다. 그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2세로부터 1805년 작위를 받은 하인리히 엉팡 다베르나스 백작이고, 어머니는 안나 플라이다. 세례명은 베네딕토, 한국명은 나국재(羅國宰)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자기 재산을 버리지 못해 예수의 제자가 되길 포기했지만 카누트 다베르나스는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거적 한 장에 싸여 묻힌 그리스도의 참 제자다. #삼형제 신부 그는 티롤 황제 사냥대 소위로 인스부르크대학 법학과 3학기를 다니던 1906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 청원서를 냈다. 그리고 내적으로 수도생활을 잘 준비했던 펠트키르크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11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청원기를 거쳐 덴마크 임금으로 성인품에 오른 '카누트'를 수도명으로 받고 수련기를 시작, 1912년 7월 28일 유기서원을 했다. 이어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친 후 1914년 8월 1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듬해 1915년 8월 27일에 종신서원을 한 후 1921년 1월 16일 한국 선교사로 파견됐다. 카누트 신부의 두 형제도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었다. 형 레오폴드 다베르나스 신부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회 소속으로 그보다 먼저 한국에 와 덕원수도원 부원장 겸 덕원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다 1944년 12월 20일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또 그의 동생 하인리히 다베르나스 신부는 세카우 수도원에 입회해 1952년 브라질의 한 보이론 연합회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영하 30℃에도 난방 안 되는 사제관에서 1921년 4월 9일 빈첸시오 슈스터ㆍ마르코 바잉거 신부와 함께 서울에 도착한 다베르나스 신부는 한국말을 채 배우기도 전인 그해 6월 13일 압록강 건너 간도 지역 한국인 본당을 인수하러 가는 선발팀에 소속돼 연길로 갔다. 그는 이질에 걸려 1923년 봄 서울 수도원으로 후송되기 전까지 삼원봉과 팔도구 성당에서 사목했다. 그는 영하 30℃가 넘는 날씨에도 난방이 안 되는 사제관과 창호지가 찢어지고 무너질 듯한 삼원봉성당에서 1921년 겨울을 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새벽 미사부터 밤 10시까지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를 줄 만큼 열정적으로 사목했다. "미사 중에 성작 속의 얼음을 세 번이나 녹여야 했습니다. 위만 살짝 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작 밑바닥까지 꽁꽁 얼었습니다. 미사 경본대 옆에 있는 촛불로 얼음은 쉽게 녹였지만, 미사의 경건함은 반감됐습니다. 손가락이 얼얼해 미사 내내 신경이 쓰였습니다"(다베르나스 신부 보고서 중에서). 수도원에서 건강을 회복한 다베르나스 신부는 1923년 10월 내평 선교기지 책임자로 부임했다. 1930년 그는 옹색하고 외딴 마을에 신자라고는 열다섯 가구밖에 없는 내평을 떠나 인근 소읍인 고산으로 본당을 옮겼다. 고산이 제대로 된 본당 모습을 갖추자 1931년 원산수녀원 첫 분원을 설립, 유치원을 운영했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신자들을 위해 살았다. "정말 영웅적이며 가없는 희생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단순히 개인적으로 편안한 삶을 포기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사에 필요한 용품들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제대포, 사제복, 제대 장식 등은 없으며 늘 가난에 짓눌려 살아야 했습니다"(제르트루다 링크 수녀, 1935년 보고서 중에서). #심장ㆍ신장 약화, 다리부종도 앓아 그의 '희생적 삶'은 건강을 앗아갔다. 심장과 신장이 크게 나빠졌고 다리 부종을 앓았다. 하지만 그는 매일 수녀원 미사를 집전하고 수녀들의 영성 지도를 맡아 했다. 공동 기도에도 참여했고, 또 신자들에게 힘닿는 데까지 고해성사를 줬다. 건강 악화로 덕원수도원에서 한 달 남짓 요양 중이던 다베르나스 신부는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1949년 5월 11일 공산당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를 거쳐 옥사덕 수용소로 끌려갔다. 심장병을 앓던 그는 세 시간 동안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무리가 돼 심장마비로 쓰러져 소 등에 실려 옮겨졌다. 건강이 나쁜데도 그는 담배 수확과 가공 등 농사일과 부엌일을 도왔다. 1950년 10월 유엔군의 북진과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인민군은 옥사덕 수용자들을 압록강 연안 만포 수용소로 옮겼다. 미군의 공습이 더욱 거세지자 수용소 경비병들은 만포 수용자들을 압록강 넘어 중국 땅 들판으로 내몰아 추위와 굶주림, 사람들의 조롱에 내던져진 채 끔찍한 3일을 보내게 했다. "날씨가 몹시 추웠다. 새벽 흰 서리에 옷이 흠뻑 젖었다. 배가 몹시 고팠으나 먹을 것은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빙 둘러서 있었다. 우리는 너덜너덜한 죄수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우리를 비웃고 조롱했다. 대부분 우리를 미군 포로로 알았다"(「북한에서의 시련」 중에서). #고결한 평온함 속으로 결국 들판에서 살을 에는 사흘 밤을 보낸 후 걸어서 만포수용소로 돌아온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1950년 11월 6일 병자성사를 받고, 단발마의 고통도 없이 조용히 사망했다. 수도자들은 그를 품위 있게 안치할 그 어떤 방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음날까지 수도자들은 그가 짧은 잿빛의 죄수복을 입고 머리엔 통나무를 벤 채 빈 옆방의 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봐야만 했다. "우리는 외적인 상황이 그렇게 궁핍했음에도 그의 얼굴에 퍼져있는 고결한 평온함과 숭고한 기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 증언). 다음날인 7일에 한국인 포로들이 와서 다베르나스 신부의 시신을 넝마에 담아 들고 나갔다. 수도자들은 그의 시신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나중에 그의 시신을 옮긴 포로 중 한 사람이 수도자들에게 매장지를 정확하게 알려줬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조은일2013.06.18
![[연재] 산골 선교사 임보나의 전교일지<2> 서석공소 터를 닦으며](//cpbc.co.kr/CMS/newspaper/2012/07/rc/420870_1.2_titleImage_1.jpg)
[연재] 산골 선교사 임보나의 전교일지 서석공소 터를 닦으며 모세에게 주신 용기, 지혜 약속하신 주님 22살 젊은 나이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두메산골 서석(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에 들어가 선교사로 살 것인가, 아니면 서울에 가서 새 출발을 할 것인가 결정해야 했다. 내게 공소 선교사 자리를 제의하고 며칠 생각할 말미를 준 조선희 필립보 신부님과 마주 앉았다. 신부님은 "서석이 돌아오지 못할 지옥은 아닙니다. 힘들거나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나오면 됩니다"하고 말씀하셨다. 마음을 정하고 신부님을 뵌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부족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신부님은 월급 1만 5000환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한 달 치를 미리 주셨다. 신부님은 서석 일대를 답사하신 후 성당부지로 사용할 야산을 매입해 두신 상태였다. 그리고 야산 앞에 있는 초가 6칸을 사놓으시고 나를 선교사로 파견하시는 것이었다.홍천본당 서석공소 선교사 시절 눈 쌓인 공소 앞에서(가운데가 임 보나 선교사). 하느님은 내게 착하고 부지런한 예비신자와 협조자를 많이 보내주셨다. #면(面)에 천주교 신자 단 한 명 1956년 10월 10일, 얼마 안 되는 부엌 살림살이와 이불을 챙겨 신부님 차를 타고 서석에 들어갔다. 홍천에서 서석까지 3시간 반이나 걸려 도착하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신부님은 뭐가 그리 바쁘셨는지 우리 모자(母子)만 초가에 덩그러니 남겨놓으시고는 바로 홍천으로 돌아가셨다. 큰 집에서 대가족과 함께 살았던 터라 낯선 초가에 촛불만 켜들고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7살배기 어린 아들은 집에 가자며 칭얼거렸다. 아이는 울면서 방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신부님이 서석에 공소를 세우기로 한 이유는 연규필(안드레아) 형제 때문이다. 연 안드레아 형제는 6ㆍ25 전쟁 중에 하반신을 조국에 바친 1급 상이용사였다. 육군병원에서 세례를 받고 귀향한 그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홍천본당 조 신부님께 공소를 세워달라고 청한 터였다. 그날 저녁 연 안드레아 형제가 식사하자며 허름한 마을 식당으로 데려갔다. 그때 난생처음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는 경험을 했다. 더구나 처음 만난 상이군인(안드레아 형제)은 왜 그리 무서웠던지…. 1950, 60년대는 나라가 가난해서 조국을 위해 싸우다 불구가 된 그들에게 호구지책을 세워주지 못했다. 악에 받친 그들은 가는 곳마다 울분을 토하며 행패를 부렸다. 그러면 주민들은 물론 경찰도 무서워서 슬금슬금 피했다. 서석면을 통틀어 천주교 신자는 안드레아 형제 한 명뿐이었다. 그의 부인도 신자가 아니었다. 주민들은 "천주교라는 걸 처음 들어본다"며 무슨 신흥종교 대하듯 했다. 주민들은 불교와 유교를 믿었다. 터줏대감, 산신령, 서낭당, 손각시(처녀귀신), 아들바위(소원을 들어준다는 암석) 등 잡다한 무속에 빠진 주민도 많았다. 그리고 마을마다 자리 잡고 있는 단골무당들은 "예수 믿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소문을 내고 다녔다. 경험도 없는 내가 이토록 터가 센 마을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모든 게 피난살이할 때보다 더 어려워 보였다. 신부님이 공소에 오셨기에 용기를 내서 말씀드렸다. "부족한 게 많아서 여기서 일할 자신이 없습니다." 신부님은 한참 생각하신 후에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참아보세요. 보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잘 될 겁니다"하며 다독여 주셨다. 그날 저녁기도를 마치고 성경을 펼쳤다. 탈출기 3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하였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누가 사람을 말 못하게 하고 귀먹게 하며, 보게도 하고 눈멀게도 하느냐? 나 주님이 아니냐? 그러니 이제 가거라. 네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탈출 3,10-4,11). #한밤중 외딴 길에서 맞닥뜨린 나병환자들 복음을 묵상하면서 크게 깨달았다. 콕 집어 내게 하시는 말씀 같았다. 그 순간 용기가 솟았다. 다음날부터 서석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에 속하는 생곡리 생비라는 마을까지 오르내리면서 천주교를 알렸다. 하반신을 나라에 바친 25살 연 안드레아 형제는 나머지 상반신을 하느님 사업에 바치겠다는 각오로 선교활동을 도와줬다. 하느님은 착하고 부지런한 예비신자와 협조자를 많이 보내주셨다. 서석면 생곡1리 교우집에 집회소를 정하고 주1회씩 예비신자 교리교육을 할 때다. 낮에는 농사일이 바빠 밤에 모여 교리공부를 하다보면 밤 11시에 끝이 났다. 아무리 선교사라고 해도 젊은 여자 몸으로 밤길 6㎞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게 쉽지 않았다. 고맙게도 황 사무엘(19살)과 심 사베리오(18살)가 보디가드처럼 밤늦게 데리러 왔다. 어느 추운 날 밤, 황 사무엘이 혼자서 나를 데리러 왔다. 얼굴이 새파랗게 얼었다. 우리는 밝은 달빛을 손전등 삼아 매서운 바람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검산리 아들바위를 돌아서니까 도로 한가운데서 몇 사람이 화톳불을 피워놓고 불을 쬐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교통사고 사망자의 시신을 지키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때는 객사(客死)하면 시신을 집에 들여놓지 않았던 터라 길에서 그런 광경을 더러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깜짝 놀랐다. 장날마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나병환자들이었다. 나병환자들이 몹쓸 짓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시절이다. 장날에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광경도 실제 보았다. 발길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남장을 할 겨를도 없었다. 사무엘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큰일 났어요. 이쪽에 여자가 있는 걸 본 것 같아요." 도로 오른쪽은 가파른 산이고, 왼쪽은 낭떠러지였다. 그야말로 피할 곳 없는 외나무다리였다. "회장님, 지금이라도 돌아가요. 빨리 뛰면 돼요." 나는 마음을 다잡고 독백처럼 말했다. "아냐, 늦었어. 그냥 땅만 보고 지나가." 그 순간 무리에서 한 사람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고 소리쳤다.(계속)조은일2012.07.17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42)] 19.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개혁과 의의)](//cpbc.co.kr/CMS/newspaper/2011/12/rc/398042_1.2_titleImage_1.jpg)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42)] 19.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개혁과 의의)교회 개혁, 쇄신으로 가톨릭 정통 교리 확립 ▨ 공의회 이후 개혁 1545년 12월 13일에 개회한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 12월 4일 폐회하기까지 18년에 걸쳐 25차 회기를 통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교리 문제와 교회 개혁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에서 마무리하지 못하고 사도좌에 넘긴 사안들이 있었습니다. 신앙에 폐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이른바 금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 공의회에서 결정한 교리와 전례에 따라 교리서와 미사경본을 간행하는 일,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위한 기도서 성무일도를 발간하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비오 4세 교황은 1564년 3월 칙서릍 통해 공의회에서 준비한 자료를 토대로 금서 목록을 간행합니다. 이어 공의회 결정들을 올바로 해석하고 시행하는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 해석 추기경 위원회'를 구성합니다. 비오 4세는 또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들, 신학자들이 휴대할 수 있도록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리를 요약한 「트리엔트 신앙 고백」을 발간합니다. 나아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규정과 어긋나는 모든 특전이나 관면, 권한 등이 폐지됐음을 공식으로 선포합니다. 1565년 12월 9일 비오 4세 교황이 선종하고 후임 교황에는 로마 종교재판관으로 이름을 떨친 보스코 바렌고 추기경이 선출됩니다. 그가 성 비오 5세(재위 1566~1572) 교황입니다. 종교재판관으로 이단 척결에 단호함을 보여 유화적인 선임 비오 4세 교황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지만, 비오 5세 교황은 선임 교황의 개혁 노선을 따라 공의회와 선임 교황이 남긴 과제를 계속 수행해 나갑니다. 본당 신부들을 위해 가톨릭교회의 주요 교리와 규범인 「로마 교리서」를 발간했으며,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위한 기도서 「로마 성무일도」를 간행했습니다. 「로마 미사경본」도 간행, 서방 교회 전체가 통일된 로마 전례로 미사를 거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비오 5세 교황은 교황청을 수도원처럼 꾸며 검소하게 생활하고 공의회에서 결정한 성직자 상주 의무를 엄격히 적용해 장기간 임지를 비우는 주교들에게는 사목직과 성직록을 박탈하기도 했습니다. 공의회의 개혁 정신은 비오 5세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재위 1572~1585) 때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달력 그레고리오력을 도입한 교황으로도 잘 알려진 그레고리오 13세는 상주 교황대사 제도를 도입, 교황대사들을 통해 트리엔트 공의회 개혁 교령들이 지역 교회에서 제대로 시행되는지 지도, 감독토록 했습니다. 이를 통해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이 유럽 각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또 로마에 신학원을 재건하는 것을 비롯해 여러 신학원을 신설 또는 통합 확대해 공의회에서 역점을 둔 성직자 양성 교육을 뒷받침했습니다. 그레고리오 13세 후임 교황 식스토 5세(재위 1585~1590)는 공의회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머리 개혁' 곧 교황청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식스토 5세는 1588년 1월 반포한 교황령을 통해 15개 성으로 이뤄진 교황청 편제를 확립했습니다. 9개 성은 보편 교회 업무를 , 6개 성은 교황국 통치를 담당토록 했습니다. 이에 앞서 1585년 12월 교황과 주교들과의 일치 증진을 위해 사도좌 정기방문(앗리미나, ad limina)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와 인접 국가들 주교들은 3년에 한 번, 그밖의 유럽 주교들은 4년에 한 번, 아메리카 같은 나머지 지역 주교들은 5년에 한 번 로마를 방문해 지역 교회 상황을 보고하며 신앙의 유대를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시행되고 있는 앗리미나가 이때 처음 시작된 것입니다. 교황들의 개혁 못지않게 지역 교회 주교들도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노선에 따라 교회 생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교구 신학교 설립, 주일 및 축일 강론, 주교들의 임지 상주 및 교구 순시 같은 사목 조치들이 각 교구에서 이뤄졌습니다. 특히 교황 비오 4세의 조카로서 밀라노 대교구장을 지낸 성 가를로 보로메오(1538~1584) 추기경은 개혁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는 공의회 개혁의 효과적 실현을 위해 대교구를 12개 지역으로 나눠 교구장 대리들에게 맡기면서 그들에게 실질적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사제 양성을 위해 신학교와 부속 소신학교를 세우고 별도로 교리학교도 세웠습니다. 보로메오 추기경이 교회 개혁 내용을 요약해 1582년에 간행한 「밀라노 법령」은 스페인과 프랑스 지역 교회들에 유용한 길잡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의의 19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트리엔트 공의회는 무엇보다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 주장에 맞서 가톨릭 정통 교리를 확립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공의회는 은총과 의화 교리, 원죄 교리, 성경 경전, 성체성사와 실체변화, 일곱 성사와 전례, 연옥 교리 등 가톨릭교회의 주요 교리를 정립했습니다. 주요 교리와 관련해서 일부 부족한 점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교회론과 교황 수위권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교황 수위권 문제를 제대로 다룰 상황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지닙니다. 공의회 우위설이라든가 또는 주교들도 교황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게서 권한을 직접 받았다는 주교 신수설 같은 이론들이 당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자칫하다가는 공의회가 파국으로 끝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공의회는 또 프로테스탄트들의 개혁에 맞서 개혁 교령들을 통해 가톨릭 개혁과 쇄신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개혁 교령들은 철저한 개혁을 부르짖는 진보적 주교들과 전통을 고수하려는, 특히 머리인 교황청 관리들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지만 그럼에도 교회 생활의 폐해와 악습을 청산하고 제도와 규율을 정비해 개혁과 쇄신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석이 됐습니다. 한편에서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이 머리(교황청)보다 지체(지역 교회와 본당, 수도회) 개혁에 그쳤다는 지적도 있지만 공의회 이후에 개혁 성향들의 교황들이 잇따라 선출돼 공의회의 개혁 노선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발표한 수도생활에 관한 개혁 교령과 자선 활동에 대한 권면 등은 기성 수도회들의 개혁을 촉발시키는 한편 사회복지와 자선 사업에 투신하는 새로운 수도회들을 탄생시키는 데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혁 수도회인 맨발의 가르멜회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실천을 쇄신하는 밑거름이 됐고 이후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릴 때까지 거의 400년 동안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조은일2011.12.06

“파병 장병들과 함께 남수단에 더 좋은 삶 선사하고 싶습니다”[남수단에서 온 편지] - (하) 평화·긴장 공존하는 곳에서 만난 예수님 한빛성당 세례식 기념 및 교우 공동체 단체사진. 여 신부는 6월 부대 내 한빛성당에서 7명의 예비신자 군인들에게 세례를 주는 기쁨이 있었다고 전했다. 아프리카 남수단 보르 지역에는 현재 남수단재건지원단(이하 한빛부대) 21진이 파병되어 있다. 이 부대에는 여상민 신부가 군종장교(육군 소령)로 파병돼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한빛부대는 유엔 평화유지활동(UN PKO)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로 2013년 1월 창설됐다. 보르성당에서 이노센트 신부님, 앤서니 신학생과 함께. 한빛부대는 주둔지 인근 보르 성 바오로 성당에 학용품과 생활용품들을 비롯한 물품을 지원하고 있다. 한빛부대 제공 환한 미소 뒤 숨겨진 가난의 고통 남수단에서의 생활에서 현지 주민들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단독으로 직접 활동하고 찾아다니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 유엔 기지 내에서 함께 일하는 현지 고용인들과의 만남 또는 부대 출장, 위문활동 과정 안에서 이따금 만남이 허락되기도 합니다. 우리 장병들을 위해 파견된 군종신부 역할이 우선이지만, 동시에 보편 교회 사제로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 대한 목자적인 마음가짐을 꺼내볼 수 있는 귀한 순간이지요. 그래서 이분들과도 마찬가지로 시원한 커피와 빙수를 함께 나누며 서로 엄지척 ‘따봉’으로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그 뒤로 저를 만날 때마다 손을 흔들며 ‘피터!’(베드로)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 모습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렇게 강복을 드리고 나서 기분 좋게 하늘을 올려다보면, 오히려 제가 강복받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얼마 전 부대 인근에 위치한, 지역사회의 교육 거점 역할을 함께 수행하고 있는 보르 성 바오로 성당에서 학용품과 생활용품들을 비롯한 물품 공여식이 있었습니다. 마침 장소가 성당이라 저로선 현지 주민들을 만나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승인을 받아 성당에 기증할 묵주와 영한 성경을 준비해 함께 다녀왔습니다. 철창 안에 계신 성모님. 보르 성당 측은 도난 방지를 위하여 강화유리와 울타리로 둘러놓았다. 콩고에서 선교 사제로 이곳에 오신 이란지 마주네 이노센트 신부님과 앤서니 신학생을 중심으로 남수단 교우들이 환한 미소로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성당 교육관에서는 재봉틀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직업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고, 비록 성전은 노후하였지만 감실 속 예수님은 온화하게 미소 짓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현지인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며 성령으로 하나 되는 친교를 경험하는 뜻깊은 시간을 잠시나마 가질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한국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모습에서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우리 군과 유엔(UN)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의 이러한 미소 속엔 여전히 굶주림과 가난의 고통이 숨겨져 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는 아이들 뒤로 초소 같은 작은 건물이 하나 보였습니다. 가서 살펴보니 성모상이었습니다. 도난 방지를 위해 강화유리와 울타리로 둘러놓은 것이지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단에는 ‘QUEEN OF PEACE(평화의 모후)’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초소에 갇혀 계신 성모님과 그 앞에서 공을 차며 뛰놀던 예쁜 눈망울의 아이들, 평화와 긴장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여상민 신부는 성모님께 이 땅의 모든 이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매일 밤 묵주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은총과 보호를 청한다고 말했다. 묵주를 받고 기뻐하는 현지인들. 건빵 주머니에 두둑하게 넣어둔 묵주 남수단에는 그동안 수많은 선교사들의 노력 덕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으며, 그 중에는 성당을 다니는 신자들도 꽤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 항상 건빵 주머니에 후원받은 묵주를 두둑이 넣어두고, 만나는 이들 중 신자가 있다면 강복과 함께 나눠주거나, 혹은 대외 작업에 투입되는 우리 군인 신자들을 통해 묵주를 나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우려 섞인 목소리를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혹여 신자인 척 받아다가 시장에서 장신구처럼 되파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축복받은 성물은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기에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팔아서라도 그 사람의 굶주림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수 있다면, 이곳에서만큼은 이 또한 선교지에서 사람을 살리는 새로운 묵주 기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떠나간 묵주는 성모님께 맡겨드리기로 했습니다. 자애로우신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그 묵주를 만나는 이가 누구든, 고요히 “사랑한다 얘야”하고 속삭여주시겠지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라고 하신 주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여전히 기회가 닿을 때마다 만나는 이에게 강복을 주고 묵주를 선물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이 땅의 모든 이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매일 밤 묵주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며 은총과 보호를 청하곤 합니다. 여 신부가 촬영한 수호천사 같은 형상의 신기한 구름. 그는 하느님께서 한빛 부대원과 남수단 주민 모두에게 축복이 내리기를 기도했다. 현지에서 열린 선물 같은 세례식 따라서 저의 사목적 목표는 부대원들을 대상으로 현지 종교행사 및 위문활동과 같은 군종 업무를 통해 우리 군인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이를 통해 유엔 평화유지군으로서 남수단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6월 부대 내 한빛성당에서 7명의 예비신자 군인들에게 세례를 주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출국 전 시작된 교리공부 끝에 이뤄진 아프리카 현지 미사와 세례식은 그야말로 감동이었고, 저를 비롯한 교우 공동체 모두에게 선물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자랑스러운 청년들에게 신앙의 힘을 더해줌으로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장병들을 계속해서 양성해나가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선교인 것 같습니다. 우연히 수호천사 같은 모습의 신기한 구름도 촬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 한빛 부대원과 남수단 주민 모두에게 축복을 내려주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사기를 끌어올리고, 보이지 않는 가교 역할로 남수단 주민들의 삶에 기여하는 파병 사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저희 한빛부대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 파병되어 활동 중인 우리 국군 장병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 부탁드립니다. 저 또한 멀리서 이 글을 보시는 모든 교우 여러분의 영육 간 건강을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멘. 남수단재건지원단 한빛부대 21진 /천주교 한빛성당 군종장교 소령(진) 여상민 베드로 신부cpbc2026.10.06

성경 입문 (2) 신약성경 개요[월간 꿈 CUM] 약속 _ 신약이 말을 건네다 (02) Q. 신약성경에는 몇 권의 책이 있습니까? A. 신약성경에는 27권의 책을 포함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① 복음서 :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복음서 ② 사도행전 ③ 13개의 바오로 서간들 :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로마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둘째 서간( 코 린 토 1·2 서 ) ,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갈라티아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페소 서),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필리피서),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콜로새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둘째 서간(테살로니카 1·2 서) ,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둘째 서간(티모테오 1·2 서) , 티토에게 보낸 서간(티토서),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필레몬서). ④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히브리서) ⑤ 7개의 가톨릭 서간들 : 야고보 서간(야고보서), 베드로의 첫째, 둘째 서간(베드로 1·2 서) , 요한의 첫째, 둘째, 셋째 서간(요한 1·2·3 서) , 유다 서간(유다서). ⑥ 요한 묵시록 Q. 지금의 신약성경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정경으로 확정되었습니까? A. 지금의 27권으로 된 신약성경이 1세기 말에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책을 정경에 포함시킬지 고민하였습니다. 처음 정경 범위를 규정한 사람은 영지주의 이단(異端) 마르키온(Marcion, ?~160년경)으로서, 그는 그리스도교 성경에 루카 복음과 바오로의 열 서간-히브리서, 1·2베드, 3요한, 야고보서 제외-만을 포함시키고, 그 밖의 다른 사도 시대 작품과 구약성경은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현존하는 최초의 신약 정경 목록은 18세기에 이 문서를 발견한 이탈리아 학자 무라토리(L.A. Muratori)의 이름을 딴 ‘무라토리 정경’(Canon Muratori)입니다. 라틴어로 기록된 이 목록의 필사본이 단편으로 남아있으며 200년경 로마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목록은 현 신약 성경 27권 중 22권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1·2서 요한3서 제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27권 정경을 주창한 그리스도인의 저서 가운데 최초 문서는 367년 알렉산드리아 주교 성 아타나시우스의 제39차 부활축일 서간에 정경 목록이 담겨있습니다. 이후 397년 제3차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최초로 27권 신약성경을 공식적으로 승인, 선포하였습니다. Q. 성경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경은 무엇입니까? A. 신약성경을 포함한 모든 성경 가운데서 4복음서가 가장 뛰어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4복음서는 우리의 구원자, 사람이 되신 말씀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계시헌장 18항) Q. 복음서란 어떤 책입니까? A. 복음서는 신약성경의 첫 번째 부분으로 4권의 책으로구성되어 있으며, 상세하게 묘사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하여 줍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4권의 복음서들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책들입니다. Q. 복음서들은 어떤 형성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책이 되었습니까? A.복음서의 형성과정은 세 단계를 거쳤습니다. 첫째, 하느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전한 나자렛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케리그마’, 곧 짧은 형태의 설교로 전하기 시작하고, 이와 동시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을 모아 전례와 교리교육과 호교론과 선교에 이용하였습니다. 이 둘째 단계에서 교회가 모은 전승들은 처음에는 대부분 구두 전승이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록된 전승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셋째, 복음서 저자들이 초대 교회가 간직해온 다양한 예수님 관련 전승들을 입수해서 저마다 그분의 가르침을 자기네 공동체의 상황에 적용할 목적으로 고유한 복음을 썼습니다.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등의 주임을 지냈다. cpbc2024.02.05

기도생활 어떻게 하면 잘할까성경·교부 전통 따라 기도 방식·장소·시간 등 안내 수행 / 가브리엘 붕게 신부 / 분도출판사 “거룩한 교부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란, 주일의 의무를 어느 정도 충실하게 이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생 동안 날마다 수차례 기도드리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식사와 수면, 숨쉬기 등 삶에 필요한 여러 기능을 규칙적으로 수행하듯이 자신의 신앙을 규칙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영적 활동’은 오직 끊임없는 실천(수행)을 통해서만, 방금 언급한 기능들처럼, 자명하게 보이는 자연스러움에 이를 수 있다.”(84쪽) 신앙인에게 ‘기도’는 가장 익숙하면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베네딕도나 이냐시오 성인이 가르쳐 준 기도 방법을 비롯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성경과 교부 전통에 충실하면서 개인이 기도드리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책은 흔치 않다. 「수행 : 교부들에게 배우는 기도 생활」은 성경과 교부 전통에 따라 기도하는 장소와 시간 및 기도하는 방식과 자세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질그릇 : 거룩한 교부들의 전통에 따른 개인 기도의 실천」으로, 저자는 교부들과 사막의 사부들이 기도를 어떻게 이해했고 어떤 방식으로 생활화했는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일상에서 개개인이 기도를 실천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보고서는 아무도 새 포도주를 원치 않는다’에서는 전통의 중요성, 영성과 영성 생활, 활동과 관상, 시편 기도와 묵상을 소개한다. 둘째 부분 ‘장소와 시간’에서는 개인 기도를 바치기 위해 적합한 장소와 환경 및 기도하는 방향 등을 다루며, 셋째 부분 ‘기도하는 방식’에서는 분노나 생각으로부터의 자유가 수행적 방식의 기도에서 나오는 열매임을 지적하며 여러 유형의 수행적 기도 방식을 설명한다. 마지막 ‘기도하는 자세’에서는 몸의 중요성을 환기하며 일어서서 드리는 기도, 손을 들어 올려서 드리는 기도, 시선을 하늘로 향해 드리는 기도,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서 드리는 기도 등을 소개한다. 부록으로 실은 ‘실천적 조언’은 기도를 드리기에 올바른 장소와 환경을 조성하는 일, 기도를 드리는 시간, 시편 기도, 기도하는 방법과 자세 등을 요약했다. 저자는 기도의 방법을 설명하면서 성경과 전승의 근거도 함께 제시한다. “외적인 자세는 내적 태도를 육체적으로 표현할 뿐 아니라 내적 태도에도 직접 영향을 끼친다. 하느님 앞에서 서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그만큼 경외심도 커진다. 서 있으려고 애쓰지 않고 다른 기도 자세들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결코 합당한 열정을 얻지 못할 것이며, 요셉 부스나야가 말한 것처럼 ‘대개 차갑고 얕은’ 상태에 머물고 말 것이다.”(167쪽) 저자 가브리엘 붕게(1940~) 신부는 독일 출신의 러시아 정교회 수도승 사제로, 독일 본에서 철학·역사·신학을 공부했고, 스위스 베른대학교에서 고대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 벨기에 셰브토뉴의 성 십자가 수도원에 입회했고, 1980년 이후 스위스에서 은수자로 지내고 있다. 저자는 “이 모든 수행(실천)은 깨지기 쉬운 ‘질그릇’에 담겨 우리에게 전해 오는 소중하고 썩지 않는 보물이며,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보이지 않는 ‘보화’”라며 “우리는 기도하는 대로 믿고 믿는 대로 기도하며, 올바르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머지않아 올바르게 믿지 않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하정 기자신문취재팀 윤하정2024.10.02

영지주의 등 이단으로부터 정통 신앙 지켜[저는 믿나이다] (42) 리옹의 성 이레네오 주교 리옹의 성 이레네오 주교는 영지주의를 비롯한 당대의 많은 이단으로부터 교회의 사도 계승의 정통성을 지켜가는 데 공헌했다. 리옹의 성 이레네오 주교 이콘. 출처=정교회 온라인 매체 Pemptousia 성 유스티노가 교회 외부의 박해자들을 상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보편성과 우월성을 이론적으로 제시해 우상 숭배와 다신교를 논박하면서 교회를 보호하는 데 공헌했다면, 교회 내부의 갈등을 조장하고 분열을 가속시키던 이단에 맞서 교회를 보호한 대표적인 호교 교부가 있습니다. 바로 리옹의 성 이레네오 주교(130/140?~202년께)입니다. 물론 유스티노 역시 「호교론」을 통해 이단을 반박했습니다. 리옹의 성 이레네오 주교는 당시 교회 내 깊숙이 들어와 있던 영지주의자들을 상대로 성경 정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이단 사상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쳐 정통 신앙을 확립하는 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사도와 사도 교부 시대 이단에 관해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2세기 교회 안에서는 영지주의와 마르치온주의, 몬타누스주의 등 여러 이단이 성행했습니다. 간략히 상기하자면, 영지주의는 2~3세기 교회를 뒤흔들던 사상으로 영과 육의 철저한 이원론 위에 세워진 이단입니다. 그들은 죽은 이의 부활은 없으며,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했지요. 더불어 십자가 죽음도 부활도 아무 의미 없고, 인간이 구원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획득한 ‘깨달음’ 덕분이라고 했지요.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느님과 주님의 은총, 초월성을 조정할 수 있다고 여겨 그리스도 없는 하느님, 교회 없는 그리스도, 하느님 백성 없는 교회에 이르게 했습니다. 또 인간은 악한 본성에 대해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다며 방탕하게 살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마르치온주의는 구약의 하느님을 ‘복수의 하느님’, 신약의 그리스도를 ‘선한 하느님’으로 대립시켜 구약의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암시하는 내용이 있으면 모두 삭제해 루카 복음서 일부와 바오로 사도의 서간 일부만을 신약 성경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해 강생의 신비를 거부하는 왜곡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제시했습니다. 더불어 영지주의와 반대로 철저한 ‘금욕 생활’을 강요해 혼인을 거부했으며, 금주(禁酒)를 지키기 위해 성찬례 포도주 사용조차 배제했습니다. 몬타누스주의는 자신들이 ‘성령의 대변인’이라 주장하며 곧 종말이 오니 페푸자에 새 예루살렘을 세워 천년왕국을 맞기 위해 깨어 준비해야 한다며 잦은 금식과 철저한 금욕, 순교를 강요했습니다. 이밖에 에비온파, 니콜라이파 등 각가지 이단이 성행했습니다. 성 이레네오는 5권으로 구성된 저서 「이단 논박」을 통해 거짓된 영지주의를 비롯한 여러 이단의 실체를 낱낱이 고발하고, 정통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땅 끝까지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교회는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신앙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시편 145,6; 사도 4,24; 14,14) 전능하신 아버지이신 한 분 하느님과, 우리 구원을 위하여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들 한 분 예수 그리스도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미리 말씀하신 성령과, 주님의 재림과, 동정녀로부터의 그분의 탄생과, 수난과, 죽은 이들에게서의 부활과, 우리의 사랑하는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육으로 승천하심과, 모든 것을 한데 묶어 ‘포괄’하여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기 위하여(에페 1,10) 아버지의 영광 안에 하늘에서부터 그분의 재림과, 그리고 인류의 모든 육체를 부활시켜,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느님이시며 구세주이시고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모두 그분을 고백한다는 것과(필리 2,10), 모든 것에 대해 정의로운 판결이 이루어진다는 것과, 악령들과(에페 6,12)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천사들과 배교자들, 불경한 자들, 불의한 자들, 부정한 자들과 하느님을 모독한 자들은 영원한 불 속으로 보내신다는 것과, 의로운 이들과 공정한 이들과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어떤 이는 처음부터 어떤 이는 참회에 의해 그분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는데, 선물로 썩지 않는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찬란함으로 둘러싸 주실 것에 대한 신앙이다.”(「이단 논박」 1,10,1-신앙의 규범. 「고대 교회사 사료 편람」 황치헌 신부 역, 181쪽) 이레네오 주교는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을 제외한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 요한의 서간들과 묵시록, 베드로의 첫째 서간 그리고 헤르마스의 「목자」를 신약 성경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당시는 교회가 아직 신약 성경 정경을 확정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네 복음서를 상징하는 네 생물(사람·사자·독수리·황소)을 제시한 이도 바로 이레네오 주교입니다. 이레네오 주교는 무엇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쓰였으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사도들을 계승하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더불어 그는 이단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아니기에 근본적으로 진리의 은사를 지닐 수 없다고 반박하며 보편 교회의 정통성을 보호하는데 헌신하였습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5.09.02

‘사제 부재’ 초기 교회, 미사·성사 집전한 지도자들[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10) 가성직제도 1 이승훈과 권일신, 정약용, 이존창, 유항검 등 교회 지도자들은 미사와 성사를 통해 신입 교우들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1786년 가을부터 가성직제도를 시행한다. 탁희성 작, ‘가성직제도’, 지본채색, 1988. 1785년 3월 ‘명례방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있은 후 여러 양반 집안에서 가톨릭 신앙에 심취해 있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초기 조선 교회의 두 기둥이었던 이벽(요한 세례자)과 이승훈(베드로, 당시 29세)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아버지 이부만에 의해 집에 감금된 이벽은 그해 7월께 전염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이승훈도 사랑방으로 끌려가 아버지 이동욱에게 ‘벽이문’과 ‘벽이시’를 짓고 앞으로 영원히 이단을 물리치는 데 앞장서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그러나 이승훈은 자신의 신앙을 쉽게 버리지 않았다. 달레 신부는 이때 조선 교회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작은 양 떼의 신앙은 잠시 흔들리기는 하였으나 아주 꺼지지는 않았었다. 천주교인 집단이 그 교우 중의 몇몇이 배교함으로 말미암아 슬픔에 잠겨 있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대부분 신자가 흔히는 재판관과 형리들의 박해보다도 더 참아 받기 어려운 집안 박해 가운데에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위로를 받았다. 입교자 수는 늘어갔다.”(「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21쪽) 피정 통해 하느님과 만난 권일신과 조동섬 한양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정 박해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경기도 여주 한감개에 있던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당시 43세)이 초기 조선 교회를 이끌었다. 그는 마치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성령의 인도로 40일간 광야에서 머무셨던 것처럼 먼저 얼마 동안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조동섬(유스티노, 당시 46세)과 함께 경기도 양평 용문산의 적막한 절에서 예수회 선교사 드 마이야 신부가 쓴 「성경광익」(聖經廣益)과 「성년광익」(聖年廣益)에 적힌 대로 8일간 영신수련 피정을 했다. “그는 그의 유일한 스승이었던 성령의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고자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성화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 알았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규칙적인 피정을 할 결심을 하고, 자기의 계획을 더 쉽게 실천하기 위하여 용문산에 있는 어떤 적막한 절로 들어갔다. 친구 중에서는 오직 한 사람 조동섬만이 그를 따라갔다. 절에 도착하여 그들은 피정 동안에는 내내 서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들은 우리 주님과 성인들을 본받고자 하는 원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신심 수업에만 전심하면서 절에서 8일을 지냈다. 진정한 천주교 정신에 잘 맞는 이러한 실천은 그들 자신과 그들이 피정 후에 가르친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얻게 하였음이 확실하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22쪽) 이승훈에게 위임된 미사·성사 집전 권한 이승훈은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차츰 잊히고 아버지의 단속도 점차 옅어지자 즉시 교회 품으로 돌아왔다. 권일신, 최창현(요한, 당시 26세), 홍낙민(루카,당시 34세),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당시 29세),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당시 26세), 정약전(당시 27세)·약용(요한 사도, 당시 23세) 형제가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아들였다. 교회 지도자들인 이들은 1786년 봄 한양 회현방 난동(오늘날 회현동) 정약용의 집에서 신앙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복음을 더욱 쉽게 선포하고 새 영세 교우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할 방안을 논의했다. 이승훈은 이 자리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선 성사를 받아야 하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할 사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북당에서 미사와 성사를 신부가 주례하며 자신도 사제로부터 직접 성사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승훈의 말을 들은 교회 지도자들은 가톨릭 교리서 내용을 살펴보고 우선 ‘고해성사’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한 교우가 다른 교우에게 고해성사를 볼 수 있으나 서로 맞고해를 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들은 1786년 가을에 다시 모였다. 미사와 세례·견진성사 집전을 주제로 논의했다. 아무리 교리서를 뒤져봐도 미사와 세례·견진성사 집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뜻을 같이해 이승훈에게 미사와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일을 위임했다. 자발적인 교회 설립, 불가피했던 가성직제도 이승훈은 경기도의 권일신, 충청도의 이존창, 전라도의 유항검, 한양에 사는 정약전과 홍낙민 등 10명을 신부로 뽑아 임명하고 미사와 성사 집전 권한을 부여했다. 또 최창현을 비롯한 남녀 10여 명을 ‘부제’ 격인 ‘회장’으로 임명하고 교회 일을 돕도록 했다. 보편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초기 조선 교회의 ‘가(假)성직제도’가 이렇게 1786년 가을에 수립됐다. 가성직제도에 대해 차기진(루카, 양업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박사는 이렇게 평한다. “지도층 신자들은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한 어린 교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새로 진리를 찾아 교회로 들어오는 예비 신자들에게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 준다는 순수한 목적에서 성직 제도를 수립한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혹 이것이 잘못은 아닌가’하는 의심이란 있을 수 없었다. 조선의 젊은 학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교회, 선교사의 가르침이 아니라 서적을 통해 진리를 찾은 신앙 선조들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특징이자 한계성이었다.”(「고난의 밀사」 59쪽)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6.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