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교육 본보기' 세운 강석준 신부, 논산대건고 교장 퇴임"전인교육의 길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복음에 비춰 바라보고 성찰케 하는 교육이 중요합니다." 대전교구 강석준 신부 하면, 'PESS 전인교육 프로그램'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학생들의 신체적(Physical), 정서적(Emotional), 영성적(Spiritual), 지적/봉사적(Study & Service) 측면을 균형있게 개발함으로써 전인적 인간으로 길러내고자 그 첫 글자를 따와 PESS 프로그램을 만든 주인공이어서다. 논산대건고를 '공교육의 본보기'로 떠오르게 한 강 신부가 8월 27일자로 정년퇴직했다. 그렇지만 퇴임 후에도 계룡시에 있는 '(사)PESS청소년교육연구소' 대표로 여전히 교육의 길을 걷는 강 신부를 11일 만나 그간 살아온 얘기, 특히 청소년사목에 대한 소회와 생각거리를 들었다. 사제로 산 34년 중 3분의 2가 넘는 24년 6개월이라는 세월을 아이들과 함께 부대낀 강 신부는 "행복했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교육이론이라고는 아는 게 없는 나에게 유일한 멘토는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느님 말씀, 특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비춰 판단하고 실천하니까 하느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두려움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저 아이들을 좋아했기에' 뼈를 묻을 각오로 들어간 교육현장은 가톨릭학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입시'에 찌들어 있을 뿐 가톨릭 교육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사제가 왜 학교에 와 있는지, 교육을 왜 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원칙은 성경 안에서 찾았다.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1테살 5,23)에서 힌트를 얻어 PESS 전인교육 프로그램을 고안해냈다. '영성이 중심이 되는' 전인교육이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영적 체험)과 그리스도에 관해 아는 것(지적 체험)이 다르다는 데 착안, 살아있는 지식이 되도록 하는데 중점을 뒀다. 1995년은 강 신부의 교육인생에 분기점이었다.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그는 인성교육을 시도했다. 맨 처음 시도한 건 아이들 능력에 맞는 '수준별 이동수업'. 결과는 놀라웠다. 공부를 포기했던 아이들은 새롭게 시작했고, 잘하던 학생들은 더 잘하게 됐다. 7차 교육과정을 준비하던 교육부는 자신들이 추진하던 개혁안을 이미 이름도 없는 시골학교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다는 데에 더 놀랐다. 그로부터 논산 대건고가 교육개혁의 모델이 됐다. 이어 지식을 내면화하는 작업, 곧 의식 계발에 들어가 영성이 중심이 된 인성교육을 시도했다. 그 핵심은 피드백(Feedback). 'SQ(Spiritual Quotient, 영성 지수) 리더십 프로그램'을 개발해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 또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숙고하게 하고 기록하도록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생각도 한층 깊어지고 확대됐다. 생각하는 문화, 함께하는 문화는 자연스럽게 학내 폭력이나 집단따돌림 같은 고질적 병폐를 불식시켰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많은 걸 배웁니다. 배우는 걸 반으로 줄이고 배운 걸 내면화시켜 의식 수준을 끌어올려야 생명력 있고 살아있는 지식, 곧 자기 것이 됩니다. 외워서 뭐하려고요. 스마트폰에 다 있습니다." 그래서 강 신부는 입시제도에서 '좋은 학생'의 개념을 바꾸라고 한다. 지식 평가가 아닌 의식 수준을 평가하는 쪽으로 가야 하고, 그래야 학교가 의식 계발에 치중하는 교육을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다는 것. 강 신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학교뿐 아니라 주일학교도 바꾸라"고 강조한다. 단순한 교리지식 전수 수준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도록 주일학교 교육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시 궁동본당 주임으로 2년간 사목할 당시 주일학교에 PESS 프로그램을 적용, 본당 안에 '청소년교회'를 만들어 교리교육 프로그램을 바꾸고 청년ㆍ대학생과 초ㆍ중ㆍ고 생이 별도로 사목위원도 뽑고 예산안도 세워 집행하는 사목적 실험을 하기도 했다. 강 신부는 이제 PESS청소년교육연구소 누리방(http://pess.kr/rb/)을 본당 주일학교 누리방과 연동시켜 주일학교 교육 패러다임을 바꾸는 시도를 해보고 싶다고 한다. 거기에 PESS 프로그램에 관한 앱과 같이 영성을 나누는 툴(Tool)을 개발해 사회적 전송망 시스템(SNS) 같은 공간에서 하느님 말씀을 공유하고 말씀 묵상을 나누는 방법도 구상하고 있다. 그리고 PESS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본당 공동체도 꿈꾼다. "우리나라는 교육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 데 비해 교육 현실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방향 설정이 잘못돼 있기에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빨리 망가집니다. 교육자들은 아이들의 재능을 키워주는 조건만 만들어주면 됩니다. 창의적 사고를 하게 하려면 아이들이 자신의 한계에 부딪힐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고 고민하게 하면 됩니다. 그래서 피드백이 중요하고, '아! 체험'이 중요합니다. 이런 창의성 교육은 주일학교나 청소년사목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cpbc2013.09.24
[출판]교부들의 성경주해-신약성경IV 루카복음서(아서 A. 저스트 2세 엮음/이현주 옮김/분도출판사/4만 8000원) 「교부들의 성경주해」 총서 중 신약성경 루카복음서를 다룬 책이다. 초기 교부들의 눈을 통해 루카복음을 살펴보고 있다. 교부들은 설교와 저술, 사목서간, 교리 강의 등을 통해 루카복음서를 해석하고 가르쳤다. 이는 루카복음서 주해 목적이 처음부터 신학적이며 사목적이었음을 말해준다. 밀라노의 암브로우스, 아타나시우스, 아우구스티노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다마쿠스의 요한, 마부그의 필록세누스, 테오필락수트 등 1~8세기 동방과 서방에서 활동한 주요 교부들 문헌을 수록했다. 책에 실린 문헌 발췌문 대부분은 한국어로 처음 번역된 것들이다. 부록으로 루카복음서에 인용된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와 문헌, 교부시대 저술가들의 시기 및 지역별 일람표, 인용 저술가의 약전과 익명작품 개요 등이 실렸다. 박수정 기자박수정2011.06.14
![[출판] 일치의 성사-성체성사와 교회 -주님 만남과 일치로 이끄는 성체성사](//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1330_1.1_titleImage_1.jpg)
[출판] 일치의 성사-성체성사와 교회 -주님 만남과 일치로 이끄는 성체성사전 일치평의회 의장 카스퍼 추기경, 성체성사 다양한 측면 다뤄 일치의 성사-성체성사와 교회(발터 카스퍼 지음/조규만ㆍ조규홍 옮김/분도출판사/9500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3년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를 발표하며 성체성사가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은 물론 교회 전체의 삶의 원천이자 중심이며 절정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듬해엔 '성체성사의 해'를 선포, 전 세계 신자들이 성체성사가 지닌 의미를 되새기고 성체성사가 중심이 된 삶을 살도록 독려했다. 옛부터 교부와 신학자들은 성체성사를 일치의 성사로 이해하며 성체성사의 본질을 꿰뚫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일치의 표징이요 사랑의 끈"이라 했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회적 일치의 성사"라고 했다. 이 시대 가톨릭을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하나인 발터 카스퍼(전 교황청 일치평의회 의장, 사진) 추기경은 "교회는 선교를 통해 언제든 성체성사가 본질적으로 항상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2004년 성체성사의 해를 맞아 이 책을 펴내며, 성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는 성체성사와 일치, 성체성사와 교회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독일 로텐부르크-슈트트가르트 교구장으로서 사목 현장에서 보고 느낀 현실과, 교의신학자로서 연구한 이론을 바탕으로 성체성사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봤다. 카스퍼 추기경은 엠마오로 떠나는 두 제자 이야기(루카 24,13-35)를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에 주목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절실한 질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물으며 "성체성사를 거행함으로써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알아보고 체험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그분께 다가가게끔 이끌어 주시는지 하는 물음에 몸소 대답하셨다. 이는 엠마오의 두 제자가 얻은 답과 다르지 않다.… 미사 중에 우리는 그분이 누구이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알아볼 수 있다"(44~45쪽). 빵을 떼어 나누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는 것은 우리도 빵을 떼어 나눔으로써, 즉 나누고 베풂으로써 서로가 그리스도인임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카스퍼 추기경은 남을 밟고 올라서고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현대인의 삶을 경고하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줄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성체성사는 미사를 통해 이뤄지므로 "주일미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알아보기, 성체성사의 참뜻에 따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하기, 그것이 우리의 모토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일치의 성사인 성체성사가 교회일치운동에 어떠한 영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교회일치는 전례일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성체성사에만 집중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일치의 형태적 다양성은 결핍이 아니라 풍요로움의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교회가 추구하는 바도 하나의 획일화된 교회가 아니라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다"(87쪽). 카스퍼 추기경은 이와 함께 성찬 전례 때 나누는 평화의 인사 의미를 강조했다. "성찬 전례 때 우리는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일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심을 증거하는 평화의 축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평화이시다"(163쪽).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조은일2013.07.02
![[덕원의 순교자들]<23> 루페르트 (요셉) 클링자이스 신부](//cpbc.co.kr/CMS/newspaper/2013/12/rc/490218_1.1_titleImage_1.jpg)
[덕원의 순교자들] 루페르트 (요셉) 클링자이스 신부 한국인 사제 양성 못자리 일군 학자 수도자 루페르트(요셉) 클링자이스 신부 (Rupert Klingseis)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1890년 1월 5일 뮌헨 마리아 힐프 ▲세례명: 요셉 ▲한국명: 길세동(吉世東) ▲첫서원: 1911년 10월 8일 ▲종신서원: 1914년 10월 11일 ▲사제수품: 1915년 7월 16일 ▲한국파견: 1930년 11월 9일 ▲소임: 덕원신학교 철학 교수 ▲체포일자 및 장소: 1949년 5월 9일, 덕원수도원 ▲순교일자 및 장소: 1950년 4월 6일, 평양 인민교화소 하느님의 종 루페르트 요셉 클링자이스 신부는 독일에서도 저명한 철학자로 한국인 사제 양성에 평생을 바친 수도자였다. 그는 특히 한국인 신학생들의 학문적 식견을 넓히고 이들을 교수 요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유럽 유학 주선에 노력했고 해방 후 우리말로 강의하기 위해 50이 넘은 나이에도 한국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학자였다. 철학ㆍ신학 박사인 명석한 수도자 클링자이스 신부는 1890년 1월 5일 독일 바이에른 뮌헨의 외곽마을 마리아 힐프에서 태어나 '요셉'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가 굶어 죽었을 만큼 궁핍했지만, 그의 가정은 신앙심 깊은 성가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명석했던 클링자이스는 14살이 되던 해인 1904년부터 마인 강변에 있는 상트 루드비히 소신학교에서 공부했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김나지움으로 옮겨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다. 1910년 가을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입회한 그는 '루페르트'라는 수도명으로 성직 지망 수련기를 시작, 1911년 10월 8일 첫서원을 했다. 그 후 로마 성 안셀모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이어 1914년 10월 11일 종신서원과 1915년 7월 16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1918년 뮌헨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클링자이스 신부는 1922년부터 1930년까지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철학대학 학장직을 맡아 철학 강의를 했고,수도원 부원장직도 함께 수행했다. 1930년 덕원신학교 철학 교수로 있던 크리소스토모 슈미트 신부가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보좌 아빠스로 선출돼 독일로 돌아오자 그를 대신해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가 1930년 11월 9일 덕원수도원으로 파견됐다. 그는 1931년 1월 2일 엘리지오 콜러 신부와 함께 입국해 덕원신학교에서 15년 동안 철학과 윤리신학, 교회사, 라틴어를 강의했다. 그는 한국 이름 '길세동'(吉世東)처럼 한국인에게 조금이나마 더 보탬이 되고자 신학생 양성과 함께 피정 지도도 활발히 했다. 덕원신학교의 수업이 대부분 라틴말로 진행됐지만 그는 한국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요즈음 학교 강의 외에 달마다 한 번꼴로 한국어 강론을 하고 있습니다. 강론 원고를 독일어로 작성해 내가 한국어로 번역한 다음, 곧 사제품을 받을 제자(노규채 아우구스티노)에게 넘겨 주면, 그는 한국인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일일이 문장을 고쳐 줍니다. 그렇게 원고가 완성되면, 유창하게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저 혼자 맹연습을 해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이 일이 조금씩 쉬워질 것입니다"(클링자이스 신부 1938년 12월 4일자 편지 중에서). 그 와중에도 1940년에는 국민 계몽 총서 제1권으로 「인간의 영혼은 물질인가 정신인가」를 펴내기도 했다. 영혼의 불멸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그리스도교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결코 타협할 수 없음을 주장한 이 책은 5000부나 출간됐다. 1945년 8ㆍ15 광복과 함께 북한 땅을 점령한 공산군은 덕원수도원에 극심한 제약을 가했다. 전기는 물론 연료와 음식마저 단절되거나 제한됐다. 덕원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속옷가지가 누더기로 변해 가도 여벌이 없었다. 소련군의 진주와 북한 공산당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는 계속 운영됐고, 그 역시 철학강의를 계속했다. "내게는 수건이나 손수건조차 멀쩡한 것이 하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석탄을 때 본 것이 4년 전이었습니다. 아무튼 나는 얼어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셔츠 두 개에 내의까지 껴입었습니다. 창문도 종이로 막아 뒀습니다"(클링자이스 신부 1949년 1월 14일자 편지 중에서).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는 매우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 시간전례(성무일도)를 바치다가 갑자기 정전돼 성당이 깜깜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그가 외우는 시편 소리만 성당에 울려 펴졌다. 반면, 그는 일상사에 대한 상식은 전혀 없었다. 물품이 귀해 덕원신학교에서 교수 신부나 손님들을 위해 짚신을 실내화로 대신 비치해 놓았는데, 그는 짚신을 어떻게 신는지 몰라서 항상 거꾸로 신고 다녔다. 일은 몹시 서툴렀지만 공동체 의식이 투철해 공동 소임에 절대로 빠지는 일이 없었다. '나쁜 사상' 유포죄로 체포돼 순교 1949년 5월 9일 밤 11시에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이 덕원수도원에 난입해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아르눌프 슐라이허 부원장 신부,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를 원산으로 압송했다. 이들은 5월 11일 다른 수도자와 함께 평양인민교화소로 이송됐고 감옥에서 재판을 받았다.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는 영혼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반공산주의 저술을 출판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돼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모든 것은 이른바 '나쁜 사상' 때문이었다. 나쁜 사상이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대치되는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이념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루치우스 로트 신부, 1950년 10월 편지 중에서). 루페르트 클링자이스 신부는 11개월간의 힘든 수감생활 끝에 1950년 4월 6일 성목요일에 평양인민교화소에서 가혹한 학대와 영양실조로 순교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동료 수도자들 증언 "루페르트 신부는 수업 시간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늘 기분 좋게 생활하고 성인처럼 기도합니다. 그는 강의를 잘하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매우 인기가 좋습니다"(엘리지오 콜러 신부, 아달리코 뮐레바흐 신부에게 보낸 1940년 7월 14일자 편지 중에서). "밀을 수확하는 시기가 오면, 공동체 전체가 수도원 농장으로 나가 밀을 베었는데, 그도 항상 밀 수확을 도왔다. 6월 하순이라 날씨가 더워서 멱을 감을 정도로 땀을 흘려가면서도 그는 싫은 내색하지 않고 일을 했다. 서투른 일을 너무나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다른 형제들이 아무리 말려도 공동 소임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수도 형제들은 하는 수 없이 그가 일하도록 놔두었고, 한 명이 뒤를 따라다니며, 그가 해놓은 일을 다시 고쳐 놓곤 했다. 덕원 수도원에서 그와 함께 생활했던 수도형제들은 그를 두고 기도하고 일하는 전형적인 베네딕도회 회원이라고 평했다. 그는 기도에 열심이었고, 학문 연구에도 매진했다. 그는 학식으로 쌓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살면서 모든 이들에게 친절했다"(덕원수도원 연대기 중에서). "두달 뒤(1950년 10월), 나는 장 안토니오 수사와 오영길 이멜다 수녀와 함께 삽을 들고 다시 묘지로 가서, 신학교 교수이자 철학박사인 루페르트 신부님의 시신을 찾았다. 그분의 얼굴에는 빨래번호 273이 새겨진 손수건이 덮여 있었다. 바지는 원장 신부님 것을 입고 있었다. 루페르트 신부님은 임종 때 죄수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차림새로 매장되는 것을 루치우스 원장 신부님이 원치 않아 당신 바지를 그분께 입혀 드렸던 것이다. 루페르트 신부님은 나쁜 일이라곤 정말 하나도 한 적이 없다"(임근삼 콘라도 수사 증언 중에서). cpbc2013.12.31
![[성경 속 궁금증] (13) 주님은 언제 다시 오는가](//cpbc.co.kr/CMS/newspaper/2011/11/rc/395827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13) 주님은 언제 다시 오는가그날과 그시간은 아무도 몰라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림은 '최후의 심판'(조토 작, 1306년). 몇 년 전 어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이 세상에 곧 종말이 올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이들은 세상 종말의 때가 되면 휴거(携擧), 즉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할 때 구원받는 사람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그 날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부 맹신도들은 종말론에 세뇌돼 학업과 생업을 그만뒀고, 전 재산을 교회에 바쳤다. 가족을 버리고 가출해 가정이 파탄난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종말론에 대한 주장은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하며 늘 존재했다. 이는 종말이 사람들의 큰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 종말은 영화나 소설 등에서 아주 흥미로운 주제로 자주 등장한다. 성경을 보면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그리스도 재림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기본 신앙이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코린 1,7). 부활해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세가 끝나는 마지막 시기에 다시 세상에 오신다는 것이 재림사상이다. 재림의 때가 곧 세상 종말의 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재림은 세상 마지막 때인 종말에 일어날 여러 현상들과 연관돼 있다. 그리스도 재림은 그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 무렵 환난이 지난 뒤 곧바로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 24,29-30). 이런 믿음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바로 예수님께서 잡히기 전날 밤에 사도들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그래서 그리스도의 열성적 제자들 가운데는 자기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돌아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재림이 잘못 이해되지 않을까 경계하면서도 반드시 이뤄질 것임을 강조하셨다(마태 24,4-31).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희망을 간직한 채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도록 요청받았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2-13). 재림의 때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 재림은 악이 최종적으로 멸망하고, 하느님의 영원한 통치가 시작되는 때라는 것이다(1코린 15,22-25).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퇴사자22011.11.15
![[특집-신천지, 무엇이 문제인가] 치밀하고 교묘하게 포교... 가출 등 가정파괴 속출](//cpbc.co.kr/CMS/newspaper/2012/07/rc/420834_1.1_titleImage_1.jpg)
[특집-신천지, 무엇이 문제인가] 치밀하고 교묘하게 포교... 가출 등 가정파괴 속출 김 바오로(51)씨는 5년 전 이혼해 두 아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간 아내와는 연락이 끊겼다. 화목했던 가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아내가 성경 공부를 시작하면서다. 언제부턴가 성경 강의를 들으러 간다던 아내는 자주 집을 비웠다. 수상한 낌새를 챈 남편은 아내가 공부하는 성경과 자료를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아내는 신천지(공식명칭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신천지가 사이비 종교라고 알고 있던 남편은 아내를 말렸지만 이미 늦었다. 아내는 벌써 신천지에 깊이 빠져 있었다. 신천지 신자라는 것을 들킨 아내는 이후 남편과 아이들에게 신천지 신자가 될 것을 강요했다. 또 신천지를 반대하는 가족들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신천지 신자들 말만 들었다. 교회에 못 다니게 하면 집을 나가겠다는 아내를 남편은 더 말릴 도리가 없었다. 김씨처럼 가족이 신천지에 빠져 가정이 파괴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최근에는 50대 남편이 신천지에 빠진 아내를 말리다 홧김에 목을 졸라 살해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 같은 극단적 사건이 아니더라도 신천지에 빠진 이들의 가출과 폭력, 학업 포기, 직장 퇴사 등과 같은 문제가 속출하고 있다. 잘못된 신앙에 빠지는 것도 문제지만 신천지 때문에 가족을 등지고 생업과 학업을 포기하는 등 반사회적, 가정 파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기독교 이단상담소협회 한 관계자는 "이혼과 가출을 종용하고 집을 나온 이들을 영웅 대접을 해주는 종교가 제대로 된 종교냐"면서 "신천지는 이단도 아닌 사이비 종교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폐해가 심각한 수준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천지에 빠진 딸이 가출했다며 한 여성이 신천지 신학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1983년부터 이만희 통해서만 14만 4000명 구원 주장신천지 감추고 1~3년간 접근… 사제·수도자 사칭도개신교, 10년 전부터 이단상담소 개설 등 적극 대응 이만희씨가 1983년 설립한 신천지 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은 전국을 12지파로 나눠 선교를 펼쳐왔다. 신천지는 신자 14만 4000명이 되는 날 새 세상이 열리고 이들만이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최근 신자가 10만 명을 넘어, 올해를 구원의 해로 삼고 한층 공격적으로 선교에 나서고 있다. 14만 4000명은 요한 묵시록 7장에 나오는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이들'로 신천지는 이 숫자가 선택받은 신천지 신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천지 교리는 종말론을 다루고 있는 마태오복음 24장과 요한 묵시록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며 신자들에게 왜곡된 성경 지식을 주입하고 있다. 신천지는 또 성경이 모두 상징과 비유로 이뤄져 있기에 '계시받은 자'만이 이를 완벽하게 풀이할 수 있다며 '계시받은 자'가 바로 이만희씨라고 말한다. 삼위일체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은 하느님, 이삭은 예수님, 야곱은 이만희씨라고 주장한다. 세상 끝날에 예수 영혼이 이만희씨에게 들어와 오직 이만희씨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신천지는 성경 내용을 알고 있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를 선교 대상자로 삼는다. '추수꾼'이라 불리는 신천지 신자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로 둔갑해 1~3년간 신천지 신자임을 숨기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주변 사람들과 신뢰를 쌓는다. 이후 신심이 흔들리는 이들이나 전도사, 집사, 사목회장, 분과장 등과 같은 핵심 인물들에게 접근해 신천지 성경 공부로 유도한다. 선교 대상자 관리가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이뤄져 있어 한 번 발을 들이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게 돼 있다. 신천지 신자였던 박 미카엘(30)씨는 "강의실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성경을 잘 모른다며 이것저것 물어와 나처럼 성경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를 전담하는 신천지 신자였다"면서 "나를 관리하는 사람이 최소 5~6명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천지 신자들은 선교 대상자가 신천지 교리에 완전히 빠질 때까지 자신이 신천지 신자임을 들키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받는다. 선교를 위해서라면 온갖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요새 신천지처럼 거짓된 성경을 가르쳐 주는 곳이 많으니 조심하라"고까지 이야기 한다. 이 밖에도 신부와 주교에게 인정받은 성경 강의라고 홍보하고 신천지 교회로 끌어들이거나, 신부와 수도자를 사칭해 신자들을 유인하기도 한다. 개신교회는 10여 년 전부터 신천지 문제에 적극 대응해 왔다. 신천지 신자들이 교회 신자들을 선동, 목사를 쫓아내 교회가 통째로 신천지에 넘어가는 일이 생기는 등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교계 방송을 통해 신천지 선교 전략과 피해 사례를 지속적으로 보도, 신자들이 처음부터 신천지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또 이단상담소를 개설해 신천지에 빠진 가족으로 고민하는 가정을 돌보며 신천지에서 다시 교회로 돌아온 이들이 올바른 신앙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상대적으로 신천지 피해가 적었던 가톨릭교회는 지난해부터 주교회의와 각 교구에서 신천지 활동에 주의를 당부하는 공문을 발표하고 신천지 피해 예방에 나섰다. 또 구역장ㆍ반장 월례교육에서 신천지 선교 전략을 알려줘 신자들이 신천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특히 성당이나 가톨릭교회 공식 기관이 아닌 장소에서 열리는 성경 공부에 참석하지 말고, 의심되는 성경 공부는 즉시 사목자에게 알릴 것을 당부했다. 주교회의 홍보국장 이정주(광주대교구) 신부는 "교구 홍보국장단 회의 때 신천지 문제를 논의하면서 각 교구 피해 사례를 공유하기로 했다"면서 "또 천지일보 등 신천지와 관련된 매체 및 단체와는 일체 접촉하지 않도록 결정했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신천지 예방대책* ▶가톨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경공부 및 통신교리를 통해서 공부한다. -각 교구 성서 40주간/성서못자리(서울)/여정 -통신성경(성경 100주간/성바오로 딸 수도회/가톨릭교리신학원) -청년성서모임 -가톨릭회관 -각 본당 ▶소공동체 모임 때 본당에서 제공한 반모임 교재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가톨릭 공식 기관이 아닌 외부 장소에서 성경 공부를 권유하는 사람이 본당에서 활동하면 사목자에게 알린다. ▶성당에서 발각돼 퇴출당한 '추수꾼'들이 사목자에 대해 온갖 유언비어를 퍼트리니 이에 주의한다. 박수정2012.07.17
![[평화신문·가톨릭출판사 공동기획] 젊은이여, 신앙의 근본을 재발견하라 <14>](//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5192_1.0_titleImage_1.jpg)
[평화신문·가톨릭출판사 공동기획] 젊은이여, 신앙의 근본을 재발견하라 <1>무엇을 믿고 있는가?두치오 디 부오닌세냐(1255~1319)의 '광야에서 유혹받으시는 예수'. 77.예수님이 30년 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사셨고, 그로써 우리의 일상을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31-534항, 564항) 78.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도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나요?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은 인류 전체가 속해 있는 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세례를 통해 그분은 표징을 남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범한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언젠가 죽음 속으로 빠져들겠지만, 당신 아버지의 권능으로 다시 부활하실 것입니다.(535-537항, 565항) 79.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유혹받는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했나요? ▶예수님이 실제로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분이 진정한 인간이셨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히브 4,15) 구세주를 발견하게 됩니다.(538-540항, 566항) 80.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시나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변화되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입니다.(541-546항, 567항) 81.예수님은 실제로 기적을 행하셨나요? 아니면 그저 신앙심을 강조하기 위해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한가요? ▶예수님은 실제로 기적을 행하셨고, 사도들도 기적을 행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실제 사건들을 전합니다.(547-550항) 82.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시며 당신에게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퇴사자22013.03.27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3>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중)](//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4195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중)신앙 고백, 진리에 대한 결단과 투신으로 드러나야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해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아 신앙의 해를 선포했다. 사진은 베네딕토 16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 미사 집전을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들어서는 모습. 오늘날 신앙의 상태와 신학 흐름에 관한 문제 제기는 과연 무엇인가? 지난 호에서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서문에 나오는 '행운의 한스' 이야기를 소개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계속해서 미국 개신교 신학자 하비 콕스(1929~ )가 「세속도시」에서 인용한 바 있는,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어릿광대와 불타는 마을'이라는 비유를 제시한다. 덴마크를 순회하던 어느 곡예단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곡예단 단장은 출연 준비를 하던 광대를 이웃 마을로 보내 도움을 청한다. 추수가 끝난 논과 밭에 불씨가 옮아 그 마을에도 화재가 번질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광대의 이러한 호소를 구경꾼을 끌어들이려는 기발한 수법의 광고나 일종의 홍보로만 생각해 손뼉을 치고 웃기만 한다. 결국 불길은 마을에까지 번져 손 쓸 겨를도 없이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 두 가지 비유 이야기는 오늘 시대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이 마주하는 심각한 위기 상황을 설명한다. 현대인에게 신앙 의미와 가치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임무와 역할이 여러 측면에서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교인이 내적으로는 소중한 신앙 유산과 교회의 영적 자산을 스스로 포기해 버릴 위험에, 그리고 외적으로는 종교와 신앙 자체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종교적 무관심', 또는 모든 종교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무차별주의'에 직면해 무력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메시지다. 사실,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의 유산을 오늘날 교회 공동체적 차원에서 어떻게 다시 생생하게 체험하며 살아갈 것인가는 신앙의 해를 맞이해 우리에게 주어진 핵심 질문이자 과제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뒤이어, 이제 믿음의 근본적 의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오늘날 인간의 믿음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사도신경의 첫 시작인 '나는 믿나이다'라고 하는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서 베네딕토 16세는 믿음이란 한 마디로 인간의 한 실존적 태도와 자세, 즉 자신의 존재론적 근원과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인간의 선택과 결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즉, 신앙이란 새로운 존재론적 안목과 전망으로써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신앙이 세상의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차원을 넘어서 인간 자신의 존재론적인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인식과 자각임을 말해준다. 문제는 믿음의 이러한 존재론적 구조와 성격이 오늘날 현실주의적이며 행동 지향적인 경향 속에서 쉽게 간과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물론이나 물신사상의 결정적 오류는 물론이고, 철학적 실증주의와 현상주의 그리고 상대주의적 흐름이 현대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경향은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초월적 능력을 부인하면서 진리에 대한 인식을, 행하고 직접 경험하는 것에만 한정시키려 한다. 인간의 믿음에 관한 기본 성찰은 신론의 문제로 연결된다. 오늘의 믿음이 드러내는 하느님 표상은 과연 무엇인가? 베네딕토 16세는 성서적 신(神) 신앙에는 위격과 존재라는 두 가지 측면이 나뉠 수 없이 결합돼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역사 안에서의 위격적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 체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는 존재론적 초월성에 의해 조화로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역사의 예수님이 요한복음서에서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초월적 말씀(로고스)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이렇듯 성서적 신 신앙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측면의 조화와 통합이 초기 그리스도교 발전 단계에서도 역시 반복돼 나타남을 강조한다. 그것은 성서적인 위격-존재적 신관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존재론적 신관과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베네딕토 16세는 탈출기 3장 14절에 나오는 "나는 있는 나다"라는 존재론적 신적 언명이 그리스 철학적 배경에서 자라난 초세기 교부들에게 호소력 있게 작용해, 성서적 신 개념과 그리스 사상 연계를 이룩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 모든 역사를 이어받은 초기 그리스도교는 철학자의 신을 받들고 이교의 신들에 역행함으로써 자신의 선택과 정화를 과감히 단행하였다"(140쪽). 그리고 이러한 신앙과 존재론의 결합은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 체계 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이미 성경 자체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선택과 결단 과정의 핵심은 바로 '모든 신화에 반대되는 로고스(Logos)의 선택'이었다. 그 대표적 예로 요한복음 1장 1-18절의 로고스 찬가를 들 수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진리' 개념과 '로고스' 개념은 히브리 전통과 그리스 사상의 균형 있는 결합을 보여주는 매우 좋은 예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신관의 통합 과정, 즉 성서적인 위격-존재적 신관과 그리스 철학자들의 존재론적 신관의 결합 과정은 그리스도교의 성립을 통해 유다이즘과 헬레니즘의 결합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알리는 가장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표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관의 결합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신비를 통해 결정적으로 구체화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이제는 유다-그리스적 사고 지평의 확장을 통해 전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로서 선포되는 과정을 밟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 본래의 '원체험'이 초기의 '증언' 단계를 거쳐 '역사적 해석'의 단계에 접어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니케아(325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381년)와 에페소(431년)를 거쳐 칼케돈(451년)에 이르기까지 제1~4차 보편공의회에서 이뤄진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의 핵심 교의 정립 과정에서 그리스 철학 개념과 용어들이 많이 도입돼 사용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지평에서 볼 때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해석과 선포의 발전 과정을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전승 본연의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로 포함시키는가, 아니면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필요성에 따른 하나의(첫 번째) 토착화 과정으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판단에 관한 논쟁이다.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서는 전자(前者)의 입장이 드러나고 있으며, 제3세계 일부 신학자들은 후자(後者)의 입장을 취한다. 전자의 입장을 성경과 전승에 기초하면서 그리스 철학적 사고에 영향을 받아 논리적 분석과 성찰을 중시하는 서구 스타일의 고전적 신학이라 한다면, 후자의 입장은 신앙의 역사적 차원을 중시하여 공동선과 토착화를 추구하는 맥락에서 신학적 성찰을 전개하는 제3세계 중심의 신학 흐름이라 할 수 있겠다. 2006년 9월 12일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교에서 행한 베네딕토 16세의 연설에서도 이 주제가 다뤄진다. 베네딕토 16세는 로고스 개념의 성서적 등장으로 말미암아 "성서적 신앙의 그 모든 힘들고 구불구불한 길이 목적에 이르게 되고 그 종합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사상의 만남을 볼 때, 그리스도교가 동양에서 발원하고 중요한 발전을 이루기는 했어도, 궁극적으로 유럽에서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베네딕토 16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탈(脫)헬레니즘' 필요성을 내세우는 제3세계 신학자들의 신학적 주장에 대해 '토착화'(inculturation)라는 말 대신에 '상호문화성'(inter-culturality)이라는 용어 사용을 제안한다. 이러한 진술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유럽 문화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사실상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 제기다. 그리스도교 자체가 수없이 많은 역사적 조정 과정을 거쳐 이뤄진 종교적ㆍ사상적ㆍ문화적 가치와 그 표현의 총화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교로부터 서구 문화적 요소를 분리하려 시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다른 문화를 만났을 때 발생하는 상호작용의 실제 과정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복음 가치의 발견에 주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라는 논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2000년 신판의 머리말은 말한다. "토착 그리스도교에 대한 요구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어디까지나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모든 위대한 문화는 서로에 그리고 진리에 열려 있다." 베네딕토 16세의 '토착화'에 관한 논지는 이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완성론' 혹은 '성취론'적 전망으로 연결된다.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2000년 신판 머리말에서는 특히 아시아적 맥락이 고려된 함축적 표현이 이뤄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아시아 문화의 복음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식별과 정화 작업이 반드시 선행돼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 겨레들이 그 민속 신앙에 있어 이미 그리스도 신앙의 적지 않은 부분을 제 나름대로 표출해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특히 고통받는 하느님과 자애로운 어머니가, 성경의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주는 신앙의 중심적인 표상이 되고 있다는 점은 오늘의 우리들도 일깨우는 바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음은 물론이다"(33쪽).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진리를 향한 결단과 투신으로 드러나야 함을 강조한다. '나는 하느님을 믿나이다'라는 신앙고백은,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실재 중 가장 우선적인 가치와 의의, 그리고 진리에 대한 선별적이고 선택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온갖 우상숭배를 거슬러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듯, 그리고 초대교회 교부들이 여러 이단적 주장과 싸우며 신앙 진리를 찾아나간 것처럼, 오늘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참다운 진리를 향한 결단의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처럼 로고스라는 핵심 개념을 통한 통합적 신 신앙이야말로 베네딕토 16세의 신학 사상의 기본을 구성한다.박준양 신부(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퇴사자22013.05.21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 기념 전국 선교 신앙대회 이모저모 마리아의 군단, 성모신심 강화 통한 쇄신, 성장 다짐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 기념 전국 선교 신앙대회는 전국의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성모신심으로 한마음이 된 축제의 장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레지오 마리애 단원 1만여 명은 성모님의 하느님에 대한 순명 정신을 본받아 성숙한 단원으로 성장할 것을 다짐했다. 지난 60년간 레지오 마리애 정신을 살아온 신앙 선조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선교 신앙대회가 광주 염주종합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됐다. 이날 1만여 명의 레지오 마리애 간부와 단원들은 성모신심으로 한국교회 복음화에 투신할 것을 다짐했다. ○…5월 25일 광주 염주종합실내체육관을 가득 메운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열기는 30도 가까운 이른 여름 더위보다 더 뜨거웠다. 기념미사에 앞서 벡실리움(레지오 마리애 단기)과 성모상, 기수단이 차례로 입장하자 객석에 있던 단원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단장 김칠연)를 시작으로 대구 의덕의 거울 세나뚜스(단장 류해석),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단장 김광희) 단원들이 단기를 들고 입장했고, 사회를 맡은 손보영(광주평화방송) 아나운서는 각 세나뚜스와 레지아의 연혁 및 단원 수 등을 차례로 소개했다. 입장식에 이어 하성호(대구 세나뚜스 담당)ㆍ김종대(광주 세나뚜스 담당) 신부가 성모상에 화관을 씌우자, 이를 지켜보던 단원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김광희(펠릭스, 광주 세나뚜스) 단장의 개회 선언에 이어 단원들은 레지오 마리애의 60년 역사를 다룬 영상 '레지오 마리애의 어제와 오늘'을 감상하며 레지오 마리애가 걸어온 길을 회고했다. 단원들은 엄숙한 가운데 묵주기도와 까떼나를 함께 바쳤다. ○…이어 김희중(광주대교구장) 대주교 주례와 사제단 50여 명 공동 집전으로 60주년 기념 경축미사가 봉헌됐다. 김 대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1950년대 한국 사회와 교회는 전쟁의 폐허에서 삶의 터전을 재건하고자 몸부림쳤다"며 "온 국민이 물질적 정신적 궁핍을 느끼며 마음의 안식처를 찾고 있을 때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됐다"고 회고했다. 김 대주교는 이어 "레지오 마리애의 기본 정신은 주님 뜻에 순명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기도는 우리 생명을 하느님과 연결해주는 탯줄과 같다"면서 레지오 마리애의 기본 무기(기도)를 버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단원들은 6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30개 평의회의 1만 3000여 명 단원이 이어 쓴 신구약 합본과 7개 평의회가 필사한 39권의 레지오 마리애 교본, 30개 평의회가 바친 묵주기도 5200만 단을 예물로 봉헌했다. 단원들의 다짐을 적은 '우리의 다짐'패도 함께 봉헌했다.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알고 싶고, 살고 싶었습니다." 기념미사 후에 열린 기념식, 고령의 나이로 강단에 선 하초자(가타리나, 72, 마산교구 회원동본당)씨가 선교 사례 발표를 마치자 장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기념식에서는 하씨를 비롯해 단원으로서 복음 선포와 냉담교우 회두에 열성을 쏟은 단원 18명에게 선교대상을 수여했다. 깊은 성모신심으로 오랫동안 레지오 마리애 간부로 활동해온 단원 17명은 공로대상을 받았다. 수상자 중에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어르신 신자가 많아 눈길을 끌었다. 시상식에 앞서 한국평협 최홍준(파비아노) 회장은 축사에서 "한국교회 대표 성모신심 단체이자 평신도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의 60주년을 축하한다"면서 "한국 가톨릭 신자의 10%를 차지하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새 복음화에 투신해달라"고 요청했다. 콘칠리움 특사로 방한한 패트릭 페이씨는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의 손때가 묻은 성경을 김희중 대주교에게 전달했다. 광주 세나뚜스는 목포 산정동성당에 있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에 성경을 보관하기로 했다. 광주 세나뚜스 담당 김종대 신부는 "도입 60주년을 맞아 쇄신의 출발은 성모님의 정신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엇이든 '예'라고 순명하신 성모님의 굳은 믿음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이날 신앙대회에 참석한 대구대교구 최훈(요한 사도, 봉덕본당 은총의 모후 꼬미시움)씨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며 성모님께 의탁하는 삶을 살아왔다"며 "많은 이들이 성모님의 겸손과 순명 정신을 본받아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전부터 한복을 차려입고 행사 안내 봉사를 맡은 광주대교구 주화영(베로니카, 화군동본당 '하늘의 문' 쁘레시디움 단장)씨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기에 신앙인으로서 더 부지런하고 참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광주 세나뚜스 김광희(펠릭스) 단장은 "신앙의 해를 맞아 지난 60년의 세월을 반성하고,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를 타파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 함께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손춘복 명예기자 ▨레지오 마리애는 '마리아의 군단'을 뜻하는 조직으로 고대 로마의 군대 조직인 로마 군단(Legio Romae)에서 가져온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 조직은 단위체인 쁘레시디움(Praesidium), 본당의 평의회 꾸리아(Curia), 꾸리아 대표가 모인 지역평의회 꼬미시움(Comitium), 교구 평의회 레지아(Regia), 국가 평의회인 세나뚜스(Senatus), 중앙 평의회 꼰칠리움 레지오니스(Concilium Legionis)로 구성돼 있다. 콘칠리움 특사- 패트릭 페이(콘칠리움 전 단장) "한국의 수많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헌신하고 있다는 점이 감격스럽습니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가 아시아 복음화의 큰 도구가 되길 바랍니다." 5월 25일 열린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60주년 기념 전국 선교 신앙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아일랜드의 콘칠리움 레지오니스 특사 패트릭 페이(Patrick Fay, 55, 콘칠리움 전 단장)씨는 "레지오 마리애가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신 한국의 주교님들과 성직ㆍ수도자들에게 감사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콘칠리움 레지오니스는 아일랜드 더블린시에 있는 세계중앙평의회로, 레지오 마리애의 최상급 평의회다. 페이씨는 콘칠리움 레지오니스에서 서기를 맡고 있다. 그는 "전 세계의 단원 중에서 한국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10%를 차지한다"며 "한국의 단원들이 수적으로 많은 만큼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이행해주고 있어 감사하다"고 밝혔다. 또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봉사 및 선교단체로서 어르신과 환자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냉담교우들을 회두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페이씨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교포들이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서 봉사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면서 "앞으로도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를 위한 복음화 사명을 수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콘칠리움 서기 보조 패트릭 오더나우씨와 함께 방한한 페이씨는 5월 28일 출국했다. 페이씨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 도입 50주년 행사에도 참석한 바 있다. 이지혜 기자 조은일2013.05.29
![[성경 속 궁금증] (12) 모세 오경은 모세가 썼나요](//cpbc.co.kr/CMS/newspaper/2011/11/rc/395120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12) 모세 오경은 모세가 썼나요모세의 전승을 토대로 기록교회는 모세에서부터 전해오는 전승을 토대로 기록됐다는 뜻에서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로 본다.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모세 대리석상(1515년). 모세오경은 창세기와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권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모세가 이 다섯 권의 저자라고 알려져 있다. 유다인들은 모세오경을 토라(Torah)라고 부른다. 히브리어로 토라는 지시, 또는 '인도하다, 길을 가리키다'를 뜻한다. 이 토라를 칠십인역(七十人譯/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 중 가장 오래된 번역본)에서는 법으로 번역한 까닭에, 이 부분을 율법서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성경의 주요 법률 대부분이 토라에 수록돼 있어 이스라엘 민족의 의무사항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서라는 말은 지나치게 법률을 강조하는 인상을 주기에 토라의 참뜻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모세오경은 법보다는 가르침과 지침을 함께 전하고 있다. 유다인들은 토라의 기록을 비슷한 길이로 구분해 두루마리 다섯 개에 나눠 기록하고 보관했다. 그래서 오경이라는 책 이름이 나왔다. 오경의 어원은 희랍어로 펜테터이코스인데, 펜타(penta : 다섯을 뜻함)와 테우케(Teuche : 도구, 또는 글을 쓴 두루마리를 넣어두는 상자)가 합쳐진 말이다.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각각 5개의 두루마리로 나눠 5개의 항아리 같은 상자에 보존했다는 데에서 펜테터이코스라는 명칭이 유래한 것이다. 유다인들은 책의 첫머리가 시작되는 단어로 오경의 각 권을 불렀다. 그러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에서는 각 권의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명칭을 창안했다. 후대 번역본들도 칠십인역의 명칭을 따라 창세기(시작, 기원의 뜻), 탈출기(출발, 탈출의 의미), 레위기(레위인들에 관한 규정), 민수기(인구조사 및 숫자가 많이 취급됨), 신명기(제2의 율법이란 뜻)라 했다. 구약성경에서 모세오경은 신약성경에서 복음서와도 같다. 모세오경 전체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약속한 땅으로 인도하시는 구원계획 기록이다. 모세오경에 모세를 붙여 부르는 이유는, 모세가 이 오경의 저자라 믿는 데에 기인한다. 실제 어떤 종류의 법이나 일부는 모세가 기록했다.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웠다"(탈출 24,4). 성경에서는 한 번도 오경이 모세가 기록한 것이라고 언급하지 않았지만,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 필로나 플라비우스 요셉, 그리고 그리스도교 교회는 모세가 오경을 기록한 것으로 전했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모세가 직접 썼다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모세가 오경을 다 썼다는 것이나, 모세오경이 모세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극단적 주장이다. 그래서 교황청 성경위원회와 많은 가톨릭 학자들은, 오경은 모세가 직접 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모세에서부터 전해오는 전승(예컨대 십계명)을 토대로 기록됐다는 뜻에서 모세를 저자로 본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퇴사자22011.11.08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2>앙리 드 뤼박(중)](//cpbc.co.kr/CMS/newspaper/2014/01/rc/493307_1.2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앙리 드 뤼박(중)그리스도교의 새로움과 그 신앙의 보편적 가치 제시 칼 라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앙리 드 뤼박(오른쪽).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작업을 하면서 젊은 독일 신학자 칼 라너와 요셉 라칭거 등과도 만났다. 사진출처=www.karl-rahner-archiv.de 암흑기와 불교 연구 그리고 명예회복 「초자연성에 대한 연구」(1946)로 예수회 제재를 받은 앙리 드 뤼박은 예수회 총장의 지시에 순종하고 1950년부터 1959년까지 리옹을 떠나 파리에서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이 암흑기에 불교에 관한 연구에 몰두해 세 권의 책을 냈다. 「불교의 관점들 I」(1951), 「불교와 서양의 만남」(1952), 「불교의 관점들 II, 아미타불」(1955). 동양의 신비주의 불교에 대한 연구는 드 뤼박에게 인류의 영성사가 제공해주는 방대함 속에서 '그리스도 사건'의 위대한 유일성에 대해 점점 더 분명한 확신을 갖게 했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이해의 보편성을 확인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영성 사상를 숙고하게 했다. 1954년에는 교회에 관한 아름다운 저서 「교회에 관한 묵상」(Me'ditation sur l'Eglise)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지금도 인용되는 유명한 저서로 그가 얼마나 교회를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1958년 그는 프랑스 학술원(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추대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1960년 8월 복자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위원'으로 임명됨으로써 그의 사상은 교회로부터 공인받게 됐다. 그는 공의회 개최 기간(1962~1965)에 신학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의회 모든 문헌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이때 드 뤼박은 젊은 독일 신학자 칼 라너와 요셉 라칭거(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 등과도 만났다. 공의회는 계시헌장에 나타난 성경과 성전의 유일한 원천, 무신론, 교회헌장, 비그리스도인 선언 등에 그의 사상을 수용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드 뤼박은 공의회 결과로 설립된 교황청 그리스도교일치평의회 산하 '비그리스도교인의 사무국' 위원으로 5년간 활동했다(1969~1974). 이 사무국은 유다교를 제외한 타종교와의 대화와 우호적 관계를 위해 생긴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공의회의 근본 정신에 대한 해설서를 내고 강연했다. 계시헌장과 사목헌장 등에 대한 그의 해설은 유명하다. 마침내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3년 2월 2일 드 뤼박을 이브 콩가르와 함께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그의 깊고도 위대한 신학사상이 교회에서 정통한 것으로 공인받게 됐다. 그가 87세에 사제에서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신학적 공로 때문이다. 드 뤼박 추기경은 1989년 93세 때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한 역사적 상황과 주요 주제를 다룬 책을 발행한 후, 곧바로 몸이 쇠약해져 파리의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했다. 몇 년간 병원 신세를 진 그는 1991년 9월 4일 생을 마감했다. 인품과 학문적 열성 앙리 드 뤼박과 함께 살던 동료와 제자들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우 얌전하고 꼼꼼하며 신중한 성격이었다. 평생 연구에만 몰두했던 학자로서 공부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 날 수도원의 공동 방에 동료들이 모두 나가고 혼자 남게 됐는데, 방을 나서려는 순간 드 뤼박은 라디오가 켜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라디오를 끌 줄 몰라 한참을 씨름하다 결국은 포기했다고 한다. 그가 유일하게 다룰 줄 알던 기계는 타자기뿐이었다. 드 뤼박의 제자로 은퇴 후 많은 신학책을 펴내고 있는 세스부에 신부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자주 뒷목 통증을 호소하면서 저녁이면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방에 들어가서도 쉬기는커녕 다시 열심히 타자기를 두드려 동료들은 이런 그의 학문적 열성에 혀를 내둘렀다. 그의 천재성은 탁월하다. 그는 많은 교부의 책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유명한 사상가나 철학자의 책을 읽곤 했는데, 그때마다 중요한 구절을 편지봉투 뒷면에 메모해 두곤 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쓸 수 있는지 궁금해하던 세스부에 신부는 어느 날 그의 방에 들렀다가 글씨가 빼곡한 편지봉투를 하나하나 넘기면서 직접 타자를 치는 스승 앙리 드 뤼박을 봤다. 이렇게 탄생한 원고가 곧 책으로 발행된 것이다. 사실 그의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많은 교부의 글을 인용하고, 체계적인 목차도 생략하는 경우가 허다해 읽기가 지루하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지 않으면 무슨 주장을 펴는지 알기도 어렵다. 그저 한 주제에 대한 교부들의 진술을 모아둔 것 같은 인상이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그 모든 교부의 언급이 자신의 주장을 펴는 중요한 신학적 논거로 정리돼 있다. 드 뤼박은 또한 쉬운 글을 써야 한다는 이유로 어떤 사상에 대해 단순화해서 말하기를 피한다. 그만큼 신중의 신중을 기한다. 이러한 학문적 열성과 철저함으로 그의 책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도 인용되고 재판되며 중요한 참고서가 된다. 한편으로 그의 작품을 읽는 프랑스 독자들은 그의 프랑스어 문체에 혀를 내두른다. 그의 문체는 프랑스어의 분위기를 잘 살린다는 평가를 받아 프랑스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만큼 외국인에게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품세계와 신학적 공헌 그의 신학 작품세계는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폭넓고 다양하며 심오하다. 이탈리아에서는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전집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출간했다(1979).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를 추모하는 국제협회가 생기면서 Cerf 출판사를 통해 전집이 나오기 시작됐다. 총 50권으로 계획된 전집은 각 권이 600쪽을 넘는다. 현재까지 20여 권이 나왔다. 그의 작품은 주로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신학적 숙고를 담아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새로움과 그 신앙의 보편적 가치를 제시한 것이었다. 유명한 작품은 인본주의 무신론, 하느님에 대한 신학적 인식론, 신학적 인간학, 초자연성, 교회론, 불교에 관한 연구, 테이야르 드 샤르댕에 관한 저서 및 당대의 신학자나 철학자(모리스 블롱델, 에티엔느 질송, 쟈크 마리탱)와 교류한 사상교류집 등이 있다. 그의 신학 전반에 흐르는 사상은 당연히 인류에게 유일한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 그리스도의 새로움이다. 그리스도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신비나 인간의 신비, 그리고 역사의 신비를 읽어낸다. 그의 신학적 독특성이 드러나는 작품과 신학적 공헌도가 높은 것만을 추려 소개하도록 하겠다. 프랑스 기초신학의 선구자 1929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리옹가톨릭대 교수로 임명된 그는 교수 임용 기념 교내 학술대회에서 '신학과 호교론' 논문을 발표했다. 이때 그는 당시엔 생소했던 '기초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 신학의 변화와 쇄신을 예고했다. 그 당시 신학은 주로 호교론(護敎論)과 신학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호교론은 가톨릭 신앙이 믿을만하다는 것을 믿지 않은 이들을 향해 제시하는 학문이다. 호교론은 신앙에 도전하는 유럽의 이성적 합리주의자들에게 왜 종교가 필요한지, 왜 그리스도교 신앙을 참된 진리로 믿어야 하는지를 '순수 이성적으로' 제시하는 데 몰두했다. 반면, 신학은 일종의 교의신학으로서 호교론을 통해 믿음의 정당성이 제시됐다고 전제하고, 교회가 믿고 있는 교의들을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드 뤼박은 이러한 호교론과 신학의 '외재적 관계'를 비판하면서 앞으로의 신학은 믿음을 전제로 하거나, 수동적으로 변론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봤다. 보다 적극적으로 왜 믿어야 하는지를(호교론) 믿음의 내용(신학)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그 믿음의 내용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실천)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드 뤼박은 1930년 '종교의 역사'라는 새로운 교과목을 맡게 돼 타종교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특히 힌두교와 불교에 심취했다. 사실 역사학의 발전은 '종교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는데, 많은 경우 종교의 역사적 탐구는 본연의 학문적 특성 때문에 많은 새로운 사실을 제공했지만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고유성과 새로움을 간과하고 심지어 계시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상대화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종교가 인간의 근본적인 나약성에서 기원한다든가(심리학적 기원론), 사회와 문화의 발전과 함께 원시종교에서 고등종교로 발전해(사회-정치적 기원론) 훗날 없어질 것이라든가, 모든 종교가 근본은 하나라든가(신비주의적 관점) 하는 주장들에 맞서 드 뤼박은 신학자로서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초월성을 역사성 안에서 고려하면서 그 고유성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특히 1950년부터 불교에 대한 그의 심층적 연구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초월적 본성을 더욱 확신하게 했으며, 신비주의에도 관심을 갖게 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 신비사상의 독특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는 데 노력했다. 이와 같이 드 뤼박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어떤 신앙신조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인문학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신학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그리스도교 계시나 역사, 교회의 생활 전체를 일관성 안에서 다시 숙고하는 기초신학적 자세를 정초했다. 곽진상 신부 (수원가톨릭대 교수) cpbc2014.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