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10. 연중 제4주일- 신앙](//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9557_1.0_titleImage_1.jpg)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10. 연중 제4주일- 신앙하느님 진리에 동의하는 초자연적 은총'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예수님 말씀을 나자렛 주민들은 믿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며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 인간의 합당한 응답이 믿음, 곧 신앙입니다.나자렛 사람들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예수님 말씀을 믿지 않았지만, 동정 마리아는 천사의 전갈에 믿음으로 동의함으로써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다. 사진은 나자렛 주님탄생예고 대성당 모자이크화. [CNS 자료사진]◇살펴봅시다 ㉠신앙(150~152, 166~175항):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격적으로 하느님께 귀의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전체에 대해 자유로이 동의하는 것"(150항)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을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 드리고 하느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그런 믿음을 피조물에게 두는 것은 "헛되고 어리석은 일"(150항)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분 곧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강생하신 말씀이시기 때문"(151항)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1,18). 또 성령의 도움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주시는 분은 그분의 영이신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믿는 것은 성령께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교회 안에서 교회로부터 물려 받았습니다. 우리가 "저는 믿습니다" 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할 때 언제나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고백합니다. "교회가 먼저 믿고 이로써 나에게 그 신앙을 전해주고, 키워주고 지탱해주기"(168항) 때문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또한 우리 신앙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알아둡시다 ㉡신앙의 복종(144~152항): '복종하다'(oboedire)는 라틴어로 '에게'라는 뜻을 지닌 'ob'와 '듣다'라는 뜻을 지닌'audire'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복종은 말하자면 자신이 들은 하느님 말씀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앙의 복종으로 모범을 보인 대표적 인물로 구약의 아브라함을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믿음으로 따랐고 이방인으로 순례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신앙으로, 자신의 외아들까지 바치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믿음 때문에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됐습니다(로마 4,11-23; 히브 11,1-18 참조). 교회는 나아가 동정 마리아를 "가장 완전하게 신앙의 복종을 실천하신 분"(148항)으로 제시합니다. 마리아는 신앙 안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신앙의 동의를 합니다. 이 때문에 모든 세대가 마리아를 복되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나아가 마리아는 일생 동안 극도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리아를 "가장 순수한 신앙을 실현하신 분"(149항)으로 공경합니다. 신앙의 특성(153~165항): 신앙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153항)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려면 하느님 은총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또한 성령의 내적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은 "참으로 인간적 행위"(154항)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자유나 지성에 결코 반(反)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움직여진 의지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이다"(155항). 신앙이 지성적 행위라는 것은 신앙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동의(同意)하는 것이 결코 정신의 맹목적인 작용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지성 또는 이성의 관계를 좀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확실합니다. 신앙의 이 확실성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 말씀 자체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적 이성의 빛이 주는 확실성보다 하느님의 빛이 주는 확실성이 더 큽니다. 성 안셀모(1033~1109)는 "신앙은 이해를 요구한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믿는 바를 이해하도록 요구하고 또 이 이해를 통해 우리는 더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는 "믿기 위해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유명한 금언을 남겼습니다. 자연적 이성의 빛이 주는 확실성보다 하느님의 빛이 주는 확실성이 더 크다는 것은 신앙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 해도 "신앙과 이성 사이에 진정한 불일치는 있을 수 없다"(159항)고 교회는 단언합니다. "신비를 계시하고 신앙을 주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인간의 정신에 이성의 빛을 비춰 주시기 때문"(159항)입니다. 신앙과 이성의 이런 관계에 비춰 우리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참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도덕적 규범에 따라 이뤄진 탐구라면 결코 신앙과 대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실재는 다 똑같은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이끌어내기 때문"(159항)입니다. 신앙이 인간의 응답 곧 인간적 행위라면 그 행위는 어느 누구도 억지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됩니다. 곧 신앙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여야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신앙과 회개로 초대하시지만 결코 이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느님을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그 믿음을 항구하게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리합시다 -"신앙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인간이 인격적으로 온전히 귀의하는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행위와 말씀을 통해서 당신 자신에 대해 밝혀 주신 계시를 지성과 의지로 따르는 것이다"(176항).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 이외에 다른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178항).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 선물이다. 믿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 도움이 필요하다"(179항)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퇴사자22013.01.29
![[아! 어쩌나] 213. 사람들이 나약하게만 보여요](//cpbc.co.kr/CMS/newspaper/2013/08/rc/467578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213. 사람들이 나약하게만 보여요 Q. 30대 초반 청년입니다. 군대도 다녀왔고 나름대로 직장생활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군대와는 달리 사람들이 참 나약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군대에서는 '하면 된다'는 신념을 익히고 나왔는데, 사회인들은 생각보다 훨씬 약한 것 같더군요. 특히 혼인을 약속한 여자친구는 성당에 다니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저 몰래 점을 보러 다니는가 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을 잘 듣는 편인데, 그러고는 혼자서 불안해합니다. 여자라서 그러려니 하면서도 가끔은 짜증이 나네요. 사람들은 왜 자기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A. 형제님이 짜증을 내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현대문명이 발달하고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건들이 인간 사회를 발달하게 해주는데, 여자친구가 왠지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으니 짜증 날만 하지요. 그리고 군인정신으로 살면 되는데, 나약한 사회인들을 보면 한심한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한 발자국 뒤에서 보세요. 세상이 현대화돼 가면서 점집이 없어졌나요? 아니면 종교에서 기복신앙을 구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나요? 인간 사회는 참으로 기묘해서 물질적 발달과 더불어 기복신앙을 구하는 욕구도 같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심리학에서는 '통제의 착각'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전부 자기가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착각은 왜 생기는가?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자기 식대로 처리하다 보면 근거 없는 자만심이 생겨나 세상 모든 일을 다 자기 힘으로 할 것 같은 자기도취와 착각에 빠집니다. 즉, 자신이 노력하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일은 변수가 아주 많아 자기 마음대로 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의지도 형제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강하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사람은 자기 의지보다 다른 사람들이 던지는 암시에 더 약한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그냥 한 마디 던진 것이 낮에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다가도, 밤이 되면 왠지 마음에 걸려 도무지 잠을 못 이루는 것이 사람입니다. 왜 우리는 암시에 약한 존재인가요? 우리는 주관이란 것을 가지고 삽니다. 사람의 판단과 결정은 인격의 자아 부분에서 이뤄진다고 합니다. 이 자아가 여러 가지 변수를 종합해 개인적 결론을 내린 것을 우리는 주관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 자아는 그리 완전한 것이 아니어서 외부 영향을 쉽게 받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완벽하고 뚜렷한 주관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간혹 주관이 있는 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특히 성장 과정 중 안정된 환경에서 자라지 못한 사람들은 자아가 아주 약해 다른 사람들의 암시에 쉽게 넘어가고 사기를 당하곤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약한 자아 암시에 잘 걸려드는 특성을 이용하는 것이 위약 효과(플라세보 효과) 혹은 광고 효과이고, 나쁜 것으로는 사기를 치는 것이 해당합니다. 특히 종교 사기꾼들은 사람들의 이런 취약점을 아주 잘 알고 영악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마음 안에 불안과 공포를 주입하고서 자신이 구세주나 예언자인 양 행세하면서 미숙하고 약한 사람들의 자아를 심리적 감옥에 넣고 피를 빨아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적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자아를 가지고 험난한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암시를 줘야 합니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은 밭이나 논과 같다고 하는데 자기암시란 이런 땅에 씨를 뿌리는 행위입니다. 약한 자아는 다른 사람들 말을 잘 들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암시를 줘도 따라 하는 특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긍정 심리학자들은 자신에게 부정적 말을 하지 말고, 긍정적 말을 해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 하는 식의 말을 자주 하면 정말로 인생살이가 꼬이고 해결되지 않는 늪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할 만하잖아. 잘했었잖아, 잘 할 거야" 등 영어로 'I can do it' 하는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긍정적 자기암시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시도해도 되지 않으면 '약한 자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 할 수 있습니다"가 아니라 "주님 저는 약한 존재입니다"라고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고, 주님께 마음을 의탁하는 기도를 하면 자기암시와는 또 다른 차원의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제게서 멀리 계시지 마소서. 주님, 저의 구원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시편 38,22-23). 홍성남 신부 (서울대교구 영성생활상담소장) 상담전화: 02-776-8405 cpbc2013.08.06

출산은 생명 사랑과 인격적 관계의 시작서울 생명위워회 제24차 학술 세미나 '인간의 존엄성과 출산의 가치'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가 13일 개최한 '인간의 존엄성과 출산의 가치' 학술 세미나에서 발표자들이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출산율은 1.23명(2011년 기준)으로, 전 세계 222개 국가 가운데 217위다. 출산을 축복이기보다는 부담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한 탓이다. 정부가 저출산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들 것이라는, 다분히 경제적 우려 때문이다. 출산에 깃든 생명의 신비는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위원장 염수정 대주교)는 13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출산의 가치'를 주제로 제24차 학술 세미나를 열고, 생명에 관한 교회 가르침을 토대로 다양한 각도에서 출산의 의미를 짚었다. 염수정(서울대교구장) 대주교는 인사말을 통해 "출산과정에 대한 기술적 개입이 확대되면서 수정되는 순간부터의 인간 존중, 인격체로서의 인간과 성(性) 등과 관련된 중대한 도덕적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면서 "생명은 하느님 선물이라는 진실에 비춰, 태중의 작은 아기일지라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발표문 요약.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성경의 세계에서 본 생명 (이명기 수녀, 가톨릭대 ELP학부대학 교수) 성경은 생명의 초기 형태가 어떻고, 또 어떤 과정으로 발달했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직 '누가' 그 모든 것을 창조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생명을 말할 때 몸과 영혼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총체적 존재이다. 성경은 인간생명이 지닌 전일성(wholeness)의 특성을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목으로, 목구멍(식도)으로, 숨(호흡)으로, 피로, 영혼으로 표현하는데, 어느 것 하나로 표현해도 그것은 인간생명 전체를 가리킨다.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생명과 관련된 구체적 필요에 대해 망설이지 않고 응답하신다. 생명에 대한 예수의 배려는 그분이 온갖 질병을 고쳐주시는 행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야말로 예수가 목숨 바쳐 수행한 하느님의 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마르 3,4). ▨생명 시작의 생명과학적 이해 (김원선 교수, 서강대 생명과학과) 생물학적 개체로서 인간은 난자와 정자의 융합에 의해 수정란이 형성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정자와 난자는 생식을 위해 고도로 분화된 특수세포이지만 유전적으로는 완벽하지 못한 상태이다. 수정이 되는 순간부터 유전적으로 완전함이 성취되고 생명력을 얻으면서 활발한 물질대사와 함께 생명체로서의 긴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수정란은 한 개체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와 생명체로서 지녀야 할 기본 특성을 이미 모두 갖췄다. 단순한 세포덩어리로 보이는 배아는 실제로는 생명체의 기본 기능을 차질없이 수행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이것이 생명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과연 배아의 정체는 무엇인가. 단순해 보이는 사안도 막상 경계선에 이르면 그 경계는 멀리 벗어나 있다. 이는 인간 능력이 절대적이지 못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불확실성과 가치전도에 의한 편의주의적 경향은 사안을 매우 복잡하게 만든다. 낙태ㆍ배아줄기세포 연구ㆍ체세포 복제가 이뤄지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다. 양보할 수 없는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면서 이를 과학의 언어로 합리화하고 인위적 잣대로 재단하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출산의례와 생명의식 (이향만 교수,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새 생명의 탄생은 한 집안의 축복이자 경사이다. 출산과정에서 나타나는 정성과 인간생명에 대한 경외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생명의식을 보여준다. 전통적 출산의례는 출산과정만이 아니라 한 생명의 잉태를 위한 준비과정인 수태와 출산과 양육에 이르는 전 과정을 아우르고 있다. 이 점에서 혼인식이 출산의례의 시작인 셈이다. 실질적 출산의례는 태교로 시작해 태어날 아이의 삶을 예견하는 태몽, 출산과 금기, 아기의 장수를 비는 첫 잔치인 백일, 아기가 장차 할 일을 예견하는 돌잡이, 정상적 가족 구성원이 되는 세 돌에서 끝난다. 세 돌은 부모에 대한 삼년상의 근거가 된다. 사람은 모든 생명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다른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 이를 통해 자기 생명의 가치와 권리가 생긴다. 전통적 출산의례는 이러한 생명의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새 생명은 한 공동체에 새로운 희망이자 의미이고 거울이었다. 출산의례는 정성을 다해 새 생명을 경외하는 가운데 생명의 신비를 깨우치고자 했다. ▨출산의 의미와 윤리적 실천 (정재우 신부, 가톨릭대 생명대학원 교수) 자녀를 원하는 부모의 올바른 태도는 자녀의 잉태를 결정하는 분은 따로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녀를 부부의 바람 또는 성취의 대상으로 삼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기다리고 '선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뜻한다. 부부행위는 인격적이고 책임 있는 사랑의 행위로, 부부가 배우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동시에 서로에게 새 생명을 선사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피임을 통해 출산의 책임을 배제하는 부부행위는 전적인 내어줌과 받아들임이라는 부부 사랑의 의미를 손상하며, 시험관아기 시술 등 사랑의 행위가 배제된 출산은 자녀를 지배하고 도구처럼 다룸으로써 자녀 사랑의 의미를 손상한다. 결국 두 가지 차원 중 어느 하나를 배제한 행위는 인격적 의미를 상실하고 감각적 쾌락이나 만족을 얻기 위한 물리적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출산 본연의 의미를 회복한다는 것은 사랑과 인격적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인간 삶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친밀한 관계인 부부 관계와 부모-자녀 관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런 인격적 관계 안에서 행위자 자신이 인격체로 성장하게 된다. 퇴사자22012.10.17
![[신앙의 해] 우리는 이렇게 살겠다 - 서울대교구](//cpbc.co.kr/CMS/newspaper/2012/10/rc/428141_1.0_titleImage_1.jpg)
[신앙의 해] 우리는 이렇게 살겠다 - 서울대교구'허약한 신앙' 기초 다지고, 신앙의 기쁨 재발견 11일, '신앙의 해' 막이 올렸다.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대다수 교구는 이날 교구별로 신앙의 해 개막미사를 봉헌하고 변화와 쇄신을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각 교구는 신앙의 해를 알차게 보내고자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각 교구가 마련한 신앙의 해 청사진을 살펴본다. 서울대교구가 신앙의 해를 앞두고 펴낸 「신앙의 해 안내서」(이하 안내서)는 '신앙의 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궁금해하는 모든 교구민을 위한 계획서이자 참고서다. 70여 쪽 분량의 안내서는 교구 차원 행사와 함께 본당에서 신앙의 해를 의미있게 보낼 수 있도록 돕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안내서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신앙의 해 선포를 앞두고 반포한 자의교서 「믿음의 문(Porta Fidei)」을 시작으로 △서울대교구 신앙의 해 사목교서 △신앙의 해 다섯 가지 표어 △교구 차원 세부안 △본당 차원 세부안 등 다섯 항목으로 이뤄졌다. 안내서 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교구 '신앙의 해' 사목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신앙의 해를 선포한 것은 세계교회가 심각한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앙의 위기는 지역 교회마다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유럽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큰 세력은 과도한 과학적 사고방식과 개인주의다. 신앙의 중요성과 의미를 상실한 '식어버린 신앙'이 문제다. 한국교회에도 이런 형태의 위험이 서서히 나타난다고 본다. '허약한 신앙'이 그것이다. 많은 이들이 가톨릭 신앙에 대해 호감을 갖고 교회 문을 두드리지만, 매년 거의 입교자만큼 냉담교우가 양산된다.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해 신앙을 저버리는 이들이 많다. 신앙의 기초가 약해서다. 따라서 신앙의 해 모든 프로그램을 신앙의 기초 강화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 신앙이란 하느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성경을 통해 하느님께 귀 기울여야 하며, 꾸준히 기도하면서 하느님과 자주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또 미사 중에 주님과 일치를 이루고 신자들 간 친교를 이룬다. 주님과 친교를 이룸으로써 그분의 손과 발이 돼 세상에 나아가 봉사할 힘을 얻게 된다. 이를 다섯 가지 표어로 요약하면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 △교회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 △미사로 하나 되는 신앙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이다.▨교구 차원 세부안 서울대교구는 11일 명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신앙의 해 개막미사를 신앙의 해 성격이 드러날 수 있게 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교구장 염수정 대주교 주례하고 사제단이 공동집전한 개막미사에서는 세례 갱신식을 통해 세례로 시작된 신앙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보편지향기도도 특색이 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교황과 모든 성직자를 위해 기도합시다 등 4가지 보편지향기도는 제목만 언급하고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신앙의 해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봉헌시간에는 성경과 기도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가톨릭교회교리서」, 사회교리서, 빵과 포도주에 이어 빈 바구니를 봉헌했다. 빈 바구니는 앞으로 신앙의 해를 살아갈 모든 이들이 신앙의 열매인 선교와 봉사,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각오를 의미한다. 교구는 개막미사 후 공의회 문헌과 교리서를 교구 모든 본당에 보급한다. 또 문헌 내용을 강의와 강론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주제별로 쉽게 정리한 자료집을 제작키로 했다. 주보와 평화신문ㆍ평화방송 등 교회 매체를 통해서도 문헌과 교리서의 주요 내용이 소개된다. 한편 신앙의 해 폐막미사는 2013년 11월 24일(그리스도와 왕 대축일)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다. #사목국 사목국은 올해 12월 31일까지 신앙의 해 다섯 가지 표어를 주제로 '신앙체험수기'를 공모, 내년 11월 24일 폐막미사 때 당선작을 시상할 예정이다. 노인사목부는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위한 방문 교리교사를 양성한다. 방문 교리교사로 봉사하려는 이들은 본당 주임신부 추천을 받아 교육과정에 등록하면 된다. 교육 이수자들은 봉사자 자격증을 받고 본당과 가톨릭중앙의료원 및 일반병원사목부와 연계해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소공동체 교재 「길잡이」를 발행하는 일반교육부는 교리서 내용 중 1편 신앙고백을 「길잡이」에 연재함으로써 교리서 내용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다. 선교전례사목부는 2013년 6월 21일 명동성당에서 '예비신자 교리교사의 날' 행사를 열어 '가톨릭교회교리서와 교리교사'를 주제로 강의와 체험담 발표를 갖고, 미사를 봉헌할 예정이다. 단체사목부는 염 대주교와 평신도단체 간 만남의 날 행사를 열고 △신앙체험 발표 △2013년 사목지침 안내 △교구와 협력 부분 논의 및 협조사항 안내 등을 통해 교구와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단체 활성화를 논의한다. #청소년국 청소년국은 청년성서모임ㆍ문화홍보국 등과 함께 2013년 5월 청소년의 달과 명동성당 문화축제에 발맞춰 '청년 기도의 밤' 행사를 연다. 5월 중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떼제기도를 겸한 성시간과 참회예절, 개별 고해성사, 묵주기도, 교구장과 함께하는 미사 등이 열린다. 초등부는 내년 3월 10일 교리교사의 날 행사를 혜화동 청소년회관 또는 우리은행 대강당에서 개최한다. (재)서울가톨릭청소년회가 주관하는 이날 행사는 외부강사 강의와 신나는 찬양, 미사와 근속교사 시상식 순으로 진행된다. 초등부는 또 올해 10월부터 내년 10월까지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우리 손으로 성경 만들기'(가제) 성경필사 행사를 열고, 초등부 한마음 큰잔치(가제)도 연다. 중고등부는 올해 11월 4일 올림픽공원에서 제4회 가톨릭 유스데이(CYD) 행사를 열고 '신앙의 해 선포식'을 갖는다. 아울러 내년 8월 9~11일 의정부 한마음청소년수련원에서 중고등부 연합캠프를 열고, 신앙의 해와 관련해 청소년들에게 신앙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할 예정이다. 대학생사목부는 내년 7월 18~28일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되는 '2013 리오 세계 청년대회'(World Youth Day Rio 2013) 참가를 통해 청년들 신앙을 다진다. 세계청년대회는 청년들에게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하고, 청년들이 기쁨으로 하느님과 교감함으로써 스스로 신앙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교구 신학생들도 대거 참가할 계획이다. 청년부는 강사진을 구성해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회교리ㆍ성과 사랑ㆍ성경 등 교육 및 특강을 실시하며, 교리경시대회 등을 연다. 청년교리서 「유캣(YOUCAT)」(가톨릭출판사)을 이용해 청년들이 교리공부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울 방침이다. 아울러 SNS를 활용한 신앙내용 전파에도 앞장선다. 한국스카우트 가톨릭연맹은 11월 10일 용문청소년수련원에서 전국 지도자대회 중 가톨릭스카우트 신앙의 해 선포미사를 개최하고, 4대 복음 필사 운동, 가톨릭연맹 10주년 기념 전국 도보성지순례 대장정 등을 펼친다. 아울러 중고등학교사목부와 가톨릭학생회도 △Cell 모임 △학생대회 △가톨릭학생회 신앙대회 등 신앙의 해 행사를 기획했다. #문화홍보국ㆍ성소국 문화홍보국은 교계 및 일반 신문ㆍ방송사 종교담당 기자를 대상으로 신앙의 해 교구 및 본당 행사를 널리 알리고,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와 팟캐스트 서비스를 통해 뉴미디어 홍보에 주력할 계획이다. 주보도 신앙의 해를 위한 개편 작업이 한창이다. 주보의 최인호(베드로) 칼럼과 가톨릭교리 해설, 사회교리, 청소년 특집 등을 신앙의 해에 초점을 맞춘다. 아울러 명동성당을 찾는 젊은이들을 위한 단기 명상ㆍ피정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가톨릭언론인협의회는 교구 성지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서소문과 절두산ㆍ새남터 등을 순례하는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합동 성지순례를 계획했으며, 가톨릭 언론인신앙학교 과정에 순교성지에 대한 강의도 마련한다. 교구 순교사적지와 관련한 스토리텔링 기획 및 외국어 번역 작업도 벌인다. 성소국은 11월 4일 서강대에서 열리는 가톨릭 유스데이(CYD)에서 상설부스를 운영해 성소계발에 주안점을 두는 한편, 2013년 1월 31~2월 1일 열리는 부제서품식과 사제서품식에 참석하는 신자와 수품 대상자들이 신앙의 해를 좀 더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영상 제작과 홍보물을 제작할 계획이다. 아울러 내년 4월 21일 가톨릭대 신학대학에서 열리는 성소주일 행사 때에도 신앙의 해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사회사목부ㆍ평신도사도직협의회 사회사목부는 전 교구민을 대상으로 신앙실천 캠페인 '제가 하겠습니다! I DO!'를 펼친다. △기도 △단식 △자선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이뤄진 캠페인은 신자들이 '제가 하겠습니다 봉헌서약서'를 작성토록 함으로써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이끈다. 평협은 내년 3~6월 14주 동안 가톨릭회관에서 열리는 '평신도학교 공의회과정'에 더 많은 신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 홍보할 계획이다. 교구 각 본당은 10월 14일 주일 교중미사를 신앙의 해 개막미사로 봉헌한다. 대축일급 미사로 봉헌되는 이날 미사에서 세례 갱신식을 갖는다. 보편지향기도는 명동성당 개막미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도 제목만 언급하고 침묵한다. 성경과 기도서, 공의회 문헌 등을 봉헌하는 봉헌예식도 같다. 안내서는 본당에서 △하루 한 장 성경 외우기 △성경 쓰기 및 공부하기 △가정기도 바치기 △성인성녀 닮아가기 △「가톨릭교회교리서」 읽기 △견진성사 받기 △성체신심 강화 △주중 고해소 운영 △순교사적지 순례 △대부모와 대자녀 관계 증진 등에 역점을 둘 것을 권고했다. 정리=이힘 기자 lensman@pbc.co.kr이힘2012.10.09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0>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하)](//cpbc.co.kr/CMS/newspaper/2014/01/rc/491226_1.1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하)거대한 우주론적 차원에서 성체성사의 신학 재조명 샤르댕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아무 도구도 없이 홀로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체성사의 신비를 온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해 거행하는 체험을 했다. 그는 세상 자체를 살아 있는 성체로, 하나의 전례로 보고 성체성사의 신학을 거대한 우주론적 차원에서 재조명했다. 【CNS】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 샤르댕은 자신의 개인적 삶의 여정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과학적 탐구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합하는 낙관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세계관을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주론적 차원의 신학사상을 전개했는데, 이는 20세기 초중반 당시에 매우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을 줬다. 한편으로 샤르댕의 신학사상은 그의 생전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팎에서 많은 논쟁을 유발시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긍정적인 영향 또한 계속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샤르댕의 신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의 「사목헌장」과 「교회헌장」 작성에 사상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온 땅을 주님께 드리는 제단으로 우주론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샤르댕의 신학사상을 가장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은 그가 중국에 가서 지질학과 고생물학을 연구하기 시작하던 시절인 1923년의 신앙체험을 기록한 글 「세계 위에 드리는 미사」이다. 당시 그는 학문적 탐사를 위해 몽골 접경지대인 오르도스(Ordos) 사막 한가운데에 머물고 있었다. 마침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맞아 새벽에 일어났지만 그는 미사를 봉헌할 도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샤르댕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사막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아무 도구도 없이 홀로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체성사의 신비를 온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해 거행하는 체험을 했던 것이다(「세계 위에 드리는 미사」 참조, 김진태 옮김/이병호 감수,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4, 표지). 그곳에는 성당도 제단도 없었기에, 샤르댕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온 땅을 주님의 제단으로 삼아 미사를 봉헌한다. "주님, 이번에는 아시아의 대초원 안에 들어와 있지만, 또 다시 저는 빵도 포도주도 제단도 없이 이렇게 서서, 그 모든 상징들을 뛰어넘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순수 실재를 향해 저 자신을 들어 올리려 합니다. 당신의 사제로서, 저는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세상의 온갖 노동과 수고를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15쪽). 그렇다면 온 땅을 주님의 제단으로 삼아 미사를 집전하는 샤르댕 신부가 빵과 포도주 대신 미사의 예물로 봉헌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인간과 생명체들이 이뤄내는 삶의 노력과 수고다. "저쪽 지평선에서는 이제 막 솟아오른 태양이 동쪽 하늘 끝자락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불이 찬란한 빛을 내며 떠오르면, 그 아래 살아 있는 땅의 표면은 다시 한 번 잠에서 깨어나 몸을 떨며 또다시 그 두려운 노동을 시작합니다. 오 하느님, 저는 새로운 노력이 이루어낼 소출들을 저의 이 성반에 담겠습니다. 또 오늘 하루 이 땅이 산출해낼 열매들에서 짜낼 액즙을 이 성작에 담겠습니다. 이제 곧 지구 곳곳으로부터 올라와 '영'(靈)을 향해 모아질 온갖 힘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는 영혼의 깊은 속 그것이 저의 성반이며 성작입니다. 새날을 맞이하라고 지금 빛이 흔들어 깨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들과 신비로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15~16쪽).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모든 것을 마치 성체성사에 사용되어 거룩하게 변화되고 거양될 '대제병'처럼 하느님께 봉헌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샤르댕이 발견한 "세계의 성사"(36쪽)다. "주님, 새날의 첫 새벽에 당신께서 만드신 창조계 전체가, 당신의 이끄심에 따라 움직이며 모든 것을 다 올려 봉헌하는 이 '거대한 제병'을 받으소서. 저희의 노동인 이 빵이 그 자체로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부스러기일 뿐임을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고통인 이 술 역시 다음 순간에 사라질 하찮은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볼품없는 물질 덩어리 그 깊이에 당신께서는 거룩함을 향한 어떤 억누를 수 없는 갈망을 숨겨 두셨습니다"(18~19쪽). 샤르댕의 신학사상에 대한 평가 「세계 위에 드리는 미사」를 통해 샤르댕은 성체성사의 신학을 거대한 우주론적 차원에서 재조명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처럼 우주론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샤르댕의 신학사상에 대해 교회 내에서도 많은 반대와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오늘날 샤르댕의 신학사상이 가장 큰 오해를 받는 부분은 현대 뉴에이지(New Age) 운동의 이론가들과 그 추종자들이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에 관한 그들의 잘못된 개념과 논리를 합리화하고 정당성을 얻기 위해 샤르댕의 글을 자주 언급하고 인용한다는 점이다. 뉴에이지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바는, 세상의 궁극적 실재란 오직 하나의 비인격적이고 신성한 에너지로서의 '우주적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적 차원에서의 비인격적인 궁극적 실재 이론을 내세우는 세계관을 옹호하기 위해서 샤르댕의 저서들이 뉴에이지 운동의 이론가에 의해 계속 인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샤르댕의 사상은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그리스도론을 주장하면서도 결정적으로 그리스도 강생 신비의 인격적 차원을 강조한다. 즉, 모든 실재가 혼동 없이 수렴되는 중심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인격적 실재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실 샤르댕의 진정한 의도는 초대 교회부터 전수되는 고전적인 '말씀(Logos) 그리스도론'을 현대 과학사상이 탐구하는 우주적 차원에서 재조명하려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약 성경의 바오로 서간에 나오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에페 1,3-10; 콜로 1,15-20; 필리 2,6-11 참조)을 근거로 샤르댕은 역동적인 현대적 세계관에 맞게 창의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우주적 보편성에 관한 신학사상을 전개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재위 2005~2013)는 샤르댕의 신학사상을 매우 긍정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 최종 책임자로서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을 오랜 기간 역임했다. 그러므로 베네딕토 16세의 긍정적 평가는 샤르댕 신학사상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모두에게 알려준다. 요제프 라칭거(Joseph Ratzin ger)라는 개인 신학자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절인 1968년 출간된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장익 옮김, 분도출판사, 2007년 신정판)은 베네딕토 16세의 신학적 기조 사상이 압축적으로 잘 드러나는 핵심 저서다. 바로 여기에서 베네딕토 16세는 샤르댕의 신학사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특히 예수님에게서 드러나는 인성과 신성의 결합 의미를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지평에서 설명하고자 시도한 공로를 높이 산다. 그리고 이 평가는 샤르댕의 그리스도론 전체에 대한 훌륭한 요약이기도 하다. "이런 연관을 오늘의 세계관에서 새로 생각하고 다소 지나치게 생물론적 경향이 없지는 않았으나 전체로 보아 그래도 옳게 이해했으며, 여하튼 새로이 대할 수 있게 한 것은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큰 공로였다고 인정해야 할 줄 안다.…여기 현대 세계관의 견지에서 때로는 지나치게 생물학적 어휘를 써 가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바오로-그리스도론의 방향이 파악되고 새롭게 이해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신앙은 예수에게 있어 생물학적 도식으로 말해서 이를테면 다음 단계의 진화적 도약을 성취한 인간, 우리의 제한된 인간 존재 양상과 단자(單子)적 봉쇄에서 탈출한 인간을 보는 것이다. 인격화와 사회화가 더 이상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뒷받침하는 인간, 지상(至上)의 일치가 또한 아울러 지상(至上)의 개성과 매한가지인 인간, 인류가 그에게서 최대한 자신의 미래로 성취될 수 있는 저 인간을 신앙은 예수에서 본다. 따라서 신앙은 균열된 인류를 유일한 아담, 유일한 '몸', 미래의 인간존재 안으로 모아들이는 움직임의 시동을 그리스도에서 본다. 신앙은 그리스도에게서 인간이 오히려 '사회화'되고 유일한 분과 일체가 돼 개개인이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될 저 미래를 본다"(239~242쪽). 세상 자체가 곧 성체가 됨을 향하여 한편, 2009년 7월에도 베네딕토 16세는 로마서 8장에 대한 강론을 통해 샤르댕이 「세계 위에 드리는 미사」에서 제시했던 관점을 인용하며 그의 신학사상을 매우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어쩌면 이는 샤르댕 신학이 담고 있는 최종 지향점에 대한 베네딕토 16세의 영성적 해석이기도 하다. "사제직의 역할은 세상을 축성하여 세상 자체가 살아 있는 성체가 되도록, 하나의 전례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전례는 세상의 실재와 동떨어진 그 어떤 것이 아니게 됩니다. 오히려 세상 자체가 살아 있는 성체가, 하나의 전례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테이야르 드 샤르댕에 의해 제시되었던 위대한 전망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에는, 우리가 진정한 우주적 전례를 거행하게 될 것인데, 거기에서는 우주 자체가 곧 하나의 성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 기도합시다. 하느님께 대한 흠숭 안에서 세상이 새로이 변형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변형이 바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합시다."박준양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신학과사상학회편집위원장)cpbc2014.01.07
![[성경 속 궁금증] <30> 부활하신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살과 뼈를 보여주셨을까](//cpbc.co.kr/CMS/newspaper/2012/04/rc/41265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부활하신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살과 뼈를 보여주셨을까영혼과 함께 육신도 부활 확인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에게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 하셨다. 그림은 '의심하는 도마' (카라바조 작, 1602년).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때 제자들은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을 다시 만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성경 기록을 보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뵙고도 부활을 믿지 못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루카 24,36-37). 제자들에게 예수님 부활은 너무 당황스럽고 믿기 힘든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실제로 살아계시며 제자들과 함께 계심을 강조하셨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루카 24,38-40). 그런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놀라며 예수님 부활을 완전히 믿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러한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드심으로써 다시금 부활을 확인시켜 주셨다. 결국 의심 가득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져보고, 먹는 것을 본 후에야 비로소 주님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활한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며, 그분 육체는 실제로 존재한다. 부활한 예수님 생명은 영혼의 생존만이 아니라 육신의 생존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특별히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육체를 강조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루카가 사목한 공동체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예수님 시대에서 떨어져 있었으며, 그리스계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철학적 사고방식을 지닌 그리스계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육신과 함께 부활했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들 고유한 사고방식으로는 육체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 부활은 그리스도교를 구성하는 신앙의 기본적 특징이었다. 그리스도교는 나자렛 예수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카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예수님 부활의 참된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부활한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한 이야기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한 육체를 순전히 환영(幻影)의 차원으로만 생각하려는 교회 일부의 시도를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루카복음이 부활한 예수님의 육체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에서 루카가 강조한 것은 지상의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었다. 그래서 루카는 예수님이 육신과 뼈를 가지고는 있지만, 보통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기도 하고 사라지시기도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부활은 몸의 실재와 관련된 것으로, 몸이 없는 영과는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퇴사자22012.04.25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1>나자렛 예수-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1](//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7394_1.1_titleImage_1.jpg)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 나자렛 예수-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1믿는 이들에게 이미 다가온 '하느님 나라' 하느님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과 새로운 계약(新約)을 맺는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성령강림 사건이 펼쳐진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보물이 무궁무진 묻혀 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백운철 신부가 독자 여러분과 신약의 세계를 탐구하는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을 연재한다. 이 연재는 평화방송 TV '백운철 신부의 신약여행'(연출 조규만 PD, 월요일 오전 9시)과 함께 진행된다. 백운철 신부는 파리가톨릭대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가톨릭대 신학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공생활을 시작했다. 그림은 예수가 요르단 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장면을 형상화한 유리화. 【CNS 자료사진】 우리 신앙의 대상인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을 살펴보려면 당시 팔레스티나의 정치적ㆍ종교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기원전 63년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에 진군하면서부터 유다는 로마의 속국이 됐다. 로마는 팔레스티나를 완전히 장악해 제국주의적인 지배를 강화했다. 예수가 활동했던 베로데와 갈릴래아는 헤로데왕의 아들 안티파스가 다스리게 됐다. 종교적으로는 사두가이, 바리사이, 요한 세례자 그룹 등 여러 계파가 공존했다. 그러나 계파들은 계약적 율법주의(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는 조건으로 율법을 줬고, 신자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었다.■예수의 탄생 예수는 헤로데왕 치하 기원전 6~7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탄생일을 알 수 없음에도 12월 25일을 탄생일로 정한 것은 이 날이 로마의 동짓날인 태양신 축제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태양'이라는 신앙고백과 맞물려 이교도 축제일을 탄생대축일로 정한 것이다. 신약에서 마태오와 루카복음을 제외하면 동정 잉태를 명시한 부분이 없다. 오히려 유다인들이 예수를 맘제르(사생아, mamzer)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미뤄 사생아라는 의혹을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동정 잉태는 성모 마리아가 제자 공동체에게 들려줘 가족 전승 형태로 전해졌을 것이다. 때문에 초대교회는 일부 제자를 제외하고 예수 탄생 비밀을 알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열심한 유다교 신자였던 부모에게서 신앙을 물려받았고, 나자렛 회당에서 율법을 읽을 만큼의 지식을 갖췄다. 또 나자렛에서 하느님과 깊이 친교를 나누는 경험을 통해 성경에 대해 독자적 이해를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12살 때는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예수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했다(루카 2,46-47).■세례와 공생활의 시작 예수는 세례를 받으며 공생활을 시작했다. 요한 세례자의 활동시기를 바탕으로 추정하면 세례 시기는 서기 27년 가을이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확실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요한은 "세상 종말이 가까이 와 하느님 심판이 임박했으니 흐르는 물에서 세례를 받으라"고 가르친 바 있다. 요한은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회개의 열매로 옷과 먹을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고 요구하며 사회정의 실천을 강조했다.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줬다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 역시 전달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예수가 하느님 아들로 활동할 수 있었던 힘은 성령에서 비롯됐다. 루카는 예수가 성령 안에서 흥겨워하며 하느님을 찬미했다고 전한다(루카 10,21). 본인은 이를 성령 안에서의 취기(醉氣)로 이해하고 싶다. 예수의 흥겨움에는 일종의 전염성이 있었고, 제자들 역시 사람들과 음식과 친교를 나누며 즐거워했다.■하느님 나라 예수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바실레이아 투 테우(Basileia Tou Theou,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 나라)'다. 이 말은 예수 이전에도 쓰인 바 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온다"는 독특한 표현을 썼다. 이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가 미래에 가야 하는 공간적 대상을 넘어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는 역동성을 강조한다. 또 이 말은 하느님 한 분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며, 이방 민족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리라는 민족주의적 희망을 담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가 내 안에 머물며 나를 이끌 때 이미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게 된다. 친밀한 일치 안에서 우리 가운데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기적의 권능과 밀접하게 관련시켰다. 기적은 하느님 나라를 현실화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예수가 행한 마귀 추방과 치유 기적은 하느님 권능을 사람들에게 펼쳐 자비로운 은총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결코 기적을 행할 수 없다. 기적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능력이다. 이 능력은 믿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믿음 없이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우리에게 도달할 수 없고, 치유도 구원도 일어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2-24). 정리=김은아 기자 euna@pbc.co.kr퇴사자22013.01.08
![[세계 물 협력의 해]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ㆍ평화신문 공동기획- 목마른 하느님 1](//cpbc.co.kr/CMS/newspaper/2013/03/rc/443372_1.0_titleImage_1.jpg)
[세계 물 협력의 해]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ㆍ평화신문 공동기획- 목마른 하느님 1물은 생명이다 / 가톨릭교회 가르침과 프란치스칸 영성 안에서 바라본 물국내에서 몇 안되는 모래강인 내성천. 사진은 경북 예천군 회룡포마을 전경. 평화신문은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와 함께 새 기획 '목마른 하느님'을 시작한다. 전문가 기고와 현장 취재를 통해 인간 생명의 근원인 물의 소중함과 그 안에 깃든 영성적 가치를 전한다. 유엔(UN)은 세계 각국의 물 부족 상황을 전 지구적 차원의 협력으로 극복하자는 취지로 올해를 '세계 물 협력의 해'로 정했다. <연재 순서> 1. 물은 생명이다 2. 생물학적 관점으로 본 물 3. 물에서 배운다 4. 동양사상에서 바라보는 물 5. 물은 모두의 것이다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승은 물이 인간에게 주는 이로움에 관해 가르침을 준다. 물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중요한 실제 순간과 상징적 순간에 함께한다. 구약 예언자들은 영적인 물과 지상의 물이 함께 흘렀던 한 장소를 영적 상징으로 여겨 지상의 물을 사용해 마음속에 그렸다. 이사야는 "내가 목마른 땅에 물을, 메마른 곳에 시냇물을 부어 주리라. 너희 후손들에게 나의 영을, 너의 새싹들에게 나의 복을 주리라"(이사 44,3), 그리고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이사 55,1)하고 선포한다. 에제키엘(47,1-12 참조)은 성전 밑에서 솟아올라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둑을 따라 흐르는 강이 되는 물을 봤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 47,9).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의 흐르는 물로 세례를 받으셨다(마르 1,9).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하고 외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가하고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수를 주신다(요한 4,4-15).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상징적 의미로 가득하다. 돌아가실 때에 이르자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요한 19,31-37). 우리 영혼을 위해 예수님이 주신 생명수와 우리 몸을 위해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주어진 살아 있는 물은 하나는 자연적인 것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초자연적인 것을 위한 것이다. 둘 다 생명을 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그리스도 전통에서 중요한 상징이다. 물이 없으면 모든 것이 죽는다. 물은 모든 생명체가 그것을 통해 생겨나고 존재하고 번성하는 기본 요소다. 물은 지구의 활력소이면서 40억 년간 진화해왔다. 또 정교하고 복잡하게 균형 잡힌 순환계를 유지시킨다. 공동선에 기여할 뿐 아니라 공동선의 일부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신선한 물 자원은 유한하며, 이제는 공공재화가 아니라 상품이 되고 있다. 현재 안전한 식수 부족은 10억이 넘는 사람들 복지를 위협한다. 또 24억 명이 적절한 위생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 가난한 나라의 도시 빈민들은 같은 도시의 중상류층보다 4~100배나 더 많은 물값을 지불해야 한다. 빈민들에게 물이 '생존권 문제'가 되고 있다. 본성상 물은 상품 가운데 하나로 취급돼서는 안 되며, 합리적이며 공동으로 사용해야 한다. 물은 공공의 선이기에 물 분배는 전통적으로 공공기관 책임에 속한다. 물 분배를 민간영역에 맡기더라도 물은 계속 공공의 선으로 간주해야 한다. 물에 대한 권리는 모든 인간 권리와 마찬가지로 인간 존엄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물을 경제적 효용 가치로만 여기는 단순한 양적 평가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 물이 없으면 생명은 위협받는다. 그러므로 안전한 식수에 대한 권리는 보편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쓰임 많고 값진 물을 통해 하느님을 찬미했다. 쓰임이 많은 것은 인류는 물론 모든 생명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생명을 기르고 자라게 하는 물 만큼 쓰임이 많은 것은 없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뜻에 따라 생명을 기르기에 값진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뜻에 맞갖게 자신의 쓰임과 값을 살아가는 것을 가난(무소유)이라고 가르치셨다. 물질적 결핍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갖게 쓰이고 값을 내는 것이다. 물을 더 쓰임 많고 값지게 사용하는 것은 모든 생명을 위한 공공의 선을 지향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3년 사순 담화에서 예수님께서 물과 목마름을 자주 언급하시며 성서적 측면을 말씀하셨다. 때로는 인간 활동이 불모지를 만들고 수질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된다. 당장 이를 그만둬야 한다. 해결책은 이러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돕는 기관들의 헌신적 지원과 협력에서 찾을 수 있다. 김정훈 신부(작은형제회, 주교회의 환경소위 위원) cpbc2013.03.12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9>칼 라너(하)](//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2615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칼 라너(하)자신의 한계 넘어 하느님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고찰칼 라너는 시대가 제가하는 문제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중심의 신학으로 초월론적 방법론을 펼치며 현대 신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라너는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때때로 그러한 질문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부하는 민감한 것이기도 했지만 라너는 이러한 도전을 피하지 않았다. 1968년에 반포된 윤리 회칙 「인간 생명」은 인공피임을 단죄했다. 라너는 교도권 입장을 존중했지만, 회칙이 개인의 양심적 결정을 더 존중했어야 한다고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그렇다고 그가 자유로운 성문화와 피임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성문화에 대한 회칙의 강경한 입장은 정당한 것이라고 보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돼 심각한 문제였던 사제 독신제에 관해서도 라너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라너는 사제 독신제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신제를 없애면 사제직이 속물적이게 되는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론상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사제 독신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엔 강하게 반대했다. 진지한 실천 없이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려는 싸구려 성향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의 눈엔 사제 독신제를 폐지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라너는 오히려 독신제를 '십자가의 우둔함'이라고 표현하며 옹호했다. 1970년 교황의 무류권 문제를 제기한 한스 큉(1928~ )을 향해 라너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큉은 계시된 진리와 이 진리를 교의적인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다. 인간 개념으로 규정된 것은 언제나 왜곡이 일어나기에 계시 진리를 온전히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교의적인 문장은 계시 진리라고 할 수 없기에 절대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나아가 교회 가르침을 보호하고 때론 교리를 선포하는 교황에겐 신앙에 대한 무오류성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미 인간의 사고로 개념화되는 순간 계시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교황이 정한 교의를 신자에게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신자들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했다. 라너는 이러한 큉의 주장을 위험하게 여겼다. 큉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업적 즉, 하느님의 강생은 신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생이 신자들에게 의미를 준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의 이해 방식과 능력에 상응해 이뤄진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라너는 진리에 대한 결정은 언제나 개념이나 문장을 통해 정리돼야 한다고 보았다. 교회가 하느님의 계시 진리를 이해하고 있고 그것을 참되게 전달할 수 있다는 데 반대한다면, 즉 하느님의 구원 진리에 대한 교회의 인식과 전달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모든 인간에게 향하는 하느님 계시가 의미 없고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류성의 거부는 결국 성경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오류 없이 하느님 말씀을 인지하고 바르게 기록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기록한 성경이 계시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물론 언어를 통한 개념적 정리가 진리의 심연을 다 열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라너는 하느님의 계시 진리가 인간의 이해 능력을 멀리 뛰어넘어서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칼 라너 신학의 핵심은 초월론적 방법론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인간의 정신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을 추구하는 초월 행위를 숙고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라너는 경험되는 구체적 사물 또는 사건을 뛰어넘어 그 사건과 사물이 존재 가능하도록 하는 전제인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을 고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의 출발점은 인간에 대한 이해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 내의 정신'이다. 세계 내에서 정신적 존재로 자신을 성취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그 안에서 타인들과 '함께 하는 존재'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제한성을 벗어나 궁극적인 존재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자이며 참된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을 묻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자기 스스로에서 오지 않고 타자로부터 선사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 한계를 넘어선 무한한 그 어떤 존재, 세상의 모든 존재를 허락하는 알 수 없는 어떠한 절대자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분이 곧 하느님이다. 모든 존재자에게 그 존재를 허락하고 빛을 비추는 최종 근거, 즉 하느님은 인간에게 무한한 현실이자 무한한 지평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은 현실이지만 무한하기에 인간에게는 신비로 다가온다. 절대자 하느님은 무한한 존재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의 인식능력에 상응해 진리의 빛을 비추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해부하듯이 사물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느님의 무한한 현실은 인간에겐 신비로운 존재이자 그 심연을 알 수 없는 존재다.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은 인간의 궁극적 질문조차도 삼켜버리는 어두운 심연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하느님 존재는 결국 모든 존재자들의 의미를 부여하는 무한의 현실이고 세계와 인간의 궁극적 기원이 되는 절대적 신비인 것이다. 칼 라너의 신학은 가톨릭교회의 전통 신학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신학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제기되는 질문에 새로운 답을 내놓으려 했다. 그는 교회의 권위적 방법론을 탈피하고 '아래에서 위로'라는 인간중심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의 인간 이해의 핵심은 하느님을 찾아 자신을 끊임없이 초월하는 인간이다. 이를 위해 라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과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의 통합을 시도한 요셉 마레샬의 철학을 수용했다. 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인간 이해를 제공한 마틴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을 수용하기도 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질문은 구체적으로 현시점을 살아가는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히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현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제한돼 있음에도 무한한 현실인 하느님에 대해 무한히 개방된 존재다. 인간은 무한한 신비인 하느님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해 나아간다. 이러한 가운데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지며 더욱 책임 있는 존재로 성장한다. 인간은 무한한 현실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가졌고, 역사 내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인간은 자신이 사는 세상을 하느님의 사랑에 상응해 구성하도록 노력한다. 1984년 초 칼 라너는 매우 바쁜 시기를 보냈다. 2월 11~12일 프라이부르크대교구 가톨릭 학술원에서 '하느님의 신비 앞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주제로 강연했고, 며칠 지난 2월 17일 런던에서 강연한 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와 대화'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것이 라너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었다. 2월 22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한 그는 3월 5일 인스브루크 공동체에서 생일 축하연을 가졌다. 그 이후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을 일으켜 코피를 흘렸다. 3월 9일 입원한 그는 중간에 회복하는 듯 했지만 상태가 악화돼 3월 30일 밤 11시 26분에 선종했다. 그는 4월 4일 인스브루크 예수회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연구는 근대주의 개념을 긍정적으로 수용해 근대주의 도전을 극복하려 한 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자신의 신학으로 인간을 강조함으로써 현대 신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그는 인격의 세 가지 특징을 잘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는 '본연성', 자신의 주인이 되는 '주체성', 그리고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되지 못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독자성'이 그것이다. 물론 라너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격적인 하느님의 무한성과 독자성 그리고 주체성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제한적이라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라너의 신학적 기획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라너는 자신의 신학을 통해 인간의 인간됨을 영성적이자 체계적으로 그리고 사목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행했다. 그에게 인간은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그리고 절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면에서 주체적인 존재다. 그리고 인간이 주체적인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규성 신부(예수회, 서강대 교수)퇴사자22013.07.09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주님의 종, 로마노 과르디니(하)](//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054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주님의 종, 로마노 과르디니(하)근대 문명의 한계,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통찰하다퀵보른 청년운동의 중심이었던 로텐펠스성에 모인 청년들. #예수 그리스도, 과르디니의 신앙과 신학의 중심 과르디니의 '가톨릭 세계관' 강좌는 그가 처음 시도한 강의라 수업을 하면서 완성해 가야 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그가 교수 취임강연에서 분명하게 밝혔듯, 그의 사상 중심에는 구체적 역사의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세상을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세상과 거리가 필요한데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아닌 근본적인 거리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거리는 세상과 다른 존재, 세상을 초월한 존재만이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존재는 세상에 대한 거리를 확보해 줘야 할 뿐 아니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세상의 가치를 확인시켜 주고 세상을 온전히 채워줄 수도 있어야 한다. 과르디니에게 이 존재는 강생을 통해 세상 일부가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는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신앙으로 예수에게 다가가고, 그의 관점을 나의 관점으로 공유해야 한다. 그의 이러한 견해를 이해하면 그가 전 생애에 걸쳐 강의나 강론을 통해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내려 노력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과르디니는 다른 강의 외에 신약성경에 관한 강의도 병행했다. 문학작품을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역사비판학적 방법론의 도움 없이 성경을 하느님 말씀으로 읽고 이해하려 했다. 그는 베를린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노년 시절 뮌헨에서까지도 늘 젊은이들을 상대로 정기적으로 강론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기쁜 일로 여겼다.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고 또한 그가 가장 아끼던 작품 중 하나인 「주님」(Der Her, 남현욱ㆍ박재순 역/바오로딸)은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슐뤼터가에 있는 베네딕토경당에서 매주 했던 강론을 모아 엮은 책이다. 예수의 유년시절 기록부터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주님 모습을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로 나눠 구분하지 않고, 묵상을 통해 독자들 마음 안에 주님을 생생하게 현재화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세상과 관계에 대한 충분한 신학적 바탕을 갖추고 있지 않았기에 과르디니는 이를 보완한 「신약성서 속에서의 그리스도상」(김몽은 역/신태양사 세계기독교사상전집9)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상(像)이 개개인 안에 생생하고 힘차게 살아 있는가, 아니면 낡고 무기력하게 있는가에 따라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것이 좌우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상을 더욱 생생하게 밝히려는 그의 노력은 「주님의 인간적 실제」, 「바오로와 요한 문헌들 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상」 발간으로 이어졌다. 또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는 그리스도교 본질은 특정한 진리 체계나 삶의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 예수의 구체적인 삶과 활동 그리고 운명, 다시 말해서 예수라는 역사의 인물에 있다고 단언한다. 구체적인 역사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을 함께하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리스도교적인 존재와 행위, 가르침 등 모든 것을 규정하는 범주다. 과르디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학문적 접근과 함께 일상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주님과 가까워지고 그분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교회 공동체가 지키는 규범적 전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신자들 감성과 느낌 그리고 개인 사정이 결합돼 있는 일상 기도와 신심생활을 돕기 위한 책들도 저술했다. 「우리 주 구세주의 십자가길」, 「주님의 어머니」, 「사랑스런 우리 어머니의 묵주기도」 그리고 「주님의 해」 등은 십자가의 길 또는 묵주기도를 통해 주님 삶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데 도움을 주는 저서들이다. 특히 「주님의 해」에서는 전례력 전체를 관통해 매 주일의 주제를 다섯 개씩 만들어 묵주기도와 연결하는 실험적 제안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빛의 신비를 추가해 주님 일생을 묵상할 수 있도록 한 일과 일맥상통한다. #베를린을 떠나는 50대 과르디니 과르디니 강의는 1933년경부터 나치 정권의 감시를 받았고 결국 1939년 폐지됐다. 대학교수로서 활동은 금지됐고 퀵보른 청년운동의 중심이었던 로텐펠스성이 몰수됐다. 과르디니는 이 강제 휴직 기간 동안 강의 부담에서 벗어나 얼마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미뤄뒀던 원고를 정리해 여러 책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베를린에 있을 수 없게 되자, 1943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오스하우센에 있던 60년 지기 동창 신부 요셉 바이거의 사제관으로 숙소를 옮겼다. 이 시기에 그는 국가사회주의의 이면과 해악을 밝히는 저서 「신화와 계시 그리고 정치에 나오는 구원자」, 자서전적인 기록 「나의 생애에 관한 보고」 등을 저술했다.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조언 전쟁이 끝나고 과르디니는 1945년부터 튀빙겐대에서 '세계관 강의'를 새롭게 시작한다.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곳에서 이제는 그리스도교 세계관 교수로 강의하게 된 것이다. 그의 강의실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과르디니는 1948년 과르디니 개인 이름을 건 세계관 강좌를 맡아달라는 뮌헨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곳에서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전쟁 이후에는 윤리학과 인간학에 관한 강의를 주로 했고, 문화비판과 사회비판적인 저서인 「근대의 종말」(한국어판 제목은 「불안전한 인간과 힘」, 전헌호 역/성바오로), 「힘」, 「윤리학」 등을 저술했다. 기술과 기계 문명의 실체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지나치게 확장된 인류의 힘을 어떻게 제어하고 올바르게 이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이에 대한 조언을 그리스도교 신앙 관점에서 제시했다. 물론 과르디니의 현대문명에 대한 진단과 조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염려는 그의 활동 초기부터 학문적 활동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미 1927년에 출간한 「코모 호숫가에서 보낸 편지」에서 시대 변화에 대한 그의 예리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이탈리아 북부 아름다운 휴양지 코모 호수에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책에서 과르디니는 기계문명으로 인간과 자연이 점점 괴리되어 가는 현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적하며 균형 잡힌 발전을 제안했다. 빠른 경제 성장과 IT 강국 급부상 등으로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황폐해지는 현실을 걱정하는 우리에게도 현대의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염려와 조언은 아직도 그 현실성을 잃지 않고 있다. 현대문명의 위험성에 대한 그의 경고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조언들이 1972년 로마클럽이 발표한 환경보고서 '성장의 한계'보다 거의 50년 앞서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예언자적 통찰력을 짐작하게 한다. #마지막 말 생애 마지막 10여 년은 교회 안팎에서 인정해준 명예와 육체적 고통이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 그는 1952년 독일서적협회에서 평화상을 받았고, 교회에서는 몬시뇰 칭호를 받는 명예를 얻었다. 1961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고 1962년에는 브뤼셀에서 에라스무스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70세가 되던 해인 1955년 네지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얻은 신경통은 그의 인생 후반부를 늘 따라다녔다. 질병과 노령에도 불구하고 저술 활동은 계속했지만, 1962년 대학교수직을 내려 놓았다. 그의 강좌는 칼 라너(Karl Rahner)가 이어받았다. 1968년 8월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고향에 다녀온 그해 10월 1일 83세를 일기로 뮌헨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과르디니는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꿨던 꿈 이야기를 전해준다. 꿈에서 그는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말'(word)을 받고 태어난다는 메시지를 듣는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푸는 비밀번호와도 같은 말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은 이 말의 결과이고, 이 말은 세월과 함께 점점 뚜렷해지고 그 의미가 채워진다. 중요한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에 동의하며 살아야 하고, 언젠가는 이를 근거로 각자의 삶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주님을 받들어 모시며 한평생을 살았던 과르디니는 자신의 묘석에 다음의 '말'을 부탁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분의 자애로운 심판을 믿으며."김영국 신부(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퇴사자22013.06.18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주님의 종, 로마노 과르디니(하)](//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953_1.0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주님의 종, 로마노 과르디니(하)근대 문명의 한계,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통찰하다퀵보른 청년운동의 중심이었던 로텐펠스성에 모인 청년들. #예수 그리스도, 과르디니의 신앙과 신학의 중심 과르디니의 '가톨릭 세계관' 강좌는 그가 처음 시도한 강의라 수업을 하면서 완성해 가야 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그가 교수 취임강연에서 분명하게 밝혔듯, 그의 사상 중심에는 구체적 역사의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세상을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세상과 거리가 필요한데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아닌 근본적인 거리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거리는 세상과 다른 존재, 세상을 초월한 존재만이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존재는 세상에 대한 거리를 확보해 줘야 할 뿐 아니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세상의 가치를 확인시켜 주고 세상을 온전히 채워줄 수도 있어야 한다. 과르디니에게 이 존재는 강생을 통해 세상 일부가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는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신앙으로 예수에게 다가가고, 그의 관점을 나의 관점으로 공유해야 한다. 그의 이러한 견해를 이해하면 그가 전 생애에 걸쳐 강의나 강론을 통해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내려 노력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과르디니는 다른 강의 외에 신약성경에 관한 강의도 병행했다. 문학작품을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역사비판학적 방법론의 도움 없이 성경을 하느님 말씀으로 읽고 이해하려 했다. 그는 베를린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노년 시절 뮌헨에서까지도 늘 젊은이들을 상대로 정기적으로 강론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기쁜 일로 여겼다.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고 또한 그가 가장 아끼던 작품 중 하나인 「주님」(Der Her, 남현욱ㆍ박재순 역/바오로딸)은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슐뤼터가에 있는 베네딕토경당에서 매주 했던 강론을 모아 엮은 책이다. 예수의 유년시절 기록부터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주님 모습을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로 나눠 구분하지 않고, 묵상을 통해 독자들 마음 안에 주님을 생생하게 현재화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세상과 관계에 대한 충분한 신학적 바탕을 갖추고 있지 않았기에 과르디니는 이를 보완한 「신약성서 속에서의 그리스도상」(김몽은 역/신태양사 세계기독교사상전집9)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상(像)이 개개인 안에 생생하고 힘차게 살아 있는가, 아니면 낡고 무기력하게 있는가에 따라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것이 좌우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상을 더욱 생생하게 밝히려는 그의 노력은 「주님의 인간적 실제」, 「바오로와 요한 문헌들 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상」 발간으로 이어졌다. 또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는 그리스도교 본질은 특정한 진리 체계나 삶의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 예수의 구체적인 삶과 활동 그리고 운명, 다시 말해서 예수라는 역사의 인물에 있다고 단언한다. 구체적인 역사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을 함께하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리스도교적인 존재와 행위, 가르침 등 모든 것을 규정하는 범주다. 과르디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학문적 접근과 함께 일상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주님과 가까워지고 그분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교회 공동체가 지키는 규범적 전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신자들 감성과 느낌 그리고 개인 사정이 결합돼 있는 일상 기도와 신심생활을 돕기 위한 책들도 저술했다. 「우리 주 구세주의 십자가길」, 「주님의 어머니」, 「사랑스런 우리 어머니의 묵주기도」 그리고 「주님의 해」 등은 십자가의 길 또는 묵주기도를 통해 주님 삶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데 도움을 주는 저서들이다. 특히 「주님의 해」에서는 전례력 전체를 관통해 매 주일의 주제를 다섯 개씩 만들어 묵주기도와 연결하는 실험적 제안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빛의 신비를 추가해 주님 일생을 묵상할 수 있도록 한 일과 일맥상통한다. #베를린을 떠나는 50대 과르디니 과르디니 강의는 1933년경부터 나치 정권의 감시를 받았고 결국 1939년 폐지됐다. 대학교수로서 활동은 금지됐고 퀵보른 청년운동의 중심이었던 로텐펠스성이 몰수됐다. 과르디니는 이 강제 휴직 기간 동안 강의 부담에서 벗어나 얼마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미뤄뒀던 원고를 정리해 여러 책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베를린에 있을 수 없게 되자, 1943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오스하우센에 있던 60년 지기 동창 신부 요셉 바이거의 사제관으로 숙소를 옮겼다. 이 시기에 그는 국가사회주의의 이면과 해악을 밝히는 저서 「신화와 계시 그리고 정치에 나오는 구원자」, 자서전적인 기록 「나의 생애에 관한 보고」 등을 저술했다.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조언 전쟁이 끝나고 과르디니는 1945년부터 튀빙겐대에서 '세계관 강의'를 새롭게 시작한다.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곳에서 이제는 그리스도교 세계관 교수로 강의하게 된 것이다. 그의 강의실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과르디니는 1948년 과르디니 개인 이름을 건 세계관 강좌를 맡아달라는 뮌헨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곳에서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는 전쟁 이후에는 윤리학과 인간학에 관한 강의를 주로 했고, 문화비판과 사회비판적인 저서인 「근대의 종말」(한국어판 제목은 「불안전한 인간과 힘」, 전헌호 역/성바오로), 「힘」, 「윤리학」 등을 저술했다. 기술과 기계 문명의 실체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지나치게 확장된 인류의 힘을 어떻게 제어하고 올바르게 이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이에 대한 조언을 그리스도교 신앙 관점에서 제시했다. 물론 과르디니의 현대문명에 대한 진단과 조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염려는 그의 활동 초기부터 학문적 활동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미 1927년에 출간한 「코모 호숫가에서 보낸 편지」에서 시대 변화에 대한 그의 예리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이탈리아 북부 아름다운 휴양지 코모 호수에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책에서 과르디니는 기계문명으로 인간과 자연이 점점 괴리되어 가는 현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적하며 균형 잡힌 발전을 제안했다. 빠른 경제 성장과 IT 강국 급부상 등으로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황폐해지는 현실을 걱정하는 우리에게도 현대의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염려와 조언은 아직도 그 현실성을 잃지 않고 있다. 현대문명의 위험성에 대한 그의 경고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조언들이 1972년 로마클럽이 발표한 환경보고서 '성장의 한계'보다 거의 50년 앞서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예언자적 통찰력을 짐작하게 한다. #마지막 말 생애 마지막 10여 년은 교회 안팎에서 인정해준 명예와 육체적 고통이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 그는 1952년 독일서적협회에서 평화상을 받았고, 교회에서는 몬시뇰 칭호를 받는 명예를 얻었다. 1961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고 1962년에는 브뤼셀에서 에라스무스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70세가 되던 해인 1955년 네지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얻은 신경통은 그의 인생 후반부를 늘 따라다녔다. 질병과 노령에도 불구하고 저술 활동은 계속했지만, 1962년 대학교수직을 내려 놓았다. 그의 강좌는 칼 라너(Karl Rahner)가 이어받았다. 1968년 8월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고향에 다녀온 그해 10월 1일 83세를 일기로 뮌헨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과르디니는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꿨던 꿈 이야기를 전해준다. 꿈에서 그는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말'(word)을 받고 태어난다는 메시지를 듣는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푸는 비밀번호와도 같은 말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은 이 말의 결과이고, 이 말은 세월과 함께 점점 뚜렷해지고 그 의미가 채워진다. 중요한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에 동의하며 살아야 하고, 언젠가는 이를 근거로 각자의 삶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주님을 받들어 모시며 한평생을 살았던 과르디니는 자신의 묘석에 다음의 '말'을 부탁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분의 자애로운 심판을 믿으며."김영국 신부(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사무총장)퇴사자22013.06.18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7> 고의적 살인, 하느님 공경하는 행위](//cpbc.co.kr/CMS/newspaper/2013/06/rc/460185_1.1_titleImage_1.jpg)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고의적 살인, 하느님 공경하는 행위살인의 기원은 '분노와 시기'... 죄인의 죽음보다 회개가 중요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시작하며 사기꾼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경찰이요? 물론 그렇겠지만, 모든 사람이 부정직해진 세상이 아닐까요? 살인을 밥 먹듯 하는 살인마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요? 역설적으로, 살인 전문가에게 자신이 살인당할 일인가 봅니다. 정남규(40세)가 구치소 안에서 자진(自盡)했다는 3년 전 기사를 보고는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 사형을 집행하라는 여당 의원들의 요구가 일었고 연말이 다가오자 불안감을 못 이겼던 것 같다고 합니다. 자그마치 13명의 부녀자를 살해한 간 큰 살인마조차도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살인행위', 그 실체가 궁금해집니다. ♂♀생명봉사자 : 신부님, 죄송하지만… 죽어 마땅한 사람은 죽어야 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당연하지요. 하지만 누가 죽어 마땅한 사람인지, 그리고 누가 죽일 수 있는지의 문제가 또 남습니다. 성 암브로시오에 의하면, "죄인을 죽이기보다는 바로잡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살인이 또 다른 살인행위를 통해서 처벌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9항 §3). 예고드린 대로 회칙 본론인 제1장으로 들어가 '인간 폭력의 기원'에 대해 신학적 숙고를 해봅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먼저 생명의 세상에서 죽음의 기원이 '악마의 시기'(7항)라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분노와 시기'가 작동해 살인행위가 이어진다는 것을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맥을 같이해 설명하십니다(8항). ♂♀생명봉사자 : 왜 카인을 차별하셔서 '분노와 시기'를 촉발시키셨을까요? 인류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피할 수 없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카인의 봉헌보다 아벨의 봉헌을 반기셨는지 성경은 설명하지 않는다"고 일부러 지적하시는 것을 보면, 교황님께서도 아쉬움을 느끼셨나 봅니다. 필자의 속마음도 무척 아쉽습니다. 필자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첫 부모의 타락으로 죽음이 인간성 안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인간성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손해 등에 대한 '과장된 피해망상'이 심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인간 각자의 정성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당연히 하느님께서 더 반기실 수도 덜 반기실 수도 있겠지요. 문제는 덜 반겨진 인간이 더 반겨진 인간과 동일한 대우를 기대하도록 '악마의 속임수'가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인간의 완전한 친교를 향한 '악마의 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떡도 아닌데 먼저 김칫국물부터 마시도록 착각하게 합니다. 정성이 적으면 적게 얻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차별로 인식하도록, 자기 몫도 아닌데 손해보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그래서 분노를 일으키도록 만듭니다. 정성이 적어서 덜 반가운 카인이지만 그래도 그와의 '대화를 단절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조차도 의심하게 해 하느님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도록 합니다. 이간질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시기와 속임수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마침내 인류 최초로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였습니다"(창세 4,8; 7항 참조). 교황님께서는 이 가족살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살인행위가 인류의 '영적 친족관계에 대한 침해'(8항 §3)라고 하시며, 생명의 원천인 피를 흘리게 하는 고의적 살인이 "하느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9항 §1)이라고 규정하십니다. 그래서 살인자 카인조차도 살해당하지 않도록 "표를 찍어주셨음"(창세 4,15)을 잊지 않고 애써 강조하십니다(9항 §3). 마치며 전 세계 197개국 가운데 미국과 대부분 개발도상국인 57개국만이 사형을 집행한다는데 우리나라는 다행히 10년 이상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의 사형제 폐지국가'랍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노골적인 사형집행보다도 생명의 초기와 마지막 단계에 대한 위협입니다. 이것은 다음에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이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교육분과장, 가톨릭대 윤리신학 교수)cpbc2013.06.25
![[평화인] 박용만(실바노, 두산그룹 회장) -냉혹한 경영에서도 따뜻함 일구는 '하느님의 사람'](//cpbc.co.kr/CMS/newspaper/2013/04/rc/451030_1.2_titleImage_1.jpg)
[평화인] 박용만(실바노, 두산그룹 회장) -냉혹한 경영에서도 따뜻함 일구는 '하느님의 사람' 두산그룹 박용만(실바노, 59) 회장은 외할머니의 만두를 잊지 못한다. 어린 시절, 그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외할머니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주일미사를 거르는 일이 결코 없었다. 묵주기도는 매일 바쳤다. 외손주가 외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칭얼대도 외할머니는 "이 할미가 하느님 뵈러 갔다 오는 게 내 새끼한테도 좋지"하며 성당으로 향했다. 손주의 손을 떼어놓고 성당에 간 외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사온 건 만두였다. 그가 정신없이 만두를 먹다가 "할머니도 하나 먹어"하고 내밀면 외할머니는 먹는 시늉을 하며 만두를 받아뒀다가 손주가 다 먹고 나면 그 만두를 다시 내밀었다. 그는 천주교에 입교한 계기를 묻는 질문에 할머니와 만두를 함께 떠올렸다. 그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 아버지가 되고 나서 성당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강력한 사람들의 따뜻한 집단'을 표방하는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을 십자고상이 걸린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은 돌봄과 배려를 바탕으로 한 따뜻한 성과주의를 지향한다. 돌봄과 배려로 성과를 내라 117년 역사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 두산은 '사람이 미래다'라는 핵심가치로 사람 중심의 경영을 해왔다. 두산그룹은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두산건설 등 산업기반 설비와 기계, 건설 등 인프라 지원사업과 소비재 사업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지난해 4월 2일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한 박 회장은 취임식에서 "따뜻한 성과주의를 통해 인재를 키우겠다"고 밝혔다. 따뜻한 성과주의는 끊임없이 경쟁을 유도해 도태되는 사람을 가차 없이 내보내는 경영이 아니다. "따뜻함의 반대는 무관심, 냉혹입니다. 내부 경쟁이 전혀 없을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 역량을 정확히 파악해 육성하자는 것이지요." 그는 올해부터 후배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육성했는지를 인사 평가에 반영하기로 했다. 임원이 부하 직원과 소통하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도 포함했다. "100명의 신입사원이 모두 사장까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느 기업이나 조직은 피라미드 형태이기 때문에 올라가면서 누군가는 떠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 과정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조직은 따뜻할 수도 냉혹할 수도 있습니다." 박 회장은 "인간을 도구화해서 경쟁의 결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며 "돌봄과 배려를 통해 구성원 역량을 파악해 육성하면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역량을 알고 상처받지 않고 회사를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업운영은 각박하고, 회사생활은 기계적으로 돌아가기 쉽다. 대기업 총괄 CEO로서 업무 스트레스는 만만치 않다. 박 회장은 일하면서 오는 괴로움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가상의 원을 그려보세요. 그 원은 제 자신이 가진 역량의 한계입니다. 하나는 원 밖의 일을 이루고 싶을 때 괴로움이 오지요. 내 역량을 벗어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원 안에 있는데 내가 충분히 하지 않아서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후회와 자책으로 이어집니다." 박 회장은 "원 밖에 있는 역량은 내 역량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이 안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나를 분명히 알고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스트레스를 없애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귀띔했다. 따뜻한 집단의 소통 잘하는 CEO 박 회장은 젊은이들과 소통을 잘하는 CEO다. 신입사원들과의 술자리와 야구를 좋아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 SNS를 통해 다양한 이들과 소통을 즐긴다. "회사 가기 싫다"는 직원의 글에는 "내 차 보내줄까?ㅋㅋㅋ"라고 댓글을 단다. 그에게 젊은이들과의 소통 비결을 묻자, 박 회장은 "그들의 다른 점을 인정해주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이어 박 회장은 "젊은 친구들은 우리 베이비붐 세대가 만들어놓은 풍요롭고 다양한 사회에서 자랐다"며 "좋고 나쁨을 떠나 어떻게 다른지를 보면 이해하기가 쉬워진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신입사원뿐 아니라 어린이들을 만나러 서울시 꿈나무마을도 종종 방문한다. 꿈나무마을은 마리아 수녀회가 운영하는 아동복지시설. 박 회장은 재단법인 마리아 수녀회 후원회장이다.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고등학교 친구의 권유로 꿈나무마을을 방문한 게 계기가 됐다. 두산 베어스 선수단은 5년째 꿈나무마을을 방문해 아이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선사하고 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우울할 줄 알았는데 밝고 순진한 모습에 놀랐습니다. 편견이었죠.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들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인연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박 회장은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태워주고 싶어 직원들과 자전거를 사서 꿈나무마을을 방문하는가 하면, 겨울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옷도 지원해줬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하고 밝은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혹시라도 밝은 웃음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박 회장은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공헌 활동과 사회 환원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선택사항이 아닌 시대를 관통하는 조류"라고 강조했다. 그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나눔 정신을 확산하는 재단법인 '바보의 나눔'에 통 큰 기부를 몇 년째 이어가고 있다. 박 회장은 기업을 운영하며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이 숨어 있음을 발견할 때 즐겁다고 털어놨다. "성경 말씀을 경영에 그대로 투영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답답하고 힘들어집니다. 하지 못할 일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나 사회생활에서 이건 참 옳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묵상해보면 하느님 말씀과 다른 게 많지 않아요." 박 회장은 이어 "두산그룹 구성원들이 각자 역량을 잘 갖추고 서로를 돌보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집단으로 만들어주길 바란다"면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책임 있는 당당함을 보여주고, 투명하고 바른 경영을 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경영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외출장이 없을 때에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틈틈이 묵상하는 시간을 통해 기도하는 박 회장은 "내게 신앙은 불완전하지만 중요한 삶"이라고 말했다. "제가 신앙인이라고 하면 많은 분이 완벽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매일 실수하고 고해성사도 자주 봅니다. 다만 제가 신앙을 안 가지고 계신 분과 차이가 있다면 고해성사를 할 수 있다는 것 같아요."(웃음) 두산가(家)의 천주교 신앙은 1896년 서울 배오개시장(현 종로4가)에 '박승직 상점'(두산그룹 모태)이라는 면직물 점포를 연 박승직(베드로, 1864~1950) 거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회장은 박승직 거상의 장남인 고 박두병(바오로) 회장과 부인 고 명계춘(데레사) 여사의 7남매 중 5남이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조은일201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