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빛내 신학자들]<18>한스 큉(하)](//cpbc.co.kr/CMS/newspaper/2013/09/rc/474984_1.2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내 신학자들]한스 큉(하)종교 간 대화와 세계 윤리 정립에 힘써 1978년에 발간된 「신은 존재하는가?」는 「그리스도인의 실존」보다 신학계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가톨릭 철학자 에머리히 코레트(E.Coreth, 1919~2006) 신부는 책의 전반부, 곧 데카르트에서 시작해 니체에 이르는 근대 사상과 겨루면서 화해와 극복을 추구한 부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계속된 교회 교도권에 대한 큉의 비판에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큉은 근대 무신론조차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유독 가톨릭교회의 제도와 교도권에 대해서만 왜 그렇게 비판적인지 묻고 싶다." 큉과 교회 교도권과의 해묵은 갈등은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1967년 「교회」로 시작된 교황청 신앙교리성과의 갈등은 1970년에 발간한 「무류라고?」로 인해 더욱 고조된다. 신앙교리성은 조사를 위한 '대화'에 큉을 부르지만, 큉은 '대화'의 공정한 규정을 선결조건으로 내세웠다. 그 후 협상은 지루하게 진행되다가 1975년 2월 조건부로 마무리된다. 큉이 앞으로 교황 무류권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신앙교리성에서도 더 문제 삼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갈등은 수습됐다.교회 교도권과 마찰 하지만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즉위한 직후, 큉은 다시 교황 무류권을 언급했다. 1979년 초 발간한 「진리 안에 보존된 교회?」라는 소책자에서 교황 무류권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반복하면서, 새 교황에게 이 문제에 관한 대화를 요청했다. 신앙교리성은 이를 1975년에 맺은 합의를 깬 것으로 간주하고, 1979년 12월 18일 성명을 통해 "한스 큉 교수는 자신의 저작들에서 가톨릭교회의 온전한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그는 가톨릭 신학자로 간주될 수도, 가르칠 수도 없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큉은 가톨릭교회의 이름으로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사제직은 그대로 유지됐다.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결국 큉은 튀빙겐대 측과의 조율을 거쳐 독자적 지위를 얻게 된다. 가톨릭 신학부 소속이 아닌 총장 직속의 교회일치 신학 교수로서, 그 직책과 연관된 교회일치연구소 소장직을 계속 유지하고 대학 전체를 대상으로 강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스 큉은 이렇게 특별한 조건에서 활동하다가 1995년 12월에 정년 퇴임했다. 가톨릭 교수 자격을 박탈했음에도 큉의 학문 활동은 왕성하게 계속됐는데, 연구 초점은 가톨릭교회와 신학 울타리를 넘어 좀 더 넓은 분야로 확장된다. 세계 종교의 기초 연구 우선 전통적 신학 주제를 대상으로 한 저서는 종말론을 다룬 「영원한 생명?」(1982), 교회일치를 지향하는 자신의 신학적 방법론을 제시한 「새로운 출발점에 선 신학」(1987), 사도신경 해설서 「믿나이다」(1992) 정도다. 이에 비해 종교와 문학, 특히 여러 종교에 대한 저작들을 다수 출판했다.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1984), 「문학과 종교」(1985), 「신학과 문학」(1986), 「그리스도교와 중국의 종교」(1988), 「인간성의 변호인들」(1989) 등이다. 1990년에 출간한 「세계 윤리 구상」(1992년 우리말 번역)에서 큉은 원대한 계획을 드러냈다. 그는 현재 인류 상황을 고찰해볼 때 생존을 위해선 인류 전체를 위한 윤리가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이런 측면에서 대 종교들이 인류를 위해 공헌할 바가 매우 큰데, 세계 윤리는 윤리 담지자인 세계 종교들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협력을 위해선 종교 간 대화가 필수적이다. 큉은 자기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세계 윤리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종교의 평화 없이는 세계의 평화도 없고, 종교의 대화 없이는 종교의 평화도 있을 수 없다." 큉은 종교 간 대화를 위해 각 종교에 대한 기초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봤다. 그리고 긴장과 다툼이 많은 세 종교, 곧 아브라함에게 기원을 둔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 대한 기초 연구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실행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인간이 2000년대에 돌입하면서 대 종교들의 취지는 어떠한 것일까? 무엇이 지속돼야 하고, 무엇이 변화돼야 하는가? 영속적인 신앙의 요체는 무엇이며 변화하는 징후는 무엇인가? 종교 사이의 적대는 어디에 있으며, 병존과 분화, 수렴과 갈등의 진원지 그리고 대화의 씨앗은 어디에 있는가?" 큉은 세 종교에 대한 연구 결과를 차례로 발표했다. 1991년에는 「유다교」, 1994년에는 「그리스도교」(2002년 우리말 번역), 2008년에는 「이슬람」(2012년 우리말 번역)을 썼다. 큉은 이 책에서 패러다임 분석을 통해 각 종교가 어떻게, 또 왜 오늘날의 모습이 됐는지를 고찰하고 바람직한 미래 모습을 제시했다. 큉은 자신이 주창한 세계 윤리 구상이 실현되도록 적극 활동했다. 19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협의회가 제정한 '세계 윤리를 위한 선언'의 산파 역할을 했다. 이 선언은 장차 세계 윤리의 기초가 되는 4가지 기본 원칙을 담고 있다.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비폭력의 문화 △정의로운 경제 질서와 연대성의 문화 △진실한 삶과 관용의 문화 △남녀의 평등과 동반의 문화를 의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1995년 세계 윤리 구상의 구체적 실현을 돕는 '세계윤리재단'이 설립됐고, 큉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2012년 4월에는 큉이 명예교수로 있는 튀빙겐대에 '세계윤리연구소'가 세워졌다. 큉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 중심주의 큉은 가톨릭 교수 자격이 박탈된 후, 자신의 신학을 변호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철두철미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논하는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신앙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중심주의'로 표현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집중은 신학 연구 초기에서부터 일관성 있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그리스도 이해는 동일하게 머물지 않고 큰 변화를 겪는다. 칼케돈공의회의 교의 결정에 근거한 전통적 그리스도론, 이른바 '위로부터 그리스도론'에서 현대의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 역사의 예수에 초점을 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큉은 그리스도교 신학과 삶은 성경에 토대를 둬야 한다고 확신하는데, 그 성경의 중심은 역사의 예수라고 주장한다. 이런 전제하에 성경에서 출발해 교의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성경의 중심인 역사의 예수를 신학의 근본 규범으로 삼아 교회 전통 요소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해 의미를 축소하거나, 제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방법론은 큉의 대표작 「그리스도인의 실존」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큉은 이 책을 통해 목표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정확하면서도 오늘의 현실에 부응하고 최근의 연구 현황에 바탕을 두면서도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그리스도교 설계의 결정적 특징을, 그리스도교적 실천을 위해서 도출하는 것이다. 이 설계가 원래 2000년의 먼지와 쓰레기에 덮이기 전에 무엇을 뜻했었으며, 이 설계가 오늘 새로이 조명될 때 각자에게 뜻있고 보람찬 삶을 위해 무엇을 뜻할 수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또 다른 복음이 아니라 오늘을 위해 유일한 옛 복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이 시도는 환영만이 아니라 교회와 전통을 소홀히 한다는 거센 비판도 받는다. 바로 여기에 큉이 극한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키면서 교회 교도권과 심각한 마찰을 빚은 이유가 있다. 교황 무류권에 대한 논쟁은 많은 물의를 빚었지만, 그가 이유 있는 질문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없는 문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 주제에 내재한 문제를 끄집어내 공론화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큉이 시도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은 전통 그리스도론의 핵심 내용을 불충분하게 반영했다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문제시되지는 않았다. 질문과 시도는 정당하지만 해결책은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학자 하인리히 프리스(H.Fries, 1911~1998) 신부는 현대인들, 특히 의심과 물음이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을 설득력 있게 전하려는 큉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큉으로 인해서 불안을 느끼는 신자들 외에도 아주 많은 수의 사람들이 큉의 저서, 특히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신은 존재하는가」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위해 진정한 도움을 발견하거나 신앙을 강화하고, 신앙 이해와 획득을 위해 새롭고 신뢰할만한 입구를 찾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목자와 교리교사, 설교자에게 위에 언급한 두 책은 진정 귀중한 보고(寶庫)가 됐다. 큉은 자신의 말과 글을 통해 교회 변두리에 자리한 사람과 그리스도인, 그리스도교 신앙과 거리를 두고서 교회를 비판적으로 대하는 이들에게 도달한다." 교황 무류권 문제로 큉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칼 라너 신부도 비슷한 취지로 얘기했다. "나는 큉의 여러 입장을 비판적으로 거부하는 견해를 밝혔고 나름대로 항변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한스 큉의 긍정적 의미와 자유주의적이고 대중적이며 회의적인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전해주려는 그의 성실한 노력을 존중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1981년 12월 칼 라너는 다른 여러 신학자와 함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큉과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대화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한스 큉 신부가 교회 교도권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결국 가톨릭 교수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해서, 또 여전히 비판의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신학적 노력과 성과의 긍정적 측면을 거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도 계속되는 세계 윤리 정립을 위한 그의 노력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주목할 만한 시도다.손희송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장, 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cpbc2013.09.24
![[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3.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녀지는 신앙-<1>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8,31)](//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057_1.0_titleImage_1.jpg)
[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3.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녀지는 신앙-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8,31)교회 가르침, 구원의 길 안내하는 '신앙의 내비게이션' 나는 길눈이 무척 어둡다. 병자영성체를 주러 제 발로 걸어들어간 길인데도 나오면서 헤맬 정도다. 내가 기억한 주요 지점에 다른 건물이 생기면 그 길은 전혀 새로운 길인 양 헤맨다. 운전할 때는 더 그렇다. 많아야 1년에 몇 차례 운전하는 내게는 시시각각 변하는 도로와 건물들이 나를 당혹하게 한다. 어쩔 수 없이 운전해야만 할 때는 지도를 꺼내놓고, 주요 도로와 교차로를 따로 적어 그대로 따라간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마련된 가장 큰 선물이 내비게이션이다. 어찌나 신통방통한지 목적지만 정해놓으면 알아서 길 안내를 해준다. 요즘은 기술이 더욱 발전해 몇 번 차로로 가야 하는지도 알려주고, 주유소까지도 알려주니, 이젠 지도책이 없어도 되고, 건물이 새로 생겨도 당황하지 않게 됐다. 그런데 모든 내비게이션이 다 완전한 것은 아니다. 같은 곳에서 빙빙 돌게 하거나, 엉뚱한 길로 안내하는 때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어떤 회사 것이 좋다거나 어떤 소프트웨어가 좋다며 선호하는 제품이 있다. 그 제품을 쓰면 헤매지 않을 수 있고, 기름과 시간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교회의 가르침은 '신앙의 내비게이션'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인간 구원의 길을 자세하게 안내해준다.#교회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교회의 가르침이란 한 마디로 '신앙의 내비게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로와 지명뿐 아니라 급커브 지역, 제한속도와 일방통행 같은 여러 가지 조건과 통행량, 낙석 지역 같은 환경도 자세히 조사해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가르침도 어느 한 개인의 주관적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와 사도들과 교부들에게서 내려온 가르침, 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현 시대의 문화와 과학ㆍ경제ㆍ환경 등 모든 조건을 고려해 인간 구원의 길을 자세하게 안내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왜 교회의 가르침이 필요한가?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류 구원의 문이 열렸지만, 모든 인간이 그 문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현재 세상을 사는 우리는 아직 그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충실하게 살아서 그 문으로 들어가겠지만, 그 문으로 가는 길을 아직 알지 못하거나 찾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전 인류가 그 구원의 길에 들어서고, 또한 충실히 그 길을 걸어서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사도시대 때부터 교회는 하느님 백성에게 구원의 길을 따라 하느님 나라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 안내를 해왔으며, 이 길인지 저 길인지 헷갈려 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이정표를 제시해왔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구원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 일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서도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교회헌장」 16항)고 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인가? 내비게이션 없어도 운전자가 알아서 스스로 목적지를 찾아갈 수는 있겠지만, 잘 알고 있는 지역이 아니라면 엉뚱한 곳에서 헤매게 될 가능성이 있다. 하느님 나라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 길을 안다고 자부할 수 있으며, 스스로 길을 찾았거나 찾을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께 올바로 나아가서 구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권한으로 가르치는가? 세상에는 큰 목소리를 내며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올바른 지식과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공동체 전체를 위해 말한다 하더라도 그 방식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려울진대, 지식도 없이 자기 기분에 따라 그릇된 판단을 하면서도 고집을 부린다면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 시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스승에게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면서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 행위의 바탕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바탕으로 백성을 가르칠 자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말과 행위에는 인간적 권위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신적 권위를 지니고 계셨다. 그 말씀과 행위는 보는 이들마다 경탄하게 했고,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가?'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이런 권위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사도단에게 직무와 권한을 주셨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7-19).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교도권이란 사도들의 직무 가운데는 사제직과 예언직, 왕직이 있고, 이 가운데 진리를 선포하는 직무를 예언직이라 하는데, 이 예언직을 수행하기 위해 하느님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교회의 가르침 혹은 교도권이라고 한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교황과 주교들은 계시의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 성령의 빛을 비추어줌으로써 진리의 빛을 밝히고, 하느님 백성이 그 빛을 따라 구원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준다. 교회의 가르침은 새로운 계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 말씀에 종속돼 봉사하며, 전해지는 것만 가르친다. 하느님 명령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경건히 듣고 거룩하게 보존하고 성실히 해석함으로써 교회와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춰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말씀에 대한 유권적 해석이 필요한데 이 권한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여받은 참된 스승인 주교들'(「교회헌장」 25항)에게만 유보된다.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은 성경의 우위성을 전제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교회법전」, 그리고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담겨 있다. #가르침의 형태 교회의 가르침에는 유권적 교시와 권고적 설교, 학문적 교수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유권적 교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권위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으로서 주요한 교도권의 행사이다. 이는 장엄 교도권(보편공의회나 관구공의회를 통해 문서로 가르치거나, 교황이 성좌에서 선언하는 문서)과 통상 교도권(지역 주교들의 사목교서나 설교, 교리해설 혹은 시노드), 그리고 통상 보편 교도권(교황령, 교황회칙, 교령, 로마 대심법원의 판결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권고적 설교는 계시 진리의 이해와 실천을 돕기 위해 권고와 격려, 해설, 교정 등의 방법으로 수행되는데 사제의 강론과 훈화, 교리가 이에 해당한다. 수도자나 평신도의 설교 및 교리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학문적 교수는 계시 진리의 학문적 연구와 교수를 통해 그 내용과 뜻을 밝히고 가르침으로써 교도권의 보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교도권의 중요성 개신교회가 여러 교파로 갈라진 이유는 성경을 해석하는 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판단과 해석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큰 분열을 일으키게 됐다. 마르틴 루터도 처음에는 성경 해석의 자유를 주장했지만, 엉뚱한 해석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이 난립하자 성경 해석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주장했다. 해석의 자유를 부르짖었던 본인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성경 해석에 있어 공식적 해석과 개인적 해석을 구별한다. 개인의 묵상, 체험 및 해석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거나 강요할 수 없다. 본인 스스로 엉뚱한 길에서 헤매는 것은 상관하지 않으나 다른 사람들까지 헤매게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된 내비게이션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진리의 길을 따라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통 교회의 가르침이 중요하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 이단에 빠진 수많은 오류를 이미 겪어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이야말로 정통 교회의 '신앙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2000년 전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모으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교회를 통해 온 세상의 하느님 자녀를 불러 모으고 계신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백성인 우리는 한 목자 아래서 한 목소리로 하느님께 찬미와 찬양을 드리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확신을 가지고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이형전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가정사목부 담당)퇴사자2201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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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3.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녀지는 신앙-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8,31)교회 가르침, 구원의 길 안내하는 '신앙의 내비게이션' 나는 길눈이 무척 어둡다. 병자영성체를 주러 제 발로 걸어들어간 길인데도 나오면서 헤맬 정도다. 내가 기억한 주요 지점에 다른 건물이 생기면 그 길은 전혀 새로운 길인 양 헤맨다. 운전할 때는 더 그렇다. 많아야 1년에 몇 차례 운전하는 내게는 시시각각 변하는 도로와 건물들이 나를 당혹하게 한다. 어쩔 수 없이 운전해야만 할 때는 지도를 꺼내놓고, 주요 도로와 교차로를 따로 적어 그대로 따라간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마련된 가장 큰 선물이 내비게이션이다. 어찌나 신통방통한지 목적지만 정해놓으면 알아서 길 안내를 해준다. 요즘은 기술이 더욱 발전해 몇 번 차로로 가야 하는지도 알려주고, 주유소까지도 알려주니, 이젠 지도책이 없어도 되고, 건물이 새로 생겨도 당황하지 않게 됐다. 그런데 모든 내비게이션이 다 완전한 것은 아니다. 같은 곳에서 빙빙 돌게 하거나, 엉뚱한 길로 안내하는 때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어떤 회사 것이 좋다거나 어떤 소프트웨어가 좋다며 선호하는 제품이 있다. 그 제품을 쓰면 헤매지 않을 수 있고, 기름과 시간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교회의 가르침은 '신앙의 내비게이션'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인간 구원의 길을 자세하게 안내해준다.#교회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교회의 가르침이란 한 마디로 '신앙의 내비게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로와 지명뿐 아니라 급커브 지역, 제한속도와 일방통행 같은 여러 가지 조건과 통행량, 낙석 지역 같은 환경도 자세히 조사해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가르침도 어느 한 개인의 주관적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와 사도들과 교부들에게서 내려온 가르침, 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현 시대의 문화와 과학ㆍ경제ㆍ환경 등 모든 조건을 고려해 인간 구원의 길을 자세하게 안내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왜 교회의 가르침이 필요한가?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류 구원의 문이 열렸지만, 모든 인간이 그 문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현재 세상을 사는 우리는 아직 그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충실하게 살아서 그 문으로 들어가겠지만, 그 문으로 가는 길을 아직 알지 못하거나 찾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전 인류가 그 구원의 길에 들어서고, 또한 충실히 그 길을 걸어서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사도시대 때부터 교회는 하느님 백성에게 구원의 길을 따라 하느님 나라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 안내를 해왔으며, 이 길인지 저 길인지 헷갈려 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이정표를 제시해왔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구원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 일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서도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교회헌장」 16항)고 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인가? 내비게이션 없어도 운전자가 알아서 스스로 목적지를 찾아갈 수는 있겠지만, 잘 알고 있는 지역이 아니라면 엉뚱한 곳에서 헤매게 될 가능성이 있다. 하느님 나라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 길을 안다고 자부할 수 있으며, 스스로 길을 찾았거나 찾을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께 올바로 나아가서 구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권한으로 가르치는가? 세상에는 큰 목소리를 내며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올바른 지식과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공동체 전체를 위해 말한다 하더라도 그 방식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려울진대, 지식도 없이 자기 기분에 따라 그릇된 판단을 하면서도 고집을 부린다면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 시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스승에게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면서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 행위의 바탕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바탕으로 백성을 가르칠 자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말과 행위에는 인간적 권위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신적 권위를 지니고 계셨다. 그 말씀과 행위는 보는 이들마다 경탄하게 했고,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가?'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이런 권위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사도단에게 직무와 권한을 주셨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7-19).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교도권이란 사도들의 직무 가운데는 사제직과 예언직, 왕직이 있고, 이 가운데 진리를 선포하는 직무를 예언직이라 하는데, 이 예언직을 수행하기 위해 하느님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교회의 가르침 혹은 교도권이라고 한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교황과 주교들은 계시의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 성령의 빛을 비추어줌으로써 진리의 빛을 밝히고, 하느님 백성이 그 빛을 따라 구원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준다. 교회의 가르침은 새로운 계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 말씀에 종속돼 봉사하며, 전해지는 것만 가르친다. 하느님 명령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경건히 듣고 거룩하게 보존하고 성실히 해석함으로써 교회와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춰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말씀에 대한 유권적 해석이 필요한데 이 권한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여받은 참된 스승인 주교들'(「교회헌장」 25항)에게만 유보된다.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은 성경의 우위성을 전제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교회법전」, 그리고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담겨 있다. #가르침의 형태 교회의 가르침에는 유권적 교시와 권고적 설교, 학문적 교수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유권적 교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권위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으로서 주요한 교도권의 행사이다. 이는 장엄 교도권(보편공의회나 관구공의회를 통해 문서로 가르치거나, 교황이 성좌에서 선언하는 문서)과 통상 교도권(지역 주교들의 사목교서나 설교, 교리해설 혹은 시노드), 그리고 통상 보편 교도권(교황령, 교황회칙, 교령, 로마 대심법원의 판결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권고적 설교는 계시 진리의 이해와 실천을 돕기 위해 권고와 격려, 해설, 교정 등의 방법으로 수행되는데 사제의 강론과 훈화, 교리가 이에 해당한다. 수도자나 평신도의 설교 및 교리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학문적 교수는 계시 진리의 학문적 연구와 교수를 통해 그 내용과 뜻을 밝히고 가르침으로써 교도권의 보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교도권의 중요성 개신교회가 여러 교파로 갈라진 이유는 성경을 해석하는 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판단과 해석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큰 분열을 일으키게 됐다. 마르틴 루터도 처음에는 성경 해석의 자유를 주장했지만, 엉뚱한 해석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이 난립하자 성경 해석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주장했다. 해석의 자유를 부르짖었던 본인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성경 해석에 있어 공식적 해석과 개인적 해석을 구별한다. 개인의 묵상, 체험 및 해석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거나 강요할 수 없다. 본인 스스로 엉뚱한 길에서 헤매는 것은 상관하지 않으나 다른 사람들까지 헤매게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된 내비게이션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진리의 길을 따라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통 교회의 가르침이 중요하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 이단에 빠진 수많은 오류를 이미 겪어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이야말로 정통 교회의 '신앙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2000년 전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모으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교회를 통해 온 세상의 하느님 자녀를 불러 모으고 계신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백성인 우리는 한 목자 아래서 한 목소리로 하느님께 찬미와 찬양을 드리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확신을 가지고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이형전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가정사목부 담당)퇴사자22013.06.18
![[신앙의 해, 뿌리깊은 나무가 되어] 3.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4.끝>참된 신앙인이 되는 길](//cpbc.co.kr/CMS/newspaper/2013/08/rc/467553_1.2_titleImage_1.jpg)
[신앙의 해, 뿌리깊은 나무가 되어] 3.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참된 신앙인이 되는 길교회는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 가르치는 학교 성경을 중심으로 교회 가르침에 따라 자신을 성찰할 때 참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서울대교구의 특수사목 신부들 24명이 함께 사는 공동 숙소인 성김대건관. 이곳 식당에서 주로 이용하는 두 개의 식탁 가운데에는 제법 큰 약상자가 있다. 그 약상자 안에는 여러 개의 약병이 들어 있는데, 어떤 질병에 대한 약이 아니라 비타민을 비롯한 건강보조 약품이 대부분이다. 40대와 50대 신부들이 주를 이루고, 몇몇 30대 신부들이 있는 곳에서 무슨 약을 그렇게 많이 갖추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약상자 안에는 제법 많은 약병이 있다. 처음 그 약상자를 봤을 때에는 많은 가정에서 그렇듯 약을 사다 놓기만 하고 잘 먹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예상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병에 든 약도 비타민 하나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잘 먹지 않았는데, 요즘은 식사 후에 약상자 안의 여러 약통에서 약들을 꺼내 한 움큼씩 먹으면서 이것이 무슨 대단한 보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 챙겨준다. 현대인들이 가장 관심 있는 주제 중 하나는 건강이다. 본래 인간은 고래로 무병장수를 희망해왔으니 건강을 바라는 것이 현대인들만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무병장수를 원하는 선조들은 호흡법이나 심신단련을 통해 건강도 지키고 장수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편하게 갖는 것이 중요하므로 감정을 절제하고 제어하기 위한 노력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건강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적당히 먹고, 적당히 운동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숙면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그런데 바쁜 현대인들은 기름진 음식을 폭식하고, 걸을 수 있는 거리를 차 타고 다니며, 여러 가지 스트레스에 짓눌리고, 밤늦게까지 자기 취미 생활을 하느라 늦게 잠자리에 든다. 이런 모습은 건강을 위한 생활습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서도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거나 건강해지기를 원한다. 그래서 찾는 것이 바로 약이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기초적인 노력을 게을리하면서도 약을 통해 건강해지리라 기대하고 맹신하기까지 한다. 이런 모습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머물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어떤 기도를 바치거나, 어느 성지에 가거나, 기적의 패나 스카풀라 같은 성물을 소지함으로써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중심은 신앙생활에서 중심은 하느님과의 관계이며,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 노력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르쳐 주셨고,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나눔(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중요성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부자 청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함을 깨우쳐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인은 이 가르침에 따라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런데 영적으로 나약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 이 길을 충실히 걸어가기 어려우므로 기도 때마다, 미사 때마다 주님께 은총을 구하며, 그 은총에 힘입어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해야 한다. 건강해지고자 하는 사람이 매일 음식을 절제하고, 매일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어쩌다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참된 신앙인이 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한국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생활에서조차 약을 찾는다. 자신의 부족한 노력을 채워줄 수 있는 효과 빠른 특효약을 찾는 것이다. 기본적인 신앙생활과 사랑의 실천을 게을리 하면서도 말로만 바치는 기도나 성물들을 통해 영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이는 수험생이 시험공부를 하지 않고 컴퓨터 게임만 하다가 십자고상을 끌어안고 자면서 시험을 잘 치르게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이런 허황된 믿음과 허황된 기대가 자신을 망치고 만다. 참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요행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교회 가르침에 따라 교회는 하느님 백성에게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해 준다. 우리가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느님 나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부모님에 대한 봉양을 소홀히 하면서 하느님께 대신 바쳤다는 의미로 '코르반'이라고 하면 된다고 믿었고, 이런 나쁜 관행에 대해서 예수님께 꾸지람을 들었다. 이는 백성의 지도자들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다. 본인만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하느님 백성들까지도 진리의 길을 벗어나 오류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로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에 비춰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사람들은 함부로 다른 이들에게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자신의 어둠과 나약함을 부끄러워하며 하느님께 은총과 자비를 청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 다른 이들의 허물을 들추어낼 자격이 없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속해 있으면서 교회나 교회 봉사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런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임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에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예수님 시대에도 누구보다 율법을 잘 안다고 자부하던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닮았다. 율법교사와 바리사이들이야말로 성경 안에서 율법의 규정들만 따질 줄 알았지, 그 내면에 깔린 사랑의 정신은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의인임을 자처하면서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며 살다가,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누구보다 작아지게 됐다. 교회 가르침에 따라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신앙인으로 성장해갈수록 이웃의 눈 속의 티보다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빼내려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 찬양과 전례 교회는 흩어진 하느님 백성들을 불러 모아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며 일치시킨다. 사도행전을 통해 드러나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함께 모여 공동생활을 했으며, 한마음 한뜻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도했음을 알 수 있다. 박해를 받을 때에도 변함없이 함께 모여 빵을 나누었으니, 이는 함께 모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빵을 나누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 특성임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교회는 모든 하느님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불러 모은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백성들은 전례를 통해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제사와 제물을 봉헌하며 함께 빵을 나누면서 친교와 일치에 이른다. 일치를 이루는 것은 성령의 작용이고,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악령의 유혹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공동체에서 내보내려 하는 사람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이며, 이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공동체가 분열된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공동체의 일치를 이루려는 사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예수 수난에 동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함으로써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카 9,23)고 가르쳐주셨다. 이 말씀대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미했고,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도록 초대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걸려 넘어지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데 왜 하느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하며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영광의 그리스도 이전에 고난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때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깊이 일치하게 되고, 더 큰 사랑을 발하게 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나눔의 실천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나눔을 실천하며 일치에 이르도록 초대한다. 초대교회 공동체들은 공동생활을 하며 저마다 가진 것을 모두 내어 놓고, 너희 가운데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신명기 15장의 말씀을 실천했으며,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갈라티아와 코린토의 신자들은 예루살렘 모교회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그들을 위해 기꺼이 나눔을 실천했다. 그들은 이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었으며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게 됐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가서 너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신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세상 안에서 세상을 배우며 성장하고 발전한다. 혼자 노력해서 배우는 것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학교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학교다. 하루빨리 세상의 모든 이들이 이 학교에서 구원의 길을 찾게 되는 날이 오길 바란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이형전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가정사목부 담당)cpbc2013.08.06
인천 노동자들 위한 복합문화센터 마련'인천교구 노동자센터' 개소, 쉼터 심리상담실 카페 등 갖춰 365일 누구나 와서 휴식하고 피정할 수 있는 쉼터부터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소성당까지, 거기에 웬만한 옷가게 부럽지 않은 의류매장에, 마음껏 담소를 나누며 희망찬 앞날을 이야기할 카페도 있다. 각종 노동문제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인천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이 같은 공간이 생겼다. 인천교구는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481-4에 복합 문화센터를 방불케 하는 '인천교구 노동자센터'를 마련하고, 10월 31일 교구 총대리 정신철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했다. 교구 노동사목부(담당 김윤석 신부)가 3년여에 걸쳐 약 15억 원을 들여 조성한 노동자센터는 연면적 약 165㎡, 건축면적 약 730㎡에 지상 1~6층 규모의 사목공간으로, 심리카페ㆍ맘에 드는 가게(마을기업)ㆍ강당ㆍ교육실ㆍ사무실ㆍ노동 및 심리상담실ㆍ쉼터 등을 갖춰 다양한 분야에 걸쳐 노동자들을 보살필 수 있는 공간이다. 정신철 주교는 축복식에서 "전 노동사목부 담당 장동훈 신부께서 3년 전 처음 노동자들의 인성과 영성계발을 위한 센터 건립 제안서를 들고 왔을 때 꼭 하고 싶은 일임에도 비용 마련 문제 탓에 고심했던 기억이 난다"며 "기도의 응답으로 마련된 이곳이 40년 가까이 교구가 일궈온 노동사목의 중심으로 거듭나 우리 사회에 공동선의 빛을 실현하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사목에 힘써온 교구는 2002년부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노동자 주일'을 제정해 고된 노동자들을 위로하고 있는데, 이날 노동자센터를 조성함으로써 다시 한 번 노동사목에 새 전기를 가져오게 됐다. 교구 노동사목부는 센터 건립을 통해 경기 부천시ㆍ인천 부평구ㆍ주안동 등에 흩어진 노동자들을 위한 공간과 업무를 한데 모은 것은 물론, 센터에 상주하게 될 심리상담가와 노무사를 통해 더욱 전문적인 노동ㆍ법률ㆍ심리상담과 교육을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나아가 성경모임과 동아리, 피정 등 신앙생활까지 돌볼 수 있게 됐다. 센터는 노동자들을 위해 상시로 강당, 교육실, 쉼터 등을 대여해 줄 계획이다. 김윤석 담당신부는 "지금도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해 더욱 전문적이고 폭넓은 사목으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돕는 총체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문의 : 032-865-6792, 인천교구 노동자센터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cpbc2013.11.05
![[성경 속 궁금증] (20) 성경에서 문학 유형 이해가 왜 중요한가](//cpbc.co.kr/CMS/newspaper/2012/01/rc/401610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20) 성경에서 문학 유형 이해가 왜 중요한가진정한 메시지 올바로 알기 위해 17세기 교회는 성경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천동설을 주장했다. 그림은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종교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1616년 교회가 '지구는 돈다'고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단죄할 때 다음 성경구절을 근거로 제시했다. "주님께서 아모리족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으로 넘겨주시던 날, 여호수아가 주님께 아뢰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외쳤다. '해야, 기브온 위에, 달아, 아얄론 골짜기 위에 그대로 서 있어라'"(여호 10,12). 당시 교회는 성경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지구를 중심으로 해와 달이 돈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이후 교회는 지동설을 단죄한 것에 대해 잘못을 인정했다. 성경, 특히 구약의 많은 문장들은 여러 가지 표현양식으로 기록됐다. 그렇기에 우리가 성경의 글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글의 문학 유형을 올바로 알아야만 한다. 이는 시와 소설, 논문, 보고서 등의 글이 서로 다른 특성을 가졌기에 각각의 글들이 가진 문학 유형을 제대로 알아야만 그 글들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은 2000~3000년 전 오늘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기록된 책이다. 그렇기에 이 글들을 오늘날의 시선과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면 그 뜻을 잘못 이해할 수 있다. 또 성경은 사건 현장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자신들이 서 있는 현재 위치에서 조상들에게서 전해 내려온 창세기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기록한 것이다. 또 창세기와 모세오경은 일종의 회고에 의한 신앙체험 고백 이야기를 당시 민담과 설화 형식을 빌어서 기록한 것이다. 모세오경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민족으로 등장하는 초기에 겪은 역사적ㆍ종교적 체험을 확고한 기반으로 한다. 역사적 사건이 먼저 있었고, 후대에 구전과 기록으로 자신들의 체험을 전달하려 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한 사료들은 긴 구전 전승 과정을 거치면서 지역, 사건, 인물에 따라 내용이 추가되기도 하고 빠지기도 했으며, 때로는 해설을 덧붙이는 등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다. 저자들은 이런 전승 사료들에 다시 지역, 사건, 인물에 따라 기원적 의미를 덧붙였고, 그 시대에 쓰이던 문학 방식을 이용해 자신들 신앙을 고백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 영감을 받은 성경 저자가 역사적 진리를 토대로 한 인물, 사건, 이야기를 자기 시대와 연관지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에서 역사적 진리를 발견하는 가운데, 늘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또 성경의 모든 문학 유형은 보편적 인간 가치를 알려주고 있으며, 성경 속 이야기들은 민담, 설화 형식을 이용해 하느님과 그 앞에 선 인간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의 문학 유형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와 전달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퇴사자22012.01.11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7>나의 살던 고향(마르 6,1-6)](//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6465_1.0_titleImage_1.jpg)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나의 살던 고향(마르 6,1-6)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메시아라고?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성경 말씀이 이뤄졌다는 예수님 말씀을 믿지 않았다. 동정 마리아는 천사의 전갈에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다. 사진은 나자렛 주님탄생예고 대성당 모자이크화. [CNS 자료사진]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을 찾아가 보자. 나자렛은 갈릴래아 지역에 있다. 팔레스티나는 유다, 사마리아, 갈릴래아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갈릴래아는 어떤 곳일까. 세 지역 중 가장 북쪽에 있는 갈릴래아는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다. 남쪽은 비가 많이 내려 땅이 비옥해 농사일을 주로 한다. 밀과 보리, 포도와 석류가 많이 난다. 호수가 있어 어업도 많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 갈릴래아는 헤로데 임금의 아들 헤로데 안타피스(기원전 4년~ 기원후 39년)가 다스리고 있었다. 기원후 70년쯤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완전히 함락된 후 갈릴래아는 유다교 학문의 중심지가 됐다.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의 탄생지는 베들레헴, 삶의 터전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공적 직무 수행의 중심지였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기적은 갈릴래아에서 가장 많이 행하셨다. 예수님 제자도 대부분 갈릴래아 출신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리래아로 가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 곳도 갈릴래아에 있는 산이었다. 이처럼 갈릴래아는 예수님과 밀접한 곳이다. 나자렛은 '(꽃이) 만발하다', '감시하다, 보호하다'는 뜻이다. 구약에서는 나자렛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신약에서는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구약성경에서 나자렛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엘이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하고 반발한다. 메시아는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나자렛 출신이라고 밝히는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과 다름없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내가 나자렛 출신이라고 하니, 메시아로 여기지 않았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중요한 두 시기를 보내셨다. 잉태와 아동기, 그리고 어른이 되어 사람들을 가르치신 곳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에서 하혈하는 여인과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신 후 제자들과 나자렛으로 이동하셨다. 나자렛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사시는 곳이다. 예수님이 고향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하셨다. 예수님이 고향을 더 이상 방문하지 않으신 것은 고향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쯤에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을 요셉의 아들로 여겼다"(루카 3,23).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에 공생활을 시작하셨고, 그 전에는 줄곧 나자렛에 사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여러 곳을 다니며 군중에게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도록 기적을 행하셨다. 그런 분이 고향에 가고 싶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기쁜 마음으로 고향에 가셨다.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스승으로 가셨다. 첫날은 안식일이었다. 유다인들에게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배하는 중요한 날이다. 고향에 가신 예수님은 회당에 가셨다. 예수님은 예언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을 봉독하셨다. 예언서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하느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이가 바로 메시아라고 밝히고 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같은 뜻의 그리스어다. 예수님은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이사 61,2). 은혜로운 해는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시간 △하느님과 화해가 이뤄지는 시기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치유와 자유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 시간이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것이 메시아의 역할이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기름부음 받은이가 나라고 밝히신다. 이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하느님의 은총이 예수님을 통해 드디어 주어졌음을 뜻한다. 예수님은 "오늘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구나'라며 기뻐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마르 6,2-3) 하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다.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3) 하면서 못마땅해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하며 이름을 나열하고,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라며 믿을 수 없어 했다. 부모와 친척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은 자기들과 예수님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의미다. 너무 잘 알던 이가 남다른 권위와 능력을 지니고 나타난 사실이 못마땅한 것이다.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유명한 율법학자의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부잣집 아들이었다면…. 완전히 다르게 대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내게 오신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맞을 것인가?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방송시간 : (화) 오전 8시, (수) 새벽 1시/오후 1시 40분, (금) 밤 8시, (토) 밤 10시 ※교재 문의 : grace@paul ine.or.kr, 02-944-0945 퇴사자22013.07.30
![[가톨릭교회교리서]<46>십계명 : 첫째 계명(하)](//cpbc.co.kr/CMS/newspaper/2014/04/rc/504681_1.0_titleImage_1.jpg)
[가톨릭교회교리서]십계명 : 첫째 계명(하)부적 지니고 점 보는 일 첫째 계명 거스른다첫째 계명은 온갖 유형의 미신이나 우상숭배를 금한다. 교회는 그러나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사진은 지난해 브라질 세계청년대회에서 성모자상을 모시고 가는 청년들. 【CNS】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2110~2128항) 하느님만을 섬기라는 첫째 계명은 또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금합니다. 따라서 미신과 불경은 모두 첫째 계명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미신(2111항) 미신은 쉽게 말해 헛되고 바르지 못한 믿음이나 그런 믿음의 실천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경배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미신 행위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지적합니다."미신은 또한 우리가 참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의 형태로 치장될 수 있다.…기도나 성사들이 요구하는 마음가짐을 경시하면서 그 외적인 요소들에만 효력을 부여하는 일도 미신에 빠지는 것이다"(2111항). 우상숭배(2112~2114항)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를 거부하고 다른 신, 곧 우상을 모시는 것은 첫째 계명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단지 이교(異敎)의 그릇된 예배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신격화하는 것 또한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잡신이나 마귀(예를 들어 악마 숭배), 권력, 쾌락, 인종, 조상, 국가, 재물 등 인간이 하느님 대신에 어떤 피조물을 숭배하고 공경한다면 이는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2113). 하느님보다는 하느님이 아닌 어떤 것을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점과 마술(2115~2117항) 첫째 계명은 또한 모든 형태의 점복을 물리치기를 요구합니다. 사탄이나 마귀들에게 의뢰하는 것,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 미래를 꿰뚫어 본다며 헛되이 추측하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탄생 별자리를 믿거나 점성술이나 손금에 의지하거나 무당(점쟁이)에게 물어보는 일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역사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믿으며 하느님께 신뢰하며 자유와 책임의식을 갖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워야겠지만 점복을 통해 미래를 미리 내다보거나 장악하려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만 드려야 하는 영예와 존경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마술이나 요술 행위 역시 경신덕에 크게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부적을 지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경(2118~2122항) 말이나 행위로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 신성 모독죄와 성직 매매가 모두 불경에 해당하는 죄들입니다. 신성 모독은 성사와 전례행위, 그리고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성직자, 수도자)과 물건(축복한 십자가), 장소(성당) 등을 모독하거나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모독하는 것은 중죄가 됩니다. 성직 매매는 영적인 것을 금전으로 사고 파는 행위를 말합니다. 영적인 선물은 자기 것이 아니기에 마치 자기가 주인인 듯이 행세하는 것은 첫째 계명을 거스릅니다. 교회법은 이렇게 규정합니다."성직자는 성사 집전을 위해 관할권자가 정한 봉헌금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못하며, 가난한 이들이 가난 때문에 성사의 도움이 박탈되지 아니하도록 항상 주의하여야 한다"(교회법 제848조). 무신론(2123~2126항) 무신론의 형태는 다양합니다만, 하느님의 존재를 배격하거나 거부한다는 면에서 경신덕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무신론이 생겨나고 확산되는 데는 신앙인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신앙인들이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거나 교리를 잘못 제시하거나 종교, 윤리, 사회 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리기 때문"(사목헌장 19항)입니다. 흔히 무신론은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신 긍정이 인간의 존엄성에 조금도 배치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인간 존엄성은 바로 하느님 안에 기초를 두고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불가지론(2127~2128항) 불가지론은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입장을 말합니다. 불가지론은 여러 형태를 띠는데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초월적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는 형태가 있는가 하면 하느님의 존재 증명이 불가능하다며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형태도 있습니다. 불가지론은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을 찾는 것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무관심주의나 윤리적 양심의 게으름 등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 불가지론은 실천적 무신론이 됩니다. 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새기지 마라(2129~2132항) 구약성경은 "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어 타락하지 않도록 하여라"(신명 4,16)라고 지시합니다.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 이유로 개신교 신자들은 성당에 성모상이 있는 것을 보고 우상숭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구약시대부터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상징적으로 가리켜 주는 형상들을 만들도록 명령하시기도 합니다. 구리뱀을 만들라는 말씀이나(민수 21,4-9), 계약의 궤와 커룹을 만들라는 말씀(탈출 25,10-22)이 그러합니다. 8~9세기에 일어난 성화상 논쟁(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을 그린 그림을 공경하는 것과 관련한 논쟁)과 관련, 교회는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에 맞서 그리스도뿐 아니라 천주의 성모, 천사와 모든 성인의 성화상 공경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성화상 공경은 우상을 금지하는 첫째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를 공경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그림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표상하는 분 곧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 또는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유념할 것은 성화에 표하는 공경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정리=이창훈 기자 백영민2014.04.10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4>십계명과 사회교리<6>교회,](//cpbc.co.kr/CMS/newspaper/2014/02/rc/497110_1.0_titleImage_1.jpg)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십계명과 사회교리교회,사회교리 가르침, 더불어 사는 삶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성당 순례를 빼놓고는 거의 볼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는 유럽은 하느님 창조물의 결과인 자연경관의 빼어남보다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과 인간의 인공적 구조물이 어우러진 곳이다. 사물에 깃든 그리스도교 신앙 유학 시절, 로마로 성지순례나 여행을 오는 사람들을 가끔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로마 안내를 하다 보면 주로 찾아가는 곳이 성당이었다.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기에 별 불만이 없었지만 가끔 신자가 아닌 분들도 있었다. 그중 신자가 아닌 지인이 불평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신부님, 로마에는 성당 아니면 갈 곳이 없나요? 저는 신자도 아닌걸요." 나는 "로마에는 성당 빼고는 더는 가 볼 만한 곳이 없다"고 대답했다. 주요 관광 명소도 대부분 성당이었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가더라도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품이 거의 없었다. 중세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높이에서 미술 작품들을 창작했다.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 수많은 중세 미술가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관과 신앙적 체험 안에서 자신의 작품에 정신을 투영했고 예술혼으로 승화시켰다. 유학 시절, 어머니께서 아들 신부를 보러 오셔 성 베드로 대성당 순례를 하신 적이 있다. 머물던 수도원에서 식사하던 중 이탈리아인 노사제께서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고 어머니께 물으셨다. 어머니는 뜻밖에도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성당 중앙의 비둘기 모습이 가장 마음에 와 닿네요"라고 답하셨다. 어머니는 성당의 규모나 미술 작품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셨고, 스테인드글라스의 비둘기 모습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신 것 같았다. 인간의 인공적인 미술품 속에 녹아든 작가의 노고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모습을 찾아내신 것이다. 평생을 평범하게 신앙으로 살아오신 어머니께서는 어떤 위대한 미술 평론가보다 더 아름답고 훌륭한 소감을 말씀하셨다. 사제인 나 역시 처음 유학을 와서 대성당 안에 자리하고 있는 예술 작품들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마음을 뺏겼었는데, 어머니는 사제인 나보다 더 나은 신앙인이셨다. 성당 안에 자리한 미술 작품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신 것이다. 교회, 하느님께서 인간과 머무는 곳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부터 교회는 신자를 교육할 목적으로 성당 내에 수많은 벽화를 그려 장식했다. 예술적인 차원이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교육할 목적이었다. 작품 대부분은 성경의 여러 이야기나 성인들의 삶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일종의 시청각 교육이었다. 문자를 아는 이들은 소수 지배계층이었고 대중은 그러지 못했다. 따라서 교회는 대중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심어주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미술 작품과 음악을 사용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 미술, 음악, 건축 등 대부분의 중세 예술 작품은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화려하게 성전을 꾸미는 것이 단순히 외적인 부분만 아니라 개개인의 영적인 차원까지도 배려한 꼼꼼한 조치였다. 오늘날처럼 교회 밖에서도 즐길 거리가 많은 사회 안에서는 교회라는 공간적 장소가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곳이다. 한 교회 안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형제 자매들이 모여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며, 공동체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오늘날에도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성적 차원의 필요성은 오늘날에도 교회가 세상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과 깊이 연관되어 나타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분리시킨 채 살아갈 수 없으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니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인간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통해 영적인 것과 세상의 것들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얻는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함께 머무시는 구체적인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추상적이거나 영적인 차원을 넘어서 인간 세상과 역사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 함께 존재하는 곳이다. 따라서 인간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협력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60항 참조).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하는 곳이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은 세상 안에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사회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회교리가 우리 인간 사회를 더욱 풍요롭고 충만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간추린 사회교리」 62항 참조).백영민2014.02.18
소통과 친교로 '나눔교리' 익혀부산교구 청소년사목국, CUM(꿈) 캠프캠프 참가자들이 소통을 주제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부산교구 청소년사목국 부산교구 청소년사목국(국장 권동국 신부)은 7월 22~24일, 29~31일 두 차례에 걸쳐 부산 남천동 푸른나무 교육관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나눔과 소통'을 주제로 캠프를 열었다. 캠프는 청소년사목국이 본당 중고등부 학생 눈높이에 맞춰 발행하는 월간지 'CUM'(꿈)의 활용도를 높이려는 취지로 기획됐다. 주일학교 교재로도 쓰이는 CUM은 복음을 읽고 나누는 나눔교리와 게임을 통해 교리를 익히는 별난교리, 전례 상식, 여행지 소식 등을 담고 있다. 캠프에 함께한 170여 명의 청소년과 교사들은 2박 3일 동안 마당극과 퍼포먼스 등을 함께하며 자신을 알아가고, 표현하며, 상대와 소통했다. 잡지에 실린 나눔교리, 즉 소통과 나눔으로 교리를 몸으로 익히는 시간도 가졌다. 이병준(스테파노, 덕계본당) 교리교사는 "본당 교리 시간에는 성경을 읽고 문제를 푸는 등 교사와 학생과의 소통이 중심이었는데, 이번 캠프는 학생들이 배운 것을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나누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청소년사목국 중고등부 담당 박난묵(안드레아)씨는 "나눔교리를 어려워하는 청소년들의 이해를 높이고, 잡지를 활용한 본당 교리교육을 활성화하고자 캠프를 열고 있다"고 설명했다. CUM은 부산교구는 물론 타 교구에서도 구독할 수 있다. 문의 : 051-0629-8742 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cpbc2013.08.06

걷기ㆍ빈그릇 식사로 가톨릭 영성 체험서울 우리농, 남양주 슬로푸드 국제대회서 '밥과 영성' 진행남양주 슬로푸드 국제대회에서 열린 천주교 걷기명상과 빈 그릇 식사 체험 참가자들이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다. 이힘 기자 세상이 빨리빨리를 외치며 속도를 높여갈 때 '느리게''천천히' 먹거리의 참 의미를 생각하자는 것이 '슬로푸드' 정신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체육문화센터에서 열린 2013 남양주 슬로푸드 국제대회에서 '음식에 대한 종교적 깨달음'을 얻는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대교구 우리농운동본부(본부장 조해붕 신부)는 3일 체육문화센터 야구장에서 '밥과 영성'을 주제로 걷기명상과 빈 그릇 식사 체험을 진행하고, 50여 명의 참가자들이 먹거리에 대한 가톨릭교회 영성을 체험하도록 이끌었다. 진행자로 나선 서울 환경사목위원회 생태유아교육소위 김영주(요한어린이집 원장) 수녀는 "밥이 하늘이다. 한 톨의 쌀, 한 그릇의 밥은 농부의 땀일 뿐 아니라 흙과 벌레, 물과 구름 같은 자연이 함께 만든 우주의 공동작품"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밥을 먹는 행위는 이들의 우주적 생명을 먹는 거룩한 의식이며, 우리 몸은 이러한 수많은 요소로 구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김 수녀는 이어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빵을 나눠 주신 성찬례와, 먹고 남은 빵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차는 기적 등 성경에도 먹거리에 관한 부분이 많이 있다"면서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듯, 우리는 먹거리를 통해서도 주님 뜻을 헤아리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이날 야구장에서 주변 산책로를 따라 자연생태공원까지 1㎞가량을 걸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맞으며 풀벌레 소리와 나뭇잎 밟는 소리 등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점심때는 모든 음식을 남기지 않고 비우는 빈 그릇 식사 체험을 했다. 빈 그릇 체험이 인상 깊었다는 이경희(히야친타, 서울 목3동본당)씨는 "원래 음식을 빨리 많이 먹는데, 양을 조금 줄이고 천천히 먹으니 많이 먹었을 때보다 배가 부르다"며 "우리 모두 여유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조금 줄여 먹으면 음식물 쓰레기도 생기지 않을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cpbc2013.10.08
![[성경 속 궁금증] 35. 이스라엘 백성은 왜 성막을 만들었을까?](//cpbc.co.kr/CMS/newspaper/2012/06/rc/416850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35. 이스라엘 백성은 왜 성막을 만들었을까? 하느님 만나 대화하는 거룩한 장소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세운 성막.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거나 움직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신들에게는 저마다 다스리는 관할 영역이 있으며, 그곳을 벗어나면 힘을 쓸 수 없다고 믿었다. 또 이들은 신전을 만들어 신들의 장소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를 분리시켰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느님을 위한 공간인 성막(聖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성막은 당시 근동에서 갖고 있던 신전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 시나이 광야에 도착했을 때,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사십일 동안 머무르며 하느님에게서 십계명이 적힌 돌판과 성막에 관한 법규를 받는다. 성막에 관한 법규는 성막을 짓는 방법부터 그 안을 장식하는 방법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너는 가늘게 꼰 아마실, 자주와 자홍과 다홍 실로 짠 천 열 폭으로 성막을 만들어라. 커룹들을 정교하게 수놓아 그 폭을 만들어야 한다.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 암마, 각 폭의 너비는 네 암마로 하되, 폭마다 치수를 같게 하여라. 다섯 폭을 옆으로 나란히 잇고 다른 다섯 폭도 옆으로 나란히 이어라…"(탈출 26장 참조). 성막은 내부와 외부를 나눠 거룩한 곳과 거룩하지 않은 곳을 구별해놓았다.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쪽 하나밖에 없었고, 이 문을 통해서만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막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공간으로, 이스라엘 최초 성막은 천막 형식으로 운반이 가능했다. 이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동할 때나 행진할 때 성막은 늘 그 가운데 있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 중심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성막은 하느님 현존의 증표였고,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성막을 매개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다. 성막이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중심부에 위치했던 것은, 당시 신전들이 사람이 사는 거주지와 떨어진 곳에 건립된 것과는 대조된다. 성막에는 '하느님 말씀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사상이 깃들어 있다. 유다인들은 예로부터 말에는 힘과 인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무한한 능력을 지닌 하느님 말씀은 반드시 이뤄진다고 믿었다. 유다인들이 성막을 세운 목적은 하느님과 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종교는,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백성은 그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데서 형성된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무엇보다 대화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막은 사람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또 성막은 신앙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사람들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막의 영적 의미는 이스라엘만이 아닌 모든 인간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막은 교회의 예표이며, 하느님과 대화하기 위해 만나는 장소이다. 퇴사자22012.06.05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9>순교자, 두 개의 천국을 살다간 사람들](//cpbc.co.kr/CMS/newspaper/2014/03/rc/500225_1.0_titleImage_1.jpg)
[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순교자, 두 개의 천국을 살다간 사람들 아프리카 선교사 모임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케냐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신부님에게 나이로비 쇼핑몰 테러사건에 대해 들었다. 테러범들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었는데 쇼핑몰 안에 있던 인질 중에 이슬람교도와 아닌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 신앙을 물었다고 한다. 인질들에게 코란을 읽게 하고, 마호메트에 대해 질문해 제대로 답하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고 한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희생자 중 몇몇은 테러범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을 떳떳이 밝히고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I'm Christian!"(나는 그리스도교인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순간이 오면 과연 가톨릭 신앙을 떳떳이 고백하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신분 초월한 신앙 선조의 형제애 이처럼 가톨릭 신앙을 고백한 이들이 우리 신앙 선조들이다. 그들은 200년 전 수차례의 모진 박해를 통해 아무런 죄 없이 천주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다. 세상 불의와 싸우며 신앙을 고백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난 2월 8일, 평화방송 라디오를 통해 교황청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초기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을 결정했다는 바티칸 통신의 소식을 들었다. 124위 시복 결정은 사제인 나에게도 큰 기쁨인 동시에 한국 가톨릭교회의 큰 기쁨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신앙의 자유가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지만, 순교자들은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신앙 자유를 위해 싸웠다.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면서까지 신앙을 지켰을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용기는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초기 순교자들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부터 그들의 삶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하느님을 알게 됨으로써 얻게 된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재산도, 가족도, 권력도 하느님을 만나서 얻게 된 진정한 기쁨을 대체하지 못했다. 124위 중 황일광(시몬)의 삶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1757년 충청도 홍주에서 천민으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몹시 어렵게 보냈다. 그러나 1792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그의 모든 삶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황일광은 입교 후 상상도 못한 대접을 신자들에게 받았다. 신자들은 그가 백정임을 알았지만 똑같이 대했다. 심지어 양반 집 방안까지 초대받아 들어갔다. 신분제도가 철저했던 조선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황일광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교우들에게 감동해 살아생전 두 개의 천당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울 정약종(아우구스티누스)의 집 근처에서 살다 체포됐다. 관헌들이 무자비한 형벌을 가하며 배교할 것을 강요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진 고문에 다리가 부러져 들것에 실려 고향인 홍주로 보내졌지만 명랑함을 잃지 않았다. 결국, 1802년 1월 30일 고향인 홍주에서 참수를 당했다. 평상시 농담처럼 말했던 것처럼 두 번째 천국으로 갔다. 신분제도를 뛰어넘는 가톨릭교회의 보편적 형제애는 황일광이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게 했고, 죽어서도 천국을 살게 했다. 그리스도인, 욕심과 거짓을 버려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사도 10,34; 로마 2,11; 갈라 2,6; 에페 6,9 참조)는 성경 가르침은 시대를 넘어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지닌 존엄성은 인간이 다른 사람 앞에서 갖게 되는 존엄성의 기초가 된다. 또한 인간 존엄성은 인종, 국가, 성별, 출신, 문화, 계급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평등과 우애의 궁극적인 바탕이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144항 참조). 순교자 황일광은 출신이나 계급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형제애를 통해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살았다. 이 세상 안에서 이미 천국을 맛보았던 것이다. 초기 신앙 선조들의 사상은 돈, 신분, 학벌, 직업 때문에 차별화돼 가는 오늘 세상에 다시 한 번 일침을 놓는다. 만일 우리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의지하여 살며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욕심과 거짓을 던져 버려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이 하느님 뜻에 맞는 세상으로 변화하길 바란다. 세상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과 다르게 살아간다고 말했지만, 실제는 세상 여러 가지 욕심에 마음이 팔려 점점 더 세속화돼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부끄럽게 다가왔다. 나도 순교자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찾는 기쁨의 삶을 지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총칼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상황에서 과연 진리와 정의 편이 돼 내 전 존재를 걸 수 있을까?백영민2014.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