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예수님은 초능력을 갖고 계섰을까? 궁금하면~](//cpbc.co.kr/CMS/newspaper/2012/11/rc/431229_1.0_titleImage_1.jpg)
[출판]예수님은 초능력을 갖고 계섰을까? 궁금하면~가톨릭출판사, 신앙의 해 맞아 청소년 교육도서 출간 예수님 궁금증 62가지(샤를 델레 글/에릭 퓌바레, 플로랑스 방데르마를리에르 그림/고선일 옮김/가톨릭출판사/1만 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선포한 '신앙의 해'를 알차게 보내기 위한 교회 내 움직임이 활발하다. 교구와 본당마다 신앙의 해 관련 행사와 교육 등을 마련하며 신자들이 하느님을 새롭게 체험하고, 신앙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깨닫도록 이끌고 있다. 하지만 정작 교회 미래인 청소년을 위한 신앙의 해 맞춤 교육이나 프로그램을 찾아보긴 어렵다. 이에 가톨릭출판사(사장 홍성학 신부)는 신앙의 해를 맞아 청소년 교육도서로 「예수님 궁금증 62가지」를 펴냈다. 가장 예민하고 혼란스러운 사춘기 시절, 신앙의 참맛을 느끼지 못해 교회를 떠나는 청소년을 위해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서다. 책은 복음서를 토대로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예수에 관한 궁금증을 명확하고 또 친절하게 해결해 준다. 이와 함께 각 질문에 삽화를 곁들여 청소년들이 흥미를 갖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가톨릭 청소년 잡지 「사무엘」을 창간한 샤를 델레(예수회) 신부다. 잡지를 만들며 청소년과 교류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청소년들이 예수에 관해 궁금해 하는 질문 62가지를 뽑아냈다. 예수 탄생부터 어린 시절, 외모, 말씀과 행적, 죽음과 부활까지 예수 생애와 관련된 모든 부분을 다뤘다. △예수님은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특별했나요? △예수님은 학교에 다녔나요? 또 읽기와 걸음마, 이런 것들도 배웠나요? △예수님에게 여자 친구도 있었나요? △예수님은 초능력을 갖고 계셨나요? △우리도 죽은 후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수 있나요? 등 다소 엉뚱하지만 청소년들이 실제로 궁금해 하는 부분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여느 아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말하기와 걸음마를 배웠고, 민족의 종교를 익히셨습니다"(예수님은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특별했나요? 중에서).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고쳐 주셨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적'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태도랍니다"(예수님은 초능력을 갖고 계셨나요? 중에서). 델레 신부는 성경을 토대로 질문에 답해주고 있어, 청소년들이 자연스레 성경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아마도 복음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라며 "청소년들이 평소 갖고 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박수정2012.11.13
![[아! 어쩌나?] (177) Q. 이스라엘이란 나라에 대해 궁금합니다](//cpbc.co.kr/CMS/newspaper/2012/11/rc/431918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177) Q. 이스라엘이란 나라에 대해 궁금합니다Q. 이스라엘이란 나라에 대해 궁금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 유독 이스라엘을 편애하고 다른 민족들을 미워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왜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런 사리에 맞지 않는 처사를 하셨는지 늘 마음에 걸립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들은 주님께서 유다인으로 태어나셨으니 우리는 이스라엘을 우리 신앙의 선조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가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축복받은 땅이라서 그곳에 가야 진정한 신앙인이 된다고 강조하는데, 저는 왠지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그분들은 말끝마다 이스라엘을 본받아야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정말 그래야 하나요? A. 형제님 말고도 많은 분이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어서 나름의 대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선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심리 치료적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민이란 하느님께서 선택한 민족이란 개념인데, 이런 생각은 건강한 생각이 아니라 병적 콤플렉스, 그중에서도 우월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개념이라는 게 심리 치료적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우월 콤플렉스는 열등감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잘난척하는 사람을 볼 때가 있지요. 자기 학벌을 자랑한다든가 혹은 자기 외모, 자기가 가진 것 등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우월감을 가진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우월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 밑에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열등감이 깔려 있습니다. 그 열등감을 어떻게든 숨기려 하다 보니 역으로 우월감을 갖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선민의식 즉, 하느님께서 자기 민족만을 선택하셨다는 생각은 건강한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일까요? 이스라엘 민족은 중동지역에서 거대 제국이 아니라 늘 떠돌아다니던 유목민 부족이었습니다. 더욱이 주변 제국들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나라 없이 헤맸던 아픈 역사를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족적 열등감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자칫 나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정체성마저 없어질 위기에 처하게 됐는데,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극단적 처방으로 선민의식이라는 신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주님은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고, 모든 이를 당신 품으로 부르길 원하셨다고 말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될 것이다." 이 말씀처럼 선민에 뽑힌 백성이란 개념은 현대에 와서 신약의 관점에서 재해석돼야 합니다. 즉, 이스라엘만이 선민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선민의 대열에 든다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민이란 개념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알아들었다는, 깨달았다는 정신적 차원의 것으로 이해돼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하필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것일까요? 이스라엘을 한 번이라도 순례한 분은 아시겠지만, 이스라엘은 옛날에는 물을 둘러싸고 살육이 벌어진 곳이었고, 현대에 와서는 미국을 비롯한 기독교 국가들이 석유를 둘러싸고 이슬람 국가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곳입니다. 즉, 세계적 갈등의 핵심지역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겉으로는 국가 간 문제 혹은 종교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된 곳으로 비쳐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탐욕, 나누고 상생할 줄 모르는 성향이 문제임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이스라엘에 보내시어 당신 뜻을 알리려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본받으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봐야 할 듯 합니다. 간혹 외국 이스라엘 청년이 자진해서 자기 군대에 입대했다는 미담이 전해져 감동을 주곤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다른 나라에서 살다 난민처럼 밀려나서 이스라엘에 정착한 이들이 많고, 또 불안감과 두려움을 갖고 살면서 돈을 벌면 어떻게든 미국 같은 나라로 이민가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삼천리 금수강산에 사는 형제님이 굳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 발자취, 그분의 흔적을 더듬어 성경 묵상에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순례를 가시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드립니다.홍성남 신부(한국가톨릭상담심리학회 1급 심리상담가, 그루터기영성심리상담센터 담당) cafe.daum.net/withdoban퇴사자22012.11.20
![[가톨릭 문화산책]<41>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9)](//cpbc.co.kr/CMS/newspaper/2013/11/rc/483870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9)피로 얼룩진 얼굴, 못박혀 비틀어진 손발...어린양 위해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사도 2,28) 작품 : 마티스 그뤼네발트 작 '십자가 처형' (이젠하임 제대화 일부, 269×307㎝, 1512~16년, 목판에 유채, 프랑스 알자스 주 콜마르 운터린덴 미술관) ● 고통의 신비 5단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십자가, 생명, 사랑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십자가 처형'을 주제로 한 그림은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십자가 처형' 작품이 일반화하기 시작한 것은 13~14세기께다. 성 프란치스코의 신앙심,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수난에 대한 신비주의적 경향의 문헌이 널리 확산하면서였다. 많은 화가가 예수의 죽음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고통을 초월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우아하기까지 한 예수의 모습부터 예수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격정적으로 묘사한 그림까지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주제로 다룬 그림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고, 오른쪽에는 요한 사도가 배치되곤 한다. 화가 마티스 그뤼네발트(1470?~1528년)는 알사스 지방의 이젠하임에 있는 안토니오 수도회 의뢰로 수도원 소속 병원을 위해 '이젠하임 제대화'를 제작했다. 병자들을 간호하는 사도직 활동을 했던 수도회는 그림을 통해 질병과 고통스러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은총을 병자들에게 심어주려는 목적으로 제대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그래서 제대화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진 고통을 극복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듯이 환자들 역시 병마의 고통을 이겨내리라는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림 '십자가 처형'은 '이젠하임 제대화'의 중앙 패널의 일부다. 그림 중앙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보고 혼비백산한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를 부축하는 요한 사도, 무릎을 꿇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다. 오른쪽에는 요한 세례자가 서 있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병사들이 죄목으로 '유다인의 왕 예수'를 나타내는 라틴어 약자 'IㆍNㆍRㆍI(Iesus Nazarenus Rex Iudaeorum)'가 적혀 있다. #사랑의 징표 :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 황량한 골고타 언덕에서 이뤄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비참한 슬픔으로 재현돼 있다. 예수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끔찍한 고통을 말하고 있다. 말라 비틀린 팔과 다리, 머리 깊숙이 박힌 가시관으로 피로 얼룩진 얼굴, 못에 박혀 비틀린 두 손의 손가락들, 선연한 채찍 자국, 몸의 무게로 찢어질 듯한 겨드랑이, 가시 박힌 몸의 표현 등은 예수가 죽어가는 순간의 고통을 보다 강렬하게 드러낸다. 어찌할 수 없는 처참한 고통에 몸을 비틀다 예수는 막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그뤼네발트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을 통해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림의 전체 구성에서 예수는 다른 주변 인물보다 더 크게 묘사돼 수난의 육체적 고통이 두드러진 '사람의 아들'로 나타난다. 동시에 화가는 예수의 인체를 고통의 흔적과 함께 르네상스 미술의 해부학적 조형성에 맞춰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묘사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육체적 이상미는 경외감과 장엄함을 불러일으켜 예수의 신성을 느끼게 한다. 화가는 십자가에 매달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예수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림의 중심은 죽음의 고통이 아니다. 화가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 예수의 사랑을 표현한다. 예수의 손발과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인류에게 흐르는 사랑의 표징이다. 마치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던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듯이"(창세 2,6-7) 창으로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와(요한 19,34) 세상 모든 사람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성령의 표징과도 같은 예수의 피와 물을 내어주신다.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다"(요한 7,38-39).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어두운 하늘에 황폐한 돌투성이 바닥에 박힌 커다란 십자가 위에 처참하게 매달려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요한 3,16). #한없는 슬픔 :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에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크나큰 슬픔에 젖어 있다. 흰색 옷이 눈에 띄는 성모 마리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의 모습에 넋을 잃은 듯 몸을 가누지 못한다. 비통한 표정의 요한 사도가 성모 마리아를 부축한다. 그림 전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성모 마리아의 흰옷은 순결한 여인의 상징으로,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는 듯 예수의 몸에 흐르는 피땀과 대조를 보인다. 찢긴 아들의 몸을 바라보는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찬 절규는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다. 또한 십자가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예수를 바라보며 비탄에 빠져 있다. 예수의 발치에 있는 것은 향유가 담긴 옥합으로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붓고 회개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상징물이다. #구원과 희생 : 요한 세례자와 어린 양 이 작품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등장하는 인물, 곧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 외에 요한 세례자가 나타난다. 성경에 따르면, 요한 세례자는 예수가 못 박히기 전에 벌써 살로메와 헤로데에게 처형당했다. 요한 세례자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에게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줌으로써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그뤼네발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 요한 세례자를 왜 등장시킨 것일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에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비통해하는 모습과는 달리 요한 세례자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 표정이다. 그는 단지 자신의 검지를 들어 예수를, 엄지는 그의 발아래에 어린양을 가리키고 있다. 요한 세례자의 팔 윗부분 배경에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성구가 쓰여 있다. 예수가 구세주로서 오셨다는 것을 증명하며, 우리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도록 인도한다. 요한 세례자의 등장은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성작에 피를 쏟는 어린양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희생으로 한 몸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요한 세례자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신 예수가 하느님께 피의 제물로 바쳐진 구세주임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예수는 인류가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어린양이다.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물은 인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묘약'이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윤인복 교수(아기예수의 데레사,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cpbc2013.11.19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7>가난에 영적 가난이 따로 있는 것일까](//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4085_1.0_titleImage_1.jpg)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가난에 영적 가난이 따로 있는 것일까현실 외면한 영적 가난은 위험 우리는 연중시기를 보내며 요즘 주일미사 때, 루카복음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복음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가 않다. 복음 말씀이 지나치게 부와 가난을 이분법적으로 대립ㆍ대조시키며 평가에 대한 선택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루카복음은 다른 복음에는 없는 예수님의 출생 배경과 유년시기를 다룬다.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압권은 '마리아'다. 그 마리아가 부른 노래는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아기를 가진 여인이 부른 노래치고는 너무나 무겁다. 통치자와 부유한 사람이 들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이다. 통신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었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또 어떤가? 바로 성경(이사 61,1-2)을 인용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 말씀에서 아무리 (좁은 의미의) 영적ㆍ종교적 메시지를 찾으려 해도 비껴갈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는 당대의 보통 유다인들이 그렇게 철학적이며 영적이며 종교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 가난하고 배고프며 식민 지배를 받으며 고통을 겪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식민지 동족을 아끼고 사랑해 헌신하려는 이들에게도 당신 뜻을 분명히 전한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마리아의 노래도, 예수님의 말씀도 루카복음은 구원과 해방이 아무리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해도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그것을 배제한, 혹은 그 고통과 억압을 간단히 초월한 구원이 아님을 보여준다. #복음이 전하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루카복음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그 이유로 복음이 지나치게 이분법적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했다"(루카 6,24-26). 예수님께서 어찌 그렇게 사람을 편 갈라서 한편은 행복하다 하고, 다른 한편은 불행하다고 하실까? 앞에서 인용한 마리아, 자애로우신 어머니 마리아가 어찌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 '통치자','부유한 자'를 그렇게 철저하게 배제할까? 우리는 그 불편함을 모면하기 위해 타협을 시도한다. 바로 영적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 말이다.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쯤으로, 통치자는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쯤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쯤으로, 굶주리는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리는 사람쯤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은 자기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쯤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쯤으로 말이다. 그러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결코 예수님과 마리아가 꾸짖으려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갈망하는 사람이라고 위로 삼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 그러니까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정말로 배고프고, 정말로 잡혀가고, 정말로 앞을 못 보고, 정말로 묶여 갇혀 있고, 정말로 비천한 사람이 늘어간다.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아져 버렸다. 통치자들은 그 교만이 끝이 없고, 부유한 사람들은 그 부를 주체하지 못하는데, 영적 해방 덕분에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우리가 부와 가난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그동안 실제 부와 가난 사이의 불균형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퇴사자22013.07.16

윤명희, 홍익표 의원 등 국회 빛낸 바른 언어상 수상국회의원 연구단체 '일치를 위한 정치포럼' 제3회 시상식 제3회 국회를 빛낸 바른 언어상 시상식에서 수상자 의원 6명과 일치를 위한 정치포럼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국회의원 연구단체 '일치를 위한 정치포럼'(이하 정치포럼)은 2월 21일 국회 본청 의원식당 별실에서 제3회 국회를 빛낸 바른 언어상 시상식을 열고, 윤명희(새누리당)ㆍ홍익표(민주통합당) 의원 등 6명에게 으뜸ㆍ모범ㆍ품격 언어상을 수여했다. '국회를 빛낸 바른 언어상'은 정치포럼이 2011년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와 함께 정치언어 순화를 목적으로 제정한 것으로, 언어 사용에 가장 모범이 된 국회의원에게 시상하고 있다. 품격언어상을 수상한 박수현(안토니오, 민주통합당) 의원은 "성경에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같다'(1코린 13,1 참조)는 말이 떠오른다"며 "말 속에 착한 마음과 배려하는 마음, 희망을 주는 마음을 담는 것이 바른언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저 자신부터 겸손한 마음으로 국민에게 다가가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른 수상자들도 정치인의 언어사용에 대한 중요성에 공감하며, 국민에게 신뢰받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병석 국회부의장은 축사에서 "바른 언어상 수상 의원들은 국회의원 300인을 대표하는 입법부의 가장 빛나는 인물로 선정된 것"이라며 "국민을 향한 봉사정신이 정치에 대한 신뢰로 승화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정치포럼 공동대표 김성곤(민주통합당) 의원은 "정치인의 말은 국민을 편안하게도 하고, 불안하게도 한다"며 "바른 언어상 시상을 통해 대한민국 정치가 국민에게 신뢰받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치포럼은 포콜라레 운동의 일치 영성에 뿌리를 둔 연구단체다. 소속 의원들은 보편적 형제애를 의정활동에 적용하는 방안을 연구, 실천하고 있다.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교수가 지도하는 대학생 모니터단은 19대 국회 개원부터 지난해 말까지 본회의와 상임위, 국정감사의 의원 발언 기록과 영상을 분석해 수상자를 선정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수상자 명단 으뜸언어상: 윤명희(새누리당)ㆍ홍익표(민주통합당) 의원 모범언어상: 홍문종(새누리당)ㆍ남윤인순(민주통합당) 의원 품격언어상: 유기준(새누리당)ㆍ박수현(민주통합당) 의원조은일2013.02.26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6>반생명적 범죄에 무감각한 사회](//cpbc.co.kr/CMS/newspaper/2013/06/rc/459088_1.0_titleImage_1.jpg)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 반생명적 범죄에 무감각한 사회교회, 생명 기본권 억압받는 사람들 대변해 줄 의무 지녀 천상의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지상의 생명 봉사자들에게 주신 편지♂♀생명봉사자 : '새롭고 사악한 문화 사조'가 무엇인가요? 이미 서론을 읽으신 분은 벌써 간파하셨겠습니다만, 교황님께서 심각하게 우려하며 지목하시는 새로운 형태의 위협들이 만드는 '문화 사조'는 이렇습니다. 첫째는 각 분야 언로(言路)의 직무 남용으로 형성되는 문화 사조입니다. "개인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반생명적 범죄들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처벌의 면제뿐 아니라 국가의 공인까지" 그리고 "보건 제도의 무료 봉사까지 받아가면서" 그런 범죄들을 "완전히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하려는 사회적 경향 말입니다(4항 §1). 둘째는 반생명적 범죄를 합법화하려는 각국의 경향으로 형성되는 것인데, "헌법의 기본 원칙을 벗어나면서까지… 합법화"하려는 경향을 말합니다(4항 §2). 셋째는 그런 이유로 도덕적 타락을 촉발시키고 양심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만, "범죄라고 만장일치로 내려진 결정과 상식적인 도덕 판단에 의해 거부된 것들이 사회적으로 점차 용인되게 하고"(4항 §2) "그 결과로 양심 자체가 어두워져서 인간 생명의 기본적인 가치에 관한 문제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겪게"(4항 §3) 하는 그런 사조 말입니다. 넷째는 그래서 의료업의 성격마저 일부 왜곡하게 만드는 문화 사조입니다. '그 종사자들의 품위'마저도 떨어지게 하는 그런 사조 말입니다(4항 §2). ♂♀생명봉사자 : 아직 위기감의 실체가 다가오지는 않는데… 뭘 해야 할까요? 아직 서론인지라 구체적 사례들을 다루지 않아서 그렇겠습니다만, 먼저는 "1세기 전에 노동자 계층이 기본권을 억압당하고 있을 때"처럼 "생명의 기본권을 억압당하고 있을 때에 교회는 그와 똑같은 용기로써 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의무"(5항 §3)를 공감해야 하겠습니다. 그것도 그저 이념적 의무로서가 아니라 "연약하고 방어능력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의 생명"의 '불쌍함'에 대한 공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 호소하신 것처럼, "가정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생명의 성역'으로 남게 되기를"(6항 §2), 그리고 "진리와 사랑의 참된 문화를 건설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구체적 방법들은 나중에 제시될 것입니다. 나가며 "…노부부의 사랑과 존엄사를 다룬 프랑스 영화 '아모르'의 여자 주인공을 연상시켰다." 최근 국내 한 유력 주간지가 웰다잉(well-dying)을 위한 죽음 체험 프로그램을 소개하면서 쓴 기사 내용입니다. 작년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라는데, 검색해보니 웬걸, 고통스러워하는 할머니를 지극히 간병하던 할아버지가 마침내 할머니 얼굴을 베개로 눌러 숨 막혀 죽게 한다는 줄거리였습니다. 이제 위기감이 슬슬 잡히십니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상대로 봉사하고 대항해야 하는지 감이 오시는지요. 많은 장면과 대화가 담겨 있겠지만, 그래서 큰 상도 받았겠지만, 그러나 '아모르'(사랑)도 '존엄'도 아닌데, 그저 '배우자 살인극'을 존엄사로 소개하다니….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또 한 번 의노(義怒)하실 일입니다. '새롭고 사악한 문화 사조'의 한 전형이 아닐런지요. 기자의 개인적 무지의 소치인지, 아니면 의도적 혼용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고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작년 12월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제도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으로 이어지는 기사의 의도가 또 '생사람' 잡으려는 건 아닌지, 나도 우리도 '무의미한 인간'으로 내몰려는 것은 아닌지 사뭇 걱정스럽습니다. 다음에는 본론으로서 제1장을 시작하는데 먼저 '인간 폭력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인용되는 성경말씀에 대한 교황님의 예지(叡智)를 감상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입니다. 감사합니다.이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교육분과장 가톨릭대 윤리신학 교수)퇴사자22013.06.18
![[가톨릭 문화산책]<16>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4)](//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2090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4)예수의 세례, 성자임을 선포하고 새 생명과 구원 약속 조반니 벨리니(1430?~1516)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는 1501년께 제작됐다. 13세기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주 도시인 비첸차에 건립된 산타 코로나 성당 안에 특별히 그라지아니 가문을 위해 만들어진 소제대 제대화로서였다. 이 제대화에는 사연이 있다.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난 비첸차 영주 잔바티스타 그라지아니 가르자도리가 요르단 강을 건너면서 위험한 순례를 무사히 마치면 자신의 수호성인인 요한 세례자를 위해 경당을 봉헌할 것이라 다짐한 게 계기가 됐다. 예루살렘에서 안전하게 돌아온 가르자도리는 맹세한 대로 요한 세례자를 위해 성당 내에 소제대 경당을 세우고, 그곳을 자신과 자신 가족의 무덤으로 쓴다. 제대화는 예수가 요한 세례자에게 물로 세례를 받는 장면이다. 요르단 강에서 받은 예수의 세례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냄과 동시에 구세주로서 공생활을 선포하는 사건이다. 예수의 세례에 관한 기록은 4복음서에서 모두 다루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손을 모은 예수와 조개껍데기나 접시, 혹은 맨손으로 뜬 물을 떨어뜨리는 요한 세례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또한 비둘기나 하느님 형상, 천사들과 군중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림 중앙에는 예수가 남루한 옷을 걸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고 있다. 왼쪽에는 세 인물이 나무 아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다. 요한의 어깨 뒤에는 초라한 집 앞에 서 있는 은수자가 보인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비둘기가 날개를 수평으로 편 채 날고 있고, 그 위로는 양팔을 벌린 성부 하느님이 보인다. 배경은 성경에서 말하는 요르단 강이 아니라 바로 저녁 무렵의 비첸차 지방의 풍경이 묘사돼 있다. 작품 : 조반니 벨리니 작, '그리스도의 세례' (400×263㎝, 1501년께, 이탈리아 비첸차 산타 코로나 성당) ● 빛의 신비 1단 :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세례, 죽음, 구원#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화면 중심부에 두 손을 경건하게 가슴에 모은 예수의 몸은 오른쪽 발에 무게 중심을 둔 콘트라포스트(Contrappost, 이탈리아어로 '대비된다'는 뜻) 자세를 취해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 이상미를 나타낸다. 한 쪽 발로 서서 인체 중앙선을 S자형으로 그리는 인체 입상 형태로 그린 예수는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팔짱을 끼듯 엇잡은 예수의 손과 요한 세례자가 잡은 그릇에서 떨어지는 물, 비둘기, 성부 하느님이 일직선 상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예수가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래된 그림에서는 예수가 새로운 아담의 탄생이라는 의미로 거의 침수 상태의 나체로 표현되곤 한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예수는 막 강에서 나온 것처럼 물 밖에 있으며, 허리에는 믿음의 색인 흰옷을 걸치고 있다. 예수의 인간 모습(강생의 신비)은 인간이 원죄로부터 인성 회복의 가능성을 갖게 됐음을 뜻한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로마 6,3). 우리는 세례성사에서 예수의 죽음과 하나를 이루고, 예수가 죽은 뒤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것처럼 인간 부활도 약속된 것을 믿는다. 세례성사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또 예수가 세례를 받는 요르단 강은 구약의 두 가지 사건, 곧 출애굽 때 홍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건넜던 요르단 강을 의미한다.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구원의 시작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예수에게 요르단 강은 세례 후 공생활 동안 겪게 될 수난을 암시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수난과 죽음은 부활로 연결된다. #요한 세례자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한 세례자는 예수 머리 위에 물을 부어 세례를 주고 있다. 그는 유다 사막에서 은수자로 살았고, 30세가 됐을 때부터 요르단 강가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설교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전통적으로 요한 세례자는 넝마 같은 짐승 가죽옷을 입고 흐트러진 머리 모양으로 표현된다. 요한 세례자의 상징물로는 갈대로 만들어진 십자가나 어린 양이 그려진다. 이 작품에서 요한 세례자는 왼손에 십자가와 "Ecce Agnus Dei", 곧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쓴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예수 세례를 주제로 다룬 많은 작품에서 요한 세례자는 예수보다 조금 위에서 세례를 주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작품 역시 요한 세례자는 예수보다 높이 서있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굽혀 예수에게 순종한다는 뜻을 드러낸다. #떡갈나무 아래 세 인물 그림의 왼쪽에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창세 18,1) 야훼를 상기시키듯 떡갈나무 아래에 세 인물이 보인다. 전통적으로 예수 세례 그림에서 인물 또는 천사의 현존은 세상 만물이 성자 예수께 경외감으로 경배드림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고대의 존경을 표시하는 몸짓처럼 자신들의 겉옷으로 손을 감싸거나 예수께서 물에서 나오셨을 때 주님의 몸을 덮고자 옷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도 그려진다. 이 작품에서는 베네치아 회화의 영향을 받은 벨리니의 색에 대한 감각답게 아름답고 우아한 세 인물을 서로 다른 색의 의상과 포즈로 묘사한다. 세 인물은 신학적인 삼덕,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상징한다. 이들 중 두 인물은 예수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 벗어 놓은 옷을 들고 있고, 가운데 인물은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있다. 이 동작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고, 하느님과 같은 본성이신 예수가 자신을 낮추고 완전히 비우는 케노시스(Kenosis, 자기를 비움)의 겸손을 실천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성부 하느님의 기쁨 하늘에는 성령의 비둘기와 성부 하느님이 인자하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례 순간 성부 하느님은 마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고 말씀하시며 팔을 벌려 외아들의 현존을 기쁨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성부 하느님과 성령의 비둘기, 예수 그리스도는 그림의 중심 세로축으로 삼위일체를 이룬다. 이러한 삼위일체 상징은 요한 세례자의 발 아래 토끼풀에서도 알 수 있다. 하나의 줄기에서 세 잎이 돋아나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설교가 앵무새 그림 전경에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붉은 털과 회녹색 날개의 앵무새는 일반적으로 설교가와도 같은 '웅변의 상징'을 나타낸다. 벨리니의 그림에서 앵무새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3,2)고 외치며, 예수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말하는 요한 세례자의 설교를 강조하기 위해 그려졌다. 앵무새는 요한 세례자의 설교를 자연의 깊은 곳까지 알리는 역할을 한다. 자연 풍경은 중앙 요르단 강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산이 황금빛 저녁노을로 물든 하늘과 연결돼 중앙 예수와 함께 일치를 이룬다. 신성하기까지 한 풍경 속에서 하느님 음성이 다시 들리는 듯하다. "동이 틀 때 떠오르는 태양은 놀라운 도구가 되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한다"(집회 43,2).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죄를 씻어버릴 뿐 아니라 예수의 구원을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살고 죽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세례의 진정한 완성일 것이다. 윤인복 교수(아기예수의 데레사, 인천 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조은일2013.05.07

성경을 교과서처럼 '학습'해선 안돼「성경 여행 스케치」펴낸 광주가대 교수 김혜윤 수녀 "성경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가기 위해 읽는 책입니다. 신앙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합리성이 결여된 신앙은 위험합니다." 광주가톨릭대 성서학 교수 김혜윤(베아트릭스,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수녀가 신앙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는 건강한 구원의 삶을 위한 지침서 「성경 여행 스케치」를 냈다. 성경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면서 그 정치ㆍ사회ㆍ신학적 배경을 접목한 입문서다. 2006, 2007년에 차례로 발간한 「성경 여행 스케치」 1,2권을 합친 개정 증보판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도 예외 없이 마주해야 하는 상실과 아픔이 어떻게 해서 힘이 되는지, 그 이유를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통해 찾는지를 통찰했습니다." 개정 증보판에는 하느님 말씀(성경)과 우리 삶이 구체적으로 맺고 있는 인격적 소통에 주목했다. 김 수녀는 "하느님은 자신에 대한 모습을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와 행위로 다가오셨다"며 "성경은 인간에 의해 기록된 하느님 말씀"이라고 말했다. 하느님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구체적 시공간 안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는 존재론적 말씀이다. 여행ㆍ성경ㆍ역사 스케치 등 3부로 엮은 책은 '그리스도인과 성경'과 '성경에 접근하는 자세', '성경의 속성과 성경 해석 방법' '정경' '성경 해석 방법' 등을 조목조목 짚었다. 3부에는 성경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이스라엘 역사와 성경이 최종 편집되는 부족동맹 시대와 왕국시대, 식민지 시대를 조명했다. 특히 2008년 성경을 주제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 후속으로 지난해 발표한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 관련 대목을 각주로 달아 보완 설명하고 있다. 「성경 여행 스케치」는 '거룩하고 두꺼운 생명의 책' 성경의 전체 조감도를 제시한다. 김 수녀는 성경의 뼈대를 파악한 후 하느님 말씀이 우리 삶과 어떻게 인격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지를 살펴보라고 조언한다. 그는 한국사회의 교육 경쟁주의와 맞물린 한국교회의 '성경 열풍'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성경을 마치 교과서나 참고서를 대하듯 '학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성경은 언제부턴가 더 이상 생명과 구원의 통로가 아닌 학습과 탐구 대상으로 '공부'되고 있고, 수강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더 잘 아는가' 하는 경쟁(?)까지 벌어집니다." 김 수녀는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계급과 분열이 생기고, 성경(하느님)은 온데간데없고 '성경에 대한 열풍'만 남을 때 성경은 고상하고 품위 있어 잘 팔리는 '브랜드 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준양(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신부는 추천글에서 "이 책은 성경에 대한 내용을 그저 쉽고 편하게만 전달하고자 하는 시도를 넘어서, 튼튼한 신학적 기반 위에 신앙적으로 의미 있는 내용을 호소력 있게 전개했다"며 "신앙과 이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신학의 기본 명제에 매우 충실한 글"이라고 썼다.(바오로딸/9500원)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이지혜2011.09.27
![[생활속의 복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2641_1.0_titleImage_1.jpg)
[생활속의 복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연중 제15주일 (루카 10,25-37) 연중 제15주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사랑'이라는 단어라고 말한다. 그만큼 사랑은 사람살이에 있어서 핵심관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참된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람과 사람살이에 있어서 모든 책임과 의무 또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종종 간과하는 것 같다. 깊이 통찰하지 않으면 사랑은 그저 허무하기 그지없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욕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교사와 주님 사이의 질의응답이 사뭇 가슴을 찌른다. 율법교사는 주님을 시험해보려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라고 애매하게 질문한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은총인데, 이 과정 안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따지는 물음이다. 주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 하고 되물으신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루카 10,27)라고 대답한다. 주님께서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하고 말씀하신다. 사실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나라 사랑, 친구 사랑, 일 사랑, 부모자식 사랑, 이웃 사랑, 가족 사랑, 하느님 사랑, 이성 간의 사랑 등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드러나는 모든 형태의 사랑은 결국 하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은 그 자체로 무한성과 영원성을 담보로 하는 지워질 수 없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남녀 간의 사랑일지라도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랑은 진실한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며, 자유로운 내적충동으로 말미암은 참된 고백이기에 그 자체로 숭고하고 거룩하게 된다. 누가 만일 사랑한다고 약속했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고 진실을 쉽게 왜곡하는 사기꾼이 된다. 사랑의 형태는 삶의 조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드러날 수 있지만, 모든 생명이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듯 사랑도 근본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1요한 4,16)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하는 것"(1요한 4,21)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그 사랑은 믿음에서 출발하고, 그 믿음은 사랑을 낳으며, 사랑은 정의와 평화를 낳고, 정의와 평화는 사람을 살리는 원동력이 된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살리고 일으키는 원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5)로 사랑의 삶을 사는 이들 삶의 태도를 가르쳐주신다. 사랑이신 분의 말씀에 따르면 사랑의 삶은 이웃, 그중에서도 특히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그리고 사랑의 삶은 이웃에 대해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도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도 않는 삶이다. 또 사랑의 삶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하며,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내는 삶이다(1코린 13,4-7). 주님께서는 율법교사와의 대화에서 평소 성경을 통해 주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에게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삶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자세하게 들려주신다. 율법교사는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주님의 물으심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주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고 말씀하신다. 지금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진리를 보고 기뻐"(1코린 13,6)하는가? 진리 혹은 진실이 없다면 사랑은 단순히 즉흥적 감상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러므로 진리 안의 사랑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는 것이고, 당신 계획 안에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라는 부르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 진리이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신대원 신부 (안동교회사연구소 소장)cpbc2013.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