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상징] <111>무지개](//cpbc.co.kr/CMS/newspaper/2011/03/rc/371868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무지개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무지개는 매우 아름다운 대기 현상이다. 태양광선이 공기 중의 물방울에 의해 반사, 굴절돼 나타나는 일곱 빛깔 원호인데, 태양 반대쪽에 비가 오면 나타난다. 반사 횟수, 물방울 크기와 차이 등으로 무지개 모양과 크기가 결정된다. 무지개 색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각 문화권마다 색 개수가 다르게 인식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지표부터 하늘에 걸쳐 반원형 고리로 나타난다. 무지개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 때문에 무지개가 시작되는 곳을 파면 금은보화가 나온다는 전설, 하늘의 선녀가 깊은 산 맑은 계곡물에서 목욕을 하러 무지개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전설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지개에 얽힌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서쪽에 무지개가 뜨면 소를 강가에 매지 마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무지개 현상을 보고 홍수를 예견한 조상들 지혜가 담긴 말이다. 실제로 편서풍지대에 있는 한반도는 날씨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변동하기에 과학적으로도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국인들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무지개가 물을 빨아 올려서 생기는 것으로 생각해 가뭄의 원인이 된다고 여겼다. 무지개는 성경에서 매우 강렬한 상징적 요소를 가진다. 구약성경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사십 일간 대홍수 뒤에 제단을 만들어 하느님께 희생물을 바친 후 하느님 축복을 받는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계약의 표시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다.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창세 9,12-13). 무지개는 노아의 홍수 이후 하느님 자비와 평화를 상징하게 된다. 에제키엘은 자신의 예언에서 하느님을 묘사하며 무지개를 언급한다.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습은, 비 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때 나는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를 들었다"(에제 1,28). 무지개는 거룩한 임무를 수행하는 대사제를 포함해 초현세적 영광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전을 비추는 해와 같고 영광의 구름 사이에서 빛나는 무지개와도 같았다"(집회 50,7). 요한묵시록에서도 하느님 어좌 둘레에 무지개가 언급된다. "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벽옥과 홍옥같이 보이셨고, 어좌 둘레에는 취옥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묵시 4,3). 무지개는 또 하느님 은총과 자비를 상징한다. "나는 또 큰 능력을 지닌 천사 하나가 구름에 휩싸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고 얼굴은 해와 같고 발은 불기둥 같았습니다"(묵시 10,1). 초대 그리스도교 찬가에서는 성모님을 '하늘의 아름다운 무지개'라 노래했으며,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무지개 다리'라고 칭송했다. 중세시대 성화(聖畵)에서도 무지개는 그리스도와 연관을 가지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다스림을 표현하는 표본이 돼 왔다.이정훈2011.03.29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4>예수님의 참 가족(마르 3, 31)](//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2648_1.0_titleImage_1.jpg)
[마르코와 함께 쓰는 나의 복음서] 예수님의 참 가족(마르 3, 31)하느님 뜻 실행하는 모든 이가 형제이며 자매신앙으로 맺어진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다. 사진은 2010년 8월 주교회의 청소년사목위원회가 주최한 제2회 한국청년대회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돼 한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청년들. 평화신문 자료사진 가족 하면 사랑, 따스함, 편안함, 엄마 냄새 등이 떠오른다. 가족은 내가 살아갈 에너지를 준다. 아버지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하셨다. 내가 첫 서원하던 날 아버지가 시를 써주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일기장에 '오늘은 일마가 수녀원에 들어간 지 몇 일 되었다' '오늘은 일마가 수녀원에서 밥을 몇 끼 먹었다' '일마가 휴가를 나오기 몇 일 전이다' 등을 다 적어두셨다. 휴가를 갔다가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날에는 아버지가 수녀원 대문까지 배웅해 주셨다. 내가 수녀원 대문에 발을 들여놓으면 아버지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셨다. 내가 뒤돌아보면, 아버지는 수녀원 앞 굽은 골목에 있는 전봇대 옆에 서서 내 뒷모습을 보시곤 했다. 아버지는 울고 계시기도 했고, 우리는 마주 보며 웃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께서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가족은 정말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 성경에서는 가정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다. 남편과 아내, 자녀, 그들이 거느리는 종과 종의 가족이 한 가족을 형성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혼자가 된다는 것은 공포 중 하나였다. 혼자가 된 이웃을 가족으로 거둬들이는 게 풍습이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 가족은 무엇을 뜻할까. 예수님은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셨다. 마르코 3장 8절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래아에 계실 때 갈릴래아 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다. 유다, 예루살렘, 이두메아 지역,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도 많은 사람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까. 예수님은 고을을 찾아 다니며 부자와 가난한 사람, 손가락질받는 죄인, 율법학자 등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나셨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하셨고 이야기를 들으셨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웅크렸던 마음을 폈다. 찡그린 얼굴에서 미소가 번져 나왔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미움을 용서로 바꾸고, 가족 중심의 이기심을 이웃과 나누는 마음으로 바꿨다. 상처 때문에 힘들었던 마음이 치유됐고, 저주와 분노는 감사와 찬미로 바뀌었다.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을 통해 소문이 금방 퍼졌다. 그러자 예수님을 시기하는 무리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하느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등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은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벼르면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사탄의 힘이라고 여겼다.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나자렛까지 퍼졌다. 나자렛에 사는 예수님 친척과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 마리아는 오해와 시기, 질투로 둘러싸인 아들이 걱정돼 아들을 찾아간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당당하게 이들을 꾸짖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리아는 사람을 불러 "엄마가 왔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어머니와 형제라고 선포한 사람들은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이들이다. 하느님 뜻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은 바로 어머니,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카나 혼인잔치에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할 만큼 아들에게 순종했다. 마리아는 진정한 예수님의 형제이자, 누이이며 어머니임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신앙으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음을 모범으로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 기회에 가족의 의미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다. 당시 제자들에게 신앙으로 맺은 가족은 혈연을 뛰어넘는 가족이었다.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신앙의 유대로 맺어진 가족임을 깨닫는다. 혈연으로 맺은 가족은 생활방식과 습관, 생김새가 비슷하고, 신앙으로 맺은 가족은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모습이 같다. 예수 그리스도 속죄의 피로 맺어진 신앙 가족의 관계에서 우리는 한 가족이다.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산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됐다는 자부심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혈연 가족을 생각해 보자. 엄마인 나 때문에, 아버지인 나 때문에, 시어머니인 나 때문에, 며느리인 나 때문에, 아들인 나 때문에, 딸인 나 때문에, 아들인 나 때문에 가족이 분노를 느끼고 슬퍼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 때문에 아파하는 가족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로 인해 다시 웃고, 나로 인해 다시 행복을 되찾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하자. 성당에서 평소 인사를 잘 하지 않고 지나친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미소를 건네자. 우리 모두 예수님의 참 가족으로 열심히 살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성가정을 이루도록 함께 기도하면 좋겠다.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 ※방송시간 : (화) 오전 8시, (수) 새벽 1시/오후 1시 40분, (금) 밤 8시, (토) 밤 10시 ※교재 문의 : grace@paul ine.or.kr, 02-944-0945 퇴사자22013.07.09
하느님 평화에 동참하려면 끊임없이 자신 성화해야▨심층분석 / 당신은 왜 성당에 다니십니까? <하> 우리는 왜 성당에 나가는가? 우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이기에 한 번도 자문해보지 않은 물음이다. 많은 이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과연 신앙생활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서울대교구 조규만 주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시사하는 바를 잘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마음의 평화는 주님의 평화가 아닌, 마음이 평안하고 가족이 안녕한 상태의 세속적 평화"라고 말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구원의 개념이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자손이 번성하고 가축을 먹일 땅을 얻고, 질병 없이 백수를 누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해 재현되는 구원은 이러한 현세적, 물질적 차원을 넘어 하느님 나라에 미치는 평화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한 번도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사랑과 평화의 나라'의 상태인 것이다." 조 주교는 "사람들이 현세적 차원의 평화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려는 구원과 행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다"며 "이러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사제들의 예언자적 사명이자 교회가 빛이 되는 길"이라고 말했다. 또 "신자들은 매일 마음을 비우고 기도함으로써 성찰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진정한 평화에 다가서는 길을 하느님께서 일깨워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조 주교는 또 "이러한 평화는 나 중심으로 생각하거나 내 것을 움켜쥐려고 하면 절대 찾을 수 없다"며 "예수님이 가르치신 자선과 절제, 단식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풂으로써 나ㆍ이웃ㆍ하느님의 삼중 관계를 잘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박문수(프란치스코) 박사는 이러한 관계 성립에 길잡이가 되는 것이 '사회교리'라고 말했다. 사회교리가 복음적 가치를 삶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많은 신자가 주일이면 성당에 나와 하느님 아들ㆍ딸로 살지만, 미사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세상의 법에 따라 산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교회 안팎의 삶이 같아지려면 이미 우리 안에 내재돼 있는 물질주의적 태도나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복음화해야 한다. 복음적 가치를 사회적으로 표현한 사회교리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인천가톨릭대 교수 송용민(강화본당 주임) 신부도 "이웃과 함께 하느님 사랑을 나눌 때 비로소 참된 하느님의 평화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죽음 등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현실을 외면하고 내세만을 고집하거나, 현실적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미성숙한 태도"라고 지적했다. 또 "하느님의 내재적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삶을 긍정하며, 이웃들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을 서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복음적 사랑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 특유의 종교심성에서 비롯됐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평화만을 찾는 신앙은 왜곡된 신심과 편견을 만들어내기 쉽다"며 "교회는 이러한 신심을 성숙시키고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토착화시키는 지속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하느님 뜻에 맞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고된 일이다. 더 많은 희생과 고독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하느님 평화에 동참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성화하는 '가시밭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은아 기자 euna@pbc.co.krcpbc2013.04.09

사회복지사 꿈꾸는 스키 메달리스트 김현미(지적장애 3급)양 동계 스페셜올림픽에서 은,동메달 따지적장애인 김현미(마르티나, 17)양은 인생에서 '꽃피는 봄날'을 맞고 있다. 나이가 그래서가 아니다. 올초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동계 스페셜올림픽(지적 장애인올림픽)에서 은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따고 난 후부터다. 현미양에게 꽃피는 봄날은 어떠한 모습일까.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지적발달장애인 생활시설 아네트의 집(원장 김영자 수녀)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현미 양을 만났다. 김현미양이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에서 딴 은메달과 동메달을 들어 보이며 수줍게 웃고 있다. #스페셜올림픽에서 메달 3개 따 현미양은 요즘 학교에서든 집(아네트의 집)에서든 어디서나 잘 웃는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자신감 때문이다. 웃을 때면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있는 현미양에게 "메달 땄을 때처럼 웃어보라"고 하자 그제야 고개를 든다. 낯선 이에게 미소를 들켜 수줍은 표정이다. 현미양은 지적장애 3급으로, 지적장애인 특수학교인 진명학교에 다닌다. 1년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중학교 3학년이다. 지적장애 3급은 지능지수와 사회성숙지수가 50~70으로, 또래와 같은 사고와 학습, 생활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현미양은 시침과 분침, 초침이 있는 아날로그 시계를 보는 데만 2년이 걸렸다. "시계를 볼 줄 안다"고 하지만 지금도 분침 보는 것이 서툴다. 현미양 옆에서 함께 대화하던 김영자 수녀는 "현미는 운동에 소질이 많다. 스키뿐 아니라 무슨 운동이든 잘한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현미양은 스키를 배우기 전 이미 육상선수이자 배드민턴 선수, 높이뛰기 선수 등으로 활약했다. 스키는 2011년에야 입문했다. 뛰어난 운동신경과 교사들의 지도, 아네트의 집 수녀들 헌신 덕에 2년 만에 올림픽 알파인스키 메달리스트가 됐다. 스페셜올림픽에는 남동생 현재(발렌티노, 15)군과 시설에서 만난 김형주(미카엘, 14)군이 함께 출전했다. 그 중 메달을 딴 사람은 현미양뿐이다. 시계 보는 것보다 메달을 따는 게 더 쉬운 모양이다. "(1위를 한) 프랑스 친구는 정말 날아다녀요(빨라요).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올림픽 이야기를 꺼내자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다. 현미양은 2월 5일 열린 대회전 결승에서 4.5초 차이로 2위에 머물렀다. 알파인스키는 1, 2차 시도 시간을 합해 가장 빨리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에게 금메달을 준다. 현미양은 스페셜올림픽 직후 열린 장애인 동계체전에서도 동메달을 따며 기량을 뽐냈다. "4년 뒤 미국(LA)에서 열릴 스페셜올림픽에도 나갈 거예요. 올해는 5월 국내에서 열리는 배드민턴 대회에, 10월에는 높이뛰기 대회에도 나갈거예요!" #엄마 기억이 안 나요 현미양은 6살 때 남동생 현재와 함께 아네트의 집에 왔다. 어릴 때 떨어진데다 지적장애가 있어 부모 얼굴을 기억하기는커녕 함께 지낸 기억조차 없다. 남매는 본래 전남 순천에서 살았다. 부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린 남매를 보육시설로 보냈다. "엄마 얼굴이 기억 안 나요." 현미양에게 엄마 아빠 기억이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현미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남매는 아네트의 집으로 옮겨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엄마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연락도 닿지 않는다. 현미양은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지적장애'와 '부모와의 이별'이라는 십자가 두 개를 지고 살아왔는데도 말이다. 아네트의 집 수도자들의 헌신적 보살핌과 기도 덕분에 현미양은 조금씩 더 행복해지고 있다. 세례도 받았고, 주일미사에도 열심히 참여한다. 그의 밝은 얼굴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는 성경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현미양은 아네트의 집에서 '천사 누나'로 통한다. 몇 명 되지는 않지만, 자신보다 어린 동생들을 잘 돌본다. 자신이 어려움을 겪어봤기에 나이 어린 동생들 아픔을 잘 안다. 꿈을 묻자 천사같이 대답한다.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요. 저보다 더 아픈 사람,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어요." 이힘 기자 조은일2013.04.24
![[2013 신춘문예]심사평-시 (정호승, 이승하)](//cpbc.co.kr/CMS/newspaper/2013/01/rc/439541_1.2_titleImage_1.jpg)
[2013 신춘문예]심사평-시 (정호승, 이승하)사물에 대한 관찰력, 묘사 돋보여 시를 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시심이다. 마음의 바탕이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으면, 인생의 희로애락과 인간 생로병사의 비의를 탐색하는 데 있지 않으면, 그 시인은 시를 쓰는 기술자이지 시인이 아닌 것이다. 평화신문에 투고한다고 해서 반드시 신자일 필요는 없다. 또한 주제가 신앙심이나 영성이어야만 하지도 않고, 성경에서 모티브를 가져와야만 하지도 않다. 우선 좋은 시여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가 좋으려면 진실한 마음(흔히 '진정성'이라 한다)으로 써야 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정순의 '은빛 보행차'를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지팡이를 대신해 노인의 보행을 도와주는 유모차 비슷한 것이 있다. 이 시는 바로 그 보행차가 시의 초점이 된다. 몸이 불편한 노인에 대한 과도한 동정심이나 부자연스런 행동에 대한 과장된 표현 대신 사물에 대한 꼼꼼한 관찰과 세심한 기록이 이 시의 덕목이다. 그런데 사물에 대한 관찰기록 속에는 한 존재의 말년이 참으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보행차는 은빛을 띠고 있고, 그 빛나는 사물이 바로 노인이다. '햇살 걸음'의 발견도 놀랍지만 '네 개의 바퀴와 굽은 허리 하나'가, '더 이상 수리할 곳 없는 오후의 한때'와 함께 은빛 바퀴를 굴리며 가고 있는 광경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미상불, 눈부시다. '피에타'(김형미)는 병실에서 늙어버린 어머니와의 나날을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수놓은 작품인데 받쳐주는 시들이 약했다. '책의 장례'(김은호)는 전반부의 견고함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락방에서 본 풍경'(정순)은 추억담을 들려주는 입담이 여간 활달하지 않은데, 그 이야기를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압록 매운탕'(조송이)은 참 좋은 소재인데 소품에 가까워 좀 더 의욕을 갖고 퇴고했으면 한다. "백부가 인절미 담긴 칠기를 던졌다 학이 날던 다완도 함께 날아갔다"로 시작되는 시와 "누군가 걷어내는 걸 잊어버린 물그림자"로 시작되는 시를 쓴 두 응모자는 기성시인임이 심사과정에서 밝혀졌다. 전자는 오랫동안 활동하지 않았다 하고, 후자는 유명하지 않은 출판사를 통해 등단한 뒤 시집을 2권 냈다고 했다. 이런 분이 구태여 신춘문예를 다시 두드릴 필요가 있을까? 공자가 시를 '사무사'(思無邪)라고 한 이유를 가슴에 새겼으면 한다. 조은일2013.01.29
![[새해 대담]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에게 듣는다 1](//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5828_1.1_titleImage_1.jpg)
[새해 대담]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에게 듣는다 1신앙 뿌리 튼튼히 하고 그리스도인 정체성 강화◀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가 지승신 아나운서와 대담하고 있다. 염 대주교는 허약한 신앙 기초를 성경과 기도를 통해 강화하는 한 해를 보낼 것을 당부했다. [대담=지승신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아나운서부장] 2013년 새해 아침이 밝았다. 한국교회는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신앙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대통령을 선출한 우리 사회는 새 대통령에게 국민 대통합과 민생 안정을 기대하고 있다. 올해는 모든 사람이 좀 더 행복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에게 교구 사목 방향과 사회 주요 현안에 대한 해법을 들어본다. 이 대담은 평화방송 TV를 통해 1일(화) 오후 1시 10분ㆍ8시, 4일(금) 오전 8시, 6일(일) 오후 4시에 방송된다. 평화방송 라디오는 1일 오전 11시 5분 '2013년 계사년 새해, 염수정 대주교에게 듣는다'는 제목으로 청취자를 찾는다. ▶지난해 6월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하시고 6개월이 지났습니다. 교구장으로서 지난 6개월은 어떠셨는지요. "교구장이 되고 보니, 하고 싶은 것보다 짜인 일정표에 따라 끌려 다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운동량이 부족해 큰일이지만 하느님께서 아직까지 제 건강을 지켜주시니 감사하며 사목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총대리 주교 시절에는 교구장님께 요청받은 일을 하면 됐기에 편안한 마음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직접 결정해야 하니 어렵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하고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저도 예수님의 그 기도를 따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눈동자를 마주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 뜻에 맞게 저를 사용하시도록 맡겨드린다고 기도합니다. 신자들 기도는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저도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며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처럼 서로가 기도를 통해 일치하고 채워주고 도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신앙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신앙의 해 의미를 다시 한 번 짚어주십시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2011년 10월 11일 자의교서 '믿음의 문'을 발표하면서 신앙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신앙의 해는 2012년 10월 11일 시작해 올해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까지 계속됩니다. 신앙의 해가 시작된 날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이 되는 날인 동시에 「가톨릭교회교리서」가 반포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교황님께서 신앙의 해를 선포하신 것은 세계교회가 심각한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해를 보내는 우리 신앙인들은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와 인격적 교류가 이뤄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신앙의 위기는 한국교회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매년 새 입교자 숫자만큼 냉담교우가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허약한 신앙'으로 인한 위기가 느껴집니다. 신앙에 입문했지만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에 작은 난관에 부딪치거나 교회 모습에 실망해 신앙을 저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한 성경과 교리지식이 너무 부족해 이단에 빠져드는 신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신자들 신앙의 위기는 신앙 기초가 약하다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신앙의 해와 관련한 모든 프로그램을 신앙 기초 강화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강화해야 할 신앙 기초란 무엇인지요.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 사랑 안에 살도록 부르십니다. 하느님은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신약에서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과의 친교로 우리 인간을 초대하십니다. 하느님 초대에 응답해서 그분과 친교 안에 머물게 될 때 우리는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초대에,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응답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앙 기초를 강화하려면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꾸준히 기도하면서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 뜻은 교회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하느님 뜻을 좀 더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교회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미사 중에 주님과 일치를 이루고 신자들 간 친교를 이룹니다. 주님과 친교를 이룸으로써 그분의 손과 발이 돼 세상에 나아가 사랑의 봉사를 실천할 힘을 얻게 됩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주님과 친교가 깊어지고, 그러면 주님에게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화를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구장에 착좌하실 때 서울대교구가 직면한 어려움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위기의 젊은이들에게 참된 가치관과 영적 생명력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진단하셨습니다. 교구장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요. "한 나라의 미래는 그 나라 청소년들에게 달려있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청소년들에게 우리 사회는 현재의 이야기입니다. 청소년들이 아프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병들고 시들어가고 있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성세대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 어른들의 모범이 필요합니다. TV나 신문을 보면 남에게 해를 입힌 사람, 부도덕한 기업인, 고함을 지르는 정치인을 자주 보게 됩니다.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올바른 가치관으로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범을 청소년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실히 노력하면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줘야 하겠습니다." ▶지난해 대선을 치르면서 한국사회는 지역과 연령, 또 이념으로 갈라져 커다란 갈등을 빚었습니다. 예전에는 지역감정이 사회에 큰 문제로 떠오르곤 했는데 요즘은 세대간 갈등이 커져가는 것을 느낍니다. 대주교님께서 느끼시는 분열된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지요. "우리 사회의 갈등지수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우려가 많습니다. 갈등은 분열을 낳고 분열은 더 큰 갈등을 불러옵니다.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전후 재건에 역량을 쏟았던 1960~70년대를 배고픈 사회, '헝그리 소사이어티'라고 한다면 최근 우리 사회를 가리켜 성난 사회, '앵그리 소사이어티'라고 한답니다. 정치성향, 이념, 세대, 지역, 빈부에 따라 언제나 갈등은 존재합니다." ▶갈등을 해결할 해법은 있을까요. "갈등 해소를 위한 해법으로 소통이 우리 사회 열쇳말처럼 대두된 것은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진정한 소통은 아직 요원해 보입니다. 우리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유명한 '소통의 달인'이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황금률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른 이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상대에게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될 때는 한없이 행복감을 느끼지만 반대로 소외됐다고 생각될 때는 불행을 넘어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바꿔 생각하면 됩니다. 나를 낮춰서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 때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cpbc2012.12.25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 신앙핵심, 신경 생활화로 새 복음화 나서야미래사목 연구소 '사도신경과 새 복음화' 세미나 미래사목연구소(소장 차동엽 신부)는 5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사도신경과 새 복음화'를 주제로 제7차 세미나 열고 사도신경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 오늘날 교회 위기를 타개해줄 새 복음화의 길을 모색했다. 이날 세미나에는 홍승모(인천가톨릭대 신학대학장)ㆍ차동엽 신부와 한국평협 사무총장 오용석(프란치스코 하비에르)씨가 발제자로 나서 '사도신경이 신앙의 중심이자 핵심'임을 재확인하고, 사도신경의 재발견과 생활화로 새 복음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세미나에는 전국 각지에서 400여 명이 참석, 사도신경과 새 복음화에 대한 큰 관심을 보여줬다. 가수 장혜진(멜라니아)씨가 특별무대를 꾸며 자리를 한층 빛냈다. 다음은 발제 주요 내용. #성경의 요약으로서 사도신경(홍승모 신부) 사도신경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많은 이단으로부터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교 신앙 핵심을 집약한 신앙규범이다. 사도신경은 12사도들이 공동으로 작성했다고 전해진다. 7세기에 이르러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이 만들어졌고, 13세기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이 사도신경을 공인했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 신비와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핵심을 이룬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에서는 창조론과 구원론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 '영원한 삶' 등과 같은 구절은 성경 속 핵심 사건을 아우르고 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성경 요약으로, 하느님 말씀으로서 권위를 지닌다. 이 권위는 구원하는 권위로, 사도신경 단어 하나하나에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힘이 있다. #왜 새로운 복음화인가?(오용석 사무총장) 새 복음화는 주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가운데 자신을 쇄신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는 '복음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우리가 초대 교회 신자들처럼 신앙고백, 즉 '신경'을 생활화하는 것이다. 신경은 '성경의 압축, 축복의 그릇, 최강의 기도'로 가톨릭교회 최고 보물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과 「가톨릭교회 교리서」 반포 20주년을 맞아 올해 10월 11일부터 1년간을 '신앙의 해'로 선포했다. 이 신앙의 해는 신경의 생활화와 새 복음화를 강조하고 있다. 새 복음화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는 본당은 신자와 미신자들 영적 갈증을 해결해주는 마르지 않는 '샘' 역할을 해야 한다. 또 신자 고령화를 대비하며 젊은이들에게 살아있는 희망과 은총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사도신경의 현대적 적용(차동엽 신부) 사도신경은 시간을 뛰어 넘어 변하지 않는 '믿을 교리'를 담고 있지만, 각 시대마다 사도신경을 이해하는 깊이와 폭은 달랐다. 사도신경은 언제나 그 시대에 맞게 해석되며 그리스도인 신앙에 중심이 되는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최근 펴낸 「사도신경」은 오늘날 한국교회 실정에 맞게 사도신경을 해설한 책이다. 사도신경은 모든 세상살이가 다 들어있는 신앙고백으로 이를 통해 세상살이를 올바로 보는 안목을 얻을 수 있다. 사도신경은 '한 분이며 삼위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다원주의 시대에서 그리스도교를 차별화시킨다. 더불어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세상 안에서 보다 힘차게 살아갈 힘과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신자들은 교회 주역으로서 적극적으로 신앙고백을 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됐다. 평신도들은 사도신경을 중심에 두고 성령의 은사를 계발해 복음을 전파하고 사회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박수정2012.07.10
![[문화]평화화랑, 이콘전 2제](//cpbc.co.kr/CMS/newspaper/2012/12/rc/435179_1.0_titleImage_1.jpg)
[문화]평화화랑, 이콘전 2제 '형상화한 신학'이라 불릴 만큼 교회미술의 특징이 풍부하게 담긴 이콘의 향연이 연말 평화화랑에서 펼쳐진다. 26일~2013년 1월 1일 제1전시실에서 '이미경(마르가리타) 이콘전'이, 제2전시실에서 최유리(율리안나)씨와 오승민(작은형제회) 수사의 '작은 기도' 2인전이 열린다. 이들은 모두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이콘 전공 2010학번 동기이다. ▨이미경 이콘전이미경 작 '천지의 어머니', 50×70㎝, 에그 템페라. 전통적 이콘 제작 방법은 유지하되 소재를 다양화하려고 노력했다. 계란 등을 색채 안료와 섞은 물감으로 그린 템페라화, 빛의 예술인 유리화, 평면 목판에 돋을새김 기법으로 새긴 부조작품, 이콘을 도자 작업을 통해 형상화한 작품 등 다채롭다. 졸업작품 전시작을 포함해 20여 점을 선보인다. 서양화를 전공한 이씨는 2005년 장긍선(초기교회미술연구소 담당) 신부의 이콘연구소에서 이콘을 접하고 이콘 세계에 빠져 대학원까지 공부를 이어갔다. 이씨는 "이콘의 매력은 주님의 힘 없이는 그리지 못한다는 것"이라며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콘을 만들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최유리씨와 오승민 수사 이콘전 '작은기도'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성 스테파노, 성 프란치스코, 성녀 클라라 등 이콘 20여 점과 추상화 등이 전시된다. 회화를 전공하고, 수도회 형제들 조언으로 이콘을 공부한 오 수사는 "이콘 제작에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임했다"며 "이콘 안에 숨겨진 절대자를 신자들에게 보여드린다는 마음으로 이콘을 그렸다"고 말했다. 오 수사는 "동방정교회의 이콘 전통을 보존하면서 가톨릭적 특징을 살린 작품활동을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최유리씨는 서울대교구 청소년국이 발행하는 월간 「가톨릭 디다케」에 성경 삽화를 그리며 이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탈리아 산 다미아노 공방에서 배운 이콘 기법으로 제작한 이콘 한 점도 이번 전시회에 출품했다. 강성화 기자 michaela25@pbc.co.kr강성화2012.12.18
![[성경 속 상징] 춤](//cpbc.co.kr/CMS/newspaper/2011/03/rc/368743_1.0_titleImage_1.jpg)
[성경 속 상징] 춤모든 이와 친교를 나누는 자유'살로메의 춤' (베노초 고촐리 작, 1461~62년) 춤은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율동적인 몸의 움직임으로, 동작 하나하나는 무언가를 상징하고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 주부들 탈선 대명사로 춤바람이 거론되며,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정비석은 소설 '자유부인'을 통해 교수 부인의 춤바람 탈선을 비판했다. 그러나 오늘날 춤을 보는 시각은 많이 다르다. 직장인들, 노인과 중년 부부 등 많은 이들이 문화센터나 동호회 활동으로 춤을 배운다. 이들은 춤이 삶의 활력이 된다고 입을 모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춤은 종교의식에서 빠지지 않는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원에 고용된 무용수가 종교의식, 왕과 귀족들 장례식, 농민들의 풍요를 비는 제식에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부터 종교의식에 춤이 있었으며, 지금도 무속춤과 불교춤이 이어지고 있다. 춤은 기본적으로 슬픔의 반대인 기쁨의 상징이다.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의 자루옷 푸시어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습니다"(시편 30,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여곡절을 딛고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의 성막으로 옮겨 안치한 날, 다윗은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2사무 6,14). 춤은 또한 찬양의 상징이 된다. 성경에서 춤은 종종 노래와 악기들과 결합해 등장한다. 춤은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방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무사히 건넌 뒤 한 행동이 바로 춤을 춰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것이었다. "예언자이며 아론의 누이인 미르얌이 손북을 들자, 여자들이 모두 그 뒤를 따라 손북을 들고 춤을 추었다"(탈출 15,20). 하지만 우상의 유혹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적인 힘의 은총을 받기를 기원하며 수송아지 상 앞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모세는 진영에 가까이 와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과 수송아지를 보자 화가 나서, 손에 들었던 돌 판들을 산 밑에 내던져 깨 버렸다"(탈출 32,19). 신약성경에서 춤은 사람의 기쁨, 죄인들까지 포함한 모든 이와 친교를 나누는 자유를 상징한다(루카 7,32-34). 신약성경에서 가장 인상적인 춤은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헤로데 앞에서 춤을 추고, 그 댓가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요구한 것이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2-23). 초기교회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나 순교자 무덤가에서 춤을 추며 순교자들의 축일 전야를 축하했다. 춤으로 순교자의 영광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춤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갖기도 했다. 상스러운 노래나 음란한 동작 때문이었다. 이런 이교도적인 춤의 관습 때문에 춤이 있는 곳에 악마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춤은 종교적 관념과 풍습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다.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춤의 육체적 동작이 영혼의 움직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암브로시오 성인도 춤을 '영혼의 갈채'라고 높이 평가했다.퇴사자22011.03.01
![[서석희 신부의 영화속 복음여행] (20)이름, 그 귀하고 성스러운 가치- 아서 힐러 감독의 '라만차의 돈키호테'](//cpbc.co.kr/CMS/newspaper/2012/11/rc/430585_1.0_titleImage_1.jpg)
[서석희 신부의 영화속 복음여행] (20)이름, 그 귀하고 성스러운 가치- 아서 힐러 감독의 '라만차의 돈키호테' 사랑으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들은 꽃이 되었다여행 중에 만난 돈키호테와 알돈자. 1. 성경에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최초의 사람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향해 '이름을 지어 부르는 장면'(창세 2,19-20)이 나온다. 그 순간 이름을 갖지 못해 그냥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던 모든 존재들이 그 나름의 고유한 색깔과 향기에 알맞은 특별한 이름을 갖게 되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것을 하느님은 지켜보고 계신다. 이렇게 사람이 이름을 지어 부르는 행위는 성경에서, 교회 전통에서 그렇게 낯설어보이지 않는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나 야곱 등 많은 인물이 이전 이름이 바뀌고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은 이전까지와 다른 삶으로의 전환이자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가톨릭 전례에서 이름을 새롭게 부여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영화에서는 어떨까? 성경에서, 전례에서 이름을 부르는 이 의식과 행위들의 의미를 잘 표현한 영화 중 하나가 '라만차의 돈키호테'(Man Of La Mancha, 1972)다. 이 영화에 주목해보자. 2. 아서 힐러(Arthur Hiller) 감독의 영화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유명한 소설 「돈키호테」를 각색한 뮤지컬 영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라만차에 살고 있던 알론조라는 노인은 기사 이야기를 다룬 소설을 탐독하다가, 자신을 책 속의 기사들과 동일시하게 된다. 이후 알론조는 자신의 이름을 '돈키호테'로 바꾸고 세상의 악을 제거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는 충실한 하인 산초와 함께 거대한 풍차를 악한 거인으로 착각하고 달려드는 무모한 행동도 하고, 나그네들이 머무는 여관을 큰 성으로 착각하는 여정에서 알돈자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알돈자를 만나면서부터 돈키호테의 여정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알돈자라는 여자, 때때로 '불리는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신분과 삶의 처지를 짐작케 한다. 알돈자란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돈키호테가 만난 그녀 이름은 촌스럽고 천박하다. 이름만 들어도 그의 출신과 배경이 쉽게 드러난다. 영화에서 그가 자신의 이름을 제목으로 부르는 '알돈자'란 노래에 나오듯, 그의 이름은 누가 붙여준 이름인지 그 조차도 모른다. 그가 태어났을 때, 어느 누구도 그를 소중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누군가가 태어나자마자 마구간에 버린 그를 두고 알돈자라고 이름 지었을 뿐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는 이름대로 살아갈 뿐이다. 모진 게 목숨이라 살기 위해 때로는 몸을 파는 창녀로서, 때로 허드렛일을 하는 부엌데기로서…. 그리고 그를 살게 하는 힘은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존의식이 아니라 오기와 분노다. 세상을 향해 천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복수하듯이 막가는 대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던 여인이 돈키호테를 만난 것이다. 그런데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기사이자, 모두에게 꿈과 희망을 이뤄주기 위한 소명을 가졌다며 자신을 소개하는 이 기사는 그녀의 이름을 알돈자가 아닌 '둘시네아'라고 부른다. 모두가 그를 천박한 알돈자라고 부르는데, 돈키호테는 자꾸만 고귀한 숙녀, 둘시네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알돈자를 향해 둘시네아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녀야말로 자신이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여인, 희생하고 싶고 지켜주고 싶었던 이상적 여인이라고 고백한다. 둘시네아라는 이름, '아름답고 귀하고 성스러움'의 의미를 지닌 그 이름에 대해 알돈자는 무척 당황해하면서 화를 낸다. 주변 사람들과 마부들도 그가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듯 깔깔거리며 비웃는다. 그러나 알돈자에 대한 돈키호테의 진실하면서도 정중한 모습에 그녀에 대해 함부로 비웃을 수 없는 묘한 기품이 흘러 사람들은 더 이상 알돈자를 놀릴 수 없게 된다. 더구나 마부 중 한 사람인 페드로가 알돈자를 함부로 다루며 뺨을 때리는 장면을 돈키호테가 보게 되고, 이에 분개하여 돈키호테가 달려들어 사력을 다해 페드로를 쓰러뜨리면서부터 이제 사람들은 돈키호테가 보는 앞에서 알돈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알돈자 또한 처음에는 자신을 둘시네아라 부르는 돈키호테에게 당황하며 미친 노인네라며 구박했지만 살아생전 처음으로 자신을 고귀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존경과 예의를 갖춰 대하는 돈키호테에 대해 묘한 혼란(?)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자신의 겉모습을 치장하기 위해 거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대접받아야 되는 존재인지에 대해 새롭게 느끼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간 알돈자를 함부로 대하며 늘 자신들의 쾌락을 추구했던 마부들이 돈키호테가 없는 틈을 타서 한밤중에 알돈자를 납치하고 그를 능욕한다. 처참하게 짓밟히고 만신창이가 된 알돈자는 자신을 발견하고 분노하며 통탄하는 돈키호테를 보자, 절망에 빠져 '알돈자'라는 노래를 통해 절규한다. 노래의 내용에서, 그의 인생은 출생 근원부터 천박한 것으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돈키호테가 나타나면서 오히려 자신을 더 절망에 빠지게 했다는 것이다. "…당신은 내게 꿈같은 환상을 이야기해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짓밟고 지나갔지만 그들 중에 당신이 제일 잔인해. 당신은 분노만 있었던 내 마음을 절망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지. 나를 짓밟고 가는 것은 참을 수 있어. 그건 내게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나를 꿈꾸게 하지 마. 나를 더 이상 창녀 알돈자 이상이 되는 걸 꿈꾸게 하지마…." 하지만 알돈자는 이런 처절한 자기 부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이 일로 해서 돈키호테는 오히려 자신이 돈키호테가 아니라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병든 노인, 알론조로 다시 되돌아가 죽게 되지만, 적어도 그는 알돈자를 비롯해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꿈과 희망에 대해, 고귀한 이름에 대해 깨닫게 해준 것이다. 돈키호테의 죽음을 목격한 후 알돈자는 오히려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산초에게 돈키호테는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과 자신의 이름을 알돈자가 아니라 둘시네아로 부르라고 주문한다. 동시에 영화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돈키호테는 여전히 그녀의 삶 속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선언하며 길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그 앞에 놓인 새로운 길은 이전의 알돈자로서 걸어온 길이 아닌 둘시네아로서의 삶을 살게 될 새로운 길을 의미한다. 3. 이 영화는 소설 「돈키호테」 출판 400주년을 기념하여 1965년에 초연한 뮤지컬을 다시 1972년에 그대로 영화로 옮겨놓은 것이다. 국내에서도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란 제목으로 여러 차례 뮤지컬로 공연됐는데,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 '이룰 수 없는 꿈' '둘시네아' '알돈자' 등이 그 노래에 담긴 의미와 더불어 멜로디가 매력적이어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워낙 시대를 뛰어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기에 이 영화를 여러 가지로 그 깊이를 조명해볼 수 있지만, 누군가의 부름에 의해, 누군가의 진실한 애정에 의해 한 사람의 처지가 소중하고 귀한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영화 내용의 원형을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만난 사람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복음서 내용 자체가 따지고 보면 알돈자가 둘시네아로 바뀌는 반전 과정이다.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 복음서에 등장하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묵상해보자. 예수께서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을 때, 그들은 단지 예수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 인생이 총체적으로 바뀐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오래된 영화이지만, 완성도 높은 뮤지컬을 그대로 영화화했다는 점과 유명 배우 소피아 로렌이 알돈자 역할로 나온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보고 싶지만 그 대가를 비싸게 지불해야 하는 뮤지컬 '돈키호테'에 풀이 죽은 우리 같은 서민에게는 위로를 주는 영화다.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이달 중 DVD로 출시된다.)퇴사자22012.11.06
![[선교지에서 온 편지] 칠레(하)- 산티아고 도시 빈민들의 삶](//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5305_1.0_titleImage_1.jpg)
[선교지에서 온 편지] 칠레(하)- 산티아고 도시 빈민들의 삶김종근 신부(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산티아고 로 에스페호 지역 아이들과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필자. 칠레 수도 산티아고로 부임한 지 2년이 됐다. 현재 내가 사목하는 곳은 산티아고의 '로 에스페호'(Lo espejo) 지역이다. 이곳 빈민들은 수도와 전기를 몰래 훔쳐서 산다. 이들은 조금 가난한 사람들과 판자촌 주민, 종이상자를 집 삼아 사는 극빈곤층 등 세 부류로 나뉜다. 칠레에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시골 사람들이 대거 도시로 이주했다. 30년 전부터다. 그래서 도시 외곽은 빈민촌이 많다. 길이 좋고 사회간접시설이 다 돼 있는 지역이 있는 반면, 그 옆에는 무허가로 집을 짓는 곳이 있다. 정부는 부수고 빈민은 또 짓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칠레 정부는 무허가 건축을 없애기 위해 무허가 판자촌에 사는 이들을 전원 이주시킬 계획으로 아파트를 짓고 있다. 하지만 판자촌 주민이 판자촌을 떠나면 종이상자에 사는 극빈층 주민이 그 판잣집을 접수하려고 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아파트는 지었지만 입주를 미루고 있다. 아파트가 다 지어진 다음 한꺼번에 입주시키려 하고 있다.#무허가 판자촌 공소에서 나는 이곳에서 선교본당 같은 공소 몇 곳을 담당하고 있다. 한 공소는 마을 꼴을 갖춘 곳에 있고, 또 다른 공소는 무허가 판자촌에 있다. 그곳 주민들은 택시 운전을 하거나 가정부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장터에서 일한다. 설탕으로 만든 과자와 빵을 판다. 헌 옷을 깨끗이 빨아 팔기도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생계 유지가 어렵다. 교통비조차 벌기 어려워 그 지역을 벗어날 수도 없다. 공소 가운데 헤수스 데 나자렛(Jesus de nazaret) 공소는 매우 잘 되고 있다. 대단히 자율적인 평신도들이 스스로 이끌어가는 공동체다. 2년 전 부임했을 때 한 공소 사목회의에 참석했다. 1시간 반 정도 회의가 진행됐는데, 공소회장이 새로 온 신부라고 신자들에게 드디어 나를 소개해줬다. 아무리 사제라도 거의 2시간 동안 발언권이 없었다. 전례와 재정, 신자들과의 관계 등 모든 것이 사목회의에서 착착 진행됐다. 사제에게는 소외된 이들의 가정을 방문해주길 원했다. 사제는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재정적으로는 어려웠다. 평소 교리나 교회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교육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칠레교회는 여름인 1월 첫 주부터 2주 동안 모든 신자가 지역 단위로 매일 교육을 받는 '여름 신앙학교'를 연다. 구약성경반과 교리교육반, 기타반, 민속댄스, 심리학, 대화의 기술, 부모와의 관계 등 다양한 주제로 교육한다. 강사들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대부분이고, 평신도 전문가들도 있다. 재교육 여건이 부족한 칠레교회에서 여름 신앙학교가 고등학생 이상 성인들을 위한 재교육 장인 셈이다. 물론 젊은이만을 위한 강좌도 있다. 여름 신앙학교에 가려면 교통비가 많이 든다. 칠레 교통비는 왕복 2000원꼴로 한국과 비슷하다. 주 6회 2주 왕복이면 2만 4000원인데, 그 액수가 이들 한 달 수입의 10분의 1이 넘는 큰돈이라는 점이 문제다. 그래서 신자들이 미사 후에 빵을 팔거나 엠빠나다(empanada)라는 칠레식 만두와 닭고기밥 등을 만들어 팔았다. 본당 아주머니들이 이것을 팔아 본당 청년들을 위한 교통비를 마련하는 것이다. 여름 신앙학교에 갈 당사자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기도 했다. 어떤 신자는 피정에 참석하고 싶은데, 당장 돈이 없으니 1년 또는 2년 계획으로 이러한 수익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것을 오래 전에 계획을 세우고 진행한다. 사재를 털어 도와주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하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와 사제가 평등해지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다시 눈을 뜨고 싶어요" 가난한 이가 많은 안드레스 하를란 공소에 나오는 열심인 청년이 있었다. 그런데 계응을 잘 못했다. 하지만 틀리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하고, 성가도 잘 몰랐지만 열심히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점점 눈이 멀고 있었다. 그런데 약도 먹지 않고, 몇 년째 방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눈이 더 나빠지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그도 "다시 눈을 뜨고 싶다"고 했다. 청년 부모 동의를 구하려 했지만, 부모 말이 절망적이었다. 집안일도 바쁜데 그깟 눈이 중요하냐는 것이었다. 그 엄마에게 화가 났다. 집에 찾아가 엄마와 누나를 설득시켰다. 나는 "당장 의사에게 가야 하고, 돈이 얼마나 들지도 모른다. 눈 뜨는 데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나도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다"고 했다. 다행히도 엄마가 "그러면 해보라"는 식으로 허락했다. 내가 교통비를 대주는 조건으로 겨우 허락을 받았다. 이곳에는 안질환자가 많다. 미사에 오는 30명 중 3명이 시각장애인이다. 모두 정상인이었는데 시력을 잃은 이들이다. 영양부족과 안질환이 겹치면서 시각장애인이 된 것이다. 가난한 지역일수록 앞 못보는 이가 많았다. 이들의 큰 장점 중에 하나는 가난한 삶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 능력이 많다는 점이다. 작은 일 하나에도 행복할 줄 아는 좋은 심성을 가졌다. 그곳에서 일하는 선교사에게 늘 감사했다. 한국과 한국교회 이야기를 하면 놀라곤 했다. 주일미사에 빠지면 고해성사감이라고 얘기하면 '미쳤다'고 할 정도로 놀랐다. 한국교회가 역사가 짧음에도 칠레에 선교사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하고 놀라워했다. 그러면 나는 "너희도 언젠가 선교사로 살아가야 한다. 서로 꿈을 나누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곤 한다. 칠레 주민들 삶을 통해 지금 우리 한국인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알면 좋겠다. 순간순간 밝게 웃을 줄 아는 지혜를 한국 신자들도 깨달으면 얼마나 좋을까.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한국에서 좀 더 많은 선교사가 나와, 한국교회의 활기찬 모습을 해외 다른 곳에서 나눴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다.<후원계좌> 스탠다드차타드은행 : 225-20-397949예금주 : (재)천주교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퇴사자22013.07.23

"하느님 자비에 자신을 맡겨보세요"하느님의 자비 주일 유래와 의미1931년 2월 22일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나타난 그리스도는 수녀가 본 당신 모습 그대로 상본을 그리고, 그 아래에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라는 글을 넣도록 하셨다. 2000년 4월 30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모의 자비 수녀회 마리아 파우스티나 수녀(1905~1938) 시성식이 거행됐다. 새 천년기 첫 성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강론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당신 자비 메시지를 전파하신 시기가 제1ㆍ2차 세계 대전 사이임에 주목하고, "희생과 고통을 체험한 이들은 자비가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 것인지 잘 안다"며 파우스티나 성녀를 우리 시대를 위한 하느님 선물이라고 밝혔다. 이후 2001년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하느님께서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계시한 내용에 따라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도록 했다. 성녀의 일기에 따르면, 하느님은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낼 것을 명했다.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수녀와 하느님의 자비 신심 폴란드 출신 파우스티나 수녀는 '하느님 자비의 사도'였다. 수녀는 13년 동안의 수도 생활을 마치고 33살 젊은 나이에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수녀는 부활 제2주일인 1993년 4월 18일과 2000년 4월 30일 각각 시복, 시성됐다. 수도생활을 하며 특별한 영적 은사를 체험한 수녀는 하느님에게서 몇 가지 메시지를 받았다. 하느님 자비 상본을 만들고, 하느님 자비 축일을 지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시각인 오후 3시에 하느님 자비 기도 시간을 가지라는 것 등이다. 수녀가 전하는 하느님 자비 신심의 골자는 말과 행동과 기도를 바탕으로 하느님 자비를 널리 알리고 실천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하느님 자비에 온전히 내맡기는 의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생을 하느님 자비를 깊이 묵상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했던 수녀는 계시나 환시로 알게 된 하느님 자비의 신비를 일기 「나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로 기록했다.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은 하느님 자비 신심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교회 전승에 비추어 본 하느님의 자비 성경에서 자비란 깊은 동정의 마음, 상대를 도와주는 사랑, 부모가 자녀에게 베푸는 사랑뿐만 아니라 '관대한 용서'를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과 계약 맺은 백성을 구원하는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비는 동정심ㆍ용서에 충실성이 더해진 개념이다. 구약에서 보면 자비나 동정을 뜻하는 히브리어 '라함'은 자궁을 뜻하는 단어 '레헴'에서 유래됐다. 가족적 사랑과 하느님의 충실함, 변함없는 사랑 등을 나타낸다. 신약에서 예수의 자비는 구제와 치유의 의미로 이해됐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 연민을 드러내 보이셨고, 인간은 창조주를 본받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1980년)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 즉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이 이 사랑의 정신으로 변모해 자기 이웃을 대할 때"(14항)라고 말했다. 또, "자비는 정의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으며, 그 새로운 내용이 가장 단순하고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이 용서"라면서 "용서는 '사랑'이 필요하다"(14항)고 밝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약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들며 "회개는 인간 세계에서 사랑의 작용과 자비의 출현을 보여주는 제일 구체적 표현"이라면서 "자비야말로 그리스도 메시아적 메시지의 근본을 이루며 그리스도 사명의 본질적 능력을 이룬다"(6항)고 말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강성화 기자 michaela25@pbc.co.kr황병훈2013.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