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리빨리’ 빨리 없애기![월간 꿈 CUM] 철학의 길 _ 동양 고전의 지혜와 성경 (6)유학에서 하늘이 자연을 순환시키는 활동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단위로 설명을 합니다. 이것을 일 년 단위로 말하면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절로 말할 수 있고, 한 생명의 성장 과정으로 말하면 생겨나고, 자라고, 이루어지고, 거두어짐의 과정입니다. 온전한 생명 활동은 이렇듯 기다려야 하는 다양한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는 멈춤도 반드시 포함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 4분의 1인 겨울은 활동을 멈추는 비움의 시간이며, 하루 24시간의 4분의 1인 6시간은 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생명은 기다림이 필요하고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은 활동과 멈춤이 함께 공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인간이 닦달하여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연 생명을 닦달하여 기후위기가 왔다면 인류 사회가 닦달하여 인간 생명에 위기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원, 형, 이, 정의 순환을 닦달하는 소리가 바로 ‘빨리빨리’입니다. 성질이 급한 한 사내가 국숫집에 들어서자마자 왜 아직 국수를 안 가져오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사내가 엉덩이를 들이대고 자리에 앉자마자 일하는 사람이 서둘러 국수를 놓고 말합니다. “빨리 드세요. 그릇을 씻어야 해요.” 빨리 먹으라는 말에 화가 난 사내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말하길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야.” 그러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내가 보따리를 싸며 말하길 “당신이 죽었다니 재혼을 해야겠습니다.”《雅俗同觀》(아속동관) ‘빨리빨리’는 한국 사회에 당연한 문화로 자리잡힌 일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밀어붙이는 힘은 결국 나를 밀어붙이는 힘으로 돌아오게 되죠. 사회 전체가 빨리빨리 속에서 멍들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만들어 가는 시간과 멈추어 기다리는 시간이 있을 때 온전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닦달하면 결국 자기도 시달리게 됩니다. 기술 산업사회가 더 많은 생산품을 만들어 내고, 소비시키기 위해 더 많은 노동력을 내놓으라 닦달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존재는 생명이 아니라 소비 대상, 노동력으로만 취급되게 되었고, 멈춤은 익어가는 과정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공짜’, ‘게으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빨리빨리 원하는 결과를 내놓으라 닦달만 합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한 젊은 교사의 비보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 선생님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도구가 되었고, 내가 세금을 내어 돈으로 산 소비 대상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닦달한 이 역시 그 뒤에서는 다른 누군가의 시선에 노동력, 소비상품으로 진열돼 있을 것입니다. 닦달하기 전에 자신의 뒤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빨리빨리 최고를 만들어 내라는 요구가 빨리빨리 최고 먼저 망하는 나라가 되는 길임을 우리 사회는 깊은 반성과 함께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시편에 “하느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습니다. 정녕 당신 앞뜰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습니다.”(84,1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무리 천막 안이라도 악인의 집에 있느니 천막 밖 문간이라도 하느님의 집이 낫다고 합니다. 천막 안에 있다는 것은 주인이라는 말과 같고, 집 문간에 있다는 것은 문지기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인의 집에서 주인이 되느니 문지기라도 하느님의 집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는 모두가 주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 그 집이 주인이 살 수 있는 집인지는 우리가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천 날, 만 날, 영원히 지금 삶이 반복된다면 그 집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라면 악인의 집 천 날, 만 날, 영원한 날보다 더 행복한 하루를 다시 만들어 가도록 합시다. ‘빨리빨리’가 싫지만 ‘빨리빨리’를 빨리 없애기를 원합니다. 글 _ 손은석 신부 (마르코, 대전교구 산성동본당 주임) 2006년 사제수품.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전담사제를 지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전공)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소소하게 살다 소리 없이 죽고 싶은 사람 중 하나. 그러나 소리 없는 성령은 꼭 알아주시길 바라는 욕심쟁이다. cpbc2024.10.30

요한의 첫째 서간 요한의 둘째 서간, 요한의 셋째 서간[월간 꿈 CUM] 신약이 내게 말을 건네다 사도 성 요한, 로마 라테라노 대성당 출처: 월간 꿈CUM 요한의 첫째 서간 요한 1서의 저자는 누구이며 어떤 성경입니까? 요한 1서의 저자는 요한복음서의 저자이기도 한 사도 요한이라는 견해가 전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의하면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신 애제자의(요한 13,23-26) 제자들이 요한 서간집을 집필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요한 1서의 머리말을 보면 발신인과 수신인, 발신지와 수신지도 없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첫째 서간은 애제자의 제자인 저자가 요한계 교회 교우들을 가르치고 타이르는 교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 1서의 집필 동기는 교회 안에 나타난 예수님이 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고 또한 자기 행동에 죄가 있음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는 그리스도의 적(2,18-19.26; 3,7)을 경고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적들의 유혹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고 올바로 지도하는 데 있습니다. 요한 1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 ① 1,1-4 : 서문 ② 1,5-2,29 :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함(참다운 신자 생활의 기준 제시) ③ 3,1-24 : 하느님 자녀의 표지로서의 사랑 ④ 4,1-5,12 : 사랑과 믿음에 대한 훈계 ⑤ 5,13-21 : 결문 요한 1서가 주는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요한 1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이나 인성 중 하나만 가지셨거나 또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가 아닙니다. 요한 1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인자이셨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한 위이신 성자 하느님으로서 절대 신성을 가지신 분이심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한 거룩하신 하느님과 친교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죄를 멀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빛 가운데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요한의 둘째 서간 요한 2서는 어떤 성경이고 집필 동기는 무엇입니까? 요한 1서는 일종의 교서이지만, 요한 2서는 진짜 서간입니다. 요한 2서는 인사(1-3절), 형제애 실천 충고(4-6절), 영지주의 이단사상 경고(7-11절), 맺음 인사(12-13절)로 짜여 있습니다. 발신인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단지 원로로 자처합니다. ‘원로’라는 말은 ① 단순히 ‘연장자’를 말할 때 ② 성직자로서의 의미(사도 14,23) ③ ‘사도의 직제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원로가 예수님의 애제자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수신인인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은 특정 개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저자인 원로가 몸 담고 있는 교회에서 상당히 떨어진 다른 지역교회와 그 교우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요한 2서의 집필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부인하고 교우들을 도덕적 방종에로 미혹하는 등의 모든 이단 사상을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한 바른 신앙을 정립하고 하느님의 계명의 핵심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 2서가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교는 진리를 가르치는 종교이지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이전에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이단에 자주 빠지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보다는 자신들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진보적이며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하기보다 교회와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요한의 셋째 서간 요한 3서는 어떤 성경이며 집필 동기는 무엇입니까? 요한 3서는 어느 원로가 ‘사랑하는 가이오스’에게 보낸 서간의 형태로, 다른 요한의 서간들이 ‘거짓 교사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데 반해서 요한 3서는 ‘거짓 교사’가 아닌, 문제 있는 교회 지도자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일체의 대가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자신을 대접하는 교우의 집에 머물면서 식사를 해결했고, 다음 선교지로 갈 수 있는 여비를 제공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회선교사로 가장하여 이단 사상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이 생겨나 진심으로 봉사하는 교우들을 현혹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선교사들을 박대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디오트레페스를 비교하여 제시함으로써 모든 교우들이 가이오스처럼 겸손함으로 선교사들을 마땅히 대접하고 환대할 의무가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서간을 쓰게 됩니다.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주임을 지냈다.2025.09.16

베드로의 첫째 서간, 베드로의 둘째 서간[월간 꿈 CUM] 신약이 내게 말을 건네다 카파도키아 데린쿠유 지하도시. 베드로 1서의 수신인은 갈라티아, 카파도키아 등지에 흩어져 나그네 살아가는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이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 베드로 1서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저자는 1장 1절의 인사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베드로”로 자신을 밝히며, 5장 1절에서는 자신을 “원로”이며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이를 근거로 해서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 1서의 저자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부인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 1서의 저자라고 하는 것은 편의상일 뿐이고, 사실은 누가 집필하였는지 모릅니다. 다만, 저자는 로마교회의 신자로서 사도 바오로 계열의 전승뿐 아니라 팔레스티나 교회의 전승도 잘 알고 있었으며, 고난에 처한 교회들을 격려하고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 베드로 1서를 집필하였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베드로 1서의 수신인은 누구입니까? 베드로 1서는 “폰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 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1,1) ‘디아스포라’(Diaspora)는 본래 이방인들 가운데 흩어져 살고 있는 유다인들을 뜻하지만 이를 근거로 베드로 1서의 수신인들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디아스포라’는 단지 세상에 흩어져서 나그네처럼 살 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1서의 독자는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입니다.(1,14.18; 2,9.10) 베드로 1서의 집필 장소는 어디이며 집필연대는 언제입니까? 5장 13절에 보면 집필장소가 ‘바빌론’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빌론 하면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유명한 고대도시를 말합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가 그렇게 먼 곳까지 가서 활동하였다는 전승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오는 「교회사」에서 베드로 1서의 ‘바빌론’을 로마시의 별칭으로 보았고, 대부분의 학자들도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 1서는 로마에서 집필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집필연대는 로마를 가리키는 ‘바빌론’이라는 명칭이 서기 70년 이후에 사용되었고, 서기 90년 이후에 야기된 주님의 재림 지연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서기 70~90년 사이에 집필되었다고 봅니다. 베드로 1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 ① 1,1-① 1,1-2 : 인사 ② 1.3-12 : 감사기도 ③ 1,13-2,10 : 거룩하게 살라는 권고의 말씀 ④ 2,11-3,12 : 그리스도인들의 생활태도 ⑤ 3,13-4,19 : 고난을 감수하라. ⑥ 5,1-11 :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직분을 다하라. ⑦ 5,12-14 : 끝맺는 인사 베드로의 둘째 서간 베드로 2서는 어떤 성경입니까? 베드로 2서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가 아니고, 익명의 신자로서 자기가 아는 교회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이를 도와주려고 쓴 성경입니다. 그리고 독자들이 받아들이도록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저자가 빌려 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가 그 성경에서 사도의 음성과 증언을 인정했고 그것을 교회의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보존하고 전수했다는 사실입니다. 연구에 의하면 베드로2서는 신약성경 중 제일 나중에 쓰여졌다고 합니다. 베드로 2서의 집필동기는 무엇입니까? 베드로 2서의 저자는 3장 1-4절에서 집필 동기를 밝혔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비웃으며 ‘조롱을 일삼는 자들’이 나타나 신자들을 현혹시키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예언자들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상기시켜 재림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주님의 계명을 다시 기억할 것을 일깨우고자 이 서간을 썼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2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 ① 1,1-2 : 인사 ② 1,3-21 : 훈계 ③ 2,1-22 : 이단자들의 악행과 심판 ④ 3,1-13 : 그리스도 재림 희망의 확증 ⑤ 3,14-18 : 마지막 권고와 찬양 베드로 2서가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구원 진리를 단지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그 진리를 가슴에 새기며 삶속에서 실제로 실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② 우리 신앙인들이 종말에 대하여 진정으로 가져야 할 관심은 언제 종말이 올 것인가 하는 종말의 시기가 아니라 어떻게 종말을 맞을 것인가에 대한 올바른 자세입니다. 실로 우리 모든 신앙인들은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아닌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신랑이신 주님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경건의 삶을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마태 25,1-13 참조)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2025.08.15

박해 피해 신앙 일군 교우촌, ‘가난한 이들’과의 신앙 공동체로 거듭나[리길재 기자의 공소를 가다] 7. 원주교구 흥업본당 술미공소 술미공소는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서지교우촌 교우들이 내려와 형성한 유서 깊은 공소이다. 2011년부터 갈거리사랑촌 안에 새로이 마련한 술미공소 입구에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이신 바뇌의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다. 술미공소는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서지교우촌 교우들이 내려와 형성한 유서 깊은 공소이다. 2001년부터 갈거리사랑촌 안에 새로이 마련한 술미공소 입구에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이신 바뇌의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다. 박해 피해 숨어 살다 신앙 자유 얻은 후 산에서 내려와 정착한 유서 깊은 공소 장애인복지시설 ‘갈거리사랑촌’ 내에 공소 건물 신축, 2001년 축복식 거행 사랑촌 가족·신자 구분 없이 함께 신앙 키워원주교구 흥업본당 술미공소는 복자 최해성(요한)·최 비르지타와 함께 원주 부론면 서지교우촌 교우들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덕가산 자락에 숨어 살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산에서 내려와 정착하면서 생긴 유서 깊은 공소다. ‘술미’의 ‘술’은 순우리말로 높고 신성하다는 뜻으로, ‘수리’의 준말이다. ‘미’는 ‘뫼’가 변형된 말이다. 따라서 술미는 높고 신성한 산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교우들이 얼마나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살면서 신앙을 지켜왔는지 웅변해준다. 신해박해 고초 후 교우촌 일궈낸 최해성 일가 최해성(1811~1839)과 그의 고모 최 비르지타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의 친척이다. 최경환 성인은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아버지다.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 최한일과 그의 동생 최한기가 1787년 한양에서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얼마 안 가 최한일은 선종했다. 1791년 신해박해의 고초를 겪은 후 최 신부의 증조모는 12살 외아들 인주와 함께 충청도 홍주 누곡(樓谷), 곧 청양 다락골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최한기의 가족들은 강원도 홍천으로 피신했다가 지금의 풍수원에 자리 잡았다. 최해성과 최 비르지타는 최한기 가족의 후손이다. 최해성 일가는 풍수원에서 원주 서지로 이주해 교우촌을 일궜다. 최해성은 1839년 박해가 몰아치자 부모와 가족을 배론으로 피신시키고 교회 서적을 가져오려고 집으로 갔다가 체포됐다. 그는 강원 감영으로 끌려가 쇠도리깨질을 당하면서도 배교하지 않았다. 그는 배교할 것과 교우들을 밀고할 것을 강요하는 관장에게 “원주 고을을 다 주신다고 해도 거짓말을 할 수 없고,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며 신앙을 증거했다. 이 말을 들은 관장은 살이 너덜너덜해지고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최해성에게 매질을 했다. 최해성은 1839년 9월 6일 참수형을 받고 28세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최 비르지타는 최해성과 함께 체포됐다. 그 역시 최해성과 같이 관장에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남녀노소 막론하고 누가 하느님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배교를 거부했다. 최 비르지타는 4개월간 옥살이를 하다 교수형으로 56세 나이에 순교했다. 원주 순례길 중 순교 구간에 위치 서지마을은 19세기 말까지 교우촌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기해박해를 계기로 몇몇 교우는 덕가산으로 숨어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살다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술미공소와 대안리공소, 후리사공소를 이루었다. 또 일부는 부론면 장뜰, 숯가마골, 왜가마골, 두둑골로 이주해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원주교구는 2022년 총 234㎞에 달하는 순례길 ‘님의 길’을 조성, 개통했다. 박해·순교·세상의 빛을 주제로 한 3개 노선의 ‘님의 길’ 중 순교를 주제로 한 37.8㎞ 구간이 ‘최해성 요한님의 길’이다. 서지마을(교우촌)에서 시작해 원동성당까지 가는 이 순례길에 술미·대안리·후리사 공소가 자리하고 있다. 술미에 교회 인가를 받아 공식으로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57년이다. 대안리공소에서 분리돼 ‘대수리공소’라 했다. 처음에는 공소 건물이 없어 교우 가정에서 주일마다 공소 예절을 했다. 1960년대 대수리 마을에 있는 초가 한 채를 매입해 ‘술미공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공소 건물이 너무 낡고 술미와 대수리가 떨어져 있어서 1983년부터는 두 곳에서 각각 공소 예절을 했다. 술미공소는 박해 시기 서지교우촌 마냥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만이 현존하는 곳이다. 술미공소는 미사와 공소 예절, 성경 읽기, 갈거리사랑촌 가족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행한다다. 술미공소 벽면에 장식된 십자가의 길 14처. 장애인복지시설에 공소 건물 봉헌 현재 술미공소는 원주시 흥업면 대안로 738 갈거리사랑촌에 자리하고 있다. 1990년 원주에서 부부의원을 운영하던 곽병은(안토니오)씨가 술미 마을 건너편 갈거리에 장애인복지시설 ‘갈거리사랑촌’을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갈거리사랑촌 가족들이 술미공소에서 공소 예절을 함께하다 10여 년 후 아예 갈거리사랑촌 내에 공소 건물을 신축하고 2001년 김지석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했다. 시설이 너무 낡아 폐가로 방치되어 있던 옛 술미공소는 2013년 일부 수리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갈거리는 대안3리 술미 마을 앞 동쪽 덕가산 지류와 명봉산 지류가 합류해 대안리와 매지리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갈거리 또한 순우리말로 가르다에서 나온 ‘갈’과 장소, 터를 가리키는 ‘거리’가 합쳐진 말이다. 도로에서 다리를 건너야만 술미공소가 있는 갈거리사랑촌으로 들어갈 수 있다. 갈거리사랑촌은 박해 시기 서지교우촌처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만이 현존하는 곳이다.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을 갈라놓는 곳이 아니라 그들을 세상과 만나게 하고 공존하게 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갈거리사랑촌 안에 있는 술미공소가 그 만남의 현장이다. 갈거리사랑촌 가족과 술미 신자들, 그리고 이곳을 찾는 누구나 함께 구분 없이 전례 안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한다. 술미공소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입구에 있는 ‘바뇌의 성모상’이다. 바뇌에서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는 당신이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라고 밝히셨다. 성경은 가난한 이들이 “주님을 맞아들일 만한 백성”이라고 한다.(루카 1,17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이 지상에서 누리는 기쁨에 그치지 않고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마태 5장 ‘참행복 선언’ 참조) 술미공소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이신 바뇌의 성모상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을 뵙는 참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주님의 선언이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술미공소는 샌드위치 패널로 소박하게 지어졌다. 한 달에 한 번 매월 첫째 주 토요일 오후 4시에 미사가 봉헌되고, 매 주일 오전 8시 30분에 공소 예절이 있다. 장애를 안고 있는 어르신이 대부분인 갈거리사랑촌 가족들은 공소에서 성경 읽기를 하면서 신앙을 키워가고 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6.01.21

믿음·희망·사랑에 의지해 살아가라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4) 유다 서간 유다서는 인간 본성만 따라 사는 영지주의적 삶을 경고하고 믿음과 희망, 사랑의 향주삼덕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미카엘 대천사상, 몬트제 성 미카엘 대성당, 오스트리아. 유다 서간(이하 유다서)은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 많은 영향을 준 정경입니다. 그래서 유다서의 중심 내용은 베드로의 둘째 서간과 마찬가지로 ‘거짓 교사들을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릇된 교리를 퍼뜨리고 문란한 생활을 조장해 교회에 분란과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통 교회에 적대적인 자들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천사들을 모독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서는 이들을 ‘불경한 자들’이라고 단죄하고, ‘육욕에 빠진 자’, ‘꿈꾸는 자’, ‘본성만 따르는 짐승 같은 자’, ‘자신만 돌보는 이기주의자’, ‘불평불만꾼’, ‘아첨꾼’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들 거짓 교사들은 아마도 당시 교회 안에서 골칫거리였던 ‘영지주의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정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뛰어난 지식과 완전한 자유를 천부적으로 타고났다고 자부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유일하고 참된 영적 지혜를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육체를 업신여겨 그리스도의 강생도 부정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다서는 이들을 성령이 아니라 자기 본능에 따라 방탕한 생활을 하는 ‘현세적 인간’(19절)으로 규정했습니다. 유다서의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라고 밝힙니다.(1절)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두 명이 있습니다. 바로 타대오(마르 3,18; 마태 10,3)라고도 불리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루카 6,16; 사도 1,13)와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하지만 유다서의 저자는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과 야고보, 요세(요셉), 시몬과 형제인 유다입니다.(마르 6,3; 마태 13,55 참조) 오늘날 근동도 마찬가지이지만 성경에서 ‘형제’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기뿐 아니라 가까운 친척도 가리킵니다.(창세 13,8; 14,16; 29,15; 레위 10,4; 1역대 23,22)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주님의 동생 유다가 유다서를 직접 쓰진 않았으리라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서간의 여러 내용이 사도 시대 이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다서 17절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학자들은 교회 지도자 중 한 명이 유다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빌려 이 서간을 썼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80~90년께 유다서가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유다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카르타고 교회에서 일찍부터 성경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시리아 교회에서는 4세기까지 성경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를 선보인 예로니모 성인은 유다서가 교회에 알려지지 않은 문헌들을 이용했기에 사람들이 경전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게 됐다고 전합니다. 헬라어 성경은 ‘Ιουδα’(유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Iudae’,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유다 서간’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유다서는 모두 25절로 구성돼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공동 구원’에 관해 쓰려했으나 교회에 잠입해 참신앙을 거스르는 내용을 가르치는 불경한 자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거짓 교사들을 경고하고 이들과 맞서기 위한 내용으로 고쳐 씁니다.(3-4절) 영지주의는 오늘날에도 교회의 큰 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하느님 은총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오로지 자유 의지에 따라 구원될 수 있다며 극단적인 금욕을 실천했던 펠라지우스주의와 함께 영지주의를 ‘성덕의 교묘한 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교황은 영지주의는 하느님과 하느님 은총의 신비든, 하느님의 초월성을 인간이 조정할 수 있다고 여겨 결국 그리스도 없는 하느님, 교회 없는 그리스도, 하느님 백성 없는 교회에 이르게 한다고 경계했습니다. 유다서는 거짓 교사를 세 가지 형태로 식별합니다.(1-4절) 첫째, 이들은 불경합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며 주님께서 드러내 주신 진리와 참된 생활양식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둘째, 이들은 방탕합니다. 불륜을 저지르고 변태적인 육욕에 빠진 자들입니다. 셋째,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기본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유다서는 거짓 교사들이 심판을 받고 세 가지 벌을 받을 것이라 합니다.(5-8절) 첫째, 이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후 하느님의 수많은 표징과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자들처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둘째, 이들은 자기 영역을 이탈해 사람의 딸을 아내로 삼은 천사들처럼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셋째, 이들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유황불에 멸망할 것입니다. 유다서는 ‘미카엘 대천사’를 진정 본받으라고 합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자신이 판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긴 겸손한 하느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다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음 세 가지를 당부합니다.(20-25절) 첫째,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라. 둘째,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셋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고 자비를 베풀어라. 이 세 가지 당부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기본 덕인 ‘믿음·희망·사랑’과 일치합니다.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는 이 향주삼덕은 모든 윤리의 기초이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주신 은총입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리길재 선임2024.10.23

평화·순교·생태 영성, 전 세계 청년들과 함께 나누자의정부교구 2027 WYD 발대식 진행 의정부교구 청년들이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와 의정부교구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염원하는 기도를 봉헌하고 있다. 의정부교구는 23일 주교좌 의정부성당에서 ‘2027 WYD 의정부 교구대회 발대식과 발대미사’를 거행하고, 평화· 순교·생태를 중심으로 한 교구의 신앙 가치를 전 세계 가톨릭 청년들과 나눌 것을 다짐했다. 2027 세계청년대회 의정부교구 1기 봉사자 청년들은 발대식에서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청년들로서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전하기 위해 앞장서겠다”고 선언하며 △민족 화해와 일치, 세계 평화를 위해 기여하고 △순교자의 신앙과 용기를 이어받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며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생명의 문화를 확산하는데 힘쓰겠다고 결의문을 낭독했다. 청년들은 대회 주제 성구인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를 참가자들과 세 번 외치며 대회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나눴다. 의정부교구장 손희송 주교는 “대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청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며, 그 기쁨을 언어와 문화가 다른 전 세계 청년들과 신앙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서 나누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손 주교는 이날 2027 WYD 의정부 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이정훈(교구 총대리) 신부와 사무국장 박재범(청소년사목국장) 신부에게 임명장을 수여했고, 조직위원회 사무국과 세 개 지역 사무국(중부·서부·동부) 현판을 담당 사제들에게 전달했다. 박재범 신부는 WYD 의정부 교구대회 영성 운동을 소개하며 “의정부교구는 다른 무엇보다 생태·평화·순교라는 가치를 중심에 두고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청년들과 함께, 주님과 함께 신앙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발대식 후 참가자들은 주교좌 의정부성당 마당에 2027 WYD 의정부 교구대회를 기념하는 나무를 심은 뒤 발대미사에 참여했다. 미사 중 청년들은 대회의 성공적 개최와 각자의 바람을 담은 기도를 봉헌하며, 세계청년대회가 모든 청년에게 희망과 기쁨이 될 수 있기를 기원했다. 교구 청년대표 황지형(세라피나)씨는 “발대식을 하고 나니 앞으로의 시간이 더욱 기대되고 기다려진다”면서 “의정부교구에 온 전 세계 청년들이 언어가 달라도 서로가 하나라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년들에게 특별히 기도 생활과 성경 읽기를 강조한 손 주교는 “세계청년대회가 아니더라도 청년들이 평소 자주 기도하며 주님을 만나고, 성경 말씀을 통해 그분과 가까워져야 한다”면서 “주님을 인생 동반자로 삼고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발대식에는 교구 청년과 조직위원회 위원 사제 및 교구 사제단, WYD 수원 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장 현정수 신부, 교구 평협 고진철(라우렌시오) 회장을 비롯해 이기헌(베드로, 고양시 병) 국회의원, 심홍순(젬마) 경기도의회 의원, 김동근 의정부시장, 박희성(토마스) 의정부 문화재단 대표, 유은혜(아녜스) 김근태재단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2027 WYD 의정부교구대회 발대식 후 내외빈들이 대회 기념 나무에 흙을 덮고 있다. 발대식에 앞서 주교좌 의정부성당에선 본당 설립 80주년을 기념하는 ‘희망과 화합의 80년, 의정부 시민과 함께하는 희년 음악회’가 열렸다. 교구 청년성서모임, 파로스 찬양팀, 밴드 나마스테, 클래식 앙상블 가일플레이어즈가 무대를 장식했고, 마당에선 2027 서울 WYD 체험 부스와 가톨릭 플리마켓이 열렸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박수정2025.11.26

주님과 함께 최광희 주교 사목 표어 확정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된 최광희 주교의 문장과 사목 표어가 확정됐다. 최 주교의 문장은 사목 표어인 ‘주님과 함께(Cum Domino)’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과 복음 선포의 사명을 상징하는 다양한 도안 요소로 구성됐다. 성경에 기반한 사목, 한국 순교자에 대한 깊은 신심, 그리스도 중심의 목자로서의 삶을 시각적으로 조화롭게 표현했다. 문장의 핵심이 되는 표어 라틴어 ‘Cum Domino’는 ‘주님과 함께’라는 뜻으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는 최 주교의 사제수품 성구에서 영감을 받았다. 주님과의 친밀한 일치 안에서 주교직 사명을 수행하겠다는 신앙 고백이 담겨 있다. 문장 상단의 물고기(ΙΧΘΥΣ) 상징은 초대 교회 신자들이 사용하던 표지로, ‘예수 그리스도·하느님의 아들·구세주’를 뜻하는 희랍어 약자다. 이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루카 5,10)는 복음 말씀처럼 신자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사명을 드러낸다. 중앙에 물결 형태로 펼쳐진 성경은 하느님 말씀과 세례의 은총, 신앙 여정을 상징한다. 성서 사도직에 헌신해온 최 주교의 사목 방향을 반영했다. 말씀 안에서 신자들과 함께 걸어가려는 의지가 담겼다. 하단의 성지 가지 모양 잎사귀는 한국 순교자들의 신앙과 희생정신을 기리는 상징이다. 순교 선열의 삶을 본받아 오늘날에도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사목자의 사명을 담고 있다. 성경 옆 알파(Α)와 오메가(Ω)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신 그리스도께서 주교직의 주체임을 고백하는 표지다. 문장에 사용된 진청색은 깊은 믿음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황금색은 주님의 영광과 신성을, 회색은 겸손과 절제, 내면의 성찰을 상징한다. 전체 문장은 종과 횡의 교차를 통해 십자가 형상을 이루고 있으며, 이는 주교직의 여정이 곧 주님과의 동행임을 드러내며, 하느님 백성을 진리 안에서 인도하려는 사명을 상징한다. 최광희 신임 보좌 주교의 주교 서품 미사는 8월 28일 오후 2시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다.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이지혜2025.07.23
![[생활속의 복음]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4/07/wIv1775544825758.jpg)
[생활속의 복음]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마음의 평화’라는 압도적인 입교 동기가 시사하듯 신앙인은 교회 안에서 평화를 갈망한다. 평화는 전쟁의 반대말보다 폭넓은 의미를 함축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건강·성공·복지의 총체적 결실이 평화로 귀결된다. 우리 문화의 인사말은 평화의 유의어인 ‘안녕’을 확인하거나 염원한다. 평화는 구원과 상통한다. 구약 성경은 ‘샬롬’(평화)을 기원하는 인사(탈출 4,18 참조), 축복(민수 6,24-26 참조), 망자와 유가족을 향한 위로(창세 15,15 참조)를 보도한다. “평화의 하느님”(1코린 14,33)은 수난과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와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을 선사했다. 평화의 상실인 불안의 요인은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자기 밖’의 불안은 대외 여건과 주변 정세(전쟁·폭력·재앙)가 직간접적 공포를 조성하는 국면이다. ‘자기 안’의 불안은 질병·사고, 근심·걱정이 정서를 자극하여 과거의 상처나 좌절, 현재의 실패나 갈등, 미래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부정적 영향을 받는 상태다. ‘자기 옆’의 불안은 관계 형성의 미숙함과 타인으로부터 받은 배신감이 깨진 그릇처럼 회복 불가능한 불화를 초래한 경우다. 이 셋의 상호작용은 불안을 극도로 조장한다. 스승의 십자가형 이후 제자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로마인 지배층과 유다교 지도자의 감시 대상(자기 밖)인 제자들은 체포될 위기에 놓였다. 스승의 죽음으로 인한 제자들의 탄식(자기 안)은 과거를 부정하게 하고 암울한 미래를 두려워하게 하였다.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으로부터 촉발된 제자단의 분열(자기 옆)은 동료 사이의 불신을 고착하였다. 이 정황을 여실히 묘사한 문구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이다. 스승의 부재(不在)는 불안의 핵심 사유였다. 수난의 상처를 간직한 스승이 잠긴 문을 뚫고 나타나 제자들에게 인사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불안에 떨던 제자들은 스승을 ‘다시 만남’(부활)으로써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이런 맥락에서 자기 밖·안·옆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은 ‘부활의 증인’(하느님의 자녀)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토마스에게 부활 신앙의 의미를 밝힌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신앙은 ‘만남에 대한 확신’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보지 않고도 이루어지는 만남’은 ‘대면의 만남’(자기 옆)을 넘어선 ‘비대면의 만남’(자기 밖, 자기 안)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확약이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이다. 제자들 ‘안에 머무르는 성령’(갈라 4,6 참조)의 열매 중 하나는 “평화”(갈라 5,22)다. 부활 신앙은 제자들이 스승을 ‘다시 만난 체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어원상 망자의 극적 소생으로 정의되는 부활은 내용상 ‘다시 만남’(재회)이며, 이 ‘다시 만남’을 통해 ‘새롭고 영원한(언제 어디서나 어떻게든) 만남’의 문이 열렸다. 이 만남은 우리 밖/안/옆에서 “세상이 주는 평화”(요한 14,27 : 힘에 의한 평화)와 구별되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기반한 평화를 준다. 활짝 핀 봄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몸짓으로 우리에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 앞으로도 만날게요.’ cpbc2026.04.08

명례궁 화려함 사라진 자리, 143년간 이어온 신앙의 전통[리길재 기자의 공소를 가다] 41. 전주교구 무주본당 무풍공소 전주교구 무주본당 무풍공소는 1883년 설립돼 올해로 설립 143년을 맞았다. 무풍공소 전경. 야트막한 시멘트 담이 인상적이다. 전주교구 무주본당 무풍공소는 전북 무주군 무풍면 고도2길 29(현내리 653-5)에 자리하고 있다. 덕유산과 대덕산, 삼봉산을 끼고 있는 무풍면은 조선 시대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로 왕과 왕족을 위 한 행궁인 ‘명례궁’이 있을 만큼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명례궁은 무풍면 현내리 북리 마을에 있었다. 명례궁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등 세월이 흐르면서 해체되어 팔리기도 하고, 주민들이 점유해 살림집으로 변했다. 지금은 명례궁 터에 안내 표지판만 있을 뿐이고, 여전히 주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풍공소가 이 명례궁 터에 자리하고 있다. 무풍공소 입구.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 성심상은 폐쇄된 괴목공소에서 모셔왔다. 공소 입구에 들어서면 루르드의 성모 발현 동굴처럼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성모 동굴이 보인다. 무풍면은 삼한 시대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이곳을 신라 사람들은 ‘무산’(茂山), 백제인들은 ‘적천’(赤川), 통일 신라는 ‘무풍’(茂豊)이라 불렀다. 조선 시대 무풍면은 전쟁과 전염병, 정쟁 등 환난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또 전라도 전주와 진안, 경상도 김천과 대구, 거창, 충청도 대전과 인접한 교통 요지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대대로 자족하면서 넉넉한 삶을 살아갔다. 무풍공소는 4명의 수도자를 배출했다. 루르드의 성모 발현 동굴처럼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무풍공소 성모 동굴. 박해 피해 숨어든 이들, 교우촌 일구다 이곳에 박해를 피해 천주교인들이 숨어들어왔다. 1866년 병인박해 이전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여우내에 무주본당의 모태가 되는 교우촌이 형성됐다. 이 여우내를 중심으로 무주군 일대 여러 곳에 교우촌이 세워졌고 다블뤼 주교와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사목 방문했다.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복자 신태보(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순교자들의 후손과 교우들 40여 명을 이끌고 강원도 풍수원에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룬 인물이다. 그는 1801년 이후 시작된 교우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글로 남겼다. “우리는 오래지 않아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서로 깊고 진실하게 정이 들게 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주일과 축일의 의무를 지키기 시작했다. (⋯) 내 마음속에는 기쁨과 행복이 번졌다. 그것은 보물을 발견한 거나 다름없다. 나는 이 교우들을 천사처럼 사랑했다. (⋯) 모든 이가 그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아주 아무것도 없는 형제들에게 무슨 도움을 베풀어 줄 줄을 알았고,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어 주니, 이 불행한 시절보다 우애가 더 깊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2권 17~18. 23쪽) 1866년 병인박해로 무주의 교우촌은 많은 피해를 봤다. 이후 1878년 블랑·두세 신부가 무주 일대를 순회하며 전교했다. 이후 여우내와 무풍에 교우들이 다시 모여 화전을 일구고 교우촌을 재건했다. 또 충청도 영동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이 옹기를 구워 생활했다. 1883년 초대 금산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로베르 신부는 무풍과 여우내공소를 설립했다. 무주 지역에 공소는 이 두 곳뿐이었다. 그해 7월 무주 지역을 처음 사목했던 블랑 신부가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에서 제7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주교품을 받았다. 무풍공소 설립 당시 교우 수는 40여 명이었다. 하지만 무풍공소는 박해를 피해 잠시 머물던 장소였기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대부분이 고향으로 다시 가거나 생업을 찾아 타지로 떠나 1940년까지 50여 년간 공소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 지금은 일흔 살이 가까운 10여 명의 교우들이 지키고 있지만 공소 모든 곳에 그들의 정성된 손길이 묻어 있다. 무풍공소 내부. 무풍공소 제단. 제대와 십자가, 예수 성심상과 성모상이 있다. 50년 불 꺼진 공소, 아가타가 다시 밝히다 1941년 10월 무풍면 은산리에 원호인·호영 형제가 이사 와 교우들을 찾아 신앙 모임을 하면서 불 꺼진 공소에 온기가 일기 시작했다. 6·25전쟁 때 서울에서 무풍면 북리로 피난 온 이분이(아가타)씨가 전교하고 홀로 신앙생활을 하던 교우들을 모아 신자 수가 크게 늘었다. 휴전 후 1954년 교우들은 북리에 집 한 채를 사들여 공소 건물로 사용했다. 그해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공소를 방문한 금산본당 김영태 신부가 이 집을 ‘현내공소’라 했다. 1956년 9월 금산본당 은산·철목·연내·율속공소를 통합해 무주본당이 설립되면서 무풍공소 관할도 이관됐다. 초대 무주본당 주임 서정수 신부는 1957년 3월 10일 북리 현내공소를 매각한 자금과 옥수수 가루, 옷 등 구호물자를 아껴 모은 돈으로 지금의 공소 땅과 집을 사들인 후 당시 돈 2000환을 들여 공소 건물로 개수했다. 그리고 ‘무풍공소’라 이름 지었다. 공소 양 벽면에 설치돼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 입체적이고 채색이 잘돼 있다. 문 닫은 공소서 모셔온 두 팔 벌린 예수상 무풍공소는 올해로 설립 143년이 되는 무주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활동 공소이다. 무풍면 시장 뒤편에 자리한 무풍공소는 마당 입구에 반만 쌓아놓은 낮은 시멘트 담장이 인상적이다. 마당으로 들어서면 공소 입구에 마치 루르드 성모 발현 동굴처럼 자연석으로 쌓은 조형물에 성모상을 안치해 놓았다. 공소 건물 입구에는 ‘천주교 무풍공소’라는 현판과 함께 두 팔을 활짝 벌린 예수상이 이곳을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원래 종탑이 있던 자리인데 오래되어 무너질 위험이 있어 종탑을 철거한 뒤 괴목공소를 폐쇄할 때 그곳 예수상을 모셔와 모두가 볼 수 있게 입구에 안치했다. 철거한 종은 공소 마당 한쪽에 녹슨 채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공소 내부는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나무 바닥과 천장을 받치는 나무기둥들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천장은 부녀회에서 1974년 보수한 것이어서 살짝 처져 있지만, 최근에 새로 칠을 했는지 깔끔하다. 양 벽면에는 공소 건물 크기와 비교하면 제법 큰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가 설치돼 있다. 예수님의 수난을 생생하게 묵상할 수 있도록 잘 채색된 십자가의 길 14처 부조가 꽤 인상적이다. 제단에는 제대와 십자가, 예수 성심상과 루르드의 성모상이 있다. 제대와 십자가, 성상들의 비율이 안 맞는 것으로 보아 공소 입구 예수 성심상처럼 폐쇄된 공소나 다른 본당에서 가져온 듯하다. 무풍공소에는 1974년 공소 발전과 관리를 위해 부녀회가 조직됐고, 1976년에는 신학생 후원회와 레지오 마리애 샛별 쁘레시디움이 창단됐다. 무풍공소는 4명의 수도자를 배출했다. 여느 시골 공소처럼 50~70대가 청년이고, 10여 명의 교우가 공소를 지키고 있다. 사과 농사를 지으며 바쁘게 생활하지만, 공소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 한마음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그래서 무풍공소 모든 곳에 교우들의 정성이 묻어 있는 것이 느껴진다. 조선 시대 행궁인 명례궁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유서 깊은 교우촌의 역사가 아득해 보여도 143년간 이어온 신앙의 전통은 모든 이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리길재 전문2026.11.04

850년 역사 속 가톨릭과 신교의 흔적 함께 간직한 작센의 수도원[중세 전문가의 간김에 순례] 96. 독일 벡셀부르크 수도원 성 십자가 바실리카 벡셀부르크 수도원. 중앙의 성 십자가 성당은 12세기 데도 백작이 창건한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 성당으로 2018년 준 대성전으로 승격됐다. 왼쪽 위의 흰 건물은 신교 성 오토 교회로 이곳의 신·구교 역사를 보여준다.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은 세속화됐고, 성당은 귀족의 궁정교회로 사용됐다. 1993년 바이에른 에탈 수도원의 베네딕도회원들이 정착하면서 450년 만에 수도 생활이 부활했지만, 수도자 부족으로 2026년 말 철수를 앞두고 있다. 출처=드레스덴-마이센교구 중장년층 신자들에게 수녀님은 본당 신부님과 함께 성당에서 늘 만날 수 있던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점차 그럴 기회가 없어지고 있지요. 수도 성소 감소와 고령화로 본당에 파견할 여력이 없어진 데다, 수도회들이 고유한 영성과 사도직에 집중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닙니다. 850년 역사를 지닌 독일 벡셀부르크 수도원에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올해 말 철수한다는 소식을 최근 들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450년 만에 수도 생활을 되살린 곳이었는데, 다시 수도자 없는 공간으로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곳에는 수도자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 온 것이 있습니다. 성당 중앙에 우뚝 솟은 13세기의 십자가상입니다. 오늘은 신앙의 역사를 지켜 온 그 십자가를 만나러 떠나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벡셀부르크 수도원 성 십자가 바실리카. 1180년 무렵 완공됐으며, 15세기에 천장을 지금의 고딕식 늑재 궁륭으로 바꿨다. 중앙의 레트너는 신자석과 성직자·수도자의 제단부를 구분하던 가림벽으로 명칭은 라틴어 ‘독서대’에서 유래했다. 1683년 해체된 것을 동독 시절인 1971~1972년에 복원했다. 신교 지역에서 되살린 가톨릭 신앙 벡셀부르크(Wechselburg)는 신교가 우세한 작센주의 라이프치히와 켐니츠 사이에 자리한 작은 마을입니다. 주변 마을까지 합쳐 주민이 약 1,700명에 불과한 이곳은 12세기 수도원을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벡셀부르크는 독일어로 ‘교환한 성’을 뜻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작센 공작 모리츠가 수도원을 세속화한 뒤 다른 가문의 영지와 맞바꾼 데서 유래했지요. 마을로 접어들면 저 너머로 귀족의 성처럼 보이는 건물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옛 수도원 건물을 토대로 세운 바로크 궁입니다. 문루를 지나면 그 궁과 이어진 성 십자가 바실리카가 나타납니다. 높이 솟은 종탑이 없어 성당인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두꺼운 석조 벽체와 반원형 창문에서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의 역사는 12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156년 이 일대를 상속받은 그로이치의 데도 백작은 가족 묘지로 사용할 성당을 세우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아우구스티노회 공동체를 초빙했습니다. 1278년에는 독일기사단이 수도원을 넘겨받아 지역의 종교 중심지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은 귀족의 거처로 바뀌었고, 18세기에는 성당에 붙어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습니다. 이곳에 가톨릭 신앙이 되살아난 것은 19세기였습니다. 1869년 쇤부르크 가문 카를 백작 부부의 가톨릭 개종이 전환점이 됐지요. 하지만 신교가 우세한 작센에서 가톨릭 신앙의 부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정원에 루르드 성모 동굴을 조성하고 가톨릭 전례를 거행하자, 1900년에는 경찰이 외부 신자들의 출입을 막아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후 신자들의 순례가 다시 이어졌고, 동독 시절에는 전쟁으로 파손된 성당도 복원됐습니다. 통일 후 1993년 바이에른 에탈 수도원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정착하면서, 마침내 450년 만에 수도 생활이 부활합니다. 벡셀부르크 ‘승리의 십자가’. 1230년 무렵 제작된 목조 조각군으로, 십자가 상단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안은 성부가, 양옆에는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천사들이 자리한다. 아래에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 사도가 왕의 형상 위에 서 있다. 십자가 밑에서 몸을 일으키는 아담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죽음을 넘어 구원받는 인류를 상징한다. 제대에 새겨진 구원의 이야기 성당에 들어서면 큰 십자가상과 그 아래 붉은 돌로 만든 레트너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레트너는 본래 성직자와 일반 신자의 공간을 구분하던 일종의 가림벽입니다. 전례의 변화로 많은 성당에서 사라졌지만, 이곳 레트너의 중앙 강론대에서는 지금도 파스카 성야에 부활 찬송을 노래합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돌에 새겨진 성경 인물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옵니다. 제대 양옆에는 아브라함과 멜키체덱이 서 있고, 위쪽 아치에는 제물을 드리는 카인과 아벨이 새겨져 있습니다. 구약의 희생 제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완성된다는 의미로, 감사 기도 제1 양식에서도 이들의 제물을 기억하지요. 구원의 이야기는 맨 위의 거대한 목조 십자가상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승리의 십자가’ 꼭대기에는 성부, 성령 하느님, 아래에는 죽음에서 깨어나는 아담이 표현돼 있습니다. 아담의 죄로 시작된 죽음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극복된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가 이 한 공간에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벡셀부르크 청년 저녁 기도. 2000년 시작된 이 모임은 매년 네 차례 열리는 정기 청년 신앙 행사로 드레스덴-마이센 교구를 비롯한 독일 동부 여러 교구의 청년들이 참여해 공동 저녁 기도와 친교를 통해 삶의 고민을 나누고 신앙의 유대를 다진다. 출처=벡셀부르크 수도원 청년들 모여 신앙·고민 나누는 순례지 오늘날 벡셀부르크는 드레스덴-마이센 교구를 대표하는 순례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톨릭 신자가 소수인 이 지역에서 신자들이 만나 신앙의 유대를 확인하는 장소이지요. 연중 청소년, 교회 자선 기구와 본당 등 다양한 공동체의 순례가 이어지는 곳입니다. 젊은이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습니다. 매 분기 열리는 ‘벡셀부르크 청년 저녁 기도’에는 독일 동부 지역의 젊은이들이 함께 기도하고 식사하며 신앙과 삶의 고민을 나눕니다. 많이 모일 때는 200명이 넘는 큰 신앙 행사입니다. 지난 9월 주제 중 하나는 ‘의심―믿음이 흔들릴 때’였는데, 의심과 불안을 감추기보다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자는 취지였습니다. 레트너 앞에 앉아 중세의 조각가들이 돌과 나무에 새긴 구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지난 850년 벡셀부르크의 역사는 평탄치 않았습니다. 수도원이 폐쇄되어 수도자들이 쫓겨나고, 신자들이 자유롭게 기도할 수 없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갈림길에 섰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구원 이야기는 신앙이 수도원의 건물이나 수도자의 존재에만 매여 있지 않음을 일깨워 줍니다. 믿음의 불꽃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십자가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 특히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젊은이들의 마음에서 벡셀부르크의 기도는 앞으로 줄곧 이어질 것입니다. <순례 팁> ※ 라이프치히에서 아우토반(A72)을 타고 나르스도르프·로흘리츠 출구에서 B175 도로 이용(약 1시간). 가이타인이나 부르크슈테트역에서 버스(629, 626) 이용. ※ 바실리카 미사: 주일 및 대축일 10:30. 평일 12:00(월·수), 17:00(수). 시간 기도 6:45, 12:00, 18:00, 19:30. 피정의 집 및 순례자 숙소 운영. 쇤부르크 궁 정원에 루르드 성모 동굴.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마련한 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 차윤석cpbc2026.11.04

부활하신 주님 처음 목격한 ‘두 마리아’ 성해 모신 지중해 성지[중세 전문가의 간김에 순례] 95. 프랑스 생트 마리드라메르 바다의 성모 성당 론강 삼각주의 남쪽 끝, 지중해와 석호 사이에 자리한 생트 마리드라메르. 낮은 흰색 집과 붉은 기와지붕이 모여 있는 마을 중심에 노트르담 드 라 메르(바다의 성모) 성당이 보인다. 해변에는 카마르그식 투우가 벌어지는 투우장과 요트 정박지가 자리하고, 마을 뒤편으로는 광활한 카마르그 습지가 펼쳐진다. 인구 2500여 명의 작은 도시지만, 여름 휴가철과 순례 축일에는 방문객들로 붐빈다. 출쳐=셔터스톡 성경에 등장하는 ‘마리아’하면 누구를 떠올리시나요? 성모 마리아, 그다음은 마리아 막달레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의 마리아, 부활 아침 무덤을 찾은 마리아와 같은 다른 마리아들도 등장합니다. 예수님 시대 ‘마리아’, 곧 히브리어 ‘미르얌’은 우리나라의 ‘영숙’이나 ‘정희’처럼 흔한 이름으로, 당시 이름이 기록된 유다 여성 다섯 명 가운데 한 명꼴이었습니다. 지금도 아이 이름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남부 카마르그 지방에는 두 마리아의 이름을 품은 마을이 있습니다. 생트 마리드라메르, 곧 ‘바다의 성 마리아들’ 마을입니다. 주님 부활 아침 빈 무덤을 찾은 세 여인 가운데 두 사람인 마리아 야코베와 마리아 살로메를 공경하는 마을이지요. 노트르담 드 라 메르 성당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빗살형 종탑. 현재 성당은 1170~1180년경, 두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믿었던 옛 소성당을 보존한 채 그 둘레에 세워졌다. 외부 침입을 대비해 14세기 초 상부에 성곽과 돌출 방어시설을 더하고, 벽에는 화살 구멍처럼 좁은 창을 냈다. 엑상프로방스·아를 대교구 소속 본당이자 순례 성지로, 성 마르티노 공동체가 사목을 맡고 있다. 반 고흐도 찾았던 푸른 바닷가 마을 마르세유에서 아를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프랑스 남부와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물길과 갈대밭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가 떠오르지만, 그보다 훨씬 광활하지요. 석호·습지·염전 사이로 홍학이 먹이를 찾고, 초지에는 카마르그 지방의 상징인 흰 말과 검은 황소가 보입니다. 평원 끝에 자리한 생트 마리드라메르는 아담한 어촌입니다. 1888년 반 고흐도 이곳을 찾아 성당을 중심으로 들어선 붉은 기와지붕의 집들, 해변에 놓인 어선들을 두 화폭에 담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마을에는 휴양지의 활기가 넘칩니다. 좁은 골목마다 카페와 식당이 이어지고, 그 끝에는 푸른 지중해가 펼쳐집니다. 바로 이 바다를 건너 성 마리아 야코베와 성 마리아 살로메가 이곳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노트르담 드 라 메르 성당의 본랑(왼쪽)과 제단부 위 성 미카엘 소성당에 모셔진 두 성인의 성해함(오른쪽). 제대 앞에는 바닷가 마을에서 귀한 담수를 얻던 우물이 자리한다. 성 미카엘 소성당은 원래 요새 경비병실이었으나, 1448년 성해가 발견되면서 이를 모시는 소성당으로 바뀌었다. 해마다 세 차례 주요 순례 축일(5월 24~25일, 10월 셋째 주일, 12월 첫째 주말)에 밧줄을 이용해 제단으로 내린다. 3500㎞ 바닷길 건너와 부활 전한 성인들 마리아 야코베는 복음서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로 등장합니다. 마리아 살로메는 제베대오의 아내이자 사도 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여겨집니다. 두 여인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 들었고, 십자가 죽음을 멀리서 지켜봤습니다. 안식일이 지나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향료를 들고 무덤을 찾았다가 부활 소식을 듣지요. 슬픔의 현장을 지켰던 이들이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박해가 닥치자 두 성인은 라자로·마리아 막달레나·마르타 등과 함께 팔레스티나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들은 돛도 노도 없는 배에 태워 바다로 내몰렸지만, 하느님의 인도로 카마르그 해안에 무사히 닿았습니다. 당시 뱃길로 3500㎞나 떨어진 먼 곳이었죠. 다른 제자들이 프로방스 각지로 떠난 뒤에도 두 성인은 이곳에 남아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고 신앙 공동체를 일궜습니다. 두 성인을 향한 공경은 마을 중심의 노트르담 드 라 메르(Notre-Dame-de-la-Mer), 즉 바다의 성모 성당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곳에는 6세기부터 성당이 있었으며, 12세기 후반 그 옛 성당을 감싸듯 지금의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 두 성인의 무덤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다의 성모 성당은 다섯 개의 종이 달린 종탑이 없었다면 중세 성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화려한 조각이나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창 대신 높고 두꺼운 석벽과 화살 구멍처럼 좁은 창이 외관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14세기에는 지붕 둘레에는 침입자를 막는 돌출 방어시설도 갖췄는데, 당시 성당은 바닷길로 들이닥치는 약탈자들을 피해 주민이 몸을 숨기던 요새이기도 했지요. 노트르담 드 라 메르 지하 소성당(위)과 5월 순례 축제의 바다 행렬(아래). 두 마리아를 맞이하고 섬겼다고 전해지는 검은 피부의 사라는 집시와 이동생활 공동체가 특별히 공경하는 성인이다. 해마다 5월 24일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 사라의 성상을 모시고 바닷가로 행렬한다. 이튿날에는 마리아 야코베와 마리아 살로메의 성상을 태운 배를 어깨에 메고 바다로 나아간다. 성해 모시고 바다로 행렬하는 순례지 성당 안에 들어서면 좁은 창으로 스며든 빛이 장식 없는 어둑한 공간을 비춥니다. 높은 석조 천장 아래 본랑 중앙에 철제 울타리로 둘러싸인 담수 우물이 눈길을 끕니다. 제단 위쪽에 두 성인의 성해함이 자리합니다. 두 성인에 대한 공경이 본격화된 것은 교황들이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던 14세기였습니다. 앞서 1279년 생 막시맹에서 성 마리아 막달레나의 성해가 발견되면서 프로방스 일대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공경이 고조되고 있었지요. 1315년에는 아를 대주교의 승인으로 두 성인을 공경하는 신심회가 설립됐고, 14세기 중엽에는 프랑스 여러 교구의 주교가 이곳을 순례했으며, 15개 교구에서 두 성인의 축일을 기념했습니다. 이곳 순례는 1448년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프로방스 백작 르네 당주의 명령으로 성당을 발굴해 두 성인의 성해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해 12월 성해를 제단 위쪽의 성 미카엘 소성당에 모시면서 이곳은 두 성 마리아의 공경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 잡습니다. 또 두 성인의 성해를 모시고 바다로 향하는 순례 행렬도 시작됐지요. 프랑스혁명 때 중단된 이 행렬은 1862년 신심회가 재건되면서 부활했습니다. 성당을 나와 마을 골목을 따라 걸으면 이내 드넓은 바다와 마주합니다. 망망대해로 내몰렸던 두 성인은 낯선 땅에서 어떤 삶이 기다릴지 알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그들은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바닷가에서 두 성인을 맞아 오랫동안 섬겼다고 전해지는 성 사라도 그 믿음의 여정에 함께했습니다.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과 차별을 겪어 온 집시 공동체가 성 사라를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는 이유도 헤아릴 수 있을 듯합니다. 해마다 5월이면 유럽 각지의 순례자들이 성 사라와 두 성인의 성상들을 모시고 바다로 향합니다. 제각각 삶의 무게를 안고 바다에 선 이들은, 막막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을 맡겼던 두 성인의 믿음을 되새길 겁니다. 그 말씀은 오늘의 순례자들에게도 들려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순례 팁> ※ 아를에서 자동차로 40분(39km), 아를역에서 직행버스(A50)로 약 1시간. ※ 바다의 성모 성당 미사: 주일 및 대축일 10:30, 평일 18:00(화, 금, 토), 순례자의 집 운영.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마련한 2027 유럽 수도원 성지 순례. 문의 및 신청: 분도출판사, 010-5577-3605(문자) 차윤석cpbc2026.10.28
![[가톨릭 문화산책]<26>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6)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루카 22,19)](//cpbc.co.kr/CMS/newspaper/2013/07/rc/464075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미술(6)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루카 22,19)한 식탁에서 같은 빵 나누며 '주님 안에 하나되기' 후라 안젤리코는 재산이 넉넉한 가정에서 자라났음에도 늘 "진실한 재산은 조그만 만족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처럼 조그만 만족을 위해 단순하고 경건한 생활을 택한 그는 착하고 온화하고 조촐한 삶을 통해 속세의 관심에서 떨어져 살았다. 전기 작가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한 번 그린 그림을 더 손질하거나 고치는 일 없이 그대로 뒀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 손길이 자신의 붓을 인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서는 붓을 들지 않았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그릴 때는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기도하는 고결한 삶과 더불어 구성과 색채 사용에 놀라운 감각이 동반된 회화기법 덕분에 후라 안젤리코는 빠른 속도로 유명해진다 작품 : '제자들의 성찬', 후라 안젤리코 작 (1440년께, 이탈리아 피렌체 산 마르코 미술관) ● 빛의 신비 5단 :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빵과 포도주, 친교, 영원함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성체성사 소박한 방안에 모인 사람들은 성체를 받아 모실 준비를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한 손에 성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체를 직접 먹이신다.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제자들과 함께 기념하기 위함이다. 제자들의 손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합장한 손에서 가슴에 엇갈려 모은 손, 하늘을 향해 벌린 손까지 모두 경건한 자세다. 이 가운데 여덟 명은 긴 식탁 주위에 서 있고, 나머지 네 명은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있다. 네 명이 앉았던 의자는 비어 있다. 공간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안젤리코가 여덟 명만을 긴 식탁에 배치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를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8이란 숫자다. 숫자 8은 영원의 수로, '구원'과 '부활',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 8이라는 수의 의미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노아의 가족 8명은 홍수의 심판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창세 6,9-9,17). '모든 남자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창세 17,12). 할례를 통해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죄의 사함을 위한 조건을 충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안식일(주간 마지막 날인 7일째인 날)이 지나고 주간 첫날(8일째)이 밝아올 무렵 부활하셨다(마태 28,1-7). 따라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는 우리의 덧없는 시간적 개념에 '영원'을 담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돼 신성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는 순간이다. 바로 여덟 번째 날, 부활한 날이다. #친교를 위한 식탁 가운데에 예수께서 손수 나눠주시는 성체를 기다리는 제자들로 인해 방 안 공기는 긴장과 흥분이 감돈다. 화면 왼쪽에 성체를 이미 받아 모신 제자들은 지극히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아직 성체를 받아 모시지 못한 오른쪽 제자들은 초조한 기색이다. 영성체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모두는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예수님 사랑을 함께 나누려 한다. 여기에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포함된다. 안젤리코는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네 제자 사이에 유다를 그린다. 다른 제자들 얼굴 뒤에 노란색 후광이 그려진 것과 달리 유다는 자신의 머리카락과 수염의 색처럼 어두운 색 후광이 그려진다. 예수를 수난의 길로 접어들게 한 유다지만, 그의 눈빛은 성체성사의 신비를 하염없이 체험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부터 급한 성격의 베드로, 배신을 앞둔 유다까지 다양한 유형이다. 예수는 식탁에 모인 여러 성품의 제자들-비록 불균등한 형태를 이루지만-에게 같은 잔에 같은 빵을 나누어 모두가 동일하며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무언의 가르침을 주신다. 아무런 조건 없이 식탁에 둘러앉아 모든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그래서 모두는 같은 식탁에서 하나의 빵에서 비롯된 빵조각을 떼어 받아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 #목마르지 않을 물-생명의 양식 식탁 위에는 어떤 음식도 놓여 있지 않다. 다만 색깔이 칠해지지 않은 채 윤곽선만 흐릿하게 보이는 컵 몇 개가 그려져 있다. 안젤리코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요한복음 6장 35절의 말씀처럼, 맛깔난 음식을 잘 차린 식탁보다 작은 성체를 나눠주는 예수의 움직임을 통해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양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창문 뒤쪽으로 연결된 오른쪽 회랑 중앙에는 두레박이 있는 우물이 보인다. 성찬례가 거행되있는 수도원의 작은 구석방은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문을 통해 우물과 연결해 볼 수 있다. 모든 갈증을 없애주는 우물, 결코 목마르지 않을 물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성체인 것이다. 왼쪽에 나자렛의 성모 역시 두 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아들 예수가 전해줄 생명의 양식을 간절히 기다린다. 최후의 만찬에서 여자, 즉 성모 마리아를 표현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안젤리코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서 중개자이자 영적 모친, 교회 어머니인 성모를 교회와 공동체 중심에 등장시켜 예수의 존재와 성체성사의 은총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한다. 우리는 주일마다 성찬의 식탁을 준비한다. 예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다. 우리는 예수의 온전히 내어주심을 통해 생명의 양식을 얻는다. 하느님의 생명이 채워진다. '내어줌'과 '채워짐'의 신비가 성찬의 식탁에서 이뤄진다.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작품 : '그리스도의 변모', 라파엘로 산치오 작 (1516~20년, 목판에 유채, 바티칸 미술관, 일부) ● 빛의 신비 4단 :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 묵상 단어 : 변모, 영광, 빛 그리스도께서는 타볼 산 정상에서 자신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지켜 보는 가운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엘리야, 모세와 이야기를 나누신다. 기쁨과 환희, 새로운 탄생을 상징하는 '빛처럼 하얀' 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있다. 예수의 등 뒤로는 성령을 상징하는 '빛의 구름'이 형성돼 있다. 변모에서 빛은 성령처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신비와 계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요소다. 그림은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의 작품 '그리스도의 변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그는 프랑스 남동부 나르본 성당의 제대 장식 그림으로 이 작품을 의뢰 받아 제작에 들어갔으나 건강이 악화돼 37살 젊은 나이로 선종함에 따라 완성을 보지 못했고, 제자인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9~1546)가 완성했다.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이 '부활의 영광'을 예시하고 있다는 점이다.윤인복 교수(아기예수의 데레사, 인천가톨릭대 대학원 그리스도미술학과)조은일2013.07.16
![[성모 성월 특강-1강] 성모님이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이유는](https://img.cpbc.co.kr/newsimg/upload/2026/05/15/NVt1778804357919.jpg)
[성모 성월 특강-1강] 성모님이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이유는[황창연 신부의 신앙 특강] (1) cpbc 가톨릭평화방송은 5월 성모 성월을 맞아 특강을 기획했다. 황창연(수원교구 성필립보생태마을 관장) 신부가 강사로 나서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을 주제로 4차례에 걸쳐 강의한다. 본지를 이를 요약 정리해 과달루페 성모 발현 이야기와 의미를 전한다. 과달루페 성모. OSV 황창연 신부의 신앙 특강(1강) ▶다시 보기 인류 역사를 바꾼 발현,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뒤 1500년이 넘도록 성모 마리아의 공식 발현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런데 1531년 12월 9일, 그 발현이 예루살렘도 로마도 아닌, 전혀 뜻밖의 땅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일어났다. 왜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였을까. 이 강의는 그 질문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과달루페(Guadalupe)는 '돌 뱀을 쳐부수는 여인'을 뜻한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테페약 언덕은 뱀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자리한 곳이었고, 해마다 수만 명의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치던 피의 의식이 행해지던 장소였다.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이 1500년의 시간을 넘어 그 언덕 위에서 현실이 되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를 부수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 것이다." (창세기 3,15) 성경은 뱀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1531년 과달루페 발현은 아예 돌 뱀을 모시는 언덕 자체에서 이루어졌다. 성모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아즈텍의 우상 숭배를 걷어내시고, 사람을 죽여 바치는 인신 공양을 끊으시며, 생명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살리셨다. 1531년, 성모님이 오실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성모님께서 굳이 1500여 년 만에 그 시골 테페약 언덕에 발현하신 데에도 '때가 찬' 이유가 있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이유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유럽 가톨릭 교회의 심각한 분열과,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의 참혹한 수난이 그것이다. 첫 번째 이유: 교회의 분열과 개혁의 위기 16세기 초 가톨릭 교회는 극도의 타락을 겪고 있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증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벌부(免罰符)를 판매했다. 성직자의 직위가 돈으로 거래되고, 구원이 믿음이 아니라 헌금으로 얻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신앙이 왜곡되었다. 성경의 권위보다 교황과 교회의 전통이 우선시되었고, 고위 성직자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부조리가 교회 전체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이에 맞서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 조 반박문'을 게시하며 면벌부 판매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초기 복음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결국 그리스도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갈라지는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하늘에서 이 분열을 지켜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는가. 루터의 반발로부터 꼭 14년 뒤인 1531년, 성모님은 지구 반대편에 발현하셨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 번째 이유: 아메리카 원주민의 참혹한 수난 같은 시기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또 다른 비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1519년 배 11척, 병사 500여 명을 이끌고 아즈텍 문명을 침략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단 168명의 병사로 8만 명의 잉카 군대를 무너뜨렸다. 총과 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이었다. 히스파니올라 섬(오늘날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의 인구 800만 명은 콜럼버스 도착 후 불과 30여 년 만에 거의 전멸했고, 아즈텍과 잉카 문명에도 천연두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정복자들의 목적은 오직 황금이었다. 1503년부터 1660년 사이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약탈해 간 은만 해도 1만 6000톤, 금은 200톤에 이른다. 잉카의 왕 아타우알파는 가로 7m, 세로 5m, 높이 2.4m의 방을 가득 채울 황금과 그 두 배에 달하는 은을 몸값으로 바쳤지만, 피사로는 몸값을 받고도 그를 처형해 버렸다. 위로가 절실했던 이 대륙에 성모님은 발현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아즈텍 문명의 인신 공양, 그 참혹한 실상 성모님 발현 당시 멕시코를 지배하던 아즈텍 문명에는 충격적인 악습이 존재했다. 바로 인신 공양(人身供養)이었다. 아즈텍인들은 태양신·달신·전쟁신 등의 우상에게 사람의 심장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흑요석 칼로 살아 있는 사람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즈텍 문명에서 한 해 동안 희생된 사람의 수는 무려 5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를 환산하면 하루에 약 150명, 10분에 한 명꼴이다. 아즈텍 제국의 신전을 처음 세운 것을 기념하는 의식에서는 한꺼번에 2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단순한 종교의식을 넘어, 고원 지대에서 가축을 기르기 어려웠던 환경에서 단백질을 얻기 위한 식인 풍습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성모님은 이 참혹한 현실을 눈 뜨고 보실 수 없으셨다. 결국 성모님께서 1531년 발현하신 뒤 100년, 200년에 걸쳐 사람의 심장을 꺼내 알지도 못하는 태양신에게 바쳤던 악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후안 디에고에게 전하신 말씀 1531년 12월 9일 새벽, 테페약 언덕을 넘어 아침 미사를 드리러 가던 평범한 원주민 후안 디에고(Juan Diego) 앞에 성모님이 발현하셨다. 성모님의 말씀은 이러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믿으며, 내 도움을 요청하는 지상의 모든 백성의 자비로운 어머니이다. 나는 그들의 비탄의 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나의 사랑과 연민, 구원 그리고 보호를 증거로 제시하는 표시로 내가 발현한 이곳에 성당을 세우길 바라고 있다. 그러니 너는 멕시코 주교관에 가서 이곳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우는 것이 내 소망임을 전하도록 하여라." 성모님께서 스스로를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머니"라 칭하신 것은 가톨릭 신앙의 핵심을 드러낸다. 그리스어로 '테오토코스(Theotokos)', 즉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서, 마리아는 그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로 공경받는다. 성모님의 발현을 증명하는 기적으로, 후안 디에고의 틸마(겉옷)에 성모님의 형상이 새겨졌다. 지금도 과달루페 대성당에 보존된 이 이미지는 과학적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기적으로 남아 있으며, 매년 수천만 명의 순례객이 이곳을 찾는다. 성모 발현을 목격한 성 후안 디에고와 과달루페 성모를 그린 그림. OSV 발현의 역사적 의미와 이후의 흐름 성모님은 과달루페 발현 이후에도 인류 역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꾸준히 나타나셨다.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는 14세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하시어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 라고 밝히시고 치유의 샘을 솟아나게 하셨다. 하루 12만 리터가 솟아나는 이 샘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기적을 이루고 있다.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는 세 어린이에게 발현하시어 죄인들의 회개와 묵주기도, 러시아의 봉헌을 요청하셨고, 이 청원은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이루어졌다.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의 기운으로 1500년을 이어온 교회가, 이제는 성모님의 발현을 통해 지난 500년간 새롭게 쇄신돼 왔다. 과달루페 발현은 그 대장정의 시작점이었다. 순례자의 눈으로 바라본 과달루페 2026년 2월, 200명의 순례단과 함께 네 번째로 멕시코 과달루페를 순례하며 이 발현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달았다. 태양신과 달신의 피라미드를 오르고, 아즈텍 문명의 시장 흔적과 고추·카카오의 원산지를 탐방하며, 발현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느님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온몸으로 느꼈다. 성모님의 과달루페 발현은 단순히 멕시코 원주민만을 위한 사건이 아니었다. 교회의 분열로 신음하던 유럽, 정복과 전염병으로 쓰러져 가던 아메리카 원주민, 피의 제사로 얼룩진 문명 속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하기 위해 반드시 오셔야만 했다. 그 발현은 2000년 인류 구원 역사의 큰 그림 속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섭리였다. 📍 방송일시 : 첫 방송 5월 2일(토) 오전 7시 50분, 매주 토 오전 7시 50분 / 일 오후 3시·오후 10시 10분 수원교구 성필립보생태관장 황창연 신부가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cpbc 5월 성모특강 화면 캡처 cpbc2026.05.15

농부망서[월간 꿈 CUM] 철학의 길 _ 동양 고전의 지혜와 성경 (5) 중국 우언(寓言, 풍자적이거나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짧은 길이의 이야기)에 ‘농부망서’(農夫亡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농부가 호미를 잃어버리다’는 말인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농부가 밭에서 일을 마친 후 빈손으로 돌아오자 남편을 본 아내가 호미는 어디에 두었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아주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잃어버린 게 아니고 밭에 두고 왔소(田裏).” 화가 난 아내가 팔을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작은 소리로 말해요. 누가 듣고 가져가면 어떻게 해요?” 아내는 남편에게 어서 돌아가 호미를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밭으로 간 농부는 호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달려와 농부가 아주 작은 소리로 아내의 귀에 대고 말합니다. “없어졌소.”(不見了) - 「雅俗同觀」 농부가 밭일을 하다 호미를 잃어버리는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처신이 문제입니다. 위 이야기는 작은 소리로 말해야 할 때 큰 소리로 말하고, 큰 소리로 말해야 할 때 작은 소리로 말하는, 사리분별을 못하는 농부의 한심한 이야기입니다. 관찰자 입장으로 이야기 밖에서 이야기를 바라보면 멍청한 농부가 보입니다. 나는 그 정도 멍청함을 눈치채는 현명한 사람 같아 피식 웃고 맙니다. 그런데 내가 농부가 되어 들어가면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은 내가 왜 이렇게 한심해 보일까요? 우리 사회에서 없어진 호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수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무엇인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희망도 잃어버렸습니다. 일어날 힘도 잃어버렸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자살자가 늘어나고, 직장을 잃어가고, 자존감도 잃어가고, 배려도 잃어버렸습니다. 빈부차는 더욱 심해져 주머니도 비어가고, 집도 잃어갑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호미를 두고 우리의 목소리는 어떤가요? 귓속말로 작은 소리를 내야 할 때 큰소리로 내리지르고, 큰소리로 외쳐야 할 때 귀에 대고 작은 소리를 내는 사이 호미가 없어졌습니다. 언론도, 종교도, 지식인도, 예술인도, 시인도, 노동자도, 학생도 지금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우선 나부터도 귀에 대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없어졌소”(不見了) 하고 있어 한심한 농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조용해야 할 사람은 큰소리로 “밭에 두고 왔소”라고 동네방네 잘났다며 고성을 내고, 크게 세상에 외쳐야 할 이는 입술을 물고 소심하게 벽 뒤에서 “없어졌소”라고 역할 분담하는 사이 누군가 훔쳐 가 우리 사회는 호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우선 나 자신이 현명한 관찰자가 되려 할뿐, 멍청한 당사자라는 것에 부끄럽습니다. 중국 당나라 2대 황제였던 태종의 이름은 이세민이었습니다. 이름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평안케 하라’는 의미로 지어졌습니다. 이름에 걸맞은 업적을 남기기 위해 그는 3개의 거울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외모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청동거울’이요, 둘째는 역사의 흥망사를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역사의 거울’이며, 셋째는 옆에서 직언해줄 ‘충신 거울’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거울’과 ‘충신 거울’이 없어진 채 ‘청동거울’만 남아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큰소리치는 그 자신의 외모를 위한 청동거울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아진 ‘역사의 거울’과 ‘충신 거울’이 다시 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없 어 졌 소!! 글 _ 손은석 신부 (마르코, 대전교구 산성동본당 주임) 2006년 사제수품.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전담사제를 지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전공)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소소하게 살다 소리 없이 죽고 싶은 사람 중 하나. 그러나 소리 없는 성령은 꼭 알아주시길 바라는 욕심쟁이다. cpbc2024.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