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문화산책]<6>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 미술(2)](//cpbc.co.kr/CMS/newspaper/2013/02/rc/442036_1.2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묵주기도와 함께하는 가톨릭 미술(2)인류 구원 위한 수난의 길 암시된 아기 예수의 탄생 예수 탄생을 주제로 한 성화는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동방박사의 경배'와 루카복음이 전하는 '목자들의 경배'를 기초로 한다.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동방 점성술사들이 메시아 도래를 알리는 별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찾아 예수께 경배하며 선물을 바쳤다. 반면에 루카복음은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예수 탄생을 알리는 천사의 부름을 받은 양치기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했다고 전하지만, 동방박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로렌초 로토(Lorenz o Lotto, 1480-1556) 작품인 '탄생'에는 목자도, 동방박사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소 작은 작품인 '탄생'은 가정에 봉헌된 작품으로, 신비로운 예수 탄생은 상당히 가정적 분위기로 형상화된다. 작품 : '탄생', 로렌초 로토 작, 46x36㎝,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 1523년.● 환희의 신비 1단 :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묵상 단어 : 탄생과 죽음(십자가), 하늘과 땅, 사랑 #의로운 사람 요셉 팔을 쭉 뻗은 아기 예수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마리아와 요셉은 무릎을 꿇고 있다. 이콘이나 중세 전통 도상에서 요셉은 보통 아기 예수와 마리아가 있는 중심부에서 따로 떨어져 있다. 수심에 찬 표정으로 요셉은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앉아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장차 아내와 아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로토는 웃음을 띤 얼굴로 아기 곁에서 기도하는 요셉을 그린다. 기쁨과 감동, 그리고 찬미가 있다. 요셉의 침묵과 합장한 두 손은 자신이 마리아의 동정성의 증인이자 하느님과 함께 예수의 아버지임을 드러내는 듯하다. 마태오복음은 단지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했는데, 그들이 함께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의 인도로 예수를 잉태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은 그래서 마리아를 신부로 맞아들일 생각을 굳힌다(마태 1,19-25 참조). #요람에 누운 아들과 교감하는 어머니 마리아는 눈과 입술을 통해 손을 치켜들고 작은 발을 사랑스럽게 구르는 아기 예수를 바라본다. 갓 태어난 아기의 자연스러운 행동처럼 아기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안기고 싶은 듯하다. 어머니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다정다감한 교감이 느껴진다. 가슴을 숙인 채 마리아의 엇잡은 팔에는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이 드러난다. 아기를 향한 마리아의 자세와 시선은 주님의 종으로서 겸손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신비를 드러낸다. 짚이 깔린 바구니에는 나신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놓여 있다. 바닥, 땅! 이는 이 세상에 바로 오심을 뜻한다. 땅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자궁, 곧 어머니를 상징한다. 육화돼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모습은 초라한 바구니 요람에서 드러난다(루카 2,11-12 참조). 전통적 비잔틴 도상에서 요람은 부활사건처럼 열린 무덤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사각형에 단단한 형태로 표현되기도 한다. 로토는 바구니 아래에 입구를 동여맨 작은 주머니와 작은 통을 그려 앞으로 전개될 사건을 암시한다. 빵과 물! 여행을 시작한 누군가가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물건이다. 이는 곧바로 전개될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을 예고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오두막 안에는 일련의 '성스런 대화'의 요소가 빛을 통해 부분적으로 조명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시작으로 천사들과 사다리, 산비둘기, 그리고 멀리서 잘 보이지 않는 나귀와 소,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쥐덫(혹은 대패) 등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이미지는 곧바로 눈에 띈다. '탄생'에 '죽음'이 왜 등장할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탄생하고, 골고타에서 죽음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작은 천사들과 사다리 하늘에는 5선이 보이는 커다란 악보를 손에 든 세 천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노래한다. 로토는 앞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탄생을 알린 것처럼, 하늘의 힘과 축복을 천사들의 찬미로 드러낸다. 나신의 천사들은 마치 아기 예수처럼 작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관계로 인생에 중요한 사랑을 채우려 한다. 왜 오두막에 사다리가 세워져 있을까? 농촌 환경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로토는 이 사다리 역시 성경과 연결한다. 브에르 세바에서 하란으로 여행하던 중 하늘과 땅이 연결된 층계를 본 요셉의 꿈을 예수 탄생에 연결시켜 사다리를 그린다(창세 28,13 참조). 교부학자들에게 사다리는 천사들을 통한 하느님 섭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사다리는 하늘과 땅을 결합한 그리스도 강생을 알리는 상징이기도 하다. #산비둘기 한 쌍 집 입구 나무 위에는 산비둘기 한 쌍이 앉아 있다. 로토는 비둘기 한 쌍에 예리한 빛의 효과를 줘 회화적으로 강조한다. 이는 단순히 장식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세 그리스도교의 상징을 나타낸 것이다. 산비둘기는 성스러운 신부와 관계된 교회의 표징이다. 또한 아기 예수의 정결례 당시 제단에 드려야 할 재물의 규정에 따라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루카 2,24)를 바쳤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쥐덫(혹은 대패)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로토의 서명이 새겨진 물건은 무엇일까? 몇몇 비평가는 목수였던 요셉의 직업을 상징하는 대패로, 다른 한편으로는 쥐덫으로 본다. 쥐덫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에 관한 메시지를 강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쥐덫은 대각선으로 연결된 지점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관계한다. 쥐덫과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이미지 사이에 아기 예수가 있다. 도상에서 쥐덫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쥐덫은 성 아우구스티노가 "예수의 십자가는 악마를 잡는 쥐덫과 같다. 악마를 유혹하기 위해 쥐덫을 달아놓은 미끼는 다름아닌 예수의 죽음이었다"는 말을 의미한다. 로토는 예수께서 수난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신학적 교리를 자신의 작품에 표현하고 있다. 작품 :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틴토레토 작, 240x146㎝, 이탈리아 볼로냐국립회화관, 1549년께.● 환희의 신비 2단 :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묵상 단어 : 복된 여인, 기쁨, 만남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기를 잉태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친척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한다.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대로 엘리사벳은 임신한 지 6개월째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1-45) 곧 마리아의 방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게 된다. 엘리사벳은 문 앞에서 기쁨으로 마리아를 맞이한다. 단순한 둘만의 만남이 아니라 예언자 요한 세례자와 구원자이신 예수의 만남이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전원에는 성령으로 위안과 평화를 얻은 마리아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퇴사자22013.02.26
![[세계 물 협력의 해] 서울 환경사목위ㆍ평화신문 공동기획- 목마른 하느님](//cpbc.co.kr/CMS/newspaper/2013/05/rc/455648_1.0_titleImage_1.jpg)
[세계 물 협력의 해] 서울 환경사목위ㆍ평화신문 공동기획- 목마른 하느님3. 물에서 배운다 / 4대강 여주 이포보 일대 자연훼손 현장 탐방흉물스럽게 남한강을 가로막고 있는 이포보. 보가 강물을 가로막아 물이 썩기 시작했다.<연재 순서> 1. 물은 생명이다2. 생물학적 관점으로 본 물3. 물에서 배운다4. 동양사상에서 바라보는 물5. 물은 모두의 것이다 "이건 강이 아니라 썩은 물이에요. 맑디맑던 한강 상류가 4대강 사업으로 썩고 있어요." 5월 22일 경기도 여주군 남한강 이포보에서 만난 여주환경운동연합 전 간사 안은화(41)씨는 시궁창처럼 변해버린 남한강물을 바라보며 가슴을 쳤다. 8년 전부터 여주에서 살아온 그는 "4대강 공사 전 이곳은 주말마다 온 가족이 강가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행복한 주말을 보내던 곳"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굴착기가 강바닥을 긁어낼 때마다 내 가슴이 파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며 안타까워했다. 그의 안내로 여주군 남한강 일대를 둘러봤다. 남한강은 더 이상 '생명을 품은 강' 모습이 아니었다. #흉물스런 이포보와 그 일대 취재 차량이 이포보에 도착하자, 눈에 들어온 것은 남한강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괴기한 모양의 건축물이다. 외계인이 타고 왔을 법한 둥근 우주선 7개가 다리 위에 착륙한 모습의 이상한 구조물이 강을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이포보다. 이포보는 2011년 10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4대강 공사 완공 기념행사를 열었던 곳이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대한민국의 4대강은 생태계를 더욱 보강하고 환경을 살리는 강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1년 7개월여가 지난 현재, 이포보를 흐르는 강물은 심한 냄새와 부유물질로 강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안씨는 "강은 흘러야 하고, 강바닥엔 모래가 있어야 그 모래가 오염물질을 가라앉히고 물을 정화한다"며 "모래를 죄다 긁어내는 바람에 남한강은 점점 썩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설명을 마치고 물속에 손을 넣었다. 심하게 부패한 수생식물과 진흙과 같은 오니(汚泥)들이 잔뜩 딸려 올라왔다. 시궁창에서나 맡을 수 있는 역한 냄새도 났다. 이포보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가 물 흐름을 막고 있어 유속은 제로(0)에 가까웠다. 보 위에서 내려다본 강물에는 이따금 쓰레기가 떠 있었고, 희뿌연 더러운 물거품이 보 밑에서 뭉게구름처럼 생겨나고 있었다. 차를 돌려 이포보 오토캠핑장에 갔다. 이곳도 역한 강물 냄새가 나기는 마찬가지다. 새롭게 조성된 이포보 오토캠핑장에는 강변 대신 강에서 멀리 떨어진 주차장 부근 야영장에 텐트가 처져 있었다. 강변에서 낭만적 캠핑을 기대했던 캠핑족들이 냄새 때문에 강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는 모습이다. 인근 대로에 산더미처럼 쌓인 골재도 문젯거리다. 강바닥에서 퍼올린 자갈과 모래가 4년째 흉물처럼 방치돼 있다. 여주군 일대에는 높이 10m 규모의 골재산이 17개나 있다. 15톤 덤프트럭 100만 대 분량이다. 골재에서도 역한 냄새가 났다. 강에 사는 조개가 썩으면서 나는 냄새다.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려 인근 농작물에도 피해를 준다. 여주군은 매년 골재 관리비용으로 50억 원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200억 원이 넘는 세금이 골재 관리비로 사라졌다. #여주대교와 신륵사 일대 여주대교에서 신륵사가 바라보이는 강 맞은편. 영월근린공원에서 강변유원지 방향 일대를 걸으며 수질을 살폈다. 강변은 충격 그 자체였다. 조그마한 선착장에 들어서자 물 흐름이 끊긴 곳에서는 각종 부유물과 쓰레기가 가득 차 있다. 팔뚝만한 누치 사체가 반쯤 썩어 물 위에 떠있었고, 파리떼가 들끓었다. 나뭇가지를 주워 강물을 저으니, 시커먼 진흙이 뿌연 강을 더 뿌옇게 만들었다. 가는 곳마다 악취로 숨을 쉬기 어렵다. 큰 자갈과 모래마다 부유물이 가득 붙어 썩고 있었고, 4대강 공사 때 버려진 폐건축자재도 강바닥과 모래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강을 이 지경으로 만들려고 수십 조 혈세를 쏟아 부었단 말인가'하고 화가 치밀었다. 고요히 수천수만 년을 흘러온 강에 손을 대 하느님 창조질서를 짓밟은 대가는 처참한 사체로 발견된 누치와 조개, 물고기들이 온몸을 내던져 설명해주고 있었다. 기자와 함께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안씨는 "그래도 희망을 품자"고 했다. 그는 "강은 창조된 그대로 흐르도록 두면 언젠가는 원래 모습을 되찾지 않겠느냐"며 "4대강 공사 때도 손대지 않고 남겨둔 아름드리 나무가 그래도 희망의 징표"라고 씁쓸해했다. 여주군 일대 남한강은 "강에 있는 물고기들은 죽고 강은 악취를 풍겨, 이집트인들이 강에서 물을 퍼마시지 못할 것이다"(탈출 7,18)는 성경 구절이 실현되기라도 한 것처럼 악취를 풍기며 썩고 있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cpbc2013.05.29
![[공동체]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 진출 75주년 감사미사와 대축제 통해 '프란치스코처럼 작고 겸손하게' 살겠다 다짐](//cpbc.co.kr/CMS/newspaper/2012/10/rc/428085_1.0_titleImage_1.jpg)
[공동체]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 진출 75주년 감사미사와 대축제 통해 '프란치스코처럼 작고 겸손하게' 살겠다 다짐 올해 한국 진출 75주년 '은총의 해'를 맞은 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 국가형제회는 7일 '프란치스코처럼 작고 겸손하게' 복음적 삶을 살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 국가형제회(봉사자 이현주)는 이날 대전시 부사동 한밭종합경기장 내 충무체육관에서 75주년 감사미사와 대축제를 갖고, 회개와 쇄신을 통해 진정한 프란치스칸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감사미사는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와 주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 작은 형제회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카푸친 작은 형제회 등 1회 프란치스코회 사제단 60여 명, 광주ㆍ인천ㆍ제주 교구 사제회원 5명 공동집전으로 전국 13개 지구, 138개 단위 형제회원 6500명이 참례한 가운데 봉헌됐다. '회개와 쇄신'을 주제로 한 2부 감사미사 봉헌 시간에 국가형제회는 빵과 포도주, 한국인으로는 첫 재속회원인 장면(요한) 전 총리와 첫 사제회원인 오기선 신부 등 2명의 인물전을 봉헌하고, 지구형제회는 지난 3년간 필사한 성경과 지구 쇄신운동, 헌혈증서, 장기 및 시신 기증 봉헌서, 특산물 등을 봉헌했다. 이어 기념식에서 서약생활 50년 금경축을 넘긴 허순덕(데레사, 81)씨 등 재속회원 24명과 사제회원인 광주대교구 김성용 신부 등이 기념패를 받고, 75주년 기념 체험수기 입상자 3명도 상을 받았다. 이에 앞서 '회상과 만남'을 주제로 한 미사 전 행사에서 회원들은 75주년 기도와 함께 6ㆍ25전쟁 중 순교한 착한 목자 이광재 신부 시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바치고 동영상을 통해 75년 역사를 되돌아본 뒤 서울지구 형제회에서 준비한 퍼포먼스를 관람했다. 또 감사미사에 이어 '일치와 기쁨'을 주제로 75주년 축제를 열어 지구별로 준비한 성가와 노래, 율동, 연극, 댄스 등을 즐겼다. 이현주(가타리나) 국가봉사자는 이날 "75주년을 새로운 시발점으로 삼아 철저한 쇄신을 통해 교회와 사회에서 마음을 열고 기뻐하며 프란치스코처럼 작고 겸손하게 나아가자"고 말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 국가형제회원들이 제각기 팻말을 들고 '일치와 기쁨'을 주제로 한 대축제를 마치며 한국 진출 75주년을 자축하고 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 진출 75주년 기념행사 이모저모 7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거행된 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 진출 75주년 감사미사는 지나온 75년 발자취를 돌아보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다가올 100주년을 내다보며 '작은 프란치스코'로 살겠다는 서약의 대축제였다. "작은 프란치스코 다짐 ○…감사미사와 대축제에 앞서 지난 3년간 성경 필사와 희생, 봉사를 통해 내적 쇄신을 이뤄온 재속 프란치스칸들은 첫 전국 행사에 형제적 기쁨을 나누며 75주년 기도문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겸손하고 단순하게 형제애가 충만한 하느님의 종으로 살아가고, 세상과 형제회 안에서 섬김의 삶을 살아나감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하느님 자애와 평화를 전하기를" 기도했다. 75주년 감사미사의 절정은 지난 3년간 내적 쇄신을 지향하며 정성스럽게 필사한 성경과 한국인 재속 프란치스칸 2명의 인물전, 지구 형제회 쇄신운동, 헌혈증서(250매), 장기(350명) 및 시신(46명) 기증 봉헌서, 특산물 등 봉헌 예식이었다. 또 기념식을 통해 재속회원 24명과 사제회원 1명 등 총 25명에게 지난 50년간 서약생활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기념패를 전달했다. 또 이날 감사미사 봉헌금 4000여만 원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뜻을 기려 설립된 재단법인 바보의 나눔에 전액 기증키로 했다. 행사장 2층 복도에선 지구별로 지나온 역사와 발자취를 보여주는 유물이 전시돼 재속 프란치스칸들 발길을 잡아끌었다. 미사를 주례한 유흥식 주교는 강론에서 "하느님께서 죄인인 인간의 몸을 취한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의 신비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이해하는 열쇳말"이라며 '작은 프란치스코'로 성실히 살아가기를 전 회원들에게 당부했다.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는 축사를 통해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보편적 형제애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 프란치스칸의 삶을 충실히 살아 갈 것"을 주문했다. "일치와 기쁨 나눔 대축제" ○…1부 미사전 행사, 2부 감사미사에 이은 3부 대축제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원들은 물론 맨발의 재속 가르멜회 등 타 수도회 3회원들까지 한데 어울려 일치와 기쁨을 나눈 자리였다. 지구 형제회원들은 제각기 특색 있는 노래와 율동, 연극, 퍼포먼스, 풍자극 등을 통해 폭소와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 1회 수도회인 작은 형제회와 3회 수도회인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ㆍ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회원들도 노래와 율동 등으로 재속회원들과 기쁨을 함께했다. 올해 서약생활 51주년을 맞은 전주 전동형제회 허순덕(아기 예수의 데레사)씨는 "형제회를 통해 24시간을 하느님께 향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게 돼 정말 행복하고 앞으로도 형제자매들과 함께 '섬기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작은 형제회 한국관구장 기경호 신부는 "하느님께선 지난 75년간 한 순간도 회원들에게서 사랑의 눈길을 떼지 않으셨기에 지난 75년은 은총의 75년이자 사랑의 75년이었다"며 "앞으로도 75년 발자취를 돌아보며 진정한 회개를 통한 쇄신과 사랑의 역사를 써 나가기 바란다"고 말했다. 1937년 12월 서울 백동(현 혜화동성당)에서 첫 착의식(입회식)이 거행되고 이듬해 1월 첫 형제회로 서울형제회가 설립됨으로써 시작된 국내 재속 3회의 맏형 격인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현재 13개 지구에 회원 1만3000여 명을 둔 단체로 성장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오세택2012.10.09
![[아! 어쩌나] 199. 성인이란 어떤 사람인가요](//cpbc.co.kr/CMS/newspaper/2013/04/rc/451018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199. 성인이란 어떤 사람인가요 Q. 새내기 신자입니다. 대부님이 "천주교인들은 성인을 본받아야 한다"며 성인전 몇 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그분들의 삶이 존경스럽고 부럽기는 합니다만, 부담스럽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내가 과연 성인들처럼 완덕의 삶을 살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성인전을 읽을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지기만 합니다. 성인이 돼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구원에 대한 자신감도 점점 약해져 가고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A. 성인전은 일반 사회에서는 위인전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나침반이 배의 길잡이가 돼주듯, 위인전은 인생의 목표적 삶을 보여주지요. 성인전도 마찬가지로 구체적 신앙생활의 목표를 보여줍니다. 위인들처럼 성인을 본받으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책이 성인전입니다. 그런데 교육계에서는 위인전이 아동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지만, 부작용도 있다는 사실을 공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자아는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 자아와 지금의 나인 현실적 자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위인전은 이상적 자아의 자리를 갖는 것이지요. 지금의 자신을 혐오하고 지나치게 편향된 마음으로 이상적 자아만 추구하면 정신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려는 성인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전이 지나치게 성인들을 이상화한 내용만으로 구성된 경우 즉, 성인들에게 인간적 하자(瑕疵)가 있음을 기록하지 않은 성인전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적 열등감'을 갖게 합니다. 심지어 비현실적 신앙생활로 이끄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인들을 인격적 결함이 없는 완전한 사람, 천사처럼 영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이 아닐뿐더러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우리에게 지나친 심적 부담을 안겨줍니다. 또 자칫 하느님을 멀리하고 냉소적 신앙인이 되게 할 우려가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성인들의 인간적 면도 봐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주님은 완전한 인격체로 묘사돼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인간적 면모를 자주 보여주십니다. 성전에서 환전상이 장사를 한다고 화를 내시면서 상을 둘러엎으십니다. 그리고 수난의 길을 가시기 전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새 고뇌에 빠지십니다. 또 부활하신 후에는 제일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를 만나시는 등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스캔들을 만드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주님에게서 그분이 사랑의 하느님이심을 인식하고 마음이 가까이 감을 더 깊이 느낍니다. 따라서 형제님이 성인이 아무 결함 없는 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형제님 생각은 주님이 성인들보다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루카복음 7장 36절 이하를 보면, 주님 발에 향유를 붓는 여인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이 말씀은 진정한 성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공개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미성숙하며, 이성적이기보다는 동물적 감정에 쉽게 휩쓸리는 존재이기에 적지 않은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성인들은 자신의 그런 허물을 인정하고, 그 허물을 고치기 위해 평생 노력한 분들입니다. 즉,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일반인들과 다른 점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잘난 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죄인임에도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용서받으며 살아온 존재란 것을 인식하고, 참회하는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자신이 용서를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아 팽창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은근히 단죄하는 신앙적 패륜아가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여인이 주님 발에 향유를 부었을 때, '주님이 저 여자가 죄인임을 모르시는가'하고 불편한 속내를 드러낸 사람들, 그들이 바로 용서받을 정도로 죄짓지 않았다는 근거 없는 자부심을 품고 사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많은 용서를 받으면서 살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마음이 늘 고마움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적게 용서받고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용서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늘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 성찰을 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성남 신부 (서울대교구 영성생활상담소장) 상담전화: 02-776-8405 cpbc2013.04.30
![[나의 묵주이야기] 36. 어두운 길 밝혀준 '손전등 불빛'](//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6042_1.0_titleImage_1.jpg)
[나의 묵주이야기] 36. 어두운 길 밝혀준 '손전등 불빛' 박일원 십자가의 성 요한 (호주 시드니 와이타라본당,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합니다」 저자) 내가 가톨릭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참 암담하고 심란한 시절이었다. 두 살 때 걸린 소아마비로 어머니 등에 업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에는 친구와 친척 등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중ㆍ고등학교를 거친 후 대학까지 마쳤지만 이제는 뭘 해야 하나, 그리고 내 짝은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나에 대한 온갖 궁리 때문에 잠 못 이루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명동성당에 이르는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며 제발 예쁜 짝 하나를 보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나는 결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원이 이뤄져 더 기도할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 낯선 호주에 이민 와 살게 되면서 의지할 곳이 필요해 성당을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정을 겸해 시드니 남서쪽 잼버루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까지 찾아갔다. 깊고 깊은 산골이라 사람도, 나무도, 공기도, 물도, 구름도, 생각도 모든 게 다 고여 있는 듯했다. 수도원 입구에는 피정이나 묵상하러 오는 외부인을 위한 오두막이 몇 채 있고,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수녀님들이 거처하는 숙소와, 새벽이면 인근 마을 주민이 찾아와 미사를 봉헌하는 작은 성당 하나가 있다.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 별채에서 이틀 동안 머물며 성경을 읽고 묵상한 뒤 시드니로 돌아오는 날 아침이었다. 수녀원에 딸린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수녀님 한 분이 다가오시더니 혹시 시드니까지 가는 거라면 '렌드윅'이라는 동네에 사는 여성 신자 한 분을 데려다 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아내는 쾌히 승낙했지만 나는 그곳을 들르면 돌아가야 했기에,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들어 짜증이 났다. 게다가 그 여성은 우리와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몸이 피곤해 뒷자리에 눕겠다고 말하는 등 다소 예의가 없어 보였다. 렌드윅에 거의 다 와서 사는 집이 어디냐고 묻자, 그 여성은 그냥 로터리 근처에 세워주면 된다고 대답했다. 아내가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사는 곳의 정확한 위치를 묻자 그녀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 병원이라고 했다. 그제야 아내와 나는 그 여성이 병원 장기입원 환자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뒷좌석에 자꾸 누우려고 했던 이유도 알게 됐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던 거였다. 그녀는 병원 입구에서 내리며 손가방에서 묵주 하나를 꺼내 작은 선물이라며 건네줬다. 순간 나 자신이 무척 추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전날 수녀원에서 새벽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오두막 숙소를 나섰을 때 일이 떠올랐다. 캄캄한 새벽,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아내와 나는 우산에만 신경을 썼지 어두운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는 전혀 생각지 못해 손전등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래서 성당까지 요리조리 물웅덩이를 피해 가며 오솔길을 가고 있는데, 뒤에서 차박차박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정 거리를 두고 누군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앞쪽으로 계속 손전등 불빛을 비춰줬다. 워낙 캄캄해서 뒤를 돌아봐도 그가 누군지 볼 수 없었지만, 그 오렌지 불빛은 우리가 돌부리나 물웅덩이를 피해 갈 수 있도록 살펴줬다. 나는 그 여성분이 전해준 묵주를 볼 때마다 그동안 내가 이 묵주를 손에 쥐고 남을 위해 기도했던 적이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본다. 부끄럽게도 인도의 잠언시 한 구절이 떠오르는 비 내리는 저녁이다. "나 아닌 것들을 위해/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아무리 험한 날이 닥쳐오더라도/스스로 험해지지 않는다//갈라지면서도/도끼날을 향기롭게 하는/전단향나무처럼" cpbc2013.04.02

신앙생활, 하느님 나라보다 '마음의 평화' 중시▨심층분석 / 당신은 왜 성당에 다니십니까? <上>가톨릭 신자들은 신앙생활에서 영원한 삶이나 구원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신자들이 한 야외미사에서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하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설문조사 결과에서 보듯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평화로만 치자면 요즘 명상수련센터나 요가교실에서도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의 주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날이 갈수록 내면화, 개인화하는 추세를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고, 신앙생활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두 차례에 걸쳐 살펴봅니다."요즘 물가는 오르는데 집값은 떨어지고, 아들은 취직이 안 돼 걱정이고…. 여러 가지로 걱정할 게 많은데, 아무래도 성당 가서 기도하면 그런 불안감이 좀 덜하죠. 신앙생활이 마음에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50대 여성 신자 박 마리아(51)씨는 성당에 나가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신자가 적지 않을 것 같다. 최근 서울대교구 대치동본당(주임 김철호 신부)이 신자들 신앙생활 설문조사 결과를 기초로 작성한 사목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신자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신앙생활보다 '마음의 평화'를 꼽았다. 응답자들은 사제가 강론시간에도 복음 자체에 대한 해설(22.5%)이나 교리ㆍ교회에 대한 이해(6.9%)를 돕기보다는 마음에 위로와 평화(37.7%)를 주는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이러한 경향은 나이를 불문한다.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청년부가 지난해 5월 19~39살 본당 신자 1만 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청년신자의 신앙생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청년들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마음이 평안한 것(38.7%)'과 '가정생활이 즐거운 것(30.6%)'을 꼽았다. 신앙생활이 가장 중요하다고 답한 이는 16.5%밖에 되지 않았다. 또 응답자들은 신앙이 자신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61.9%)'는 답을 골랐다. 두 조사 결과는 상당수 신자들이 마음이 평화로운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신앙생활 목표를 마음의 안정을 얻는 데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원한 삶이나 구원같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는 한국인만의 종교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종교를 가진 한국인에게 두루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보는 견해다. 송용민(인천가톨릭대 교수) 신부는 "한국인들은 어떤 특정한 교리나 종교적 진리에 대한 관심과 열정보다 마음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실천적 지침에 대한 갈망이 더 크다"며 "그렇기에 교리나 성경공부보다는 영성적 삶에 관심이 많고, 때로 종교가 지나치게 윤리적 지침을 강요할 때 부담을 느끼거나, 종교생활에서 이탈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원인은 사회적 불안이다. 물질만능주의와 양극화 심화, 최근의 경제난과 취업난 때문에 많은 이들이 불안감을 겪고 있고, 이를 해소할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택한다는 것이다. 서울대교구 조규만 주교는 "물질적 풍요가 공평하게 분배되지 못함으로써 사람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피해의식이 심해지고 있다"며 "이러한 심리적 박탈감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거대한 집단(가톨릭)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질책할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을 보다 성숙한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조 주교는 "어느 종교든지 구복(求福)적 차원을 내포하고 있는 만큼 이러한 현세적, 구복적 성격을 무시하면 안 된다"며 "다만 신자들의 이러한 동기를 점차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 교회와 사제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은아 기자 euna@pbc.co.krcpbc2013.04.02
-말씀과 놀이](//cpbc.co.kr/CMS/newspaper/2012/03/rc/408238_1.1_titleImage_1.jpg)
[신앙의 재발견](7)-말씀과 놀이말씀 통해 배려 배우고 기쁨 느끼도록홍광철 신부(대전교구 합덕본당 주임, 합덕유스호스텔 관장)일반적으로 '성경'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공부'다. 공부와 놀이는 쉽게 연결되지 않고, 성경말씀과 놀이는 더욱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놀이가 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말씀과 놀이'다.'말씀과 놀이'는 현재 대전 합덕유스호스텔에서 시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청소년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친구들과 나누고, 말씀으로 기도하기를 통해 복음의 핵심으로 들어가 말씀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게 목표다. 주일학교는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이 위로받고, 신앙 안에서 한 주 동안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말씀의 씨를 받아 간직한 어린 신앙인들이 자신의 씨를 심고 관리하며 열매를 맺어 나가도록 도와줘야 한다. 학교폭력과 집단 따돌림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요즘, 전국 시ㆍ군 교육청이 주일학교를 강조하는 이유는 인성교육의 현장으로서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각 본당 주일학교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주일학교 교리의 근본 문제는 반복학습과 말씀교육의 부재다. 신앙도 생활 속에서 좋은 습관으로 자리잡도록 반복해서 가르쳐야 한다. 교리를 통해 성경을 가르치기보다 성경을 통해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단편적으로 성경을 배우는 게 아니라, 말씀이 삶의 지표가 되고 기쁨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생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연습을 하게 된다. 생각이 복음적으로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당연히 습관과 성품이 바뀐다. 습관과 성품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생활이 바뀌고, 결국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 생각이 바뀌려면 귀가 따갑도록 성경말씀을 듣고 읽을 수 있는 기회와, 성경말씀을 가지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복음말씀을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통해 학생들 생각은 깊어지고 이해력은 커진다. 나눔을 하면서 학생들은 서로 생각의 다름을 체험할 수 있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배려'를 배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소외되는 학생들이 줄어들게 되고, 각자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같은 소통의 연습을 통해 또래 친구들의 고민도 들어주고 상담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키울 수 있다. 구역 소공동체에서 실시하는 복음 나누기가 성공을 거두기 어려운 것은 어려서부터 말씀을 읽고 나누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적 생각을 바꿀 수 있는 훌륭한 독서 교육인 '말씀과 놀이'를 어려서부터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정리=박정연 기자 cecil@pbc.co.kr ※평화방송 TV '신앙의 재발견' 방송시간 : 월요일 오전 8시(본방송), 화요일 오후 9시(이하 재방송) 목요일 오후 4시, 일요일 오후 8시조은일2012.03.13
![[성경 속 궁금증] (8) 결혼식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왜 쫒겨났을까](//cpbc.co.kr/CMS/newspaper/2011/10/rc/392249_1.1_titleImage_1.jpg)
[성경 속 궁금증] (8) 결혼식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왜 쫒겨났을까인간 세상 예복과 질적으로 달라예수님은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혼인 예복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회개라고 하셨다. 그림은 '카나의 혼인잔치'(제라드 데이비드 작, 1500년). 임금이 아들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혼인잔치에 오지 않았다. 그러자 임금은 종들에게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종들은 거리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을 데려왔고, 혼인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임금은 하인들에게 그의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게 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임금이 아들을 위해 베푸는 혼인잔치에 비유하신 대목이다(마태 22,1-14). 결혼식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왜 쫓겨났을까. 우리는 결혼식 혹은 장례식에 갈 때, 그에 어울리는 예복을 차려 입는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도 그에 걸맞은 예복이 필요하다. 유다인들은 혼인잔치가 치러지는 동안 새 신랑과 신부는 물론 가족, 그리고 잔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까지 혼인 예복을 입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는 풍습이 있었다(마태 22,12 참조). 유다인들 혼인잔치는 가족과 친인척, 마을 사람들, 지인들, 심지어 행인들도 참여할 수 있는 큰 축제와 같았다. 혼인잔치는 일주일이나 치러졌으며, 잔치 내내 연회, 노래, 춤 등이 이어졌다. 혼인을 치르는 신부는 아름다운 여왕처럼 몸치장을 했다. 신부는 목욕을 하고, 가족이나 이웃에게 보석을 빌려 머리를 장식했다. 신부는 베일로 얼굴을 가렸는데, 이 베일은 혼인을 치르는 장내에 들어갈 때까지 벗을 수 없었다. 새 신랑과 신부가 혼인서약을 한 후, 남편과 아내가 됐음을 선언 받은 뒤에야 비로소 베일을 걷을 수 있었다. 이때 혼인잔치에 참여한 손님들은 결혼이 성립하는데 중요한 증인 역할을 했다(창세 29,22).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혼인 예복은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는 자애로, 혼인 예복은 세례 자체라기보다는 깨끗한 마음과 흠 없는 양심,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혼인 예복은 믿음의 세례라고 했다. 거룩한 교회에 속한 사람이지만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잔치에 온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 혼인 예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했다. 이는 창조주께서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키기 위해 혼인잔치에 오셨을 때 그분께서 지니셨던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혼인 예복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회개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았다고 무조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언급한 결혼 예복은 인간 세상의 예복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렇기에 예복을 갖추지 않으면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는 것이다.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퇴사자22011.10.11
![[아! 어쩌나] 198. 가지지 못한 사람](//cpbc.co.kr/CMS/newspaper/2013/04/rc/449911_1.0_titleImage_1.jpg)
[아! 어쩌나] 198. 가지지 못한 사람 Q. 성경에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편이 아니시던가요?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자들 편을 드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대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A. 형제님처럼 복음 내용을 사회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분들은 그렇게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 내용은 치유적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기에 한쪽으로만 해석하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큽니다. 형제님이 보신 내용은 루카복음 8장 16-18절에 나오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성장 심리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마다 인생이란 시간과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을 제대로 활용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대비적 비유를 드신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이라는 시간은 아주 소중합니다. 절대로 아무렇게나 써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마구 써버리고, 자신을 '헐값 인생'으로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가진 것도 못 써보고 주어진 시간마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채 인생 노숙자처럼 살다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명씨로 사라진다는 것을 경고하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 가운데 하나는 사회의 등불이 돼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등불 같은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요? 미국 뉴욕대 여성의학자 수잔 코바사는 "도전 정신과 통제, 몰입이라는 세 가지 자질을 갖추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위기를 위협이 아니라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둘째 외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하더라도 대처 방식은 언제든지 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위기와 고난을 긍정적 틀로 변화시켜주는 가치 있는 일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자세를 가지고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요? 말콤 글래드웰은 "1만 시간의 노력을 기울이면 누구나 보통 사람의 범주를 벗어난 인생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경과학자 다니엘 레비턴 역시 "1만 시간의 연습을 해야 장인의 입지를 가진다"고 했지요. 이렇게 말하면 많은 분이 나는 그렇게 못 한다고 하면서 뒤로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들은 길게 그리고 천천히 시간을 잡으면 됩니다. 20년, 아니 30년을 잡고 넉넉하게 길을 간다면 크게 성공하거나 세상을 비추는 등불은 못 될지라도 어두운 골목길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밤길에 넘어지지 않게 도울 수 있습니다. 또한 성장하기 위해서는 관계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우리 마음과 신체의 관계, 나와 이웃의 관계, 나와 생명과의 관계, 보호막처럼 존재하는 집단 혹은 사회적 제도와의 관계 등등. 장인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성장과 성공은 주위 도움으로 이뤄지는 것이기에 관계에 대해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관계들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별개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관계가 성장하면 다른 것들이 연관성을 갖고 성장을 촉진합니다. 주님께서 가진 사람이 더 가질 것이라고 하신 것은 이런 성장의 법칙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 영성가는 관계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성장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성장에도 관심을 두고 도움을 주고자 할 때 함께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이런 동반자적 관계를 통해 인간은 더욱 인간다워지고, 복음적 인격을 갖추게 되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활 체험을 하게 된다." 참으로 지당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누이 이웃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랑 실천이 단순한 종교적 행위 차원이 아닌, 인간을 성장시키기 위한 기본적 자세임을 강조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말들이 귀에 들리지 않고,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하는 분들, 인생을 허무하게 여기고 노력을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하는 분들은 자신의 무기력증을 깊이 있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리고 입이 아니라 온 몸으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도 "인생이 지루하고 허망하다" "세상을 등지고 싶다"는 식의 말로 인생을 농락하는 분들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시한부 삶을 살며 시간의 아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는 분들을 생각하십시오. 홍성남 신부 (서울대교구 영성생활상담소장) 상담전화: 02-776-8405 cpbc2013.04.24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21>요한 밥티스트 메츠(하)](//cpbc.co.kr/CMS/newspaper/2013/10/rc/479506_1.1_titleImage_1.jpg)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요한 밥티스트 메츠(하)신앙을 개인 영역에서 사회 정치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메츠의 신학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모색하고, 인간을 '연대적인 주체'로 다시 살려내는 작업이다. 메츠는 하느님을 향한 깊은 열정으로 시대의 징표를 예민하게 읽고 인류의 고난 역사를 껴안았다. 교회 내 문화적 다원주의와 정치신학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종교 간 대화와 교회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관련해 메츠는 진정한 세계교회가 되기 위한 전제로 △역사적인 신뢰 △예수 추종의 실천 △고통의 기억을 통한 보편적인 소통 능력을 제시했다. 메츠는 교회가 참으로 세계교회가 되기 위해선 유럽중심주의와 교회의 단일성을 방어적으로 고수하려는 관료적인 중앙집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봤다. 또 그리스도교의 원천과 긴밀히 결합돼야 하고 더 나아가 이 원천이 다른 문화와 만남에서 매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특히 성경의 두 가지 근본 유산, 곧 모든 이를 위한 자유와 정의, 민속적-문화적 다양성을 창조적으로 인정하는 문화(타자를 인정하는 문화)가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를 추종하는 신비적이고 정치적인 실천 속에서 세계교회로 구체화될 수 있다. 여기서 실천은 가난한 이들과 타자를 존중하는 선택을 의미한다. 교회가 지금 여기에서 예수의 수난을 증언하고 하느님 정의를 수행할 때 진정으로 세계교회로서 면모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교 복음의 고유한 원천인 고통의 기억을 토대로 타자의 고통을 기억할 때, 교회는 문화적 다양성 속에서도 보편적 교회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교회가 다양성 안에서 인정의 문화를 세계화(보편화)하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며, 세계의 평화가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서로 인정하는 책임을 다하도록 이끌기 위한 생산적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와 정치신학 메츠의 정치신학은 근대 사상의 격랑과 회오리 속에서 형성됐다. 그런 만큼 메츠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근대적 사고에 방어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못마땅해했고, 오히려 근대의 모색과 구상을 비판적, 생산적 관계 속에서 자리매김하는 것을 옹호하는 쪽이었다. 그가 근대적 사고에 직면해서 그리스도교 대화 방식을 '생산적 비동시성'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면에서 우리는 그의 신학을 '계몽을 넘어선 계몽'을 지향하는 신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메츠의 신학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모색하고, 인간을 '연대적인 주체'로 다시 살려내는 작업이다. 물론 이러한 메츠의 모색을 오늘날 낡은 시도로 받아들이거나 시대에 부응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메츠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체의 해체 과정'이라고 진단하고 근대화 과정이 극단화된 형태로 파악한다. 즉 주체가 이성의 도구화를 통해 '또 다른 미성숙'으로 휩쓸려 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이 또 다른 형태에서 미성숙하다는 것을 확인해 줄 뿐이다. 개체화된 인간은 근대의 기술적 진보 사상으로 형성된 시민사회에서 그저 무기력할 뿐이고, 윤리적 문제는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한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인격적 결단까지도 제거해 버린다. 이 때문에 메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방식에 회의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는 이성의 보편타당한 합의를 목표로 삼지 않고 불일치, 다원성 그리고 서로 다름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하나를 강조하는 사유나 윤리의 보편타당성 문제와 같은 큰 담론을 거절하고 작은 이야기를 중요시한다. 이를테면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세련하고 서로 다른 실재를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메츠는 서구철학의 전체주의적 사고가 형언할 수 없는 재앙을 가져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우슈비츠로 표현되는 재앙은 근대적 사유를 총체적으로 문제 삼는 사건이다.) 그는 또한 삶의 세계가 다원적임을 인정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메츠는 전체주의적 사고와 하나임을 추구하는 사유는 서로 구별돼야 한다고 보며, 상호관계성을 상실한 다원주의적 사유의 파편화 경향과는 생각을 달리한다. "서로 상관성이 없고 또 행동과는 동떨어진 다양성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폭력이 둥지를 틀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이고 동등하다는 생각을 위험천만한 것으로 의심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유다인들이 가스실로 보내지기 전부터 이러한 하나됨에서 원천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봉쇄되지 않았는가?" '거만한 다원주의'는 결국 보편적 책임과 연대를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불의에 저항하는 것을 무력화한다. 메츠는 이를 우리 삶이 개인주의에 이르는 형태로, 비판적 책임이 없는 관망자 성향 혹은 우리 세계의 위기와 고통의 현실 앞에서 부초처럼 떠도는 것과 같은 관계로 특징짓는다. 간단히 말하자면 보편적 윤리가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유에서는 보편적 윤리를 유효하게 하는 합의의 원리가 불충분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합의를 모두에게 보편타당하게 요구할 수 없고, 또 그것은 단지 하나의 지평일 뿐이며 바로 그 때문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게 되는 것은 그저 왜소한 윤리일 뿐이다. 이 윤리는 마지막엔 사회시스템에 대한 무책임한 적응 능력으로만 나타난다. 메츠는 오늘날 보편적 윤리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한다. "왜소한 윤리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시금석과 같은 것이고…, 위험 상황에서는 자기실현마저도 쉽게 포기하는 것을 간단히 허용한다. 또한 그것은 모든 갈등을 개인주의적으로 해소하게 하고, 보편적 동의와는 달리 모든 것이 다 똑같다는 식이다…. 이러한 왜소한 윤리는 만족하는 다수를 위한 윤리이다. 다른 이들의 고통이나 불만족하는 소수를 고려하지 않는 윤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기후에 직면해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와 그리스도교 희망을 말할 것인가. 문화와 종교 세계의 다양함 속에서도 모두에게 타당하고 보편적인 진리의 척도가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을 포스트모던의 시장에 내어주고 말 것인가. 이에 대한 메츠의 응답은 하버마스가 메츠와 논박에서 언급한 바처럼 '암시적'일 뿐이다. 메츠는 합리적 근거를 엄격하게 철학적으로 반성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 대신 '고통의 기억'을 대화를 통해서 보편적인 책임을 이끌어낼 수 있는 척도로 제안한다. 그러나 '기억'의 범주만으로는 상대화의 위험이나 새로운 폭력의 대두, 사회적 모순을 해소할 수 없다는 한계도 분명하다. 메츠의 정치신학 의미와 평가 메츠의 정치신학의 전체적 윤곽은 근대와 오늘날의 위기를 예민하게 의식하고 '생산적 비동시성'(근대의 기획과 연대하나 시민사회의 주체와 종교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메츠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해석학적'이라 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복음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판적 이성을 토대로 동시대의 사회적, 역사적 관계 속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앙과 종교를 사적인 영역으로 환원하거나 축소한 신학적 프로그램을 거슬러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정치적인 차원을 신학적 사유에 중심에 놓았다는 점은 분명히 정치신학이 이룬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메츠의 정치신학은 또한 '맥락적 성격'을 지녔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과 더불어 인간 실존과 역사의 의미를 기억하는 이성을 바탕으로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고통의 기억을 통해 승자의 역사 안에서 배제되고 망각된 고통당하는 이들의 자취를 찾은 점, 또한 그들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옹호하면서 고통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주체의 신학을 모색한 점은 메츠의 정치신학이 이바지한 큰 공헌이다. 메츠의 정치신학이 지닌 맥락적 성격과 관련해서 그의 신학이 남미의 해방신학(메츠 역시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았다)을 비롯해 이른바 제3세계 신학 토착화에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다는 것도 지나칠 수 없다. 메츠의 정치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신학적 해석학의 수단을 해방하는 기억의 서사에서 찾았기에 '요청적 성격'을 지닌 신학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은 기억과 서사를 통해 전승되고, 서사의 기억은 전승의 실천을 통해 역사적으로 매개된다는 점에서 폐기할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역사적 자기계시가 다만 서사의 기억만으로 만족스럽게 보증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적 문제에 있어서는 비판적 성찰이 불가피하다. 메츠의 정치신학이 지닌 근본 문제는 서사적 매개와 논증적인 성찰을 뒤섞어 놓았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메츠의 정치신학에서 철학과 신학의 긴장은 서로 차별화되지 않은 채 '신학적으로' 용해됐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성격 규정에 앞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메츠의 정치신학은 근본적으로 '예언자적이고 신비적인 얼굴'을 지녔다는 점이다. 특히 하느님을 향한 깊은 열정 속에서 시대의 징표를 예민하게 읽고, 인류의 고난 역사를 껴안고 씨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외에도 메츠의 정치신학이 고통당하는 타자를 위한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고 타자와 그 타자성을 존중하는 인정의 문화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오늘의 신학에 큰 자극과 영감을 제공한다. 모든 인간을 주체적인 존재로 호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복음을 신학적 사유 중심에 두고, 이를 역사와 사회의 맥락과 관계 속에서 해명한 정치신학의 기획은 언제나 유효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김정용 신부(광주가톨릭대 교수)cpbc2013.10.22
![[가톨릭 문화산책]<33> 영화(7) '터치'- 생명을 살아가는 작은 숨결들](//cpbc.co.kr/CMS/newspaper/2013/09/rc/473157_1.1_titleImage_1.jpg)
[가톨릭 문화산책] 영화(7) '터치'- 생명을 살아가는 작은 숨결들흔들리는 인간 마음을 터치하는 '그 손길' 터치(Touch, 2012) 감독 : 민병훈 상영시간 : 100분 장르 : 드라마 등급 : 18세 이상 몇 년째 자살률이 부동의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 2011년 서울시에서 자살한 사람은 2722명으로, 하루 평균 7.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3시간마다 1명이 자살한 셈이다. 너무 빈번해 이제는 특별한 인물이 아니면 보도도 되지 않는다. 민병훈(바오로)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그날그날 세상을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그저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의 낮고 작은 숨결이 모여 이룬 것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신의 영역이라면, 그 생명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이런 메시지를 살리려고 애쓴, 소시민의 이야기 같은 영화 '터치'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줄거리 국가대표 사격 선수를 지냈지만 점차 알코올 중독자가 된 후 모든 걸 잃고 중학교 사격코치를 하는 남편 동식(유준상)과 간병인 일을 하며 쪼들리는 삶이지만 금실 좋은 부부로 살아가는 아내 수원(김지영)의 이야기다. 수원은 병원 몰래 돈을 받고 가족에게 버림받은 환자들을 무연고자로 속여 요양원에 입원시키기도 한다. 어느날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있는 동식은 코치 재계약 문제로 이사장이 주는 술을 어쩔 수 없이 마시고 음주 운전을 하다가 자신이 가르치던 사격부 학생 채빈을 치게 되자 당황한 나머지 뺑소니를 쳤다가 경찰에게 잡힌다. 동식의 교통사고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원은 자신이 돌보는 노인환자의 끈질긴 성관계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하지만 이 사실이 발각돼 수원은 결국 병원에서 퇴출당한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수원은 딸 주미가 없어졌음을 알게 되고 수소문 끝에 낯선 집에서 주미를 발견하는데…. 민초들의 삶 영화의 첫 장면은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만신창이가 돼 흔들리는 들풀로 시작한다. 세파에 시달리며 가정을 지키는 소시민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장례미사를 드리는 성당 안 풍경이다. 검정색 포에 덮인 관, 아빠 품에 안긴 어린이의 해맑은 미소가 스쳐 가지만 수원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사제는 강론을 계속한다. "…하지만 사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 나서야 합니다.… 영혼 속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의 눈은 좀 더 밝아질 것입니다. 영혼 속 신과 연결된 끈을 놓지 않는다면…." 강론은 영화의 흐름을 암시한다. 장례미사 도중 돌아가신 할머니의 아들이 성당 밖으로 나와 고통스러워한다. 수원이 말을 건넨다. "어머님은 좋은 데로 가셨을 거예요." 그러나 아들의 질문은 날이 서 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그때 뭔가 수원의 양심을 건드린다. 사랑과 용기의 영이 그녀를 터치한 것이다. 수원은 몰려오는 피곤을 감수하며 간병 일에 힘을 소진한다. 먹고 살기 위해 불법 의료행위까지 하며 늘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래서 수원은 자신에게 불신의 눈길을 던지는 사제나 수녀의 눈길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 그녀의 긴장된 삶을 거친 숨소리와 함께 핸드 헬드 카메라로 클로즈업하며 따라가는데, 이들 장면 속에는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거나 이웃을 괴롭혀 상처를 주지 못하는 수원의 착한 심성과 강인함의 양면성을 겹쳐서 보여준다. 그녀는 간신히 남편을 출옥시킨 뒤 노인 복지센터를 그만둔다. 동식이 사격코치를 하던 부유한 집안 여학생 채빈은 자신의 속옷을 훔쳐 달아나는 남학생(장정원)을 사격용 총으로 쏜다. 정원이는 폐병에 따른 합병증으로 다리가 썩어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달동네 학생이다. 동식은 정원이를 쏜 채빈의 뺨을 때리며 야단친다. "빈총이라도 사람에겐 겨누지 않는다." 수원의 노력으로 출옥한 동식은 사냥 포수로 돈벌이를 한다. 그러던 어느날 덫에 걸려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어린 사슴을 보며 생명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동식은 두려움과 신비로움의 체험을 사슴이라는 상징을 통해 하느님 영에 터치된다. 인간의 쓰러짐은 인간적인 것이고, 다시 일어섬은 신적인 것이다. 절망의 끝에서 찾아온 희망 주미의 행방불명을 알게 된 수원은 절규하며 딸을 찾아 나선다. 그때 딸의 생일선물 인형을 매달고 가는 남학생을 미행한다. 학생이 다다른 가난한 달동네 정원이의 집 벽장에서 주미를 발견한 수원은 두려움과 분노 속에 도망치듯 딸을 끌고 나온다. 그때 방바닥에서 방치된 한 여인을 본다. 더러운 오물 냄새 속에 다리가 썩어가는 여인의 꺼져가는 신음 소리가 수원의 양심을 건드린다. 그때 성당 마당에서 본 사슴이 떠오른다. 수원은 자신의 마음을 터치하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 그래서 다시 그 여인을 찾아간다.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어두운 방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살은 수원과 그녀를 비춘다. 어쩌면 우리 영혼 속에 깃들고 싶어 하는 하느님 빛의 초대인지도 모른다. 차가운 현실 죽음이 임박한 듯한 여인을 위해 수원은 주민센터도 찾아가고 병원 응급실도 찾아가지만 관료적인 그들의 태도는 답답하기만 하다. 수원은 소리친다. "그럼, 돈 없으면 치료도 받지 말라는 건가요?" 이 말은 사회에 던지는 절규다. 마지막으로 가톨릭노인복지센터에 전화 다이얼을 돌린다. 그러나 그동안 수원이 저지른 거짓에 속아온 사제는 그 여인의 입원을 거절한다. 수원은 가슴을 에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직접 여인에게 안락사 주사를 놓아주려 하지만 두려움이 엄습한다. 절망의 순간에 양심을 건드리는 하느님! 수원은 자신이 생명도, 죽음도 책임질 수 없는 존재임을 절감한다. 이때 죽음에 임박한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수원의 볼을 조용히 건드린다. 그를 위해 애쓰는 수원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터치다. 그때 요양원 구급차가 도착한다. 요양원에 도착한 여인은 세례를 상징하는 물속에 잠긴다. 그동안 몸과 마음의 상처가 깨끗이 씻긴 것이다. 수원은 그의 손을 잡아준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여인은 아들 정원을 보살펴줄 것을 수원에게 부탁한다. 그의 고달픈 삶을 위로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은은한 성가를 뒤로한 채 수원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밤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다. 한편 동식은 채빈의 사격 성공에 환성을 지르며 또 술을 마신다. 취중에 교통사고로 쓰러진 아이를 총으로 쏜 동식은 갓길에 쓰러진다. 아침 햇살이 동식이의 어깨를 환히 비춘다. 잠을 깬 동식은 몽롱한 눈으로 자동차 문을 여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신에게 생명의 경외감을 안겨준 사슴이다. 햇살은 동식의 눈과 사슴의 눈을 강하게 비춘다. 동식은 생명을 죽인 죄책감에 오열한다. 지친 몸으로 돌아온 수원을 밝고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비추고 수원 손에 들려진 생일 선물 인형이 클로즈업된다. 그때 원장신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잘 들어갔니? 방금 자매님이 편안히 하늘나라로 가셨다. 안나야, 고생했다. 정말 수고했다. 편히 쉬거라." 수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불편함을 주는 영화 러시아에서 영화 공부를 한 민병훈 감독의 작품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연출기법처럼 담백하고 함축적이다. 이 영화는 관객이 능동적으로 사유하게 하고, 곱씹으면서 깊은 의미를 끌어내게 한다. 영화 '터치'는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는 영화다. 직면하고 싶지 않은 어둔 현실의 갖가지 문제에 질문을 던지는 진지한 영화이기에 재미로 감상하기에는 무겁고 감상하기 힘든 영화다. 이 영화는 각자의 현실 속에서 터치하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성찰적 예술성이 강한 작품이다. 그룹대화 1. 오늘을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사회의 부조리한 문제들은 무엇인가? 2. 이 영화에서 터치 받은 것은 무엇인가? 3.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터치한다고 생각하는가? 성경구절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이복순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cpbc2013.09.10